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중과 겸양으로 무장한 삶의 달인
조선사회 장악한 유학 설계도의 완성자,
퇴계 이황
20세기 초 경성제국대학에서 교편을 잡은 다카하시 도오루(高橋亨·1878~1967)는 조선 지식인의 지적 종속성을 증명하기 위해 이황의 철학을 본보기로 삼아 질타했다. 이황은 오직 주희(朱熹)의 책만을 금과옥조로 삼은 주자학의 충실한 조술자였고 이 때문에 조선 유학은 퇴계 이후 주자학 일변도로 치달았다는 것이다.(高橋亨, ‘조선유학대관’) 조선 유학, 나아가 조선정신의 부재를 고발하기 위한 정치적 논평이었다.
그럼 식민지 시대 관변학자의 치우친 발언이라고 보아 넘기면 그만일까? 이황 스스로 자신은 천하고금의 종사(宗師)인 주자(주희를 높인 말)를 스승으로 삼고 주자의 말을 존신(尊信)한다는 것을 여러 차례 강조했다. 주자의 말에 부합하느냐 그렇지 않으냐를 사상의 정통과 이단을 가르는 절대 기준으로 삼았다. 한참 후배지만 동시대를 산 율곡 이이(1536~1584)도 퇴계의 학문을 가리켜 “모방하는 맛(依樣之味)이 심하다” “하나같이 주자의 설만 따랐다”(율곡전서, ‘성호원에 답하다’, 答成浩原), “성현의 말씀을 받들어 따랐지만 스스로 발견한 점은 찾아볼 수 없다”(율곡전서, 어록-상)고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이황의 철학이 정말 이 정도밖에 안 된다면 어떻게 수백 년을 생존해 조선 유학의 거대한 수원지가 될 수 있었을까? 공자도 선인(先人)의 말씀을 계승할 뿐 새롭게 만들지 않았다(述而不作)고 자처했는데, 스스로 주자를 따르겠다고 한 퇴계의 겸사(謙辭)를 우리가 너무 단순하게 이해한 것은 아닐까?
다음 회에 보겠지만, 이황은 문인제자였던 기대승(1527~1572)과 ‘사단칠정논변(四端七情論辨·네 가지 및 일곱 가지 감정에 관한 토론)’을 펼치면서 철학 논쟁에 불을 지폈다. 신유학의 정치(精緻)하고 세밀한 개념들이 이황과 제자 간의 설전에 등장했고 새로운 의미를 얻었다.
당시 이황이 촉발시킨 철학 논쟁은 이후 당파와 학맥을 불문하고 조선 지식인의 중요한 사유의 전범(典範)이 되었다. 사실 이황의 철학 자체가 이미 치열한 논쟁과 성찰의 산물이다. 그는 10대 후반부터 ‘성리대전(性理大典)’을 비롯한 주자학 관계 서적을 보았지만, 주자학에 대한 퇴계의 관점은 단순한 묵수나 수용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는 중국 명나라 학자들, 진헌장(陳獻章)·왕수인(王守仁) 등이 선불교(禪佛敎)와 비슷하게 유학을 심학화(心學化)한 것을 비판했고, 화담 서경덕의 기철학이 불멸하는 기(氣)로 이(理)의 가치를 떨어뜨린 점을 경계했다. 세간에 잘 알려지지 않은 이언적(1491~1553)의 ‘무극태극설(無極太極說)’을 소개하면서 기와 뒤섞인 이의 위상을 다시 복원시켰다. 이런 복잡한 상호비판과 논쟁의 과정에서 이황의 사유가 무르익은 것이다.
