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해전사의 감탄,
210전209승1무의 여자 제독 연수영~아!고구려여!!
세계적인 해전사 연구가들이 연구하며 감탄하는 연수영의 출중한 리더십, 탁월했던 전략, 전무후무한 위업,그러나 한국에선 잊혀진 영웅 총 32회의 대규모 전투에서 32전 31승 1무를 기록,총 178회의 소규모전투에서 178승이라는 놀라운 전승신화를 기록하며 오합지졸을 일컬어 당나라군대로 부르는 단초를 마련한 여제독..
중국 현지에선 신장(신령스러운 장수)로서 숭배받고 사당도 있으나,지금은 중국해군기지가 들어서 기밀지역이 되었으며,중국이 이 유적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을 추진
2003년 6월. 요동반도 남해안에 발해인들이 세워놨던 그녀의 전적비와 비문(그러나 비석의 명문(銘文) 대부분이 중국인들에 의해 변조(變造) 또는 훼손되었다고 한다)들이 발굴됐고, 중국이 이 유적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을 추진하면서 해설문에 연개소문과 연수영 남매 이야기와 고구려와 당나라 해전 등을 구체적으로 기록하면서 그녀의 정체가 드러났다.(중국 사회과학원에서 들은 얘기-중국에서 문물이 발견되면 문물이 발굴되었던 장소를 다른곳으로 발표하고 문물을 그곳으로 이전하는 일이 많다고 한다-소수민족(특히,만몽족과 조선족)때문이 아닐런지?
일례로 현재의 만주가 원래 만주가 아니며,진짜 만주는 천산부근의 감숙성북부,악이다사,영하(만주족 자치구있음)-만주칠기의 시원지로서,찰합이의 지역이었던 악이다사를 찰합이가 망한후 만주라고 부르게 되었다(중국고금지명 대사전)
청 태조의 발흥지는 음산동남으로(원래의 음산=만주족이 탱그리산으로 불러서 천산으로 바꿨다는 백산)우랄특의 종족을 정복한후 부족을 통일하였다==>내몽고 오라특기(우랄특)(바로 중국고금지명대사전에서 말하는 만주의 북계이다. 러시아와 중앙아역사-현재의 중국동북지방은 청이 18세기말에 정복했다)
우리 사학계는 아직도 연수영의 존재를 우리나라와 중국의 그 어떤 사서에도 나오지 않는다는 이유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또한 연수영 관련 유적은 현재 중국의 해군기지가 됐고, 비문 등도 중국정부에서 기밀로 엄중하게 관리하고 있으므로 우리는 접근할 수 없는 실정이다.
한편, 중국의 야사인 ‘서곽잡록’과 ‘비망열기’라는 책에도 연수영의 전설이 실려 있다. 연수영의 이름이 연소정 또는 개수영으로 나오는 자료도 있다. (대륙이 한국의 고토인것을~~~)
이순신에 버금가는 신장 고구려의 여자장수 연수영
연수영(淵秀英)은 고구려 말기의 집권자인 대막리지 연개소문(淵蓋蘇文)의 이복 누이동생이다.
연개소문이 군사를 일으켜 영류왕을 죽이고 보장왕을 세울 때 낭자군(娘子軍)을 이끌고 조력했던 여인이다.
그는 혁명 뒤 당의 침공에 대비, 수군을 양성하면서 발해만과 요동 바다를 방어하겠다며 자청해서 요동반도 남해안 수군기지 성주로 나간다.
645년(보장왕 4년) 당나라와 전쟁이 터지자 함대를 이끌고 출전해 압도적으로 우세한 당나라 수군을 상대로 연전연승의 개가를 올린다. 하지만 그는 여자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비열하게 독살당하며 최후를 맞는다.
매번 승전과 함께 점점 연수영수하로 많아지는 군사로 인해, 그리고 같은 형제인 '연정토'의 시기로 인해, 실권을 장악하던 '연개소문'에게 죽음을 당하게 된다. 이유는 언젠가 힘이 세지면 많은 군사들을 동원해 반역을 하게 될거라는 죄목이다.
