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류, 술, 멋

세계가 우리 집이다

醉月 2011. 2. 4. 12:25
세계가 우리 집이다
김지영씨는 인도양 안다만의 배 위에서 만난 스페인 남자 다리오와 함께 4년째 여행 중이다. ‘배꼽두개’로 불리는 부부가 아마존·안데스 등에서 함께 살기, 유럽에서 무일푼으로 살기 등 세계를 집 삼아 살아온 얘기를 들려줄 것이다.

 

신발 없이 아마존으로 가는 길

히피 여행가 김지영이 남편 다리오와 함께 아마존에서 만난 사람과 풍경
» ‘배꼽부부’(지와 다리오)는 통장 잔고가 없지만 걱정도 없다. 아마존을 여행할 당시. 김지영 제공

아마존의 시작 혹은 끝에는 ‘벨렝’이라는 항구도시가 있다. 배들이 대서양과 아마존을 넘나들고 이방인도 많은 이곳은 브라질에서도 둘째라면 서러울 위험한 도시였다. 우리는 벨렝에서 3일을 지내며 아마존으로 들어가는 배삯을 흥정했다. 우리가 정한 목적지는 ‘산타렝’이라는 곳으로 아마존강을 거슬러 올라가 3박4일이 걸렸다.

우리는 4일 동안 작은 공간에서 재미난 무엇을 할까 생각하다가 뜨개질을 하려고 사둔 색실을 머리에 꼬는 것에 도전하기로 했다. 그리고 나는 이틀 만에 배 안에 있는 10명의 아이들에게 부탁을 받았다. 아이들은 이 거래(?)에서 자신이 줄 수 있는 땅콩이나 과자 한 주먹을 내놨다. 우리는 언제나 그렇듯 주변 사람들과 친구가 되기로 했다. 내 옆에 호랑이 문신이 있는 아저씨는 말이 없어 더 무서웠다. 그래도 핑크색 꽃무늬 이불을 덮고 자는 모습이 나쁜 사람 같아 보이지 않았다. 아마존강을 따라가는 배 안에서 보는 풍경은 한정됐다. 그저 황톳빛의 강물과 나무, 중간중간 집이 나타났다가 사라졌다가 강이 좁아졌다가 넓어졌다가 하는 풍경 외에는 아무 변화가 없었다. 배는 아마존강의 작은 마을들을 거쳐갔다. 인디오 아이들은 배가 지나가는 시간을 알고 작은 카누를 타고 나와 있었고, 배에 탄 몇 명의 사람들은 자신의 아이들이 입다가 작아진 옷가지들을 비닐봉지에 담아 그들에게 던져주었다. 물자 구하기가 힘든 그들을 먼 곳에 사는 이웃들이 돌보는 것이다. 이 작은 걸음이 세상을 바꾸는 힘이라는 것에 희망을 느꼈다.

산타렝에 내리자마자 우리는 버스를 타고 ‘알테도샤우’로 향했다. 이곳은 ‘아마존의 카리브해’라는 별명을 가졌다. 하얀 백사장과 투명한 강물은 이제껏 배 위에서 본 황토물의 아마존이 아니었다. 그날 밤 우리는 한 가족을 만났다. 프레드손, 오드리, 자이언, 하라를 만나 ‘사랑의 섬’(Ilha do amor)에서 한 달간 함께 먹고 나누며 캠핑(멋진 말로), 아니 노숙을 했다.

프레드손과 오드리는 부부였다. 그들은 8년에 걸쳐 상파울루에서 아마존까지 히치하이킹으로 왔다고 했다. 그들이 소유한 것이라고는 망가진 텐트와 배낭, 그리고 그나마 값이 나가는 것은 사랑의 섬으로 매일 가족을 실어 나를 수 있는 10만원 정도에 산 중고 배가 전부였다. 돈은 장신구를 만들어 팔아 마련했다. 오드리는 사랑으로 가득 찬 엄마였다. 나에게 매듭 짓는 법을 가르쳐준 선생님이기도 하다. 자이언은 내가 아는 아이 중 가장 사랑스러웠다. 장난감을 많이 가져본 적이 없는 자이언은 자연에서 놀이감을 찾았다. 주로 나무조각, 돌, 아마존의 작은 물고기들이었다. 하지만 아이는 행복했다. 자이언에게 코바늘로 뜨개질한 어설픈 인형을 만들어주었으나 물속에서 가지고 놀다가 얼마 안 가 몸의 부위들이 해체됐다. 그들은 누가 봐도 거리의 가족이었다. 그들이 버릇처럼 하는 말이 있었다. “부에나 비다.”(Buena Vida.) ‘인생 참 좋다’는 말인데, 세상 사람들이 가진 것 없어 보이는 이들의 말에 공감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누가 뭐래도 그들은 행복했다.

그곳에서 나는 많은 것을 배웠다. 그룹 안에서 개인의 공간을 찾는 것과 그것이 이기적인 게 아니라 당연하다는 것, 아이들과 노는 것과 자연을 사랑하는 것, 더러움에 익숙해지는 것, 나만의 장신구를 만드는 것, ‘정글 화장실’을 쓰는 것, 바나나 하나로 배고픔을 잊는 것, 신발 없이 다니는 것(누군가가 신발을 훔쳐갔다), 해먹에서 자는 것에 익숙해졌지만 새벽 추위에는 익숙해지는 법이 없었다.

김지영 히피 여행가

 


*김지영씨는 인도양 안다만의 배 위에서 만난 스페인 남자 다리오와 함께 4년째 여행 중이다. ‘배꼽두개’로 불리는 부부가 아마존·안데스 등에서 자연과 함께 살기, 유럽에서 무일푼으로 살기 등 세계를 집 삼아 살아온 얘기를 들려줄 것이다.

시간이 없는 사랑의 섬

카샤사 한 병과 잡동사니 연주로 파티를 열었던 사랑의 섬,
신선한 샘과 코코넛잎 집이 있었던 마카코섬
» 마카코섬에서 지와 다리오 부부가 살았던 집. 그들은 여기서 시간도, 문명도 잊고 지냈다.

“며칠인지 몇 시인지도 까먹고 지낸 지가 꽤 되었다. 글을 쓴 지도 오래되었다. 이곳 자연 속에서의 생활이 익숙해지면서 내 겉모습도 자연과 하나가 되었다. 강물을 더럽히고 싶지 않아 비누와 샴푸를 쓰지 않자 머리는 자연 드레드로 변했고 피부도 더러워졌다. 하지만 무엇이 더러운지 모를 딜레마에 빠졌다. 내 겉모습이 더러워짐에 강물은 덜 오염되었고, 강물이 오염됨에 내 겉모습은 깨끗해 보였다. 무엇이 옳을까 곰곰이 생각하다가… 나는 비누와 샴푸를 쓰지 않는 쪽으로 굳혔다. 나에게 더 가치 있는 것은 내 겉모습보다는 강물이기 때문에….”(아마존에서 쓴 캠핑일기 중에서)

브라질 아마존의 중간에 위치한 산타렝의 ‘사랑의 섬’(ilha do amor)은 주말이 지나면 사람들의 발길이 거의 없는 고요한 곳으로 변했다. 카리브해의 해변 같은 아마존 백사장의 작은 코코넛잎 지붕 레스토랑들도 문을 닫았다. 그러면 우리는 친구들을 데려와 파티를 했다. 브라질의 값싼 술 ‘카샤사’(사탕수수로 만든 알코올 농도 40도의 술) 한 병을 준비하고 고무를 뜯는 것 같은 형편없는 고기 몇 점을 불에 올리면 파티는 저절로 따라왔다. 그 누구도 MP3나 스피커는 가지고 있지 않았으나 자기 앞에 있는 잡동사니들로 연주를 하며 노래를 했다. 가끔 기타를 잘 치는 친구가 있으면 분위기는 최고조로 향했다. 걱정이나 스트레스라는 단어가 존재하지 않는 곳이었다. 우리는 사소한 것에 잘 웃었고 쉽게 행복해했다. 8년째 집 없이 여행 중인 그들은 날마다 휴가 중인 것 같았다. 우리는 그곳에서 많은 친구를 사귀었다. 보통 몇 년째 남미 대륙을 방랑하는 히피들이었는데, 개중에는 상파울루에서 대학까지 나와 사회제도에 반항하는 무정부주의자들도 있었고 파벨라(빈민지역) 출신의 글도 못 읽는 이도 있었지만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여행자라는 공통점이 그들을 하나로 묶었으니까….

하루는 배로 2시간 거리의 마카코섬에 살고 있는 콜롬비아 친구의 초대를 받았다. 마카코는 포르투갈어로 원숭이라는 뜻인데, 그 정글 섬에는 빨간 얼굴의 작은 원숭이들이 살고 있었다. 사랑의 섬에서 함께 지내던 여행자 가족의 아빠 프레드손은 마카코섬으로 떠나는 날 아침부터 자신이 ‘선장’이라며 거드름을 피웠지만 그 누구도 그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았다. 꼬박 2시간을 프레부인 오드리와 자녀인 자이언과 하라, 나와 다리오 이렇게 6명이 탄 작은 배의 노를 저어야 하는 그는 마른 체구지만 힘은 장사였다. 하지만 이 여행 이후 그는 모터를 간절히 원했다. 꽤나 힘들었던 모양이다. (진정으로 원하면 이루어진다는 요즘 유행어 ‘끌어당김의 법칙’(law of attraction)대로 한 달 뒤 그는 모터를 갖게 되었다. 도시에서 온 부자 노인이 그에게 선물했다.)

그 어떤 가이드 책에도 나오지 않는, 아는 사람만이 찾아갈 수 있는 마카코섬에는 신선한 샘이 있었고 머물다 갈 수 있는 작은 코코넛잎 집이 있었다. 하지만 이곳에서 할 수 있는 일은 한정돼 있었다. 전기와 가스 없이 생활하는 것은 이미 익숙했지만, 그야말로 혼자 나갈 수도 없는 정글에서 지내는 것은 나에게 편안함과 불안을 동시에 주었다. 오기 전 얻은 헉슬리의 <아일랜드>라는 책을 몇 페이지 읽고 다시 덮었다. 철저한 자연 속에서 책을 읽인들 그다지 흥미롭지 않았다. 심심해지면 샌들을 신고 정글을 걸었다. 독성벌레가 있다는 것을 모두 알았지만 아무도 조심하는 기미가 없었다. 네 살배기 자이언조차 언제나 맨발이었으나 프레드손과 오드리는 한 번도 주의를 주지 않았다. 타파조 국립공원에 네 번이나 왔다는 달라이라마도 정글에서 맨발이었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실제로 개인 비행기를 타고 이곳 ‘알테도샤우’(???)에 휴가를 왔었다는 빌 게이츠가 맨발의 히피가 된 모습을 상상하면 더 웃겼다. 우리는 하루에 한 번 비밀의 샘에 가서 목욕을 했다. 돌아와서 함께 밥을 짓고 저녁에는 모닥불에 앉아 이야기를 했다. 나의 불완전한 스페인어는 점점 포르투갈어로 변했다. 마카코섬이 지겨워질 무렵 우리는 타파조 국립공원 안의 인디언 마을로 갈 채비를 했다.

 

휘발유는 만병통치약

이도 잡고 독도 푸는 아마존 인디언의 상비약…
식물기름·나무껍질 이용하는 자연치유법도 특효

» ‘알’을 제거하기 위해 옆머리를 깎은 다리오. 지와 다리오 제공

브라질 아마존에 있는 타파조 국립공원 안의 인디언 커뮤니티 자마라쿠아(Jamaracua)에 온 지 10일이 넘어갈 무렵부터 머리가 간지러웠다. 그리고 나의 예상이 적중하는 순간이 와버렸다. 내 머릿속에 다른 생명체들이 둥지를 틀고 자손을 번창시키며 살아가고 있었다. 간지러움이 단순한 더러움과 열기의 복합작용이기를 그렇게 바랐건만. 이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 힘들었다. ‘이’를 제거하기 위해 일주일 동안 하루에 5번씩 독한 비누로 머리를 감았다. 내 머리는 뻣뻣한 빗자루가 됐고, 그사이 머릿속을 방황하며 돌아다니는 생명체의 움직임이 줄어들었을 거라… 믿고 싶었다. 일생에 한 번 삭발을 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까지 했다.

