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장환_The Last Train
저무는 역두에서 너를 보냇다.
비애야!.
개찰구에는
못쓰는 차표와 함께 찍힌 청춘의 조각이
흐터져잇고
병든 역사가 화물차에 실리여간다.
대합실에 남은 사람은
아즉도
누귈 기둘러
나는 이곳에서 카인을 맛나면
목노하 울리라.
거북이여! 느릿느릿 추억을 싣고 가거라
슬픔으로 통하는 모든 노선이
너의 등에는 지도처름 펼처잇다.
오늘의 젊은 세대들은 오장환이라는 시인도, 그리고 그가 쓴 [The Last Train](더 라스트 트레인)이라는 시도 잘 알지 못할 것이다.
오랫동안 금제의 월북문인 목록에 올라있었던 시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60대 이상의 문학 애호가들이라면 절망적인 상황에 부딪칠 때
마다 [저무는 역두에서 너를 보냈다/비애야!]라는 그 시구를 한번쯤 속으로 외쳐보지 않았던 사람은 드물 것이다.
날이 저문다던가, 역두라던가, 그리고 너라고 의인화해서 부른 비애라던가, 누가 읽어도 어두운 종말의식을 느끼게 한다. 더구나 [비애
야]라는 짧은 한마디 말이 시행 전체를 한숨처럼 메우고 있는 운율감도 처절하다.
실상 이 시에는 [비애]란 말을 비롯하여 [청춘] [추억] [슬픔] [목놓아 울리라]와 같이 감상적이고 통속적인 낱말들이 많이 등장한다.
그리고 인생을 역이나 기차에, 그것도 막차에 비기는 우유는 아무리 호의적으로 평한다 해도 참신하다고는 말할 수 없는 것들이다.
그런데도 이 시가 주는 독창성, 그리고 그 매력은 그러한 감상의 흐름을 갑자기 절단하고 돌연한 이미지로 전환하는 그 의외성에 있다.
기호론적으로 말하자면 코드전환이다.
그 첫번째의 의외성은 개찰구에서 대합실로 기차와 역의 코드전환에서 발생한다. 개찰구란 말은 차표를 내고 기차를 타기 위해 통과하는 출구로서 [타다] [출발하다] [떠나다] [보내다] [헤어지다]와 같은 일련의 행위와 관련되는 코드를 생성한다.
그렇기 때문에 개찰구는 [너를 보냈다 비애야!]와 같은 시적 코드로서 [못 쓰는 차표와 함께 찢긴 청춘의 조각이 흐터져 있고/병든 역사가 화물차에 실리여 간다]로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이때 독자들은 누구나 화자를 배웅하는 사람, 즉 누군가를 떠나보내기 위해서 역에 있는 사람으로서 인식한다.
[개찰구에는…]으로 시작되는 2연과 [대합실에…]로 시작되는 3연은 똑같은 병렬구조로 되어 있으나, [개찰구]와 [대합실]은 전연 색다른 코드를 나타낸다. 왜냐하면 개찰구와 달리 대합실은 문자 그대로 만남과 기다림의 코드로서 배웅이 아니라 마중의 장소이다.
그래서 대합실의 코드는 역과 기차를 출발에서 도착으로, 헤어짐에서 맞이함으로 바꿔버린다.
그래서 누군가를 떠나보내는 자로서의 화자 입장이 3연에 이르면 갑자기 누군가를 기다리거나 마중나온 자로서 바뀌게 된다.
[대합실에 남은 사람은/아즉도/누귈 기둘러/나는 이곳에서 카인을 만나면/목노하 울리라.] 이렇게 대합실의 코드는 출발의 장소인 역을,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장소로 전환하고, 화자 역시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으로 변신하게 된다.
대합실에 남아있는 사람들은 [아직도]라는 말이 암시하고 있듯이 막차가 떠난뒤에도 기대를 버리지않고 기차를 타고 찾아올 사람을 기다린다. 개찰구의 사람들과 대합실의 사람들은 전연 다른 코드에서 존재하고 있다. 같은 역, 같은 차인데도 그 코드에 따라서 의미는 아주 달라진다.
두번째의 코드전환은 [카인을 만나면]이라는 구절에서 발견된다.