결국 독이 든 음식으로 죽음을 당하지만 끝까지 여장군으로서의 당차고 강한 모습과, 나라를 사랑하는 모습을 버리지 않는다.
연수영이 처음 성주로 부임해 수군을 양성한 요동반도 남해안 석성 유적
연개소문과 연수영 남매를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돈황석굴의 벽화.(고구려 평양성이 장안성이라는 북사,원사,수사등의 기록을 보건대,당시의 돈황은 고구려 영토였을듯~)
고고학적 발굴 성과에 따르면 가야시대에는 여성으로만 구성된 여군부대가 있었던 것으로 확인됐다. 가야시대 고분에서 투구와 갑옷을 입고 무장한 상태의 여성 시신이 발굴됨에 따라 이를 근거로 여성 군사지휘관의 존재를 추정하게 된 것이다.
1. 연수영장군의 인격.
그녀는 자신에게 가장 엄중하였지만, 부하와 적들까지 사랑하였던 진정한 인격자였습니다.
연수영,
그녀는 언제나 전쟁에 앞서 항상 군사들 앞에 부르짖기를 "만일 죽어야 한다면, 내가 가장 먼저 죽을 것이요. 다쳐야 한다면 내가 먼저 다칠 것이다. 내가 죽기전엔 그 누구도 죽거나 다칠 수 없다."와 같이 항상 스스로를 희생하였고, 몸소 스스로가 앞장서서 전장에 나섰습니다.
그녀는 총 32회의 대규모 전투에서 32전 31승 1무를 기록했고, 총 178회의 소규모전투에서는 총 178전 178승이라는 놀라운 전승신화와 신화를 일군 최고의 명장이었습니다. 이것은 오합지졸에 미련하여, 입만살아있는 군대를 일컬어 "당나라군대"라고 하는 대명사의
가장 큰 단초를 제공하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녀는 단 한번도 적에게 잔인하였던 적은 없었습니다. 적이 아무리 욕을 하여도, 또한 그녀의 앞에서 고구려의 포로를 죽이며 잔인한 면모를 과시하는 와중에서도 단 한번도 당나라의 백성들을 살육한 바 없고, 또한 저항하다가 잡힌 포로를 살육한 바 없으며, 적을 가볍게 여기지 않았고, 아무리 자신에게 지더라도 그 적이 왜 져야 했고, 내가 왜 이겨야 했는지 꼼꼼하게 기록하며 다음 전투에도 계속 참고를 하였던 끊임없는 인격수양과 노력을 병행하였던 장수였습니다.
살벌하였던 645년부터 649년까지의 전쟁에서 총 32회의 대회전과 178회의 소회전을 겪는 동안, 단 1회의 패전한 바 없는 그녀는 그녀의 비문에 스스로 당나라의 군대를 다음과 같이 평가였습니다.
[당나라의 군사들은 진법에 능하며, 심리전술에 탁월하고, 병세를 효과적으로 다루는 능력이 탁월한 강적 중에 강적이다. 그러나 그들이 나에게 진 것은 스스로의 오만함과 때와 장소를 적절하게 구별하여 전략과 전술을 실행하지 못하였다는 것. 그리고 지나친 승리를 갈구하는 각박한 마음이 계속 패착으로 이어져서 졌다. 당나라의 군대는 결코 오합지졸이 아니다. 만일 때와 장소와 오심지의를 터득하지 못한 장수가 만일 군사를 이끈다면, 당나라의 군대에 반드시 패할 것이다.]
그녀의 평가는 너무나 신랄하게 맞아떨어졌습니다. 그녀에게 무려 200여회나 참패하였던 당수군은 658년 대대적인 공습에서 결국 고구려수군 10만대군을 불과 2만 7천명의 수군으로 완전히 참패시켰습니다. 연수영장군이 그렇게 지휘하며, 항상 승리로 이끌었던 고구려수군은 그녀가 사라지자 결국 참패를 하였던 것입니다.
