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류, 술, 멋

미술작품으로 더 매력 넘치는 "제주"

醉月 2021. 12. 14. 19:00
제주의 ‘빛의 벙커’에서 몰입형 미디어아트 영상을 상영하는 모습. 가운데 서 있는 사람이 도슨트 투어를 진행하고 있는 이서준 가이드다. 무선마이크로 이어폰을 낀 고객에게 작품을 해설해준다. 그는 유럽의 유명 미술관과 박물관에서 가이드 일을 하다가 코로나19로 귀국해 제주에서 미술관 도슨트 투어를 진행하고 있는데, 고객의 만족도가 5점 만점에 5점이다.



감히 필적할 상대가 없는 가장 강력한 여행 콘텐츠는 ‘자연’입니다. 그곳이 꼭 제주가 아니더라도 말입니다. 자연의 아름다움이야말로 제주를 꿈꾸게 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니까요. 여행에서 기대하는 대부분 위안은 아름다운 자연에 있습니다.

자연을 이길 수야 없겠지만, 그와 견줄 만한 것이 바로 ‘예술’입니다. 여행에서 우리를 몰입하게 하는 첫 번째가 자연이라면, 두 번째는 예술입니다. 제주의 자연은 그야말로 특별하지만, 제주에서 만나는 예술도 그 못지않습니다. 지난달 26일부터 28일까지 메종글래드 제주에서 그림 시장인 ‘아트제주’가 열렸습니다. 거기서 느낀 감회가 ‘예술에 몰입하는 제주여행’을 생각하게 했습니다.

자연의 매력이야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아는 일입니다만, 예술은 좀 다릅니다. 그렇다 해도 여행에서 만나는 예술이란 전문적인 감식안 없이도 저마다 눈높이에서 즐길 수 있는 것이 맞춤하겠지요. 제주에서 누구나 쉽고 편하게 즐길 수 있는, 몰입을 부르는 체험형 예술의 공간을 찾아봤습니다.


# 아트제주, 그리고 제주의 미술

시작은 ‘아트제주’였다. 아트제주는 6년째 제주에서 열리고 있는 ‘아트페어’다. 제주도가 주최하고 사단법인 섬아트제주가 주관한다. 올해는 지난달 26일부터 28일까지 사흘 동안 제주 연동의 메종글래드 제주에서 열렸다. 아트페어란 여러 화랑이 한데 모여 미술 작품을 사고파는 시장을 여는 행사. 쉽게 말하자면 ‘미술 거래 팝업스토어’다.

아트제주를 찾는 방문객 열에 여덟이 제주도민이다. 같은 제주도민이지만 더 나눠 보면, 본래 제주 원주민과 제주로 이사 와서 사는 이른바 이주민이 반반 비율 정도 된다. 이주민들의 문화·예술적 취향이 아트제주가 거둔 성공의 비결 중 하나다.

해마다 장소를 바꿔가며 열렸던 아트제주는 2018년부터는 메종글래드 제주에서 열리고 있다. 지난해에는 코로나19로 개최되지 않았으니 올해 아트제주는 메종글래드 제주에서 치른 세 번째 행사다. 왜 메종글래드 호텔일까. 메종글래드 제주는 40년 역사의 유서 깊은 호텔이다. 본래 메종글래드 제주는 ‘제주 그랜드호텔’이었다. 1981년 개관한 제주 그랜드호텔은 후에 지어진 중문의 호텔신라, 롯데호텔과 함께 제주의 대표적인 특급호텔로 어깨를 겨뤘다. 1995년 이름을 바꾼 메종글래드 제주는 그랜드호텔 시절부터 제주도민들에게 가장 친숙하고 각별한 호텔이었다.

제주 사람들에게 그랜드호텔은 통과의례의 공간이었다. 제주 사람들은 거기서 상견례를 하고, 결혼식을 하고, 돌잔치를 했다. 형편이 미치지 않아 해보지 않았다고 해도, 적어도 남이 하는 그런 행사에는 가봤다. 제주 사람들이 그랜드호텔을 ‘특별한 어떤 날의 추억’으로 기억하는 이유다.

