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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창의 최고 명승지로 꼽히는 수승대. 오른쪽의 바위는 생김새가 거북을 닮아 구연대, 암구대, 거북바위 등으로 불린다.
경상도 거창땅은 들녘이 참으로 넓다. 덕유산(德裕山·1,614m)이 지나는 백두대간과 금원·기백산으로 이어지는 ‘남강기맥’의 높다란 첩첩 산줄기 안에 이토록 너른 들판이 펼쳐져 있다는 사실에 입을 다물지 못할 정도다. 글자로만 풀어본다면 엄청나게 규모가 크다는 거창(巨創)과 창성하게 거주할 수 있다는 정도로 해석할 수 있는 거창(居昌)의 의미는 다르지만, 풍기는 분위기는 비슷하다. 실제 동국여지승람에는 이곳 지명이 거열(居列)·거사(居陀) 등으로도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크고 밝은 벌판’이란 의미라 한다.
▲ 수승대 구연서원 내에 있는 비석들. 가장 왼쪽이 인자와 군자의 영원한 덕을 뜻하는 산고수장(山高水長)비석이다.
그래서 가능하다면 거창 답사는 거창읍 서북쪽의 거열성 산책을 곁들이는 게 좋다. 거창 신(愼)씨, 위천의 초계 정(鄭)씨, 갈천(葛川)의 은진 임(林)씨와 더불어 거창을 세거지(世居地)로 삼은 4대 성씨라 할 수 있는 거창 장(章)씨의 선조를 추모하기 위해 건립한 위천변의 건계정(建溪亭)에서 산길을 걸어올라 거열성 성벽을 거닐면서 ‘한들’로 불리는 거창의 너른 들판을 바라보면 거창의 진면목을 깨닫게 된다.
▲ 관수루에서 바라본 구연서원.
생김새가 거북을 닮아 구연대(龜淵臺), 암구대(岩龜臺)로도 불린 이 거북바위의 원래 이름은 수송대(愁送臺)였다. ‘시름을 보낸다’는 뜻이다. 계류와 바위와 소나무가 절묘하게 어우러진 곳이라 세속의 근심 따위는 훌훌 털어버린 은자의 여유가 엿보이는 명칭이라 생각이 들겠지만, 역사적인 해석은 조금 다르다.
거창군지 등의 기록에 의하면 삼국시대 이 주변이 백제땅이었을 당시에 백제에서 신라로 보내는 사신을 이곳서 전별하면서 사신이 돌아오지 못할 것을 근심했다는 데서 유래한다. 하지만 거창의 향토사학자들은 백제로 가던 가야 사신에게서 유래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산도 높고 들판도 넓은 거창은 역사적으로 진한과 변한, 신라와 가야, 신라와 백제 사이에 위치한 전략상의 요충지였다. 그런데, 백제 말기인 의자왕 때는 거창과 동쪽으로 접한 대야성(합천)이 백제땅이었다. 642년(선덕여왕 11) 백제 장군 윤충의 침공으로 대야성이 함락되고, 신라 도독 김품석은 김춘추의 딸인 아내와 함께 자살했던 것이다.
▲ 거창읍을 적시고 흐르는 위천에서 마을 노인들이 돌을 쳐서 물고기를 잡고 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어떤 유래가 있든지 물과 바위와 소나무가 한데 어우러진 수승대는 원래의 이름대로 충분히 시름을 달랠 수 있을 정도로 멋진 풍치를 자랑한다. 이 절승지를 본격적으로 경영한 이는 요수 신권(樂水 申權·1501-1573)이다. 조정에서 내리는 벼슬을 마다하고 거창으로 내려온 요수는 이곳에 서원과 정자를 짓고 제자를 가르쳤다.
지금 널리 불리는 수승대라는 이름은 퇴계 이황(退溪 李滉·1501-1570)에서 유래한다. 1543년 봄날 거창에 들른 퇴계는 위천에 있는 수승대의 내력을 듣고 찾아가던 중 아쉽게도 왕의 부름을 받게 된다. 할 수 없이 걸음을 돌려 한양으로 가게 된 퇴계는 한 편의 시만 친구인 요수에게 보내고 떠난다.
▲ 북덕유산 자락에 있는 송계사.
