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류, 술, 멋

산수화 속으로 떠나는 여행

醉月 2011. 2. 24. 08:55
산수화 속으로 떠나는 여행

  "산수화 속에서 산책하고 노닐면서, 숨가쁘게 사는 현대인들이 조금 느리게 숨쉴 수 있는 '숨구멍'을 찾을 수 있기 바랍니다."

국제신문은 새 전면 문화기획 시리즈 '이성희 시인의 산수화 산책'을 8일부터 매주 연재한다. 이 시리즈의 필자 이성희(사진) 시인은 "제가 쓰게 될 글들의 미학적인 의미 같은 것을 먼저 말하기보다 산수화 속의 트인 공간, 여백, 활달한 붓질에 대해 먼저 독자들께 상기시켜 드리고 싶다"고 말했다. 이 같은 산수화의 특징들이 "지친 심신을 달래주고 상상력을 자극하는 이미지 여행을 선사할 수 있을 것"이라고 그는 믿기 때문이다.

'이성희 시인의 산수화 산책'은 동아시아의 산수화를 '미술사적'으로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지의 여행'으로 그려나갈 예정이다. 매회 동아시아 산수화 한 폭이 주요 대상으로 정해지며, 이 산수화의 이미지와 맞물리는 서양화, 그리고 이 산수화의 이미지와 이어지는 시 또는 산문이 '이미지 여행'의 동반자가 된다. 이런 점에서 이 시리즈는 이 시인이 지난 2001년 국제신문에 1년 동안 연재해 큰 반향을 일으켰던 '이미지 오디세이'의 연장선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다룰 예정인 화가들로는 안견 정선 심사정 김홍도 최북 이인문 김정희 조희룡 안중식 등 한국의 화가들, 석도 마원 곽희 예찬 왕몽 서위 팔대산인 제백록 등 중국의 화가들, 그리고 일부 일본의 화가들이 있다"고 이 시인은 말했다.

시인이자 철학자, 미학자인 필자가 미술 문학 미학을 아우르면서 '산수화'에 관해 쓰는 이 글들은 동아시아 산수화에 대한 흥미로운 접근이 될 것으로 보인다. 이 같은 시도는 그 동안 별로 이뤄진 적이 없기 때문이다.

이 시인는 부산대 철학과를 나와 같은 학과 대학원에서 노자 연구로 석사학위를, 장자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88년 '문예중앙' 시 부문 신인상을 받으며 시인으로 등단했으며 '돌아오지 않는 것에 관하여' 등 시집 2권을 냈다. 저서로는 '미술관에서 릴케를 만나다'(컬처라인)가 있으며 현재 금성고 교사이자 한국해양대 강사로 활동하고 있다.

 

<1> 안견의 몽유도원도

여보게, 내 꿈에 본
무릉도원을 그려주게
구름과 계곡에 갇힌데다
입구마저 꽁꽁 숨었다네
찾지 못한들
참이 아닌들 어떠한가
내 처지 잊고 편히 쉴 곳
꿈 아니면 어디 있겠나
 
  안견의 '몽유도원도'. 동아시아인의 이상향인 무릉도원은 수직적이며 비애가 가득 서려있다.

동아시아 산수화는 우리들이 잃어버린 세계이다. 산수화를 산책하면서 우리는 동아시아의 굽이진 옛길과 신선한 바람, 그리고 정신과 상상력을 다시 만나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그곳에서부터 숨가쁜 오늘의 삶에 지친 심신을 위로 받고, 새로운 생명을 꿈꾸는 이미지의 여행을 떠날 수 있게 되리라. 이 시리즈는 매주 수요일 연재된다.

주막집에서 기장밥을 시켜놓고 도사 여옹 앞에서 신세 한탄을 하던 노생이 설핏 잠이 들었다. 노생은 꿈속에서 80년의 파란만장한 삶을 살다가 잠에서 깨어났다. 깨어보니 옆에는 여전히 여옹이 앉아있었고 주막집 기장밥은 아직 뜸이 들지 않고 있었다. 당나라 심기제의 소설 '침중기'의 이야기다. 삶이란 한바탕 꿈인가?

조선의 가장 위대한 산수화 한 점이 꿈과 연관되어 있는 것은 참으로 기이하다. '몽유도원도', 그 앞에 서면 중력이 사라진 허공에 떠있는 듯, 현기증이 난다. 기암괴석의 산들이 마치 구름처럼 피어 있기 때문일까. 이 곳은 꿈속이다. 잘 알려진 것처럼 이 그림은 어느 화창한 4월의 봄날(1447년 세종 29년), 안평대군이 꿈꾼 도원의 풍경을 당대 최고의 화사 안견이 사흘 만에 완성한 것이다.

길을 잃은 어부가 복사꽃 만발한 무릉의 계곡을 따라가다가 발견하게 된 숨겨진 마을 이야기를 도연명은 '도화원기'(桃花源記)에 쓰고 있다. 그 끝은 이렇다. "남양에 사는 유자기라는 사람은 고상한 선비다. 이 얘기를 듣고 기꺼이 도원을 찾아보려고 했으나 이루지 못한 채 얼마 안 되어 병으로 죽었다. 마침내 그 뒤로는 그곳으로 가는 나루를 묻는 사람이 없게 되었다." 그러나 그곳으로 가는 현실적 가능성이 사라져버렸을 때, 그때 비로소 무릉도원은 동아시아인의 이상향이 된다. 이상향이란 언제나 현실의 불가능성 위에 축조된다. 그리하여 황금빛 이상향의 뒷면에는 저녁 이내(嵐) 같은 비애가 서려있기 일쑤다. 하수상한 시절, 그곳을 풍류남아 안평이 꿈속에서 찾았다. 어디선가 아득히 비애의 향내가 스민다.

이 장엄하고도 쓸쓸한 꿈길을 따라가 보자. 화면은 사선의 흐름과 그 흐름을 단절시키는 수직선의 구도로 되어 있다. 횡으로 펼쳐지는 그림의 서사는 화면의 왼쪽 아래의 현실세계에서부터 오른쪽 상단 복사꽃이 흐드러지게 만발한 도원까지 사선을 이루면서 전개된다. 그러나 기괴한 형상으로 솟아오른 수직의 산들이 두 세계의 연결을 단절시키고 있다. 단절은 가운데 깊은 계곡의 물길을 만들면서 심화되는데, 여기서 사람의 길은 끊긴다. 화가는 다른 세계로 들어가는 동굴을 화면 아래에 용의주도하게 숨겨놓았다. 이 동굴로 들어서기 위해서 우리는 그림의 경계선을 벗어났다가 다시 거슬러 올라와야만 한다. 그곳으로 가는 길이 실상은 없다는 것을 화가는 암시하려 했던 것일까?

도연명이 '도화원기'에서 '빛이 나는 동굴'이라고 말한 그 동굴이다. 동굴이란 본디 어두운 곳이 아니던가. 빛과 어둠이 만나는 내밀한 모순에서부터 도원은 시작된다. 동굴을 벗어나면 기암괴석에 둘러싸인 복사꽃 도원이 자욱한 안개 속에 펼쳐진다. 누가 꿈꾸는가? 여기서부터는 바위가 꿈꾼다. 저 몽환적인 바위 봉우리들은 제각기 꿈속에서 솟아오르는 환상의 형상들이 아니라면 무엇이겠는가. 안견은 산을 운두준(雲頭)으로 그리고 있는데, 운두준이란 뭉게뭉게 피어나는 구름의 머리처럼 산의 주름을 그리는 기법이다. 그러나 운두준은 여기서 단지 기법이 아니라 이미지다. 도원을 둘러싼 산들은 구름의 이미지로 숨쉬며, 기어코 구름으로 피어오르고 있다. 육중한 암괴와 가벼운 구름이 하나로 융합되는 기묘함.

현대의 조각가 브랑쿠시는 돌에 신성과 에너지를 부여하여 돌이 중력을 이기고 날아오르기를 꿈꾸었다. 그의 조각은 비상하는 돌인 셈이다. 그러나 그것은 이미 안견의 그림 속에 가득하다. 하늘로 솟아오르거나 허공에 거꾸로 매달린 돌들을 보라. 그리하여 도원은 바위산에 첩첩이 싸여있지만 동시에 구름 가운데 피어올라 있기도 한 고도의 질적인 공간이다. 당나라의 시인 왕유는 "거닐다 흐르는 물 다하는 곳에 이르러선/ 앉아서 구름 이는 때의 장관을 바라본다"고 하였던가.

 
로랭의 그림 '하갈과 이스마엘'. 서양인들이 꿈꾸는 수평적 구도의 이상향이 잘 나타나 있다.  
이상향의 공간은 동서양이 사뭇 다르다. 17세기 프랑스의 화가 클로드 로랭은 서양인들이 꿈꾸는 황금시대의 이상향을 그렸다. 그가 보여준 이상향은 주로 물가에 넓게 트인 평원지대이다. 거기는 옛날의 황금시대를 환기시키는 고대 건축물이 있고 소나 양들이 한가롭게 풀을 뜯는 목가적인 공간이다. 그 공간은 황혼 빛을 받자마자 미묘한 색조의 변성을 이루며, 풍경이 감추어둔 서정적인 신비를 조용히 연다. 도스토예프스키와 니체는 로랭의 그림을 보고 경이로운 황홀경을 체험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동아시아인들은 이상향을 찾기 위해 계곡을 타고 산으로 올랐다. 로랭의 공간이 수평이라면 안견의 공간은 수직이다. 산수화에는 언제나 노자(老子)에서 비롯된 산수자연 애호 취미와 산으로 상징되는 신선세계로의 상승을 꿈꾸었던 도교적 열정이 깔려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제 우리의 열정은 도원으로 상승한다. 자욱한 안개 속에 핀 화사한 복사꽃. 프로이트라면 여기서 성적인 소망을 발견했을 법하다. 복숭아의 형태와 빛깔은 야릇한 '도색' 판타지를 불러온다. 실로 도원은 패각류의 속살이나 자궁의 형태와 닮지 않았는가. 그러나 시인은 안개 속으로 들어간다. "안개 속에서 사람들은 형용사로 이야기한다"(허만하). 꽃들은 차라리 안개가 피워내는 율동 같다. 여기서 우리는 모든 이름과 명사의 중압감을 던져버리고, 주어도 목적어도 사라진, 그저 형용사로서만 속삭일 일이다. 어쩌면 이상향은 형용사만 남은 세계가 아닐까. 붉은, 혼곤한, 기이한, 황홀한… 그러나 적막한. 이 황홀한 형용사의 세계는 왜 이리 소슬하고 적막한가. 그것은 그림 속에 사람이 한 명도 보이지 않기 때문만은 아닌 것 같다. 꿈과 이상의 불가능성 때문인가. 그 불가능성이 어느새 고단한 현실을 환기시키기 때문인가.

'몽유도원도' 당시의 현실 속으로 한 걸음 들어가면 우리는 처절한 권력투쟁의 현장과 마주치게 된다. 야심가 수양대군에 의해 사약을 받아든 안평, '몽유도원도'에 찬시를 바쳤던 안평의 추종자들 앞에 불어닥친 피비린내 나는 광풍. 안평의 꿈은 이 현실로부터 벗어나고 싶었던 소망의 표현이었을까? 그리고 안견은 이 적막한 황홀경을 현실에 대한 어떤 예감으로 그렸던 것일까? 덧없어라, 복사꽃 흐드러진 봄날의 꿈이여.

인간사의 한 굽이 격랑이 지나간 다음, 낙향한 조선의 한 선비는 그래도 이렇게 꿈꾸고 있다. "시냇가에 혼자 앉아, 명사(明沙) 조한 물에 잔 씻어 부어 들고, 청류를 굽어보니, 떠오나니 도화(桃花)로다. 무릉이 가깝도다. 저 매히 귄 거이고."(정극인의 '상춘곡')


◇ 산점투시(散點透視)

르네상스 이후 서양화의 대부분은 하나의 고정된 시점에 의한 투시원근법으로 그려진다. 반면 동아시아의 산수화는 3원법이라는 다양한 시점이 그림의 전개를 따라서 이동하는 산점투시(散點透視)를 보여준다.

'몽유도원도'라는 꿈길은 그 길을 걷는 화가의 위치와 심리 상태에 따라서 시점이 이동한다. 현실세계는 멀리 넓은 곳을 바라보는 평원법, 도원의 입구에서는 높은 곳을 올려다보는 고원법으로 숭고한 느낌을, 두 세계를 나누는 계곡에서는 깊은 곳을 내려다보는 심원법으로 단절의 심연을 표현한다. 그리고 도원에 이르면 갑자기 시점은 하늘로 솟는다. 조감도의 시점이다. 중력을 이기고 구름처럼 피어올라야만 구름 속의 도원을 만날 수 있다는 뜻일까.

<2> 석도의 위명육선생산수책

 
  석도의 '위명육선생산수책'. 대담하게 근경을 생략해 상단의 운해와 함께 그림 전체가 구름의 여백으로 둘러싸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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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은 마치 무궁하게 출렁이며 흘러가는 무한의 여백이 방금 빚어낸 듯이 구름 위에 솟아올라 있다. 무한은 창공에서가 아니라 발 아래에서 저렇게 문득 가까이 다가와 있다. 석도(石濤·1642~1718)의 '위명육선생산수책(爲鳴六先生山水冊)'은 파격적이고 대담한 구도 위에 금세 비에 씻긴 듯한, 한없이 투명하고 깊은 산의 내면을 펼쳐 보이고 있는 것이다. "비 그친 아침의 물비린내"(함성호)가 난다.

핏발이 선 칼날과 창이 번득이고 성과 집은 불타고 있었다. 그날. 그리고 밤. 명말청초(明末淸初)의 혼란 속에서 명 왕조의 종실이었던 정강왕 주형가의 집안은 같은 종실이면서 황제를 참칭했던 당왕 주율건의 군대에 의해 유린당하고 도륙당했다. 전 가족이 몰살되는 참혹한 현장의 뒤로 주형가의 4살짜리 아들은 내관의 등에 업힌 채 어둠 속으로 잠적했다. 이후 아이는 무창의 한 절에 맡겨져 승려로 자라게 되는데, 그가 바로 그림으로 일세를 풍미하게 되는 석도이다. 이름 주약극, 법명 도제(道濟), 호 고과(苦瓜), 자 석도. 이 복잡한 내력을 가진 기구한 고과화상의 붓은 한평생 분노와 비애, 욕망과 달관의 틈 사이에서 안식하지 못한 채 방황하고 춤추게 된다.