이황의 철학이 당대 및 후대에 미친 사상적 영향력보다 사실 더 놀라운 점이 있다. 그것은 27세(1527년)에 과거에 합격하고 34세에 문과 대과에 급제해서 승문원의 벼슬을 시작한 이후 1545년(명종 즉위년) 을사사화를 겪고 1568년(선조1년) ‘성학십도(聖學十圖)’를 왕에게 올려 성인군주(聖王)가 될 것을 촉구한 말년에 이르기까지 퇴계가 보였던 놀라운 처신이다. 형인 이해(1495~1550)가 을사사화의 여파로 양주에 유배가던 중 사망했고, 이황도 김안로·이기 등 당대 권세가로부터 핍박을 받은 적이 있다. 그럼에도 퇴계는 위험천만한 사화(士禍)의 틈새에서 한 번도 귀양 간 적이 없으며 조심스레 일진일퇴를 거듭한 끝에 벼슬이 우찬성·대제학 등 고위직에 올랐고 훈구·사림을 초월해 수많은 제자를 배출했으며 당대 최고의 성리학자, 문장가, 서예가로 이름을 날렸다. 명종·선조 연간 실록을 보면 모든 사관(史官)이 일제히 퇴계의 학문과 언행, 인품, 대인관계를 극찬한 것을 알 수 있다. 조선 역사를 통틀어 퇴계처럼 모든 사관으로부터 이토록 찬사를 받은 인물은 거의 없다. 이황은 360여명의 노비와 3000두락이 넘는 방대한 전답(田畓)을 거느린 상당한 재력가였다. 후손들이 작성한 분재기(分財記)를 통해 당시 퇴계의 자산 규모를 가늠할 수 있는데 그가 소유하고 관할했던 재산은 우리의 예상을 훨씬 웃돈다.
무엇이 이토록 퇴계의 삶을 영달하게 만든 것일까? 물론 최고 수준의 철학적 논쟁과 성찰이 뒷받침되었다. 그러나 이에 앞서 이황은 진퇴와 출처의 기미를 명확히 포착하고 극도로 신중하게 처신했던 삶의 달인, 정치적 삶의 전문가였다. 이황은 10대 때부터 도연명(陶淵明)의 시를 사모한 문학적 감성이 뛰어난 수줍은 소년이었다. 20세에 ‘주역’에 빠져 식음을 전폐할 정도로 맹렬히 공부했고, 처음 ‘심경부주(心經附註)’를 얻었을 때(23세)는 마음이 통연히 뚫리는 상쾌함을, 훗날 ‘주자전서(朱子全書)’를 교정보며 출간할 무렵(43세)에는 더위와 병을 잊을 정도로 깊은 애정을 느꼈다고 고백한 철저한 학자형 인간이었다.
부친 없이 자라며 집안의 우환을 책임지고 사화(士禍)의 세풍을 겪었던 이황으로선 정치 현실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이미 40세 이후로 ‘난진이퇴(難進異退·벼슬에 나갈 때는 어렵게, 물러날 때는 신속히 나옴)’를 되풀이하며 계속 벼슬을 사양했기에, 명종조차도 국왕인 자신의 요청이 부끄러울 지경이라고 역정을 냈을 정도다.(명종실록 13년 8월 5일) 퇴계의 간곡한 부탁으로 젊은 사림(士林)의 뒤를 봐준 이준경도 이황이 온갖 변명을 늘어놓으며 마치 산금야수(山禽野獸)와도 같이 툭 하면 고향으로 물러난다고 불평했다. 하지만 퇴계의 물러남은 그것이야말로 철저히 의도된 정치행위였으며 사림의 종장으로서 자신의 권위를 극대화하는 현명한 결정이었다. 그는 정세에 누구보다도 밝았고, 사림의 비극이 두 번 다시 반복돼선 안 된다는 확고한 신념을 가졌다. 한발 물러나 향촌에서 조용히 정지(整地) 작업을 진행한 것을 돌아보면 이황의 선견지명과 인내심에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
잠시 물러남과 더불어 퇴계는 사림의 정치완성을 위한 신중한 장계(長計)에 들어갔다. 출사했을 때도 이황은 기묘(己卯)와 을사사화처럼 사림의 정치 피해가 어떤 이유로도 재발돼선 안 된다는 점을 경연석상의 진강(進講) 시에 명종과 선조에게 간곡히 알렸다. 이준경 등 고관대신에게는 연소한 사림을 포용해줄 것을 거듭 부탁했으며, 기대승·박순(朴淳)·이이 등 젊은 사림에겐 성급하게 행동하여 조광조의 전철을 밟아선 안 된다는 점을 수시로 당부했다. 기묘사림은 학문이 완성되지 않았는데 스스로 너무 높이 치켜세웠고 시세를 살피지 않은 채 급박하게 경세(經世)에 뛰어들었지만, 이것은 패망을 재촉하는 길이니 대명(大名)을 지고 대사(大事)를 맡은 그대들은 절실히 경계해야 한다고 당부한 것이다.