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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자의 자연관

醉月 2011. 5. 10. 07:50
노자의 자연관 _
본고는 노자철학의 기본입장을 가장 잘 보여주는 '자연·무위'의 철학사상을 중심으로 노자가 말하는 '자연'의 철학적 의미가 무엇인지를 알아보고, '자연'과 '무위'의 상호 관련성을 알아보려는 데 주된 목적을 두었다. 노자의 {도덕경} 안에는 '자연'이라는 용어가 다섯 차례 등장하는데, 그 용례는 다음과 같다.

 

① "人法地, 地法天, 天法道, 道法自然."(제25장),

② "功成事遂, 百姓皆謂我自然."(제17장),

③ "希言自然"(제23장),

④ "道之尊, 德之貴, 夫莫之命而常自然."(제51장),

⑤ "以補萬物之自然而不敢爲."(제64장)

 

본고는 먼저 이 다섯 가지 '자연'의 용례를 통하여 노자가 말하는 '자연'의 의미가 일반적으로 우리가 말하는 '자연'과 다르다는 것을 확인한다. 일상적으로 우리가 인식하고 있는 '자연'이란 인간 외적 경험 대상의 총체로서 다분히 기계론적이고 목적론적이며, 물리적인 자연세계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지만, 노자에 있어서의 '자연'은 본연한 세계의 상태를 형용한 '스스로 그러하다(自己如此)'는 의미를 지니는 '그 자체로서의 자연'의 의미임이 '자연'에 관한 다섯 가지 용례의 분석으로부터 밝혀진다.

 

즉 노자에 있어서의 '자연'은 인간의 의식에 대상화되어 의미화되기 이전의 세계 자신이 지닌 존재상태를 형용한 말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노자의 '자연'은 필연적으로 '무위'의 개념을 자체적으로 안고 있다. '무위'란 어떠한 강제력이나 특정한 작위를 배제하는 행위를 말하기 때문이다. 노자에게 있어서 '무위'는 '처사'하는 일종의 방법이며, '자연'은 '무위'가 드러내는 일종의 효과이다.

 

그리고 노자가 '무위'를 통하여 비판하는 것은 일체의 인간 중심적인 분별이다. 따라서 노자의 '무위'란 모든 인간 중심적인 분별을 더 이상 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러한 점을 염두에 두면서 본고는 특히 노자의 '무위'의 개념을 정치철학적인 측면에 초점을 맞추어 비판적으로 고찰함으로써 노자가 생각한 이상정치의 철학적 근거가 바로 '자연·무위'임을 확인하였다. 이상과 같은 노자의 '자연·무위'의 철학사상은 현대를 사는 우리들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자연'에 대하여 일종의 오만과 독단의 절대적 폭력을 보유하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노자의 '자연·무위'의 사상은 '자족'의 족함을 권고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노자의 '자연'은 인간 중심주의적 세계관을 근원으로 삼고 있는 서구적 자연관에 대한 비판적 대안으로서도 그 역할이 충분할 것이다.


1. 노자적 사유의 생명력을 찾아서
선진시대의 위대한 사상가 중에서 노자와 장자보다 그 사적을 고찰하기가 더 어려운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이러한 경향은 특히 두 사람 가운데 노자가 더욱 심하다고 볼 수 있다. 노자는 그 생애의 자취가 불분명할 뿐만 아니라 이름이나 생졸연대에 관해서도 여러 가지 주장이 분분하여 오늘날까지도 사실상 어느 일방의 주장이 옳다고 하기가 어려운 실정이다.

 
노자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전설이 있다. 특히 그는 사후에 도교의 시조로까지 추존되었는데, 후일 도교가 중국에서 성행할 때 몇몇 왕조에서 도교를 국교로 삼음으로써 그 전설은 더욱 더 많아지게 되었다. 사마천(司馬遷)은 노자가 춘추시대 말기의 사람으로 성은 '이(李)'씨이고 이름은 '이(耳)'이며 자는 '담(聃)'이라고 하였다. 또한 그는 노자가 초(楚)나라 고현(苦縣) 여향( 鄕) 곡인리(曲仁里) 사람이라고 하는데, 이곳은 오늘날의 하남성 녹읍의 동쪽 10리 지역으로 안휘성의 박현과 가까운 곳이다.