인생의 내력만큼 강렬한 개성의 에너지를 가졌던 석도는 동기창에 의해 확립된 전통적 방식에 집착하지 않았다. "나는 스스로의 법을 사용한다", "어떤 법도 세우지 않고, 어떤 법도 버리지 않는다"라고 그는 외쳤다. '위명육선생산수책'에는 고법(古法)의 구도를 상쾌하게 파해버린 청신함이 있다. 일반적으로 산수화에는 근경과 중경, 그리고 원경이 적절한 규모로 화면에 배치되기 마련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석도는 대담하게 근경을 생략해버림으로써 근경과 중경 사이를 가로질러야 할 구름의 띠가 바로 화면의 바닥에 깔리게 되었다. 그리하여 상단의 운해와 함께 그림 전체가 구름의 여백으로 둘러싸이게 되었다. 이제 산은 자꾸만 무한으로 확산되려는 여백의 소용돌이 속에 신비롭게 떠있는 것만 같다. 여백(無)과 형상(有)은 서로 밀어내고 서로 스며들면서 하나의 리듬을 이룬다. 그리하여 형상을 넘어선 형상, 붓이 끝난 곳에서 시작되는 의미가 무궁하게 생성된다.

서양화에는 여백이 없다! 그러나 예외는 있다. 렘브란트를 보라. 그의 화면을 가득 채우고 있는 어둠은 형상과 색채가 사라지는 무(無)이면서, 빛의 돌연한 솟아오름을 가능하게 하는 심연의 여백이다. '명상하는 철학자'에는 그 신비로운 여백이 화면 전체를 휘감고 있다. 한 시인은 그림을 이렇게 감상하고 있다. "어둠에서 내려오는 나선형 계단과 힐끗 보이는 황량한 복도는, 감상자로 하여금 빛나는 물질을 분비하는 이상한 조가비의 내부를 엿보게 한다"(발레리). 빛과 어둠을 기묘하게 배합시키면서 내려오는 나선형의 계단을 통하여 우리는 조가비나 소라의 내부로 들어서게 된다. 나선이 깊이를 얼마나 내밀하게 만드는가. 나선으로 흘러들어가는 소라의 내부보다 더 고요하고 깊은 해저가 어디 있으랴. 소라껍질이 그 주인의 몸이 커지는 대로 나선으로 깊어지듯이 '명상하는 철학자'는 철학자의 고뇌와 명상이 깊어지는 만큼 기이한 빛을 발산하며 깊어지는 철학자 내면의 심층이다.

렘브란트의 그림에서 어둠에 둘러싸인 철학자가 있다면 석도의 그림에는 구름에 둘러싸인 은사(隱士)가 있다. 렘브란트의 여백이 철학자의 고독한 내면, 그 심층의 지하로 고요히 자맥질 치고 있다면 석도의 여백은 산수자연의 기운과 융합하면서 무궁한 우주의 율동으로 확산된다.


松下問童子 소나무 아래 동자에게 물으니
隱士採藥去 스승은 약초 캐러 갔다고 하네
只在此山中 어딘가 이 산중에 계시거늘
雲深不知處 구름이 깊어 있는 곳 모르네



 
  렘브란트의 '명상하는 철학자'. 화면을 가득 채운 어둠은 빛의 돌연한 솟아오름을 가능하게 하는 심연의 여백이다.
'퇴고(推敲)'의 고사로 유명한 당나라의 시인 가도(賈島)의 시, '심은자불우(尋隱者不遇:은사를 찾았으나 만나지 못하다)'다. 이 시는 짧고 매우 쉬운 말로 쓰여졌지만 문자를 넘어선 여운의 울림으로 아득하고 광활하다. 산과 깊은 구름은 은사를 가려주고 있다기보다 은사와 하나로 결합되고 있다. 이 은사는 세속의 집착과 욕망에서 벗어나 자연과 시적인 합일을 추구하였던 장자(莊子)의 후예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석도 그림 속의 방문자는 요행히 은사와 만날 수 있었나 보다.

'위명육선생산수책'을 보면 근경은 생략되고 원경은 중경 뒤의 운해에 잠기면서 대뜸 중경만이 클로즈업된다. 그리하여 산의 내밀한 풍경 한 장면이 문득 들킨다. 나선형의 구름띠 속에 드러난 산의 내부. 한 줄기의 굽이진 길이 있고, 그 길에서 세속의 방문자가 시동을 데리고 있는 은사와 만나는 순간이다. 방문자는 화면 왼쪽 아래에 살짝만 드러난 세속세계(근경)로부터 왔을 것이고, 은사는 저 운해에 아득히 잠긴 원경의 푸른 산에서 내려왔으리라. 화면에서 거의 사라진 근경과 원경은, 둘 사이를 잇는 한 줄기의 길과 그 길 위의 두 사람을 통하여 지금 거기에서 만나고 있는 것이다. 혹시 이백의 '산중문답'과 같은 허허로운 문답이 오고갔을까? "왜 푸른 산에 사느냐고 묻는 그 말에/웃으면서 대답하지 않으니 마음 스스로 한가하네."

석도의 삶은 모순으로 가득 차 있다. 명 왕조의 종실로서 그는 청왕조에 대한 깊은 원한을 가지고 있었지만 여러 차례 청 왕조의 신하를 자처하면서 입신양명을 구했으며, 산사람을 자처하면서도 세속의 삶을 살았다. 승려이면서 도사였고, 대담하고 과감하면서도 여리고 섬세했다. 석도는 만년에 양주에 정착하였는데 '크게 씻어내는 집'이라는 의미의 '대척당(大滌堂)'을 짓고 호도 '대척자'라고 지었다. 그는 무엇을 씻어내고 싶었던 것일까? 씻음을 통하여 그는 모순된 자신의 삶을 치유하고자 했던 것일까? 이 청신한 만남의 그림은 세속적 야심의 불길이 점차 식어가던 해, 그의 나이 53세, 양주에 정착한 그 해(1694년)에 그려진 것이다. 분열된 마음, 찢겨진 삶을 치유하고 화해시키고자 함인가? 두 세계, 세속인과 은사 사이의 작은 만남이 호젓한 산길을 생동시키고 산과 운해를 출렁이게 한다. 푸른 정적 속에 점점이 젖는 새소리, 솔숲 사이에서 솟는 투명한 바람, 산의 내밀한 향기들이 문득 화면에 가득하다.

그러나 우리는 석도의 산길에서만 머물러 있을 순 없다. 이제 하산하여 저 어지러운 먼지 속의 저자거리로 돌아가야 한다. 해동의 대시인 최치원이 금천사(金川寺)를 떠나 산을 내려오면서 썼다는 시 한 구절이 절실하게 다가온다.

'문 앞의 한 줄기 길을 웃으며 가리켰는데/ 산 밖으로 나가자마자 천 갈래로 갈라졌다네'.

 

<3> 심사정의 선유도(船遊圖)

 
  심사정의 '선유도'. 격랑을 이루는 물살의 질감과 그림 속 네 개의 시선은 긴장과 균형의 절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화가가 죽었을 때, 그의 집에는 염을 할 돈조차 없었다. 청나라 연경에서도 그림을 찾는 구매자가 많았다는 당대 조선 최고의 화가, 현재(玄齋) 심사정(1707~1769), 그의 일생은 그러했다. 좌절과 가난, 그리고 고독 속에서, 그러나 그는 하루도 붓을 놓지 않았다고 한다. 그가 만년에 그린 작은 그림 한 점, '선유도'는 격랑의 파도만큼이나 심상치 않다. 저기가 어딘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요동치는 물 가운데 배 한 척이 흔들리고 있을 뿐. 물결은 요동치면서 한 불우한 화가의 운명과 삶, 그리고 꿈과 몽상을 한 자리에 불러오고 있다.

심사정이 유산으로 상속받은 것은 어둠이었다. 그의 할아버지 심익창은 노론과 소론의 권력투쟁 과정에서 당시 왕세자였던 연잉군(영조)을 시해하려다 실패하여 역적이 되었다. 집안은 풍비박산이 났다. 왕정의 시대, 역적의 자손으로 태어난 아이에게 주어질 수 있는 삶이란 무엇이겠는가? 쉴 새 없이 불어오는 폭풍우와 굽이치는 파도, 우울한 습기, 해소될 길 없는 목마름, '천지에 외로운 한 마리의 갈매기(天地一沙鷗)'(두보) 같이, 그의 삶은 그러했을 것이다. 불행과 고독은 그의 몸에 새겨진 지울 수 없는 문신이었던 것이다.

'선유도'의 화면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격렬한 물살은 심사정이 만났던 괴로운 운명의 모습일까. 그러나 보고 있노라면 차라리 정지용의 감각적인 언어가 떠오른다. '바다는 뿔뿔이/ 달아나려고 했다.// 푸른 도마뱀 떼같이/ 재재발렀다.// 꼬리가 이루/ 잡히지 않는다'(바다 2). 화가는 화면 안에 물과 배 외에는 다른 아무 것을 그리지 않았기 때문에, 도마뱀 떼같이 뿔뿔이 달아나는 요동은 경계도 없이 전 화면을 진동시키고 물안개 띠를 따라 화폭을 넘어 자꾸만 밀려온다. 우리 몸 속, 물의 원소들이 따라서 일제히 요동한다. 아득한 근원에서 우주를 담고 있는 물이 함께 출렁인다.

그러나 이러한 움직임을 보여주는 수면과는 달리 배 위의 두 선비는 경이로운 평정 속에 있다. 굽이치는 파도, 요동하는 배, 중심을 이동하는 학, 삿대를 물 속에 깊이 박는 사공, 심지어 매화나무조차 꿈틀거리는 듯 모두가 움직임 속에 있지만 오직 두 명의 선비만이 먼 곳에 시선을 두고 고요한 몽상에 잠겨 있다. 배 위의 매화나무와 학은 배를 타고 있는 선비 중 한 사람이 송나라 시인 임포(林逋)임을 짐작하게 한다. 임포는 평생 처자도 없이 항주의 고산에 혼자 은거했던 시인이다. 그는 초당 주위에 365그루 매화를 심어놓고 학을 기르며 살았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가 '매화 아내에 학 아들(梅妻鶴子)'을 가졌다고 말하곤 하였다.


疎影橫斜水淸淺 성긴 그림자 맑고 얕은 물에 비스듬히 기울고
暗香浮動月黃昏 그윽한 매화 향기는 달빛 어린 황혼에 떠도네.


 
  일본 에도시대 호쿠사이(1760~1849)의 작품인 일본 전통 목판화 '시나가와 파도 뒤로 보이는 후지산'.
임포의 시 '산원소매(山園小梅: 동산의 작은 매화)'이다. 시를 나직이 읊조리노라면 '성긴 그림자(疎影)'와 '그윽한 향기(暗香)'가 온몸에 스민다. 고개를 들면 시선이 닿는 곳마다 허공에 매화꽃이 한 송이씩 피어날 것만 같다.

그러나 꽃이 없는 '선유도'의 매화나무를 보자. 나무는 단순히 배 안의 소품이 아니다. 오히려 그 나무의 뿌리가 기이하게 퍼져나가 이 배를 이루고 있는 것은 아닌가. '선유도'의 배는 매화나무의 변형이다. 그리하여 가을날, 앙상한 나무는 배의 돛대가 되어 학을 맞이하고 있다. 상처 입은 화가는 밀려드는 세파(世波) 위에서 임포를 꿈꾸는 것이다. 그의 고독과 은일과 초월을 말이다.

화가는 신묘한 솜씨의 속필로 격랑의 물살을 그렸는데, 그 물은 마치 끓고 있는 것만 같다. 물은 지금 거의 비등점에 이르고 있는 모양이다. 이제 곧 끓는 물은 기화되어 상승할 것이다. 초월의 상승! 일본 에도(江戶) 시대, 호쿠사이(1760~1849)가 그린 우키요에(浮世繪·일본의 전통 목판화)인 '시나가와 파도 뒤로 보이는 후지산'은 성난 물을 매우 극적으로 보여준다. 배를 덮칠 듯이 파도는 거대하게 솟아오른다. 파도는 입을 벌리고 물의 내면을 사납게 드러낸다. 물은 모든 것을 그 내면 속으로 삼켜서 깊고 푸른 심층으로 끌어내리려 한다. 그리하여 '물은 날카로운 발톱으로 가득 차 있다'(빅토르 위고). 이 파도를 그리기 위해 호쿠사이는 수 년을 바닷가에서 파도를 관찰했다고 한다. 그러나 '선유도'의 물은 끓어오르며 공중으로 상승하려고 한다.

전율적인 숭고미를 드러내기 위해 호쿠사이는 시점을 수면 가까이로 낮게 둠으로써 파도의 높이를 강조하였다. 반면 심사정은 시점을 허공에 둠으로써 물결의 표면 위에 펼쳐지는 생성을 포착한다. 높이 솟은 호쿠사이의 파도는 아래로 하강하려 하고, 표면에서 끓는 심사정의 파도는 오히려 기화되어 하늘로 상승하려 한다. 발자크의 표현처럼 '물은 불타는 물체'가 되려 하나 보다.

소동파는 만고의 절창인 그의 '적벽부'에서 물의 이미지가 어떻게 하늘의 이미지와 결합하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백로는 강을 비껴 날고 물빛은 하늘과 접하였다. 한 척의 작은 배를 가는 대로 내버려두고 만경(萬頃)의 아득함을 넘어가는데, 넓고 넓어 허공에 의거하여 바람을 타니 그 머무를 바를 모르는 것 같으며, 표표히 날아올라 세상을 잊은 채 자유의 경계를 얻고, 날개가 돋아 신선의 세계에 오르는 것만 같았다'.

소동파의 시선 속에는 물과 하늘의 경계가 사라지고 있다. 그리하여 물 가운데로 배가 나아갈 때 그것은 곧 바람을 타고 허공을 나는 것이다. 끓어오르는 물의 부력은 상승기류가 되고, 배는 새가 된다. '선유도' 역시 이러한 상승의 몽상 속에 있다. 허공으로 그림의 공간을 확장시키고 있는 선비의 시선을 보라. 배를 둘러싸고 알 수 없는 아우라처럼 부드럽게 피어오르는 물안개는 몽상의 내밀한 숙성을 보여준다. 험난한 파도 속에 뿌리를 내린 매화나무가 꿈틀거린다. 수평에서 이루어지는 물살의 율동을 수직으로 이어받으면서 솟아오르는 매화나무의 율동은 곧 학의 우아하고 눈부신 비상으로 이어질 것이다. 날개가 돋아 신선의 세계로 오르다! 심사정, 그 외로운 혼의 황홀한 뱃놀이다.

