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류, 술, 멋

다시 시작된 여행 ...그리웠던 그 섬 흑산도

醉月 2022. 4. 22. 19:39
바다를 끼고 굽이굽이 산길을 넘어서 당도하는 흑산도 남쪽의 사리마을. 200여 년 전쯤 천주교를 믿었다는 죄로 손암 정약전이 유배 와서 머물렀던 마을이다. 정약전은 여기서 제자를 가르치고 ‘자산어보’를 썼다.

 

대중가요의 힘은 ‘공감’에서 나온다. 공감의 요체는 실재성(實在性)이다. 실재성이란 ‘진짜 있는 일처럼’ 꾸미는 것. 누구나 겪었음 직한 사랑과 이별, 아픔을 주로 다루고 제목이나 가사에 진짜 지명을 쓰는 이유도 그래서다. 목포의 눈물, 대전 블루스, 안동역에서, 영일만 친구….

그런데 이렇게 가져다 쓴 지명은 때로 거꾸로 지역을 이미지화한다. 흑산도에 막 도착해서 배에서 내리면 가장 먼저 듣게 되는 건 이미자의 노래 ‘흑산도 아가씨’다. 쾌속선이 들고날 때면 예리항 선착장에는 어김없이 이 노래가 나온다. 흑산도 사람들은 사실 ‘흑산도 아가씨’ 노랫소리가 지겹다. 수십 년 동안 똑같은 노래만 주야장천 틀어대는데 지겹지 않을 수 있을까.

흑산도 관광 명소인 상라산 전망대의 ‘흑산도 아가씨 노래비’가 언젠가부터 노래를 멈춘 이유다. 노래비의 노래는 중단됐지만, 흑산도 예리항에는 배가 드나들 때마다 여전히 이미자의 흑산도 아가씨 노래가 울려 퍼진다. 외지인들은 흑산도라면 이 노래부터 먼저 떠올리니, 흑산도 주민들이 지겹더라도 어쩔 수 없다.

‘못 견디게’ 육지를 그리워하다 ‘가슴이 검게 타버린’흑산도 아가씨의 노랫말은 추억이나 회한 혹은 공감보다는 통속 소설의 스토리에 가깝다. 이 노래를 주제가 삼아 1969년 개봉한 윤정희, 이예춘, 남진 주연의 영화 ‘흑산도 아가씨’ 역시 대학생 호스티스 얘기를 다뤘다. 어찌 됐든 흑산도 아가씨는 반세기 넘게 흑산도의 주제가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이만큼 한 지역을 통째로 지배해온 노래가 또 있을까. 아, ‘목포의 눈물’은 빼고….


# 노래가 가수를 섬으로 불러들이다

흑산도에는 노래 ‘흑산도 아가씨’를 기념하는 곳이 3곳 있다. 노래비와 동상, 그리고 유래를 적은 벽화다. 흑산도에 갔다면 누구나 가는 상라산 전망대에 흑산도 아가씨 노래비가 있다. 3단의 기단 위에 세워진 거대한 노래비는 무슨 참전기념탑만 하다. 지금까지 본 노래비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크다. 기념탑 앞에 가수 이미자가 두 손을 찍은 핸드프린팅 조형물이 있다.

이미자가 ‘흑산도 아가씨’를 부른 건 1966년. 노래가 대히트를 했어도 이미자가 흑산도에 간 적은 없다. 흑산도 땅을 처음 밟은 건 노래를 취입한 지 자그마치 46년 만인 2012년 9월 15일이다. 그날 한 방송사 주최로 열린 흑산도 공연에서 이미자는 ‘흑산도 아가씨’를 불렀다. 노래비 앞의 핸드프린팅은 그때 찍은 것이고, 흑산도 여객선터미널 북쪽 방파제 끝의 흑산도 아가씨 동상도 그날 공연에 맞춰 세운 것이다. 흑산도 사람들은 지금도, 이미자가 걸그룹 ‘티아라’와 함께 왔던 그때 이야기를 한다. 동상으로 만든 흑산도 아가씨는 오른손을 눈썹 위에 대고 먼바다를 바라보는 모습인데, 발치에는 난데없이 홍어가 끼어들었다. 흑산도에서 ‘흑산도 아가씨’를 이기는 유일한 게 있다면, 그건 바로 ‘홍어’다.