소코로 아줌마(우리가 한 달간 함께 지낸 인디언 가족의 엄마)는 금세 내가 이 소유자임을 알아차렸다. 알고 보니 그녀의 딸들이 우리에게 이를 옮겼던 것이다. 아침부터 그녀는 내 머리를 붙들고 ‘이 퇴치 작전’에 돌입했다. 우선 머리 전체에 안디로바라는, 아마존에서 나는 식물의 천연기름을 바르고 식칼로 한꺼번에 여러 알을 빼내며 이 제거에 ‘장인’다운 면모를 보여주었다. 그런데 나의 인생 동무 다리오를 위해서는 조금 더 강력한 방식이 준비돼 있었다.

그날 오후 소코로 아줌마는 대뜸 그의 머리에 휘발유를 뿌리기 시작했고 생명체들은 우수수 머리에서 떨어지는 투신자살을 택했다.

하지만 그것으로도 알을 전부 죽이지는 못했다. 하는 수 없이 다리오는 유난히 알이 많은 귀 뒷부분의 머리를 다 밀어버렸다. 지금에 와서는 패셔너블해 보이지만 사실 그의 헤어스타일은 이의 알들을 제거하기 위한 최후의 수단이었던 것이다. 이것이 첫 번째 휘발유 체험이었다.

다음날 아마존이라고는 믿기 힘든 백사장이 있는 강가에서 프리스비를 던지며 놀았다. 그날 다리오는 드디어 아마존에 온 날부터 그렇게 기다렸던(?) 라야(Raya)- 촉수에 독을 가진 민물 가오리- 를 느꼈다. 엄살 제로의 다리오는 태연하게 라야에 발바닥을 찔렸다고 말했고 걱정 말라며 오히려 나를 안정시켰다. 열 걸음이나 걸었을까? 신경을 타고 올라오는 독을 느끼며 다리오가 주저앉았다. 다행히 때마침 강을 지나가는 다른 부락 인디언 가족의 배를 발견하고 불러세웠다. 여덟 살이나 먹었을 듯한 선주 인디오의 아들은 배가 땅에 닿기도 전에 헤엄쳐 달려가 소코로 아줌마 가족에게 다리오의 상황을 전했다.


 

 

 

 

 

라야에 찔렸을 때 대처법

1.아마존식- 신선한 닭똥을 붙인다. 양파를 갈아 휘발유에 섞어 상처에 바른다.

2.미국식(캘리포니아)- 레몬즙을 따뜻한 물에 타서 상처 부위를 담근다.

3.한국식- 된장을 바른다(아마존에서는 불가능).

 

이곳은 아마존이므로 아마존 방식대로 했다. 개똥도 약에 쓰려면 없다고 평소 그렇게 신경을 날카롭게 하며 싸돌아다니던 닭들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이제부터 닭을 붙잡고 똥을 싸길 기다려야 할까? 고민하고 있을 때 아줌마는 임시방편으로 휘발유를 상처 부위에 뿌렸다. 다리오는 이 상황에서 비장의 4번, 스페인식 대처법을 제시했다(술에 취해 현실을 잊는 것).

“가서 카샤사(사탕수수로 만든 브라질의 술) 한 병만 가져와!” 반 리터를 숨도 안 쉬고 마신 다리오에게 동네 아저씨가 정글에서 귀하게 전해지는 나무껍질을 가져와 가루를 내어 담배와 피우게 했다. 아마존식 천연마취제였다. 그 마을 인디언들은 어릴 적부터 몸이 아플 때 이 가루를 담배와 함께 피웠다고 했다. 다리오는 혼자 술에 취해, 나무껍질에 취해 행복해했다. 라야에 찔린 것도 잊은 채 2시간 뒤 그는 동네 아이들과 맨발로 축구를 했다.

 

“동물을 죽이면 몸이 아파”

사냥으로 먹고살지만 자연과의 약속을 어기지 않는 아마존 인디언이 악어를 놓아준 이야기
» “내가 정한 동물이 아닌 다른 동물을 죽이면 몸이 아파온다”는 일라실다 아저씨가 어깨에 악어를 메고 있다.지와 다리오 제공

자마라쿠아(Jamaracua) 인디언 마을에서 일라실다 아저씨가 새벽에 악어 한 마리를 등에 짊어지고 왔다. 열두 자식을 둔 아저씨는 아직도 혼자 맨손으로 악어 한 마리를 거뜬히 사냥할 만큼 건재하다는 것을 증명했다. 악어 목에 꽂혀 있는 쇠로 된 후크를 빼자 피가 약간 보였다. 목덜미에 상처가 있었지만 이 정도로 악어가 죽을 것 같진 않았다. 엄청난 생명의 에너지가 느껴졌다. 악어가 더 이상 반항하지 않자, 아저씨는 악어를 입 주위에 두른 밧줄을 풀어서 우리가 자는 천막에 두고 갔다. 왜 이곳에 악어를 두고 갔는지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아마 이 악어가 손님인 우리를 위한 것이라는 의미가 아니었을까 싶다. (아니면 밤새 겁먹을 우리를 놀리기 위해?) 1m 정도 크기의 악어를 바로 곁에 눕히고 자야 하는 상황에서 긴장감으로 쉽사리 잠이 오지 않았다.

뚫린 천장 넘어 깜깜한 밤하늘에는 별이 쏟아질 듯했다. 그때 갑자기 ‘타타타’ 하는 소리가 났다. 손전등으로 악어가 있던 자리를 비추어 보았다. 악어는 온데간데없고 악어 피를 쫓던 개미떼만 있었다. 악어는 목을 쳐야만 죽는다는 현지인들의 말이 옳았다. 그래도 멀리 가지 못하고 근처에 있을 거라 생각하니 아마존의 악어괴담 등이 머릿속에 떠올라 좀처럼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날 밤 나는 악어꿈을 꾸었다. 돼지꿈이나 뱀꿈처럼 의미가 있는지는 모르지만 악어 입에 뽀뽀를 하는 꿈이었다.

아침에 일어나 커피를 마시러 부엌에 갔는데, 부지런한 아저씨는 새벽낚시에서 이미 돌아와 찹쌀떡 같은 빵인 만디오카를 먹고 있었다. 나는 악어가 도망간 이야기를 했다. 궁금해하던 악어고기를 못 먹게 돼 안타깝다고 말하는데, 부엌에서 일하던 소코로 아줌마를 비롯해 학교 갈 준비를 하던 어린 두 아들과 두 딸은 연신 큰 소리로 웃으며 내 이야기를 들었다. 우리는 아저씨가 일부러 악어를 놓아줬다는 걸 알게 됐다. 악어에게 살 수 있는 기회를 준 것이다. 악어가 아침까지 그 자리에 있으면 잡아먹고, 도망가면 아직 명이 남아 있으니 가서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아마존의 인디언 중에는 원숭이·악어 등을 잡아먹는 부족들이 있다. 하지만 사냥에는 엄격한 자연과의 약속이 있다. 아저씨는 가족의 유일한 사냥꾼으로, 일주일에 한 번 혼자 정글로 가서 사냥해 가족에게 고기를 제공했다. 우리가 자마라쿠아에서 지낸 한 달 동안 아저씨는 항상 잡아오겠다는 동물을 잡아왔다. 타투(큰 쥐를 닮은 동물), 사슴, 하발리(?????) 등. 사냥이 쇼핑도 아닌데 신기했다. 아저씨가 사슴을 잡겠다고 하면 어김없이 다음날 식탁에는 사슴 요리가 올랐다. 궁금해하던 우리는 아저씨에게 물어보았다. 그러자 그는 이렇게 답했다.

“나는 언제나 혼자 정글로 가지. 손전등 없이 달빛에 별빛에 의지해서. 정글은 내 손바닥 같아서 어디에서 사냥해야 하는지 잘 알아. 그리고 조용히 앉아 담배 하나를 말아 피우면서 동물들의 발자국 소리를 듣고 있으면 어떤 동물인지 알지. 그 동물이 가까이 오기를 기다리면서…. 만약 내가 정한 동물이 아닌 다른 동물을 죽이면 다음날 내 몸이 아파오는 거야.”

그들은 자연과의 일치감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었다. 자연이 병들면 자신이 병든다는 것을 알고 꼭 필요한 것만 바라며 축적하지도 않으며 모든 것을 감사히 받는다. 자연은 그들의 신이고 삶의 젖줄이다. 오히려 많은 것을 소유하지 않은 그들이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풍족한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연은 그들을 먹이고, 그들은 대신 욕심을 버린다.

-달라이 라마가 네 번이나 와서 명상했다는 타파조 국립공원의 거대한 정글 안, 6가구가 사는 작은 마을 자마라쿠아에서

 

가이아의 정원에서 세계를 만들다

아마존 밀림의 정원에서 아나키스트 베네와 함께했던 상상력 가득한 예술과 음식의 세계
» 칠판에 필자의 그림을 그리는 베네. 그는 다혈질의 아나키스트이면서 섬세한 예술가였다. 지와 다리오 제공

사이레 축제(아마존강 돌고래의 사랑의 재회를 축하하는 전통 축제) 기간에 조용히 캠핑할 곳을 찾다가 하르딩 데 가이아(Jardin De Gaia)로 갔다. 마을에서 30분 동안 땡볕을 받으며 걸어 도착한 이곳은 정글 속 작은 파라다이스였다. 프랑스 아저씨 카를로스와 뇨넬은 이곳의 작은 정글 땅을 빌려 채소와 허브 정원을 만들었다. 집도 직접 짓고, 유기농 화장실도 만들고, 빗물을 모아 식수로 사용하고 샤워도 할 수 있게 했다. ‘가이아’는 자연의 여신 이름이고, 한국말로 ‘가이아의 정원’이라는 뜻의 이곳은 이름만큼 모든 것이 완벽했다. 뇨넬이 프랑스에 잠깐 돌아간 사이 프랑스에서 온 자칭 ‘아나키스트’ 베네는 이곳에 자리잡고 우리를 초대했다.

베네는 내게 창조적인 에너지를 주는 친구였다. 그녀는 서아프리카의 작은 섬나라 ‘카보베르데’에서 브라질까지 히치하이킹으로 왔다. 80살 뉴질랜드 선장과 두 달 걸려 대서양도 건넜다. 아마존에서 만난 그녀와 나는 바로 절친이 되었다. 우리는 곧잘 길거리를 쏘다니며 쓰레기를 뒤졌고 그 속에서 보물도 찾아냈다. 사이레 축제가 끝나고 남은 조형물을 뜯어오거나 누군가가 버린 옷감을 주워와 옷을 만들기도 했다. 간혹 주워오는 것들에 그림을 그려서 쓰레기가 아닌 예술창작품(?)으로 둔갑시켰다. 하루는 길거리에서 빨갛게 녹이 슨 철판을 주워와 그림을 그렸다. 그녀는 내 모습을 철판에 그렸고, 나는 한글로 ‘누구나 길에서 일한다. 먹는다. 배운다’라는 글귀를 적어넣었다. 예술가 베네는 한글이 너무나 아름답다며 자신이 쓴 말도 안 되는 프랑스어 시를 이른바 ‘포르투뇰’(포루투갈어+스페인어)로 번역해주며 한글로 써달라고 했다. 그녀가 본 한글은 아마도 아주 이국적이고 아름다운 선의 그림이었을 것이다.

그녀는 남미에 오기 전 2년간 프랑스 남부에 있는 스쾃하우스(Squat House)에서 생활했다. 스쾃하우스는 히피, 펑크, 아나키스트 등 사회제도에 속하기를 원치 않는 온갖 이름의 젊은이들이 빈집을 점거해서 사는 주거지인데, 함께 예술과 문화적 소통을 하며 공짜로 지낼 수 있다. 하지만 불법이기에 찾기가 쉽지 않고 소개 없이는 들어갈 수 없는 비밀 소굴 같은 곳이다. 필자들 역시 런던에서 스쾃하우스에서 지낸 적이 있다. 그곳은 돈 없이 여행하는 우리에게 더러운 공짜 안식처이자 이상을 나누는 공동체이기도 했다. 그리고 이렇게 아마존에서 숙명처럼 모인 나와 다리오, 베네의 동거가 시작됐다. 나중에는 루시아노가 가이아의 정원에 합류했다. 그는 상파울루에서 대학원까지 졸업한 인재였지만, 현재는 자신이 만든 장신구를 팔아서 근근이 살아가는 히피다.

