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련단체&요결

들풀의 명상 이야기

醉月 2011. 6. 5. 10:34
첫째마당. 왜 명상을 하는가
20세기는 인류의 목적이 하나로 통합되었다는 특징을 갖는 시기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90년대 말, '지구화', 또는 '세계화'라는 말이 나왔는데, 그것 또한 20세기라는 한 세기 동안 무르익은 인류의 목적이 통합되는 것을 드러내는 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굳이 20세기의 현상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인류는 이미 하나였습니다. 그 하나인 인류가 나뉘어 온 것이 20세기까지의 역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나뉘어 온 인류사에 있어서 통합의 시도는 여러 차례 있었습니다.

 
로마의 통일이 그것이었고, 중국의 통일도 그런 흐름으로 읽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전까지의 통합은 주로 무력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20세기의 통합은 무력이라는 양상을 보이지 않습니다. 아주 달콤한 유혹으로 다가왔습니다.
"잘 살게 해 주겠다."
이것이 그들의 손짓이었습니다. 과학과 기술, 합리성과 부유함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 문명이라는 이름표를 달고 있는 서구의 손짓에 무너지지 않을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 손짓에 홀린 나라나 겨레들은 하나같이 무너져내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저 사람들에게 배워 저 사람들처럼 잘 살아야겠다'는 것이 꿈이 된 것입니다. 선진국이 되고자 하는 바램을 탓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모두들 그 선진화 작업에 발을 벗고 나섰습니다.


20세기가 저물어갈 무렵, 인류는 거의 하나로 통합이 되었습니다. 이제까지 다양한 문화와 가치관을 지니고 살아오던 인류는 드디어 하나의 문화를 추구하게 되었고, 하나의 가치관으로 통합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통합은 바람직한 통합이 아니었습니다. 인류 생존에 반드시 있어야 할 중요한 가치가 중심에 놓인 것이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오히려 인류의 앞날을 매우 위태롭게 하는 문화를 바탕으로 하여 통합이 된 것입니다.


그 가치관의 중심에는 '돈'이 있습니다. 돈이 생기는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사회, 돈으로는 안 되는 일이 없는 세상이 돼 버렸습니다. 인류의 목적이 돈이 된 것입니다. 돈을 많이 가지고 있는 것이 잘 사는 것이 된 세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참으로 그러하냐는 물음은 뒷전으로 밀려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저 모두가 돈을 벌기 위해서만 혈안이 된 세상에서, 돈 이외의 것을 말하는 목소리는 모두 제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심지어는 인류의 이상을 제시하고, 그 이상의 추구를 으뜸으로 해야 하는 종교마저도 돈 앞에 무릎을 꿇어버리고 만 것이 20세기의 현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20세기를 거쳐오면서 인류는 엄청난 맹신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서구에 대한 맹종과 맹신입니다. 서구, 특히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국가들은 무조건 옳다는 그릇된 믿음이 그것입니다. 미국에 대한 찬사는 엄청납니다. 결국 20세기는 미국이 세계정신을 하나로 통합하는 데 성공한 시기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운동경기와 그릇된 성 문화, 그리고 자유라는 이름으로 누리고 즐기는 온갖 것들은 모두 소비라는 속셈을 그 안에 감추고 있습니다. 그리고 인류는 드디어 대량소비사회로 빠져들게 되었습니다. 돈을 벌어 잘 살게 해 주겠다고 꾀어가지고 모든 인류를 소비자로 만드는 일에 성공한 미국, 그래서 경제라는 새로운 무력을 세계를 통일한 미국의 성공이 바로 20세기의 현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20세기 인류 통합의 실상입니다.


20세기 말, 인류는 통합된 가치관으로 추구하는 그 끝에 행복이 없다는 것을 조금씩 보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이 도드라지게 드러난 사태가 바로 우리나라가 겪어야 했던 '금융위기'였습니다. 철없는 사람들은 그 구제금융 사태가 정치를 잘못한 탓에 온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구제금융이라는 부끄러운 사태는 정치가들의 잘못이 아닙니다. 보다 옳게 말한다면 그것은 국민들의 쓰임새가 잘못된 탓이었다고 해야 합니다. 버는 것보다 더 쓰게 만드는 사회에서 그 물결에 휩쓸려 살아놓고는 정치를 탓하는 것은 정직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배경에는 상업자본주의가 있고, 상업자본주의라는 장사꾼의 논리의 실제 배경은 미국이라고 보아 거의 틀림이 없습니다.


"모두를 잘 살게 해 주겠다, 우리를 따라오면 다 잘 살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을 곧이들은 우리들은 그들을 따라서 길을 닦았고, 전기를 들여오고, 전화를 놓고, 텔레비전을 사고, 냉장고와 컴퓨터, 자동차를 들여놓았습니다. 그리고 서양식 집을 지어놓고 이것저것 삶을 편리하게 한다는 것들을 들여다 쌓았습니다. 그 결과는 모두가 빚쟁이가 된 것입니다.


자동차 한 대를 샀다고 쳐 봅시다. 일단 자동차를 할부로 사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그러면 할부가 끝날 때까지는 빚쟁이입니다. 현찰을 주고 샀다고 해도 날마다 들어가야 하는 기름값이며, 세금, 그리고 보험료, 때때로 길을 가다가 교통위반 범칙금을 물어야 하는 것까지 모든 것을 잠재채무라고 한다면, 우리는 하나의 개인이 아니라 그저 길을 걸어가는 빚덩어리에 지나지 않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자유가 아니라, 자유라는 이름을 하고 있는 신종 노예가 된 것입니다. 여유를 잃어버린 현대판 노예, 이것이 오늘날 우리의 이름입니다. 그런데도 이 상태를 노예상태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없습니다. 끝도 없이 환상을 쫓아서 발버둥을 치면서 오늘보다는 내일이 나을 것이라고 스스로를 속이면서 내닫습니다. 소유는 많아지지만 그 소유는 다만 쓰레기에 지나지 않습니다. 오늘 홀릴 듯이 멀쩡한 얼굴을 하고 나온 상품을 신이 나서 사지만, 그것은 내일이면 이내 쓰레기가 되고 맙니다. 그것도 그냥 쓰레기가 아니라, 버리는 데도 다시 돈이 들어야 하는 소비의 극단화 현상으로써의 쓰레기입니다. 돈만 드는 게 아닙니다. 그것을 버리는 데에는 자연을 못쓰게 만드는 생태계 위기로 이어진다는 것을 모를 사람은 없을 줄 압니다. 오늘은 자랑스러운 마음으로 물건을 샀지만, 내일은 그것이 헌 것이 되어 열등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되고 맙니다. 그렇게 우리는 쓸모없는 것들을 사서 그것이 쓰레기가 되는 것을 보고, 다시 새로운 것을 사는 악순환을 반복하는 삶을 살 뿐, 거기 더 나은 미래란 없습니다.


미국 돈을 보면 섬뜩해집니다. 1달러짜리 돈 뒷면에는 피라미드가 그려져 있습니다. 그 사람들이 저희와 아무 상관이 없는 피라미드를 왜 그 돈에다가 그렸는지를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해가 안 갑니다. 그런데 더 자세히 보면 더욱 알 수 없는 게 있습니다. 그 피라미드 꼭대기에 눈이 하나 그려져 있습니다. 어떤 뜻으로 그 그림을 그렸는지는 모르지만, 이것은 세계경제를 지배하는 미국의 감시체제라는 쪽으로 결론이 내려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미 그렇게 되었습니다. 미국의 증권시세의 오르내림이 세계 증권시세를 좌우하는 것이 바로 그 뚜렷한 증거입니다.
종이 된 통합, 이것은 또 다른 폭력이었습니다. 달콤한 유혹으로 다가와서는 이제는 옴치고 뛸 수 없도록 꼭꼭 묶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거기까지는 그들의 성공이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있었고, 드디어 터졌습니다. 그들의 과학과 기술이 갖는 한계, 그들의 합리성이 모순을 드러낸 것입니다. 먼저 꼽을 수 있는 것은 자연.생태계의 파괴일 것입니다. 이미 지구는 거의 회복이 어려울 정도로 짓밟혀 있습니다. 그러나 곳곳에서 서구의 문명을 추구하는 가치관에 문제가 있다고 하면서 들고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철학 쪽에서 그런 반론이 나왔고, 종교 쪽에서도 그 흐름이 있습니다. 문화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철학 쪽에서는 과정철학이라는 것을, 신학 쪽에서는 종교다원주의 신학과 포스트모더니즘 신학을, 그리고 문화에서는 문화의 다양성에 대한 관점의 변화를 보이고 있다는 점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프랑스 영화제에서 돋보인 임권택 감독의 '취화선'이 높은 평가를 받았다는 것을 꼽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모두 20세기에 추구하던 가치관이 무너지고 있다는 징조들입니다. 더 자세하게 말한다면 미국이 무너지고 있다는 소리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인류는 방향을 바꾸지 않으면 안됩니다. 돈으로 쏠려 있던 관심, 돈이 추구하는 것의 궁극이던 것을 내려놓는 일입니다. 이것은 혁명입니다. 그들이 소리없는 유혹이었던 것처럼, 이 혁명 또한 아주 조용히 일어나야 성공을 거둘 수 있습니다.
그러면 돈에서 어디로 눈길을 돌려야 하겠습니까?
20세기 초라면 '사람'이라고 말했을 것입니다. 그것은 휴머니즘의 대답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21세기입니다. '사람'이라는 대답이 그르지는 않지만, 그것만으로는 모자랍니다. 21세기에 추구해야 할 최상의 가치는 '목숨살이(생명)'입니다. 돈으로 사람을 행복하게 할 수 없다는 것은 이미 드러났습니다. 그것은 오히려 사람을 불행하고 비참하게 합니다. 행복은 목숨살이를 가장 복판에 두었을 때, 거기서부터 은은한 내음처럼 피어오르는 것입니다.


목숨살이를 복판에 두는 일, 다시 말해서 '내가 나를 놓치지 않고 사는 일', 이것이 바로 명상을 통해서 얻게 되는 수확입니다. '사람'을 복판이라고 하지 않고 '목숨살이'를 복판이라고 한 까닭은 나와 남의 무게가 다르지 않다는 것을 말하려는 뜻입니다. 적어도 목숨에 있어서는 그 무게가 다르지 않다는 말입니다. 사람의 목숨과 미물이라고 하는 다른 생물들의 목숨에 우열이 없다는 말입니다.
인류를 종이 된 사슬에서 풀어내는 일, 그게 21세기의 숙제입니다. 그리고 이 사슬풀이는 언제나 나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내가 묶여 있다면 아무리 남을 풀어주고 싶어도 풀어 줄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모든 분들에게 자기 사슬을 풀어버리는 길을 알려드리고 싶은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에 명상만한 길이 없다고 생각되어 명상 이야기를 해 보려고 합니다.
길이 있어도 족쇄에 매여 있으면 갈 수가 없습니다. 길을 떠나서 자유로운 세상을 누리고자 하는 모든 이들에게 명상을 권합니다. 자신이 묶여 있다는 걸 모르는 사람들은 여기서 제외될 수밖에 없습니다. 목숨살이와 자유, 이것은 뗄 수 없는 속성이고 권리입니다. 모든 살아있는 것은 자유입니다. 이 자유를 구속하는 모든 것은 거짓입니다. 거짓의 허물을 벗어버리고 참된 자유를 누리는 길나들이에 모든 살아있는 목숨살이를 모시는 큰 잔치마당을 한 펼쳐 보십시다.

 

둘째마당. 명상의 시작
그 하나, 앉음새에 대하여

 
명상에 있어서 기초는 앉음새입니다. 그것은 사람은 바른 몸꼴을 하고 살아야 하는데, 그 몸꼴을 바르게 하는 첫걸음이 앉음새이기 때문입니다. 놀랍도록 희한한 일은 그 어디에서도 바른 앉음새를 가르쳐주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옛날에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서당에 가거나, 예법을 배우거나 앉음새를 먼저 가르쳤습니다. 그런 점에서 볼 때에는 오늘날의 교육이 옛날의 교육에 못 미칩니다. 앉음새가 바르던 시절에는 사람들이 부끄러운 줄도 알았고, 떳떳하게 사는 것이 자랑스러운 일이라는 것도 알았었습니다. 물 건너 것들을 동경하면서 우리는 우리의 옛것이라면 무조건 우습게 여기는 태도에 익숙해졌습니다. 그것은 앉음새를 중요하게 여기던 옛 삶씨를 업신여기는 것에서도 다르지 않습니다. 몸을 다지는 기본은 달리기가 으뜸이라고 가르치는 것이 요즘의 교육입니다. 그러는 사이에 우리 모두는 바른 몸꼴을 놓치고 말았습니다. 달리기가 으뜸이 아니라, 바른 앉음새가 으뜸입니다. 움직임 앞에 정지가 있기 때문입니다.


앉음새는 바른 몸꼴을 지니게 합니다. 등이 바르지 못한 사람이 비굴하다는 것을 모를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현대를 사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등이 곧지 못하다는 것은 이만저만 안타까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보다 심각한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온갖 질병이 바르지 못한 몸으로부터 나온다는 사실입니다. 최근에 와서 등에 대한 관심이 조금 생기기는 했습니다만, 아직 그 수준은 매우 낮습니다.
등이 바르지 않으면 왜 병이 생기느냐고 물을 사람이 있을 줄 압니다. 그 이야기를 좀 하고 넘어가겠습니다.


사람은 살면서 자기 게으름 때문에 몸을 바르게 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이 바르지 못한 몸꼴은 자꾸만 등을 휘고 비틀리게 합니다. 등뼈가 본디 유연한 뼈와 뼈의 이음고리로 되어 있기 때문에 쉽게 굽거나 비틀리지 않지만, 한 번 굽거나 비틀리면 다시 펴기도 매우 힘이 듭니다. 더군다나 조금 굽거나 비틀린 것으로는 별 불편이 없기 때문에 그냥 편한대로 몸을 굴리고, 그것이 조금씩 심해지게 됩니다.


그렇게 등뼈가 잘못된다는 것은 등뼈와 갈비뼈로 감싸고 있는 오장육부가 불필요한 압박이나 자극을 받게 된다는 것을 뜻합니다. 제 자리에 있어야 할 오장육부가 밀리거나 눌립니다. 어떤 경우는 다른 장기가 눌리고 밀리는 통에 저 있을 자리를 많이 차지하게 되는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등 위쪽 어깨가 구부정한 사람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대부분 허파, 염통, 간이 위로 들리고, 십이지장, 작은창자, 큰창자 같은 것들은 아래로 쳐지기 때문에 밥통이 차지할 자리가 그만큼 넓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실제로 대식가라고 하는 사람들이 덩치가 큰 사람이 아니라, 이런 몸꼴을 한 사람이라는 것만 보아도 쉽게 알 수 있는 일입니다.


사람이 살면서 참 아름답다고 할 수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는 모든 것이 있어야 할 바로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름답기만 한 것이 아니라, 제 자리에 있는 그것들과 그 옆에 있는 것들의 행복이기도 합니다. 행복과 아름다움은 이런 관계에 있습니다. 본인과 그 이웃이 행복한 것이 제삼자가 보기에 아름다워 보이는 법이라는 말입니다.


오장육부가 제 자리를 못 잡는 것, 이것은 곧 내장의 긴장으로 이어집니다. 내장의 긴장은 마음의 불안으로 먼저 나타납니다. 잘못한 일도 없는데 사소한 일에도 가슴이 쿵쿵거리고 얼굴이 쉬이 붉어지는 사람은 염통을 의심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대부분 마음이 다급하게 되는 것은 가슴에서 일어나는 일이고, 느긋해지는 마음은 아랫배 쪽에서 나오게 됩니다. 배짱이나 뱃심이라는 말도 다 같은 '배'를 두고 하는 말인데, 여기서 말하는 배는 배꼽 아랫부분의 배를 말하는 것입니다.


뱃속이 이렇게 긴장하는 동안 몸의 상태도 조금씩 굳어집니다. 쉬운 이야기를 하나 하고 넘어가겠습니다.
지금은 인천에서 교사로 일하고 있는 아끼는 젊은이가 하나 있습니다. 그가 한 때 명상을 공부하러 다녔습니다. 어느 날 그가 와서 무좀약 자랑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자기 동서가 약국을 하는데, 좋은 무좀약이 있다고 가져다 주더라는 겁니다. 내가 웃으면서 약은 안 쓰는 게 좋다고 했더니, 발을 보여주면서 이렇게 간단하고 감쪽같이 없어졌는데 안 쓰겠느냐면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곧 비듬으로 고생하겠다고 했더니 전혀 못 알아듣고 돌아갔습니다. 사흘 쯤 지났는데, 그가 눈이 휘둥그래져서 헐레벌떡 들어왔습니다. 어떻게 된 일이냐고, 비듬이 느닷없이 생겼는데 얼굴까지 내려올 정도로 심해졌다는 겁니다. 실제로 보니 이마의 상당부분까지 비듬이 생겨 허옇게 벗겨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설명을 해 주었습니다.


"비듬과 무좀, 여드름, 상처가 생기면 쉽게 덧나는 것, 이런 것들은 모두 같은 형제다. 그 뿌리는 뱃속에 있는 지라인데, 지금 거기에 문제가 있다고 지라가 말하고 있는 게 바로 무좀이다."


그렇게 말하면서 이어서 "그런데 네가 그 입을 무좀약으로 그렇게 강하게 틀어막으니 어쩌겠느냐, 뱃속은 너보다 정직한데 입을 막는다고 말을 안 하겠느냐. 그러니 당연히 비듬으로 터지는 거다" 하고 말해 주었습니다.
좀 더 설명을 한다면 지라는 몸에 있어서 야전사령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뼈에서 백혈구를 만들면 그 상당부분을 지라가 저장을 합니다. 그러다가 몸 안에 세균이나 바이러스가 들어오면 지라에서 백혈구를 내보냅니다. 뿐만 아니라, 갑자기 피를 많이 쏟으면 지라는 그 안에 여분으로 비축해 두었던 피를 공급해서 위기를 넘기는 일도 합니다. 작게 보이는 지라가 하는 일만 해도 헤아릴 수없이 많은데, 다른 내장 이야기를 낱낱이 다 한다면 그것만으로도 여러 밤을 새워야 할 것입니다.


아무튼 반드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등이 반듯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야 몸이 건강해지고, 마음도 차분하게 가라앉습니다. 그 바른 몸을 지니기 위해서, 그리고 잘못된 몸을 바로잡기 위해서 앉음새는 매우 중요합니다.


그 몸을 바로 세우게 하는 좋은 앉음새는 결가부좌입니다. 먼저 두툼한 방석이나, 좀 딱딱한 베개를 준비합니다. 오랫동안 깔고 앉아있어도 15 센티 쯤의 높이를 유지할 정도가 되어야 합니다. 많은 경우 방석을 권하는 것 같은데, 실제로는 베개가 더 좋습니다. 그 베개에 궁둥이를 "걸쳐서" 앉습니다. 그리고 두 다리를 편하게 편 상태에서 한 쪽 다리를 구부려 맞은 편 다리 허벅지 위에 올려놓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다리를 다시 접어 먼저 접은 다리 허벅지 위에 올려놓는 것이 결가부좌입니다.


그런데 몸이 굳은 상태에서 처음부터 결가부좌를 하는 일이 그리 쉽지 않습니다. 그럴 때는 가볍게 반가부좌를 하면 됩니다. 반가부좌는 왼손잡이는 왼쪽 다리를, 오른손잡이는 오른쪽 다리를 먼저 접은 다음 반대쪽 발을 허벅지 위에 올려놓으면 됩니다. 그리고 틈틈이 결가부좌를 연습하여 나중에는 결가부좌를 하도록 해야 합니다.


궁둥이에 베개를 받치는 까닭은 그렇게 함으로써 몸의 무게 중심을 제대로 잡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앉음새를 갖춰 앉았을 경우에 양 무릎과 궁둥이의 꼬리뼈를 정점으로 하는 삼각형이 생깁니다. 그리고 궁둥이를 높임으로 인해서 이 삼각형의 중심점이 있는 곳에 몸의 무게중심이 자리를 잡게 되고, 안정감이 생긴다는 말입니다.


다음에는 등을 펴는 일입니다. 천천히 몸을 좌우로 흔들면서 양 옆으로 흐트러진 중심을 잡습니다. 이렇게 흔들다 보면 중심이 잡혔다는 느낌이 옵니다. 그 때 멈춘 다음, 다시 앞뒤로 또 그렇게 흔들다가 중심이 잡혔을 때 멈춥니다.


사실 이 때 중심이 잡힌 것으로 느껴지긴 하지만 완전한 것은 아닙니다. 나이 열 다섯이 넘었다면 누구나 몸꼴이 바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만 첫걸음이니 서두를 일은 하나도 없습니다. 서둘러서 제대로 되는 일이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지금까지 잘못 써 온 몸을 하루 아침에 바로잡을 생각을 한다면 그건 도둑놈 심보입니다. 천천히 흐름을 만들겠다는 마음으로 시작해야 합니다.
앉은 다음에는 턱을 당겨서 머리를 반듯하게 폅니다. 고개를 숙이고 사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고개를 깊이 숙이고 다니는 사람은 뱃속 어딘가에 큰 병이 자라고 있는 사람이라고 보면 틀림없습니다. 고개를 다 펴고 나면 두 귀가 정확하게 두 어깨 위에 똑바로 떨어지는 느낌이 듭니다.


그 다음에 눈길을 두는 일입니다. 눈길은 콧마루에 자연스레 떨어뜨려 놓으면 됩니다. 그렇게 가만히 몸을 바로 하고 앉아 있으면 온 몸의 무게중심은 앉음새의 삼각형 한 복판에 놓이게 되고, 힘의 중심은 배꼽 아래 쪽에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꼭 기억해야 할 것은 어깨에서 힘을 완전히 빼라는 것입니다. 어깨가 굳는 것도 매우 위험한 일입니다. 평소에도 어깨에서 완전히 힘을 빼는 일이 아주 중요합니다.
마지막으로 손입니다. 어깨에서 힘을 완전히 뺀 상태에서 자연스럽게 두 무릎 위에 올려놓으면 됩니다. 선불교에서는 한 손을 아래에 놓고, 다른 손을 위에 올려놓은 뒤, 엄지손가락을 서로 붙여서 동그랗게 모은 상태로 하라고 가르칩니다만, 그것 또한 어깨에서 힘을 빼는 데 어려움을 주는 모양인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자연스럽게 두 무릎 위에 올려놓는 것이 좋습니다.


이 때의 준비물이 있습니다. 반드시 준비해야 할 것인데, 그것은 10분 단위까지 시간을 잴 수 있는 시계입니다. 이런 시계는 미용재료상에 가면 머리 볶을 때 시간을 재는 시계가 있습니다. 태엽으로 된 것이 있고, 건전지를 넣을 수 있는 것이 있는데, 태엽을 감아서 쓰는 것이 좀 더 바람직합니다. 태엽을 감는 시계는 조금 시끄러운 소리가 나지만, 그렇게 소리가 나는 것은 조금 지나면 아무렇지도 않게 들리기 때문에 그다지 걱정할 것은 없습니다.


다시 한 번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①궁둥이가 깔고 앉은 것에 약간 쳐들려서 두 무릎과 꼬리뼈에 똑같은 힘이 얹히게 되어야 합니다. ②등은 바르게 펴야 하는데, 이 때 가슴이 앞으로 내밀어지지 않는 몸꼴이 바른 몸꼴입니다. 그러나 처음에는 익숙치 않아서 누구나 가슴이 앞으로 나오게 됩니다. 그것은 크게 신경쓰지 않아도 됩니다. 천천히 해 가는 동안 바른 몸꼴을 회복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③어깨에 힘이 하나도 들어가 있지 않고, 몸의 무게중심은 아랫배 쪽에 머물면 됩니다.

 

그 둘, 몸 풀기
앉음새에 익숙하지 못한 사람은 누구나 발이 몹시 저릴 수밖에 없습니다. 발목이 아픈 것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아프거나 저리거나 모든 것을 참고 견디지 않으면 안되는데, 그것은 앉음새가 익숙하지 않은 까닭이니 크게 걱정할 일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해서 몸이 마비되는 일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저 조금은 미련하다고 할 만큼 참아내는 힘이 필요합니다. 그것을 다 견디고 나서 얻는 기쁨은 이제까지 겪어보지 않은 새로운 것이고, 그 새로운 기쁨만으로도 큰 의미가 있습니다.

 

앉음새에서 발을 풀고 나서 굳어버린 다리를 풀어주면 아주 좋습니다. 그렇게 굳은 다리를 풀어주는 좋은 운동이 있습니다. 먼저 두 다리를 천천히 펴고, 허리를 굽혀 두 손으로 발을 잡습니다. 다리를 편 상태에서 자기 발을 잡지 못할 정도면 허리가 아주 많이 굳은 것인데, 이 때는 다리를 굽힌 상태에서 발을 잡고 숨을 내쉬면서 다리를 폅니다. 할 수 있는 만큼만 펴면 됩니다. 며칠 지나지 않아서 곧 다리를 편 상태에서도 발을 잡게 될 것이고, 계속해서 숨을 내쉬면서 허리를 굽혀간다면 곧 자기 무릎에 입맞춤을 할 수 있게 되고, 머지않아서 허리를 딱 반으로 접어 가슴이 허벅지에 닿게까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발을 잡았으면 발바닥을 검지 손가락으로 꼭꼭 주무르면서 허리를 깊이 숙입니다. 발바닥은 앞 쪽의 가운데 부분으로부터 시작해서 골고루 주물러 줍니다. 허리를 숙일 때는 숨을 깊게 내쉽니다. 그리고 숙일 수 있는 만큼 깊이 숙이고 숨을 길게 두세 번 내쉽니다. 그리고 허리를 편 다음 덜 저린 쪽 다리를 접어 정강이가 허벅지에 걸치게 올려놓습니다. 다리를 접은 쪽 손으로 발목을 꼭 감싸 쥐고, 나머지 손으로는 발가락을 감싸 잡습니다. 그리고는 발목을 크게 원을 그리면서 천천히 돌립니다. 돌리는 방향은 왼쪽에서 시작해서 열 여덟 바퀴, 그리고 다시 오른쪽으로 열 여덟 바퀴를 돌립니다. 이때 마치 노를 젓는다는 느낌이 들도록 원을 크게 그려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한 쪽이 끝나면 발을 바꿔 나머지 다리를 풀어줍니다. 이 운동으로 저리고 아픈 다리는 깨끗하게 해결이 됩니다. 단순히 저린 것만 해소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다리풀기를 하루 두 차례씩 두 달만 하게 되면 어떤 운동이나 노동을 갑자기 해도 절대로 몸에 알이 배는 일이 없습니다.
몸을 풀어주는 이야기를 좀 더 해야 할 말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몸에서 쓰지 않는 근육을 풀어주어야 하는 일입니다. 팔이나 다리를 한쪽만 쓰는 것도 몸의 균형을 잃게 하는 큰 까닭입니다. 그러므로 쓰지 않던 곳을 될 수 있으면 자꾸 쓰도록 노력을 해야 합니다.

 

어린 아이 때는 이것을 잘 합니다. 아이들은 자면서 몸을 많이 움직입니다. 그 움직임을 잘 보면 깨어서 활동할 때 쓰지 않던 쪽을 많이 움직인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습관과 학습에 의해서 이 균형감각을 찾으려던 본능을 잃어버리게 되고, 그러면서 몸의 균형이 깨어지게 됩니다. 이 깨어진 균형의 회복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쓰지 않던 근육들을 자꾸만 써서 될 수 있으면 몸 전체를 고루 풀어주어야 합니다. 고개를 한껏 뒤로 제껴보기, 앞으로 깊이 숙이는 것, 팔을 뒤로 해서 할 수 있는 만큼 위로 올려보기, 손을 엇잡고 깍지를 낀 상태에서 비틀어보기 같은 정지된 몸으로 풀어줄 수 있는 일들이 있습니다. 이를 닦을 때 왼 손을 써 보기라든가, 될 수 있으면 물건을 들 때 왼 손을 쓰는 것도 좋은 일일 것이며, 여기서 말한 것 말고도 어떤 것들이 있는지 생각해 보고 쓰지 않던 근육들을 최대한 가동시키도록 하면 몸은 훨씬 부드러워지게 될 것입니다.

 

몸이 굳는다는 것은 한 쪽 근육만 발달하고, 그 반대쪽 근육이 퇴화한 것을 말합니다. 몸이 굳은 것만큼 균형감각을 잃게 되고, 그렇게 균형감각이 떨어지는 것만큼 기운도 흐트러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단순히 저린 다리를 풀어주는 것뿐이 아니라, 온 몸의 굳은 상태를 스스로 찾아내어 골고루 풀어주는 것까지 나아간다면 비단에 꽃까지 덧얹은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이 몸으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몸은 내가 하고자 하는 모든 일의 첫 번째 자리입니다. 몸을 이해하고, 몸을 돌보고 가꾸는 일에 많은 투자를 해야 합니다. 그런데 요즘은 사람들이 몸에 투자를 하되 엉뚱한 곳에만 투자를 합니다. 화장을 한다거나, 성형수술로 그럴듯해 보이게 하려고 한다거나, 주름살을 없앤다고 이런 저런 짓들을 하는 것을 보면서 안타까운 마음만 자꾸 듭니다.
그렇게 해서 아름다워질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그렇게 한 얼굴들을 가만히 보고 있으면 아름답다기 보다는 처량하다는 마음이 더 드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 얼굴에 나타나는 가장 확실한 것은 처량스러움일 뿐입니다. 더구나 그렇게 하는 짓이 몸을 망치는 일이라는 것까지를 헤아리면 슬픈 마음까지 드는 것을 어쩔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그런 엉뚱한 투자를 하면서 몸도 못쓰게 만들고, 얼굴빛을 어둡게 할 일이 아니라, 보다 분명하고 확실한 투자를 해야 합니다.

 

언뜻 생각하면 다른 사람에게 잘 보일 수 있을 것처럼 여겨지는 일, 그렇게 하는 것이 상대방에 대한 예의나 배려라고 생각되는 일은 결국 한 마디로 말한다면 얄팍한 속임수일 뿐입니다. 더구나 그 속임수는 속아넘어가서 그것을 이쁘게 보는 상대방에게도 언젠가는 상처가 될 수 있지만, 더 큰 문제는 자신에게 커다란 피해가 된다는 것입니다. 마음도 못쓰게 되고, 몸도 못쓰게 되는 짓을 하면서 돈까지 버린다는 것은 삼중의 손해일 뿐입니다.

 

그렇게 스스로를 포장하거나 뜯어고치려고 하는 마음 깊은 곳에는 뿌리깊은 열등감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그리고 포장하거나 뜯어고쳤다고 해서 열등감이 해소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도 미리 알고 있어야 그런 유치한 짓을 하면서 손해를 겹겹으로 보는 일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마이클 잭슨인가 하는 사람이 이 일의 가장 분명한 증인일 것입니다.

 

몸을 가꿔서 참으로 상대방에게 돋보일 수 있는 으뜸은 얼을 살려내어 온 몸에서 고운 기운이 넘실대며 풍겨나오게 하는 일입니다. 그러면 조금 못생긴 구석이 있는 것쯤은 넉넉하게 해결이 됩니다. 생김새는 별 것도 아닌 것 같은데 보고 나면 또 보고 싶은 사람, 만나고 나면 자꾸 좋은 일이 생기는 사람, 함께 있으면 그 있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푸근하게 느껴지는 그런 사람이 되는 일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누구나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그 모든 것은 몸의 평형을 찾는 일과 기운을 다듬는 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지금 당장 글에서 눈을 떼고 왼 손으로 오른 손을 가볍게 감싸쥐어 보십시오. 그리고 마음으로 왼손이 말한다고 생각하고 한 마디 천천히 해 보십시오. '미안해, 그리고 참말로 고마워.' 이렇게 말입니다. 그 동안 훨씬 더 많은 일을 한 오른손이 무척 행복해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행복이 오른손으로부터 왼손으로 퍼져나가고, 온 몸으로 가득해지는 것까지 느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오른손과 왼손의 화해, 거기서 오른손에 쌓여 있던 피로가 깨끗하게 풀리기 시작할 것입니다. 매우 아름다운 일입니다.

 

몸 안에서의 화해도 모르면서 동서화합이나 남북화해를 말하는 것, 글쎄, 어떨지 모르겠습니다. 화해나 놓임, 그리고 조화는 그 어디서보다도 먼저 내 몸 안에서 일어나야 합니다. 그리고 그 첫걸음은 앉음새로 아프고 저린 다리를 팔로 풀어주는 것에서 배우게 된다는 말입니다. 팔이 다리를 행복하게 하고, 왼쪽이 있어 오른쪽이 기뻐하고, 위가 있어 아래가 즐거운 곳이 바로 몸입니다. 그 조화를 몸으로 연습해 나가는 동안, 또 다른 조화를 향한 태도가 생길 것입니다. 그리고 참된 행복이라고 하는 것은 이 조화로부터 시작된다는 것도 보게 될 것입니다. 손이 발에게 말하게 하고, 다리가 팔에게 말을 하고 있다는 것도 여기서 조금은 느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의식이 몸에게 말하고, 몸은 또 의식에게 말하는 것도 물론입니다. 이 이야기는 뒤에서 조금 더 자세하게 하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만 더, 두 손을 따끈따끈하도록 비빈 다음 빛이 새어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눈을 포옥 감싸 보십시오. 그리고 눈을 뜬 채로 손이 감싸서 생긴 어둠을 지그시 바라보도록 하십시오. 그렇게 한 상태에서 숨을 한 열 두어 번 쉰 다음, 그 손을 펴서 얼굴을 가볍게 씻어 보십시오. 온 얼굴에 손의 기운이 부드럽게 퍼질 것입니다. 물로 씻는 것과는 다른 세수가 될 것입니다. 이 또한 한 가지 기쁨이 될 것임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 셋, 병에 대하여
앉음새가 되었으면 다음은 숨 이야기로 넘어가야 하는데, 먼저 병 이야기를 하고 가도록 하겠습니다. 그것은 현대인의 거의 모두가 병에 걸려있기 때문에 매우 중요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건강하게 오래 살기를 바랍니다. 그런데도 거의 모든 사람이 크거나 작거나 병을 끼고 산다는 것은 묘한 역설이 아닐 수 없습니다. 게다가 많은 사람들은 틀림없이 병에 걸려 있는데도 그것조차 모르고 살아갑니다.

 

사람의 몸에 생긴 병은 크게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몸이 스스로를 조절하느라고 앓는 병입니다. 어린 아이들은 앓으면서 커갑니다. 한 번 앓고 나면 이제까지 안 하던 짓을 한 가지 더 합니다. 그만큼 자랐다는 것입니다. 그 한 가지를 더 하게 되기까지 아이의 몸 안에서는 많은 변화가 일어나게 됩니다. 그 변화에 적응하는 과정이 병이라는 형태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아기들이 그렇게 앓을 때, 무조건 병원으로 달려가는 어버이는 미련한 사람입니다. 사람의 몸이라는 것이 얼마나 놀랍도록 정교하게 되어 있는지를 알면 그러지 않게 됩니다. 가만히 앓는 아이를 지켜보는 것은 아이의 앞날을 위해서도, 어버이의 공부를 위해서도 아주 좋은 일입니다. 눈이 열려 잘 보게 되면 이것이 자라느라고 앓는 몸살인지, 아니면 정말 병원에 가야 하는 병인지를 가려 낼 수 있습니다.
저 혼자 병을 해결해 본 아이는 다음에 비슷한 문제가 생겼을 때 아주 쉽게 처리를 합니다. 우리 몸의 세포도 그 자체로 하나의 완벽한 목숨이고, 나름대로의 기억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감기 바이러스와 혼자 싸워 보았으면 다음에 감기 바이러스가 왔을 때 얼른 알아차리고 간단히 처리를 합니다. 그런데 약이나 외부 수단에 의존해 버릇을 하면 세포는 그것들을 스스로 해결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세포의 수명이 다하면 새로 생기는 세포에게 제가 가지고 있는 지식을 전달해 주고 죽는다는 사실입니다. 무엇인가를 먹고 호되게 체해서 고생을 한 사람은 오랫동안 그 먹거리를 못 먹습니다. 그것은 밥통을 이루고 있는 세포들이 그 먹거리를 기억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기억을 쉽게 완화시키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배를 손으로 가볍게 쓰다듬으면서 마음으로 배에게 말을 하는 겁니다. '그 때 내가 잘못해서 그런 거야. 이젠 괜찮아' 하고 안심을 시키는 겁니다. 그리고는 그 먹거리를 아주 오래 잘 씹어서 삼키면 배가 비로소 마음을 놓고 받아들이게 되고, 이것을 서너 번 거듭하면 깨끗하게 없어집니다.

 

몸의 힘과 세포의 기억력을 믿어야 합니다.
그렇게 자라느라고 앓는 병이 있는가 하면, 몸이 망가지느라고 앓는 병이 있습니다. 대개 스물 대여섯 넘어서 앓는 병은 거의가 몸이 망가지느라고 앓는 병이라고 보면 됩니다. 그 가운데에 이십대에 앓게 되는 허리앓이가 있습니다. 뭐 잘못한 것도 없는데 허리가 끊어지게 아픈 경험은 거의 모든 사람에게 있었을 것입니다. 요즘 젊은이들은 힘을 쓰는 노동을 안 하기 때문에 이 과정마저도 모르고 지나가는 것 같습니다.
아무튼 이 허리앓이는 벼라별 짓을 다 해도 낫지 않다가 한 대 여섯 달, 아니면 한 해쯤 지나면 씻은 듯이 없어집니다. 그래서 예전에는 이 허리앓이를 안 거친 사람은 어른이라고 쳐주지도 않았습니다. '애들이 허리가 어디 있느냐'고 하는 말이 있었습니다. 이 허리앓이를 일종의 통과의례로 알았던 것입니다.

 

그 원인은 이렇습니다. 잘못된 몸꼴로 허리가 비틀리고 구부러집니다. 몸은 바르게 있자고 하는데, 그걸 모르는 사람이 그저 버릇대로 편한 쪽으로만 앉거나 눕고, 팔도 한 쪽만 쓰고, 그래서 중심이 무너지는 겁니다. 참고 버티던 몸이 바르기를 포기할 때 이 허리앓이가 시작됩니다. 그리고는 그대로 굳어버리면 아픔이 가시게 됩니다. 몸의 포기입니다. 이 포기는 몸이 편안해지려는 의지에 굴복한 것인데, 이 때부터 여러 가지 몸 안의 문제가 일어나게 됩니다.

 

입맛이 달라진다는 것은 가장 두드러진 현상일 것입니다. 밥통에서는 신트림도 자주 생기고, 고구마나 팥, 고등어 같은 것을 먹으면 잦은 생목 오름으로 고생도 하게 됩니다. 몸에는 때아닌 살이 붙기도 합니다. 어리석은 사람들은 그것을 체질의 변화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체질이라는 것은 일생을 두고 변하지 않는 것입니다. 체질은 그대로인데 몸에 맞지 않는 먹거리가 자꾸만 당기게 되니 몸은 더욱 빨리 망가지게 될 것은 보나마나 한 일입니다.

 

이렇게 해서 몸이 못쓰게 돼 가는데, 그렇게 아플 때 사람들은 곧바로 약을 먹거나 병원으로 갑니다. 병원에 가 봐야 그들이 정확하게 아는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병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은 앓는 이 자신입니다. 그런데 몸에 대해 무지하게 되는 방식으로만 살아왔기 때문에 몹시도 어리석게 남에게 가서 내 병을 좀 고쳐달라고 합니다.

 

우리 몸은 스스로 모든 것들을 고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한 실례를 본다면 그것은 몸의 겉에 상처가 생겼을 때 저절로 아물게 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몸 겉은 그렇더라도 몸 속은 더욱 쉽게 흠집이 생기면 낫게 되어 있습니다. 입 안에 생긴 상처는 살갗에 생긴 상처보다 더 쉽게 낫는 것이 그것을 증명해 줍니다. 더군다나 몸 안에는 웬만해서는 탈이 나지 않도록 단단하고 질기게 되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렇게 단단하고 질기게 생겼지만 그래도 잘못해서 탈이 난다면 그 탈을 스스로 고칠 수 있는 자기치료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 몸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탈이 생겼을 때, 그 탈을 느끼면 몸이 스스로를 치료할 수 있도록 조건을 갖춰주면 됩니다. 그것이 몸을 반듯하게 세우고, 숨을 고르는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좀 더 다급하다 싶으면 먹거리를 끊고 속을 깨끗하게 비워주면 될 것입니다. 몸을 비우면 배는 고파서 힘이 빠지는 것 같지만, 세포들은 긴장을 하게 되고, 저항능력은 아주 커지게 됩니다. 그렇게 해서 몸은 스스로를 아주 빠른 시간 안에 고치게 되어 있습니다.

 

다만 우리들이 병이 생기면 먼저 지레 겁부터 먹고, 약국이나 병원, 또는 어떤 치료수단에 의지하는 것은 몸을 못 믿는 탓도 있지만, 몸에 대해서 너무 무지하다는 것도 한 까닭입니다. 몸을 모르기 때문에 몸 안에 이상이 생기는 데도 그것을 모르고 있다가, 아주 급하게 되어 겁이 나서 병원을 찾게 되는 것이 그 것입니다. 그러면 병원에서는 그들의 지식으로 약이나 주사, 또는 수술이라는 방식으로 땜질을 해 줍니다.
나는 개를 좋아해서 기르고 있습니다. 언젠가 한 번은 개가 밥을 안 먹는 겁니다. 걱정이 돼서 맛있는 걸 해다 줘도 거들떠도 안 보았습니다. 아무래도 죽나보다 하고 그냥 안타까워 하면서 지켜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한 사날 지나고 나니 이 녀석이 며칠 전에 주었던 밥을 깨끗이 먹어치웠던 겁니다. 제 몸에 병이 나니까 그걸 가만히 지켜보면서 몸을 비우고, 그 비운 사이에 세포들은 큰 힘을 얻어 병을 해결했고, 그래서 다시 건강을 얻었던 것입니다.

 

그 때 나는 큰 가르침을 준 개한테 절이라도 하고 싶었습니다. 몸을 믿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약이나 의사, 또는 의술을 믿을 일이 아닙니다. 대단히 서글픈 일이지만, 요즘 의사들 가운데 우리의 건강에 관심이 있는 분이 몇이나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대부분 우리 호주머니에 있는 돈에만 관심이 있는 게 아닌가 싶어 입맛이 쓸 때가 한 두 번이 아닙니다.

 

우리의 몸, 이것은 아주 놀랍도록 정교한 장치입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대로 하나님이 만들었다면, 그 하느님은 그것만으로도 전지전능한 분이라는 칭송을 받기에 모자람이 없습니다. 그만큼 정교하기 때문에 작은 자극에도 큰 상처를 입을 수도 있겠지만, 그게 또 그렇지 않습니다. 약한 곳은 깊숙이 감싸 두어서 다치지 않게 되어 있고, 전체가 아주 유연하게 돼 있어서 웬만한 충격에는 끄떡없도록 기가 막힌 구조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잘 만들어져서 오히려 그것이 사람을 미련하게 합니다. 무관심하게 그냥 멋대로 살아도 잘 굴러가니까 몸을 함부로 다루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그래서 그 놀랍도록 값진 몸을 함부로 굴려서 폐차직전의 자동차처럼 해 가지고 끌고 다니는 이들이 너무 많은데, 이보다 안타까운 일이 또 있을까 싶습니다.

 

병이 오면 사람들은 그 병을 대부분 적으로 인식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병을 고치려고 치료를 받는 과정을 '투병을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병과 싸워서 이길 방법이 없습니다. 아무리 작은 것 같은 병도 그것과 대항해서 싸울 때는 거의가 사람이 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병은 싸워야 할 적이 아니라, 가까운 친구로 생각하는 자세가 중요합니다. 병을 친구로 생각하고 병과 사귀는 자세를 가질 때 비로소 많은 것들을 볼 수 있게 됩니다.

 

어떤 노인이 폐결핵에 걸렸습니다. 참 결 곱게 산 어른인데 어쩌다가 그런 병에 걸렸는지는 아무도 모를 일입니다. 그분이 병에 걸렸다는 말을 듣고 그분을 아끼는 많은 사람들이 그분에게 몰려갔습니다.
"선생님, 어서 가셔서 치료를 받으셔야지요. 병원으로 가십시다."
사람들이 그렇게 말했습니다. 너무도 곱게 사신 분이고, 앞으로도 할 일이 너무 많은 분이라는 생각에 얼른 그 병을 고치고 싶다는 것이 그분을 존경하는 사람들 생각이었다고 합니다. 게다가 흔히들 폐결핵쯤은 요즘 의학으로 얼마든지 해결할 수 있는 병이라고 하니, 그 치료를 아무래도 간단하게 여긴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분의 태도는 완강했습니다. 잔잔하게 웃으며 이렇게 말씀하시면서 치료를 받자는 권고를 물리치셨다고 합니다.