흑산도에는 깊을 심(深) 자를 쓰는 작은 마을 심리(深里)가 있다. ‘지푸미’ 마을이란 정겨운 이름으로도 불리는 곳이다. 이 마을에는 흑산도 아가씨 노래의 유래를 적은 벽화가 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영부인 육영수 여사가 이 동네 심리국민학교 학생들을 해군함정에 태워 서울 구경을 시켜줬는데, 그 기사를 보고 작사가와 작곡가가 의기투합해 ‘흑산도 아가씨’ 노래를 만들었다는 얘기다. 의아한 건 ‘육지를 그리워하다 가슴이 검게 탄’ 노래 속의 섬 아가씨와 ‘서울 구경이 하고 싶은 낙도 어린이’의 정서가 사뭇 다르다는 점이다. 짐작하건대 아마도 낙도 어린이의 서울 방문으로 흑산도라는 섬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정도의 연관이 있었으리라.


빨랫줄에 내걸린 홍어. 이렇게 말려서 홍어포무침을 해먹는다.

# 흑산도를 보는 법…섬 순환도로

흑산도는 목포에서 서쪽으로 90㎞쯤의 거리에 있다. 쾌속선으로 2시간 정도가 걸린다. 흑산도는 인근 부속 섬과 합쳐서 흑산면이라는 하나의 면(面)을 이룬다. 흑산도가 거느리고 있는 11개의 유인도를 포함한 70여 개 섬에다 그 주변 바다까지 다 합치면 면 단위 중 면적이 가장 크다.

흑산도는 보통 홍도와 함께 다녀오게 되는데, 바삐 다녀오느라 두 섬을 비슷한 크기로 생각하기 쉽지만, 흑산도와 홍도는 체급이 아예 다르다. 흑산도의 면적은 19.7㎢(약 593만 평). 분당신도시 면적과 비슷하고 서울 여의도 크기의 7배 정도다. 섬을 한 바퀴 도는 일주도로는 25.4㎞에 달한다. 해안 지형이 대부분 바위로 이뤄져 바위를 깨부수고 길을 내느라, 1984년 공사를 시작해 26년 만인 2010년에서야 일주도로가 다 만들어졌다.

흑산도 여행은 ‘섬 안을 보는 여행’이다. 홍도 여행이 유람선을 타고 해상경관을 보는 식이라면, 흑산도 관광은 일주도로를 따라 섬을 한 바퀴 도는 방식으로 이뤄진다. 흑산도는 지형이 거칠어서 섬 가운데 마을이 없다. 바다 말고는 기대고 살 게 없는 데다 평지라고는 해안가를 빼고는 없다시피 해서 그렇다. 해안을 따라 이어진 섬 일주도로는 마을과 마을을 잇는다. 일주도로로 섬을 돌았다면 섬 안에 있는 마을을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전부 다 본 거란 얘기다.

해안도로에는 1000원짜리 공영 버스가 다닌다. 버스가 양쪽 방향으로 순환한다는데, 왜 그러는지는 모르겠지만 동쪽으로는 하루 3번, 서쪽으로는 하루 7번 운행한다. 그런데 주민들에게 버스 시간을 물으니 얼버무리기 일쑤다. 배차 간격을 물으면 ‘대중없다’는 답이 돌아온다. 버스 대신 비싼 택시를 태우려 하는 게 아니냐는 의심이 들 정도였는데, 한참을 얘기해보고 나서야 알게 됐다. 매일 타지 않으면 주민들도 버스 시간을 잘 모른다. 마침 지나가는 버스를 잡아탄다면 모를까, 관광객이 버스 시간을 숙지하고 버스를 타는 건 거의 불가능해 보였다.