아침에 눈을 뜨면 언제나 나무 위에 작은 원숭이들이 있었다. 루시아노는 일어나자마자 정원에 물을 주고, 다리오는 불을 지펴 커피를 끓이고, 베네와 나는 인도식 밀가루빵 ‘차파티’를 만드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알게 모르게 자신의 임무가 정해져 있었다. 루시아노는 아주 과묵했다. 반면 베네는 언제나 흥분하며 정치적 논쟁을 벌이기 좋아했다. 이 스물두 살의 혈기왕성한 아나키스트는 언제나 그렇듯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이 전부인 양 떠들었다. 자신이 프랑스인이라고 생각하지 않으며 프랑스와 자신은 아무 상관이 없다고 하다가, 금세 프랑스의 음식과 전통에 대한 칭찬에 열을 올리며 자신이 프랑스인인 것이 자랑스럽다고 했다. 그녀는 프랑스인이 확실했다.

유난히 더워서 숲 속에 하루 종일 숨어 있던 어느 날, 우리는 먹을거리가 거의 떨어졌다는 것을 알았다. 하르딩 데 가이아에서 조금만 걸어나가면 망고나무가 있었는데, 아직 익지 않은 푸른 열매들만 달려 있었다. 우리는 그 망고를 따서 요리를 하기로 했다. 먼저 깍둑썰기를 하고, 양파와 마늘을 넣어 볶다가 물을 붓고, 한 주먹 남은 소야프로틴(대두로 만든 채식주의자용 고기)과 정원에서 잘 자라고 있는 이름 모를 여러 향기 좋은 허브를 넣고, 마지막으로 달걀탕처럼 달걀 하나를 깨뜨려 넣었다. 이렇게 하르딩 데 가이아표 ‘그린망고수프’가 탄생했다. 익지 않은 망고는 얼추 감자 같은 맛을 내면서도 과일 특유의 향이 있었다. 우리는 요리 하나를 할 때도 서로의 상상력에 의지했다.

우리들의 천국, 당신들의 지옥

최소한의 것으로 천국을 만든 아마존 생활…
소비주의 사회를 탈출해 진정한 자유를 누리다
» 소유를 줄이니 존재가 커졌다. 뻥 뚫린 천장은 은하수의 흐름을 보여주었고, 우리는 그것을 보고 별자리 그림을 그렸다.지와 다리오 제공

2개월 동안의 아마존 생활이 그랬듯이 ‘가이아의 정원’ 역시 지붕이 없었다. 밤에 잘 때 해먹에 누워 모기장 사이로 보이는 별들이 좋았다. 뻥 뚫린 우리의 천장은 은하수가 어떻게 움직이는지도 보여주었고 달의 위치로 시간을 알아내는 법도 가르쳐주었다. 우리는 매일 밤 보이는 별자리를 책에 그려넣어 손수 별자리 책을 만들었다. 밤하늘은 또 다른 세계와 나를 연결해주는 매개체였다. 이곳을 떠나 제대로 만든 집의 막힌 천장 아래에서 지낼 것을 생각하니 벌써부터 답답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간만에 아주 풍족한 아침 식사를 했다. 커피 2잔, 쿠스쿠스케이크, 비스킷과 과바젤리. 뜨거워야 할 아침 햇살은 구름에 가려졌고 시원한 바람마저 불어오는 것이 비가 올 것을 예감하게 했다. 우리는 빗물을 모아 식수로 사용했으므로 커다란 물받이용 고무 대야의 뚜껑을 활짝 열어두었다. 아니나 다를까, 아침 식사 뒤 비가 오기 시작했다. 빗방울이 고무 대야에 똑똑 떨어지는 소리를 듣고 있으니, 오랫동안 머릿속에 묻어둔 생각들이 다시금 떠올랐다.

사회와 개인, 예술과 차별, 빈곤과 음식, 자아와 타인에 대해 그리고 사회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삶이 얼마나 자본주의적 발상인지 생각했다. 사람들은 저마다 행복을 말한다. 우리의 행복은 ‘가이아의 정원에 사는 것’이었다. 평화로운 아침과, 풍족하지 않지만 나눌 수 있는 음식과, 서로 오가는 이야기들, 이것으로 족했다. 더 넓은 아파트로 이사하고 더 비싸고 좋은 차로 바꾸는 것이 세상 사람들의 행복이라면 우리의 행복은 전혀 다르다. 하루하루를 내가 가진 감정에 충실하고 노동력 착취를 당하지 않으며 창의성을 맘껏 발휘하는 생활이 우리가 궁극적으로 원하는 삶이다. 그런 삶은 돈으로 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우리에겐 돈이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우리에게 필요한 돈은 얼마인지, 우리가 얼마나 최소한의 것들로 살아갈 수 있는지 아는 데는 연습이 필요하다. 재화가 넘쳐나는 바빌로니아에서는 돈 없이 사는 것이 힘들 수 있지만, 우리는 지금 아마존에 있다. 내가 먹는 것은 하루 두 장의 밀가루빵 ‘차파티’와 한 주먹의 쌀, 약간의 채소와 과일, 몇 조각의 비스킷이다. 강물에 샤워하고 빗물을 모아두었다가 마시고 나무를 잘라 불을 지피고 요리한다. 그 밖에 밤을 환하게 비출 한 자루의 초와 성냥…. 내게 매달 청구되는 세금은 없다.

소비를 하지 않기로 작정한 것은 아니었지만 여행을 계속하면서 자연스럽게 내 삶에서 소비가 그다지 중요한 요소가 아님을 깨달았다. 자연스럽게 우리 여행은 소비에 대한 반항이 되었다. 부족한 것은 언제나 사람과 자연에 의해 채워졌다. 여행을 하면서 알게 된 것은 부족함이 축복이라는 사실이다. 만약 전혀 부족하지 않은 여행을 했다면 우리는 그 부족함이 자연스레 채워지는 경험을 못했을 것이다.

이 세상에는 부족한 사람이 더 많은데 사회는 언제나 완벽한 사람들을 모델로 보여준다. 완벽한 사람이 되는 과정에서 나는 절대 행복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런 사회적 옷은 내게 어울리지 않는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조금은 지저분하고 불완전한 내 옷이 더 편한 이유다. 왜 모두 원하는 것이 같아야 할까? 다르면 틀린 거니까? 다른 사람처럼 되기 위해 용쓰지 않고 나만의 색을 내며 사는 것이 당연하다. 다름은 틀린 게 아니라 재미있는 것이다. 모두가 저마다 아름다운 색을 낼 때 우리는 그림 같은 사회를 만들 수 있다.

이곳 아마존에서 나를 둘러싸던 모든 물질적인 것과 결별하고, 나를 꾸몄던 모든 것에서 탈피하고, 소비 위주의 사회에서 탈출한 나는 진정한 자유를 느낀다. 내가 사는 이곳에는 좋은 회사에 입사해 높은 연봉을 받는 것보다 더 재미있는 것이 무궁무진하다.

 

화폐 없이도 사는 그곳

» 베네수엘라의 인적이 드문 해변에서 다리오가 코코넛을 자르고 있다. 지와 다리오는 코코넛물로 샤워도 했다.지와 다리오 제공

아마존을 떠날 때 내 발은 통퉁 부어 있었다. 유난히 불개미와 벌레들의 공격을 많이 받은데다 언제나 먼지로 덮여 있어서 염증이 생기고 고름이 멈추지 않았다. 그런 발로 베네수엘라의 국경을 넘고 히치하이킹을 해서 바나나를 실은 트럭을 얻어타고 첫 번째 도시인 산타 엘레나(Santa Elena)에 도착했다. 동네 사랑방 같은 작은 식당에서 밥을 먹는데 한 아저씨가 내 발의 상태가 심각해 보인다며 당장 병원에 가지 않으면 발을 절단하게 될 거라고 겁을 주었다. 물론 베네수엘라 사람 특유의 ‘오버’와 ‘과장’임을 알면서도 무서워서 당장 병원으로 달려갔다. 의사는 소독하는 동안 빨간약을 두 통이나 썼고, 항생제 링거를 놓고도 약을 한 달치나 주었다. 모든 치료가 끝나고 돈을 내려고 수납 창구를 찾았지만 없었다. 사회주의를 실현하려는 베네수엘라에서는 병원이 모두 공짜였다.

발의 염증이 아물 무렵, 우리는 리오 카리베(Rio Caribe)라는 곳으로 향했다. 가까이에 베네수엘라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천상의 낙원 메디나 해변이 있는 곳이다. 그렇다면 모두가 찾아간다는 메디나 대신 아무도 안 가는 곳으로 가보는 게 어떨까? 언제나처럼 우리는 샛길로 빠졌고, 또다시 승합차 버스를 몇 번 갈아타며 이름 모를 해변을 찾아갔다. 가는 도중 동네의 유일한 일차선 비포장도로를 막고 있는 청소년들을 만났다. 사정은 이랬다. 그 동네 학생들은 학교에서 선생님들이 입버릇처럼 하는 ‘너희의 권리를 찾으라’는 말을 실천하고 있었다. 그들이 생각하는 자신의 권리는 무료 통학버스였다.

이 시골 마을에는 정부가 마련해준 공공의 교통수단이 없었다. 당연히 승합차나 승용차를 가진 사람들은 영업허가증도 없이 마을의 교통을 장악하고 있었다. 찻삯은 비쌌고, 배차 시간은 운전사 마음대로였다. 동네 사람들은 막혀버린 도로에서 서로에게 소리를 지르며 잘잘못을 가렸다. 그 와중에 어디선가 나타난 아이스크림 장수는 그날 그 자리에서 최고의 실속을 챙겼다. ‘투쟁’과 ‘아이스크림’, 어울리지 않았지만 워낙 초현실적 상황이 많이 벌어지는 남미에서는 모든 것이 가능했다. 이 해프닝은 자신의 권리를 찾으라고 학생들에게 말한 선생님들이 학생에게 집으로 돌아가도록 설득함으로써 2시간 만에 끝났다. 학생의 귀가를 도운 것은 다름 아닌 길가에 몇 시간째 서 있던 그들의 적 ‘불법 봉고차’들이었다. 집에 다 가서 돈이 없다고 그냥 내리는 학생들에게 사람들은 욕을 한마디씩 했지만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이것이 베네수엘라 스타일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우리는 이름 모를 해변에 도착했다. 그곳에는 정말 아무것도 없었다. 사람의 흔적도 없을뿐더러 물도 없었다. 있는 것이라고는 1km 가까이 되는 해변을 빽빽하게 가득 채운 코코넛 나무들뿐이었다. 나무마다 어른 머리통보다 큰 초록색 코코넛이 주렁주렁 달려 있었다. 머리에 떨어졌다가는 바로 의식을 잃을 듯했다. 우리는 우선 머리 위로 떨어질 코코넛이 없는 곳을 찾아 텐트를 쳤다. 우리가 가져간 물은 고작 1ℓ였지만 우리에게는 자연이 준 코코넛이 있었다. 금방 주변의 코코넛을 주웠는데 다섯 통이나 되었다. 다리오가 브라질에서 산 마체테(넓고 긴 정글용 칼로, 캠핑할 때마다 요긴하게 썼다)로 코코넛을 탁탁 쳐서 깨면 나는 그 물을 우리가 항상 가지고 다니는 알루미늄 냄비에 넣었다. 코코넛 물로 조리한 밥을 먹었고, 그날 밤 코코넛 물로 샤워를 했다. 어떤 비싼 뷰티살롱에서도 할 수 없는 특별 피부관리를 받은 셈이다. 피부가 촉촉해진 느낌이 들었다. 텐트 안에서 자는 동안 코코넛 냄새가 은은하고 달콤하게 퍼졌다.

바닷가에서 캠핑을 하면서 우리 텐트는 녹이 슬고 많이 망가졌다. 이번에도 예외 없이 우리는 정성스럽게 텐트를 수리했다. 베네수엘라에서 간 첫 번째 대도시인 푸에르토라크루스에서 10달러 정도 주고 산 이 파란색 싸구려 텐트는 아주 편안한 안식처였다. 텐트는 우리와 1년 넘게 남미 여행을 함께했다. 안데스의 해발 4천m 고지에서도 안전한 집이 돼주었고, 비바람으로부터 우리를 지켜주었다. 사람들 눈엔 더 이상 구제할 수 없을 정도로 낡아 보이겠지만, 우리는 이것을 버리고 새것을 살 생각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다. 조금씩 고쳐주면 언제나 그렇듯 완벽하지는 않았지만 쓸 만했다. 우리에게는 완벽한 것이 어울리지 않으니, 이 텐트는 우리 집임이 틀림없다.