 

"아냐. 얘들이 모두가 내가 모셔들인 내 손님들인데 내가 그 손님들을 죽이자고 주사를 맞고 약을 먹을 수가 있나. 그저 사는 날까지 손님접대 하다가 갈 수 있도록 나를 좀 그냥 놔둬주게."
큰 소리는 아니지만, 그 안에 담긴 목소리는 이만저만한 힘이 실려있는 게 아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아무도 그분을 말리지 못하고 돌아설 수밖에 없었더랍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입니다. 먼빛에서 그분을 우러르는 마음으로 지켜보던 나도 네 해 전에 그분이 돌아가시기 전에 한 번 뵈어야지 하고 찾아갔었습니다. 그 때 가면서 '아마 이번에 그분을 뵙는 것이 마지막이겠구나' 했었습니다. 가서 뵈었을 때에도 몇 달을 넘기기가 쉽지 않아 보였습니다. 안쓰러운 마음과 함께, 병을 손님으로 모시겠다는 그분의 마음을 가만히 헤아려 보다가 인사를 하고 나왔습니다. 그 때 혼자 사시는 그분 언저리를 맴돌던 조그마한 강아지들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그렇게 뵙고 왔는데 아직까지도 그분이 살아 계십니다. 몇 달을 못 넘길 것 같던 분이 아직도 손님 모시면서 일도 잘 하고 계십니다. 언제까지 그렇게 살아 계실지 모르지만, 그분이 말씀하신 '손님으로 모시겠다'는 말이 점점 큰 목소리가 되어 가슴 안에서 울려옵니다.
이제 몸에 관심을 가질 때입니다. 그래서 몸이 무슨 말을 하는지를 알아들을 줄 아는 귀열림이 있어야 합니다. 명상을 통해서 그 귀열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명상은 하늘에 오르자는 것도, 신선이나 도인이 되자는 것도 아닙니다. 나를 바로 알고, 내가 다른 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으로 살아가게 하는 수단일 뿐입니다. 그리고 명상을 통해서 가장 먼저 알게 되는 것이 바로 자신의 몸일 때에만 그 명상이 바른 명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넷, 숨 이야기
구약성서에 보면 하느님이 사람을 만드는 과정이 나옵니다. 흙을 빚어서 사람을 만들어 거기 숨을 불어넣으니 비로소 살아있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숨은 몸과 함께 사람을 이루는 중요한 구성요소라는 말을 그렇게 하고 있는 것으로 들립니다. 사실 우리말의 '목숨'이라는 말도 '몸과 숨'이라는 뜻인 것 같습니다. '몸'의 미음 받침이 기역으로 변화한 것이라는 마음이 듭니다. 살아있음은 곧 숨을 쉬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몸과 숨, 그 둘은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 둘이 하나입니다. 기능상 구분이 가능할 뿐입니다.

 

서양의학은 숨을 쉬는 바탕기관을 허파라고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숨의 바탕은 얼주머니라고 해 왔습니다. 실제로 허파가 숨을 쉬는 바탕기관이 아니라는 것은 갓 태어난 어린 아기가 숨 쉬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허파가 있는 가슴이 달싹거리면서 숨을 쉬는 것이 아니라, 배꼽 아랫부분이 발딱거리면서 숨을 쉽니다. 그것은 숨의 바탕자리가 바로 이 곳이라는 것을 뜻합니다. 그래서 예부터 내려오는 우리의 가르침이 옳다는 것이 증명됩니다. 이것을 흔히 단전이라고 불렀는데, 내가 보기에는 '숨의 바탕자리', 또는 '얼주머니'라고 하는 게 더 옳을 것 같아서 여기서는 이곳을 얼주머니라고 부르도록 하겠습니다.

 

얼주머니에서 시작된 숨은 공기를 들이쉬고 내쉬는 것으로 이어지면서 허파에서 정점을 이룹니다. 그러나 이 숨은 허파 혼자서 쉬는 게 아니라는 것은 서양 사람들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몸의 모든 기관과 조직, 그리고 세포 하나하나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숨을 쉽니다. 서로 제 숨을 쉬는데, 모든 숨이 커다란 하나의 조화를 이루고 있는 것이 우리 몸이 가지고 있는 호흡체계입니다. 뿌리는 얼주머니에 두고 있으면서 온 몸이 숨을 쉬는 숨 덩어리가 바로 목숨살이라는 말입니다.

 

서양 사람들 생각을 하나 걸고 넘어가야겠습니다. 그들은 이 땅에 있는 것을 크게 둘로 나누면서 생물과 무생물이라고 했습니다. 그 기준은 아무래도 숨을 쉬는 것과 숨을 쉬지 않는 것을 기준으로 하여 갈라놓은 것으로 보이는데,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오류입니다. 그들의 기준대로 보면 생물이라고 하는 것들만 숨을 쉬고, 무생물은 숨을 안 쉰다는 말이 됩니다. 그러나 이 세상엔 무생물이란 없습니다. 숨을 쉬지 않는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다는 말입니다. 흙은 흙대로, 돌은 돌대로, 그리고 철이나 금속류, 또는 비철금속에 이르기까지 숨이 없는 것은 없습니다. 다만 이것들을 화학처리한 것은 다른 목숨살이와는 아주 다른 숨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해로운 것으로 분류될 수는 있을 것입니다.
왜 이 말을 하는가 하면, 우리의 숨은 우리 몸 안에서 완전한 통일과 조화를 이루고 있으며, 그것이 우리 바깥세계의 숨과도 조화를 이루고 있습니다. 자연의 숨, 즉 지구의 숨인 봄 여름 가을 겨울 같은 것과도 이 숨은 조화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 숨은 더 크게 우주의 숨과도 통일과 조화를 이루고 있는 것은 물론입니다.

 

생물과 무생물이라고 하는 생각은 이미 그들이 무생물이라는 것과 생물이라고 하는 것 사이에 건널 수 없는 깊은 금을 그어 놓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말고는 아무런 뜻이 없습니다. 단절은 파괴를 지향하게 되어 있습니다. 생물과 무생물을 나눈 서구문명이 생태계 파괴의 주범인 것은 그저 우연의 산물이 아닙니다. 그들 생각의 바탕에 그런 파괴적인 요소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을 본받고자 한 제삼세계권 사람들도 그런 단절을 자꾸만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자연과의 거리가 곧 문명의 척도라고 하는 인식이 그것입니다. 겨울에 수박을 먹고, 여름에 얼음을 먹는 문화가 그것입니다. 거기 자연의 숨결과 사람의 숨결은 이미 깨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그것 또한 병의 한 원인입니다.

 

병에서 놓여나는 길 가운데 하나는 자연과의 숨결을 회복하는 일입니다. 철모르는 짓에서 벗어나 철따라 사는 삶이 행복인 줄을 알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멀리 자연까지 갈 일은 미뤄두고, 우리 몸 안에서의 조화로운 숨결을 이야기해야 하겠습니다. 얼주머니를 뿌리로 하는 숨이 허파로 이어지고, 그것이 온 몸의 각 기관과 조직의 숨과 일치하고, 낱낱의 세포들의 숨에 이르기까지 조화와 통일을 이룬 숨을 쉰다면, 그 사람은 건강한 사람입니다. 그런 숨을 쉬고 자 하는 마음을 지녀야 합니다.

 

그런데 이 숨을 흐트러지게 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 첫째는 아무래도 사람들의 욕심일 것입니다. 욕심이 일어나면 숨의 중심이 가슴으로 올라갑니다. 중심이 흐트러지면 바른 숨이 나올 수가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나를 보고, 어떻게 해서 마음을 비울 수 있었느냐고 묻는데, 사실 나는 마음을 비운다는 생각도 없이 살아갑니다. 다만 때때로 흐트러지는 숨의 중심을 몸의 무게중심인 얼주머니에 모을 뿐입니다. 그러면 쓸데없는 욕심은 줄일 수 있습니다.

 

욕심을 깨끗이 버린 증류수 같은 사람이 되는 것, 그것은 꿈꿀 것도 없습니다. 모든 목숨살이는 결코 순수 증류수처럼 될 수도, 절대진공상태가 될 수도 없습니다. 그저 살아가면서 그 삶을 알 뿐입니다. 그렇게 살다가 때가 되면 훌훌 벗고 떠나는 것, 떠난다고 그게 죽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목숨살이로 다만 변화할 뿐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배고플 때는 먹고 싶고, 졸리면 자고 싶고, 먹었으니 마려우면 싸야 하고, 제 삶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무엇인가 일을 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다만 그렇게 살아가는 삶이 전체의 조화를 깨뜨리지 않는 것일 때에만 바른 삶이라는 것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삶이라고 하는 것이 숨결이라는 큰 흐름이라는 것입니다. 아마도 사람들이 그 흐름을 거스르지 않는 것은 마음을 비운 것으로 읽는 모양입니다.
아무튼 숨이 자꾸만 뜨게 되면 몸 안에 여기 저기서 반란세력이 일어납니다. 그 반란세력은 몸 안에서 몸의 조화를 깨면서 저희들만의 호흡체계를 가지려고 합니다. 그게 성공을 하면 몸은 아주 깨어지고 맙니다. 여기서 숨을 가다듬는 일을 하게 되면 비로소 그들의 세력이 약화됩니다. 그것은 우리 몸에는 늘 스스로를 지키고 바로 세워가려고 하는 바탕되는 의지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 힘을 믿고 숨을 고르다 보면 반란세력이 몸 붙일 자리는 저절로 없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이제 숨을 어떻게 가다듬어야 할 것인지를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좋은 숨은 앞에서 말한 것처럼 조화로운 숨입니다. 숨이라고 하는 것은 단순히 공기의 드나듦이 아닙니다. 크게 볼 때 숨은 기운의 드나듦입니다. 그렇게 볼 때에만 숨의 바탕이 되는 자리가 얼주머니일 수 있습니다. 그릇된 습관과 편리의 추구는 이 조화로움을 잃게 합니다. 얼주머니로부터 시작되는 깊이있는 숨을 쉬어야 하는데, 어깨만 달싹거리는 얕고 불안정한 숨을 쉬고 있는 것이 현대인의 모습니다.

 

얕은 숨은 안정감이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쉽게 흥분하고 별 일도 아닌 일에 목숨까지 걸기도 합니다. 몸은 갖가지 병이 생겨나고, 추구해서는 안될 것들을 목적으로 삼기도 합니다. 좌표를 잃은 불안정함, 이게 숨을 놓치고 사는 현대인의 모습입니다.
여기서 바른 숨을 찾는 일은 매우 중요한 숙제가 됩니다. 바른 숨은 간단히 말하면 가늘고, 길고, 깊은 숨입니다. 누구든 자기 숨소리를 듣지 못할 정도의 숨이 좋은 숨입니다. 숨소리가 날 만큼 거친 숨을 쉰다는 것은 가슴 쪽에 이미 병이 생기기 시작했다는 것을 뜻합니다. 이런 숨을 극복하려면 숨을 고르는 것밖에는 다른 길이 없습니다.

 

또한 숨을 길게 쉬어야 하는데, 이것은 숨을 한 번 쉬는 데 시간이 길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보통의 사람들은 1분에 열 여섯 번에서 스무 번 정도 숨을 쉰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숨은 이미 흐트러진 숨이라는 것입니다. 무의식 중에 숨을 쉬어도 열 번이나 열 두 번 정도가 될 수도 있습니다. 명상 때의 숨 길이는 분 당 한 번, 또는 숨 하나에 3분 이상을 쉴 수도 있습니다. 이 긴 숨을 위해서 천천히 마음 속으로 수를 세어나가면 좋습니다. 꼭 기억해야 할 것은 처음에는 날숨을 길게, 들숨은 그보다는 조금 짧게 쉬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날숨과 들숨의 길이는 약 7: 4 정도의 비율이 좋습니다. 천천히 일곱을 내쉬면서 이 때 아랫배가 당겨져 올라가는 듯한 느낌으로 쑤욱 들어가야 합니다. 어떤 곳에서는 숨을 내쉴 때 아랫배가 볼록하게 나와야 한다고 가르치기도 합니다만, 그것은 옳지 않습니다. 그건 숨을 쉬는 게 아니라, 그저 배 운동을 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날숨에는 얼주머니가 쑤욱 들어가고, 들숨 때 불룩하게 나오는 것이 옳습니다.

 

그러나 배가 들어가느냐 나오느냐 하는 것에 크게 신경을 쓸 필요는 없습니다. 얼마 동안 숨을 고르다 보면 몸 안에 숨이 드나드는 길이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되는데, 그렇게 숨이 드나드는 것을 마음으로 들여다 보기만 하면 됩니다. 단전이 어느 곳이라느니, 그 단전을 느끼기 위해서 이런 저런 다른 짓을 해야 하느니 하기도 하는데, 그런 것도 별로 의미가 없습니다. 그저 긴 숨을 쉬어야 한다는 것만 알면 됩니다.

 

날숨이 길어야 하는 데에는 까닭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 동안 그릇되게 살았던 탓에 몸 안에 쌓이고 고인 탁하고 못된 기운을 밀어내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냥 숨을 쉬면 그런 기운은 점점 더 쌓이고, 그런 기운으로 사는 동안은 나도 불안하고, 나를 만나는 남도 불안하게 됩니다. 날숨을 길게, 들숨을 조금 짧게 쉬는 동안 들어오는 기운이 적고 내쉴 때 나가는 기운이 커짐으로 그 때 쌓이고 고여있던 탁기(濁氣)가 흔들리면서 일어나게 됩니다. 그것들은 본디 몸 안에 남아있어야 할 것이 아니기 때문에 조금씩 밖으로 빠져나오게 됩니다. 기운이 뭔지를 모르는 사람도 이 숨을 얼마 동안 쉬다 보면 어느 땐가 문득 자기의 기운이 맑아진다는 것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물론 그것은 다른 사람이 먼저 알아보게 된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조금만 주의를 기울여 보면 얼굴에서 다른 빛이 난다는 것을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깊은 숨을 이야기해 보고자 합니다. 그것은 숨을 쉴 때, 날숨과 들숨이 얼주머니에서 들락날락하는 숨입니다. 몸 속 가장 깊은 곳으로부터 숨이 나오고, 몸에서 가장 먼 곳에 있는 곳으로부터 들숨이 다가오게 하는 것, 그래서 숨이 커다란 원을 그리고 내 주위를 돌게 되는 것, 그것이 바로 생명현상입니다.

 

바른 숨은 처음에는 내가 연습을 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본디는 그렇게 숨을 쉬며 태어났다가 삶이 흐트러지면서 이 숨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숨을 연습하다 보면 나중에는 바른 숨이 저절로 되고, 나는 그 숨을 따라가기만 하면 되는 것, 그것이 바른 숨을 찾았을 때 일어나는 일입니다.

 

앉음새를 갖추고 숨을 고르는 일, 이것이야말로 명상의 시작과 끝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른 앉음새와 제대로 된 숨을 찾아가는 나들잇길이 바로 명상입니다. 잘못된 습관과 그릇된 가치관으로 흐트러진 숨과, 굽고 뒤틀린 몸을 느끼면서 바로잡아 가는 과정, 그리고 제대로 된 숨과 완전히 바른 자세를 찾는 자리가 바로 명상의 끝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 자리에서 명상을 끝내도 된다는 말이 아니라, 바로 거기서부터 그는 남을 가르칠 수 있는 스승이 되는 것입니다.

 

그 다섯, 경계해야 할 것
이렇게 앉음새 갖추고 숨을 고르는 일에는 참으로 재미있는 일이 많습니다. 처음에는 무척 힘들다는 마음이 들 것입니다. 내 경험을 먼저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나는 처음 시작할 때 몸이 많이 굳어있었습니다. 전혀 결가부좌가 안 되는 몸이었습니다. 사흘 동안 다리 접는 것을 연습해서 겨우 접었는데, 몹시 아프기도 했지만 금방 미끌어져 내려와 풀려버리고 마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물을 찍어다 허벅다리에 바르고 거기 발을 얹어서 미끄러지지 않게 하고 30분을 버텼습니다.

 


얼마나 발목이 아픈지 꼭 끊어지는 것만 같았습니다. 발목이 아프면 마음 속으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먼저 '내 발목이 아프다'고 합니다. 그 다음에는 '발목이 아프다'고 하면서 나와 발목을 마음으로 떼어놓았습니다. 마지막에는 그냥 '아프다'고 하면서 발목과 아픔도 떼어놓았습니다. 그러면 잠시 아픔을 잊게 됩니다. 그러나 그것도 잠깐일 뿐입니다. 금새 끊어지게 아픈 발목을 다시 느끼게 됩니다. 아픔이 살아나면 지옥 같고, 잠시 잊을 때는 천국 같았습니다. 첫날 30분 동안 천당과 지옥을 천 번은 오르내린 것 같았습니다. 게다가 시간은 왜 그리도 더디게 흐르는지, 30분을 그렇게 길다고 느낀 것은 아마 그 때가 처음이었을 것입니다.

 


이윽고 30분이 지나 시계가 울었을 때의 기쁨은 이제까지 내가 겪었던 어떤 기쁨보다도 큰 것으로 느껴졌습니다. 처음 자전거를 쓰러지지 않고 탈 수 있었을 때 그런 기쁨이 있었고, 여자와 처음 살을 섞었을 때 또한 자전거를 타던 것보다는 더 큰 기쁨이었는데, 그런 것과는 견줄 수 없는 또 다른 기쁨이 거기서 느낄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날 아침이었습니다. 두려움이 생기는 겁니다. 어찌 또 그 긴 시간을 견딜 수 있을까 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었습니다. 사실 30분이 그렇게 길다는 것은 이제까지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일입니다. 훈련소에서 보내던 나날들도 시간이 그리 더디지는 않았습니다. 어쩌면 그 30분은 영원과도 맞먹는 길이처럼 느껴지기도 했고, 시계가 고장나지는 않았나 싶기도 했었습니다. 그러나 어제도 했는데 오늘 못하랴 하면서 다시 덤볐고, 둘째 날도 잘 넘겼습니다.

 


하루에 두 번씩, 아침 저녁으로 그렇게 명상을 시작했는데, 내 경우의 그 시작은 명상이 아니라 그저 치열한 싸움이었습니다. 굳은 몸으로 인한 아픔, 그 동안 한 번도 그런 고요 속에 있어보지 못한 때문에 오는 지루함이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물고늘어지는 적이었습니다. 나는 그들에게 시달리면서도 어쨌든 시작한 것이니 끝장을 보자는 마음으로 독하게 매달렸습니다.
겨울이나 여름이나 옷을 다 벗고, 창문은 연 채로 싸움을 해 나갔습니다. 한 이레쯤 지나니 앉음새가 조금은 수월해졌습니다. 그래서 견딜만할 때, 알 수 없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명상에 들어가면 바깥의 어떤 자극에도 움직이지 않아야 합니다. 전화가 온다고 전화 받으러 가거나, 파리가 날아와 얼굴을 간지른다고 손을 들어 쫓아도 안됩니다. 그저 마음 속으로 '아, 파리가 와서 앉았구나' 하고 알아채면 됩니다. 그런다고 파리가 가만히 한 곳에만 앉아있는 것이 아닙니다. 얼굴을 이리저리 핥으면서 기어 갈 때에는 정말 괴롭습니다. 더욱 견디기 힘든 것은 입술을 핥을 때입니다. 그러나 '내가 이것을 싫어하는구나' 하고 알아채기만 하면 됩니다. 모기가 와서 물어도 그저 지켜보면서 가만히 숨만 가다듬으면 됩니다.

 


그렇게 파리나 모기, 또는 전화나 밖에서 나는 소리를 잘 견디고 있던 참인데, 느닷없이 불알이 몹시 따가웠습니다. 시작한지 10분도 안 되었을 때였을 것입니다. 벼룩에게 물려 봤지만, 벼룩이 무는 건 장난도 아니었습니다. 따가움은 계속되었고, 얼마나 심한지 창자가 다 비틀리는 것 같았습니다. 진땀을 흘리면서 그 따가움을 내려놓으려고 해 봤지만 그게 안 되었습니다. 나중에는 이렇게 아픈 것을 계속 참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는 마음까지도 들었습니다.

 


그래도 참으로 미련스럽게 참았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시간이 되어 시계가 울었을 때의 그 해방감은 뭐라고 표현할 수 없는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아마 팔일오에도 그렇게까지 시원한 해방감을 느끼지는 않았을 거라는 마음까지도 들었습니다. 다리를 풀고 보니 개미가 거기 있었습니다. 개미는 한 마리가 아니었습니다. 이빨이 유난히 단단하고 물리면 몹시 괴로운 그런 개미가 무려 열 두 마리가 표적을 찾아 정신없이 바쁘게 바닥을 기어다니고 있었는데, 저것들이 그 여린 불알 가죽을 뜯고 있었구나 하면서 그것들을 보는 순간 온 몸에 소름이 쪼옥 돋았습니다. 지금도 이 글을 쓰면서 그 때를 다시 떠올리는 내게 아직도 그 때의 괴로움이 그대로 살아나는 듯 싶습니다.

 


명상을 하는 사람은 어떤 것도 죽이지 않는 것이 원칙입니다. 모든 목숨을 소중하게 여기는 마음, 그게 명상의 기본이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날 나는 그 기본을 깨뜨리고 말았습니다. 얼마나 미운 마음이 드는지 한 마리도 놓치면 안된다면서 다 잡아서 죽어버렸습니다. 그러자 마음이 시원해졌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보니 그게 스승을 죽인 짓이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을 후회하거나, 그 일에 마음이 걸려 넘어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아무튼 부끄러운 기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10년을 오는 동안, 그 다음에 또 한 번 개미가 달려든 일이 있는데, 그 때는 그냥 다리를 풀어버리고는 개미부터 잡고 다시 시작을 했었습니다. 얼마나 괴로움이 컸던지 다시는 겪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아마 지금이라면 견딜 수 있을 것도 같고, 즐길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이제는 그런 게 오지 않을 것쯤은 압니다.

 


그렇게 밖에서 오는 자극들을 거치고 나면 그 다음에는 안에서 일어나는 것들이 또 있습니다. 잡념은 처음부터 일어나는 것인데, 잡념이 일어나면 마음 속으로 "무(無)" 하고 길게 소리를 내면서 숨을 내쉽니다. 처음 명상을 시작할 때 일어나는 생각은 그게 좋아 보이던 기발한 것으로 생각되던 모두가 잡념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 모든 생각들을 자꾸만 몰아내야 합니다.

 


이 잡념은 모두가 감정의 쓰레기들이라서 바른 판단을 흐리게 하는 것들입니다. 세계와 우주까지도 꿰뚫어보는 눈을 지니고 있는 것이 사람인데, 겹겹이 쌓인 이 잡념이라는 쓰레기가 우리의 눈을 가려서 보아야 할 것을 못 보게 합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벗겨내는 일을 해야 하는데, 명상 말고 또 다른 길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잡념의 양은 그 사람이 살아온 세월과 비례합니다. 또한 그 사람이 살아온 삶의 질과도 비례합니다. 그것은 그 세월 동안 살아오면서 자신이 지녔던 삶의 태도에 따라서 몸 안에 쌓인 탁하고 못된 기운으로부터 일어나는 일종의 악취와도 같은 것입니다. 명상을 통해서 이것들을 몰아내는 것만큼 사람됨이 맑아지고, 그 맑아진 것만큼 삶이 여유로워지고 부드럽게 됩니다. 삶의 여유나 부드러움은 결코 돈이나 지위, 또는 명예 같은 것에서 오는 게 아닙니다.

 


잡념을 어느 정도 걷어내고 나면 신비체험을 하게 됩니다. 신비체험은 여러 가지가 있는데, 모든 신비체험은 마치 어둠 속에서 마주치는 구덩이와 같습니다. 그래서 명상을 한다는 사람들이 여기 빠져서 헤어나지 못하고 그것이 전부인 것처럼 착각을 하여 다른 사람을 홀리는 일도 흔히 볼 수 있습니다. 그런 수준에서 하는 짓들은 거의가 바람직하지 않은 결과를 내고 맙니다. 또한 이런 사람들 때문에 명상이나 기운의 수련이 하찮은 짓거리로 치부되기도 합니다.

 


남의 전생을 봐 준다거나, 기 치료를 해 준다거나, 남의 점을 봐 주는 행위들 가운데 이런 유형의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신기할 정도로 효과가 있는 듯 하지만, 결국 따지고 보면 달라진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곧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대부분이 명상을 하다가 겪게 되는 신비체험 쪽에 머물러서 거기만 맴도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다시 내 이야기를 조금 더 하고 넘어가야겠습니다.
한 3년 쯤 되었을 무렵입니다. 그 때 자꾸만 이상한 것들이 보였습니다. 때로는 꿈에 보이기도 하고, 어떤 때는 명상에 들어가 있을 때 환영처럼 떠오르기도 했습니다. 그것들은 주로 남에게 들켜서는 안될 짓을 하는 것들이었고, 그 짓을 하는 사람들은 내가 아는 사람이기도 하고, 모르는 사람이기도 했는데, 모르는 사람은 그렇게 보고 나서 며칠 안 지나서 마주치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참 알 수 없는 일인데, 나는 그것이 좋지 않은 일이라는 것을 이미 다른 곳에서 들어서 알고 있었고, 그런 것들이 떠오르면 몰아내려고 애를 쓰면서 얼마 동안을 지내야 했습니다. 떠오르면 물리치고, 다시 다른 것들이 떠오르면 또 내쫓고, 그러면서 한 서너 달을 보냈습니다. 얼마가 지나자 다시는 그런 것들이 나타나지 않았고, 다시 평정이 왔습니다. 한편으로는 서운한 마음까지 들기도 했습니다. 그 평정이 오고 얼마 지난 다음에야 나는 한 가지를 더 보게 되었습니다.

 


목숨이 가지고 있는 성질 가운데 하나를 본 것입니다. 목숨이란 시간과 공간에 구애를 받지 않는 것이라는 사실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는 것이 당연한 것이라는 문화 안에 살면서 그것을 학습하고, 거기 길들여져 왔습니다. 그래서 목숨이 지니고 있는 시공을 초월하는 본연의 능력을 상실해 버린 것입니다. 그것을 알고 보니 점장이들이 하는 일이 한편으로는 이해도 되고, 한편으로는 그런 점장이들한테 가서 자신의 운명을 묻는 사람들이 안쓰러워 보이기도 했습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그로부터 한 4년이 지났을 무렵이었습니다. 그 때는 아픈 사람을 만져보면 병이 만져지는 것 같았습니다. 희한한 일은 같은 고뿔처럼 보이는 것도 어떤 때에는 어깨에서 병이 만져지기도 하고, 어떤 사람에게서는 팔이나 다리, 또는 등에서 만져지기도 했습니다.
그 때는 참 유혹을 많이 받았습니다. 잘 하면 그 병을 움켜쥐어 끄집어 낼 수도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렇게 해서 아픈 사람을 고쳐주는 일은 좋은 것이라는 마음이 자꾸만 고개를 쳐들었습니다. 그런데도 내가 들은 명상에 대한 원칙이 그것을 가로막았습니다. 그것은 '곁길로 빠지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감각으로 느껴지는 모든 것은 명상이 축하는 목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명상을 통해서 도달하게 되는 맨 끝자락, 그것은 다른 어떤 거도 아닙니다. 다만 내 몸이 반듯해지고, 올바른 숨을 쉬는 것입니다. 그것은 나 자신이 자기를 놓치지 않고 오직 자기 자신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게 아닌 모든 것은 다 홀림이고, 곁가지일 뿐입니다. 그런 곁가지는 그것이 아무리 가치 있어 보이고, 의미가 있어 보인다고 하더라도 버려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몸이 떠오르는 공중부양을 경험하기도 한다고 합니다. 또 다른 사람은 백회가 열리면서 우주의 기운이 온 몸으로 밀려들어오는 것을 경험하기도 하는 모양입니다. 기라고 하는 것이 몸 안을 돌아다니다가 마침내 몸 밖으로 나와서 바깥을 휘돌기도 하고, 그게 우주의 끝까지 내달리는 것을 경험하기도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런 것은 다 아무 것도 아닙니다. 무시하고 지나쳐 버려야 할 명상의 쓰레기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반드시 잊지 말아야 할 일입니다.

 


때로 어떤 사람은 그런 것을 반드시 거쳐야 할 과정으로 알고, 그걸 거치지 않은 사람은 아직 그 단계에 다다르지 못했다고 생각하기도 하는 것 같은데, 이 또한 어린 헤아림일 뿐입니다. 사람에게는 각각 편차가 있어서 어떤 사람이 겪은 것을 다른 사람은 겪지 않고 지나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정상인 사람이 모두가 도달할 수 있는 자리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곧은 몸과 바른 숨'이라는 자리입니다. 이미 앞에서도 말한 것처럼, 그 자리에 다다른 사람은 다른 사람들의 스승이 될 수 있습니다.
다함께 이 길로 들어서길 바랍니다. 모든 살아있는 사람들이 이 자리에 초대를 받고 있습니다. 살아있다고 하는 것은 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으로 살아갈 몫이 있다는 말입니다. 참된 복이 있다면 그렇게 자기 자신으로 사는 삶입니다. 그 삶이야말로 가슴이 미어지도록 아름다움이고 말입니다. 그러니 모두가 이 초대에 응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셋째마당. 군더더기 털어내기
그 하나, 무엇이 불행인가
비참함과 불행, 이것은 모든 인류가 벗어나고자 하는 바라지 않는 자리입니다. 그런데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이 어떤 불행이던지 모든 불행은 저 스스로 찾아오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자신이 모셔들인 것 아니고는 어떤 불행도 그냥 들어오는 법이 없습니다. 자신이 모셔들인 것이기 때문에 그에 대한 책임도 모두 스스로가 지지 않으면 안됩니다.

 


비참함과 불행으로부터 벗어나려고 한다면 그 원인을 찾는 것이 가장 먼저 풀어야 할 숙제입니다. 어떤 사람은 그 원인을 무지함에서 찾으려고 합니다. 사람이 지니고 있는 욕심이라고 하기도 합니다. 어리석은 사람들은 자기 밖에 있는 어떤 것들에서 찾으려고도 합니다. 그 보다 더 큰 어리석은 노릇은 불행의 원인이 결핍에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나름대로 그럴 듯한 말을 하기도 하지만, 모두가 정답은 아닙니다. 무지함이 때때로 불행의 원인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오히려 아는 것이 더 큰 불행을 불러들이는 수도 없지 않습니다. 그러니 무지는 불행의 한 요소일 수는 있지만, 원인은 되지 못합니다. 욕심 또한 불행을 불러들이는 하나의 요소로 작용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또한 불행의 뿌리가 되는 원인이라고 하기에는 모자랍니다. 소유의 결핍은 이전에는 불행의 원인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현대에 와서 결핍이 불행이라고 하기에는 우리는 너무 많은 것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위에서 말한 것들은 모두가 불행의 요소일 수는 있지만 불행의 원인은 못 됩니다. 다른 불행의 요소라고 하는 것들도 크고 작은 불행의 한 요소일 수는 있지만 거의가 원인이라고 하기는 좀 뭣한 것들일 수 있습니다.

 


불행의 가장 깊은 뿌리는 다른 것이 아니라 '군더더기'입니다. 군더더기란 전혀 있을 필요가 없는 것이 거기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군더더기는 삶을 힘들게 하고, 사람을 쉽게 지치게 합니다. 솜만 지고 가면 될 일을, 그 솜을 물에 적셔서 짊어진 것과 같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것 때문에 삶에 즐거움보다는 괴로움이, 편안함보다는 힘겨움이 가득하게 됩니다. 웃어야 할 일을 보고도 웃지 못하는 비극, 잔치를 벌여야 할 때에 장례를 치러야 하는 안타까움,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어야 할 인생이 눈물짓고 탄식하면서 땅을 치는 일로 가득하게 되는 모든 까닭이 그 군더더기로부터 시작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인생을 괴로움의 바다'라고 하는 말에 아니라고 말하지 못하고 모두가 엄숙하게 고개를 끄덕입니다.

 


이 모든 것은 거짓입니다. '살아가는 것이 괴로움의 바다'라는 말이 거짓이라는 말입니다. 군더더기에 휩싸이고, 그 군더더기로 몸과 삶을 온통 가득 채워 놓은 탓에 삶의 참 모습을 알지도 보지도 누리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하는 말입니다. 그렇게 살도록 운명지어진 것이 삶이 아닙니다. 괴로움이나 불행이 전혀 없을 수는 없지만, 그 바탕꼴은 기쁨과 즐거움으로 가득하다는 것이 그야말로 '생명의 진실'입니다. 그런 생명의 진실이 여기 있다고 하거나, 저기 있다고 하는 말을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또한 거짓말쟁이입니다. 모든 목숨 안에 이미 그 생명의 진실이 담겨 있습니다.

 


그런데도 그 생명의 진실을 외면하게 하고, 군더더기로 가득한 삶을 살게 하는 흐름이 있습니다. 그 큰 흐름은 힘있는 자들의 야욕입니다. 현대 사회에서의 그것은 다름 아닌 돈의 논리를 가치의 중심에 두는 상업자본주의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끝없이 물건을 사게 하는 무한소비의 시대를 충동질하는 그것들이 바로 군더더기 가득한 삶을 살게 하는 원흉입니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풍요를 약속하지만 결국은 모두를 종으로 만들고, 스스로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한 삶을 살다가 가도록 만듭니다. 나름대로의 가치관도 있고 윤리나 덕목도 있지만, 그 뿌리는 비윤리와 몰가치입니다. 목숨살이의 길과 반대되는 곳에 서서, 목숨살이와는 상관없는 저희들의 축제를 벌이고 있는 것이 바로 상업자본주의의 진짜 얼굴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마침내 목숨을 못살게 굴고, 목숨을 왜곡시키고, 목숨의 가치까지도 부정하는 쪽으로 판을 몰고 갑니다.
한 가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비씨카드사에서 한 때 "여러분, 모두 부자 되세요" 하는 선전을 아주 사람 홀리게 했던 적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그 선전을 아무 분석없이 좋아했고, 그런 인사를 하는 사람들도 생겨났습니다. 아직도 그 비슷한 광고가 계속되고 있는데 그것은 속이 뻔한 속임수입니다.

 


도대체 비씨카드의 무엇이 사람들을 부자가 되게 하겠느냐는 말입니다. 그들은 소비자들이 돈을 쓸 때에만 저희들에게 이익이 생긴다는 것을 잘 아는 사람들입니다. 모두를 부자가 되게 하려고 수천만 원을 들여서 그런 광고를 할 턱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부자가 되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발라먹자는 것이 그 속에 들어있는 참된 속셈입니다. 말에 속지 말고 그 말에 담긴 속셈을 볼 줄 알아야 하는데, 그것 못 보고 그 선전을 좋아하는 어리석음이 안타까울 뿐입니다. 실제로 그 선전이 나오고 한 해도 못 되어 카드 빚에 신세 망친 사람들이 무더기로 쏟아져 나온 일은 사람들이 그 광고를 좋아할 때 이미 예정된 수순이었습니다.

 


그렇게 사람들에게 돈을 쓰게 하는 무한소비에의 충동처럼 위험한 일이 또 있을까 싶습니다. 사실 사람이 살아가는 데 그렇게 많은 것들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소비충동에 홀린 사람들은 온갖 불필요한 것들을 사지 않으면 큰 일이라도 날 것 같은 위기의식까지 느끼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런 물건들을 정신없이 사들입니다. 살 때는 그것만 가지면 엄청 좋아질 것 같지만, 실제로 사들인 다음에 보면 아무짝에도 쓸데없는 것들도 많고, 처음에는 쓸만한 것 같지만 얼마 쓰지 않아서 그냥 버려두어 창고만 차지하게 되는 물건은 또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렇지 않고 제법 오래 쓴다고 하더라도 그것 없어도 얼마든지 살 수 있는 것들이 한 두 가지가 아닙니다.
그러니 모두가 알아야 하는 것은 '내게 반드시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헤아리는 일입니다. 꼭 있어야 할 것만을 갖고 싶어하는 것은 욕심이 아니라 슬기입니다. 그런 슬기를 가르치는 곳은 아무 데도 없는 것 같습니다. 그걸 가르쳐 주면 장사꾼들은 모두 어려워질 터이기 때문입니다. 혹시 가르쳐 주는 사람이 있다고 하더라도 어리석은 사람은 그 옳은 가르침보다는 귀에 달콤한 홀리는 말에 이끌려 군더더기를 찾아 제 목숨을 허물어가며 내닫는 것이 오늘날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그들의 논리는 이렇습니다.
'그렇게 사는 것이 좋고 옳기는 하지만, 그래 가지고야 어디 사람 노릇을 하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무한소비사회로부터 따돌림을 받는 것은 결코 두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들이 말하는 '사람 노릇'이라는 그 속뜻은 저네들의 소비충동에 유혹을 잘 당하는 사람이라는 뜻일 뿐입니다. 그건 사람 노릇이 아닙니다. 정확하게 말한다면 '바보 짓'입니다. 바보로 살기를 자청한다면 얼마든지 그들을 따라가도 좋습니다. 그리고 그 책임은 반드시 본인이 짊어질 무거운 짐, 본인의 두 발목에 채워질 사슬로 돌아온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군더더기는 또 있습니다. 그 또 다른 군더더기는 먹거리들입니다. 먹어서는 안 될 먹거리들이 군더더기를 이루면서 몸 안에 쌓입니다. 속에서 찌꺼기가 쌓이는 것만큼 겉으로는 살이 찐다는 것도 잊지 말아야 할 일입니다. 무엇이 참으로 내게 필요한 먹거리인지를 아는 것, 그래서 그것을 가려서 먹을 줄 아는 슬기도 무척 아쉬운 때입니다. 그리고 이 부분에 있어서 사람은 다른 짐승들보다 훨씬 더 미련합니다. 동물들은 거의 과식을 하거나, 몸에 불필요한 것을 섭취하는 일이 없습니다. 오직 필요한 것을 필요한 만큼만 먹습니다. 그러니 미련하게 많이 먹는 사람을 두고 '돼지 같은 인간'이라고 욕하는 것은 적절치 않습니다.

 


그것 말고도 여러 면에서 사람은 짐승만 못합니다. 생명원리를 따라서 사는 문제를 놓고 볼 때 그렇습니다. 그 살아가는 삶꼴에 점수를 매긴다면 짐승들은 거의가 75점을 넘길 터이지만, 사람은 거의가 60점을 밑돈다는 것이 정확한 채점입니다. 그러니 '짐승 같은 것', 또는 '짐승만도 못한 놈'이라는 욕은 아무리 봐도 옳지 못합니다.
얘기가 조금 빗나간 것 같습니다. 다시 먹거리 이야기를 하자면, 입에 맞는 먹거리를 찾아 먹으려는 마음을 버려야 합니다. 그 마음이 바로 군더더기입니다. 입에 맞는 것과 몸에 좋은 것 사이에는 늘 갈등관계가 있습니다. 입맛보다 먼저 몸이 무엇을 달라고 하는가를 헤아릴 줄 아는 사람이 옳은 사람입니다.

 


어렸을 때에는 입에 당기는 먹거리가 몸에 필요한 먹거리였습니다. 그런데 자라면서 몸에 균형을 잃고, 삶을 헤아리는 슬기를 놓치게 되면서부터 입에 맞는 먹거리와 몸에 맞는 먹거리 사이에 갈등이 생기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몸은 이미 탈이 난 몸입니다. 그런데도 아이들의 편식은 걱정하지만, 입맛에 맞는 먹거리만 찾아다니는 어른들의 식습관에 대해서 걱정을 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몸에 맞는 먹거리를 찾는 슬기, 이것을 지녀야 하는 일은 그 무엇보다도 시급한 과제입니다. 그것 때문에 체질별 식단이 나오고, 어떤 사람에게는 어떤 먹거리가 좋고, 어떤 사람에게는 어떤 먹거리가 나쁘다는 말도 쉽게들 합니다. 그렇지만 그 또한 그다지 바람직한 것이 아닙니다. 스스로가 자신에게 어떤 먹거리가 좋은 것인지를 알지 않으면, 간단하게 양인이기 때문에 양인에게 맞는 먹거리는 이러저러한 것, 음인이기 때문에 음인에게 맞는 먹거리는 이러저러한 것이라고 틀을 짜 놓는 것도 위험한 일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먹거리를 두고 얻을 수 있는 지혜가 성서에 있습니다. 신약성서 마르코의 복음서에 보면 "무슨 독을 마시더라도 해를 입지 않을 것"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 말은 고엽제 같은 것을 먹어도 상관이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몸이 바르기만 하다면 독이 되는 먹거리를 먹어도 그것을 새겨낼 수 있게 된다는 말로 읽는 것이 옳습니다. 다만 몸이 바르지 못한 상태에서는 자신에게 맞는 먹거리를 찾아 먹을 줄 알아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늘 몸에게 먼저 물어보는 습관을 들여야 합니다. 입이 달라는 대로 그저 먹어대던 게걸스러움에서 벗어나는 것이 무엇보다 먼저 헤아려야 할 일이라는 말입니다.

 


군더더기에는 또한 군더더기 마음이 있습니다. 이것은 주로 바람직하지 않은 인간관계와 거기서 오는 경험들, 그리고 부적절한 학습을 통해서 생기게 됩니다. 모든 군더더기들이 그렇지만, 이 생각의 군더더기들 또한 사람의 몸과 마음에 병이 생기게 하는 한 까닭이 됩니다. 더군다나 생각의 군더더기는 사람을 어리석게도 합니다. 괜한 일에 사람을 미워하게도 되고, 잘못된 선입관이나 편견의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그 모든 것이 자신이나 남을 비극으로 몰아넣는 원인이 된다는 것을 모를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마음의 군더더기는 단지 마음의 군더더기만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몸에 군더더기가 없는 사람은 마음의 군더더기도 생기지 않는 법입니다. 그러니 몸이 반듯하지 못한 사람, 뚱뚱하게 살이 찐 사람, 몸 안에 질병을 끼고 사는 사람이 바르고 깨끗한 마음을 지니고 있다는 것은 처음부터 말도 안 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다만 마음의 군더더기를 따로 이야기하는 데에는 까닭이 있습니다. 몸이 바르다고 하더라도 그가 겪어 온 삶의 과정에 따라서 마음에는 군더더기들이 생길 수 있는 여지가 있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그 마음의 군더더기가 오래 묵으면 반드시 바르지 못한 몸이 되는 일에 작용을 한다는 점입니다. 마음이 먼저냐 몸이 먼저냐를 따진다면 물론 몸이 먼저일 터이지만, 때로는 마음이 몸을 못쓰게 할 수도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이런 군더더기들을 버리는 일이야말로 우리가 살면서 반드시 풀어야 할 큰 숙제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군더더기를 보는 눈이 열려야 하고, 그 다음에는 군더더기를 내버리는 용기를 지니는 일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명상만한 방법이 없습니다. 종교가 그렇게 할 수 있다고 하는데, 미안한 말이지만 그 말에는 동의를 할 수 없습니다. 오늘날의 종교상황이 그 말에 동의를 할 수 있게 하지를 않습니다. 종교가 그런 역할을 할 수는 있겠지만, 오늘날의 종교는 이미 군더더기를 버리라는 말을 할 자격을 잃어버리고 말았다는 것이 더 올바른 시각일 것입니다.

 

그 둘, 몸의 군더더기를 털어버리는 장 체조
한 때 우리는 살찐 사람을 부러워하던 가난한 과거를 갖고 있었습니다. 대머리가 벗어지고 배가 나오면 금상첨화로 여겨지던 재미있는 날이었습니다. 대머리가 어째서 부의 상징이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배가 나온 것은 넉넉하게 이해가 됩니다. 그것은 먹거리가 흔하다는 것을 뜻했으니 말입니다. 그만큼 우리는 먹을 것이 귀하던 시절을 살았습니다. 워낙 먹을 것이 없는 세월을 살다 보니, 언제나 부러운 것은 광에 있는 쌀독에 하얀 쌀이 가득하게 쌓여 있고, 그 흰쌀로 지은 하얀 쌀밥에 고기반찬을 해서 배가 부르도록 실컷 먹어보는 것이 소원이었던 어찌 보면 서글픔까지도 자아내는 날들이었습니다. 적어도 70년대 초반을 살았던 사람이라면 이것을 잘 알 것입니다. 반드시 그래서만은 아니지만, 그래서 우리 겨레에게 있어서 밥은 그대로 곧 하늘이었습니다.

 


이제 옛사람이 된 최명희 선생이 쓴 '혼불'이라는 소설에 보면 '염라대왕이 수채구멍에 산다'는 말이 나옵니다. 먹거리를 귀하게 여긴 우리 겨레의 삶씨를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밥이나 쌀알을 함부로 하여 수채구멍에서 그런 것들이 보이게 하는 사람은 염라대왕이 잡아간다는 뜻이니 말입니다. 이렇게 밥을 값지게 여기던 삶씨를 잃어버린 것은 '잘 살아 보세'의 그릇된 운동 뒤에 오는 공황상태라고 읽을 수 있습니다. 너무도 못살던 지난날을 벗어버리고자 하는 몸부림으로 치달았던 60년대와 70년대를 지나면서 그 시절의 독재에 대한 보상을 그야말로 '잘 사는 것'으로 받으려던 심리가 우리 사회에는 자꾸만 자라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곧 '많이 누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누림은 먹거리를 찾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먹거리를 찾는 것도 그냥 찾는 것이 아니라, 게걸스럽게 찾는 것으로 나타난 것이었습니다. 몸에 좋다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잡아먹어서 그렇게 엄청나게 불어나는 개구리를 씨 말릴 만큼 먹어대는 식성, 바깥나라에 나가서도 '보신관광'이라고 하는 말도 안되는 관광문화를 만들어내는 처참하도록 가엾은 탐욕, 먹거리의 가치도 모른 채 미식을 탐하여 온 나라 구석구석의 맛있다는 식당을 찾아 헤매는 한심스러울 만큼 철없는 짓거리를 하고, 그래서 곳곳에 명소라고 간판을 내 건 식당들이 늘어서 있지만, 어디에서도 먹새문화를 싹틔우는 것은 찾아도 볼 수 없는 마당이 된 것이 우리의 현실이었습니다. 그 모든 것은 모두가 열등감의 부산물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오는 결과는 사회 전체의 분위기를 흐트러뜨리고, 그러면서 개인의 심성에 자꾸만 찌꺼기가 가득해지는 것, 그 사이에서 떼돈을 벌려고 하던 사람들이 부지기수로 살림을 거덜내는 것, 어떻게 하다가 운때가 맞아서 떼돈을 버는 사람이 있기도 했지만, 그들 또한 엉뚱한 형태의 파산을 경험하지 않으면 안되는 쪽으로 결과가 나고 말았습니다.

