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남자 셋이 해변에서 할 수 있는 일은 그리 많지 않다. 수영을 하거나 '헌팅'을 하거나 술을 마시거나. 수영은 바로 하기가 그랬고 '헌팅'은 자신 없었다. 끼가 넘치는 스페인 청년 라울은 '헌팅'이 당겼겠지만, 크리스천과 나는 시원한 맥주가 마시고 싶었다.
5분 뒤. 우리는 맥주를 두 캔씩 사서 모래사장에 앉았다. 따뜻한 바닷바람을 맞으며 시원한 맥주를 목 뒤로 넘겼다. 맛있다. 크리스천은 맥줏값이 싼 베트남을 사랑한단다. '나도 그래'라고 맞장구를 치는데 한 아주머니가 불쑥 나타나 뭘 내민다.
바다가재였다. 모래사장 위에서 바로 구워주겠단다. 과연 아주머니의 바구니에는 바다가재와 요리도구가 들어 있었다. 짭짤한 안주가 필요한 순간 기가막힌 우연이었다. 두 마리 정도 사서 나눠먹자는데 동의한 우리가 가격을 물어보니 한 마리에 14만동을 달란다. 넉살 좋은 라울이 가만히 있을 리 없다. 두 마리 살 테니까 20만동으로 하자고 했다. 10달러가 조금 넘는 가격이다. 아주머니 옆에 가서 애교도 부리고 엄포도 놓는 라울. 멋지다!
모래사장에서 맛 본 바다가재 바다가재 가격을 흥정하는 라울.
먹음직스러워 보이는 바다가재.
결국 20만동에 두 마리 사는데 성공. 아주머니는 불을 피우는가 싶더니 금세 바다가재를 구워 우리 앞에 내놓았다. 고소한 냄새에 군침을 삼키고 부드러운 맛에 저절로 눈이 감겼다. '위하여'라는 나의 구호에 맞춰 맥주를 마시고 가재를 맛봤다. 다이어트를 많이 한 가재였을까. 남자 셋이 달려들었더니 남아 나질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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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가재를 요리하는 아주머니들.
접시를 돌려주며 아주머니에게 잘 먹었다고 인사하고 돌아서는데 이번에는 어린 여자 아이가 크리스천과 라울 옆에 딱 붙어 있다. 가서 보니 담배나 과자 등을 파는 아이였다. '비싼' 가재를 사먹는 아저씨들이 반가웠나보다. 담배를 사달라고 조른다. 장사 경험이 많은지 영어 단어를 곧잘 이야기한다. 하루 종일 뜨거운 햇볕 아래 돌아다녀서인지 아이의 피부는 많이 그을려 있었다.
"몇살이야?"
"(손가락을 7개를 펴고) 7살."
"학교는?"
"안 가. 담배, 과자. 플리즈~"
한참 뛰어 다니며 놀아야 할 나이에 생활전선에 나온 아이가 안쓰러웠다. 언제쯤 모든 아이들이 굶주리지 않고 행복할 수 있는 날이 올까. 아이들을 돈벌이 수단으로만 생각하는 어른들과 아이들을 보호하지 못하는 국가는 반성해야 한다.
학교에 들어가서도 마찬가지다. 학생들은 꿈과 희망 대신 학원 강의와 과외를 들어야 한다. 그나마 이런 테두리 안에 있는 아이들은 나은 편이다. 돈 많은 부모를 만나지 못한 아이들은 좌절할 뿐이다. 우리 사회가 아이들의 손을 잡아 일으켜줘야 하는데 오히려 피도 눈물도 없는 경쟁 체제만 유지하려고 한다. 안타까운 일이다. 따뜻한 사회만이 지속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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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배를 팔러온 여자 아이.
흡연자인 라울이 말보로 레드 한 갑을 사고 크리스천과는 과자를 몇 봉지 샀다. 기분이 좋아진 아이는 '땡큐'라는 말을 남기고 저쪽으로 사라진다. 크리스천이 나를 툭 친다.
"아시아 나라들을 가보면 저런 아이들이 많더라. 한국에는 없지?"
"베트남보다 상황이 낫지만 어려운 사람들이 많지. 아일랜드도 같은 상황 아니야?"
"우리는 복지 제도가 잘 되어 있어서 괜찮은 편이야. 뭐, 세금이 많다는 게 문제지만."
쌀국수만 먹다가 피자를 먹으니 너무 느끼했다
맥주를 다 마시고 호텔 쪽으로 걸었다. 줄지어 달리는 오토바이 사이에 익숙한 차 한 대가 보인다. 앗, 마티즈다. 그런데 뭔가 달랐다. 글자와 숫자가 붙어 있는 외관. 지붕에 얹혀진 구조물. 놀랍게도 그것은 택시였다. 마티즈 택시! 이게 끝이 아니었다. 모닝 택시. 구형 프라이드 택시도 내 앞을 보란 듯이 지나갔다. 미처 생각도 못했던 일이었다. 호치민에서는 택시 대부분이 일본차였는데 나트랑에서는 우리나라 경차가 '택시' 사인을 달고 달리고 있었다. 얼른 카메라를 꺼내 신기한 순간을 찍고 있는데 라울이 사진을 찍는 내 모습을 신기하게 바라본다. 도로에서 만난 마티즈 택시. 도로에 서 있는 모닝 택시. 잠깐 여행사에 들려 내일 투어를 예약했다. 보트 트립이라는 상품이었는데 배를 타고 나트랑 근방 섬 4개를 도는 프로그램이었다. 배 위에서 점심도 먹고 와인도 맛볼 수 있단다. 크리스천은 이미 보트 트립을 예약해둔 상태였고 라울은 스쿠버 다이빙을 선택했다.
"왜 찍어?"
"한국에서는 볼 수 없는 거라서!"
크리스천이 피자를 먹자고 해서 가이드북에서 본 이탈리아 식당을 찾아가는 길. 밤이 됐는데도 먹을 거리와 장신구를 파는 아주머니들과 마사지를 받으라는 아저씨들이 계속 우리를 붙잡았다. 거절하는 것도 일이었다. 날이 어두어지자 이번에는 거리에 사람들이 많아졌다. 건물에 붙어 있는 간판들은 저마다의 색깔을 밝혀 사람들을 유혹했다. 각양 각색의 다양한 사람들이 흥겨운 표정으로 거리를 돌아다녔다. 휴양지 특유의 미세한 흥분이 느껴졌다.고급스러워 보이는 식당과 끈적끈적한 팝송이 흘러 나오는 술집에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졌다. 자유를 만끽하는 관광객들이 거리를 점령했다.
이탈리아 식당은 프랑스에서 건너온 여성이 운영하고 있었다. 세명이 먹을 수 있는 피자가 19만동. 크리스천과 라울은 맛있게 먹는 피자가 나는 별로였다. 가격이 너무 비싼데다가 베트남에서 쌀국수만 먹다가 피자를 먹으니 너무 느끼했다.
이제 외로움이 나를 떠난 것 같았다 바다가재를 먹기 전 기념촬영.
호치민에서 달랏으로 갈 때도 그랬듯이 버스로 이동한 날은 너무 피곤하다. 일찍 잠자리에 들기로 하고 각자 숙소로 향했다. 라울이 샤워를 하는 사이 어제 달랏에서 만났던 네덜란드 친구 엘케에게 전화를 했다.
"안녕~이지 라이딩은 어땠어?"
"정말 환상적이더라. 그래서 나는 내일부터 6일동안 베트남 중부를 이지 라이딩으로 가기로 했다."
"와우~대단한대! 부럽다~ 즐거운 여행해!"
엘케는 6일 동안의 이지 라이딩으로 호이안까지 간단다. '그게 진정한 여행일 텐데...' 부러웠다. 엘케가 옆에 있던 헤더를 바꿔줘서 안부를 물었다. 헤더와 메리는 내일 오후 늦게 나트랑으로 온다고 했다. 잘 됐다. 크리스천, 라울, 헤더, 메리 그리고 나 이렇게 다섯 명이 함께 내일 저녁을 먹기로 하고 전화를 끊었다.
호치민에서부터 나를 따라왔던 외로움이 이제 나를 떠난 것 같았다. 무거운 짐을 벗어버린 듯한 기분이었다.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잠에서 깼다. 누구지? 힘들게 몸을 일으켜 눈을 게슴츠레 뜨고 앞을 바라보니 한 남자가 분주하게 뭔가 뒤지고 있다. 호텔 직원인가, 아니면 도둑? 두 손으로 잠에 취한 눈을 비비고 나서야 내가 라울과 함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냈다. 265kb 플래시 메모리도 아닌데 몇 시간 전에 '굿나잇' 인사를 나누었던 친구를 까맣게 잊고 있었다.
눈부신 햇살이나 시끄러운 오토바이 소리에 눈을 떴던 날들과는 달랐다. 인기척에 잠을 깨는 것, 내가 눈을 떴을 때 누군가 내 옆에 있다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다. '굿모닝'이라고 한마디 했더니 라울이 몸을 돌려'굿모닝'하며 웃는다.
얼마 안 있어 라울은 스쿠버 다이빙을 하러 나갔다. 나도 옷을 입고 카메라와 선글라스를 챙겨 들고 밖으로 나왔다. 구름 한 점 없는 날씨다. 아침이라서 햇살도 따갑지 않고 딱 좋다. 모든 게 선명했다. 아직 잠에서 깨어나지 않은 것 같은 건물도 수영복을 입고 해변으로 향하는 아가씨들도. 도로 위를 달리는 오토바이의 엔진소리까지 경쾌하게 들렸다. 나트랑의 상쾌한 아침.
아침은 계란 프라이를 넣은 바게트 샌드위치
크리스천이 머물고 있는 호텔로 가는 길에 바게트 샌드위치와 물을 샀다. 바게트를 파는 노점이 길가에 한 두개 씩은 꼭 있다. 이번에는 바게트 안에 고기 대신 계란 프라이를 넣었다. 10만동 짜리 지페를 건냈더니 아주머니가 난처한 표정을 짓는다. 가지고 있는 돈을 셈하여 보더니 맞은 편 약국에서 거스름 돈을 바꾸어 와서 준다. 본의 아니게 아주머니에게 운동을 시켰다.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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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게트 샌드위치를 사먹은 곳.
호텔 로비에서 대형 지구본을 돌려보며 크리스천을 기다렸다. 지구본이나 세계지도 앞에서는 내가 한없이 작아지는 것만 같다. 이렇게 많은 나라, 이렇게 많은 도시 중 나는 몇 개나 볼 수 있을까.
천천히 돌아가던 지구본은 한반도에서 멈췄다. 'Sea of Japan'. 일본해라는 글자가 우리나라와 일본 사이 바다에 적혀 있었기 때문이다. 일본의 바다라고? 외국에 나오면 나라 생각하게 된다고 하더니 순간 울컥했다. 몰래 'East sea'라고 적어 주고 싶었다.
"바다 이름에 대해서 너무 민감한 거 아냐?"
일본이, 혹은 다른 나라들이 일본의 바다라고 생각하는 곳은 우리나라의 동해이기도 하다. 간단한 명칭이지만, 그렇게 쉬운 문제가 아니다. 지난 2006년 베트남 하노이에서 열린 한일 정상회담에서 우리는 이 바다를 '평화의 바다' '화해의 바다'로 부르자고 제안했지만, 일본은 받아들이지 않았었다. 대부분의 세계 지도에 일본해라고 표기되어 있기 때문에 일본으로서는 손해볼 게 없다.
크리스천이 지구본을 보고 있는 내 어깨를 툭 쳤다.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나서 내가 'Sea of Japan'을 손으로 가리키자 크리스천이 궁금하게 바라본다. 한 호텔 지구본에 표기된 'Sea of Japan'.
"일본해라고 되어 있는데 너무 이기적인 표시야."
"왜? 일본 옆에 있는 바다잖아."
"왼쪽을 잘 봐. 한국도 있잖아."
"음, 그렇긴 하네. 그럼 뭐라고 불러?"
"우리는 동해라고 불러. 최소한 두 명칭을 함께 쓰는 게 맞지."
"바다 이름에 대해서 너무 민감한 거 아냐?"
"잘못된 건 잘못된 거지."
크리스천의 말이 맞을 지도 모른다. 단지 바다 이름인데 우리가 너무 민감한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한쪽이 납득할 수 없다는 건 대화와 태협이 필요하다는 뜻. 최소한 두 명칭을 모두 써주는 게 맞다. 금성홍기를 단 배들이 항구에 묶여 있었다.
팔자에도 없는 역사 강의를 할 수는 없었다
항구를 떠나는 모습. '바다 이야기'는 이쯤에서 그만 뒀다. 크리스천을 이해시키려면 역사적인 배경까지 설명해야 했기 때문이다. 보트 타러 가는 길에 팔자에도 없는 역사 강의를 할 수는 없었다. 그것도 그냥 강의가 아니라 영어 강의다. Impossib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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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잔한 물결 위를 달리는 배.
섬으로 향하는 우리배. 케이블카가 리조트를 왔다갔다 한다.
항구에는 낡은 금성홍기를 단 조그마한 배가 줄지어 묶여 있었다. 모양이 죄다 똑같다. 아래는 하얀색, 위에는 파란색인 선체에는 의자가 놓여져 있었고, 사다리를 타고 지붕으로 올라가서 햇볕을 즐길 수도 있었다.
잔잔한 물결과 그 위에 떠 있는 하얀 구름
우리는 가이드를 따라 배로 건너갔다. 우리가 자리를 잡자 배는 '덜덜덜~' 힘겹게 모터를 돌리기 시작했다. 힘없는 모터 소리에 괜찮을까 싶었는데 시금치를 먹은 뽀빠이처럼 점점 힘을 낸다. 그러더니 몇 분 사이에 '빠르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속력을 높였다.
와우~ 눈 앞에 펼쳐진 바다는 정말 아름다웠다. 시원한 바람은 내 몸을 간지럽혔고, 바다에 부서지는 햇살은 눈을 부시게 했다. 잔잔한 물결과 그 위에 떠 있는 하얀 구름이 저절로 카메라 셔텨를 누르게 했다. 저 멀리 리조트와 그곳을 왔다갔다 하는 빨간 케이블카도 보였다. 장난감 같다. 우리 앞뒤로는 항구에 줄지어 묶여 있던 배들이 물살을 가르며 앞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멀리서 보면 고기잡이 선단 같겠다
가이드는 영어와 베트남어로 번갈아 말하면서 여행 일정을 설명했지만, 우리는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러기에는 너무 바빴다. 이쪽에서 저쪽에서 사진을 찍느라 정신이 없었다. 잔잔한 물결과 그 위에 떠 있는 하얀 구름이 저절로 카메라 셔텨를 누르게 했다. 스무살 초반으로 보이는 가이드는 영어, 프랑스어, 일본어, 중국어, 한국어 등 각 나라의 언어로 인사를 한 끝에 우리의 눈길을 겨우 잡았다. 크리스천은 여전히 '디카질'에 빠져 있었지만. 가이드는 '여러분 제 말 안 들으면 우리 다시 항구로 돌아갈 거예요'라는 협박 겸 농담을 섞어 가며 오늘 일정을 설명했다. 먼저 첫번째 섬에 내려 수족관을 돌아보고 두번째 섬 근처에서 스노쿨링을 한다고 했다. 그리고 나서 배에서 점심을 먹고, 즐거운 노래자랑 시간을 갖는다. 다시 배를 움직여 세번째 섬 앞 바다로 이동해 와인을 마시고 마지막 섬에서 마음껏 물놀이를 하게 된단다. 배에서 노래자랑까지? 와우~ 듣고 보니 참 알찬 투어다. 일제히 가이드의 설명을 듣고 손뼉을 쳤다. 짝짝짝! 신난 관광객들은 어이아이들 같았다. 10여 분 남짓 물살을 헤쳤을까. 배는 벌써 첫번째 섬에 도착했다. 선착장에서 수족관이 보였다. 만국기를 걸어 놓은 배 모양의 건물은 꼭 놀이동산의 유령선 같았다. 아, 맞다. 달랏에서 본 크레이지 하우스가 떠오르기도 했다. 음산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같은 건축가가 만들었나. 두 건물 다 별로 기분 좋게 보이지 않는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원색 물고기부터 게으른 거북이까지 보트 트립 첫번째 섬. 이곳에서 수족관을 둘러봤다. 사람들을 따라 들어간 건물 안은 물고기 천국이었다. 가운데 큰수족관 안에 크고 작은 수많은 물고기들이 헤엄을 치고 있었고 둥글게 배치된 수족관에는 신기한 물고기가 관광객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사람이 물고기 구경을 하는 건지, 물고기가 사람 구경을 하는 건지. 한국에서 한번 쯤은 봤던 물고기가 대부분이었지만, 한참을 쳐다보게 만드는 신기한 물고기도 간혹 보였다. 수족관 안에는 예쁜 원색을 뽐내는 물고기부터 좀처럼 움직일 생각을 안 하는 게으른 거북이까지 있다.다. 모두 다 행복해 보였다. 생김새는 달라도 뭐라고 하지 않는 물고기 사회. 다양성을 인정하는 수족관 사회가 대단하다. 햇살이 수족관 안까지 들어와 물고기들을 비춰 주었다. 물고기들도 날마다 바뀌는 사람들을 구경하는 게 재미있나보다. 사람들 코 앞까지 다가왔다 떨어졌다 한다. 물고기들도 사람 구경을 하고 있겠지? 크리스천은 여기서도 말없이 사진만 찍는다. 크리스천은 찍은 사진을 숙소에 있는 노트북에 바로 바로 저장시킨다고 했다. 그래서 일단 많이 찍고 보자는 주의로 나가고 있단다. 내가 '이것 좀 봐, 신기해'라고 해도 고개만 끄덕일 뿐 눈은 디카의 LCD 화면을 응시하고 있다. 못 말린다. 베트남으로 오는 비행기에서부터 꾸준히 카메라 셔터를 눌러온 나보다 더한 친구다. 우리는 새로운 경험을 하기 위해 떠나온 걸까. 사진을 찍기 위해 떠나온 걸까. 두 개가 떼어 낼 수 없는 것이지만, 어떤 때는 '내가 사진 찍으로 여기까지 왔나'라는 생각이 드는 때도 있었던 게 사실이다. 뭔가 증거를 남겨야 한다는 각박관념에 사로잡혀서 말이다. 풍경화 그리고 싶어라 풍경화를 그리고 싶었는데... 수족관을 보고 계단을 따라 위로 올라가보니 전망대 비슷한 공간이 있다. 그림 같은 풍경이 눈 앞에 펼쳐져 있었다. 하얀 구름이 떠 있는 파란 하늘과 조그마한 배들이 떠 있는 바다가 보기 좋았다. 그 자리에 앉아서 풍경화를 그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학창 시절 미술 성적이 '미'를 벗어난 적이 없을 정도로 그림 그리기에는 스노쿨링을 하러 물에 들어가기 직전에 찰칵. 문외한이었지만, 이 순간 만큼은 위대한 작품을 그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고 하더니 아름다운 풍경은 나에게 붓을 쥐어주려고 한다. 침을 한번 꿀꺽 삼키고 사진 한 장 찍고 다시 배로 돌아왔다. 우리가 제일 늦게 왔는지 바로 배가 엔진을 돌린다. 