널리 알려지진 않았으나 메종글래드 호텔 주인인 DL(옛 대림건설)은, ‘글래드’ 브랜드 호텔 등으로 전국에 2300실이 넘는 객실을 보유하고 있다. 객실 수 기준으로 롯데호텔과 호텔신라에 이은 국내 3위 메이저다. DL그룹은 호텔뿐 아니라 문화예술 공간에도 관심이 많다. 1996년 대림문화재단을 설립해 대전에 한국 최초의 사진미술관인 한림미술관을 개관했고, 2002년 5월에는 서울로 미술관을 자하문로로 이전해 대림미술관으로 재개관했다. 2012년 서울 한남동에 젊은 작가의 창작활동을 지원하는 전시공간 ‘구슬모아당구장’을 개관했으며, 2015년에는 디뮤지엄을 열었다. 메종글래드 제주에서의 세 번째 아트제주 개최도, 당연히 그 연장선 위에 있다.


아트제주가 열린 메종글래드 제주의 객실. 아트제주 기간 동안 호텔 16층 모든 객실이 아트제주에 참가한 화랑의 전시 부스로 활용됐다.



# 호텔 객실이 미술전시장 되다

메종글래드 제주를 방문한 건 지난달 25일, 그러니까 아트제주 개막을 하루 앞둔 날이었다. 호텔 로비의 아트제주 등록 부스 앞에 긴 줄이 섰다. 개막에 앞선 VIP 프리뷰 행사에 초청받아 제주에 내려온 화랑 관계자나 수집가들이었다. 올해 아트제주는 메종글래드 제주 로비 일부와 16층의 모든 객실, 그리고 하루 숙박료 400만 원의 프레지덴셜 스위트룸에서 열렸다.

올해 아트제주에는 국내외 1000여 점의 작품이 나왔다. 쿠사마 야요이·나라 요시토모·라이언 갠더·알렉스 카츠 등 외국 유명작가들과 이우환·김창열·박서보·변시지·이왈종 등 내로라하는 국내 작가들의 작품이 망라됐다. 호텔 객실 하나하나에 화랑 이름이 내걸렸고, 객실에는 화랑이 가져온 작품들로 가득했다. 그림은 객실 벽에 걸렸고 침대 위, 탁자 위에도 올려졌다. 푹신한 소파와 고급스러운 테이블은 훌륭한 전시 소품이었다. 예술의 향기 가득한 객실과 객실을 건너다니며 그림을 보러 다니는 재미가 쏠쏠했다.

휴양지 제주에서 열리는 아트제주는, 다른 지역에서 열리는 아트페어와는 분위기나 느낌이 사뭇 다르다. 미술 시장이 서울 중심으로 편중돼 있어 자칫 지방에서 열리는 아트페어는 ‘변두리’란 느낌이 드는데, 제주만큼은 다르다. 우선 아트제주에는 제주 작가 작품이 적지 않고, 제주를 배경으로 하거나 제주에서 작업한 작품도 많다. 그런 경우가 아니더라도 작품에는 제주만의 느낌이 있다. 제주라는 자연적 혹은 인문적 특성에다 휴양지가 가진 특유한 예술적 전통이 버무려 있다. 서울 중심의 미술 시장과는 전혀 다른, 제주만의 영역이 따로 있다는 느낌이다. 꼭 그림을 사겠다고 생각하지 않더라도, 제주의 향기로 꽉 채워진 아트페어를 둘러보는 재미가 있는 건 그래서다. 올해 아트제주는 역대 최다 방문객(7000명)과 최고 매출 기록(25억 원)을 작성하며 짧은 일정을 마치고 끝났다. 올해는 끝났지만 아트제주는 내년에도 열린다. 올해 이만큼 성과를 거뒀으니 내년 행사는 더 크게 열릴 게 틀림없다. 그때를 기약하자.


제주 구좌읍 하도리의 성수미술관 제주특별점. 빼어난 제주의 자연경관에서 손님이 직접 그림을 그리는 로망을 실현할 수 있는 곳이다.



# ‘제주다운’ 예술이 있는 것일까

이른바 ‘제주적인 예술’이 만들어지고 유통되는 시장이 만들어질 수 있을까. 제주 고유의 예술적 전통이나 미학은 가능할까. 이런 고민에 대한 해답을 내는 건 그 분야 사람들의 몫이겠지만, 여행자 입장에서도 관심이 간다. 여행자들에게도 예술적 감수성으로 채색된 제주는 썩 매력이 있기 때문이다. 제주여행에서 자연이 다 못 채워주는 것을 미술적 경험으로 얻을 수 있다.