(퇴계전서 중 ‘기명언에 답하다’ ‘박순에 답하다’) 1568년 선조가 즉위하여 사림의 이상을 구현하려고 퇴계를 초빙했을 때 말년의 퇴계는 모든 사림의 추앙을 한 몸에 받았지만 여전히 윤원형, 이량 등 훈구대신들이 퇴계를 ‘소기묘(小己卯·조광조 아류)’로 부르며 반격의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선조수정실록 2년 6월 1일) 마지막 순간까지도 이황이 신중과 겸양을 내세워 물러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다급한 주변을 정비한 뒤 퇴계는 보다 근본적인 대책 마련에 착수했다. 우선 기묘사림에 의해 구상된 조선도학의 계보(道統)를 보다 확고히 하기 위한 이론 작업에 들어갔다. 선조 즉위년에 기대승을 통해 정몽주의 문묘종사에 이어 김굉필·조광조 등을 종사해야 한다고 발의하도록 했고, 뒤이어 자신도 김굉필·정여창·조광조·이언적 등 사현(四賢)의 현창(顯彰)을 강력하게 건의했다. 사실 이언적을 제외하고 퇴계는 누구에 대해서도 만족하지 못했지만 도학정치의 완성을 위해 일단 한발 물러섰다. 먼저 거론된 김종직은 도학에 몸담은 자가 아니며 문장을 화려하게 꾸미는 사장학(詞章學)에 뛰어난 자라고 보았고, 김굉필과 조광조 등은 남겨 놓은 저술이 없어 학문의 깊이를 알 수 없는데 특히 조광조는 ‘학력미충(學力未充·배움이 충분하지 못함)’임에도 함부로 나서서 화를 자초다고 책망했다.(퇴계선생 언행록 중 ‘인물을 논하다’, 論人物) 다만 이언적의 ‘회재집(晦齋集)’을 보고선 그가 이(理)를 명확히 밝혀서 학문의 올바름을 얻었기에 종사(從祀)하여 널리 알릴 가치가 있다고 보았다.
퇴계는 자신이 학문적으로 높이 평가한 이언적을 문묘종사자 명단에 올리기 위해 최대의 정치력을 발휘했을 뿐만 아니라 동의하지 못한 다른 인물에 대해서도 적극 발벗고 나섰다. 김굉필과 정여창의 유고정리와 사묘건립에 참여했고, 조광조와 이언적의 인품 및 공적을 알리는 행장(行狀)을 자신이 직접 저술했다. 군신(君臣)과 조야(朝野·중앙과 지방향촌)를 막론하고 누구도 더 이상 문묘종사자 선정에 이의를 제기하지 못하도록 철저히 명분을 쌓음으로써 사림의 회생에 기여한 것이다. 유치명이 전하듯이, 퇴계는 누가 보아도 매우 겸손하고 공손한 사람이었으나 도학의 계보와 관련해선 무거운 책임을 스스로 자임했다.(퇴계전서 중 ‘屛銘發揮跋文’) 도통(道統)의 승계만큼은 본인이 직접 진두지휘한 것을 알 수 있다.
이황은 ‘조선도학계보’를 확정하기 위해선 보다 심층적이고 근본적인 명분, 조선의 안목을 상회하는 그 이상의 논리가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중국 송대부터 원명시대까지 주자학 관련 인물을 오백 명 이상 선정해서 그들의 행장과 학설, 사적을 총망라한 철학사 ‘송계원명이학통록(宋季元明理學通錄)’을 작성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일종의 통사류 철학사로 분류할 수 있는 퇴계의 이 작품은, 송원(宋元) 시대 자국의 유교 지식인을 품평한 황종희(黃宗羲·1610~1695)의 ‘송원학안(宋元學案)’보다 무려 백여 년 이상 앞선 것이다. 퇴계는 1559년 ‘이학통록’을 쓰기 시작했을 때 이것이 도학의 요점을 밝힌 글이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송계원명이학통록 중 ‘目錄幷小敍’) 맹자가 양주와 묵적의 무리를 이단으로 공격함으로써 성인의 문도(門徒)가 되었듯이 자신도 주자학과 다른 이단의 학설을 논파하겠다는 의지를 천명한 것이다. 이는 중국을 포함, 동아시아 지평에서 조선 지식인을 평가함으로써 당대 사림(士林)의 학문과 정치가 세계사의 ‘정통’이라는 것을 확고부동하게 자리매김하는 순간이었다.