흑산도 관광을 위한 가장 적절한 교통수단은 관광택시다. 흑산도에는 7대의 관광택시가 있다. 모두 7인승 승합 차량인데 섬을 한 바퀴 도는 데 대당 6만 원쯤 받는다. 한 사람이 1만5000원을 내고 합승으로도 이용할 수 있다. 운전사는 관광 가이드를 겸한다. 명소를 안내해주고 중간중간 관광 포인트에 승객을 내려주며 사진촬영 시간도 준다. 섬 일주 관광은 보통 1시간 30분, 길어봐야 2시간 남짓이면 끝난다. 그 시간에 대부분의 흑산도 명소를 다 본다. 대부분 여행자가 흑산도에서 짧게 머물다 가니 관광택시도 밀린 숙제하듯 바삐 섬을 도는 것이다.


진달래 핀 상라봉 봉수대 정상에서 낙조를 감상하는 모습. 해가 지는 쪽에 홍도가 있다.

# 관광택시로 섬마을을 들여다보다

먼저 흑산도 마을의 개략적인 설명부터. 흑산도의 중심마을은 섬 북쪽의 ‘예리’와 ‘진리’다. 두 마을은 나란히 흑산도 내해를 끼고 있는데 수협 위판장이 있는 죽향리를 가운데 두고 둘로 나뉜다. 쾌속선이 닿는 여객선 선착장이 있는 마을이 예리다. 어선이 빽빽하게 정박해 있고 식당과 횟집이 가득해 늘 북적인다. 반면 진리는 흑산면 소재지로 학교나 교회, 성당 등이 모여있어 차분한 분위기다. 울릉도 저동과 도동의 분위기와 사뭇 비슷하다. 예리가 저동처럼 흥청대는 쪽이라면, 진리는 도동처럼 고즈넉하다.

흑산도 북쪽에 예리와 진리가 있다면, 섬 남쪽 끝에는 ‘사리마을’이 있다. 예리와 진리가 상업과 행정의 중심이라면, 사리는 외졌으되 고즈넉하면서 아름다운 전형적인 어촌마을이다. 섬마을 특유의 정취와 푸근함이 물씬 느껴지는 곳이다. 예리와 진리, 사리마을은 흑산도를 지탱하는 기둥이나 진배없다. 이곳을 빼고 나면 흑산도의 다른 마을은 말 그대로 손바닥만 하다.

이제부터는 흑산도 관광택시를 타면 들르는 곳들이다. 흑산도에서 관광택시를 타면 보통 순환도로를 시계 반대방향으로 도는데, 그 순서를 따랐다. 가장 먼저 관광택시가 멈춰서는 곳은 섬사람들이 풍어제를 지냈던 진리마을 서낭당 격인 ‘진리당’이다. 진리당은 2개의 당집, 그러니까 각시당과 용신당을 한데 묶어 부르는 이름이다.

각시당은 고기잡이 나갔다 죽은 남편을 따라 목숨을 던졌다는 설화 속의 각시를 기린다. 대낮에도 어둑한 상록림으로 뒤덮여 있다. 각시당과 짝을 이루는 용신당은 돌담 오른쪽 숲길 끝, 바다 가까이에 있다. 용신당은 신당이라기에는 너무 작았고, 텅 빈 폐허처럼 방치돼 있다. 진리당에서 풍어제나 당제를 지내지 않은 지 20년이 넘었단다. 관광택시 기사는 진리당 주변을 ‘신들의 정원’이라 부른다고 했지만, 당집은 더 이상 신을 모시지 않으니 ‘신들이 떠난 정원’이라는 편이 더 적당하지 않을까.


지도바위. 바위에 뚫린 구멍이 영락없이 한반도 지도 모양이다.

