풍류, 술, 멋

우리나라 바닷가 1만리 자전거여행_끝

醉月 2011. 1. 21. 08:53

헉! '도로'는 없고 '개떼'만 있다
[우리나라 바닷가 1만리 자전거여행 51] 통영시 죽림지구에서 창원시 마산항까지

 

11월 10일(수)

 

어제 저녁 드디어 거제도를 벗어났다. 이번 여행 최대 난코스 중에 하나를 지나 왔다. 그런 까닭에 오늘 아침 마음이 한결 가볍다. 이후로 그 이상의 난코스는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지도를 들여다보는 것만으로도 멀미를 할 것 같이 복잡한 해안선을 가진 지역은 거제도가 끝이다. 부산에 '가덕도'라는 섬이 하나 남아 있기는 하지만, 그 섬이 아무리 험하다 해도 거제도만 하지는 않을 것이다. 거제도에 비하면 가덕도는 아주 작은 '새끼섬'에 불과하다.

 

오래간만에 화창한 날이다. 맑고 따뜻하다. 바람은 잔잔하다. 지난 며칠간 통영시와 거제도를 돌아 나오느라 누적된 피로만 아니라면, 다른 것에 구애받는 일 없이 마음껏 여행을 즐길 수 있을 것 같은 날이다. 숙소를 떠나면서 바로 바다와 바투 붙어 있는 해안도로를 달리기 시작한다.

 

한동안 오가는 차량도 드물고, 언덕이 거의 없는 평지를 달린다. 속이 다 후련하다. 이런 길을 달려보는 게 얼마만인가? 자전거가 마치 도로 위를 미끄러지듯이 지나가고 있다. 이런 상태라면 오늘 안으로 통영과 고성을 지나, 부산을 눈앞에 둔 마산까지도 달려갈 수 있을 것이다. 도무지 끝이 날 것 같지 않았던 남해안 여행이 끝나가고 있다.

 

  
통영시 해안도로
ⓒ 성낙선
해안도로

울긋불긋 홍조를 띠기 시작하는 산줄기들

 

틈틈이 자전거에서 내려 바다를 바라다본다. 하늘은 밝고 따뜻하고, 바다는 맑고 고요하다. 한없이 평화로워 보이는 풍경이다. 파란 바다 위에 점점이 떠 있는 섬들이 검은 빛으로 반짝인다. 내 눈에는 오늘 이 섬들이 모두 바다 위를 수놓은 보석처럼 아름다워 보인다. 이곳의 바다는 고성반도와 거제도로 둘러싸여, 호수와 크게 다를 것이 없는 모습을 하고 있다.

 

덕포리를 지나면서 77번 국도와 만난다. 근처에 안정산업단지가 있고, 조선소 같은 크고 작은 공장들이 있어 대형 차량들이 비교적 많이 지나다닌다. 그렇지만, 이미 거제도의 14번 국도를 지나온 사람이라면 이 국도가 그렇게 큰 위협이 되지는 않는다. 그리고 일단 안정산업단지를 지나고 나면, 지방도로만큼이나 한적한 도로로 바뀌기 때문에 자동차들 때문에 너무 신경을 써야 할 일은 없을 것 같다. 77번 국도는 통영시와 고성군 동해면을 지나 마산 율티리까지 이어진다.

 

  
'한국의 아름다운 길'이 시작되는 곳, 동진대교가 있는 해안도로.
ⓒ 성낙선
동진대교

동해면으로 접어들어서는 줄곧 해안도로를 달린다. 이 도로는 바닷가 산비탈을 가로지르기 때문에 조금 힘이 든다. 하지만 이 비탈길 역시 거제도의 절벽 길에 비하면 꽤 유순한 편이라고 할 수 있다.

 

이곳 동해면의 해안도로에서 바라다보는 경치가 무척 아름답다. 중간에 '한국의 아름다운 길' 표지판이 서 있다. 이 길 위에서 가조도와 칠천도, 그리고 마산의 저도와 같은 섬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바다는 물론이고, 바다로 내뻗은 산줄기 역시 그림같이 아름다운 풍경을 만들어내고 있다.

 

이곳 한반도 남쪽의 산등성이에도 비로소 단풍이 들고 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녹색이 짙었던 산들이 빨갛고 노란색으로 물들어 가고 있다. 북쪽에 단풍이 물들기 시작한 시점에 비하면, 너무 늦은 감이 없지 않다. 하지만 울긋불긋 홍조를 띠기 시작한 산줄기들이 불붙은 몸을 식히려는 듯 파란 바다에 은근슬쩍 몸을 담그고 있는 광경은 이곳에서만 볼 수 있는 색다른 풍경이다. 동해면 해안도로를 돌아 동진교를 건너면, 그때부터는 마산이다.

 

  
해안도로 풍경
ⓒ 성낙선
해안도로

  
단풍이 짙게 물든 산줄기.
ⓒ 성낙선
단풍

 

'도로'는 없고 '개떼'만 기다리고 있는 좁은 오솔길

 

마산으로 들어서 율티리를 지나가는 바닷가길이 조금 복잡하다. 공장들 사이로 비집고 들어간 아스팔트 길이 갑자기 숲 속 언덕을 만나 좁은 시멘트 길로 이어지는 바람에, 이대로 계속 가야 할지 말아야 할지 망설이게 만든다. 그러더니 그 길을 얼마 못 가, 길가 전봇대에 '도로 없음'이라고 아무렇게나 휘갈겨 쓴 글귀가 보인다. 점입가경이다.

 

  
전봇대에 '도로 없음' 표시가 써 있는 길.
ⓒ 성낙선
도로 없음

거 참 난감한 노릇이다. '도로 없음' 표시가 자동차 통행을 막기 위한 것인지, 아니면 막다른 길이라 더 이상 갈 길이 없다는 뜻인지 판단하기 어렵다. 하지만 여기서 돌아 나간다고 해도 또 다른 길을 찾는다는 보장이 없다. 길이 있어도 찾기가 쉽지 않다. 할 수 없이 그대로 앞으로 나아간다. 다행히 막힌 길은 아니다. 밭 사이로 마을로 들어서는 길이 가느다랗게 이어져 있다. 좁은 오솔길이다.

 

그 길을 빠져나가면 바로 개 사육장이다. 처음에 그 사실을 모르고 무심코 그 길을 가다가 깜짝 놀란다. 갑자기 자신들의 영역을 침범한 자전거여행자를 발견한 개들이 미친 듯이 짖어댄다. 가슴이 철렁한다. 너무 놀라 자전거에서 떨어질 뻔하다가 한쪽 다리를 겨우 땅에 딛고 멈춰 선다. 주위를 둘러보니, 길가 양쪽이 모두 철망을 둘러친 개 사육장이다.

 

양쪽 우리 안에 갇힌 개들이 사냥감이라도 발견한양 누런 이빨을 드러낸 채 사납게 짖어대고 있다. 개들이 참 여러 가지로 애를 먹인다. 그렇다고 갇혀 사는 개들을 탓할 수도 없다.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길가에서까지 개들을 사육해야 하는 사람들이 문제다. 이 길에는 도로가 없다는 표시 외에 '개조심' 표지를 함께 붙여 놓아야 하는 게 아닌가 싶다. 여하튼 그나마 길이라도 남아 있어서 다행이다.

 

  
해안도로에서 바라다보는 풍경. 바닷물이 맑고 투명하다.
ⓒ 성낙선
해안도로

 

의욕은 물론, 호기심마저 바닥을 드러내고 있다

 

내포리의 해안도로를 달려 신촌삼거리에서 머뭇거린다. 이대로 해안을 따라가면 '저도'라는 작은 섬을 돌아 마산의 남쪽 끝에 있는 '원전항'까지 들어갔다 나와야 한다. 들쭉날쭉한 해안 길을 구석구석 들어갔다 되돌아 나와야 하는 길이라, 시간이 꽤 오래 걸릴 수밖에 없다. 그곳을 모두 거쳐 가기에는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린다.

 

'신촌삼거리'가 갈림길이다. 신촌삼거리에서 우회전을 하면 남쪽에 있는 저도와 원전항으로 들어가는 길이고, 좌회전하면 다른 곳을 거치지 않고 바로 마산항으로 가는 길이다. 현재 시간 오후 3시경, 이 시간에 저도로 길을 잡을 경우에는 인적이 드문 해안도로나 산길에서 밤을 맞을 가능성이 높다. 그런 곳에서 저녁 식사와 잠자리를 해결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는 이제 입이 아파서 더 떠들어대고 싶지도 않다.

 

이것저것 대충 따져본 끝에 결국 마산항으로 방향을 잡는다. 현실적인 선택이지만 비겁한 느낌을 지울 수는 없다. 저도 방향으로 길을 잡기에는, 그동안 내 의지와 용기가 많이 약해진 탓이다. 의욕은 물론이고, 호기심마저 서서히 바닥을 드러내고 있다. 낯선 곳, 사람들이 잘 오가지 않는 곳에 선뜻 발을 들여놓는 게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

 

여행이 점차 의무방어전을 치르는 격으로 변질되고 있다. 이러다 대충 해치우고 보자는 식으로까지 변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내가 언제부터 이렇게 변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나는 지금 확실히 이전과는 '다른 여행'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일상에서 벗어나기 위해 여행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떠나온 일상으로 다시 되돌아가기 위해 여행을 하고 있는 게 분명하다.

 

마산항으로 가는 길에, '안녕로'라는 이름의 독특한 해안도로 위를 지나간다. 바닷가 산 아래로, 좁은 길이 구불구불 산비탈을 넘어간다. 인적이 드문 길에 낙엽이 수북이 쌓여 있다. 마침 왼쪽 산 너머로 살짝 해가 넘어간 뒤라서 산그늘이 짙다. 지금은 날이 추워서 다소 스산한 기운이 감돈다.

 

하지만 햇볕이 뜨거운 날에는 나무 그늘 짙은 산 속을 달리는 것만큼이나 시원하고 상쾌한 길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오가는 차량마저도 드물다. 아스팔트만 걷어내면 바로 자연으로 돌아갈 수도 있는 길이다. 욕심 같아선 이 길을, 자동차 통행을 막고 자전거만 다닐 수 있는 길로 만들고 싶다.

 

세상의 모든 길들이 안녕로만 같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렇게 되면, 자전거여행 중에 내가 얼마나 안녕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시간은 크게 줄어들 것이다. 그만큼 여행 중에 의욕을 잃고 시름에 잠겨야 하는 일 같은 것도 대부분 사라지고 없을 것이다. 꿈 같은 길, 꿈 같은 일이다.

 

  
해안도로에서 바라본 바다와 섬
ⓒ 성낙선
해안도로

 

코끝을 자극하는 매연, 그런데 그 느낌이 싫지 않다

 

가포동에서 산자락을 하나 넘어가면 마산 시내다. 예전의 마산시는 지난 7월 진해시와 함께 창원시로 통합이 되면서 지금은 행정구역상 '마산합포구'와 '마산회원구' 등으로 이름이 바뀐 상태다. '시'가 '구'가 됐다고 도시 자체가 축소된 것은 아니다. 널찍하고 반듯한 도로가 시내를 가로지른다. 번잡하기는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도로 왼쪽으로 높이 올려다 보이는 산은 대산이다. 어찌된 일인지 바닷가에 접해 있는 거대 도시에 들어설 때마다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는 건물이 대규모 아파트단지다. 장흥이 그렇고, 여수와 통영이 그랬다. 마산 역시 같은 양상이다. 대산의 산자락을 아파트들이 뒤덮고 있다. 아마도 도시가 확장되면서 새로 도시로 탈바꿈하는 지역에 대규모 아파트 단지를 조성한 까닭일 것이다.

 

  
마산 시내 인도 겸 자전거도로. 울창한 숲길을 연상시킨다.
ⓒ 성낙선
자전거도로

마산 시내로 들어서서는 마산항까지 자전거에서 내려 천천히 걸어간다. 마산항이 가까워질수록 거리가 점점 더 복잡해진다. 도로 위에서 자동차들이 내뿜는 매연이 코끝을 자극한다. 입안에 쓴맛이 감돈다. 그런데 묘한 일이다. 그 느낌이 싫지 않다. 한편으로는 마음이 편해지는 걸 느낄 수 있다. 좋다는 뜻은 아니다. 여수나 통영에서 느꼈던 것보다는 훨씬 거부감이 덜하다는 뜻이다.

 

통영에서만 해도 그렇지 않았는데, 마산에서는 이 복잡하고 어수선한 거리마저 친숙한 느낌으로 다가온다. 서울을 떠나면서는 한동안 길 위에서 야성을 되찾아가는 듯하더니, 오히려 여행 기간이 길어지면서 다시 도시인의 습성이 되살아나고 있다. 하긴 40년 넘게 몸에 밴 습성 아닌가? 몇 십일 도시를 떠나 있었다고 해서 말끔히 사라질 습성이 아니다.

 

오늘 마산에서 이 여행이 더 이상 의심할 여지없이, '떠나는 여행'에서 '되돌아가는 여행'으로 급속히 전환하고 있음을 깨닫는다. 오늘 하루 달린 거리는 90㎞, 총 누적거리는 3860㎞다. 그동안 자전거로 달려온 거리가 4000㎞에 육박하고 있다. 이렇게 되면, 이틀 후 부산 지역에서 1만리를 넘어설 가능성이 높다. 4000㎞를 '리'로 환산하면 1만리가 된다. '바닷가 1만리 자전거여행'이라는 제목대로라면, 이 여행은 사실상 부산에서 막을 내려야 한다.

 

  
마산 가고파 국화축제 조형물. 국화로 장신한 용. 축제가 끝나 철거를 앞두고 있다.
ⓒ 성낙선

아찔! 터널 안에서 '탱크'가 돌진해 온다
[우리나라 바닷가 1만리 자전거여행 52] 창원시 마산항에서 부산시 을숙도까지

 

11월 11일(목)

 

 

오늘 드디어 부산으로 진입한다. 여행을 떠난 지 58일만이다. 언제 그날이 올까 생각했는데, 어느새 이날이 오고 말았다. 고흥반도나 거제도를 달리고 있을 때만 해도 그곳을 벗어나는 일은 영영 오지 않을 것 같은 절망감에 사로잡히곤 했다. 그런데 그런 와중에도 자전거는 하루하루 계속해서 굴러가고 있었던 거다.

 

 

마산에서 좀 더 분명해진 일이지만, 부산이 가까워지면서 이 여행이 새로운 전기를 맞고 있는 게 더욱더 확실해지고 있다. 거제도가 고비였다. 그때는 모든 게 절망적이었다. 그런데 거제도를 벗어난 이후로는 다시 여행이 희망적으로 변해가고 있다. 뜻밖이다. 해남의 땅끝마을에 도착했을 때와는 또 다른 느낌이다.

 

 

땅끝마을을 돌아 남해 바닷가를 달리기 시작했을 때는 마음이 상당히 무거웠다. 남해의 잔뜩 주름 잡힌 해안선과 그 해안선에 알토란처럼 매달려 있는 섬들은 지도를 들여다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기가 질렸다. 언제 남해를 다 돌아 동해로 접어들 수 있을까 막막했다. 남해안의 서쪽 끝에서 봤을 때, 동쪽 끝에 있는 부산이 마치 피안의 세계처럼 보였다.

 

 

영원히 가닿을 수 없을 것 같이, 멀고 먼 세계가 부산이었다. 그랬던 부산을 이제 눈앞에 두고 있다. 마음이 날아갈 것처럼 가볍다. 부산을 지나서 동해로 올라서게 되면, 그때부터는 서해나 남해와는 비교할 수도 없이 '곧은 해안선'이 나온다. 자전거를 타고 해안선을 지나간 흔적이 더욱 뚜렷하게 나타날 것이다. 거리를 단축하고 있는 걸 확연하게 보여줄 수도 있다.

 

 

그리고 거제도 같이 크고, 해안선이 복잡한 섬은 두 번 다시 나타나지 않는다. 거제도 같이 언덕이 많은 해안선 역시 더 이상 찾아보기 힘들다. 강원도에서 '삼척'을 지나가는 구간이 비교적 언덕이 많은 편이어서 힘들 수는 있지만, 그 정도는 애교로 봐줘야 한다. 그러니 이제부터는 여행을 하면서 주름 잡힌 해안선과 높은 언덕 때문에 압박을 받을 일이 거의 없다고 봐야 한다.

 

  
장복터널
ⓒ 성낙선
장복터널

 

 

'탱크'가 돌진해온다, 장복터널

 

 

마산항을 떠나 약 10㎞ 정도 가면 바로 창원시 진해구다. 진해로 들어서서 제일 먼저 장복터널과 마주친다. 터널 길이가 무려 800m가 넘는다.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기에는 조금 긴 터널이다. 하지만 우회로를 찾아 되돌아가기에는 너무 먼 거리를 달려왔다. 이 터널은 그나마 지나가는 차량이 많지 않아 다행이다. 후미등을 켜고는 터널 안으로 들어선다.

 

 

우리나라 터널 안이 대체로 그렇듯이 장복터널 역시 갓길 같은 게 따로 없다. 그래서 도로 가장자리를 조심스럽게 달려야 한다. 그리고 대범해야 한다. 이런 터널 안에서는 승용차가 덤프트럭처럼 요란한 굉음을 내며 지나간다. 덤프트럭 같은 대형차들은 탱크가 돌진해오는 것 같이 위협적이다. '탱크'가 지나갈 때마다 몸이 흔들린다. 정신을 똑바로 차리지 않으면 위험한 순간을 맞을 수도 있다.

 

 

터널을 빠져나오면 진해 시내다. 진해는 자전거 타기 좋은 도시 가운데 하나다. 진해항 바닷가를 따라 자전거도로가 곧게 깔려 있다. 일부 구간, 해안에 자리 잡은 군사시설 때문에 해안에서 벗어나 안쪽으로 돌아가는 길이 나오기는 하지만 그 길에도 역시 자전거도로를 만들어 놓았다.

 

 

하지만 진해의 자전거도로가 얼마나 유용한 것인지는 나는 잘 모르겠다. 이곳의 자전거도로는 대부분 인도 겸용인 데다, 중간 중간 길이 끊어지는 곳이 많아 꽤 불편한 편이다. 폭이 좁거나 노면이 고르지 못해 불편한 점도 있다. 따라서 진해에서는 경우에 따라 도로 위를 달리는 게 더 나을 수도 있다. 도로에 차량이 많은 편이 아니다.

 

 

시내를 벗어나면서부터 언덕을 오르내리는 길이 나타난다. 올봄 미니벨로를 타고 처음 이 길을 달릴 때는 숨이 턱에 차게 힘들었다. 그런데 오늘은 그때와 다르게 몸이 상당히 가볍다. 언덕도 그렇게 가팔라 보이지 않는다. 갑자기 체력이 좋아진 것도 아닌데, 몸이 이렇게 가벼운 건 순전히 심리적인 요인 때문일 것이다. 마음이 그 어느 때보다 편하다.