장수는 때와 장소를 정확하게 가릴 줄 아는 명확한 통찰력과 지혜를 갖춰야 하며, 또한 오심지의를 터득해야만 바로 진정한 장수라는 것을 여실히 가르쳐 주는 대목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녀의 선견지명은 너무나도 정확하였습니다. 양만춘, 연수영, 고정의, 연개소문이 다 사라진 고구려는 결국 100전 100패를 거듭하였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오심지의(五心之意)를 정확하게 분석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오심지의는
첫째, 자심지의(自心之意)
이것은 언제나 적은 바로 "나" 자신이라는 것입니다. 조금이라도 편해지고 싶은 마음, 잘못을 남에게 미루고 싶은 마음, 나의 이익을 갈구하고 싶은 마음, 남을 헐뜯고 욕하고 싶은 마음, 정도를 넘어서는 과욕을 스스로 절제하고 억제하며 자신을 강하게 단련시켜나가는 것을 바로 자심지의라고 합니다. 연수영장군은 바로 자심지의를 극대치로 실현한 명장이었습니다.
여기서 부터 이미 당나라의 지휘관과 연수영이라는 인물의 차이는 너무나 크게 나타났습니다. 연수영이라는 인물은 오직 고구려의 군사와 나라, 백성, 적의 희생을 줄이고, 무모한 적의 야욕을 꺾기 위해 싸웠을 뿐. 한번도 자신의 이익을 갈구한 바 없으며, 더불어 단 한번도 자신을 편하게 하지 않았고, 남에게 단 한번도 미룬 바 없는 인물이었습니다. 언제나 자신이 앞장섰고, 오직 자신이 적앞에서 그 화살과 창날과 검날을 받았으니 스스로 승리에 대한 강한 욕구와 오직 전공을 탐했던 당나라의 지휘관과 이미 격이 달랐던 것입니다.
그녀를 일컬어 거란사를 전공하는 서양학자들은 다음과 같이 평가를 내립니다.
"연수영! 그녀는 이미 이긴 싸움을 싸웠다."
이것이 당나라 장수들과 연수영장군의 가장 결정적인 핵심적인 차이였습니다.
둘째, 군심지의(軍心之意)
부하들을 아끼고, 군사들을 아끼는 마음이며. 그들을 위해 어떤 희생과 심신의 평안도 구하지 않을 정도로까지 오른 경지를 이르는 말입니다. 그리하면 어떤 군사들이라도, 또한 부하들이라도 따르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10만의 군사를 지휘하면서도 그 한명한명을 아주 소중하게 여겼고, "사람이 곧 힘이요, 사람이 곧 모든 것"이라는 것을 가장 극대치로 실현하였던 것입니다. 자심지의와 군심지의만 터득하고, 그 경지에 오른 자라면 이미 "전투"에서 충분히 이길 수 있는 자질을 갖춘 사람입니다.
셋째, 민심지의(民心之意)
이것은 전쟁의 대의명분을 바로 세우고, 그것이 대체 누굴을 위한 무엇을 위한 전쟁인가를 확고하게 가릴 줄 알았으며, 더불어 국가를 구성하는 최대다수 최대성원의 백성들을 위한 희생이었고. 또한 그것이 만인을 위한 희생이었던 것입니다. 당나라의 군사들이 고구려땅에서 부린 횡포는 가히 상상을 초월합니다.
(안시성성주가 보는 앞에서 여자를 발가벗겨서 불구덩이로 집어쳐넣어 잔인하게 살상하였던 그 모습을... 더구나 안시성 군사들 태반의 아내였고, 여동생이었고, 누나였고, 딸이었고, 어머니였었던 사람이 무척이나 많습니다. 자신의 아내요, 여동생이요, 누나요, 딸이요, 어머니를 적이 불구덩이 속에 알몸으로 만들어 집어넣어 생으로 태워죽이는 잔인한 현장을 목격한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런 극단적이고, 처절한 상황에서도 연수영장군이 원정한 이래로 단 한번도 당나라에서 민간피해가 벌어진 바 없으며, 오히려 적의 백성들에게 군량미를 나누어주고, 그들의 상처를 치유하여 주었으며, 연수영장군 본인이 그들에게 죽을 먹여주기까지 하였습니다. 만인의 마음을 얻을 수 있는 경지! 백성을 진정으로 위할 수 있는 진정한 경지에 도달하였던 그녀는 이미 당나라의 장수들과 그 격이 달랐던 것입니다.
