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6대 민간 전설
중국은 자신들이 세계에서 무형문화재를 가장 많이 가진 나라라고 자부한다. 2006년 중국 정부는 전국의 무형문화재를 보호하고 합리적으로 이용하며 계승 발전시킨다는 방침에 따라 1차로 518개의 무형문화재를 지정하였다. 그 서두에 민간문학과 관련된 31개가 나열되어 있는데 그중에 특이하게도 전설이 6개가 지정되어 있다. 앞선 글에서 다룬 양축 전설을 비롯하여 백사전(白蛇傳)·맹강녀(孟姜女)·동영(董永)·서시(西施)·제공(濟公) 전설이 바로 그것이다. 그만큼 중국인들에게 널리 알려진 문화콘텐츠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증거라 하겠다. 오늘은 지금까지 어렴풋하게 알고 있었던 중국 6대 민간 전설에 대해 조금 더 상세히 알아보고자 한다.
서극 감독 영화로 만든 ‘백사전’
백사전 전설은 우리에게 왕조현과 장만옥이 열연한 서극(西克) 감독의 영화 ‘청사(靑蛇)’로 소개된 바 있다. 명나라 말기 풍몽룡의 의화본소설집 ‘경세통언(警世通言)’ 제28권에 ‘백낭자영진뇌봉탑(白娘子永鎭雷峰塔)’이란 제목으로 실려 있다. 1000년을 수련한 백사가 청어(靑魚)와 함께 각각 백소정(白素貞)과 소청(小靑)이란 이름의 여자로 둔갑하여 항주(杭州) 서호(西湖)에서 선비 허선(許宣)을 만나 사랑에 빠진다. 소심한 허선은 일련의 사건을 통해 두 여자의 정체를 의심하고 두려워하던 중 승려 법해(法海)의 도움을 받는다. 결국 백사와 청사는 바리때 속에 잡혀 뇌봉탑(雷峰塔) 아래 갇힌다. 이 일로 허선은 속세와 인연을 끊고 출가하여 수년 동안 수행하다 죽는다. 후에 승려들이 그를 화장하여 골탑(骨塔)을 세웠다는 이야기이다.
백사전 전설의 인기는 현대에 들어와서도 계속 이어졌다. ‘패왕별희’의 작가로 유명한 홍콩의 작가 이벽화(李碧華)가 ‘청사(靑蛇)’란 작품을 내놓았고, 앞서 언급한 대로 서극은 이를 영화로 제작하였다. 이에 앞서 일본에서는 1958년에 ‘백사전’이란 제목으로 애니메이션을 제작하였는데 이는 일본영화 사상 최초로 컬러로 제작된 장편 애니메이션으로 일본영화사에서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남편 위해 목숨 바친 열녀 ‘맹강녀’
맹강녀 전설은 남편을 위해 목숨을 바친 열녀 이야기이다. 진(秦)나라 때 맹(孟)씨네가 오이를 심었는데 오이가 벽을 타고 이웃집 강(姜)씨네에서 열매를 맺었다. 두 집은 오이를 나누기로 하고 반을 가르니 안에서 아리따운 소녀가 나왔다고 한다. 그래서 그녀의 이름을 맹강녀(孟姜女)라고 하였다. 맹강녀는 자라면서 빼어난 외모와 영리함, 그리고 여러 재주를 지녀 소문이 자자하였다. 당시 진시황은 장성을 짓기 위해 장정들을 징집하였다. 만희량(萬喜良)이란 선비가 징집을 나온 관리들을 피해 담을 넘어 피신하였다. 그 집은 바로 맹씨네 후원이었고 때마침 그곳에 있던 맹강녀와 만나게 된다. 맹씨는 만희량을 숨겨 주었고 그의 인품을 보고 맹강녀와 짝을 이루어 준다. 그러나 3일이 못되어 관리들이 들이닥쳐 만희량을 잡아간다. 걱정이 된 맹강녀는 겨울옷을 준비하여 신랑을 보기 위해 길을 나선다. 갖은 고생 끝에 장성에 다다른 맹강녀는 신랑이 얼마 전 굶주리다가 죽어 장성 안에 묻혔다는 소식을 듣는다. 맹강녀는 신랑이 묻혔다는 장성 근처에서 통곡을 하였고 하늘도 감동하였는지 장성이 무너지고 여러 시신 가운데에서 신랑을 찾을 수 있었다.
마침 장성을 시찰하던 진시황이 이를 보고받고 크게 화를 내며 맹강녀를 처벌하려 하였지만 그녀의 미모를 본 진시황은 흑심을 품는다. 맹강녀는 진시황에게 세 가지 조건을 내건다. 즉 신랑을 잘 장사지낼 것, 영구 행렬 뒤에 문무백관을 나열할 것, 바다를 보여줄 것 등이었다. 두 조건을 성사시키고 바다에 이른 맹강녀는 투신하여 생을 마감한다.