제주에서 미술로 여행을 충만하게 확장할 수 있는 곳들을 찾아 나선 이유다. 제주여행에서 예술을 동선에 끼워 넣을 수 있으려면 전제해야 할 게 ‘가장 대중적일 것’이라는 조건이다. 더불어 독특한 예술적 경험을 해볼 수 있는 곳이라면 여행의 즐거움과 결이 맞을 듯하다.

그렇게 첫 번째로 찾은 것이 ‘몰입형 미디어아트’다. 제주에서 요즘 가장 뜨거운 건 ‘실감 미디어’다. 실감 미디어란 영상으로 실제 모습처럼 표현하거나 평면적인 풍경을 입체적으로 자극을 극대화해 표현해내는 새로운 시각 표현 기법이다. 예술적 감성에다 테크놀로지를 비벼낸 실감 미디어는 회화나 조각으로는 표현하지 못했던 규모의 자극을 보여준다.

몰입형 미디어아트는 실감 미디어의 대표적인 예다. 폐쇄된 공간에 수십 대의 빔프로젝터를 설치하고 시각과 청각을 극도로 자극하는 몰입형 미디어아트가 제주 곳곳에 있다. 시작은 2018년 폐쇄한 국가 기간통신시설에다 프랑스에서 가져온 미술계 거장의 회화작품을 영상으로 선보인 ‘빛의 벙커’다. 어두운 벙커에서 구스타프 클림트와 빈센트 반 고흐의 그림이 살아 움직이며 흘러가는 모습에 관람객들은 압도당했다.

빛의 벙커에서 시작된 제주의 미디어아트 붐은, ‘아르떼뮤지엄’으로, ‘노형수퍼마?’으로 옮아붙었다. 제주의 문화예술 공공수장고에도, 심지어 제주 중산간의 해외명품 버버리 팝업스토어에도 몰입형 미디어아트가 등장했다. 이제는 제주뿐 아니라 전남 여수나 강원 강릉 등의 관광지에도 몰입형 미디어아트 상영공간이 잇따라 문을 열고 있다.




# 몰입형 미디어아트, 그리고 현혹

같은 미디어아트 종류라 비슷할 것처럼 보이지만, 경험해보면 완전히 다르다. 빛의 벙커는 세계적 거장의 미술작품을 빛과 음악으로 담은 프랑스 미디어아트다. 지난 2018년 문을 연 이래 클림트를 거쳐 고흐와 폴 고갱, 그리고 지금은 클로드 모네와 오귀스트 르누아르, 마르크 샤갈, 파울 클레의 그림이 벙커의 주인공이다. 빛의 벙커가 보여주는 건 시종일관 장중한 클래식 음악과 거장들의 명화다.

반면 디지털디자인 회사가 만든 아르떼뮤지엄은 공간을 여러 구획으로 나눠서 각각의 미디어아트를 상영한다. 회화 작품을 보여주는 공간도 있지만, 그보다 빛과 영상으로 보여주는 시각적 체험 쪽에 포커스를 맞췄다. 파도치는 바다 영상이 현실처럼 느껴지는 공간도 있고, 무한한 공간감을 느끼게 하는 공간도 있다. 하나하나가 미디어아트 작품이다. 빛의 벙커가 전통적인 미술관 느낌이라면, 아르떼뮤지엄은 여러 작품을 모아놓은 테마파크에 가깝다.

노형수퍼마?은 미디어아트에다 흑백사진이 주는 추억을 끼워 넣었다. 슈퍼마켓의 ‘켓’을 ‘?’으로 쓰고 있는 데서 정체성이 엿보인다. 이곳은 다른 미디어아트 공간과는 달리 스토리가 있다. 1981년 어느 날 제주 노형동의 한 슈퍼마켓에 다른 차원의 공간으로 가는 문이 나타나는데, 그 문을 열고 들어가 탐험한다는 게 주된 줄거리다. 다른 곳보다 규모나 다양성은 좀 못하지만, 개방감 넘치는 중앙홀의 압도감이 단연 돋보이는 곳이다.

