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사상

염화실의 향기_05_관음사 회주 이두스님

醉月 2010. 3. 8. 08:36


1960년대 초 어느날. 머리를 빡빡 깎은 30대 초반의 사내가 광주 외곽의 거지굴에 나타났다. 그는 유도로 닦은 날랜 싸움 실력으로 신고식을 치른 뒤 걸인들과 한 패가 됐다. 두달 남짓 누더기 옷을 걸치고 노숙을 하며 빌어먹고 지냈다.

이두스님은 “마음의 수행은 여러 생에 걸쳐 익혀온 업습(業習)으로 익혀져 있는 것을 서툴게 하고, 서툰 것을 익숙하게 익히는 것”이라며 “화장이나 수술로 얼굴을 바꿀 것이 아니라 먼저 마음을 고치면 얼굴이 좋아지고, 운명이 좋아진다”고 말했다. 관음사(청주)/이상훈기자

갑자기 거지굴에서 사라진 사내는 엿장수가 되어 나타났다. 리어카를 끌고 엿가위를 두드리며 장터를 떠돌았다. 그러나 ‘엿장수 맘대로’ 엿을 툭툭 끊어주는 후한 인심 탓에 손해만 보고 말았다. 이번에는 엿 목판을 걷어치우고 넝마주이로 나섰다. 사내는 어느새 ‘똘마니’들을 거느리고 넝마주이 대장 노릇을 했다. 전라도땅 주먹, 거지, 넝마주이치고 그를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사내는 장성 갈재에서 6개월 동안의 밑바닥 생활을 접었다. 그곳에 땅 2000평을 사서 흙집을 지었다.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한 아이들에게 천자문과 주산, 부기를 가르쳤다. 학생은 점점 늘어났고 마침내 ‘능인교민원학당’이 세워졌다. 흙집을 지은 지 6년, 그는 다른 사람에게 학당을 맡기고 홀연히 그곳을 떠났다.

이두(二斗·78)스님이다. 효봉선사가 엿장수를 했던 것처럼, 스승인 금오스님이 걸인만행을 했던 것처럼 그도 구도를 위한 만행을 했던 것이다. 세속의 밑바닥 삶을 뼛속 깊이 체험한 그는 갑사, 송광사 등의 선방과 직지사, 용현사 등의 토굴을 오가며 정진했다. ‘장이두’라는 이름의 서정시인으로 세간에도 널리 이름을 알렸다. 지금은 24년째 충북 청주 동편의 도심사찰 우암산(牛岩山) 관음사를 지키고 있다.

관음사는 청주대학교 뒤편 숲이 우거진 우암산 허리에 있다. 60년 전 인봉(忍峰)노사가 고려 초기의 계향사(桂香寺) 폐사지에 초암을 지어 관음사를 열었다. 스님은 ‘계향사(桂香舍)’로 불리는 요사의 ‘석수실(石壽室)’에 주석하고 있다. 터가 높아 청주시내가 한눈에 들어오고 멀리 무심천이 가느다랗게 보이는 요사는 고색(古色)은 없어도 담담했다.

19일 오후, 그는 텔레비전 긴급 뉴스로 나오고 있는 손학규씨의 한나라당 탈당 소식을 보다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만면에 미소를 띠고 반갑게 부여잡는 손이 따뜻했다. 첫 인사는 자연스럽게 정치 이야기가 됐다.

“살 만한 세상은 남의 잘못을 덮어주는 심덕(心德)이 있는 세상이지요. 지금 우리 사회가 혼란스러운 것은 남의 잘못만을 탓하면서 자신의 목적과 주장을 관철하려는 이기심 때문입니다. 인간사회의 갈등은 탐(貪·욕심), 진(嗔·성냄), 치(痴·어리석음)의 삼독(三毒)에 귀결되고 그것은 또 탐심으로 집약되지요. 욕심 없는 마음일 때 모든 일을 올바로 판단할 수 있는 건데…”

이두스님은 10년새 두번씩이나 뇌졸중으로 쓰러졌다가 일어났다. 건강을 되찾기는 했지만 아직도 말이 어눌하고, 표현은 자꾸 생각과 어긋나는 것 같았다. 그 말의 요점을 상좌인 현진스님이 잘 정리해줬다.