수승이라 새로이 이름을 바꾸노니(搜勝名新換)
봄을 만난 경치 퍽 아름답구나(逢春景益佳)
머언 숲 속의 꽃들은 방긋거리고(遠林花欲動)
그늘 진 골짜기엔 아직 흰 눈이 잠겼네(陰壑雪猶埋)
먼 곳에서 수승대를 그윽이 바라보니(未寓搜尋眼)
오로지 서로를 그리워하는 마음 더하기만 하구나(惟增想像懷)
언젠가는 한 두루미의 술을 가지고(他年一樽酒)
큰 붓 들어 단애의 아름다움을 그려볼까 하노라(巨筆寫雲崖)
▲ 오랜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가조면 사병리 당동마을의 당산.
수승대는 구연서원, 구연대, 요수정 등이 모두 어우러졌을 때 제멋이 난다. 수승대에 들어서면 제일 먼저 구연서원(龜淵書院)이 반긴다. 일찍이 거창을 세거지로 삼은 요수가 1540년 구연재를 짓고 은거하며 후학을 기르던 곳으로서, 그가 세상을 뜨자 유림에서 세운 서원이다.
- "어찌하면 세속의 시름을 잊을 수 있을까"
- 거창 - 바람소리도 빚어내는 山高水長의 고을
▲ 수승대를 찾은 시인묵객들 물가 너럭바위에서 시를 지은 후 여기서 붓을 씻었다 한다.
서원으로 들어서려면 큼직한 두 개의 바위 사이에 절묘하게 서있는 관수루(觀水樓)를 지나야 한다. 1740년에 세워진 이 누각은 서원의 대문인 셈인데, 아래층을 받치는 누하주(樓下柱)가 돋보인다. 용틀임하듯 굽은 아름드리 나무를 그대로 기둥으로 쓴 자신감과 대범함은 그저 감탄사만 던지게 만든다. 누각을 오를 때도 나무계단 대신에 계곡쪽 바위를 밟고 오른다. 바위와 마루 사이의 한 자쯤 되는 틈엔 넓적한 돌을 걸쳐 놓았는데, 역시 너무 자연스럽다. 자연과의 조화라는 우리 전통 건축의 가장 큰 특징을 잘 보여주는 이 누각은 몇 번씩 오르내려도 전혀 지겹지 않다.
▲ 구연서원의 대문격인 관수루는 용틀임하듯 굽은 아름드리 나무를 그대로 기둥으로 쓴 누하주가 돋보인다. |
누각에 올라 얼어붙은 계류를 바라보며 ‘관수(觀水)’를 생각한다. ‘물을 보는 데 방법이 있으니, 반드시 물의 흐름을 봐야한다. 흐르는 물은 웅덩이를 채우지 않고는 다음으로 흘러가지 않는다(流水之爲物也 不盈科不行).’ 맹자의 진심장(盡心章)에 나오는 구절이다. 서두르지 말고 차근차근 순리대로 전진하라는 가르침으로서, 학문을 수양하는 올바른 자세를 가리킨 것이다. 최근 세계 과학계를 온통 뒤흔들어놓은 ‘황우석 박사팀 논문 조작사건’을 생각하게 한다. 물 흐르듯 차근차근 순리대로 진행했다면 이번 같은 사태는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오래도록 낡은 관수루에서 내려오지 못하는 까닭이다.
▲ 거창 방짜징을 만드는 작업. |
서원의 큼직한 비석엔 산고수장(山高水長)이란 글귀가 새겨져 있다. ‘어진 사람이나 군자의 덕은 오래도록 전해진다’는 뜻이다. 이 글귀도 가슴에 담는다.
요수정(樂水亭)은 계류 건너에 있다. 최근에 놓은 구연교라는 다리가 있어 어렵지 않게 건널 수 있다. 화강암으로 전통 홍교 형식을 본 딴 다리를 보면 계곡 풍광을 거스르지 않으려 고심한 흔적이 엿보인다.