같은 미디어아트라 해도 지향하는 바가 확연하게 다르니, 선호나 취향에 따라 평가도 다르다. 자녀를 동반한 가족 단위 관광객들은, 다양한 콘텐츠가 있는 아르떼뮤지엄을 선호한다. 미술에 관심이 있다거나 중년 이상이라면 대개 빛의 벙커 쪽의 손을 들어준다. 재방문율은 빛의 벙커가 압도적으로 높은 듯했다. 실제로 아르떼뮤지엄에는 처음 그곳을 찾는 방문객이 대부분이었지만, 빛의 벙커는 두 번째 혹은 세 번째 방문 관람객의 비율이 많았다.


# 만점 평가…도슨트 투어의 매력

몰입형 미디어아트에 대한 두 가지 오해가 있다. 첫 번째는 화려한 눈요기만을 겨냥해서 만들어진 볼거리라는 것. 두 번째는 원작을 바탕으로 파생한 하위의 속된 예술 장르라는 것. 비유하자면 고색창연한 국보급 문화재를, 온갖 기교로 대중들의 기호에 맞는 기성품으로 복제해 소비한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대가들의 미술작품을 활용한 미디어아트 감상에는 약간의 부채의식이 있다. 회화사에 한 획을 그은 명작을 너무 쉽게 당의정처럼 감각으로만 소비하는 게 아니냐는 부끄러움 비슷한 것이다.

하지만 미술계의 시선은 그렇지 않다. 미디어아트 역시 어엿한 예술의 한 분야. 대가들의 작품을 가져다 쓰기는 하지만, 그걸 화려하게 시각화하고 음악을 끼워 넣어 만든 미디어아트는 그 자체가 또 다른 분야의 예술이라는 주장이다. 미디어아트가 보여주는 강렬한 자극을 그저 만끽하면 된다는 얘기다. 덧붙이자면 진짜 미술관에 가듯 회화사나 그림의 의미 등을 익히고 간다면, 몰입감이 높아져서 더 감동적인 경험을 할 수 있다.

빛의 벙커를 잘 보려면 도슨트 투어를 이용하는 것이 좋겠다. 도슨트는 ‘전문적인 지식을 가진 안내인’을 말한다. 빛의 벙커에는 오디오 기기로 녹음해둔 해설을 듣는 ‘공식’ 도슨트 투어가 있는데, 그것도 나쁘지 않지만 도슨트로부터 직접 설명을 듣는 투어를 더 추천한다. 여행가이드 매니지먼트 회사를 표방하는 ‘가이드라이브’가 진행하는 빛의 벙커 투어가 이즈음 제주에서 가장 인기 있는 도슨트 투어다.

가이드라이브 회사 소속으로 빛의 벙커 도슨트 투어를 진행하는 이서준(31) 가이드는 유럽에서 한국인 여행자를 상대로 전문적인 박물관이나 미술관 투어로 명성이 높았던 현지 여행사 ‘자전거나라’ 출신. 루브르박물관 등에서 가이드 투어를 했다. 유럽의 역사와 예술에서 종교를 떼어놓을 수 없는데, 그는 대학과 대학원에서 신학과 교회사를 전공했다. 그의 미술 해설이 깊이가 남다른 이유다.

유럽여행 가이드로 일하던 그는 2020년 1월 비자갱신을 위해 한국에 들어왔는데, 코로나19가 창궐하면서 발이 묶였다. 1년 넘게 놀다가 더 이상은 안 되겠다 싶어서 가이드라이브에 입사해 제주에서 빛의 벙커 도슨트 투어를 시작했다. 그의 도슨트 투어는 인터넷 기반 여행사 ‘마이리얼트립’에서 팔고 있는데, 그의 안내를 길잡이 삼아 빛의 벙커를 둘러본 손님이 매긴 평점이 자그마치 ‘5점 만점에 5점’이다. 도슨트 투어는 커피숍에서의 사전 설명 40분, 빛의 벙커 안에서의 45분짜리 영상 작품해설 순으로 진행됐는데, 가이드는 당시의 미술사조와 화가들의 삶과 작품 경향은 물론이고 영상 순서와 배경음악 선곡, 색감 변화까지 붙잡아 섬세하게 해설해줬다.