계향사 객실은 서재로 꾸며져 있다. 한쪽 벽은 시집 등 문학서, 다른 한쪽은 불교 경전들이 가득 꽂혀있다. 스님이 세권의 책을 꺼내왔다. 최근 한꺼번에 펴낸 시집 ‘천등산 달밤에’, 시조집 ‘별처럼 흐르는 가을하늘’, 법어집 ‘불타가야(佛陀伽耶)로 가는 길’이다. 병중에 가다듬은 글들이다. 요즘도 시선집을 내기 위해 그동안 썼던 시들을 고르고 있다.

스님은 시인답게 꽃을 좋아하고, 비오는 날을 좋아하고, 산을 좋아한다고 했다. 그의 시에는 산을 노래한 것들이 유독 많다. 스님은 관음사 곳곳에 화초를 많이 심었다. 그에게 봄이 또 왔다. 스님은 요즘 계향사 주변을 서성대며 봄꽃 터지기를 기다리고 있다.

그는 학도병으로 6·25 전쟁에 참전해 포로로 붙잡혔다가 간신히 탈출했다. 지칠 대로 지친 심신을 이끌고 계룡산 갑사를 찾아갔다. 사형인 탄성스님의 소개로 만난 금오스님은 “쌀 한섬을 능히 지고 밤을 샐 수 있겠느냐”고 물은 뒤 그를 제자로 받아들였다. 열아홉살 때였다.

금오스님은 호랑이라는 별명답게 매사에 철저하고 수행에 엄격했다. 제자들에게는 항상 검소한 생활을 강조했다. 그러나 자상한 모습도 있었다. 이두스님이 하루는 큰스님들이나 찾아와야 꺼내놓는 참기름을 듬뿍 넣고 밥을 비벼먹다가 들켰다. 불호령이 떨어질 줄 알았는데 “그래, 맛있더냐?” 한마디 던지고는 끝이었다.

직지사 천불선원에서 10일 동안 용맹정진할 때 일이다. 앉은 채로 졸다가 쓰러졌다. 금오스님이 법당 뒤로 불렀다. “밥값도 못하는 녀석”이라며 몽둥이질을 해댔다. “악이 바치더라구.” 그는 꼿꼿이 앉아서 10일을 버텨냈다.

그의 방에는 금오스님의 사진이 모셔져 있다. 사진 아래 작은 불상과 향로, 촛대가 있다. 스님은 아침 저녁 예불 후 은사스님에게 예를 올린다. 그는 길이 혼미할 때마다 ‘쌀 한 섬’의 무게를 생각한다.

“금오스님이 등에 얹어준 ‘쌀 한 섬’은 번뇌와 망상의 무게지요. 번뇌망상의 소멸만이 업장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길이라고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그의 수행은 ‘시심(詩心)과 불심(佛心)’으로 다듬어졌다. 70, 80년대 불교계와 문단에서 이두스님의 활동은 두드러졌다. 사회활동도 활발했다. 갑사와 법주사의 주지를 맡았을 때는 활달한 성격과 친화력으로 절의 문턱을 낮췄다고 한다. 한창 시를 쓸 때는 서울 조계사 근처에서 공초 오상순 선생 등 문인들과 어울렸다. ‘현대문학’ ‘시문학’ 같은 문학지에서도 그의 이름을 자주 볼 수 있었다. 청주경실련 대표, 금오문도회 문장(門長) 등을 맡기도 했다. ‘직지심체요절’을 한글로 번역한 것도 그가 처음이다. 스님은 그동안 ‘겨울빗소리’ ‘목련송’ 등 시집과 ‘푸른산방’ ‘산 속에서 산을 보는 법’ ‘운수방담’ ‘명암이 없는 선하 앞에서’ 등 산문집을 합쳐 20여권의 책을 냈다.