맹강녀 이야기는 춘추시대 제(齊)나라에서 기원하였다. ‘동주 열국지’를 읽어보면 제나라는 강태공(姜太公)의 봉국(封國)이었기 때문에 제나라 사람들은 모두 ‘~강(姜)’이라고 기록하였다. 따라서 ‘맹강녀’란 맹씨네 첫째 딸이란 뜻이다. 맹강녀 전설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좌전’ 양공(襄公) 23년 부분에 나온다. 기량(杞梁)이 제(齊) 장공(庄公)을 위해 전사하였음에도 대우를 받지 못하자 그 아내가 남편을 위해 장공의 직접적인 사과를 받아내고 안치되었다는 이야기이다. 여기에 후에 ‘곡소리’와 ‘장성 붕괴’ ‘바다로의 투신’ 등의 줄거리가 더해져 오늘날의 맹강녀 전설이 전해지게 되었다. 당대 승려시인 관휴(貫休)는 ‘기량처(杞梁妻)’라는 시에서 사연의 장소를 기성(杞城·지금의 산동 치박淄博시)에서 진(秦) 장성으로 바꾸어 놓았다. 원대에는 이 전설이 여러 희곡으로 작품화되었고, 장성 증축이 이루어진 명대에는 사람들이 노동의 불만을 맹강녀 전설에 반영하여 여러 세부 줄거리를 첨가하였다. 지금도 중화권에서는 TV와 영화 등 다양한 매체를 통해 맹강녀 전설이 소개되고 있다.
현재 산동(山東)성 용천(湧泉)에는 바다에 투신한 맹강녀를 기리는 기념관이 세워져 망부석(望夫石) 등의 기념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또한 진황도(秦皇島)에 가면 맹강녀 묘라고 일컫는 정녀사(貞女祠)가 있다.
소문난 효자 이야기 ‘동영과 칠선녀’
동영과 칠선녀 전설은 소문난 효자를 위해 하늘이 선녀를 내려 보내 짝을 이루어준다는 이야기이다. 동영(董永)에 관한 최초의 이야기는 4세기에 쓰여진 ‘수신기(搜神記)’에 ‘한동영(漢董永)’이란 제목으로 실려 있다. 천승(千乘) 사람 동영이 어려서 어머니를 여의고 아버지와 함께 농사를 지었다. 동영은 작은 수레에 아버지를 태워 모시고 다녔다.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장례 치를 돈이 없던 동영은 자기 몸을 노비로 판다. 주인은 그의 인품을 믿고 돈을 주었고, 동영은 3년 상을 치른 뒤 노비가 되기 위해 주인집으로 향한다. 도중에 여자를 만나 부부가 되었고 함께 주인을 찾아가자 주인은 베 짜는 기술이 있는 여자에게 100필의 비단으로 갚으라 말하였다. 여자는 10일 만에 모든 일을 마친 뒤 집을 나서면서 자신이 하늘의 직녀인데 천제(天帝)가 동영의 효성에 감복하여 보내졌음을 밝히고 하늘로 올라가 사라졌다고 한다.
동영은 ‘한서(漢書)’에 기록되어 있는 실존 인물이다. 그의 조상이 다른 사람의 음모를 고발한 공로로 고창후(高昌侯)에 봉해졌고 중간에 잠시 지위를 잃었다가 동영이 다시 고창후에 봉해졌다. 이런 역사 인물이 신선 관념이 성행하던 동한(東漢·25∼220) 시기의 영향을 받아 이야기가 변형되었던 것이다. 동진(東晋) 시대 ‘수신기’의 작가 간보(干寶) 역시 역사적 연원을 알지 못한 채 동영의 이야기를 기록하였다. 그래서 신녀(神女) 신분의 칠선녀(七仙女)를 ‘하늘의 직녀’라고 칭하였다. 이는 동진 시기에 이미 견우직녀 전설이 널리 전파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간보의 기록 때문에 동영의 전설은 한동안 견우직녀 전설에 묻혀 있었다. 돈황에서 ‘동영변문(變文·운문과 산문을 교대로 사용한 민간문학)’이 발견되면서 동영 전설은 견우직녀 전설과 구별되기 시작했고 신녀의 존재를 하늘의 별자리와 연결 짓게 되었다. 그리고 명대에 편찬된 송원화본 소설집 ‘청평산당화본(淸平山堂話本)’에 실린 ‘동영우선전(董永遇仙傳)’에서 동영의 아들이 어머니인 선녀를 찾는 과정에 노란옷을 입은 칠선녀의 존재가 확정되었다.
1950년에는 안휘성 안경(安慶)시에서 만든 희곡(戱曲)영화 ‘천선배(天仙配)’로 다시금 크게 각광을 받았으며 2002년 10월 26일에는 중국 우정국에서 민간전설 시리즈 우표를 발행하였는데 그중에 ‘동영과 칠선녀’ 내용도 포함되어 있었다. 무한(武漢)에서 60㎞ 정도 떨어진 효감(孝感)시는 이 전설의 발원지다. 그래서 1984년 효감시는 동영과 칠선녀 전설을 기리기 위해 동영공원을 조성하고 전설과 관련된 여러 건물을 짓고 동영의 효행을 기리고 있다.