두번째 섬 앞에서 가이드가 스노쿨링 장비를 하나씩 나눠줬다. 코까지 막아주는 물안경을 쓰고 공기 호스를 입에 물고 풍덩! 아, 따뜻해. 생각보다 따뜻했다. 스쿠버 다이빙을 해봤던 크리스천이 습기를 안 차게 해주는 거라며 물안경에 침을 뱉어 닦으란다. 따라 해봤는데 영 별로다. 내 얼굴에 침뱉는 기분이랄까. '푸~푸~' 공기 호스를 부는 법도 익혔다. 헤엄을 쳐 산호가 있는 곳까지 와서 고개를 바다 속으로 집어 넣었다. 물안경을 통해 본 수면 아래의 모습은 환상 그 자체였다. 부서진 햇빛이 산호초와 물고기에 닿자 눈부시게 화려한 색이 살아났다. 빨강, 파랑, 노랑, 하양. 저마다 자신들이 가진 색을 자랑했다. 먹이를 먹는 것처럼 물고기들은 산호에 입을 붙였다 뗐다 하며 돌아다녔다. 생애 첫 스노쿨링 우리의 눈에 보이는 세계가 전부가 아니다. 물안경 하나만 써도 새로운 세계가 보이는 것을. 갑자기 아침 일찍 스쿠버 다이빙을 하러 나간 라울이 부러워졌다. 실컷 구경하고 배 위로 올라와 한숨 돌리는데 선원들이 의자 배열을 바꾼다. 음식을 차리기 위해 가운데 있는 의자를 모두 평평하게 눕혔다. 그 위에 식탁보까지 깔아 놓으니 식탁이 따로 없다. 커다란 식탁은 음식으로 채워지기 시작했다. 해산물, 샐러드, 고기 등이 차례 차례 자리를 잡았다. 청명한 날씨에 전잔한 바다 위 보트에서 즐기는 점심은 색달랐다. 보기만 해도 배가 불렀다. 다른 사람들도 모두 만족하는 눈치다. 크리스천도 활짝 웃는다. "이거 다 먹을 수 있을까?" 보트 위 노래자랑 4인조 베트남 '오빠밴드'의 흥겨운 무대. 가운데 탬버린을 흔드는 사람은 싱가포르 관광객. 음식은 생각보다 맛있었다. 같은 메뉴라도 집에서 먹는 것보다 야외에서 먹는 게 더 맛있는 것처럼. 말도 없이 젓가락질 하는 소리만 들렸다. 서양 사람들도 서툰 젓가락질에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다 나처럼 먹지는 않았다. 아깝게도 음식이 꽤 많이 남았다. 싸달라고 말하고 싶을 정도였다. 식탁을 정리하고 나자 정말 노래자랑이 시작됐다. 제일 먼저 상상도 못했던 밴드가 흥을 돋우었다. '악기가 있을까'라고 걱정했는데 선원들로 구성된 4인조 밴드의 공연은 내 생각이 기우였음을 보여줬다. 기타 한 대와 플라스틱통으로 만든 드럼 그리고 탬버린이 악기의 전부였지만, 그들의 음악은 빌보드차트 1위팀 저리 가라였다. 가이드는 싱가포르 여자를 무대 앞으로 끌어내 탬버린을 맡기고 한곡을 더 뽑았다. 나트랑 선상 노래자랑은 베트남 '오빠밴드'의 화려한 공연으로 시작됐다. 가이드가 공연에 심취해 있는 젊은 중국 여성들을 무대로 불러내더니 마이크를 건넸다. 얼떨결에 마이크를 받은 여자들이 무대 울렁증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서 있는데 마침 그때 흘러나오는 기타 반주. 아, 이 구슬픈 멜로디. 나도 아는 노래였다. 바로 '첨밀밀'. '티엔 미 미 니 샤오 더 티엔 미 미...' 여명과 장만옥의 키스신이 인상적이었던 영화 '첨밀밀'에 삽입되어 많이 알려진 노래다. 벌써 10년이 더 된 영화. 고등학교 때 제2외국어였던 중국어 수업 시간에 배웠던 노래이기도 했다. '첨밀밀'이 '달콤함'이라는 뜻이었지만, 무대에 나온 중국 여성들의 노래는 달콤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박치와 음치의 조화라고나 할까. 오래된 노래라서 부를 줄 모르나보다. 우리나라 20대들에게 이미자 선생님의 노래를 부르라는 것과 다름이 없으니까. 그렇게 중국 여성들의 무대가 끝나자, 이번에는 덩치 좋은 미국 아저씨가 가수가 됐다. 자신의 이미지와 잘 어울리는 컨트리 노래를 불러줬다. 그 다음에는 일본 선수. 또 다시 기타 반주가 시작됐다. 역시 일본의 전통 노래였다. 기타 반주가 시작된 이상, 일본 사람에게는 이미 선택권이 없었다. 난감해하며 떠듬 떠듬 노래를 부르는 일본 여성이 애처롭기까지 하다. 기타 반주하는 아저씨가 각 나라의 전통가요를 연구하는 사람 같았다. 젊은 사람들이 맞춰 부르기 힘든 기타 연주만 한다. 그래도 분위기는 '업'된 상태! 다양한 나라의 사람들이 앞에 나와 노래를 부르는 것 자체가 구경거리였다. 베트남에서 부른 아리랑 노래를 부르고 있는 미국 아저씨. 나도 마이크를 피할 수 없었다. '코리아~'라는 가이드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무대 앞으로 당당하게 걸어 나갔다. 멋지게 부르리라. 그런데 기타가 튕기는 멜로디는... 안 돼!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이었다. 민요가 나올 줄은 상상도 못했다. 기껏해야 나훈아 아저씨 노래 정도일 줄 알았는데. 그리고 뭔가 가슴 뭉클한 감동적인 순간에 불러야 할 것 같은 아리랑을 감히 노래자랑에서 부르려니 '거시기'했다. 희미한 가사에 난처해 하는 크리스천. 나보다 가이드가 더 신났다. 아리랑을 좋아하나보다. 가이드와 듀엣으로 아리랑을 불렀다. 베트남 바다 위에서 부르는 아리랑. 지루할 줄 알았는데 막상 아리랑을 불러보니 입에 쫙쫙 달라 붙는다. 중간에 리듬까지 빨라져 가이드 아저씨랑 함께 펄쩍 펄쩍 뛰면서 아리랑을 불렀다. 락 버전 아리랑이라고나 할까. 크리스천도 반주에 맞춰 노래를 불렀지만, 역시 오래된 노래인가보다. 얼굴을 찡그리며 가사를 기억하느라 애를 쓴다. 겨우 한 곡을 다 부르고 들어와 투덜된다. "정말 오래된 노래야. 난 몰라." 관광버스춤을 이해할 수 있었다 무대를 거부한 몇몇 서양 남자들을 빼고는 모두 한곡씩 불렀다. 이제 끝이라고 생각하고 크리스천과 의자에 축 늘어져 있는데 갑자기 시끄럽게 플라스틱 통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밴드가 다시 노래를 부르려는 모양이었다. 사진 찍기 바쁜 관객들. 가이드가 괴성을 지르며 '댄싱 타임'이라고 외쳤다. 이번에는 춤? 뭐, 이왕 놀기로 마음 먹은 터다. 우리는 가이드를 따라 미친듯이 몸을 흔들었다. 좌우로 손가락을 찌르는 아저씨, 두 손을 머리 위로 돌리는 여자, 다리를 흔드는 청년. 가지 각색의 춤이 나트랑 바다를 수놓았다. 절정의 순간. 우리는 기차놀이를 하는 것처럼 앞 사람의 어깨를 잡고 무대를 돌기도 했다. 관광버스에서 춤을 추시는 어르신들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땀이 날 정도로 몸을 흔든 우리들은 음악이 멈추자 마자 자리에 털썩 주저 앉았다. '맨 정신에 춤 추려니까 이상해'라는 나의 말에 크리스천은 이제서야 맥주를 마시자고 했다. 맥주 캔을 하나씩 들고 목을 축이고 있는데 배는 어느새 세번째 섬 앞에 도착했다. 튜브를 끼고 '플로팅 바'로! 지치지도 않는 우리의 가이드. 이번에는 모두 바다에 뛰어들라고 한다. '자, 이제 플로팅 바 시간입니다, 모두 바다로 들어가세요!'. 플로팅 바? 떠있는 술집이라는 뜻인데 어떻게 하려는 거지? 우리는 말 잘듯는 착한 아이들처럼 한 사람씩 튜브를 배급받고 바다 속으로 내려갔다. 바닷물이 햇빛에 반짝거렸다. 이미 가이드는 저 앞에 있었다. 아래가 막힌 큰 튜브에 술이 담긴 바구니와 함께 걸터 앉아 있었다. "빨리 이쪽으로 오세요!" "이쪽으로 오세요. 그리고 뒤로 살짝 누워서 제 튜브에 발을 올려 놓으세요. 플로팅 바를 즐길 시간입니다!" 바다 위에 누워 마시는 와인 언제 틀었는지 배에서 신나는 음악이 흘러나왔다. 우리는 커다란 검정색 튜브를 둘러쌌다. 그리고 시키는 대로 발을 튜브에 올리고 뒤로 누웠다. 아, 편하다.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바다 위에서 이대로 한숨 자고 싶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그럴 시간이 없었다. 가이드 청년이 양주잔을 하나씩 돌리더니 술을 따라줬다. 달랏 와인이었다. '치어스~'라고 외치며 한잔 마시는데 달달한 게 맛있다. 졸음은 와인 한 잔에 달아나 버리고 우리는 다시 잔을 내밀었다. 모두들 주당들인 게 분명했다. 바다 위에 누워 즐기는 와인. 환상적이었다. 파란 하늘에서 쏟아지는 햇빛을 맞으며 푸른 바다 위에 반쯤 누워 받아 마시는 와인은 환상적이었다. '나트랑의 물결은 하얗게 빛났고 와인은 우리를 붉게 물들였다'. 시 한 수 쉽게 지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술이 한잔 들어가자 모두들 신났다. 웃고 소리치며 흥겹게 마신다. 물 위에서 춤을 추는 남자도 있었다. 정신없이 그러나 즐겁게 마시고 또 마셨다. 크리스천은 맥주만 잘 마시는 줄 알았는데 와인도 홀짝 홀짝 쉬지 않고 목뒤로 넘겼다. "크리스천! 너 술 정말 잘 마신다." 흔들리는 바다 위에 차려진 술집이다 보니 안타깝게도 술을 따를 때 흘리는 양이 꽤 많았다. 그걸 감안하고라도 와인 네 병이 너무 빨리 동이 나버렸다. 못말리는 주당들! 적당한 음주는 삶의 활력소인 게 분명했다. 댄스 타임을 하고도 무덤덤한 표정을 유지하고 있던 일행들이 달라졌다. 와인 파티를 끝내고 배 위로 올라온 우리들의 얼굴에는 하나같이 웃음꽃이 피었다. 꽃 색깔은 붉은색. 모두 색조 화장을 한 것처럼 얼굴이 발그레했다. 웃음꽃만 핀 게 아니다. 이야기꽃도 피었다. 사진찍기 바빳던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앉아 수다를 떨었다. 과묵하게만 봤던 남자들이 말이 더 많다. '어디서 왔어?' '여행 코스는?' '학생이었구나' '캄보디아는 어때?' '와인 참 맛있다' '맥주 한잔 더하자' '한숨 잤으면 좋겠다' '가이드 진짜 웃기다' '호치민보다 안 덥네' '화장실이 어디지?' 평화로운 해변. 웃고 즐기는 사이에 배는 조용히 마지막 섬에 닻을 내렸다. 파란 바다에 둘러싸인 섬. 이곳에는 잔잔한 파도와 고운 모래로 장식된 아름다운 해변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해변에는 이미 사람들이 많았다. 선글라스를 끼고 의자에 누워 일광욕을 즐기는 사람들과 바나나 보트, 모터보트 낙하산 같은 놀이를 즐기는 사람들이 보였다. 평화롭고 따뜻한 해변의 오후 구름 한 점 없는 하늘 아래 색깔이 예쁜 바다. 풍덩~ 아직도 알코올의 흔적이 남아 있던 우리는 달리기 시합이라도 하듯 허겁지겁 바다로 뛰어들었다. 물이 기분 좋게 따뜻했다. 물 위에 누워 물장구를 치는 크리스천은 아무말 없이 이쪽 저쪽을 왔다갔다 했다. 영국에서 온 찰리와 아일랜드에서 온 제이슨은 수영에는 도통 관심이 없다. 두 남자는 딱 붙어서 열심히 대화를 하고 있었다. 영국인 부부는 사랑스럽게 커플 수영을 즐겼고 중국 여자들은 낙하산 보트를 타고 하늘로 날아 올랐다. 나는 크리스천을 따라 갔다가 찰리 옆으로 왔다가 중국 여자들의 '공중부양'을 바라봤다. 평화롭고 따뜻한 해변의 오후. 마치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았다. 아무런 걱정, 근심 없이 휴식하는 시간이 바로 지금, 이 순간이다. 각종 기구를 탈 수도 있었다. 물놀이를 마치고 배에 오르니 반가운 손님이 눈에 들어왔다. 각양 각색의 과일이 담긴 접시가 보기 좋게 식탁 위에 놓여져 있었다. 수박, 바나나 같은 눈에 익은 과일도 먹고 처음 보는 열대 과일도 맛봤다. 그런데 정말 모두 다이어트 중인가. 최선을 다해 먹었는데도 과일도 점심과 마찬가지로 다 못 먹고 남겼다. 결국 맛있는 과일도 남기고 말았다. 이제 항구로 다시 돌아갈 시간. 참 풍성한 시간이었다. 물놀이와 레크레이션, 맛있는 음식과 과일 그리고 친해진 사람들. 기대하지 못했던 유쾌한 '뱃놀이'였다. 아침부터 우리를 지켜보던 해님도 서쪽 하늘로 향하는 늦은 오후 우리는 뭍으로 나왔다. 옷깃만 스쳐도 인연인데 이대로 헤어지기 아쉬웠다. 그래서 각자 호텔에서 간단한 샤워를 하고 나서 저녁을 함께 먹기로 했다. 영국인 부부인 앤디와 제니가 분위기 좋은 바도 안단다. 1차는 저녁, 2차는 술. 오케이! 우리는 '플로팅 와인바'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었다. 다시 만난 헤더와 메리
늦은 오후 다시 항구로 돌아가는 길. 어제 크리스천과 라울과 피자를 먹었던 식당에서 저녁을 먹었다. 헤더와 메리 그리고 라울만 빼고 모두 보트 트립에서 만난 친구들이었다. 헤더와 메리는 어제 정한 약속 장소에서 식당으로 내가 데려왔다. 둘 다 피곤해 보였다. 긴 버스 여행 때문. 아침 일찍 달랏을 떠나 오후 늦게 나트랑에 도착했다고 했다. 스페인 청년 라울은 팔팔했다. 스쿠버 다이빙이 일찍 끝나서 푹 쉬었단다. "스쿠버 다이빙 어땠어?" 다시 만난 친구들. 왼쪽부터 메리, 헤더, 라울. 피자를 먹으면서 서로 인사를 했다. 찰리는 24살 영국 청년인데 정치학 대학원을 다니고 있다고 했다. 방학을 이용해서 동남 아시아를 여행하고 있었다. 크리스천처럼 아일랜드 출신인 제이슨은 스웨덴에서 만난 일본 여성 유코와 함께 베트남에 왔다. 중국에서 온 두 여성은 중국의 여행지에서 만난 사이라고 했다. 테레사는 광저우에서 사업을 하고 있고, 리는 항저우에서 신문기자로 일하고 있었다. 앤디와 제니는 신혼여행으로 베트남 종단 여행을 하고 있었다. 부러워라. 배낭을 길동무 삼아 베트남을 여행하는 나와는 처지가 천양지차였다. 앤디는 영국에서 탱크 운전을 가르치는 교관이고 제니는 금융 관련 업무를 한다고 했다. 우정의 8할은 알코올이라고 했던가 술집으로 자리를 옮겨 기념촬영. 나는 앤디가 제일 마음에 들었다. 이유는 딱 한 가지. 앤디가 나보다 나이가 많았기 때문이다. 여행 도중 처음으로 보는 '형님'이었다. 뭐, 나이를 따지는 게 쓸데 없는 짓이겠지만, 앤디의 나이 때문에 기분이 좋아지는 건 부인할 수 없었다. 앤디에게 이 사실을 일깨워줬더니 바로 낙담한다. "앤디가 제일 나이가 많네!" 저녁을 다 먹고 근처 바에 자리를 잡았다. 우정의 8할은 알코올이라고 했던가. 우리는 끝이 보이지 않는 맥주와 칵테일을 마시면서 우정을 키우고, 이메일 주소를 나누었다. 사진찍기도 빼놓을 수 없었다. 단체 사진 촬영을 맡기려고 술집 점원에게 건넨 카메라가 7~8개였다. 김치~! 큐피트의 화살과 라울의 '문신'을 새기고 즐거워 하는 친구들. 이럴 수가. 웃음소리와 이야기 소리에 음악이 묻힐 때쯤 개구쟁이 라울이 일을 저질렀다. 펜을 꺼내 우리에게 문신을 새겨주기 시작한 것이다. 바에 있는 여성들 팔에 죄다 큐피트의 화살을 그렸다. 그 아래에 'RAUL'이라는 글씨와 함께. 여기서 문신이 끝났으면 참 좋았을 것을. 펜은 여러 주인을 만났고, 주인이 바뀔 때마다 우리들의 팔에는 새로운 문신이 등장했다. 마치 고대의 주술이 우리 몸에 새겨져 있는 것 같았다. 주술을 외우면 정말 뭔가 신비한 일이 일어날 것 같기도 했다. 그래서였을까. 누구하나 펜을 놓으려고 하지 않았고, 문신을 지우려 하지도 않았다. 과감한 혹은 무모한 문신 새기기는 (누군가가 나중에 이름 붙인) '크레이지 나이트'가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눈을 뜨니 머리는 아프고 입술은 말랐다. 그놈의 숙취는 베트남에까지 따라왔다. 냉장고를 열어 물을 벌컥 벌컥 마셔도 정신은 여전히 혼미했다. 겨우 사워를 하고 나오니 꿈나라에 있던 라울이 침대에 걸터 앉아 안부를 묻는다. "괜찮아?" 어젯밤 우리는 달렸다. 알코올을 연료 삼아 신나게 달렸다. 우연의 일치였는지 그 자리에 있던 친구들은 참 잘 달렸다. 맥주를 몇 명이나 마셨는지 칵테일을 몇 잔이나 마셨는지 알 수 없다. 라울도 나도 며느리도 몰랐다. 맥주는 연달아, 칵테일은 통째로 숙취에 괴로워 하는 나의 룸메이트 라울. 이를 테면 우리의 '달리기'는 이랬다. 앤디는 '영국에 비하면 껌값'이라는 맥주를 연달아 마셨고 라울은 칵테일 피쳐를 통째로 입에 부어버렸다. 크리스천은 맥주와 칵테일을 번갈아 맛봤다. 제이슨과 찰리도 술잔을 쉽게 내려 놓지 않았다. 여성들은 가끔 '걷기'도 했지만, 뒤쳐지지는 않고 잘 따라왔다. 나도 질 수 없었다. 이쪽 저쪽 자리를 옮겨가며 내 잔으로 친구들의 잔을 부딪쳤다. 바디 랭기지를 섞어 가며 이야기도 많이 나눈 것 같은데 기억이 잘 안 난다. 술자리는 밤이 깊어서야 겨우 정리 되었다. 술값을 계산하고 나오는데 앤디가 외쳤다. '씨클로' 아저씨를 태우고 자기가 운전하는 라울. "수영하러 가자!" 수영? 이렇게 취했는데? 웃기는 소리였다. 그런데 그 웃기는 소리에 모두 귀를 기울였다. '말도 안 되는 소리하지 말라'며 넘길 줄 알았는데 내 귀에 들린 아우성은 '그래' '좋아!' '얼른 가자'였다. 평생 음주 수영과는 담을 쌓아둘 줄 알았는데 음주 수영을 베트남에 와서 하게 되다니. 인생 모를 일이었다. 음주 수영이 내키지는 않았지만... "수영하자!" 용감한 친구들. 결국 라울 덕분에 팬티만 걸친 채 바다 속으로 들어갔다. 음주 수영이 내키지는 않았지만, 막상 바다에 몸을 담그니 편안해졌다. 헤더가 시합을 하자고 해서 저 앞까지 수영을 했는데 보기 좋게 졌다. '왜 이렇게 느리냐'고 손가락질 하는 헤더에게 '너무 취해서 그렇다'는 변명을 하고 돌아서는데 라울이 갑자기 나를 물 속에 쳐박았다. 짠 바닷물이 코에 들어와 괴로워 하는 나를 보고 모두들 배꼽을 잡고 웃는다. 분한 마음에 라울을 쫓아가봤지만 날쌘 젊은이를 잡기에는 역부족이다. '크레이지 나이트'에 따라온 숙취 평화로운 해변.