퇴계에 따르면 중국 주자학은 명대를 거치면서 급격히 ‘심학화(心學化)’되는데, 이것은 주자학의 추상적인 이(理)와 태극(太極) 개념에 대한 반발로 등장한 현상이다. 구체적으로 느끼고 감지할 수 있는 실존적인 마음(心) 작용에 유학자들이 더 주목하게 되었다는 말이다. 명대 심학(心學)의 문호를 연 진헌장(陳獻章), ‘심즉리(心卽理·마음이 곧 그 자체로 이치다)’ 학설로 심학을 완성한 왕수인(王守仁·양명학의 창시자)이 그들이다. 이황은 이들이 본심(本心)에 몰입하고, 심체(心體·마음의 본래 모습)를 점진적인 공부가 아니라 신비한 즉각적 체험을 통해 파악하려는 태도가 매우 위험하다고 생각했다.(퇴계전서, ‘白沙詩敎傳習錄抄傳因書其後’) 마치 선불교의 돈오법(頓悟法)처럼, 어떤 근거도 없이 자의적으로 자기 마음과 의식이 발동한 데 빠질 수 있기 때문이다. 퇴계는 이들이 내성적인 마음공부에 치우쳐 사물의 객관적 원리와 법칙을 탐구하는 격물궁리법(格物窮理法·사물에 나아가 원리를 탐구하는 것)을 간과했다고 비판한다.
특히 왕수인이 선천적으로 타고난 도덕적 마음, 즉 양지(良知)를 알면 누구나 이미 성인이며 자연히 발출하는 이 마음이야말로 세상 모든 이치(理)가 발생하는 근원이라고 본 점(心卽理), 마음 밖을 벗어나선 어떤 사물도 없다(心外無物)고 본 것을 신랄하게 비판했다.(‘전습록(傳習錄) 논변’) 퇴계 역시 ‘심경(心經)’을 존중하여 훗날 심학의 한 원류를 이룬 것으로 평가받지만, 퇴계의 관점은 철저한 자기조율과 단속, 즉 삼가고 두려워하는 ‘경(敬)’의 공부를 통해 마음의 통제력을 확보하는 것을 의미했다. 퇴계가 공부하고 노력해야 하는 인간의 유한성에 주목했다면, 왕수인은 우리가 이미 완성된 인간(聖人)이며 한번 돌아보면 “길거리 어디나 성인이 가득 차 있다”고 말했다.(전습록 중 ‘滿街聖人論’) 퇴계는 이(理)에 대한 명확한 윤리적 기준 없이 이렇게 현상적 마음 작용에 매몰된 명대의 심학으로부터 거리를 두고자 했다.