# 흑산도의 절경을 보는 자리…상라봉

진리당보다 더 신령스러운 기운이 느껴진 곳이 옛 절터인 무심사지였다. 빈 절터에 늙은 팽나무 노거수가 활개 치듯 가지를 뻗고 있고 그 발치에 석탑 하나와 못생긴 석등 하나가 얌전하다. 거대한 팽나무의 밑동이 옛 절집의 기단과 석탑 덮개돌 같은 석물을 움켜쥐듯 자라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이른 아침이었는데, 마침 흑산도에 하나 있는 절집 칠락사의 대지 스님이 붉은 가사를 걸치고 팽나무 앞에서 예불을 올리고 있었다. 통일신라 때 창건해 고려 말 폐사됐다는 절집 자리에서 수백 년 동안 끊어졌던 기도가 다시 이어지고 있었다.

무심사지를 지나면 ‘흑산도 열두 구비길’이다. 흑산도에는 북쪽과 남쪽에 각각 가파른 고갯길이 하나씩 있는데, 북쪽 고개가 열두 구비길이다. 이름처럼 가파른 언덕길이 뱀처럼 구불거리며 올라간다. 고개 정상이 앞서 말한 흑산도 아가씨 노래비가 서 있는 상라산 전망대다. 전망대에서 10분 정도만 걸어 오르면 상라봉 정상인 봉화대가 있다.

상라봉 봉화대는 흑산도에서 가장 훌륭한 경치를 만날 수 있는 자리다. 여기서 진리와 예리마을을 끼고 있는 흑산도 내해와 구불구불 오르는 열두 구비길, 그리고 인근의 섬까지 다 한눈에 들어온다. 북쪽으로는 대둔도와 다물도가 손에 잡힐 듯하고, 서쪽으로는 장도와 망덕도 너머로 홍도가 또렷하다. 이즈음에는 홍도를 살짝 비껴 해가 지는데, 봉화대에서 보는 노을빛으로 붉게 물든 홍도 풍경이 자못 인상적이다.


# 가장 먼 유배지, 사리마을

상라봉 열두 구비길을 넘으면 흑산도의 서쪽이다. 길은 해안을 끼고 이어지면서 작은 어촌마을을 차례로 지나간다. 마리, 비리, 곤촌, 심리…. 한자로 적은 행정지명보다는 마을주민들이 부르는 이름이 더 정겹다. 마리는 ‘모듸미’고, 비리는 ‘전듸미’며, 곤촌은 ‘곤듸’, 심리는 ‘지푸미’다. 한적한 어촌마을의 정취도 볼만하고 해안도로 변에도 볼거리가 적잖다. 길에서 보면 영락없이 한반도 모양으로 구멍이 뚫린 지도 바위도 있고, 1969년 무장간첩이 은거했다는 동굴이 있으며, 길가에 차고 맑은 물이 솟는 약수터도 있다.

흑산도 동에서 서로 넘는 북쪽의 고개가 열두 구비길이라면, 서에서 동으로 넘는 흑산도 남쪽의 가파른 고개가 ‘한다령’이다. 한다령도 상라봉 열두 구비길 못잖게 구불구불 가파른 경사를 내려간다. 이제부터는 흑산도의 동쪽이다. 고개를 넘으면 ‘모래미’라고 부르는 사리마을이다. 사리마을은 ‘자산어보’를 지은 정약전이 유배돼 16년 동안 머물렀던 마을이다. 흑산도만 해도 귀양길이 한 달 걸릴 정도로 먼 곳인데, 흑산도에서도 사리마을은 배가 닿는 항구에서 가장 멀다. 그 무렵의 교통 사정을 생각하면 ‘지구의 끝’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궁벽한 오지였으리라. 정약전의 이야기는 뒤에서 다시.

사리마을에서는 이즈음 주민들이 한창 김을 뜨고 있다. 갯바위에서 뜯어온 자연산 김을 잘 씻어 김발에 떠서 말린다. 3월 말에서 4월 말까지 딱 한 달 동안에만 할 수 있는 일이라고 했다. 이런 식으로 뜨는 재래식 김은 이제 다른 곳에서는 찾아보기 어렵다. 이렇게 말린 김은 성글고 질감도 거칠지만, 대신 김 특유의 향이 짙다. 40장에 1만 원. 바다에 나가 김을 뜯고 찬물에 손을 담그고 김을 떠내는 수고에다 대면 그리 비싼 것도 아니다.