저 앞에서 쉬고 있는 헤더와 메리. 체크 아웃을 하고 배낭을 여행사에 맡긴 다음 해변으로 갔다. 저녁에 출발하는 버스를 타기 전까지 해변에서 시간을 보낼 요량이었다. 오늘도 날씨가 좋았다. 수영을 하는 사람들과 그늘 아래 긴 나무 의자에 누워 책을 읽거나 낮잠을 자는 사람들이 보였다. 우리도 의자를 빌려 지끈거리는 머리를 달랬다. 수평선을 바라보며 평화로운 해변에서 살면 좋겠다는 생각이 했다. 삭막한 도시를 벗어나는 것만으로도 행복할 테니까. 하지만 과연 가능한 일일까. 당분간은 안 되겠지.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모두 도시에 있고 이런 곳은 금세 지루해질 거다'라는 핑계를 생각해 내버렸다. 아, 숙취가 더 심해지는 것 같았다. 아름다운 나트랑 해변. 알고 보니 저 앞에 메리와 헤더도 쉬고 있었다. 라울과 함께 가서 인사를 했더니 어제 음주 수영한 거는 미친짓이었다고 웃는다. 미친짓 맞다. "뭐야, 제일 재미있게 수영해 놓고선..." 평화로운 나트랑의 오후 큰 소리는 쳤지만, 원래 수영 실력이 형편 없는 데다가 숙취가 고통스러워서 물에 들어갈 수가 없었다. 시합은 다음 기회로 미루고 둘러 앉아 '크레이지 에잇'이라는 카드 게임을 했다. 라울이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맥주를 몇 캔 사왔다. 스페인에도 해장술이 있나보다. 파도는 여전히 잔잔했고 사람들은 행복해 보였다. 나트랑에서의 마지막 오후는 달콤했다.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던 해가 구름에 숨었나 싶더니 수평선 너머로 사라졌다. 뭐가 부끄러운지 해가 빠진 바다 위 하늘이 붉게 물들어 있다. 땅거미가 내린 해변은 아직 사람들로 붐볐다. 어두워지기 전 막바지 물놀이는 하는 사람들과 물건을 하나라도 더 팔려는 아주머니들이 보였다. 아, 떠나기 싫다. 뉴튼의 관성의 법칙은 여행에도 적용되는 게 분명하다. '정지한 물체에 힘이 가해지지 않으면 그 물체는 정지를 계속한다. 운동하는 물체에 힘이 가해지지 않으면 그 물체는 운동 상태를 바꾸지 않고 등속 직선운동을 계속한다.' 아름다운 해변과 따뜻한 친구들을 만난 곳. 누가 잡아 끌지 않는다면 영원히 나트랑에 머무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뭐, 누가 잡아 끌지 않아도 돈과 시간이라는 놈들이 우리를 가만히 두지 않겠지만. 우리는 짐을 챙겨 발바닥을 간지럽히는 모래를 음미하며 천천히 해변을 빠져 나왔다. 이제 헤더와 메리와 헤어져야 했다. 라울과 나는 저녁 버스를 타고 호이안으로 떠나지만, 어제 나트랑에 온 헤더와 메리는 내일 보트 트립을 하겠단다. 버스 시간이 남아 함께 저녁을 먹었다. 나트랑의 거리 모습. 쌀국수를 호호 불면서 사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헤더와 메리는 이번 여행이 정말 소중하다고 했다. 5주 후에 캐나다로 돌아가면 취직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헤더에게 "열심히 놀아"라고 했더니 작심한듯 "원없이 놀거야"라고 대답한다. 헤더와 메리는 하노이까지는 같이 여행하고 그 다음에는 헤더는 말레이시아로, 메리는 베이징으로 간다고 했다. 메리에게 "젓가락질 열심히 연습해서 베이징으로 가"라고 충고해줬다. 메리가 웃으면서 보란 듯이 내 눈 앞에서 젓가락질을 해보였다. "이 정도면 되지?" "응, 그런데 나보다는 못하네!" 농담을 던졌더니 메리가 눈을 흘긴다. 우리를 지켜보던 라울이 아무말 없이 서툰 젓가락질을 해본다. 시선 집중! 하지만 이내 시선 분산! 서너 번 젓가락을 붙였다 떼어다 해보더니 잘 안 된다고 신경질을 낸다. "라울! 앞으로 계속 연습해!" 나트랑 거리의 이발사. 만난 지 며칠 밖에 안 됐지만, 헤더와 메리는 유치원 때부터 알고 지내온 오래된 친구처럼 느껴졌다. 너무 오버했나. 아니다. 달랏과 나트랑. 이렇게 두 도시에서 연속으로 봤으니 그럴 만도 했다. 타지에서는 옷깃만 스쳐도 친구가 되니까. 그냥 가기 아쉬워서 맥주로 이별의 건배도 했다. "씨 유!" 또 보자는 인사를 건네고 우리는 버스 쪽으로, 헤더와 메리는 숙소 쪽으로 향했다.정말 '씨 유'다. 베트남을 떠나기 전에 일정이 겹친다면 또 만날 수 있을 것 같았다. 2층 침대 버스 내부 모습. 마치 군대 내무반 같았다. 이번에 우리를 호이안으로 데려다 줄 버스는 지금까지 탔던 것과 달랐다. 버스 크기는 비슷한데 내부는 일반 버스와 다른 모습이었다. 마치 군대 내무반을 옮겨 놓은 듯한 실내 인테리어가 돋보였다. 내무반이라면? 맞다. 이 버스는 승객들이 누워서 잠을 잘 수 있는 이층 침대 버스였다. 여기서는 'Sleeping Bus'로 불렸다. 이층 침대. 얼마나 낭만적인 단어인가. 어렸을 때 한 친구의 집에 이층 침대가 있었다. 그 친구 동생이 일층에서 자고 이층을 친구가 썼었다. 난 그 집에 놀러 갈 때마다 그 이층 침대가 참 부러웠다. 일층과 이층을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 자체가 스릴이 있었고, 이층에서 친구와 놀 때면 괜히 가슴이 벅차올랐다. 조금 불편했던 침대. 하지만 라울과 함께 오른 이층 침대는 별로 낭만적이지 않았다. 상상해보라. 버스 크기가 비슷한데 이층 침대가 들어가 있다. 얼마나 불편할 지. 철제 계단을 올라와 다리를 펴고 철제 구조에 갈색 쿠션이 깔린 자리에 앉았다. 승객들도 각자의 'ㄴ'자 모양의 의자에 올라갔다. 의자의 등받침을 뒤로 펴니 'ㄴ'자 의자는 '一'자 침대가 됐다. 178cm. 나름 학창시절 큰 키로 '부러움'을 샀던 나에게 침대는 비좁았다. 몸을 약간 구부리고 어찌 어찌 해서 누웠다. 그런데 내 왼쪽 이층 침대에 자리를 잡은 라울은 아직도 방황 중. 가방 놓을 곳이 없어 난감해 하고 있었다. 휘둥그레진 눈을 돌려 가며 투덜댄다. 오버하는 라울.^^ 나트랑을 떠나는 'Sleeping Bus'는 호이안에 내일 새벽이 돼서야 도착한다. 밤에 이동을 하니까 그만큼 시간이 절약되는 셈이다. 또 버스에서 잠을 잘 수 있으니 피곤한 승객들에게는 참 좋은 버스다. 하지만 문제는 '과연 이 버스에서 잠을 잘 수 있을까'였다. 유쾌한 영국인 부부. 음주 수영의 '묘미'를 알려준 친구들. '다른 사람들은 괜찮나'해서 뒤를 돌아보니 하나같이 불편해 보인다. 나보다 덩치 큰 외국인들은 아예 어깨가 침대 밖으로 삐져 나와 있었다. "앤디! 안녕~ 같은 버스네!" 침대 버스에 탄 기념으로 한 장! 불편한 느낌은 다시 만난 친구들의 웃음소리에 날아가 버렸다. 라울과 나는 침대에 누워 기념 촬영까지 했다. 피할 수 없으면 즐길 수 밖에. 한국에서는 탈 수 없는 이층 침대 버스니까. 즐기자! 버스는 생각보다 경쾌한 엔진소리를 내며 조심스럽게 앞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붉은 태양이 대지를 붉게 물들이는 모습이 차창 밖으로 보인다. 벌써 아침인가? 아~ 개운해. 좁은 침대에서 한숨도 못 잘 줄 알았는데 참 잘 잤다. 어제 저녁을 먹으면서 맥주를 마신 게 도움이 된 것 같다. 다시 한 번 깨달은 위대한 알코올의 힘! 버스는 호이안에 도착했다. 오래된 도시 호이안. 16세기에는 중국, 인도, 이슬람 상인들이 모여드는 국제적인 무역항으로 유명했다고 한다. 아직까지 고풍스러운 건물이 남아 있어 오래된 도시를 사랑하는 여행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호이안은 우리나라와도 인연이 있다. 불과 40여 년 전 베트남 전쟁 당시 우리나라 해병대 청룡부대가 주둔했던 곳이기 때문이다. 버스에서 내리면서 주위를 둘러보니 다들 비몽사몽이다. 라울은 내가 너무 잘 잤다고 했더니 어떻게 그럴 수 있냐며 내 등을 툭툭 친다. 해가 뜬 지 얼마 안 된 것 같은데 햇살이 벌써부터 따갑다. 크게 심호흡을 하자 물 비린내가 섞인 시원한 아침 공기가 폐로 밀려 들어왔다. 도시마다 공기가 다르다. 호치민의 아침 공기는 무미건조했고, 달랏은 쓴 맛이 느껴졌다. 그리고 냐짱은 달콤했다. 서울에서는 내가 숨을 쉬고 있는지 조차 몰랐는데 베트남에서는 공기를 맛보고 있다. 오래된 도시 호이안 조용한 호이안의 아침 풍경. 이래서 떠나야 한다는 거다. 내가 온전히 나 자신이 될 수 있는 곳. 그렇다고 비행기를 타고 꼭 어디로 가야 하는 건 아니다. 사실 장소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묵직한 첼로 연주가 흘러 나오는 아담한 홍대의 카페가 될 수도 있고, 잠자리가 날아 다니는 집 앞 공원 벤치도 좋다. 하다못해 화장실 변기도 괜찮다. 누구 아빠, 누구 아들, 누구 대리가 아니라 나 자신을 만날 수 있는 곳이 있어야 한다. 그런 공간을 찾아 나는 베트남까지 날아왔는지도 모른다. 나를 만나고 공기를 맛보고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서. 알고 보니 우리가 타고 온 버스에는 라울의 친구들이 있었다. 똑똑하게 생긴 영국 남자 스캇과 착하게 생긴 로이라는 한국 청년이 바로 그들. 스캇은 금융 쪽 회사에 다니다가 일을 그만 두고 여행을 하고 있어고 로이(한국 이름이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도 회사를 그만 두고 인도, 태국 등을 돌아보고 베트남에 들렸다고 했다. 추파 던지는 오토바이 아저씨들
"모든 사람이 나처럼 먹는다면 다 먹을 수 있을 텐데..."
중간에 약간씩 박자를 놓치기도 하고 가사도 틀렸지만 미소 하나만은 세계 최고다. 열심히 연주하는 모습이 한 TV 예능 프로그램에서 악전고투하는 '오빠밴드'를 닮았다. 팝송을 연주하고 부르는 모습은 그 어떤 그룹보다도 멋있었다. 내한공연이라도 하라고 할까.
관객들이 더 신났다. 마치 콘서트장에서 온 것처럼 환호를 보내줬다. 화끈한 공연이 끝나고 다시 자리로 돌아올 때 약간 민망하기는 했지만, 베트남 아리랑 공연은 대성공이었다.
"나도 마찬가지였어."
"응, 바다 위에서 튜브를 끼고 술을 마시는 건 처음인걸. 맛있다."
"정말 대단했어! 바다 속이 예쁘더라. 너는 어땠어?"
"우리? 우리는 노래도 부르고 춤고 추고 술도 마셨지!"
"우와~더 재밌었겠다. 나도 너 따라갈 걸~"
"내가 제일 나이가 많다고? 슬프다."
"나이가 뭐가 중요해? 마셔~"
"그래... 나이를 잊기 위해 마시자!"
"아니, 안 괜찮아."
"아, 어제 정말 많이 마셨어.그치? 머리가 아프다."
"흥! 니가 새긴 문신 때문이야!"
내일 일찍부터 투어가 있다며 옆길로 새버린 크리스천과 제이슨을 제외하고 우리 모두는 해변으로 향했다. 깊은 밤 해변에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잠든 것처럼 보이는 조용한 바다만이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다. 중간에 앤디와 제니 부부가 먼저 속옷만 걸친 채 바다로 뛰어 들었다. 그 뒤로 메리와 헤더가 따라갔다. 찰리, 테레사, 리는 구경하겠다며 모래밭에 주저앉았다. 참 난감함 상황이다. 바다로 뛰어들어야 할까, 구경해야 할까. 고민은 그리 길지 않았다. 라울이 씨익 웃으면서 망설이는 나를 검은 바다로 내몰았기 때문이다. 그대로 빠질 수는 없었다.
"잠깐만! 옷 좀 벗고~"
음주 수영을 기념하는 사진을 찍고 옷을 입었다. 다들 너무 재미있었다고 깔깔 댄다. 뭐, 재미있기는 했는데 위험한 짓이다. 운이 좋았다. 음주를 단속하는 경찰이 없었던 게 다행이라고나 할까. 사실 음주 수영은 반혼수상태에서 운전하는 것과 같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 매년 음주 수영으로 목숨을 잃는 사람들이 수십명이다. 어제는 짜릿했는데 다시 생각해보니 오싹하다. 어쨌듯 우리는 축축한 서로를 바라보며 외친 '굿나잇'으로 정신 없었던 '크레이지 나이트'를 마감했다.
모든 일에는 대가가 따르듯이 '크레이지 나이트'에는 숙취가 따라왔다. 조금 더 누워 있다가 베낭을 쌌다. 오늘 저녁에 호이안으로 떠나야 했기 때문이다. 짐을 풀었다가 쌀 때 느낌이 묘하다. 마치 군대에서 훈련 나가기 전 느꼈던 긴장감이 떠올랐다. 새로운 경험을 한다는 기대감과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는 스트레스가 내 가슴 속에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러니까 미친거지! 참, 왜 그렇게 수영이 느려?"
"술 취해서 느렸던 거라고! 한번 더 할까?"
맙소사! 숙취 때문에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떠들었는데... 눈치없는 내 손은 맥주캔를 들었고 침이 고인 내 입은 맥주를 마셨다.
"라울! 젓가락질 계속 연습해!"
낭만적인 이층 침대는 어디 가고
피할 수 없으면 즐길 수 밖에
앗, 놀랍게도 맨 뒷자리에 영국인 부부 앤디와 제니가 앉아 있다. 바로 어젯밤 순진한 나를 음주 수영의 세계로 이끈 그 부부다. 마음 같아서는 앤디 쪽으로 가서 인사하고 싶었지만, 다시 계단을 내려갔다가 올라오는 게 너무 귀찮았다. 그래서 그냥 고개만 돌려 환하게 웃는 부부에게 안부를 물었다.
"정호! 그러게 신기하다."
"(침대) 괜찮아?"
"괜찮냐고? 보다시피 (불편해)... 라울도 있네? 라울 안녕!"
"안녕~ 반가워!"
우선 숙소를 구해야 했다. 좁은 침대에서 고생한 몸에 물이라도 줘야 하니까. 어두운 짐칸에 실려 호이안까지 온 무거운 배낭도 쉬어야 했다. 어디로 갈까 하는데 라울이 친구가 머물고 있다는 게스트 하우스로 가자고 했다. "좋아!"하고 만장일치로 따라 나서는데 난감하다. 달랑 라울이 받아 적은 주소만 들고 어떻게 찾아가지?
무작정 길을 나서는데 오토바이에 걸터 앉아 있는 아저씨들이 우리들에게 추파를 던진다. '아, 오토바이를 타면 되겠구나.' 아저씨들이 어디로 가냐고 물어봐서 주소를 보여주니 어딘지 안다며 오토바이에 타란다. 요금은 1만5천동. 배낭은 앞에 놓고 우리는 오토바이 뒷자리에 올라탔다. 오토바이 4대는 상쾌한 아침 공기를 가르며 일렬로 달렸다. 시간일 일러서 인지 인적이 거리에는 인적이 드물었다. 가게도 아직 침묵하고 있었다. 높은 건물이라고는 없는 거리였다. 조용하고 한적한 곳. 마치 영화 세트장을 달리는 기분이었다. '액션'이라는 영화감독의 외침이 들릴 것만 같았다.
처음에 오토바이가 내려준 곳은 똑같은 이름의 숙소였지만, 게스트 하우스가 아니라 호텔이었다. 게스트 하우스로 가야한다고 했더니 오토바이 아저씨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시 우리를 태웠다. 몇 블럭 달리지 않아 오토바이는 가정집 같은 곳으로 우리를 데려다줬다. 이곳이 우리가 찾던 게스트 하우스였다. 파란 하늘 아래 잔잔한 강. 예쁜 물고기 조형물까지.
다행히 우리 네 남자를 위한 방이 있었다. 침대 4개를 나란히 놓아둔 방이 하룻밤에 12달러. 한 사람이 3달러만 내면 그만이었다. 함께 뭉치니 숙박비도 싸고 심심하지도 않고 일석이조다. 아직 우리방의 사람이 나가지 않아 먼저 아침을 먹기로 했다. 게스트 하우스에서 멀지 않은 곳에 노점이 있었다. 앙증맞은 의자에 사이 좋게 앉아 쌀국수를 먹었다. 스캇이 매운 고추를 먹다가 두 눈이 시뻘겋게 충혈돼 눈물을 흘린 것만 빼고는 다 괜찮았다. 고추가 맛있다고 마구 집어 먹을 때부터 알아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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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에 떠 있는 조그마한 배.
스캇, 로이, 크리스티나, 올... 새로운 친구들
숙소로 돌아와 네 명이 차례대로 샤워를 하고 빨래를 하는 동안 라울의 친구가 나타났다. 이탈리아에서 온 크리스티아니였다. 안경을 쓴 모습이 귀엽다. 라울을 호치민에서 만났다고 한다. 바르셀로나에서 5년이나 살아서 스페인어가 유창했다. 라울하고 스페인어로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이 영락없는 스페인 사람이다. 영어에 콤플렉스가 있는 라울이 물을 만났다. 크리스티아니와 스페인어로 열심히 대화를 나눈다. 말이 잘 통해서 호치민에서 친구가 됐나보다.
크리스티아니는 호이안이 좋아서 벌써 닷새째 머물고 있다고 했다. 닷새씩이나... 안 지겹나.
"너무 오래 있는 거 아냐?"
"호이안이 너무 좋아. 도시가 예쁘잖아. 그리고 싸게 옷도 살 수 있어."
"그러다가 여기에 눌러 앉는 거 아냐?"
"하하하, 그럴 지도 모르지."
그런데 크리스티아니는 정작 유명한 관광지는 둘러보지 못했다고 했다. 우리는 게스트 하우스에서 1달러에 자전거를 빌려 타고 시내를 돌아보기로 했다. 그때 올이라는 이스라엘 청년이 게스트 하우스로 들어와 방을 얻었다. 얼마 전 군대에서 전역하고 대학에 가기 전에 동남아시아 지역을 여행하고 있다고 했다. 붙임성이 좋은 올은 금세 우리와 어울렸다. 특히 '군대'라는 경험을 공유한 청년이란 게 끌렸다.
"얼마 동안 군대에 있었어?"
"3년. 여자는 2년이야."
"우리는 2년. 이스라엘 군대는 어때?"
"2년이라고? 좋았겠다. 군대는 지루했지. 다시는 안 갈래."
'군대'라는 경험을 공유했던 이스라엘 청년
점점 강해지는 햇볕. 정말 덥습니다.
어느 나라나 국방부 시계는 안 가는구나. 여기서 만난 친구들 모두 군대에 가는 한국 남자들을 불쌍히 여겼는데 올은 한국 청년들을 부러워 했다.
우리 6명은 자전거를 타고 호기롭게 시내로 향했다. 낯선 곳에서 타는 자전거는 묘했다. 오토바이와는 또 다른 맛이다. 나도 모르게 콧노래가 나올 정도로 즐거웠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짬깐. 얼마 지나지 않아 뜨거운 햇볕 아래 주눅이 들어 버렸다. 시원했던 공기는 벌써 뜨겁게 달궈졌다. 베트남 중부지방인데도 남쪽 호치민보다 더 덥게 느껴졌다. 끈적 끈적한 느낌이 아니었다. 사막에서나 느낄 수 있을 법한 건조한 더위였다. 일사병에 걸릴 것만 같았다.