 

이상한 나라의 지와 다리오

버스도 히치하이킹하고 공짜로 데리러 오는 천사 운전사도 있고…
경치보다 사람이 아름다운 마르가리타섬
사람들 이야기를 들을 걸 그랬다. 여행 중 만난 사람들은 하나같이 베네수엘라에 가더라도 그 유명한 마르가리타 섬에는 가지 말라고 충고했다. 실제로 마르가리타 섬의 가장 큰 번화가인 ‘포르 라 마르’(Por la Mar)에 도착한 뒤 시몬 볼리바르 광장에서 기념사진 한 장을 찍고 나니 더 이상 할 일이 없었다. 배차 시간을 기다리며 쉬고 있는 버스 운전사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그는 우리가 좋아할 만한 곳이 있다며 데려다주겠다고 제안했다. 그는 우리에게 돈을 받지 않았다. 남미에서는 말만 잘하면 버스도 히치하이킹할 수 있다.

운전사가 데려다준 해변에서 캠핑을 했다. 마르가리타섬에서 캠핑하는 데 가장 불편한 것은 바로 ‘샤워’였다. 땀으로 얼룩진 몸에 소

금 결정체가 주렁주렁 달리고, 머리에는 하얀 것들이 가득 앉아 있었다. 해변에 즐비한 레스토랑에는 모두 샤워기가 있었지만 오직 손님에게만 사용이 허락됐다. 샤워기 손잡이 부분을 아예 빼놓은 곳도 많았다. (비싼 음식을 먹는 손님의 발에 묻은 모래를 씻어내기 위해 종업원들은 손잡이를 가져와 샤워기를 틀어주었다.) 물에는 그렇게 짠돌이가 아닐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섬에는 지하수가 없어서 모든 수돗물을 본토에서 끌어다 썼다. 아무리 그래도 물 좀 쓰겠다는데 그렇게까지 문전박대를 하다니…. 나는 별 상관없는 얘기들을 갖다 붙이며, 사회주의를 실현하겠다는 나라가 물도 공짜로 안 주느냐고 괜히 신경질을 냈다. 휘발유 50ℓ가 1달러인 이 나라는 미네랄워터 1.5ℓ가 1달러다.

» 히치하이킹을 한 버스를 타고 지와 다리오는 해변으로 가서 캠핑을 했다.지와 다리오 제공

베네수엘라는 이상한 나라였다. 암시장에서 돈을 바꾸면 은행 환율보다 2배 이상이 많았다. 우리는 이 사실을 미리 알고 있었기 때문

에 브라질에서부터 꼬깃꼬깃 접어둔 100달러짜리 10장을 계속 가지고 다녔다. 둘이 베네수엘라를 3개월 동안 여행할 예산이었다. 다행스럽게도 선거철이라서 암시장의 달러 가격이 더 올라간 상태였다. 그러나 이곳에 오면 누구나 한 번씩 당한다는 환전 사기에 우리도 예외 없이 걸려들었다. 연금술사도 아닌데, 분명 세어본 돈의 50볼리바르푸에르테(BF) 지폐가 전부 2BF짜리로 바뀌어 있었다. 예산에 심각한 타격을 입었지만, 그래도 이 섬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푼타아레나(Punta Arena) 마을에 가는 계획은 실행하기로 했다.

내 마음은 사람들에 대한 불신으로 가득했기 때문에 히치하이킹이 먹힐 리 없었다. 푼타 아레나는 히피나 찾는 마르가리타 섬 변두리에 있는 작은 동네로, 버스는 고사하고 지나가는 차도 20분에 한 대씩 있었다. 무작정 기다릴 수 없어서 우리는 우선 걸었다. 길을 걸으면서 분노도 점점 사그라지는 것 같았다. 돈을 잃은 것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래도 나의 ‘긍정 에너지’는 바닥을 치고 있었다. 풍선에 바람을 불어넣듯이 긍정 에너지를 불어넣는 모습을 머릿속으로 그리면서 말없이 걸었다. 땡볕에 달궈진 아스팔트 열기 때문에 발바닥에서 불이 나는 것 같았다. 그때였다. 반대편 길에서 똥차 한 대가 우리에게 와서 섰다.

“아까 이 길을 지나면서 걷고 있는 당신들을 보았지만 차에 사람이 많아서 세울 수 없었어요. 푼타 아레나까지 갔다가 돌아오는 길이에요. 당신들을 데리러 왔어요.”


그는 천사임이 틀림없다. 그의 차는 한국에서라면 여러 번 폐차하고도 남을 만큼 낡았다. 게다가 그는 한손을 쓸 수 없었다. 내가 그의 손을 쳐다보자 그는 애써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내 오른손은 마비된 지 오래됐지만, 나는 운전하는 걸 아주 좋아해요.”

그는 캠핑하기 좋은 해변의 끝으로 우리를 데려다주고, 이 마을은 안전하니까 걱정 말라며 물이 필요하면 동네 사람 아무에게나 부탁하면 된다고 말했다. 마을의 집들은 거의 판잣집이었다. 가난한 마을 사람들은 해변의 부자 레스토랑 사장도 나눠주지 않던 물을 우리에게 나눠주었다. 아름답다고 소문난 푼타 아레나의 해변에는 쓰레기가 지천에 깔려 있었다. 아마도 아름답다고 소문난 이유는 해변이 아니라 그곳 사람들 때문이 아닐까.

 

무소유라는 무소불위의 무기

여권 없이 국경을 넘는 ‘집시’ 르네,
100% 히치하이킹으로 북미를 종단한 나탈리와 함께한 나날들
베네수엘라의 아름다운 바다와 산에서 3개월을 보내고 콜롬비아로 넘어갔다. 그곳에서 두번째로 찾은 대도시는 도시 전체가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콜롬비아의 작은 유럽’ 카르타헤나(Cartagena)였다.

카르타헤나에서 가려고 했던 플라야블랑카(Playa Blanca)는 ‘하얀 해변’이라는 뜻으로, 콜롬비아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할 정도로 완벽한 바다였다. 보통 배를 타고 가는데 관광객을 상대로 하기 때문에 비쌌다. 대신 우리는 그 가격의 절반도 안 되는 돈으로 갈 수 있는 루트를 동네 사람을 통해 알아냈다. 버스를 타고 큰 시장까지 나가서 스티로폼으로 만든 요금 몇백원짜리 허접한 배를 타고 100m가 채 안 되는 바닷길을 건넌 뒤 히치하이킹을 하면 되었다. 물론 차가 많이 다니는 곳이 아니므로 운이 좋아야 1시간 안에 차를 잡아 탈 수 있었다. 우리는 약간의 돈을 내고 트럭을 얻어 타고 마지막 마을에 도착해서 30분 정도 걸었다. 비포장도로에 먼지가 뿌옇게 앉은 키 작은 나무들만 무성한 길이었다. 이렇게 오는 데만 거의 하루가 걸렸다. 언제나처럼 사람들이 잘 가지 않는 길을 선택하는 바람에 시간을 많이 낭비했지만, 배를 타고 왔다면 보지 못했을 주변의 작은 마을들을 보았고 마을 사람들과 이야기도 할 수 있었으니 그것으로 충분히 특별했다. 어차피 우리에게 풍족한 것은 시간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 콜롬비아 해변에서 커피를 끓이는 지(왼쪽)와 나탈리. 이들은 아침이면 그곳의 어부들과 음식을 나눴다.지와 다리오 제공

그곳에서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온 왕년의 히피 나탈리와 브라질에서 온 르네를 만나 일주일을 함께 지냈다. 두 번 불을 지피지 않아도 되도록 모든 일용할 양식을 함께 만들어 나누었고, 자신이 아는 작은 것들을 서로에게 가르치고 배웠다. 예를 들어 우리가 알고 있는 손 매듭 패턴을 르네에게 알려주었고, 르네는 다리오에게 망치로 두드려서 철사를 구부려 만드는 장신구 기술을 가르쳐주었다. 나는 나탈리에게 손뜨개질하는 것을 가르쳐주었고, 나탈리는 북미와 알래스카의 여러 아름다운 장소를 말해주었다. 나탈리는 나보다 나이도 많고 여행 경험도 훨씬 많았다. 그녀는 알래스카에서 멕시코까지 북미를 종단했는데 100% 히치하이킹으로 가능하다며 북미에서 먹힐 수 있는 히치하이킹 기술을 전수해주었다.

르네는 3년째 남미를 여행 중이었다. 그는 그야말로 집시였다. 여권도 없었고 은행계좌도 없었다. 하지만 그는 그동안 남미의 수많은 국경을 건너다녔다. 국경을 건널 때 여권이 없다고 하면 돈을 달라고 하고 돈도 없다고 하면 몇 시간 기다리게 하고 겁을 주지만 그는 언제나 풀려났다. 남미의 부패한 경찰들에게는 돈으로 해결되지 않는 일이 없을 정도였다. 그런데 돈도 없다니 그들에게는 실속이 없는 것이다. 대부분의 브라질 히피들은 늘 이런 식으로 대책 없는 여행을 했다. 그들은 법에 저촉받지 않는 집시고 그들이 가진 최대 무기는 ‘무소유’였다.

우리는 그곳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한 최고로 맛있는 음식을 만들었다. 그중 우리가 가장 좋아한 것은 콜롬비아에서 흔한 콩인 ‘렌틀’로 만든 요리였는데, 불을 지펴 만든 요리는 언제나 그렇듯 가스로 요리한 것과는 깊이가 다른 맛을 냈다. 우리의 아침 식사는 저녁보다도 훨씬 풍성했다. 0.5kg 정도 되는 밀가루로 인도식 빵 ‘차파티’를 만들어서 갖고 다니던 천연 꿀과 함께 먹었다. 차파티를 지나가는 어부들과도 나누었고 아침 산책을 나온 해변가 숙소에 머무는 여행객 친구들과도 나누었다. 나눌 것이 있다는 것은 언제나 친구를 사귀는 데 유리하게 작용했다. 우리는 르네 덕분에 매일 밤 기타 연주를 감상할 수 있었다. 감미로운 브라질 억양의 포르투갈어로 부르는 그의 노래는 나에게 브라질에 대한 향수에 잠기게 했다. 우리 여행에서 빠질 수 없는 자연에서의 시간들은 나에게 좋은 명상과 창조적 에너지를 되찾아주었다. 거기다 이 좋은 친구들과 함께 있으니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었다.

 

내려오면서 보았네, 안데스의 얼굴을

등산화도 없이 오른 해발 4646m 활화산 푸라세…
올라가며 만났던 사람들, 내려오며 보았던 풍경들
남미에 온 이유 중 하나는 바로 ‘산’이었다. 안데스산맥을 타면서 남쪽으로 내려오는 경로를 택한 것도 산이 좋아서였다. 산을 알아가는 것은 마치 ‘신’을 알아가는 것 같았다. 운동을 하기보다는 도를 닦으러 가기에 우리에게는 최고급 장비나 기능성 등산화가 필요 없었다. 유황이 뿜어나오는 콜롬비아 남부의 활화산 푸라세(Purace)에 오르기로 했다. 버스를 타고 구불구불 산길을 오르다가 중간에 내려 한참을 걸어야 했다.

» 활화산 푸라세를 개와 함께 거니는 ‘지’. 그에게 산을 알아가는 것은 신을 알아가는 것과 같았다.지와 다리오 제공

그렇게 도착한 대피소에는 아무나 잘 따르는 개가 두 마리 있을 뿐 아무도 없었다. 한참을 기다렸다. 몇 시간 뒤 학교에서 돌아온 8살이나 먹었을 듯한 꼬마가 텐트를 칠 수 있는 곳으로 우리를 안내해주었다. 아이는 우리가 쉴 수 있도록, 놀고 싶어하는 개들을 쫓다시피 데리고 돌아갔다가 어둑해질 무렵 대피소 소장 겸 농부인 아빠와 함께 우리에게 왔다. 그곳엔 본래 관광객이 많이 찾는 유황 온천이 있었는데 몇 해 전부터 온천수가 나오지 않는다고 했다. 자연히 사람들의 발길이 끊겼다. 아저씨의 직업도 대피소장에서 농부로 돌아갔다.

다음날 새벽 일어나니 우리 텐트 주변에서 소들이 풀을 뜯고 있었다. 우리가 산에 오를 것이라고 알고 있는 영리한 개 한 마리는 함께 오르기로 약속이나 한 듯 텐트 앞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가방에는 빵 한 덩어리와 햄 한 덩어리, 오렌지 두 개와 물병이 이미 들어가 있었다. 오르는 동안 우리는 조금씩 음식을 나눠먹었다.