 

이와 같은 전통적 견해에 따르면, 노자는 초나라 사람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육덕명(陸德明)의 주장은 이와는 다르다. 그는 {노자음의(老子音義)}에서 노자를 진(陳)나라 상현(相縣) 사람으로 보고 있다. 그렇다면 노자는 과연 초나라의 고현 사람인가, 아니면 진나라의 상현 사람인가라는 문제가 제기된다. 허항생(許抗生)의 주장에 근거한다면, 역사적으로 고현은 원래 진나라에 속해 있었는데 춘추시대 말기에 초나라가 진나라를 멸망시킴으로써 고현 땅은 진나라와 함께 초나라에 귀속되었다고 한다.

 

그러므로 노자의 철학사상은 진나라가 멸망하기 이전에 형성된 것이기 때문에 당연히 춘추시대 진나라의 철학사상으로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구라하라 고레히도(藏原惟人)는 오늘날 많은 학자들이 그를 송(宋)나라 출신일 것으로 본다는 견해를 제시하고 있는데, 이러한 주장은 일찍이 요내(姚 )의 {노자장의(老子章義)}와 마서륜(馬敍倫)의 {노자핵고(老子  )} 등에 기록되어 있는 내용과 같다. 그런데 또한 일각에서는 진나라가 송나라의 남쪽 끝과 인접한 지역이므로 노자는 그 조상이 아마도 송나라에서 진나라로 이사하여 살았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고 보기도 한다.

상황이 이와 같다 보니, 우리가 노자에 관한 생몰연대나 출신국 등의 문제에 관하여 정확히 고찰하기는 현실적으로 곤란하다.


한편 노자가 지은 책은 {노자} 또는 {도덕경}이라고 통칭되는데, 그것은 서한(西漢) 시대의 말기에 이미 그러하였다. 진(晋)의 왕필(王弼)이 노자를 주석하면서 {도덕경}이라고 표제를 붙였으나 도와 덕을 나누어 상·하편으로 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당현종(唐玄宗)이 노자를 주석함에 이르러 비로소 장구를 개정하여 {도덕경}이라 하였는데, 도에 관하여 말한 부류를 상권으로 삼고 덕을 말한 부류를 하권으로 삼았다. 이러한 {도덕경}의 판본은 일반적으로 [도경]이 앞에 있고 [덕경]이 뒤에 있다. 그러나 1973년 장사(長沙)의 마왕퇴(馬王堆) 한묘(漢墓)에서 서한 초기의 백서(帛書)가 출토되었는데, 그 중 {도덕경}은 [덕경]이 앞에 [도경]이 뒤에 있어 전국시대에 한비자가 말한 {도덕경}의 순서와 같았다. 그런데 [도경]이라고 하여 모두 '도'에 관하여 말한 것은 아니며, 또한 [덕경]이라고 하여 모두 '덕'에 관하여 말한 것도 아니다. 전체적으로 볼 때 주로 [도경]은 '도'의 존재론적 측면을 이야기하고, [덕경]은 '도'의 기능적인 측면을 이야기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사마천은 노자가 {도덕경}을 저술하게 된 원인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노자는 은둔하여 도와 덕을 닦았고 그의 학문은 스스로 재능을 숨겨 이름을 남기지 않는 것에 힘썼다. 그는 주나라에 오랫동안 살다가 주나라가 쇠미해지는 것을 보고 그곳을 떠났다. 국경의 관문이었던 함곡관(函谷關)에 이르자 그곳을 지키는 관령 윤희(尹喜)가 말했다. '선생님께서는 지금 은둔하시려 하시니, 억지로라도 저를 위하여 책을 하나 남겨 주십시오.' 그러자 노자는 상·하로 되어 있는 저서 두 편을 써서 도와 덕에 대해 논한 5천여 자의 글을 남기고 떠났다.