중국 4대 미녀, 서시(西施)의 전설
서시(西施)의 본명은 시이광(施夷光)으로 왕소군(王昭君), 초선(貂蟬), 양귀비와 함께 고대 중국의 4대 미녀로 손꼽히는 인물이다. 춘추전국시대에 오(吳)의 속국이 된 월(越)왕 구천(句踐)은 와신상담(臥薪嘗膽)하며 복수의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오왕 부차(夫差)가 미색을 즐긴다는 것을 안 구천은 범려(范蠡)와 상의하여 서시와 정단(鄭旦)을 찾아냈다. 그녀들은 임무에 앞서 3년 동안 춤과 동작, 걸음걸이, 예의 등을 익힌 뒤 화려한 궁중의상을 차려 입고 오왕에게 보내진다. 결국 오왕 부차는 미인계에 말려들어 패망의 길을 걷는다. 그 후 서시는 그녀의 미모를 시기한 구천의 부인에 의해 돌에 묶여 바다에 버려져 죽었다고도 하고, 범려와 함께 강호에 숨었다고도 한다. 이처럼 달과 꽃, 물고기가 부끄러워 몸을 숨기고 날아가던 기러기도 떨어뜨리는 미모를 가졌던 서시인지라 그녀에 관한 각종 전설이 전해지고 관련된 각종 문학작품이 파생되었다.
살아있는 부처 ‘제공(濟公)’
제공(濟公·1148~1209)은 인간 활불(活佛)로 불리며 중국에서 인구에 회자되는 전설적 인물이다. 제공은 절강 태주(台州) 사람으로서 남송의 선종 고승이며 법명은 도제(道濟)이다. 그의 조상은 송 태종(太宗·재위 976~997)의 부마이자 절도사였고 집안 대대로 불교를 믿었다. 마흔이 넘도록 자식이 없었던 그의 부모는 간절한 기도로 그를 낳았다. 국청사(國淸寺) 주지가 이름을 수연(修緣)이라 지어줬고 이때부터 불교와 인연을 맺게 되었다. 부모가 돌아가신 뒤에 국청사에 들어가 주지였던 혜원(慧遠)의 가르침을 받고 ‘도제’란 법명을 받게 되었다. 이후 여러 사찰을 거쳐 마지막에는 항주 영은사(靈隱寺)에 기거하였다.
제공에 관한 전설은 남송시대부터 널리 유행하였다. 신동 이수원(李修元)과 고승 도제에 대한 신비한 이야기가 구전되다가 설서인(說書人·이야기꾼)들의 손을 거치면서 더욱 풍부해졌다. 제공은 성격이 호탕하여 술과 도박을 즐겼고 염불과 좌정 수련은 좋아하지 않았다. 고기를 좋아하고 기방(妓房)을 드나들며 사방을 떠돌아다녔다. 이 과정에서 어려운 사람들을 돕고 악인을 혼내주었다. 자신이 가진 의술을 이용하여 많은 이들을 치료해 주었고, 한 사찰이 불타 없어지자 자진하여 모금활동에 나서 원형대로 복구하기도 했다. 시문에도 능하여 가는 곳마다 자신의 감흥을 글로 남겨 ‘확봉어록(鑊峰語錄)’ 10권이 전해진다. 명말 청초에는 제공의 신기한 사적을 묘사한 ‘제공전(濟公傳)’이 나왔다.
제공에 관한 이야기는 20세기에 들어서도 계속 이어져 설서인들에 의해 240회에 달하는 ‘제공전전(全傳)’이 유행하였다. 특히 1993년에 주성치, 장만옥, 매염방 등이 주연한 정소동(程小東)의 영화 ‘제공(The Mad Monk)’은 제공의 이야기를 알리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제공 이야기는 중화권에서 TV 시리즈로도 재생산되어 1985년에는 대륙에서 ‘제공’이란 제목으로 8회 방영되었고, 1988년에는 ‘제공유기(游記)’ 20회, 1996년에는 싱가포르에서 ‘활불 제공’이란 제목으로 30회, 1997년에는 홍콩에서 ‘제공’이란 제목으로 20회가 방영되었다. 또한 대만에서는 2007년 6월 6일부터 2008년 7월 25일까지 장장 297회에 걸쳐 ‘제공’을 방영한 적이 있다.
이처럼 중국은 전설을 전설로 남겨두지 않고 각 전설의 역사적 연원을 탐구함과 아울러, 관련 이야기를 각 지방의 문화 관광사업과 연계시켜 경제 개발을 유도하고 영상콘텐츠로 재창조함으로써 문화콘텐츠의 개발과 활용에 적극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한국의 관련 종사자들도 이처럼 전설을 현실에 되살리는 작업에 보다 관심을 가지고 노력해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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