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 김성환>
목차
1, 들어가는 말
2. 도교수양의 유래
3. 도가의 양생적 전통
3-1. 精神의 도가적 함의
3-2. 우주의 (精)氣와 통하고, 形神을 함께 保全하는 養生의 수양
4. 도교수양의 宗旨
4-1. 愛氣·尊神·養精과 內丹의 修煉
4-2. 신선이 되는 길
5. 도교수양의 현대적 의미
6. 나가는 말
1. 들어가는 말
흔히 도교는 유교·불교와 더불어 동아시아 문명의 골간을 형성했다 고 한다. 이렇게 동아시아에서 三敎를 문명의 세 기둥으로 여겨온 역사는 실로 오랜 것이다. 중국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7세기의 고구려인도 이미 儒敎·佛敎·道敎의 공존을 三足鼎立에 비유하고 있다. 그런데 이처럼 수천 년 동안 한자문화권에서 문명의 한 축으로 인식 되어온 '도교'가 20세기에 들어와 동아시아 지식인들에 의해 그 이 전과 매우 다른 방식으로 이해되었다. 노자와 장자(소위 老莊)를 중심으로 형성된 철학의 학파인 '도가'(Taoism in philosophy 혹은 philosophical Taoism)와 東漢말에 건립된 五斗米道로부터 비롯된 종교인 '도교'(Taoism in religion 혹은 religious Taoism)를 구분해야 한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은 것이다.
사실 이런 구분은 20세기 초 서양 근대철학의 직·간접적 영향 아래 동아시아의 학술적 전통을 이론·사변화하는데 주력했던 몇몇 동양 철학자들의 그다지 엄밀치 못한 관점을 그대로 물려받은 것인데, 이미 학문의 영역을 넘어 일반적 통념으로 굳어져 버리고 말았다. 그리하여 지난 수십 세기 동안 동아시아에서 '道家의 가르침(道家之 敎)' 정도를 의미했던 '道敎'는 오늘날 도가와 무관한 별개의 종교를 지시하는 개념으로 이해되고 있다.
필자가 '철학의 학파인 도가'와 '종교인 도교'의 이원화가 '엄밀하지 않다'고 평가하는 이유는 우선 이런 구분이 역사적 진실에 부합되지 않기 때문이다. 애당초 철학과 종교가 나뉘지 않았던, 달리 말하자 면 철학(philosophy)과 종교(religion)의 이원적 개념 자체를 가지고 있지 않던 문명의 역사를 철학과 종교로 나누어 기술하는 것은 적절 치 않다. 그런데 이보다 더 큰 문제는 한 문명 내부의 계승사적 맥락을 다른 문명의 관점에 기초해 인위적으로 단절시켰다는 점에 있다. 수십 세기에 걸쳐 동아시아 문명 안에서 실제로 전승된, 그리고 '전 승된 것'으로 이해되어온 老子이래 도가(혹은 도교) 계통사의 맥락 이 '철학'과 '종교'를 이원화하는 다른 문명, 즉 근대 서구문명의 시 각에 의해 철저히 분리되었던 것이다.
이처럼 '철학으로서의 도가'와 '종교로서의 도교'라는 관념이 근대 서구의 지배적인 사고방식에 따른 것은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이것 이 '도가'나 '도교' 자체가 본질적으로 부합되는 현실을 갖지 못한 관념, 또는 완전히 조작된 관념임을 증명하는 것은 아니다. 오늘날 통상적으로 '도교'라고 부르는 현상, 즉 五斗米道에서 太平道·天師 道·全眞道·正一道 등에 이르는 결사, 그리고 이런 조직적 결사와는 거의 인연이 없지만 결코 무시할 수 없는 魏伯陽이나 葛洪 같은 인 물의 학술적 영향 등은 동한 말인 AD2세기 이후 2천년 가까이 역사 적으로 실재했던 동아시아 문명의 분명하고도 뚜렷한 하나의 골간 이었다.
어쨌거나 필자는 이 글에서 여전히 '도교' 개념을 사용할 것이다. 그리고 이를 통해 학계와 일반에서 흔히 '도교'로 부르는 현상을 지시 할 것이다. 오늘날 이 개념이 이미 '道家之敎'라는 전통적인 의미를 넘어 어떤 특정한 대상, 즉 AD2세기 이후에 동아시아에 실재했던 하 나의 문화적 현상을 지칭하는 고유명사로 사용되고 있음을 현실적 으로 인정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도교'를 종교로 단정하여 그 이전의 소위 '철학적 도가'의 전통과 격리시키는 통속적 견해에 필 자가 동의함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필자는 '도교'야말로 '도 가'의 역사적이고 실질적인 계승이라고 보며, 이 양자를 종교와 철 학으로 단순화시켜 격리하는 것에 반대한다.
老子의 사상이 莊學과 黃老學으로 발전한 뒤, 西漢의 武帝 시기 이후에 黃老道가 그 이전의 전통을 잇고, 이것이 다시 道敎로 계승되 어 수천 년을 이어온 과정은 그 전승의 맥락과 시대적 조류의 흐름 이 분명하다. 그 와중에 玄學과 같이 一時를 풍미한 사조가 중첩되 기도 하지만, AD2세기 이후에 가장 큰 大河를 이룬 것은 역시 도교 이며, 이것이 儒·佛과 더불어 동아시아 문명이라는 큰솥의 실질적인 三足을 이루었다. 그러므로 '道家와 분리된 道敎'란 역사적 허구이며, 실재했던 문명현상을 관념적으로 재구성한 추상에 불과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과연 노장사상은 도교라는 역사적 실체가 없이도 수십 세기 동안 동 아시아에서 그처럼 지속적인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었을까? 도교의 道士 집단이야말로 장구한 세월에 걸쳐 老莊의 사상을 구체적으로 계승한 매우 강력하고 독자적인 주체였다. 도대체 隋唐 이후 근대에 들어서기 전까지, 도교와 무관한 순수한 '道家의 학도'들이란 실제 로 존재하기나 했던 것인가? 이런 역사적 사실에 눈감고, 老莊의 道 家나 玄學만을 따로 떼어 금지옥엽으로 떠받드는 도가철학 연구란 반쪽에 불과할 뿐이다. 동양철학 전공자들이 노장철학과 현학을 선 별적으로 다루는 관념의 성채에서 벗어나 도교를 아우르는 계통사적 시각을 확보해야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2. 도교수양의 유래
도교가 동한 順帝시기(AD125-144)에 張陵이 창건한 五斗米道로부 터 비롯된다고 알려진 것은, 무엇보다 이로부터 교단(혹은 종단)에 해당하는 본격적인 결사가 조직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찌 보면 이 역시 매우 모호한 기준일 뿐이다. 도교는 결코 어느 날 갑자기 등장한 것이 아니며, 그 시작단계부터 이미 매우 복잡한 문화현상이었다.
하나의 문화현상으로서 '도교'를 이루는 여러 원류의 본격적인 합류 는 사실상 오두미도의 출현보다 앞서, 최소한 서한후기에 분명하게 모습을 드러내는 黃老道라는 先河에서 비롯되었다. 이는 이미 선진 시기로부터 발전한 여러 갈래의 학술이 복합적으로 계승되어 새롭 게 발휘된 동시에, 漢이라는 특수한 시대적 상황에 부합하여 등장한 사조였다. 황로도는 크게 아래와 같은 네 원류로부터 조성되었다.
1) 가깝게는 서한 초기의 武帝(BC86-140) 이전에 전성기를 구가하 던 黃老學, 그리고 멀리는 老子로까지 소급되는 도가의 학설을 계승 하였다. 특히 선진도가의 수양론과 생명중시(重生, 貴生) 경향, 그리 고 황로학의 精氣학설로부터 지대한 이론·사상 및 실천적 자양분을 공급받았다. 이의 구체적인 맥락은 아래에서 다시 살피기로 한다.