문맥적 보완이 없어 그 뜻이 아주 애매하게 들리지만 그것이 비애니 청춘이니 하는 코드와 구별된다는 것을 금세 알 수 있다. 비애와 청춘은 개인적 차원의 코드에 속해 있는데 비해서 카인은 창세기적 코드로서 인류전체의 역사나 그 종말론과 관련된다. 그러므로 갑자기 이 시에서 서정적 요소는 서사적인 요소를 띠게 되고, 감상적인 정서는 원죄와 같은 역사적 의식으로 변한다. 즉 정서에서 의식으로의 전환인 셈이다.
그래서 개찰구 코드에서 숨겨져 있던 [병든 역사]란 의미가 전면으로 나서게 되고, 정서를 의인화했던 그 대상은 상징적 대상으로 변한다.
끝없이 이마에 죄인의 표지를 달고 지구의 끝에서 끝으로 방황하는, 그래서 언제나 막차뒤에 오는 손님으로서의 카인-- 라스트 트레인의 종말 의식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누구나 카인인 것이다.
[이곳에서 카인을 만나면]이라는 시구에서 강조된 이곳은 막차가 떠나고 난 다음의 대합실이며 [고도를 기다리며]와도 흡사한 절망의, 그러나 기다림의 [희망의 장소]라 할 수 있다.
마지막 세번째의 코드전환은 종련의 거북이다. 기차가 거북이로 변신하는, 너무나도 돌연하고 엉뚱한이 전환은 [라스트 트레인]의 전 시의 구조를 바꿔버리는 작용을 한다. 기차는 문명의 코드에 속해있는 것이고, [기차는 빨러…]라는 아이들의 노래처럼 스피드를 나타내는 코드와 관련된다. 그러나 거북은 십장생의 하나로 전통적인 코드에 속해있고 이솝우화의 코드대로 저속을 나타내는 가장 느린 동물이다. 시의 첫연은 [비애야!]라고 불렀는데, 이 마지막에서는 [거북이여!]로 바뀌어진다.
기차를, 막차의 이미지를 쫓아오던 사람들은 예상치 않던 거북이의 패러다임 변환으로 충격을 받는다.
[거북이여! 느릿느릿 추억을 싣고 가거라/슬픔으로 통하는 모든 로선이/너의 등에는 지도처름 펼쳐있다.]놀라운 전환이다.
막차는 거북으로 변신되어 있다. 기차길의 선로가 거북의 잔등이 무늬로 변하고 다시 그것은 지도로 확산된다. [거북무늬 선로 지도]의 변환과정속에서 이미 화자는 전송객도 출영객도 아닌 거북의 승객이다. 어디로 가나 그 종착역은 슬픔이다. 어두운 종말의식은 변하지 않았으나 종말을 유예하는 지속(느린 속도)과 장수의 상징마저 지니고 있는 지속의 시간-- 거북이에 의해서 어쩌면 문명을 횡단하는 전통문화이기도 한 그 거북이에 의해서 오장환의 종말의식은 아주 작은 희망의 언어로 바뀌게 되는 것이다.
좀 더 상상력이 풍부한 독자라면 거북의 잔등이에 실은 이끼낀 비석의 금석문자, 이제는 판독조차 할 수 없는 그 이상한 상형문자들을 떠올릴지도 모른다. 기차가 비석을 등에 실은 거북이의 대석으로 변하는 이 전율적인 시인의 상상력속에서는 카인의 후예들이 겪고 있는 슬픔의 노선(역사)까지도 견고한 거북무늬로 응축되고 마는 것이다.
오장환은 이 의외성에 의해서, 그리고 패러다임 전환에 의해서 통속적인 역이나 기차의 상징적 가치를 높였다. 그리고 그 의미를 개인의 차원에서 민족의 차원으로, 민족의 차원에서 전인류의 차원으로 시적 의미를 심화하고 확산시켰다. [라스트 트레인]은 식민지의 지식인만이 한숨으로 외우는 시가 아니다. 어느 시대 어느 곳이건 카인의 자손으로서 상징되는 모든 사람들의 시인 것이다.
그가 막차라는 한국말을 사용하지 않고 영어로 시의 표제로 삼아 라스트 트레인이라고 한 것도 그런 뜻 때문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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