장산대첩에서는 연수영장군의 대장선이 보는 앞에서 장량이 고구려인 포로들을 끌고와 사정없이 목을 잘라 바닷속에 빠트렸으며, 갖은 욕설과 폭언을 퍼부어댔습니다.
"너희 나라 놈들은 다 멍청이들만 있느냐? 하하하. 목이 슬겅슬겅 잘려, 바다를
피바다로 만드는데도 감히 나서지도 못하는 등신들 푸하하하!!!"
이미 수천명의 목이 바닷물에 떠올려져 빙빙 맴돌았고, 적들은 끊임없이 야유를 부리며 저것도 내가 상대해야 할 적이냐며 그토록 비웃고 갖은 폭언과 비웃음으로 표현하였습니다.
<장량기(長良記)>에 다음과 같이 장산대전 직전의 기록이 나옵니다.>
"고구려의 장수 중에는 장수와 같은 자는 하나도 없었다. 내가 저런 작자들과 싸운다는 것 자체가 정말 망신이다. 너무 실망이다. 저런 쓰레기 같고, 벌레짝 같은 장수들이 장수들이라고 달고 다니니 이 전쟁은 내가 이겼으며, 단 세달이면 고구려는 우리 당나라의 손에 들어올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랬던 장량!!!
그는 대장산도 해전에서 서기 645년 8월 18일부터 9월 2일까지 벌어진 이 대해전에서
자신이 거느린 함대의 80%를 모두 상실하였으며, 자신은 연수영장군의 칼을 피해 자신의 함대로 도망치기 바빴습니다. <연수영장군의 이야기 중에서 "울어라 칼날이여!"편을 참조하시길 바랍니다.>
3개월이면 고구려를 정복할 수 있다고 호언장담하였던 장량은 결국 연수영이라는 도저히 넘을 수 없는 태산장벽을 만나, 결국 13년 뒤인 658년 그것도, 연수영장군이 없는 틈에 고구려수군을 무너뜨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 이후로 비사성해전, 흑산해전, 묘도해전, 동래해전, 어양포해전, 협랑진해전, 청구도해전, 오호진 해전 등 연수영과 겨룬 모든 해전에서 단 1회의 승전도 못하고 모두 전패하게 되는 운명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넷째, 적심지의(敵心之意)
바로 적의 장수, 적의 군사, 적의 백성들의 마음까지 황차 탄복시킬 수 있는 경지에 도달하는 것을 말합니다. 연수영장군은 적에게 어떤 잔학, 잔혹행위도 자행하지 않았으며(전투중의 공포, 수사, 단병전에 의한 희생을 제외한 그 외적인 부분에서), 또한 적과 대치하고 있는 와중에서도 적이 먼저 치지 않으면, 좀처럼 선제공격을 취하여 적을 쳐부수는 행동을 하지 않아 종당에는 연수영장군의 깃발만 봐도 당군은 꽁무니를 빼는 일까지 벌어졌습니다.
당나라의 백성들은 가는 곳마다 연수영장군을 열렬히 환영함으로서 당의 최고집권자
당태종을 위기에 빠트렸고, 당의 장수들도 모두 그녀의 재질과 인격에 감탄사를 절로 내며 그 격이 다름을 인정하였습니다.
장량기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보입니다.
<내가 일평생에 싸워온 많은 수군 장수중에, 고구려의 한 여장수는 유독 나에게 인상이 깊다. 날 여러번 감옥으로 몰아넣었고, 여러번 나로 하여금 지게 하였지만. 나는 그녀가 밉지 않다. 할수만 있다면 용정차를 나누며 이야기를 하고 싶고, 진지하게 시간을 내어 천하대론을 토론하고 싶다.>
이름을 회피한 장량기의 이 부분은 바로 연수영장군을 지칭하고 있는 말이었습니다. 장량은 연수영장군과 싸워 단 1회도 이겨본 적이 없는 인물이었습니다. 결국에는 두손두발을 다 들었다는 것을 표시합니다.