2) 황로도는 전국시기부터 본격적으로 발전하는 方技의 이론과 실 천적 기술들을 흡수하였다. 방기는 곧 사람의 생명에 관한 고대의 이론·지식과 기술의 총칭으로,『漢書·藝文志』는 의학인 '醫經'과 약학인 '經方' 그리고 '房中'과 '神仙'을 함께「方技略」으로 분류한 다. 이처럼 중국 고대의 방기는 醫藥學과 神仙養生術이 나뉘지 않은 체계를 이루어 行氣(吐納)· 穀·服食·導引·房中과 같은 法術을 포괄 하였는데, 이러한 법술들은 병을 제거하며(除病), 노화를 억제하고 (却老), 수명을 연장하며(延年), 몸을 가볍게 하고(輕身), 더 나아가 仙人이 될 수 있는 효과를 지닌 것으로 여겨졌다.
3) 戰國이래의 數術 역시 황로도 이론체계의 중요한 구성 부분이었 다. 數術이란 우주 혹은 天地와 관련된 古代의 이론과 실용지식의 총칭으로, 天文·曆法·地理學 등과 占卜(占星)術이 어우러져 분리되 지 않은 체계를 이루었다. 특히 전국중엽의 鄒衍을 필두로 하는 陰 陽家에 의해 체계화된 陰陽五行說의 영향이 지대하였다. 이러한 수 술은 한편으로 자연법칙을 탐구하는 동아시아적 고대과학의 효시를 이루었고, 자연법칙으로부터 비롯하여 역사·사회의 운동법칙을 설 명하는 거대담론의 이념적 기초를 제공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는 다른 한편으로 天人感應의 災異說 및 신비주의적 占卜·呪術과 관련된 것이기도 했다
4) 전국중엽에 渤海와 山東반도의 해안 일대를 중심으로 크게 일어 나 서한 초까지 줄곧 유행한 神仙思想과 不死의 法術이 황로도의 주 요한 원류였다. 초기의 神仙說은 주로 渤海의 동쪽에 있다고 전해진 三神山(蓬萊·方丈·瀛洲), 그리고 여기에 거주하는 불사의 仙人 및 不死藥과 관련된 설화를 중심으로 발흥했는데, 이는 늦어도 齊나라 威王시기(BC356-319)에 이미 渤海와 山東의 해안 지역에 광범하게 유포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제나라의 威王과 宣王, 그리고 연나라의 昭王 등이 사람들을 바다로 보내 삼신산을 찾았으며, 이런 탐사대의 파견은 漢武帝 시기에 이르기까지 4백여 년 동안 지속된다. 한편 신 선사상의 발흥과 더불어 중국 동쪽의 해안 일대를 중심으로 '方 士'로 불리는 일군의 士人 세력이 크게 성장한다.
황로도는 위에서 간략히 살펴본 道家·方技·數術·神仙의 네 원류가 만나 하나로 어우러진 사조였으며, 한나라의 방사들이 그 발흥을 이 끌었다. 그런데 이 네 갈래의 원류는 다시 道家와 方術로 축약될 수 있다. 자연의 운동과 인간의 생명활동을 통일적 맥락에서 이해한 동 아시아 고대인의 관점에서 볼 때, 神仙術을 포함하는 '方技'와 '數 術'은 결코 별개가 아니었으며, 실제로 이를 통틀어 '方術'이라고 불렀기 때문이다.
도교는 바로 이런 황로도를 직접적으로 계승한다. 그러니 도교가 '도가의 정통 노선에서 벗어난 이단'이나 '도가의 탈을 뒤집어 쓴 방술'이라고 하는 세간의 견해도 일견 타당해 보인다. 그러나 이것은 여전히 단편적인 평가에 불과하다. 선진시기에 도가와 방술은 이미 상당히 깊은 내연의 관계를 맺고 있었으며, 老子로부터 莊學·黃老學 과 黃老道로 이어지고 이것이 다시 도교로 나아가는 과정은 도가적 전통이 본래부터 내재하고 있던 특성의 자기전개로 보아야 하기 때 문이다. 단지 각 시대마다 역사적 상황과 사상사적 조건에 차이가 있고, 이를 반영해 독특한 문제의식과 시대적 특징을 구비한 사조들 이 앞과 뒤를 이었을 뿐이다. 하지만 이를 논의하는 것은 도가(도교) 사 전반에 대한 포괄적인 검토를 필요로 하므로, 분량이 제한된 본 논문에서 본격적으로 다루기에 적절한 주제는 아니다.
이런 이유로 아래에서는 특히 '수양'의 문제를 중심으로 범위를 좁혀 논의를 진행하고자 한다.
3. 도가의 양생적 전통
3-1. 精神의 도가적 함의
'도가는 철학'·'도교는 종교'라는 도식적인 이분법 외에, 도가와 도 교의 차별성을 강조할 때 자주 제기되는 논거가 있다. 그것은 도가 (특히 老莊)가 지향하는 궁극적인 경지는 현실의 일체 속박으로부터 벗어나 소요하는 순수한 정신적 자유의 경지인 반면, 도교는 현세에 서 몸이 不老長生하는 신선이 되기를 목표로 삼는다는 것이다. 또한 도가 사상가들이 心齋·專一·坐忘 등의 수양을 통해 어디에도 구애되 지 않는 정신(혹은 마음)의 자유를 추구했다면, 도교의 도사들은 食 氣·服食· 穀·導引·氣功·房中 등의 기술적 방법에 의존해 長生不死 를 추구했다고 구분한다.
그리하여 정신적 안정을 추구하는 도가는 無爲적이지만, 육체의 단련에 치중하는 도교는 有爲적이라고 평가하기도 한다.
그러나 도가(특히 老莊)가 육체를 배제하고 순수한 정신상의 절대적 자유를 추구했다는 주장은 잘못된 것이다. 도교가 육체의 단련에만 치중했다는 것도 사실과 다르다. 서둘러 요점을 말하면, 도가와 도 교는 정신과 육체를 근본적으로 나누지 않았으며, 따라서 '정신'과 '육체'를 이원적으로 파악하는 맥락에서 도가와 도교를 구분한다는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오늘날 '정신'이라는 개념은 보통 '뇌의 활동에 의해 일어나는 관념 이나 사유작용의 결과(idea, thought)' 혹은 '사물을 느끼고 생각하 는 능력이나 작용'(mind), '마음의 자세나 태도(mentality)'를 의미한 다. 또는 '물질이나 육체로부터 독립된 비물질적이고 근원적인 실재 (영혼: sprit, soul)' 등을 가리키기도 한다. 어느 경우라도 '정신'의 함의는 대체로 그 작용의 대상이 되는 '사물', 또는 영혼을 가두고 속박하는 '육체'와의 이원성(혹은 대립성)에 대한 관념을 반영한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이런 정신 개념에 입각하여 노장에 등장하는 '精'과 '神' 그리고 '精神' 개념을 파악한다. 예컨대『莊子』「天 下」편에서 "담담하게 홀로 神明과 함께 한다"고 노자를 評하는 내 용, 혹은 장자가 "홀로 天地의 精神과 더불어 왕래한다"는 구절을 '육체'와 대립하는 '정신'상의 절대 자유를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하는 따위이다. 한편『莊子』「刻意」에서 '養形'을 그리 높이 평가하 지 않는다는 것이 자주 강조되기도 한다.