 

 

  
삼포.
ⓒ 성낙선
삼포

 

 

내 마음을 노래하는 '삼포로 가는 길'

 

진해해양공원 앞을 지나 조금 길고 높은 언덕을 하나 넘으면 '삼포로 가는 길' 노래비가 나온다. 그 노래비 앞에 서서 '삼포로 가는 길' 노래를 연이어 듣는다. 들을수록 마음이 푸근해지는 노래다. 노랫말에서 '걷다 보면'을 '달리다 보면'으로 바꾸면, 바로 내 이야기가 돼 버려 묘한 느낌을 준다. 이 노랫말을 짓던 당시 작사가의 마음이 내 심정과 같았던 게 분명하다.

 

 

'바람 부는 저 들길 끝에는 삼포로 가는 길 있겠지 굽이굽이 산길 걷다 보면 한발 두발 한숨만 나오네 아아~ 뜬구름 하나 삼포로 가거든 정든 님 소식 좀 전해주렴 나도 따라 삼포로 간다고 사랑도 이젠 소용없네 삼포로 나는 가야지(삼포로 가는 길, 1절)'

 

 

노래비가 서 있는 산비탈 아래 마을이 바로 삼포다. 노랫말을 잘 들어보면 그 옛날 삼포는 산길을 걸어서 다녀야 했던 모양이다. 아마도 사람들의 발길이 잘 닿지 않아 조용한 곳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삼포는 노랫말과는 영 다른 분위기다. 포구를 앞에 두고 횟집이 즐비하다. 마을 뒤로 아스팔트 도로가 지나가는 마당에, 그 마을의 포구가 예전 모습을 간직하고 있을 리가 없다.

 

 

삼포를 떠나 흰돌메공원이 있는 언덕을 넘어가면 사도 해안도로다. 자전거도로가 바닷가에 바짝 붙어 있다. 그 도로 위로 바닷가를 따라 달리는 기분이 쾌적하다. 경치도 아름답다. 하지만 이곳의 자전거도로 역시 노면이 너무 거친 게 흠이다. 지난번에 다녀갔을 때보다도 더 거칠어진 느낌이다.

 

 

안골포를 돌아 나와 부산신항만으로 넘어가는 언덕을 오른다. 이 언덕만 넘어가면, 그때부터는 내가 그렇게 애달아 하던 부산이다. 충분히 감동에 젖을 만하다. 하지만 지금은 감격에 북받치기에는 조금 이르다. 부산신항만을 지나서, 그 앞에 바로 가덕도가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가덕도는 비록 땅은 작지만, 그 위용은 여느 섬 못지않다. 가덕도는 이미 섬이 아니다. 섬과 육지 사이 바다를 매립해 육지화하고 있는 중이다.

 

  
굴구이로 유명한 안골포. 바닷가에 생굴을 까서 파는 가게가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 성낙선
안골포

  
안골포 굴강. 조선시대 군선이 정박하던 곳. 문화재 발굴 예정 알림판이 서 있다.
ⓒ 성낙선
안골포

 

 

진입로에서부터 애먹이는 섬, 가덕도

 

 

가덕도를 여행하려면, 섬을 가로지르는 도로를 타고 450여m 높이의 산을 넘어다녀야 한다. 결코 만만한 섬이 아니다. 그런데 이 섬이 들어가는 길에서부터 애를 먹인다. 길이 매우 복잡하다. 가덕도 방향 도로 표지는 아예 찾아볼 수가 없다. 그 길을 부산 신항만 컨테이너터미널을 드나드는 트레일러들과 함께 달린다.

 

 

 

게다가 이곳은 현재 가덕도와 거제도를 연결하는 도로를 개설하느라 공사 차량이 뻔질나게 드나든다. 부산 신항만에서부터 미로와도 같은 도로를 지나, 도로 주변 공사장을 지나가야 하는데 어디가 길이고 어디가 공사장인지 구분 가지 않는 곳도 있다. 대형차들이 지나다니느라 흙먼지가 자욱하게 피어오르는 길로 자전거 한 대가 지나가는데, 내가 생각해도 참 안쓰러운 광경이다.

 

 

이곳은 도로 공사뿐만이 아니라 부두를 확장하는 공사를 함께 진행하고 있다. 가덕도와 육지 사이의 바다를 메워 대규모 부두를 건설하고 있다. 이곳에서 매립지가 걸쭉한 늪으로 변해가는 광경을 구경하는데, 그 느낌이 사뭇 섬뜩하다. 매립지 앞에, '이곳에 빠지면 다시 빠져나올 수 없다'는 경고판이 여러 개 서 있다.

 

  
가덕도 장항고개에서 내려다 본 매립지.
ⓒ 성낙선
가덕도

 

가덕도 해안도로로 들어서는 얼마 안 가 산줄기를 타넘는 가파른 언덕을 오르기 시작한다. 그 언덕에 '장항고개' 표지판이 붙어 있다. 그 고개를 웬만하면 처음부터 끝까지 자전거를 타고 넘을 생각이었는데, 겨우 30m를 가지 못하고 포기한다. 이런 길은 자전거를 끌고 오르는 것도 쉽지 않다. 가덕도는 섬 전체가 산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몸에서 열이 나면서 안경에 김이 서리는데, 중간 중간 그냥 되돌아 내려갈까 고민하게 만든다. 이 고개를 넘어갔다 다시 되돌아 넘어오는 건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하지만 이를 악물고 걸어 오른다(!). 그래도 '이게 마지막이다'라고 생각하니까 어느 정도 버틸 만하다. 그런데 언덕을 이렇게 천천히 걸어서 오르다 보니 또 다른 문제가 생긴다.

 

 

힘든 것도 힘든 거지만 시간이 더 문제다. 어느새 시간이 오후 4시에 가까워지고 있다. 고개를 넘어가는 사이 하늘에 먹구름이 덮인다. 날씨가 급변하는 게 조짐이 좋지 않다. 이런 날은 평소보다 더 빨리 어두워질 수 있다. 이런 상태로는 해가 지기 전에, 섬을 빠져나가는 게 거의 불가능해 보인다.

 

  
부산신항만 컨테이너 터미널 부근 도로
ⓒ 성낙선
부산신항만

 

 

설상가상, 돌풍에 비까지 내리다

 

 

가덕도는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힘든 섬이다. 가덕도는 섬 전역이 공사 중이다. 거제도를 잇는 도로를 건설하면서, 섬 곳곳을 개조하는 작업이 한창 진행 중이다. 가는 곳마다 땅이 파헤쳐져 있고, 공사 차량이 줄을 지어 지나다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 섬에 도로는 좁고, 갓길은 없다. 그리고 경사가 가파른 지역이 많아 자전거를 타고 돌아다닌다는 게 상당히 무모한 일이다.

 

 

그 길을 덤프트럭과 함께 지나다니는데 살이 떨리지 않을 수 없다. 내가 이 길을 이렇게 무리해가며 달려야 하나 하는 생각이 고개를 쳐든다. 공사 때문에 그나마 자전거로 돌아다닐 수 있는 구간이 제한적이다. 갈 길이 바쁜 데다 체력이 거의 바닥이 나 있는 나로서는 다행이라고 할 수도 있다. 결국 거가대교 공사가 한창 벌어지고 있는 바닷가 공사장을 앞에 두고 자전거를 되돌려 나온다.

 

 

가덕도를 나와서는 명지오션시티까지, 녹산국가산업단지를 가로지르는 도로를 달린다. 명지오션시티에 도착할 무렵, 해가 떨어진다. 그러면서 오늘 저녁 을숙도를 넘어 바로 부산 시내로 진입하려던 계획에 차질이 생긴다. 명지오션시티 외곽으로 아스콘을 덮은 자전거도로가 깔려 있다. 가로등까지 켜 있다. 이때만 해도, 이 길을 따라가면 날이 어두워져도 을숙도까지는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명지오션시티를 벗어나 을숙도를 향해 달려가는 길에 갑자기 돌풍이 불기 시작한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다. 바람이 앞을 막아 더 이상 달리기 힘들다. 설상가상으로 때맞춰 비까지 흩뿌린다. 결국 을숙도를 넘어가지 못하고 을숙도가 건너다보이는 낙동강가에서 오늘 하루 여행을 마무리한다.

 

  
해질 무렵, 명지오션시티에서 바라본 신호대교.
ⓒ 성낙선
신호대교

 

사타구니 통증이 점점 더 심해지고 있다. 안장에 눌린 상태로 58일을 버텼으니 전혀 이상한 일도 아니다. 도중에 할 수 없이 안장코를 조금 낮췄다. 그 결과 사타구니 통증은 조금 줄어든 대신에 엉덩이 통증이 좀 더 심해졌다. 아무래도 사타구니를 누르던 힘이 엉덩이에 집중된 탓일 게다.

 

 

앞바퀴 뒷바퀴 모두 계속해서 바람이 새고 있다. 어찌된 일인지 앞바퀴는 어제 수리를 했는데도 계속 바람이 새고 있다. 수리를 잘못한 게 분명하다. 바람이 새는 양이 적어 자전거를 타는 데는 크게 무리가 없지만, 때때로 공기를 주입해야 하는 게 여간 성가시지 않다. 오늘 하루 달린 거리는 93㎞, 총누적거리는 3953㎞다.

 

헉! 거대한 '괴물차'가 따라온다
[우리나라 바닷가 1만리 자전거여행 53] 부산시 을숙도에서 용호동까지

 

11월 12일(금)

 

 

  
짐받이에서 떨어져 나간 가방.
ⓒ 성낙선
가방

어제 저녁 가덕도를 찾아가기 직전, 부산신항만 부근의 인도에서 짐받이에 부착했던 가방 한 짝이 떨어져나갔다. 보도블록이 울퉁불퉁 튀어나온 인도에서였다. 그동안 비포장도로를 여러 군데 별 문제 없이 달려온 것만 믿고 마구 페달을 밟은 게 탈이었다. 무언가 털썩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서 뒤들 돌아다보았더니, 가방 한 짝이 바닥에 떨어져 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마음 한 구석이 풀썩 무너져 내리는 느낌이다. 처음에는 단지 짐받이에 거는 플라스틱 고리가 벗겨진 줄 알았다. 그런데 가방을 다시 짐받이에 부착하려고 보니까 고리가 아예 부러지고 없다. 이 가방은 자전거 짐받이에 탈부착이 가능하게 만들어진 것이다. 수시로 짐받이에 붙였다 뗐다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갈고리 모양의 고리가 부러지면서, 가방을 구입해 사용한 지 겨우 두 달 만에 무용지물이 되고 만 것이다.

 

 

어처구니가 없었다. 하긴 그 두 달 만에 남들 일 년은 쓰고들 남을 만큼 달고 다녔으니, 고장이 날만도 하다. 이런 상황에 짐받이가 부러지지 않은 것만도 천만다행이다. 문제는 이제부터 이 짐을 어떻게 가지고 다녀야 하느냐는 거다. 임시로 짐받이 위에 얹어 줄로 단단히 붙잡아매기는 했지만 불편하기 짝이 없다. 무엇보다 가방 속의 물건을 꺼냈다가 다시 집어넣는 일이 보통 귀찮은 게 아니다.

 

 

모양새는 더 가관이다. 지고 이고, 어딘가 먼 길을 가고 있는 모습이 분명한 게 피난민 행색이 따로 없다. 짐받이 가방이 이 지경이 된 건, 가방을 구입하면서 짐받이에 연결하는 갈고리가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진 것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은 내 잘못이 크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60일 넘게 여행을 하면서 그 플라스틱 고리에 가해질 하중을 고려하지 않은 건 아무래도 너무 생각이 모자랐다.

 

  
을숙도. 낙동강하구언
ⓒ 성낙선
낙동강하구언

 

짐받이에서 떨어져 나간 가방, 이를 어쩌나

 

 

오늘 아침, 가방을 다시 짐받이에 얹어 줄로 붙잡아매는데 보통 귀찮은 게 아니다. 이런 일을 아침저녁으로 매일 반복해야 한다는 것도 한심한 일이다. 궁리 끝에 가방을 뗐다 붙였다 할 필요없이 아예 짐받이에 완전히 고정하기로 하고 끈으로 단단히 붙잡아맨다.

 

 

끈을 잘라내지 않는 한, 앞으로 이 가방은 여행이 끝날 때까지 자전거에서 분리할 수 없다. 그 안에 든 짐 역시 자전거와 함께 숙소 밖에 남겨둬도 될 만한 물건들로 채운다. 이렇게 되고 보니, 그동안 가방 하나는 따로 들고 다니지 않아도 됐었다는 사실도 깨닫게 된다. 이런 걸 전화위복, 새옹지마라고 하나?

 

 

내가 가지고 다니는 가방은 모두 3개다. 하나는 등에, 두 개는 짐받이에 얹혀 있다. 당연히 그날 여행을 마치고 숙소로 들어가거나 할 때는 양손에 가방 두 개를 집어 들어야 한다. 그것은 기본이고, 그 외에 또 다른 잡동사니들이 있을 경우에는 옆구리에 끼거나 입으로 물고 날라야 하는 일까지 발생한다.

 

 

그런 와중에 이제 어찌할 방법이 없이 가방 하나를 포기하고 나니까, 마음이 이렇게 편할 수가 없다. 앞으로는 양손에 바리바리 짐들을 싸들고 다녀야 하는 성가신 일은 사라질 것이다. 짐 속의 짐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해, 아침에 짐을 챙길 때마다 절절매야 하는 일 역시 반으로 줄어들 것이다.

 

 

그런데 이런 내 마음과는 달리 오늘 아침, 하늘이 조금 흐릿하다. 때 아닌 황사주의보가 내려졌다. 봄철도 아니고 늦가을에 황사라니, 황당한 일이다. 방송에서는 바깥 활동을 자제하라는데, 자전거여행자인 나로서는 수용하기 힘든 주문이다. 하늘이며 바다가 온통 뿌옇다. 저게 다, 안개가 아니라 중국에서 날아온 황사라고 생각하니까 숨쉬기가 곤란하다.

 

  
송도해수욕장
ⓒ 성낙선
송도해수욕장

 

바닷가 절벽 아래 산책로, 절영해안산책로

 

 

을숙도를 건너면 오른쪽으로 다대포해수욕장까지 자전거도로가 깔려 있다. 이 길은 부산에서 자전거여행을 하기에 가장 좋은 길 중에 하나로 꼽힌다. 남쪽으로는 다대포해수욕장까지, 북쪽으로는 삼락습지생태공원을 지나 구포역까지 자전거를 타고 갈 수 있다. 그리고 이곳은 북쪽으로는 갈대밭이, 남쪽으로는 을숙도 너머로 지는 저녁노을이 특히 아름다워 여행객들이 많이 찾아온다.

 

 

부산은 도심 곳곳에 언덕이 유난히 많은 도시다. 송도해수욕장까지 가는 도로 역시 끊임없이 언덕을 오르내린다. 그나마 도로가 전체적으로 기울기가 심하지 않아서 다행이다. 게다가 부산은 서울만큼이나 복잡한 도시다. 아니 그 이상일 수 있다. 도로에서 길을 찾아내는 일이 결코 만만치 않다.

 

송도해수욕장에서는 다시 영도까지 부산 공동어시장과 자갈치시장 앞길을 달린다. 이 길은 바닷가에 바짝 붙어 있어 영도까지 계속 평지를 달릴 수 있다. 하지만 이곳은 부산 시내에서도 가장 번잡한 곳 중에 하나다. 시장과 연결이 되어 있어 길이 차량과 사람들로 북적이는 걸 감수해야 한다.

 

  
영도. 조선소에서 건조중인 배.
ⓒ 성낙선
영도

 

영도 해안에 조선소가 이렇게 많은 줄은 오늘 처음 알았다. 가는 길목마다 조선소에 가로막혀 돌아 나와야 한다. 조선소 주변 골목이 미로처럼 복잡하다. 해안선을 따라가는 게 아니라 마치 조선소를 순례하고 있는 듯한 기분이다. 한동안 쇳소리와 용접 소리 요란하게 울려 퍼지는 골목길을 헤매 다니다가, 더 이상 시간을 빼앗길 수 없어 다시 큰 도로를 찾아 나온다.

 

영도에 와서 보니, 우리나라가 조선 강국이 될 수 있었던 게 어느 날 갑자기 일어난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더욱 강해진다. 거기에는 우리나라 해안 곳곳에 영도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소규모 조선소들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영도에서는 꼭 한 번 찾아가봐야 할 곳이 '절영해안산책로'다. 이 산책로는 우리나라 산책로 중 최고의 반열에 올려놓을 만한 곳이다. 이 산책로를 걷다 보면, 도심에서 얼마 되지 않는 거리에 이렇게 멋진 산책로가 있다는 사실에 놀란다. 부산 시민이 부러워진다. 바닷가 절벽 아래로 산책로가 길게 이어진다. 산책로 제방 아래로는 망망대해를 달려온 파도가 바닷가 검은 바위에 부딪쳐 하얗게 부서진다. 그 풍경이 가히 절경이다.

 

 

이곳은 바닷가 산책로에서 바라보는 풍경뿐만이 아니라, 절벽 위를 지나가는 도로인 절영로 위에서 내려다보는 풍경 역시 매우 아름답다. 절영로는 길 자체가 바닷가 자연 공원이다. 절영해안산책로는 사람이 많이 드나드는 곳이라, 자전거 통행이 불가능하다. 자전거는 산책로 입구에 세워두고 안쪽으로는 걸어서 들어가야 한다.

 

  
절영해안산책로
ⓒ 성낙선
절영해안산책로

  
영도 절영로의 하늘전망대. 바닥에 강화유리를 깔아 절벽 아래가 내려다 보인다.
ⓒ 성낙선
하늘전망대

 

여행을 떠난 지 59일 만에 1만 리, 4000㎞ 돌파

 

 

  
영도다리 위에서 4000km를 돌파하다
ⓒ 성낙선
속도계

영도를 한 바퀴 돌아서는 다시 옛날 영도다리 위로 올라선다. 그 위에서, 좀 더 정확하게는 영도다리 중간 지점에서 속도계가 4000㎞에 달했음을 보여준다. 여행을 떠난 지 59일이 되는 날 오후 3시 30분, 드디어 전체 여행 거리가 1만 리를 넘어선 것이다. 참으로 길고도 먼 여행이다.

 

 

예전에 미니벨로를 타고 왔을 때는 서울에서 부산까지 단 4일 밖에 걸리지 않았다. 그런데 이번에 산악자전거를 타고 부산까지 오는데 무려 59일이나 걸리다니, 우리나라 해안선은 우리가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길다. 그 거리를 온몸으로 체감하는데, 근 두 달이나 걸린 셈이다.

 

다시 한 번 더 강조하지만 해안선만 놓고 봤을 때 우리나라는 결코 작은 나라가 아니다. 아주 큰 나라다. 신라시대 때 장보고가 해상 무역을 장악하게 되는 걸, 머리로는 잘 이해하기 힘들다. 하지만 이렇게 해안선을 여행하다 보면, 어떻게 해서 그게 가능했는지 명약관화해진다. 그 이유를 온몸으로 깨달을 수 있다. 

 

 

 

 

영도를 나와서는 부산 북항으로 방향을 잡는데 도로 사정이 몹시 안 좋다. 신선대 가는 길까지 컨테이너 트레일러들이 줄을 이어 달린다. 도로 위에 트레일러들이 빈 틈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꽉 들어차 있다. 그런 길에 갓길마저 보이지 않는다. 어쩌다 내가 그런 길을 가고 있다. 컨테이너를 실은 화물차들이 슬금슬금 뒤를 따라오는데 마치 거대한 괴물이 뒤를 쫓는 기분이다.