최대한 부지런히 준비하고 나왔는데도 농부들은 벌써 밭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방목하는 소들은 하나같이 건장했지만 그 큰 몸으로도 우리가 지날 때마다 ‘쫄아서’ 도망갔다. 온통 초록색이던 풀과 울창한 나무들이 점점 사라지면서 곧 풀 한 포기도 안 보이는 돌산이 나왔다. 작은 돌멩이들이 깔린 가파른 경사면에서 내 발은 자꾸만 미끄러졌다. 고도가 높아지고 경사가 급해질수록 잠깐씩 멈추는 횟수가 늘어났고, 그 짧은 시간 동안 바람은 또 얼마나 부는지 추위 때문에 바로 몸을 움직여야 했다. 하지만 다리오는 고도에 전혀 힘들어하지 않았다. 출발한 지 6시간 만에 푸라세 꼭대기 해발 4646m에 도착했다. 다리오는 가지 말라는 나의 윽박지름도 무시하고 유황 가스가 노랗게 뿜어져나오는 분화구 가까이에 기어코 갔다.

우리는 미친 듯이 불어대는 바람을 피해 큰 바위에 몸을 숨기고 가방 안의 점심을 나눠먹었다. 동행한 개에게도 똑같은 양을 나눠주었다. 그런데 가까이서 보니 개의 배가 볼록한 게 임신을 한 모양이었다. 만삭의 배로 우리와 함께 이 고생을 한 이유가 무얼까? 가방 속의 ‘햄 덩어리’ 때문이었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때까지도 피곤함과 추위에 지쳐 이 아름다운 자연이 만들어낸 작품을 감상할 겨를이 없었다. 내려오는 길에야 여유를 찾은 나는 내가 얼마나 높이 있는지 실감했다. 그제야 아름다운 안데스의 얼굴과 만났다.

산에서 내려와 대피소에서 이틀을 더 머물렀다. 특별히 할 일 없이 산길을 어슬렁거리며 평화로운 에너지를 느꼈다. 떠나는 날 아침, 1시간은 족히 걸어서 드문드문 버스가 지나가는 비포장도로까지 나왔다. 버스가 온다는 믿음은 버리지 않았지만 1시간이 넘도록 그곳을 지나는 차는 한 대도 없었다. 그러던 중 차 한 대가 도착했다. (물론 버스는 그 뒤로도 오지 않았다.) 차주인의 이름은 ‘디에고’였다. 그는 인근 도시 포파얀(Popayan)에 사는 대학생인데, 작은 트럭에 빵을 잔뜩 싣고 가게가 없는 시골 오지마을을 돌며 빵을 팔아 학비를 댄다고 했다. 차를 타고 오는 동안 그는 우리에게 자신의 사업 구상을 얘기했다. 영리하고 사업 아이디어가 풍부한 것으로 보아 이 청년이 부자가 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그는 우리의 다음 행선지인 산아구스틴으로 가는 버스가 있는 마을까지 데려다줬다. 물론 우리 때문에 조금 더 돌아가야 했지만 그는 상관없다고 했다. 가는 길에 먹으라고 빵도 한 봉지 주었다. 디에고는 스스로 삶을 개척하고 노동을 즐기는 멋진 청년이었다. 남에게 베푸는 일을 기꺼이 하는 그가 꼭 부자가 되기를 바란다. 그는 부자가 될 자격이 있기 때문이다.

 

달의 목에 오르다

에콰도르에 도착해서 별다른 계획 없이 찾아올 우연을 기다렸다. 그러다 우연히 에콰도르의 안데스산맥 트레킹 안내책자 복사본을 몇 페이지 발견했고 그것이 우리의 길이 되었다. 돌아갈 곳도 없고 돌아갈 날도 정해지지 않은 우리에게 계획된 길은 없었다.

수도 키토에서 멀지 않은 곳에 세계에서 가장 완벽한 모양의 화산산이 있다. 이름은 코토팍시(Cotopaxi), 잉카의 언어 케추아(Quechua)어로 ‘불덩어리’라는 뜻이다. 그들이 살던 때 큰 화산 폭발이 있어서 그런 이름이 붙었나 보다. 또 다른 인디언 부족 언어인 카야파(cayapa)어로는 ‘달의 목’이라 불렸는데, 나는 달에 가본 적도 없는 그들이 외계 행성을 걷는 듯한 코토팍시 위의 돌바닥을 절묘하게 표현했다는 것에 놀랐다.

» 코토팍시 산에서 음식을 만들기 위해 불을 피우는지와 베네. 아마존에서 헤어진 지 7개월 만에 이들은 재회했다.지와 다리오 제공

코토팍시 여행은 아마존을 떠나 7개월 만에 우연히 에콰도르에서 다시 마주친 베네와의 재회를 기념하기 위해서였다. 키토에서 버스를 타고 마차치라는 마을에서 내렸다. 이 루트는 보통 관광객들이 가는 길이 아니므로 입장료를 내는 검문소를 거치지 않아도 되고, 가는 길에 코토팍시 주변의 절경을 감상할 수 있었다. 대신 하루 6시간씩 이틀을 걸으면 된다. 마을에 도착하고 트럭을 히치하이킹하는 데 성공했지만 오래가지는 못했다. 중간에 비까지 내리기 시작했다. 줄기차게 오는 비에 비옷으로 갈아입고 진흙길을 3시간이나 걸었을까? 우리는 벌써 하늘이 어두워지는 것을 느꼈다. 텐트를 칠 만한 곳을 찾아 짐을 풀고 저녁으로 간단히 치즈샌드위치를 만들어 먹은 뒤 깊은 잠이 들었다. 딱딱하고 축축한 바닥이었지만 상관없었다.

다음날 서둘러 텐트를 접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전날 생각보다 많이 걷지 못했기에 마음이 급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큰 장애가 눈앞에 펼쳐졌다. 짙은 안개 때문에 10m의 시야도 확보할 수 없었다. 게다가 사람들이 잘 다니지 않는 곳이라 길이라는 표시도 명확하지 않은 상태에서 다리오의 천재적인 방향감각과 허접한 지도 한 장에 의지해 걸었다. 길을 잃을 것 같은 상황에서 ‘에라, 모르겠다! 밥이나 먹고 보자’며, 하루 만에 엄청 딱딱해진 빵에 참치 캔 하나를 열어 나누어 먹었다. 그 사이에 안개가 걷히는 것 같았다.

간신히 길을 찾아 내려간 언덕에는 새까맣고 건강한 황소들이 있었다. 조심스럽게 그들 사이를 지나 언덕 위에 서니 안개 사이로 코토팍시의 완벽한 봉우리가 보였다. 적당한 평지를 골라 텐트를 쳤다. 전날보다 더 높은 고도에 추위가 느껴졌다. 우리는 재빨리 마른 장작을 주워다 불을 지펴 따뜻한 요리를 했다. 양파와 버섯을 넣은 라면이었다. 별거 아니지만 먹는 내내 얼마나 행복했는지 모른다. 그날 7~8시간 정도 걸은 것 같았다. 뱃속이 따뜻하게 차오르자 추위와 피로에 지친 내 볼도 빨갛게 달아올랐다. 온기를 느끼며 아무 말 없이 앉아 있었다. 아무 대화가 필요 없는 완벽하고 아름다운 밤이었다. 그리고 나는 수많은 별의 신호를 받았다.

다음날 아침, 우기에 잔뜩 흐려야 할 하늘의 모습이 화창했다. 코토팍시의 만년설 봉우리가 구름 사이에 수줍게 걸려 있었다. 우리의 ‘무작정 걷기 중심적’ 여행 일정을 따라오기가 피곤했는지 베네는 남겠다고 했고, 나와 다리오는 코토팍시에 오르기로 하고 다시 길을 나섰다. 장비 없이 올라갈 수 있는 한계인 4800m의 대피소까지 먼지를 잔뜩 뒤집어쓰고 죽기 살기로 올라온 우리는 대피소 아저씨가 공짜로 준 따뜻한 물과 마른 빵을 점심으로 먹었다. 관광차를 타고 대피소 가까이까지 올라와 피곤한 기색 없이 차를 마시던 사람들은 우리를 힐끗힐끗 쳐다보았다. 지금 생각하니 우린 꽤나 없어 보였다.

텐트와 베네가 있는 곳으로 돌아오자 해가 막 지려고 했다. 베네는 언덕 위에서 우리가 오는 것을 보고 미리 불을 피워놓았다. 마지막 만찬으로 어제와 똑같은 라면을 먹었다. 베네는 우리가 없는 사이에 강 주변에서 수영을 하다가 영역 본능이 강한 새들의 공격을 받은 이야기를 하며 씩씩거렸다. 어제보다 덜 추운 밤 날씨에 우린 불이 꺼지고도 한참 동안 그곳에 앉아 이야기를 나눴다.

 

떨어진 열매의 주인은 인간이 아니다

에콰도르 투미아누마 마을에서 가축과 함께 지내며 배운 인간과 자연의 공존
빌카밤바에 도착한 것은 선거일 밤이었다. 원한다면 16살부터 투표할 수 있는 에콰도르에서 아직 앳된 청소년들이 그들의 첫 번째 투표를 기념하듯 술판을 벌였고, 걸어서 10분이면 다 둘러볼 수 있는 작은 마을에는 활기가 가득했다. (남미에서는 비교적 짧은) 10시간의 버스 이동으로 지친 우리는 텐트 칠 만한 곳을 찾아나섰다. 동네 사람들이 이곳저곳 알려줬지만 모두 강가의 자갈밭이었다. 그나마 학교 옆 농구대가 있는 공터가 평평해서 그곳에 텐트를 치고 잠을 잤다. 다음날 아침 웅성웅성하는 소리에 잠에서 깨어보니 아이들이 텐트 주위에 모여서 웃고 있었다.

우리는 활기차게 그들에게 아침 인사를 하고 헝클어진 머리 그대로 텐트를 접었다. 무엇이 그렇게 재미있는지 이번에는 수십 명의 전교생이 창문으로 우리의 동작 하나하나를 주시했다. 농구를 하지 못해 화내는 아이들은 없었다. 어쩌면 이 아침 우리 같은 사람들을 구경하는 것이 더 흥미로웠을지 모르겠다. 가방을 챙기고 아침 식사를 하러 동네 슈퍼에 갔다. 동네 사람들은 우리가 어디서 지내는지 물었다. 학교 옆 공터라고 하자 그들의 친구인 라파엘 아저씨를 소개해주었다. 그에게는 과수원 옆에 창고로 쓰는 빈집이 하나 있었다. 전기도 가스도 없는 이 집은 그에겐 그냥 창고였지만 우리에게는 최고의 보금자리가 될 수 있었다. 다음날 우리는 이틀 동안의 공터 캠핑을 접고 ‘투미아누마’(외우는 데 며칠이 걸렸다) 마을로 향했다.

» 투미아누마의 빈집에서 지와 다리오는 부족함 없는 생활을 누렸다. 옥수수알을 떼고 있는 다리오.지와 다리오 제공

라파엘 아저씨의 빨간색 도요타 트럭을 타고 반쯤 부서진 철교까지 가서 오솔길을 10분 정도 걸었다. 생각한 것보다 훨씬 훌륭한 집이 나왔다. 방 안에 20년은 족히 됐을 법한 엉성한 철제 침대와 더러운 매트리스가 있었다. ‘청결’과는 거리가 멀지만 동네 사람들이 준비해준 우리만의 공간이 생긴다는 것 자체가 특별했다. 그 방의 주인은 우리만이 아니었다. 초록색 눈을 가진 금발의 고양이와 낳은 지 일주일도 안 됐는지 눈을 떼지 못하는 새끼 3마리도 있었다. 불 때는 아궁이가 있는 작은 주방은 청소 뒤 우리가 가장 좋아하는 공간이 되었다. 집으로 통하는 오솔길을 5분 걸어 내려가면 라파엘 아저씨 가족의 자랑인 널따란 피망 밭과 과수원이 나왔다. 과수원에는 오렌지, 감귤, 레몬, 바나나, 과바, 파파야, 아보카도 나무가 자라고 있었다. 바질과 오레가노, 레몬그라스 등이 잡초처럼 무성했고 잘 살피면 호박이나 감자, 옥수수와 콩도 있었으나 안타깝게도 아직 철이 아니었다. 그중에서 내가 특히 좋아한 것은 빨간 열매를 맺은 커피나무였다. 나는 곧바로 커피 열매를 수확한 뒤 창고에서 찾아낸 넓은 소가죽 위에 널어 햇볕에 말렸다.