하지만 도가는 정신과 육체를 이원적으로 나누지 않았으며, 이 모두 가 하나의 道에서 나온다고 보았다. 굳이 정신과 육체를 나누더라 도, 양자는 不可解한 관계를 맺고있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한 예로 『莊子』「知北遊」는 이렇게 말한다. 대저 훤히 드러나는 것은 깊고 어두운 것에서 생겨난다. 분별할 수 있는 有形은 無形에서 생겨난다. 精神은 道에서 생겨나고, 유형의 물질(形)은 본래 精에서 생겨나며, 萬物은 다시 유형적 물질의 상호 작용으로 생겨난다.
『莊子』는 "無에서 有가 생긴다"는『노자』의 다소 모호한 언급을 구체화시키고, 한 걸음 더 나아가 만물의 생성이 "도(道)⇒정신(精 神)⇒유형의 물질(形)⇒만물(萬物)"의 순서에 따라 진행된다고 한 다. 여기서 道와 精神은 '형체가 없는 것(無形)'이며, 形과 萬物은 '형체가 있는 것(有形)'이다. 그런데 '無形'에서 '有形이 생기는 과정 은 결코 일방통행이 아니라 순환적이다. 이것은「지북유」의 다른 글에 잘 드러난다.
삶은 죽음과 동류이고, 죽음은 삶의 시작이다. 누가 그 법칙을 알겠 는가! 사람의 삶은 기(氣)가 모인 것이다. 기가 모이면 삶이 되고 흩 어지면
죽음이 된다. 이렇게 죽음과 삶이 같은 종류인데 내가 또 무 엇을 근심하겠는가? 그러므로 만물은 하나다. 아름다운 것을 신기 하게 여기고, 추한 것을 썩고 냄새난다고 여기지만, 썩고 냄새나는 것은 다시 변화하여 신기하게 되고,
신기한 것은 다시 썩고 냄새나는 것으로 변하게 된다.
그러므로 이런 말이 있다. "천하를 통틀어 '하나의 氣(一氣)'일 뿐이다." 그러므로 성인은 하나(一)를 귀하게 여 긴다. 이 글은 '無形'과 '有形'이 끊임없이 반복 순환하는 우주적 生滅(혹 은 生死) 운동을 묘사하고 있다. 일체의 유형적인 사물은 '(無形인) 氣가 모인것(氣之聚)'이며, 그 소멸은 반대로 '氣가 흩어져(氣之散)' 無形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에 불과하다. 그렇기 때문에 "천하를 통 틀어 하나의 氣일 뿐이다(通天下一氣)"라고 하는 것이다. 결국 無形 이 되었든 有形이 되었든 그것은 본질적으로 하나의 기(一氣)이다. 그 가운데 보다 정미롭고 신묘한, 즉 아직 형체로 전환되지 않은 순 수한 氣가 精神(혹은 精과 神)이며, 유형적인 육체는 이러한 精神으 로부터 생명(력)을 부여받는다. 그러므로 사람의 有形的인 몸은 그 본질이 무형의 氣(精神)일 뿐만 아니라, 결국은 다시 흩어져 無形인 순수한 一氣의 상태로 돌아간다.
이러한 '一氣'인 우주의 시원적 상태는 곧 정신과 물질이 나뉘지 않 고, 유형적인 어떠한 것도 담겨있지 않다는 면에서 虛無(太虛)이지 만, 일체 만물의 근원인 순수한 에너지라는 면에서 보면 가득 차 있 는 것이다. 이는 전국시기에 도가의 실질적 주류였던 황로학의 사상 에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黃帝四經』「道原」에 다음과 같은 묘사가 있다. '한결같은 무(恒無)'의 처음 상태는 모든 것이 통하여 같은 太虛이 다. 텅 비고 같아 하나(一)를 이루니, 오직 '한결같은 하나(恒一)'만 이 있을 뿐이다. 축축하고 아득하여, 아직 밝고 어두운 분별조차 없다. 神이 미묘하게 두루 가득 차 있으며, 精은 고요하여 빛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로부터 말미암아 존재하는 것이 없고, 만물은 아직 이로부터 생겨나지 않았으니, 형체 있는 것이 없고(無有形), 크게 통 하여 이름도 없다(大 無名). 위의 인용문에서 '한결같은 무(恒無)'·'한결같은 하나(恒一)'·'형체 있는 것이 없음(無有形)'·'크게 통하여 이름도 없음(大 無名)'은 모 두 道의 가장 순수한 시원적 상태를 가리킨다. 그런데 온 우주가 하 나로 통하여 유형적인 것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 '太虛'인 이 상태는 결코 아무 것도 없는 절대적 無가 아니다. 오히려 이는 '神'과 '精'이 미묘하고 고요하게 가득 차 있다는 점에서 절대 충만의 상태이다.
그런데 여기서 '精'과 '神'은 곧 氣에 다름이 아니다. 역시 황로학파 의 작품으로 알려진『管子』「內業」편은 '精'을 '氣의 정미로운 것 (氣之精者)'이라고 한다.「心術下」는 '神'이 '그 극한을 알 수 없고, 천하를 훤하게 알 수 있고, 사방의 극한까지 통하는 것"이라고 하는 데 이를 '意氣'라고도 칭한다. 즉 인간의 의식활동을 주관하는 氣가 '神'인 것이다. 한편「내업」은 다시 "응결된 기( 氣)는 '神'과 같아 서, 만물이 다 갖추어져 있다. … (이는) 精氣의 극치"라고 말한다. 이처럼 고대 도가에서 '精'과 '神'은 정미롭고 신묘한 氣 혹은 그 작 용과 관련된 의미를 지닌다.
3-2. 우주의 (精)氣와 通하고, 形神을 함께 保全하는 養生의 수양
그런데 이러한 氣는 흔히 이해하듯이 단순한 물질 혹은 질료가 아니 며, 정신과 물질(육체)을 아우르고 그 근원이 되는 순수하고 무형적 인 에너지이다. 관념이나 사유작용의 결과, 사물을 느끼고 생각하는 능력이나 작용, 마음의 자세나 태도, 또는 비물질적이고 근원적인 실재로서 오늘날 우리가 '정신'이라고 일컫는 것은 이러한 氣로부터 독립된 것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육체 역시 氣가 모여 이루 어져있다. 그러므로「心術下」에서 '氣는 몸을 채우는 것(氣者, 身 之充也)'이라고 한다.『장자』에서 '사람의 삶이란 곧 氣가 모인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나,『老子』가 "만물은 陰氣를 등에 지고 陽 氣를 품에 안으며, 陰陽이 조화된 氣로 中和를 이룬다"고 하는 것 역 시 이런 생명관의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도가는 생명의 근원인 순수한 '氣'를 지극한 상태로 유지하 는 수양을 중시한다. 우리는 여기서 벤자민 슈월츠가 "유기적 생명 에 관해서" 쓰여졌다고 지적한 "어린아이의 우월성이라는 매우 강력 한 은유"에 포함될『노자』의 몇 구절을 언급할 필요가 있다.『노 자』에서 갓난아기( 兒·赤子)는 곧 생명력으로 충만한 몸에 대한 구체적인 상징이기 때문이다.『노자』55장은 "德을 품음의 두터움 은 갓난아기에 비유된다"고 하면서, "筋骨이 유약하나 손아귀 힘은 단단하고, 암·수가 합하는 것을 모르면서도 생식기가 빳빳하게 서니 精의 극치다. 하루 종일 울어도 목이 쉬지 않으니 和의 극치다"라고 말한다. 여기서 '精'은 곧 精氣고, '和'는 和氣이다. 즉 갓난아기가 지닌 생명력의 본질이 지극한 精氣와 和氣의 작용에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한편 10章은 "순수한 氣를 凝聚하여 부드러움에 이르는 것 을 갓난아기와 같이 할 수 있겠는가?"고 한다. 이처럼 노자는 '精 (氣)'·'和(氣)'를 순수하고 지극한 상태로 유지하는 것을 '덕을 품음 (含德)'의 구체적인 내용에 포함시켰으며, "순수한 氣의 凝聚(搏 氣)"를 수양의 방법으로 제시했다.