 

  
북항컨테이너터미널을 들고나는 트레일러들.
ⓒ 성낙선
컨테이너터미널

 

트레일러 운전자들은 또 그들대로 짜증이 났을 법하다. 빨리 가지도 못하고 피해 가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트레일러에 앞서 가는 자전거여행자가 제정신으로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해안에서 가장 가까운 길을 찾아 달리다 보니 결국 이런 길까지 만나게 된다. 처음부터 이런 사정을 미리 알았다면, 무슨 일이 있어도 이 길로 들어서지 않았을 것이다.

 

 

이 도로는 자전거가 다닐 수 있는 길이 아니다. 이 도로는 일종의 컨테이너 화물을 실어 나르기 위한 자동차용 도로라고 보는 게 속편하다. 굳이 모험을 할 필요가 없다. 부산은 자동차 운전자들의 도로 운전이 거칠기로 소문난 곳 중에 하나다. 그게 모두 시간을 다투는 화물 트럭들이 많이 오가는 탓이다.

 

그 트럭들이 주로 해안선에서 가까운 해안도로를 자주 오가는 편이다. 그러니 부산에서는 굳이 해안선을 고집해가며 화물트럭들과 몸싸움을 벌일 이유가 없다는 생각이다. 부산의 해안도로는 혼이 나갈 정도로 복잡하다. 도로가 혼탁한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그나마 머리가 맑을 때, 좀 더 안전한 길을 찾아보는 게 좋을 듯하다.

 

그런데 내가 컨테이너터미널 앞을 지나가는 길을 벗어난 뒤로도 여전히 제정신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길을 가는 도중에 그만 오륙도 방향 표지판을 놓치고, 바로 용호동으로 들어서서는 번잡한 도로 위에서 또 다시 방향을 잃는다. 마침 해가 떨어져 더 이상 달리고 싶은 의욕마저 사라진다. 오늘 하루 달린 거리는 63㎞. 총누적거리는 4016㎞다.

 

어떻게 된 일인지 신발이 도로 깨끗해지고 있다. 여행 초기 빗물에 젓고 개펄에 빠져 시커멓게 변색이 되었던 신발이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회색이 되고 있다. 바닷가에서는 신발마저 풍화 작용 과정을 거친다. 이대로 한 달 정도를 더 버티면, 방금 세탁을 끝낸 것과도 같은 깨끗한 신발로 되돌아갈지도 모른다.

 

 

  
영도다리 위에서 건너다본 부산대교.
ⓒ 성낙선
부산대교

결혼은 했냐고? 대체 그건 왜 묻는 거지?
[우리나라 바닷가 1만리 자전거여행 54] 부산시 용호동에서 온산읍 진하해수욕장까지

 

11월 13일(토)

 

 

어젯밤 내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른 채, 부산시 용호동에서 하루를 묵었다. 어제 저녁 컨테이너 터미널 앞길을 지나오면서 방향 감각을 완전히 잃어버린 탓이다. 이곳이 용호동이라는 건 오늘 아침 지도를 확인하다 겨우 알아낸 사실이다. 오늘 내가 가야 할 길에는 유명 관광지들이 줄줄이 늘어서 있다. 부산을 대표하는 해수욕장들이 연이어 나타난다는 것도 특기할 만하다.

 

 

용호동에서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는 해수욕장이 바로 광안리해수욕장이다. 해변 산책로를 따라가다 보면 한눈에 보기에도 광활하다 싶은 해수욕장이 모습을 드러낸다. 백사장만 1.4km다. 해안선이 발달한 나라답게, 해수욕장 규모 또한 범상치 않다. 해수욕장이 얼마나 광활하면 그 이름에 '광'자를 집어넣었겠는가? 그런데 부산에는 이런 해수욕장이 이곳에만 있는 게 아니다.

 

 

해수욕장 규모로 놓고 봤을 때 부산 같은 도시도 흔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도시에 이렇게 해수욕장이 많은 곳도 드물지 않을까 싶다. 부산은 다른 곳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대규모 해수욕장이 다섯 손가락으로 꼽고도 남는다. 다대포, 송도, 광안리, 해운대, 송정… 등 백사장이 모두 상암동 월드컵경기장이 비좁다 싶을 만큼 넓다.

 

 

모양새만 해수욕장인 곳은 하나도 없다. 바닷가 풍경이 아름답기로는 두말하면 잔소리다. 사시사철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이들 해수욕장이 있는 것만으로도 부산은 서울보다 훨씬 더 살기 좋은 도시임에 틀림없다. 근처에 광안리해수욕장이 있는 것만으로도 큰 복인데, 멀지 않은 곳에 해운대해수욕장까지 있다.

 

  
광안리해수욕장
ⓒ 성낙선
광안리해수욕장

  
부산의 새 명물 광안대교. 광안대교 너머로 보이는 것은 마린시티에 신축중인 건물들.
ⓒ 성낙선
광안대교

 

그 남자의 질문 방식이 참 묘하다

 

 

해운대는 우리나라에서 여름이면 해수욕객이 가장 많이 몰려드는 곳으로 유명한 해수욕장이다. 매년 '언제' 관광객 백만을 돌파했다는 소식이 뉴스 한 꼭지를 차지하곤 한다. 마침 주말이어서 해운대 백사장으로 관광객들이 몰려든다. 연인들은 물론이고, 유치원에서까지 아이들을 집단으로 데리고 온 걸 보면 전 국민이 사랑하는 국민관광지임에 틀림없다.

 

 

해운대를 떠나려다 주차장 앞에서 이제 막 이곳에 도착한 한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그 사람 얼굴에 호기심이 잔뜩 묻어난다. 남들이 모두 자동차를 끌고 온 마당에 혼자서 자전거를 타고 나타났으니, 사람들의 시선을 끌지 않을 수 없다. 이제 곧 질문 공세가 시작될 것이다.

 

 

그런데 이 남자의 질문 방식이, 이전에 내게 질문을 던졌던 사람들하고는 조금 다르다. 이전에는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들이 지극히 기초적인 질문을 해왔다면, 이 사람은 그래도 뭘 좀 알고 덤벼드는 것 같다. '여행을 언제 시작했느냐?'는 질문에서 '잠은 어디서 자냐?'는 질문으로 이어지더니, 즉석에서 내가 그동안 지출하는 돈이 얼마인지를 계산해낸다. 그러더니 다시 '그 돈을 다 어디서 충당하냐?'고 묻는다.

 

 

거 참, 틀린 계산도 아니고 그리 불쾌하게 생각할 질문도 아니다. 그렇지만 어딘지 모르게 언짢은 구석이 있다. 그 사람의 질문에 마치 내 속을 훤히 꿰뚫어보는 독심안 같은 것이 숨어 있다. 거짓말하기가 뭐해서 내가 여행비를 어떻게 마련했는지 솔직히 얘기해 줬더니, 마치 자기 일처럼 근심스러워 하는 표정이다. '결혼은 했냐?'고 묻는 말이 결혼까지 한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하고 돌아다니냐는 말로 들린다. 참 묘한 분이다.

 

 

혼자 여행을 다니는 게 얼마나 외롭고 힘든지는, 말이 너무 길어질 것 같아 대충 얼버무린다. 여럿이 같이 다니면 좋지만, 세상에 나 같은 놈이 어디 흔한가? 나도 가끔 내가 희한한 놈이다 싶을 때가 있는데, 세상에 나를 따라서 여행을 다닐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나보다 더 희한한 사람일 것이다. 이 말을 들으면 내 친구 중에 '그러면 내가 너보다 더 희한한 놈이냐?'고 물을 사람이 있을 것 같은데, 뭐 굳이 답할 필요도 없다.

 

 

친구들과 어울려 장기여행을 떠나는 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부작용이 너무 많다. 그래도 그가 '혼자 다니는 것보다는 여럿이 어울려 다니는 게 더 즐겁지 않느냐?'고 물을 때는, 그러면 지금 나와 함께 여행을 떠나시겠냐고 물으려다 그만둔다. 생각처럼 간단한 일이 아니다. 이 기회에 굳이 내 의견을 밝혀 두자면, 장기간 계속 되는 여행은 오랜 시간 외로움을 이겨낼 수만 있다면 혼자 다니는 게 최고라는 생각이다.

 

 

이 양반도 나를 떠나보내는 게 꽤 아쉬운 표정이다. 아직 궁금증을 모두 해소하지 못한 게 분명하다. 하지만 나는 이미 내 속마음까지 바닥을 다 드러낸 상태다. 더 이상 들려줄 말이 없다. 개인적인 질문을 너무 많이 던져 불편하긴 했지만, 그 역시 자전거여행에 무척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게 틀림없다. 조만간 그를 어딘가 한적한 길 위에서 다시 만났으면 하는 바람이다.

 

  
광안해수욕장 가는 길의 해변 산책로
ⓒ 성낙선
산책로

  
해운대해수욕장
ⓒ 성낙선
해운대해수욕장

 

해도 해도 끝없이 계속되는 펑크 수리

 

 

해운대해수욕장을 떠나서는 바로 달맞이길로 방향을 잡는다. 달맞이길은 예전부터 부산의 드라이브코스로 유명한 곳이다. 이 길이 지금은 자전거동호인들이 많이 찾은 여행 코스 중의 하나로 자리를 잡았다. 부산의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었던 자전거인들이 달맞이길 입구에서부터 심심찮게 눈에 띄기 시작한다. 다들 어디에 숨어 있다 이렇게 한꺼번에 나타나는 것인지 모르겠다.

 

 

알록달록 유니폼을 갖춰 입은 동호인들이 줄을 지어 달맞이길 언덕을 올라가고 내려온다. 달맞이길은 지레짐작했던 것보다는 경사가 낮은 편이다. 호흡만 잘 조절하면, 큰 힘 들이지 않고 넘어갈 수 있다. 오가는 차량이 비교적 적은 편이고, 주변 경치도 아름답다. 달맞이길은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이 근력을 키우기에 딱 좋은 언덕이라고 할 수 있다.

 

 

달맞이길을 내려가는 길에 오른쪽으로 자전거 판매대리점이 눈에 들어온다. 매장 주인이 매장 앞 공터에 쪼그리고 앉아 펑크를 수리하고 있다. 어쩌면 이게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른다. 이곳을 떠나면 앞으로 어디에서 자전거를 손볼 수 있게 될지 알 수 없다. 사장이 젊은 사람인데, 솜씨가 꽤 좋아 보인다. 그가 펑크 수리를 마치기를 기다려, 내 자전거를 들이민다.

 

 

브레이크가 어떻고, 펑크가 어떻고 하는 얘기를 숨 쉴 틈 없이 들려줬더니 자전거를 꼼꼼히 살펴본다. 우선 브레이크다. 브레이크는 내 생명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 적잖이 신경이 쓰이는 물건이다. 지금까지 4000km를 넘게 달렸는데 브레이크에 여전히 아무런 문제가 없지만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앞으로 1000km 가량을 더 달려야 하고, 나중에 진부령을 넘어가야 하는 일이 남아 있어 보통 신경이 쓰이지 않는다. 가능하면 패드를 교체했으면 하는 바람을 내비쳐보지만, 별문제가 없다는 답변이 돌아온다.

 

 

그다음에는 앞바퀴를 살핀다. 앞바퀴는 내가 펑크를 수리한 곳 외에도 한 군데 더 펑크가 나 있다. 펑크 수리를 하기는 했는데 다른 곳에 펑크가 난 것까지는 마저 찾아내지 못했던 거다. 이걸로 몇 번째 펑크를 수리하는 건지 이제는 셀 수도 없게 됐다. 브레이크에 문제가 없는지를 확인하고 펑크마저 말끔히 수리하고 나니까, 마음이 더없이 개운하다. 이렇게 해서 그동안 계속 내 마음을 무겁게 짓누르던 두 가지 문제를 한꺼번에 해결한다.

 

 

매장 주인이 나이가 젊은 사람이다. 매장 문을 연 지 이제 겨우 3개월 됐단다. 자전거를 수리하는 솜씨가 아주 깔끔하다. 내가 지금까지 여행한 이야기를 듣고는 꽤 흥미를 보인다. 지금 내가 쓰고 있는 글을 나중에라도 읽어보고 싶다고 해서 제목을 가르쳐준다. 그리고는 그의 매장에서 바람막이 점퍼를 한 장 구입한다. 아무래도 다가오는 추위가 자꾸 신경이 쓰인다.

 

 

자전거매장 뒤로 바로 송정해수욕장이다. 송정해수욕장 역시 부산다운 면모를 갖췄다. 앞서 지나쳐온 해수욕장들과 다른 점을 든다면 도심에서 약간 벗어나 있어 광안리나 해운대와는 달리 한적한 정취를 맛볼 수 있다는 것이다. 어느 정도 옛날 분위기가 남아 있는 느낌이다.

 

  
송정해수욕장
ⓒ 성낙선
송정해수욕장

  
용궁사 가는 길의 해안 풍경. 포근한 정취가 느껴지는 갯바위
ⓒ 성낙선
갯바위

 

바람에 내 간절한 소망을 날려 보내다

 

 

송정해수욕장을 떠난 이후로는 대체로 평탄한 길이다. 용궁사에서 대변항을 지나 임랑해수욕장까지 달려가는데 힘들었던 기억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 물론 그렇게 힘이 들지 않았던 데는 중간 중간 쉬어가는 일이 빈번했던 이유도 있다. 해안을 따라 가는 길에 나타나는 주변 풍경이 그냥 지나치기 힘들게 아름답다.

 

 

서해나 남해와는 또 다른 풍경이다. 서해에서는 갯고랑 깊이 파인 갯벌이, 그리고 남해에서는 바다 위에 떠 있는 섬들이 무심히 보아 넘길 수 없는 아름다운 풍경을 보여주었다. 그에 비해 동해안에서는 바닷가 갯바위들이 끊임없이 내 눈을 사로잡는다. 그 바위들 대부분 다른 곳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특이한 형상을 하고 있다.

 

 

크고 작은 바위들이 해변을 다채로운 모양으로 장식하고 있다. 그리고 그 바위들을 향해 먼 바다를 달려온 파도가 몸을 던진다. 하얗게 부서진다. 파도소리 또한 예사롭게 들리지 않는다. 그 소리가 귀를 씻는 것처럼 시원하다. 맑고 경쾌하다. 이런 광경은 이곳 동해에서만 볼 수 있다. 다른 곳에서도 볼 수 있다고 해도 그것이 동해만 하지는 못하다.

 

  
용궁사
ⓒ 성낙선
용궁사

  
간절곶, 소망우체통
ⓒ 성낙선
간절곶

임랑해수욕장을 지나서 울산으로 접어든다. 울산 경계를 넘어서 간절곶까지 한달음에 달려간다. 서서히 해가 지고 있다. 간절곶은 우리나라에서 해가 가장 먼저 뜨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연말연시가 되면 사람들이 가장 많이 찾는 곳 중의 하나다. 하지만 연말연시가 아닌 때에도,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찾는다. 그 바람에 주변 일대가 대규모 관광지로 변모했다.

 

 

'간절'곶이라는 이름 때문인지 이곳에 간절한 소망을 품고 찾아오는 사람들이 부지기수다. 바닷가 언덕에 높이 5m, 2층 건물 높이의 거대한 우체통이 하나 우뚝 서 있다. 이름이 소망우체통이다. 무언가 간절한 소망이 있는 사람들이 이곳에서 자신의 소망을 엽서에 적어 보낸다. 소망을 비는 일이 연말연시에만 이루어지는 게 아니다. 일 년 365일 계속되고 있다.

 

 

나 역시 간절한 소망이 있다. 하지만 나는 그 소망을 엽서에 적어 보내는 대신, '바람'에 실어 날려 보낸다. 그편이 훨씬 더 '간절'하다. 오늘은 온산읍으로 들어서 진하해수욕장에서 여행을 마친다. 예전에는 몰랐던 사실인데, 해가 질 무렵의 동해 바닷가 풍경이 묘하게 아름답다. 하늘 한쪽 모서리가 옅은 분홍색으로 물들어 있고, 파도는 파란색 형광빛으로 반짝인다. 그런데 카메라로는 그 색감이 잘 살아나지 않는다.

 

 

부산을 경유하면서 여행이 다시 활기를 찾고 있다. 여전히 몸이 고되기는 하지만, 여행하는 '맛'을 잃을 정도는 아니다. 오히려 그 맛이 새로워지고 있어 또 다른 흥미를 불러일으킨다. 오늘 달린 거리는 62km, 총누적거리는 4078km다. 길도 좋은데 하루 종일 달린 거리가 62km에 불과한 것은 그만큼 여행 중에 어딘가에 머물렀다 가는 시간이 많았기 때문이다.

 

  
진하해수욕장
ⓒ 성낙선
진하해수욕장

1박 2일도 실수한 대왕암, 그럴만 하겠네 
[우리나라 바닷가 1만리 자전거여행 55] 울산시 진하해수욕장에서 경주시 읍천항까지

 

11월 14일(일)

 

  
갯바위. 한 마리 용이 바다를 헤엄쳐 가는 모양이다.
ⓒ 성낙선
갯바위

  
해국이 피어나는 갯바위. 외모에서 범상치 않은 기운이 느껴진다.
ⓒ 성낙선
갯바위

'동해'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게, '푸른 바다'와 다양한 모양을 한 '갯바위'다.

 

그중에서도 특히 주목해야 할 게 갯바위다. 동해의 갯바위는 전국의 바닷가를 통틀어 가장 다양한 모습을 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수적인 면에서도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동해는 우리나라 갯바위들을 해안선을 따라 일렬로 전시해 놓은 대규모 전시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갯바위는 바위 절벽과 달리 바닷가 가까운 곳, 수심이 낮은 바다 위에 몸을 드러낸 바위들을 말한다. 동해의 맑고 푸른 바닷물 위로 희거나 혹은 검은 몸체를 드러낸 바위들이, 여러 가지 색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근거리에 위치한 바위들조차 서로 다른 성분과 모양을 하고 있어, 어떻게 해서 이런 구성이 가능해질 수 있었는지 의아할 따름이다.

 

 

갯바위야말로 동해를 동해답게 만드는 가장 중요한 구성 요소 중에 하나다. 개개의 바위들을 따로 따로 떼어놓고 봤을 때는 비록 그 규모나 특징을 크게 내세우기 힘들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바위들이 가지고 있는 개개의 특성을 연이어 보거나, 사진을 보듯이 한꺼번에 들여다봤을 때는 그 풍성함과 다채로움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이런 갯바위들을 감상하는 데 자전거여행처럼 좋은 여행 방식도 없다.

 

 

오늘 동해를 여행하면서 보게 되는 갯바위들 또한, 서해나 남해에서는 볼 수 없는 특이한 풍경을 보여준다. 돌이 풀과 꽃을 피워내고, 그 돌이 살아서 마치 바다를 헤엄쳐 다니는 것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그 바위들이 마치 내게 '이것이 바로 동해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다.