이 낙원은 라파엘 아저씨의 가족과 그의 삼형제, 사촌들까지 먹일 수 있었지만 모두 자기 밭을 가지고 있어서 언제나 과일과 채소가 반 이상 땅에 그대로 떨어졌다. 그들은 절대 바닥에 있는 것을 먹지 않았는데 이유인즉, 떨어진 열매의 주인은 인간이 아니기 때문이다. 떨어진 열매는 벌레가 먹거나, 그냥 그 자리에서 썩으면 더 좋은 흙을 만드는 거름이 된다.

첫날 우리는 이곳 ‘식구’들과 개인 면담을 했다. 고양이는 다 자란 새끼까지 합쳐서 7마리였고, 엄마 고양이 외에는 우리에게 좀처럼 오지 않았다. 또 자기 공간에 대한 인식이 아주 강해 조금만 다가가도 있는 대로 화내는 거위가 4마리, 특별한 캐릭터 없는 닭 2마리, 젖은 흙 먹는 것을 좋아하는 당나귀와 잘생겼지만 마음을 열지 않는 말 1마리까지 대식구였다. 우리 임무는 이 가족들을 돌보고 빈집에 활력을 불어넣는 것이었다. 장이 서기 전까지 5일 동안 우리는 사람들이 가져다준 음식으로 끼니를 해결했다. 다정한 마을 사람들은 밭일을 갔다 오면서 우리 집을 지날 때 토마토나 양상추 등을 집 앞 탁자에 놓고 갔다. 특히 조세피나 아줌마는 올 때마다 한 주먹의 쌀이나 달걀 등을 가져다주었다. 우리는 간간이 동네 사람들의 밭일을 도우며 감사함을 전했다. 우리가 가진 건 전기도 안 들어오는 빈집과 하루 세 끼 검소하게 먹을 수 있는 음식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너무나 풍족했다.

 

레알 유기농을 살다

지천에 널린 파파야, 알로에 칵테일, 피망밥… 에콰도르에서 천연 재료로 직접 만든 유기농 식단
에콰도르 투미아누마 마을 사람들은 ‘유기농’(Organic)이란 말의 의미를 잘 알지 못하지만 이들의 삶 자체가 유기농이다. 동네에는 제대로 된 슈퍼마켓이 없어 거의 자급자족으로 살아간다. 다리오는 사춘기 소년 카를로스가 알려준 치즈만들기를 해보고 싶어 동네에서 유일하게 젖소를 키우는 아주머니를 찾아갔다. 우유통이 따로 없기 때문에 통을 가져가야만 우유를 받아올 수 있었다. 마치 ‘세련된’ 현대사회의 친환경운동의 한 예인 것 같지만, 그들은 평생 이렇게 살아왔다.

다리오는 가져온 우유를 발효시키고 허브의 일종인 생오레가노를 넣어 맛있는 치즈를 완성했다. 치즈 보관하는 데 바나나 잎만큼 좋은 것이 없다. 올리브유 대신 버터에 잘게 썬 마늘과 마당 한쪽에서 잡초처럼 자라는 바질을 넣으면 훌륭한 ‘페스토 소스’의 대안이 된다. 자연은 내게 언제나 좋은 영감을 주고 선생이 돼주었다. 이곳에는 마케팅 수단의 ‘오가닉’이 아닌, 그들이 직접 재배한 천연 식재료의 제대로 된 오가닉이 있었다.

» 마침 피망이 풍년이라 신선한 피망을 마음껏 즐겼다. 투미아누마 마을 사람들과 피망을 수확한 뒤 휴식을 취하는 지.지와 다리오 제공

나는 매일 아침 일어나 쓰디쓴 알로에 조각에 레몬 둘세(Lemon Dulce·오렌지만 한 크기의 달콤한 레몬)를 세 개 정도 손으로 짜넣고, 파넬라(Panela·사탕수수물을 끓인 정제되지 않은 설탕)를 한 숟가락 섞어 만든 ‘알로에 칵테일’을 마셨다. 하루 필요량의 비타민C가 내 몸에 충전되는 느낌이었다.

천연 항생제 역할을 한다는 파파야는 남미에서 흔히 먹을 수 있는 과일이다. 다리오는 숲을 한 바퀴 돌 때마다 내가 좋아하는 노르스름한 파파야를 서너 개씩 따왔다. 흔해빠진 것이 바나나였다. 미처 다 먹지 못하고 남은 바나나는 우리가 돌보는 말 ‘만시토’(Mansito·스페인어로 ‘순둥이’라는 뜻)에게 주었다. 유난히 낯을 많이 가리는 만시토지만 바나나의 유혹은 뿌리칠 수 없었는지, 멀리서 나를 보면 조용히 다가오곤 했다. 처음 라파엘 아저씨의 부탁으로 바나나를 따러 갔을 땐 하늘 높이 달린 바나나를 어떻게 따야 할지 고민스러웠다. 라파엘 아저씨는 ‘키가 5m 이상 되는 바나나 나무 위로 올라가야 한다’는 농담까지 했지만, 바나나 따는 법은 의외로 간단했다. 그냥 나무 중간을 잘라버리면 된다. 아직 설 익어 푸른색을 띨 때 따서 자루에 넣어 응달에 걸어놓으면 일주일 뒤 노랗고 뽀얀 바나나를 맛볼 수 있다.

부엌에는 언제나 과일과 채소가 넘쳤다. 밥을 지을 때마다 불을 피워야 하기 때문에 한 끼 준비하는 시간이 배로 들지만 3~4일이 지나자 혼자서도 거뜬히 불을 지펴 밥을 지을 수 있게 되었다. 상황은 언제나 새로운 기술을 하나씩 가르쳐준다. 피망이 풍년이라 끼니 때마다 신선한 피망을 먹었는데, 기름에 볶기도 하고 국을 만들기도 했다. 심지어 피망밥도 지었다. 나는 태어나서 그렇게 과육이 두꺼운 피망을 먹어본 적이 없으며, 그 천연이 가진 신선하고 달짝지근한 맛은 우리가 창작한 요리의 최고 재료가 되었다.

슬로푸드, 슬로라이프… 사람들은 웰빙하는 방법으로 ‘느림’을 제안한다. 이곳에선 애초에 빨리 할 수 없었다. 다리오는 원래 차분하고 느긋한 성격이지만, 나는 그 반대다. 다리오는 무엇인가를 만들 때도 언제나 신중하고 천천히 하지만, 나는 빨리 해치우고 싶은 마음이 앞서는 사람이다. 그렇다고 느린 삶이 불편한 것은 아니다. 이곳은 결과보다는 과정이 재미있는 곳이다. 밥을 짓기 위해 불을 피우는 것은 재미있다. 그래서 배가 고프기 전에 천천히 과정을 즐기면서 요리를 해야 한다. 과일을 먹기 위해 장대를 가져가서 과일을 따오는 과정은 과일을 먹는 것보다 더 즐겁다. 그 어느 것 하나도 그 과정에서 ‘내’가 빠지지 않는다.

처음 이곳에 도착해서 장만한 30자루의 초는 우리의 밤을 더 아름답게 해주는 장식품이었다. 촛불은 어두운 밤 우리의 공간을 가득 채워주었다. 우리의 눈은 침침한 촛불에도 책을 읽을 수 있을 만큼 익숙해졌다. 오솔길을 30분만 걸으면 물놀이할 수 있는 신선한 계곡이 나왔다. 가끔 일이 없는 만시토를 타고 오솔길을 산책했다. 만시토는 이름대로 순한 말이라 나를 위해 아주 천천히 걸었다. 나는 부자였다. 맛있는 과일들은 먹고 먹어도 끝이 없었고 화창한 날씨는 나를 빛나게 했다.

 

“그 노인네 85살밖에 안 됐지”

천혜로 장수를 누리는 에콰도르 시골 마을에서 만난 비센테 아저씨의 탐정놀이
에콰도르 투미아누마 마을의 창고를 빌린 ‘우리 집’에 자주 오는 손님 중 한 명은 비센테 아저씨였다. 왜소한 몸집인데다 말투와 표정에서 그가 조금 모자란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에게는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다.

이곳의 비옥한 땅은 부지런한 사람들에게는 풍족함을 주지만, 그는 일을 하지 않고 매일 술만 마셔 동네에서 알아주는 술주정뱅이였다고 한다. 동네 사람들은 ‘푼타’(punta)라는 술을 만들어 마셨다. 마을잔치 때 맛본 푼타는 알코올 도수 60도가 넘는 위험한 술이었지만 사탕수수로 만들어 달착지근한 맛에 ‘맛이 가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술에 대한 자기 조절이 비교적 잘되는 다리오 역시 잔치 때 마을 아저씨들에게 업혀올 정도였다. 비센테 아저씨는 푼타에 취한 어느 날 고꾸라지면서 머리를 바닥에 부딪혔고 그 뒤로 바보가 되어버렸다는 것이다. 그의 아내는 두 아들을 데리고 도망가버려 소식도 모르고 그는 졸지에 부모와 모든 형제의 업보가 되어버렸다.

하지만 우리는 아저씨가 좋았다. 밭일이 끝나고 당나귀를 두고 가면서 아저씨는 항상 밭에서 캔 것들을 우리에게 나눠주었다. 언제나 미소 띤 얼굴이었고 가끔 우리가 밥을 차려주면 그렇게 맛있게 먹었다. 바보가 된 그는 일도 열심히 했고 술도 마시지 않는 성실하고 다정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 비센테 아저씨는 낯선 마을을 찾은 이들에게 더없는 친구가 되었다.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비센테(왼쪽)와 다리오.

하루는 물이 시원치 않게 나왔다. 길이가 1km도 넘는 호스로 계곡의 꼭대기에서 물을 끌어다 쓰는데, 검정색 고무 호스는 탄탄해서 좀처럼 망가지는 일이 없었기 때문에 도무지 원인을 찾을 길이 없었다. 때마침 온 비센테 아저씨는 아마도 낙엽이 들어가 막힌 것 같다며 호스를 놓은 길을 따라갔다. 우리도 아저씨를 쫓았다. 하지만 상황은 달랐다. 불과 집에서 3분 떨어진 곳에서 누군가가 ‘마체테’(정글에서 쓰는 긴 칼)로 호스를 일부러 끊어놓은 것이다. 그 흔적도 선명해서, 두 번의 시도를 했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음, 누가 이런 짓을 했는지 짐작이 가는군.”

아저씨는 심각하게 말했다. 그 모습이 마치 과학수사대(CSI) 형사 같았다.

“이곳을 지나다니는 그 노인네야!”


우리는 매일 보는 백발의 꼬부랑 할머니를 떠올렸다. 할머니는 우리에게 인사를 하지 않는 유일한 동네 사람이었고, 가끔 마녀 같은 눈초리로 우리를 주시했다. 아저씨의 말에 따르면, 할머니 밭에 물을 대는 샘은 이맘때가 되면 마르는데 1년 내내 마르지 않는 샘을 가진 우리가 부러워서 그랬으리라는 것이다.

“에이 그래도 그렇지, 말도 안 돼요! 힘없는 할머니가 어떻게 마체테로 호스를 이렇게 단번에 잘라놓냐고요!”

나와 다리오는 황당해하며 웃었다. 그러나 아저씨는 나름 완전 진지해져서 말했다.

“아니야! 그 노인네 나이 얼마 안 먹었어, 남편이 훨씬 나이가 많아.”

“대체 그 할머니가 몇 살이신데요?”

“그 노인네는 아직 젊어. 85살밖에 안 됐지, 남편은 93살이야. 그 역시 아직 밭일을 나간다고.”

우리는 황당했다. 아! 비센테 아저씨가 바보라는 사실을 잠시 잊어버렸다.

하지만 이 지역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장수 마을이었다. 90대 할아버지가 밭일을 하는 것도 결코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비센테 아저씨의 탐정놀이는 그 뒤로도 계속됐다. 어느 날 우리가 집을 비우고 잠시 나간 사이 누군가가 부엌에 있던 음식을 죄다 먹어버렸다. 아껴두었던 과일잼이고 뭐고 모조리…. 그때도 비센테 아저씨는 “누가 그랬는지 짐작이 가는군…” 하며 신빙성 없는 주장을 했다. 배고팠던 동네 아이들이 그랬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넘어가려 했으나 아저씨는 동네 사람들의 알리바이를 스스로 추측했다. 그가 탐정이었다면 아마 평생 배고프게 살았을 것이다. 그가 농부로 태어나서 참 다행이다.