이밖에『장자』나 황로학 계열의 저작들에서 우주의 순수한 氣(精, 神)와 통하고 이를 보전하는 수양에 관해 언급하는 내용을 찾아내는 일은 결코 어려운 것이 아니다. 오히려 제한된 지면에서 이를 일일 이 열거하는 것이 힘들 정도인데, 그 대표적인 사례 몇 가지만 들면 다음과 같다. 『莊子』「人間世」: 너의 뜻을 전일하게 하라. 귀로 듣지 말고 마 음(心)으로 들으며, 마음으로도 듣지 말고 氣로 들어라. 귀는 소리를 듣는데 그치고, 마음은 (생각하는 바에) 부합하는데 그친다. 氣는 텅비어 사물에 應待하는 것이다.
道는 오직 텅 빈 상태에 모이니, 텅 빔이 곧 '마음을 齋戒하는 것(心齋)'다. 『莊子』「德充符」: 道가 그대의 외모(貌)를 부여하고, 하늘이 그 대에게 형체(形)를 주었으니, 好惡의 감정으로 그 몸에 內傷을 입히 지 말라. 지금 그대는 그대의 정신(神)을 도외시하고, 그대의 정기 (精)를 피로하게 하며, 나무에 기대어 읊조리고 마른 오동나무에 기 대어 눈을 감고 있다.… 『莊子』「知北遊」: 네가 너의 형체(形)를 바르게 하고, 너의 감각 을 하나로 추스르면, '하늘의 조화로운 기(天和)'가 장차 깃들 것이 다. 밖으로 향하는 너의 지식을 안으로 끌어들이고, 사물을 이러 저 리 재는 너의 척도를 하나로 통일하면, '神'이 장차 도래할 것이다.
『管子』「內業」: 精을 보존하면 저절로 생명(력)을 얻는다. 이것 이 밖으로 드러나면 광택이 흐르고, 이를 안으로 內藏하면 '샘의 근 원(泉原)'이 되어, 드넓고 화평하게 '氣의 연못(氣淵)'을 이룬다. 연 못이 마르지 않으면 사지가 견고해지고, 샘이 마르지 않으면 몸의 아홉 구멍(九竅)이 우주와 통하니, 이에 (몸에 충만한 기운이) 능히 천지를 엿보고 사해에 번진다. 『呂氏春秋』「先己」: 精氣를 날로 새롭게 하고 邪氣를 모두 제거 하면 天壽를 누리니, 이를 일러 眞人이라고 부른다. 이처럼 도가의 양생수양은 '形'과 '神'을 아울러 보전하는 것을 중시한다.
이는 有形의 物質과 無形의 精神이 모두 하나의 道(혹은 一氣) 에서 나와 서로 不可解한 관계를 지닌다고 보는 입장에서 매우 당연 한 요구이다. 司馬談은 일찍이 도가의 요지를 설명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무릇 사람을 살게 하는 것은 '神'이며, 사람이 의탁하는 것은 '形'이 다. 神을 지나치게 사용하면 고갈되고, 形을 지나치게 부리면 피폐 해지며, 形과 神이 분리되면 곧 죽는 것이다. 죽은 사람은 다시 살아 날 수 없고, 形神이 분리된 사람은 다시 이를 결합하여 본 상태로 돌아가지 못하기 때문에, 성인은 이(形과 神)를 모두 중시한다.
이런 점으로 볼 때, '神'은 생명의 근본이요 '形'은 생명의 그릇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먼저 그 神과 形을 안정시키지 않고 '내게 천하를 다스릴 수 있는 방법이 있다'고 말하고 있으니, 도대체 무엇을 가지고 그렇게 할 수 있다는 말인가? 사마담은 도가가 무엇보다 생명의 가치를 귀하게 여기며, 특히 생명 을 神과 形의 상호의존으로 파악하여 양자를 동시에 보전하는 수양 을 중시했다고 밝히고 있다.
우리는 위에서 老子이래 선진시기의 도가가 形神을 아우르는 양생 의 수양을 중시한 맥락을 간략히 살펴보았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양생이 선진도가 사상의 유일한 핵심이었다고 할 수 있는 것은 아니 다. 양생의 이론과 실천은 도가적 전통을 형성한 특성의 일부였으 며, 老子로부터 비롯된 도가사상의 다른 구성요소들, 요컨대 天道無 爲의 우주론, 無爲而治의 정치학, 滌除玄鑒의 직관적 인식론, 素朴· 謙虛·寡慾의 윤리학, 脫俗·無我의 미학 등과 불가분의 상호의존적 그물망을 이루었다.
그래도 이것은 양생을 종지로 하는 도교의 성립 과 발전, 그리고 후에『道德經』(『老子』)·『南華眞經』(『莊 子』)등으로 불리게 되는 전적들에 대한 양생적 해석을 가능하게 만 든 도가의 내재적 특성이었으며, 이 때문에 우리는 도교를 도가적 전통의 계승과 전개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4. 도교수양의 宗旨
4-1. 愛氣·尊神·重精과 內丹의 修煉
도교수양의 목표는 一元인 形神의 생명(력)을 최적의 상태로 고양시 키는 것이고, 이 목표에 도달하기 위한 수양의 요체는 愛氣·尊神·重 精을 떠나지 않는다. 그런데 이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우선 老·莊·黃 老學 및 陰陽家의 道論과 氣論을 계승하는 도교의 元氣학설부터 살펴보아야 한다.
도교는 우주 만물의 근원과 근본을 모두 元氣에서 찾는다. 여기서 '근원'이라 함은 생성론적 始元을 의미하며, '근본'은 존재론적 본체 라는 함축을 지니는 것이다. 漢代 黃老道의 저작으로 도교 이론의 형성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太平經』은 "만물은 원기에서 생겨 난다", "원기는 온 우주를 감싸 안고 있어, 그 氣를 품수받지 않고 생 겨나는 것은 없다"고 주장한다. 원기가 우주 만물의 생성론적 시원 임을 분명히 밝히는 것이다. 한편『태평경』은 "天·地·人은 동일한 원기을 근본으로 하며, 나뉘어 세 몸이 된다"거나 "氣는 천지만물의 운명을 하나로 관통하게 하는 바"라고 말하는데, 이는 원기가 우주 만물 존재의 공통적 본체이기도 하다는 것을 분명히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원기와 이의 所産인 物의 차이는 무엇보다 그 형체의 없고 있음으로 드러난다. 우선 氣는 그 형체나 흔적이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해 '無形'은 氣의 본질적 속성 가운데 하나이다. 하지만 이런 무형적 氣는 일체의 유형적 사물을 만들어낼 수 있다.
비록『태평경』처럼 직접적이지는 않지만, 동한 말 오두미도를 이 끈 張氏 일가의 저작으로 알려진 초기도교 경전인『老子想爾註』 (이하『상이주』로 약칭) 역시 대동소이한 氣論적 우주관을 표명한 다.『상이주』에는 특히 '道氣' 개념이 자주 등장한다. 이 '도기'는 "늘 아래위로 오르내리며 천지의 안팎을 경영"하는 것으로, "천지 사 이에 있으면서도 맑고 미세하여 보이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상이 주』가 이처럼 '도기' 개념을 즐겨 사용하는 배후에는 '道'의 본질이 곧 '氣'라는 인식이 깔려 있다. 한편『상이주』는 만물의 근원과 근 본을 설명하는데 '道精' 개념을 사용하기도 한다.
만물은 道精을 머금고 있다.