초가지붕이 정약전이 머물던 사촌서당이고, 그 아래가 사리 공소다.

#흑산도 동쪽 해안을 따라가는 길

사리마을을 지나서는 흑산도 동쪽 해안을 따라간다. 이쪽에는 소사리(잔모리미)와 천촌(여티미)과 청촌(청재미)마을이 있다. 천촌마을에는 병자수호 조약 불가상소를 했다는 이유로 흑산도로 유배 온 면암 최익현의 유허비가 있다. 비석 뒤 바위벽에 ‘기봉강산(箕封江山) 홍무일월(洪武日月)’이란 글씨가 선명하다. 홍무(洪武)는 명나라 태조 주원장의 연호다. 해석해 보면 ‘중국 은나라의 기자(箕子)가 봉한 땅이며, 명나라 주원장이 세운 세월’이란 뜻이다. 우리나라가 이런 나라인데, 감히 일본이 넘보느냐는 얘기다. 위정척사와 의병운동의 서릿발 같은 기개는 감탄스럽지만, 이 뿌리 깊은 사대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천촌과 청촌마을을 차례로 지나면 길은 섬을 한 바퀴 돌아서 다시 여객선 터미널이 있는 예리로 이어진다. 이렇게 관광택시는 섬을 한 바퀴 돈다.

흑산도 관광에 관광택시를 권했지만, 흑산도를 잘 보겠다면 ‘걷기’만 한 게 없다. 관광택시가 흑산도의 명소를 거의 빠짐없이 들르는 건 맞다. 하지만 흑산도는 그렇게 봐야 하는 곳이 아니다. 화보집을 재빨리 넘기듯 보는 홍도와는 다르다. 항구에서 말리는 생선을 구경하거나, 주민들이 자연산 김을 뜨는 모습을 구경하거나, 홍도 뒤쪽으로 지는 노을을 느긋하게 바라보며 이미자의 노래를 흥얼거리는데, 흑산도 여행의 즐거움이 있다. 그렇게 하려면 스스로 속도를 조절해가며 다녀야 한다. 흑산도 순환도로를 다 걷는 데는 7∼8시간 남짓이 소요되는데, 하루에 다 걷기보다는 이틀에 나눠 걷는 걸 추천한다.


팽나무 노거수가 자라고 있는 무심사 절터.

# 가혹한 유배지에서 보낸 16년

마지막으로 뒤로 미뤄둔 정약전 이야기. 천주교를 믿은 죄 하나로 정약전의 집안은 1801년 신유박해 때 풍비박산이 났다. 약전은 완도군 신지도로 유배됐고, 동생 약종은 참수돼 순교했으며 막냇동생 약용은 포항 장기로 유배됐다. 설상가상 같은 해 맏형 약현의 사위, 그러니까 약전과 약용의 조카사위인 황사영이 중국 베이징(北京)의 주교에게 조선의 천주교 탄압 실상을 알리고 서양 선박 파견을 요청하는 편지를 보내려다 발각되는 이른바 ‘황사영 백서사건’이 터지자 유배지는 더 멀어졌다. 정약전은 신안의 우이도로, 약용은 강진으로 옮겨졌다. 1807년에 정약전은 다시 흑산도로 유배지가 옮겨졌다. 그 무렵 흑산도는 가장 가혹한 유배지였다. 정약전은 이후 우이도에서 숨을 거두기까지 16년 동안 유배생활을 했다.

정약전이 유배돼 살았던 흑산도 사리마을에는 유배문화공원이 조성돼 있다. 공원에는 자산어보의 내용을 새긴 비도 있고, 유배인 저마다의 사연을 적은 비도 있다. 문을 닫아놓았지만 ‘위리안치(탱자나무 울타리 안에 가두는 유배형)’며, ‘절도안치(외딴 섬에 가두는 유배형)’ 등 유배형의 종류에서 이름을 딴 관광객용 숙소도 세워놓았다.