 


밥은 하늘이어야 합니다. 밥은 그 자체로 곧 하늘이라는 생각은 우리 겨레에게 있어서 아주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살았던 나날이 반세기도 안 지났는데, 이제는 살이 너무 쪄서 보기 싫다고 하고, 살을 빼는 것이 소원이라는 사람들이 이만저만 많은 게 아닌 마당이 되고 말았습니다. 심지어는 남의 살을 빼 준다는 것만으로 떼돈을 버는 사람들까지 나오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길에 나서서 '여기 살을 빼 줄 터이니 모두 오시오' 하고 외치면 열에 예닐곱 사람은 그 자리에서 따라붙을 정도입니다. 살을 뺀다고 벼라별 짓을 다 한다는 소리를 듣고 어이가 없을 때도 한 두 번이 아닙니다.

 


살이 쪄 있다는 것은 어쨌든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긴 합니다. 그것은 등이 굽었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등이 반듯한 사람은 아무렇게 먹어도 살이 찌지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살이 쪘다는 것은 먹거리를 함부로 했다는 뜻도 됩니다. 종교인들이 그네들 절대자를 섬기는 것처럼 소중하게 밥을 모실 줄 아는 삶결이 여느 때보다도 아쉬운 시대입니다.

 


밥을 소중하게 여기는 마음,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밥 앞에 절을 하는 마음으로 밥을 먹을 수 있어야 합니다. 기독교인들이 밥을 앞에 놓고 비손을 드리는 것이나, 불교에서 밥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는 오관게는 그 정신을 받들어야 할 좋은 가르침입니다. 굳이 종교를 갖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밥 앞에서 고개를 숙여 먹비나리를 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밥을 먹을 만한 아무런 자격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끼니마다 수많은 목숨살이들을 죽여야 하는 것에 대한 죄스러움을 바탕에 두고 밥을 먹어야 옳습니다. 그렇게 먹는다면 결코 밥을 함부로 다루지 않을 것이고, 그런 사람은 누가 옆에서 살찌라고 빌어도 결코 군살이 붙을 일이 없을 것입니다. 이것은 먹거리 앞에서 스스로를 낮추는 일입니다. 그리고 먹거리 앞에서 머리를 꼿꼿이 들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밥이 하늘일 뿐 아니라, 밥이 곧 하느님이고, 밥이 곧 모든 것입니다.

 


그러므로 군살없이 살고 싶은 사람은 살을 빼기에 앞서 먼저 마음가짐을 낮추어야 합니다. 밥을 우러러 섬기는 마음, 그래서 밥 앞에서 늘 엄숙해지는 사람만이 살을 빼고 날씬하게 살 자격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렇지 않고 마음가짐은 그냥 둔 상태에서 병원에 가서 지방 흡입 시술을 받아서 살을 뺀다거나, 몸을 있는대로 괴롭혀서 살을 빼는 일, 또는 함부로 먹어놓고는 단지 살을 빼겠다고 밥을 굶는 것들은 모두 자신의 목숨에 대해 큰 죄를 짓는 행위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제 거기서 벗어나야 합니다. 밥을 섬기는 마음으로부터 시작해서, 자신의 삶을 소중하게 여기는 삶씨를 하루바삐 만들고, 거기서 밝고 건강한 삶이 나와야 합니다.

 


어떻습니까?
마음가짐이 되었다면 이제 몸의 군더더기인 살이 어떻게 해서 그렇게 붙게 되었는지를 알아보도록 합시다.
먼저 꼽을 수 있는 것은 밥을 빨리 먹는 버릇입니다. 밥은 그렇게 빨리 먹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소중하게, 그리고 조심스럽게 먹어야 합니다. 적어도 밥을 씹을 때 단 맛이 날 때까지는 씹어야 합니다. 그런데 단 맛은커녕 게걸스럽게 먹어대는 사람들이 거의 대부분입니다. 바빠서 그런다고 하지만, 그건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도대체 밥 먹기를 서두를 만큼 바쁜 일이 있다는 것이 말이 안 됩니다. 사람이 살면서 하는 일 가운데 으뜸이 숨을 쉬는 일, 버금이 밥을 먹는 일일 터인데, 그래서 충분히 즐기면서 밥을 먹어야 옳은 일인데 바빠서 그 밥을 허둥지둥 먹어야 한다면 그 삶은 이미 아무런 의미도 없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나는 바보입니다' 하는 것과 하나도 다를 것이 없습니다.
꼭꼭 씹어서 밥을 먹는다는 것은 내 것 아닌 것을 내 것으로 만드는 첫 번째 과정을 제대로 거치는 일입니다. 먹거리는 그 어느 것이든 우리 몸에 직접 들어오게 되면 큰 문제를 일으킬 수 있는 독입니다. 그 독을 내 것으로 만드는 과정이 먼저 먹을 수 있는 것을 고르는 과정, 그 다음에 그것을 먹을 수 있도록 조리하는 과정, 그리고 입안에서 충분히 씹는 과정들입니다. 씹는 일을 통해서 아주 잘게 부수어지고, 그렇게 부수어지면서 침과 잘 섞여 쉽게 소화시킬 수 있도록 하게 되어 있는 것이 먹거리와 몸의 바른 관계입니다. 그렇게 하도록 되어 있는 것이 몸의 구조이기도 합니다.

 


똥을 잘 못 누는 사람이 똥을 잘 못 누는 까닭은 두 가지가 있는데 그 첫째가 씹지 않고 대충 삼키는 탓입니다. 허겁지겁 제대로 씹지 않고 먹어대기 때문에 그 다음의 과정이 순조롭게 진행이 될 수 없는 것은 당연합니다. 첫 단추를 잘 끼워야 한다고 말은 잘 하면서도 이 가장 중요한 과정의 첫 단추를 제대로 채우지 않는 짓은 사람이 할 수 있는 도둑질 가운데 가장 바탕이 되는 도둑질입니다. 다른 도둑질은 잘만 하면 안 들킬 수도 있다고 하는데, 이 도둑질만은 절대로 안 들킬 수가 없습니다. 몸에서 그대로 반응이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몸은 정직합니다. 목숨이 정직한 것처럼 몸도 정직합니다. 혹시 하느님은 속일 수 있을지 모르지만, 몸은 속일 수가 없습니다. 이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꼭꼭 잘 씹어먹는다고 해서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변비를 두고 이야기를 한다면, 또 다른 까닭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그들이 걷기를 귀찮아한다는 점입니다. 꼭꼭 씹어먹으면서 걷기를 즐기면 큰창자와 막창자가 살아나게 되고, 머지 않아 변비 문제는 해결될 것입니다. 그것을 변비 약이나 먹으면서 해결하려고 해 봐야 일시적일 뿐이고, 만일에 해결이 된다면 다른 곳에서 다시 탈이 나게 될 것이 틀림없습니다.

 


얘기가 조금 빗나갔습니다. 살은 잘못된 먹새와 그릇된 몸꼴로부터 온 것인데, 그렇게 살이 쪘다는 것은 내장이 굳기 시작했다는 것과도 다르지 않습니다. 내장이 조금씩 두꺼워지면서 차츰 굳어가는 현상이 밖에서는 살이 찌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또한 내장의 상태가 그렇게 된다는 것은 몸의 균형과 조화도 깨어지기 시작한다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겉에 있는 살만 걱정할 일이 아니라, 속에 있는 내장의 상태를 먼저 걱정해야 합니다. 건강의 척도는 내장의 상태에 의해 결정됩니다. 내장이 부드러우면 몸도 마음도 부드럽고 느긋해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군더더기로 두꺼워지고, 그래서 굳은 내장을 풀어주는 장체조는 아주 필요하고 요긴한 운동입니다. 이제 그 장체조를 설명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반가부좌를 하고 앉습니다. 그 다음에 왼손으로 오른쪽 무릎을 잡고, 숨을 깊이 들이쉽니다. 들이쉰 숨을 길게 내쉬면서 윗몸을 왼쪽으로 주욱 밀어냅니다. 숨을 내쉴 때 아랫배가 쑤욱 들어가도록 깊이 내쉬어야 하고, 몸은 그냥 옆으로 기울어지지 않고 마치 브레이크 댄스를 출 때처럼 수평이동을 해야 합니다. 끝까지 밀고 갔으면 숨을 들이쉬면서 몸을 원위치로 가져오고, 손을 바꿔서 왼쪽 무릎을 잡습니다. 그리고 숨을 내쉬면서 몸을 오른쪽으로 밀어냅니다. 이렇게 왕복 열 번씩을 하면 됩니다. 아침과 저녁에 속이 비었을 때 이 운동을 하는데, 정확하게 한다면 처음부터 뱃살이 당기는 가벼운 통증이 느껴질 것이며, 며칠 지나지 않아 방귀가 잦고, 똥의 양이 많아질 것입니다. 그리고 한 달만 계속한다면 뚱뚱한 사람은 적어도 5킬로그램은 삶이 빠지는 것을 간단하게 경험할 수 있습니다.

 


살이 빠질 때는 처음에 얼굴부터 빠지는 것이 보통입니다. 배는 맨 나중에야 빠집니다. 그러나 장 체조를 하면서 살이 빠질 때는 뱃살이 먼저 빠집니다. 그것은 뱃속에 있는 더러운 군더더기가 직접 녹아내리면서 빠져나오기 때문입니다. 운동이나 다른 방법으로 살을 뺄 때에는 내장에 있는 군더더기보다는 먼저 지방을 태우면서 살이 빠지기 때문에 얼굴부터 빠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장의 군더더기를 직접 흔들어서 살을 뺄 때는 그 과정이 거꾸로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부작용이 없는 확실한 살빼기가 될 것입니다.
시작해 보십시오. 아주 놀라운 경험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마음의 군더더기와 삶의 군더더기를 털어내는 이야기는 이 뒤에서 계속해서 하게 될 것입니다.

 

그 셋, 장신구 버리기
뱃속에 있는 군더더기에 앞서서 얘기를 했어야 할 일인데, 그렇게 되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몸에 걸치고 있는 군더더기들을 버리는 일입니다. 장신구의 역사가 어떻게 되는지는 잘 모릅니다. 다만 그것이 사람을 노예로 만드는 굴레로부터 시작된 묘한 문화를 배경으로 한다는 것은 누구라도 쉽게 헤아릴 수 있습니다. 문화는 유행으로부터 비롯됩니다. 유행은 참으로 놀라운 힘을 지니고 있어서, 어떤 것이 유행이 될 때, 많은 사람들은 그 유행을 본능으로 부러워하게 하는 속성을 가집니다. 나팔바지가 유행할 때에는 아무도 몸에 꽉 끼는 맘보바지를 입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그저 한결같이 나팔바지를 입어야 괜찮게 보이는 것이 유행입니다. 그러다가 새로운 유행이 시작되면 나팔바지를 입는 것은 왠지 시대에 뒤떨어진 것으로 여겨지는, 그래서 흔히 말하기를 '촌스러운 차림새'라고 인식하게 하는 묘한 힘을 지니고 있습니다.

 


장신구도 그것이 노예생활로부터 시작되었지만, 일단 유행을 타면서부터 그것을 하지 않으면 사람 축에도 끼지 못할 것 같은 묘한 심리를 부추기는 힘을 지닙니다. 결혼을 할 때는 반드시 예물로서 가락지나 귀걸이 같은 장신구들을 해야 하고, 그래서 그것을 끼고 있지 않으면 결혼을 하지 않은 사람으로 보이게 하는 마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게 유행에 민감한 것을 가만히 살펴보면 속이 비어 있는 허허로움 탓입니다.

 


장신구 유행 가운데서도 위험한 유행이 있습니다. 전에는 소박한 유행으로 그저 금이나 보석 정도를 몸에 지니면 되었는데, 요즘은 아무 쇳덩어리나 그저 그럴 듯하게 생기기만 했으면 몸에 지닌다는 사실입니다. 종교와 상관없이 십자가 목걸이를 쇠붙이로 만들어서 걸고 다니는 사람들, 귀걸이와 팔찌, 그리고 심지어는 배꼽까지 뚫어가면서 장신구를 주렁주렁 매달고 다니는 것은 아무리 봐도 위험하기 짝이 없는 것입니다.
보석이라고 하더라도 위험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금이나, 은 또는 여러 가지 보석 종류는 몸에 이롭다고들 하지만, 그런 보석 종류를 지니고 있는 것이 몸에 맞지 않는 사람도 의외로 꽤 많이 있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금이 맞고, 어떤 사람에게는 은이 좋다는 식으로 건강 요법을 말하는 사람들도 있는 것 같은데, 그보다는 차라리 그냥 보석을 지니지 않으면 속 편하다는 것을 먼저 생각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보석은 그렇다 치고, 문제는 쇠붙이를 장신구로 걸고 다니는 일입니다. 쇠란 참 무서운 것입니다. 철기문화가 시작되고부터 인류 역사는 대량살상의 시대로 접어들게 되었다는 것을 먼저 헤아려야 할 것입니다. 쇠는 그 바탕이 다른 목숨들을 죽이는 힘을 지니고 있습니다. 지나친 논리의 비약일지 모르지만 예수가 금요일에 십자가에 달려 죽었다고 하는 것에도 이런 의미가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처럼 위험한 쇠를 몸에 걸치고 다니는 것은 늘 자신의 목숨을 죽일 수 있는 힘을 곁에 두고, 그래서 그 힘에 의해서 자신의 기운이 흐트러지게 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옛 어른들은 쇠가 무섭고 위험한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집을 지을 때도 될 수 있으면 쇠를 쓰지 않는 삶씨를 지니고 있었고, 집 안에서 쓰는 물건들 가운데 굳이 쇠가 아니면 안될 때에는 충분히 길을 들인 다음에야 비로소 도구로 사용하는 슬기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요즘 사람들은 쇠가 두려운 줄을 모릅니다. 그저 함부로 쇠를 다룹니다. 쇠를 함부로 다루는 곳에는 목숨을 함부로 여기는 문화가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쇠가 무서운 줄 모르는 사람들은 그 쇠를 장신구로 쓰는 데까지 치닫고 있는데, 일단은 모든 장신구들을 내려놓을 줄 아는, 장신구 비우기를 해야 합니다.

 


굳이 장신구를 하고 다니겠다는 사람들이 있다면 굳이 말리지는 않겠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명상을 할 때만이라도 몸에 있는 모든 쇠붙이를 내려놓을 수 있어야 합니다. 허리띠에 붙어 있는 쇠붙이, 팔목에 차고 있는 시계, 손가락에 끼고 있는 가락지나 팔목에 차고 있는 팔찌, 목걸이나 귀걸이 같은 모든 쇠붙이를 빼거나 벗어 놓아야 합니다. 평소에 입는 옷에도 될 수 있으면 쇠붙이를 적게 쓴 옷을 입는 것이 좋습니다. 그렇게 해서 될 수 있으면 불필요한 모든 것을 달고 다니지 않는 차림새를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장신구는 위험합니다. 특히 쇠로 된 장신구는 더욱 위험합니다. 그러니 모든 장신구를 내려놓는 것, 그것은 명상에 있어서는 마음의 자세로도 아주 필요한 것일 뿐만 아니라, 기운이라는 점에서도 매우 중요한 일이라는 점을 다시 한 번 강조합니다.

 

그 넷, 날숨으로 마음 군더더기 비워내기
우리에게는 '마음'이라는 것을 어찌 보면 참 쉽게 생각한다 싶은 경향이 있습니다. 흔히들 일편단심이라는 말을 잘 합니다. 변치 않는 마음을 지니고 살자고 다짐을 하거나, 약속도 잘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모두가 거짓말이고 속임수입니다. 마음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잘 몰라서 하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서양 사람들은 마음이 머리에서 나온다고 하는 것 같습니다. 머리에서 나온다면 일편단심이 가능할 것입니다. 그러나 마음은 머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오장육부로부터 나오는 것이 마음입니다. 간과 쓸개, 양쪽 허파, 염통과 밥통, 췌장과 쓸개, 십이지장과 지라, 큰창자와 작은창자, 그리고 콩팥과 방광이 움직이면서 그 상태에 따라서 마음이 다르게 나옵니다. 그 오장육부를 지형에 견줄 수 있습니다.

 


하늘이 있고, 땅과 뫼, 골짜기와 물이 있어서 그 곳에 부는 바람이 결정됩니다. 같은 곳인 것 같지만 땅이나 하늘이 살아있기 때문에 그곳이 똑같았던 일은 세상이 생겨나고부터 한 번도 없었습니다. 또한 거기 부는 바람도 똑같았던 일이 한 번도 없었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처럼 사람의 몸 상태도 늘 움직이면서 변화를 하고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그 몸에서 나오는 마음 또한 똑같은 일은 단 한 번도 없었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입니다. 그저 비슷한 생각은 있을 수 있겠는데, 그 비슷한 것도 스스로 짜 놓은 어떤 틀이 있을 때, 또는 교육이나 반복된 학습에 의해서 행동양식이 비슷할 때에만 같아 보이는 마음이 나오는 것일 뿐입니다.

 


마음이라는 말에 스스로 걸려 넘어지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면 삶이 한결 쉬워집니다. 누군가가 다가와서 평생 변치 않는 우정으로 살자고 하거나, 일편단심으로 사랑을 하겠다고 하면 그저 웃어넘길 수 있어야 합니다. 그건 그 때의 마음일 뿐이고, 그런 소리를 하는 것 자체가 그 말하는 사람의 깊지 못함을 드러내는 것일 뿐임을 알면 됩니다.

 


마음이라고 하는 것이 몸, 즉 내장의 상태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은 내장의 상태가 그 사람의 성격을 결정한다는 것을 볼 때 증명이 됩니다. 성격이 급한 사람은 대장과 심장에 상당히 문제가 있는 사람입니다. 늘 조바심을 치는 사람은 콩팥과 방광이 제 기능을 다하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게으른 사람은 밥통이 잘 상합니다. 속을 많이 끓여도 밥통은 탈이 나는데, 아무튼 이런 식으로 몸의 상태가 마음을 결정합니다. 또한 그 마음 씀의 정도를 두고 성격이나 인격이라고 하는 것을 모를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사람이 살면서 보고 들은 것, 배우고 느낀 것, 인간관계를 통해서 겪고 만난 것들은 우리의 기억 안에 무작위로 저장이 됩니다. 그것들은 모두 순수의식을 방해하고, 꿰뚫어보는 혜안을 가리는 장애물로 작용을 합니다. 더구나 이 기억이라는 것들은 정리하면서 저장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마음의 상태에 따라서 제 멋대로 튀어나오는 것도 사실입니다. 더 무서운 것은 그 기억들이 어떤 자극에 대해 반응하는 일에 매우 크게 작용을 한다는 사실입니다.

 


사람의 마음을 가만히 지켜보면 맨 위에는 온갖 잡념들로 뒤덮여 있습니다. 이 잡념은 그냥 보기만 흉한 것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대부분 사람의 행동을 결정짓는 심리충동은 모두 이 잡념층의 작용이라고 보면 틀림없습니다. 판단력이 좋은 사람이라면 그래도 이 충동이 곧바로 실수로 이어지지는 않을 터이지만, 많은 사람들이 이 잡념층의 작용 때문에 크고 작은 실수를 저지르곤 합니다. 말로 하는 실수에서 행동으로 드러나는 실수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실수는 사람을 믿지 못하게 하기도 합니다. 자기 자신도 스스로를 통제하지 못하게 되는 경우가 한 두 번이 아닙니다.

 


잡념층만 걷어낸다면 한결 사려깊은 말과 행동을 할 수 있게 됩니다. 이미 숨 이야기를 하면서 잡념을 내려놓는 방법을 말했습니다. 그런 식으로 생각들을 자꾸 내려놓다 보면 비로소 조금씩 자신이 맑아지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 때쯤 되면 떠오르는 생각이 조금 다른 차원의 것임도 알게 될 것입니다. 잡념이 아니라 거의 잠재의식에 가까운 것들이 떠오릅니다.

 


이런 생각과 기억들은 보다 깊은 층에서 사람의 행동과 말을 조절하는 역할을 합니다. 보통 한 해쯤 지나면 이 층에 다다르게 되는데, 사람에 따라서 조금씩 다를 수는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때가 되면 잡념층이 아주 없어진다는 말은 아닙니다.
잡념층이란 생활쓰레기장 같아서 비워도 계속해서 쓰레기가 생기는 것과 같다고 보면 됩니다. 다만 이 때쯤 되면 잡념층과 잠재의식의 층을 구분할 수 있게는 된다는 말입니다. 잠재의식의 층에 저장되어 있는 기억들은 그 동안 까마득히 잊고 있었던 것들, 또는 성격형성에 큰 영향을 준 일들입니다. 때로는 스스로의 기억 속에서 지워버리고 싶은 것들일 수도 있습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그게 전생의 것일 수도 있다고 하기도 합니다.

 


그렇게 깊은 잠재의식의 층에 저장되어 있던 것들이 떠오르게 되면, 그것들을 가만히 따라가면 됩니다. 불쾌했다거나 견딜 수 없는 경험이 되살아난다고 하더라도 거부해서는 안됩니다. 그저 가만히 들여다보기만 하면 됩니다. 그렇게 지켜보는 동안에 그 장면들이 뚜렷이 되살아나는 수도 있고, 그저 막연한 기억으로 회상되는 정도일 수도 있는데, 어떤 형태든지 그냥 지켜보기만 하면 됩니다. 주욱 나타나는 것만큼만 보아야 합니다. 거기서 다른 연상을 끌어내려고 하거나, 그 때의 상황들을 스스로 설명하려고 해서도 안됩니다. 그리고는 여기가 맨 끝이다 싶은 판단이 들거든 그 자리에서 칼로 무를 자르듯이 단호하게 딱 잘라버리면 됩니다. 이 작업이 끝나면 그 사건이나 경험은 더 이상 자신의 인격을 형성하는 요소에서 제거됩니다. 그런 경험의 지배를 통해서 다른 상황에서 자신이 자극에 반응하는 양식이 형성되었다는 것도 알게 될 것입니다.

 


이런 정리가 어느 정도 계속되고 나면 과거의 경험이나 사건들로부터 그만큼 해방될 수 있습니다. 거기서 그 동안 참으로 자유를 누리고 싶어하면서도 잡념과 고정관념, 그리고 편견과 독선이라는 겹겹의 굴레에 갇히고 매여 있던 자아가 해방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비로소 이 때부터 눈이 열려서 눈에 보이는 것들을 있는 그대로 보게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행복이라는 것은 무엇이든 존재하는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보는 데서부터 시작이 된다는 것도 또한 여기서 알게 되는 한 깨달음일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행복을 소유의 정도, 또는 누릴 것을 누리느냐 못 누리느냐, 아니면 다른 사람이 오르지 못한 곳에 오르는 것에서 찾으려고 합니다. 이런 것에서 찾는 행복은 한 순간의 즐거움으로 그칩니다. 오히려 그 순간이 지나면 허기와 갈증만 더 커집니다. 그러므로 파랑새를 쫓아다니면서 찢기고 할퀴던 찌루찌루와 미찌루의 방황을 끝내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리고 명상이야말로 무한소비문화에 홀려서 버둥대던 자리로부터 과감한 인식의 수정과 방향전환으로 가게 되는 아주 중요한 행복의 분기점이라는 것을 여기서 다시 한 번 강조해 두고자 합니다.
마음의 군더더기를 비워내는 일은 이렇게 중요합니다. 그리고 여기서부터 '사람다움'이라는 말이 무슨 뜻을 지니는지도 알게 됩니다. 그것은 마음을 비웠다는 것보다는 뒤죽박죽으로 뒤엉켜 있던 기억들을 정돈하는 작업이라고 하는 것이 옳기 때문입니다. 정돈된 마음으로 모든 보이는 것들을 있는 그대로 보는 일, 그것은 보는 이에게도 보이는 그 대상에게도 행복이 열리는 첫 번째 관문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 다섯, 흐트러진 기운의 위험함
모든 사람에게는 다 기운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물론 이것은 사람에게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지구에는 지구대로, 우주에는 우주대로 각각의 기운이 있습니다. 지구의 기운은 우주의 기운과 조화를 이루고 있습니다. 만일 지구의 기운이 우주의 기운을 거슬러 존재하려고 한다면 지구는 그 자리에서 그 생명이 끝나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었습니다.

 


'없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는 까닭이 있습니다. 과거에는 없었는데 이제 지구의 기운은 우주의 기운과 이루고 있던 조화의 균형이 깨지기 시작했다는 말입니다. 엘리뇨 현상이나 라니냐 현상이라고 하는 것, 또는 빙산의 녹아내림, 대기 중의 이산화탄소의 증가, 오존층의 파괴, 그리고 생태계 질서의 무너짐과 심각한 오염들은 모두 지구 기운의 흐트러짐이라는 현상으로 묶을 수 있습니다.

 


이 모든 재앙의 원인은 사람에게 있습니다. 사람들의 흐트러진 기운이 지구를 휩쓸어 덮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흐트러진 기운은 욕심과 무지로부터 나왔습니다. 사람들의 욕심을 채워주기 위해서, 그리고 그 욕심을 부추기는 일에 모든 투자를 아끼지 않는 현대문명이 낳은 결과입니다. 욕심을 부리는 것이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 당연한 인간의 본성이라고 꼬드기는, 그리고 얼마든지 채워 줄 터이니 걱정하지 말고 채우고 싶어 하라고 부추기는 사이 모든 인류의 정신이 병들고, 그 욕심 채우기의 결과로 지구가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엘리뇨나 라니냐는 지구가 앓고 있는 깊은 해소병이라고 보면 틀림이 없을 것입니다. 수많은 파괴와 오염은 지구가 앓고 있는 문둥병으로, 녹아내리는 빙산과 공기 중 이산화탄소의 증가는 지구의 고열병이고, 깨어진 오존층은 악성 탈모증으로 보입니다. 무차별 파괴되는 열대 원시림은 지구의 허파에 대책없는 구멍이 뚫리는 것으로밖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면서도 끝없이 파괴와 오염을 증가시켜가고 있는 이 현상의 끝이 어디인지는 불을 보듯이 뻔합니다.

 


21세기 인류 최대의 화두는 목숨입니다. 목숨살이에 대한 우러름의 윤리가 나오지 않는 한, 이 위기는 회복되지 못하고 파멸로 치달아 갈 것입니다. 인류는 그 동안 수없이 많은 흥망을 거듭하면서 여기까지 왔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자본의 논리라는 악의 화신으로 세계의 통합을 이루게 되었고, 그 결과는 핵무기보다 더 무서운 지구파멸을 향해 치닫는 것으로까지 이르렀습니다.

 


사람, 지구, 우주뿐 아니라, 모든 살아있는 것들은 다 제 기운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을 제외한 모든 목숨살이의 기운은 철저하게 우주의 기운 안에서 조화를 이루고 있습니다. 오직 사람만이 그 기운을 벗어나 있습니다. 지구 위에 사람만 없어진다면 지구는 이내 다시 기운을 회복할 것입니다. 이것은 인류가 스스로 이 우주의 기운 안으로 들어가 조화를 이룰 것인가, 아니면 모두가 함께 멸망하는 쪽으로 계속해서 나아갈 것이냐 하는 중대한 갈림길 앞에 서 있다는 것을 뜻하는 이야기입니다.

 


인류가 이렇게 제 기운을 잃게 된 원인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자연을 거슬러 사는 것이 편리이고 행복이라고 생각한 때문입니다. 모든 다른 동물들은 자연 안에서 그들의 삶을 꾸려왔습니다. 그러나 인류는 그들이 가지고 있는 머리를 써서 자꾸만 편리를 추구했습니다. 그러면서 천 년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은 집을 짓고 사는 거미를 비웃었습니다. 발전을 가능하게 하는 머리야말로 위대한 것이라고 하면서 자연과의 단절을 계속 추구해 왔습니다.

 


자연과 단절되는 것이 행복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도 자연으로부터 살아가는 데 필요한 자원을 얻어야 한다는 문제까지 스스로 해결할 수는 없었습니다. 자연과의 단절 안에서 자연으로부터 삶의 조건을 얻으려 한다는 것은 자연과 사람 사이의 공동운명체 관계가 깨어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하면 현재의 인간과 자연의 관계는 상생의 관계가 아니라 상극의 관계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어느 한 쪽이든 반드시 무너져야 할 극단의 관계가 된 것입니다.

 


여기서 사람이 취해야 할 태도는 분명해집니다. 기존의 가치관과 문화를 버리고 자연과의 조화를 회복하는 일입니다. 자연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이 행복이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깨닫지 않으면 안됩니다. 생활양식도 바탕부터 달라져야 합니다. 좀 더 더럽게, 좀 더 불편하게, 그리고 좀 더 느리게 살아가는 방식을 배워야 합니다. 배우는 것이라기보다는 회복하는 것이라고 하는 것이 옳습니다.

 


마음에 거슬리는 일이 하나 있어서 짚고 넘어가고자 합니다. 이름만 들었고, 그 이야기도 다른 사람에게 들은 것이기 때문에 확실한 것은 아닙니다. 소위 성공했다고 하는 목사님이라고 하는데, 그가 속도를 아주 즐긴다는 소문입니다. 소문이 사실이 아니기를 바라는데, 내 바램이 아무래도 틀린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것 때문에 적어도 그는 내게는 목사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그는 뭔가 속이 상한 일이 있으면 차들이 뜸한 새벽 시간에 경부고속도로로 차를 몰고 나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가속발판을 끝까지 밟은 채 순식간에 부산까지 갔다가 온다는 것이 그 소문의 내용입니다.

 


기름 한 방울 안 나는 나라에서 기름을 펑펑 쓴다는 것도 탐탁찮게 보이는 일이지만, 그의 행위가 바람직하게 느껴지지 않는 것은 그것 때문이 아닙니다. 피땀 흘려가며 번 돈 가운데서 얼마를 정성을 담아 하느님께 바친 사람들의 순수한 헌금을 그렇게 쓴다는 것도 곱지 않은 일이지만, 그것 때문도 아닙니다. 속도를 즐긴다는 일이 거슬리는 것입니다.

 


시속 4킬로에서 30킬로 정도가 사람에게는 안정감을 주는 속도입니다. 그보다 더 느리면 안정감은 더 커질 것입니다. 보다 큰 안정감은 움직이는 것보다는 정지해 있는 상태, 가장 큰 안정감은 가만히 정지해 있는 상태에서 마음 속에서 들고 일어나는 모든 것들까지를 다 가라앉힌 상태여야 합니다. 그런데 불안정한 마음을 달래겠다고 한적한 시간에 넓은 길로 자동차를 몰고 나가서 내달으면서 그 불안정한 상태를 해소했다고 느끼는 사람이라면, 그 이유 하나만으로도 그를 종교인으로 인정할 수가 없습니다.

 


목사님이 되었던, 스님이던, 또는 신부님이나 수녀님, 아니면 무당이던 종교 종사자들이라면 그들은 모두 구도자로써의 태도를 바탕에 지니고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구도자는 현실의 이익보다는 자신이 추구하는 종교의 진리를 찾아가는 것이 가장 큰 일입니다. 그 진리를 찾아서 길을 잃은 사람들에게 길을 찾아 주는 일, 그리하여 사람들이 잘 살도록 이끌어가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들의 내면은 언제나 빛으로 가득해야 하고, 어떤 혼란에도 흔들림이 없는 절대안정의 균형상태가 유지되어야 합니다.

 


속도에 대한 이야기만 했는데, 깨끗함을 좋아하는 것이나, 편리의 추구, 그리고 먹새가 흐트러진 것에 대해서도 할 말이 많지만, 이쯤에서 줄이겠습니다. 다시 흐트러진 기운 이야기로 돌아가면, 그렇게 속도를 즐기는 일은 기운이 극도로 흐트러져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시대의 문화흐름이기도 합니다. 속도로 그 기운 흐트러짐을 해소하려고 하는 것은 부질없는 노력입니다. 오히려 더욱 기운이 흐트러지고, 그 흐트러진 기운을 가진 사람이 하는 말이라면 그것이 설교든, 설법이든, 아니면 강론이든 제대로 된 익은 말이 나오기는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귀에 부드러운 그럴 듯한 소리를 많이 했다고 해서 그것이 좋은 설교나 설법, 또는 강론일 수는 없습니다. 눈을 홀리게 하는 어떤 현상을 보여주었다고 해서 그것이 좋은 종교적 행위일 수도 없습니다. 보다 중요한 것은 그 말이나 행위를 하는 사람의 기운이 어떤 상태에 있느냐 하는 점입니다.

 


기운이 흐트러지면 삶이 불안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흐트러진 기운의 극치는 정신질환입니다. 기형아의 출생도 흐트러진 기운의 결정체입니다. 태교 가운데 으뜸이 명상이라고 하는 것도 다 같은 까닭임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날마다 일어나는 크고 작은 사건과 사고 역시 기운이 흐트러진 결과입니다. 가지런하게 정돈된 기운으로 사는 사람은 사고가 나도 비켜가게 되고, 그런 자리에는 있지도 않게 됩니다.

 


언젠가 교통사고 현장에 가 본 일이 있습니다. 평소 가까이 지내는 사람은 아니었는데, 마음 속으로 존경하는 그런 초등학교 동기동창생이 교통사고를 낸 까닭이었습니다. 그는 아내 일로 마음을 많이 썼던 벗이었습니다. 버스 운전을 하는 그의 아내는 도박을 아주 즐겼다고 합니다. 도박을 하면서 애써서 마련했던 집도 팔아버렸고, 그래서 전세로 옮겼는데 전세 보증금도 다 날려버렸고, 그래서 사글세로 살다가 그것마저도 못 하게 되어 시골에 있는 집으로 들어가 거기서 출퇴근을 하던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 친구를 존경하게 된 것은 다른 까닭이었습니다. 그가 시골로 들어가 불편을 감수하면서 먼 길을 출퇴근하게 된 것은 아내의 도박 때문이었습니다. 그렇게라도 해서 아내를 도박의 굴레로부터 벗어나게 해 보고 싶었다는 것입니다. 시골로 들어간 그의 아내는 집에만 있는 것을 못 견뎌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여기 저기 삯일을 하러 다녔는데, 하루는 경운기를 타고 가다가 사고를 당했다는 겁니다. 다른 사람들은 다 멀쩡한데, 이 친구의 아내만은 목을 다쳐서 아예 식물인간이 되고 말았습니다.

 


친구의 늙은 어머니가 며느리 병수발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똥오줌을 받아내고, 미음을 끓여서 목으로 넘기는 일이 이만저만 고생이 아니었습니다. 그런 것을 보고 친구의 처가에서 찾아와서는 여러 모로 인사가 아니라고 하면서 딸을 데려가겠다고 했더랍니다. 그러자 친구가 하는 말이, '둘이 하나가 되겠다고 한 것은 조건이 좋을 때만 하나라는 것은 아니라'고 하면서 어쨌든 함께 살겠다고, 그냥 돌아가라고 했다는 이야기를 바람결에 들었습니다.

 


그 날부터 그 친구를 우러르는 마음으로 살았습니다. 그러던 그가 교통사고를 당했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그 현장을 가 보았습니다. 물론 모든 상황이 끝난 뒤였습니다. 가 보니 친구가 차를 달리다가 급제동을 해서 바퀴가 끌린 자국, 그리고 맞은 편에서 오던 차가 급히 서느라고 끌린 바퀴 자국과 함께, 페인트로 이리 저리 그려놓은 경찰들의 표시로 길이 어질러져 있었습니다. 그것을 가만히 지켜보던 내게 언뜻 보이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사고를 당한 두 사람의 기운이었습니다.

 


둘 다 흐트러진 기운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더 흐트러진 기운을 가지고 있었던 짐차 운전수는 현장에서 죽었고, 그보다는 덜 흐트러진 기운을 가지고 있던 친구는 작은 승용차를 타고 있었지만, 차만 못쓰게 되고 사람은 상처 하나 없이 멀쩡했습니다. 다만 사망사고를 냈기 때문에 경찰서에 수감되었습니다.

 


그걸 보면서 기운의 흐트러짐이 모든 사고의 원인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기운이 흐트러진 채로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도 알게 되었습니다. 또한 그 무렵에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의 기운이 그렇게 낡고 삭아서 형편없이 흐트러져 있다는 것도 보았습니다. 날마다 끊임없이 일어나는 사건과 사고들, 그래서 그런 사고와 사건들을 미리 예방한다고 이런 저런 조치를 한다고 해도, 이 흐트러진 기운을 바로잡지 않는 한 사고와 사건은 언제나 끊임없이 계속될 수밖에 없다는 것도 보았습니다.
흐트러진 기운을 정리하는 일, 그게 바로 명상입니다. 명상을 통해서 자연을 알고, 우주의 기운을 이해하며, 그 기운과 조화를 이루어 사는 것이 행복입니다. 이것을 알게 되는 것보다 더 큰 정보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명상은 단지 개인의 행복일 뿐만 아니라, 파멸로 가는 지구를 건질 수 있는 확실한 대안이기도 합니다. 좀 더 느리게, 불편함을 즐기기, 그리고 조금 더 더럽게 사는 삶이 결 고운 삶이라는 것, 이제 아시겠지요?

 

그 여섯, 걷기
편리를 추구해 온 현대인에게 있어서 매우 두드러진 발전 하나를 꼽는다면, 그것은 탈것의 발전일 것입니다. 먹거리가 풍부해진 것과 탈것의 발전은 현대인이 병을 앓게 되는 커다란 두 요인입니다. 불과 서른 해 전만 해도 우리에게는 보릿고개가 있었고, 이동수단은 걷는 것이 대부분이었습니다.

 


70년대에 내가 아는 어떤 노인은 아예 차를 못 타는 분이었습니다. 멀미를 어떻게나 심하게 하는지 한 번 차를 탔다가 몹시 고생을 하고는 다시는 차를 안 탄다고 했습니다. 그 때 많은 사람들이 그 노인을 보고 웃었습니다. 웬만하면 먼 나들이를 하지 않거나, 하게 된다면 아무리 먼 곳이라도 걸어서 다녀와야 하기 때문이었습니다.
노인 자신도 차를 타지 못한다는 것이 큰 병신이라고 하기도 했습니다. 남들 다 하는 서울 구경은 꿈도 꿀 수 없었고, 차를 타면 한 시간이면 갈 수 있는 길도 이 양반에게는 꼬박 하룻길이었으니 그럴 만도 했습니다. 친척의 결혼식에 간다고 새벽에 길을 나서서 휘적휘적 안개 자욱한 가을 길을 걷던 노인의 모습이 오늘따라 몹시도 그립습니다.

 


지금 우리는 발달한 탈것을 이용해서 엄청나게 많은 거리를 돌아다닙니다. 차를 모는 사람은 웬만하면 4년이면 지구를 한 바퀴 도는 거리를 돌아다닙니다. 운전을 직업으로 하는 사람은 여섯 달이이면 지구를 한 바퀴 도는 셈입니다. 이것은 전통사회에서는 하루 6킬로를 걷는다고 볼 때 꼬박 걷는다고 해도 약 20년을 걸어야 할 거리를 그렇게 쉽게 이동하는 것입니다.

 


서울 한 번만 갔다 와서도 몇 년씩 사랑방에 앉아서 얘기의 주도권을 잡던 세월은 이제는 전설 같은 시절이 되고 말았습니다. 웬만하면 누구나 전국 유명한 곳은 안 가본 곳이 없을 정도가 되었습니다. 명소라고 소문이 나기만 하면 그렇게 미친 듯이 몰려다니는 사람들 때문에 서너 해도 못 가서 쓰레기 더미가 되고 맙니다. 그렇게 온 나라를 뒤집어 놓더니 급기야 해외여행까지 눈을 돌리고, 남의 나라에 가서 추태를 부리며 나라 망신을 시킨다는 소리도 곳곳에서 들립니다.

 


태국에 갔을 때의 일입니다. 우리보다 생활수준이 떨어진다고 알고 있는 그 나라 사람들의 삶씨를 가만히 살피면서, 돈살림으로는 우리보다 떨어졌는지는 모르지만, 삶씨를 엮어내는 수준은 우리보다 훨씬 깊고 넓다는 것을 보면서 많은 것들을 배우고 반성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태국 여행을 하는 동안 수없이 많은 한국사람들을 곳곳에서 만날 수 있었던 것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얼마나 해외여행을 즐기는지를 알 수 있는 하나의 척도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미니시암이라는 데엘 갔습니다. 세계의 문화유적이라고 하는 것을 20분의 1로 줄여 놓았다고 하던가 하는, 그래서 그야말로 없는 것이 없다고 할 수 있는 그런 관광명소였습니다. 그것을 둘러보고 나오는 길에 뒷간에 볼일이 생겨서 들렀습니다. 그리고는 거기서 얼굴이 붉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뒷간 벽에 종이쪽지가 하나 붙어 있었는데, 틀림없는 한국 글씨로 씌어 있는 것은 "변기에 담배꽁초나 오물을 버리지 마세요" 라는 말이었습니다. 부끄러웠습니다.

 


세월 좋아졌다고, 그래서 온 나라를 다 쓰레기장으로 만들고, 해외에까지 나가서 부끄러운 짓을 가지가지로 벌이고 있는, 콧노래를 부르며 그렇게 즐기는 이 마당에 그 차멀미 노인이 그리워지는 것은 그 노인이야말로 생명감수성이 뛰어난, 그야말로 '살아있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몸으로 보여 준 어른이었다는 까닭입니다. 편리를 몸으로 거부한 사람, 기계를 타고 움직이는 것은 생명이라는 점에서 볼 때는 바람직하지 안다고 하면서, 그것을 의지나 헤아림이 아니라 몸으로 느낄 수 있었던 그야말로 깨어있는 사람이었다는 마음이 드는 겁니다.

 


자동차가 1960년대의 고무신보다 더 흔해진 세상, 그래서 어중이 떠중이가 다 차를 몰고 나와서 말도 안 되는 짓을 하는 세상, 행정까지도 사람보다는 차를 우선시하는 말도 안 되는 자동차 세상이 돼버리고 말았습니다. 그 자동차는 이제 무엇보다도 요긴한 생활의 필수품이 되어 그것 없이는 못 산다고 할 정도까지 되었습니다.

 


그러면서도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동차를 몰면서 갖춰야 할 예의를 갖추지 않습니다. 아니, 아예 예의를 모르는 사람들도 엄청나게 많습니다. 그것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차가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그냥 차를 몰고 다니기 때문입니다. 겨우 바퀴를 굴리는 것만 배워가지고 운전이랍시고 합니다. 운전면허 시험문제의 그 어느 곳에도 운전예절이라는 것이 보이지 않습니다.

 


기계의 편리와 함께 그 편리보다 더 큰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 차를 탔다고 해서 그 차를 모는 사람이 차가 된 것이 아니라, 틀림없이 사람이라는 것, 길에 나가면 차가 우선이 아니라 사람이 먼저라는 것들을 가르치는 운전교육이 없습니다.
길이라는 것도 모두 그렇게 생겨 먹었습니다. 사람은 차 때문에 길을 내 주고 돌아가거나, 오르내리기를 해야 합니다. 그러나 차는 그냥 지나가게 되어 있습니다. 육교나 지하도가 바로 그것입니다. 사람이 먼저라면 육교나 지하도는 차가 오르내리고, 사람은 그냥 지나가야 옳습니다. 그렇게만 한다면 사람이 살기 훨씬 좋아질 것이고, 불필요한 교통신호등을 절반 이하로 줄일 수 있을 것이며, 신호대기로 버리는 기름과 시간을 그만큼 절약할 수 있습니다.

 


걷는 얘기를 한다고 하면서 차 이야기를 너무 많이 했습니다. 차 때문에 걷기를 너무 안 하기 때문에 그랬던 것 같습니다. 그 수많은 탈것 때문에 사람들의 발은 거의 장식품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탈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얼른 눈에 띄는 것은 대기오염인데, 사람들의 아랫도리가 자꾸만 부실해지는 것도 쉽게 눈에 띄지 않지만 대기오염 못지 않은 현상입니다.

 


그러다 보니 기운은 자꾸만 위로 치솟고, 툭하면 열을 내고, 아무 것도 아닌 일로도 목숨을 거는 사람들까지 나옵니다. 모두가 걷기가 모자라서 생긴 현상이라고 몰아부칠 수만은 없지만, 걷지 않음이 큰 까닭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이제 발이 제 구실을 하게 해야 합니다. 걷되 천천히 걸어봐야 합니다. 적어도 하루에 이십리는 걸어야 되는데, 이십리는 고사하고 천 발짝도 못 걷는 것이 현실입니다. 걷는 일이 많아지는 것만큼 삶에 새로운 힘이 생기게 됩니다. 거기서 얻는 기쁨으로 그 동안 우리가 무엇을 잊고 살았는지를 보게 될 것입니다.