아무 것도 없는 큰 空虛의 가운데 道精이 있다. 이것이 나뉘어 만물 에 베풀어지니, 만물의 精은 모두 한 뿌리인 것이다. 『상이주』가 精을 "道에서 분화된 氣"라고 한 것에 비추어 볼 때, 위에서 말하는 '道精'은 道氣에 다름 아닌 것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 이다.『태평경』과『상이주』는 이처럼 원기나 도기 등의 개념을 통해 만물의 근원과 근본을 해석하는 한편, 氣가 보다 구체적으로 분화하고 작용하는 과정은 陰陽五行을 통해 설명한다.
황로도와 도교는 바로 이런 기론적 우주론에 기초해, 우주와 생명의 유기적 결합을 중시하는 天人合一 이론과 이의 실현을 위한 수양(양 생)론을 제시한다. 그러므로 이 때 무엇보다 강조되는 것은 역시 '기'의 작용이다. 천지만물의 생성 및 존립과 마찬가지로 생명 또한 '기'로 이루어진 것이어서 "氣를 잃으면 죽고, 氣가 있으면 산다"고 보기 때문이다.
『태평경』은 원기·정기·음·양·중화·오행 같은 氣의 작용이 천지만물의 운동 변화와 사람의 생명 활동을 동시에 관통하 는 보편적 원리라고 이해하는데, 특히 생명 활동에 대한 精·氣·神 학 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세 氣가 하나로 함께 하면 신묘한 근본(神根;元氣)이 된다. 세 氣 가 운데 하나는 '精'이고, 다른 하나는 '神'이며, 또 다른 하나는 '氣'다.
이 셋은 함께 모여 하나의 생명을 이루는데, 이는 天·地·人의 氣에 뿌리를 두고 있다. '神'은 그 기를 하늘로부터 받고, '精'은 그 기를 땅으로부터 받으며, '氣'는 그 기를 중화의 기운으로부터 받으니, 이 들은 서로 더불어 함께 하나의 道를 이룬다. 그러므로 '神'은 '氣'를 타고 운행하며, '精'은 그 중간에 머문다. 이 셋은 서로 도와 목숨을 다스리니, 天壽를 바라는 사람은 반드시 氣를 아끼며(愛氣), 神을 존 귀하게 여기고(尊神), 精을 귀중히 여겨야(重精) 한다. 그런데 제3장에서 살펴본 것처럼, 精·神·氣·陰陽 등의 개념을 중심 으로 생명활동을 이해한 것은 그 유래가 이미 오래된 것이다. 따라 서 위의 인용문에 나타나는 精·神·氣의 관념 자체가『태평경』의 독창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은 분명한데, 그래도 여기에는 동시대 혹은 그 이전의 다른 문헌에서 쉽게 발견할 수 없는 다음과 같은 특징이 나타난다.
첫째, 비록 정·신·기 개념이 오래 전부터 사용되었지만, 이 개념들의 함축과 서로의 관계에 대한 기술은 매우 모호하고 혼란스러웠다. 그 것은 이 개념들이 오랜 시기에 걸쳐 여러 학파와 사상가에 의해 발 전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태평경』은 이를 陰·陽·中和 세 氣의 측면에서 다시 명확하게 정의했고, 이 이론은 도교의 생명관과 양생 설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둘째,『태평경』은 정·신·기의 조화와 통일로 이루어진 사람의 생명 이 천·지·인의 조화로 이루어지는 대우주에 대한 소우주적 대응관계 를 가지는 것으로 이해했다. 이 때 음·양·중화 세 氣의 작용은 천지 만물의 운동 변화와 사람의 생명 활동을 동시에 관통하는 보편적 원 리로 간주되었다. 천지만물과 사람의 생명은 모두 "신묘한 근본(神 根)"으로 불리는 하나의 뿌리, 즉 元氣에서 비롯된다는 점에서 본질 적으로 차이가 없는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이처럼 대우주인 천 지와 소우주인 생명이 서로 대응하는 유기적 통일성을 지닌다는 생 각은 신체 각 부분에 대한 해석에서도 잘 나타난다. 예를 들어 둥근 머리는 하늘, 평평하게 모난 발은 땅, 사지는 네 계절, 五臟은 五行 에 대응한다고 보는 따위가 그것이다.
사실 도교적 수행은 매우 다양하며 상세하고 구체적인 수련 방법들 을 갖추고 있다. 요컨대 그것은 內視·存思와 같은 정신 혹은 마음의 觀照法을 비롯해, 行氣·食氣 등으로 불리는 호흡법, 음식과 약물의 조절법인 服食(服餌)· 穀, 導引·氣功의 신체 운동, 그리고 房中術 등을 포괄한다. 이런 수련들은 각각 별개로 운용되기보다 상호의존 적이고 유기적으로 통합되는데, 이를 하나로 묶는 원리가 곧 '氣를 아끼며(愛氣), 神을 존귀하게 여기고(尊神), 精을 두텁게(重精)'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도교 수련이 일견 복잡하고 다양해 보이지만, 사 실 이 모두는 大宇宙의 陽·陰·中和의 氣에 대응하는 우리 몸의 神·精 ·氣의 조화를 유지하고, 순수한 무형의 우주적 氣(元氣)와 合一(혹 은 返本)한다는 원리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후에 도교 內丹學 에서는 이러한 神·精·氣가 각각 上·下·中丹田의 개념으로 발전되지 만, 이 경우에도 그 실질적인 수양의 요체는 크게 바뀌지 않는다.
4-2. 神仙이 되는 길
신선은 도교수양의 궁극적 경지를 상징한다. 그런데 不死의 존재인 신선이 되기를 희구한다는 점에서, 도교는 종종 자연법칙에 역행하 여 지나치게 목숨에 집착한다고 비판받아 왔다. 그러나 이는 도교 이론의 내적 맥락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 피상적 평가에 불과하다. '생명'에 대한 도교의 강렬한 관심이 단지 오래 살고싶다는 욕망에 서 비롯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특히 도교가 자연법칙에 역행한다 는 비판은 크게 잘못된 것이다. 유교나 불교에 비교할 때 도교는 훨 씬 더 철저하게 자연법칙을 탐색하고 이를 토대로 인생의 문제를 바 라보는 태도를 지닌다. 오히려 오해는 도교적 시각에서 보는 자연법 칙이 일반의 상식을 뛰어넘는 것이었다는데 기인한다. 중국 고대의 자연과학적 업적 가운데 상당 부분이 도교 계통에서 성취되었다는 사실이 이를 입증하는데, 이에 관련해서는 저명한 니담(Joseph Needham)을 비롯한 적잖은 학자들의 연구 성과가 이미 많이 누적 되어 있다.
앞서 말한 것처럼 불사의 존재인 신선에 대한 중국 고대인의 관심은 멀리 전국 중엽의 燕·齊 해안 지역을 중심으로 발원한 三神山의 전 설에 기인한다. 그러나 '오래 사는 것(長生)'과 '수명 연장(延命)'에 대한 추구의 역사는 이보다 더 오랜 것이다. 그런데 생명에 대한 이 런 관심은 이미 오래 전에 단순한 수명 집착의 차원을 벗어나 나름 대로 철학적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노자』는 일찍이 만물에 모두 성쇠의 부침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사물이 장성하여 노쇠 하는 것이 '도에 어긋난다(不道)'고 지적하고, 도에 어긋나면 요절한 다고 말하고 있다. 이 주장들은 일견 모순돼 보이지만 사실은 그렇 지 않다. 노자는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사물의 부침을 인정하면서도, 그 저변에 존재하는 근원적인' 道를 중시했기 때문이다.
