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운장은 호색한, 화타는 소인배였다?
요즘 중국 인터넷 게시판에서는 관우와 화타를 두고 논쟁이 자자하다. 이는 일부에서 관우는 삼국연의에 나오는 것처럼 의리가 있고, 천하무적이며 여색을 멀리하는 사람이 아니라 무예는 좋으나 출중하지는 못하고 여색을 좋아하는 사람이요, 화타는 의덕(醫德)이 높지 않고 사람 또한 소인(小人)이라 병치료를 빌미삼아 조조를 협박하다가 결국 조조의 칼에 맞아 죽었다고 한 것이 불씨로 되어서이다.
관운장은 호색한?
삼국연의에 보면 관운장은 천하무적일 뿐만 아니라 여색에 눈길 한번 돌리지 않는 사나이다. 더군다나 중국 민간신앙에서는 관운장을 관제(關帝), 관로야(關老爺)라고 신으로 높이 받들고 있으며 사찰들이 있는 곳이면 거의 다 관우를 모신 관제묘(關帝廟)가 있다.
그러나 중국 사회과학원 신문과 전파소 소장이며 연구원인 인윈궁(尹韻公) 선생은 그렇게 보지 않고 있다. 인 연구원에 따르면 “관운장은 무예가 일반 명장과 다름없고, 결코 천하무적인 것은 아니다”라고 주장하고 있다. 인 연구원은 고증을 거쳐 관운장은 천하무적이 아니라고 하면서 관운장과 비슷한 무예를 갖춘 사람은 관운장 시대에 수두룩하다고 했다.
그러면서 인 연구원은 관운장이 진짜 천하 무적의 무예를 가지고 있다면 조조 수하의 명장 방덕의 화살에 이마를 맞지 않았을 것이며, 두번이나 포로가 되고 나중에는 한낱 이름도 없는 동오(東吳, 즉 손권의 오나라)의 마충의 계책에 빠져 맥성으로 도망하지도 않았을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관운장은 삼국연의에서 작가에 의해 신격화가 되었다고 했다.
인 연구원은 또 삼국지의 촉서(蜀書)와 위서(魏書) 등을 연구하고 고증하면서 관우는 여색에 눈길 한 번 팔지 않는 사람도 아니라고 했다.
삼국지에 보면 조조와 유비가 대군을 거느리고 여포를 공격할 적에 관운장은 여포가 장수로 파견한 진의록에게 花容月態(얼굴이 아름답고 몸매가 빼어난 미인)의 아내가 있다는 것을 알고 조조를 보고 성을 파하게 되면 진의록의 아내를 자기에게 달라고 했다. 관운장의 이유라면 자기의 아내가 아직 자식을 낳지 못했으니 진의록의 아내를 자기에게 주어 자식을 보도록 해달라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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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란이 분분했던 중국의 삼국시대, 한나라 임금을 옆에 끼고 제후를 호령했던 조조, 그는 관운장과 여인을 다투었던가? 혹시 그것이 결국은 관운장을 곁에 둘 수 없는 원인이었던가? 심사숙고할 대목이다. ©sohu.com |
이에 격분한 관운장은 사냥하는 기회에 조조를 죽이려고 했으나 유비가 말리는 바람에 죽이지 못했다. 그러면서 인 연구원은 관운장은 삼국연의에 나오는 관운장처럼 천하무적도 아니요, 여색에 눈 한번 팔지 않는 사나이도 아니라고 했다.
명의 화타는 소인(小人)?
삼국연의에 나오는 다른 한 사람 역시 요즘 중국 네티즌들이 관심을 모으고 있는 대상으로 되고 있다.
중국 남경회계학원의 쉬사오진(徐少錦)교수와 하북성평천민족학원의 린전칭(林振淸)선생은 삼국지와 후한서 등 사서들의 기록을 인용하면서 화타가 죽게된 원인은 조조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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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타, 중국의 사찰들에가서 약왕묘에 들어가보면 거의 다 화타가 모셔져 있다. 중국 삼국시대, 전란에 허덕이던 백성들에게 한가닭 생의 희망을 보여주었던 화타는 소인이요, 성질이 고약한 사람이었던가? ©sohu.com |
이를 벼슬길을 여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한 화타는 병치료를 기회로 조조가 자기에게 벼슬자리를 줄 것을 바라면서 병을 바로 치료하지 않았던 것이다.
당시 조조가 앓던 두통은 중의학에서 말하는 두풍(頭風)이라는 병인데 완치하기는 어렵지만 화타의 말처럼 치료해보았자 연명이나 하는 정도로 되는 그렇게 중한 병은 아니라는 것이다. 화타가 병세를 과대평가한 것은 어떤 목적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조조의 말에서도 입증이 되는데 조조는 화타가 자기의 병을 치료할 수 있으나 소인이라 병치료를 기회로 뺀다고 했다.
후한서에는 화타의 사람됨됨이를 평가할 때 성질이 더럽다고 했다.
그러면서 두 교수는 화타는 사람됨됨이가 삼국연의에 나오는 것처럼 그렇게 고상한 사람이 아니라 벼슬, 그것도 고관대작에 뜻을 둔 사람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한나라의 법으로 보았을 때 아내가 앓는다는 핑계로 조조의 명령을 거역했을 때 죽을 죄를 졌다고 했다. 한나라의 법에는 임금이 부를 때 오지 않는 것 역시 죽을죄인 것이다.
이 세편의 논문이 발표되면서 중국의 인터넷 게시판은 시끌벅적 끓고있다. 옳거니 그러거니 왈가왈부 토론이 이어지고 있다.
이 역시 중국 현재의 학술상황을 어느 정도 보여주는 바가 있는 바, 하나는 중국의 학술연구환경이 전에 비해 많이 편해졌고 또 학자들의 오해된 중국 역사사실을 바로잡으려는 노력을 보여줌과 동시에 전통도덕과 문화사유방식에서 탈피하려는 노력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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