더불어 고구려가 멸망한 후 그녀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문, 그녀의 무덤을 파괴하지 않았고, 수만명의 당나라의 군사들이 그녀의 무덤에서 절을 하며 크나큰 가르침을 받았다고 하였습니다.
658년 고구려수군을 전멸로 몰아넣었던 장해해전은 바로 연수영장군의 전법을 그대로 응용비화시킨 장량의 승리였기 때문입니다.
그는 출전하면서 군사들에게 연수영에게 배운 그대로 실천하였습니다.
"우리는 단 한번도 고구려수군을 이겨본 적이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승리를 위해 전장으로 가는 것이 아니다. 고구려의 무모한 한 독재자 연개소문은 끊임없이 전쟁을 일으켜 이제 모두를 힘들게 하고 있다. 바로 그의 숨통을 조이기 위함이며, 고구려의 백성들에게 잔학한 행동을 하지 말찌며, 욕설도 하지 마라. 또한 나의 대장선이 적진 깊이 들어갈 것이며, 우리는 승리의 사치를 버리고 연개소문에게 더는 중원정복의 야욕을 펼치지 말 것을 확실하게 가르치기 위해 우리는 이길 수 없는 이 전장에 나간다. 더는 전장의 고통을 당하고 싶지 않은 자 나를 따르라!"
하며, 그는 장엄하게 군사를 이끌었고 27000명의 수군으로 10만명의 고구려수군을 격파함으로서 그는 연수영에게 배웠던 것이었습니다. 만일 연수영이 살아있었다면, 그는 연수영에게 또 졌을 것이며, 연개소문의 무리한 독재를 견제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녀의 죽음은 당나라에 엄청난 명분을 주었고, 장해해전에서 대다수 고구려수군의 인재들마저 빠진 가운데 고구려수군의 처절한 참패극으로 끝났습니다.오직 연수영의 독실한 수하였던 장운형의 분전으로 당수군이 압록수까지 치켜드는 것은 간신히 벽류하에서 막아내었던 것에 그쳤습니다.
적으로 하여금, 그토록 감탄하게 하고 적에게 가르침을 줄 수 있는 경지를 가진 장수. 이미 연수영장군은 백전백승을 할 수 있는 4가지의 조건을 완벽하게 구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단 한시도 전쟁에서 패하지 않았습니다. 전투에서도 전쟁에서도 그녀는 모두 완승을 거두었습니다.
다섯째, 천명지의(天命之意)
자신의 소명과 또한 하늘의 이치를 명확하게 깨닫고, 땅의 이치를 깨달아 이를 무리하게 거역하지 않고 품을 수 있는 경지를 뜻합니다. 이것이 그녀가 결국 이길 수밖에 없는 전쟁을하였던 대표적인 이유였습니다.
수십만의 군사들의 목숨이 오가는 전장을 지휘하였고, 수천, 수만의 적이 끊임없이 쳐들어오는 전투에서 모두 승전하였던 당대 을지문덕장군의 모든 것을 이은 명장이었습니다.만일 천책상장이라고 한다면, 당태종이 아니라 바로 연수영장군이 더 적합할 지도 모르는 것이었습니다.
명성적인 천책상장이 아니라 실질적이고도, 진솔한 천책상장이었던 연수영장군은 만족을 알고, 자신의 소명과 소신을 명확하게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또한 그것을 아는데만 그치지 않고 언제나 일관되게 그것을 실천에 옮겼습니다.
가장 미운 적에게 조차도 그의 입에 죽을 먹이고, 자신의 자홍비의를 그 추운 겨울 날에 가장 미운 적, 가장 찢어죽이고 싶은 적군에게 입혔던 바로 그녀의 모습이 당나라의 장수들이 그녀를 결코 넘을 수 없는 벽으로 만들었던 것입니다.^^
이를 통해서 보는 연수영장군의 인격은 화끈하기도 하면서도, 탁월한 지도력과 지휘능력을 갖추었고, 무엇보다도 가장 탁월한 오의지심의 인격의 경지에 올라섬으로서 거의 성웅에 가까울 정도로의 인격을 가졌습니다. 다만 그녀는 많은 전장에서 많은 피를 흘린 관계로 성웅이라고 표현할 수는 없고, 다만 참다운 인격과 인간미를 가진 명장이라고 할 수 있을 것 입니다.