 


걷는 것도 될 수 있으면 바닥이 얇은 신을 신고 걸을 수 있어야 합니다. 맨발로 흙을 밟는 것은 더욱 좋은 일입니다. 흙이 별로 없으니 가까운 학교 운동장에 가서 신발을 벗어놓고 천천히 걸어보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일삼아 걷는 것은 연습이고, 적어도 시내버스 세 정거장 정도는 걷는 버릇을 들이도록 해야 합니다. 그 정도의 거리는 조금 빠른 걸음이라면 약 15분 거리밖에 안 되는데, 그 거리를 걸을 엄두를 못 내는 것이 오늘을 사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걷기를 두려워하는 이 마당은 우리에게서 많은 것을 빼앗아 갔습니다. 수많은 목숨이 탈것에 치어 죽어갔고, 우리나라 장애인의 절반은 교통사고 후유증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닙니다. 탈것은 꼭 필요할 때에만 이용하되, 자동차문화와 자동차예절이 살아나야 합니다. 그래서 차를 탈 만한 자격을 갖춘 사람이 차를 몬다는 말이 나와야 합니다. 그보다는 많이 걷기가 전 국민에게 하나의 운동으로 살아나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훨씬 건강한 삶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걷기, 그것은 살아있음을 느끼는 또 다른 방법입니다. 걸으면서 찾을 수 있는 것은 굉장히 많습니다. 특히 그 가운데서도 명상을 하면서 걷는 명상걷기가 있습니다. 여기서 명상걷기에 대해서 이야기해 보고자 합니다.
명상걷기는 웬만한 곳이면 조그만 공간만 있어도 가능합니다. 먼저 일반 명상을 할 때처럼 눈길을 툭 떨어뜨려 콧등에 내려놓습니다. 눈길을 이렇게 떨어뜨림으로서 이제까지 '본다'고 한 것이 얼마나 한정된 것이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본다'고 하던 것은 사실은 자신이 본다고 느낀 것을 제외한 모든 볼 수 있는 것을 못 본다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보겠다는 마음 자체를 내려놓음으로서 비로소 '본다'는 것의 참 뜻을 알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 다음에는 어깨를 툭 떨어뜨려 힘을 완전히 뺍니다. 목은 곧게 세우고, 팔 역시 자연스레 내려놓은 상태에서 걸음을 시작합니다. 왼발을 쳐들면서 '내가 왼발을 쳐들고 있다'고 의식합니다. 천천히 왼 발을 앞으로 내밀면서 '왼발이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의식합니다. 마음 속으로 그렇게 말을 해도 좋습니다. 발을 디딜 때 '내 왼발이 지금 땅에 닿고 있으며, 그 무게를 땅이 받아주고 있다'고 의식합니다.
그 다음에는 오른발을 들어 옮깁니다. 천천히 걸으면서 온 마음을 발의 들고 내디디고, 다시 다른 발을 들고 내디디는 것에만 집중합니다. 방향을 바꿀 때는 방향을 바꾸는 것을 의식하면서 걸음을 떼어 놓습니다.

 


그렇게 명상걷기를 하는데, 이것은 굳이 어느 때라고 할 것 없이 틈이 날 때마다 해 보면 됩니다. 앉아서 하는 명상을 하기 전에 명상걷기로 준비를 하는 것도 아주 좋습니다. 이런 명상걷기를 하면서 또 다른 살아있음의 즐거움을 느낄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이 명상의 시간이 늘어감에 따라서 삶이 얼마나 기쁨과 즐거움으로 가득한 것인지도 알게 될 것입니다.

 


또한 그 동안 얼마나 그릇된 삶씨에 얽매어 자신을 낭비했는지도 보게 될 것입니다. 명상은 반생명문화로부터 생명의 문화로 나아가는 부수입을 얻게 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명상을 하게 되면서 얻게 되는 깨달음은 생명의 본질에 대한 것이 그 중심을 이루게 됩니다.
그 생명은 자연의 흐름과 언제나 그 흐름을 일치시키려는 경향을 지니고 있습니다. 자연의 흐림이 곧 우주의 기운입니다. 기독교식으로 말한다면 이것이 곧 하느님의 뜻이고, 하느님의 숨결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맨 끝자락에 있는 기쁨이 바로 이 자연의 흐름과 완전한 일치를 이루는 자리라는 점에서, 그 자리가 곧 불교에서 말하는 극락이나 해탈의 자리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일곱, 나쁜 버릇 버리기
우리가 살면서 배운 것 가운데 가장 큰 것으로 꼽을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나쁜 짓을 하면 안된다'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 말 바로 뒤에는 '착한 일을 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것만 바로 지켜진다면 이 세상은 곧바로 천국이나 극락이 될 것입니다. 영어로는 그에 비슷한 말이 있는데 '유토피아'라고 합니다.

 


영어를 몹시 못마땅해 하는 내가 '유토피아'라는 말을 한 데에는 까닭이 있습니다. '유토피아'의 바탕뜻이 재미있기 때문입니다. '실재로 존재하지 않는 세계'라는 것이 그 속뜻이라고 하는데, 그걸 모를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것은 나쁜 짓은 안 하고 좋은 일만 하면 된다는 간단한 원칙만 지켜지면 되는데도 그게 안 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으로 읽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면 안되는 짓을 뻔히 알면서도 하는 까닭,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을 하지 않는 까닭을 알아야 한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실제로 이 일은 처음부터 불가능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나쁜 짓을 하지 않고는 한 시도 살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그게 바로 생명의 속성입니다.
잠에서 깨어 먼저 하게 되는 것은 아침을 준비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그 아침을 먹는다는 일 자체가 누군가를 죽이는 일과 곧바로 맞닿아 있습니다. 목숨살이라는 자리에서 볼 때, 사람의 목숨과 벼나 콩의 목숨이 다르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사람 하나가 한 끼를 해결하기 위해서 수천의 쌀이나 콩을 희생시킬 아무런 자격이나 근거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아무 거리낌없이 그것들을 죽여서 한 끼 배를 채웁니다.
이 때 적어도 죄송하다는 마음이라도 가질 수 있어야 하는데, 아무렇지도 않게 먹는 일부터가 나쁜 짓입니다. 그렇게까지 헤아린다면 어떻게 살아갈 수 있겠느냐고 하면서, 그것만은 그냥 넘어가자고 할 사람이 많을 줄로 압니다.

 


안 될 일입니다. 사소한 악을 방치하는 데서부터 인류파멸의 씨앗이 된다는 것, 오늘 서울에서의 나비 날개짓이 내일 남태평양의 거센 폭풍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실제로 우리가 '하라, 하지 마라'를 배울 때도 사소한 잘못부터 뿌리를 뽑지 않으면 안된다고 배웠습니다. 그렇다면 먹거리를 섭취하면서도 죄가 되지 않는 길을 찾는 것이 가장 먼저 해결해야 할 숙제일 것입니다.
그 문제는 숙제로 남겨두고 다음 이야기로 넘어가겠습니다. 나쁜 짓을 하면 안된다고 하는데, 여기서 중요한 문제는 그럼 '무엇이 나쁜 짓이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문제에 답하기 위해서 이러이러한 짓은 나쁜 짓이라고 목록을 만든 것이 윤리이고, 도덕이며, 법이나 제도 같은 장치들입니다.

 


세상이 복잡해지다 보니 그런 장치들도 오히려 그 자체가 악인 경우까지 생겼습니다. 그리고 장치들에서는 하면 안된다고 한 일 가운데서도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다는 것을 한 두 번씩 경험하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극단적인 예를 든다면, 지금 횡단보도 신호등은 빨간 불입니다. 그런데 길 건너에 한 아이가 쓰러져 피를 흘리고 있습니다. 그러면 마땅히 빨간 불을 무시하고 달려 건너가서 아이를 일으켜 응급처치를 하고 병원으로 데리고 가야 옳습니다. 그렇다고 법이 이 사람에게 교통위반 범칙금을 물렸다고 하면 그 법은 악입니다.

 


그런데 상황이 달라져서 역시 빨간 불인데 만원짜리 지폐 묶음 한 다발이 길 건너편에 떨어져 있습니다. 그 때는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이 때 역시 사람들은 거의가 길을 건너갈 것입니다. 그러나 이때 길을 건너는 것은 그릇된 행위일 것입니다.
법이나 제도, 또는 윤리나 도덕이라고 하는 것이 딱 못박혀져서는 안된다는 말입니다. 모든 것은 척도는 그 행위의 결과가 목숨살이 전체를 두고 볼 때 옳은 일이냐 아니냐에 따라 판가름이 난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만, 간단히 말해서 나쁜 짓은 자기 욕심에 이끌려 그 욕심이 판단의 기준이 되어 행한 짓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도 단 한 번이라면 그냥 보아넘길 수 있다는 것이 우리 사회에 널리 통용되는 일입니다. 법에서도 초범에게는 너그럽습니다. 문제는 습관이 된 나쁜 짓입니다. 나쁜 짓이 버릇이 되면 몹시 위험합니다. 그것을 버리지 않으면 사람됨이 못쓰게 됩니다. 굳이 다른 사람에게 피해가 가는 것까지는 따질 일이 아닙니다. 그 습관된 버릇을 가진 것 자체로 그 사람은 이미 사람의 묶음에 넣기가 곤란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유토피아라는 낱말이 다시 떠오르는 것은 이렇게 버릇이 된 나쁜 짓을 거듭하면서도 아무렇지도 않게 사는 삶이 너무나 많다는 점입니다.
그러면 이제 내게 있는 좋지 못한 어떤 버릇이 있는지를 찾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어떤 버릇들이 있는지는 각자가 찾아볼 일이고, 그 버릇을 고치는 이야기를 해 보겠습니다.

 


어떤 버릇이 있다면 먼저 명상의 시간에 그 버릇을 가만히 생각해 보면 됩니다. 언제 그런 짓을 했는데, 왜 그렇게 했어야 했는지, 그리고 그 결과는 어떠했는지를 살펴보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맨 처음 그런 버릇이 생긴 자리까지 찾아내면 됩니다. 한 해 정도 명상을 한 사람이라면 자기 버릇의 첫 번째 자리를 찾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한 해도 되기 전에 이런 버릇을 고치겠다고 덤비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버릇의 뿌리를 발견하거든 그 자리에서 단호하게 칼로 무를 자르듯이 잘라버려야 합니다. 그래도 다음 번에 자리가 생기면 어쩔 수없이 다시 이끌리는 실수를 반드시 하게 될 것입니다. 그 때 스스로 '아, 내가 이 짓을 하고 있구나' 하고 느끼면 됩니다. 느끼면서 하도록 하십시오. 그러다 보면 그것이 시들해지기 시작할 것이고, 머지 않아 깨끗이 버리게 될 것입니다.
깨끗이 버렸다는 것은 다시는 안 한다는 것과는 다른 뜻입니다. 거기 얽매인 자신을 풀어내기만 하면 된다는 말입니다. 목숨이란 그 무엇에도 얽매일 수 없다는 것만을 짚어두고 다음 이야기로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모든 목숨이 자유입니다. 그것을 구속하거나 방해하는 모든 행위는 다 악입니다. 그리고 그 악이 습관화되는 것, 이것은 몹시 위험한 일입니다.

 

넷째마당. 느끼기
그 하나, 숨 느끼기
어디서부터인가 사람은 제게 쓸모없는 것들을 귀하게 여기기 시작했습니다. 인류사회의 위기가 시작된 것은 아마도 황금을 귀하게 여기기 시작한 그 때부터가 아닐까 싶습니다. 가장 확실한 금전가치의 척도가 금이라는 사실은 금이 얼마나 현대사회에 있어서 중요하게 여겨지는지를 알 수 있게 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성서는 인류가 최초로 만든 우상이 금으로 만든 송아지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황금이 인간을 하느님과 멀어지게 하는 자강 큰 요소라고 해석할 수 있는 여지를 가지고 있는 이야기입니다. 더군다나 요즘처럼 돈이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고 여기는 세상에서는 더욱 절실한 의미를 지닌 말로 받아들여집니다. 황금 안에 마성(魔性)이 있다고 한 것은 옛날 이야기입니다. 이미 황금은 사람을 노예로 부리고 있습니다.

 


사람이 단순한 금속의 하나일 뿐인 황금의 노예가 되었다는 사실, 이것은 말로는 쉽지만, 실제로 그 노예상황에서 벗어나는 일은 그리 간단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매우 큰 비극이면서도 그 비극으로부터 선뜻 벗어나려고 하지 않는, 그리고 그 황금의 노예가 된 것이 얼마나 사람을 비참하게 하는지를 사람들은 보려고 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오직 황금이 주는 유익에 대해서만 눈길을 돌리려고 합니다.

 


그런데 금이야말로 사람이 살아가는 데에는 아무 짝에도 쓸데없는 것입니다. 그걸 걸고 다니면서 스스로 그럴듯해 보인다고들 느끼는지 모르지만, 목걸이로 걸고 있는 사람을 보면 아찔한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목이 돈이라는 이름의 사슬에 걸린 모습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팔찌 또한 그런 뜻으로 본다면 가락지는 애교로 봐 줄 수도 있을 정도이지만, 그 가락지가 상징하는 의미 또한 가볍게 보아넘길 수만은 없습니다.
금과 함께 보석으로 쓰이는 모든 것들은 사람이 살아가는 데 아무런 보탬이 안 됩니다. 유일하게 금강석만은 강한 물질을 자르는 데 쓸 수 있다고 하지만, 그 또한 그런 쓰임새로는 쓰이지 않으니 결국은 모든 보석은 사람이 살아가는 일에는 아무 짝에도 쓸데없다고 해도 괜찮을 것입니다.

 


보석을 귀하게 여기면서부터 사람들은 제게서 참으로 쓸모있는 것들을 우습게 여기기 시작했습니다. 쌀을 위해서 보석을 내놓는 게 아니라, 보석을 위해서 쌀을 내놓게 되었습니다. 입으려고 옷을 만드는 게 아니라, 입성을 만들어서 돈을 만들겠다고 옷을 짓습니다. 삶의 우선순위가 뒤바뀐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이렇게 쌀과 옷, 또는 집을 돈을 위해서 만들고 짓다가, 자신의 인격까지도 돈을 위해서 팽개치는 일이 어디서나 일어나게까지 되었고, 마침내 그것은 돈을 위해서 때로 목숨까지 내던지는 웃지 못할 어리석은 짓들까지 보게 되었습니다. 그냥 단순히 구경거리다 하고 보면 재미도 있을 것인데, 아무래도 그것이 남의 일 같지만은 않아서 사뭇 가슴이 저리고 아파오는 것입니다.

 


거기서부터 사람들의 삶이 흐트러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삶이 흐트러진 것과 얼이 흐트러진 것이 같은 말일 수 있다면 '보석이 사람의 눈을 흐리게 한다'는 것도 같은 뜻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삶결에서 밥이 그 가치를 잃게 되었고, 그러면서 밥을 가능하게 하던 하늘과 땅을 아예 염두에 두지도 않는 삶씨가 나왔습니다.

 


땅과 하늘을 염두에 두지도 않는 시대의 종교는 또한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기도 합니다. 하늘이 어질러지고 땅이 더럽혀진 마당에서 종교의 세 불리기는 그저 철부지 장난으로만 보입니다. 마치 큰 장마로 물이 불어나 마을이 휩쓸리고 재산이 떠내려가고, 심지어는 목숨까지 결단이 나는 데에도 한 쪽에서는 그 불어난 물에 신이 나서 올라오는 물고기를 잡기에 여념이 없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종교의 역할이 무엇이고 구도자의 길 찾기는 또 무슨 의미를 지니는지를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할 때입니다. 어느 종교는 옳고 어느 종교는 그르다는 소리를 하는 이들이 종종 있는데, 이 또한 그저 주정뱅이의 낮술 취해서 웅얼거리는 소리처럼만 들릴 뿐입니다. 부끄러운 줄을 알아야 하는데, 눈을 감고서는 그 감은 눈에 보이는 희미한 영상 같은 것을 쫓아가는 짓은 이제 제발 그만두어야 합니다.

 


사람에게 가장 요긴한 것이 무엇인지를 되찾아야 합니다. 그 우선순위는 보석보다는 옷이나 집, 옷이나 집보다는 밥, 밥보다는 물, 그리고 물보다는 숨입니다. 우리 목숨이 살아가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두 요소가 있다면 그것은 몸과 숨입니다. 그 목숨을 감싸고 있는 것이 바로 땅과 하늘입니다.
금을 보면 즐겁습니까?
돈을 쌓아놓으면 행복합니까?
그러나 나는 돈 때문에 행복한 사람보다는 돈 때문에 불행한 사람을 훨씬 더 많이 보았습니다. 돈이 너무 많아서 탈이 난 사람, 돈이 없어서 불행한 사람, 돈을 벌려고 하다가 사람 못쓰게 된 사람, 이 모두가 돈 때문에 불행해진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모두가 돈의 노예이던가, 돈의 폭력에 희생된 사람들이던가, 둘 가운데 하나이거나, 아니면 둘 다이거나 그렇습니다.

 


그러나 밥이나 옷은 거의 우리를 행복하게 합니다. 그것을 함부로 하다가 벌을 받는 경우, 또는 오직 돈벌이의 수단으로만 밥이나 옷을 만들다가 화를 입을 경우가 아니면 말입니다. 그러나 그것 말고도 밥이나 옷으로 화를 입는 일이 또 있기는 합니다. 쉬어갈 겸 들은 이야기 하나 하고 넘어가겠습니다.

 


그리 멀지 않은 지난 어느 날, 한 시골 잔치집에서 있었던 일이라고 합니다. 먹을 것이 귀한 한 가난한 사람이 쌀도 아낄 겸, 한 사흘을 굶었습니다. 잔치 날이 되면 얼마든지 걱정없이 먹을 수 있다는 계산을 했던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는 드디어 잔칫날, 이 사람은 느긋하게 앉아 그야말로 배가 찢어지도록 먹었습니다. 그래야 또 한 이틀을 잘 넘길 수 있다고 헤아린 까닭도 있었겠지만, 사흘 굶어 담 안 넘는 놈 없다고, 담도 넘을 필요없이 그냥 먹을 수 있는데 왜 안 그러겠습니까?

 


실컷 먹고는 일어나려고 하는데, 너무 먹은 탓에 몸이 말을 안 들더랍니다. 그래서 마당에 나 있는 풀포기를 잡고 힘을 써 보는데, 겨우 일어나려고 하는데 풀이 쑥 뽑히고는 그냥 주저앉더라는 겁니다. 다시 다른 풀을 잡고 일어나려다가 이번에는 풀이 뚝 끊겨서 엉덩방아, 이렇게 끊고 뽑으며 몇 번 주저앉던 이 사람이 드디어 일어서기를 포기하고는 한 마디를 쏟아놓았더라는 겁니다.
"아이고, 배고픈 놈들은 무슨 복이람!"
그렇습니다. 이제는 배부른 것보다는 배고픈 것이 복이 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만큼 먹거리가 흔해진 겁니다. 흔해진 만큼 먹거리를 함부로 다루기도 합니다.
옛날의 병은 거의가 먹지 못해서 생긴 것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병이라고 하는 게 거의가 너무 먹어서 생긴 것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같은 암이라고 하더라도 옛날의 암을 다스리는 처방과 요즘의 암을 다스리는 처방이 달라야 합니다. 굳이 암뿐 아니라 모든 질병이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자꾸만 먹어댑니다. 그러다가 병이 생기는데, 그 병이 생겼을 때는 일단은 뱃속을 비워주어야 합니다. 조금 뱃속이 더부룩하고 몸이 찌뿌등하다 싶으면 먼저 속을 비워보는 것이 좋습니다. 생명감각이 웬만큼만 살아있다면 왜 병이 났는지, 어떻게 하면 낫겠는지를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입성 때문에도 탈이 나는 수가 있습니다. 여름에 너무 덥게 입는다든지, 겨울에 너무 춥게 입는다든지 하는 것도 탈의 한 원인일 수 있습니다. 몹시 위험한 것이 그놈의 배꼽티라는 옷입니다. 세상에 유행도 어디서 그리도 왼못된 유행이 생겼는지 모르겠습니다. 겨울에도 배꼽을 내놓고 다니다니 정말 아찔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아랫도리는 언제나 배꼽 위까지 올려 입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배꼽 언저리에 허리띠를 단단히 여며 매야 됩니다. 배꼽은 그냥 어머니와 내가 이어졌던 흔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배꼽은 사람이 이 땅에 태어나서 최초로 입게 된 상처입니다. 그 상처는 사람의 상처경험의 원형이라는 의미도 있지만, 사람의 목숨이 시작되는 자리이고, 모든 기운에 아주 민감한 부분입니다. 그러므로 여름이나 겨울이나 반드시 배꼽을 가리고 살아야 합니다.
옛어른들은 아이들을 기를 때, 잠 든 아이들이 이불을 차내면 자다가도 일어나서 이불을 덮어주었습니다. 여름이거나 겨울이거나 아이들이 이불을 차내는 것처럼 위험한 일이 없다고 헤아린 것입니다. 잠이 든 새에 아이가 배꼽을 내놓는 것까지도 그렇게 꺼리던 삶의 숨결을 우리는 오늘 되새겨 보아야 합니다.

 


냉난방이 잘 되는 요즘에는 한 겨울에도 맨다리와 팔뚝을 내놓고 다니는 사람을 흔히 볼 수 있습니다. 따뜻한 곳에 있다가 잠시 그냥 다녀도 괜찮다고 여기는 까닭입니다. 그러나 살갗이 추위를 못 느꼈다고 하더라도 냉기는 뼛속을 파고든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옷을 입되 될 수 있으면 합성섬유를 입는 것이 좋고, 몸을 죄는 옷보다는 헐렁하여 통풍이 잘 되는 옷이 바람직합니다.

 


아주 못된 옷이 있습니다. 그것은 여성들이 흔히 몸매를 돋보이게 한다고 하면서 입는 거들이라고 하는 옷입니다. 이 옷으로 몸을 조여 놓고 그 답답함을 어떻게 견디는지 참 알다가도 모를 일입니다. 본디 살이 쪄서 쳐지는 배를 안 쳐진 것처럼 보이게 한다는 것이 무슨 뜻이 있다는 건지 아무리 생각해도 모를 일이지만, 그런 심리를 부추겨서 돈벌이를 하는 사람들도 곱게만 볼 수는 없습니다.
돈이나 밥, 또는 옷까지도 이렇게 탈이 날 수 있는 여지가 있다는 점에서 잘못 다루면 불행의 원인이 됩니다. 그것은 물을 마시는 것에서도 그렇습니다. 물은 다른 것에 비해서는 좀 덜하지만, 그렇다고 아무렇게나 갑자기 많은 물을 벌컥벌컥 마시는 것도 그리 좋지는 않습니다. 덥고 목이 탄다고 얼음물을 갑작스럽게 마셔대는 일은 더욱 위험한 일입니다. 물을 씹어먹던 옛사람들의 슬기가 무엇인지를 헤아려 보아야 할 때입니다.

 


다른 모든 것들에 비해서 숨을 쉬는 일에는 탈이 없습니다. 결국 숨이 가장 값진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렇게 숨이 값진데도 다들 숨은 저절로 쉬는 것이라고만 생각합니다. 숨먹거리인 공기가 이 땅을 살아가는 모든 목숨살이들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합니다. 금강석이나 진주, 금덩어리 따위는 아무렇게 되더라도 상관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보석을 얻기 위해서는 안달을 하고, 보석을 잃으면 속이 상하다고 하지만, 공기가 더럽혀지는 것으로는 아무도 슬퍼하거나 안타까워하지 않습니다.

 


앞이야기가 너무 길어졌습니다. 이제 숨을 느끼는 이야기를 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사람이 살면서 느낄 수 있는 가장 바탕이 되는 쾌감이 바로 이 숨을 느끼는 것에서부터 나온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숨에서 기쁨을 얻지 못하는 사람은 다른 기쁨도 제대로 느낄 수 없음은 물론입니다. 따라서 숨 느끼기라는 이 일은 기쁨을 기쁨으로 느끼게 하는 데에도 아주 중요한 일입니다.
숨을 쉬는 요령에 대해서는 이미 앞에서 설명을 했으니, 그 다음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처음 숨을 의식하면서 쉬던 때는 달리기를 하고 났을 때일 것입니다. 그밖에는 이제까지 달리 숨을 느껴본 적이 없을 줄로 압니다. 그러나 명상호흡에서는 어쩔 수없이 의식하면서 숨을 쉴 수밖에 없습니다.

 


숨은 언제나 내쉬는 숨이 먼저입니다. 내 몸 속 가장 깊은 곳, 곧 얼주머니를 쥐어짜듯이 조이면서 숨을 천천히 내쉽니다. 겉으로 볼 때는 그저 아랫배가 깊숙이 들어가는 것처럼 보일 것입니다. 그렇게 천천히 내쉬면서 숨이 그냥 숨길을 타고 올라와 콧구멍으로 빠져나간다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숨을 느끼면 날숨이 단지 공기의 나옴이 아니라 기운이라는 실체가 나오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이것이 얼주머니로부터 시작해서 회음을 거쳐 꼬리뼈 쪽으로 돌아가는 것을 느껴야 합니다.

 


꼬리뼈까지는 몸 밖을 훑고 지나가는 듯한 느낌이어도 됩니다. 꼬리뼈에서 숨은 등뼈 안쪽을 타고 올라갑니다. 등뼈 마디마디를 골고루 훑어 올라간 숨은 목을 지나면서 뒷머리로 올라가 백회를 거쳐 콧구멍으로 나온다고 느끼면 됩니다. 날숨을 이렇게 느끼면 됩니다.
그리고 들숨은 콧구멍으로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미간에 큰 구멍이 하나 있다고 생각을 하고, 그리로 숨이 들어온다고 생각하면서 받아들입니다. 목으로 들이쉬는 것이 아니라 들어오는 숨을 그저 맞아들인다는 느낌이면 됩니다. 얼굴 위쪽으로 들어온 숨은 온 머리를 가득히 채우면서 목 가득히 타고 내려갑니다. 그렇게 흘러내리면서 목을 지난 들숨이 가슴을 지나면서 허파와 간과 쓸개, 그리고 염통을 골고루 쓰다듬으며 내려갑니다. 가슴을 지난 들숨은 온 뱃속을 훑어내리면서 콩팥과 밥통, 췌장과 십이지장, 맹장과 지라, 작은창자와 큰창자와 자궁을 골고루 쓰다듬으며 얼주머니에 가서 모이면서 그 부분이 불룩하게 됩니다.

 


이것이 한 호흡입니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처음에는 그 느낌이 잘 안 올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억지로 그 느낌을 가지려고 하지 말아야 하고, 잘 느껴지지 않는데도 느껴진다고 스스로에게 거짓말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저 느껴지는 것만큼을 바른 숨을 쉬면서 느끼다 보면 머지않아 느낌이 올 것입니다.

 


이렇게 숨을 쉬게 되면 숨이 두 가지를 도와준다는 것을 또한 알게 될 것입니다. 하나는 날숨의 도움으로 등뼈가 더욱 바르게 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들숨의 도움으로 굳었던 오장육부가 부드러워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등이 펴지면 펴진만큼 숨이 부드러워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등이 펴지면 펴진만큼 숨이 부드러워지고 내장이 부드러워지면 그 부드러워진 것만큼 숨이 더욱 깊어지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등이 펴지고 장기가 부드러워지는 것은 또 그대로 얼굴에서 편안함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이 때 주의해야 할 것이 있는데, 어느 자리에서도 숨을 멈추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숨을 쉬다 보면 자신이 내쉬는 숨이 가 닿는 자리도 느껴지게 됩니다. 그 숨은 내게서 나가서 사방으로 퍼지면서 내게 가까운 제자리살이들에게로 다가갑니다. 그리고 제자리살이들에게 가 닿자마자 그들이 내 숨을 기뻐하며 받아들이는 것도 느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먹거리를 주고받는 일은 죽고 죽이는 관계이지만, 숨을 주고받는 일은 살고 살리는 상생의 관계입니다. 상생의 관계로만 관계가 지속될 수 없고, 거기에 걸맞는 상극의 작용도 함께 공존한다는 사실은 자연스럽게 알게 됩니다.
숨을 들이쉴 때에는 그와 반대로 제자리살이들이 내 쉰 숨으로부터 내게로 다가오는 것이 조금씩 느껴질 것입니다. 처음에는 그저 방안의 공기가 밀려들어오는 것으로 느껴질 터이지만, 머지않아 내 숨이 지구 반대쪽 끝에 있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어느 제자리살이에까지 이어져 있고, 그가 내뿜은 기운이 우우 소리를 치듯이 밀려들어오는 것까지도 느끼리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때쯤 되면 목과 가슴에 전혀 힘을 주지 않고 그저 배에 압력을 가하는 것만으로 숨이 천천히 밀려나오고, 그 압력을 뺐을 때 저절로 숨이 끌려들어오는 것이 가능해질 것입니다. 이 숨이 아주 좋은 숨입니다.

 


이렇게 숨을 쉬는 사이에 수많은 느낌들이 있을 터인데, 그 모든 것을 다 얘기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이 느낌은 그대로 깨달음으로 들어가는 문 열림이라는 사실입니다.
또한 아주 좋은 숨은 숨을 쉬고 있다는 그것까지 내려놓은 절대평정의 상태라는 것입니다. 그 상태를 선불교에서는 입정(入靜)이라고 하는데, 이런 상태에까지는 쉽게 다다를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을 내려놓은 자리, 거기가 명상의 경지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이제 숨의 마지막 느낌을 말하고 마치겠습니다. 그것은 내 날숨에 나 자신이 완전히 녹아내려 절대무(絶對無)의 상태가 되는 것, 그리고 내 들숨에서 온 우주가 다 내 안으로 빨려들어오는 듯한 숨을 쉬는 일입니다. 이 숨이 된다면 바로 그 숨 하나가 영원과 맞먹는 무게를 지닌 숨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 자리는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는 삶의 완성의 순간이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거기가 끝이 아니라는 것을 모르지는 않을 줄로 압니다. 사실 삶이라는 것은 시작과 끝이 따로 있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단, 이 모든 것들을 한 번에 느끼려고 할 일은 아닙니다. 모든 것은 의식을 가지고 느끼면서 시작하는 지금의 내 숨 안에 다 담겨 있습니다. 그리고 이 숨은 나날이 커질 것입니다. 그 숨을 따라가는 삶, 그것은 거칠 것이 없는 삶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 둘, 먹거리 느끼기
밥 이야기를 하려면 먼저 목부터 메어옵니다. 그렇다고 감상에 젖어서는 얘기가 안 된다는 것을 모르지 않습니다. 먼저 성서에 나오는 대로 예수가 "나는 밥이라"고 했다는 말이나, 또는 만해의 시 「님의 침묵」에서 "타고 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된다"는 말을 떠올려 봅니다.
예수 믿는다고 하는 이들이 들으면 펄펄 뛸지 모르지만 스스로 똥이 되어 이 땅에 와서 '나는 밥'이라고 외친 말과, 만해가 '타고 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된다'고 한 말이 다르지 않습니다.

 


밥 이야기는 언제나 똥 이야기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그것은 숨을 한자로 호흡(呼吸)이라고 한 것과도 흐름을 같이 하는 것입니다. 더욱이 명상에서의 밥은 똥 그 자체입니다. 그래서 먼저 똥 이야기부터 하기로 하겠습니다.
얼이 흐트러진 마당에 흐트러지지 않은 것은 없습니다. 그 중에 맨 처음 얼이 흐트러지던 시발점을 찾는다면 그것은 똥을 더럽다고 여기는 삶씨를 꼽을 수 있을 것입니다.

 


똥이라는 말을 거부하고, 그래서 똥이라고 하면 말도 저속하다고 여기고, 대변이라고 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들, 그 냄새를 싫어할 뿐만 아니라, 멀리 해야 하는 것으로만 알고들 있는 사람들이 똥의 의미를 제대로 알 수 있을 턱이 없습니다.
똥이 무엇인지, 똥이 얼마나 쓸모있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아예 고려도 하지 않으려고들 합니다. 그래서 버리면 된다고 알고 있고, 버려도 아주 못된 방식으로 버립니다. 그것이 자연으로 돌아가서 자연을 살찌우는 거름으로 쓰여야 하는데, 버리기 위해서 물을 많이 못쓰게 만들고, 버린 것이 처리되는 데에도 또 수많은 자연이 파괴되는 방향으로 버리고들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것을 문화생활이라고 합니다. 이 글에서 쓰는 '삶씨'라는 말이나, 또는 영어에서 문화라고 하는 말은 자연과의 조화나 공존을 하는 것을 그 뜻 안에 담고 있습니다. 그런데 자연을 죽여서 단지 눈앞과 코 언저리만 깔끔해 보이는 얄팍한 수작을 문화생활이라고 하는 것은 아무리 보아도 같잖은 짓입니다.
똥은 먼저 그 똥을 내놓은 그 사람 자신입니다. 조금만 슬기로운 사람이라면 자기 똥만 잘 들여다보아도 자기의 몸 상태를 읽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식생활과 삶의 가락을 바꿔가면서 똥의 변화도 읽어갈 수 있을 것이고, 그러면서 자신의 건강상태도 조절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똥을 내놓고는 한 번 들여다 볼 사이도 없이 주욱 물을 내려서 버리고 마는 삶씨에서는 어림도 없는 일입니다. 똥이 자기 자신을 말하는 것이라면 똥을 자세히 들여다 볼 줄도 알아야 합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똥을 우러르는 마음까지 생긴다면 삶은 한결 아름답고 그 결이 곱게 풀려날 것입니다.

 


그리고는 그 똥이 곧바로 자기가 먹을 먹거리를 기르는 거름으로 쓰인다면 더 바랄 것이 없습니다. 그 많은 인구가 누어대는 똥을 논밭에다 다 뿌린다면 너무 양이 많아 거름이 되기는커녕 오히려 땅만 못쓰게 할 것이라는 걱정도 없지 않을 것입니다.
만일 논밭에 뿌리고 남을 만큼 너무 많다면 이미 그것만으로도 생태계의 균형은 깨지고 만 것입니다. 굳이 그렇다고 한다면 우리에게 먹거리를 팔아먹는 나라에 똥수출을 해야 옳습니다. 무슨 고양이 낮술에 취한 소리냐고 할지 모르지만, 그래야 맞는다는 말입니다. 까마득한 이야기이긴 합니다만, 그게 올바른 계산일 것입니다.

 


우리 옛어른들은 참으로 똥을 사랑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개성 장사꾼은 그 장사꾼정신이 아주 투철했다고 합니다. 옛날에는 거름으로 똥까지 사고 팔았다고 하는데, 그것을 사고 파는 이들도 역시 장사꾼이었던 모양입니다.
똥을 팔아먹을 때 가끔은 물을 타서 양을 늘리는 사람들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물 탄 똥을 구별하는 데, 개성 장사꾼들이 사용한 방법이 있습니다. 오늘날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놀라지 마십시오. 그들은 손가락으로 찍어서 맛을 보아서 물이 섞인 똥을 가려냈다고 합니다.

 


똥을 값지게 여기는 사람은 반드시 밥도 우러르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밥을 우러르는 사람은 틀림없이 값진 똥을 내놓게 되어 있기도 합니다. 그런데 똥을 함부로 여기는 이 삶씨에서는 밥도 함부로 여깁니다.
똥뿐이 아닙니다. 쓰던 물건도 또한 함부로 다루다가 아무렇게나 내버립니다. 얼마든지 더 쓸 수 있는 것을 단지 낡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또는 유행이 지났다는 것 때문에 버리는 일은 이미 상식만큼이나 흔한 세상이 되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사람의 목숨까지도 아주 가볍게 여깁니다. 그렇게 사람의 값어치까지 아무렇지 않게 여겨지는 이 세태도 따지고 들어가 보면 똥을 함부로 여기고, 밥을 우습게 다루는 태도에서부터 나온다고 볼 때, 똥을 거룩하게 여기는 삶씨, 밥을 하느님으로 모실 줄 아는 마음이 여느 때보다 더욱 아쉬운 요즈음입니다.

 


요즘 우리가 먹는 밥은 너무 기름집니다. 그렇게 먹는데도 몸에 탈이 그것밖에 나지 않는 것을 보면, 우리 몸이 참 놀랍도록 잘 만들어졌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알게 될 것입니다. 경유를 넣어야 할 차에 휘발유를 넣고 몰고 다니는데도 그 기관이 멀쩡하게 잘 돌아가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니 말입니다. 그렇게 기름지게 먹어대다가 몸에 탈이 나면 또 몸에 좋다는 이런 저런 것들을 먹어댑니다.
말도 안 되는 일이 바로 그것입니다. 무엇인가를 너무 담아서 꿰어진 자루에 더 새로운 물건을 담아서 꿰어진 것을 막자는 것과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 어리석은 짓은 이제 그만 하고, 우선 먹거리를 우러르는 마음가짐을 가질 수 있어야 합니다.

 


명상에 있어서의 먹거리는 기존의 먹거리에 대한 상식과는 다른 헤아림으로 보아야 합니다. 이제까지 우리가 배운 대로 한다면, 어느 먹거리를 놓고 따질 때, 그 먹거리에 어떤 어떤 영양소가 있으며, 열량은 얼마나 되는지를 가지고 먹거리를 평가해 왔습니다.
그게 얼마나 타당한 것인지는 모르지만, 먹거리의 의미는 영양소와 열량에 있다고 하는 것으로는 충분한 설명이 안 됩니다. 만일 그렇게만 보고 먹거리를 설명하려고 한다면 앞뒤가 안 맞는 부분이 너무 많습니다.
따라서 먹거리를 따질 때는 그 먹거리가 가지고 있는 기운을 바탕에 두고 헤아려야 합니다. 좋은 먹거리에는 좋은 기운이 담겨 있고, 나쁜 먹거리에는 나쁜 기운이 담겨 있습니다.

 


어떤 사이가 나쁜 부부가 있었습니다. 아내는 밥을 하면서도 지아비가 미워지는 마음을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미워하는 마음으로 날마다 밥을 했습니다. 남편은 아무 것도 모르고 식성 내키는 대로 열심히 밥을 먹는데, 이상하게 나날이 살이 빠지더라는 겁니다. 살만 빠지는 게 아니라, 몸에서 힘도 자꾸만 빠져나가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서로 미워하면서 지내다가 결국 헤어졌는데, 그 뒤로 남편은 건강이 어느 정도 회복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일이 있습니다.

 


미움도 하나의 기운입니다. 미워하는 마음으로 만든 밥에는 독이 들어가 있습니다. 그런데 미워하는 마음이라 하더라도 '내가 미워하니까 독이 되어라' 하는 의도를 담으려고 해서 독이 담기는 것은 아닙니다. 행여 사이 나쁜 지아비를 말려 죽이고 싶은 사람이 실험을 해 보다가 안되어 엉터리없는 소리라고 할까봐서 웃으면서 덧붙이는 말입니다.

 


그런데 미움보다 더 무서운 게 있습니다. 그것은 돈을 벌어야겠다는 마음 하나만으로 만든 먹거리입니다. 대중가요에 보면 '돈이라는 글자에 받침 하나 바꾸면 돌이 된다'고 하는 말이 있던데, 천만의 말씀입니다. 돈이 돌이 되는 수는 절대로 없습니다. 그러나 돈을 주고받는 거기에는 언제나 독이 생깁니다. 그러므로 거래를 할 때에는 반드시 인격을 걸어놓고 해야 그 돈의 독으로부터 서로를 지킬 수 있습니다.
꿈 같은 이야기입니다. 어느 누구도 거래에 인격을 걸지 않고, 사는 사람은 그 물건을 샀을 때의 효용가치를 생각하고, 파는 사람은 언제나 이윤에만 관심이 있는 것이 오늘날 흔히 이루어지는 거래의 전부이기 때문입니다.
인격을 걸어 만든 먹거리를 파는 장사꾼이 우리나라에 몇 분이나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사 먹는 모든 먹거리는 그리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이 말이 언뜻 이해가 안 되거든 가장 맛있다고 생각되는 밥집을 정해놓고 다니면서 거르지 말고 열 끼만 먹어 보면 금방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팔려고 만든 것이라 하더라도 손으로 주물러서 만든 먹거리는 그래도 아주 양호합니다. 기계화를 통해서 모든 공정이 기계를 거쳐서 사람의 손이라고는 한 번도 닿지 않고 만들어지는 즉석식품들은 훨씬 더 위험합니다.
기계는 그 자체로만도 위험한 물건입니다. 철(鐵)이라고 하는 것의 성격 자체가 다른 목숨을 파괴하는 힘을 지니고 있다는 것은 이미 앞에서 말씀들인 바 있습니다. 그런 쇠붙이를 다룰 때에는 철저하게 길을 들여야 합니다. 쇠가 갖고 있는 죽이는 기운을 바꾸는 일이 바로 그 길을 들이는 일입니다. 옛날 어머니들이 무쇠 솥을 처음 사다 걸어놓고는 아궁이에 불을 때면서 기름걸레로 끝없이 닦아내던 솥 길들이기는 이 시대를 사는 모든 기계를 다루는 사람들이 배워야 할 태도입니다. 그렇게 해서 쇠가 가지고 있던 기운을 다 태워 닦아낸 다음에야 거기다 밥도 짓고 국도 끓였습니다.

 


그런데 즉석식품을 만드는 기계들이 그런 길들이기를 거친다는 말을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굳이 그런 기계들 뿐만 아니라, 우리가 쓰고 있는 엄청나게 많은 기계들을 그렇게 길들이는 과정 없이 그냥 씁니다. 그래서 기계의 유용함과 함께 기계로 인한 수많은 피해들도 발생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먹거리 이야기로 돌아가면, 즉석식품은 거의가 내장을 굳게 합니다. 아주 위험한 먹거리라는 말입니다. 무슨 소리냐고, 라면만 먹으면서도 끄떡없이 잘 사는 사람이 있다고 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은 특별한 경우라서 예외로 쳐야 합니다. 즉석 먹거리에 골병든 사람이 훨씬 더 많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으려면 즉석 먹거리에 좋은 기운을 담는 특별한 방법을 고안해야 할 것입니다. 편한 것을 추구하는 사람들의 입맛에 맞춰서 단지 편리만을 주는 것으로는 한계가 있습니다. 미국에서 맥도날드가 고발을 당한 것은 좋은 본보기가 될 것입니다.
좋은 먹거리는 집에서 손수 만든 먹거리입니다. 그것은 별 것도 아닌데 중독성도 없으면서도 결코 질리는 법이 없습니다. 그것도 될 수 있으면 고무장갑 끼지 말고 맨손으로 만든 것이 더 좋은 먹거리입니다. 그것 아니면 안 되니까 할 수 없어서 먹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 먹거리를 만드는 데에는 이것 만들어서 돈을 벌겠다는 그런 속꿍꿍이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 먹거리를 우러러 섬기는 마음으로 먹으면 거기서 땅이 느껴져 땅을 먹고, 하늘을 느껴 또한 하늘을 먹는다는 것까지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밥상 위에 하늘이 담기고 땅이 실려 있으니 이보다 더 훌륭한 해원굿이 어디 또 있겠습니까?
또한 먹거리는 제 철에 난 것이 좋은 먹거리입니다. 나무새를 놓고 말한다면, 봄에는 잎을, 여름에는 열매를, 가을에는 뿌리를 먹을 수 있는 것이 정상입니다. 그리고 겨울에는 세월과 햇살, 그리고 정성을 어울러서 익힌 것들을 먹으면 좋을 것입니다. 그렇게 할 줄 아는 슬기를 우리 옛어른들은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먹거리에 기쁨이 있습니다. 먹기가 잔치여야 배설이 예배나 예불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잔치와 예배를 한 눈으로 보면 그 자체가 하나의 가치있는 예술일 것입니다. 이 행위가 제대로 된다면 오늘의 혼탁한 종교도 좀 정화가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정말 간절한 바램입니다. 그렇게 될 날을 위해서 마음을 모두어 봅니다.

 

그 셋, 철(계절) 느끼기
20세기의 한국은 비극으로부터 시작한 시기였습니다. 20세기는 우리에게는 식민지를 경험하는 것으로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이 흔히 말하기를 일제 36년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정확하게 말한다면 한일합방이 식민지의 시작이 아니라, 그 보다 스물 다섯 해를 더 거슬러 올라가야 할 것입니다.
해월 어른이 열었던 천도교가 전봉준에 의해서 동학이라는 혁명이 되었고, 그 혁명은 전북 고부에서 시작해서 한양으로 밀고 들어가면서 모순과 부패의 극치였던 조선왕조를 뿌리부터 개혁할 수 있는 세력으로 자랐던 것입니다. 조정에서는 이 힘을 감당할 수 없었고, 바야흐로 한겨레에게 해원과 상생으로 열리는 새 시대가 오는 것 같았습니다.

