目次
1. 동학농민전쟁과 전남세력의 호응
2. 친군무남영과 장위영의 군사규모
3. 황토현전투와 이동과정
1) 황토재 전투
2) 농민군의 남하
4. 장성전투 승리의 실상
1) 장위영병의 진군
2) 장성전투 승리의 실상
5. 장성전투의 영향
6. 장성전투 승리의 의미
동학농민전쟁과정에서 나타난 장성전투는 커다란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런데도 그 전투의 실상을 정리한 논문이 없었다. 여기에서는 그 배경과 과정의 의미를 함께 고찰하여 보기로 한다. 특히 백주년을 맞이하여 그 의의를 더듬어 보고 사적지 지정, 기념전시관 건립 등의 기념행사에 한 참고 자료로 제시하는 바이다.
1. 동학농민전쟁과 전남세력의 호응
그 34개 군현중에 지금의 전남지역은 영광,함평,장성을 비롯 무안, 장흥, 순천, 구례 등 17개 지역의 농민군 지도자 명단이 나타난다.
이 숫자는 참여 군현의 반수를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 참여 군현은 훨씬 더 많았던 것이다. 그 예로 초기부터 활동한 화순,광양등지의 농민군 지도자가 있었던 것으로 보아 짐작할 수 있다.
특히, 장성의 두령으로 김주환(金 煥), 기수선(奇守善), 기동도(奇東濤), 박진동(朴振東), 강계중(姜戒中), 강서중(姜瑞中) 등이 등장한다. 김씨, 기씨의 등장이 주목된다. 이 지역은 전통적으로 울산 김씨, 행주 기씨, 그리고 변(邊)씨 등이 토호 양반으로 군림해 왔기 때문이다.
1894년 9월 2차 봉기가 단행될 적에 전라도 31개 군현의 장령이 참여한 것으로 나타나는데, 그중에 지금 전라남도 지역으로는 장흥, 창평, 장성, 능주, 광주, 보성, 나주, 영암, 강진, 구례, 해남, 곡성, 영광, 흥양, 순천 등 15개 지역이었다.
특히, 2차봉기 무렵, 전남지역은 일본군의 해상 침투를 막기 위해 손화중, 최경선 등이 공주전투에 합류치 않고 광주지방에서 농민군을 이끌고 있었던 점을 감안하면 그 참여 정도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더욱이 공주전투이후 광주, 나주, 강진, 장흥, 해남, 무안, 순천, 여수, 광양에서 큰 전투들이 있었고 주력군의 잔여세력들이 이들 지방에서 무수한 희생을 치렀다. 어떻게 보면, 전국의 지역중에 가장 많은 희생자가 위의 해안지방에서 나왔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1880년초 친군영이라는 이름으로 중앙에 5영을 두었다. 이어 지방에도 친군영을 설치하였는데 평양, 해주, 강화도, 대구, 전주, 청주, 춘천 등지였다. 전주에는 1893년 친군무남영이라는 이름으로 방어군을 두었다. 그 조직은 영사이하 약 천여명으로 구성케 되어 있었다.
그러나, 무남영군은 이런 기본조직과는 달리 정식의 군대는 3백명이었고, 장관(將官)과 잡역이 7백여명이었다. 다시 말해 정식군대보다 잡역이 배수나 많았던 것이다.
그것도, 훈련병에 지나지 않을 정도로 군율이 없었고 또, 각 군현에 백일(百一)의 세를 거두어 거의 착복하는 통에 월급이나 경비가 제대로 지급되지 않았다.
장위영은 복잡한 개편을 거쳐 탄생하였다. 1888년 중앙군인 친군영을 총어(摠禦) 통위(統衛) 장위 경리(經理) 등으로 재편하였다. 장위영은 좌영의 임무를 맡았는데, 장위사 이하 지휘관 밑 잡직이 3백 49명, 병정과 작대병(作隊兵)이 4천 2백 10명이었다. 그러나, 기본조직과 정원의 규정대로 갖추어지지 않은 것 같다.
다시 말해 4영 또는 3영의 조직이나 정원대로 경비를 염출할 수가 없었던 데에 기인할 듯 하다. 군사마(軍司馬)인 최영년은 "서울에서 총리, 총제 두 군영을 새로 설치하여 각군현에 수세하여 증액한 것이 너무 많았는데 호남의 지세(紙稅), 죽세(竹稅)와 해구의 잡세같은 것은 이루 기록할 수도 없었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장위영병은 서울방어, 특히 궁궐호위를 맡은 이 나라에서 가장 강력한 군대였다. 그런 탓으로 재래식 무기가 아닌 청과 일본에서 수입해온 크루프포 신식총 등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그 무기와 장비에 있어서 무남영과는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이었던 것이다.