노자는 '도'의 특성이 '한결 같음(恒)'에 있다고 보며, 도의 또 다른 상징인 谷神의 비유를 통해 그 불멸성을 설파하기도 한다. 또한 이 렇게 영원한 '도', 그리고 이를 본받아 長久한 하늘·땅과 함께 사람 ('王' 혹은 '人')을 세상의 '네 가지 큰 것(四大)'이라고 한다. 동시에 이들 모두가 '스스로 그러함(自然)'을 공통적이고 궁극적인 常規로 삼는다고 피력한다. 인간이 영원하고 무한한 우주 그 자체인 '도'와 본질적 속성을 공유하고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그리고 이런 면에서 長生은 단순한 수명 연장의 의미를 넘어 자연스러운 '도'와 합일되 는 天人合一적 경지의 한 표현으로 인정되었다. 노자 이후 도가가 줄 곳 '생명을 기르는 것(養生)'을 중시한 것은 이처럼 그것이 도가 적 '천인합일'의 중요한 한 측면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도가 계통의 이런 사상은 전국시기에 이미 일찌감치 신선사 상과 서로 결합되는 양상을 보였고, 이 두 사상적 경향의 결합은 한 대에 이르러 더욱 가속화되어 결국 황로도와 도교의 성립을 가져오 기에 이른 것이다. 서한 중엽 이후 황로도의 성립을 주도한 方士들 은 한편으로 燕·齊 해안 지역에서 발원한 神仙方術을 계승하는 한 편, 도가의 우주론과 생명론·양생론 등을 이와 접목시켰다. 따라서 황로도에서 제기하는 '신선'은 불사의 존재라는 본래의 신화적 이미 지를 간직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황로도의 양생 경지를 대표하는 상 징적 존재이자 천인합일을 실현한 이상적 인격의 대표로 간주되었 다. 그런데 이런 신선의 경지란 우주와 생명을 관통하는 근본이자 근원으로 여겨진 元氣와의 합일에 다름아닌 것이었다.
『태평경』은 사람의 경지를 아홉이나 열 등급으로 나누어 분류한 다. 우선 열 등급의 분류법은 낮은 단계로부터「어리석고 천한 사람 (愚賤之人)⇒착한 사람(善人)⇒현인(賢)⇒성인(聖)⇒참된 도를 깊이 앎(深知眞道)⇒신선이 되어 不死함(得仙不死)⇒진인(成眞)⇒신인 (成神)⇒하늘과 그 덕을 나란히 함(與天比其德)⇒원기와 그 덕을 나 란히 함(與元氣比德)」의 순서로 전개된다.
수행의 최고 목표가 곧 元氣와 合德하는 것에 있음을 분명히 알 수 있다. 한편 인생 경지에 대한 아홉 등급의 분류 가운데 최고 경지는 '元氣無爲'로 지칭되는 데, 그 구체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그 위에 가장 높은 경지는 '元氣無爲'로, 그 몸을 생각하는데 일말의 작위함이 없다. 단지 그 몸이 텅 비었다고 생각하여, 氣에 몸을 내맡 겨 형체가 없는 것처럼 여긴다. 항상 이를 법으로 삼아 (元氣無爲의 경지를) 이루면 하지 못함이 없고 알지 못함이 없다.
그러므로 사람 에게 道가 없을 때는 그저 평범한 사람에 불과하지만, 道를 얻으면 신선으로 변할 수 있다. 그 神이 하늘로 올라 하늘을 따라 변화하니, 곧 하지 못함이 없게 되는 것이다 『태평경』의 작자가『노자』의 無爲 사상을 원용하고 있음을 분명 히 알 수 있다. 그런데 위의 인용문에서 특히 주목해야할 것은 다음 두 가지이다. 첫째는 無爲가 "그 몸이 텅 비었다고 생각하여, 氣에 몸을 내맡겨 형체가 없는 것처럼 여기(思其身洞白, 若委氣而無 形)"는 경지(혹은 수양)로 풀이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처럼 도교 수련은 무의지적 상태에서 氣에 몸을 내맡기는 것을 요체로 삼는다. 이것은 導引·氣功이나 行氣 등의 경우에도 예외가 아니어서, 이런 수행 과정에서는 몸의 동작이나 호흡 등이 氣의 자연스러운 흐름을 따라 이루어져야 한다. 그리고 이를 위해 무엇보다 의지나 생각의 작용이 멈춘, 즉 無念無想의 상태가 전제되어야 한다. 이것은 도교 의 수련이 육체에 매달리는 기술적이고 유위적인 것이라는 세간의 평가가 잘못되었음을 의미한다. 둘째로 위의 인용문은 평범한 사람 과 신선이 본래부터 서로 다른 존재가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한다. 凡人이라도 道를 얻어 수양을 하면 체내의 응결된 神氣가 天道와 합 일되는 仙化를 경험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신선이 된다는 것'은 단순히 육체 그대로 죽지 않는 불멸의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형체에 대한 집착 을 버리고(思其身洞白), 몸의 궁극적 본질인 무형적 氣를 기르는 것 을 통해 도달할 수 있는 경지이다. 동시에 우주의 근원인 元氣와 합 일되는 경지이기도 하다. 따라서『태평경』이 강조하는 수행의 요 체는 우리 몸의 "氣를 아끼며(愛氣), 神을 존귀하게 여기고(尊神), 精 을 두텁게(重精)"하는 한편, 元氣에서 나뉜 精·神·氣 세 氣를 잘 조화 시켜 통일된 상태로 유지하는 '守一'의 범위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 다. 한편『상이주』는 "精을 쌓아 神을 완성하면 신선이 되어 장수 할 수 있다"고 하는데, 이 역시『태평경』에서 강조하는 수행의 요 지와 크게 다르지 않다.
사실 '神仙'은 유가의 '聖人'이나 불가의 '부처(佛)'와 마찬가지로 도 교, 더 나아가 동아시아 문화 속에서 어떤 신화적이고 상징적인 이 미지를 간직한 기호로 전승되어온 것이다. 이것은 예컨대 堯舜이 그 역사적 실재와는 크게 무관하게 수천 년 동안 유가적 이상인격의 상 징으로 존숭되고, 또한 불교에서 부처가 역사적 석가모니의 의미를 넘어 최상의 깨달음 자체인 法身을 의미한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런데 신선의 이미지를 구성하는 요인 가운데 줄곧 큰 시비 거리가 되었던 것이 '不死'이다. 영원히 죽지 않는다는, 그것도 육신이 죽지 않는다는 설정이 문제가 된 것이다. 실제로 이런 설정은 웃지 못할 해프닝이나 비극의 원천이 되기도 했는데, 예컨대 전국중엽에서 한 나라 무제 시기까지 不死를 갈구한 중국의 여러 군주들은 신선이 거 주한다는 海中 三神山의 不死藥을 찾아 대규모의 탐사대를 파견했 으며, 또한 적잖은 술사들이 不死의 효험이 있다는 僞金(外丹)을 제 조·복용했다가 중금속(수은) 중독으로 불귀의 객이 되기도 했다. 이 런 일들은 분명 맹목적인 불사추구의 결과였다.
그런데 이미 위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신선'은 불사의 존재라는 이 미지와 도교적 이상인격(또는 경지)의 대표라는 의미를 동시에 가지 고 있다. 이 가운데 전자가 보다 신화적이라면, 후자는 상대적으로 상징적 함축성이 강한 것이다. 실제로 신선의 역사적인 내함은 전자 에서 후자로 발전하는 추세를 보인다. 戰國시기로부터 漢代 중엽에 이르기까지 신선과 관련된 기록들은 주로 신화 혹은 설화적 이미지 를 반영하고 있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莊子』·『列子』·『淮 南子』와 같은 道家 계통 저작 및『史記』「封禪書」, 그리고『山 海經』·『楚辭』등에 수록되어 있다. 한편 黃老道가 등장하고 道敎 가 이를 계승하면서, 이상인격을 상징하는 신선의 함축성이 보다 강 화된다.『太平經』에서 그 초기적 사례를 찾을 수 있으며, 후대로 갈수록 그 경향은 더욱 분명해진다. 그리하여 신선의 계보가 복잡하 고 다양해지는 동시에 체계적이 되며, 불사보다는 수련을 통한 成仙 得道의 측면이 강조된다.