유배문화공원의 중심이라면 정약전이 제자를 가르쳤던 사촌서당이다. 복원한 사촌서당 현판에는 사촌의 한자를 ‘沙村’이 아닌 ‘沙邨’이라 적어놓았다. 마을 촌(邨) 자를 ‘둔’이라 잘못 읽는 경우가 많지만 실은 훈과 독음이 ‘마을 촌(村)’ 자와 똑같다. 자산어보를 지을 때 ‘검을 흑(黑)’ 자를 쓰는 ‘흑산(黑山)’이 아니라 ‘검을 자(玆)’ 자를 써서 ‘자산(玆山)’으로 바꿔 제목을 붙인 경우와 비슷해 보인다. 흑산이 자산이 되고, ‘沙村’이 ‘沙邨’이 됐다. 뜻은 그대로 둔 채 글자를 슬쩍 비트는 솜씨에서 문향(文香)이 느껴졌다.


# 정약전, 그는 어디로 돌아갔을까

정약전은 사촌서당을 ‘복성재’라고도 불렀다. ‘복성(復性)’을 두고 ‘(천주학을 버리고) 성리학으로 되돌아온다’는 뜻의 반성문쯤으로 해독하지만, 천주교의 입장은 다르다. 박상선(58) 흑산성당 주임신부는 복성을 “본래의 성정, 즉 교리의 근본적인 원칙을 지키겠다는 선언으로 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약전이 유배 중에도 믿음을 버리지 않았을 것이란 근거로, 박 신부는 100년쯤 뒤인 1902년 6월 목포성당의 드예 신부가 흑산도를 방문한 후 뮈텔 주교에게 보낸 사목 보고서 기록을 들었다. 드예 신부는 보고서에서 사리 주민 박인수를 흑산도 유일의 가톨릭 신자로 기록했는데, 그는 다름 아닌 정약전이 유배 시절 머물렀던 집안 사람이었다. 보고서에는 또 ‘정약전이 한국어 성가의 가사를 만들었다’는 내용도 있다.

분명한 건 정약전의 유배지라는 인연으로 흑산도에 천주교가 빠르게 전파됐다는 것이다. 정약전이 유배된 지 150여 년 뒤에 지나서 신안에서 가장 먼저 흑산도에 공소와 성당이 생겼다. 그가 유배돼 살았던 사리에 1957년 천주교 공소가 들어섰고, 이듬해인 1958년 진리에 성당이 세워졌다.

천주교는 흑산도에서 조선소와 발전소를 짓고 약국을 열었으며 학교를 운영했다. 밀가루와 옥수숫가루로 보릿고개를 넘기게 했고 배를 사서 수익금으로 어려운 형편의 주민들을 돕기도 했다. 그게 얼마나 고마웠던지 신도들은 초분 장례를 지내는 초장(草葬)골 주변 땅을 성당에 기부했다. 그 땅에다 지은 게 지금의 흑산성당이다. 흑산도에서 가장 번듯한 건물이자, 최고층(5층) 건물인 흑산문화관광호텔을 흑산 성당이 소유하고 있는 것도, 그때 기부받은 땅을 몇 년 전에 되찾았기 때문이다. 흑산성당의 박 신부가 흑산도 관광호텔 사장을 겸하고 있는 것도 거슬러 올라가면 200년 전쯤 흑산도로 유배 온 정약전으로부터 시작된 일인 셈이다.


■ 흑산도에 유배 된 이유

고려 때부터 조선에 이르기까지 기록으로 확인된 흑산도 유배인은 135명이 넘는다. 당쟁에 휘말리거나 역모를 꾀했다는 죄목으로 유배 온 경우도 있지만, 정감록을 유포한다는 죄목으로 유배 온 승려도 있고, 임금의 옷을 도둑질하다 걸려서 온 경우도 있으며, 횡령에 얽혀 유배된 관료도 있다. 궁금했던 건 1693년 흑산도로 유배된 궁궐의 나인 정숙의 유배 이유. ‘해괴한 짓’이라고만 나와 있는데 과연 종신형이나 다름없는 흑산도 유배형을 받을 만한 해괴한 짓이란 무엇이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