 

  
바위 위에 앉아 휴식을 즐기는 갈매기들
ⓒ 성낙선
갯바위
  
바위가 엿가락처럼 누워 있는 주상절리.
ⓒ 성낙선
갯바위

 
갯바위 없이 동해를 말할 수 없다

 

 

오늘의 여정은 경주시까지다. 거리는 멀지만 해안선이 그리 복잡하지 않아 큰 무리는 없을 것 같다. 진하해수욕장 곁으로 강이 흐른다. 온산읍을 이리저리 휘젓고 내려온 회야강이다. 해수욕장 끝에서 그 강을 건너는데, 건너편으로 항구가 내려다 보인다. 강양항이다.

 

강 하구를 사이에 두고, 진하해수욕장과 강양항 사이에 하늘 높이 육교가 걸쳐져 있다. 그 육교 위로 올라서자 바다는 물론이고, 항구와 항구를 드나드는 배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그 광경이 꽤 인상적이다. 항구를 이렇게 높은 위치에서 내려다볼 수 있는 기회도 흔치 않다. 특히 등대 같은 건 언제나 밑에서 올려다 보기 마련이다.

 

애초 그럴 목적으로 만든 것은 아니겠지만, 내 눈에는 이 육교가 잘 만들어진 또 하나의 전망대처럼 보인다. 전망대 구실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전망대들이 지천인 마당에, 이 육교야말로 전망대 이상의 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다.

 

 

강양항을 지나면 그 다음부터는 온산국가산업단지 앞을 지나가는 길이다. 이 길에서는 공장 건물 외 별다른 특색을 찾아보기 힘들다. 공단을 벗어날 때까지 쉼 없이 페달을 밟는다. 앞으로 울산을 지나 포항을 지나갈 때까지는 이런 공단길이 수시로 나타날 것이다. 이런 길이 마냥 나쁜 것만은 아니다. 비록 정감이 가는 길은 아니지만, 때때로 거리를 단축해주는 효과도 있다.

 

 

온산국가산업단지가 끝나는 지점에서 울주군 경계선을 넘어선다. 울주군으로 들어서면, 이번에는 울산용연공업단지다. 공단을 벗어나는 일이 생각처럼 쉽지 않다. 공단을 가로지르는 길에서 머뭇거리고 있을 이유가 없어, 계속해서 페달을 밟는 데 집중한다. 어느 순간부터 지루함이 밀려오지만, 중간에 장생포항 같은 항구가 있어 그런 대로 참고 견딜 만하다.

 

  
강양항
ⓒ 성낙선
강양항

 

'포경기지'에서 '고래문화특구'로 거듭나는 장생포

 

 

장생포항까지 가는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장생포항은 과거 고래잡이로 명성을 날리던 곳이다. 지금은 고래잡이가 법으로 금지되어 있어, 더 이상 그 명성을 이어가지 못하고 있다. 그 대신 고래탐사선을 운영하는 등 고래와 관련이 있는 다양한 사업을 펼쳐 새로운 이미지를 구축하는 데 힘을 쏟고 있다.

 

 

다 좋은데 항구 건너편으로 공업단지가 빤히 건너다보이는 게 가슴이 아프다. 거대한 공업단지 시설물들로 항구가 잔뜩 주눅이 들어 있는 모양새다. 매연인지 안개인지 하늘이 뿌옇게 내려앉아 있는 광경이 마음을 더욱 더 무겁게 짓누른다. 장생포는 현재 항구 주변이 공업단지로 완전히 포위가 되어 있는 상태다.

 

 

항구 가까이 고래박물관이 있다. 이곳의 전시실에서 포경 금지 조치가 내려지기 전에 우리나라에서 행해진 포경의 역사는 물론, 그때 사용했던 물건들을 한눈에 들여다 볼 수 있다. 살아 있는 돌고래는 물론이고, 여러 가지 고래 모형이나 머리뼈 같은 것들은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물건들이다.

 

 

마침 주말을 맞아 매표소 앞이 입장권을 구입하려는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다. 박물관 야외광장 앞으로 아이들이 신나게 뛰어다니는 모습이 보기 좋다. 그 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공업단지로 인해 무거웠던 마음이 조금은 가벼워지는 기분이다.

 

 

장생포항을 떠나서는 울산 시내를 관통하는 태화강을 건넌다. 태화강을 가로지르는 명촌교에서부터 방어진항까지 강변을 따라 자전거도로가 깔려 있다. 그 자전거도로를 한참을 달려가다 보면, 도로 양쪽으로 현대자동차 울산공장이 들여다보인다. 의외의 풍경이다.

 

공장 주변 풍경이라 꽤 을씨년스러울 것 같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다. 그동안 사진이나 텔레비전 영상으로만 보아 왔던 풍경이 바로 내 눈 앞에서 펼쳐지는데, 그 풍경이 장관이다. 공장 마당에 수출 대기 중인 것으로 보이는 승용차들이 줄맞춰 늘어서 있다. 그 끝이 어딘지 알 수 없다. 한눈에 보기에도 엄청난 물량이다.

 

자전거를 타고 다니면서, 자동차에 호감을 느껴보는 것도 극히 드문 일이다. 대자연을 바라보는 것과는 조금 다른, 또 다른 감동이 밀려온다. 인간의 능력이라는 게 거의 무한대다. 그 능력을 좀 더 바람직한 일에 사용하지 못하는 게 아쉬울 뿐이다. 

 

  
장생포고래박물관. 포경선 전시물
ⓒ 성낙선
고래박물관

  
태화강 강변 자전거도로와 갈대밭
ⓒ 성낙선
태화강

 

대왕암, 이름뿐만이 아니라 웅장함에서도 대왕격

 

 

장생포항을 떠나 태화강 하구에 위치한 방어진항을 돌아가면, 동해 바닷가 갯바위의 '대왕'격이라고 할 수 있는 대왕암공원이 나온다. 대왕암공원은 바다 한가운데로 돌출해 있는 해안선을 돌아가며, 여러 가지 다양한 모양을 한 바위들이 군집 형태를 이루고 있는 곳이다.

 

 

그 중에서도 대왕암은 '신라시대 문무대왕의 왕비가 죽어서 호국룡으로 남아 나라를 지키겠다는 유언을 남기고는 바위 섬 아래 묻혔다'는 전설을 간직하고 있다. 말하자면 문무대왕의 왕비가 잠들어 있는 수중릉인 셈이다.

 

그래서 그런지 이곳을 경주시에 있는 '문무대왕 수중릉'과 헛갈리는 사람들이 더러 있다. 사람들이 착각을 할 수 있는 여지는 또 있다. 문무대왕 수중릉 역시 울산의 대왕암과 마찬가지로 '대왕암'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탓이다. 하지만 이 둘은 위치도 다르고 모양도 다르다. 그러니 서로를 혼동하지 않는 게 좋겠다.

 

 

대왕암공원의 바위들은 웅장함이나 품격 같은 면들에서 다른 곳의 바위들보다 더 높은 점수를 줄 만하다. 공원 안 바닷가에 자리를 잡고 있는 바위들이 거의 모두 제 이름값을 하고 있다. 남근바위, 탕건바위, 자살바위 등등…. 고유한 이름이 붙은 바위만 해도 십여 개다. 그 바위들이 대부분 '국보'급이다.

 

바닷가 언덕 위 해송숲도 일품이다. 한국 사람이라면 살아서 꼭 한 번은 가봐야 할 곳이다. 그 풍경이 머릿속에서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공원이 겉보기와는 달리 무척 넓다. 공원 입구에서 해안 바윗길을 따라가면, 일산해수욕장으로 내려가는 계단이 나온다.

 

  
대왕암공원. 구름 다리 건너 바위 섬이 대왕암.
ⓒ 성낙선
대왕암

  
대왕암공원 안 바위 위에 올라선 사람들.
ⓒ 성낙선
대왕암공원

  
대왕암공원 안에서 낚시를 즐기는 사람들.
ⓒ 성낙선
대왕암공원

 

대왕암을 떠난 뒤로도, 동해를 특징짓는 바위들이 줄줄이 나타난다. 비록 그 이름이 분명치 않은 바위들이 대부분이지만, 내가 보기엔 그 바위들 하나하나 이 세상 그 어느 바위들보다 개성이 뚜렷해 보인다. 모두 이곳 동해에서만 볼 수 있는 바위들이다.

 

 

이후로 경주시로 들어설 때까지도 내 눈에 들어오는 것 모두 갯바위뿐이다. 어느새 그 독특한 매력에 빠져 바닷가 구석구석, 갯바위 하나하나 알뜰히 더듬고 다니는 나를 발견한다. 이렇게 오늘, 동해가 내게 색다른 재미 하나를 안겨준다.

 

 

부산을 벗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은데 벌써 경주시다. 동해로 들어서면서 확실히 여행에 속도가 붙고 있는 걸 피부로 느낄 수 있다. 거리가 단축되는 게 눈에 보인다. 여행이 신명을 되찾아가고 있다. 오늘 여행은 경주시 양남면의 읍천항까지다. 오늘 하루 달린 거리는 83km, 총누적거리는 4161km다.

 

포항경제 살리는 3천억원 '과메기의 힘' 
[우리나라 바닷가 1만리 자전거여행 56] 경주시 읍천항에서 포항시 약전리까지

 

11월 15일(월)

 

  
읍천항 입구
ⓒ 성낙선
읍천항

 

읍천항에서 한반도의 꼬리라고 할 수 있는 호미곶까지 거의 일직선에 가까운 길을 달린다. 그 바람에 바닷가 풍경이 마치 영화 필름이 돌아가는 것만큼이나 빠르게 뒤로 물러나 앉는다. 풍경이 머리에 잔상으로 남아 있기도 전에 사라져 버린다.

 

 

이 구간은 바닷가 도로가 매우 잘 발달되어 있다. 도로가 해안선과 거의 같은 형태의 굴곡을 그리고 있다. 도로가 바닷가에서 멀리 벗어나는 걸 보기가 힘들다. 그 도로가 때로는 바닷가 언덕을 지나가기도 하고, 때로는 조용한 바닷가 마을 앞을 지나가기도 한다.

 

  
바닷가 마을 풍경. 담장 그림이 무척 서정적이다.
ⓒ 성낙선
바닷가 마을

 

바닷가 언덕은 조금 다르지만, 마을 앞길에서 바라보는 주변 풍경은 어디나 조금씩 엇비슷한 데가 있다. 일종의 전형 같은 것이 있는 셈이다. '바닷가 마을이 다 이렇지'하는 말이 자연스럽게 튀어나올 수 있다. 해안선이 단조로운 만큼, 그 해안선을 따라 생겨난 마을 또한 그에 못지않게 단순한 구조를 하고 있다.

 

 

이 역시 해안선이 복잡한 서해나 남해하고는 또 다른 모습이다. 그렇다고 뭐, 불만이 있다는 얘기는 아니다. 동해안이 단조롭다고 해서, 동해가 아닌 서해나 남해 같은 복잡한 해안선을 한 번 더 돌아보고 싶은 거냐면 그건 또 아니기 때문이다.

 

  
방파제를 넘는 파도
ⓒ 성낙선
방파제

 

오늘 아침, 바다에서 바람이 조금 심하게 불어온다. 바람에 떠밀려온 파도가 바닷가 바위와 방파제를 때리는 소리가 요란하다. 마치 방파제를 넘지 못해 사납게 울부짖는 형상이다. 때로는 그 파도가 도로가에 세워놓은 시멘트벽을 넘어, 한동안 비가 내리지 않아 하얗게 말라 있는 아스팔트를 적신다.

 

 

그 아스팔트 길을 지나가는 동안 시간을 잘못 맞추면 내가 그 파도를 뒤집어 쓸 수도 있다. 아스팔트가 유난히 검게 물든 부분은 바닷물이 방파제를 넘어와 쏟아진 곳이다. 자동차가 없으니, 이제는 파도를 피해 다녀야 하는 일이 생긴다. 찬바람이 불어 바닷가 도로 위에서 사람 그림자를 찾아보기가 힘들다. 항구나 포구가 있는 곳이 아니면, 사람의 온기를 느끼기 힘들다.

 

  
문무대왕 수중릉, 겉으로 봐서는 이곳이 수중릉이라는 걸 알 수 없다.
ⓒ 성낙선
문무대왕 수중릉

 

이름과는 달리 초라한 모습의 문무대왕 수중릉

 

 

읍천항을 떠난 지 얼마 안 돼 문무대왕 수중릉이 나온다. 이미 울산의 대왕암공원에서 상당히 큰 규모의 대왕암을 보고 온 터라, 진짜 문무대왕 수중릉이라고 하면 울산의 대왕암을 뛰어넘는 웅장한 자태를 뽐내는 갯바위나 바위섬이 나타날 줄 알았다.

 

 

그런데 막상 수중릉이 바라다 보인다는 바닷가에 서고 보니, 도대체 무엇을 두고 수중릉이라고 하는 건지 분간조차 하기 힘들다. 바닷가에서 200여 미터 떨어져 있는 곳 바다 한가운데에 나지막하게 엎드려 있는 작은 바위섬이 하나 있을 뿐이다.

 

 

그 섬이 문무대왕 수중릉이란 걸 알게 된 건 바닷가 한 쪽에 서 있는 안내판을 보고 나서다. 한 시대를 풍미한 왕의 '릉'치고는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작고 초라한 모습이다. 사실 왕이 잠든 능을 단지 그 규모로 재단하는 내가 생각이 모자란 것일 수도 있다.

 

그러고 보면, 사람들이 울산의 대왕암을 문무대왕 수중릉으로 착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게다가 사람들이 울산의 대왕암과 문무대왕 수중릉을 모두 '대왕암'이라고 부르고 있는 마당에, 둘 중에 어느 것이 진짜 문무대왕 수중릉인지를 구분하는 일이 쉽지 않다.

 

문무대왕 수중릉에도, 앞서 보고 온 울산의 대왕암과 비슷한 내용의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온다. 하지만 울산의 대왕암과 달리 이곳에 전해져 오는 이야기는 단순한 전설로 보기 어렵다. 그 내용이 비교적 구체적이다. 삼국사기에 '문무대왕이 죽으면서 불교식 장례에 따라 화장을 하고 동해에 묻으면 용이 되어 동해로 침입하는 왜구를 막겠다는 유언을 남겼다'는 이야기가 적혀 있기 때문이다.

 

바닷가에서는 알아보기 힘들지만, 공중에서 내려다보면 바위섬 한 가운데에 관 모양의 바위가 들어앉아 있는 걸 볼 수 있다. 그리고 바위섬에 사람들이 인위적으로 힘을 가한 흔적도 남아 있다고 한다. 그만큼 이곳이 삼국사기에 전해져 내려오는 문무대왕의 수중릉일 가능성이 높다는 얘기다.

 

하지만 바위섬 어디에도 유골이나 부장품 같은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니, 이곳에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 역시 100% 사실로 받아들이기 힘들다.

 

  
도로가에서 해풍을 맞으며 말라가는 과메기
ⓒ 성낙선
과메기

 

제철 맞아 해풍에 꾸들꾸들 말라가는 구룡포 과메기

 

 

  
호미곶 가는 길가의 '해국' 자생지.
ⓒ 성낙선
해국

문무대왕 수중릉을 떠난 이후로는 달리 오랜 시간 머무르는 곳 없이, 이러저러한 이름의 항구와 해수욕장들을 번갈아 드나들면서, 줄곧 포항시까지 달려간다. 오류해수욕장을 지나면, 그때부터는 포항시다. 그러더니 구룡포가 가까워지면서 길가에 과메기를 말리는 광경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구룡포는 과메기 주산지다. 구룡포를 지나가면서 과메기를 한번 살짝 '맛'보고 지나가지 않을 수 없다. 과메기는 단순한 음식물이 아니다. 이제 과메기 없는 구룡포와 포항은 생각할 수조차 없다.

 

 

구룡포 과메기가 포항 경제를 살리는 효자 상품 중에 하나라는 말이 있다. 포항시 지역 전체의 과메기 매출액이 700억 원에 달한다고 하니까, 그게 결코 빈 말은 아닐 것이다. 거기에 판매와 운송 등의 과정에서 발생하는 금액까지 모두 포함하면, 그 수치는 3000억 원까지도 늘어난다고 한다. 어마어마한 수치다.

 

올해 1월 한라산 어리목 등산로로 윗세오름까지 올라갔을 때다. 뜨거운 컵라면을 먹고 있는 사람들로 발디딜 틈 없이 산장이 북적이는데, 그 틈바구니에서 차가운 과메기를 먹는 사람들이 있었다. 과메기가 전국으로 팔려나가 가정집의 식탁에까지 오르고 있다는 건 잘 알고 있었지만, 그 과메기가 등산객 가방에 실려 한라산에까지 올라오고 있는 줄은 몰랐다. 한겨울 눈덮인 한라산 백록담 아래에서 먹는 과메기 맛은 과연 어떤 것일까?

 

그런데 그 과메기가 요즘엔 미국이나 일본 같은 나라들에까지 수출된다고 한다. 과메기가 한라산을 넘고 바다를 건너, 해외로까지 팔려 나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앞으로 계속해서 더 큰 소득을 불러들일 게 틀림없다. 철강 못지않은 효자 상품이라는 말이 하나도 틀리지 않다. 그게 다 과메기의 '힘'이다. 과메기는 11월에서 2월까지가 제철이다.

 

바닷가에서 차가운 바닷 바람을 맞으며 꾸들꾸들 말라가는 과메기를 쳐다보고 있으려니까, 갑자기 식욕이 돋는다. 하지만 지금은 과메기에 넋을 놓고 있을 때가 아니다. 구룡포에서 호미곶까지 다시 숨가쁘게 달려간다. 시간이 조금 애매모호해서다. 호미곶에서 하루를 묵게 되면 별 문제가 없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동해면 약전리까지는 달려가야 한다.

 

 

구룡포항에서 동해면 약전리까지 직선거리로 10㎞에 불과하다. 하지만 호미곶을 돌아서 가려면 그 길이가 3배 가까이 길어진다. 결코 짧지 않은 거리다. 현재는 4시가 조금 넘은 시각, 해가 떠 있는 시간이 이제 겨우 2시간도 남지 않았다.

 

  
호미곶, 상생의 손.
ⓒ 성낙선
호미곶

 

푸르스름한 달빛이 길을 밝혀주는 밤길 자전거여행

 

 

  
호미곶 독수리바위.
ⓒ 성낙선
독수리바위

호미곶까지 최선을 다해 달려갔지만, 그곳에서 딱히 오늘밤을 머물렀다 갈 만한 곳을 찾지 못한다. 이름이 잘 알려진 관광지인데도 불구하고, 포장마차나 찻집 외에 이렇다 할 숙박업소나 식당을 찾아볼 수 없다.

 

 

별 수 없이 바로 약전리로 직행한다. 머뭇거리거나 다른 대안을 찾아볼 여유가 없다. 대안을 찾는다고 해도 뾰족한 수가 없다. 이럴 때 다른 대안을 찾는다는 게 시간 낭비가 될 가능성이 높다는 걸 깨달은 지 오래다. 조금 무식한 얘기일지도 모르지만, 생각은 나중에 행동이 먼저다.