다행히 사막보다는 나았다. 거리에 건물이 늘어서 있고 군데 군데 나무도 심어져 있었으니까. 낡은 지붕에 걸린 햇살은 빛을 잃어 어두 컴컴한 그늘이 되어 거리에 떨어졌다. 싱싱한 나뭇잎을 만난 햇살도 힘없이 사라졌다. 우리는 마치 햇빛을 맞으면 목숨을 잃는 귀신들처럼 필사적으로 그늘 쪽으로 자전거를 몰았다. 곡예 자전거가 따로 없었다.
나는 무슨 배짱으로 햇빛을 가릴 모자 하나 안 쓰고 뙤약볕에 나왔을까. 그러고보니 앞에 가는 스캇, 라울, 크리스티나는 죄다 모자를 쓰고 있다. 호치민보다 북쪽에 있는 도시라 만만하게 봤다가 정말 큰 코 다친다, 아니 큰 코 다 탄다. 그늘아! 어딨니? 호이안 구경하러 나왔다가 자전거 실력이 늘게 생겼다.
먼저 오픈 투어버스를 예약하기 위해 여행사에 들렸다. 호이안은 하루만 둘러보고 내일 아침에 훼로 떠날 요량으로 티켓을 알아봤더니 자리가 없단다. 낭패다. 호이안에서 4시간 거리인 훼에 정오쯤 도착해 시내를 둘러보려던 내 계획이 어그러져 버렸다. 남은 좌석은 오후 2시 출발 버스. 이 버스를 타고 훼에 가면 저녁이다. '궁궐은 저녁에 개방 안 할 텐데...' 속상했다. 그 다음날도 아침부터 저녁까지 DMZ 투어를 할 예정이라 훼를 돌아보는 게 불가능했다.
'게으른' 여행자들을 위한 티켓 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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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늘이 있어 다행이었다.
호이안에 도착하자 마자 자리를 알아봤어야 했다. '뭐, 어떻게든 되겠지!'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내일 오후 2시 버스를 예약했다. 훼에서 라오스로 넘어간다는 로이도 나와 같은 버스를 예약했다. 다른 친구들은 하루 더 호이안에 머문단다.
"훼에 볼 거 별로 없대"
"음... 그렇겠지?"
라울의 위로에 다시 힘을 얻어 자전거 폐달을 밟았다. 우리는 효율적으로 호이안을 둘러보기 위해 티켓 세트를 샀다. 5장으로 돼 있는 티켓인데 각 장으로 입장할 수 있는 곳이 달랐다. 시내에 있는 명소 십여 군데가 각 특성에 맞게 다섯 가지로 분류돼 있었다. 1번은 박물관, 2번은 중화회관, 3번은 전통가옥, 4번은 수공예품 감상 5번은 사원이었다. 가고 싶은 곳을 골라 그곳에 맞는 티켓을 내면 된다. 모든 박물관과 전통가옥 등을 보기 어려운 우리처럼 '게으른' 여행자들에게 안성맞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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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교의 모습.
우리가 뜨겁게 달구어진 자전거 위에서 오만상을 지으며 처음 찾은 곳은 응우엔 옛거리. 이 거리는 호이안의 옛모습이 보존된 곳으로 유네스코에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돼 있다. 세월의 무게가 느껴지는 건물들과 목조 다리가 우리를 맞았다. 아, 이 느낌. 마치 어렸을 때 재미있게 봤던 영화 <백투더퓨처>를 찍는 기분이었다. 아쉽게도 영화는 금방 끝났다. 다리를 배경으로 기념촬영을 하는 사람들이 나를 현실로 데려다 놓았기 때문이다. 단체 관광객들은 독사진도 찍고 커플사진도 찍으며 즐거워했다.
자전거를 세워놓고 다리 위로 올라가 티켓을 한 장 냈다. 이 다리는 일본인들이 만들었다. 그래서 일본교라고 불린다. 16세기에 모습을 드러낸 다리는 일본인들의 거주지와 중국인들의 거주지를 잇는 역할을 했다고 한다. 오랜만에 밟는 나무바닥이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위를 지나갔을까. 실내는 신을 섬기는 사당으로 꾸며져 있었고 그 옆에서 한 아가씨가 기념엽서와 기념품을 팔았다.
참 친절한 설명이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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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를 마시는 친구들.
다리 위에 서서 앞을 바라보니 잔잔한 투본 강이 눈에 들어왔다. 조그마한 배 한 척이 가만히 떠 있다. '국제적인 무역항'으로 이름을 날리던 수백 년 전에는 많은 배가 다녔겠지. 다리에서 내려와 우리도 다른 사람들처럼 다리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다.
다음에 들린 곳은 일본교 근처에 있는 오래된 집이었다. '베트남, 중국, 일본의 건축 양식이 뒤섞여 있는 가옥'이라는 가이드 북의 설명처럼 묘한 분위기가 풍기는 집이었다. 200년이 넘은 집이란다. 안으로 들어가니 한 여성이 녹차 같은 차를 작은 잔에 부어줬다. 아이스 차가 아닌 게 아쉽기는 했지만, 맛은 좋다. 호호 불어서 아껴 마시고 있는데 여성이 집에 대해서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참 친절한 설명이었지만, 내 귀엔 잘 안 들어왔다. 스캇과 올만 100% 알아 들을 수 있을 영어 설명이었기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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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가 내부 모습.
내 귀보다 눈을 더 믿을 수밖에 없었다. 집안은 집 주인들로 보이는 사람들의 사진들과 알 수 없는 배지로 장식돼 있었다. 오래된 벽과 가구는 이 집과 잘 어울렸다. 스캇에게 설명 잘 들었냐고 물어봤더니 어깨를 으쓱한다. 별로였나.
어느새 점심 시간. 우리는 크리스티나가 알고 있는 싸고 맛있는 식당으로 향했다. 한 낮의 거리는 너무 더워서 돌아다니기 힘들었다. 호이안에는 바람이 없는 게 분명했다. 바람을 일으켜 보려고 자전거의 속도를 높여봐도 감감 무소식이다. 강변으로 나가서야 바람이 조금씩 분다. 두 아이는 그늘 아래 앉아 한가롭게 마작 같은 게임을 하고, 카페에는 더위를 피하는 사람들로 붐볐다. 강변에 서서 잠깐 사진을 찍는데 바구니가 달린 장대를 어깨에 멘 아주머니가 우리 옆으로 지나갔다.
팔자에 없는 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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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머니와 기분 좋게 사진을 찍었지만...
주민들과 사진을 같이 찍고 싶었던 스캇이 아주머니를 세워 카메라를 가리켰다. 마음씨 좋게 생긴 아주머니는 활짝 웃으며 카메라 쪽으로 몸을 돌렸다. 아주머니는 장난끼가 발동했는지 자신의 바구니를 라울의 어깨에 얹어 주려고까지 했다. 상상도 못했던 아주머니의 행동이 어찌나 재미있던지 모두들 '하하하' 소리 내어 웃었다.
드디어 사진촬영. 원, 투, 쓰리! 우리는 일렬로 서서 아주머니와 사진을 찍었다. 아주머니에게 고맙다고 하고 돌아서는데 아주머니가 불쑥 손을 내민다. 악수를 하자는 건가. 옆에 있던 라울이 악수를 하려고 하는데 아주머니가 손을 뿌리친다. 그러고는 다시 손바닥을 펴서 라울 앞에 내민다. 아주머니의 얼굴에 웃음기는 벌써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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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심히 달릴 수밖에...
설마했는데... 아주머니의 손짓은 우리가 생각했던 것과 달랐다. 아주머니의 손은 돈을 원하고 있었다. 사진을 같이 찍어줬으니 돈을 달라는 거였다. 당황스러웠다. 아주머니에게 모델비를 줘야 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으니까. 며칠 전 달랏에서 내 사진을 찍어주고 2천동을 받아간 아저씨가 떠올랐다.
"미안해요, 돈이 없어요"라고 하는데도 아주머니는 버티고 서 있다. 할 수 없이 우리는 아주머니를 두고 자전거에 올라탔다. 팔자에 없는 도주였다. 우리는 도망하는 죄수들처럼 그 자리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기분 좋게 사진 찍고 이게 뭐람. 다행히 아주머니는 우리를 따라오지 않았다. 대신 그 자리에서 뭐라 뭐라 소리를 질렀다. 우리에게 뭔가 안 좋은 소리를 하는 것 같았다.
자전거는 금세 다른 거리로 접어 들었다. '이제 됐겠지'하고 한숨 돌리는데 괜스레 미안한 마음이 든다. 그냥 적은 금액이라도 드릴 걸 그랬나보다. 여유를 찾기 위해 온 여행길을 더 팍팍하게 만들고 있는 것 같아 속상한 마음까지 들었다. 이런 바보! '나라도 드리고 왔어야 했는데...' 어떻게든 손해 안 보려는 속물 근성은 외국에 와서도 쉽게 안 없어진다.
친구들은 나의 '고통스런' 마음을 알아채지 못한 것 같았다. 내가 자학을 하고 있는 동안 차례 차례 자전거를 세우고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2층으로 이루어진 이곳은 수공예품 생산 모습과 특산품을 볼 수 있는 공간이었다.
1층 바닥에는 중학생으로 보이는 남자아이 둘이 앉아 열심히 나무를 깎고 있었다. 불상을 만드는 모양이다. 뒤에 병풍처럼 서 있는 '해피붓다'들이 아이들이 무엇을 만드는지 귀띔해줬다. 나이는 어려 보였지만, 혼신의 힘을 다해 일하는 모습이 감동적이었다. 20여 가지가 넘는 조각칼로 번갈아 나무를 파내는 모습에는 '장인 정신'이 어려있었다.
'해피붓다' 만드는 아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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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심히 조각을 하고 있는 아이들.
그 옆에는 베트남 전통 의상을 입은 여자 인형들이 새 주인 기다리고 있었다. 옷이 날개라더니 화려한 옷을 입은 인형은 참 예뻐보였다. '저 인형이 다 진짜 사람이었으면...'이란 공상이 들 정도였다. 인형을 파는 여인은 재봉틀까지 가져다 놓았다. 문제가 있는 인형을 바로 A/S를 해주나보다.
2층에는 그동안 다른 도시에서 봐왔던 스카프 같은 물건이 진열돼 있었다. 역시 여성 손님들이 압도적으로 많다. 실크 스카프 가격을 물어보려다가 호치민보다 싸면 마음이 아플 것 같아서 입을 열지 않았다. 바람을 불러오는 부채와 햇빛을 가려주는 모자도 손님들을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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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 악기 연주에 맞춰 노래하는 여자들.
다시 아래로 내려와 보니 스캇이 나를 부른다. "입구 쪽에서 공연 시작했어"라며 나를 입구쪽으로 유혹했다. 그 앞에 가보니 많은 사람들이 벌써 의자에 다 앉아 있다. 바로 베트남의 전통 공연이 시작됐다.
먼저 듣기 좋은 노랫소리가 흘러나왔다. 혼성 5인조 밴드의 연주에 맞춰 보라색과 분홍색 옷을 각가가 입은 두 가수가 나와 잔잔한 노래를 들려줬다. 밴드가 연주하는 악기는 우리나라 전통 악기와 비슷하게 생겼지만, 소리는 약간 더 경쾌했다.
관객 사로잡은 전통 문화 공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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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아지경에 빠진 여배우.
노래가 끝나자 한 여성이 나와 1인극을 보여줬다. 이 배우는 얼굴 표정과 몸동작으로 옛날부터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를 표현했다. 생각보다 '리얼한' 연기에 감탄사가 저절로 나왔다. 숨죽이고 바라본 배우의 열연이 끝나자 모두들 큰 박수를 보내줬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배우는 연기를 하는 동안 목소리를 전혀 내지 않았다. 무대 옆에서 마이크를 잡고 있는 사람이 대사를 했기 때문. 마치 무성 영화에서 활약했던 변사 같았다. 그래서 더 극적으로 느껴졌는지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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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채춤에 이어 항아리춤을 선보이는 여인들.
마지막 순서는 춤이었다. 아리따운 여성들이 나와 부채춤과 항아리춤을 보여줬다. 우리나라에서도 쉽게 볼 수 있는 부채춤이라 설렁설렁 보는데 옆에 있던 영국 남자 스캇은 눈을 떼지 못한다.
"부채로 저렇게 춤을 추는 거 처음 봐."
"한국에 오면 더 예쁜 춤 보여줄게."
"정말? 꼭 가야겠다."
"꼭 와!"
햇빛 가리개 있는 시클로가 부러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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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사적인 햇빛 가리기.
공연을 다 보고 나와보니 오후 1시가 다 돼 간다. 더위가 절정에 이르렀다. 호이안과 다낭에 진을 쳤던 해병대의 가장 큰 적은 더위였을 것 같다. 사람을 무력하게 만드는 더위를 먼저 극복해야 살아 남을 수 있었겠다.
거리에는 햇빛 가리개가 있는 시클로(자전거 앞에 좌석을 붙여 사람을 태울 수 있게 만든 것)가 많이 늘었다. 그늘 아래 안락해 보이는 의자에 있는 사람들, 참 좋아 보인다. 이것도 더위를 이기는 법일까. 자전거를 타는 여성들은 긴소매 옷에 선글라스와 마스크를 착용했다. 나는 달랑 선글라스 뿐인데... 잊지말자. 여행에는 만반의 준비가 필요하다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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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점 뜨거워지는 거리.
자전거까지 뜨거워져 괴로움이 두 배가 된 이 순간. 단 한 사람만 괜찮아 보였다. 바로 이스라엘에서 온 올. "괜찮냐"고 물어보니 끄덕 없단다.
"군대에 있을 때 더운 날 훈련을 많이 했거든."
"이스라엘은 별로 안 덥지 않아?"
"고원지대는 괜찮지만, 해안 쪽은 여름에 무척 더워. 내가 훈련했던 곳은 더웠어."
"나는 해안선 지키는 부대에 있어서 별로 덥지는 않았어."
베트남에서 나눈 군대 이야기
예비역들은 못 속이는 걸까. 올이랑은 무슨 이야기를 해도 군대로 수렴된다. 베트남까지 와서 군대 이야기라. 음냐, 말을 하지 말아야지. 하지만 결심은 몇 초 사이에 무너져 내렸다.
"한국 위험하지? 아직 전쟁 중이잖아?"
"어... 그렇긴 하지. 니네도 전쟁 중이잖아?"
"전쟁은 무슨, 그냥 준비하는 거지."
"팔레스타인하고 전쟁 중 아니야?"
"그걸 뭐 전쟁이라고 할 수 있나? 전쟁까지는 아니지."
팔레스타인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이스라엘. 그동안 얼마나 많은 팔레스타인들이 이스라엘의 미사일에 쓰러졌을까. 그동안 얼마나 많은 이스라엘인들이 자살폭탄테러에 목숨을 잃었을까. 복수는 복수를 부르고 피는 피를 부른다. 대화와 타협이란 정답을 왜 그렇게 외면하는지 답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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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이안 투본 강변의 모습.
물론 우리도 남말 할 처지가 못 된다. 아직 전쟁 중인 나라에 살고 있으니까. 아직 서로 믿지 못하고 있으니까. 올에게 한마디 쏘아붙이려다가 말았다.
시간이 벌써 1시가 넘었지만, 나머지 두 곳을 돌아보고 점심을 먹자는 게 대세였다. '그래, 이 상태에서 점심을 먹고 나서는 몸이 무거워져서 아무 것도 못해'라고 내 자신을 위로하며 자전거에 올랐다. 앗, 뜨거! 이 엄청난 열기. 엉덩이와 두 손이 순식간에 익어버릴 것만 같았다. 다들 화들짝 놀란 표정이었다. 배고픈 우리는 그래도 괜찮은 편. 정작 휴식이 필요한 건 열받은 자전거였다
배가 채우고 나니 눈꺼풀이 무거워졌다. 식당에 누워 한숨 자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모양' 빠지게 내가 먼저 '숙소로 돌아가서 쉬자'고 할 수가 없었다. 누군가 총대를 메면 맞장구를 쳐주려고 기다리는데 아무런 이야기가 안 나온다. 아까부터 땀을 많이 흘리던 스캇이 나서주면 좋으련만. '음, 역시 유일한 30대인 내가 나서야 하나' 머뭇거리고 있는데 크리스티나가 입을 열었다.
"우리 이제 다 돌아봤는데 뭐할까. 쇼핑 할 사람은 없지? 그럼 바닷가로 놀라가자!"
헉, 바닷가? 호이안에도 바다가 있었나? 가이드북에 해변이 안 나와 있는데...
"여기에 바다가 있어?"
"응, 동쪽으로 한 3,40분 정도 자전거 타고 가면 해변이 있어. 물이 깨끗해서 놀기 좋아."
선뜻 "가자"고 하지 못하고 눈치를 보는데 라울이 "가자"고 외친다. 땀 많이 흘린 스캇도, 올도 좋단다. 그나마 로이가 나와 뜻이 잘 맞기는 했지만, 우리만 빠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뭐라고 대꾸를 하려고 하는데 혈기 왕성한 20대 청춘들은 어느새 자전거 옆에 섰다. 나도 얼른 자전거를 끌고 나오는데 청춘들은 벌써 출발한다. 너무해, 여기는 '경로우대'도 없냐!
서른 넘은 아저씨의 '저질체력' 호이안의 그림 같은 풍경.
해변은 동쪽인데 친구들의 자전거는 반대쪽으로 달렸다. "어디로 가냐"고 물어보니 올이 "해변에 가기 전에 조금 더 둘러보기로 했다"고 설명해줬다. 체력도 좋다. 나름대로 헬스를 하면서 체력을 비축했다고 생각했는데 호이안에 와서 '저질체력'이 됐다. 서른이 넘으면 운동을 많이 해도 현상유지만 된다고 하더니 그 말이 꼭 맞다.
아까보다 행인들이 많이 줄었다. 사람들은 어디선가 절정에 이른 더위를 피하고 있었고, 우리는 어디론가 절정에 이른 더위를 즐기러 가고 있었다. 가끔식 지나가는 사람들도 선글라서와 수건으로 완전 무장했다. 노천카페 그늘 아래 편히 쉬고 있는 관광객들이 우리를 쳐다봤다. 아니, 그냥 쳐다본 게 아니었다. 우리를 긍휼히 여기는 눈빛이었다. 난 느낄 수 있었다. 강의 북쪽은 오래된 거리가, 남쪽은 현대식 건물이 있었다.
처음에 봤던 일본교를 지나 서쪽으로 달렸다. 5분 정도 달렸을까. 한적한 강변이 눈 앞에 펼쳐졌다. 잔잔한 강물 위에 반짝이는 햇살이 내려 앉았다. 강을 기준으로 위와 아래의 분위기가 달랐다. 북쪽 오래된 거리에는 관광지와 상점, 시장, 식당 등이 자리하고 있어 번화했고, 현대적인 건물이 들어서 있는 남쪽은 조용했다. 남과 북을 연결하는 다리 위에는 친구들의 카메라 셔터 소리와 '치즈' '김치'라는 목소리만 들렸다.
자전거를 버리고 싶었다 열심히 사진을 찍는 친구들.
자, 이제 진짜 해변으로 향할 시간. 크리스티나, 라울, 올이 먼저 출발하고 나는 로이와 스캇과 PC방에 잠깐 들렸다가 따라 가기로 했다. 숙소에 들려 샤워를 하고 수영복을 쳥겨 PC방을 찾아 나섰다. 그런데 다른 도시에서는 쉽게 찾았던 PC방이 안 보인다. 거리를 샅샅이 뒤져도 PC방을 발견하지 못했다. 가게 주인들에게 물어봤지만, 알려주는 대로 간 곳마다 PC방이 아니었다. 여기 저기 기웃거리다가 다시 땀이 등을 적실 때쯤 깨끗하게 포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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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무장하고 오토바이를 타는 사람들.
"도대체 PC방은 어디에 있는 거야? 있다가 다시 찾아봐야겠다. 먼저 가! 난 신발 좀 맞추고 갈게."