심사정은 낙관으로 '선묵(禪墨)'을 많이 썼지만, 더러 '호산유유기(湖山有幽氣)'라는 호리병 모양의 도장도 썼다. 호수와 산에는 그윽한 기운이 있다는 뜻이다. 심사정의 외로운 예술혼을 유혹했던 자연의 그윽한 기운은 이제 호수와 산이 아니라 그가 남긴 그림 속에서 우리를 유혹한다. yneaa@hanmail.net


# 그림 속 네개의 시선

'선유도'는 무척 단순한 구도로 보이지만 화가는 교묘하게 네 개의 시선을 교차시키면서 그림의 단순함을 극복하고 있다. 뱃머리의 선비가 전방을 향한 수평의 시선이라면 뒤의 선비는 먼 허공을 향하는 상승의 시선이다. 그리고 등을 보이고 있는 선미의 사공은 삿대를 따라서 물을 내려다보는 하강의 시선이다. 세 개의 시선이 각각 수평과 상하로 향하면서 화폭을 넘어 몽상의 공간을 중층적으로 확장시키고 있다.

그리고 여기에 또 하나의 시선이 숨겨져 있다. 바로 학의 시선이다. 학은 나무 위에서 배를 내려다보고 있다. 학의 시선은 배에서 일어나고 있는 모든 움직임을 관조하면서 사방으로 흩어지기만 하는 시선을 다시 배 안으로 통합시키려 한다. 그리하여 확산과 수렴의 긴장된 균형을 유지시킨다. 이 작은 배 안에서 화가는 얼마나 멋들어지게 시선의 풍요로움과 긴장을 만들어내고 있는가.

<4> 곽희의 조춘도(早春圖)

 
  중국 북송대의 곽희의 '조춘도'. 곽희는 북종화 산수의 대명사로 통한다. '조춘도'는 그의 대표작으로 초봄의 충만한 기운을 표현하고 있다.
싹이 되려는 씨앗
흐르려는 계곡물
터지려는 꽃망울
'봄이 오는 기미'에 취하다


지금 우리는 알 수 없는 힘들과 그 힘에 의해 춤추고 있는 기이한 바위와 나무들의 무도회에 초대받은 것은 아닌가.
미묘한 불안정성이 빚어내는 역동성.
온몸은 그 힘의 율동에 감전된 채 전율을 느낀다.
곽희(郭熙1000~1090)의 걸작, '조춘도'는 산수의 형상을 사생한 것이 아니라 산과 물이 지금 막 솟아오르고 생성되고 있는 사건을 포착한 것만 같다.

시는 당(唐)에서 끝나고 회화는 송(宋)에서 다했다고들 흔히 말할 때, 그것은 송의 이성, 범관, 그리고 곽희가 이룬 산수화의 위대한 절정을 말하고자 함이다. 곽희는 이성의 수려함과 범관의 웅혼한 화풍을 종합하여 북송 산수화의 양식을 완성하였다. 곽희는 70세가 넘은 만년에 궁중화가로서의 최고 지위인 예학(藝學)에 오르게 된다. 그러나 그는 젊어서부터 도가의 학문과 도인술을 익혔으며, 항상 저잣거리를 떠나 산수 속에서 노닐 것을 꿈꾸었다.

'초봄'이라는 이름을 가진 이 그림에는 봄을 알려주는 꽃이나 새들, 물이 오르는 버들도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해조묘(蟹爪描·나뭇가지를 게의 발처럼 그리는 기법)로 그려진 앙상한 나무들 사이로 겨울 바람이 아직도 유령처럼 서성이고 있는 듯하다. 황량한 겨울의 어둠은 끈질기게 근경의 풍경을 끌어 잡는다. 그러나 바위들은 빛을 받아 조금씩 부풀어오르며 진동하고, 앙상한 나뭇가지는 미묘한 에너지로 충전되기 시작한다. 우리가 그림에 귀를 기울일 수만 있다면 또한 어둠을 밀어내면서 계곡을 흐르는 청량한 물소리를 듣게 될 것이다.

'靑石에 어리는/ 찬물소리// 반은 눈이 녹은/ 산마을의 새소리'(박목월의 '산도화 3').

봄은 겨우내 언 계곡이 풀리는 소리의 미묘한 파동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리하여 어느덧 중경을 흐르고 있는 대기(大氣)는 겨울을 이겨내는 신춘의 생기와 빛으로 가득하지 않은가. 곽희는 봄을 그린 것이 아니라 봄의 기미, 계절이 교체되는 자연의 파동을 그린 것이다.

'주역'으로 보자면 '조춘도'는 산() 아래 물()이 있는 몽괘(蒙卦)의 이미지(象)인데, 몽괘는 신생의 생명이 태어나서 얼마되지 않은 어린 시기다. 아직은 몽매함과 어둠 속에 있지만 형통함의 기미를 내포하고 꿈틀거리고 있다. 그리하여 산의 맥은 화면의 어두운 하단에서부터 주산의 꼭대기까지 잠에서 깨어나는 용(龍)처럼 화면 전체를 'S' 자로 가르며 솟아오르고자 한다. 그리하여 용은 왼쪽의 밝음(陽)과 오른쪽의 어둠(陰)을 진동하게 하면서 역동적인 태극 형상의 춤사위를 이룬다. 우주의 춤, 봄이다.

 
세잔의 '로브 거리에서 본 생트 빅투아르산'.명.  
'로브 거리에서 본 생트 빅투아르산'에서 세잔이 그린 산 역시 격렬한 진동 속에 있다. 이는 시각적인 풍경과 그 풍경의 바탕이 되는 기본 형태로 돌아가려는 힘 사이에서 일어나는 진동이다. 세잔은 빛에 따라 순간적으로 변하는 풍경의 표면을 포착하려 했던 인상파를 극복하고자 한다. 그리하여 지속적이고 견고한 풍경의 내적 토대를 발견하려 한다. 여기에서 작용하는 힘은 모든 형태의 기본이 되는 기하학적 덩어리로 분리되려는 힘이다. 반면 '조춘도'는 표면의 포착도, 기하학적 분리도 아니다. 그것은 우주적 생명의 기운과 합일하고자 하는 힘과 율동들이다. 봄이 되려는 힘, 그것은 생명의 힘이 아니고 무엇이랴. '(성인은) 만물과 더불어 생명의 봄을 이룬다(與物爲春)'. 장자(莊子)의 말씀이다.

곽희는 자연에 대한 예민한 감수성과 산수 속에서의 오랜 체험을 통하여 이러한 미묘한 산의 변화를 포착하였다. 실제로 산의 모습은 사람의 위치에 따라 바뀌는 것이기 때문에 걸음걸음 보고 면면마다 보면서 소요하여야 산의 진면목을 얻을 수 있다고 그는 주장하였다. 이러한 체험의 과정은 산수화 속에서 이동시점(산점투시)으로 나타나는데 곽희 자신이 '조춘도'에 멋지게 그것을 실현하고 있다.

화면 왼쪽에 나있는 작은 길을 따라서 오른쪽 계곡 위에 있는 사원까지 걸어가 보자. 우선 산의 입구를 걸어가는 사람들은 언덕 사이로 빛의 대기에 싸인 채 구름처럼 나타나는 웅장한 주산의 봉우리를 올려다보게 될 것이다(고원법). 왼쪽 계곡의 다리를 건널 때쯤이면 그들의 시선은 왼쪽의 넓은 계곡을 따라 펼쳐지는 평원으로 향할 법하다(평원법). 그리고 사원에 도착했을 때 위로 주산의 어두운 뒷면을 올려다보다가(고원법), 폭포가 있는 계곡 아래를 내려다보게 되리라(심원법). 산을 소요하는 자가 산의 면면들과 만나는 체험(시간)이 하나의 화면(공간)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러나 곽희와 동시대를 살았던 소동파는 산 속을 소요하다 산을 잃었다. 동파는 관리로 전근 가는 도중 여산(廬山)을 지나게 된다. 여산의 장려한 풍경 속으로 그는 스며들고 말았다. 그리고 시 한 수만 남는다. '제서림벽(題西林壁)'이다.


橫看成嶺側成峰 가로로 보면 고개요 세로로 보면 봉우리라
遠近高低各不同 멀고 가깝고 높고 낮고 제각각 다르구나
不識廬山眞面目 여산의 참된 모습을 알지 못함은
只緣身在此山中 다만 내 몸이 이 산 속에 있기 때문일세.


위치와 시점에 따라서 산은 변한다. 고개가 되었다가 봉우리가 된다. 산은 살아서 꿈틀거린다. 살아 생동하는 산의 풍경 속에 빠진 소동파는 결국 산의 진면목을 알게 되었을까? 시의 표현대로만 본다면 그는 진면목을 보지 못한 셈이다.

그러나 그가 진면목을 알 수 없다고 말할 때 사실 그는 이미 스스로 여산의 진면목이 되어 있다. 산의 진면목은 지리학자처럼 그것을 분석하여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과 온몸의 느낌으로 하나가 될 때 나타난다. 체험을 통하여 자연의 리듬과 합일하는 것이다. 산 속에서 산과 하나가 되는 것, 풍경 속에서 풍경이 되는 것, 이것이 여산의 진면목이다. 시인은 이것을 '사람이 풍경으로 피어날 때'(정현종)라고 하였고, 장자는 이것을 '물아일체(物我一體)'라고 하였다. '조춘도'에 나타난 산의 체험도 그러하다. 화가의 소요는 산의 파동, 그 속을 흐르고 있는 우주적 생명의 힘찬 리듬과 하나가 되어 함께 춤이 되고자 한다. 이미 화가의 붓은 봄을 만드는 자연의 춤이다.

곽희는 그림을 그리기 전에는 항상 좌우에 향을 피우고 주위 모든 것을 정결히 한 채 고요히 명상에 잠겼다고 한다. '조춘도'를 자세히 보면 주산의 봉우리 사이에 설핏 누각의 그림자가 보인다. 신선의 거처 같은, 길이 끊긴 자리. 붓을 들기 전, 곽희의 명상은 잠시 여기에 머물렀던 것일까?

 

# 이곽파, 북송대 절정의 산수화풍

북송대의 이성과 곽희에 의해 확립된 화풍을 흔히 '이곽파'라고 한다. 이곽파는 중국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와 일본에도 큰 영향을 끼친 산수화 절정의 양식이다. 안견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친 것도 이곽파의 화풍이었다. 대단한 컬렉터인 안평대군이 소장했던 곽희의 그림들을 안견은 감상할 기회가 많았을 것이다. 대체로 이곽파의 화풍은 북방 지역의 화성암 지대 산세를 표현하기 위해 산을 머리가 뭉게구름처럼 피어나는 운두준(雲頭), 혹은 구름처럼 말리는 권운준(卷雲)으로 그렸다. 그리고 나무의 가지는 게의 발톱처럼 보이는 해조묘를 주로 사용하였다. 구도는 대개 근경, 중경, 원경이 점차 상승하면서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거대한 우주적 산세를 이룬다. 산수는 거대하고 웅장하게 표현하고 사람이나 동물은 개미처럼 작게 묘사하여 자연의 장엄과 숭고를 보여준다. '조춘도'에서 거대한 산수 속에 작게 숨어있는 사람들의 다양한 모습을 찾아보는 것도 매우 흥미로운 일이다.


<5> 어몽룡의 월매(月梅)

 
  조선 제일의 '매화 화가'로 평가받는 어몽룡의 '월매'. 달빛과 매화의 그림자가 호젓한 정취를 물씬 자아낸다.
정월달 한국의 창호지에는 매화가 핀다.

김광섭의 시, '창호지' 가운데 한 구절이다. 조선 창호지의 반투명 질감이 매화나무의 그림자를 어루만지는데 적요한 뜨락에는 매화가 핀다. 고담(古淡)스러운 운치다. 시에는 표현되어 있지 않지만 창호지에 매화 그림자가 비치도록 해주는 것은 아무래도 달빛이어야 제격이다. 달빛과 매화의 그림자가 만드는 이 호젓한 정취를 담은 창호지는 또한 어몽룡(1566~?)의 화선지가 되어 유현(幽玄)한 질감의 공간을 펼쳐놓는다.

어몽룡의 생애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별로 없다. 다만 선조 37년(1604년)에 진천 현감을 지냈으며, 매화 그림으로는 조선 제1인자로 평가받았다는 것, 그리하여 황집중의 포도, 이정의 대나무와 함께 삼절(三絶)로 불리었다는 정도다. '월매'를 보면 가히 명불허전(名不虛傳)임을 알겠다.

북송 때 선승 중인(仲仁)은 어느 날 화광사에서 문호 소동파와 의기투합하여 노닐다가 달빛에 비친 매화의 그림자가 창문에 어리는 것을 보고, 그 성글고 소쇄한 맛에 취하여 문득 붓을 들어 따라 그리게 된다. 그것이 묵매화(墨梅畵)의 시작이다. 달빛에 젖은 매화 한 줄기에 시정(詩情)과 선미(禪味)가 가득하다. 어몽룡의 '월매'는 우리를 다시 화광사의 그 달밤으로 초대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적당한 마른 붓질은 소박한 듯 담대하고, 한 호흡에 그은 것처럼 거침이 없으면서도 청신한 공간의 디자인을 이룬다. 대나무가 직선이고 난초가 곡선이라면 매화는 굴곡이다. 그래서 매화 가지의 모습을 '용이 서리고 봉황이 춤춘다(龍蟠鳳舞)'고들 한다. 그러나 '월매'의 화면을 가로질러 가는 굵은 둥치는 지나치게 과시적 굴곡을 이루고 있지 않다. 선은 'ㄹ'자 유음(流音)의 파동으로 흐름을 만들면서도 간결하여 차라리 공간을 담박하고 고요하게 한다. 흐르면서도 고요한 질감, 그것은 바로 달빛의 촉감이 아니던가.