물가에 솟은 너럭바위를 주춧돌 삼아 지은 정자에 올라서면 바위와 물과 소나무가 절묘하게 조화를 이룬 수승대 풍광이 한눈에 들어온다. 우거진 송림과 커다란 바위, 그리고 맑은 계류가 어우러진 요수정에서 내려다보는 암구대는 그야말로 절경이다. 암구대에는 요수정과 암구대, 수승대의 아름다움을 읊은 시와 이름들이 빼곡하게 새겨져 있다. 정자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마루 가운데 판자로 지은 한 칸의 온돌방. 한여름이라 하더라도 한밤중엔 서늘한 백두대간 산간지역의 기후를 염두에 둔 지혜다.
▲ 북상면 야산에 있는 농산리석불입상에서 치성을 드리는 신도들. 이 불상은 지난해에 보물 제1436호로 지정되었다. |
정자에서 바라보는 암구대도 좋지만, 암구대에서 바라보는 계곡의 운치도 일품이다. 암구대 정상은 20여 평의 널찍한 평지다. 바위 꼭대기에 돌로 사람 키 높이의 축대를 빙 둘러쌓고 거기에 흙을 돋웠는데, 여러 그루의 소나무가 좋고, 돌의자 4개와 찻상으로 사용했을 법한 돌탁자 2개가 있다. 따뜻한 차라도 한 잔 들면 좋으련만 그게 아니면 또 어떠랴. 앞엔 요수정이요, 뒤는 관수루, 그리고 상류로 고개 돌리면 눈 덮인 덕유산이 수승대를 내려다보고 있으니 이곳이 수승대 최고의 명당이다.
▲ 거창읍내가 한눈에 들어오는 거열산성. |
동계는 사간원 정언을 지낼 때 광해군이 영창대군을 강화로 귀양보냈다가 죽이고, 영창대군의 생모인 인목대비를 폐출하려 하자 부당하다고 직언하다가 제주도 대정으로 10년 간 유배됐다. 인조반정 후엔 대사간·경상도관찰사·부제학 등 요직을 역임했다. 옛 스승인 정인홍이 광해군 시절 부당한 권력을 휘두른 죄로 인조반정 후 참수 당했을 때 아무도 그의 시신을 돌보지 않았으나 동계는 위험을 무릅쓰고 정인홍의 장례를 치를 정도로 의리가 강했다.
그리고 1636년 병자호란 때엔 이조참판으로서 김상헌(金尙憲)과 함께 척화(斥和)를 주장하다가 삼전도의 굴욕을 당하자 할복자살을 기도했다. 그러나 당시 이미 67세로서 너무 늙어 힘이 없었음인지 실패하자 귀향한 후 덕유산 기슭에 숨어살다가 5년 뒤 세상을 떠났다.
▲ 수승대 거북바위엔 수승대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시와 이곳을 거쳐 간 시인묵객들의 이름이 빼곡히 새겨져 있다.
그곳이 바로 북상면 농산리의 모리재(某里齋)다. 모리(某里)는 말년에 세상 사람들이 그에게 어디로 갔냐고 물어오자 ‘아무 동네로 갔다’고 대답했다는 데서 유래한다. 과연 남명 조식의 제자다운 일생이라 할 수 있다. 동계는 백이(伯夷)와 숙제(叔齊)처럼 미나리와 고사리를 먹고 살았다고 한다. 그 까닭으로 동계 제삿상에는 미나리와 고사리가 빠지지 않는다고 한다.
▲ 6.25전쟁 당시 수많은 양민들이 학살당한 거창사건의 현장인 탄량골에 서있는 보존비. |
어쨌든 동계 덕분에 거창의 초계 정씨 집안은 명문가의 반열에 올랐으나 그의 현손 정희량(鄭希亮)이 1728년 이인좌의 난을 꾸미는 바람에 멸문 직전까지 가기도 했다. 다행히 유림들이 ‘동계와 같은 충신의 제사가 끊겨서는 안 된다’고 구명한 덕에 멸문의 화를 면할 수 있었다. 그 뒤 영양현감을 지낸 양옹 정기필(1800-1860)이집안을 다시 일으켰는데, 이 정온 종택도 그 무렵인 1820년에 중건됐다.
배치에 군더더기가 없는 정온 종택의 집채들은 전체적으로 단정하면서도 엄격한 선비를 닮았다. 이끼 낀 돌로 석가산을 만들고, 모란이며 작약, 국화 등을 심었는데, 한겨울이라 아름다운 풍경을 볼 수는 없는 게 아쉬웠다. 현재 동계 종가는 한국 최고의 부잣집이자 12대 만석꾼을 지낸 경주 최부잣집 맏딸로 초계 정씨 집안으로 시집와 접빈객(接賓客)의 전통으로 손님을 맞아주는 종부 최희 할머니가 지키고 있다.