 

 

호미곶을 떠나 울기재라는 이름의 높고 긴 고개를 넘어가는 사이에 해가 똑 떨어진다. 동해로 들어서면서 해지는 시간이 점점 더 빨라지고 있다. 그렇게 해서 어둠이 깔린 바닷가 길을 1시간 가량 달린다. 다행히 달이 밝아, 사물을 분간하는 데는 큰 어려움이 없다.

 

 

이제는 자전거를 타고 밤길을 달리는 데도 꽤 익숙해진 모양이다. 갈 길이 급한데도 마음이 이상하리만치 차분하다. 어둠 속, 바닷가를 지나가는 높은 언덕 길 위에서 푸르스름한 달빛을 받아 차갑게 번득이는 바다를 내려다본다. 검은 물결 출렁이는 바다 너머로 멀리 포항 시내를 밝히는 붉은 불빛이 보이기 시작한다. 오늘 하루 달린 거리는 93㎞, 총누적거리는 4254㎞다.

 

  
계원리 바닷가 풍경
ⓒ 성낙선
계원리

  
현대적인 분위기의 양포항
ⓒ 성낙선
양포항

중국인이 오징어 맛을 안다면? 무섭다 
[우리나라 바닷가 1만리 자전거여행 58] 영덕군 축산항에서 울진군 죽변항까지

 

11월 17일(수)

 

어디선가 밤새 닭울음소리가 들린다. 그 소리에 그새 아침이 되었나 해서 시계를 들여다보면 여전히 한밤중이다. 그런 식으로 밤새 몇 번이나 잠에서 깨어 일어났는지 모른다. 그냥 알람 시간에 맞춰서 일어나면 되지 생각할 수도 있는데, 그게 그렇지 않다. 핸드폰 알람이 오전 6시에 맞춰져 있다. 동이 터오는 시간은 아침 7시 무렵이다.

 

만약에 닭 우는 소리가 동이 터오는 시간과 동일하다면, 알람 소리를 듣지 못하고 늦잠을 자고 있는 셈이 된다. 그러니 자연히 눈이 떠지지 않을 수 없다. 몸은 피곤해 죽을 맛인데, 닭울음 소리에 자꾸 눈을 뜨게 되는 것도 참 신기한 일이다.

 

이제 여행도 다 끝나 가는데 마음을 편하게 먹자고 생각하면서도 좀처럼 긴장이 풀리지 않는다. 아침 일찍 일어나야 한다는 생각이 닭울음 소리와 연동돼 자꾸 눈을 뜨게 만든다. 내 무의식 속에 여행을 가능한 한 하루라도 빨리 끝내야 한다는 생각이 강박으로 작용하고 있는 게 분명하다.

 

그런데 그놈의 닭이 너무 자주 울어 젖히는 바람에 너무 자주, 그것도 너무 일찍 눈을 뜨고 있다. 피곤하다. 할 수만 있다면, 그놈의 닭을 입을 막아서라도 새벽이 오지 않게 만들고 싶다. 하지만 닭이야 울든 말든, 여행객이 그 소리에 잠을 설치든 말든 새벽은 오고 해는 또 뜨기 마련이다.

 

  
바닷가 절벽 위를 지나가는 해안도로
ⓒ 성낙선
해안도로

 

중국인들이 오징어를 먹기 시작했다... 너무 무섭다

 

숙면을 취하지 못한 탓인지, 오늘 아침 온몸이 찌뿌듯하다. 이런 날일수록 먼저 근육을 적당히 풀어주고 나서 자전거에 올라타야 하는데, 오늘도 역시나 자전거를 보자마자 바로 올라타 페달을 돌리기 시작한다. 그러고 보니 여행을 하면서 그동안 아침저녁으로 간단하게나마 체조를 하던 때가 언제 적이었는지 이제는 아주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내 몸 여기저기서 근육통이 사라지지 않고 있는 게 아마도 이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그나마 길이 좋아서 다행이다. 길마저 곱지 않았으면, 동해안 여행도 그리 유쾌하다고 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축산항에서 고래불해수욕장까지 가는 해안도로가 내 몸과 마음을 더없이 편안하게 만들어준다. 경치가 아름다운 건 두말할 필요도 없다. 역시 동해안이다.

 

  
오징어 말리기
ⓒ 성낙선
오징어

 

드디어 길가에 오징어들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기대했던 대로다. 허연 몸을 드러낸 오징어들이 길가 공터를 뒤덮고 있다. 반건조 오징어, '피데기'가 될 오징어들이다. 바다에서 잡아올린 지 얼마 안 돼서 그런지 무척 싱싱하다. 때깔이 참 곱다. 이 오징어들을 전자레인지에 돌려 구우면, 입안에 단맛이 돌 정도로 맛있다. 아, 상상만 하고 있는데도 입안에 군침이 고인다.

 

도로 주변에 공터를 찾아보기 힘들다. 빈 공간이 있으면 모두 지지대를 세워 오징어를 널어 말리고 있다. 도로가 온통 오징어 덕장으로 변해 있는 셈이다. 한쪽에서 마을 주민들 여럿이 밤새 널어 말린 오징어를 거둬들이느라 바쁘다. 이 오징어들을 한 축에 20마리씩 묶어 바로 유통업체에 넘긴다.

 

오징어를 말려서 피데기로 만드는 데 얼마나 오래 걸리는지를 물었다. 그랬더니, 그 기간이 생각 밖으로 짧다. 요즘 같이 볕이 좋을 때는 하루 정도만 말려도 된다고 한다. 단 하루다. 하루 만에 생물 오징어가 반건조 오징어가 돼서 구이용으로 팔려나간다. 참 놀라운 일이다.

 

요즘 오징어 값이 배춧값 못지않게 가격이 오르고 있다. 생산량이 예전만 못하기도 하지만, 소비가 크게 증가하고 있는 게 주원인이다. 최근에 중국 사람들이 오징어를 먹기 시작하면서 물량이 달린다는 이야기도 있다. 13억 중국 인구가 오징어 맛을 알게 되면, 과연 어떤 일이 벌어질까? 아, 이건 상상만 해도 무서운 일이다.

 

피데기 같은 경우, 요즘 거리에 내놓기 바쁘게 팔려나간다고 한다. 내 상상이 현실이 되고 있는 걸까? 이 많은 오징어들이 덕장을 떠나기 무섭게 팔려나간다니, 오징어라면 사족을 못 쓰는 내게 이처럼 무시무시한 말도 없다.

 

  
대진해수욕장, 갯바위 위에 앉아 돌김을 뜯는 할머니와 할머니를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는 갈매기
ⓒ 성낙선
대진해수욕장

  
고래불해수욕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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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래불해수욕장

 

일반 김 값으로는 도저히 따질 수 없는 할머니표 돌김

 

대진해수욕장 한쪽 백사장 끝에서 갯바위 위에 걸터앉아 계속 무언가를 잡아 뜯고 있는 할머니 한 분을 발견한다. 잔뜩 굽은 등 때문에 그렇지 않아도 왜소한 몸이 소꿉놀이를 하는 여자아이만큼이나 작아 보인다. 이 추운 날, 칼날 같은 바람을 맞으며 바닷물에 젖어 얼음장같이 차가운 바위 위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 걸까?

 

바위 위에 갓난아이 머리털 같은 해초가 다닥다닥 붙어 있다. 녹색 빛이 감돈다. 돌김이란다. 길어야 채 2cm가 되지 않을 것 같다. 그나마 바닷물에 젖어 바위에 납작하게 붙어 있다. 그런 돌김을 손끝으로 잡아 뜯는데, 바위 위에 돌김이 뜯겨나간 흔적이 남지 않는다. 돌김이 거의 그대로 남아 있다.

 

그렇게 해서 얼마나 많은 돌김을 뜯을 수 있을지, 갑갑하다. 곁에서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오금이 저린다. 돌김을 뜯는 할머니의 손이 바위와 흡사한 빛을 띠고 있다. 몸피에 비해 굵은 손마디가 옹이가 진 나무토막처럼 딱딱해 보인다. 평생 바닷물에 절어 있다가 세월이 덧쌓이면서 마침내 돌처럼 굳어진 손이다.

 

안쓰러운 마음에 '그렇게 해서 얼마나 뜯을 수 있냐?'고 물었더니, 할머니는 '아주 적다'며 '나이가 들어 이제는 이런 일밖에 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김발에 널어 말리면 몇 장 되지도 않는' 돌김을 마치 보석을 다루는 것처럼 조심스럽게 집어올리고 있다. 나같이 성질이 급한 놈은 도무지 감질이 나서 할 수 없는 일이다. 할머니가 만드는 김은 시장 가치로는 따질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세상은 그런 가치를 전혀 알아주지 않는다.

 

대진해수욕장에서 바라다보는 백사장이 끝 간데없이 길다. 대진해수욕장에서 고래불대교를 넘으면 덕천해수욕장과 고래불영동해수욕장이 연달아 나온다. 대진에서 보면 이 3개의 해수욕장이 하나인 것처럼 보이는데 그 길이를 짐작하기가 어렵다.

 

사실 이 해수욕장들은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고 해도 무방하다. 대진에서 고래불까지 백사장이 무려 6개 마을을 지나가는데 그 길이만 8km, 20리다. 입이 쩍 벌어지는 길이다. 백사장 길이만 놓고 보면, 우리나라에서 이곳을 능가할 백사장은 또 없을 것 같다.

 

  
후포항에서 열린 2010 울진대게축제
ⓒ 성낙선
울진대게축제

  
후포항. 배에서 대게를 내리는 사람들
ⓒ 성낙선
후포항

 

울진에서 잡히면 울진대게, 영덕에서 잡히면 영덕대게

 

고래불해수욕장에서 얼마 가지 않아서 울진군으로 넘어간다. 울진군으로 들어서면 바로 후포항이 나온다. 영덕을 지나오면서 길거리에서 수없이 많은 '대게'들과 눈 맞춤을 해야 했는데, 후포항에서도 대게가 가장 먼저 얼굴을 내밀고 나온다. 대게 간판이 영덕만큼이나 많다. 울진은 영덕과 함께 대게 주산지로 알려진 곳이다.

 

후포항에서는 지금 한창 대게축제(11월 19일~21일)를 준비 중이다. 축제 준비를 갖추기 위해 부둣가에 엄청난 양의 대게가 쌓이고 있다. 대게가 너무 많아 아예 짐짝 취급을 받고 있다. 그 바람에 몸통에서 떨어져 나가는 다리가 한둘이 아니다. 부두에 대게의 대나무같이 길고 곧은 다리가 아무렇게나 돌아다닌다.

 

기성망양해수욕장을 지나면 바닷가에 울진대게 내력을 밝히는 대게 동상이 하나 나온다. 그곳의 울진대게 유래비에 울진대게가 '14세기 초엽인 고려시대부터 울진의 특산물로 자리 잡아' 왔다고 적혀 있다. 울진에서 오래전부터 대게를 잡아 왔다는 사실을 강조함으로써 울진이 명실공히 대게의 고장임을 역설하는 내용이다. 거기에는 영덕에 대게의 명성을 넘겨준 아쉬움도 배어 있다.

 

사실 울진대게든 영덕대게든 알고 보면, 그냥 다 한 다리 건너다. 굳이 지역을 나눌 필요가 없다. 영덕 대게가 영덕에만 사는 것도 아니고 울진대게가 울진에만 사는 것도 아닌데, 영덕이니 울진이니를 구분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나? 소비자들은 그저 살이 실하고 맛있는 대게가 있으면 그곳을 찾아가기 마련이다.

 

  
울진대게상
ⓒ 성낙선
울진대게

  
울진 해안도로 풍경
ⓒ 성낙선
해안도로

해가 지기 전에 죽변항에 도착한다. 그런데 죽변항 근처, 숙박을 하게 된 모텔의 주인이 자칭 이 지역 홍보대사다. 내가 서울에서 강원도 고성까지 자전거를 타고 여행을 하고 있다는 얘기를 했더니, 키를 들고 방 안까지 쫓아 들어온다. 그러더니 울진이 얼마나 아름답고 살기 좋은 고장인지를 설명하고 나서는, 이 지역에 온 이상 반드시 보고 가야 할 여행지를 줄줄이 엮어 내린다.

 

그곳들을 들러보지 않고 가면 울진을 여행했다고 말할 수 없다고 강조하는데, 당장에라도 나를 끌고 밖으로 나갈 태세다. 내가 오늘은 너무 늦었고 내일 그중에 한두 군데는 반드시 들러보고 가겠다고 말하고 나서야 겨우 방문을 닫아주고 나간다. 고향을 사랑하는 마음이 이 정도면 자칭이 아니라, 타칭 홍보대사라 해도 전혀 틀린 말이 아닐 것이다. 오늘 하루 달린 거리는 86km, 총누적거리는 4444km다.

 

  
울진 해안도로 풍경
ⓒ 성낙선
해안도로

  
울진 해안도로 풍경
ⓒ 성낙선
해안도로

어? UFO... 이젠 내 눈 의심해야 하나
[우리나라 바닷가 1만리 자전거여행 59] 울진군 죽변항에서 동해시 용정동까지

 

11월 18일(목)

 

어제 저녁 모텔 주인과 약속한 대로, 가능하면 새벽에 죽변항 수산물 위판장에서 벌어지는 경매 장면과 항구 뒤편 언덕 바닷가에 있는 <폭풍속으로> 드라마 촬영지를 돌아볼 생각이었다. 하지만 오늘 아침 너무 늦게 일어나는 바람에 위판장에서의 새벽 경매 장면은 볼 수 없었다. 내가 위판장에 들어섰을 때는 이미 경매가 끝나고, 차가운 바닷바람만 휑하니 지나갈 뿐이다. 아쉽기는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 다음에 바로 <폭풍속으로> 촬영지가 있는 바닷가 언덕을 찾아간다. 항구 뒤쪽 마을 안길로 언덕을 올라가면, 왼쪽으로 바닷가 절벽 위에 교회와 일본식 가옥이 올라서 있고 오른쪽으로는 대나무 숲이 등대 아래 절벽 위를 뒤덮고 있는 것이 보인다. 아름답지만, 어딘가 모르게 위태로워 보이는 풍경이다. 드라마를 보지 않아서 잘 모르겠다. 하지만 이곳에서 폭풍이 몰아치는 날의 정경이 어떠했을지는 조금 짐작이 간다.

 

모텔 주인은 남들이 모두 잠든 시간에 가끔 촬영지 절벽 위로 올라가 대나무 숲속을 혼자 거닐며 조용히 음악에 심취하곤 한다고 했다. 그때의 기분이 '너무나 환상적'이라고 하는데, 나는 조금 으스스한 느낌이다. 아마도 촬영지를 비추는 조명이 꺼져 있는데다가 날이 추워서 그런 느낌이 더 강하게 드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이곳이 음악을 들으며 산책을 하기에 좋은 곳이라는 말에는 충분히 공감한다.

 

  
동이 트기 직전, '폭풍속으로' 촬영지 대나무 숲.
ⓒ 성낙선
폭풍속으로

  
'폭풍속으로' 촬영지
ⓒ 성낙선
폭풍속으로

 

해안 경비초소에 그려진 '하트' 낙서

 

  
하트가 그려진 해안 경비초소
ⓒ 성낙선
경비초소

죽변항에서 약 10여 ㎞를 더 가면 그때부터는 삼척이다. 앞에서도 잠깐 얘기한 적이 있지만, 삼척은 동해안에서도 가장 힘든 구간이다. 언덕이 많은 걸로 유명하다. 바닷가 언덕을 오르락내리락 하다 보면 진이 다 빠진다. 그런 까닭에 삼척이 가까워지면서 조금 긴장이 되기 시작한다.

 

이곳에서는 길을 선택하는 데 신중해야 한다. 가능하면 바닷가에 근접해 있는 도로를 이용하는 게 좋다. 그렇지 않으면 자칫 산길로 접어들 수도 있기 때문이다. 같은 언덕이라도 산길보다는 바닷가 절벽 위를 타고 넘어가는 길이 그나마 경사가 낮은 편이다.

 

울진군을 벗어나기 직전에 나곡리라는 마을의 바닷가에서 조금 기이하달 수 있는 풍경과 마주친다. 바닷가 초소 벽에 누군가 붉은 색 스프레이로 사랑하는 사람의 이름을 적어놓았다. 명색이 '군사시설'을 누가 이렇게 해놓은 것인가? 예전 같았으면 근처에 다가가기도 힘든 물건이다. 접근은 물론 사진 촬영도 금지되어 있었다. 그런 시설물이 지금은 폐허처럼 방치돼 있다. 그리고 누군가 그곳에 예쁘게 낙서까지 해놓았다.

 

경비초소 벽에 낙서를 한다는 건, 나로선 생각하기 힘든 일이다. 바닷가 초소가 어느새 냉전시대 유물이 되어가고 있는 광경이 예사롭지 않다. 하트 모양의 낙서가 도시 뒷골목 담벼락이 아니라, 경비초소 벽에 그려지면서 이전에는 생각하지도 못했던 또 다른 의미를 만들어내고 있다.

 

해안 초소가 이런 상태라면, 앞으로 동해 바닷가를 가로막고 선 가시 철망을 거둬내는 날도 그리 멀다고만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는 이 모든 게 예측불허다. 철조망을 사이에 두고 대립과 갈등이 증폭하고 있다. 과거로의 회귀가 무슨 유행병처럼 번지고 있다. 동해라고 해서 언제까지나 조용하고 평화로운 날이 계속되리라는 보장이 없다.

 

색다른 풍경을 보여주는 작은 항구, 갈남항

 

고포마을을 지나면서부터 드디어 강원도 삼척시다. 이 여행도 이제 막바지를 향해 치닫고 있다. 그런데 삼척시로 들어서는 길이 너무 어수선하다. 신울진원자력발전소 공사 현장을 지나가면서 길을 잘못 들어 공사장 주변 도로를 헤맨 뒤다. 그리고 삼척시로 들어서서는 호산해수욕장 주변 지역을 지나가느라 조금 애를 먹는다.

 

이곳은 지금 LNG생산기지를 건설하느라 주변 도로가 매우 어수선하다. 그 바람에 월천리 솔숲 주변 풍경이 제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게 훼손된 것은 물론이고, 호산해수욕장 주변은 또 앞으로 뭐가 어떻게 들어서려고 하는지 원형을 알 수 없을 정도로 마구 파헤쳐지고 있다. 호산해수욕장은 강원도에서 보기 드문 몽돌해수욕장이다.

 

  
삼척을 지나가는 도로. 급커브 주의 표지판.
ⓒ 성낙선
급커브

  
갈남항. 항구 안에 자리잡은 작은 바위섬.
ⓒ 성낙선
갈남항

해신당공원을 오르는 길이 상당히 힘든 편이다. 신남항 뒤로 가파른 산길을 구불구불 돌아 오른다. 웬만하면 걸어서 올라가고 싶은데 자존심이 허락을 하지 않는다. 그 길에서 땀을 흠뻑 흘리고 나면, 언덕 위로 해신당공원 앞 주차장이 나온다. 여기서 잠시 자전거에서 내려 쉬어가지 않을 수 없다. 다리도 아프지만, 엉덩이가 견딜 수 없이 아프다. 계속 달려가고 싶어도 더 이상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

 

해신당공원 앞을 지나 언덕 아래를 내려가면 갈남항이다. 갈남항은 겉보기에 작고 보잘 것이 없는 곳이다. 내리막길 중간에 항구로 내려가는 좁은 샛길이 나타나 그냥 지나치기 쉽다. 관광객이 찾아갈 만한 곳이 아니다. 그런데 그 작은 항구에서 바라보는 풍경이 무척 아름답다. 풍경이 다른 항구 못지않게 다채롭다. 부둣가와 방파제에서 바라다보는 풍경이 다른 곳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멋을 간직하고 있다.