'복고미'가 뛰어난 호이안은 맞춤 정장이나 맞춤 신발로도 유명했다. 상품의 값이 싸고 디자인과 품질이 좋아 쇼핑을 즐기는 여행객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크리스티나는 5일 동안 호이안에 머물면서 이미 몇 벌이나 맞췄다고 했다. 스캇도 영국 가서 신을 가죽 신발 몇 켤레를 사겠단다.
로이와 나는 스캇과 헤어진 뒤 동쪽으로 자전거를 돌렸다. 큰 도로를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5분 정도 달렸을까. 도로를 따라 길게 늘어서 있는 상점을 지나고 있는데 벌써 다리가 아파왔다. 아직 해변의 '해'자 냄새도 맡을 수 없는 곳인데...
크리스티나의 말을 들었을 때는 평탄한 자전거 도로가 깔려 있을 것만 같았는데 저 앞은 오르막길이다. 주위를 둘러보니 자전거를 타고 다니는 사람들이 별로 없다. 오토바이를 몰고 신나게 달리는 사람들만 눈에 들어왔다. 이럴 줄 알았으면 오토바이 택시를 타고 오는 건데. 다리는 무거워지고 정신은 혼미해졌다. 철인 3종경기를 하고 있다는 착각까지 들었다. 뭐, 해변에 가서 수영을 할 예정이니까 여기에 달리기만 추가하면 딱 맞는 셈이다. 그보다 과연 해변까지 갈 수나 있을까. 자전거를 버리고 오토바이에 올라 타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억눌렀다.
평화로운 시간이여 멈추어 다오 해변 앞에 마련된 대규모 오토바이 주차장.
고개를 몇 개 넘고 수많은 상점들과 굉음을 내는 오토바이를 보낸 후에 간신히 해변에 도착했다. 우리들은 이런 걸 흔히 '인간승리'라고 부른다. 자전거를 어디에다 세울까 하고 둘러보는데 왼쪽 공터에 수백대의 오토바이가 나무 지붕 아래 줄지어 서 있다. 가까이 가보니 오토바이 주차장. 이렇게 많은 오토바이가 가지런히 서 있는 모습은 생전 처음이다. 각양각색의 오토바이들이 물놀이에 빠져 있을 주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정말 베트남은 오토바이의 나라다. 우리가 타고 온 자전거가 왜 그리 초라하게 보이던지...
그래도 한 켠에 자전거도 서 있는 걸 보니 여기다가 자전거를 세우고 해변에 가야 하나보다. 해가 구름에 가려지자 인파가 몰려왔다.
"그냥 길가에 세워둘까?"
"누가 집어 갈수도 있으니까 여기다가 세우죠."
로이의 충고대로 자전거를 두고 가기로 했다. 눈치를 보고 있는데 남자 직원이 다가온다. 다짜고짜 베트남어로 뭐라고 해서 조금 당황하기는 했지만, 별 탈 없이 5천동을 내고 자전거를 세우는데 성공했다. 번호표를 받아 들고 주차장에서 나와 해변으로 향했다. 다른 사람들은 먹을거리를 가져와 맛있게 먹는데... 우리는 그냥 구경만.
천신만고 끝에 도착한 바닷가는 냐짱 해변보다 크기가 작은 아담한 곳이었다. 그래도 파도도 제법 치고 물도 이만하면 깨끗했다. 사람들도 그렇게 많지 않아 조용했다. 저쪽에 크리스티나 일행이 모래사장에 앉아 있었다. 터벅 터벅 걸어가 "너무 힘들었어"라고 했더니 라울이 "빨리 물에 들어가"라고 나를 바다로 떠민다.
못 이긴 척 들어간 바다는 시원했다. 천천히 헤엄쳐 나갔다가 몸에 힘을 빼고 파도에 밀려오기를 반복했다. 로이는 어떤 꼬마가 영어로 계속 말을 시켜서 도망다니느라 바빴고, 라울은 베트남 아이들이랑 모래사장에서 공놀이를 했다. 체육교사답다. 크리스티나와 올은 여전히 모래사장에 앉아 수다를 떨었다. 아, 평화로운 시간이여 멈추지 다오.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
얼마 지나지 않아 스캇이 합류했다. 스캇도 물에 안 들어오고 모래사장에 앉아 버렸다. 나만 어린애처럼 물놀이를 즐겼다. 늦은 오후가 되자 뜨거웠던 해는 구름 뒤로 숨어 버리고 대신 인파가 몰려왔다. 거의 대부분이 이곳 주민들이나 근처 이웃들인 것 같았다. 가족 단위로 모래사장에 자리를 깔고 앉아 웃음꽃을 피우며 가져온 음식을 나눠 먹는다. 우리도 음식을 조금 싸올 걸 그랬나보다. 치킨, 과자, 과일을 푸짐하게 가져와 맛있게 먹는 사람들을 보니 너무 부러웠다
"자, 이제 돌아가자!"
해변으로 우리를 안내했던 크리스티나가 다시 한번 외쳤다. "그래! 가자!" 해가 지기 전에 얼른 숙소로 돌아가는 게 나았다. 불쌍하게 사람들 먹는 거 구경하는 것도 좀 그렇고. 수건을 안 챙겨온 탓에 물에 빠진 생쥐 마냥 축축한 채로 모래사장을 가로질러 나갔다.
한손에 과자를 든 아이들이 모래사장을 뛰어 다닌다. 에너지가 넘치는 모습에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간다. 티없이 잘 자라다오! 아이들을 요리조리 피해 모래사장을 빠져 나와 자전거를 세워둔 주차장으로 몸을 돌리는데 우리보다 먼저 해변에 도착했던 라울, 크리스티나, 올은 다른쪽으로 간다.
"자전거 안 찾아?" 해가 저무는 풍경이 예술이다. 핀잔을 주려는데 벌써 올이 자전거를 끌고 온다. 음, 베트남에서는 자전거를 잘 안 훔쳐가나보다. 서울에서는 도심 한복판에 자물쇠를 채워둔 자전거도 없어지는데. 괜히 주차비만 날렸다. 주차장에 들어가보니 우리가 세워둔 자리가 어딘지 헷갈린다. 직원에게 번호표를 보여주고서야 자전거를 찾아냈다.
"자전거? 우리 자전거는 저쪽에 있는데."
"주차장에 안 세웠어?"
"돈 아끼려고 그냥 나무 옆에 세워뒀어."
"잃어버리면 어떻게 하려고..."
해가 저무는 호이안
다시 나만의 철인 3종경기가 시작됐다. 돌아가는 길은 더 힘들다. 폐달을 돌리는 장딴지와 허벅지가 비명을 지른다. '베트남으로 해외 전지 훈련왔니?'라고 내 자신에게 물어 봤다. '...' 대답이 없다. 나를 추월해가는 오토바이만이 '부릉 부릉' 호들갑을 떨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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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에 젖은 생쥐라도 기념사진은 찍어야 했다.
저만치 앞서가던 라울 일행이 다리 위에 멈춘다. 자전거에서 내려 카메라를 꺼내들더니 열심히 사진을 찍는다. 무슨일이지? 궁금한 마음에 고통도 잊은 채 다리까지 힘껏 폐달을 돌렸다.
"왜 그래?"
"하늘 봐봐!"
하늘? '아...' 탄성이 흘러나왔다. 첫눈에 반했다. 고개를 돌려 바라본 하늘은 누군가가 캔버스 위에 물감으로 그려 놓은 작품 같았다. 활활 타오르던 해가 저물다가 짙은 회색 구름에 걸렸다. 돌발상황에 당황한 해가 사방으로 붉은 빛을 쏘아댄다. 아름답다. 이 순간을 간직하고 위해 똑딱이 카메라를 들어 몇 장 찍어봤지만, 성에 차지 않는다. 눈으로 찍어 머릿속에 집어 넣을 수밖에.
거리에서 우연이 만난 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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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양각색의 등.
구름을 빠져나온 해가 본격적으로 저물기 시작할 때쯤 우리는 다시 자전거에 올랐다. 훌륭한 작품 감상을 해서 그런지 한결 폐달질이 수월하다. 어찌 된 영문인지 앞서가던 라울, 크리스티나, 올이 뒤로 처지고 스캇이 선두로 나섰다. 로이와 나는 스캇을 뒤쪽아 갔지만, 따라 잡지는 못했다. 쓸 데없는 경쟁심은 건강을 해칠 수도 있는 법. 우리 페이스대로 달렸다.
40분 남짓 쉬지 않고 달려서 겨우 출발했던 거리로 돌아왔다. 이미 날은 어두워졌고 알록달록한 네온사인과 흥겨운 라운지 음악이 거리를 뒤덮었다. 여행의 자유를 만끽하는 사람들이 그 거리에 나와 있었다. 길 위에 쏟아버린 에너지를 빨리 보충하고 싶은 마음에 서둘러 달리는데 낯익은 얼굴이 보인다.
"헤이~찰리!"
"정호!"
"언제 왔어? 어제 같은 버스 타는 줄 알았는데 없더라."
"나도 너 찾았는데 없더라~ 버스가 중간에 고장나서 오후 늦게 호이안에 왔어."
"정말? 안 됐다. 난 바닷가 갔다오는 길이야. 잘 됐다. 한 시간 후에 저기 다리에서 보자!"
신기하다. 냐짱에서 헤어졌던 찰리를 다시 만날 줄이야. 같은 슬리핑 버스를 못 타서 못 볼 줄 알았는데, 역시 세상은 좁다. 숙소로 돌아가 샤워를 하고 있으려니까 라울 일행이 도착했다. 라울에게 찰리를 만났다고 말했더니 라울도 깜짝 놀란다. 자기는 크리스천을 만났단다. 정말 세상은 좁다. 밤이 되자 못 보던 등가게가 문을 열었다.
어두워지자 불어오는 시원한 강바람
교대로 얼른 씻고 나서 저녁을 먹으로 밖으로 나왔다. 가장 먼저 강바람이 얼굴에 닿는다. 시원하다. 낮에 불볕 더위 때문에 고생했던 기억이 가물가물하게 느껴진다.
강변 앞에는 낮에 못봤던 가게들이 문을 열었다. 황홀한 빛을 뿜어내는 각양각색의 등이 손님들을 유혹하고 있다. 호이안이 등으로도 유명한가? 강 위에 있던 각종 조형물들도 감춰뒀던 색깔을 드러냈다. 불을 밝힌 물고기, 연꽃, 염소 등이 물 위에 비친 모습은 예술이다. 낮에는 그냥 모형인 줄 알았는데... 우리는 찰리와 크리스천을 만나 즐겁게 저녁을 먹고, 맥주를 마시면서 수다를 떨었다. 만난지 며칠 밖에 안 되는 사이지만, 머나먼 타지에서는 그 며칠이 몇년, 몇십년인 것처럼 느껴졌다. 나만 빼고 모두들 참 많은 나라를 다녔다. 스페인 출신 라울은 남아메리카를 다 돌고 동남아시아를 다니고 있고, 아일랜드 남자 크리스천은 호주에서 워킹 홀리데이를 하고 아시아 여행이 나섰다. 이탈리아에서 온 크리스티나는 스페인에서 5년 동안 살았단다. 그래서 라울하고는 스페인어로 대화한다. 한국 청년 로이도 태국, 홍콩 등 다니며 여행을 즐기고 있었다. 내 옆에 있던 크리스천이 진지한 표정으로 자신이 생각하는 여행의 의미를 알려줬다. 멈출 수 없는 여행에 대해서. "정말 여행은 좋은 것 같아. 새로운 풍경을 보는 것도 좋지만, 여행을 다니면 나를 돌아볼 수 있어. 내가 살아올 날들과 내가 살아갈 날들을 말이야. 그래서 여행하기 시작하면 멈출 수가 없나봐. 중독이지." 어디론가 바삐 가는 자전거. 난 뭐했을까? 생각해보니 그동안 따뜻한 집에서 어머니가 차려준 밥상을 받으며 잘 지냈던 기억밖에 없다. 나이는 32살인데 아직도 가족에게 너무 의존적이다. 배낭을 메고 혼자 떠날 생각을 하지 못했다. 인생에 대한 고민 없이 '좋은 게 좋은 거다'라는 심정으로 그냥 그렇게 살아왔다. 하지만 올해는 달랐다. 제2의 사춘기가 찾아온 것처럼 내 존재와 삶에 대한 회의가 들었다. '이대로 살아야 하나' '다른 삶은 없을까'. 답답했다. 내 인생을 온전하게 살지 못했다는 자책감마저 들었다. 그 답답함이 나를 베트남에 데려다 놓았는지도 모른다. "하노이에서 다시 만나자!" 양털 구름이 예쁜 호이안의 하늘. 로이와 나는 내일 오후에 호이안을 떠난다. 목적지는 훼. 물어보니 우리와 일정이 딱 맞는 사람이 없다. 아침 버스를 타고 훼로 가는 크리스천이 그나마 일정이 비슷하다. 친구들에게 아쉽다고 했더니 대수롭지 않은 반응이 나온다. "괜찮아~ 하노이에서 만나면 되지!" 낙천주의자 라울과 크리스티나가 한 마디씩 해준다. 고맙다 친구들! 다시 만날 수 있다는 희망만 있다면 슬프지 않다. 지금 이 순간을 즐기면 되는 것이다. 우리는 술잔을 높이 들고 내가 알려준 '건배'를 외치며 술잔을 부딪쳤다. 마작 같은 게임을 하는 아이들. 건물의 얼룩은 강이 범람했을 때 생긴 것. 오늘도 오토바이 엔진소리에 눈을 떴다. 아직도 친구들은 꿈나라에 있었고, 대신 허락도 받지 않은 햇살이 우리 방에 들어와 있었다. 시간이 벌써 오전으로 접어 들었다. 늦잠을 잤는데도 머리가 조금 아팠다. '건배'를 몇 번이나 외쳤는지 기억이 안 날 정도로 잔을 부딪혔던 게 떠올랐다. 이러다가 이번 여행은 내 인생에서 '음주 여행'으로 이름 붙여질 지도 모른다. 빨래가 잘 말라 행복했던 호이안 샤워를 하고 나와보니 그 사이 친구들이 다 일어났다. 모두들 부스스하다. 로이와 나는 짐을 쌌다. 호이안에서는 날씨가 좋아 빨래가 바싹 말랐다. 아싸! 훼에서 속옷을 제대로 갈아 입을 수 있겠다. 달랏에서 빨래가 잘 안 말라 고생했었는데 냐짱과 호이안 모두 날씨가 좋아 다행이었다. 작은 것에 행복을 느끼는 것. 이게 바로 여행이다. 마네킹으로 사람들의 눈길을 끄는 옷가게. 친구들과 작별 인사를 하고, 아니 하노이에서 다시 만나자는 약속을 했다. 나는 약간 슬픈데 친구들은 희희낙락인 것 같다. 나이든 아저씨를 쫓아버려서 기분이 좋은가. 제일 오랜 시간 함께 했떤 라울이 제일 좋아 한다. 치, 라울 미워! 로이와 큰 배낭을 메고 거리로 나왔다. 아, 오늘도 덥다. 양털 구름이 떠 있었지만, 햇살을 가려주기에는 너무 외소했다. 조금이라도 돈을 아끼자는 생각으로 버스 타는 곳까지 걸어가기로 했는데 10미터 걷고 바로 후회했다. 그렇다고 오토바이 택시가 눈에 보이지도 않아서 그냥 최대한 그늘 속을 옮겨 다니며 걷기로 했다. 1달러짜리 백반 점심시간 식당을 찾아 온 손님들. 호이안, 참 매력적인 도시다. 이렇게 옛 거리를 걷는 기분은 어디서도 느끼기 힘들지 않나. 우리나라만 해도 '디자인', '뉴타운'이라는 수식어를 붙여 가며 옛 걸들을 모조리 파괴하고 있는데... 옛 것과 새 것을 조화롭게 하는 게 발전이고 개발일 텐데 우리는 어떻게든 갈아 엎으려고만 한다. 그렇게 해야만 선진국이 되고 잘 사는 게 된단다. 나중에 친구들이 우리나라를 찾아와서 뭐라고 할까. 벌써 걱정된다. 땀을 뻘뻘 흘리면서 버스가 서는 여행사 앞에 도착했다. 짐을 잠시 사무실에 맡기고 점심을 먹으러 나왔다. 뭘 먹을까 하고 둘러보는데 저 앞 오토바이가 많이 서 있고 사람들은 의자에 앉아 있었다. 호기심에 로이와 함께 그 앞까지 가보니 사람들이 맛있게 밥을 먹고 있다. 백반을 파는 식당이었다. 쌀밥에 여러 가지 반찬을 얹여 주었다. 얼마냐고 물어보니 2만동이란다. 넉살 좋은 로이가 "1만 5천동!"이라고 외치자 아주머니가 못 이긴 척 고개를 끄덕인다. 대단한 로이! 1만 8천동이 1달러니까 이 점심은 1달러도 안 되는 셈이다. 계란과 양배추 그리고 돼지고기 자리에 앉아 있는데 아주머니가 접시에 밥을 떠놓고 뭐라 뭐라 한다. '어떤 반찬을 넣어줄까'라고 하는 것 같았다. 아무 거나 달라는 의미로 어깨를 으쓱해 보였더니 아주머니가 빠른 손놀림으로 밥 위에 반찬을 담아준다. 1달러가 채 안 되는 백반. 밥을 계란과 양배추 그리고 돼지고기가 덮고 있었다. 국물도 한 그릇 내줬다. 옆 테이블에 있는 사람들은 접시에 따로 반찬을 더 주는데 우리는 이게 끝이다. 음, 왜 그런 거지? 베트남어를 모르는 슬픔은 더 이상 물어볼 수 없다는 것에 있다. 주는 대로 먹을 수밖에. 밥 먹는 동안 이 식당에는 베트남 사람들만 찾아왔다. 궁색한 식당이라 관광을 온 사람들은 잘 찾지 않나보다. 먹어보니 음식이 담백하다. 자극적인 맛을 좋아하는 외국인들의 입맛에 잘 맞지 않을 것도 같았다. 하지만 육군 예비역인 로이와 내 입맛에는 진수성찬이었다. 금세 한 접시를 비우고 나서 버스 타는 곳으로 돌아왔다. 호이안에서 훼로 직행할 줄만 알았던 버스가 다낭에서 멈춰 버렸다. 웬일인가 해서 운전석 쪽을 바라보니 중국 사람들처럼 보이는 대여섯 명의 아저씨들이 버스에 오른다. 호이안과 훼의 중간에 위치한 다낭에서 손님을 태우기 위해 정차했나보다. 지금은 베트남 중부지역의 최대 산업도시가 된 다낭은 남중국해로 나갈 수 있는 항구로써 옛날부터 무역항으로 번영했던 곳이다. 하지만 베트남전 당시만에는 다낭은 미군과 한군군의 도시였다. 미군은 이곳으로 상륙해 해병 사령부를 구축했고, 한국군은 청룡부대가 주둔했다. 아저씨들이 자리에 앉자 버스는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버스에서 바라본 다낭에서 전쟁의 흔적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차창 밖으로 푸른 바다가 길게 누워 있었고, 그 앞에는 뙤약볕에 지친 컨테이너가 꼼짝도 하지 않고 앉아 있었다. 거리에는 시원한 옷차림을 한 사람들과 손님을 기다리고 있는 호텔과 식당이 보였다. 다낭도 둘러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촉박한 일정 때문에 버스에서 바라보는 걸로 만족해야 했다. 훼로 가는 버스 안에서. 후드득 두드득. 차창을 때리는 빗소리에 낮잠에서 깼다. 시간을 보니 6시가 다 돼 간다. 햇볕이 쨍쨍 내리쬐던 날씨가 어두워졌다. 누군가가 냄비에 뚜겅을 덮듯이 하늘에 먹구름을 덮어놨다. 심술궂어 보이는 구름이다. 저 멀리 보이는 바다도 안색이 잿빛이다. 로이는 아직 눈을 감고 있었다. 어제 많이 마셨다더니 아직도 잠에 취했다. 먹구름 관찰에 흥미가 없어지자 그동안 멀리했던 카뮈의 <이방인>을 꺼내 읽었다. 너무나도 냉소적인 뫼르소의 언행에 소름이 돋기도 했지만, 여행하는 동안 만난 뫼르소는 이해못할 만한 사람도 아니다. 작은 도시에서의 삶, 아름다운 해변, 쿨한 연애... 어찌보면 초라해 보이는 단조로운 뫼르소의 일상은 부럽기까지 했다. 다행히 먹구름은 우리 버스를 따라오지 않았다. 훼에 접어들자 비는 그치고 서쪽으로 기울어진 해가 얼굴을 내밀었다. 버스는 오후 늦게 훼로 들어섰다. 훼는 19세기에서 20세기까지 베트남을 다스린 응웬 왕조의 수도였다. 이때 처음으로 베트남이라는 국호가 사용되었다. 하지만 베트남의 앞길은 순탄치 않았다. 베트남에 군침을 흘리던 프랑스의 침략이 노골화 되다가 결국 1883년 프랑스와 후에 조약을 맺고 프랑스의 보호국, 아니 프랑스에 점령당했다. 