위천변을 거슬러 오르다 또 한 분의 선비를 만난다. 동계의 첫 스승인 갈천 임훈(葛川 林薰·1500-1584)이다. 갈천은 1540년 생원시에 합격해 사직서참봉과 군자감주부·광주목사·장악원정 등을 지낸 뒤 1582년 장예원판결사에 임명됐으나 그만두고 고향으로 내려와 후학을 길렀다. 그가 마학동에 연 서당은 중산 마을을 거쳐 갈계리로 옮기면서 후학들이 학문을 갈고 닦는 전당이 됐다.
▲ 거창의 대표적인 산성인 거열성 오르는 산길. 거창군민들의 산책로로 사랑 받고 있다. |
10년만에 찾은 갈계리 갈천서당은 예전보다 더 풍상에 시달린 모습이다. 당시만 해도 처마 밑에는 옛날에 사용하던 큰북의 외통이 걸려 있었으나 아쉽게도 그사이 썩어 없어졌는지 눈에 띄지 않았다. 서당에서 멀지 않은 선생의 고택 자이당(自怡堂)은 정려(旌閭)가 걸려 있는 솟을대문의 초석이 볼거리다. 거북 모양의 이 초석은 집안의 복과 안녕을 빌고 화재 등의 재앙을 쫓는 의미로 만든 것인데, 10년만에 만나는데도 여전히 건강한 듯해 반갑다. 천년만년 한결같기를 기원해본다.
북상면 소재지에서 서쪽으로는 남덕유산에서 발원한 월성계곡이 있다. 풍치가 좋아 여름 한철엔 제법 많은 피서객이 몰린다. 북상면 소재지에서 월성계곡을 거슬러 오르다보면 초입 근처에서 농산리 석불입상(보물 제1436호)을 만난다. 농산리 긴밭골에 천년 세월을 외롭게 서있는 부처님 곁에서 이런저런 사연을 생각하며 둘러보다 보면 시간이 훌쩍 지나간다. 어리석게도 예전엔 짧은 소견에 도지정 유형문화재라 무시(?)하고 그냥 지나쳤는데, 올 여름에 보물로 등극했다는 소문을 듣고 이번에 보니 과연 세련된 모습은 제법 품위가 있었다.
그렇다고 해도 금원산(1,353m)과 기백산(1,330.8m)에서 발원한 산상천 상류의 지재미골에 있는 가섭암지 마애삼존불상을 만나지 않으면 정말 서운하다. 위천면 소재지에서 산상천을 거슬러 오르다가 휴양림 매표소를 지나 오른쪽 계곡을 따르다 솔향 그윽한 숲을 지나게 되면 집채만한 커다란 문바위가 반긴다. 높이와 폭이 20m쯤 되는 거대한 바위덩어리인 문바위는 둥근 타원형이라 사람이 오를 수 없는데도 바위 꼭대기에는 누가 쌓은 것인지 돌탑들이 세워져 있다.
▲ 갈천 임훈 선생이 거처하던 북상면 갈계리의 임씨고가. 독특하게도 대문채 홍문의 초석이 거북머리로 되어 있다. |
문바위를 지나 마애불 관리사무소 뒤로 난 108계단을 올라 바위덩어리 틈새로 들어서면 가섭암지 마애삼존불(보물 제530호)이 반긴다. 삼존불 머리 위로는 사선으로 물골을 만들었는데, 이는 흘러내리는 빗물이 부처의 몸을 적시는 것을 막아주는 역할을 한다.