“자연의 이치로 부처님의 뜻을 드러내보이려고 글을 씁니다. 현대시로 쓰여진 게송이라고 할까. 귀종선사의 무정설법(無情說法)을 깨우친 소동파가 ‘시냇물 소리가 곧 설법이거늘(溪聲便時廣長舌), 산빛이 어찌 청정한 법신이 아니랴(山色豈非淸淨身)’라고 읊은 것과 다름없어요. 그러나 은사스님이 계시면 ‘모호한 말로 꾸며내는 필선(筆禪)은 선이 아니다’라고 대갈일성이 떨어질 판입니다.”

이두스님은 제자와 신도들에게 인과를 철저하게 믿어야 한다고 늘 강조한다. 그는 법문 때마다 “불교는 유일신을 믿는 다른 종교와 달리 삼세인과(三世因果)를 믿고 자기자성(自己自性)의 깨침을 목적으로 하는 실존의 종교”라고 설명한다.

“부처님은 ‘자귀의 법귀의(自歸依 法歸依)’를 말씀하셨어요. 스스로에게 귀의하라, 법에 귀의하라는 말이지요. 깨달으면 내가 곧 부처라는 가르침은 절대자 혹은 타인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결정권자이자 인생의 주체라는 뜻입니다. 무엇보다도 마음을 넓고 너그럽게 써야 합니다. 마음을 잘 쓰는 용심(用心)의 생활이 세상과 사람을 바꿉니다.”

그는 길어진 인터뷰로 몹시 지쳐 있었다.

“그동안 무엇을 이루었고, 갈 때는 무엇을 남기고 가겠습니까.”

스님은 한순간도 머뭇거리지 않고 대답했다.

“없어!”

노승이 살아온 한 생의 잔영처럼, 어느새 일락서산(日落西山)의 붉은 노을이 비끼고 있었다.


▲ 이두스님

1929년 지금은 북한땅이 된 강원도 김화에서 태어났다. 1951년 금오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법명은 정월(精月), 법호는 월암(月庵). 금오스님에게 허락을 받아 ‘이두’라는 필명을 법명 대신 쓰고 있다. 71년 갑사 주지, 78년 법주사 주지를 지냈다. 83년부터 청주 관음사에 주석하며 법주사 수말사로 가꾸었다. 현재 관음사 회주이자 조계종 원로위원이다.


제자 현진스님이 말하는 이두스님
청주 관음사에는 ‘문향(文香)’이 가득하다. 시인인 이두스님에 이어 상좌인 현진 주지스님이 수필가로 활동중이다. 현진스님은 ‘산문, 치인리 십번지’ ‘삭발하는 날’을 펴내 담백하고 아름다운 문장으로 화제가 됐다.

“큰스님은 정말 시처럼 사시는 분입니다. 시심으로 수행을 하시니까 걸림이 없어요. 병환 중에도 다른 사람을 귀찮게 하지 않으려고 가능하면 혼자서 일을 처리합니다. 욕심이나 사심이 전혀 없어요. 법주사 주지를 맡고 있을 때 전두환정권의 10·27법난으로 안기부에 끌려갔는데 개인 통장에 예금이 전혀 없는 것을 보고 놀랐다고 합니다.”

현진스님은 “스님께서는 인과법을 철저하게 믿어 인과를 무서워하고 자기 생활을 철저하게 점검하면 중노릇은 저절로 잘하게 되는 법이라고 늘 말씀하신다”면서 “그것 말고는 절 살림에 대해 말을 하거나 화를 내는 일이 전혀 없다”고 말했다.

사제가 문화에 관심이 많다보니 관음사는 해마다 다양한 문화행사와 음악회를 여는 등 자연스레 ‘문화도량’으로 가꾸어지고 있다. 사월 초파일에는 해마다 트로트 산사음악회를 연다. 큰스님도 이미자의 노래 ‘동백아가씨’를 좋아한다. 대법당을 개방해 불교문화대학을 열고 직지심체요절 강의, 신심명 강의, 불교미술, 한지공예, 전통무용 등의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현진스님은 “산에는 고목이 보물이듯이 산사에는 노스님이 보물”이라며 “큰스님이 건강을 더욱 많이 회복해 글을 쓰고 법문하시는 모습을 자주 뵈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