이황의 철학은 송대 주자학과 명대 심학 사이의 갈등과 긴장의 산물이다. 또한 서경덕 학파의 사상, 태허(太虛) 기의 불멸을 주장하는 기철학과 논쟁하면서 자기 사유의 골격을 갖췄다. 이(理)와 기는 결코 다른 것이며 구체적 사물과 관계없이 이(理)는 영원히 존재하지만 기는 생멸을 겪는다고 강조한 것은 이 맥락에서다.(퇴계전서, ‘非理氣爲一物辨證’) 퇴계는 서경덕의 제자 남언경(南彦經)이 무의(無意)·무욕(無欲)하는 공부로 담일청명(湛一淸明)한 기에 이르려고 했을 때, 의식과 욕망을 없애려는 행위야말로 정(靜·고요함)에 치우친 불교식 수행법이라고 비판했다.(퇴계전서 중 ‘남시보에 답하다’) 올바른 정좌법(靜坐法)이란 외부 사물에 관한 일체의 생각을 끊는 것이 아니라 단지 사의(私意)를 개입시키지 않으려는 노력일 뿐이라고 본 것이다.(퇴계전서 중 ‘김돈서에 답하다’) 퇴계는 정좌(靜坐), 함양(涵養), 경(敬) 공부 등 마음을 수련하는 어떤 공부도 신비한 정적주의에 빠져선 안 되고, 오직 일상생활의 경험 가운데 구체적 사태와 더불어 수행하는 것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퇴계가 중시한 경(敬)의 공부는 신비한 내면의 힘 같은 것이 아니라 자기용모와 자세, 언행 등을 밖으로부터 검속해서(整齊嚴肅) 마음의 통제력을 갖는 구체적 노력을 의미했던 것이다.(퇴계전서 중 ‘이굉중에 답하다’)
퇴계는 복잡한 정치 상황에서 일진일퇴를 거듭했지만 문과 출신의 관료이자 학자인 자신의 과업을 한시도 잊지 않았다. 그는 40여년 관직생활을 거치며 숙고와 신중을 거듭했고, 사림의 정치위상을 확립하기 위한 최후의 일전을 조용히 치렀다. 네 명의 문묘종사를 확정하는 추춧돌을 깔았으며 ‘이학통록(理學通錄)’이란 유학통사 집필을 통해 범아시아적 차원에서 조선 유학과 사림의 정통성을 밝혔다. 주도면밀하고 자기절제력이 뛰어났던 이황의 조용한 과업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이념적으로 유교 지식인의 명분과 논리를 축조한 뒤 그는 지방향촌에서 도학정치의 이상을 구현하는 첫 삽을 떴다. 동향 사족(士族)과 상의하여 향촌 규약(規約)을 만들었는데, 조선 현실을 감안한 최초의 모델 예안향약(禮安鄕約)과 온계동약(溫溪洞約)이 이렇게 퇴계의 손을 거쳐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33개 조항의 엄격한 징벌권을 갖춘 새로운 규약 내용을 살펴보면, 은일지사(隱逸之士)가 아니라 새로운 마을공동체 조성에 나선 사회운동가 퇴계의 활력을 엿볼 수 있다.(퇴계전서, ‘禮安鄕立約條’) 그의 향촌 퇴거(退去)가 장고(長考)의 정치적 산물임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퇴계는 이념을 공유한 후속세대 문인관료를 배출하기 위해 교육시스템도 바꿨다. 태학 및 향교 등 관학(官學)에서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던 교육진흥을 위해 서원건립운동을 전개한 것이다. 조선 최초의 서원은 1541년 풍기군수 주세붕이 건립한 백운동서원이다. 이 서원은 명종 5년(1550년) 후임군수로 부임한 이황의 건의에 의해 정부로부터 소수서원(紹修書院)이란 이름을 받고 최초의 국가공인서원이 된다. 이로부터 지방 유지의 출자나 정부 보조금으로 수많은 서원이 건립됐고 숙종 때 이르면 각 도에 80~90개 서원이 세워졌다. 조선 중후기 서원의 성행은 전적으로 이황에 의해 발단된 일이다. 서원은 재지사족의 학문적·정치적 권위를 뒷받침하는 명실상부한 조직으로 성장했다. 도산서당(陶山書堂·퇴계 사후 1574년 도산서원으로 증축) 등 지방서원을 통해 배출된 퇴계 문인들은 집단 연명(聯名) 상소 등 새로운 형태의 정치행위를 창출하면서 세(勢)를 넓혔다.
이론과 현실, 모든 면에서 퇴계의 구상은 조선사회 저변을 관통하는 거대한 흐름을 이뤘다. 이것은 일선에 나서 큰목소리 내지 않고 조용히 자신의 단계별 과업을 추진한 주도면밀한 정치구단의 성과였다. 조선 유학의 전체 그림을 완성하고 유포시켰던 장본인. 이황은 세속의 현자라 불릴 정도로 겸양과 절제가 몸에 배었지만 마지막 순간까지 살얼음 걷듯 자신과 주변을 철저히 단속했다. 혈기방장한 젊은 유생과 문인들이 벌여 놓은 정치난국을 수습한 것은 결국 신중에 신중을 기한 퇴계의 몫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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