 

항구 안에 작은 바위섬이 솟아 있다. 항구가 하얀 바위산을 품어 안은 형상인데, 그 모습이 볼수록 매력적이다. 방파제 너머로는 갯바위들이 드문드문 머리를 내밀고 있는 바다에서 해녀들이 자맥질을 하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날이 추운 탓에 초록색 바닷물이 이가 시릴 정도로 차가워 보인다. 아직도 차가운 물속을 드나들며 해산물을 채취하는 해녀들이 있다는 게 신기할 따름이다.

 

  
갈남항 앞바다. 해산물을 채취하는 해녀.
ⓒ 성낙선
해녀

  
갈남항. 해안 풍경
ⓒ 성낙선
갈남항

  
갈남항.
ⓒ 성낙선
갈남항

 

언덕 앞에서 약한 모습 보이기 싫어

 

  
새천년해안유원지 소망의탑
ⓒ 성낙선
새천년해안유원지

갈남항을 떠나서는 다시 바닷가 언덕 위를 오르내린다. 아무래도 삼척을 벗어나기 전까지는 마음을 놓을 수가 없을 것 같다. 새천년해안유원지 소망의탑이 서 있는 언덕을 올라가는 길에서 다시 한 번 더 있는 힘을 다해 페달을 밟는다. 언덕이 조금 가파른 편이어서 처음에는 그냥 걸어서 오를까도 생각했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때 언덕 위에서 도보여행객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걸어서 내려오는 게 아닌가?

 

자전거여행자는 이럴 때 참 곤란하다. 언덕을 앞에 두고, 다른 사람들에게 약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리가 부러지든 말든, 숨이 뒤로 넘어가든 말든 계속해서 페달을 밟는다. 이깟 언덕쯤 아무것도 아니라는 걸 보여주기 위해 평소보다 더 빨리 더 세게 페달을 돌린다. 이럴 때 내가 참 유치하다는 걸 알면서도, 어쩔 수 없다. 이건 뭐 본능에 가까운 행위라 통제가 불가능하다.

 

그런데 젠장 이놈의 언덕이 밑에서 올려다보는 것하고는 다르게 제법 높고 가파르다. 때는 늦었다. 이제는 후회해도 소용이 없다. 결국 숨이 가빠 앞으로 고꾸라질 것 같은 지경이 되어서야 겨우 언덕 끝에 오른다. 매번 겪는 일이지만 정말이지 두 번 다시 되풀이하고 싶지 않은 고통이다. 다행히도 이 길에서는 이후로 이렇게 낑낑대며 올라야 하는 언덕도 이걸로 끝이다.

 

  
맹방해수욕장
ⓒ 성낙선
맹방해수욕장

  
추암해수욕장.
ⓒ 성낙선
추암해수욕장

 

멀쩡한 비행기를 UFO로 착각하다

 

곧이어 동해시로 넘어 간다. 동해시에서는 북평국가산업단지와 동해항을 지나가는 길이 조금 복잡하다. 그리고 동해항을 에돌아가는 도로 위로 자동차들이 많이 지나다니는 편이다. 완전히 마음을 놓을 수 없는 길이다. 그렇게 동해항을 지나면서 피로가 밀려온다. 오늘 하루 동해안 최대 난코스 중에 난코스라고 할 수 있는 삼척을 관통한 데다, 동해항을 지나오는 중에 대형차들이 많이 지나다니는 도로 위에서 조금 헤맨 탓이다.

 

  
UFO로 착각한 비행기. 노란 불빛을 내뿜으며 곡선 비행을 하던 작은 물체는 온 데 간 데 없고...
ⓒ 성낙선
비행기

용정동을 지나가는 도로 위의 하늘에서 이상한 물체를 발견한다. 형체를 분간하기 힘든 물체가 흰 연기를 길게 내뿜으면 지나간다. 그리고 그 주위로 노란 빛을 내뿜은 작은 물체 하나가 곡선 비행을 하고 있는 게 아닌가? 말로만 듣던 미확인비행물체, UFO다. 세상에 인간이 만든 비행물체치고 저런 식으로 날아다니는 물건은 없다. UFO일 가능성이 크다.

 

잽싸게 카메라를 꺼내 들어 셔터를 누른다. 이게 다 몇 초 안 되는 사이에 벌어진 일이다. 사진을 몇 컷 찍지 않아서, 그 비행물체는 휙 사라진다. 그렇지 않아도 두 달 넘게 전국을 떠돌아다니는 여행을 하면서 우주선 한 번 보지 못하고 끝내는가 싶어 아쉬웠다. 왜 여행 중에 우연히 UFO를 목격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지 않나? 이때 역시 여행을 오래 하다 보니, 내게도 드디어 이런 일이 생기는구나 생각했다.

 

그런데 숙소에 들어와서 사진을 확대해서 보니, 그게 그냥 일반 비행기하고 똑같이 생겼다. 그리고 어찌된 일인지 노란 불빛 같은 건 흔적도 없다. 이상한 일이다. 분명히 무언가 보았는데 말이다. 허탈하다. 내가 너무 피곤해서 뭘 잘못 봤겠지 생각하면서도, 내가 내 눈을 의심해야 하는 상황이 조금 당황스럽다. 헛것을 다 보고, 내가 오늘 힘들긴 정말 많이 힘들었던 모양이다. 오늘 하루 달린 거리는 97㎞, 총누적거리는 4541㎞다.

 

헤어졌다가 망상해수욕장 앞에서 극적인 상봉! 
[우리나라 바닷가 1만리 자전거여행 60] 동해시 용정동에서 강릉시 경포대해수욕장까지

 

11월 19일(금)

 

동해시에서 만나게 되는 가장 인상적인 풍경은 '바닷가 철길'이다. 바닷가를 지나가는 도로 위에 서면, 발 아래로 두 줄기 철로가 지나가고 그 철로 너머로는 푸른 바다가 넘실대는 것을 볼 수 있다. 자전거를 타고 가면서, 철길 너머로 건너다보는 바다가 또 다른 멋으로 다가온다. 자동차를 타고 가면서 보는 것과는 확연히 다르다.

 

이 철길은 정동진역을 지나 강릉역까지 이어진다. 오늘의 바닷가 여행은 부득이 이 철길과 함께 한다. 자전거를 타고 바닷가 길을 상당 구간 철길과 나란히 달린다. 때로 서로 헤어졌다 다시 함께 달리기를 반복하다가, 망상해수욕장으로 들어서는 길 앞에서 극적인 상봉을 하기도 한다.

 

  
망상해수욕장 입구 철길 건널목
ⓒ 성낙선
망상해수욕장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정동진

 

  
정동진역 하트 모양 장식
ⓒ 성낙선
정동진역

망상을 지난 철길은 이후 강릉시 옥계에서 잠시 떨어져 달리다가 나중에는 자전거와 함께 나란히 정동진역으로 들어서게 된다. 그리고는 안인항 근처에서 완전히 이별을 고하게 되는데, 그때는 '말없이 안녕'이다. 나중에 한 번 더 상봉을 할 기회가 찾아오기는 하지만, 그때는 서로 제 갈 길을 찾아 가기 바쁘다.

 

망상에서 강릉시 옥계까지 가는 길이 조금 위험하다. 갓길이 없고 차량이 많은 편이라 주의할 필요가 있다. 옥계를 지나 모래시계공원의 바닷가 쪽 산책로를 따라 올라가면 정동진해수욕장이다. 파도가 머리 위에 하얀 포말을 이고 달려온다. 날이 추운데도 해변을 거니는 사람들이 예상 외로 많다. 역시 정동진이다. 사시사철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해변 산책로 끝에서 계단을 걸어 오르면, 그곳이 드라마 <모래시계>로 십수 년째 유명세를 타고 있는 정동진역이다. 이제는 드라마를 본 사람들의 기억이 백사장에 찍힌 발자국만큼이나 희미해지고 있는데도, 드라마로 인해 정동진역이 얻은 명성은 좀처럼 사그라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지금은 젊은 연인들이 미래를 약속하는 장소로, 그리고 매년 새해가 되면 전 국민이 찾아가고 싶어 하는 해맞이 장소로 변하면서 더 많은 명성을 얻고 있다. 드라마 촬영지가, 새로운 관광 명소로 거듭나는데 정동진만큼 성공적이었던 곳이 또 있을까? 이후로 수없이 많은 드라마 촬영지들이 관광지로의 변신을 시도했지만, 결국 정동진의 뒤를 잇지는 못했다.

 

금진항에서 정동진으로 향해 가는 길의 해안도로가 예술이다. 바위 절벽 아래를 유연하게 휘어져 돌아가는 도로의 곡선이 가슴이 두근거릴 정도로 아름답다. 하지만 해안도로 끝에서 정동진으로 넘어가는 언덕이 길고 가파르다. 그래도 이 길이 동해안에서 만나는 마지막 난코스라고 생각하면 조금은 마음이 편하다.

 

  
정동진역, 표지석과 '모래시계 소나무'.
ⓒ 성낙선
정동진역
  
금진항에서 정동진 가는 길의 해안도로.
ⓒ 성낙선
해안도로

 

강원도는 사실상 해안선 전역이 백사장

 

안인항에서 강릉항을 찾아가는 길이 몹시 복잡하다. 강릉공항을 에돌아가는 길이라 길을 잃고 헤매기 딱 좋다. 이럴 때는 가능한 한 이정표가 분명한 도로를 이용하는 게 좋다. 공연히 마을 안길과 농로를 헤매면서 시간을 낭비할 필요가 없다. 공항을 지나 남대천을 넘어가면, 천변을 따라 바다로 내려가는 자전거도로가 나온다. 그 끝에 강릉항이 있다.

 

강릉항은 최근 관광어항으로 탈바꿈한 곳이다. 주변에 여러 가지 시설이 들어섰다. 관광지로 단장을 끝낸 지 얼마 안 돼 산뜻한 느낌이다. 그 중 남대천을 가로질러 항구와 남항진해변을 잇는 솔바람다리가 인기다. 다리 위에 서서 맞는 바람이 상쾌하다. 그 바람이 절반은 강바람이고, 절반은 바닷바람이다.

 

  
강릉항, 솔바람다리
ⓒ 성낙선
솔바람다리

 

강릉항에서부터 경포대해수욕장까지 소나무 숲 사이로 난 2차선 도로를 달린다. 길이 좁고 갓길이 없어 조금 위험해 보이기는 하지만 오가는 차량이 적어 크게 위협을 느끼지는 않는다. 그 길을 가는 사이에 송정과 강문해수욕장을 지난다.

 

그리고 경포대 위로 사근진이나 순포 같은 해수욕장이 나오는데, 이 해수욕장들을 모두 하나로 이으면 앞서 지나온 '고래불'만큼이나 길다. 가는 곳마다 줄줄이 해수욕장이다. 사실 강원도는 몇 군데를 제외하고는 해안선 전역이 '백사장'이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오늘은 경포대에서 일찌감치 여행을 마무리한다. 서울에서 회사 후배들이 응원 차 내려오기로 했기 때문이다. 내가 자전거여행을 하면서 먹을 거 제대로 못 먹고 돌아다닌다고 징징댔더니, 영양 보충을 시켜주겠단다. 그런데 이들이 경포대에 도착하는 시간이 오후 11시쯤이다. 이 밤에 무슨 영양 보충을 시켜주려는지 몹시 기대가 된다. 오늘 하루 달린 거리는 61km, 총누적거리는 4602km다.

 

  
경포대해수욕장
ⓒ 성낙선
경포대해수욕장

거대한 짐승이 죽어서 하얀 뼈를 남겼나? 
[우리나라 바닷가 1만리 자전거여행 61] 강릉시 경포대해수욕장에서 속초시 중앙시장까지

 

11월 20일(토)

 

지난 밤 영양 보충을 아주 심하게 했다. 저녁을 먹은 지 4시간도 안 돼, 다시 매운탕을 앞에 놓고 공깃밥을 비우는데, 마지막에는 식도까지 밥알이 차오르는 느낌이었다. 그때 잠깐 소화제를 먹어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지만, 다행히 별 탈은 없었다.

 

무언가 먹을 게 생겼을 때 최대한 뱃속을 채워 두는 식습관이 마침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이날 밤 배탈은커녕 포만감 속에 잠이 들어서는 밤새 '배부른 돼지'가 돼서 나뒹구는 행복한 꿈을 꾸었다.

 

  
강릉의 자전거도로
ⓒ 성낙선
자전거도로

 

소나무 숲이 인상적인 강릉의 자전거도로

 

  
소나무 숲 아래를 지나가는 자전거도로
ⓒ 성낙선
자전거도로

다시 아침이다. 후배들과 작별을 하고 나서는 바로 경포대 앞을 지나가는 해안도로로 올라탄다. 이 해안도로는 얼마 안 가, 녹색 아스팔트가 깔린 자전거도로로 이어진다. 그곳에서부터 자전거도로가 바닷가 소나무 숲 사이를 지나간다. 조용하고 쾌적한 분위기다. 다른 지역에서는 볼 수 없었던 풍경이다.

 

강릉은 지난 몇 년간 자전거 이용을 활성화하는 정책을 추진해왔다. 그 결과 지금은 이곳의 자전거도로에서 보는 것과 같이, 시민들이 일상적으로 자전거를 타고 다니는 것은 물론 관광객들이 자전거를 타고 여행을 하는 데 더없이 좋은 환경을 갖추게 됐다. 그럼 점들을 인정해 행정안전부는 올해 강릉을 우리나라 '10대 자전거 거점도시' 중에 하나로 지정했다.

 

자전거를 타고 여행을 하다 보면, 강릉처럼 독특한 풍경을 보여주는 곳도 드물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자전거도로 위에서 마주치는 풍경은 물론이고, 해안에서 바라보는 풍경 역시 다른 지역에서는 쉽게 찾아볼 수 없는 것들이다. 동해안을 여행하면서 수없이 많은 갯바위들을 보아 왔지만, 강릉 지역에서 보게 되는 갯바위처럼 다양한 모양을 하고 있는 곳을 찾아보기도 어렵다.

 

사천진항에서 가까운 곳에 교문암이 있다. 바위가 거대한 알 모양을 하고 있다. 그 옛날 이 바위 밑에서 이무기가 용이 되는 꿈을 꾸었다고 한다. 꿈이 현실이 되는 게 쉽지 않다. 더군다나 세상에 용꿈을 꾸는 '이무기'가 어디 한둘인가? 그런데 이 바위에는 마침내 이무기가 용이 되어 떠나는 이야기가 전설이 되어 내려오고 있다. 이무기가 용이 되어 떠나면서 바위가 두 쪽으로 쪼개졌다.

 

  
교문암
ⓒ 성낙선
교문암
  
아들바위공원.
ⓒ 성낙선
아들바위공원

 

밀가루 반죽을 주물러 놓은 것 같은 바위들

 

 

 

주문진항을 지나 북쪽으로 조금 더 올라가면 소돌항이 나온다. 그곳에 아들바위공원이 있다. 이곳의 갯바위들은 기암괴석에 가깝다. 아들바위, 코끼리바위, 소바위 등의 이름으로 불리는 특이한 모양의 바위들이 여기 저기 산재해 있다.

 

'아들바위'는 '아들을 원하는 부부가 기도를 하면 소원을 성취한다'는 속설이 전해져 내려온다. 바위가 밀가루 반죽을 주물러놓은 것 같은 형상을 하고 있다. 바위에 구멍이 뚫려 있고, 진짜 반죽을 짓이긴 듯 손자국이 남아 있어 꽤 신비한 느낌을 준다.

 

속칭 '코끼리바위'는 자연이 만들어 놓은 형상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기이한 모습을 하고 있다. 바위 표면이 마치 촛농처럼 녹아내리다 굳어진 형국이다. 아들바위처럼 여기저기 구멍이 뚫려 있는데다가, 바위 표면이 대부분 녹아서 사라진 모습이 바위라기보다는 어느 거대한 짐승이 죽어서 남긴 하얀 뼈처럼 보이기도 한다.

 

  
왼쪽이 '소바위', 오른쪽이 '코끼리바위'
ⓒ 성낙선
코끼리바위

이 바위가 왜 코끼리바위인지는 바닷가 쪽이 아닌 바위 너머 도로 쪽에서 봐야 알 수 있다. 하지만 바위가 워낙 형태가 기괴해 코끼리 모양을 찾아보는 게 쉽지 않다. 코끼리바위와 코를 마주대고 있는 바위가 소바위다.

 

어려서 이곳에서 학교를 다닌 한 주민은 이 바위를 '해골바위'라고 부르곤 했다고 한다. 그럴 듯해 보이는 이름이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고 주변 환경도 심하게 변한 탓인지, 이제는 이 바위를 해골바위라고 부르는 사람을 찾아보기 힘들다. 이 바위는 목포의 갓바위와 같은 과정을 거쳐서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모양은 다르지만 풍화와 해식 작용을 거친 과정은 비슷해 보인다.

 

  
아들바위공원. 아들바위 앞에 서서 기념촬영을 하는 사람들.
ⓒ 성낙선
아들바위공원

 

천천히 쉬어 가라는 말하는 작은 절, 휴휴암

 

소돌항을 지나면 양양군이다. 양양은 바닷가 절벽 위에서 내려다보는 풍경이 일품이다. 휴휴암은 바닷가 언덕 위에 자리 잡은 작은 암자다. 이 작은 암자에서 내려다보는 바닷가의 바위들이 꽤 다양한 형상을 하고 있다.

 

푸른 바다 위에 넓은 등을 드러내고 있는 너럭바위가 이곳을 찾은 나그네에게 다른 것은 다 필요 없으니 아무 생각 말고 그냥 천천히 쉬었다 가라고 말하는 것 같다. 바라다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한없이 느긋해지는 풍경이다.

 

  
휴휴암, 너럭바위
ⓒ 성낙선
휴휴암

휴휴암을 지나서는 하조대 입구에서 잠시 망설인다. 안쪽으로 자동차들이 줄을 이어 드나들고 있기 때문이다. 주말을 맞아 나들이를 나온 관광객들로 길이 비좁다. 주차할 곳을 찾지 못해 그 길을 다시 되돌아나가는 차도 있다.

 

하조대는 하광정리의 바닷가에 절벽을 이루고 있는 바위를 말한다. 바닷가에 기암절벽이 높이 솟아 있고, 그 절벽 위에 소나무가 자라고 있는 풍경이 절경이다. 하조대는 그 바위 절벽 위에 올라서 있는 정자의 현판에 적혀 있는 이름이다.