정글을 지키려다 학살당한 인디오

영혼의 집인 아마존 개발에 맞서던 ‘아구아루나족’,
그들과 헤어진 뒤 들려온 유혈 진압 소식
“나는 이길 필요가 없다.”

아구아루나(Aguaruna) 인디언이 삶의 권리를 위해 싸우고 있을 때 페루 리마의 젊은이들이 그들을 지지하기 위해 만든 거리의 메시지였다. 우리는 그 의미가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최고의 존엄성을 지키는 데 이미 승리한 그들을 향한 위로의 말이라고 생각했다.

석 달간의 에콰도르 생활을 뒤로하고 페루 국경을 건너왔다. 국경지대의 교통은 비싸고 느리기 짝이 없었다. 간신히 ‘하엔’이라는 먼지 날리는 작은 도시에 도착해 우리의 첫 번째 페루 정거장이 될 차차포야로 가려고 다음날 아침 일찍 떠날 채비를 했다.

“뉴스 안 봤어요? 여기서 바구아(아마조나주의 소도시)까지 인디언들이 길을 막고 시위를 하고 있어요. 트럭이고 버스고 지금은 휴업 상태예요. 아마 이곳에서 기다려야 할 거예요. 지금은 그곳을 지나는 것 자체가 위험해요.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상황이니까….”

» 도로를 봉쇄하고 자신들의 정글을 지키려던 아구아루나 청년들. 경찰은 이들의 나무 창이 무기라며 총을 쏘았다. 지와 다리오 제공

여인숙 아줌마의 이야기를 듣고 우리는 사람들에게 차차포야로 가는 다른 방법을 수소문했지만 불가능해 보였다. 딱 한 가지 방법이 있긴 했다. 시위를 하는 곳까지 ‘콜렉티보’(Collectivo·여럿이 함께 타는 택시)를 타고 간 다음, 막힌 도로는 걸어서 통과하는 것이었다. 중요한 건 얼마나 걸어야 할지 잘 몰랐다는 점이다. 우리는 무작정 콜렉티보에 몸을 실었다. 달리던 차가 속도를 줄이며 바위와 나무로 바리케이드를 친 시위 현장의 시작점에 섰다.

“여기서부터는 더 이상 갈 수 없어요.” 운전사는 돈을 걷으며 말했다.

그들은 페루의 아마존 정글에 사는 아구아루나라는 인디언이었다. 잉카에 정복당하지 않은 몇 안 되는 부족 중 하나로, 용감한 전사들로 유명하다. 그들이 아마존 정글을 멀리 떠나 도시로 나와 파란 천막을 치고 도로를 봉쇄한 이유는 페루 정부가 그들의 삶의 터전인 정글의 개발권을 미국의 한 기업에 넘기는 바람에 졸지에 집 잃을 상황에 처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정글은 물리적인 ‘집’이 아니라 영혼과 묶인 그들 자신이었다. 그런 것을 이해할 수 없는 정부에 보상금에도 움직이지 않는 그들이 어리석게만 보였고, 발밑의 장애물 같은 존재였다.


포클레인에 의해 정글은 훼손됐고, 그들이 식수로 쓰는 깨끗한 물이 흐르는 강은 진흙탕 물로 변했다. 하지만 그들의 사정을 들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들은 마지막 방편으로 아마조나주를 지나는 유일한 도로를 막고 시위를 하는 것이었다.

우리가 얼마를 걸어야 할지 그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우리는 도시에 나와 사는, 스페인어를 말하는 아구아루나족 남자들에게 “당신들의 시위는 정당하며, 우리와 다른 도시의 많은 사람들이 지지하고 있다”고 말했다. 땡볕 아래 파란 천막 안에서는 아낙네들이 시내에 사는 사람들에게 지원받은 쌀로 밥을 짓고 있었다. 그들의 식량은 쌀밥에 감자뿐이었다. 이방인의 응원이 그들을 감동시켰는지, 한 아저씨가 아구아루나족의 상징인 길다란 나무 창을 다리오에게 쥐어주었다. 사진 찍히기를 싫어하는 인디언들이지만 우리의 작고 오래된 디지털 사진기 앞에서 포즈를 취해주며, 외부 사람들에게 자신들의 상황을 알려달라는 부탁의 말을 했다.

그리고 3일 뒤 유혈 사태가 벌어졌다. 인디언 26명이 그곳에서 죽음을 맞았다. 무기가 없는 그들에게 경찰은 총을 쏘았다. 경찰은 그들의 나무 창이 무기였다고 말했다. 페루의 공영방송은 인디언을 적으로 만드는 데 급급했다. 그들을 야만인이라고 불렀다. 힘없는 그들이 왜 싸워야 했는지 설명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저 교육받지 못한 정글 사람들이었으니까. 나는 아직도 그날의 뉴스를 생각하면 눈시울이 붉어진다.

 

꼬불꼬불 페루는 신성하다

144km를 버스로 8시간 걸려 올라간 잉카 길을 걸어 내려오며 만난 신성한 유적과 사람들
아마존 정글 지역에 안데스산맥이 살짝 스쳐 지나가는 페루 북부 아마조나주의 마라뇬강은 산사람들과 정글사람들에게 모두 신성한 곳이었다. 그곳에선 그들의 두 신(神)이 하나가 된다.

감자 실은 트럭 짐칸을 얻어 탈 수도 있었지만 악명 높은 이 길만은 그나마 편안하게 버스로 가기로 했다. 144km를 가는 데 8시간 정도 걸리는 이 길은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걸리는 시간이 달라진다. 어설프게 만들어진 비포장도로는 차 한 대가 가기에도 비좁은 듯하고, 말라버린 땅으로 된 벽에서는 계속 돌들이 떨어진다. 가끔은 차가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큰 사고가 나기도 한다. 이 최강 구불구불 도로는 해발 3678m까지 오르고 950m까지 내려갔다가 다시 2500m까지 오른다. 시속 15km로 달리는 버스 안에서 사람들은 구토를 해대고 인디언 꼬마들은 버스 안에서 오줌까지 싸니 거북하기 짝이 없지만, 사람들의 마음만큼은 순례자처럼 성스러웠다. 옆자리의 할머니는 가는 내내 묵주를 손에서 놓지 않았다. 인디언들은 궁상스러운 겉모습이 무색하게 신성한 눈빛으로 창밖을 보며 말할 수 없이 아름다운 대지의 어머니에게 기도를 했다. 나는 가끔 졸다가 머리를 창문에 부딪쳤는데, 그런 일이 열 번 이상 계속되니 아예 잠잘 생각을 하지 않게 되었다. 이 초강력 멀미 속에서도 나는 마라뇬강이 주는 신성한 기운을 놓치지 않으려고 애썼다.

» ‘지’가 안데스의 야이노족 유적지에서 내려다본 세상은 경이로웠다.지와 다리오 제공

스페인 사람들이 강에서 원주민들을 만나 “우리가 도대체 어디에 있냐?”고 물었더니 원주민들이 “페루”라고 대답했다는 장면을 상상했다. 원주민의 언어로 페루는 ‘강’이라는 뜻이었다. 원주민들은 강가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 강에 있다고 말했을 뿐인데, 스페인 사람들은 그때부터 이 원주민들의 나라를 ‘페루’라고 불렀다. 사람들은 자기가 듣고 싶은 것만 듣는 데 선수다. 어쨌든 이것이 페루라는 이름의 유래다. 이 나라는 거대했다. 안데스산맥의 중심부를 갖고 있고 아마존이 시작되는 곳도 여기에 있다.

페루는 그야말로 나라 전체가 유적지나 다름없다. 우리는 안데스산맥을 타고 내려오며 작은 마을들을 지났다. 작은 팻말에 ‘잉카난’(Incanan)이라고 쓰인 곳을 수없이 만났다. 그 유명한 잉카 길이었다. 남미 전역을 정복한 그들이 걸었던 길은 이제 동네 사람들이 밭으로 가는 길이 되었다. 우연히 폐허가 된 야이노족(잉카 정복 이전의 부족)의 유적지에 도착했을 때, 그들이 제사를 지냈다는 가장 높은 곳의 가장 커다란 원형 건물에 올라서 말없이 산을 내려다보았다. 이곳에 있을 수 있는 것만으로 6일 동안의 고생은 가치 있었다(우리는 6일을 걸어서 그곳에 도착했다). 그들의 신이 태양이든 눈 덮인 산봉우리든, 그들이 있던 자리에서 똑같은 풍광을 보고 있다고 생각하니 경이로움이 머리털까지 전달됐다.

사람들의 발길이 닿지 않은 비밀스러운 유적지를 찾는 것이 우리 여행의 핵심이었다. 잉카가 (혹은 잉카 전에) 남긴 유적은 페루 전역에 비밀처럼 숨겨져 있고, 공짜였지만 쉽게 도착할 수 없는 곳이기에 시간이 촉박한 관광객들의 관심을 받지 못했다. 우리는 매번 이 특별한 장소의 유일한 사람들이었다. 사람의 손길이 아닌 자연에 의해 훼손된 유적지 벽면의, 오랜 시간 그 자리를 지켜온 흔적이 오히려 아름다웠다. 나는 치유받고 용서받았고, 삶과 나의 존재에 대해 감사함을 가득 품고 내려왔다. 그들의 신이 나에게도 자비를 베풀었다는 강한 느낌을 받았다. 내려오는 길에 지나는 마을에선 잔치가 한창이었다. 오전 내내 굶었다는 말을 하지 않았는데도 사람들은 그들이 가진 마법으로 우리의 상태를 꿰뚫어보고, 기꺼이 우리 배를 채워주었다. 그러고 보면 여행이란 마법과도 같다. 설명할 수 없는 일이 계속 일어나니 말이다. 그 마법이 여행만이 아닌 나의 일상에서도 계속되길 바라고 또 바랐다.

 

8월에 맞은 잉카의 새해

달의 신전에서 옥수수술과 즉흥 노래로 땅의 어머니
‘파차마마’에게 한 해의 복을 빌다
우리는 어느덧 잉카의 발자국을 따라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이 ‘배꼽’이라 부르던 그곳에 가까워질수록 그리운 사람을 만날 날이 가까워진 것처럼 설레었다. 20시간 동안 버스를 탔는데, 여행한 이래 이렇게 편하게 버스에서 하룻밤을 보낸 적은 없었다. 값싼 티켓을 찾던 우리에게 버스 운전사가 요금의 반값에 트렁크를 내주었기 때문이다. 남미에서는 버스 이동 기간이 길어 두 명의 버스 운전사가 번갈아 운전하는데, 우리에게 판 자리는 운전사들이 잠깐씩 눈을 붙이는 곳이었다. 두 운전사는 담요까지 몇 장 주면서 연방 우리가 편한지 물었다. 우리는 그곳에서 대자로 누워 편하게 쿠스코에 도착했다. 버스는 쿠스코라는 애인이 우리에게 보내준 리무진이었다.

» ‘잉카의 배꼽’ 쿠스코에서 지와 다리오는 새해 의식인 ‘파차마마’에 함께했다.지와 다리오 제공

오래 있을 작정으로 왔기에 관광객이 머무는 호스텔은 너무 비쌌다. 어떻게든 현지 가격의 월세방을 구해야 했다. 첫날 도착하자마자 방을 찾으러 다녔지만 큰 수확은 었었다. 다리오와 나는 언제나 그렇듯 우리에게 오는 우연을 기다렸다. 시간적 여유를 가지고 원하는 것을 머릿속에 그려두고 편안히 기다리면 언제나 마법처럼 눈앞에 나타났다. 이 방법은 배고플 때, 혹은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할 때 언제나 먹혔다.

다리오는 술을 좋아한다. 그는 ‘주(酒)님’이 적당히 취한 자에게 자비를 베푼다고 믿었다. 나는 다리오의 주님을 믿지 않았지만, 드디어 전도당할지 모를 상황이 와버렸다. 그가 언제나 새로운 장소에 도착해서 하는 일 중 하나는 지역의 술을 맛보는 것이다. 한국에 서민의 술 소주가 있듯이, 전세계의 각 지역에는 값싼 서민의 술이 존재한다. 다리오는 현지인이 마시는 술에는 그곳의 혼이 서려 있어, 그 술을 나눠 마시면 금세 그곳 사람들과 친구가 될 수 있다고 믿었다. 나는 술을 마시기 위한 그의 변명이라고 생각했지만, 함께 여행하며 관찰한 결과 그것은 사실이었다.