3. 황토현전투와 이동과정
장성전투에 앞서 황토재전투와 농민군의 이동과정을 알아둘 필요가 있다. 이 과정에는 농민군의 전술 전략이 극명하게 들어나고 또 국지전의 성격이 아니기 때문이다.
1) 황토재 전투
이경호는 "동진강의 험한 입구를 파수하여 진두(津頭)의 통로를 끊고 백산쪽에 둔병하고서 양곡 운반의 길을 끊는다면 열흘도 못되어 도둑을 사로 잡을 수 있다."고 말했다.
아주 농민군을 하찮게 본 것이다. 김문현은 무남영의 대관 이재섭에게 무남영의 초병과 각읍의 포군을 거느리게 하고 송봉희에게 도내의 보부상을 거느리게 하여 서문 밖 용두머리를 지키게 하였다.
이어 이경호에게 좌초병과 각읍의 포군을 거느리고 금구길로 나가게 하였고 도한인 별초군(別抄軍), 유상(油商)인 수초군(水抄軍), 지소인(紙所人)인 산초군(山抄軍)을 편성하여 동원하였다.
계속해서 각군의 포군 보부상 무부 등에게 총동원령을 내렸다. 그리하여 고부쪽으로 몰린 숫자는 무남영병 7백, 토병 5백 60, 또는 장정 수 천, 보부상 천여명이라 하였다.그리고 일부 유림 민보군(民堡軍)도 참여하였다. 황현은 "김기술(金箕述)은 김개남의 일가인데 백산의 싸움에 칼을 짚고 관군을 도와 김개남이 이를 갈고 죽이려 하였다"고 기록하였다.
이때의 양쪽 사정에 대해 이런 기록이 있다.
이 싸움에서 농민군은 흰옷을 입은 향병은 추격하지 않았고 검은 옷 입은 영병과 붉은 인주를 등에 붙인 보부상만을 추격했다 한다. 이렇게 해서 농민군은 전라도의 관군을 여지없이 깨부셔 재기불능의 타격을 안겼다.
2) 농민군의 남하
이어 삼거리와 흥덕을 거쳐 고창 역장을 함락하고 영광에 머물렀다. 이에 동학사에서는 "이때 동학군의 뒤를 쫓던 관병들은 고부 흥덕 무장 등 읍을 거쳐 영광 군저(郡底)까지 팔았으나, 동학군은 일방 앞서가며 성을 만나는 대로 함락을 시키고 고기 등물을 거두어 가지고 보일만 말만하게 앞을 서서 남으로 남으로 향하여..."라고 기술하였다.
농민군은 함락시킨 고을에서 양곡을 거두어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고 억울한 죄인을 풀어주고 무리를 거두어 사용하고 못된 아전과 토호를 징치하였다.
농민군은 영광에서 6일을 머물다가 4월 18일 함평에 주둔했다. 농민군의 함평 주둔은 상당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곳에서 농민군은 기율을 다지고 농민군 진지 주변에서 배회하는 혐의자를 죽여 관군의 밀정 침투를 막았으며 또 진세를 벌여 깃발과 행군을 정비했다. 그리고 나주 공형(公兄)에게 글을 보내 항복을 권유했다. 나주시는 영장과 각읍의 모군(募軍)이 방어라고 있었는데 나주목사 민종열은 이 제의를 거부했다.
한편 뒤따라오는 초토사 홍계훈에게 글을 보내 대의를 밝히고 폐정의 조목도 제시하였다. 이 두 가지 글은 농민군이 최초로 관변에 보낸 것으로 그 거사 동기를 천명한 것이다.
4. 장성전투 승리의 실상
1) 장위영병의 진군
장위영병의 5대가 군산포를 거쳐 전주에 도착한 것은 4월 7일이었다.
그런데, 전주에 입성할 적에는 320여명이 도망쳐서 470여명만이 남아있었다고 한다. 4월 7일은 바로 황토재 전투가 있던 날이었다.
홍계훈은 농민군의 동정에 대해 보고를 받았다. 그러나 즉각 군대를 파견하지 않고 전주에서 머물며 영장 김시풍 등이 농민군과 내통했다는 혐의를 씌워 처단하며 머뭇거리고 있었다.