화가는 우선 화선지 위에 둥근 물체를 올려놓고 그 위에 먹을 뿌려 화면에 달을 만들었다. 그러자 달빛의 촉감과 운율이 이제는 매화나무 가지를 생성시키기 시작한다. 달의 곡선을 따라 휘어지는 늙은 둥치, 그리고 마치 달의 부름에 끌린 듯이 어린 가지들이 달을 향해 솟아오르며 꽃을 피운다. 매화의 암향(暗香)이 달빛을 타고 흐른다. 사군자, 그 중에서도 매화가 일반적으로 상징한다고 하는 성리학의 견고한 정신이나 도덕적 이념을 벗어나서 오늘은 이 마술적이고도 아름다운 달밤의 상상력 속으로 오래도록 서성거리고 싶다

세월의 무게를 가진 늙은 가지는 중력에 순응하며 아래로 늘어지지만 어린 가지들은 명랑한 운율처럼 솟으며 상승한다. 달의 원만한 원은 이 모순되는 두 흐름을 화해시키면서 균형을 이루게 한다. 그리하여 풍경은 화음을 이룬 하나의 음악, 소야곡이 된다. 이 작은 음악은, 그러나 작은 공간을 넘어서 확산되려 한다. 매화의 굵은 가지는 화면 안에서 끝나지 않고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흘러가면서 화면을 확장시키려고 한다. 그리하여 음악은 우주의 아득한 달밤을 가로질러 가는 우주의 음악이 되려하는가.

동아시아 화훼도나 사군자, 17세기 서양 정물화는 유사한 듯하지만 사뭇 다르다. 서양 정물화의 화려한 꽃들은 마치 제각각 꽃말이 있는 것처럼 각각 어떤 의미를 지시하고 있지만 전체적으로는 허무를 표현하는 것이다. 잉브로시우스 보스카르트의 '벽감 속의 꽃 정물화'는 건물 밖의 자연과 실내의 벽을 동시에 보여주면서, 꽃들은 생명의 자연에서 차단되어 인위적 문명 속으로 들어오는 그 순간의 공간에 놓여진다. 대지의 뿌리가 잘린 이 아름다운 꽃들은 쉬 시들게 될 것이며, 이들을 담고 있는 유리병 역시 쉽사리 깨어질 것이다. 프랑스어로 정물화는 '나뛰르 모르뜨'(nature morte), '죽은 자연'이라는 말이다.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전도서 1:2). 정물화의 근원적인 메시지다.

 
잉브로시우스 보스카르트의 '벽감 속의 꽃 정물화'.  
그러나 동아시아 옛 그림 속의 꽃과 나무들은 생명의 그 자리, 대지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그들이 만들어내는 선은 자연의 생성력과 이어져 있다. 매화를 그리는 데는 다섯 가지 요체가 있다. '몸체는 늙고, 줄기는 괴이하고, 가지는 청신하며, 잔가지는 힘차고, 꽃은 기이하게 할 것(體古, 幹怪, 枝淸, 消健, 花奇)'. 이 다섯 가지는 실상 하나의 생성 과정이다. 화가의 붓은 오랜 시간 속에서 이어지는 자연의 생성 과정을 일획의 호흡으로 압축한다. 그리하여 가지 하나의 일획 속에 나무와 숲과 대자연의 호흡이 담긴다. 매화 한 가지, 꽃 한 송이에 온 우주의 시간과 생성이 담기는 것이다. 소동파였던가, '누가 한 떨기 붉은 꽃이라고 하는가, 가없는 봄날의 정경을 다 싣고 있거늘(誰言一點紅, 解寄無邊春)'.

조선의 선비 가운데 매화를 가장 사랑했던 사람은 아마 퇴계 이황일 것이다. 이황을 단순히 조선의 성리학의 체계를 세운 철학자로만 보는 것은 이황을 반밖에 보지 못한 것이다. 이황이 또한 탁월한 시인임을 우리는 잊고 있다. 그는 무려 2000여 편의 시를 지었으며, 특히 매화를 사랑하여 매형(梅兄)이라고 부르면서 수많은 매화시편을 남겼다.

 

 

 



 
청나라 화가 황신의 '답설심매도'.  
步中庭月人 뜨락을 거니노라니 달이 사람 따라오네
梅邊行幾回巡 매화꽃 언저리를 몇 차례나 돌았던고
夜深坐久渾忘起 밤 깊도록 오래 앉아서 일어나기를 잊었더니
香滿衣巾影滿身 옷 가득 향기 스미고 달 그림자는 몸에 가득하네.


봄날, 시정에 젖어 도산서당의 달밤을 홀로 거니는 대철학자이자 노시인인 그의 모습이 눈에 선하지 않은가. 시인의 몸은 매화나무 몸체처럼 늙었지만 그의 가슴에는 청신한 시정의 새 가지들이 달빛을 타고 솟아오르고 있나보다. 그는 지금 달빛에 젖은 매화의 그윽한 향기가 되고, 매화 그림자를 받아 그 자신이 매화가 되었나 보다. 시방, 소동파와 중인, 이황과 어몽룡은 같은 뜨락을 거닐고 있다. 달빛과 매화의 뜨락, 그곳은 우리가 잃어버린 정신의 공간이다.

'월매'의 오른쪽 화면 끝에서 위로 쭉 솟아오른 긴 가지는 위로 솟는 새 가지 중에 가장 굵은 가지임에도 뒤의 가지보다 흐리며, 급기야는 달 근처에서 형체감이 사라지고 있다. 달빛과 공간과 나무가 하나로 녹아들고 있는 것인가. 화가의 마음 끝자리가 닿는 곳이다.


# 매화가 핀 뜨락, 조선 선비의 마음자리

흔히 성리학의 이념을 나타내고 있다는 문인화의 묵매는 선승인 중인에 의해 시작되었다는 데서 알 수 있듯이, 원래는 유교의 군자보다 선종의 깨달음이나 도교의 신선과 더 깊은 친연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매선(梅仙)이라고도 하였다. 퇴계 역시 매화를 '장자'에 나오는 막고야산의 신선에 비유하였다. 선비들이 겨울 속에서 일찍 핀 매화를 찾아나서는 모습은 '심매도(尋梅圖)'라는 이름으로 많은 화가들의 그림 소재가 되었는데, 이는 일종의 구도의 정신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송나라 성리학자들은 자신들이 추구하는 선비정신을 추운 눈 속에도 맑은 꽃을 피워내는 매화에서 찾았다. 성리학자들에게 매화는 다섯 개의 음기 밑에서 하나의 양기가 생겨나고 있는 '주역' 복괘(復卦)를 연상시켰다. 생명의 양기가 시작되는 복괘는 만물의 생명을 키워내는 '천지의 마음(天地之心)'이며, 성리학자들이 찾고자 하는 생명의 이념이었다. 매화의 뜨락, 그곳은 조선 선비들의 마음자리이며, 정신의 뜨락이었다.

<6> 이성의 '독비과석도(讀碑꿣石圖)

 
  '고금의 제일인자, 백세의 스승'이라 불렸던 당나라의 화가 이성이 그린 기이한 신품(神品) '독비과석도'.
기괴(奇怪)하다. 해조묘로 그려진 나무들은 황량하다. 기이하게 비틀린 나뭇가지들은 허공을 움켜쥐려는 듯이 보인다. 흡사 '귀신이 우는 듯 빈 풀밭에 비 뿌리고/ 장안의 깊은 가을밤/ 추풍에 몇 사람이 늙어 가는가?/ 어둑어둑한 황혼길'('감풍') 같은 음산하고 우울한, 당나라의 불우한 요절 시인 이하(李賀)의 분위기다. 그러나 다시 보면 이 헐벗은 나뭇가지들은 오히려 허공을 감전시킬 것 같은 에너지로 충만해 있는 것 같지 않은가. 황량한 생기, 헐벗은 충만, 이런 모순적인 조어가 아니라면 어떻게 이 기이하게 춤추는 나무숲을 표현할 수 있으랴. 그러나 더욱 당혹스러운 것은 숲 가운데 우뚝 솟아있는 거대한 비석이다. 신비로운 선돌처럼, 수수께끼처럼 그것은 아무런 설명도 없이 돌연히 거기 서 있다. 그리고 그 수수께끼를 풀려는 듯이 당나귀를 탄 선비가 비문을 읽고 있다. 이성(李成·919~967)의 기이한 신품(神品), '독비과석도'이다.

몰락한 선비 가문에서 태어난 이성이 살아야 했던 시대는 당 제국이 붕괴되고 5대와 10국이 명멸하던 혼란의 시기였다. 그는 어릴 때부터 경서를 널리 읽고 시문을 지으면서 국가를 경영하는 관리를 꿈꾸었지만 시대의 혼란은 그의 꿈을 무산시켰다. 그러나 좌절된 꿈이 그를 역사상 가장 위대한 화가가 되게 하였으니 삶이란 참 오묘할 따름이다. 이성을 평가하는 오래된 말이 있다. '고금의 제일인자, 백세의 스승!'.

이성의 화풍은 안개 낀 겨울 산과 숲의 맑고 광활한 풍경으로 유명하지만 '독비과석도'에서처럼 비석을 화면 가운데 배치한 것은 매우 독특한 구성이다. 어쩌면 여기에 좌절된 그의 꿈과 욕망이 비밀의 정원처럼 숨겨져 있는 것은 아닐까?

'독비과석도'는 나무와 돌의 풍경이다. 이들이 광활한 평원을 배경으로 솟아오를 때 우리는 예사롭지 않은 기운을 느끼게 된다. 그림의 화면 전체를 움켜쥐고 있는 나무들은 신화 속의 우주목을 연상시킨다. 지하와 지상, 그리고 천계를 이어주는 우주목은 두렵고도 신성한 나무이다. 귀기(鬼氣)가 서린 황량함. 거기에 돌연히 솟은 비석은 풍경에 황량함을 더해준다. 비석, 그것은 여기에 죽음이 떠돌고 있다는 표지이기 때문이다.

 
  독일의 낭만주의 화가 프리드리히의 '참나무숲의 수도원'.
독일의 낭만주의 화가 프리드리히의 '참나무 밑의 수도원'은 '독비과석도'와 매우 닮은 풍경을 보여준다. 앙상한 가지를 드러낸 거대한 참나무는 이성의 나무처럼 기괴하면서도 알 수 없는 신성함과 숭고함에 싸여 있다. 참나무는 서구에서 신화 시대부터 신탁이 내리는 곳으로 여겨지던 신성한 나무이다. 이 참나무 숲에는 비석 대신 폐허가 된 고딕식 사원의 잔해가 솟아 있고 거기에 장례식 행렬이 지나가고 있다. 역시 죽음이다.

모든 신화와 종교는 무덤 위에서 시작된다. 그리하여 무덤으로부터 문명이 시작된다. 죽음을 어떻게 인식하고 어떻게 극복하느냐에 따라 문명의 형태가 달라지는 것이다. 죽음을 극복하는 방식에 있어서 동서양의 차이는 사원과 비석의 차이에 상응한다. 프리드리히는 어둠에 잠긴 숲과 그 위에 열리는 빛을 통해 죽음을 초월하는 구원을 화면으로 불러온다. 사원으로 표현된 종교의 세계다. 반면 죽음 위에 세워진 비석은 죽음을 기록함으로써 역사로 만든다. 동아시아인들에게 역사는 신성한 것이다. 삶의 유한성은 천국의 약속이 아니라 무궁하게 이어지는 역사의 평가와 심판에 의해 보상된다. 이는 공자의 '춘추'에서 시작하여 조선의 '왕조실록'에서 그 절정에 이른다. 프리드리히(서구)의 그림이 종교학이라면 이성(동아시아)의 그림은 역사학이다.

'저 말줄임표의 겨울 숲'(주창윤)이라고 시인은 말했던가. 그러나 이성의 황량한 숲에는 숱한 말들이 떠돌고 있다. '비석을 읽는다'는 제목처럼 이 그림은 숲에 떠도는 수수께끼 같은 말들을 우리가 해독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겨울 나무들이 태양을 향해 두 팔 들고
다섯 손가락 여섯 손가락씩 온몸을 박동치는
푸른 불기둥의 타오름을 보인다.' -박용하 '청동 구리빛 나무들의 노래 1' 중에서.


시인은 죽음과 같은 앙상한 겨울 나무에서 놀랍게도 생명의 불기둥을 보고 있다. 실로 나무는 겨울에서 봄으로 생과 사의 순환을 반복한다. 북구의 신화에는 우주목인 이그드라실(물푸레나무)에 관한 이야기가 있다. 하늘과 땅과 지하를 연결하는 이 거대한 나무의 뿌리는 저승에 닿고 있다. 그런데 저승에는 모든 강물의 원천인 샘이 솟고 이 지하수에서 다시 모든 생명이 태어난다. 나무는 죽음이면서 부활인 셈이다. 겨울을 지난 마른 가지에 새로 연두 빛 잎새가 돋듯이 말이다. 이와 같은 생사의 순환이란 실은 자연의 생성 과정이며 자연의 시간이다.

반면에 돌은 시간과 변화에 저항한다. 시간에 대한 저항은 돌이 문자를 새긴 비석이 됨으로써 가장 치열해 진다. 그것은 시간의 변화를 이겨내고 먼 훗날까지 기록되고 보존되려 한다. 나무가 자연의 생성이라면 비석은 인간의 역사이다. 그래서 나무가 곡선인 반면에 비석은 직선이다. 나무가 자연의 시간이 만들어내는 죽음의 힘을 표현할 때 비석은 문화의 힘으로 그것에 저항한다. 비석을 삼킬 듯이 휘감아 도는 나무들의 힘을 비석은 견디고 있다.

돌은 침묵이요, 적막이기 마련이다. '고요함이여, 바위에 스며드는 매미 울음소리', 일본의 시인 바쇼(芭蕉)의 하이쿠다. 매미의 울음소리만이 들리는 여름날의 적막이 '바위에 스며드는'이라는 표현을 통해 얼마나 생생한 실감을 얻고 있는가. 그러나 비석이라는 바위는 침묵하지 않는다. 비석은 많은 증언과 주장을 하고 있으며 감탄하고 외친다. 이성은 왜 숲 속에 이 웅변의 비석을 세워놓고 한 선비로 하여금 읽게 하고 있는가? 선비의 시선은 사실 화가의 시선일 터. 그는 지금 역사와 자연의 사이에서, 관료의 꿈과 자연 속으로의 은둔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이 비석의 비문처럼 후대의 역사에 그 자신의 이름을 깊게 새겨놓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혀 있는 것일까?