쿠스코의 방을 얻게 된 것도 다리오의 ‘주님 은혜’ 덕분이었다. 밤에 달짝지근한 ‘카냐소’(페루의 서민 술)를 찾아나선 그는 동네 아저씨들에게 묻고 물어 도착한 한 구멍가게에서 카냐소 1ℓ를 사고 주인 아줌마에게 주변에 혹시 빈방이 있는지 물었다. 그녀에게는 대나무와 황토로 만든 옥탑방이 있었고, 그곳은 우리의 보금자리가 되었다. 다리오의 주님을 찾아가니 그곳에 해답이 있었다. 그것도 쿠스코가 한눈에 보이는, 전면이 유리로 된 펜트하우스였다. 나에게는 더없이 멋진 집이었지만 사람들은 ‘비닐하우스’라고 불렀다. 밤이 되면 온도가 영하 가까이 떨어지는데 안과 밖의 차이가 없다는 것이 흠이었지만 쿠스코에 온 지 3일 만에 그렇게 우리 집이 생겼다.

우리는 쿠스코에서 새해 첫날을 맞이했다. 8월1일은 잉카 이전부터 안데스 사람들에게 한 해가 시작되는 첫날이었다. 그들의 달력은 태양을 중심으로 한 서양의 것이나 달을 중심으로 한 동양의 것과 달랐다. 8월1일, 이날은 ‘파차마마’(땅의 어머니)에게 한 해의 복을 빌고 지난해에 대한 감사를 표하는 의식을 한다. 우리는 집에서 1시간쯤 걸어 파차마마 의식이 치러지는 달의 신전으로 갔다. 피워놓은 불 주위에 둥그렇게 둘러앉은 사람들이 차례로 자신이 준비해온 것을 불에 태우고 기도를 올렸다. 코카 잎과 ‘와이루로’라는 아마존의 빨간색 씨앗으로 한 해 동안 풍족함을 준 자연의 어머니에게 감사를 드리고, 막걸리와 비슷한 옥수수로 만든 인디언의 술 ‘치차’를 나눠 마시며 작은 축제 분위기를 만들었다. 그중 나이가 많고 얼굴에 덕이 드러나 있는 한 인디오 아저씨가 깃발을 흔들자 사람들은 황토로 만든 둥그런 술병을 돌려 마시며 돌아가며 즉흥적인 노래를 불렀다. 나는 이 모든 의식이 낯설지 않았다. 평화를 존중하고 자연과 하모니를 이루며 감사해하는 그 모습이 동양의 정신과 닮아 있었다. 그들에게 ‘파차마마’란 신이자 공존하는 그대로의 자연이었던 것이다.

아름다운 굴레, 원주민의 베틀

쿠스코에 잠시 정착해 직물짜기를 배우다 베틀이 인생의 굴레가 된
여성의 삶을 만나다
쿠스코에 2개월간 정착한 목적과 이유는 단순했다. 우리가 있는 모든 곳이 ‘집’이 된다는 것이 우리가 생각하고 추구하는 삶의 방식이었기 때문이다. 비록 안락함과 청결함이라는 부분에서 조금 결핍된다 할지라도 육체와 영혼이 쉴 수 있는 공간은 ‘집’이라고 불리는 데 부족함이 없었다. 그러고 보면 세상이 바라보는 ‘집’은 투자 대상이지 영혼이 쉴 수 있는 곳은 아니라는 생각도 들었다. 우리는 운 좋은 사람들이라서 어딜 가든 머물 공간을 찾을 수 있었다. 그것이 작은 오두막이든 창고든 중요치 않았다. 쿠스코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달동네 언덕의 옥탑방에서 오랜 여행에 작은 쉼표를 찍고 무거운 가방을 내려놓았다. 그때 가장 좋았던 것은 당분간은 매일 같은 곳에서 잠을 잘 수 있다는 것이었다.

» 지(맨 오른쪽)가 베틀로 직물을 짜는 친체로 여성들과 얘기를 나누고 있다.

쿠스코에 도착해서 가장 관심을 가진 것은 전통 직물짜기였다. 그것을 배워보고 싶었다. 시내의 한 고급 부티크에서 하루 2시간 과정의 강좌가 있었지만 가격이 비쌌다. 가게의 아르바이트생이 이곳에서 10만원이 넘는 벨트가 ‘친체로’라는 인디언 마을에서 오는 것이라고 귀띔해주었는데, 그녀는 우리가 고가의 물건을 살 만한 인물이 아니라는 걸 금세 알아차린 듯했다.

다음날 우리에게 베틀 기술을 가르쳐줄 선생님을 찾아 친체로로 갔다. 인상 좋은 아줌마에게서 벨트를 하나 사고 기본 기술을 가르쳐달라고 했다. 그녀는 일주일에 한 번씩 장을 보러 쿠스코 시내로 나오는데 그때마다 만나서 가르쳐주었고, 우리는 형편에 맞춰 수업료를 냈다.

대부분의 친체로 여성들이 그렇듯, 그녀는 8살 때부터 베틀 다루는 기술을 배웠다. 하지만 직물 짜는 일은 생각보다 훨씬 어렵고 시간이 많이 드는 작업이었다. 특히 계속 연결되는 무늬를 새기기 위해 수십 개나 되는 실들을 하나하나 세고 정렬해야 하는 과정이 헷갈렸다. 우리가 배운 것은 커다란 기계가 아닌 길다란 나무조각 두 개로 이뤄진 휴대용 베틀이었다.

일주일에 한 번쯤은 현장 학습차 친체로를 찾았다. 베틀로 직물 짜는 것도 구경했고, 무엇보다 그곳에 가면 딸기를 섞어 만든 ‘치차’(옥수수로 만든 막걸리)를 마실 수 있었다. 이는 마을 아낙네들이 특히 좋아하는 음료였다. 한 잔을 사먹으면 언제나 서비스로 한 잔을 더 받는데, 두 잔을 다 마시면 나는 어느새 알딸딸해지고 얼굴이 화끈거렸다.

한번은 벨트를 만드는 데 필요한 털실을 샀다. 조금 바가지를 썼지만 이번만은 애교로 받아주었다. 털실을 만드는 작업이 얼마나 손이 많이 가는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을 아낙네들은 양털을 직접 깎고 꼬아서 실을 만들고 천연 재료를 이용해 여러 색으로 물을 들였다. 내가 특히 좋아한 빨간색 실은 선인장에 기생하는 개미처럼 생긴 빨간 벌레를, 초록색 실은 풀을 삶아서 물을 들였다고 했다. 하지만 요즘에는 이런 작업들이 구식으로 여겨져 시내에 나가 화학염료를 사다가 염색한다고 한다. 우리는 그들이 지켜나가는 전통 방식이 매우 소중한 것이며, 또한 외국인을 상대로 판매할 때 천연 염색이 더 높은 값을 받을 수 있다고 말해주었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공장에서 찍어낸 물건들이 더 가치 있는 것일지 모르겠다. 우리가 산업문명에서 자연으로 돌아가는 삶을 동경하는 것처럼 어쩌면 자연에서 모든 것을 얻어 자급자족하는 그들에게는 돈으로 뭐든 얻을 수 있는 편리한 우리 사회가 동경의 대상일 수도 있다.

우리의 베틀 실력은 걸음마도 못 뗀 아기 수준에 그쳤다. 친체로 마을을 의미하는 고유의 ○× 무늬가 들어간 가장 간단한 벨트를 만드는 데 10일이 넘게 걸렸다. 오랜 시간 앉아 있자니 하체가 쑤시고, 얇은 실들만 보고 있으니 고개도 눈도 아팠다. 그리고 그녀들의 삶을 가득 채운 베틀이 아름답기만 하다고 여긴 나의 생각도 바뀌었다. 직물짜기는 어쩌면 그녀들이 바꾸고 싶어도 바꿀 수 없는 인생의 굴레임을 아주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태양이 태어난 곳에 이르다

태양의 섬에서 신의 눈물을 마시고
바람을 맞으며 거지가 된 태양신을 느끼다
볼리비아로 떠나는 날, 쿠스코에 온 뒤 처음으로 비가 내렸다. 오랫동안 비가 내리는 쿠스코를 바라보았다. 창문 너머 보이는 집들의 옥상, 그 옥상 위에 잔뜩 걸린 빨래들. 남미의 특징 중 하나는 비가 억수같이 와도 절대 빨래를 걷지 않는다는 것이다. 곧 햇빛이 내리쬘 것이고 그럼 젖은 빨래도 다시 마를 것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해가 뜸을 알고 있는 것처럼 우린 우리가 다시 쿠스코로 돌아올 것을 알고 있었다.

페루와 볼리비아 국경지대에는 광활한 티티카카(Titicaca) 호수가 있다. 멀리 수평선이 하늘과 맞닿은 이 호수는 바다에 와 있다는 착각이 들 정도로, 직접 보지 않고선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넓었다(폭가 무려 160km). 우리는 호수의 수많은 섬 중에서 잉카인들이 가장 성스럽게 여기던 태양의 섬(Isla del sol)에서 며칠 캠핑을 하며 보내기로 했다.

» 지와 다리오 제공

티티카카 호수에 암흑의 나날이 계속되던 때, 인티(Inti)라고도 불리는 태양 창조의 신 비라코차(Viracocha)가 태양에게 빛을 가져오라고 명령했다. 그러자 이 섬의 작은 틈 사이로 태양이 떠올랐다. 그는 달과 별을 차례로 만들고 태평양을 걸어서 건넌 뒤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고 한다. 잉카의 전설에 따르면, 비라코차는 거지 모습을 하고 지구를 떠돌아다니고 있다고 한다. 자연을 창조한 신을 우리 중 한 사람, 그것도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의 모습으로 형상화한 그들의 인간적인 신화에 나는 감동했다.

배를 타고 태양의 섬에 내리자 잉카인들이 만든 계단이 나왔다. 별로 높지 않은 계단을 오르는데도 나는 숨이 턱턱 막혔다. 생각해보니 우리는 해발 4천m에 있었고, 언제나 가볍다고 생각했던 나의 15kg짜리 배낭은 내 어깨를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다. 쿠스코에서의 긴 정착 생활이 남긴 부작용 탓도 있었다. 힘겹게 계단을 다 오르자 세 개의 물줄기가 나왔다. 아무리 극심한 가뭄에도 한 번도 마른 적 없다는 이 섬의 유일한 샘이었다. 쿠스코에서도 수돗물을 마셨던 우리는 이 지하수를 의심하지 않고 벌컥벌컥 마셨는데 주변의 외국인들은 물을 입에도 대지 않았다.

뜨거운 태양과 높은 고도에 섬을 횡단하며 말라버린 내 입이 그렇게 많은 물을 원하게 될 줄 몰랐다. 나중에 우리는 서바이벌 정신으로 티티카카 호숫물을 마셔야 했다. 섬의 북쪽에 사는 사람들도 호숫물을 그대로 마셨다. 배탈과 엄청난 갈증 중에서 어느 쪽을 선택하게 되는지는 그 상황에 있어본 사람만이 알 수 있다. 신의 눈물이라는 생각으로 마신 결과 다행히 우리에게는 아무 탈도 없었다.

천천히 걸어온 탓에 이틀이 걸려 섬의 북쪽에 도착했다. 해의 발자국이라 불리는 흰 바위 옆에 비교적 온전하게 보존된 잉카유적지 하나가 있었다. 잉카시대에 태양신을 만나러 온 순례자들을 위한 숙소였다.

우리는 아무도 없는 강변에서 따뜻한 해를 온몸으로 받으며 아무 소리도 없는 완전한 고요를 경험했다. 그리고 나는 ‘살아 있다’는 느낌을 강력하게 받았다. 야망도 행위도 소리조차도 존재하지 않는 그곳에서 오히려 삶의 충만함을 느낀다는 것이 이상했지만 사실이다. 내가 깨닫지 못했던 진리를 몇만 년을 존재한 호수가 스승이 되어 알려주는 것 같았다.


밤이 되자 태양은 서쪽으로 떠나고 다시 거센 바람이 집을 찾아온 듯 섬으로 돌아왔다. 바람을 피하기 위해 우리는 유적지 안에 텐트를 쳤는데 이곳에서의 하룻밤이 나에게는 그 어떤 고급 호텔에서의 하룻밤보다 더 의미 있었다. 잉카의 순례자들이 머물던 그곳에서 그들의 태양신 비라코차는 남루한 방랑자의 모습을 한 우리 안에 함께 있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