결코 자기백성과 자기군사들에게 칼을 겨눌 수 없었던 그녀는 스스로 목숨을 지움으로서 조국의 파멸을 피하고자 하였지만, 결국 그녀가 없는 조국은 마지막까지 버티던 살아있는 군신 연개소문마저 독재의 늪에서 헤어나오지 못해...
고구려는 연개소문의 죽음과 함께 일가의 내분이 폭주하여 멸망하고 만 것입니다.
2. 연수영장군의 승리의 배경.
첫째, 적의 어떤 도발과 야유에도 꿋꿋하게 자신의 소신과 원칙을 지켜나갔으며 그 적에게 그대로 되돌려주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그럼으로서 적과 확실하게 차별화되고, 완벽할 정도로 다른 도의적인 모습을 보여줌으로서 결국 적이 스스로 감탄하게 되었으니 이것은 그녀의 인격적인 부분이기도 했지만 승리의 첩경이 되었습니다.
그녀가 원정할 때마다 당수군과 당나라의 백성들은 도리어 저항력을 잃었습니다.
"우리가 정말 저런 군대와 싸워야 한단 말인가? 저들과 싸울 이유가 없어..."
적으로 하여금 이미 싸울 이유를 분쇄시켜버렸던 것입니다. 연수영장군은 대장산도 해전 당시 목을 자르고, 욕설을 퍼분 그 답례로 자신의 피를 차에 넣어 화살과 함께 선물로 보낸 후에 성심성의의 예를 다한 다음과 같은 서찰을 보내었습니다.
"장군의 답은 참으로 잘 받았습니다. 저는 장군께 저의 손가락에서 묻어나온 피와 이 화살을 선물로 바치노니, 이 전장이 끝나거든 꼭 저에게 다시 돌려주시길 바랍니다. 이 피로서 장군께 맹세를 드리노니 제가 장군께서 원하는 것을 해주지 못하더라도 넓으신 아량으로 이해를 해주시길 바랍니다."
와 같은 서찰을 보내었습니다. 장량은 그런 연수영을 비웃었습니다.
"하하하, 제법 예의는 있다만 이게 대체 뭔가. 저런 벌레짝 같은 녀석에게 지다니... 참으로 어이가 없다..."
그런데 그것은 연수영장군의 속뜻을 담고 있었습니다. 자신의 손가락을 베어 차에 넣은 것은 바다에 빠져 목을 잃은 백성들의 넋을 자신의 피로서 위로함이었고(장수로서 즉, 그들을 지켜주지 못한 책임을 통감하며 반드시 적의 칼을 꺾겠다는 자신의 다짐. 즉 피와 목숨으로서 적을 섬멸하겠다는 다짐과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에게 바친 화살은 그의 배가 고구려수군이 쏘아올린 화살로 가득히 담겨질 것이라는 아주 강력한 메시지였던 것입니다. 더불어 자신의 모습에 실망하지 말라는 것은 자신이 바로 장량의 방식과 같은 장수가 아님을 명백하게 선포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을 전혀 간파하지 못한 장량은 결국 참패를 하였고, 그 참패를 당한 후에야 진정한 속뜻을 알아차리며 몸서리가 치도록 두려움에 떨어야 했습니다. 결국 당군은 연수영장군을 결국에는 이길 수 없었고, 심지어 비사성서구전투에서도 무려 6만의 대군이 단 1만
2천명의 상륙군에 쩔쩔매며, 수성전조차도 제대로 치루지 못하는 그야말로 참패에 가까운 망신을 당해야 했습니다.
둘째, 시기와 장소를 적절하게 골라 반드시 필승할 수 있는 곳을 선택하였고... 그 시기와 장소에 가장 합당한 전략, 전술을 수립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녀는 거의 최고라고 자부할 수 있는 인격과 덕성을 갖춘 덕장이었고, 더불어 탁월한 지휘능력과 지략을 갖춘 지장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협수로에서는 공포의 이자방진를 통하여, 적의 전력을 무력화시켰고, 넓은 바다에서는 방원진을 펼쳐 적을 꼼짝달싹을 못하게 하였으며, 섬으로 들어서는 길목에서는 장사진과 곤자대형, 어린진과 추행진을 적절하게 사용하여 적들을 물리쳤습니다.