마애삼존불은 모두 넓적한 얼굴에 둥글고 작은 눈에 뭉툭한 코를 가졌다. 두툼한 입술을 앙 다물어 다소 고집스러워 보이기도 한다. 이런 모습은 거창 둔마리 벽화고분의 주인공과도 닮았다. 거창의 향토사학자들은 이를 ‘덕유산의 품에 안겨서 사는 사람들의 토속적이고 순박한 얼굴’이라 평한다.거창 동부의 곡창인 가조도 제법 널따랗다. 우두산(1,046m), 비계산(1,130m), 숙성산(899m), 박유산(712m) 등으로 이어지는 분지 안쪽에 자리 잡은 가조엔 웬만한 군청 소재지들도 부러워할 정도의 널따란 분지가 펼쳐져 있다. 가조의 진산은 옛 산성이 있는 금귀산(710m)이다. 둔마리 벽화고분은 금귀산 동남쪽 산자락에 있다. 여기에서 ‘피리 부는 천녀도’가 발굴됐다. 1971년 발견 당시 이미 도굴되어 유물은 나오지 않았으나 다행히 벽화가 발견되어 고려시대의 생활상을 어느 정도 알 수 있었다. ‘피리 부는 천녀도’는 한 손엔 피리를, 또 다른 손에는 과일을 담은 접시를 들고 있는데, 그 필치가 자유로워 생기가 넘친다. 피장자의 혼을 극락으로 즐겁게 인도해주는 역할을 한다.
전체적으로는 불교적인 요소에 도교적인 요소가 가미되어 있다는 게 전문가의 평이다. 이 벽화는 벽면이 채 마르기 전에 단숨에 그린, 이른바 서양미술의 프레스코(Fresco) 기법으로 그린 수작이다. 최근 전문가들은 무덤이 고려시대에서도 후기에 조성됐고, 그림은 원나라 도교문화의 영향을 크게 받은 것이라 진단했다. 복식사에선 천녀의 옷이 북방계 복식에 근원을 둔 한국 고유 복식의 전통을 따르고 있다고 분석했다.
거창에 왔으니 백두대간이 빚은 ‘바람의 소리’를 들어보자. 사물놀이에 쓰이는 악기들은 흔히 기후현상에 비유하기도 한다. 징은 바람이고, 북은 구름, 장구는 비요, 꽹과리는 천둥이다. 바람이 불면 구름이 몰려들어 비를 뿌리고 천둥을 내린다. 그리고 바람은 사물의 가락을 모두 감싸서 멀리멀리 울려 퍼지게 한다. 호수에 파문을 그리는 동심원의 물결처럼 멀리 퍼져나가는 낮고 은은한 소리다.
옛날부터 북쪽 지방은 유기 그릇을 위주로 만들었고, 남쪽 지방에서는 상대적으로 어려운 징이나 꽹과리 같은 악기류를 제작했다. 징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두드려서 만든 징은 방짜징, 틀에 부어서 만든 징은 안성맞춤징이라 한다. 경상도 함양과 전라도 운봉은 망치로 두들겨 음을 맞춘 고급 방짜징으로서 쌍벽을 이뤘다. 그 함양에서도 안의·서상·서하면 일대, 즉 옛 안의현(安義縣) 지역은 일찍이 유기 타악기 공방인 징점(鉦店)이 들어서서 그 제작기술이 전국적으로 으뜸 대접을 받으며 명성을 날리던 때도 있었다.
“광복 전인 일곱 살 때 서상 꽃부리 징점에서 징과 첫 인연을 맺었지요. 그 해 부친을 여읜 뒤 먹고 살 길이 막막해져서 징점에서 꼴담살이(머슴살이)로 허드렛일과 잔심부름을 하면서 밥이나 얻어먹는 신세였어요.” |
▲ 수승대 반구대 정상엔 돌의자와 돌로 만든 찻상이 있다.
열일곱 살 되던 해, 실력 인정받는 대정이로서 깐깐하던 징점 주인 오덕수씨(79년 작고)는 그를 정식 종업원으로 고용했다. 징 하나 당 일정액의 품삯을 받았는데, 이는 집안 가계를 충분히 책임질 수 있을 정도의 금액이었다. 눈썰미 있던 장인은 이미 10여 년 간이나 어깨 너머로 배운 가락이 있어 일을 배우는 속도는 빨랐다. 풀무질꾼을 시작으로 센메꾼, 앞메꾼을 차례로 거쳐갔다.
“스무 살 되던 해 스승으로부터 곧 대정이가 될 수 있겠다는 칭찬을 들었죠.”