그러다가 급기야 육체의 불사를 부인하는 道派들이 나타난다. 중국 후기도교의 兩大派 가운데 하나로 금나라 초에 성립되어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全眞道가 육체의 불사를 부인 하는 대신 내단수련을 통해 형성되는 '眞性'의 解脫과 '陽神'의 昇天 을 추구한 경우가 대표적이다.
5. 도교수양의 현대적 의미
이제 이상의 고찰을 토대로 도교수양의 현대적 의미를 생각할 차례 가 되었다. 최근 건강에 대한 관심의 증대와 사회적 환경의 변화 등 으로 도교수련에 대한 열기가 높아지면서, 이의 유래와 효과·방법 등에 대한 자의적인 해석이 범람하고 있다. 더 나아가 氣수련을 노 골적으로 상업화하거나 신흥종교화하는 조짐이 나타나고, 혹은 이 를 지나치게 국수주의적으로 해석하여 문제가 되기도 한다. 또한 도 교수련을 지도(전파)하거나 기공치료에 나서는 사람들의 자질이 의 심스러운 경우도 허다하며, 저마다 자신의 수련방법을 절대화하여 그 장단점을 객관적으로 검증하기 힘든 것도 사실이다. 특이공능이나 초능력 혹은 氣치료와 같은 현상적 측면에 치중하거나, 도교수련을 몸의 단련 위주로만 이해하는 경향이 있음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이런 문제의 대부분은 도교수련 자체에서 기인한다기보다, 오히려 도교수련에 대한 곡해 혹은 무지에서 발생한다. 도교수련이 대중화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일종의 사회병리학적 현상으로 볼 수 있는 것도 있다. 특히 우리나라에서 이런 문제점들이 두드러지는 것은 지난 80년대 이후 도교적 수련이 급속도로 발흥하여 대중화된 반면, 이에 대한 체계적이고 엄밀한 학문적 연구가 미진했던 탓이 크다고 하겠다. 하지만 이러한 문제나 한계로 인해 도교수련의 의미 자체를 부인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도교수양의 현대 적 의미를 다음 몇 가지로 간략히 정리하고자 한다.
1) 생명존중의 기풍 인간을 物化시키고 생명을 경시하는 현대사회의 인간소외, 생명소 외는 그 심각성이 이미 충분히 지적되어왔다. 현대인은 자신과 타자 를 하나의 물건처럼 수단이나 도구로 취급하는 집단정신병리학적 증세에 노출되어 있으며, 이로 인해 스스로 괴로움을 겪는 것은 물 론 일상적으로 타자의 생명을 파괴하고 억압한다. 그리하여 현대인 은 점차 잔인하고, 폭력에 무감각하며 이기적인 '문명에 병든 야만 인'이 되어가고 있다.
그러나 도가와 도교는 '생명을 귀하게 여기는(貴生)'것을 宗旨로 삼 는다. 어떤 대의명분이나 윤리적 가치도 생명가치에 선행할 수 없다 고 보는 것이다. 이런 생명존중의 태도는 도교(도가)수양의 결과로 얻어진다. 우주만물 생명의 근원인 순수한 무형의 에너지(氣)에 자 신을 내맡기는 것을 통해, 우주의 가장 근본적이며 위대한 작용이 생명운동에 있다는 점을 자각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도교의 수련은 정신과 육체를 모두 멍들고 피폐하게 만드는 현대적 질병을 내부로 부터 치유할 수 있다. 이것은 개인적·사회적인 활력을 강화시킬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현대 사회에 만연한 정신(심리)상의 질환이나 범 죄·테러·전쟁의 위협 등을 해소하는데 직·간접적인 도움을 줄 수 있다.
2) 육체와 정신의 조화와 건강의 유지 도교수양의 가장 큰 특징은 形과 神의 통일적 근원인 無形의 氣를 최적의 상태로 유지하는 것에 있다. 이러한 수양은 우선 心身의 건 강을 유지한다는 측면에서 생명력 넘치는 일상의 기틀을 마련한다. 앞에서 인용했던 司馬談의 말처럼 '생명의 근본인 정신(神)과 생명 의 그릇인 육체(形)를 아울러 안정시키는 것'이야말로 만사형통의 근본이기 때문이다.
한편 形神竝存, 性命雙修의 수양은 神과 形, 이성(reason)과 몸 (body)을 이원적으로 나누어온 동서양의 주류적 철학·사상 전통을 극복하는 실천적 원리를 제공할 수 있다. 이는 수천 년 동안 논리·인 식·가치·윤리 등을 철학의 중심 문제로 삼아 철저하게 몸을 배제시 켰던 소위 '인식지배의 패권'에 대해 하나의 반성적 관점을 제공한 다. 뿐만 아니라 해체주의나 몸의 철학이 감성 및 육체적 욕구의 해 방이라는 또 다른 극단에 경도되는 부정적 경향을 견제할 수 있다. 이 두 태도가 결국 육체와 정신의 二元的 대립을 전제로 하는 반면, 도교는 이런 대립을 초월하는 形神의 근원적 통일에 대한 관점을 가 지고 있고, 실제로 그 조화를 유지하는 실천적 수양의 방안들을 발전시켜 왔기 때문이다.
3) 욕망의 조절을 가능케 하는 길 흔히 道敎는 利己·有爲的으로 長生에 집착한다고 지적 받아왔다. 그 러나 이는 도교의 내적 맥락을 무시한 표면적 비난에 불과하다. 도 가와 도교가 長生을 추구한 것은 생명가치를 중시하고, 장기적인 운 동을 지속하는 자연질서와의 合一을 도모한데서 비롯된 것이다. 비 록 長生을 추구하지만, 이것이 곧 세속적 쾌락을 즐기려는 욕망의 發露는 아닌 것이다.
오히려 도교는 無慾 혹은 少私寡慾을 강조한다. 도교의 煉形養神은 생명의 眞元之氣를 기르는 것으로, 이를 위해서는 우선 감각기관이 나 의지의 욕구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外物을 추구하는 욕망, 그리 고 주객을 분리하는 대상적 인식활동을 멈추고 역동적인 우주의 본 질인 순수한 氣에 자신을 내맡겨야만 眞元之氣가 길러지기 때문이다.
인식활동·감정·욕망을 제거하고 心身을 비우는 이런 수양이 自我 (ego)의 측면에서는 지나치게 억압적이고 정태적인 것으로 비춰질 수 있다. 하지만 이는 자신을 잊고 천지의 왕성하게 운동하는 기(天 地之强陽氣)와 하나가 된다는 점에서 오히려 대단히 자유롭고 역동 적이다. 이처럼 도교수양은 순수한 氣의 활력을 몸으로 느끼면서 자 연스럽게 外物에 대한 욕망을 조절하는 길을 제공한다. 이것은 금기 와 억압을 통해 욕망을 통제하는 그 어떤 윤리적이거나 종교적인 시 도보다 실현가능성이 높고 효율적이다.
4) 인간과 자연의 갈등 해소 도교수양은 기본적으로 소통의 수양이다. 形神의 氣와 대자연의 氣 가 원활하게 소통되어 막힘이 없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도교수련은 컵안에 담겨 고여있던 물이 강으로 복귀해 강과 하나가 되어 다시 흐르는 것에 비유할 수 있다.
이 때 강에서 '물'이 강물과 컵에 담긴 물 사이의 동질성을 담보한다면, 도교수련의 차원에서는 '氣'가 무한한 우주와 수행자 사이의 동질성을 담보한다. 다시 말해 기는 우주와 만물에 통일성을 부여하는 근거이자 만물들을 하나로 이어주는 매개로 작용하는 것이다. 바로 이런 氣가 없는 곳 없이 遍 在해 있어 소통의 수양이 가능해진다.