홍계훈은 일부의 군대를 선발대로 태인,무장 등지로 내려보내고 딴전을 피우다가 4월 18일에야 본대를 이끌고 출동했다. 이 무렵 조정에서는 강화도 수비병 400명을 증파하는 조치를 취하였다. 홍계훈의 군대는 4월 21일에야 영광에 도착했다. 농민군은 이 무렵 함평에 머물고 있었다. 이때 농민군쪽에서는 홍계훈의 동정을 파악하고 앞에 말한 [원정서(原情書)]를 보내며 자기들의 거사동기를 표방했다. 그리고는 홍계훈이 영광에 도착하던 날 장성은 발길을 돌렸다.
농민군은 나주공형에게 경고문을 보내기만 하고 함평.나주의 사잇길로 빠져 나와 장성으로 진출했던 것이다. 이것은 바로 홍계훈의 허를찌른 것이다. 홍계훈은 이 [원정서]를 받고 조정에 "말이 불궤(不軌)한 것이 많고 뜻이 극히 해괴하다"고 보고하면서 정확한 보고를 하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는 이들을 선유하기 위해 왕의 윤음을 들고온 이효응, 배은환 등의 종사군관을 농민군 진영으로 보냈다. 싸우기 전에 이들을 왕의 윤음으로 해산시켜보려 한 것이다.
홍계훈은 이때까지도 자기 휘하의 군졸이 도망친 사실을 철저히 숨기고 있었다.
또 그는 농민군이 장성으로 진출한 사실을 알고 대관 이학승, 원세옥, 오전영에게 각기 1대씩을 딸려 장성으로 보냈다. 그 자신은 영광에 머물고 있다가 총제영병(강화수비병)이 법성포에 도착한다는 보고를 받고 23일 군관등을 법성포로 보내 맞이케 하였다.
그 자신은 강화도 수비병과 합세할 계획아래 이런 행동을 벌이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전술일 수도 있으나 겁장이의 행동을 보인 것이라고 볼 수 있었다.
아뭏든 강화도 수비병 4백여명이 합류해 오자, 그는 한결 마음이 놓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날 저녁 무렵 간담이 서늘한 보고를 받고 어찌할 줄을 몰랐다.
2) 장성전투 승리의 실상
농민군은 21일 장성에 도착하여 월평(月坪)의 삼봉(三峯)아래에 진을치고 있었다. 이때의 정황을 최익현은 이렇게 요약하였다. "공(이학승)이 장위영 대관으로 종료하여 영광에 유진하고 있을 적에 도둑 무리 수만명이 장성의 월평에서 주둔하고 있었다. 공이 군사 2백명을 거느리고 선봉이 되어 물을 사이에 두고 싸워 도둑 백여명을 베었다. 그러나 수가 적어 적과 맞설 수 없었고 대군도 멀리 떨어져 있었다. 이에 도둑이 물을 건너 삼면을 포위하여 추격하니 사졸이 끝내 무너졌다." 농민군은 영광,함평에서 부터 그 숫자가 불어나 있었는데 황현과 최익현은 이때 농민군의 숫자를 만여명이라고 했고 전봉준은 4천여명이라고 했다.
월평은 이 일대에서 큰 장이 되는 곳이다. 또 이곳은 앞에는 황룡강이 가로 놓여 함평, 영광의 길을 가로막고 있고 뒤에는 삼봉이 자리잡고 있다. 전강배산(前江背山)의 전술적 지형이었다. 농민군은 이런 곳에 진을 치고 이틀이나 머물고 있었다. 다시 말해 바로 북상하지 않고 진용을 갖추고 결전에 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홍계훈은 앞에서 말할 대로 선발대 3백여명은 보내면서 농민군의 동정을 살피라고 했지, 전투를 명령한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홍계훈은 또하나의 꾀를 내고 있었다. 이런 기록이 있다."지방군으로 앞장을 세워 싸우게 한다. 왜냐하면 지방군은 경군과 서로 평등한 대우를 받지 못한 탓으로 초토사를 원망하여 내분의 변이 있을까 두렵다." 고 일본측 정보원들은 이런 사정을 보고하고 있다.
홍계훈이 자신의 부대와 무남영의 군대를 이끌고 왔는데 차별대우를 하여 무남영군 또는 향병의 불만이 고조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지방군의 불안이 고조되었는데 이 지방군을 총알받이로 삼고 자신의 군사를 보호하려는 작전을 세웠던 것이다. 그러므로, 경군, 3백여명에 상당수의 지방군이 장성전투에 참여했던 것이다. 이때 전봉준은 경군의 숫자를 7백여명이라고 말했는데 중앙군과 지방군의 숫자를 합해 말한 것일 수도 있겠다. 아무튼 이학승은 장성지경에 들어왔으나 지리에 어두웠다. 그는 머뭇거리며 월평 건너편에 이르니 4방에서 농민군의 모습이 보였다. 이학승은 나갈 수도 물러 갈수도 없어서 일단 격문을 보내 회유하려 들었으나 농민군측에서는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
이학승은 농민군측의 숫자가 워낙 많고 또 선제공격을 받을 것을 염려했다. 그리하여, 대포를 먼저 발포했다.