 


조정은 위기를 느껴 중국에 지원을 요청하였고, 이를 빌미로 조선을 노리던 일본이 군대를 보내어 동학을 진압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역사의 흐름은 민중의 손을 들어 주는 것 같았는데, 기운은 그렇지 못했던 것입니다. 일본 군대는 동학을 잔인하게 탄압했고, 그들은 이 혁명을 씨도 못 찾을 정도로 쓸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동학을 일본이 쓸어버린 그 자리부터 우리는 이미 식민지였다고 하는 게 솔직한 역사 이해가 아니냐는 겁니다. 그것은 그 뒤 일본의 횡포에서 그대로 드러납니다. 일본 군대는 민비를 죽이고, 중일전쟁과 러일전쟁을 벌여 이기면서 식민지 점령세력의 위세와 오만함을 한껏 뽐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땅의 식민지 역사는 약 60년이 된다고 보는 게 옳을 것입니다. 그게 정확하고 옳은 역사진술이 될 것입니다.

 


식민지 역사는 이 땅에서 어른을 없애는 것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릇이라고 보이는 분들은 살아남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잡혀 죽거나, 나라 밖으로 떠돌거나, 죽은 듯이 숨어 지내야 했습니다. 그리고는 활개치고 다니는 것은 모두가 속 얕은 철부지들이었습니다.
정치 쪽에서 활동한 사람들, 큰 돈을 쥔 사람들, 새 시대의 파수꾼이라고 하던 지식인이라는 사람들이 모두 어리석고 잔꾀만 부리는 철부지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흐름을 탈 줄은 알았지만, 그것으로 끝이었습니다.
어려운 때를 사는 어른은 기운을 키우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 기운이 식민지 치하에서는 자랄 수가 없었습니다. 좌우 대립에서 좌는 옳고 우는 그르다는 것도 의미가 없는 일이었습니다. 나라는 점점 메말라 갔고, 그래서 해방이 바로 코앞에 다가오기까지도 그 해방을 미리 본 사람이 없었습니다.

 


갑자기 해방이 되고 나니 사람들은 어리둥절해 했습니다. 해방된 나라를 맞이할 준비가 전혀 안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는 사이 약삭빠른 정치꾼들이 들어와 또아리를 틀고 앉았습니다. 그것도 저 혼자의 힘으로는 안되니까 등에 외세를 업고 들어왔습니다. 해방은 이름만 해방이었고, 결국은 새로운 형태의 식민지가 된 것입니다. 귀신 하나를 겨우 몰아내고 나니 일곱 귀신이 떼를 지어 밀려들어온 꼴이 되어 두 동강 난 분단 식민지라는 특이한 상황이 되었습니다.

 


어른을 죽이는 일은 이 상황에서도 하나도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얄팍한 꾀장이들의 득세가 계속 이어졌더라는 말입니다. 남쪽을 놓고 볼 때, 아직도 친일 잔재가 득세를 하고 있는 실정이고, 정치에서 경제, 문화, 지식인 계층, 그리고 종교계에 이르기까지 본질은 제껴놓고 비본질을 추구하는 세력들이 온갖 이권을 다 틀어쥐고 있는 것이 오늘의 상황입니다.

 


그렇게 20세기는 우리에게 몹시도 추운 겨울이었습니다. 견딜 수 없는 혹한이 끝내 구제금융에까지 이어지고, 거기서 20세기가 마감되었습니다. 한겨레 역사의 혹한기는 어른의 씨앗은 잠을 자면서 꿈만 꾸던 시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정직하게 살면 밑지는 세상, 열심히 일하는 것보다는 공짜 돈을 찾아 눈을 반짝이는 사람이 잘 사는 마당, 진실과 성실보다는 처세술이 중요하게 인식되는 나날이 이어졌습니다. 거기서 대다수의 서민들은 힘겨운 나날을 살 수밖에 없었고, 어른됨의 면모를 갖춘 사람은 바보라고 따돌림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래서 20세기는 어른부재의 시대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어른이라는 것, 그것은 단지 나이가 많은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 아닙니다. '얼이 든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것은 철이 든 사람이라는 것과도 같습니다. 요즘같은 어지러운 세상에서는 나이가 많다는 까닭 하나만으로도 우러름을 받을 만합니다. 그 거칠고 험한 세월을 탈없이 살아내었으니 말입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세상을 새롭게 할 수가 없습니다. 어른은 철을 알기 때문에, 다시 말하면 우주의 기운을 아는 사람이므로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는 기운 그 자체입니다. 그런 어른이 있을 때, 살마당은 든든한 곳이 됩니다. 어른이 어른으로 우러름을 받고, 그런 어른의 가르침이 큰 마당 한 복판에서 울려날 때, 그 살마당은 신명나는 곳이 될 수 있습니다.

 


어른을 기다린다고 될 일이 아닙니다. 아무리 어른이 있어도 그 어른을 알아보는 사람이 없으면 그 또한 비극입니다. 어른이 되어가는 사람만이 어른을 알아보아 어른으로 모실 수 있는 사람입니다. 20세기가 어른이 없었던 때라고 할 수 있지만, 그 20세기에도 어른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다만 그들은 있어도 늘 구석진 곳에 있었고, 무뢰배들이 마당 복판을 차지하고 떠들고 있었던 것입니다.

 


어른이 되는 길, 그것은 세월을 보내는 것이 아니라, 기운을 느낄 줄 아는 사람이 되는 일입니다. 철부지들은 '나는 봄이 좋다'거나, 또는 '가을이 좋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나쁜 계절이란 없습니다. 봄은 봄대로 그 고움이 있고, 여름은 여름대로 그 힘이 있으며, 가을은 가을의 아름다움을, 그리고 겨울은 겨울의 멋을 가지고 있습니다. 철이 드는 것은 모든 계절로부터 그 계절을 몸에 담는 것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봄에 봄을 담아야 여름을 여름으로 살 수 있습니다. 여름을 여름으로 받아들인 사람에게만 가을이 가을일 수 있습니다. 그렇게 봄 여름 가을을 제대로 담아낸 사람만이 겨울을 받아들일 수 있고, 긴 긴 겨울을 잘 갈무리한 사람이 그 다음 봄을 또한 제대로 싹틔움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렇게 사는 삶을 '철이 든 사람', 곧 어른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계절을 거슬러 살거나 앞당겨 사는 것이 문명이라고 알았던 이제까지의 삶씨는 기운의 흐름을 느끼는 감각기관을 마비시키는 그런 삶씨였습니다. 마취된 채 살면 그것은 삶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제 정신으로 살기, 다시 말하면 '자신을 놓치지 않고 자기 자신으로 살기' 이것이 명상이 추구하는 삶입니다. 이 삶을 살 수 있다면 다른 모든 것을 못 얻거나, 지니고 있는 것을 잃어버려도 하나도 아쉬워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아내의 주검 앞에서 춤을 추었던 장자라는 어른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묵묵히 기운을 담으면서 새로운 시대를 여는 사람이 어느 때보다 아쉬운 21세기 초입니다. 그리고 그 새로운 시대가 여러 가지 모양으로 우리 앞에 다가오고 있습니다. 이 흐름을 타지 못하면 낙오자가 됩니다.

 

그 셋, 말과 말없음
오늘날 현대인에게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일들 가운데 말의 낭비가 있습니다. 말을 함부로 하거나, 또는 지나친 표현들, 너무 많은 말을 하면서 살고 있다는 마음을 버릴 수가 없습니다. 말이 낳으면 실수가 따른다고 하면서 말을 줄이라고 하기도 합니다. 옛 사람들이 즐겨 가르치던 '세 번 생각한 뒤에 한 번 말하라'는 것은 요즘에는 듣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그저 아무렇게나 내키는 대로 말들을 하기 때문에 그런 말들을 제대로 알아듣는 일만으로도 지칠 정도입니다. 어떤 말이 내게 도움이 되는 말인지 해가 되는 말인지를 가리는 일도 어렵지만, 이제는 누가 말을 하면 그 말이 무슨 뜻인지를 알아내는 것도 그다지 쉽지 않습니다. 젊은이들이 한 때 유행처럼 즐기던 '사오정 연속탄'도 그런 까닭에서 생겨나지 않았는가 싶기도 합니다. 그러다 보니 자신이 한 말도 듣는 이에게 어떤 뜻으로 가 닿게 될지를 알 수 없는 의미의 단절을 어디서나 경험하게 됩니다. 모두가 말이 많아진 까닭에 일어난 현상입니다.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어느 대학교수라는 사람의 말이 떠오릅니다. 그는 말을 꼭 "...라고 생각되어집니다" 하는 식으로 맺곤 했습니다. 말글살이의 표본이라고 하는 방송국 아나운서라는 사람들도 툭하면 "보여진다"느니, "되어진다"느니 하기도 합니다.
도대체 어떻게 해서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는지,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서 고개를 갸웃거리게 하는 일입니다. 말이 안되는 말을 쓰는 자리, 거기는 바로 얼이 흐트러진 자리입니다. 말이라고 하는 것이 얼을 담는 그릇인데, 흐트러지거나 일그러진 그릇에 담긴 얼이 제 꼴을 지닐 수 없다는 것은 그럴 수밖에 없는 일입니다.

 


그와 함께 책임을 전혀 지지 않을 빈 말, 그래서 말의 성찬이 되고 마는 일도 어디서나 볼 수 있습니다. 종교, 특히 개신교의 언어남발은 끔찍할 정도입니다. 그들은 우리가 가장 복과 상관없는 세월을 살고 있을 때 축복이라는 말을 가장 많이 한 사람들일 것입니다. 진리라는 말도 한국 개신교인들에 의해서 경매처분이 되고 말았으며, 구원이라는 말도 아예 헐값이 되어버렸습니다. 개신교는 그렇게 스스로를 싸구려 종교로 전락시켰습니다. 그러면서도 어쩌면 그렇게 한결같이 자기네만 옳은 종교라고 우기는지, 종교의 가치를 아는 사람이 보면 안타깝게만 보일 일입니다. 자기만 옳다는 것은 주장으로 할 일이 아닙니다. 그렇게 자신만 옳다면 좀 더 진지하게 그 옳음을 몸으로 살아내야 할 일입니다.
텔레비전 광고에 이르면 말의 성찬은 극치에 다다릅니다. 광고가 세태를 반영하는 까닭일 것입니다. 그러니 방송광고는 아예 얘기할 가치도 의미도 없다는 마음도 듭니다. 그럼에도 광고를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는 것은, 광고가 단순히 상품을 선전하는 것으로만 그친다면 그것은 아무런 가치도 없는 공해성 광고라는 것입니다. 광고가 의미가 있고, 한 사회 안에서 가치를 지니기 위해서는 상품의 선전과 함께 정보의 중요한 전달이 있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광고현실은 그렇지 못합니다. 그저 저희들이 파는 물건만 사면 모든 것이 다 해결될 것처럼 말합니다. 광고에서 말하는 그대로만 된다면 이 세상에 아픈 사람은 하나도 없어야 하고, 겨울에 추운 사람도 하나도 없어야 하며, 여름에 더운 사람도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광고는 과장이 너무 심해서 아무도 그 광고를 보고 정보를 얻을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얻는 정보는 그릇된 정보이기 때문에 정보로서의 가치가 하나도 없습니다. 이제는 광고시장이 좀 더 바람직한 쪽으로 나아갈 수 있기를 기대해 봅니다.

 


아주 심각한 말글살이의 흐트러짐은 학자라는 사람들이 쓰는 말들입니다. 앞에서 말한 "생각되어집니다" 정도는 애교로 봐 줄 수도 있을 만큼 학자들의 말글살이는 그야말로 엉망입니다. 그 사람들이 잘 쓰는 들온말은 말할 것도 없고, '적(的)'이라는 말에 이르면 어이가 없습니다. '적(的)'이라는 말의 뿌리는 영어의 말 끝에 가서 붙는 'tic'이라고 합니다. 그 말을 영어 발음이 시원치 않은 일본 사람들이 그들의 말로 '데끼'라고 읽었고, 그들 말 가운에서 '데끼'라는 소리가 나는 '적(的)'으로 교묘하게 둔갑시킨 말이라고 합니다. 그 희한한 둔갑과 합성으로 된 말을 되나가나 붙여가면서 마치 그것이 배운 사람의 말투라는 식이니 그야말로 "데끼!"가 아닐 수 없는 노릇입니다.
건축현장의 일본말 투성이, 영어를 공용화해야 한다고 하는 넋빠진 주장, 한문을 섞어 써야 세계화가 된다고 생각하는 소리들을 들으면 아예 입이 다물어지지 않습니다. 그렇게 말이 흐트러지고, 오염된 자리에서 바른 얼이 솟아나기를 바란다는 것은 웅덩이를 파 놓고 거기서 용이 나오기를 기대하는 것만큼이나 철없는 짓입니다.

 


우스운 말 하나 더 하고 넘어가겠습니다. 어디를 가나 볼 수 있는 식당 차림표에 "닭도리탕"이라는 먹거리가 있습니다. 그 "도리"라는 말이 일본말로 "닭"이라는 말인데, 도대체 어떻게 해서 그런 웃지 못할 말이 나왔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입니다. 한 술 더 떠서 "토끼도리탕", "오리도리탕", "꿩도리탕"까지 있는 걸 보면 이건 참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가늠이 전혀 안 됩니다.

 


이런 자리에서 헤아려야 할 것은 말이 무엇인지를 먼저 알아채는 일입니다. 흔히들 '언어'라고 하는 '말'은 일종의 감정의 배설입니다. 물론 말이라고 하는 것이 의사소통을 하는 도구이지만, 감정의 배설이라는 점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말이 감정의 배설이기 때문에 적절한 말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배설이 안 되면 감정의 균형이 깨지고, 그렇게 감정의 균형이 깨어진 상태는 정신질환에 다름이 아닌 매우 위험한 상황까지 가게 됩니다. 한국 사회는 매우 오랫동안 언어의 통제를 받았습니다. 감정의 배설까지도 법의 감시를 받지 않으면 안 되는 불행한 시대가 거의 백년 가까이나 지속되었습니다. 그런 과정에서 감정의 우회배설이 불가피하게 되었고, 거기서 말의 해석이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언어의 혼란이었으며, 의미의 단절도 그 때문에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전체를 놓고 볼 때 감정을 배설하는 기능 자체가 흐트러진 것이라고 읽을 수 있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 와중에 말을 어렵게 하는 것이 배운 사람의 특권처럼 인식되는 현상이 겹쳐지고, 그래서 뜻도 모를 말들을 하지 않으면 안되는 웃지 못할 일까지 덧씌워지면서 20세기 말의 언어생활은 극도의 혼란상황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민주주의가 제대로 펼쳐지기에 앞서서 주장된 것은 표현의 자유라는 것이었습니다. 배설의 기능이 흐트러진 상태에서 주장되는 표현의 자유는 결국 언어생활의 기현상이 될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거의 회복이 어려울 만큼 말글살이가 복잡하게 뒤엉켜버렸습니다. 그래서 말 때문에 곰니하게 되고, 오해도 생기고, 심각한 불행이 일어나기도 하고, 심지어는 사람이 죽어나는 일까지도 생깁니다. 말이 정확하지 않으니까 말 한 마디를 해 놓고 설명을 해야 하고, 설명이 오해를 불러일으키니 또 다시 풀어주겠다고 말을 하고, 그러다가 처음에 하려던 말과는 아무 상관없는 쪽으로 얘기가 흘러버려서 전혀 엉뚱한 결과를 내는 일도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현상입니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말까지의 한국 언어생활이 감정의 변비였다고 하면, 표현의 자유가 주장되기 시작한 20세기 말부터 지금에 이르는 시기는 감정의 설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설사란 소화되지 못한 것들이 그냥 배설되는 것을 말합니다. 거듭되는 설사는 속을 허하게 하여 속이 비는 것으로 이어지고 그래서 감정의 공황상태로 이어지게 됩니다. 그 자체가 비극인 것이 감정의 공황상태란 하나의 이상심리, 곧 정신질환이기 때문인데, 우리는 지금 거의 모든 사람이 집단심리공황상태를 경험하고 있습니다. 개인의 현상이 아니라 한 시대를 아우르는 전체 사회의 흐름이라는 데에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현새사회를 집단신경질환의 시대로 진단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다른 면에서도 그렇지만, 특히 말글살이에 있어서 아주 심각합니다.

 


변비가 해결될 때 과다한 설사가 있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일 수도 있습니다. 그처럼 시원하고 행복한 일도 그리 많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 설사가 그치지 않고 계속될 때입니다. 배설이 안 될 때의 답답함도 불행스러운 일이지만, 지나친 설사 또한 그에 못지 않는 괴로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여기에서 조절이라는 기능을 살려내지 않으면 안 됩니다. 언제까지고 변비 때의 감정으로만 설사를 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말은 또한 삶씨를 담는 그릇이고, 또한 얼을 가꾸는 거름이기도 합니다. 말로 진리를 담을 수 없다고 하여 말을 아끼는 선불교는 그예 말에다 진리를 담는 일에 어느 정도 성공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성공은 말을 줄이고 또 줄여서 다다른 성공이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이쯤에서 말을 아끼고 줄일 줄 아는 슬기를 지녀야 합니다. 그리고 말을 할 때는 정확하게 할 줄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을 기르는 데에는 침묵훈련만 한 연습이 없습니다. 이레에 하루, 그게 정 안 된다면 하루에 단 두 시간이라도 말없이 지내보는 시간을 좀 가져야 할 것입니다.

 


보다 쉽고 좋은 방법이 있습니다. 그저 혼자 가만히 앉아서야 누구라도 두어 시간은 말없이 보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과 마주하고 있을 때 말을 참아 보는 연습을 하는 겁니다. 무슨 말인가 하고 싶을 때, 먼저 생각을 해 보면 됩니다. 내가 이 말을 하는 것이 때에 맞는 말인지를 늘 마음 속으로 굴려 보는 겁니다. 그리고는 하고 싶은 말을 참아도 보는 겁니다.

 


구약성서 잠언이라는 곳에 보면 "때에 맞는 말은 아로새긴 금쟁반에 구르는 은구슬과 같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런 말을 하기 위해서는 침묵훈련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말은 많이 한다고 해서 효과를 내는 것이 아닙니다. 말이 많으면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많다는 것이야 모를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줄이되 말 한 마디에 자신의 인격 모두를 담을 줄 알고, 말 한 마디로 핵심을 바로 꿰뚫을 수 있어야 합니다.
침묵훈련을 하다 보면 안으로부터 생기는 힘을 가장 먼저 느낄 수 있습니다. 전에는 종교인들이 주로 이 훈련을 했습니다. 스님이나 신부님, 또는 수녀님들이 이런 침묵훈련을 많이 한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나 누구에게나 필요한 것이 이 훈련입니다. 말은 그릇입니다. 말에 무엇을 담았는지를 헤아려 보면서 말할 줄 아는 사람이 익어가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사람이 다 익었을 때는 굳이 담으려고 하지 않아도 저절로 모든 것이 담기게 될 것입니다. 그 때까지 우리는 꾸준히 이 훈련을 해야 합니다.

 


여기서 하나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말보다 더 중요한 것이 기운이라는 점입니다. 사람들은 모두가 어떤 괜찮은 사람을 만나면 그에게 무슨 말을 들을까를 먼저 헤아립니다. 공책을 꺼내들고 그가 하는 말을 적으면서 고개를 주억거리기도 합니다. 그런데 참으로 좋은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그 좋은 사람의 기운을 느끼고 받아들이는 것이 더 큰 일이라는 사실입니다. 기운이 나쁜 사람은 아무리 좋은 말을 해도 그것이 듣는 이에게 좋은 결과로 가서 이어지지 않습니다.

 


어렸을 때, "나가 뒈져라"는 소리를 많이 듣고 큰 아이가 아주 잘 자란 것을 헤아리면 얼른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말이 아니라 기운이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 기운을 기르는 일이 또한 침묵훈련입니다. 침묵에 익숙해지는 것, 그것은 자신의 내면의 세계와 가까워지는 또 하나의 방법입니다.

 


자기 내면과 가까워지는 것만큼 우주가 가까이 다가옵니다. 그리고 침묵 안에서 우주를 담았을 때, 거기서 나오는 말 한 마디가 우주만한 무게를 지닐 수 있습니다. 선불교 이야기 하나를 하고 다음으로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어느 제자가 스승에게 와서 물었습니다.
"스승님. 제게 우주를 좀 가르쳐 주십시오."
그러자 스승은 제자를 지그시 건너다 보기만 합니다. 둘 사이에 침묵이 흐릅니다. 그러나 그 침묵의 흐름 안에 기운의 교감이 있었다는 것을 여기까지 온 사람들은 모르지 않을 것입니다. 이윽고 스승이 한 마디를 내어놓습니다.
"너, 좁쌀을 아느냐?"
제자는 좁쌀에 대해서는 모르는 것이 없는 사람입니다. 산문에 들어와 수행을 하기 시작한 날부터 이 제자는 좁쌀과 가까웠습니다. 조 말고는 달리 먹거리가 별로 없는 깊은 산중에서 이들에게는 좁쌀이 주식(主食)이었습니다.
제자는 아침에 일어나면 좁쌀을 씻어서 밥을 지었고, 밥을 먹고 나면 밭에 나가 조를 가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좁쌀에 대해서라면 언제 씨를 뿌려야 하는지, 김은 어떻게 매고, 거름은 또 어떻게 주어야 하는지, 거둘 때는 언제고, 먹거리가 되게 하기 위해서는 어떤 과정을 거쳐야 하는지, 그리고 씨앗 갈무리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모든 것까지를 아주 잘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스승이 물었을 때, 제자의 머릿속에는 좁쌀과 함께 했던 그 세월들이 떠오르면서 그 좁쌀이 조금씩 확대되어 다가오는 것이었습니다. 마치 현미경으로 좁쌀을 보는 것과도 같았고, 또 멀리서 서숙이 자라고 있는 밭을 멀리서 망원경으로 보는 것 같은 느낌도 그 사이에 떠올랐다가 사라지곤 했습니다. 적어도 이 제자는 좁쌀에 대해서만은 그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알음알이를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 압니다."
제자가 자신있게 대답을 했습니다. 그러자 스승은 제자의 머리통을 콱 쥐어박았습니다. 그리고는 큰 소리로 꾸짖듯이 한 마디를 쏟아냈습니다.
"이놈아, 좁쌀을 아는 놈이 어찌 우주를 모른단 말이냐?"
이 꾸짖음에 제자의 눈이 활짝 열리고, 우주가 한 눈에 보였습니다. 제자는 가만히 일어나 스승에게 큰 절을 올립니다. 스승은 그 절의 의미를 알고 빙그레 웃으며 그가 입고 있던 누더기 가사와, 그가 쓰던 밥그릇을 제자에게 건네주었더라는 이야기입니다.
단 네 마디의 말에 우주를 담을 줄 알던 선불교의 전통은 매우 큰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거기서 우리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그 선불교에서는 "말로는 아무 것도 담을 수 없다(不立文字)"고 합니다. 그렇게 말에다 깨달음을 담는 것이 어려운 것부터 가르치는 선불교만이 할 수 있었던 일입니다. 그 깊이를 헤아리면서 침묵훈련을 해 보기 바랍니다. 여기서 말한 것보다 훨씬 더 크고 많은 것을 찾아낼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다섯, 잘 사는 것
좀 서투른 수작 하나 하고 넘어가겠습니다. 전에 쓴 시처럼 생긴 글이 하나 있어서 그걸 하나 소개하고 가려고 합니다. 글낯은 "볕쬐는 늙은이"입니다.
내 살아온 나날들이 참 아득도 하구먼
남들은 말하기 좋아
쏜살처럼 달아나버린 세월이라고 하지만
내 돌이켜 보니 참으로 멀고도 긴 길을
더듬으며 비틀대며 살아왔네 그려
처음으로 자동차를 본 일이며
도시가 움쑥움쑥 자라나던 일이며
호랑이나 귀신보다 더 무서운 것들을
안고 끼고 살지 않으면 안 되는
희한한 사람살이를 보면서 왔는데
어떤 일들은
전설이나 신화의 한 자락으로 녹아들어 갔고
잊혀진 이름이며 먼저 간 사람들까지
그리움마저 이제는 빛이 바래고 말았네 그려
젊었을 때야
바램도 많았고 무엇인가 내세워 자랑도 하며 들뛰었지만
이제야 무슨 그런 게 있겠는가
내세울 자랑거리 하나도 없고
바램도 있을 턱이 없지
꿈을 꾸어서 무얼 하겠는가 말이지
다만
꼭 한 가지 바램이 있긴 한데
그게 이루어질지 어떨지는 모르겠네 그려
그 마지막 남은 내 바램이 무엇인고 하니
봄이 아니고 가을에
아침이 아니고 저녁 때
될 수 있으면 날도 맑았으면 좋겠지만
그것까지야 바랄 수 없지
아무튼 그 낙엽 지는 가을날 저녁
나 어릴 때 살던 옛살나비쪽으로 머리 두고
곱게 누워 입가에 엷은 웃음 한 자락 띄운 채
숨 내려놓을 수 있기를
오늘은 구름이 오락가락하는 아침이구먼
부는 바람 아무래도 날 부르는 하늘 손짓은
아닌 것 같은데
볕이 자꾸만 구름에 가려지고
바람은 옷섶을 헤치며 살갗을 시리게 하는군
나 죽을 때
왔던 곳으로 되돌아갈 수만 있다면
이런 것쯤이야
아무 것도 아니지 뭐

 

좀 길고 어수선한 중얼거림이었습니다. 잘 사는 이야기를 하려고 입을 떼면서 웬 소리냐고 의아해 할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더군다나 얘기의 알맹이가 죽음이니 더 낯설게 느껴지지는 않을까 싶기도 합니다.

 


잘 산다고 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늘 사는 것만 생각합니다. 그러나 삶은 언제나 죽음과 짝을 이루고 있습니다. 죽음이 전제되지 않은 삶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 명상을 통한 발견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죽음은 이미 우리가 손으로는 다 꼽을 수 없도록 겪으면서 여기까지 왔습니다.

 


'나'라고 하는 한 목숨이 생기려고 두 목숨이 끊어졌습니다. 그 목숨이 끊어진 자리는 어버이의 시원한 배설에까지 뿌리가 닿아 있습니다. 그들의 사랑이라는 이름으로의 어우러짐, 그리고 사랑이 죽음에 가 닿던 절정, 그 순간에 난자라는 목숨 하나가 깨어지고, 정자라는 목숨 하나가 녹으면서 첫 숨이 시작되었습니다.

 


거기서 시작한 숨 또한 까마득하여 의식의 가장 밑바닥에 가라앉아 퇴적층이 되고 말았지만, 그것까지도 죽음과 삶의 반복이었습니다. 들숨이 살아남이라면 날숨이 죽음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무의식의 층에서 의식의 층으로 나오는 순간, 우리는 어머니의 자궁이라는 기관 하나를 터뜨려 죽임으로서 하나의 사람이 되었고, 그 죽음은 껍질로 땅에 버려졌습니다.

 


그 때부터 지금까지 반복해 온 죽음과 삶이 아주 부드럽게 교차하는 것을 단지 생명현상이라고만 생각하면서 살아왔습니다. 내어놓음이 죽음이고, 받아들임이 살아남이라는 말입니다. 거기서 나온 현상으로서의 운동을 삶이라고 뭉뚱그려 말하지만, 살아남과 죽음은 틀림없이 구분이 되어야 합니다.

 


잘 죽을 줄 아는 사람이 잘 살기 때문입니다. 날숨이 좋아야 들숨이 바람직할 수 있습니다. 내어놓는 일이 시원해야 먹는 일이 즐거울 수 있는 법이고 말입니다. 모르면 몰라도 변비를 앓는 사람은 나중에 죽을 때도 몹시 힘이 들 것이니, 살아서 이것만은 제발 해결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잘 산다는 것은 보통 가진 것이 넉넉한 삶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잘 사는 것의 기준이 될 수 없습니다. 지닌 것을 넉넉해 하는 사람이란 거의 없고, 넉넉해 하는 사람은 그 넉넉해 함이 길게 가지 않는 것이 사람살이 같더라는 말입니다. 만일 그런 것을 잘 사는 것으로 알고 달려가는 사람이 있다면 머잖아 깎아지른 벼랑 앞에 서게 되던지, 아니면 끝도 없는 종살이만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잘 사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을 것입니다. 적어도 목숨을 바탕에 놓고 볼 때, 잘 사는 것은 크게 두 가지로 말할 수 있습니다. 흐름을 거스르지 않고 그 흐름과 함께 가는 것이 그 첫 번째입니다. 흐름을 따라간다면 삶은 쉽고 부드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이제까지 그대가 한 얘기는 왜 흐름을 거스르는 얘기뿐이냐고 할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자본주의, 그것도 장사꾼이 중심이 된 자본주의와 문명화라는 것을 거스르는 이야기가 이제까지 한 이야기의 전부라고 할 수도 있으니 말입니다. 게다가 대세는 이미 그 쪽으로 기울어진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소련의 몰락, 중국의 시장개방 정책은 모두 사회주의에 대한 자본주의의 승리로 보였고, 그 동안 팽팽한 긴장으로 이어지던 세계 균형은 자본주의 쪽으로 한꺼번에 기울어지면서 긴장상태가 끝난 것이 사실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 흐름이 우리가 함께 타야 할 물결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사회주의에 대한 자본주의의 승리는 그 자체로 자본주의의 완벽함을 보증하는 내용으로 읽을 수는 없습니다. 구조가 좀 더 유연한 자본주의가 좀 더 굳고 딱딱한 사회주의 구조를 이긴 것뿐입니다. 사회주의도 자본주의도 그것의 옳고 그름을 판별하는 시금석은 생명질서라는 차원에서 읽어야 합니다.

 


그런데 자본주의와 현대과학은 계속해서 생명질서를 교란하거나 파괴하는 쪽으로만 치닫고 있습니다. 그런 흐름을 타는 것은 생명질서를 거스르는 것일 뿐입니다. 그 흐름은 죽음만이 있는 흐름이고, 문화 자체가 죽음을 그 핵심에 담고 있음으로 언제나 비극과 불행이 예정되어 있는 흐름입니다. 코앞의 이익 때문에 나머지 모두를 버리지 않으면 안 되는 불합리한 흐름이라는 말입니다.
거기는 시원한 배설이 없는 곳입니다. 찌지근하고 개운치 않은 배설, 그리고 그 배설한 것의 뒤처리에 골머리를 앓아야 하는 배설, 배설물이 재생산으로 이어지지 않고 오히려 또 다른 죽음으로 이어지는 그런 배설만이 있을 뿐입니다. 모두가 어둠이고 아픔이고 더러움이고 악함만이 있는 세계입니다.

 


거기를 살다 보니 가을에 죽어야 할 목숨이 모든 것이 펄펄 살아나는 봄에 픽픽 쓰러져갑니다. 저녁 해가 질 때 웃으며 죽어야 하는데 아침해가 솟아오를 때 울고불고 더 살아야 하겠다고, 살려달라고 아우성을 치다가 결국은 죽습니다. 이게 바로 슬픔이고 부끄러움입니다.
흐름이란 우주의 질서입니다. 거기 삶을 맞춰가는 겁니다. 이미 비슷한 얘기를 했는데, 거듭 말하자면 봄에 봄을 살고, 여름에 여름을 살고, 가을과 겨울에는 또 그대로 가을과 겨울을 사는 겁니다. 아이 때는 아이답게, 나이를 먹어서는 제 나이에 걸맞는 삶을 사는 것을 흐름을 따라 산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나이를 먹는 사람은 나이를 감추려고 하고, 아이더러는 점잖게 살라고 가르칩니다. 점잖다는 말은 젊지 않다는 말입니다. 모두들 물구나무를 서서 살겠다는 배포로만 보이는데, 다 죽음의 문화가 빚어낸 서툰 몸짓일 뿐입니다.
잘 사는 것의 두 번째는 어우러짐, 즉 조화로운 삶입니다. 저 있을 자리에 분명히 있어야 어우러짐이 가능하게 됩니다. 있는 자리에서 할 일을 하되, 무엇에도 서두르지 않고 사는 것이 또한 어우러짐입니다. 그 어우러짐을 주역에서는 태극이라고 하고, 상생과 상극의 조화로 일어나는 음양오행의 운행질서라고 보았습니다. 불경의 '색즉시공 공즉시색'도 어우러짐의 다른 표현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도교에서는 無爲而無爲라고 했습니다. 그 모든 것을 성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늑대가 새끼양과 어울리고
표범이 수염소와 함께 딩굴며
새끼사자와 송아지가 함께 풀을 뜯으리니
어린 아이가 그들을 몰고 다니리라
암소와 곰이 친구가 되어
그 새끼들이 함께 딩굴고
사자가 소처럼 여물을 먹으리라
젖먹이가 살모사의 굴에서 장난하고
젖뗀 어린아기가 독사의 굴에 겁 없이 손을 넣으리라
나의 거룩한 산 어디를 가나
서로 해치거나 죽이는 일이 다시는 없으리라
바다에 물이 넘실거리듯
땅에는 야훼를 아는 지식이 차고 넘치리라

 

흐름을 따라 어우러지는 삶, 내어놓음과 받아들임이 부드럽게 어우러지는 삶, 이것은 명상이 추구하는 또 다른 형태의 삶꼴입니다. 누구라도 명상을 하면서 이곳으로 흘러가지 않고 영계(靈界)가 어떻다느니, 신선이나 도인이 어떻다느니 하는 소리만 한다면 그들은 모두 곁길로 새어 구덩이에 빠진 사람들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습니다. 명상이나 수련을 돕는다고 하면서 밥벌이나 하려는 수작은 아예 얘기할 가치도 없는 무리들이고 말입니다.

 

다섯째마당. 읽기
그 하나, 읽기에 앞선 듣기
글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사람이 다른 목숨살이들과는 다른 삶씨를 이루면서 살 수 있는 큰 힘입니다. 글이 있어서 자기 생각을 다른 곳에 전할 수도 있고, 앞서 살던 사람들이 이룬 일이나 그들의 훌륭한 생각을 배울 수도 있습니다. 글씨를 갖게 된 것은 인류 문화의 커다란 혁명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글씨 때문에 오히려 퇴화한 것도 없지 않습니다. 현대인이 보기에 과거의 사람들은 놀랄만한 기억력과 판단기능을 갖고 있었다고 합니다. 내가 아는 한 노인은 그 예가 될 것입니다. 그 노인은 흔히 말하는 바보였습니다. 글씨는 말할 것도 없고, 자기 나이가 몇인지, 생일이 언제인지, 그리고 숫자에 대한 개념도 전혀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노인에게 놀라운 능력이 하나 있었습니다. 어떻게 아는지는 아무래도 알 수 없는 일이었는데, 쉰 일곱 집 제사 돌아오는 날과 생일 돌아오는 날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는 겁니다. 지금도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입니다. 한 번은 제사가 든 그 집에서 깜빡 잊고 제사를 지내지 못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날 아침, 이 노인이 제삿밥을 얻어먹겠다고 찾아왔을 때서야 그들은 깜짝 놀랐던 것입니다.

 


글씨뿐 아니라 정보의 저장이라고 하는 것이 사람의 능력을 퇴화시키는 역기능이 있다는 것을 알면, 문명의 이기(利器) 때문에 무엇을 잃어버렸는지를 되새겨 보게 됩니다. 문명의 이기를 배우는 첫 번째 기관은 학교입니다. 글씨와 숫자를 배우는 것이 그 배움의 바탕이며, 이어서 갖가지 인류가 이루었다고 하는 성과들과, 그 이용방법을 배웁니다. 그리고는 그 배운 것을 활용하여 살아갈 수 있는 생활인이 되게 하는 것, 그것이 교육일 것입니다.

 


교육은 참으로 많은 기회를 갖게 해 줍니다. 요즘에 와서야 교육의 문제점이나 역기능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게 되었지만, 지금부터 30년 전만 해도 교육이 곧 사람을 만드는 유일한 길이라는 것에 아니라고 할 사람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교육이 두루 널리 퍼진 현대에 사람이 잃게 된 것 가운데 가장 큰 것을 꼽으라고 한다면 사람이 만든 글씨를 배우면서 사람이 만들기 이전부터 존재하는 글씨를 읽을 기능이 퇴화했다는 점입니다.

 


우주의 흐름을 읽는 일, 자연의 소리를 듣는 일, 몸이 말하는 것을 알아채는 일을 모두 놓쳐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리고는 아예 그런 것이 있었다는 것조차 모르는 새로운 형태의 문맹, 멀쩡한 농아가 돼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 나비의 애벌레가 그 고치 속에서 알아채는 꽃이 피는 소리를 사람은 듣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큰 비가 오기 전에 개미들은 모두가 이사를 가는데, 사람은 그걸 모릅니다. 우리 몸 안에서도 세포와 세포, 조직과 조직, 그리고 기관과 기관이 끊임없이 얘기를 나누는데도 그걸 전혀 알아듣지 못합니다.

 


글씨를 배우는 것도 좋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 그것은 얼이 살아있어서 목숨이 말하고 있는 소리들을 들을 줄 알고, 그 목숨살이들이 어우러지면서 펼쳐낸 그림과 글씨를 볼 줄 알고, 읽을 줄 아는 사람이 되는 일입니다. 사람이 만든 글씨와 함께, 이것까지 읽을 수 있게 된다면 인류문화는 훨씬 바람직한 방향을 잡을 수 있을 것입니다. 적어도 20세기 문화현상과 같은 문화의 그릇된 흐름은 나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자연 안에 가득한 언어는 더 넓게 보면 온 우주 안에 말들이 가득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절대침묵의 상태란 이 우주의 그 어느 곳에도 없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 우주에 가득한 파장이라고 할 수 있는 언어들을 모든 목숨살이들이 서로 주고받으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목숨살이들의 살아감이라는 현상으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꽃 한 송이가 피어나는 일에 단순히 땅에서 섭취하는 영양소와 광합성 작용, 그리고 잎으로 쉬는 숨과 수분증발이 전부라고 한다면 그것은 너무 안일한 관찰입니다. 그 꽃 한 송이에 우주 전체와 나누는 끝없는 이야기를 고치 속에 있는 나비가 될 애벌레가 듣습니다. 자연에는 비밀이 없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이 그런 식인데, 사람의 몸에서도 세포 수준에 이르면 그 세포는 우주파와 끝없는 교신을 하고 있습니다. 세포가 알아듣는 자연의 언어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글씨를 배우고, 숫자를 배우고, 그 동안 인류가 쌓았다는 사회 과학 예술 문화 같은 것들을 익히는 일에 온 넋을 다 빼앗겨서 인간의식은 그것을 듣는 귀와 눈을 못쓰게 만들고 말았던 것입니다. 아는 것이 병이라던 옛 어른의 말이 그렇게 절실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를 익힌다는 것이 모든 나머지 것을 놓치는 것이라는 점, 잎사귀 하나를 얻기 위해서 몸통을 버리는 일이었다는 것을 되짚어 보아야 할 때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절망할 일은 아닙니다. 완전히 마비되어 못쓰게 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다만 잠자고 있을 따름입니다. 이 잠을 깨우는 왕자의 입맞춤, 그것은 숨을 들여다보기 시작한 바로 그 자리입니다. 얼주머니가 살아나는 자리입니다. 귀가 열리면 그렇게 시원해질 수가 없고, 눈이 열리면 그렇게 기쁠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무슨 소리들이 있는지, 모든 조화로운 음악이 가득한 이 우주라는 마당에 펼쳐진 악보읽기로 들어가 보도록 합시다.

 

그 둘, 몸의 역사 읽기
다시 말하게 되는 것은, 역시 모든 것은 몸으로부터 시작된다는 점입니다. 처음에 주의를 기울여 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제까지 아무 생각없이 지나쳤던 일들에 주의를 기울여 보는 겁니다.
추우면 돋아나는 소름, 슬프거나 너무 웃었을 때 나오는 눈물, 더우면 일어서는 털과 솟아오르는 땀, 틀림없이 몸의 한 부분이면서도 깎거나 잘라도 아프지 않은 손톱 발톱과 머리카락들을 가만히 떠올려 보는 겁니다. 이 때 반드시 버려야 할 것, 그것은 과학이나 생물학의 지식으로 그 현상을 설명하려고 하지 말고, 그냥 무심의 상태로 지켜보는 것입니다. 지식으로 설명하려고 하면, 그들이 하는 말을 읽을 수 없습니다. 그냥, 단지 그냥 바라보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면 거기서 그들의 말을 들을 준비가 되고, 머잖아서 알아듣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와 함께 또 하나 읽어서 도움이 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내 몸에 남아있는 흉터들을 지켜보는 일입니다. 그 흉터가 내 몸이 살아온 삶의 이력을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하나 하나 살피는 동안, 또 다른 많은 것들을 읽을 수 있게 될 것이고, 새로운 기쁨 하나를 더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틀림없이.

 


몸이 하는 말, 몸에 씌어진 수없이 많은 언어를 읽어가는 일은 이제 우리 몸이 하는 일로 넘어갑니다. 숨을 쉬는 것이 단순한 공기의 들고남이 아니라는 것, 먹은 것이 내 몸 안에 들어와서 어떻게 나로 살다가 나가게 되는지를 가만히 지켜보는 겁니다.
들숨이 날숨이 되는 과정, 밥이 똥이 되는 그 길고도 복잡한 과정, 그 어려운 일을 하면서 결국은 힘을 만들고 있다는 사실들을 알게 될 것입니다. 아무 생각 없이 지나치던 이것을 지켜보는 일은 어느 복잡한 화학공장을 보는 것보다도 훨씬 더 신기하고 재미있습니다.
그 어떤 나들이에서도 이만한 화려함과 정교함, 그리고 신비라고밖에 말할 수 없는 아름다움을 이제까지는 본 적이 없을 것입니다. 어떤 소설이나, 어떤 예술작품도 이것에 미칠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사람이 쌓고 이룬 모든 업적은 모두 통틀어도 사람 하나 안에서 일어나는 일에 미치지 못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지구를 깨뜨릴 만큼 엄청난 발달을 이룬 현대과학으로는 결코 설명도 이해도 안 되는 몸의 현상 앞에서 저절로 머리가 숙여지고, 큰 절을 올리고 싶은 마음까지도 들 것입니다. 그 때 가만히 일어나서 큰 절을 끝없이 올려보는 것도 괜찮은 일입니다.
아름다움이면 아름다움으로, 정교함이면 정교함으로도 이만한 걸작을 아직 사람은 만든 일이 없습니다. 요즘 복제인간을 만들었다고 떠들썩합니다. 몹시 위험한 짓을 한 것임에도 틀림이 없습니다. 유전공학의 성과라고, 온 지구가 다 시끌벅적한데, 그것도 따지고 보면 우리가 어렸을 때, 뒤가 비치는 얇은 반투명 종이를 어떤 그림 위에 올려놓고 그 그림을 따라 그린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가치도 그 정도밖에 안된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게다가 위험마저 예상되니 그런 면에서 볼 때, 복제인간이나 복제동물을 만드는 위험한 장난을 누군가가 말려야 하는데, 걱정은 걱정입니다. 돈을 복사하면 그 자리에서 중죄로 다루는 사람들이 목숨을 복사한 것은 그냥 두는 이 어처구니없는 노릇, 참으로 안타까운 현실이 아닙니다. 이것은 또한 돈이 인간의 가치보다 윗 자리를 차지한 현상으로 읽을 수도 있는 일입니다.

 


몸의 활동을 보는 것과 함께 이제 우리 몸 속으로 들어가 보는 겁니다. 가만히 숨을 고르면서 내 몸이 훑고 지나가는 자리를 더듬어 갑니다. 그러면서 몸 속의 장기들, 기관들, 뼈 속과 근육 조직, 피의 흐름을 따라서 다녀보는 겁니다. 입이 목에게 말을 하고, 배가 등에게 말을 건네는 끊임없는 의사소통이 거기 있습니다. 기관과 기관, 조직과 조직, 세포와 세포가 끊임없이 이야기를 나누는데, 거기는 농담이나 쓸데없는 말이 거의 없습니다. 그들끼리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세포와 조직, 조직과 기관도 말을 나눕니다. 온 몸이 아주 복잡하고 정교한 연락체계로 되어 있습니다.

 


예를 하나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가끔씩 혓바늘이 돋는 일이 있을 것입니다. 그 혓바늘은 먹은 것이 몸에 맞지 않는 것이라는 밥통의 언어입니다. 어떤 것은 먹자마자 바로 혓바늘이 서기도 합니다. 그럴 때는 무엇을 먹었는가를 잘 헤아려 보고, 그것을 먹지 않아야 합니다. 똑같은 것이라도 몸의 상태에 따라서 어떤 때는 받아들이고, 어떤 때는 받아들이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이렇게 몸의 상태까지 읽을 수 있는 것이 몸을 읽는 일입니다.