그리고 마침내 스물여섯에 징 작업의 최고 기술자인 대정이가 됐고, 서른둘에 독립해 안의에 징점을 차렸다. 그때만 해도 시골에선 집집마다 징 하나씩 갖고 있던 시절이었지만, 호시절은 잠깐이었다. 1970년대 들어 새마을운동이 시작되면서 전통 풍물놀이가 점차 사라져갔던 것이다. 당연히 징점도 된서리를 맞았다.
“당시 함양에만 50여 곳이 넘던 징점이 있었는데, 하나둘씩 문을 닫았지요. 나도 징으로는 먹고 살기도 힘들고 해서 문을 닫고 서울에 올라갔어요. 그때가 아마도 74년도였을거요. 아파트 공사장에서 막노동 같은 일을 하면서 닥치는 대로 살았는데, 이상하게도 징 소리가 머릿속을 떠나지 않더라고요.”
▲ 금귀봉 동남쪽 능선 해발 450m 지점에 위치한 거창둔마리벽화고분. |
축사를 개조해 ‘오부자공방’이란 간판을 달고 점식(47)·점술(45)·성술(42)·경동(39) 네 아들과 함께 방짜징을 만들었다. 88년 이후 전승공예대전에서 3년 연속 수상을 한 후 93년에는 경남도 무형문화재 제14호 ‘징장’이 됐다. 97년에는 정장농공단지의 넓은 터로 옮겼다. 오부자 공방 한쪽엔 새로 지은 30평짜리 전통 한옥이 한 동 서있다. 이씨는 자신의 손때가 묻은 옛날 징 제작도구들을 그 안에 전시해 징 박물관을 만들 예정이라 한다.
현재 이 공방은 장인과 함께 넷째 아들인 경동씨, 그리고 경동씨의 부인인 막내며느리 김순영(34)씨가 운영하고 있다. 30년 가까이 곁에서 그림자 같이 돕던 둘째 점술씨는 서울에서 오부자상사를 열어 전통악기를 전국에 보급하고, 큰아들 점식씨와 셋째아들 성술씨도 독립해 거창읍에서 북과 장구를 전문적으로 제작하고 있다. 그래서 따지고 보면 이젠 ‘2부자 공방’인 셈인데, 그래도 장인은 외롭지 않다. 25년 동안 함께 일해 온 막내아들이 안양공업전문대학을 졸업하고 장인의 일을 도우면서 미래의 대정이가 되기 위해 징과 씨름하고 있기 때문이다.
▲ 북상면 덕유산 기슭의 토종벌통. |
예로부터 징 소리는 10리 밖에서도 들려야 좋은 소리라고 했다. 장인이 최고로 치는 소리는 황소 울음 같은 깊이가 있는 징이다. 그래야 10리를 갈 수 있기 때문이다. 징소리는 누구든 낼 수 있지만 황소 울음을 내는 징은 고독한 대정이만이 빚어낼 수 있다. 그 징소리는 어떤 울음일까. “더엉 더엉 덩~.” 글쎄…. 백두대간 정기로 빚어낸 그 바람 소리를 어찌 길손의 짧은 글 솜씨로 표현할 수 있을까.
바람의 소리를 생각하며 거창 남쪽으로 향한다. 거창 최남단의 신원면은 거창의 여느 고을들과 자연환경이 많이 다르다. 면 전체가 ‘남강기맥’과 그 지맥에 솟은 감악산(981m)·갈전산(764m)·바랑산(797m)·월미산(863m) 등으로 둘러싸여 있고, 이 산들 사이를 흐르는 작은 계류들이 사천천을 이루는데, 평야의 발달이 미약해 산기슭엔 손바닥만한 다랑논이 계단처럼 첩첩으로 놓여있다.
▲ 주상면 거기리의 성황당. 주민들은 요즘에도 매년 정월 대보름날 이곳에 모여 마을의 안녕과 풍년을 기원하는 동제를 지낸다.
감악산 청연 마을 고갯길을 넘으며 견벽청야(堅壁淸野)라는 단어를 떠올린다. 이는 성벽 수비를 견고히 하고 모든 곡식을 성안으로 거둬들여 적에게 타격을 입히는 전법을 말한다. 고구려가 수·당과의 전쟁에서 자주 사용했으며, 전 유럽을 제 말발굽 아래 두었던 나폴레옹도 광활한 러시아 설원으로 밀고 들어갔다가 러시아군의 견벽청야 전술에 말려들면서 몰락의 길로 접어들고 말았다.