그 후 1945년 제2차세계대전이 끝난 뒤 베트남독립동맹 8월혁명 때 13대 황제였던 바오다이의 퇴위로 응웬 왕조는 멸망했다. 이런 이유로 훼에는 응웬 왕조의 왕궁이 남아 있고 외곽에서는 왕릉과 사원을 볼 수 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베트남 전쟁 당시 폭격으로 유서 깊은 건물이 많이 피해를 입었다고 한다. 훼에도 오토바이와 씨클로가 많이 다닌다. 중부지역 대도시인 훼도 교통이 꽤 복잡했다. 호치민에서 봤던 오토바이떼들이 훼에서도 이리 저리 몰려다녔고, 버스와 택시들도 뒤처지지 않으려고 힘을 다해 달렸다. 교통은 아무래도 좋았다. 문제는 벌써 날이 저물려고 한다는 사실. 오늘 아침 버스를 놓친 게 뼈 아팠다. 원래 오후 2시쯤 도착해 훼를 돌아보려고 했는데 오후에 호이안을 떠나 이제야 훼에 들어선 것이다. 해가 남아 있는 동안에라도 발품을 팔아야 했다. 시내도 둘러보고 투어 예약도 마쳐야 했다. 시간이 없었다. 얼른 숙소를 잡고 거리로 나와야 했다. 우리는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달려든 호텔 '삐끼'들 중 하룻밤에 12달러짜리 방이 있다는 '삐끼'의 오토바이를 탔다. 그 청년이 데려다 준 곳은 호텔의 맨 꼭대기. 옥탑방 같은 곳이었다. 조금 저렴하다고 했더니 역시 싼 게 비지떡이다. 하지만 이것 저것 따질 시간이 없었다. 배낭을 두고 바로 나왔다. 호텔 옥탑방에서 바라본 모습. 우선 길가에 있는 여행사에서 나는 내일 DMZ 투어를 예약했고, 로이는 라오스로 넘어가는 버스편을 알아봤다. 무사히 예약을 마치고 구시가지 쪽으로 걸었다. 훼는 흐언 강을 기준으로 강을 북서쪽으로 강을 건너면 구시가지 남동쪽은 신시가지로 나뉜다. 구시가지에 있는 왕궁과 시장이 볼거리를 제공했고, 신시가지에 있는 여행사, 호텔, 식당 등이 여행객들의 의식주를 책임졌다. 흐언 강 위에 서 있는 짱띠엔교를 건너면 바로 왕궁을 둘러싼 성벽을 볼 수 있다. 빠른 걸음으로 다리를 향해 가는데 흰 반소매 셔츠를 입은 아저씨가 우리 앞에 다가온다. 오토바이를 타라는 건 줄 알고 물어보면 "No!"라고 해야지 하고 있는데 아저씨는 오토바이라는 말을 꺼내지도 않는다. 대신 친근하게 우리에게 인사부터 한다. "헬로우~" 훼의 구시가지로 통하는 다리 입구. 한국인이라고 했더니 아저씨는 웃음을 실실 흘리면서 우리를 꼬신다. "뷰티풀 걸~! 10달러!" 이런, 또 그 소리다. 호치민에서 나의 외로움을 달래주려는 아저씨처럼 "뷰티풀 걸"이란다. 이번에는 로이랑 둘이 있어서 외롭지 않은데... 우리가 무시하자 아저씨는 더 적극적으로 나온다. 아예 우리 앞 길을 막고 새끼 손가락까지 흔든다. "걸~ 오케이? 10달러!" 날이 저무는 훼의 모습. 헉, 5달러? 귀찮아 하는 우리 모습이 아저씨의 눈에는 흥정하는 걸로 보였나보다. 반값 세일까지 들어가셨다. 적극적인 아저씨의 행동에 웃음까지 나올 판이다. 다시 한번 "No!"라고 소리치고 빠른 걸음으로 앞서 나갔다. "5달러만 내면 여자 얼굴만 보여주는 거 아닐까요?" 로이의 농담에 헛웃음이 나왔다. 생각하지도 못했던 호객행위에 당황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궁금했다. 대체 뭐지? 10달러, 5달러를 내면 어떻게 해주겠다 걸까. 만약 우리가 한국인이 아니었다면 아저씨가 저렇게 적극적으로 나왔을까. 훼의 하늘은 점점 어두워지고 있었다. 해질녘 짱티엔교는 시끌벅적했다. 오토바이는 부릉 부릉 기분 좋은 소리를 지르며 순식간에 다리를 건너갔다. 차도에는 씨클로와 오토바이가 레일 위를 달리는 기차처럼 줄줄이 달렸고, 인도에는 구시가지와 신시가지를 오가는 사람들로 붐볐다. 다리 위가 '만남의 광장'이라도 되는지 젊은이들과 학생들이 삼삼오오 모여서 수다를 떨고 있었다. 난간에 기대어 큰소리치는 남학생들과 방글 방글 웃는 여학생들의 모습은 학창시절에 했던 미팅을 떠오르게 했다. 대학가 커피숍에 마주앉아 얼굴을 붉혔던 '고딩'들의 수줍은 만남. 바로 엊그제 같은데 따져보면 벌써 십수년 전이다. 그때 앳된 여고생들 중에 아이 엄마도 있겠지. '사교모임'까지 열린 다리 위 인도는 포화상태. 있는 힘껏 달려 단숨에 다리를 건너고 싶었지만, 틈이 없다. '실례합니다' '잠시만요'를 외치면서 인파를 헤쳐나가고 싶었다. 그런데 베트남말로 '실례합니다'가 뭐지. 으이구! 간단한 현지어도 모르는 바보. 생김새가 현지인인 건 아무 소용 없다. 그냥 자동차 경주를 하듯 요리 조리 사람들을 앞질러 다리를 건넜다. 왕궁 쪽으로 들어가는 구시가지의 다리. 구시가지의 상점들은 날이 저물기 기다렸다는 듯이 간판에 불을 밝히고 있다. 사실 상점들이 불은 켜든 말든 우리는 관심이 없었다. 우리의 목표는 왕궁이니까. 급하게 다리를 건너느라 이마에 땀방울까지 맺힌 로이와 나는 군말 없이 길을 재촉해 왕궁 쪽으로 향했다. 얼마 안 가서 오른쪽에 다리가 보였다. 연꽃이 떠 있는 연못을 가로지르는 다리는 오래된 장벽 안쪽으로 이어져 있었다. "저쪽이다!" 우리는 오토바이를 토해내는 구멍으로 빨려 들어갔다. 왕이 없는 스산한 왕궁 왕궁 둘레에 있는 구시가지의 연못. 본래의 색깔을 알 수가 없는 벽은 낡아 보였다. 금방이라도 무너져도 아무도 뭐라고 할 것 같지 않았다. 드디어 왕궁의 남쪽문인 응오몬이 눈에 들어왔다. 응오몬을 5m 높이의 성벽으로 둘러싸인 왕궁으로 들어 갈 수 있다. 하지만 7시가 다 되어 도착한 응오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오후 5시면 문을 닫는 응오문은 야간 개장이 없다. "그냥 성벽 넘어 갈까?" 중국식 건물이 돋보이는 왕궁 남쪽문인 응오문. 왕이 없는 왕궁 앞은 스산했다. '부랴 부랴 왔어요, 잠깐만 보고 나올게요'라고 하소연할 수 있는 사람도 없다. 오토바이를 타고 바람 쐬러 온 사람들이 왔다가 사라질 뿐이다. 아들 군대 보내는 부모처럼 견고한 성벽을 뜨겁게 쓰다듬고, 걸작 앞에 선 평론가처럼 각종 장식이 달려 있는 응오문을 감상하고 돌아섰다. 국기 계양대와 연. 아래쪽으로 내려오는데 베트남 국기가 펄럭인다. 거대한 국기 계양대다. 계양대 앞 광장에는 아직 좌판을 접지 않은 아주머니들이 남아 있다. 왕궁에 못 들어간 이방인들의 기분이 나쁜 것을 눈치챘는지 한 아주머니가 다가와 연을 건넨다. 연을 날리며 기분 좀 풀라는 건가. 아주머니는 오토비이에 가지 각색의 형광색 연을 열 개나 넘게 매달았다. 연들은 오토바이에 묶여 있는 게 갑갑한지 미친듯이 몸을 움직였다. 로이가 한 놈을 풀어주려다가 아주머니가 부른 몸값이 생각보다 비싸서 포기했다. 시무룩한 우리에게 웃음을 준 아이들 이제 누구도 딴지를 걸 수 없는 저녁이었다. 마치 취직 시험에라도 떨어진 것처럼 로이와 나는 터벅터벅 짱티엔교를 향해 걸었다. 상점들은 아직 문을 연 곳이 많다. 군데 군데 자리를 잡은 노점에도 사람들이 꽤 있다. 자매로 보이는 여자아이들이 자전거를 타고 즐겁게 놀고 있다. 그 모습이 귀여워 카메라를 갖다 대니 큰 아이는 미소를 짓고, 작은 아이는 까르르 웃는다. 티 없이 맑은 아이들의 웃음에 시무룩했던 얼굴이 풀린다. 제법 시원해진 후에의 밤거리를 걷는데 눈에 익은 두 사람이 앞에 있다. 듬직한 탱크 교관과 날렵한 직장인. 바로 영국인 커플 제니다. 베트남이 특별히 좁은 걸까. 신기하다. "와우~ 이게 웬일이야!" 해맑게 웃는 아이들. 가디드북을 꺼내 지도에 표시를 하고 두어 시간 후에 만나기로 했다. 호이안에서 아침 버스를 타고 후에로 온 영국인 커플은 왕궁도 안 보고 푹 쉬었다고 한다. '우리랑 표 좀 바꿔주지'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다가 내려갔다. 숙소로 간다는 커플과 헤어지고 우리도 숙소로 넘어갈까 하다가 동바 시장에 들리기로 했다. 동바 시장은 구시가지에서 가장 볼거리가 많다는 곳. 시장 구경도 하고 저녁을 먹으면 되겠다. 고소한 고기냄새를 따라가보니 간판에 불을 밝힌 구시가지 상점들. 활기차고 왁자지껄한 재래시장을 상상했는데 동바시장의 저녁은 파장 분위기다. 상점들이 거의 문을 닫았거나 닫고 있었다. 반찬거리를 파는 재래시장에만 손님이 있을 뿐이었다. 야간 개장은 시장에도 없나보다. 마땅한 식당도 보이지 않는다. 다시 시무룩해진 얼굴을 하고 있는데 어디서 고소한 고기냄새가 풍겨온다. 냄새를 따라 찾아간 곳은 도로 바로 옆 노점. 국수를 말고 있는 아주머니를 수십 개의 목욕탕 의자들이 둘러쌌다. 그리고 손님들이 그 의자들을 하나씩 차지하고 국수를 맛있게 먹고 있다. 가방을 멘 외국인들도 목욕탕 의자에 앉아 조용히 국수를 맛본다. 분명히 국수인데 웬 고기 냄새? 국수 위에 고기를 얹었나? 배고픔보다 궁금증이 더 커졌다. 아주머니에게 가까이 다가가 살펴볼 수밖에. 빨강, 파랑 목욕탕 의자들 틈새를 비집고 들어갔다. 짱티엔교를 건널 때처럼 말이다. 눈깜짝할 사이에 아주머니 앞까지 가는데 성공! 모두들 정신없이 국수를 후루룩 얌얌하고 있는 동안 아주머니도 정신없이 국수를 말고 있었다. 뭐, 사발에 면을 담는 건 여느 국수와 똑같다. 그런데 국수를 내놓기 직전, 아주머니는 젓가락을 들고 몸을 살짝 틀었다. 그러더니 한 쪽 접시 위에 쌓여 있는 구운 돼지고기 세, 네 점을 국수 위로 옮긴다. 식료품을 파는 재래시장. 그리고 나서 그 국수를 목욕탕 의자 위에서 목이 빠지게 국수를 기다리고 있는 손님에게 내민다. 말 그대로 고기 국수다. 아주머니는 국수를 말고 고기를 얹는 동작을 자연스럽게 반복하고 있었다. 손님들도 국수를 받자마자 후루룩 얌얌하고 돈을 내고 일어서는 동작을 부드럽게 해낸다. 구운 고기를 얹어주는 1만동짜리 고기 국수 구운 고기 냄새에 홀린 우리는 줄곧 그랬던 것처럼 목욕탕 의자에 앉아 당당하게(?) 손가락을 두개 들어 국수 두 그릇을 주문했다. 군침이 입안에 적당히 고였을 때쯤 고기 국수가 우리 앞에 놓였다. 아, 이 맛. 한국에서 즐겨 먹던 고기맛이다. 고추장이나 라면으로 고국을 그린다는데 우리는 고기냄새를 맡고 고기를 씹으며 우리나라, 우리집을 떠올렸다. 면도 쫄깃하고 나물도 씹히는 맛이 좋다. 단지 채소향이 강해 국수를 먹다가 푸른 잎을 모조리 그릇밖으로 퇴장시켜 버렸다. 맛있게 고기를 먹는 사람들. "맛있는데요?" 먹음직스러운 구운 돼지고기 국수가 우리 돈으로 7백원 정도. 그릇을 싹싹 비우고 계산하려고 가격을 물어봤다. 물어봤다는 표현보다 돈을 꺼냈다가 맞겠다. 영어가 안 통해서 돈을 꺼내서 흔들어 보니 아주머니도 돈을 꺼내 화답한다. 2만동이다. 두 그릇에 2만동이니 한 그릇에 1만동. 1달러에 1만8천동이니 우리 돈으로 6, 7백원 정도 하는 셈이다. 우리나라 가게에서는 과자 한 봉지가 1천 2백원 하는데 맛있는 고기 국수가 7백원이라니. 정말 감사한 일이다. "왕궁 좀 못 보면 어때? 고기 국수 먹었는데!" 달콤하고 시원한 쩨 다양한 쩨의 재료들. 우리나라 휴대폰을 보고 있는 베트남 여인. 쩨를 먹고 있는데 옆자리에 젊은 여성 두 명이 앉는다. ID카드를 목에 걸고 있는 걸로 봐서는 직장인일 것 같 시원하고 달콤한 쩨. 았다. 쩨가 나오기를 기다리면서 한 여성이 휴대폰을 꺼내 뭔가 확인했다. 슬쩍보니 우리나라 터치폰이었다. 반가운 마음에 나도 모르게 말을 걸었다. "한국 휴대폰이네요?" "아~ 개운해!" 얼음까지 씹어 먹고 나니 마치 쩨 CF라도 찍는 것처럼 개운하다는 말이 튀어 나온다. 더할 나위 없는 저녁이다. 옆에 있는 고기 국수집은 아까보다는 손님이 줄었지만, 손님이 끊이지는 않았다.고기를 뚜껑 삼은 국수 그릇이 목욕탕 의자로 쉴새 없이 배달됐다. 약간 떨어진 곳에서는 한 아주머니와 여자 아이가 두 개의 석쇠에 고기를 넣고 화로 위에서 굽고 있다. 구운 고기가 이미 한가득 쌓여 있는데 고기는 계속 구워졌다. 저 많은 고기를 다 팔 자신이 있는 게 분명했다. "문 닫을 때쯤 오면 고기를 더 많이 넣어 주는 게 아닐까? 떨이하듯이..." 석쇠에 열심히 고기를 굽고 있는 아주머니. 고기 국수에 미련을 못 버린 우리는 있는 힘껏 공기(고기 냄새)를 들여 마시고 나서야 돌아설 수 있었다. 선선한 저녁을 기다렸다는 듯이 많은 사람들이 거리에 나와 있었다. 상점의 불은 꺼져 거리는 어두웠지만, 노점은 활기를 더해갔다. 가게 주인들은 각종 맥주와 음료수를 늘어 놓고 손님들을 유혹했다. 테이블에 옹기 종기 모여 담소를 나누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기 좋다. 여유가 묻어 나오는 저녁 베트남은 어디를 가나 여유가 묻어 나온다. 그래서 더 정이 간다. 내가 어릴 때 우리 동네에서 느꼈던 느낌과 비슷했다. 저녁 무렵이면 어른들은 동네 곳곳에 모여 웃고 떠들었고 아이들은 배고픔도 잊은 채 여기 저기 뛰어다녔다. 이제 아스라한 기억일 뿐이다. 우리가 누리던 그 많던 여유는 어디로 갔을까. 무엇과 바꾸어 버린걸까. 다시 찾을 수 있기는 한 걸까. 가물가물한 기억을 더듬는데 로이가 마트가 있다고 저 앞을 가리킨다. "어, 진짜 마트네" 아까 정신없이 구시가지로 넘어오느라 못 봤던 건물이다. 예쁘게 만들어진 각종 광고판으로 단장한 마트 건물은 훼의 거리와 어울리지 않았다. 1층에 있는 KFC도 이질적이다. 이 마트 때문에 동바시장에 사람이 별로 없었던 것인지도 몰랐다. 이 많은 고기를 다 팔 수 있을까. 훼도 '발전'하고 있었다. 베트남에서도 '경제 성장'과 '발전'이 최대 과제일 테니까. 하지만 세상에 공짜 점심은 없는 법. '발전'을 하면 할 수록, '경제 성장'을 이룰 수록 소중한 것들이 사라져 갈 것이다. 사라지고 난 다음에야 그것들이 소중했음을 깨닫겠지. 우리가 경험했던 것처럼 말이다. 정겨운 오토바이 드라이브 장을 보러 가는 사람들. 로이는 라오스를 돌아보고 한국에 들어갔다가 다시 호주로 갈 예정이었다. 호주에서 워킹 홀리데이 비자로 돈도 벌고 영어 공부도 할 거란다. "부럽네, 나도 두 살만 어렸어도...흑흑" 로이의 여행 경험과 앞으로의 포부에 대해서 듣고 있는데 앤디와 제니가 들어왔다. 웃으면서 "미안해"라고 하는 두 사람을 야단칠 수도 없는 노릇. 게다가 앤디는 베트남에서 만난 친구들 중에 유일하게 나보다 나이가 많은 분이셨다. 경로우대 해야지... 모두들 타이거로 건배를 하고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전쟁은 끔찍해" 동바시장에서 장을 보는 사람들. 어쩌다가 '전쟁'이 화제로 올랐다. 앤디와 우리는 어떻게든 전쟁과 관련이 있으니까. 앤디는 탱크 교관이고 우리는 대한민국 육군 예비역이었으니까. 앤디는 "전쟁은 끔찍하다"고 정의를 내렸다. 자신이 가르친 제자들 중에 전쟁터에서 목숨을 잃은 군인들도 꽤 있다고 했다. 앤디의 목소리가 갑자기 떨린다. "내가 전쟁 때문에 먹고 살기는 전쟁은 끔찍한 거야. 내가 탱크 운전을 알려준 애들도 몇 명 죽었어. 젊은애들인데... 전쟁은 이 세상에서 사라져야해. 평화가 필요해." 동바시장을 지나다니는 사람들. 영국인들이 미국을 싫어했나? 두 나라는 굳건한 동맹국일 텐데. 하긴 굳건한 한미 동맹 아래에서도 이견은 존재하니까 영국도 그럴 수 있겠다. 동맹 관계를 떠나 어디서든 군림하려는 미국의 태도가 문제다. 두 번째 타이거를 시켜서 마시는데 이번에는 제니가 입을 연다. "베트남으로 여행 오길 잘 한 거 같아. 여러 가지 구경도 하고 좋은 사람들도 만나고 말야." 훼에서 다시 한번 뭉치자! 가족이 오토바이에 타고 드라이브를 한다. 타이거 두 병을 마시며 수다를 떨다보니 벌써 10시 반이 넘어갔다. 우리는 내일 다시 이곳에서 만나기로 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투어 버스를 새벽에 타야 한다고 했더니 제니가 우리를 측은하게 바라본다. "같이 가자!"는 내 제안에 두 사람은 고개를 절레 절레 흔든다. 그냥 내가 대표로 갔다와서 사진을 보여달란다. "그래 신혼부부는 둘만의 시간을 보내! 내가 사진 많이 찍어올게~" 겨우 맥주 두병에 몸이 무거워졌다. 있는대로 물을 빨아들인 솜처럼 무겁다. 내일 잘 일어날 수 있을까. 흥겨운 팝송이 흘러나오는 거리를 지나 우리의 옥탑방이 있는 호텔로 돌아왔다. 로이는 먼저 올라가고 나는 이 도시 어딘가에 있을 크리스쳔과 내일 훼로 온다는 스캇, 라울에게 메일을 보냈다. 맥주를 좋아하는 친구들이라 어디에선가 맥주를 마시고 있으려나. 친구들~ 잘 지내? 훼에서 다시 한번 뭉치자! OK? "띠띠띠 띠띠띠" 낯선 기계음에 벌떨 일어났다. 어제 로이가 자기 전에 휴대폰으로 맞춰 놓은 알람인가보다. 몇시지? 잠깐 눈을 감았다 뜬 것 같은데 시간은 5시 40분이다. 눈만 뜬채 침대에 누워 있는 로이에게 먼저 씻는다며 샤워실로 들어가 고양이 세수만 하고 나왔다. 자기 전에 감은 머리가 제멋대로였지만, 6시에 버스를 타기 위해 머리감기는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새벽이라고 생각했는데 밖은 벌써 환하다. 거리에는 붉은빛이 완연하다. 잠꾸러기 구름은 아직 다 일어나지 않았는지 하늘에는 조각 구름 몇 개만 떠있다. 20대 청년 로이는 나보다 더 빨리 씻고 나와 옷을 입었다. 카메라와 모자를 챙겨 후다닥 로비로 내려오니 곧바로 미니버스 한 대가 우리 앞에 선다. 버스에서 내린 아저씨가 우리 이름을 확인하고 나서 우리를 버스에 태운다. 버스에 앉아 있는 서너명이 반쯤 감긴 눈으로 우리를 힐끗 보고 천천히 고개를 돌린다. 먼저 탄 승객들은 거의 반수면 상태다. 우리도 이제 한숨 자면 되는건가. 와우~ 해냈다. 못 일어나면 어쩌나 걱정하며 잠들었는데 우리는 훌륭히 해냈다. 장하다! 이제 아무 걱정 없이 한숨 자면 된다. DMZ 근처까지 가려면 3시간 넘게 달려야 하니까.