이 대포는 황룡강을 건너 날아가 월평장터를 명중시켰다.
장터에서 점심밥을 먹던 농민군 50여명이 쓰러졌다. 농민군은 경군의 대포위력을 이때까지 잘 몰랐던 것 같다. 장터의 농민군은 일시 동요하였으나 곧바로 진영을 가다듬고 삼봉으로 올라갔다.
삼봉에서 내려다 보면 황룡강 일대는 물론 함평, 나주길, 장성읍내의 정경이 모두 한눈에 들어온다. 관군의 동정을 확연하게 바라본 농민군은 진세를 학형(鶴形)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타원형의 장태 수십개를 굴리며 물밀듯이 지쳐왔다. 농민군은 장태뒤에 숨어서 접근해 왔다. 그리고, 몸을 장태뒤에 숨기고 포를 쏘아댔다.
여기에서 장태라는 무기에 대해 설명할 필요가 있겠다.
① 장태는 둥글기가 닭장같고 바깥에는 칼을 나란히 꽂았고 아래에는 바퀴 수개를 달았는데, 탄환이나 화살이 모두 여기에 꽂힌다는 설
② 평죽으로 얽어 닭의 장태와 같이 만든 것으로서 그 밑에 차바퀴를 붙인 것이며 그속에 군사가 앉아 총질을 하게 된 것이라는 설
③ 타원형으로 짚을 뭉쳐 대나무를 겉에 대고 그 밑에 비퀴를 달고 그 뒤에 엎드려 밀고 나왔다는 설.
④ 타원형으로 짚을 속에 넣고 겉에 대나무를 얽었는데 길이는 10∼20발 정도가 되었다는 설.
이중에 ④ 의 설이 가장 합리적인 것으로 보인다. 바퀴를 달았다는 것은 산악지대에서 사용할 적에 마땅치 않으며, 또 평지에서도 이용하기 힘들다. 어쨌든 장태는 큰 위력을 발휘했다. 농민군은 강을 건너 3면으로 포위하고 진격해 왔다. 관군이 쏘는 총알은 장태에 꽂혔고 농민군은 함성을 지르며 지쳐 돌격했고 관군은 도망치기에 급급했다.
아직 장마철이 오기 전이어서 황룡강의 물은 그리 많지 않았을 것이다. 황룡강과 그 언덕은 피로 물들었고 시체는 강과 들판에 쌓였다. 이학승은 도망치다가 신호리 장성읍내길의 구릉에 이르렀다.
이학승은 더 달아날 수없는 지경에 처해서 "나는 대장 이학승이다. 의리로 구차히 살 수 없으나 역적이 어찌 나를 죽이리오."라고 말하였고, 농민군은 총을 쏘아 죽였다. 농민군은 이학승의 머리를 베어 갔다. 이학승의 시체는 두메 그자리에 묻었는데 이런 기록이 전해진다.
그러면, 이때 양측의 희생자는 어떤 규모였던가?
농민군측의 희생자는 다음과 같다. 전봉준은 공초에서 처음 대포를 쏠적에 50여명이 죽었다고 했다. 홍계훈은 대포 한방에 수백명이 죽었다고 하였다. 황현은 무덤 하나에 4∼5명씩 17개를 만들었다고 하였다.
관군측의 희생자는 다음과 같다. 황현은 관군 7명이 죽었다고 하였으며 홍계훈은 이학승을 비롯하여 병정 5명이 죽었다고 하였으며 이선근은 일본측 자료를 토대로 지방군 3백여명에 경군 12명이 죽었다고 하였다. 그러나 전봉준 공초세는 관군의 죽은 숫자를 말하지 않고 있다.
이로 보아 관군측에서는 향병이 주로 앞장을 서서 많은 희생자를 냈는데, 홍계훈은 이 사실을 중앙에 거짓으로 보고하였다고 판단된다. 그는 처음부터 향병의 참여사실을 보고하지 않고 있었다.
또 이때 농민군은 전리품을 노획했는데 홍계훈은 "크루프포 1좌, 회선포 1좌, 탄환 얼마쯤을 잃었다."고 하였고, 황현은 대환포 2좌를 빼앗았다고 하였고 오지영은 대포 3문과 양총 백여개를 빼앗았다고 하였다.