관직을 얻는데 실패한 이성은 가족들을 거느리고 하남의 회양으로 이주하여 일생을 떠돌았다. 낙망한 그는 자주 술에 취해 있었으며 그때마다 미친 듯이 노래를 불렀다. 마침내 어느 거리에서 술에 취하여 객사하였다. 쓸쓸한 인생이다. 그러나 그의 이름은 '독비과석도' 속의 비석처럼 역사의 기념비가 되어, 세월의 마모를 견디고 우리 앞에 우뚝 서 있다.


 
  한스 발둥 그린의 '세 연령층의 여인과 죽음'.
# 3가지 시간들의 교차

'독비과석도'는 우리에게 시간에 관한 상념에 잠기게 한다. '독비과석도'에는 3개의 다른 시간들이 교차되고 있다. 첫째, 바위와 나무를 생성시키는 자연의 시간. 둘째, 비문에 기록된 역사적 시간. 그리고 마지막으로 지금 이곳을 지나고 있는 한 개인의 실존적 시간이 그것이다. 서양화에서 시간은 무시무시한 낫을 든 크로노스 신이나 혹은 해골이 들고 있는 모래시계로 표현되곤 한다. 이는 시간이 바로 죽음과 이어져 있다는 의미다. 그러나 비석은 실존의 죽음이면서 동시에 실존을 넘어서는 역사이다. 뿐만 아니라 '독비과석도'의 그림 속에 나타난 비석은 비문이라는 문자를 통해서 인간의 세계와 연결되고 비석을 받치고 있는 귀부(龜趺)의 거북을 통해서 자연과 이어지고 있다. 역사의 시간은 자연의 시간과 개인 실존의 시간을 연결해 주는 중간항인 셈이다. '독비과석도'는 그림으로 표현된 일종의 시간론이다.

<7> 호쿠사이의 `붉은 후지산`

 
  일본의 '광기어린 천재화가' 호쿠사이의 걸작 '붉은 후지산'. 호쿠사이는 우키요에라는 상업적 풍속화를 예술의 절정으로 이끈 화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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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은 초여름 마파람을 타고 활짝 갠 우주를 향해, 그 우주 전체를 지탱하려는 듯이 외롭게 솟아있다. 수평으로 열을 지은 구름은 압도적인 산의 상승감을 강조하고 있다. 풍경은 극단적으로 단순화되어 있으나 이 단순함 속에는 강렬한 에너지가 끓고 있다. 산의 정상에 마치 전류가 흘러내리는 듯한 화산재의 모습을 보라. 해발 3776m이며 여전히 활화산으로 분류되고 있는 화산, 후지산을 그린 호쿠사이의 걸작 '붉은 후지산'이다.

'라이프'지가 최근 발표한 1000년의 세계사를 만든 100대 인물 가운데 86번째 인물로 선정되었던 일본의 화가 카츠시카 호쿠사이(1760~1849). 그는 우키요에라는 상업적인 풍속화를 예술의 절정으로 이끈 '광기어린 천재 화가'다. 호쿠사이는 90세까지 살았는데 사용한 아호가 20~30여 개나 되었고 90번을 넘게 이사를 다녔다고 한다. 이 무슨 유별난 이사 중독증인가?

천하를 떠돌았던 김삿갓이나 바쇼의 방랑과는 다르지만, 이는 어쩌면 새벽부터 밤까지 지독하게 그림만을 그렸던 화가가 도시 속에서 할 수 있었던 일종의 예술적 방랑은 아니었을까? 그가 사용한 아호 가운데 '불염거(不染居)'라는 아호가 있다. 그 뜻은 '있는 곳에 물들지 말라'이다. 실로 그는 하나의 기법이나 영역에 물들지 않고 수많은 유파를 편력했다. 이사 가듯이. 이 때문에 그가 소속된 가츠카와파로부터 파문을 당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대중 소설의 삽화, 만화, 춘화, 동물, 정물, 풍경 등 숱한 영역으로 끊임없이 변신하고 방랑했다. 방랑하는 자는 외롭다. 그에게는 안식할 곳이 없기 때문이다.

호쿠사이는 70세 즈음의 만년에 '후카구 36경'이라는 일련의 연작 판화를 제작한다. 이 작품을 통하여 그는 가부키 배우나 유곽의 여인들을 주로 소재로 삼던 우키요에에 풍경이라는 새로운 경계를 열었으며, 산수화라는 동아시아의 오랜 전통과 우키요에를 만나게 하였다.

 
  후카구 36경 중 '오백나한사의 사자에도'.
이 연작을 하나씩 펼쳐본다면 우리는 후지산 주변의 다양한 삶의 풍속과 자연의 변화 속으로 방랑하는 흥미로운 체험을 갖게 될 것이다. 이들 풍경들은 대체로 '슨슈 에지리'에서처럼 매우 동적인 주변 풍경과 부동의 후지산이 대조를 이루고 있거나, 혹은 '오백나한사의 사자에도'처럼 보는 사람과 보여지는 산이 대립을 이루고 있다. 그러다가 돌연 일체의 자잘한 풍경과 지명들이 사라지고 푸른 하늘을 향해 장엄하게 솟아오른, 그러나 지극히 단순한 산만 남는다. 동(動)과 부동(不動), 보는 자와 보여지는 자의 대립도 사라져 버렸다. 다만 거기 온통 붉게 타오르는 산이 있을 따름이다. '오랜 세월 기슭에다 쌓아올린 시간의 고요와/ 깨울 수 없는 태허의 고요,/ 거기 깃들어 있는 신의 미소'(조정권 '산정묘지 8')만이 있는 듯하다. 그곳은 편력과 방랑 속에 떠돌던 후쿠사이의 예술혼이 비로소 안식하고자 했던 곳이었을까?

이어령은 그의 명저 '축소지향의 일본인'에서 일본 문화의 특징 가운데 하나를 '가마에'에서 찾았다. 가마에란 모든 동작, 앞으로 일어나거나 혹은 이미 있었던 모든 움직임을 한 자세로 축소시킨 형태이다.

'가마에'를 가장 잘 보여주고 있는 것은 일본의 전통적인 연희 예술인 '노(能)'다. '노'는 모든 동작이 극도로 압축된 움직임 속에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에 흔히 '움직이는 조각'이라고도 불려진다. 마치 정지한 듯한 연희자의 자세 속에 무대 위를 지나간 모든 동작이 응축되고 있으며 앞으로 발생할 모든 동작이 잠재되어 있다. 정중동(靜中動), 정지는 무한한 움직임을 담고 있다. '노'의 여인탈이 무표정한 중간 표정이지만 희로애락의 모든 표정을 담고 있는 '무한 표정'인 것처럼.

'붉은 후지산'은 일종의 '가마에'다. '후카구 36경'의 다른 풍경들 속에 나타난 다채로운 수평적인 움직임은 여기에서 산이라는 하나의 형상으로 축소되고 응축되면서 이제 막 새로운 수직 상승의 움직임으로 변신하려고 한다. 상승의 욕망이 '가마에'의 간결한 디자인과 강렬한 색채의 대비 속에서 꿈틀거리고 있다. 화가 칸딘스키는 붉은 색에서 트럼펫 팡파르를 듣는다고 하였다. '붉은 후지산'의 붉은 색은 귀를 찢는 트럼펫 고음의 절정에서 문득 온몸을 휘감는 적막감, 고음의 적막감이다. 그것은 수직적 상승의 의지다. 바슐라르는 산의 이미지는 단적으로 '솟는 힘'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절정에 오를수록 뻐국채 꽃키가 점점 소모된다. 한마루 오르면 허리가 스러지고 다시 한마루 위에서 모가지가 없고 나중에는 얼굴만 갸웃 내다본다. 화문처럼 판 박힌다. (중략) 산 그림자 어둑어둑하면 그렇지 않아도 뻐국채 꽃밭에는 별들이 켜든다. 제자리에서 별이 옮긴다. 나는 여기서 기진하였다.

정지용의 명시 '백록담'의 한 부분이다. 정지용은 뻐국채 꽃키가 낮아지는 것을 통해서 산의 상승을 보여준다. 그리하여 꽃이 화문처럼 땅에 박히는 곳은 수목한계선, 인간의 한계선이다. 여기서부터 별들의 세계가 펼쳐진다. 인간은 여기서 기진하게 된다. '붉은 후지산'은 이 한계선을 청색에서 적색으로의 전환을 통해 보여준다.

동아시아에서는 예전부터 산을 푸른 산, '청산(靑山)'이라고 하였다. 비록 청산이 세속과 절연된 세계라 할지라도 그곳은 '살어리 살어리랏다/ 쳥산(靑山)애 살어리랏다'(청산별곡)라고 노래할 수 있는 곳이다. 왕유가 '산길에는 원래 비가 없는데/ 허공 푸른 빛깔이 옷깃을 적시네(山路元無雨/ 空翠濕人衣)'라고 할 때 청산은 인간과 융합할 수 있는 색채를 띤다. 그러나 붉은 산은 그렇지 않다. 청색이 끝난 곳에서 시작되는 적색은 인간의 접근을 거부하는 고음이다. 모든 대립을 넘어서서 인간을 압도하는 고독한 우주산의 장엄이오, 숭고다. 호쿠사이는 여기에서 기진했을까?

호쿠사이는 죽기 전에 말했다. "하늘이 내게 10년만 더 목숨을 허용한다면 진정한 화공이 되었을 것을…." 그는 '부질없는 세상(浮世)'을 초월하여 저 산처럼 절정까지 솟구치고 싶었나 보다. 끝없는 예술적 방랑을 통하여 최고의 경지를 추구했던 한 외로운 예술혼이다.

호쿠사이보다 앞서 방랑 속에서 죽어갔던 시인 바쇼의 마지막 하이쿠가 생각난다. '방랑에 병들어, 꿈은 겨울 들녘을 헤맨다'

 

<8> 예찬 '육군자도(六君子圖)'

 
  중국 산수화의 최고의 명작으로 꼽히는 예찬의 '육군자도'. 텅 비어 있는 적막한 강은 '무소유'로 20년간을 떠돈 화가의 삶과 잇닿아 있는 듯하다.
당혹스러운 일이다. 역대 수많은 감상자들과 화론가들이 중국 산수화 최고의 명작으로 제시하곤 하는 한 점의 그림. 그 그림은 서양의 채색화에 길들여진 우리의 미의식을 순식간에 뒤흔들고는 알 수 없는 황량한 들녘 한가운데로 우리를 던져 놓는다. 예찬(倪瓚·1301~1374)의 '육군자도', 이 적막한 공간 속에 들어가 보는 일은 스산하고 당혹스럽다.

예찬은 원나라 말, 도교를 신봉하는 부호의 집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시문과 시화를 좋아하였으며 희귀한 책과 골동품, 서화를 모으는데는 가격의 고하를 따지지 않았다. 아버지와 형이 죽고 자신이 재산을 물려받게 되자 그는 '청비각'이라는 큰 서재를 만들어 전국의 유명한 시인 묵객들을 초빙하고 교유하였다. 그리고는 어느 날, 무슨 이유에선지 그는 전 재산을 친척과 친지들에게 나누어주고는 홀연히 가족들을 데리고 방랑을 떠난다. 소주(蘇州) 태호(太湖) 근처에 배를 띄우고 생애의 마지막까지 떠돌았던, 그 고단하고 가난한 방랑의 시작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화가로서의 위대한 여정의 시작이기도 하였다. 원제국의 몰락을 재촉하는 홍건적의 난이 돌이킬 수 없는 들불처럼 전국으로 퍼져나가고 있을 즈음이었다. 그는 난세를 무소유의 예술혼으로 견디려고 한 것일까?

예찬이 태호 주변을 배로 떠돌 때, 이 떠돌이가 예사롭지 않은 사람임을 눈치 챈 사람들은 더러 그가 배를 댈 때를 기다려 지필묵을 내밀기도 하였다. 그날 저녁도 예찬이 막 배를 기슭에 대고 있는데 그가 머물던 숙소의 주인이 등불과 종이를 가지고 와서 정중하게 그림을 청했다. 그는 몹시 피곤하였지만 조용히 붓을 들었다. 그 어두운 등불 밑에서 '육군자도'라는 일품(逸品)이 창조되었던 것이다.

마르고 담담한 붓이 근경의 흙 제방과 그 위의 나무 여섯 그루, 먼 원경의 소슬한 강 언덕을 피마준(披麻)으로 소략하게 그려놓고는 멈춰버렸다. 그리고는 비어버렸다. 붓은 아무 욕심이 없는 듯 메마르고, 나뭇가지 위에 약간의 바람이 머물고 있지만 형상들은 고요하고 성기다. 그리하여 시인 김현승의 기도처럼 '가을에는/ 호올로 있게 하소서…/ 나의 영혼,/ 굽이치는 파도와/ 백합의 골짜기를 지나/ 마른 나뭇가지 위에 다다른 까마귀같이'('가을의 기도') 쓸쓸하다. 앙상한 나뭇가지 위의 까마귀, 그 적막한 풍경처럼, 번쇄한 장식이나 수식이 없는 화면은 청량하고 스산한 가을의 공기로 가득 차 있는 듯하다. 명나라의 동기창은 이를 '고담천연(古淡天然)'이라고 하였다. 그것은 예스럽고 담박하며 꾸밈이 없이 자연스러운 것을 일컫는 말이다.

인상파의 거장 모네는 예찬만큼 물을 많이 그렸다. 평생 물을 찾아다녔던 모네는 '베퇴유의 센강, 비 갠 뒤 햇살의 인상'에서처럼 수면에 부서지는 빛의 순간적인 변화를 포착하고자 했다. 그는 수면의 인상을 그린 것이다. 모네는 만년의 '수련' 연작에 와서야 수면을 뚫고 들어가는 수심의 깊이를 발견한다. '수련, 녹색 반영'에서는 수면에 반영되는 수면 위 세계와 수면 아래 심연이 만나고 있다. 그 만남이 물의 꽃인 수련으로 핀다.