 


대개 입안에 생기는 탈은 밥통이 먹거리를 거부하는 것으로 들으면 됩니다. 잇몸에 탈이 나는 것은 대장이 괴로워하고 있다는 것으로 읽으면 되고 말입니다. 그럴 때는 먹기를 그치고 깨끗한 물을 마시면서 탈이 사라질 때를 기다리는 것이 슬기로운 일입니다.
몸을 읽는 데 가장 쉬운 것은 여자들의 달거리입니다. 남성과 여성을 놓고 볼 때, 여성의 생명감각이 훨씬 뛰어납니다. 그것이 바로 이 달거리에 있습니다. 달거리는 단순히 아기를 낳기 위한 성가신 장치가 아닙니다. 달거리를 통해서 여성들의 몸은 체질을 조절합니다. 몸이 산성체질이 되었을 때에는 달거리를 통해서 산성물질을 배출합니다. 다른 기관을 통한 배설보다 훨씬 뛰어난 배출의 역할을 합니다. 또한 달거리를 하게 되는 간격, 달거리의 길이와 양, 빛깔과 냄새는 모두가 몸의 언어입니다. 자체로도 스스로의 몸 상태를 조절하지만, 그것을 살펴 읽으면 훨씬 더 바르고 건강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종이기저귀를 쓸 것이 아니라, 헝겊 기저귀를 쓰도록 해야 합니다. 종이기저귀는 그저 둘둘 말아서 버리게 되어 있지만, 헝겊을 쓰면 빨래를 해야 하기 때문에 자세히 살필 수가 있습니다. 이 때의 마음 자세는 더럽다고 여기지 않는 것이어야 합니다. 몸 안에서 나오는 모든 것은 아무 것도 더러운 것이 없습니다. 오직 깨끗하지 않고 더럽다고 여기는 그 마음만이 더러운 것일 뿐입니다. 그리고 이것들은 깨끗하다고 하기보다는 거룩하다고 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그 거룩한 것을 우러러 절하는 마음으로 살피다 보면 몸이 하는 말을 하나씩 알아듣게 될 것입니다. 또한 거기서 삶이 아주 부드러워진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렇게 하나하나 읽어가다 보면 마침내 세포 하나까지도 보게 될 수 있습니다. 거기서 몸을 읽는 것은 끝입니다. 그런데 참으로 신비로운 것을 다시 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 세포 바로 너머에 우주가 있다는 것이 그것입니다. 아무리 우주선을 타고 우주여행을 하여도 결국은 우주의 지극히 일부분밖에 볼 수 없습니다. 그런데 세포를 본 다음, 거기서 저절로 보이는 우주는 모든 것을 통틀어서 한 눈에 보는 그런 우주이기 때문입니다. 사람과 우주가 하나로 이어져 있는데, 그것이 바로 세포 한 알 안에 우주가 있고, 우주 안에 사람이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현대과학과 그 과학에 의해 세뇌된 인식으로는 결코 다다를 수 없는 자리입니다. 설명도 할 수 없고, 거기 얽매인 사람들에게는 아무리 설명을 한다고 해도 알아들을 수 없는 그런 것들입니다. 그러나 틀림없이 존재하는 차원의 세계이고, 반드시 다다라야 할 세계입니다. 이미 사람을 제외한 모든 다른 목숨살이들은 그것을 읽고 거기다가 말을 나누고 있습니다. 사람도 과거에는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문명의 이기에 휩쓸리면서 그 중요한 인식기능을 잃어버리고 만 것입니다.

 


몸 읽기의 마지막 자리는 우주를 보는 일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공식은 아닙니다. 다만 감각으로 느껴지면서 홀리는 곁길로만 빠지지 않으면 마침내 생명의 궁극에 다다르게 된다는 말로 대신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때쯤이면 어떻게 사는 것이 최선이며, 삶의 길이 어떤 것인지도 분명하게 보일 것이고, 거기서 새로운 삶의 길이 열리는 것도 볼 수 있습니다.

 

그 셋, 마음의 역사 읽기
사람을 즐겁게 하는 일로 나들이가 있습니다. 새로운 곳에 가서 낯선 것을 보게 되는 것은 즐거운 일입니다. 아이나 어른이나 나들이 때에는 마음가짐부터 다릅니다. 평소 살던 곳에서 먼 곳으로 갈수록 기대는 더욱 커지고, 그래서 무엇인가 받아들일 준비가 더 많이 됩니다. 소풍보다는 수학여행이 더 큰 의미를 가지는 것과도 같을 것입니다. 늘 보던 것들도 나들잇길에서 보는 것은 다른 의미를 하고 다가오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런데 명상을 어느 정도 하다 보면, 이 나들이가 좀 시들해집니다. 아름다운 경치, 오밀조밀한 자연보다 훨씬 더 감칠맛 나는 나들이가 바로 명상을 통해서 하게 되는 마음나들이이기 때문입니다. 나이아가라 폭포나 그랜드캐년의 장관, 세계 최고봉이라는 히말라야 꼭대기, 또는 전설까지도 다 녹여버리고 말았을 것 같은 깊디깊은 바다 속의 신비가 새로운 경험이 되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한 사람이 살면서 겪은 것들이 겹과 켜를 이루면서 만들어낸 풍경이 결코 그에 못지 않기 때문에 마음나들이는 그야말로 엄청난 나들이일 수밖에 없습니다.
빛깔로도 다양하고, 높낮이며, 골짜기, 그 사이를 흐르는 물과 바람, 아픔이나 괴로움이 빚어낸 그늘이며, 절망이 떨어진 자리인 깎아지른 벼랑, 그 사이로 굽이굽이 펼쳐지며 끊길 듯 끊길 듯 이어져 온, 내가 걸어온 길을 되짚어보는 일은 그 어느 나들이와도 견줄 수 없는 새로움을 느끼게 합니다.

 


처음에는 이 길이 보이지 않습니다. 적어도 잡념층을 걷어내기 전까지는 아무 길도 안 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때는 다만 힘겨운 씨름만이 있습니다. 내려놓았는가 하면 어느 새 들고일어나고, 치웠는가 하면 값싼 옷에서 일어나는 보푸라기처럼 다시 나타나면서 도무지 가닥이 안 잡힐 것 같습니다. 앞으로 나아가기는 고사하고 늘 제자리만 맴도는 것 같이 느껴집니다.
더구나 시간은 30분이라는 짧았던 시간이 몹시도 길고 길어서, 어떤 시간이냐에 따라 시간이 늘어나기도 하고 줄어들기도 하는데, 명상의 시간은 오뉴월 엿가락처럼 끝도 없이 길게만 늘어나는 것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시간을 기다리면서 비로소 기다림을 배우게도 됩니다. 그 긴 시간을 지키면서 느긋함도 살아납니다. 그저 견디는 것만으로도 유익은 충분히 있습니다. 다만 그 유익의 댓가가 좀 모질다는 것이 괴로운 일이지만 말입니다.

 


모든 일이 다 그렇듯이 명상도 어느 정도 낯이 익을 무렵이 되면 조금씩 길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처음 산을 오르는 사람은 멀쩡히 길을 가다가도 길을 놓치고 엉뚱한 데를 헤맵니다. 그러나 산에 사는 사람은 아무리 낯선 곳이라 하더라도 일단 산에 접어들면 길을 먼저 찾습니다. 이미 십 년도 더 지난 날 약초꾼이 다니던 흔적뿐인 길도 볼 줄 알고, 아무도 지나가지 않고 오직 자기 혼자 한 번만 갔던 길도 용케 찾아서 수월하게 산을 탈 수 있습니다.

 


명상에서 마음이 걸어온 길을 찾는 것도 이와 같습니다. 조금 익숙해지면 들쑥날쑥 길이 보이다가 보이지 않다가 하는 일이 거듭됩니다. 처음에는 그게 길인지 아닌지도 모른 채 그냥 더듬어 갑니다. 간다는 의식까지도 없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좌표평면에서 보면 그는 틀림없이 가고 있는 것입니다. 때로 길을 잃어 같은 자리를 맴돌아도 가기는 가는 것이고, 그러다가 느닷없이 길을 찾아내어 앞으로 나가도 가는 것은 가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살면서 그 마음이 헤쳐낸 길을 찾는 일이 쉽지 않은 것은 복잡한 도시의 지도처럼 수없이 많은 길이 뒤엉켜 있는 까닭입니다. 아무리 보아도 어떤 것이 내 발자국인지 가늠이 안 되는 겁니다. 그러다가 길이 보이고, 길이 보일 때쯤이면 그 길 양옆이 하나같이 절경이라는 것에서 놀라움을 금치 못하는 시간이 찾아옵니다.

 


이 때부터 명상이 아주 재미있습니다. 누가 하지 말라고 말려도 자꾸 하고 싶어집니다. 굳이 시간을 정해 놓고 앉을 때뿐이 아니라, 길을 걸으면서, 그리고 일을 하다가 쉬면서도 쉽게 명상에 들어가곤 합니다. 익숙한 일을 할 때는 하면서도 명상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심지어는 잠에 들어서도 명상을 하게 된다고 합니다.

 


마음 나들이는 일단 시작하게 되면 지나온 삶을 감상하며 즐기는 것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그 지나간 날들을 확실하게 정리까지 할 수 있게 됩니다. 그 길을 걸을 때는 처음 걷는 길이라서 그 길이 지닌 의미나, 그 길에서 얻는 유익을 제대로 챙기지 못하고 지나친 경우가 대부분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지나간 일에 대해서 단순히 아쉬워하며 후회하고, 그러면서 동시에 그리움으로 되새겨보는 수준에서 그칩니다.

 


글을 쓰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에 비해서 그 정리를 잘 하는 것 같습니다. 그것은 글을 쓰는 일이 어쩔 수 없이 과거의 기억을 바탕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때로는 종교인들도 이런 정리를 잘 하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요즘 종교처럼 단지 세를 불리는 일에만 골몰해 있는 그런 종교인은 여기서는 종교인으로 분류하지 않습니다. 종교의 이름으로 장사꾼 놀음을 하는 그런 종교에서는 명상의 깊이는 이야기가 되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마음의 역사를 읽는 명상은 그것이 단순히 과거의 기억을 되살려 내어 회상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자기 자신이 몸소 구경꾼이 되어 그 때의 자신을 마치 영화를 보듯이 보는 겁니다. 그 때의 구경은 주관이 철저하게 배제된 완전한 관객의 눈으로 보는 것입니다. 문학작품도 자기 이야기이면서도 철저한 객관의 자리에서 이야기를 풀어내야 재미가 있는 법인데, 이 마음길 나들이는 어떤 미술이나 문학, 또는 가치를 통해서 얻는 감동이나 감격과는 다른 차원의 느낌으로 다가옵니다. 그것을 관객의 자리에서 다시 되짚어 볼 때에만 정리가 제대로 되게 됩니다.
하나 더 꼽을 수 있는 것은 이렇게 관객이 되어 구경을 하는 자리에서 정리를 하게 될 때, 그것이 하나의 교훈으로 이어진다는 사실입니다. 이제까지의 배움은 외우고 익혀서 그것을 응용할 수 있는 것이었는데, 여기서 배우는 것은 그 나들이를 통해서 삶의 모든 현재의 일을 꿰뚫어 알게 하는 그런 깨달음이라는 점이 다릅니다.
남의 말을 듣고, 그것을 외워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본 것을 말하게 된다는 점이 다르다는 말입니다. 거기서 참된 힘이 나온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감정은 무형의 것처럼 보이지만, 그 나름의 빛깔과 무게를 가지고 있습니다. 모든 경험과 학습에는 이 감정이 항상 개입되어 있고, 그래서 우리가 걸어온 마음의 길이라고 하는 형태뿐이 아니라, 색깔까지도 지닌 신비로운 모양을 하고 있다는 것도 이 때쯤이면 알게 될 것입니다. 이것에 가닥을 잡아 정리가 되었을 때, 그 삶은 비로소 몸의 정교한 것처럼 놀랍도록 치밀한 구조를 한 하나의 완성된 인격이 될 것입니다. 실패나 성공, 착한 행동과 못된 행동, 그리고 슬기로운 일들과 어리석은 짓들이 거기서 비로소 조화를 이루면서 하나의 작품으로 완성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기를 돌아보는 일에서 이루어지는 결과입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그저 내닫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걸어온 길을 되짚어 밟으면서 마음이 걸어왔던 길을 여행하고, 이제까지 몰랐던 새로운 즐거움 하나를 더 얻을 수 있게 될 뿐만 아니라, 거기서 자기 삶의 완전한 정리를 통해 그 삶을 하나의 작품으로 완성시켜가는 일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 나들이는 마침내 시공을 초월하는 목숨의 참꼴을 따라 거니는 보다 넓고 큰 지평의 확대로 이어질 것입니다. 마음을 읽음으로서 몸을 읽는 것이 완성되고, 그렇게 몸과 마음을 제대로 읽게 될 때, 우리 몸밖이라고 알고 있던 우주까지도 읽어내게 될 것입니다. 좁쌀을 제대로 알면 우주도 저절로 보게 된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를 비로소 거기서 알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 넷, 꿈읽기
사람이 하고 있는 일이나 지니고 있는 본질들은 참으로 알 수 없는 것들이 엄청나게 많은 듯 합니다. 그 중의 하나가 꿈입니다. 우리 옛사람들은 대개 꿈을 앞날을 예측할 수 있는 어떤 예지현상으로 이해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가 하면 서양의 심리학에서는 과거의 경험 가운데 무의식의 층에 묻혀 있던 것이 잠자는 동안 뇌의 무작위 활동에 의해서 튀어나오는데, 대부분 욕구불만과 깊은 관계가 있다고 보면서 꿈의 연구를 시작했습니다.

 


꿈은 무조건 앞일을 알려주는 것이라고만 한다면 그것은 적절치 못한 설명입니다. 그런가 하면 억압된 욕구의 표출이라고만 하는 것도 꿈을 다 말했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아직까지는 꿈의 모든 것을 정확하게 설명한 이론은 없는 것 같습니다.
꿈을 이해하는 일은 또 다른 자기이해를 위해서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이제까지의 명상은 그냥 앉아서 숨을 고르고, 그러면서 잡념을 내려놓은 다음, 마음 안의 흐름을 따라가기만 하면 되었는데, 꿈을 읽기 위해서는 조금 성가신 작업을 해야 합니다.

 


먼저 머리맡에 필기구와 공책을 늘 마련해 두어야 합니다. 자다가 꿈을 꾸고 깼거든 곧바로 일어나서 그 꿈을 적습니다. 천천히 하나 하나 다시 떠올리면서 적어보는 겁니다. 그렇게 바로 적지 않으면 자기가 꾼 꿈의 대부분을 곧 잊어버리기 때문입니다. 특히 염두에 두어야 할 일이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인상 깊게 남는 꿈은 오래 기억도 하고, 중요하나 꿈이라고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꿈을 깨면 곧 잊어버리거나, 뒤숭숭해서 무슨 꿈인지 얼른 가닥이 잡히지 않는 것은 개꿈이라고 하면서 대수롭지 않게 여기기도 합니다. 건강이 좋지 못한 사람들도 이런 꿈을 많이 꾸기 때문에 단순히 건강의 탓이라고만 돌리고 마는 것도 흔히 볼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사소해 보이는 꿈이라고 하더라도 꼼꼼히 적어야 합니다. 어떤 꿈을 사소하다고 하는 것은 의식의 편견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의식이 편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느끼기까지는 많은 수련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 편견으로부터 벗어나기만 한다면 그는 어른이라고 불려도 괜찮을 사람입니다.

 


그렇게 거의 모든 꿈을 꼼꼼히 적어가다 보면 자기가 꾼 꿈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를 알아듣게 됩니다. 그것은 이제까지 이해되어 온 꿈과는 아주 다른 것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실제로 앞일을 미리 예고하는 꿈도 있고, 단순히 과거의 회상인 꿈도 있고, 욕구불만의 표출인 꿈, 또는 건강의 상태를 말하는 꿈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꿈이 있습니다.

 


그런 꿈을 가지고 다른 사람에게 가서 꿈풀이를 해 달라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것은 별로 쓸데없는 짓일 뿐입니다. 그렇게 남의 꿈을 풀어준다고 하는 것에는 자신의 몸을 남에게 보이면서 고쳐달라고 하는 것과 비슷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목숨들에는 어느 목숨에게나 헤아릴 수 없을 만큼의 엄청난 정보가 담겨 있습니다. 그 정보를 다 안다는 것은 처음부터 불가능한 일인지도 모릅니다. 다만 이 모든 정보를 통해서 드러내고 있는 현상들에만 집착해 있는 것이 현대의 과학수준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물론 과학자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면, 과학을 오해하고 있다고 하거나, 형편없는 무식한 소리라고 한 소리 들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현대의 과학수준이 이르러 있는 자리가 아직은 그렇게 지적을 해도 크게 그릇된 것은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도 필요할 줄 압니다.

 


아무튼 직관을 통해서 그 다양하고 수많은 정보들이 어우러지면서 말하는 본질이 무엇인가를 알 수 있게 될 때, 과학의 수준이 어떤 것인지를 보다 쉽게 말할 수 있습니다. 다만, 그렇다고 해서 과학을 무시하자는 말은 아닙니다. 그 나름의 성과도 있고, 깊이도 있다는 것을 모르지는 않습니다. 깨달음의 차원에서 과학과의 접점이 없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그 접근방법이 다르다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고, 과학의 출발점이 표면현상부터 시작한다면, 명상의 출발점은 자신의 내면으로부터 출발하는 차이가 있다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깨달음의 차원에서 주고받는 말은 단순히 지식의 종합을 통해서 내려진 결론을 말하는 것과는 확실히 다른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깨달음에 이르는 길 가운데 하나가 꿈을 정리하는 작업입니다. 꿈이 말하는 것은 마음의 상태뿐 아니라, 몸의 상태, 그리고 보다 깊은 차원의 생명현상에 대한 목숨의 느낌에 이르기까지 아주 다양합니다. 꿈을 읽으면서 도달하게 되는 것의 예 하나를 들어 보겠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봄이면 뒤숭숭한 꿈을 꾸게 마련입니다. 잠에서 깨어 조금만 지나면 그냥 잊혀지고 마는, 어찌 보면 아주 사소해 보이는 그런 꿈들입니다. 그렇게 꾸던 꿈이 봄 풀이 싹이 터 한창 자랄 때면 거의 없어집니다. 사람에 따라서는 이 봄꿈을 꾸지 않는 사람이 있고, 일년 내내 이 꿈을 꾸는 사람도 없지는 않습니다.

 


이런 꿈은 기운이 허해서 꾸는 꿈일 수도 있다고 합니다. 아마 일년 내내 뒤숭숭한 꿈에 시달리는 것은 그렇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기운이 허해서 그런 꿈을 꾼다고 걱정할 것은 없습니다. 기운이 허하다는 것 또한 몸 안에 있는 기운의 균형이 일그러져 있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고, 기운을 북돋우는 약을 먹는 것보다는 기운을 가다듬는 것이 우선이기 때문에 차츰 좋아질 수 있습니다.

 


아무튼 봄꿈이라고 할 수 있는 그 뒤숭숭하고 내용도 뚜렷하지 않은 꿈은 그것이 사람의 유전정보 안에 있는 제자리살이의 유전정보들의 흔적이라는 점입니다. 가을에 잠들어 겨울을 보내던 제자리살이의 목숨들은 봄이 오는 것을 느끼면서 힘이 생깁니다. 이 때부터 잠들어 있던 기운이 씨앗이나 움, 또는 제자리살이들의 세포에서 조직으로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그것에 대해 움직임살이의 목숨도 반응을 합니다. 그 반응이 봄꿈이라는 형태로 나타나는 것은 꿈을 읽어가다 보면 누구라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다른 움직임살이들은 이 때부터 내분비 기능이 왕성해지기 시작해서 4월에서 6월 사이에 발정과 교미, 그리고 새끼를 낳는 일까지 이어집니다.
다른 모든 부분에서도 제자리살이와 움직임살이는 조화를 이루면서 운명공동체로서의 삶을 펼쳐내는데, 이것은 삶의 주기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고, 그것이 어떤 형태로든 서로 감지할 수 있는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제자리살이와 움직임살이의 유전정보가 매우 비슷하게 생겼다는 최근 과학의 발견이 또한 이것을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결국 꿈은 또 다른 형태의 생명현상이라는 말입니다.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이라고 버릴 일도, 섣불리 해몽을 시도하려고 할 일도 아닙니다. 더구나 우스운 것은 자기가 꾼 꿈을 남에게 가서 묻는 일입니다. 늘 하는 말입니다만, 나를 알고, 내게 대해서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나 자신뿐입니다. 내가 나를 모르고 산다는 것은 남의 삶을 산다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내 일을 남에게 묻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하나 살피며 가다 보면 마침내 열리는 하늘을 볼 수 있게 됩니다.
꿈을 읽는 일, 그것은 목숨을 읽는 또 하나의 방법입니다. 그리고 그 꿈 또한 다른 형태로 드러난 자아의 목소리라는 것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하여 꿈을 읽고 나면 자신이 꾼 꿈이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를 알게 되고, 그렇게 하여 한 걸음 더 깊이 자기에 대한 이해를 가지게 될 것입니다.

 

그 다섯, 보이는 것 따라가기
참선 수행에 있어서는 선 수행을 하는 동안은 아무 것도 읽지 말라고 합니다. 거기에는 그럴 만한 까닭이 있습니다. 참선을 지도하는 스승이 있어서 그 스승으로부터 배우면 되는 까닭입니다. 그러나 명상은 혼자서 하는 것을 기본으로 하기 때문에 적당한 도움이 되는 책을 읽는 일은 허용됩니다.

 


눈이 열리는 것만큼 공부가 뒤를 따라 준다면 훨씬 더 많은 것을 쉽게 깨달을 수 있을 것입니다. 무(無)에 대해서 공부를 할 마음이 일어났을 때 노자의 도경에서 무(無)와 허(虛)의 관계를 도움받을 수 있고, 그것이 반야심경에서의 공(空)과 어떤 같은 점과 다른 점이 있는지를 살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도경을 공부하되 의미있는 해석이나 관점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자기 결론을 얻을 수 있는 방향으로 공부를 해 나가야 합니다. 그 결론에 이르기까지는 도경을 잘 아는 사람을 만나서 이야기를 들을 수도 있고, 제대로 된 책을 통해서 배울 수도 있습니다. 비슷한 관심을 가진 사람이 모여서 함께 공부하고 토론을 하면서 배워나가는 것은 더욱 좋은 방법일 것입니다.

 


어려운 것은 불교나 기독교에 대한 것들을 공부할 때입니다. 그 방면의 지도자를 만나서 도움을 받을 수 있는데, 이 때 주의해야 할 것은 포교를 하려는 사람에게서는 아무런 도움이 안된다는 점입니다. 요즘에 와서 제삼자의 입장에서 자기 종교를 말해주는 사람이 좀 있는 것 같은데,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런 사람을 만나는 일이 그리 쉽지는 않습니다. 포교를 하려는 사람에게서는 그 종교를 제대로 듣기가 어렵습니다. 잘못 접근을 했다가 그 종교에 관심을 보이고 있는 것을 포교의 기회로 읽은 사람을 만나면 오히려 곤혹을 치를 수 있으니 조심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절망할 일은 아닙니다. 내 기운이 무르익으면 제대로 된 풀이를 해 줄 사람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어떤 사람을 만나서 가르침을 받겠다는 마음가짐은 처음부터 버리는 것이 좋습니다. 오직 해야 할 일과 지녀야 할 마음의 태도는 명상에 모든 힘을 기울이는 일입니다. 그러면서 자기정리가 되고, 기운이 무르익게 되면 만날 만한 사람을 만나게 되고, 꼭 필요한 지혜의 흔적들을 접하게 될 것입니다.
마음공부를 하는 데 반드시 거치고 나가야 할 공부가 있다면, 한국의 전통종교인 굿에 대한 것, 한 번도 한국사의 표면에서 두드러진 역할을 하지는 못했지만 한국인의 삶에 엄청난 영향을 끼친 주역 사상, 그리고 풍수 사상과 동학운동, 민족운동으로서의 삼일운동, 해방 후의 현대사와 한국 문화에 대한 큰 흐름을 잡는 일이 필요할 것입니다.

 


흔히 무속이라고 하는 종교현상은 한민족의 기원을 설명하는 설화에까지 그 뿌리가 매우 깊습니다. 언뜻 보면 무척 무모하고 유치한 종교현상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무속의 바람직하지 못한 면 때문에 사람들이 좋지 않게 생각한 부분도 없지 않습니다. 그러나 한민족의 깊은 심층심리 속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이 흐름을 바로 보지 못한다면 큰 눈을 뜨는 일이 그만큼 더디고 어려울 것입니다. 다만 굿과 그 종교현상을 이해는 하되, 거기 빠져서 머무르는 일은 보다 뒤로 미뤄두어야 할 것입니다.

 


도교 또한 한겨레의 사상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한국인으로서의 가치관과 전통, 그리고 위기 때마다 대안으로 제시된 희망이 도교로부터 나온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다소 황당해 보이는 신선사상은 우리 겨레가 지향하던 인격의 원형으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한 내용에 걸리지 않고 자신의 눈으로 이해하려는 자세를 가져야 할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말도, 자신의 전이해를 통한 편견도, 그리고 도교에서 말하고 있는 문자의 뜻에 걸리지도 않으려면 그것보다는 명상 자체에 비중을 두어야 합니다.

 


주역 사상도 우리 겨레와는 뗄래야 뗄 수가 없는 밀접한 관계에 있습니다. 흔히 주역은 점을 배우는 이론체계라는 이해를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것은 그리 바람직한 관점이 아닙니다. 주역을 접할 때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동양인의 시각과 관점으로 설명하려는 우주의 기운에 대한 것이라는 점에 눈길을 맞추어야 할 것입니다. 점을 치는 것은 주역의 부록일 뿐입니다.

 


풍수도 우주의 기운 가운데서 땅의 기운을 읽는다는 점에 있어서 매우 요긴한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자료입니다. 묘지 자리나 집터, 또는 샘 자리를 보는 눈을 여는 것은 풍수사상의 각론입니다. 그보다는 풍수를 통해서 추구하고자 하는 자연과 인간의 조화라는 것에 초점을 맞춰서 접근을 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입니다.

 


우리 문화를 곱새기는 일도 명상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우리 옛 문화가 조화로운 생명을 지향하고 있다는 것을 찾아내면, 거기서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하는 해답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밖에 우리 것 가운데서 생명을 지향하고 있는 사상이나 운동을 살펴보고, 생명과 상극의 자리에서 생명 경시풍조, 생명파괴의 동력이 된 것들이 무엇인지도 한 마디로 설명할 수 있도록 정리해 둘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 것들은 굳이 우리 것이 아니라 하더라도 내 것으로 받아들여 소화시킬 수 있는 폭넓음도 필요합니다. 심리학 가운데서 융의 이론이라든가, 성자라고 불리는 프란시스의 삶, 인도의 큰 어른 간디에 대한 내용들도 눈여겨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런 내용을 더 공부하려고 할 때, 그 방면의 잘 아는 사람을 찾는 것이 좋다고 했는데, 이 때 주의해야 할 일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을 만나기 전에 혼자서 밑그림을 그려놓고 어떤 기대를 하지 말아야 한다는 점입니다. 그러다 보면 그 사람으로부터 받아들여야 할 내 마음이 좁아져 호리병의 목처럼 되기 때문입니다. 이미 앞서 말한 것처럼 그저 그 사람과 기운을 나눈다고 생각하고 텅 빈 자세로 마치 명상을 하듯이 마주하면 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은 책을 읽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글에도 기운이 있고, 책에도 기운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좋은 기운을 가진 책을 고를 줄 아는 눈을 지녀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길동무로부터 도움을 받는 것도 좋을 것입니다. 사기(邪氣)가 넘실거리는 책들은 언뜻 보면 재미도 있어 보이고, 그럴듯해 보이기도 하는데, 대부분 함정이 있거나, 곁길로 빠지게 하는 힘을 지니고 있으므로 멀리해야 합니다. 주장이 강한 내용, 교리를 담고 있는 책이나 글, 적을 상정해 놓고 쓴 글이나, 또는 책의 내용과는 상관없는 속셈을 가지고 쓴 것들은 특별히 주의를 해야 합니다.

 


어쩌다가 그런 책들을 읽게 되면 '지금 내 기운이 이것과 잘 어울릴 수 있는 때로구나' 하고 먼저 알아챈 다음, 그 책이 드러내고 있는 속셈이 정확하게 무엇인지를 보면 됩니다. 보겠다는 마음을 내려놓고 그저 가만히 명상에 들어가다 보면 그게 보일 것입니다. 좋아보이는 것이든지 아니면 거슬리는 것이든지 명상에 들어갈 때는 일단 모두 다 내려놓고 텅 빈 마음으로 숨만 바라보면 된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하면 길이 훨씬 넓어질 것입니다. 그들이야말로 명상길에 있어서 만나는 또 다른 벗이고 스승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스승은 벌레 한 마리도 스승일 수 있고, 어느 날 느닷없이 얼굴을 훑고 지나가는 바람도 스승일 수 있으며, 그럴 때는 그 벌레나 바람결이 어떤 경전과도 맞먹는 의미와 무게를 지닌다는 것도 아울러 짚고 넘어가야 할 일입니다.
공부를 하는 데 있어서, 그 공부하는 방법은 느껴지는 것만큼 따라가면 된다는 점입니다. 그것이 무속에 대한 것이든, 아니면 도교나 기독교, 또는 어떤 사상이나 흐름에 관한 것이든, 억지로 하려고 해서는 얻을 것이 별로 없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보이는 것만큼 따라가기' 그것이 바로 공부의 가장 좋은 길입니다.

 

여섯째마당. 보기
그 하나, 본다는 것에 대해서
느낀다는 것과 읽는 것, 그리고 본다고 하는 것은 어떻게 보면 같은 말일 수 있습니다. 이 세 가지 개념은 '안다'고 하는 것도 어떤 언어에서는 명상에서의 읽기가 끝난 뒤에 일어나는 '보임'을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안다'고 하는 것은 지식으로 체계화된 것을 배우기라는 행위를 통해서 익힌 것이라는 뜻이라고 상정해 놓고 이야기를 풀어가고 있다는 것을 미리 밝혀둡니다. 오늘날의 지식, 특히 초보 단계의 지식을 놓고 헤아린다면 그것이 너무도 생명을 거스르는 방향으로만 가고 있다는 점을 꼽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야말로 이차방정식을 풀어서 그 답을 가지고 밥을 짓는 것도 아니고, 원소기호를 외워서 기차표를 사는 것도 아닙니다. 대부분의 아이들은 '배우기'라는 과정을 아주 못 견뎌 합니다. 요즘엔 많이 좋아졌다고 하는데, 그래도 학교라는 구조는 아이들을 질식시키는 큰 틀을 내려놓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문화의 흐름이 목숨을 복판에 놓고 전개될 때까지는 하나도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 구조에서 전달되는 지식은 거의가 바람직한 것이 못 됩니다. 사람을 살리려는 교육이 아니라, 교육이라는 제도를 존속시키기 위해서 교육이 존재하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교육에 있어서 또 하나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교육이 상품이 되었다는 점입니다. 영리를 목적으로 하고 교육은 수단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런 교육을 받으면서 아이들이 건강하게 자랄 것이라고는 기대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리고 이 교육의 결과인 '안다는 것'이 목숨살이와 연결될 길은 아예 없습니다.

 


다만 그런 교육을 받으면서도 목숨에 대한 관심과 사랑을 따라가는 사람이 있기는 합니다. 이것은 목숨이 지니고 있는 꺾이지 않는 분출이지 그 자체가 교육에도 그만한 것은 담겨있다는 것으로 읽어서는 안될 현상입니다. 교육이 참으로 배우는 사람 중심이 된다면, 교육환경은 엄청난 지각변동을 일으키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그 교육을 통해서 느끼고 읽고 보는 눈이 트일 것입니다. 교육현장에서의 만남이 느낌을 키우는 일로, 거기서 배우고 읽고 쓰기가 자연과 우주의 흐름을 읽는 일로, 그리고 그 느낌과 읽어냄이 참으로 사람이 보아야 할 것을 보게 되는 일로 이어질 것입니다.

 


명상은 누구나 어디서나 할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자연과 더불어 살던 시대에는 아이들이 충분한 명상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지각되지 않은 명상이기 때문에 그것을 명상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인가는 좀 더 따져봐야 할 일이지만, 어쨌든 명상의 소양을 충분히 가꾸면서 자라고 있었다고는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자라던 풍경은 충분히 명상의 요소를 가득히 담고 있었다고, 거기서 명상으로 이어가는 일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명상의 마지막 자리는 '보는 것'입니다. 느낀다는 것은 막연한 개념입니다. 실체가 있다는 것을 느끼기는 하는데, 그것이 또렷하게 보이지는 않습니다. 그 느낌은 맹인이 점자를 처음 만졌을 때를 생각하면 쉽게 이해가 될 것입니다. 아직 그것이 무슨 뜻인지는 잘 모르지만, 그것을 익힌 다음에 어떻게 될 것인지는 알 수 있습니다.

 


느낌이 커지면 읽기가 됩니다. 읽기는 부분을 보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늘이나 땅, 살아있는 것들 하나 하나를 그 개별의 존재로 보면서, 그것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그리고 그들이 하는 말이 무엇인지를 알아채는 것이 '읽기'입니다.
바람에서 바람을 읽고, 물에서 물을 읽고, 살아 움직이면서 끝없이 변화해 가는 자연의 움직임을 읽어가는 것, 거기서 자기만의 눈이 생기게 되고, 마침내 그 눈이 다 열렸을 때 모든 것이 한 눈에 들어오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보는 것'입니다.

 


보는 순간 입이 열립니다. 말을 하되 외워서 읊어대는 것이 아니라, 듣는 이의 눈을 뜨도록 자극하는 말을 할 수 있게 됩니다. 이 입이 떨어진 자리는 참으로 놀라운 자리입니다. 그것은 기독교에서 말하는 거듭남이라는 것과 비슷한 것입니다.
보게 되면 또한 자기가 무엇을 하면서 살아야 할 것인지를 알게 됩니다. 그렇게 찾으려고 애쓰던 길이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이 길을 본 다음에 펼쳐내는 삶은 이전의 것과는 아주 다릅니다. 자기를 본 자리로부터 시작되는 삶은 이전의 것과 겉으로 보기에는 똑같은 것으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때로 그 삶은 커다란 방향전환을 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이제까지 살아오던 삶의 수단인 직업이 자신의 기운과 잘 어울리는 것이었다면 그 직업은 계속해서 그의 일터가 될 것입니다. 다만 삶의 내용에 있어서는 커다란 중심이동이 생기게 됩니다. 삶의 목표나 관심이 자신과 가족, 또는 어떤 추구하던 가치관으로부터 목숨이나 깨달음 쪽으로 바뀌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깨달음이 목표가 되던, 목숨이 목표가 되던 살아있음에 대한 우러름과 그에 대한 깊이있는 통찰력은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이제까지 마지못해서 하던 일에 이끌려 다녔다면 그 일을 버리고 새 일을 찾게 될 것입니다. 부적절한 인간관계의 청산이 이전과는 달리 쉽게 이루어질 것이며, 그가 본 길은 틀림없어서 그 일을 해 나감에 있어서의 추진력은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일 것입니다.
또한 이제까지는 삶을 헤쳐나가는 길에 걸림돌이 되는 사람도 많이 만나게 되고,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만났는데 그에게 실망하던 일도 많았을 터이지만, 이제부터는 그런 인간관계는 잘 생기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게 만나고 싶어하던 좋은 사람, 결이 고운 사람, 큰 어른을 쉽게 만날 수 있게 된다는 것도 길을 보게 된 자리에서 일어나는 일들입니다.

 


수행의 끝은 종교지도자가 되는 것으로 반드시 결말이 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명상수행이 어느 정도의 단계에 다다르면 그는 이미 종교지도자로서의 자질까지 갖추고 있게 될 것입니다. 다만 요즘 세상에서 말하는 그런 종교지도자들과는 차원이 다르다는 것은 이미 앞에서도 말한 바가 있습니다. 그런 차원은 종교성이라고 하기보다는 그냥 '어른'이라고 해 두는 것이 좋을 듯 싶습니다.

 


소위 말하는 '적성에도 맞지 않는 일'을 마지못해 하면서 스스로의 가슴에 독이 가득하게 고이는 일은 여기서는 찾아볼 수 없게 됩니다. 그것이 우리 시대에 많은 사람들이 염려하는 사십대의 돌연사의 원인이 됩니다. 그것을 한 마디로 설명한다면 그게 또한 '기가 막혀' 죽는 것이기도 합니다. 막혔던 기운의 흐름을 뚫어주는 것이 명상이므로, 명상 안에서는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없습니다.

 


이렇게 '본 사람'이라면 나이를 먹어서 소외된 노인으로 남는 일도 없을 것입니다. 그는 이미 한 사회에서 든든한 정신의 지주가 되어 있을 터이기 때문입니다. 그 자신을 아무도 알아주는 사람이 없다 하더라도 그것 때문에 삶의 의미를 상실한 무기력한 노인으로 남지는 않게 됩니다.
본 사람은 반드시 말을 하게 되어 있고, 그 말은 사람이 알아듣지 않으면 하늘이나 땅이 알아듣게 되어 있습니다. 좀 황당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그렇게 우주의 기운과 소통이 되는 삶을 사는 것만으로도 인생은 넉넉하게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어른이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그 사회는 그만큼 살만한 곳이 되고도 남습니다. 기운이 무르익으면 반드시 그런 어른이 사람들을 이끌어가는 스승 노릇을 하게 될 것이고 말입니다.

 


때로 명상을 한다고 하는 사람들이 종교를 바꾸는 경우도 없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또한 그리 살가운 모습은 아닙니다. 명상은 자기 종교에 대해 실망을 하게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자기 종교의 참 모습을 보고, 그 종교를 통한 구도의 가능성을 읽는 것도 명상의 한 결실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종교를 바꾸는 명상가가 있다면, 또는 종교를 바꾸도록 종용하는 명상지도자가 있다면 그것은 명상의 초기 단계거나, 보아야 할 것을 다 보지 못한 것으로밖에는 볼 수가 없습니다. 특별히 문제가 있는 종교집단이 아니라면, 모든 종교에는 나름의 가치가 있고, 그 종교를 승화시켜 구도의 길을 걷게 하는 기능이 있기 때문입니다.

 


종교를 바꾸는 것보다는 자기 종교에 충실하고, 그 종교를 보다 바람직한 종교가 되게 하려는 노력을 하게 되는 것이 명상의 또 다른 효과라고 할 수 있고, 그렇게 되는 것이 마땅합니다. 20세기의 종교현상은 종교가 종교의 본질을 잃고 자본의 논리를 따라 변질, 또는 타락을 한 시기였습니다. 만일에 기독교에 실망을 하여 불교로 종교를 바꾸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불교에서도 만족할 수 없을 것입니다. 거꾸로 불교에서 실망을 한 사람이 기독교에 온다고 하더라도 역시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 둘, 몸과 목숨의 참 꼴 보기
앞에서 '본다는 것은 보지 못하는 것'이라는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무엇엔가 눈길을 줄 때, 다른 모든 것들을 못 보게 된다고도 했습니다. 보는 줄 알고 있지만 보지 못함, 눈을 뜬 줄 알고 있으나 사실은 감고 있는 상태가 그것입니다. 이제 말하고자 하는 보는 일은 그것을 넘어선 '보기'에 대한 이야기라는 것을 다시 한 번 강조합니다.

 


가장 먼저 보게 되는 것은 몸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염처경에서도 네 가지 염처가 있는데, 그 첫째 염처가 몸을 보는 '신념처(身念處)'입니다. 볼 줄 알고 보면 이전과는 다른 몸이 보일 것입니다. 오장육부를 보는 것이라든가, 몸의 역사를 읽는 것은 앞에서 이야기했으니 이제 좀 다른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그것은 살아있는 몸은 기운이 다니는 길로   이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그 길이 시작되는 자리는 오장육부이고, 각각의 길에는 오장육부의 이름이 붙여져 있습니다. 염통으로부터 시작되는 심기맥, 간으로부터 시작되는 간기맥, 쓸개로부터 시작되는 담기맥, 허파로부터 시작되는 폐기맥들로부터, 콩팥의 신기맥, 핏줄에서부터 시작된 심포기맥, 위기맥, 소장기맥, 비기맥, 대장기맥, 방광기맥, 췌장기맥이 있고, 이 모든 기맥의 중심에 삼초기맥이 있습니다.

 


이 길에는 각각 그 가다가 머무르는 정류장쯤 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을 경락이라고 부릅니다. 그렇게 길을 따라 흐르는 기운은 제 시작된 길에서 몸 바깥쪽으로 흐르면서 맨 끝에는 세포 하나 하나에까지 다다르게 되고, 거기서 바깥에 흐르는 기운과 만납니다. 조화와 균형이 중요하다고 하는 것은 내 몸 안을 흐르는 기운과 밖에서 흐르는 기운이 만난다는 것을 염두에 둘 때에도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경락과 치료에 대해서는 아주 쉽게 된 책이 있는데, 그것은 사계절출판사에서 나온 문익환 목사님이 지은 것으로 『더욱 젊게』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을 꼼꼼히 읽는다면 보다 쉽게 건강한 몸을 배울 수 있을 것이고, 주변의 아픈 사람에게도 많은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경락에 대한 것을 보는 일에 많은 훈련도 될 것입니다. 길을 미리 이해하고 나면 기운의 흐름을 더욱 쉽게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보이긴커녕 느껴지지도 않는데, 책에 있는 것들을 억지로 느껴보려고 하거나, 느낀다고 스스로에게 거짓말을 하는 자기속임수에 빠지지 말아야 한다는 점입니다.

 


그렇게만 한다면 이 경락은 명상을 해 나가는 동안 여러 가지로 보이게 될 것입니다. 가만히 앉아서 숨을 가다듬다 보면 가벼운 경련이 일어나는 곳들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경락이 살아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또한 진동도 오는 일이 있는데, 그것도 경락과 관계가 있는 것임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진동은 명상에 들어가서 얼마 안 되어 오는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은 끝내 진동이 오지 않는 사람도 없지는 않습니다. 진동이 심할 경우에는 몸이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비틀리기도 하고, 매우 큰 움직임으로 의지와는 상관없이 움직이기도 합니다. 가벼운 경련이나 진동이 올 때에는 그것을 그냥 지켜보도록 하면 됩니다. 정도가 너무 심하면 다리를 풀고 진정을 한 다음에 계속하도록 해야 합니다. 모든 것이 몸이 회복되느라고 생기는 현상이지만, 지나치게 되면 좋지 않은 결과가 올 수도 있기 때문에 풀어주고 다시 계속하라는 것입니다.

 


기운을 말하는 데 있어서 또 하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상허하실(上虛下實)이라는 것과 수승화강(水昇火降)이라는 두 개념입니다. 몸의 위쪽은 비워두고, 아래쪽에 중심이 모아지는 것이 상허하실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아래쪽은 비우고 위쪽을 채우면서 살아갑니다. 머리를 중요하게 여기는 것도 같은 흐름으로 볼 수 있습니다.

 


가슴이 채워지다 보면 어깨가 굳게 되어 있습니다. 어깨가 굳는 것만큼 생각도 경직되어 탄력이 줄어들고, 갖가지 머리앓이도 생깁니다. 뿐만 아니라, 몸 안의 다른 기관들도 잇따라 고장이 생길 수 있습니다. 다혈질인 사람들, 자주 놀라는 사람들, 별 일도 아닌데도 쉽게 숨이 가쁘거나 혈압이 높아지는 사람이 모두 어깨에 힘을 빼고 가슴을 비움으로서 좋아질 수 있는 길이 열립니다.

 


거듭해서 몸의 중심을 아래쪽에 두고 가슴을 비워가다 보면 칭찬이나 비난에도 침착해질 수 있게 됩니다. 자기를 잃는 것이 아니면 그 어떤 것도 양보할 수 있는 넉넉함도 생깁니다. 사람이 믿음직하고 든든한 것도 모두 가슴을 비우고 어깨에서 힘을 빼고 살 경우에만 가능해집니다. 지금 어깨가 움츠러져 있거나, 힘이 들어가 위로 치켜 올라가지는 않았는지 살펴보십시오. 그리고 일부러 어깨를 툭 떨어뜨려 보십시오. 한결 마음까지 가볍고 편안해진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 다음에 보아야 할 것은 생명현상입니다. 이것도 또한 기운을 중심으로 해서 보아야 함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수기(水氣)가 위, 화기(火氣)가 아래, 곧 수승화강이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냥 놔두면 물은 아래로 내려가려는 성질이 있고, 불은 위로 올라가려고 하는 성질이 있습니다. 화기가 위로 올라갈 때 위쪽이 가득하게 되는 상실(上實)의 상태가 되는 것은 물론입니다. 이렇게 위로 올라가려는 화기를 끌어내리는 일도 명상에서 얻게 되는 유익이고, 명상을 통해서 유익이고, 명상을 통해서 화기는 끌려 내려오고 수기가 위로 올라가는 것은 보게 될 것입니다.

 


바람직한 상태는 수승화강인데, 그것만으로 모든 것이 다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수승화강은 제대로 되어 있는데, 이것의 균형이 잡혀있지 않은 경우가 있습니다. 수기는 엄청나게 큰데 화기는 시원찮은 것이 그런 경우입니다. 수기가 크고 화기가 작으면 생명현상 자체가 시원찮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사람은 적게 먹어도 소화가 잘 안 되고, 늘 잔병치레를 합니다. 큰 일은 해 내지 못하지만 섬세한 일은 아주 잘 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화기를 키우기 위해서는 승부가 걸린 운동을 하면 도움이 될 것입니다. 명상을 하기에 쉬운 체질도 주로 이런 수강화약(水强火弱)의 사람들입니다.