농민군은 이런 노획물을 거두고 패주하는 관군을 더이상 추격하지 않고서 다시 월평으로 들어갔다. 이때의 정경을 두고 "깃발을 촌락에 가득 세우고 막 밥을 짓고 있다가 경군이 내습한다는 보고를 듣고는 나팔이 한번 울리자 군사를 재촉하여 출발했다. 말을 탄 자가 2백여명이었는데 곧바로 정읍으로 향했다."고 하였다.
5. 장성전투의 영향
장성패전을 접한 조정에서는 큰 논란을 벌인 끝에 전라감사 김문현과 전라병사 이문영을 파직시켰다. 그리고 김학진을 감사로 임명하고 서병묵을 병사로 임명했다. 이어 엄세영을 삼남염찰사로 이원회를 양호순변사로 삼아 현지로 파견했다.
이들은 민씨세력이 아니었다. 민씨들도 들끓는 여론을 어찌할 수가 없어서 이런 인사에 동의할 수 밖에 없었다. 반민씨들은 민씨의 책임을 묻고 새로운 인물을 등장시켜 농민군을 무마하고 민심을 돌리려 한 것이다.
이들은 즉각 현지로 출발했다. 그리고 여러가지 조치를 취했고 전주함락 이후에도 계속 활동을 벌였다.
다음의 조처는 청군(淸軍) 원병의 구체화였다. 1893년 3월 보은 원평집회때에도 군대 파병을 청에 요청했고, 황토재 패전직후에도 민영준은 청에 원병요청을 제기하였다. 그러나, 영의정 심순택 등의 반대에 부딪쳤고 서울주둔 청군의 지휘관 원세개도 결정을 못내고 있었다.
홍계훈은 장성전투의 패배를 예상하고 '차병'이 불가피함을 조정에 보고하였다. 민영준은 이 요청을 받고 임금에게 더욱 강력하게 '원병의 필요'를 알렸다. 그리하여, 고종도 반대의견을 묵살하고 원세개에게 간곡하게 요구하였고 원세개도 이에 따라 천진의 이홍장에게 그 긴급을 알렸다.
민영준은 청국의 서울 주둔 사령관인 원세개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세도정치를 견고히 하려 하였고 원세개는 많은 잇권을 챙기며 동조했다. 이때에도 많은 대신 들은 외세 개입을 주저하였고 북양대신(北洋大臣) 이홍장도 일본의 개입을 주저해 신중을 기하고 있었다. 그러나 민영준과 원세개의 적극적 추진으로 끝내 청군의 파병이 실현되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청나라의 원병이 실현되었고 청일전쟁의 단서가 열리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청나라 원병의 구체화는 장성전투에서 비롯되었던 것이다.
6. 장성전투 승리의 의미
당시 최신 정예의 군대를 깬 농민군은 사기가 크게 올라 전주성을 함락하였다. 이것은 농민군의 전술적 승리였고 한편 관군으로서는 위축을 가져왔다. 따라서, 각지의 농민군은 속속 모여들어 세력을 키웠고 다른 지역 곧 충청도, 경상도 지역으로 황토재와 장성전투의 소문이 퍼져 용기를 더해 주었다.
조정에서는 중앙군이 깨지는 사정을 보고 두가지 대비책을 세웠던 것이다. 곧 민심 수습책을 세워 민씨 세력의 제거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이를 단서로 하여 6월 21일 경복궁 쿠테타이후 개화정권과 일제에 의해 민씨들은 제거되었다.
다음으로 조정에서는 끝내 이 전투패전을 계기로 청의 원병이 실현되었고 이를 빌미로 일본군의 출병이 이루어졌다. 그리하여 청일양국의 각축장이 되었고 마침내 일본군의 승리로 마지막 농민군의 대일항쟁의 전면전이 이룩되었던 것이다. 그동안 장성전투의 중요성을 인식하면서도 단일 논문으로 연구된 적이 없었다. 물론 장성전투는 농민전쟁 전과정 뒤에서 살펴 보아야 하나 그 특수한 의미는 별도로 부각되어야 한다.
끝으로 말해둘 것은 집강소 기간에도 장성은 여러모로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광주, 나주와 전주, 정읍의 중간지점에 위치하고 있었던 지정학적인 특수성도 있었다. 그런 탓인지 전봉준은 끝무렵 입암산성 백양사를 거쳐 순창으로 몸을 숨기기도 했다.
아아, 우리의 광주와 장성은 영원할진데. 그리고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없어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