 

낙산사로 들어설 무렵, 하늘 한쪽이 붉게 물들어가는 것을 광경이 눈에 들어온다. 어느새 해가 지려 하고 있다. 휴휴암과 하조대에서 잔뜩 여유를 부리던 마음이 갑자기 바빠진다. 가능하면 오늘은 속초에서 여행을 마칠 생각이다. 양양 낙산사에서 속초 청초호까지 약 10여 km다. 아무리 늦어도 1시간 거리다. 너무 먼 거리는 아니다 싶어 여행을 강행한다.

 

  
낙산사 의상대
ⓒ 성낙선
낙산사

 

벌써 속초, 1만리 바닷가 여행의 끝이 보인다

 

  
대포항 밤 풍경
ⓒ 성낙선
대포항

청초호에 다다르기 전에 대포항에서 잠시 쉬어가기로 한다. 대포항은 설악산과 가까워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항구로 유명하다. 마침 주말을 맞은 저녁 시간, 대포항이 가까워지면서 도로 위로 승용차들이 거북이걸음을 하고 있는 모습이 보이기 시작한다. 아니나 다를까 항구로 들어서는 길 입구부터 관광객들로 넘쳐난다. 발을 옮겨 딛기 힘들 정도로 많은 인파다.

 

도로 위에서는 교통정리를 하는 경찰관의 호루라기 소리가 귀를 찌른다. 조용하고 한가한 동해 바닷가에서 목격하는 풍경치곤 다소 기이한 느낌이 드는 광경이다. 대포항을 찾는 사람들이 여전히 많다. 만약 주말에 대포항을 찾아가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이 점을 미리 알고 가는 게 좋겠다.

 

이곳에서는 손님들이 횟감으로 지목한 생선을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야구 방망이로 기절시키는 기술을 보여준다. 생선을 손님이 보지 못하는 곳에서 바꿔치기 하지 않는다는 걸 보여주기 위한 행위라지만, 그렇게 품위가 있어 보이지는 않는다. 경우에 따라서 나쁜 이미지를 심어 줄 수도 있다. 가능하면 다른 방법을 찾아보는 게 좋겠다.

 

대포항에서 청초호까지는 금방이다. 청초호를 남쪽으로 돌아서 아바이마을로 들어선 다음 갯배를 타고 중앙시장 쪽으로 넘어간다. 어두운 밤 흐린 불빛 아래, 갯배에 오른 사람들의 목소리가 무척 수다스럽다. 약간 들떠 있는 목소리들이다. 나 역시 흥분을 가라앉히기 힘들다. 벌써(!) 속초라니, 꿈같은 일이다.

 

내일 드디어 이 길고도 먼 해안선 여행에 종지부를 찍는다. 속초에서 통일전망대 출입국신고소까지 아무리 길어도 하루 거리다. 그리고는 간성읍에서 하룻밤을 머무른 다음, 내일모레는 진부령을 넘어 서울로 돌아갈 예정이다. 앞으로 짧으면 3일, 길어도 4일 후에는 모든 일정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게 된다. 벌써부터 가슴이 두근거린다. 오늘 하루 달린 거리는 70km, 총누적거리는 4672km다.

 

  
주문진항, 오징어 통구이와 도루묵 구이.
ⓒ 성낙선
도루묵

  
주문진항
ⓒ 성낙선
주문진항

평생 잊지 못할 일요일, 여기가 끝이다
[우리나라 바닷가 1만리 자전거여행 62] 속초시 중앙시장에서 고성군 통일전망대

  
영금정 주변에서 바라다 본 바다.
ⓒ 성낙선
영금정

 

11월 21일 (일)

 

내 평생 잊을 수 없는 하루가 시작되고 있다. 앞으로 남은 생애, 살아갈 날이 얼마나 남아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이 날을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것이다. 지난 9월 15일 서울 집을 떠난 지 68일째 되는 날, 마침내 강원도 속초시에서 고성군의 통일전망대 출입국신고소를 향해 떠날 준비를 하고 있다.

 

우리나라 바닷가 1만리 자전거여행의 마지막 종착점을 눈앞에 두고 있다. 마음이 들뜬다. 기대감에 가슴이 설렌다. 오래 전의 일이다. 세상에 태어나 처음으로 해외여행을 떠나면서 국제공항 출국장에서 비행기 탑승시간을 기다리던 때와 흡사한 기분이다. 여행을 하면서 이렇게 흥분해 보는 것도 참 오래간만이다.

 

세상은 여느 때와 다름이 없는, 평범한 일요일 아침이다. 어제 저녁과 다를 것이 없는 거리를, 이른 아침이라 아직 문을 열지 않은 상점들 앞을 지나, 속초여객선터미널 앞을 지나가는 대로가 나올 때까지 천천히 걸어간다. 지금 이 들뜬 기분을 최대한 길게 가져가고 싶다. 오늘이 지나면 이 기분도 더 이상 느끼기 힘들다.

 

  
설악산 울산바위가 바라다보이는 동명항
ⓒ 성낙선
동명항

 

'울산바위'가 한눈에 들어오는 동명항

 

  
속초등대 전망대
ⓒ 성낙선
속초등대

속초항에서 영금정과 속초등대가 있는 곳으로 방향을 꺾으면 동명항이다. 동명항은 크기는 작지만, 아기자기한 멋이 있는 항구다. 속초항 북쪽에 작은 공간을 차지하고 있어 마치 곁방살이라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곳을 찾는 관광객들에게는 동네 사랑방과도 같은 구실을 하는 항구다.

 

항구에 활어센터가 있어 싱싱한 해산물을 맛볼 수 있는 것은 물론, 항구에서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곳에 속초등대와 영금정 같은 볼거리들이 있어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동명항에서 바라다보는 설악산도 또 다른 멋이다. 부둣가에 서서 바라다보면, 설악산 중턱에 웅장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울산바위가 한눈에 들어온다.

 

속초등대는 바닷가 바위 절벽 위에 높이 올라서 있다. 해안 쪽에서 철제 계단을 밟아 오른다. 이 계단이 꽤 가파른 편이라서 힘이 든다. 하지만 끝까지 올라간 보람이 있다. 전망대에 서면, 속초 시내와 바닷가 풍경이 한꺼번에 내려다보인다. 막힌 데 없이 탁 트인 풍경에 가슴이 시원해진다.

 

  
장사항
ⓒ 성낙선
장사항

속초등대에서 내려와 바닷가 길을 따라가면, 영랑호와 장사항이 나온다. 영랑호 호수 둘레로 아스팔트 도로와 함께 자전거도로가 깔려 있다. 이곳은 주변 풍경이 아름답고 도로가 한적해, 가족끼리 자전거를 타면서 여행을 하기에 좋은 곳이다. 자전거를 타고 호수 둘레를 돌아보는 데 한 시간 정도 걸린다. 자전거가 없으면 빌려서 탈 수도 있다. 호수를 오른쪽으로 300여 미터 돌아가면, 카누경기장 옆에 자전거대여소가 있다.

 

장사항은 속초시에서 가장 북쪽에 있는 항구다. 항구는 작지만, 찾아오는 사람들은 적지 않다. 바닷가에 횟집 건물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는 걸 볼 수 있다. 얼마 전 이곳에 마을 어촌계 운영하는 '활어회 직판장'이 들어섰다. 이곳의 물고기들은 어부들이 바다에 나가 잡아온 것들이다. 자연산 활어회를 비교적 싼 가격에 맛볼 수 있다. 장사항은 매년 여름마다 열리는 '오징어 맨손잡기 축제'로도 유명하다. 속초에 와서 대포항을 찾아갔다가 너무 많은 인파에 놀랐다면, 발길을 장사항 같은 곳으로 돌려볼 만하다.

 

  
속초등대 전망대에서 내려다 본 속초 시내
ⓒ 성낙선
속초

 

해운대 경포대 부럽지 않은 해수욕장들

 

장사항을 지나면 곧 이어 고성군이다. 고성군으로 들어서면서 조금씩 속도를 내기 시작한다. 어차피 오늘 안으로 동해안 여행을 끝마쳐야 한다. 여행이 끝나가고 있는 게 아무리 아쉽다고 해도, 길 위에서 마냥 여유를 부리고 있을 수만은 없는 일이다.

 

  
고성군의 낭만가도, 해안길. 길 표시가 잘 되어 있어 바닷가 길을 찾아가기 좋다.
ⓒ 성낙선
낭만가도

고성군은 자전거여행을 하기에 참 좋은 곳이다. 앞서 달려온, '자전거 10대 거점도시'인 강릉이 전혀 부럽지 않다. 해안선을 따라서, 자동차 몇 대 다니지 않는 한적한 도로를 달릴 수 있다. 자전거도로 같은 걸 따로 만들 필요가 없다. 그 대신 바닷가 길로 들어서기 위해 마을 샛길을 찾아 들어가야 하는 일이 조금 번거로울 수도 있지만, 그것 또한 이곳에서 맛보는 묘미 중에 하나라고 생각하면 그만이다.

 

그 길에서 만나게 되는 바닷가 풍경이 무척 다채롭다. 해안선을 따라 쉼 없이 나타나는 해수욕장과 항구들이 제 각기 다른 풍경을 보여준다. 해수욕장들이 별다른 치장 없이 민낯을 드러내고 있는 것도 정겹다. 어느 정도, 자연 그대로의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다. 요즘 유행하는 말로 '자연산'들이다.

 

해운대나 경포대가 아무리 아름답다고 해도,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은 아마도 고성군의 바닷가를 따라가지 못할 것이다. 백사장 가까이에 오종종한 모습을 하고 있는 마을들이 있고, 백사장으로 들어서는 주택가 담장 너머로 간간이 마을 사람들의 삶이 들여다보이는 것도 꽤 푸근한 정감을 불러일으킨다.

 

  
화진포해수욕장에서 바라다본 '화진포의 성'. 산 중턱 하얀 건물. 한국전쟁 전에 김일성이 휴가를 다녀간 적이 있다 해서 김일성별장으로 알려졌다.
ⓒ 성낙선
화진포의 성
  
아야진항. 그물에 걸린 도루묵을 떼내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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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루묵

 

반갑다, 서민 품으로 다시 돌아온 도루묵

 

바야흐로 도루묵 철이다. 이름도 독특한 아야진항에서 어부와 그 가족들이 그물에서 도루묵을 떼내느라 한창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다. 부두에 쌓인 그물이 모두 도루묵으로 묵직하다. 주문진항에서 잠깐 도루묵 그물을 손질하는 광경을 보기는 했지만, 이곳처럼 도루묵이 가득 잡혀 올라온 그물은 보지 못했다. 도루묵은 주로 찌개를 끓여 먹거나 구워서 먹는데 그 맛이 일품이다.

 

도루묵의 원래 이름은 '묵어'다. 묵어가 도루묵으로 바뀌는 데 선조의 변덕스런 입맛이 크게 작용했다. 임진왜란 당시 피란길에 오른 선조가 이 물고기를 한 번 먹어보고는 그 맛에 반해 '은어'라고 고쳐 부르라고 했다. 하지만 전쟁이 끝난 뒤에 은어를 다시 맛본 선조가 그때는 그 맛이 이전만 못했는지 '도로 묵어'로 부르라고 했단다.

 

그 이후로 이 물고기를 '도루묵'으로 부르게 됐다는 이야기가 전설처럼 전해 내려오고 있다. 선조의 입맛이야 어찌됐든, 도루묵은 상당히 감칠맛이 있는 물고기다. 부드럽고 고소한 맛이 이맘 때 동해안 최고의 별미로 불릴 만하다. 그 맛을 알고 나면 도루묵을 서민들 품으로 되돌려 보내준 선조가 고마워질지도 모른다.

 

알밴 도루묵은 아무 때나 맛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수백 개 알이 톡톡 터져나가면서 입 안을 고소한 맛으로 가득 채우는데, 12월이 지나면 더 이상 그 맛을 보기 어렵다. 아야진항뿐 만이 아니라, 고성군의 항구가 지금 모두 도루묵으로 들썩들썩 하고 있다. 한가하게 시간을 보내고 있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

 

  
백도해수욕장 앞 백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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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도
  
갯바위에 올라서 낚시를 즐기는 사람들
ⓒ 성낙선
갯바위

 

다양한 모양의 동해 갯바위와 바위섬들

 

고성군의 갯바위와 바위섬 역시 독특한 멋을 보여준다. 천학정 위에서 내려다보는 갯바위는 숨은그림찾기를 해도 좋을 만큼 다양한 모양을 하고 있다. 얼핏 봐도, 코끼리, 상어, 발가락 같은 모양이 눈에 들어온다. 천학정은 교암리의 바닷가 절벽 위에 지어진 정자다. 문암항 뒤에 배경처럼 서 있는 바위도 무척 기이한 모양을 하고 있다. '능파대'라는 이름의 이 바위는 마치 금강산의 일부분을 축소해서 옮겨다 놓은 모습이다.

 

백도해수욕장과 송지호해수욕장 앞에서 바라보는 섬 풍경은 동해안에서는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것들이다. 백도해수욕장 앞의 섬, 백도는 피라미드를 연상시킨다. 바다 위로 삼각형 모양의 육중한 몸을 드러내고 있다. 바위 표면이 온통 하얀 색이어서 신비한 느낌을 준다.

 

송지호해수욕장 앞의 죽도는 바다 위에 너부죽이 엎드려 있는 형상이다. 섬 일부가 나무숲으로 뒤덮여 있는 게 녹색 융단을 깔아놓은 것처럼 보인다. 백사장에서 지척이다. 백도와는 다르게 부드럽고 편안한 느낌을 주는 섬이다. 송지호해수욕장은 백사장이 넓고, 오토캠핑을 즐길 수 있는 송지호가 가까이에 있어 해마다 여름이면 많은 사람들이 찾아온다.

 

가진항을 지나면서부터는 반암항까지 7번 국도를 타고 한동안 바닷가에서 떨어진 도로 위를 달려야 한다. 멀리 바닷가로 소나무 방풍림이 길게 늘어서 있는 풍경이 장관이다. 반암항을 지나면서 다시 바닷길로 접어든다. 이곳의 해안도로에서는 거진항이 매우 아름다운 해안 풍경을 보여준다.

 

  
바닷가 소나무 방풍림
ⓒ 성낙선
방풍림

  
거진항
ⓒ 성낙선
거진항

 

육지에서 바다 한가운데로 산줄기 하나가 쭉 뻗어 나와 있다. 산비탈 여기저기에 집들이 무리를 지어 앉아 있는 것이 보이고, 그 아래로 항구가 길게 자리를 잡았다. 군더더기를 찾아보기 힘들게 깔끔한 풍경이다. 지금까지 바닷가 여행을 하면서 '미항'이라는 수식어를 단 항구들을 수없이 많이 지나쳐 왔다. 하지만 이곳의 해안도로에서 바라다보는 거진항처럼 아름다운 항구도 드물다. 항구도 항구지만, 항구 뒤에 자리를 잡은 마을들이 더 없이 아늑한 느낌이다.

 

거진항을 지나면, 화진포해수욕장이다. 화진포는 동해에서도 아름답기로 소문난 해수욕장 중에 하나로 꼽힌다. 화진포해수욕장은 해수욕장만 아름다운 게 아니라, 주변 풍경이 다른 곳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빼어난 풍광을 자랑한다.

 

오른쪽으로는 '화진포의 성(김일성별장)'을 비롯해 '이승만별장'과 '이기붕별장'이 있고, 왼쪽으로는 광개토대왕능으로 추정되는 '금구도'가 있으며, 뒤로는 동해안 최대의 석호인 '화진포'가 있어 고성군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경치를 보여주는 곳이라고 할 수 있다. 고성 여행 중에 절대 빠트릴 수 없는 곳이다.

 

  
화진포
ⓒ 성낙선
화진포

 

북쪽으로는 이제 더 이상 올라갈 곳이 없다

 

이후 대진항이 나오면, 동해안 여행도 마침내 마무리를 해야 할 시점이다. 대진항에 서서 항구 뒤로 우뚝 올라선 하얀 등대를 올려다보는 데 이게 모두 꿈만 같다. 바닷가여행은 사실상 여기가 끝이다. 대진항은 남한에서 최북단에 위치한 항구다. 자전거로 통일전망대 출입국신고소가 있는 곳까지 북쪽으로 1km 정도 더 올라갈 수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바닷가에서 사람 사는 냄새를 맡을 수 있는 곳은 대진항이 마지막이다. 자연히 가슴이 뭉클해지지 않을 수 없다.

 

  
대진항
ⓒ 성낙선
대진항

  
간성읍에서 통일전망대 출입국신고소 사이 구간 도로 공사 현장.
ⓒ 성낙선
도로 공사

대진항에서 출입국신고소가 있는 곳까지는 채 10분이 걸리지 않는다. 내가 이 땅에서 자전거로 북쪽 끝까지 올라갈 수 있는 곳은 여기까지다. 더 이상 올라가고 싶어도 올라갈 수 없다. 이곳에서 다시 통일전망대까지 이동하려면, 그때는 자동차를 이용해야 한다. 그런데 굳이 그럴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자전거여행을 자동차여행으로 마무리할 수는 없다.

 

게다가 내 나라 땅을 드나들면서 출입국신고서까지 작성해야 하는 일이 영 마뜩치 않다. 만약에 자동차를 타고 오지 않은 사람이 전망대까지 올라가려면 다른 사람의 자동차를 빌려 타야 한다. 오후 3시 40분, 신고소에서 전망대 출입이 곧 마감되니 빨리 서두르라는 방송이 흘러나온다. 나 역시 더 이상 이곳에 머물러 있어야 할 이유가 없다. 서둘러 간성읍까지 되돌아 내려간다.

 

이제는 집으로 돌아갈 일만 남았다. 오늘밤은 간성읍에서 머물고, 내일 아침 일찍 진부령을 넘어 홍천까지 달려갈 생각이다. 그리고는 홍천에서 서울까지 또 다시 하루가 걸린다. 그러니까 이제 집에 돌아갈 날이 이틀밖에 남지 않았다. 마음이 날아갈 듯이 가볍다. 지금 마음 같아선 내일이라도 당장 서울 집까지 달려갈 수 있을 것 같다. 어디 가서 환호성이라도 지르고 싶은 심정이다. 하지만 오늘은 그 마음을, 젊은 군인들로 시끌시끌한 읍내 중국집에서 혼자 잡채밥을 먹으며 달랜다. 오늘 하루 달린 거리는 76km, 총누적거리는 4748km다.

 

  
통일전망대 출입국신고소. 이곳에서 통일전망대까지는 자전거 통행이 불가능하다.
ⓒ 성낙선
통일전망대 출입국신고소

4985km, 결국 5kg이 빠졌다
[우리나라 바닷가 1만리 자전거여행 63] 고성군 간성읍에서 홍천을 거쳐 서울 길음동까지

 

11월 22일(월)

 

1만리 해안선 여행을 무사히 마쳤다. 이제 맘 편하게 집으로 돌아갈 일만 남았다. 집으로 가기 위해 열심히 페달을 밟는 것 말고는 달리 할 일도 없다. 더 이상 마음에 담아둘 일도 없다. 그런데도 오늘 아침 간성읍을 떠나 집으로 돌아가려고 하는 마당에 무언가 여전히 가슴 속에 남아 있는 허전한 기운을 떨쳐 버릴 수 없다.