그러나 예찬의 강은 수면도, 수심도, 수면의 반영도 사라지고 없다. 화면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넓은 강은 그 흔한 물풀이나 물결 하나 없이 텅 비어서 '허공을 적시어 하늘과 뒤섞인다(涵虛混太淸)'(맹호연). 알 수 없는 적막감과 고요함. 그것은 물질을 벗어나서 '무(無)'에 닿으려고 한다. 모네가 작은 수면에 하늘과 수심을 함께 불러옴으로써 형상의 최대한을 표현했다면 예찬은 형상을 넘어서버렸다. '조용히 천지는 저무는데/ 마음은 넓은 시내와 함께 한가롭다(寂廖天地暮/ 心與廣川閒)'. 왕유 시의 이미지를 여기서 본다.

 
  인상파의 거장 모네의 '수련, 녹색의 반영'. 빛의 순간적인 변화를 포착해 수면 위 세계와 수면 아래 심연을 표현하고 있다.
붓이 끝난 자리에서 뜻이 시작된다. 물질성을 벗어나는 무의 화면은 정신의 공간을 여는 것이다. 사실적인 형상을 넘어선 정신의 풍경을 그리고자 했던 칸딘스키의 추상화의 꿈은 사실적 풍경을 포기하지 않고도 이미 여기에서 성취되고 있다. 동아시아 문화 전통에 있어서 '무'는 흔히 근원에 닿아 있는 최고의 정신 경지를 가리키는 표지이다. 이러한 경지는 시문학에서 '무아지경(無我之境:대상과 주체가 융합되어 작품 속에서 분별이 사라진 상태)'으로 표현된다. 색채가 없는 수묵에, 인적마저 끊긴 채 여백으로 가득한 예찬의 화면이야말로 바로 무아지경의 회화적 이미지가 아니겠는가.



梨花千萬片 배꽃 천만 조각
飛入淸虛院 빈집에 날아드네
牧笛過前山 목동의 피리 소리 앞산을 지나가건만
人牛俱不見 사람도 소도 보이지 않네


서산대사 휴정의 선시(禪詩) 한 수다. '빈집'은 '나'에 대한 집착을 놓아버린 마음을 가리키는가. 여기에 날아드는 배꽃 천만 조각, 그리고 피리 부는 사람도 없이 앞산을 지나가는 피리 소리의 황홀한 적막감. 누가 알랴? '나'도 소도 없는데. 아무도 없는데 이 시를 읊고 있는 그는 또 누군가? 혹시 누군가가 휴정에게 그렇게 묻는다면 그는 예찬의 그림 한 폭을 조용히 가리켰을지도 모를 일이다.

왜 당신 그림은 사물과 닮지 않았느냐는 사람들의 질문에 예찬은 이렇게 대답하곤 했다. "나는 나의 가슴속에 있는 속된 것에 구애받지 않는 기운(胸中逸氣)을 드러내려 했을 뿐이다." 속기를 싫어한 예찬은 자주 목욕을 했다고 한다. 그래서 어떤 미술사가는 그가 병적인 결벽증을 가진 것은 아니지 의심한다. 아니, 그는 어쩌면 물이 가진 정화력을 믿었던 것은 아닐까? 혹시 그는 자신의 부유한 재산과 어지러운 시대에 대한 어떤 죄책감을 가지고 있었을까? 그리하여 때를 씻어내기 위해 목욕을 하듯이, 그것을 정화하기 위해 모든 것을 버리고 강과 호수를 떠돈 것은 아닐까? 알 수 없다. 다만 여섯 그루의 나무로 표현된 그의 정신이 무의 강속에 수직으로 서서 온몸을 씻고 있을 뿐이다.

저 강이 예찬이 모든 소유를 버리고서 단지 배 한 척으로 떠돌고자 했던 그곳이었나 보다. 그는 저 텅 빈 강 위를 20년간 떠돌았다. 아내는 죽고, 자식들은 흩어지고, 그리고 홀로 남게 된 정처없는 방랑자는 고향의 친척집에 돌아와 쓸쓸히 생을 마감한다.

예찬이 죽은 뒤 강남의 사대부들 사이에는 그의 그림 소장 여부로 그 사람의 교양 수준을 가늠하곤 했다 한다. 훗날 예찬은 오진, 왕몽, 황공망과 더불어 원나라의 4대가로 불려졌다. yneaa@hanmail.net


# 일품(逸品)

예찬의 그림을 흔히 '일품'이라 한다. 일품이란 속기로부터 초월한, 맑은 순정한 정신의 경지가 일정한 틀과 격식에 구속되지 않고 자유롭게 표현된 작품을 일컫는다. 맑은 정신의 표현인 일품은 번쇄한 것을 싫어한다. 청나라의 화가 운격은 일품의 경계를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림은 간이함을 귀히 여긴다. 간이함이 더욱 오묘한 경지에 들게 되면 세속의 티끌과 찌꺼기를 깨끗이 씻어버리고 다만 고고함과 깨끗함만이 남는다." 이는 그 누구보다 예찬의 그림에 합당한 말이다.

그림의 가치를 평가하는 초기의 품등론에서는 신품, 묘품, 능품의 단계가 있었다. 여기에서 일품은 예외적인 것으로 평가되었으나 송대 이후 일품은 신품 위에 위치하는 최고의 가치로 평가되기 시작한다. 일품에는 인위적인 꾸밈을 싫어하고 세속을 벗어난 은일과 자연의 소박함을 추구하는 노장의 미의식이 바탕이 되고 있다. 도교의 신봉자이자 선비인 예찬은 이러한 철학의 세례를 받은 문인화가다. 그의 일품은 이후 문인화의 한 전형이 된다.
 

<9> 정선의 금강전도(金剛全圖)


 
  '금강전도'와 비슷한 구도를 지녔다고 평가되는 백제금동대향로.
바위가 금강석이 될 수 있는가? 산이 불처럼 춤추고 꽃처럼 피어날 수 있을까? 겸재 정선의 '금강전도'를 보면 그렇다. '바위는 불꽃이다'(옥파비오 파스). 타오르고 연소되어 어느덧 순수한 물질의 춤만 남는다. 그리하여 춤추는 불꽃 그대로 다이아몬드, 불멸의 금강석이 된다. 경이롭다. 탁월한 예술가의 작품이 늘 그렇지만, '금강전도'에는 정선이라는 한 예술가를 키워낸 오래된 역사와 사상과 미의식이 응축되어 있다. 그 응축은 화가의 손이라는 작고도 놀라운 화로에 의해 성취된 위대한 연금술이다.

정선과 금강산의 만남은 운명적이다. 중국의 화본을 흉내내던 그저 그런 화가는 금강산이라는 자연의 위대한 작품과 만남으로써 '진경산수'의 새로운 경계를 열게 되고, 또한 금강산 역시 오랜 망각 속에서 다시 우주의 꽃으로 피어난다. 그러나, 정선이 막상 '금강전도'를 그린 곳은 금강산이 아니라 그가 현감으로 봉직했던 청하 고을이었다. 그때는 이미 그가 금강산을 다녀온 지 20년이 지난, 그의 나이 59세가 되던 해 겨울이었다. 그는 왜 20년이 지난 노년의 겨울에 금강산을 다시 그렸을까? 그것도 한 화면에 일만 이천 봉 전체를 모두 그려 넣는 이 전율적인 압축의 '전도'를 말이다.

'금강전도' 앞에서 우리는 우선 화면 전체의 운동을 지배하는, 날카로운 수직의 준법이 만들어내는 암산의 군무(群舞)를 만나게 된다. 서릿발같은 골기(骨氣)가 춤춘다. 어머니 신사임당을 잃고 삶에 회의를 느낀 이율곡이 금강산에 입산하면서 느낀 첫인상도 그러했나 보다. '깎아 세운 봉우리는 날아갈 듯 괴상하고/ 눈빛 서린 높은 산세 끝이 없이 멀다(峯巒削立怪欲飛/ 雪色嵯峨逈無極)'. 이 솟아오르는 바위들의 춤사위에 어느 정도 익숙해질 때쯤이면 왼쪽에 나무들과 함께 완만한 경사를 이루고 있는 토산들이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토산을 따라서 흐르는 계곡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치솟기만 하는 화면의 힘은 여기에서부터 아래로 내려오는 힘과 균형을 이루게 된다. 이 균형 속에서야 비로소 우리는 화면 전체가 원형의 구도를 이루고 있음을 볼 수 있게 된다.

이러한 일련의 시각적 운동은 원형의 구도를 따라 시계 반대 방향으로 회전을 하게 되는데 그것은 묘하게도 태극의 형상을 이루고 있다. 정선은 역학(易學)에 해박하여 '도설경해'를 저술했다고 한다. 오랜 세월 그의 마음 속에서 수직으로 혹은 수평으로 펼쳐지고 접혀지던 수많은 금강산의 모습은 숙성되고 연성되어 20년 만에 역학의 태극 구도로 완성되었던 것일까? 화면의 제일 하단에서 시작되는 장안사 비홍교가 음문(陰門)의 형상이라면 원형 구도의 꼭대기에 있는 비로봉은 돌출된 양물(陽物)의 형상이다. 태극이란 기실 음양이 순환하고 결합하는 매우 에로틱한 도상이다.

 

 

 

 

 

 

 

 

 

 



 
  수직 구도와 솟는 형상의 독일 쾰른대성당.
서양 고딕의 건축물은 '금강전도'와 유사하게 위로 솟는 무수한 수직의 형상들로 이루어져 있다. 쾰른대성당의 수직 구도는 장엄하다. 그러나 그것은 지나치게 위로 솟는 직선의 숭고미만 드러낸다.

반면 김우창 교수가 '금강전도'와 비슷한 구도를 가졌다고 지적했던 백제금동대향로를 보자. 연잎을 새긴 몸체 위에 중첩된 산의 형상을 가진 뚜껑이 있고 다리는 용, 정상부에는 봉황이 있다. 하늘의 새와 땅의 용(뱀)이 대립되어 나타난다. 이러한 대립은 광명(양)과 어둠(음), 하늘과 땅의 대립이 되는데 역의 태극은 이러한 대립을 순환시켜 조화를 통해 만물을 낳고 생성하는 것이다. 한 남자와 한 여자처럼.

향로 뚜껑의 산봉우리들은 몸체의 연잎을 이어받은 꽃잎, 향을 피워내는 불의 꽃잎같기도 하다. '금강전도' 역시 회전하는 시선이 멈추고 보면 산은 꽃으로 변신하기 시작한다. 그것도 막 피어나는 한 송이의 연꽃으로. 정선 자신도 상단의 제화시에도 '암봉은 몇 송이 연꽃인 양 흰빛을 드날리고(幾朶芙蓉揚素彩)'라 쓰고 있다. 금강산의 암봉을 연꽃에 비유한 예는 적지 않다. 다음 시구는 권근의 감탄사다.



雪立亭亭千萬峯 높고 높은 천만 봉우리 눈처럼 흰빛으로 섰으니
海雲開出玉芙蓉 바다의 구름이 옥 같은 연꽃을 열어 놓았네.



정선이 분명 자극받고 또 참고했을 '관동별곡'에서 송강 정철 역시 봉우리들이 "부용(연꽃)을 꽂았는 듯, 백옥을 묶었는 듯"하다고 찬미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정선의 붓에 와서 금강산은 일만 이천 봉우리 하나 하나가 꽃으로 피어나면서 동시에 전체가 한 송이 연꽃이 되는, 비로자나불(비로봉)이 펼치는 장엄한 화엄(華嚴)의 만다라가 된다. 본래 원형의 만다라는 연꽃 화환의 도상이다. 날카로운 돌들이 우아한 꽃이 되는 이 놀라운 연금술.

최남선에 따르면 우리 민족에게는 광명 세계인 '밝의 뉘(밝은 누리)'를 찾는 고유신앙이 있었다. 그것을 또 '부루'라고 한다. '부루'가 한편으로는 '박'이 되었다가 한자로 '白'이 되고, 다른 한편으로는 불교와 혼합되어 '비로'가 된다. 환웅이 태백산에 내린 것처럼 우리 민족은 광명 세계를 산에서 찾았다. 그리하여 '백'과 '비로'는 주로 산에 관한 명칭이 된다. '백' 자가 들어가는 전국의 무수한 산 이름과 '비로봉'으로 불리는 수많은 봉우리들이 그 예증이다.

'금강전도'를 밑에서부터 위로 보아 가면 마치 느린 템포의 진양조로 시작하여 차차 빠르게 중모리, 중중모리, 휘모리로 넘어가는 한바탕 산조를 듣는 것 같다. 봉우리는 올라갈수록 점점 빠른 템포와 더욱 가파른 각도로 솟아오르다가 비로봉 아래, 다이아몬드(금강석)처럼 솟아 있는 봉우리의 열에 이르러서는 휘모리로 넘어가면서 음파가 극도로 진동하다가 기어코 '눈처럼 흰빛'들을 찬란하게 방사한다. 빛의 꽃, 불꽃. 이 찬란한 빛에 의해 속된 세계는 '밝의 뉘'로 열린다. 굳이 지도에 쓰이는 용어인 '전도'라는 이름 아래 그려진 이 그림은 진실로 정선이 꿈꾼 이상향으로 가는 지도가 아닐런지.

'금강전도'에는 역학의 태극과 불교의 화엄과 만다라, 그리고 우리 고유의 '밝의 뉘'가 하나로 융합하고 있다. 그것이 숱한 시인 묵객을 전율하게 했던 금강산 본래의 진면목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유불선의 조화를 추구했던 신라의 화랑들이 금강산을 도량으로 삼고 끊임없이 순례를 했던 것이리라. 그리고 이러 한 융합은 오래도록 잊혀졌다가 금강산을 찾은 한 화가에게 산은 그 진면목을 살짝 보여주었던 것일까? 그리고 화가는 그것을 20년 동안 소중히 숙성시킨 다음 드디어 한 송이 꽃으로 피워낸 것일까? 돌의 꽃이 우주의 한 가운데서 피어난다. 그것이 조선의 진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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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선의 '금강전도'(국보 제217호). 금강산을 보고 온 지 20년 뒤, 만년에 이르러서야 정선은 붓을 들어 이 명작을 그렸다. 역학의 태극, 불교의 화엄, 우리 고유의 '밝의 뉘'가 한데 섞여 진경산수의 절정을 보여주는 그림이다.
# 진경산수화

본 적도 없는 중국의 자연을 화본에 따라 그리던 화풍에서 벗어나 우리의 산천을 화폭에 옮기고자 하는 움직임의 실경산수화가 새로운 장르로서 부각되기 시작한 것은 조선 후기이다.