 


그와는 반대로 수약화강(水弱火强)의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활동하기를 매우 좋아하고, 무슨 일에나 적극 나서며 승부가 걸리는 일을 즐기고, 사람도 아주 잘 사귑니다. 웬만해서는 잘 앓지도 않고 건강에 자신이 있다고 자부를 하기도 합니다. 그러다가 한 번 앓게 되면 곧 죽을 것처럼 대단하게 앓습니다. 잔병치레를 하는 사람과는 달라서 근육과 뼈대는 힘이 세지만, 대신 세포의 저항력은 좀 떨어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40대 돌연사도 이런 사람에게서 쉽게 일어납니다. 충동에 약하고, 끈기가 적기 때문에 이런 쪽을 보완하려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명상 같은 것에는 큰 관심도 안 보이는 것이 대부분 이런 사람들인데, 이런 사람이 명상을 시작하게 되면 의외로 쉽게 깨우침에 다다르기도 합니다. 다만 유혹에 약하기 때문에 곁길이 보이거나 구덩이가 있으면 그런 곳에 잘 빠지게 되므로 특별히 조심을 해야 합니다.
여기서 주의를 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를 보고 알았기 때문에 없는 쪽을 보완한다고 무리를 하는 경우입니다. 명상은 '오직 나 자신으로 살게 하는 것'이지 초인이 되게 하는 방편이 아니라는 것, '지금 여기서 제대로 살게 하는 것'이지 여기가 아닌 어떤 내세나 무릉도원을 살게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무리를 하는 것은 목숨에는 결코 보탬이 될 수 없습니다. 서두름과 억지는 목숨에는 아무런 도움이 안 됩니다.

 


한계의 보완은 있을 수 있지만, 한계의 완전한 극복은 무모한 시도라는 말입니다. 몸과 목숨의 참 꼴을 보는 것은 내가 나로 살 수 있는 최선의 길을 본다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리고 삶의 여유와 즐거움은 거기서부터 샘으로 터져서 솟아나게 된다는 것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나를 보고 나면, 비로소 남도 보이게 됩니다. 나를 못 보았을 때는 남을 보면 그의 어느 한 면만을 봅니다. 그래서 나쁘다고 하기도 하고, 좋다고 하기도 하는데, 그것은 그 남을 정확하게 보는 것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굴절유리를 통해서 한 번, 또는 여러 번 굴절된 상대방의 상을 보는 것이며, 이것은 달리 말하면 모두가 그릇보기이고, 오해로 가는 길목일 뿐입니다. 편견으로 인한 실수는 참으로 많은데, 거의 대부분의 비극들은 이 편견과 오해로부터 시작됩니다.

 


그러나 나를 보고 난 뒤에는 그 누구를 보더라도 있는 그대로를 볼 수 있기 때문에, 이런 터무니없는 실수에 빠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 때서야 비로소 바람직한 사람사귐이 가능하게 됩니다.
그렇지 않은 인간관계에 있어서는 금방 간이라도 내어 줄 것처럼 곰살궂게 굴다가도 이내 돌아서서 싸늘해지기도 하고, 죽이고 싶을 정도로 미워한다고 했다가 곧 그것을 후회하게 되는 수도 있습니다. 그 모든 것이 바람직하고 올바른 인간관계로 가는 데는 걸림돌이 된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더군다나 터무니없는 것은 말도 안 되는 뻔한 결과가 뻔히 보이는 데도 엉터리없는 사람을 따라다니면서 뚱딴지 같은 짓을 하는 일들입니다. 그 때문에 사회에 큰 문제를 일으키기도 하고, 개인이 파멸되는 일도 많았습니다. 마약에 중독이 된다든지, 이상한 종교현상에 집착한다든지 하는 것들이나, 교활한 정치지도자 밑에 가서 줄을 서는 짓이라든지, 또는 이익이 있으면 모이고 그게 다 바닥나면 흩어지는 사람답지 못한 일들도 다 그런 것입니다. 먼저 나를 보고 나면 그런 일들은 그저 웃고 넘어갈 일들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 셋, 모든 것이 하나임을 보기
최근에 이르러서 목숨에 대한 새로운 이해에 다다른 여러 이론들이 나왔습니다. 지구도 하나의 생명체라는 이론은 이미 오래 된 얘기였지만, 모든 목숨살이들은 각각 떨어진 홀로서기만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각각의 떨어져 홀로 살아가는 것처럼 보이는 것들이 사실은 혼자 자기만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보다 큰 하나의 목숨 덩어리를 이루고 있다는 이론에 이르기까지 많은 시각의 확대가 있었습니다.
보는 것 가운데 으뜸은 앞에서도 말한 '있는 그대로 보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버려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자기중심주의, 인간중심주의, 이기주의, 집단이기주의가 그것입니다. 어떤 것에 초점을 맞춰놓고 그것을 중심, 또는 중앙이라고 한다면 거기서 시각의 왜곡이 일어납니다. 자신을 중심으로 받아들이고 해석하고 행동하는 것은 비극의 또 다른 뿌리입니다.

 


서구문화는 그 동안 자기중심주의, 또는 자기우월주의를 바탕으로 해서 다른 세계와 문화나 바라보았습니다. 그런 눈길에 비친 다른 세계의 문화나 가치관은 미개하고 열등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 저급한 문화를 저희들이 발전시킨다는 매우 오만한 자세를 보여왔습니다. 그 결과는 상대방을 파괴하는 것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비틀린 눈길을 고치지 않으면, 그 어떤 것도 있는 그대로 볼 수 없습니다. 성철스님이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라고 했다는 말은 있는 그대로 보기를 잘 드러내는 짧으면서도 힘이 있는 가르침입니다. 산이 산으로, 물이 물로 존재하는 것이 자연입니다. 때로 물이 산을 깨뜨리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산이 물을 가로막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본질이 깨지거나 달라지지 않습니다.
산이 산으로 보이고, 물이 물로 보이기 위해서는 크게 세 가지의 단계를 거쳐야 합니다. 첫째는 산과 물의 본질을 모르는 상태에서 산과 물을 보게 되는 단계입니다. 그 단계에서도 산은 산이고 물은 물입니다. 그러나 깨달음의 단계로 나아가기 위해서 산과 물에 대해서 물음을 가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둘째 단계는 '산은 산이 아니고, 물은 물이 아닌' 단계입니다. 어째서 산이 산이어야 하고, 물이 물이어야 하는가를 묻다 보면 산은 산이 아니고, 물은 물이 아니라는 부정의 시각이 생겨나게 됩니다. 이것은 의심의 단계이기도 합니다. 이 의심은 '왜 네가 산인가, 왜 네가 물인가' 하는 물음이기 때문입니다. 산은 산이 아니고 물은 물이 아니라는 이 말은 그래서 화두, 또는 공안이 됩니다.

 


그 산은 산이 아니고 물은 물이 아니라는 부정을 거치면서 마침내 산과 물의 본질을 꿰뚫어 본 다음에 말할 수 있는 것, 그것이 바로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라는 말입니다. 산이라고 하는 것은 사람이 붙인 이름입니다. 물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이 세상의 그 어떤 것들도 자신의 이름을 자신이 그렇게 붙이지 않았습니다. 이름이 그 자체일 수 없는 것, 이름에 얽매이지 말고 산과 물, 또는 다른 모든 것들을 있는 그대로 보게 되는 단계, 그것이 바로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인 단계인 것입니다.

 


그릇보기를 말할 때 서구인만을 탓할 것은 없습니다. 우리도 예외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모든 것의 으뜸(人間은 萬物의 靈長)'이라는 말을 거침없이 써 온 것이 우리였습니다. 그러나 어떤 것이 어떤 것보다 낫지도 않고, 어떤 것이 어떤 것보다 못하지도 않습니다. 사람 목숨을 파리목숨처럼 여긴다는 말은 우리에게서 드러나는 인간중심주의를 엿볼 수 있는 말이기도 합니다.
목숨이라는 차원에서 볼 때, 사람의 목숨과 파리의 목숨은 아무런 차이가 없음을 보아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목숨을 함부로 다룰 수 없고, 그래서도 안됩니다. 모든 목숨의 무게가 같다는 것을 바탕에 두고 바라보는 시간이 많아지면 많아지는 것만큼 보는 눈이 깊어지고, 눈빛은 살아날 것입니다.

 


죄라는 말을 많이들 합니다. 기독교에는 원죄라는 개념도 있습니다. 원죄를 21세기라는 자리에서 재해석한다면, 그것은 자기중심주의, 또는 자기우월주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나는 장미꽃을 좋아한다"고 말하는 자리가 장미를 제외한 모든 다른 꼿들에 대해 죄를 짓는 행위가 됩니다. 결코 내가 중심이 아니라는 것, 굳이 내가 중심일 때에는 다른 모든 것들도 그들이 하나의 중심이라는 것을 인정한 자리여야 합니다. 그 또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중심과 중심의 이어주는 끈, 그것이 바로 기운입니다. 모든 것들은 이 기운이라는 것을 통해서 하나로 이어져 있고, 이 이어짐은 끊을 수 있는 것은 사람들의 '죄' 말고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우주에서 세포까지 긴밀한 연락관계가 형성되어 있습니다. 세포에서 세포로, 세포에서 입자로, 그리고 그 가장 작은 단위 안에 우주가 담겨 있는 것까지를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검은구멍(black holl)은 우주의 어느 한 지점에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세포와 그 동안 무생물이라고 알고 있던 또 다른 형태를 한 목숨들의 최소단위 안에도 있습니다. 그 너머에서 끊임없이 태어나는 아기우주들이 있습니다. 그것을 두고 생명현상의 신비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슈바이처가 말했던 "살아있는 것에 대한 깊은 우러러봄"은 참으로 위대한 발견이었습니다. 프란시스가 동물들과 이야기를 할 수 있었다는 것은 황당한 거짓말이 아닐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회복해야 할 삶일 뿐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라고 보는 눈길의 깊이가 그만큼 깊어질수록 그 세계가 열릴 것입니다.

 


성서는 자연현상인 바람과 물결을 꾸짖는 예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신학자들까지도 그것은 하나의 설화라고 읽어넘기려고 하는 분위기도 있는데, 그렇게만 볼 수는 없습니다. 자연현상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을 만큼 눈길이 열리고 나면 그들에게 얼마든지 말을 건넬 수도 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예수가 바람과 물결을 꾸짖었다"고 말한 것은 기록자의 오해라고 읽어야 합니다. 보다 옳게 적으려면 "예수가 바람과 물결에게 말을 하니 그들이 알아들었다"고 했어야 하고, 그렇게 옮기는 것이 좋지 않을까 싶기도 합니다.

 


자연과 생태계로부터 철저하게 단절된 삶을 살아온 오늘날의 우리들에게 바람과 물결을 보고 말을 건넨 예수 이야기는 아주 깊은 감명을 주는 대목입니다. 그런데도 이 이야기를 설화로 치부해 버리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것이 내 시각입니다.
본다는 것의 가치, 그것은 아무리 말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본 사람은 이 닫혀진 문을 열 수 있습니다. 그 동안 인간의 욕심과 무지로 끝없이 두꺼워진 벽, 아무리 보아도 열릴 것 같지 않은 굳게 잠긴듯한 문, 그 문이 열리고 벽이 허물어지는 일은 보는 눈이 열리고, 편견이 깨어지는 자리에서부터입니다. 그것은 하찮아 보이는 목숨들을 귀하게 보는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종교에서 말하는 식으로 표현을 한다면 똥에서 하느님 보기, 구더기 안에 있는 부처님 보기일 것입니다. 죽은 것에서 산 것을 보기도 그와 다르지 않을 것이며, 몹시 싫어하는 사람에게서 스승을 보는 것도 내내 같은 말일 것입니다.

 


아이 때는 보려고 나들이를 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어느 정도 나이를 먹은 뒤에는 더 이상 돌아다니면서 볼 것이 없습니다. 보다 중요한 것, 보다 아름답고 황홀한 것이 모두 자기 안에 있는 까닭입니다. 그것을 보아야 비로소 다른 모든 것을 볼 수 있고, 그것을 본 자리가 바로 우주의 끝입니다. 이미 우주의 끝에 서서 그 모든 것을 내려다보고 들여다 볼 수 있게 되었는데, 돌아다닌다면 그것은 낭비일 뿐입니다.
만일 돌아다녀야 할 일이 있다면 사람을 만나기 위한 일 말고는 없습니다. 어느 정도의 자리에 올라가면 그런 일마저도 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참으로 무르익었다면 사람이 찾아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찾아온 사람들을 볼 것입니다. 삶의 찬란한 아름다움을 말입니다.

 

일곱째마당. 살기
그 하나, 명상과 삶
명상은 삶과 동떨어진 것이 아니라는 말은 이미 앞에서도 말한 바 있습니다. 때로 고행을 하기도 하고, 많은 명상가들이 그리워하는 인도와 티벳을 가고 싶어하기도 하고, 아무도 없는 깊은 산 속으로 들어가기도 합니다. 그러나 고행을 한다고 해서 될 일이라면 그게 아닌 다른 방법으로도 되어야 합니다. 인도나 티벳에 가지 않으면 깨달음이 없다고 볼 수도 없는 일일 것입니다.

 


구약성서에 보면 예루살렘을 지구의 배꼽이라고 말한 곳이 있습니다. 유다 사람들이 구심점으로 삼고 있는 예루살렘이 지구의 배꼽이라고 보았던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거기가 지구의 배꼽이었던 것처럼 한국인에게는 한국의 서울, 또는 백두산이나 한라산이 배꼽일 수 있다는 것이 무시된다면 예루살렘이 지구의 배꼽이라는 말은 다른 세계의 사람들에게 공감을 받을 수 없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산에 들어가야 수행이 된다고 생각하여 그것을 고집한다면 그 명상은 이미 축이 기울어 균형을 잃은 명상이 아닌가를 의심해 보아야 합니다. 어느 곳이나 앉을 수 있는 자리가 있다면 그곳이 바로 최상의 자리입니다. 처음에는 가만히 앉아서 시작하여 나중에는 걷거나 일을 하거나, 잠을 잘 때에도 깊은 명상의 상태까지 들어갈 수 있으면 됩니다.

 


이 명상을 통해 다다르게 된 삶은 건강한 삶입니다. 삶과 동떨어진 명상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제대로 살기 위해서 명상을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알고 남을 아는 자리로 나아간다는 것은 이미 말로는 흔하게 하는 이야기입니다.
제대로 산다는 것, 그것은 바른 몸과 좋은 숨을 쉬는 일이고, 한 걸음 나아가서는 먹는 것과 싸는 것이 균형을 갖춘 삶이며, 또한 주고받음의 관계가 조화를 이루는 삶입니다. 거기서 사랑이 나오고, 일이 나오며, 다른 이들과의 나눔이 나오게 됩니다. 삶의 의미가 또한 거기서 생길 수 있습니다. 이렇게 살아가는 사람은 그 무엇에도 걸려 넘어지지 않습니다. 삶의 의미가 생긴다는 것은 딱딱하거나 고리타분한 이론이 아니라, 모든 것이 새로운 모습으로 다가온다는 말이며, 무어에도 걸리거나 갇히지 않는다는 말은 모든 이웃들과 자연스러운 어우러짐을 펼쳐갈 수 있게 된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이 자리에서 삶은 비로소 잔치가 되고, 이렇게 삶을 잔치로 누리는 사람이 자기 삶을 다 살았을 때, 그의 일생이 하나의 훌륭한 작품이 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살도록 초대받은 것이 우리가 이 땅에 태어난 진정한 의미입니다.
어린 아이가 물감장난을 한 것처럼 어지르는 것으로 그치거나, 못된 마음으로 나쁜 짓을 하여 일을 저지른 것, 또는 나름대로는 착하고 바른 일을 했다고 했는데, 결과가 악을 돕게 된 어리석음은 삶이 아닙니다. 그것은 길을 잘못 잡은 것일 뿐입니다. 그가 아무리 큰 일을 이룬 사람이라 하더라도 말입니다. 많은 위대한 사람이라는 이들도 이런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화약을 발명한 노벨의 발명 결과가 전쟁을 더욱 크게 불지르는 것으로 나아갔고, 아인쉬타인의 원자폭탄 또한 인류를 위기로 몰아넣는 초대형 살상의 시대를 열었습니다. 그들은 그 결과를 놓고 볼 때, 결코 위대한 사람이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천재의 삶도, 부지런한 사람의 삶도 아닌, 그저 아침에 일어나면 자연스레 똥이 마렵고, 그래서 시원하게 아침 똥을 내놓은 다음 밥을 먹고, 먹었으니 일을 하고, 자기가 일한 것으로 자기와 가족이 먹고, 시간이 남는다면 자기를 즐길 적절한 시간과 함께 이웃과 나누는 시간을 쪼갤 줄 아는 그런 삶, 해가 기울어 밤이 오면 자연스럽게 잠이 오고, 그러면 보낸 하루에 아무런 아쉬움도 미련도 남기지 않고 잠들어, 그 하루를 애석해 하지 않고 보내는, 그런 평범한 삶을 사는 사람이면 됩니다.

 


정확하게 제 삶을 살면 굳이 남을 돕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아도 됩니다. 이미 그는 누군가에게 넉넉하게 도움이 되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남을 돕겠다는 것은 그 생각 자체가 건방진 것입니다. 우리는 돕는 것보다는 훨씬 더 큰 도움을 받으며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누어준 것보다는 받은 것이 훨씬 크기 때문입니다.
삶을 잔치로 살면서 하나의 작품으로 승화시켜 가는 사람의 삶은 기쁨과 고마움으로 가득합니다. 기쁨과 고마움 때문에 거기 묻혀서 자기를 놓치지 않으려는 자기 다듬음, 그것이 명상입니다. 성서에서는 그것을 기도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성장이라고 하는 것은 명상이라는 차원에서 보면 끝이 없습니다. 그리고 이 성장은 자라나는 것이라기보다는 확장되는 것이라고 하는 것이 옳습니다. 지금 인류는 그 동안 인류가 개발한 것으로 모든 생명을 다 깨버리기 직전까지 와 있습니다. 그렇다고 절망할 것은 아닙니다. 생명은 그 자체 안에 엄청난 재생능력과 변화의 가능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것을 너무 안일하게 생각한 현대과학은 자원이 무한한 것인 줄 착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한계상황까지 왔습니다. 그래서 21세기는 '목숨살이'가 최대의 화두가 된 시기가 되었습니다.

 


여기서 목숨에 대한 관심을 가지는 일은 새로운 세계에 대해 눈을 뜨는 일이고, 모든 것의 시작입니다. 새 싹에게는 희망이 거의 무한대입니다. 마찬가지로 명상의 세계도 희망은 무한대입니다. 그 무한대의 희망을 향해 나아가는 첫걸음, 그것이 21세기에 시작되고 있는 것입니다.
과거의 명상은 그 나름의 가치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 시대의 명상가들은 인간이 지니고 있는 위대한 가치를 발견했고, 그 인간의 위대함을 실현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모두가 인간의 가치를 짓밟고, 스스로 그 가치를 실추시켜가던 마당에서 그들만이 인간의 가치를 제 자리에 놓으려는 시도를 했던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시대의 명상가들의 삶은 참으로 자연스러웠습니다. 현대의 명상은 그것과는 성격이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개척이라는 과제를 동시에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명상을 하는 것, 또는 명상을 하는 사람들은 이상한 사람으로 보는 시각으로부터 자유로워질 필요가 있습니다. 다행히 이런 분위기가 생겨나고 있습니다.

 


과거의 명상가는 거의가 종교지도자들이었습니다. 이제는 평범해 보이는 건강한 생활인의 모습이어야 하고, 그렇게 될 수 있어야 합니다. 20세기의 또 하나의 현상으로 꼽을 수 있는 것은 종교라는 면에 있어서 포교가 매우 중요시되었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21세기는 포교보다는 자기 종교의 순수성, 또는 자기 종교의 승화가 과제일 것이며, 종교다원주의는 필연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될 현상이 될 것입니다.
명상이 21세기의 유일한 대안은 아닙니다. 보다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생명을 지향하는 큰 흐름이라고 할 터인데, 명상은 그 성격이 생명을 지향하고 있다고 하는 것이 옳습니다. 그러므로 명상이 어떤 종교성을 지닌다거나, 종교분파주의가 되는 일도 없을 것이며, 그렇게 되어야 합니다. 종교를 거부하지도, 개종을 권유하지도 않는 그런 명상이어야 바람직합니다. 명상을 통해서 종교와 종교 사이에 있던 벽이 허물어지는 일은 틀림없이 일어날 것입니다.

 


명상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무슨 일을 하느냐에 관한 것이 아니라, 왜 그 일을 하느냐에 관한 것입니다. 그렇게 해 나가는 일을 어떻게 전체 생명의 조화로 이어갈 수 있느냐 하는 것도 명상에 있어서 매우 핵심이 되는 과제입니다. 명상을 통해서 어우러짐으로 나아가게 되는 일, 이것이 생명의 불안을 걷어내고 다시 잔치 마당을 펼치는 일입니다.
이제 그런 삶에 대해서 조금 이야기를 해 보겠습니다.

 

그 둘, 명상의 삶
명상에 어느 정도 들어가게 되면 자신의 삶과 살림에 군더더기가 너무 많다는 것을 알아채게 될 것입니다. 그것을 보는 순간, 쓸모없는 것들을 줄여야겠다는 마음이 생깁니다. 너무 많은 살림살이는 여러 모로 사람을 지치게 합니다. 사 모으는 일도 그렇고, 관리를 하는 것도 그렇습니다. 게다가 마음의 군더더기, 인간관계의 군더더기에까지 헤아림이 미치면 사람이 얼마나 불필요한 것들을 많이 모으면서 살았는가를 알게 됩니다. 바른 삶은 살림살이를 줄이는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간단한 살림을 가지고 사는 것은 꼭 필요한 것만으로 사는 것을 뜻합니다. 제대로 살았다고 하는 삶은 이사를 해 보면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이사를 할 때 버릴 것이 많으면 그 많은 만큼 불필요한 일을 많이 한 셈이 됩니다. 그리고 이것은 오늘날에 너무도 절실한 문제이기도 합니다. 다시 사기 위해서 멀쩡하게 얼마든지 쓸 수 있는 것들을 버리는 것, 구매충동에 홀려서 집에 이미 있는 것을 두고도 더 사는 것도 늘 있는 일입니다.

 


소비중독자가 있다고도 합니다. 무슨 물건이 나왔다는 말을 들으면 일단 사지 않으면 못 견디는 사람이 자꾸만 늘어간다고 합니다. 장사꾼들이 볼 때는 그렇게 고마운 은인들일 수 없지만, 이런 사람들에게 시원한 마음이 들 만한 상을 주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없습니다. 그저 기껏해야 그릇 따위를 끼워주는 것으로 그치는데, 그런 것쯤은 이미 있으니 그 또한 새 것일 때 조금 쓰고 버릴 쓰레기들입니다.

 


상품이나 경품이라고 하는 것도 거의가 마찬가지입니다. 도무지 불필요한 것들을 자꾸만 주기도 하고, 그래서 이래저래 쌓이는 것들이 보통 많은 것이 아닙니다. 요즘은 좀 적어졌습니다만, 90년대에만 해도 웬만한 집안에서는 수건을 사서 쓸 필요가 없었습니다. 휴지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저런 잡동사니들을 판촉물로 돌리는 것들도 거슬리기는 일반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엄청나게 많은 판촉물이라든가, 또는 상품이라는 이름으로 돌리는 것들을 주고받으면서 살았습니다.

 


제대로 사는 삶의 특징은 즐기는 것의 차원이 달라집니다. 이제까지는 소유와 누림, 그리고 지위의 수직이동, 명예 같은 것이 추구하던 행복의 내용이었습니다. 그러나 명상을 통해서 눈이 열리면 이와는 차원이 달라집니다. 순환구조에 걸림돌이 되는 것들은 다만 짐이 될 뿐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소유에 대해서는 훨씬 담담하게 됩니다. 그보다는 자연의 현상에 대해 눈을 떠가면서 그것들을 즐기는 것으로 즐김의 대상이 달라집니다.

 


봄에 돋아 오르는 새싹을 알아보는 것, 같은 새라고 하더라도 겨울에 지저귀는 소리와 봄에 지저귀는 소리가 다르다는 것을 느끼게 되는 것, 그 자연과 더불어 어우러지는 것이 사람을 넉넉하게 한다는 것을 아는 삶으로의 전환입니다.
본디 아름답고 고와야 할 삶이 무너진 자리에서 조화의 회복은 큰 의미를 지닙니다. 사람과 사람의 조화, 사람과 자연의 조화는 바람직한 삶입니다. 이 삶을 추구해야 합니다. 그 조화와 상생의 세계를 향해서 무수한 시행착오를 거쳐 온 것이 사람의 역사입니다. 그리고 20세기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또한 그 시행착오의 한 형태였습니다.

 


인류사의 흐름은 이제까지의 지난날을 정리하여 상생과 조화의 자리로 나아가게 될 것입니다. 파괴와 갈등의 시대가 막을 내리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아직도 포기하지 못한 시장원리와 상업주의의 무한소비에 대해 기대를 하는 사람이 아직은 많이 있습니다.
단언할 수 있는 것은 20세기의 역사는 수요와 공급이 일치되지 않았습니다. 그 이전에는 세계가 하나라는 인식이 없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지구의 용량이 얼마나 되는지를 정확하게 몰랐습니다. 겨우 둘레 4만 킬로밖에 안 되는 지구 위에서 우리는 그 지구의 일부분이 되어 살아가고 있습니다.

 


20세기에 확인된 것은 지구가 하나라는 것, 그리고 분명한 생명체라는 사실을 발견한 것입니다. 다양한 나라와 문화가 사회주의와 자본주의라는 큰 두 개의 축으로 묶여졌던 것은 지구가 하나의 생명공동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계기도 되었습니다. 사회주의의 몰락은 마침내 인류의 가치관이 한 끈으로 묶어질 수 있다는 가능성에 대한 확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사실은 이미 하나였던 지구 생명공동체가 사람에 의해 나누어지고, 금이 그어졌던 것들을 재통합해 온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재통합은 자연과의 조화 속에서 이루어졌어야 하는데, 자연과 대립된 자리에서의 재통합이었기 때문에 반드시 한계상황에 몰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몸 안에서의 조화와 균형을 시도하여 그 방향으로 걸음을 내딛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삶이라는 보다 현실감있는 내용으로 풀어내야 할 과제를 지닙니다. 이 삶은 행복과 아름다움이 나오는 자리가 어디인지를 아는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그래서 나날의 삶이 이 행복한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것으로 이어지는 그러한 삶입니다.

 


여기서 삶꼴을 어떻게 풀어내야 하는가 하는 문제에 대한 답이 나오게 됩니다. 수요와 공급의 정확한 일치가 그것입니다. 내가 무엇을 받고 있는지를 알고, 그 받은 것만큼 내어주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헤아릴 줄 아는 일입니다.
경제논리에 따르면 이윤이 발생하지 않는 행위는 무가치한 행위일 것입니다. 그러나 생명논리에는 이윤의 발생이 없습니다. 열량불변의 법칙은 이것을 설명하고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나머지가 없는 삶은 또한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하지 않는 것이 아무 것도 없음(無爲而無爲)'이라는 말로도 설명될 수 있습니다. 어느 한 곳에서 이윤이 생긴다면 다른 한 곳에서는 반드시 손해가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똑같이 이윤의 발생을 기대한다면 거기엔 결국 갈등과 대립이 있을 수밖에 없고, 마침내 한 쪽이 포기를 하지 않으면 안되는 쪽으로 결론이 날 것입니다.

 


농업의 쇠퇴라고 하는 이 현상이 바로 그것을 말해줍니다. 이차산업과 삼차산업이 이윤을 얻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일차산업 쪽에서 희생을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여러 가지 정책들이 나오고, 농업 쪽에서도 유기농이다 뭐다 하면서 살아가려고 안간힘을 쓰지만, 계속해서 이윤을 보다 많이 남기려는 장사꾼들이 있는 한 생산자와 소비자들은 어떤 형태로든지 밑지는 팔고 사기를 하지 않으면 안되는 악순환이 거듭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처음부터 경제윤리라는 말은 그 안에 한계를 지니고 있는 이론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 경제이론은 끊임없는 이윤추구를 위해서 시장을 만들었고, 시장에서 생산자의 손해를 전제로 하는 거래가 이루어지고, 이어서 생산보다는 판매를 중요하게 여기다 보니 결국 모든 도시가 시장이 되는 산업의 불균형이 나타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여기서 사람이 회복해야 할 것은 생산의 즐거움을 느끼는 일입니다. 자연을 사랑하고, 자연을 이해하며, 그 자연의 소리를 들을 줄 아는 사람이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범위 안에서 생산을 하는 것, 이 생산활동이 모든 경제의 기초가 되어야 합니다. 값을 매기는 것도 생산자의 몫이라는 것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생산과 관련이 있고, 생산에 기여하는 일이 가장 가치있는 일이라는 생각이 가치관의 중심에 자리를 잡아야 합니다. 무한소비시대로부터 생산자가 모든 시장경제의 핵심으로 자리잡는 시대가 명상이 추구하는 바람직한 사회입니다. 그리고 이 방향으로 나아가는 명상이라야만 의미도 있고 가치도 있습니다. 거기서 비로소 삶이 아름답다고 말할 수 있게 됩니다. 쉽게 말한다면 명상의 삶은 자급자족을 원칙으로 하는 삶이라는 뜻입니다. 내가 살기 위해서 어쩔 수없이 누군가가 깨지는 일은 피할 수 없더라도 그것이 전체의 균형을 일그러뜨리지 않는 그런 삶입니다. 균형을 무너뜨리는 것이 바로 죄입니다.

 


아름다운 사람이란 제 몸에 탈이 나면 그것을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굳이 해결이 안 될 때에는 그 탈에 대해서 스스로 책임을 지면 됩니다. 또한 아름다운 사람은 제가 먹을 것을 제 손으로 만들 줄 아는 사람입니다. 굳이 그렇지 못해서 누군가에게 신세를 졌다면 그 먹은 기쁨만큼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또한 아름다운 사람은 자신이 살 집을 손수 지을 수 있는 사람입니다. 또한 아름다운 사람은 이 땅에 '내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음을 알고, 그 내 것이 없는 삶을 그대로 살아가는 사람이기도 합니다.

 


그렇게 자급자족하면서 주어진 한 삶을 살아가는 나그네로서의 살면 됩니다. 그렇게 가는 길에 거칠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자신에게만 걸리지 않는다면 그 무엇에도 거릴 일이 없다는 것, 자신에게 걸리지 않는 길은 스스로가 제 잘못으로 쌓아 놓았던 몸 속의 응어리를 풀어내면 해결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방법은 거듭 말하지만 곧은 몸과 바른 숨, 몸의 무게중심이 얼주머니에 있는 몸꼴이고 마음입니다.

 

그 셋, 사랑하기
우리나라의 경우 20세기의 현상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또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사랑'이라는 말이 아주 흔하게 쓰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한국 사회에서 이 시기만큼 사랑이라는 말이 널리 쓰인 일은 없었습니다.

 


이렇게 사랑이라는 말이 널리 쓰이고 있다는 것 자체는 아무런 문제가 없을 수도 있습니다. 사랑이 가득한 세계는 그 자체로 아름다운 일이니 말입니다. 그것이 어떤 형태의 사랑이던 사랑이라는 것은 일단은 아름답습니다. 그것도 그냥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가슴을 설레게 할 만큼 아름답습니다. 그런데 이 사랑이 20세기만큼 왜곡된 시기도 흔치 않을 것입니다. 때로는 사랑이 소유욕에 대한 다른 표현인 경우도 있습니다. 이 때의 사랑은 처음에는 사랑의 형태를 지닌 것처럼 보이지만, 결과는 사랑과는 상관없는 방향으로 전개되기 일쑤입니다.

 


소유욕으로 시작된 사랑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매우 아름다운 사랑으로 승화되는 일이 아주 없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런 예를 들면서 소유욕도 사랑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그릇된 주장입니다. 사랑이라고 하는 것이 하루 이틀에 불쑥 나타난다고 하기보다는, 오랜 세월을 두고 무르익는 것이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다'고 말할 수는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의 '사랑한다고 말하는'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사랑은 그렇게 익어가는 사랑은 아닌 것 같습니다. 사랑을 마치 일회용품 다루듯 다루는 일은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일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사랑으로 착각하여 비극으로 치닫는 것도 늘 듣는 이야기들입니다.

 


또한 사랑이라는 것을 다 갖춰진 상태에서 서로 만나서 서로 누리고 즐기기만 하면 되는 것으로 오해하고 있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들은 사랑에 뒤따르는 여러 가지 해결해야 할 문제들과, 사랑과 함께 하는 책임과 의무의 문제를 보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려운 문제가 생기면 곧장 사랑이라는 말을 취소하고 돌아서버립니다. 그런 사랑으로는 멀고 긴 길을 다 가기가 무척 어렵습니다. 사랑에는 그 사랑을 누리고 즐기는 것만큼 그것이 다시 솟아나게 할 노력이 필요합니다. 거기에는 일정부분의 수고와 내어줌, 그리고 물러섬이 필요할 때도 있습니다. 그렇게 사랑이 때로 짐이 되기도 한다는 것, 사랑하기 때문에 기꺼이 그 짐을 즐거움으로 질 자세가 안 되어 있다면 사랑살이는 처음부터 무지개를 쫓아가는 것만큼 무모한 몸짓으로 그치고 말게 될 것입니다.

 


'사랑'이라고 하는 말의 쓰임새를 놓고 보면 아주 재미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각 문화권에 따라 사랑에 대한 인식이 다르다는 점이 그것입니다. 크게 히브리 사람들의 사랑 이해와, 중세 이후 서양 사람들의 사랑 이해, 그리고 우리 전통사회에서의 사랑에 대한 인식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구약성서를 가지고 있는 히브리 사람들에게 있어서의 사랑은 동사형의 쓰임새를 갖습니다. 그들에게는 어떤 형태로든지 몸으로 움직여 나타낸 것이 아니면 사랑이라고 받아들이지 않는 태도가 있었습니다. 감상주의로서의 사랑은 그들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들이 그만큼 절박하게 살았던 까닭이었을 것입니다. 애초에 자기 나라나 자기네들 땅이라고는 없던 떠돌이들에게 감상주의로서의 사랑은 사치스러운 것으로 보일 수밖에 없었을 것임은 쉽게 헤아려 볼 수 있는 일입니다.

 


중세 이후의 서구 사회에서의 사랑에 대한 인식은 명사형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랑이 명사일 경우에는 그 사랑이 주체가 될 수 있는 위험이 있습니다. 사랑이 주체가 되는 것이 위험이라는 말은, 사랑 때문에 사람이나 목숨이 희생될 수도 있는 때문입니다. 실제로 사랑이 주어가 되어 사랑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이 희생되는 일을 자연스럽게 이해한 것이 서구인들의 생각입니다. 그 대표로 꼽을 수 있는 것이 로미오와 줄리엣 이야기일 터이지만, 실제로 서양의 역사나 또는 그들이 그린 사랑에는 사랑 때문에 목숨을 거는 일이 꽤 많았던 것 같습니다. 히브리 사람들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이 유럽인들에게는 상식의 선에서 이해되는 현실이었다는 말입니다. 목숨을 걸 만큼은 사랑해야 참된 사랑이라고 생각한 사람이 서구인이라는 말입니다. 그것이 훌륭한 사랑일지는 몰라도, 가치의 우선순위가 뒤바뀐 것은 지적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사랑이 목숨을 희생시킨다면 그 사랑은 어떻게 말하더라도 정당성을 인정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살아있는 사람이 살아가면서 나누는 것입니다. 목숨이 끝난 자리에서 남은 사람들이 그들의, 또는 그의 사랑을 위대했다고 아무리 말한다고 하더라도 사랑을 한 그 당사자에게는 그냥 비극일 뿐입니다. 그런 사랑은 안 함만 못합니다.

 


우리 전통사회에서의 사랑은 형용사형의 쓰임새를 갖고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사랑이 형용사로 이해된 자리에는 사랑이라는 말은 거의 하지 않습니다. 밀양아리랑에 "정든님이 오셨는데 인사를 못해 행주치마 입에 물고 입만 빵끗"이라고 하는 노랫말은 그것을 아주 잘 드러내 줍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과거에서 사랑 때문에 목숨을 내던지는 일은 없었습니다. 목숨을 버릴 일은 정조를 잃었을 때뿐이었습니다.
사랑에 대해서라면 갑돌이와 갑순이처럼 '달을 보고 울면서 그까짓 것'이라고 하는 정도였습니다. 그런데도 전에 한창 인기가 있던 「전설의 고향」을 보다 보면 사랑 때문에 목숨을 버리는 얘기가 꽤 많았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요즘은 「전설의 고향」을 안 하는 것 같은데, 기왕 그런 것을 하려면 우리의 전통사회와 문화를 올바로 이해하여 그야말로 우리 이야기를 할 수 있었어야 했습니다. 그저 한복이나 입히고 포장도로와 전봇대만 안 보이고, 초가집이나 기와집 같은 전통가옥만 나오면 우리 이야기인 줄 아는 식의 얘기는 이제는 그쳐야 할 때입니다.
적어도 우리 식의 전설의 고향이라면 사랑 때문에 죽는다는 이야기는 없었다는 것을 알고 그런 이야기를 꾸며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문화에 대한 몰이해로 비롯된 그 전설의 고향은 파급효과가 매우 커서 우리 문화를 오해하게 하고, 왜곡된 인식에 빠져들게 했다는 점에서 매우 모진 비판을 받아야 하는데, 그런 비판의 목소리를 들은 적이 없습니다.

 


왜 이 이야기를 하는가 하면, 사랑이라는 말이 매우 흔해진 이 시대야말로 사랑에 대한 왜곡이 가장 심한 시대라는 점 때문입니다. 사랑이 넘치면 아름다움도 넘쳐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고 오히려 그와는 정반대인 시대상황이 안타까울 뿐입니다. 이제 이런 사랑은 그쳐야 합니다. 그런데 이런 것을 사랑이라고 그릇 알고 있는 까닭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스스로를 사랑하지 못한다는 자기사랑의 부재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자기를 모르면서 자기를 사랑한다고 하는 사람은 자기사랑과 이기주의를 혼동합니다. 그렇게 자기 사랑의 정체성이 없는 사람이 다른 사람을 사랑한다고 하는 것은 처음부터 불가능한 일입니다.

 


사랑살이가 제대로 펼쳐지는 마당, 그것은 사랑하는 사람들이 조화를 이루는 과정에서 그 사랑이 무르익어가는 마당입니다. 사랑은 누리는 것이라고 하기보다는 가꿔가는 것입니다. 그 가꾸는 과정에서 가슴 설레는 기쁨이 있고, 누릴 것도 생긴다고 보는 것이 보다 올바른 사랑이해일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자기를 알고, 올바른 자기사랑을 하는 것이라는 점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입니다.

 

그 넷, 조화와 상생의 문화를 향하여
때로 사람은 가까운 것에 대한 가치를 못 보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이것은 큰 실수로 이어지곤 하는데, 우리에게는 우리의 문화를 업신여긴 실수가 있었습니다. 새마을사업과 조국근대화운동으로 통칭되는 '잘 살기 운동'은 근대화라는 미명 하에 우리 것을 짓밟아버린, 발등을 찍고 싶을 정도로 후회스러운 일이 되고 말았습니다.

 


우리가 보기에 그 무렵 서양 사람들은 부럽기만 했었습니다. 그들이 누리는 문명과 안락은 사람이 그렇게 살아야 사람답게 사는 것 같았습니다. 개화한다면서 그 동안 길렀던 머리를 깎을 때만 해도 문명의 폭력성을 보고 거기 저항하는 어른들이 있었습니다. 그 저항은 미련한 고집으로 치부되었고, 개화의 물결을 막기에는 힘이 너무나 약했습니다.

 


일제시대부터 시작된 개화는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속도가 붙기 시작했습니다. 놀라울 만큼 빠른 진행에 수많은 역효과 났습니다. 그러나 정치 민주화를 외치기에도 벅찬 우리에게 문화를 지켜야 된다는 말은 사치스러울 수밖에 없었고, 그런 말을 하는 이도 없었습니다. 부당하게 잡은 정권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눈에 보이는 성과를 늘 내 보여야 했던 독재정권은 그렇게 해서 우리 문화를 뿌리부터 파내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여기에 한 몫을 한 것은 개신교와 교육이었습니다. 독재정권 아래 있는 교육이 독재정권의 하수인이 된 일이야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고 치더라도, 개신교의 몸짓은 참으로 이해가 가지 않는 일입니다. 우리 겨레가 일궈낸 삶씨의 깊이와 가치를 볼 수 없을 만큼 깊이가 없는 것이 이 시대의 개신교였습니다. 문화란 종교를 담는 그릇이라는 말을 이미 서구에서는 하고 있었지만, 한국의 개신교는 그런 말이 지니고 있는 속뜻을 헤아리기에는 너무도 한계가 많았던 것 같습니다. 80년대 후반에 스스로 입에 침이 마를 정도로 스스로 자랑한 '세계 선교의 역사에 유례가 없는 기적'이라고 말하는 교세의 확장에만 몰두해 있었던 것이 그 당시 개신교의 일반화된 풍경이었습니다. 그 교회가 독재정치 아래서 그렇게 엄청나게 불어난 원인을 여러 가지로 말할 수 있지만, 결과를 볼 때 긍정 쪽보다는 부정의 쪽이 더 컸다고 말할 수 있는 상황이 되고 말았습니다.

 


당시 개신교는 한국의 문화라는 것을 기독교 정신에 어긋나는 것이며, 미개하고 열등한 것이기 때문에, 특히 하느님을 섬기는 일에 있어서 장애가 되는 우상숭배와, 하느님이 싫어하는 잡신을 섬기는 문화로 읽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그런 것들을 치워내고 기독교를 바탕에 두고 형성된 서구의 문화와 문명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것이 독재정권의 근대화 정책과 맞아떨어지는 부분이 있어서 종교와 정치의 밀월관계가 생겨났습니다. 이 시대에 미국은 하느님의 복을 엄청나게 받은 나라라는 설교를 안 한 목사님이 몇 분이나 될지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무튼 그래서 독재정치를 보고 '너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양심있는 개신교 지도자가 별로 없었습니다. 먼저 눈을 뜬 개신교에 몸 담고 있는 어른들이 있긴 했는데, 그들은 매도되어야 했습니다.

 


그렇게 70년대를 거치는 동안 엄청난 변화가 일어났는데, 그것은 전통문화는 모두 박물관으로 들어가고, 온 땅에 어정쩡한 서양식 겉모습이 자리를 잡게 되었습니다. 무계획한 도시개발 정책은 도시의 문제로, 편법과 야합의 경제정책으로 인한 경제의 문제로, 소비사회가 되면서 생긴 그릇된 소비문화의 문제와,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의 신뢰를 잃게 된 문제, 온 나라를 삼키고도 남을 만한 부정부패의 문제들이 곳곳에 쌓여 있습니다. 전통의 문화를 깡그리 무너뜨린 그 위에 세워진 바벨탑이었습니다.

 


뒤늦게 우리 문화의 가치와 의미를 찾아내자는 사람들이 있는 것은 그나마 다행이지만, 그 문화를 다시 심는 일은 아직도 까마득하기만 합니다. 다시 살려내는 것보다는 파괴의 흐름이 더 크기 때문이고, 문화를 다시 살려낸다고 하는 사람들 가운데 많은 이들이 그것을 밥벌이의 수단으로 삼고 있는 것도 큰 문제입니다.

 


우리 문화의 가치, 그것은 상생과 조화를 바탕으로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어려운 시절에도 과일을 딸 때마다 까치밥을 남겨 새들과 사람이 공동운명체라는 것을 잊지 않았던 여유, 들에서 밥을 먹을 때면 고시래를 하면서 땅과 사람이 하나라는 것을 몸짓으로 고백할 줄 알던 사람들이 우리 겨레였습니다. 그뿐 아닙니다. 신을 섬김에 있어서 신 아닌 것이 없다고 여겼던 깊이있는 눈이며, 자연을 어머니로 모실 줄 알던 슬기, 사람과 자연의 조화를 이루면서 먹거리를 익힐 줄 알았던 삶결은 장과 김치에 이르면 절정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여러 가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지만 초가집 이야기를 하고 넘어가겠습니다. 우리 문화의 아름다움과 합리성이 다 담겨 있는 것이 초가집이라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요즘은 참 좋아뵈는 집들이 많습니다. 통나무로 지은 집, 돌로 지은 집, 유리로 지은 집에 이르기까지 온갖 집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웬일인지 집을 잃은 마당에서 살고 있다는 마음이 들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참으로 잃게 된 것은 바로 '삶씨로서의 집'이 아닌가 생각하게 된 것은 한참이 지난 뒤였습니다. 집이 '삶씨의 바탕'이 아니라 '지님(財産)'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집을 가지고 있으면 그 덕에 삶이 매끄러울 수 있고, 집만 가지고 먹고 사는 사람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집은 사람들이 머무는 보금자리, 삶씨의 바탕이 되는 곳과는 아주 먼 뜻을 지니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의 삶은 어지럽게 흐트러지고 말았습니다.