이와 같은 수양은 사람과 자연계와의 일체감을 크게 고양시키며, 외 부세계를 더 이상 자기와 분리된 기계적 대상으로 취급하지 않게 한 다. 그리하여 자연을 대상화하는 것으로부터 비롯된 인간과 자연의 대립·갈등이 인간의 내면으로부터 치유되는 것을 경험할 수 있다. 또한 현대사회의 가장 심각한 위기 가운데 하나로 지적되는 환경문 제 해결을 위한 인간학적 토대를 제공할 수도 있을 것이다.
5) 종교의 한계로부터 자유로운 수양문화 혹자는 도교적 수련문화가 "권위 있는 전통종교에 비할 때 상대적으 로 체계적 완결성이 부족하고 권위의 소재가 분명치 않다"고 약점을 지적하지만, 보기에 따라서 이것은 전통종교의 한계에 구속되지 않 는 장점이 될 수 있다. 특히 권위의 소재가 분명치 않다는 것은 예수 나 석가모니와 같은 敎祖의 부재를 의미하는 것인데, 이는 오히려 도교수양의 긍정적인 측면이 된다. 교조의 권위가 전통종교에 강력 한 구심력을 부여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동시에 폐쇄성과 정체성의 원천이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도교수련은 氣의 단련을 위주로 하는 자력수행으로, 특별한 교조가 없고 또한 이를 필요로 하지도 않는다. 그러다 보니 오늘날 도교적인 기수련의 수행자 가운데 교파의 장벽을 넘어 불교·천주교· 기독교 등의 성직자나 신도들이 많은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이것은 도교수련이 전통종교에 구애받지 않는 보다 진보적인 수양문화와 수양공동체를 가꾸는데 유리하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이다.
6) 도교수양과 세계관의 전환 도교수양은 도교(도가)적 세계관을 뒷받침하는 강력하고도 실질적인 힘이다. 전통적으로 도교(도가) 수행자들은 無形의 순수한 氣에 자신을 내맡기는 수양을 통해 우주가 자발적이며 연속적으로 끊임 없이 운동하는 和諧의 整體라는 사실을 직관적으로 체득했다.
그런데 오늘날 도교(도가)의 이런 세계관은 소위 '신과학'에서 해체 주의, 새로운 사회이론을 모색하는 사회학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각 광받고 있다. 그리하여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이를 주객이원적이고 기계론적인 근대 서구의 세계관을 대체할 대안이라고 생각한다. 그러 나 이것은 여전히 생각일 뿐이고, 생각은 세계를 대상화하는 인식을 벗어날 수 없다. 그러기에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세계의 유기체적 본성을 설파하는 베스트셀러를 읽고 감동 받지만, 책장을 덮으면 이 내 주객이 분리된 기계적 세계로 복귀하고 마는 것이다.
하지만 수양은 이와 다르다. 수양은 순수한 一氣의 세계로 직접 들어가는 길이고, 사람들은 이를 통해 세계의 통일적(유기체적) 본성 을 보다 직관적으로 자각할 수 있다. 그리하여 이들의 삶이 실제로 유기체적으로 변화하고, 일상에서 이런 상태를 지속할 가능성이 높 아진다. 따라서 앞으로 세계관의 전환을 둘러싼 논의가 진전되면 될수록, 수양에 대한 이론·실천적 관심이 보다 고조될 것이다. 어쩌면 수양문화의 확산이 소위 '세계관의 전환'에 실질적인 견인차가 될지도 모를 일이다.
6. 나가는 말
동아시아의 철학사상은 추상적 이념이나 형이상학적 진리의 결과물을 추구하기보다 어떤 구체적 인격의 상태에 도달할 수 있도록 추동하는 실천, 즉 수양의 과정을 중시했다. 그리하여 수양을 통해 다듬어진 인격을 지식보다 우선시하는 것은 수천 년 동안 동아시아 문명 을 이끌어온 지도적 원리의 하나가 되었다. 우리는 제자들에게 "집 에서는 부모에게 효도하고, 문 밖을 나서면 어른을 공경하며, 행동을 삼가고 신의를 지키며, 널리 모든 사람을 사랑하되 어진 사람을 가까이 하라. 이를 행하고도 여력이 있으면 곧 글을 배우라"고 권유 하는 孔子나 "진실한 사람(眞人)이 있은 이후에야 참된 지식(眞知) 이 있을 수 있다"고 설파하는 莊子에게서 동아시아 학문이 지닌 수양중심적 성격의 원형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런데 1백여 년 전 西勢東漸의 역사적 질곡 속에서 동아시아 지식인들은 이러한 수양중심성이 사물에 대한 객관적 지식을 강조하는 근대 서구적 주지주의에 비해 열등하다고 여기기 시작했다. 이내 주관적이고 증명할 수 없는 수양의 가치가 크게 평가절하 되었고, 수양의 실천은 학문적으로 엄밀한 철학의 대상이 될 수 없는 것이라 하여 소위 '동양철학' 전문가를 양성하는 대학과 대학원의 커리큘럼 에서조차 완전히 배제되었다. 동양철학의 학문적 전문가들마저 수양을 몸소 실천할 (공식적) 기회를 거의 가지지 못하게 된 것이다. 조금 심하게 말하자면, 글만 배운 사람들이 孝悌仁義를 가르치고, 진실성을 연마하지 못한 사람들이 참된 지식을 논구하는 본말전도 의 상황에 직면하게 된 셈이다.
그러나 이성과 과학이 인류를 구원하여 유토피아로 이끌 것이라는 근대적 신화가 의심받는 현실, 예컨대 지구촌의 우수한 두뇌자원을 거의 독점하다시피 하고 과학의 첨단을 이끄는 강력한 나라가 갈수록 극악무도하게 약소국을 짓밟는 불량국가(rogue states)의 면모 를 드러내며, 전문지식으로 무장한 경제적 엘리트가 보다 많은 부를 독점하는 대신 대다수의 경제적 약자와 자연계를 더욱 극심하게 약탈하고, 합리성을 내세우는 자유민주주의 제도 아래서 정치가들이 뻔뻔스럽게 타락하는 것을 지켜보면서, 우리는 갈수록 덕성을 상실하는 주지주의적 인간의 야만성에 회의를 품게 된다. 멀리 눈을 돌릴것도 없이, 자고나면 신문지상을 도배하는 온갖 게이트와 부패· 부정의 중심에 서있는 대한민국의 세칭 일류두뇌집단, '불량학벌 (rogue academic clique)'이라고 불러야 마땅할 머리만 키운 군상의 행패에서 몸과 마음을 수양할 문화·교육적 기회를 제공하지 못한 근대적 주지주의의 한계와 폐해를 목도한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물론 신비주의적으로 경도되는 수양만능주의를 경계해야 한다. 수양론이 인격의 사회적 차등화와 계급질서를 옹호하는 이데올로기로 변질될 수 있는 위험도 반드시 지적되어야 한다. 우리는 과거 동아시아의 수양문화에 이런 어두운 그늘이 있었던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공개적인 논의의 장에서 다시 수양 전통의 회복을 검토하게 되는 것은 근대문명의 주지주의적 한계가 보다 뚜렷한 현실로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인류는 '知'에서 '修'로 가치의 중심을 옮길것, 즉 主修主義의 새로운 인간 학적 토대를 수립할 것을 신중하게 검토해야 한다. 사유와 지식의 중요성을 부인하자는 것이 아니며, 참된 지식의 성립을 가능케 하는 진실한 인격의 가치를 존중하자는 것이다.
- 주요 참고문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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