제주 조천읍의 김택화 미술관 전시장. 김택화는 평생을 바쳐 고향 제주의 자연과 제주 사람들의 삶을 그렸던 화가다. 전시장 입구에 서 있는 사람이 미술관을 지은 김택화 화백의 아들 조각가 김도마다.



▲ 소주 한라산 흰색 병 라벨에 사용된 김택화가 그린 한라산 그림.


# 평생 제주를 그린 화가, 그리고 그의 아들

제주의 자연과 제주 사람의 삶을 평생을 바쳐서 그렸던 화가가 있었다. 김택화. 제주 출신 최초로 홍익대 서양화과에 진학한 그는 우리나라 최초의 추상표현 그룹인 ‘오리진’의 창립 멤버로 젊은 시절부터 이름을 날렸다. 홍대 재학 중이던 1961년 데생 평가에서 그가 받았다는 98점은 개교 이래 전무후무한 점수였단다. 이듬해에는 국전에서 특선을 했다. 일찍이 추상미술로 천재성을 인정받았던 전도양양한 미술학도였던 그는 일찌감치 서울에 기반을 마련했으나, 20대 중반 군 복무를 위해 내려왔다가 그길로 평생 제주에 머물면서 고향의 풍경을 그렸다.

2006년 타계한 김택화를 기리는 ‘김택화 미술관’이 제주 조천읍 함덕고 앞에 있다. 미술관은 2019년 김택화의 아들인 조각가 김도마(44)가 지었다. 서울의 화단에서 인정받던 김택화는 왜 돌연 고향에 칩거했던 것일까. 아들 도마 씨는 아버지 생전에 그 이유를 물어봤었다고 했다. 그랬더니 아버지가 “너무 어려워서 떠날 수 없었다”고 했단다. 제주 정서가 깃든 풍경을 그림으로 담는 게 어려운 작업이었는데 그걸 제대로 해내느라 고향을 떠날 수 없었다는 얘기다.

그때까지만 해도 한국화단에는 이렇다 할 풍경화의 계보가 없었던 데다 특히 제주는 미술의 불모지이기도 했다. 아무도 가르쳐 주는 사람이 없었지만 그는 지치지 않고 그림을 그려냈다. 초가집·한라산·오름·해안가…. 아직까지 제대로 된 조명을 받아본 적 없는 작가라 알려진 대표작은 없지만, 미술관에는 대중들이 자주 봤을 낯익은 작품도 하나 있다. 제주 사람들이 ‘하얀 병’이라고 부르는 흰색 병 ‘한라산 소주’ 라벨에 그려진 한라산이 바로 김택화의 그림이다.

김택화 미술관에서는 미술관이 문을 닫고 난 뒤 여행자를 대상으로 야간 도슨트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차를 한 잔 내준 뒤 아들 김도마가 직접 안내를 맡아 미술관에 걸린 아버지 김택화 작품의 특징 등을 해설해준다. 그림의 프레임 비율 변화 등에 대한 설명이 흥미진진하다. 아들은 이혼한 아버지와 불화했다. 배다른 누이도 있다. 아들은 인정받고 싶어 했으나 아버지는 무뚝뚝했다. 그때 받은 상처와 애증을 아들은 숨기지 않는다. 아버지의 부정(父情)을 그리워해서, 혹은 아들의 효도로 미술관이 지어진 것은 아님을 짐작할 수 있다. 그래서 김택화는 객관화된다. 미술관은 평생 고향 제주를 그리며 죽음을 목전에 두고서도 붓을 놓지 않았던 제주의 화가를 기릴 따름이다.


■ 제주서 그림 그리기

제주 구좌읍 하도리에는 성수미술관 제주특별점이 있다. 미술관이지만 그림을 전시하는 곳이 아니라 누구나 찾아가 그림을 그릴 수 있는 곳이다. 바다가 보이는 창가 자리마다 이젤과 함께 물감과 팔레트, 붓 등을 갖춰놓았다. 밑그림이 그려진 도화지를 주면 그 도화지에 색칠을 하는 식으로 그림을 그리게 되는데, 싱거워 보이지만 한번 붓을 들면 잡념을 잊고 푹 빠져 그림을 그리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