서서히 빛으로 물들어가는 새벽. 크리스천과의 재회 흐뭇한 마음으로 꿈나라로 떠나려는데 골목길을 돌던 버스가 갑자기 멈춘다. '고장났나'하고 눈을 떠보니 사람들이 좀비처럼 뒤뚱거리며 버스에서 내린다. 로이와 나는 영문도 모른채 가만히 앉아 있는데 아저씨가 아침을 먹으러 가는 거란다. 아침? 새벽에 나왔다고 아침을 주는구나. 잘됐다. 뱃속을 채우면 잠은 더 잘온다. 바로 앞 식당으로 줄지어 들어가보니 대여섯명의 사람들이 이미 식사 중이다. 간단한 빵과 샐러드 등을 마음껏 먹을 수 있는 식사였다. 로이와 어디앉을까 살펴 보는데 낯익은 남자가 우리 앞에 있다. "크리스천!" 이 도시 어딘가에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크리스천을 다시 만날 줄이야. 호이안 골목에서 찰리를 만났고, 어제는 앤디와 제니를, 오늘은 크리스천이다. 놀라울 따름이다. 크리스천은 어떤 여자와 함께 아침을 먹고 있었다. 안부만 묻고 로이와 나는 다른 테이블에 앉아 식사를 했다. '아시아 버스와 함께 즐거운 여행' 배를 채우고 나오니 미니버스는 온데 간데 없고 대신 커다란 관광버스가 우리를 맞았다. 두 팀을 한 번에 태우기 위해 관광버스가 왔나보다. 버스에는 '아시아 버스와 함께 즐거운 여행'이라는 문구가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아시아 버스, 오랜만에 보는 브랜드다. 크리스천에게 슬쩍 "이거 한국에서 온 버스야"라고 했더니 그는 어깨를 으쓱하며 "이 버스 타면 한국 가는 거야?"라고 묻는다. DMZ 투어는 '아시아 버스'와 함께 했다. 우리가 돌아보려고 하는 곳은 DMZ, 즉 베트남 전쟁 당시 남과 북을 가르던 비무장지대 주변이다. 1945년 한반도의 남과 북이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갈라졌듯이 베트남은 1954년 북위 17도선 기준으로 허리가 잘렸다. 베트남의 옛 DMZ는 이 선을 경계로 폭 10km, 길이 60km로 설정됐다. 어느 전쟁이든지 적을 마주하는 지역은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기 마련. 특히 강대국의 이해관계 때문에 하나가 되지 못한 베트남 민족에게는 통일이 절실했다. 그리고 통일을 막으려는 세력에게도 DMZ는 절대 내줄 수 없는 곳이었다. 그래서 베트남 전쟁 당시 비무장지대 주변은 북베트남군과 미국, 남베트남 연합군의 전투로 바람 잘 날이 없었다. 9번 국도를 따라 미군 기지, DMZ 그리고 지하터널까지 국기 계양대를 지나가는 버스. 우리는 치열한 전투가 있었던 동하라는 도시를 거쳐 9번 국도를 따라 미군의 기지를 돌아볼 예정이었다. 또한 DMZ 안에 있는 벤하이 강과 빈목 지하 터널도 일정에 포함됐다. 지금 떠나서 저녁 때야 다시 훼로 돌아온단다. 긴 여정이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훼의 아침은 에너지가 넘쳐 보였다. 어느새 떠오른 하늘로 솟구쳐 오른 해가 투본 강에 반짝거리는 햇빛가루를 뿌려놓았다. 출근하는 길인지 도로에는 오토바이들이 줄지어 바삐 달려간다. 오토바이를 타지 않고 덩치 큰 버스를 타고 있는 게 미안해질 정도다. 국기 계양대도 지나갔다. 지금쯤 왕궁 문이 열렸을 텐데. 둘러보지 못한 게 생각하면 할수록 아쉽다. 활기찬 훼의 아침. 오토바이들이 줄지어 바삐 달린다. 깜짝 잠이 들었었나보다. 훼를 벗어난 것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어느새 동하에 다 왔다. 버스문이 열리더니 30대 중후반으로 보이는 여성이 버스에 탄다. 두꺼운 안경을 쓰고 머리를 뒤로 묶었다. 학창시절 깐깐하던 영어 선생님이 떠올랐다. 그 여성은 운전기사 옆에 서서 마이크에 대고 짧게 자기 소개(이름은 까먹었다) 를 하고난 뒤 오늘 일정을 길게 설명했다. 베트남 전쟁의 격전지를 돌아보고 터널 체험도 한단다. 처음으로 들리는 곳은 미군 초소와 로켓기지였던 록파일. 이 기지 정상에서 미군은 북베트남군의 동향을 살폈다. 아침 햇살에 반짝이는 투본 강. 갑자기 베트남 여성의 목소리 톤이 바뀌었다. 목을 가다듬더니 낮게 깔린 목소리로 또박 또박 말을 하기 시작했다. 마치 우리가 꼭 새겨 듣어야 하는 할 중요한 이야기라도 하듯이. "우리가 돌아볼 곳은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 곳입니다. 많은 군인들이 목숨을 잃었던 곳이죠. 그들의 희생이 있었기에 지금의 베트남이 있는 겁니다. 참, 먼저 바로 잡을 게 있는데 여러분들이 베트남 전쟁으로 알고 있는 이 전쟁은 미국 전쟁(america war)입니다. 베트남 사람들은 미국과 전쟁을 원하지 않았어요. 그런데도 미국은 군대를 베트남에 보냈습니다. 미국이 원한, 미국을 위한 전쟁이었기에 미국 전쟁이 맞는 말입니다." 진공 상태가 된 버스 안 베트남에 휴대폰 보급이 확산되고 있다. 어디서나 쉽게 볼 수 있는 휴대폰 가게. 훼에서 동하로 가는 길목에도 있다. 미국 전쟁? 순간 띵했다. 누군가 내 머리를 뽕망치로 때린 것처럼. 미국 전쟁은 생전 처음 들어보는 용어였다. 지금까지 단 한번도 이 전쟁을 미국 전쟁이라고 생각해본 적도, 미국 전쟁이라고 부르는 소리를 들어본 적도 없었다. 마치 숨겨져 있던 출생의 비밀이라도 들은 것 같은 느낌이었다. 베트남 사람들은 전쟁을 바라지 않았다. 선거를 통해 통일을 이루고 싶어 했다. 하지만 강대국들은 베트남의 운명을 바꾸어 놓았다. 일그러진 운명은 전쟁을 불러왔다. 그러자 미군은 자유주의를 지킨다는 명분으로 베트남에 상륙해 북베트남과 싸웠다. 부모, 형제를 잃은 베트남 사람들의 시선으로 보면 미국은 미운 나라다. 민족의 문제에 쓸 데 없이 끼어들어 온 땅을 쑥대밭으로 만들고 아까운 생명들을 앗아갔으니까. 가이드가 잠시 말을 멈추자 버스 안은 진공 상태가 된 것처럼 조용해졌다. 모두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귀를 기울여도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고, 쉴새 없이 움직이는 버스의 숨소리만 귓가를 간질인다. 처음에는 머나먼 이국땅에서 노익장을 과시하고 있는 '아시아 버스'가 마냥 기특했다. 호치민과 달랏에서 만났던 '현대 버스'와 '대우 버스'와는 또 다른 감정을 불러 일으켰다. 측은지심이라고나 할까. 하지만, 측은지심도 베트남의 한여름 쨍쨍한 햇볕 아래에서는 눈 녹듯 사라진다. '아시아 버스'에게 오늘같이 무더운 날 장거리 운행은 무리였다. 손 대면 톡하고 터질 것만 같은 엔진의 비명소리는 참을 수 있었지만, 우리집 선풍기보다도 못한 에어컨 바람은 참기 힘들었다. 차라리 창문을 여는 게 나았다. 반쯤 창문을 열자 호시탐탐 버스 탈 기회를 엿보고 있던 바람이 물밀듯이 들어왔다. 시원해~! 역시 자연의 바람이 좋다. 그런데 가이드가 나를 바라보며 한마디 한다. "에어컨 켜 놨으니까 창문 닫아주세요." 담임 선생님 같은 여성 가이드 전쟁 당시 미군의 로켓기지가 있었던 록파일. 외모만 선생님인 줄 알았더니 잔소리하는 목소리도 딱 담임 선생님이다. 조용 조용하게 말을 하면서도 거부할 수 없는 힘이 느껴진다. '에어컨이 잘 안 되니까 창문 열죠'라는 소리가 튀어 나올 법도 한데 누구 하나 내 편이 없다. 크리스천도 아까 같이 아침을 먹던 여자와 대화하느라 바쁘다. '에어컨이 안 시원해요.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창문 연 거라고요! 에어컨 안 켜면 버스 기름도 아끼고 좋잖아요. 그냥 창문 열고 가죠! 더워서 참을 수가 없다고요!'라고 쏘아주고 싶었지만, 여러 가지 사정상(물론 영어 문제도...) 입 밖으로 내놓지 않았다. 대신 "알...겠어요"라는 심드렁한 대답을 해줬다. 열심히 집을 짓고 있는 사람들. 창문을 닫고 에어컨을 켠 우리 버스는 9번 국도를 따라 서쪽으로 올라갔다. 길 따라 푸른 나무가 우리를 따라왔다. 라인이 예쁜 산등성이는 보였다 사라졌다를 반복했다. 그리고 사이 사이에는 단출한 농민들의 살림살이가 고스란히 눈에 들어왔다. 선명한 초록빛의 록파일 뜨거운 햇볕을 피해그늘에서 쉬고 있는 사람들. 30분 정도 달리고 난 뒤 가이드가 다시 마이크를 잡았다. "자, 이제 록파일에 다 왔습니다. 이곳은 미군 해병초소와 로켓기지가 있던 곳입니다. 근방에서 제일 높은 곳이라 상대방을 쉽게 관측할 수 있던 지점이죠. 또한 안개가 자주 끼어서 적들로부터 보호하기에도 좋은 곳이었습니다." 나무 지게를 지고 걸어가는 아저씨. 버스가 서서히 속도를 줄이더니 힘겨운 걸음을 멈췄다. "저 앞에 보이는 큰 산이 록파일입니다. 내려서 한번 보세요." 우리는 가이드가 시키는대로 버스에서 내렸다. 안에서 볼 때는 몰랐는데 밖으로 나와보니 바람이 장난이 아니다. 바람소리밖에 안 들린다. 바람이 산을 휘돌아 나와 사방으로 날뛴다. 머리에 쓴 모자를 금방이라도 낚아챌 것만 같다. 손으로 모자를 붙잡고 록파일을 바라봤다. 생각보다 크다. 자주 낀다던 안개는 바람에 쫓겨 달아났는지 보이지 않는다. 전쟁의 흔적도 찾을 수 없다. 이끼가 낀 돌처럼 나무가 촘촘하게 박혀 있는 산일 뿐이다. "아무 것도 없네. 그냥 산이야." 록파일 앞에서 크리스천과 세월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눴다. 록파일은 예전과 지금이나 변한 게 없다. 그 자리 그대로 서 있을 뿐이다. 변한 건 사람, 나라, 이념이다. 잿빛이었을 록파일이 지금은 선명한 초록빛이다. 눈이 아플 정도로 선명한 초록빛. "폭격 때문에 나무가 자리지 못했어요" 나무가 없는 산. 다시 버스는 지루한 도로를 달리기 시작했다. 주위에 온통 산과 나무다. 강원도 주변 국도를 달리는 기분이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산에 나무가 별로 없다는 것. 보기 그리 좋지 않다. 내 생각을 읽었는지 가이드가 "전쟁 기간 이어진 어마 어마한 폭격 때문에 나무가 자라지 못했어요"라는 변명을 한다. 고엽제가 뿌려진 걸까. 전쟁이 끝난 뒤 나무를 심지 못했나. 전쟁에서 가장 피해를 입는 건 자연일 것이다. 지독한 전쟁 무기는 말 못하는 자연을 더 쉽게 파괴해왔기 때문이다. 호치민 루트와 연결되는 다끄롱교. 뭐, 전쟁이 아니더라도 자연은 항상 찬밥이었다.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발전'이라는 논리에 밀려 자연은 사라지고 있으니까. 자연이 사라진 자리에는 만족할 줄 모르는 인간의 욕망이 들어선다. 그리고 웃기게도 그 주변에 욕망을 치장할 나무를 심는다. 옛날 미국의 개척 시대 당시 삶의 터전에서 쫓겨난 인디언들이 보호구역에서 연명했던 것처럼 말이다. 해가 점점 높이 올라가는 시각. 버스 차창 너머 보이는 사람들은 열심히 자신들의 삶을 살고 있다. 모든 게 평화롭다. 나무를 한 지게 해 오는지 한 남성이 길게 자른 나무토막을 집으로 옮긴다. 집을 새로 짓는 가족들도 보인다. 지붕이 만들어준 그늘 아래에서는 아이와 아주머니가 편히 쉬고 있다. 모자를 쓰고 집 앞에서 도구를 정리하는 아저씨도 눈에 들어온다. 생명줄과 같은 '호치민 루트' 버스 안에서도 사람들은 열심히 자신들의 삶을 살고 있다. 크리스천은 열심히 사진 찍느라 바빴고, 그 뒷쪽에 앉아 있는 젊은 서양인들은 쉬지 않고 대화를 한다. 잠을 자는 사람, 잡지를 읽는 사람도 있다. 그리고 가이드는 다시 마이크를 든다. "이번에 버스가 멈추는 곳은 다끄롱교입니다. 이 다리는 전쟁 당시 '호치민 루트'와 연결됐던 곳인데요. 즉 베트콩, 라오스, 캄보디아 등을 연결했던 통로인 '호치민 루트'가 이 다리를 통한다는 겁니다. 이 다리를 따라 북베트남군이 남진했습니다. 지금 내려서 볼 다리는 2001년도에 다시 만든 겁니다." 오토바이에서 잠시 내린 사람들. 웃는 모습이 예쁘다.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은 '호치민 루트'라고 불리는 작은 통로를 통해 보급품을 받고 연락도 하고 전투 작전도 펼쳤다. 눈에 잘 안 띄고 소규모 부대가 이동할 수 있는 이 루트는 게릴라 전법에 적합한 통로다. 전쟁 기간 동안 이 루트를 뚫고 지키기 위해 많은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이 목숨을 잃었다. 그들에게는 생명줄과 같은 길이었으니 필사적으로 지킬 수밖에. 다리 위에서 바라본 강. 버스에서 내려 다리에 서보니 다리 건너편에서 지금이라도 뭔가 튀어나올 것 같은 '포스'가 느껴진다. 하지만 전쟁 당시에는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을 이 다리 위는 조용하다. 바람소리만 귀에 들릴 뿐이다. 군용차량이 자주 보였을 다리 위를 가끔 지붕 위에 짐을 가득 실은 버스와 헬멧을 쓴 사람들이 탄 오토바이가 건넌다. 돈 달라는 동네 아이들 아이들이 돈을 달라면서 따라다니자 짜증을 낸 여성들. 사람들이 흩어져서 사진을 찍고 주변을 바라보는데 뒤에서 짜증섞인 영어가 들린다. "돈 없어. 성가신 애들아 이제 그만 가라!" 서양 여성 둘이서 돈을 달라고 하는 아이들에게 포위된 상태. 분명히 방금까지만 해도 아이들이 없었는데 어디서 등장한 걸까. 동네 아이들인가. 젊은 여성들이 돈을 잘 주게 생겼는지 졸졸 따라다닌다. 하지만 아이들의 생각과는 다르게 여성들은 불만을 터뜨릴 뿐이다. 아이들에게 둘러싸인 로이. 이번에는 아이들이 마음씨 좋게 생긴 로이를 가만히 놔두지 않는다. 로이가 웃으면서 아이들에게 "돈 없어"라고 하는데 오히려 아이들이 더 모인다. 웃는 모습이 보기 좋았나보다. 난감해진 로이는 나를 바라보며 구조 요청을 한다. 나는 무섭게(못되게) 생겼는지 아무도 다가오지 않는다.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헷갈린다. 다리 위에서 물끄러미 호치민 루트쪽을 바라봤다. 버스가 기우뚱 기우뚱하며 다리를 건너 간다. 봇짐을 진 아저씨들과 오토바이 서너 대도 그 뒤를 따라 사라져 간다. 문득 내가 베트남 사람들을 부러워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아직 베트남은 우리보다 풍요롭지는 않지만, 남과 북이 하나가 된 나라에 사는 모습은 나를 못 견디게 만들었다. 3년 전 정동영 당시 통일부 장관을 따라 개성공단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남과 북이 함께 만든 물건을 손으로 만져보고 힐긋힐긋 우리를 바라보는 북한 여직원들의 따뜻한 시선을 느끼며 '이제 통일이 멀지 않았구나'하고 감격했었다. 남북이 힘을 모아 공장을 짓고 물건을 만들면서 왕래도 잦아지고, 잦은 왕래 속에 서로에 대한 신뢰와 믿음이 생기고 그 신뢰와 믿음의 나무가 자라서 통일이라는 열매를 맺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신뢰와 믿음의 나무는 성장을 멈췄다. 물과 비료를 주면서 나무를 정성스레 가꾸어야 할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일손을 놓아 버렸기 때문이다. 그 사이 신뢰와 믿음의 나무에 불신의 덩굴이 감겼다. 금방이라도 손에 잡힐 것처럼 가까워 보였던 통일이 저만치 가버렸다. 다리를 지나가는 버스와 아저씨. 우리 나라에 있는 DMZ도 냉전의 추억 쯤으로 여겨질 날이 오겠지. 그날이 과연 올까. 언제쯤 남과 북이 하나가 될 수 있을까. 이제 그만 자존심을 버릴 때도 됐는데, 총부리를 거둘 때도 됐는데. "북베트남군의 용맹을 맘껏 보여준 승리" 다끄릉교에 있는 표지판. 케산까지 13km가 남았다. "차에 타세요!" 난간에 기대어 나름 의미있는 상념에 잠겨 있는데 '담임 선생님'의 외침이 들린다. 