 


이 마당에서 우리는 삶씨로서의 집을 다시 새겨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옛집의 곱고 살가운 그림을 다시 그려보는 것으로부터 시작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집이 있어 아름답던, 집에 살고 있는 사람뿐 아니라, 그 집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던 사람들까지도 마음이 푸근하던 그런 그림을 그려보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언덕 위에 있는 하얀 집이 아닙니다. 묏부리 일렁이며 흐르다가 잦아든 골짜기 아래로 작은 시냇물이 흐르고, 볕바른 곳 바람은 묏자락이 막아 준 곳에 옹기종기 모여앉은 마을, 해 저물녘 조금만 멀리서 보노라면 가슴을 설레이게 하는 옛날 이야기 한자락이 물씬 묻어날 듯한 그런 짓이 있는 그림입니다. 봄이면 봄이어서 봄 이야기가 배어나고, 여름이면 여름다운 그림, 가을은 가을대로, 겨울은 겨울대로 제 맛과 멋이 스민 그런 집 이야기를 우리는 다시 엮어내지 않으면 안됩니다.

 


아직도 가장 아름답고 훌륭한 그림으로 가슴에 남아있는 것, 그것은 정이 담뿍 배어 있다고 느껴지는 도톰한 짚으로 엮어올린 이엉지붕, 그리고 그 지붕에 한여름을 기어오른 박넝쿨에서 피어난 수줍은 박꽃이 저보다 더 큰 박 잎새 뒤에 몸을 숨긴 저녁, 밤 어스름에 제 몸을 내놓고 있는 꽃몸을 여름달이 가만가만 어루만지는 그 그림이 아닐까 싶습니다. 하이얀 박꽃에 달빛이 부서지던 그 저녁 우리겨레의 꿈도 그처럼 맑고 깨끗하고 고왔습니다. 그 그림이 아름다울 수 있었던 것은 그런 그림을 엮을 만한 얼이 우리 겨레의 삶 속에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오늘의 겨레얼은 물 건너 온 문화에 짓눌려 보잘 것 없이 깨어지고 말았습니다. 숨 막혀 죽어가는 이런 마당에서 우리는 우리 얼을 살려낼 곳이 어디인가를 찾아내지 않으면 안됩니다. 교육문제, 정치문제, 경제문제를 따지지만 모든 것은 집을 바탕으로 펼쳐지는 삶씨로부터 나와야 합니다. 그것은 집이 사람이 살아가는 가장 으뜸되는 바탕이기 때문입니다.

 


옛날 집 짓는 일은 터 다지는 일로부터 시작했습니다. 집을 지을 수 있는 곳에 흙을 돋우고, 집터를 다지는 일은 이제 우리 곁에서는 볼 수 없는 아릿한 옛 그림이 되고 말았습니다. 돌절구를 굵직한 동아줄로 고를 내어 얽고, 거기에 여러 사람이 매달려 절구를 들었다 놓으면서 땅을 다졌습니다. 집을 세워도 그 집이 이울지 않도록 하려는 것이 본디 터다짐의 뜻이었지만, 그와 함께 옛 사람들이 품고 있던 헤아림은 땅이 지니고 있는 온갖 기운들을 눌러 거기 사람이 마음놓고 살 수 있도록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터 다지는 일은 대부분 밤에 이루어집니다. 그 날은 온 마을 젊은 사내들이 다 모이는 날입니다. 걸쭉하고 진한 막걸리에 수수팥떡도 빚고 여러 가지 먹거리들을 만드느라 어수선한 가운데 해가 기웁니다. 어스름한 밤이 찾아들면 몰려든 사람들이 둥둥 팔뚝을 걷어부치고 땅을 다집니다. 처음에는 손도 잘 안 맞고 소리도 그렇게 잘 안 맞습니다. 언제나 하는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밤이 이슥하도록 다지다 보면 땅은 어느 새 돌덩이처럼 야물어지고, 거기에 주춧돌 놓고 기둥 세워 얼마를 살더라도 끄떡도 않을 집터가 마련됩니다. 온 마을 사람들이 다 기운을 들어 부은 그 집터는 비로소 사람이 딛고 서서 살 수 있을 만한 곳이 됩니다. 한 사람의 삶은 이렇게 다른 이들의 삶과 이어진다는 것이 우리네 옛 사람들의 삶씨였습니다.

 


집을 짓는 데는 온갖 솜씨를 가진 목수의 손길이 있어야 할 것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솜씨있는 목수가 눈으로 가늠을 하고, 톱으로 자르고, 깎을 것은 깎고 다듬을 것은 다듬고 해서 이리저리 맞춰 놓으면 집이 됩니다. 그렇게 집을 짓는 데는 목수의 솜씨도 솜씨지만 산에서 자란 온갖 나무들이 골고루 쓰였습니다. 소나무는 소나무대로, 참나무는 참나무대로 그리고 이름도 모를 아무짝에도 쓸 수 없을 것 같은 그런 나무들까지도 다 집 짓는 데 없어서는 안될 소중한 재료였습니다. 기둥으로 쓸 수 있는 것, 서까래로 쓸 수 있는 것, 외를 얽을 것, 마지막에 울타리로 쓸 나무에 이르기까지 크고 작은 온갖 나무들이 집을 짓는 일에 골고루 쓰였습니다. 게다가 똑고르고 반듯한 것만 쓰이는 것이 아니라, 굽은 것은 굽은 대로, 휜 것은 휜 대로 쓸 수 있는 것이 또한 우리네 옛 집을 짓는 일이 지닌 결 고움이었습니다.

 


그것은 이 땅에 있는 모든 것과 어우러지는 것이 사람살이라는 것을 그대로 드러내 주는 일꼴이었습니다. 사람이 사람만으로는 살 수 없음, 묏부리에서 제 한 삶을 자란 나무들이 사람의 삶 속으로 들어오는 것, 그것도 쓸만한 것을 골라 쓰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들이 쓸모 있는 것, 아니, 그것은 어느 한 때에 끼어 들어오는 그런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사람의 삶이 그 나무들과 이어져 있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었습니다.
이 집은 다 지었다고 해서 끝난 것이 아닙니다. 해마다 울타리를 새로 세우고, 지붕을 덧씌우고, 벽에 고운 흙물을 바르는 일로 집은 사람의 삶과 마찬가지로 자꾸만 자라납니다. 그러니 우리 옛 삶에 있어서 집은 목숨도 있고, 제 나름으로의 됨됨이까지 가지고 있는데, 그런 집의 됨됨이는 그 집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삶과 솜씨가 그대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이 집에 들어서려면 맨 먼저 집 앞에 있는 텃밭을 지나게 됩니다. 언제나 알뜰한 삶이 그대로 배어있는 텃밭은 요즘에 와서야 더욱 그리워지는 것인데, 거기엔 먹고 남은 구정물 찌꺼기라든가 살고 난 먼지 쓰레기 같은 것들까지도 뿌렸습니다. 텃밭을 지나면 잎이 그냥 있는 나뭇가지를 세워 띠를 띠어 만든 울타리가 있었습니다. 그 울타리를 흔드는 바람이 곱게만 들렸던 겨울녘의 일도 아스라이 남아 가슴을 아리도록 하는 그리움입니다.

 


울타리를 돌면 언제나 열려 있는 삽작이 있습니다. 닫았다고 해야 그 안에 사람이 없다는 뜻일 뿐, 그렇다고 누가 들어가려는 것을 못 들어가게 하는 것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닫아 놓은 삽작을 밀고 들어가는 사람이 있었던 것도 아닌, 그런 삽작입니다. 그저 그 울타리와 삽작은 집 바깥과 안을 가르는 것일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바람도 막고 추위도 막을 수 있으면 넉넉한 것, 요즘처럼 많은 것들을 지니고 살지 않았기 때문에 뭐 훔쳐갈 것도, 남에게 꼭꼭 숨겨야 할 것도 없었던 것이 그 때의 사람살이였으니 말입니다. 삽작을 들어서면 넓지 않은 마당이 있고, 삽작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외양간과 돼지우리가 함께 붙어 있거나 마주 보고 있고, 닭장도 그 어름에 있었습니다. 그래야 이것들을 들며나며 볼 수 있었던, 그리고 그런 짐승들도 한 집안 식구로 여겼던 우리네 옛 사람들의 살뜰한 삶이 거기서 그대로 드러납니다.

 


마당에서 추녀 끝으로 이어지는 곳에 뜨락이 있었던 집, 그 모든 쓰임새들이 참으로 아기자기했던 것이 우리네 집이었습니다. 더군다나 빼놓을 수 없는 것은 뒤꼍입니다. 거기엔 장독대가 있고, 이런 저런 열매맺는 나무들도 있는데, 그보다 더 돋보이는 것은 뒤꼍에서 이루어지던 거룩한 것과의 만남입니다. 새벽마다 맑고 깨끗한 물을 떠다 놓고 온 집안 사람들을 떠올리며 손을 비벼 올리던 옛 아낙들의 비나리는 때묻지 않은 아름다움이었습니다. 사람이 가까이 하지 않는 곳, 그러나 누가 뭐라 해도 삶에 있어 한 몫을 이루는 거기가 거룩한 무엇과 만남이 이루어지는 곳이라는 헤아림을 가졌던 것은 우리 겨레만의 도드라진 삶꼴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 아기자기한 집은 숨을 쉬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그 집에 사는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지도 집만 잘 보면 알 수 있는, 그야말로 얼굴까지 있는 그런 집이었습니다. 집을 가만히 보면 그 집에 사는 사람들의 마음과 삶꼴을 엿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집이 아름다울 수 있었던 또 하나의 까닭은 거기 아무개가 살고 있기는 하지만, 그것이 그 '아무개의 집'이라는 마음이 아주 적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방은 언제나 열려 있었고, 누구라도 거기 와서 놀 수 있고, 지나가던 길손이 머물러 쉬어도 갈 수 있었습니다. 울타리를 치고 삽작을 해 달아도 거기 사람이 들어오지 말라는 것이 아니었고, 그것이 나와 너를 나누는 뜻은 아예 없었더라는 말입니다.
이 집이 값지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사람만 사는 곳이 아니었다는 점입니다. 이 집에는 쥐도 살았고 새도 함께 어우러졌습니다. 파리나 모기는 말할 것도 없고, 굼벵이, 지렁이, 사람이 아주 싫어하는 노래기도 같이 살았으며, 쥐와 족제비, 지붕 밑에 둥지를 틀던 참새와, 봄이면 찾아오는 우리 겨레의 애완용 새였던 제비들, 어찌 보면 끔찍한 것처럼 여겨지는 커다란 구렁이도 어딘가에 살았는데, 그것을 '지키미'라고 부르며 거의 신에 가까운 대접을 했습니다.

 


모든 삶이 어우러지는 곳, 그래서 그 삶이 살쪄가고, 삶이 아름다워지게 되는 것이 집이었습니다. 이 집은 그냥 집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우주를 줄여놓은 것, 아니 그 집이 바로 우주였고, 그 집 안에 살고 있는 사람이 우주였습니다. 누리 안에 있는 사람이 누리를 엮어내고, 거기 살고 있는 사람이 누리가 되는 것이 바로 우리네 삶씨였더라는 말입니다.
상생과 조화를 바탕으로 하는 문화는 우리 전통문화의 특징이었고, 이는 기독교 정신과도 매우 가깝습니다. 따라서 문화의 회복운동에 기독교는 일정부분 책임을 지고 나서야 옳습니다. 이 문화를 무시한 자리에서 세운 교회가 바른 교회일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성서에서 말하는 '어리석은 사람이 세운 모래 위의 집'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 문화에 대한 자각이 일어나던 무렵부터 기독교 교세가 줄어들기 시작한 것을 가볍게 보아넘겨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우리 문화가 기독교와는 아주 다른 문화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가장 기독교 정신에 가까운 전통문화를 파 낸 자리에 세우려던 교회의 실수에 대한 결과일 뿐입니다.
상생과 조화의 문화를 일궈낼 수 있었던 바탕, 그것은 우리 겨레 얼이 목숨을 바탕에 두고 모든 삶을 풀어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참으로 슬기로운 일이었다는 것이 오늘날에 와서야 확실하게 증명되고 있습니다.

 

여덟째마당. 덧붙이고 싶은 이야기들
그 하나, 스트레스 해소의 길에 대하여
사람을 건강하게 하는 것으로 요가를 꼽을 수 있는데, 그 요가의 꽃이라고 하는 것이 물구나무서기입니다. 쉬운 일은 아니지만 날마다 조금씩 물구나무를 서 보는 것만으로도 건강한 삶을 살 수 있다고 합니다. 사실 사람의 직립은 여러 가지 면에서 아주 큰 부담입니다. 머리를 위로 두고 있기 때문에 수승화강(水昇火降)이 되어야 정상인 기운의 흐름이 자꾸만 거꾸로 됩니다. 기운의 역류는 먹거리와 생활습관도 큰 이유가 되는데, 그 가운데 직립도 큰 이유 중의 하나입니다.

 


직립을 하게 되면 머리를 몸의 정점에 두게 됩니다. 판단력과 이성이 극대화되고, 감정과 본능은 될 수 있는 대로 감추는 것을 바람직하게 여기는 가치관이 바로 직립의 가치관입니다. 여기서 생명의 균형이 흐트러질 수밖에 없습니다. 판단력과 이성이 중요하기는 하지만, 본능과 감정도 그에 못지 않게 중요시되어야 합니다. 몸의 건강만을 놓고 따진다면 감정과 본능에 충실한 것이 훨씬 더 좋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그런데도 교육과 가치관, 제도나 규범, 또는 법에 이르기까지 오늘날 사람들의 삶을 다루는 모든 기반은 판단력과 이성에만 기초한다고 가르칩니다. 감정이나 본능은 그 어느 자리에서도 보장을 받지 못하게 되고, 감추거나 억눌러야 하는 것으로 말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성숙한 사람이 되는 길이라는 것이 일반화되어 있습니다.

 


사람에게 병이 생기는 커다란 요소, 특히 현대인에게 아주 큰 병의 원인이라고 하는 바람직하지 않은 긴장의 원인이 여기에 있습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직립의 위험성입니다. 그래서 거꾸로 서기를 자주 해 줄 필요가 있다는 말입니다. 거꾸로 서기를 해 볼 때 먼저 헤아릴 수 있는 것은 제자리살이들한테서 배우는 일입니다.
모든 제자리살이들은 머리를 땅에 두고 살아갑니다. 가끔은 머리와 몸통, 그리고 팔다리의 구분이 잘 안되는 제자리살이가 없지 않지만, '모든' 제자리살이가 머리를 땅에 두고 산다는 것은 틀림이 없습니다. 머리를 땅에 두었기 때문에 제자리살이들은 모두가 제 생식기를 몸의 정점에 두고 있습니다. 그들의 생식기는 완전하게 개방되어 있고, 공개된다는 특징을 가집니다. 따라서 그네들의 생식활동, 곧 성행위는 아주 우아하고 화려합니다.

 


식물에게 무슨 성행위가 있느냐고 묻는 사람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성행위가 있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거기에 쾌락이 있다는 것은 인정할 수 없다는 사람들은 더 많습니다. 그럴 때마다 스스로 고등동물이라고 하면서 사고가 그렇게 단세포스러우냐고 되묻곤 합니다. 제자리살이에게는 사람이 느낄 수 있는 감정이 없다는 편견이 그런 말을 하게 된 배경일 터인데, 아무리 보아도 제자리살이에게 감정이 없다는 것은 사람들의 독선으로 보일 뿐입니다. 그들은 아침과 저녁을 정확하게 느끼고, 자신들에게 유리한 것과 불리한 것을 또한 아주 잘 압니다. 더욱 놀라운 일은 그들은 날씨에 대해서도 기가막힌 혜안을 가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가물 때의 민들레 잎을 보면 이 말이 무슨 뜻인지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 비가 좀 내린다 하더라도 앞으로 가물 것이라고 판단되면 잎 넓이를 최소화하는 민들레의 슬기를 보면 놀라움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제자리살이도 감정이 있다고, 오히려 사람이 느끼는 것보다도 훨씬 더 많은 것들을 섬세하게 느낀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충분한 감정을 지닌 제자리살이들의 그 감정의 깊이는 머리를 아래로 두고 생식기를 제 몸의 정점에 두는 감정우선형의 몸꼴에서 나온다고 봅니다. 그리고 그네들의 성, 그것은 매우 우아하고 화려하다는 결론이 나오게 됩니다. 생식시기가 시작되면 그들의 엄청난 구애활동이 펼쳐집니다. 때로 그들도 매파를 이용하기도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그들은 향기와 꿀을 스스로 만들어내기도 합니다. 생명의 신비와, 그로 인해서 온 누리에 생기가 가득해지는 놀라움이 거기 있습니다. 거의 모든 동물들이 생식기를 가리고 사는 것과는 달리 완전개방형인 저네들의 생식기는 생김새부터가 아름답고 곱습니다. 동물의 생식기는 같은 종(種)이 아니면 아무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지만, 식물의 생식기는 다른 종들이 보아도 충분히 마음이 끌릴 만큼 발달해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성행위의 놀랍도록 정교하고 우아함, 그것은 오월과 유월에 온 세상을 뒤덮는 송홧가루의 잔치에서 아주 두드러지게 나타납니다.

 


성(性)이 그 자체 이상의 가치와 의미가 된 요즘 사람들에게 이 이야기는 또 다른 자극이 되지 않을까 염려가 됩니다. 생식기를 가장 철저하게 가리고만 사는 사람들의 성은 여러 가지 바람직하지 않은 형태로 표현되곤 합니다. 성이 폭력이 되는 일, 성에 대해 무지하거나 기피하는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는 것, 또는 성이 하나의 상품이 되거나, 온갖 형태의 성에 대한 왜곡과 오해들이 거기 있습니다. 사람의 성에 있어서 아주 큰 문제는 모두가 성에 대해서는 무지하다는 점입니다. 모든 다른 기술들은 이론을 배우고, 실습을 한 뒤에 비로소 현장경험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성에 대해서는 이론도 없고, 실습은 더군다나 상상도 할 수 없습니다. 현장에 투입될 때에는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불을 꺼 놓은 채 첫 경험이라는 것을 하는 것이 보통입니다. 사정이 그렇다 보니 성에 대한 관심이 생긴 뒤에 처음 듣고 배우게 되는 대부분의 이론들은 왜곡된 것이거나, 잘못된 것들 뿐입니다. 여기서 건전하고 아름다운 성을 얘기한다는 것 자체가 희극의 극치입니다. 구성애 선생의 '아우성'이 한 때 전국을 뒤흔들 정도로 그 몸짓만큼이나 큰 파장을 일으켰는데, 결국은 하나의 훌륭한 고급 웃음거리에 그치고 만 것도 거기에 까닭이 있습니다.

 


물구나무 서기, 그것은 단순히 거꾸로 서 보는 것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감정에 충실해지는 것, 본능을 자기 생명의 한 부분으로 인식하여 소중하게 여기는 자세로부터 출발해야 합니다. 그래서 이성과 감성의 균형을 맞추는 일, 이것이야말로 감정의 긴장을 풀어내고, 그런 긴장이 쌓이지 않고 살아가는 길입니다.

 


이것을 위해서는 감정이 마음껏 표현될 수 있는 나름대로의 장치들이 마련되어야 합니다. 그림을 그려본다든지, 노래를 부르는 일, 또는 글을 쓰는 일들이 필요합니다. 예술이라고 하는 것이 모두 그런 차원으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서툴다고 비웃거나, 제대로 못한다고 부끄러워하는 일은 그야말로 어리석은 짓입니다. 처음엔 서툴더라도 자꾸만 표현하다 보면 익숙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 감정 표현의 성숙이 삶을 그만큼 부드럽게 할 것이고, 왜곡의 극치를 보이고 있는 오늘날의 성 문제도 해결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될 것입니다.

 


거꾸로 서기는 생식기를 몸의 정점에 두어보는 일입니다. 그것이 감정의 차원에서는 예술행위입니다. 그 예술이 문화를 만듭니다. 예술은 전문가들이 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가득한 요즘의 세상에서는 문화가 발생할 수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 문화의 생산자들이 모두가 장사꾼들인 세상이 되었고, 거기서 나온 문화 자체가 기형일 수밖에 없는 비극이 또한 현대의 한 현상입니다. 문화가 이불 속에서부터 시작되는 일, 문화의 현장이 이 땅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몸짓으로부터 생겨나는 일, 거기서부터 앞으로 후세의 사람들이 국보급 문화재라고 할 예술가치들이 나오게 된다는 말입니다.

 


이 일을 위해서 오늘은 물구나무를 한 번 서 보는 일이 어떻겠습니까? 그래서 수강화승(水降火昇)의 기운역류를 바로잡고, 그러면서 자기 감정을 해소하는 노래부르기나 그림그리기, 또는 글쓰기를 해 보는 것, 본능의 성실한 표현으로써의 몸을 나누는 일을 합의 하에 해 보는 것은 또 어떨런지요? 그 모든 것은 지금까지 부끄러워하던 것들이 자랑거리라는 발상의 전환과도 맞닿아 있다는 것도 잊지 말아야 할 일입니다. 기운의 조화로부터 이성과 감정의 균형에 이르는 모든 것이 삶을 아름답게 하는 일이라는 것, 그것이야말로 매우 값진 장식품이라고 하는 것을 한 번 새겨보시기 바랍니다.

 

그 둘, 민족생활의학을 되짚어 봄
몸을 배우던 때의 일입니다. 그게 무슨 책이거나 몸 이야기를 하고 있다 싶으면 구해서 읽었습니다. 참으로 좋은 책들이 많았습니다. 그 가운데 잊혀지지 않는 것이 장두석 선생의 『민족생활의학』, 『사람을 살리는 단식』이었습니다. 그 책은 참으로 몸을 배우는 사람에게는 가슴을 설레게 하는 풍부한 내용이 담겨 있었습니다. 그 두 책 가운데 『민족생활의학』은 몸에 병이 난 사람들에게는 하나의 희망이라고 할 수 있는 많은 알맹이들이 보석처럼 빛나고 있었습니다. 그분을 만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무턱대고 광주엘 갔고 그분께 전화를 했습니다. 그분은 거기 없었고, 일꾼이라고 하는 젊은이가 전화를 받았습니다. 몹시 바쁘다는 얘기였습니다. 할 수 없이 그냥 돌아왔고, 집에 와서 얼마 지나 그분과 전화로 말을 주고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분의 목소리를 듣는다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설레었습니다. 그분은 "민족생활학교"를 전국으로 다니면서 열고 계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마당은 열 나흘짜리로 펼쳐진다는 말이었고, 자기 얘기를 들으려면 거기 와서 함께 하면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열 나흘짜리 마당에 함께 하는데 드는 돈이 만만치 않았습니다. 민족을 앞에 두고 볼 때에는 말할 수 없이 부끄러운 사람이라는 것, 그 부끄러움은 겨레얼을 흐트러뜨리는 일에 큰 몫을 한 개신교의 목사라는 사실 때문이라는 것을 밝히고, 몹시 가난하기 때문에 그 돈이 부담스럽다는 것을 밝혔습니다. 그리고 참석은 아니더라도 뵙고 가르침을 받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 때 그분의 말씀이 모질게 떨어져 내렸습니다.
"기독교는 이 땅의 얼과 정신을 모두 말려 죽이고 문화를 파헤쳐 죽인 것들이 아니냐. 거기서 목사 노릇하는 사람이라면 민족생활학교에 와서 크게 뉘우쳐야 하는데, 돈이 아깝다는 것이 말이 되는 것이냐?"

 


대충 이런 식의 말씀이었습니다. 기독교가 그릇된 헤아림으로 겨레얼의 싹을 자르고, 문화를 말려 죽이는 일에 앞장선 것은 틀림없는 일입니다. 그것은 아직도 부끄러운 한 흐름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런 기독교를 부끄러워하는 사람에게 하는 말로는 선생의 말은 지나친 폭력이었습니다. 그런데 민족생활의학이라는 마당을 펼치는 어른이 겉으로 나타난 기독교만 보고 기독교는 무조건 겨레얼을 짓밟는 종교니 한겨레 얼로 살아가는 일에 기독교는 적이라고 규정을 하는 것은 지나치게 속좁은 편견이라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큰 그릇이었는데 어쩌다가 몸을 잘못 돌보아 유방암에 걸린 선배가 있었습니다. 훌륭한 신학자로 몸이 신학의 출발점이 된다는 생각을 하게 된 사람이었는데, 암에 걸려버리고 말았습니다. 그 선배가 장선생을 찾아갔던 모양입니다. 민족생활학교에 참석하면서 엄청나게 꾸지람을 들었는데, 그것이 오히려 마음에 큰 상처가 되었다는 얘기를 전해 들었습니다. 그리고는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 더욱 깊어졌습니다.
민족을 얘기하면서 민족의 분열을 획책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일이라고 봅니다. 이 땅에 개신교인이 천만이 된다고 합니다. 그 숫자가 정확한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우리나라 사람의 25%가 개신교인이라는 사실은 개신교인도 틀림없이 민족을 구성하는 한 부분이라는 것을 말합니다. 여기서 대놓고 개신교는 반민족집단이라고 몰아세우는 것은 결국은 민족의 분열로 이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더군다나 선생의 논리는 '민족'이라는 이름으로 민족의 분열, 또는 민족 내부의 갈등을 유발하게 되는 실수를 했다고 볼 수밖에 없는 작은 사건이었습니다.

 


이 땅에 몸에 대한 관심이 많은 사람은 얼마든지 있고, 그렇기 때문에 개신교집단쯤이야 무시해도 된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그렇다면 그분이 주장하는 건강이론에 '민족'이라는 이름을 붙여서는 안된다고 봅니다. 그리고 그렇게 훌륭한 일을 하는데 반드시 돈을 내는 사람만 그 마당에 낄 수 있다면 그 또한 한겨레의 정신과는 상당히 어긋나있지 않은가 싶은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것은 장사꾼 놀음에 지나지 않는다는 비판도 가능합니다.

 


물론 장선생이 그렇다고까지는 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말할 만큼 그분에 대해 많은 것을 알지도 못합니다. 다만 몸을 말하려면, 몸의 건강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면, 먼저 생명의 속성을 이해해야 한다고 봅니다. 그것은 생명의 속성이나 법칙은 철저하게 '어우러짐'이라는 사실입니다. 조화를 지향하는 생명의 속성 안에서 모든 것이 어우러질 수 있는 세계를 펼치는 것, 그것을 맛볼 수 있는 멍석을 까는 것, 그것이 민족생활학교였으면 좋겠다는 바램, 그리고 선생이 가지고 있는 알음알이는 충분히 그렇게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았기 때문에 아끼고 존경하면서 이 말을 합니다.

 


오늘날 모든 가치의 중심이 돈이 되어버린 마당에서 돈 아니어도 얼마든지 잔치가 가능하다는 것을 가르칠 수 있는 민족생활학교를 기대해 봅니다. 우리 겨레는 예로부터 조화와 균형을 중시하는 삶을 꾸려 왔습니다. 앞에서 이야기한 초가집에 담긴 문화얼이라든가, 크고 작은 문화유산들은 모두 조화를 바탕에 깔고 있는 것들임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그런 겨레얼을 바탕으로 민족을 얘기하고, 민족정신이 그렇게 꽃피워지는 것을 가르치는 민족생활학교라면 그것으로 이 땅이 훨씬 아름답게 돋보일 것이고, 그런 민족생활학교는 세계가 하나로 통합되는 21세기에 있어서 단순히 우리나라뿐 아니라, 온 세계에까지 그 가르침을 펼칠 수 있는 위대한 재산이라고 봅니다. 그만한 가치를 충분히 지니고 있는 선생의 경험과 지식을 바탕으로 한 이론들이 민족을 말하되 민족을 넘어 모든 생명을 살려내는 하나의 큰 그릇으로 꽃피워지길 비는 마음입니다.

 

그 셋, 생명의 결함에 대해서
몸을 공부하던 때의 일입니다. 아직도 더 많은 것을 배워야 하고, 지금도 공부를 하고 있기는 하지만, 처음의 그 때에는 모든 것을 다 아는 것 같았습니다. 아무데나 다니면서 아는 척을 하자 가까이 지내는 벗님 하나가 내게 멍석을 깔아주었습니다. 마음껏 춤을 춰 보라고 강의 자리를 마련해 주었는데, 그 때 몹시 당황했던 일이 아직도 엊그제 같은 느낌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 강의를 듣겠다고 기대를 하고 있는 초롱초롱한 눈망울들, 그러나 한 마디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모두가 장애인이었고, 그 중에는 도저히 허리를 바르게 펴고 앉을 수 없는 사람도 꽤 있었습니다. 결국 어정쩡한 춤을 췄지만 아무도 가락을 쳐주지 않았고, 아직까지도 개운치 못한 뒷맛으로 남아있습니다.

 


그 때는 '결함, 또는 결핍'이 생명이 가지고 있는 속성 가운데 아주 중요한 것이라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목숨살이에 대해서는 어느 한 가지만 몰라도 결국은 아무것도 모르는 것이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몸을 안다'고는 이 세상의 누구라도 할 수 없는 말입니다. 그저 할 수 있는 말이 있다면 '몸을 배우고 있다'는 정도뿐일 것입니다. 다만 '안다'고 하는 말이 의미가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것은 안다고 하다 보면 반드시 자기가 모른다는 사실 앞에 부딪치게 된다는 점입니다. 그렇게 되면 거기서 한 가지를 더 배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여기서 부끄러움을 당하는 것은 감수해야 합니다. 그런 부끄러움을 많이 당한 사람이 보다 깊은 알음알이에 다다를 수 있기는 하니, 안다고 하는 말이 때로는 쓸모있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배운 것은 잊혀지지 않는 좋은 지식이 되지만, 보다 바람직한 것은 가만히 들여다보는 일입니다. 그리고 보이는 것까지만 말하면 됩니다. '안다'고 말하다가 부딪치게 될 경우에는 자칫 남의 목숨에 큰 흠집을 낼 수가 있기 때문에 때로 몹시 큰 위험이 뒤따르는 일이 없지 않습니다.

 


아무튼 '장애'라고 하는 결함은 풀어야 할 큰 숙제였습니다. 오랫동안 그 문제는 냉큼 풀려주지 않았습니다. 결핍이나 결함을 가진 사람들을 사회복지에서는 격리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생태계 안에서 모든 살아있는 목숨들은 살아있는 동안에는 모두가 제 역할들이 있다는 것까지는 보였습니다. 사람만이 그들을 격리시킵니다. 서구의 전통사회가 어떻게 장애인들을 대우했는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격리는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 생긴 현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적어도 과거 우리나라 사람들의 삶에서는 장애나 결함이 격리되어야 할 것으로 인식되지는 않았습니다. 누구에게나 자기의 역할이 있었고 몫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현대사회가 되면서 이런 결함을 가진 사람들이 격리되어야 한다는 생각들이 우세하게 되고, 결국은 그들을 격리하는 사회복지라고 하는 것이 한 나라의 살림살이에까지 중요한 일거리가 되고 말았습니다.

 


현대사회에서는 꿈도 못 꿀 어우러짐을 펼치던 우리 옛사람들의 삶씨가 그리움으로 다가올 무렵, 한 가지 실마리가 보였습니다. 현대사회가 장애나 결함을 해결하기 위한 수단으로 격리라는 그릇된 제도를 택한 까닭이 보인 것입니다. 그것은 그들이 문제를 일으킨다고 보는 때문입니다. 장애나 결함을 가진 사람들이라고 해서 무조건 문제를 일으키지는 않습니다. 그들이 문제를 일으키는 아주 큰 까닭은 장애 자체가 원인이 아닙니다. 그들에게 역할이 없고, 따라서 몫이 없다고 느낄 때입니다. 달리 말하면 '소외를 경험할 때' 그들은 정상인들이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의 문제를 일으키게 됩니다. 역할과 몫이 있을 때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까지 포함될 때 비로소 사회가 틀을 갖추게 된다는 것, 그런데 그들을 격리시키는 구조를 갖지 않고는 유지될 수 있는 사회라면 그 사회야말로 장애사회라는 것도 보였습니다.

 


이 세상에 장애가 없는 완전한 정상인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결핍은 생명의 중요한 속성이고, 그것 때문에 살아갈 의지가 생기고, 일을 하는 동력 또한 거기서 나온다는 사실입니다. 그렇게 보면 결핍은 참으로 소중한 재산입니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결핍이 하나의 고리라는 점입니다. 남자만 존재하는 사회나, 여자들만 모인 세상은 있을 수 없습니다. 남자의 남자됨이라는 것이 여자의 입장에서 볼 때는 장애이고, 여자의 여자됨이라는 것이 남자의 입장에서 볼 때는 또한 하나의 장애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성서에서는 '하느님이 사람을 만들되 여자와 남자로 지으셨다'는 구절이 있습니다. 여자와 남자를 합칠 때만 비로소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는 해석이 가능한 구절입니다. 아무튼 남자의 결핍 부분이 있어서 여자와 결합할 수 있는 고리가 되고, 그것은 여자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결합의 과정을 때로 사랑이라고도 부르고, 상생이라고도 합니다. 어떤 경우에는 잘못된 연결이 생기기도 하는데, 이런 잘못된 연결에는 매듭이 생기고, 그 매듭을 푸는 것을 '해원(解寃)'이라고 합니다.

 


모든 살아있는 것들은 서로 치밀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전혀 상관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해충'이라고 불리는 곤충이나, 병의 원인이 되는 세균들, '잡초'라고 부르는 풀들이나, 한 번도 듣지도 보지도 못한 수많은 것들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결핍이라는 고리에 생명현상이라는 끈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생명체계입니다. 그것을 사람들은 '유기체'라고 부르는 것 같습니다. 지금은 이에 대한 보다 많은 것들이 연구에 의해 밝혀지고 있는데, 모든 생명을 서로 이어주는 고리가 무엇이라는 규정은 아직까지는 없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보입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결핍이라는 구멍입니다. 결핍이 커서 장애라고 불리는 수준의 것은 다른 목숨으로 더 긴밀하게 이어져야 하는 필요입니다. 우리 사회에서 결핍이 제대로 된 대우를 받는 경우는 신생아 말고는 없는 것 같습니다. 그 이외의 경우에는 모두가 격리되어야 할 것으로 다루어집니다. 얘기가 좀 다른 데로 가는 것 같습니다만, 최근에 이르러 이혼율이 높아가는 것도 마찬가지의 이야기로 풀이해 볼 수 있습니다. 서로 결함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만난다고 생각하지 않고, 지극히 정상인 두 사람이 만났다고 하는 태도가 첫번째 문제입니다. 게다가 결핍을 가진 것들은 함께 어울릴 수 없다는, 그래서 결핍을 격리의 원인으로 이해하고 있는 사회분위기까지 한 몫을 해서 이 이혼의 유행을 낳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바람직한 인간관계가 나올 수 없다는 것은 불을 보듯이 훤한 일입니다. 열 쌍 가운데 세 쌍이 이혼한다고 하면 거의가 이혼을 한다고 보아도 무리가 없는, 그야말로 비극의 덩어리가 곧 현대사회라는 결론까지 가능합니다.
결핍을 제거해야 할 것이라거나, 감추어 드러내지 않아야 할 것, 또는 통제가 잘 안된다고 해서 격리해야 할 것이라고 보아서는 안됩니다. 성숙한 사람은 상대의 결핍을 소화해 낼 수 있는 사람을 말합니다. 명상에서 매우 중요한 '있는 그대로 보는 것'으로부터 결핍을 제대로 보는 시각도 생겨나게 된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내 주관으로 보지 않기, 내게 옳은 것이 언제나 옳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채기, 그렇게 보면 세상은 훨씬 달라져 보일 것입니다.

 


이 때 주의해야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결핍을 일부러 찾아서 그것을 끌어안으려는 억지를 불지 말아야 한다는 점입니다. 거기서는 끌어안는 사람이나 안기는 사람이 둘 다 부자연스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안는 일이 고통일 때에 안는 행위는 또 다른 범죄일 수 있습니다. 여기서 하나 생각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경허라는 큰 어른의 일입니다.

 


어느 날 경허스님이 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날씨는 몹시 춥고 눈까지 수북히 쌓인 겨울날이었다고 합니다. 길을 가다가 보니 거지 여자 하나가 길에서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몸에는 몹쓸 피부병까지 생긴 이 여자를 경허는 들쳐업고 절로 왔습니다. 그리고는 자기 방에 눕히고는 불을 지펴 방을 따뜻하게 하고, 먹을 것을 주었습니다. 방 안에서는 몹시 심한 악취가 났지만 경허는 아랑곳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리고는 늘 그 여자와 둘이서 잠도 자고 먹기도 같이 먹었다고 합니다. 주위에 있는 다른 스님들과 불자들이 그런 경허를 보고 여자와 잠을 잔다는 것 때문에 말들이 많았던 모양입니다. 스님이 그게 무슨 짓이냐고 입방아를 찧어대도 경허는 들은 척도 않았다고 합니다. 이윽고 봄이 되어 몸이 많이 회복된 여자가 다시 떠나고 그 뒤로 일은 잠잠해졌다고 하는데, 그 이야기를 듣고는 가슴이 뭉클해졌습니다.

 


자신이 사랑해야 할 사람이 누구인지를 알아볼 수 있었던 그분은 그야말로 큰 어른이었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일을 '내가 좋은 일 한 번 해야지' 하고 시작을 해서는 안된다는 말입니다. 그저 자연스러워야 합니다. 남의 결핍을 유난히 잘 보는 사람은 그 자신의 내부에 그만한 장애가 있다는 것을 알아채는 것이 보다 중요한 일입니다. 자기를 못 보는 사람의 선행은 그리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자신의 결함을 볼 줄 아는 것, 그리고 그 결함이라는 고리를 이어주고 있는 목숨의 끈이 어디까지 연결되어 있는지를 아는 것, 그것이 훨씬 중요하고 서둘러야 할 일이라는 말입니다. 굳이 사회복지를 한다고 하면 그 다음에 일을 벌이면 어떨까 싶은 마음도 듭니다.

 

아홉째마당. 마치는 말.
그 동안 참 많은 말을 했습니다. 이 모든 얘기를 한 줄로 줄인다면 '등을 곧게 세우고 바른 숨을 쉬자'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그 나머지 이야기는 모두가 군더더기일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날마다 명상을 하는 사람이라면 여기서 말한 것은 다 필요가 없는 이야기입니다.
다만 긴 이야기를 한 데에는 까닭이 있습니다. 그것은 지극히 혼자만의 경험을 이야기하는 가운데서, 모든 이야기가 명상에 대한 욕구를 자극하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만일 이 이야기들이 명상의욕구를 건드리지 못하는 이야기로 그친다면 모든 이야기는 아무런 의미도 가치도 없습니다.

 


사람의 말이라고 하는 것이 모두 그렇다는 것을 아는 선불교에서 '불립문자(不立文字)'를 중요하게 여기는 까닭이 여기 있습니다. 그들은 될 수 있으면 말을 줄입니다. 선불교의 이야기는 그래서 아주 간단하면서도 그 안에 핵심을 찌르는 날카로움과 깊이가 있습니다.
단칼에 벨 수 없으면 칼을 빼들지 않는 선불교의 깊이는 오늘날 명상을 하는 사람들이 배워야 할 중요한 자세입니다. 그렇게 정곡을 찌르는 말을 남긴 조사들의 어록 또한 선수행을 독려하기 위해서 기록되었다고 봅니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이 글은 조사들의 어록에는 감히 견줄 수도 없는 애송이의 몸짓에 지나지 않습니다. 다만 오늘날 명상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 명상으로 들어가고자 할 때, 그들에게 길라잡이가 될 수 있는 글을 써 보고 싶었습니다. 이런 식으로 쓰인 글들은 많습니다.
그런데 때로는 너무 어려워서 일반이 알아듣기에 부족하다는 마음이 드는 것들도 있었고, 어떤 것들은 마치 명상이 건강을 회복하거나, 몸의 건강만을 위한 것이라는 식으로 쓰여진 것들, 또는 너무 심한 군더더기 때문에 하려는 이야기의 핵심을 찾기가 어려운 것들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이야기를 해 보고도 싶었습니다.

 


또 한 가지, 흔히 산 속에 들어가서 구도의 길을 간다고 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해 보고 싶었습니다. 그것은 그들의 삶이 어느 특정한 영역에 치우쳐 있다는 느낌이 든다는 것입니다.
틀림없이 명상을 오래 한 사람은 어른으로서의 기품을 지니게 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산 속에 들어앉아 도인 노릇을 하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명상에 있어서 바람직한 것은 자연과 숨결을 같이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자연과 숨결을 같이 한다는 것이 곧 산 속에서만 가능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 모두가 산 속으로 들어갈 수도 없는 일이고 말입니다. 사실은 명상을 하는 사람에게는 모든 인공의 장소까지도 자연과의 연장선상에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생활명상이 가능한 것도 그런 까닭입니다. 누구나 자신이 놓여진 자리에서 명상이 가능할 뿐만 아니라, 어느 정도 익숙해진 뒤에는 걷거나 일을 할 때에도 명상은 가능합니다. 걷기 명상이 아닌, 그저 볼 일이 있어서 걸으면서도, 그리고 사람과 사람의 만남에서도 명상은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또한 어떤 특정한 장소나, 종교지도자 같은 특정한 위치에 있는 사람이 아니더라도 명상은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그 명상을 통해서 기운의 순환이 이루어지고, 그 순환이 조화로운 것이 될때, 그것은 이미 명상이기 때문입니다.
"목숨과 목숨의 어우러짐"은 내가 명상을 통해서 얻은 결론이었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의 명상이 이 방향으로 흐르지는 않을 것입니다. 개인마다 편차가 있고, 언제나 많이 흐트러지고 일그러진 자리에서 명상이 시작되기 때문에 그 일그러짐과 흐트러짐의 정도에 따라서 명상의 진행속도나 명상에서 겪는 것은 상당히 달라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하나 강조해 두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금방 눈에 보이는 듯 하거나, 또는 손에 잡힐 것처럼 아주 그럴듯한 모습의 경험은 모든 것이 다 홀리는 것들이라는 점입니다.

인생의 길이나 여행에서는 길을 잘못 들면 돌이켜 다시 시작하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명상에 있어서는 그런 구덩이나 샛길로 접어들면 다시는 헤어나오지 못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살면서 생긴 시각의 왜곡이나 편견도 고치기가 매우 어렵지만, 명상에 있어서도 한 쪽으로 기울거나 치우치게되면 그것이 전부인 것처럼만 보이기 때문에 헤어나오지 못하고 제자리를 맴돌기만 하게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명상가들에게 사람이 꼬이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들이 평범한 사람들보다 무엇인가를 더 보기 때문에 엄청난 것처럼 보이는 까닭입니다. 그러나 참으로 명상의 길을 바르게 가는 사람은 어떻게 보면 소탈해 보이기도 하고, 때로는 바보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몹시 차갑게 느껴질 때도 없지 않습니다.

 

겉모습이나 겉으로 드러나는 행위를 보고 전체를 재단한다는 것은 오해와 실수를 할 가능성이 그만큼 커진다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나를 가다듬어가면서 사람을 보는 일이 중요합니다. 눈이 열린 것만큼만 보이는 것이 사람이고, 눈이 제대로 열리면 "참"이 보이게 되니 서두르지 말고 차근차근, 오직 몸과 숨을 바로잡기만 하면 됩니다.

이 글을 쓰는 나는 무엇을 깨달은 사람은 아닙니다. 그저 한 10년 남짓 명상을 해 온 사람일 뿐입니다. 그 10년을 돌아보면 나름대로는 치열하게 매달린다고 여겼지만, 이제 돌이켜보니 게으름을 너무 부린 나날이었습니다.

 


좀 더 열심히 했더라면, 좀 더 자신에게 성실할 수 있었다면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전혀 안 드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나는 내 생긴 대로 살았다는 점에서는 그것이 최선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먹고 싶을 때 먹고, 놀고 싶을 때 놀면서 틈이 나는 대로 꾸준히 걸어왔습니다.
언젠가 누가 물었습니다.
"당신이 지금 다다른 수준이 어떤 겁니까?"
그 때 내가 말했습니다.
"문 창호지에 바늘구멍 하나 겨우 뚫어놓고 하늘을 내다보고 있는 중이지요."

 


그만큼 아직은 더 많이 배워야 할 사람입니다. 그런 점에서는 이 글을 쓰면서 길벗을 만나고 싶다는 생각도 마음 한 켠에 있었음을 느낍니다.
다만 하나,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적어도 깨달은 사람이 한 말을 더디긴 하더라도 알아들을 수 있다는 것, 깨달은 사람이나 깨달음으로 가는 사람을 알아는 본다는 것입니다.

 

하나 더 아는 것이 있다면 아직은 그런 숨을 쉬어보지 못했지만 날숨 하나에 내 온 몸을 다 비워 그 자체로 무(無)가 되고, 들숨 하나에 온 우주를 다 빨아들여 우주가 무(無)가 되는 상태가 가장 큰 숨이라는 것을 말할 수 있습니다.

오늘도 지구는 그 낡은 몸을 뒤척이며 해님의 둘레를 돌고 있습니다. 그것은 태양계의 순환입니다. 이 순환이 태양계의 기운을 일으키고, 그 기운이 우리 모두에게 우리의 숨만큼 스며들어왔습니다. 그 사실을 숨으로 느끼는 명상의 세계로 이 글을 읽는 모든 분들을 간곡하게 초청합니다.
오십시오.
오셔서 다함께 하늘나들이를 하는 나그네 길에서 만납시다. 거기서 우리 참으로 멋진 하늘굿을 한바탕 벌여 보십시다.
눈을 어지럽힌 죄를 용서해 주시기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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