그러나 20세기 중반에 일어난 6·25전쟁 당시 한반도에서 펼쳐졌던 이 전술은 들판의 곡식이 아니라 산간의 순박한 양민학살로 전개됐다. 1951년 2월9일에서 11일 사이에 3일간 육군 제11사단 9연대가 말썽의 소지가 있는 곳은 초토화시킨다는 견벽청야 작전에 따라 신원면 4개 지역 양민들을 학살했던 것이다.
2월9일 신원면 덕산리 청연골에서 주민 84명, 이튿날 대현리 탄량골에서 주민 100명, 그 다음날 과정리 박산골에서 주민 517명, 기타 지역에서 주민 18명, 이렇게 모두 719명의 주민이 학살된 거창양민학살사건 현장은 다름 아닌 ‘킬링필드’였다. 당시 토벌군은 단 한 명의 생존자도 남기지 않으려 시체를 불 질러 태우고 묻는 천인공노할 짓도 서슴지 않았다. 또 신원면을 고립시키고 주민들의 왕래를 일체 차단하는 등 사건을 감추려 안간힘을 썼지만, 참변의 소식은 천신만고 끝에 살아남은 주민의 입을 통해 밖으로 새나갔다.
이 사건이 피난 수도인 부산 피난국회에서 거론되자, 이승만 정권은 신원면 감악산(951m) 수영덤 근처에서 국회조사단을 향해 공비가 습격한 양 사격을 퍼부으면서 조사를 무산시키려 했다. 이후 양민들의 시신은 3년간 방치됐다가 전쟁이 끝난 뒤인 1954년 음력 3월3일 박산골 현장을 발굴했는데, 서로 엉겨붙어있는 시신들을 수습해 뼈를 헤아려 보니 남자가 109명, 여자가 183명이고, 어린아이들도 무려 225명이나 되었다. 모두 517명의 희생자 가운데 절반 가까이가 어린이였다는 사실은 거창사건의 희생자들이 무고한 양민이었다는 움직일 수 없는 물증인 셈이다.
주민들은 유골을 모아 박산골 산기슭에 위령비를 세우고 묻었으나 정부는 이 사건에 대한 언급 금기를 명하고 피해자들과 그 가족들을 탄압했다. 비석은 세워진 지 1년도 안 돼 군인들에 의해 비문이 정으로 쪼인 채 매장됐고, 묘지는 경남도지사의 개장령에 따라 다시 파헤쳐졌다. 게다가 1961년 거창 사건의 주민 성분조사에 참여했던 신원면장 박영복씨 타살사건이 일어나자, 5·16 군사정부는 유족들과 유족회 간부 18명을 피의자로 몰아세우며 반국가단체 조직 혐의로 구속하기도 했다.
유족들은 민주화 바람이 불어온 1988년이 되어서야 희생자 위령 궐기대회를 갖고, 땅속에 묻혀있던 위령비를 파내서 다시 세울 수 있었다. 그리고 1996년 국회는 명예회복에 대한 특별조치법을 통과시켰다. 이로써 신원(神院) 주민들의 억울함은 신원(伸寃)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아쉽게도 피해보상을 위한 2004년 개정안은 통과하지 못했다. 국가 재정에 부담이 된다는 게 큰 이유였다. 이 개정안이 통과되어 6·25전쟁 희생자들에 대한 피해보상 요구가 잇따를 경우 무려 20조 원이 필요하다는 분석까지 나왔다는 신문 보도도 있었다. 20조원이라! 도저히 상상도 안 되는 이 천문학적인 액수는 6·25전쟁 당시 국군이나 연합군에 의해 저질러진 불합리한 행태가 그토록 많았다는 사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반증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탄량골 언덕으로 쏟아지는 겨울 햇살이 따사롭다. 추위가 한풀 꺾인 덕이다. 양지바르고 너른 터에 비석으로나마 나란히 묻힌 고인들의 영혼도 이 따스한 햇살을 느끼고 있을까. 문득 까악까악 하는 소리에 고개를 드니 허공을 맴돌던 까마귀 두어 마리가 박산골쪽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갑자기 살갗에 소름이 돋는다. 그러고 보니 1951년 그 처참한 사건이 일어난 2월9일, 그 날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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