18세기에 새롭게 유행하기 시작한 남종화 기법을 가미하여 겸재 정선에 의해 진경산수가 시작된다. 그것을 가능하게 한 것이 금강산과의 만남이다. 그는 중국의 다양한 기법을 섭렵한 뒤 우리의 산천을 묘사하기에 적합한 필법을 독창적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그의 진경산수가 단순히 눈에 보이는 대상을 재현하는 것은 아니다. 마음의 감흥과 정취를 통해 대상을 내용과 기법 면에서 새롭게 재구성, 재창조한 것이었다. 이러한 진경산수는 놀랍게도 겸재 정선, 그에 의해 시작되고 그에 의해 완성되었다.

<10> 매청의 황산천도봉도(黃山天都峯圖)

 
  세로의 구도가 주는 압도적인 숭고의 느낌은 그리스의 화가 키리코(1888~1978)의 그림 '거대한 탑'에서도 여실히 느낄 수 있다.
저것은 분명 하늘로 오르는 층계일 게다. 운해(雲海)가 밀려와 길을 끊는다. 길이 끊기면 층암 절벽 위 봉우리에 신선들의 신시(神市)가 열린다. 청나라의 화가 매청(1623~1697)은 독특한 구도, 그리고 표현주의적인 왜곡과 과장을 통해 황산 천도봉의 실경을 정녕 신비로운 '하늘 나라의 도읍지(天都)'로 디자인하고 있다.

황산에는 연단술(煉丹術)의 그 매혹적이고도 치명적인, 그 내밀하고도 노골적인 인간의 욕망이 운해만큼 자욱하게 서려있다. 까마득한 옛날, 부구생, 용성자, 황제(黃帝)가 이곳에서 신선이 되는 선약(仙藥)을 만들었다는 전설은 황산의 비경을 더욱 신비롭게 만든다. 화가는 하늘 끝까지 솟아오른 천도봉 아래 연단대가 있는 연단봉을 그려 넣었다. 황제가 선약을 제조했다는 그곳이다. 신선의 꿈, 연단술의 몽상이 기암절벽을 허공 속에 떠돌게 한다. 황산의 꿈인가, 매청의 꿈인가? 스스로 하늘에서 쫓겨난 신선이라고 하던 시인의 노래가 메아리치는 듯하다.



太白與我語 태백성이 나에게 말하기를
爲我開天關 나를 위해 하늘 문을 연다 하니
願乘 風去 원컨대 맑은 바람을 타고 가
直出浮雲間 곧바로 구름 사이로 나가고 싶어라

―이백의 '등태백봉(登太白峯)' 중에서

 

 

 

 

 

 

 

 

 

 

 

 

 

 

 

 

 

 

 

 

 

 



매청은 송(宋) 나라의 대시인 매요신의 후손이다. 그가 청년이 되었을 무렵 명(明) 제국은 몰락하고 있었다. 이자성의 난이 일어나고, 북방에서는 새로운 강자로 등장한 청(淸)이 남하하고 있었다. 그는 전란을 피하여 7년간 시골에서 은거하게 된다. 그가 다시 시골 밖으로 나왔을 때 세상은 청의 세상으로 바뀌어 있었다.

 
  중국 청대의 화가 매청의 황산천도봉도. 독특한 구도, 표현주의적인 왜곡과 과장을 통해 황산 천도봉의 실경을 신비로운 하늘 나라의 도읍지(天都)로 디자인하고 있다.
매청은 10년 동안 4차례 과거시험에 응시했으나 모두 낙방하고 만다. 그리하여 세속적 출세에 대한 야심을 포기했을 때 그는 비로소 황산을 찾게 된다. 매청이 처음으로 황산에 오른 것은 그의 나이 48세 때였다. 그곳은 완전히 새로운 세계였다. 구름바다 위에 출몰하는 황산의 신비한 봉우리와 장려한 비경들은 이후 그의 마음의 스크린에 수없이 재생되고, 겹쳐지고, 변형된다. 이윽고 그의 붓 아래 재창조되는 황산은 참으로 기이하고 경이로운 형상을 이루게 된다.

황산에는 3대 주봉이 있는데 연화봉, 천도봉, 광명정봉이 그것이다. 그 중에서도 천도봉은 기암과 괴석으로 이루어진 가장 험한 봉우리로서 황산의 관(冠)에 해당된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곳을 신선들이 사는 도읍이라고 생각하였다. 이 천도봉의 장엄함을 화가는 산 아래에서 올려다보는 고원법(高遠法)으로 강조하였다. 그리하여 긴 세로 축의 꼭대기, 시선이 닿는 끝에까지 봉우리는 마냥 솟았다.

세로의 높이가 주는 압도적인 숭고의 느낌은 키리코의 '거대한 탑'에서도 만날 수 있다. '거대한 탑'은 몽환적인 불안감에 싸여 있다. 그것은 암갈색의 우울한 허공, 같이 있으면서도 서로 고립된 듯한 두 사람, 그리고 실체를 잠식해 들어갈 듯한 긴 그림자의 적막감, 문과 창으로 보이는 탑 안의 어둠이 만들어 내는 기묘한 분위기다. 또한 인간의 접근을 불허하는 벽과 높이를 가진 탑은 일견 규칙적인 형태의 반복을 이루는 듯 보이지만 기실 배열의 규칙성과 비례들이 미묘하게 어긋나 있으며, 심지어 화면 뒤쪽으로 기울어진 듯한 시각적 느낌을 준다. 이 미묘한 불균형의 거대한 탑은 20세기 초, 전쟁의 불안감 속에서 해체의 위기를 맞은 서구 문명이라는 바벨탑이 아닐까?

인공의 거대한 탑은 일체의 움직임이 정지된 수직의 적막감을 준다. 탑의 꼭대기에 깃발을 흔드는 바람조차 그 상태로 굳어버린 듯하다. 그러나 자연의 탑인 '천도봉'은 지금도 연신 허공을 타고 사선으로 솟아오르고 있다. 하단에 좌측으로 기울어지는 봉우리들의 일률적인 반복이 화면을 장식적으로 만들고 있지만 반복되는 형상들을 압도하며 천도봉이 솟아오를 때, 그것은 순식간에 장식성의 정지된 평면을 넘어선다. 봉우리는 허공을 타고 굼실굼실 피어오르면서 안정된 장식 구도를 깨뜨리고 역동적인 숭고미의 경계를 연다. 그것은 이미 물질이 아닌 상승하는 정신의 어떤 높이를 보여주려는 듯하다.

'거대한 탑'에서 사람과 탑은 폐쇄된 담장에 의해 차단되어 있다. '황산천도봉도'에서도 연단봉에 있는 사람과 천도봉은 운해와 천 길 벼랑으로 단절되어 있다. 매청은 화면 상단에 자신이 쓴 제시(題詩)에서 천상의 구름이 도인술의 토납(吐納:호흡)을 도와주며 선약을 만들던 연단대에는 아직도 온기가 남아 있다고 쓰고 있다. 이는 연단술의 몽상이 연단봉과 천도봉 사이의 허공에 떠돌고 있음을 말해준다. 키리코의 담장이 넘어설 수 없는 단절인 반면에 연단봉과 천도봉 사이의 벼랑은 오히려 연단술적 비행을 가능하게 하는 몽상의 거리인 것이다. 도교의 마스터인 도홍경은 "불사를 위한 경이적인 비약이 있다. 그것을 먹으면 흰 두루미로 변신된다"고 하였다. 신선의 상상력은 날아오르는 날개의 상상력이다.

우연이었을까? 화가의 몽상은 천도봉의 꼭대기를 날개의 형상으로 펼치고 있다. 아니 저것은 하늘을 하늘거리며 나는 나비가 아닌가? 가장 무거운 암괴가 가장 가벼운 나비가 되는 이 놀라운 연단술적 변형을 보라. 사실 연단의 화로를 떠도는 몽상은 위험하다. 연단술에 의해 제조된 선약은 실상 수은과 납을 다량 함유한 치명적인 독약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신선이 되고자 하는 욕망은 바로 죽음으로 가는 통로가 되곤 하였다. 장자(莊子)는 그의 후배들처럼 생명을 연장하는데 집착하지 않았다. 그는 죽음까지도 포함한 자연의 모든 변화를 받아들이고 무엇에도 얽매임이 없이 나비가 되어 허허롭게 우주를 날고자 했다.

매청은 황산의 또 다른 봉우리 연화봉을 그린 그림에서 이렇게 제시를 쓰고 있다. '신선의 기운이 어린 뫼뿌리를 그 누가 심어/ 대지 위에 연꽃이 피어났을까/ 어느 해이건 연밥이 맺히면/ 나는야 저 하늘 푸른 바다에 배를 띄우려네'. 연화봉에서 하늘 바다로 배를 띄우고자 했던 매청은 천도봉에서는 장자의 나비가 되어 자유로이 훨훨 하늘을 날고 싶었던 것일까. 그러나 누가 알랴, 황산의 진면목, 매청이 창조한 나비의 뜻을. '거기 새겨져 있는 가사 없는 노래를/ 내 어찌 전할 수 있으리'(조정권의 '산정묘지 7').



# 황산화파

동기창(董其昌)은 중국화의 흐름을 문인화 계열인 남종화와 직업 화공들에 의해 이어지는 북종화로 분류하고 여기에서 남종화의 손을 들어 주었다. 동기창의 미학 가운데 이러한 전통의 이어짐과 강조는 그의 후계자들로 하여금 전통적 방식에 집착하도록 만들었다. 그리하여 청대에는 소위 동기창의 계승자들인, 사왕(四王)이라고 불리는 왕시민, 왕감, 왕휘, 왕원기 등이 화단을 석권하게 된다. 그러나 그들은 전통의 구도와 준법만을 끊임없이 반복함으로써 창의성을 상실하게 된다. 이 무렵, 전통에 얽매이지 않고 강렬한 개성을 표현하는 화가들이 등장하는데 사승(四僧)이라 불리는 홍인, 팔대산인, 석도, 석계 등이다. 매청은 석도와 막역한 사이였다. 홍인과 더불어 석도와 매청은 특히 황산에 매료되었다. 기괴하고 독특한 황산의 풍경은 개성적인 그들에게 풍부한 계시가 되었다. 매청의 황산 그림은 어떤 면에서는 석도나 홍인보다 더욱 파격적이고 독창적이어서 매우 현대적인 디자인 감각을 느끼게 해준다. 훗날 사가들은 이 세 사람을 '황산화파'라 부르게 된다.
<11> 조맹부의 수석소림도(秀石疏林圖)

 


영국의 미술비평가 로저 프라이는 동양화를 손으로 연출하는 춤의 기록이라고 하였다. 실로 조맹부(1199~?)의 '수석소림도'는 수려한 붓의 춤이다. 붓은 지금 이 순간에도 화폭 위를 춤추는 듯 한데 그 역동적 붓의 궤적이 만들어내는 형상은 바위와 성긴 나무들로 이루어진, 한 채의 고요하고 소슬한 풍경이다. 수억 년 생성의 시간을 고속 촬영하여 한 순간에서 보여주는 듯이 꿈틀거리고 있는 바위, 잎새를 다 떨어뜨리고 바위를 닮아 가는 나무, 바람을 머금은 대나무와 풀잎들. 귀를 기울이면 스산한 바람 소리가 들리고, 손을 내밀면 청량한 가을의 허공이 손끝에 묻어날 것만 같다. 조맹부는 이 그림을 그린 것이 아니라 '썼다(寫)'.

조맹부는 송태조 조광윤의 11세손이다. 그러나 그는 송을 붕괴시킨 원나라 세조의 부름을 받아들이고 관직에 나아간다. 이 일은 두고두고 그의 불명예가 되었다. 그는 변절자인가? 이민족의 통치 하에서도 최소한으로나마 중국 문화를 지속시키기 위해서 역사가 그를 필요로 했던 것일까? 원대의 학문과 서화(書畵)는 그리하여 그로부터 시작된다.

출사의 길이 원천 봉쇄된 원대 초의 문인들에게는 미래가 없었다. 그들은 모두 향리에 은거하면서 단지 옛 전통을 음미하며 르네상스를 꿈꿀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러한 복고주의를 가장 치열하게 실천한 사람은 오히려 관직에 있던 조맹부였다. 그는 문약했던 망국의 남송 문화를 극복하고 북송과 당, 그리고 그 이전의 예술 정신과 그 질박한 양식으로 회귀하고자 하였다. 그곳에서 그는 영감과 새로운 힘을 발견한다. 중국문화의 르네상스를 꿈꾸었던 그는, 어쩌면 단순히 권력에 영합한 변절자가 아니라, 난세에 하수들이 산 속으로 은둔할 때 정말 고수는 '조정 속으로 은둔'한다고 하는 바로 그 '조은(朝隱)'을 실천했던 것일까? 그 고차적인 망명을 말이다.

'수석소림도'는 붓의 흔적을 지우는 선염이나 색채도 없이 붓의 골기(骨氣)가 그대로 드러난 선으로만 이루어진 그림이다. 서양의 그림이 면 또는 양감을 사용하여 사물의 형태를 구성하는 반면, 동아시아의 회화는 철저히 선이 만들어내는 조형이다. 면이 정지하려고 한다면 선은 운동하려고 한다. 이는 세계를 불변하는 요소들의 구성으로 보는 유럽인의 시각과 세계를 변화 생성하는 기(氣)의 흐름으로 보는 동아시아인의 시각을 각각 반영한다.

 
  쇠라의 샤위춤.
쇠라의 점묘화법은 인상파와 현대 추상화를 잇는 숨겨진 고리다. 그는 인상파가 추구하던 빛의 순간적인 변화를 넘어서서, 빛의 분할을 통해 모든 색채와 형태를 구성하는 기본 요소인 점(색점)을 발견하였다. 불변의 요소인 점으로 구성된 쇠라의 '샤위춤'은 무희의 동적인 순간을 포착하지만 놀랍게도 화면은 차갑게 응고되어 있다. 점들이 조합해 낸 동작은 운동이 아니라 정지이다. 그 부동의 점은 선으로의 움직임이 아니라 기하학적 면으로 확대되면서 세잔이 되고, 그 기하학적 면들이 기발하게 재조립되면서 피카소가 된다. 반면 조맹부는 한 획의 선으로 바위의 형상과 원근을 표현한다. 바위 곁을 흐르는 공기, 바위 속을 흐르는 시간이 새겨놓은 표면의 질감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바위를 생성시키는 자연의 힘과 화가의 정신을 표현하고, 육중한 암괴와 나무를 춤추게 한다. 선 속에 모든 것이 담긴다.