 

두 달 넘게 바깥 생활을 하고도, 아직도 미련이 남아 있는 게 분명하다. 이대로 끝을 내기에는 무언가 다하지 못한 일이 남아 있는 게 분명한데, 그게 무언지 실체를 파악할 수가 없다. 막상 여행을 끝내려고 하니까 그동안 길 위에서 겪었던 일들이 모두 조금씩 아쉬움이 남는다.

 

하루 종일 길 위에서 비를 맞아야 했던 일이, 바닷가 절벽 위 오르막길을 수도 없이 오르내려야 했던 일들이 그저 꿈만 같다. 바닷가에서 수없이 마주쳤던 아름다운 광경들 역시 마찬가지다. 일장춘몽이다. 오늘 내 가슴에 한바탕 행복하고 아름다운 꿈을 난 뒤의 허전함 같은 것이 남아 있다. 어쩌면 아무리 길고 먼 여행이라도 언젠가는 반드시 일상으로 돌아가기 마련이라는 사실이 오늘 내 가슴을 헛헛하게 만드는 이유 중의 하나일 것이다.

 

  
진부령.
ⓒ 성낙선
진부령

 

'인제' 가면 언제 오나? 발길을 붙잡는 진부령

 

  
진부령 정상 표지석
ⓒ 성낙선
진부령

여행이 길어지면서, 나중에는 거의 매일 하루라도 빨리 집에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에 쫓겼다. 그래서 집에 돌아갈 날이 되면 뛸 듯이 기쁠 줄 알았다. 그런데 막상 그날이 코앞에 닥쳐서는 생각처럼 쉽게 발이 떨어지지 않는다. 홀가분하지가 않다. 숙소를 나설 시간이 돼서 짐을 꾸리는데 자꾸 손이 헛짚인다. 짐을 싸는 순서가 뒤죽박죽이다. 몸은 벌써 문밖에 나가 있는데 마음은 아직 떠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그런 내 맘을 아는지 모르는지 오늘 진부령이 자꾸 내 발을 잡는다. 한반도의 등줄기인 태백산맥을 넘어가는 일이 동네 뒷산을 오르내리는 것처럼 간단할 리 없다. 역시 호락호락 길을 내어주지 않는다. 간성읍을 떠난 뒤로는 46번 국도를 타고 한동안 거의 평지나 다름이 없는 길을 달린다. 그러다 장신유원지 앞을 지나면서부터 도로 주변에서 논과 밭이 사라지더니 본격적으로 산길로 접어든다.

 

좁은 2차선 도로가 산과 산 사이 깊은 계곡을 거슬러 올라간다. 산이 생각 밖으로 깊다. 대관령과는 또 다르다. 대관령이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점점 더 하늘과 가까워진다는 느낌이 드는 것에 반해, 진부령은 오히려 산속으로 가라앉는 듯 점점 더 깊어지는 느낌이다. 길이 굽이치는 산등성이를 구불구불 돌아서 올라가는데 이대로 산 속에 갇혀 되돌아 나오지 못하는 것은 아닌지 불안해진다. 고갯길이 높아지면서 안경에 뿌옇게 김이 서린다. 점점 더 숨이 가빠진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게, 진부령은 태백산맥의 동쪽 사면을 올라가는 고갯길치고는 경사가 비교적 완만한 편에 속한다. 높이도 다른 고개들에 비하면, 결코 높다고 할 수 없다. 높이 529m로, 대관령이 832m, 미시령이 826미터, 한계령이 1004m인 것에 비하면 한참 낮은 편이다. 그래도 진부령 역시 태백산맥을 넘어가는 고갯길이다. 상대적으로 덜 힘들 뿐이지 힘들기는 마찬가지다. 결코 가볍게 봐서는 안 된다. 온몸이 흠뻑 땀으로 젖어들 때쯤 정상에 오른다. 이렇게 해서 오늘 또 태백산맥을 넘어가는 험준한 고갯길 중에 하나를 넘는다.

 

  
진부령 정상
ⓒ 성낙선
진부령
 

날은 점점 더 추워지고, 길에서 머뭇거릴 시간이 없다

 

  
용대터널 직전 자전거도로 알림판
ⓒ 성낙선
용대터널

진부령을 넘어가면, 이후로 인제까지는 거의 내리막길이다. 올라온 것만큼이나 긴 내리막이라, 나도 모르는 사이에 태백산맥 산줄기를 빠져나간다. 마치 미끄러지듯이 빠른 속도다. 그러다가 인제군 용대리를 지나가는 용대터널 앞에서 한참을 망설인다. 터널 앞에 자전거 통행금지 표시가 붙어 있다. 그리고 46호선 옛길을 이용하라는 자전거도로 표시가 있기는 한데, 어디를 어떻게 가라는 건지 알 수가 없다.

 

우회하라는 도로가 몹시 복잡하다. 갈래 길이 많은데, 어디를 어떻게 가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는다. 주변에 인가를 찾아볼 수 없는 산속 도로여서 길을 한 번 잘못 들면 큰 낭패를 겪을 수밖에 없다. 결국 도로를 헤맨 끝에 다시 용대터널과 마주친다. 피해 갈 방법이 없다. 위험을 무릅쓰고 터널을 통과한다. 그때 터널을 피하려면 한계리 방향으로 가야 했다.

 

인제를 지나면서부터는 44번 국도로 갈아탄다. 그 후로는 오로지 페달을 밟는 데만 집중한다. 머뭇거릴 여유가 없다. 다행히 해가 지기 직전에 홍천 시내로 들어선다. 해가 지면서 기온이 급강하한다. 땀이 식으면서 몸에서 열기가 빠져나가는지, 온몸이 으슬으슬 떨려온다. 견디기 힘든 추위다.

 

체온이 급격히 떨어지고 있다. 이 상태로 10분 이상을 버티기 힘들다. 지금 내게 필요한 건 추위를 막아줄 따뜻한 방 한 칸이다. 멀리 홍천강 제방 너머로 네온사인 불 밝힌 모텔이 하나 눈에 들어온다. 망설일 시간이 없다. 그곳을 향해 직행한다. 그러고 보니, 날마다 방 한 칸을 찾아 헤매다녀야 하는 일도 오늘로 끝이다. 오늘 하루 달린 거리는 115km, 총누적거리는 4863km이다.

 

  
홍천 가는 길
ⓒ 성낙선
홍천

 

11월 23일(화)

 

사고 없는 여행, 마지막까지 긴장을 늦출 수 없다

 

  
홍천. 길 표면이 살짝 얼어 있다.
ⓒ 성낙선
홍천

날이 몹시 춥다. 아침 기온이 영하로 떨어졌다. 길바닥에 얇게 얼음이 얼어 있다. 자칫 잘못하면 길 위에서 넘어져 낙상을 할 수도 있다. 홍천 시내를 빠져나가는 동안, 겁이 나서 감히 도로 위로는 올라가 보지도 못하고 인도 위를 조심스럽게 달린다. 서울이 멀지 않다. 어제와 같은 속도라면, 해가 지기 전에 서울로 들어설 수도 있다.

 

그전에 내가 헤쳐나가야 할 난관이 하나 더 남아 있다. 예전에 경험한 대로라면, 서울에 가까워질수록 도로 위로 차량이 점점 더 많이 늘어나게 되어 있다. 자연히 자전거통행이 위험한 구간도 점점 더 많아진다.

 

오늘로 여행 70일째다. 자전거로 도로 위를 달리면서 이렇다 할 사고가 단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다. 내가 생각해도 참 놀라운 일이다. 기적에 가깝다. 그런데 서울을 코앞에 두고 사고를 당할 수는 없는 일이다. 사고 없이 무사히 여행을 끝마치기 위해서는 마지막까지 주의를 흐트러트리지 않아야 한다.

 

장거리 자전거여행을 하면서 매번 한두 차례 작고 큰 사고를 겪곤 했다. 지난해 제주도여행 길에서는 너무 피곤한 나머지 자전거를 타면서 졸다가 넘어지는 바람에, 한 달 가까이 자전거를 타지 못한 적도 있다. 여행을 시작한 지 10일이 지날 무렵에 주로 사고가 일어나곤 했다. 사고가 일어나는 주기가 일정한 게, 일종의 징크스로 굳어지는 건 아닌지 걱정을 해야 할 정도였다. 이번에도 사고가 일어나지 말라는 법이 없었다. 그런데도 단 한 번의 사고도 없었다. 징크스 같은 건 있지도 않았다. 정말이지 운이 좋았다.

 

사실은 그동안의 '경험'이 사고를 방지하는 데 가장 주효했던 게 아닌가 싶다. 사고는 겪어보지 않으면 잘 모른다. 같은 사고를 반복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것처럼 강력한 사고 방지 대책도 없다는 생각이다. '안전한 여행'도 알고 보면 고된 훈련과 피할 수 없는 고통 끝에 얻어지는 것이다.

 

  
홍천 시내를 벗어난 후에 나타나는 며느리고개터널
ⓒ 성낙선
며느리고개터널

 

위험천만, 양평의 누더기처럼 기워 만든 도로

 

양평으로 들어서기 전에 도로 위로 군부대 차량들이 줄지어 지나가는 것이 보인다. 이때까지만 해도 연평도에 포탄이 떨어진 것을 알지 못했다. 군부대가 많은 지역이라 달리 이상하게 볼 것도 없었다. 그 무렵 연평도에서는 170여 발의 포탄이 떨어지고, 우리 국군은 진돗개 하나를 발령한 상태에서 북쪽을 향해 80여 발의 포탄을 응사하고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 왜 그때 사이렌 소리 같은 걸 듣지 못했는지 이상한 일이다. 하긴 그 무렵 사이렌이 울렸다고 해도 내 귀에 그 소리가 들어왔을지 의문이다. 양평은 도로가 험하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운 곳이다. 악조건이라는 악조건은 다 갖췄다. 누더기식으로 여기저기 땜질을 해놓은 도로에, 갓길마저 없는 구간이 심심찮게 나타난다.

 

위험하기 짝이 없는 도로다. 그 도로가 평탄도는 이렇다저렇다 거론하기도 힘들 지경이고, 도로변에 널려 있는 이물질로는 지뢰밭이 따로 없다. 그런 도로를 달리고 있었으니 다른 일에 신경을 쓸 겨를도 없었다.

 

자동차 운전자들의 운전 솜씨 역시 무척 거칠다. 사람이 잘못된 게 아니다. 도로가 문제다. 이런 도로 위를 자전거를 타고 달리려면 보통 침착해야 되는 게 아니다. 이런 도로일수록 주위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상황에 집중하되 불필요한 것들에 주의를 흐트러트리지 않아야 한다. 그래야 사고를 피할 수 있다.

 

이런 길이 덕소까지 이어지는데, 그 사이 좀처럼 마음을 놓지 못한다. 덕소로 들어서서야 겨우 지뢰밭 같은 위험지대에서 벗어난다. 비로소 안심이다. 여기서부터는 강변 자전거도로로 올라타는데, 이 자전거도로가 서울까지 이어진다.

 

  
덕소, 강변 자전거도로
ⓒ 성낙선
덕소

 

역시 서울, 한강으로 뛰어들려고 하는 여자

 

서울 한강 변의 자전거도로로 들어서면서 속도를 늦추기 시작한다. 서울로 들어선 이상 더는 속도나 거리에 연연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긴장을 풀어헤치기에는 아직 이르다. 세상에 서울처럼 복잡한 도시도 없기 때문이다. 또 어떤 사건이 발생할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정신 바짝 차리지 않으면 안 된다.

 

서울로 들어선 지 2시간도 되지 않아, 뚝섬 유원지 부근에서 영문을 알 수 없는 사건과 마주친다. 갑자기 자전거도로로 뛰어든 한 젊은 여자가 한쪽 다리를 들어 올려 강가를 둘러친 울타리를 넘어가려는 장면이 눈에 들어온다. 70일 만에 돌아온 서울에서 처음으로 목격하는 사건치곤 너무 당혹스럽다.

 

처음엔 영문을 몰라 멀뚱히 쳐다보고만 있었다. 곧이어 여자를 뒤따라온 남자가 여자의 팔을 잡아당기는 걸 보고 나서야 여자가 무슨 짓을 하려고 했던 건지 깨닫는다. 보통 심란한 장면이 아니다. 남자가 '이게 무슨 짓이냐'고 고함을 지르자, 여자가 울타리를 붙잡고 늘어지면서 하늘 높이 울부짖기 시작한다.

 

금세 한강이 여자가 목청껏 쏟아내는 울음소리로 가득 찬다. 가슴이 터지고 목젖이 갈라지는 울음소리다. 무슨 한이 저리도 깊을까? 무엇이 여자로 하여금 그처럼 격렬하게 울부짖게 만드는 것일까?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이 고통스러운  울음소리다. 그 울음소리를 들으면서 비로소 내가 서울이라는, 죽통 속 같은 도시로 되돌아왔음을 실감한다.

 

  
서울 한강 자전거도로
ⓒ 성낙선
자전거도로

 

내게 큰 힘이 되었던, 짧은 응원의 말 한 마디

 

그 무렵 다시 성수대교 위로 전투기 한 대가 서쪽 하늘로 흰 연기를 내뿜으며 사라지는 게 눈에 들어왔지만 그 광경 역시 별스럽지 않게 보아 넘긴다. 그러다 오후 6시 무렵, 마침내 집 문턱을 넘어서서야 비로소 연평도에 포탄이 떨어진 사실을 알게 된다. 집에 들어서서 들은 첫 소식치고는 너무 충격적이다. 지난 세기에 이미 멸종된 것으로 알았던 괴물이 21세기에도 여전히 살아 있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잃어버린 10년을 되찾겠다더니, 아예 60년 전 괴물을 되살려낸 꼴이 아닌가?

 

너무 끔찍하다. 그 소식을 접하면서,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순간이동이라도 하는 것처럼 재빨리 현실로 되돌아온다. 여행 짐을 내려놓고 나서 지퍼를 열기도 전이다. 덕분에 70일 만에 집에 돌아온 감흥 따윈, 곰곰이 곱씹을 필요도 없게 된다. 여행에서 돌아온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마저 한가해 보일 지경인데, 감상이라니 지나치게 배부른 소리 아닌가?

 

그 와중에 여기저기서 축하 메시지를 받아야 하는 일이 고통스럽다. 솔직히 조용히 넘어갔으면 하는 바람이 간절하다. 그렇다고 여행 중에 만났던 분들과 내가 여행을 떠난 걸 알고 있는 분들에게마저, 내가 여행을 무사히 마치고 돌아왔음을 알리지 않을 수도 없다. 여행을 무사히 끝마칠 수 있었던 게 모두 그들의 관심과 응원 덕분이다. 비록 세상이 무너진다 해도 고맙다는 말 한마디는 남겨야 한다.

 

중간에 여행을 그만두고 싶은 마음이 없지 않았다. 그럴 때마다, 그들의 격려와 응원이 큰 힘이 됐다. 힘이 들 때마다, '꼭 완주를 하라'던 그들의 격려와 응원을 수도 없이 되새겼다. 그들은 진심으로 내가 이 여행을 무사히 끝마치고 돌아오기를, 혹은 돌아가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 말들이 길 위에 주저앉고 싶은 나를 끊임없이 일으켜 세웠다. 말 한마디, 손짓 하나가 그렇게까지 큰 힘이 될 줄은 몰랐다. 아직도 '완주를 하라'고 소리치며 머리 위로 높이 손을 흔들던 사람들의 모습이 지워지지 않는다. 그 장면만 떠올리면 지금도 콧날이 시큰해진다. 그분들 때문에 중간에 여행을 포기하고 싶어도 포기할 수가 없었다. 내 평생 그처럼 열렬한 응원은 처음 받아 보았다. 그 모습들, 절대 지울 수 없는 기억으로 남을 것이다.

 

  
양평을 벗어나 양수리 가는 길의 아름다운 강변 도로.
ⓒ 성낙선
양수리

 

엄청난 감동, 평생 쓰고도 남을 에너지를 얻었다

 

여러모로 힘은 들었지만, 행복한 시간이었다. 몸에서 통증이 사라질 날이 없었는데, 그 고통을 이기고도 남을 만큼 즐거운 날들이었다. 아름다운 여행이었다. 사람도 아름답고 바다도 아름다웠다. 이번에 우리나라 바다가 아름답다는 말을 제대로 실감했다. 한반도를 둘러싼 바다치고, 아름답지 않은 곳이 하나도 없었다. 새로운 풍경이 나타날 때마다, 우리나라에 이런 곳이 있었다는 사실에 가슴이 벅차오르는 감동을 맛봤다. 그런 일이 매일같이 반복됐다.

 

우리나라 해안선을 70일 동안 파노라마를 보듯이 바라보고 돌아왔다. 그 광경이 아직도 머릿속에 그대로 남아 있다. 내 머릿속의 거대한 스크린에 한반도를 둘러싸고 있는 3면의 바다가 차례대로 상영이 되는 장면을 떠올려 보시라. 웅대한 장면의 연속이다. 매 순간 엄청난 장관이 연출되고 있다. 그런 장면을 머릿속에 떠올릴 수 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나는 아주 소중한 자산을 얻은 셈이다. 그 장면을 말이 아닌 그림으로 보여주지 못하는 게 안타깝다.

 

이번 여행에서 얻은 게 정말 많다. 새해가 되면 내 나이 이제 쉰이다. 무언가를 새로 시작하기에는 너무 늦었다는 생각을 하곤 했는데, 앞으로는 그런 생각을 두 번 다시 하지 않기로 했다. 이번 여행으로 새로운 에너지를 얻었다. 여행이 내 삶에 큰 활력을 불어넣은 게 틀림없다. 앞으로도 내 인생, 어떤 일이든지 반드시 '완주'를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고 살아갈 생각이다.

 

몸무게가 65kg에서 60kg으로 5kg이나 줄었다. 60kg이면, 내 나이 30대 때나 볼 수 있었던 날렵한 몸매다. 근육이 거의 그대로 남아 있는 걸로 봐서, 지방만 빠져나간 것으로 보인다. 내 키에 몸무게 67kg가량이 정상이라는데, 이제는 근육을 좀 더 키워서 정상 체격을 유지해 볼 생각이다. 여행을 떠나기 전에 입었던 바지가 헐렁헐렁하다. 내가 이번에 여행을 하면서 잃어버린 게 있다면 아마도 이 5kg이 유일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그동안 '우리나라 해안선 1만리 자전거여행'을 함께 해주신 분들에게 감사하다는 말씀을 남긴다. 댓글이나 쪽지로 격려와 응원의 메시지를 남겨주신 분들, 그리고 내가 여행을 하고 있는 곳까지 직접 찾아와 내 지친 마음을 달래주고 가신 분들에게서 큰 은혜를 입었다. 다시 한 번 더 강조하지만, 그분들이 아니었다면 이 여행이 이렇게 아름답게 끝을 맺지 못했을 것이다.

 

오늘 하루 달린 거리는 122km, 총누적거리는 4985km다. 꼬박 70일 동안, 하루 평균 70km를 달린 셈이다. 애초 계획했던 해안선 1만리(4000km) 여행을 1만2천리를 넘겨서 끝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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