더불어서 풍화, 조류, 일기를 철저하게 구별하여 작전을 치밀하게 짰으며, 그것이 어쩔때는 적보다 6, 7분의 1의 전력차가 남에도 불구하고도 충분히 극복할 수 있었던 가장 큰 배경이 되었습니다.
셋째, 탁월한 전투기술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연수영장군의 함대는 기본적으로 최대한으로 거리를 띄워놓고 적을 타격하는 공사전(攻射戰: 투석기나 쇠뇌를 사용하는 전투)을 선호하였고, 공사전을 위주로 점차 좁혀들어가면서 탐격전(수사전이라고도 부르며, 거리를 좁히며 그 거리에 적합한 활을 쏘았다. 맥궁, 장궁, 강궁, 단궁, 편전을 모두 사용하였다.)을 벌였습니다. 이미 공사전과 탐격전에 적의 전력은 3할 이상이나 파괴되어갔고, 급속도로 기세가 위축되게 되어 있습니다.
그 다음에는 자정산포전을 치루었습니다. 이것은 배를 연환식 일자로 벌려서 집중적으로 표창을 뿌리고, 마름쇠를 뿌려 적들이 제대로 대응을 할 수 없도록 하였고, 그 다음에는 첩지전을 걸어, 그 위에 합판을 걸고 들어가 단자수들이 최단거리에서 단검과 표창을 던져 적을 사살하는 전술을 실행하였습니다.
이러한 전투기술로 인하여 당수군은 이미 자정산포전까지 거의 60%에 가까운 전력적 손실이 벌어졌으며, 그 뒤에서 이제 배위에서 단병접전이 치뤄지면 거의 전멸에 가까운 참패를 당하게 되는 원인이 됩니다. 혹은 단병전 전에 궁수들이 엄호사격하는 방호전과 도방군들이 먼저 진입하여 앞을 막는 등의 탁월한 전투기술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화공전술도 선호하였는데, 이것은 주로 원정전이나 혹은 공격전에서 적의 예기를 꺾기위한 전술로 기습적으로 감행하기도 하였습니다.
이와같은 탁월한 전투기술에 당수군은 언제나 패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넷째, 아주 엄격한 군기와 연수영장군 본인의 철저한 군인정신에 입각한 철저한 원칙주의가 언제나 군사들을 단결시켜나갔고, 가장 탁월한 질서가 유지되는 군대로 거듭나게
만들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반면 당수군은 전투가 심해지면 지휘관의 명령에 따르지 않거나, 혹은 예정된 혹은 결정된 작전에서 완전히 빗나가는 이상행동을 저지르고, 갖은 비정상적인 행동을 자행하는 등의 문제가 곳곳에서 표출된 반면에, 연수영장군이 거느리는
수군에서는 <압록해전 뒤의 이상한 일? 빼곤..> 단 한번도 비정상적인 행위나 행동이 용인되지 않았습니다.
적에게 욕설을 퍼붓는 군사가 있으면, 즉시 끌어내어 태형으로 다스렸다는 전설도 있습니다.
그만큼 아주 엄정하게 다져진 군기는 항상 철저하게 계획된 행동안에서 모든 행동을 절도있고, 짜임새 있게 하여 가장 지휘가 잘되고, 지휘계통이 철두철미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스스로가 우리들의 찬란한 역사를 잊고 사는것은 아닐까요?
'軍史관련' 카테고리의 다른 글
北 핵미사일 막는 3대 방패 과연 믿을 수 있나? (0) | 2013.06.25 |
---|---|
中 핵 선제 사용 (0) | 2013.06.12 |
김병관 - 김관진 우정과 경쟁 40년 (0) | 2013.05.29 |
공포의 다리미 F-117A 나이트호크 (0) | 2013.05.18 |
방위산업, 경쟁이냐 통합이냐 (0) | 2013.05.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