산수화의 일 획은 서예의 전통과 이어져 있다. '수석소림도'에는 조맹부 자신이 쓴 유명한 시가 붙어 있다. "돌은 비백처럼 나무는 주서(쯣書; 주나라 때 글자) 같이/ 대나무를 그릴 때는 오히려 팔법에 두루 통해야 하나니/ 능히 이를 아는 자가 있다면/ 글씨와 그림이 본래 같음을 알 것이다."(石如飛白木如쯣/ 寫竹還需八法通/ 若也有人能會此/ 方知書畵本來同.) 하루에 1만2000자를 쓰기도 했다던 서예의 대가 조맹부는 서예의 기법과 운율을 회화의 형상 속에 융합시켰던 것이다. 문인화의 서권기(書卷氣)라는 것은 많은 독서뿐만 아니라 바로 이 서법의 단련 여부와 깊은 관계가 있다. 그리하여 문인의 그림은 화공들처럼 그리는 것이 아니라 써야 하는 것이다.

'수석소림도'에서 우리는 형상과 이미지들이 만들어내는 이야기(서사)를 찾을 것이 아니라 화가 내면의 정신과 자연의 기운이 붓을 따라 흐르면서 만드는 호흡을 감지해야 한다. 형상이 선을 갖는 것이 아니라 선의 움직임이 형상을 생성한다. "바위가 천지의 뼈"(곽희)라고 한다면 천지의 정신과 기운을 나타내고 서예의 골기를 표현하는 데 바위보다 더 적절한 것이 어디 있으랴. 비백의 굵은 선은 바위이면서 서예의 획이며, 동시에 천지의 기운이다.

기이한 바위는 신성의 현현으로 여겨졌다가 점차 심미적 향유의 대상이 된다. 송대의 유명한 서화가인 미불은 돌을 무척 사랑하였다. 한번은 오래 동안 보고싶어 했던 괴석(怪石)을 찾아가서 바닥에 자리를 깔고는 "나는 석형(石兄)을 20년 동안이나 뵙고자 했습니다"라고 말하며 절을 했다고 한다. 명문 '돌의 미학'에서 조지훈은 돌의 맛을 모르고서는 동양의 진수를 얻을 수 없다고 단언한다. "무미한 속에서 최상의 미를 맛보고, 적연부동한 가운데서 뇌성벽력을 듣기도 하고, 눈감고 줄 없는 거문고를 타는 마음이 모두 이 돌의 미학에 통해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가장 무정한 듯한 바위는 오히려 교감의 극치인 물아일체, 무아지경의 경계를 나타내게 된다. 한 시인이 "내 죽으면 한 개 바위가 되리다."(유치환)라고 노래할 때, 단지 비정(非情)과 적멸의 의지만을 찾아낼 것이 아니라 자아에 대한 집착의 버림(죽음)을 통해 얻게 되는 무아지경의 평정, 줄 없는 거문고를 타는 심미적인 경지를 그 바위에서 감지해 본다고 해서 무어 이상하랴.

바위는 일정한 형상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화가의 내면으로 스며드는 자연의 리듬을, 그 원음을 그대로 표현할 수 있다. 고대 그리스의 피그말리온이 자신의 조각을 사랑하여 그 돌을 사람으로 변하게 했다는 신화를 우리는 들었다. 간중심주의적인 피그말리온의 꿈을 꾸지 않는다. 바위는 인간으로 변신하지 않아도, 그 속에 구체적 형상이 숨어 있지 않아도 생동하는 생명의 기운이다. 형상을 생성시키는 자연의 율동적인 힘 그 자체이다. 그래서 그의 바위는 형상을 넘어선 비백의 추상적인 선이면서 동시에 기운생동의 춤이 된다.

화면의 양쪽에 숱한 감식가와 소장자의 인장들은 조맹부가 얻은 명성을 잘 드러내고 있지만 사가들은 그의 출사를 끝내 용서하려 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리하여 그는 소위 원의 4대가 반열에서 빠지게 된다. 그러나 그의 붓은 지금 여기 여전히 춤추고 있다.


# 조맹부의 글과 그림

조맹부는 산수화 외에도 도석화 인물도 화조화 말 염소와 양 같은 여러 소재에 모두 능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는 서예에서 가장 위대한 업적을 이루었다. 안진경 이후 남송의 서법을 물리치고 왕희지의 전형으로 복귀할 것을 주장했던 그는 그의 호를 따서 송설체(松雪體)라고 명명되는 서체로 스스로 일가를 이루었다. 송설체가 원 명 청 그리고 고려와 조선에 미친 영향을 실로 지대하였다. 그리하여 그의 그림은 서예의 기법과 융합되었는데, 특히 난초와 대나무, 괴석의 그림에서 서법과 회화의 형상을 탁월하게 융합시켰다. 그는 왕유에서부터 시작하여 북송의 문동과 소동파로 이어진 문인화를 중흥시켰으며 그 중에서도 소위 매 란 국 죽의 사군자는 그에게 와서 확실한 장르로 정립된다.

 

<12> 윤인걸(?)의 어가한면도(漁暇閑眠圖)

 
  윤인걸의 '어가한면도'
깊은 몽상에는 주어가 사라진다. 누가 이 조용한 안식의 풍경 속에 홀로 주인일 수 있겠는가? '어가한면도'는 조선 중기 윤인걸의 작품으로 전해오지만 확실치 않다. 차라리 이 그림 앞에서 우리는 화가의 이름을 잊어버려도 좋을 듯하다. 무명(無名)! 이 얼마나 아득한 허공을 단숨에 여는 호칭인가. '이름 없음' 속으로는 모든 것들이 들어온다. 바람은 서걱거리며 갈대 숲으로 불어오고, 가을 밤, 투명한 어둠이 수면을 부드럽게 감싼다. 수파가 먼 곳에서부터 밀려와 배를 흔든다. 조용히, 그리고 천천히. 흔들리는 배는 요람이 된다. 요람은 어부를 잠들게 하고 느리게 파동을 이루며 휴식의 수심으로 자맥질 치게 한다. 그리하여 주어 없는 몽상은 무한히 확장되고 깊어진다.

 

 

 

 

 

 



 
  워터하우스의 '힐라스와 님프들'
상상력의 세계에서 물은 여성이다. 독일의 낭만주의 시인 노발리스는 연못의 물 속에 "매력적인 한 떼의 젊은 처녀들이 용해되어"('푸른꽃') 있는 듯한 강렬한 환상을 고백하였다. 노발리스의 환상은 워터하우스(1849~1917)의 그림 '힐라스와 님프들'에서 형상화된다. 호수가 생성시킨 눈부신 처녀들이 한 청년을 유혹하는 순간. 그러나 이 순간은 위험한 순간이다. 미소년 힐라스는 헤라클레스의 동성 애인이었다. 두 사람이 유명한 아르고스 원정대에 끼여 항해를 할 때였다. 헤라클레스는 항해 도중 부러진 자기 노를 교체하기 위해 뭍에 상륙한다. 이때 함께 내린 힐라스에게 헤라클레스는 물을 길어오게 하였다. 물을 길러 간 힐라스는, 그러나 다시는 영영 돌아오지 못했다. 연못의 님프들이 힐라스를 유혹하여 물 속으로 데려가 버린 것이다. 이 관능적이고 위험한 유혹의 순간을 워터하우스는 포착한다. 여성으로서의 물은 서양의 상상력 속에서 남자를 파멸시키는 이러한 팜므 파탈(요부)의 이미지로 나타날 때가 많다. 노래로 뱃사람들을 유혹하는 싸이렌과 로렐라이 전설이 또한 그러하지 않은가.

그러나 '어가한면도'에서 어부를 잠들게 하는 여성의 강물은 관능적인 유혹이 아니라 무한한 여백과 같은 안식을 준다. 물은 어부의 꿈을 어두운 심연으로 익사하게 하지 않는다.


秋老芙蓉一夜霜 가을 밤 서리는 연꽃에 내리고
月光蕩湖光 달빛 출렁거리며 호수에 은빛으로 부서지는데
漁翁穩作船頭睡 어옹은 뱃머리에서 평온하게 잠이 든 채
夢入鮫宮白渺茫 꿈속에 교궁에 드니 은백의 빛이 아득하여라


명대의 화가 당인(唐寅)의 제화시다. 교궁은 교인(鮫人)이 사는 곳이다. 교인이란 일종의 인어인데 그의 눈물이 진주를 만든다고 한다. 그러나 교인은 요부가 아니다. 당인의 시에는 아무런 성적 억압이나 쾌락의 탐닉이 없다. 고요하고 온화한 안식이 있을 뿐이다. 청의 건륭 황제가 마원의 그림에 붙인 시 또한 그러하다. '달이 진 강에 밤이 깊어 낚시질을 파하고/ 버들에 기대 잠들어 화서국을 꿈꾼다(月落江天罷釣魚/ 倚柳坐睡夢華胥)' 화서국이란 '열자'에 나오는 상상의 나라이다. 물 속의 교궁이 인간과 동물이 분리되기 전 근원의 심연(이것이 교인과 같은 반인반수로 형상화된다)이라면 화서국은 아무런 지배와 복종이 없는 무위자연의 자유로운 세계다. 지금 저 어부의 꿈도 교궁과 화서국을 떠돌고 있을까?

그러나 이 풍경 속에서 정녕 누가 꿈꾸는가? 어부인가? 강물인가? 아니면 우리인가? 어부가 꿈꿀 때 갈대도 강물도 꿈꾸는가? 풍경 전체가 꿈꾸는가? 배는 마치 그 꿈과 몽상을 위한 기관 같다. 차주전자의 주둥이에서 흘러나오는 증기는 이 몽상의 기관이 지금 작동 중임을 알려준다. 그리고 숨어 있는 작은 불, 결코 뜨겁지 않으면서 몽상을 끓이는 그 기관의 에너지를 느끼게 한다. 사방 가득한 물과 서늘한 어둠 속에서 작은 불이 조용히 타오른다. 이 젖은 불이 단순히 하강하는 잠 너머로 우리를 이끈다.

'어가한면도'에서 우리는 두 계열로 흐르는 선을 보아야 한다. 첫 번째 선은 화면의 중앙에 수면으로 드리운 갈대의 선과 낚시줄, 그리고 감미로운 잠에 빠져드는 어부의 시선 방향인 수면 아래로 흐르는 계열의 선이다. 또 하나의 선은 왼쪽 갈대들과 큰 배의 뱃머리가 만드는 사선, 그리고 주전자에서 나오는 수증기의 선과 그 선의 연장선에 있는 한 쌍의 기러기가 또 다른 계열의 선을 이룬다. 이 두 계열의 선은 시정으로 가득한 가을밤의 꿈이 흘러가는 두 방향을 암시한다.

첫째 계열을 통해서 꿈은 요람 안에서 흔들리면서 수심으로 잠긴다. 이때 물은 근원적인 모성의 물이다. 요람을 흔드는 물이 모성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모성의 물은 우리에게 안식과 휴식을 준다. 심연으로 잠기는 안식이란 더러 영원한 휴식인 죽음을 환기시키지만 우리는 그런 심연에까지 들어갈 필요는 없다. 둘째 계열의 선이 무저갱의 심연에 닿기 전에 우리의 몽상을 일으켜 세워주기 때문이다. 차주전자의 증기는 하강하는 물을 끌어 올려 조용히 상승시킨다. 물의 꿈을 상승시킨다. 그리하여 물의 꿈은 가을밤의 젖은 공기를 이루고 드디어 새가 되어 하늘로 날아간다. (우연인가? 주전자의 주둥이를 빠져나오는 증기의 모습이 기러기의 형상을 닮았다.) 이곳에서는 남자를 유혹하여 파멸로 이끄는 요부가 아니라 가을 하늘로 날아오르는 물새가 물의 정령이 아니겠는가. '나 물한리 가네 물한리 가서/물 속에 잠든 그리움 건져 올리는 물까마귀 되려네.'(진명주 '물한리 가네') 하고 노래하는 시인의 물새처럼.

첫째 계열의 선이 수직으로 드리워진 부동성을 보여준다면 둘째 계열은 사선을 이루면서 유동적인 움직임을 화면에 부여한다. 그리하여 화면은 고요하면서도 생동하는 움직임으로 가득하다. 이것이 '어가한면도'에 나타난 꿈과 몽상의 동역학이다. 꿈과 몽상은 근원의 심연으로 침잠하면서 자유롭게 아득히 먼 곳으로 떠돈다. 정지와 유동, 하강과 상승이 동시에 일어난다. 저 한가로운 어부의 꿈은 물의 몽상과 뒤섞이면서 그리하여 하강하고 상승하면서 주어가 없는 물아일체(物我一體)의 풍경을 열고 있다. 채색을 벗어난 수묵(水墨)이란 이때 얼마나 어울리는가. 먹빛 속에 일체의 모든 풍경이 스며든다.


# 물아일체

장자(莊子)가 제시했던 최고의 정신 경지. 나와 대상이 전면적인 교감 속에 융합하는 것이다. 세계와 나의 완전한 감응 상태 속에서는 주관과 객관의 구분이 사라진다. 따라서 주어도 사라진다. 이를 또 '무아지경(無我之境)'이라고 하였다. 한 시인의 표현대로 '사람이 풍경으로 피어'나는 것이다. 소동파는 말한다. '여가(문동)가 대나무를 그릴 때/대나무만 보고 사람은 보지 아니한다./어찌 사람을 아니 볼뿐이겠는가./깜박 그 자신의 존재 마저 잊어버린다./일신(一身)이 대나무로 화해 버리니/무궁히 솟는 청신함이여.' 이것이 또한 산수화의 정신이다.

이는 대상을 보는 사람과 대상을 철저히 분리시켜 그 대상을 인식하고 지배하고자 했던 근대 서양의 시각과 대립된다. 서양의 시각이 과학자의 눈이라면 동아시아의 시각은 시인의 눈이다. 과학자의 눈인가, 시인의 눈인가? 서양 과학 문명이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지금, 새로운 세계를 열기 위해 가장 먼저 던져야 할 질문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