빨리 버스를 타지 않으면 지각 체크라도 할 기세다. "네!" 나를 포함해 나이든 서너 명의 '학생들'이 총총히 버스에 올라탔다. 자리에 앉기도 전에 버스는 목에 걸려있던 가래를 뱉어내듯 시원하게 끄으응 소리를 내더니 바퀴를 굴리기 시작한다. 우리의 열성팬, 동네 아이들이 웃고 떠들고 있는 모습이 점으로 변할 때쯤 가이드가 다음 목적지를 설명해줬다. "여기서 13km 정도 가면 케산기지가 나옵니다. 케산기지는 DMZ에서 25km 정도 떨어진 곳에 미군이 건설한 기지입니다. 북베트남에 가장 근접한 미군 기지였죠. 미군은 케산기지에서 북베트남군의 움직임을 포착해 공격했습니다. 타격을 입은 북베트남군은 1968년 1월에 북베트남군은 케산기지를 공격합니다. 이들은 큰 피해를 무릅쓰고 두달 넘게 케산기지를 계속 공격해 케산의 전진기지까지 점령하며 포위망을 좁혀나갑니다. 하지만 핵무기를 쓴다는 미군의 협박에 북베트남군은 포위망을 풀고 물러가고 미군도 두달 후 케산기지를 파괴하고 철수했습니다. 북베트남군의 용맹을 맘껏 보여준 승리였습니다." 완전 무장을 하고 걷고 있는 사람들. 가이드는 "북베트남군의 용맹을 맘껏 보여준 승리였다"는 문장을 천천히 그리고 힘을 줘서 말했다. 어린이들에게 동화 구연을 하는 선생님처럼. 세계 제일이라는 미군을 도망가게 만들었으니 통쾌할 만도 하다. 사실 케산기지를 둘러싼 전투도 엄청났지만, 그쯤 북베트남이 남베트남 주요 도시를 향해 감행한 테트(음력설) 공세는 미국을 궁지에 빠뜨리는 효과를 거두었다. 북베트남군의 전사자는 3만 3천명에 달했고 베트콩은 거의 괴멸됐지만, 대규모 기습공격은 미국 내 반전여론을 고조시켰다. 공원 같은 케산기지 높게 지어져 있는 농가. 1층에는 오토바이가 서 있다. 마이크가 꺼지자 버스 안은 조용해졌다. 배경 음악처럼 깔려 있는 버스의 엔진소음만 들린다. 아까 멈춰섰을 때 에어컨에 손을 댔는지 이제 제법 시원한 바람이 머리카락에 닿는다. 밖에는 도로를 따라 걷는 사람들이 종종 보였다. 구름의 방해 없이 쏟아지는 햇살을 모자와 두건으로 가리고 어디론가 걸어간다. 케산기지로 가까이 갈수록 집 모양이 특이하다. 기둥을 박아 건물을 땅에서 '공중부양'시킨 모습이다. 빈 공간에는 오토바이가 서 있다. 1층이 주차장, 2층이 주거공간인 셈이다. 가이드는 "반끼에우 족들이 근처에 살고 있다"고 설명했다. 베트남 전쟁(아니, 아메리카 전쟁) 당시 북베트남을 도와 물자수송을 하거나 전투에 참가했던 소수민족이 산단다. 지금은 커피 농사를 짓고 있다고 했다. 전쟁기념관 같은 케산기지터의 모습. 어느새 버스는 오르막길을 달렸다. 케산기지에 다 와가는 모양이다. 군인들과 각종 무기들이 진을 치고 있었을 이 주변으로 포탄이 비오듯 쏟아졌겠지. 지금은 허름한 농가밖에 보이지 않았다. 평화로운 전원 풍경이다. 다시 마이크를 잡은 가이드는 "케산기지에 박물관이 있으니까 그것도 둘러보세요. 1시간 정도 시간을 드릴게요. 시간 내에 버스에 타세요"라고 말했다. 시간을 말하는 가이드의 눈빛이 내 얼굴에 박힌다. 치, 너무해! '이번에는 1등으로 탈게요'라는 말을 차마 목구멍 밖으로 내지 못하고 속으로 삼켰다. 녹슨 포탄 껍질 사이로 풀이 자라고 있다. "공원 같은데?" 철문을 지나 케산기지 안으로 들어가자 마자 크리스천이 한마디 했다. 정말 크리스천의 말마따나 케산기지는 잘 가꾸어진 정원수와 통로가 공원 같았다. 41년 전 미 해병대의 최전방 기지는 온데 간데 없었다. 저 앞에 보이는 헬리콥터들이 '여기는 기지였어'라고 항변하는 것 같았지만, 정상을 참작해주더라도 '전쟁 박물관'이상으로 생각하는 건 무리였다. 하긴 전쟁의 흔적이 남아 있다면 전 세계에서 온전한 곳은 아마 없을 것이다. 세계사의 다른 이름이 전쟁의 역사니까. A hell on earth 모래주머니를 쌓아서 만든 어두컴컴한 벙커와 밝은 세상을 통하게 해주는 공간. 한쪽 구석에 녹슨 포탄 껍질이 쌓여 볼쌍사나운 무더기를 이루고 있다. 누군가의 생명을 앗아갔을 포탄 껍질 사이로 초록빛 풀이 돋았다. 죽음을 넘어서는 끈질긴 생명력. 이름모를 병사의 혼이 싱싱한 풀로 다시 태어났을 지도 모른다. 모래주머니로 만든 벙커가 덩그러니 서 있다. 크리스천과 어두컴컴한 안으로 들어가봤다. 아무 것도 없는데도 왜 그런지 갑갑하다. 마치 누군가가 있는 것처럼. 참을성 없는 크리스천이 불만을 털어 놓는다. 케산기지터에 서 있는 낡은 기념비. "여기서 군인들이 생활했던건가. 숨 쉬기도 힘들었을 것 같아. 나가자!" 기념비도 하나 서 있다. 흰 타일을 배경으로 분홍색 타일로 포인트를 준 기념비다. 분홍색 타일 안에 검정색 돌에 알파벳이 새겨져 있다. 비바람에 앞부부분은 많이 닳아 잘 안 보인다. 맞춤법이 틀린 문장도 있는 것 같았다. "...(북베트남) 정규군과 이 지역 무장한 흐엉 호아 사람들이 용감하게, 불굴의 의지로 공격해서 이 기지를 지옥으로(a hell on earth) 만들었다..." 당시 미군은 포탄을 쏟아부었지만, 북베트남군은 아랑곳없이 포위망을 점점 좁혀왔다. 두달이 넘게 이어진 공방전에서 미국은 200여 명이 사망하고, 1600여 명이 부상을 입었지만, 북베트남 측은 최소 1만명 이상의 인명손실을 봤다고 한다. 대부분 미군의 무차별 포격에 의한 피해였단다. 북베트남으로 볼 때는 전사에 길이 남을 치열한 전투가 분명했다. 기념비에 새겨진 '용감하게, 불굴의 의지로'라는 수식어가 과하지 않다. 속을 비운 녹슨 미군 전차는 긴 포신을 저 멀리 겨눈채 멈춰 있고, 전투기는 꼬리를 하늘로 높이든채 부스러져 있다. 귀국하지 못하고 이곳에 잠들어 있는 무기들이 저승에 가지 못하고 이승을 떠도는 귀신들처럼 보여 불쌍했다. 땀을 식혀주는 시원한 바람도 귀신들 앞에서는 을씨년스레 분다. 길을 따라 더 위로 올라가보니 공터다. 흙이 유난히 붉다. 앞에서 본 '정원'과 달리 별다른 꾸밈이 없었나보다. 기지에 활주로도 있다고 했는데 그 일부분인가. 마치 붉은 피를 머금은 듣한 땅이 황량하기 그지없다. 마른 개 한마리가 어슬렁거릴 뿐이다. 다시 안쪽으로 들어오니 베트남 아저씨 두 명이 다가와 쟁반 크기만한 나무판을 내민다. 그 위에 각종 배지와 동전 그리고 탄피가 놓여져 있다. "2달러, 2달러"라며 나를 붙잡는 아저씨를 정중히 거절하고 박물관 안으로 들어왔다. "나라면 탈영했을지도 몰라" 박물관 정면에 놓여진 각종 장비와 케산 공방전 당시 사진 자료.
당시 자료사진도 볼 수 있다. 유리관 안에 놓여 전시되고 있는 스티븐 일병의 신분증. 이 군인은 어떻게 됐을까. 살아 있다면 손자의 재롱에 함박웃음을 터뜨리는 60대 노인이겠지. 제발 그랬으면 좋으련만, 라이언 일병 구하기처럼 누군가 스티븐을 구했으면 좋으련만. 코딩된 신분증 겉에 스며든 선홍빛이 마음에 걸렸다. "하루에 수천발씩 포탄이 떨어졌던 곳이래. 나라면 탈영했을지도 몰라." 목숨을 잃은 동료 위에 엎드려 슬퍼하고 있는 미군 병사. 케산 주변 소수민족은 북베트남군의 전투를 도왔다. 군대에 다녀오지 않은 크리스천에게는 케산기지 방문이 더 공포스럽게 느껴졌나보다. 하긴 나도 군대에서 자대 배치 받은 이후 한번도 총을 안 쏴봤다. 이등병 때 행정병으로 차출돼 동기들이 총 쏠 때 마우스 없는 컴퓨터를 무기 삼아 워드 작업을 했기 때문이다. 41년 전 내가 이 자리에 있었다면 크리스천처럼 나도 기도를 열심히 했겠지. 9번 도로를 거슬러 빈목 터널로 녹슨 전차가 속을 다 내보인 채 서 있다.
꼬리만 남은 비행기. 황량한 케산 기지터 즐거운 점심시간. 시골 식당에 두줄로 앉아 각자 당기는 음식을 주문했다. 나는 만만한 치킨 쌀국수. 케산 공방전 당시 상황이 표시된 지도. 내 앞에 아이들에게 '인기'가 좋았던 여자 둘이 앉았다. 인사를 나눠보니 둘은 친구 사이로 영국에서 왔단다. 대학교 새학기 시작 전에 동남아시아를 도는 중인데 내일 호치민으로 내려갈 예정이라고 했다. 아무래도 여성들에게는 '빡센' 일정인가보다. 새벽부터 돌아다니는 게 쉽지 않은 데다가 전쟁에 대한 감상도 그다지 크지 않을 테니까. 배불리 점심을 먹고 빈목 터널로 출발했다. 산신령 같은 '호 아저씨' 빈목 터널로 가는 길에 펼쳐진 논과 예쁜 구름. "빈목 터널은 지하도시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DMZ 바로 위쪽에 있는 위치한 빈목 터널은 3층 구조인데요. 이 터널 안에서 몇백명이 함께 생활했습니다. 숙식은 물론 아이까지 낳고 길렀죠. 베트남 사람들의 힘을 확인할 수 있는 곳입니다. 터널 앞에서 더 자세하게 설명할게요. 아직 한시간 반은 더 가야하니까 푹 쉬어요." 가이드의 설명이 끝나기가 무섭게 누군가가 묻는다 "구찌 터널하고 똑같은 터널 아닌가요?" "아뇨, 구찌 터널보다 훨씬 더 잘 만들었어요. 가보면 알아요." 구찌 터널보다 잘 만들었다고? 완벽하게 감춰지고 탈출구로 마련된 구찌 터널보다 잘 만들었다는 것을 쉽게 이해할 수 없었다. 뭐, 가보면 알겠지. 활짝 웃고 있는 호치민. 도로 중간 중간 이런 광고판이 서 있다. 길가에 큰 광고판이 자주 보인다. 우리나라 고속도로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음주운전을 하지 맙시다' '졸릴 때는 휴게소로'같은 문구 대신 산신령처럼 흰 수염을 기른 '호 아저씨' 호치민이 하얀 치아를 드러낸 채 웃고 있다. 운전자들을 지켜주는 수호신 마냥 호치민 사진 주변에는 후광이 있다. 호치민의 나라 베트남. '아, 베트남은 사회주의 국가지'라는 생각을 새삼스레 했다.
"그래, 하노이가 아니라도 언젠가는 다시 만날 수 있겠지!"
거리는 어제와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옷가게는 손님의 눈길을 잡아 당길만한 예쁜 옷을 앞에 걸어뒀고, 관광객들은 여기 저기서 사진을 찍었다. 자전거와 오토바이는 바삐 지나다녔고, 선글라스와 모자로 햇빛을 가린 사람들이 얼굴을 찡그린 채 어디론가 걷고 있었다.
단조로운 뫼르소의 일상이 부럽다
숙소는 호텔의 옥탑방
친근한 아저씨의 황당한 제안
"하이~"
"코리안?"
"예스~"
"노~!!"
"5달러! 오케이?"
우리가 한국인이 아니었다면 달랐을까
"..."
"농담이다."
"신기하다! 낮에 온 거야? 우리는 온 지 얼마 안 됐어."
"그랬구나. 이따가 맥주나 한 잔 할까?"
"그래!"
젓가락질을 하며 고기가 맛있다고 감탄하던 로이는 국수 그릇을 뚝딱 비웠다. 천천히 국수를 음미하는 나를 보고 한 그릇을 더 먹을지 심각하게 고민하더니 겨우 단념한다.
"그러게 집생각 나네~!"
"한그릇 더 먹을까..."
"그러던지~ 그런데 이따가 맥주 마실 거잖아!"
"내일 또 먹을까요?"
"그럴까?"
아주머니는 얼음을 반쯤 채운 맥주잔에 우리가 고른 재료를 담아줬다. 달콤하고 시원하다. 고기국수를 먹은 다음 입가심 하기에는 딱이다. 환상적인 궁합에 감탄이 절로 나온다. 국수를 먹고 난 다음에 꼭 들러야 하는 필수코스 같았다. 국수가게와 쩨가게는 공생 관계가 아닐까. 어쩌면 주인이 같을 수도 있다.
"네, 한국에서 왔어요?"
"호치민에서 하노이까지 여행 중이예요."
"아, 좋네요."
"한국 좋아해요?"
"네, 한국 영화 좋아해요. 꽃보다 남자?"
"아, 그거 인기있죠."
"잘생긴 남자들이 나오잖아요."
시장 근처 쇼핑몰에서 일한다는 두 여성은 <꽃보다 남자>의 팬이었다. 드라마에서 휴대폰으로 자동차로... 불과 30여 년 전 적국이었던 한국의 문화와 상품이 베트남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한류가 되어 흐르고 있었다. '부디 우리나라의 썩은 부분은 베트남으로 건너오지 않았으면 좋으련만'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어 시작과 끝을 구분할 수 없을 무렵 쩨를 다 먹은 여성들이 일어선다. "어디가냐"고 물어봤더니 지금 일을 하러 가야 한단다. 아니면 <꽃보다 남자>를 보러가는 길이거나.
"이따가 출출해지면 또 와보죠~"
구경삼아 들어가보니 내 예상이 맞다. 확실히 사람들이 많았다. 아이들의 손을 잡고 온 아주머니들과 젊은 부부들이 열심히 물건을 고르고 있었다. 동선에 맞게 잘 정리된 선반과 밝은 조명 아래 보기 좋게 진열된 상품은 사람들의 눈길을 끌기에 충분했다. 아래층에는 서점, 옷가게, 잡화점 등 여러 종류의 가게들이 성업 중이었다.
기분 좋게 강바람을 쐬며 다리를 건너 영국인 부부 앤디와 제니를 만나기로 한 바에 다다랐다. 약속시간인 9시가 넘었는데도 부부는 아직이다. 뭐, 어떻게 연락할 방도가 없다. 자리를 안내해준 점원이 앞에서 서성대길래 타이거를 한병씩 시켰다. 귀여운 호랑이가 인쇄된 타이거를 홀짝거리면서 앤디와 제니를 기다렸다. 로이에게 딱 30분만 기다리고 일어서자고 했다. 내일 DMZ 투어 버스가 새벽 6시 출발이라 밤늦게까지 놀 수가 없다.
"정말 슬펐겠다. 앤디 그거 알아? 우리는 아직 전쟁 중이라는 거."
"응, 잠시 멈춘 거지? 북한이 핵무기까지 개발해서 걱정되겠네?"
"뭐, 평화적으로 잘 해결해야지. 핵무기를 쓰면 남과 북 다 망하는 거니까."
"어디서든 미국이 문제야. 이라크도, 아프카니스탄도, 북한도 미국이 끼어들어서 다 망쳐놓는다니까."
"하하하, 미국을 싫어하는구나?"
"영국인들은 대부분 미국을 싫어해. 너무 거만하잖아."
"건배!"
"나도 그래~ 그렇게 비싸지도 않고 말야."
"우리는 이게 신혼여행이거든. 어디를 갈까 고민했었는데 베트남을 종단하는 게 재미있을 것 같아서 결정한 거야."
"난 그냥 베트남이 친근했어. 베트남 전쟁도 있었고 지금은 문화적 인적 교류가 활발하기도 하고."
"베트남 전쟁이라... 그때 한국군이 미군을 도우러 왔었지?"
"응, 말하자면((영어로 설명하기가) 복잡하지.그래서 내일 DMZ 투어 가볼 생각이야. 북베트남군과 미군이 치열한 전투를 벌였던 곳으로."
"거기 더워서 힘들다고 하던데... 우리는 그냥 쉬려고~!"
"정호! 잘 지냈어?"
"어, DMZ 투어 가는 거야?
"응, 너도?"
"좀 더운데요."
"조금 있으면 시원해질 거예요. 닫아주세요."
"세월이 흘렀으니까."
"몇십 년 전만해도 여기에 폭탄이 떨어지고, 총알이 날아다녔었는데 지금은 조용하네. 기분이 묘해."
"한국도 50여 년 전에는 폐허였잖아. 베트남은 통일이 됐는데 우리는 아직도 멀었어."
"그러고보니 겨우 50년 전이네. 뭐, 통일이야 언젠가 할 수 있겠지."
"정말 그렇네."
아담한 실내에는 베트남 전쟁 당시 사용됐던 무기와 케산기지 사진이 전시돼 있었다. 그 중에 내 눈길을 끌어 당긴 건 어느 병사의 신분증. Steven c winch가 그의 이름이다. 일병을 뜻하는 Private의 약자 PVT가 인쇄돼 있다. 사진 속 스티븐 일병은 두꺼운 안경을 쓴 채 잔뜩 겁을 집어 먹고 있었다. 훈련이 아닌 진짜 전쟁터. 총알이 날아다니는 지옥에 던져진 어린 병사의 두려움이 보였다. 안쓰럽다.
"탈영해도 갈 곳이 없잖아. 기도하면서 열심히 싸우는 게 최선이지. 사람의 목숨은 하늘에 달려 있으니까."
"나는 교회를 다니지는 않지만, 전쟁터에 나오면 열심히 기도할 거 같아. 하하하."
"응, 나 군대에 있을 때 교회에 꼭 나갔어. 나가면 '초코파이'라는 스낵도 줬거든."
다행히 이번에는 늦지 않게 버스에 올랐다. 가이드도 지체하지 않아 만족하는 눈치다. "이제 점심 먹으로 갈게요"라고 선심스듯 이야기하고 돌아 앉는다. 9번 도로를 따라 왔던 길을 거슬러 내려갔다. 다들 점심을 먹는지, 뙤약볕을 피해 낮잠을 자는지 창 밖으로 보이는 집 주위에 아무도 안 보인다. 논밭도 조용하다. 저공비행 중인 구름이 그 위로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아이들한테 인기 좋던데?"
"하하하, 성가신 아이들? 농담마! 아까 너무 힘들었어."
"여행은 재미있게 하고 있어?"
"재미는 있는데 너무 덥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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