 

그 후 그가 어디로 갔는지 아무도 알지 못했다." 그러나 노자의 철학사상을 함축하고 있는 {도덕경}이 언제 기록되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노자}가 춘추시대에 기록된 것으로 알고 있지만, 이미 중국에서는 5·4 신문화운동 직후부터 이 문제를 둘러싼 논란이 벌어졌다. 이러한 결과는 양계초(梁啓超)가 {노자}는 춘추시대의 작품이 아니라 전국시대의 작품일 것이라고 주장함으로써 시작되었다.

 

그 논쟁은 대체로 다음과 같은 세 갈래로 전개되었다. 하나는 {노자}가 공자보다 먼저 살았던 노자의 작품이라는 설이고, 다른 하나는 그것이 전국시대의 작품이라는 설이며, 또 다른 하나는 진한 교체기에 이루어진 작품이라는 설이다. 그러나 오늘날 학계에서 대체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설에 의하면, {노자}는 맹자 이후 장자 이전의 작품이라는 것이다. 그 작자 문제는 정확히 고증할 수는 없으나 전통적인 주장처럼 노자가 그 작자라고 믿을 근거는 없다는 것이다. {노자}에는 춘추시대 말기 일부 은자들의 사상이 수록되어 있지만, 노자의 중심사상과 기본원칙은 역시 전국시대에 형성된 것이며 맹자보다 시기상 앞설 수 없다는 점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할지라도 노자라는 인물이 춘추시대 말기에 실존했으리라는 가능성은 여전히 부정할 수 없다.


분명한 것은 {노자} 속에는 노자의 철학정신이 응축되어 있다는 점이다. 도가의 철학적 지혜의 근원은 사실상 이 {노자}에 있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이다. 그런데 {노자}가 지닌 진정한 가치는 과연 언제 {노자}가 저술되었느냐 하는 역사적 권위로부터 찾아지는 것은 아닐 것이다. 오히려 {노자} 안에 내재된 노자적 사유의 생명력으로부터 {노자}의 진정한 가치는 찾아진다. 그리고 또한 노자가 어느 시대, 어떤 곳에서 살았는가 하는 역사적 실존성의 시비를 밝히는 것보다도 노자의 철학적 생명력이 과연 어디에 있는지를 밝히는 일이 보다 더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노자적 사유의 생명력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은 아무래도 그의 '자연·무위'의 철학사상이 아닐까 한다.

 

노자철학은 후대의 철학사상 및 정치, 그리고 문화의 전반에 걸쳐 커다란 영향을 끼치면서 수많은 주석가와 연구가들에 의하여 여러 방면의 연구가 진행되어 왔는데, 종래로 우리는 노자철학의 핵심을 부지불식간에 '무위자연'의 철학이라고 습관적으로 연상하곤 하였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오늘날까지 노자의 철학을 가리켜 단적으로 '자연철학'이라고 서슴지 않고 말하는 것이다.


필자는 본고에서 노자철학의 기본입장을 가장 잘 보여주는 '자연·무위'의 철학사상을 중심으로 노자가 말하는 '자연'의 철학적 의미가 무엇인지를 알아보고, '자연'과 '무위'는 어떠한 관련성을 지니고 있는지 검토해보려고 한다. 그리고 노자의 '자연·무위'의 철학사상을 구체적으로 살펴보기에 앞서 노자가 자신의 철학적 목표에 도달하기 위하여 설정해 놓은 회의와 부정의 방편이 과연 노자철학의 전체 구도 안에서 어떠한 기능과 역할을 수행하는지 살펴보도록 할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노자적 사유의 역동성이 '자연'이라는 문제의 영역 안으로 자연스럽게 수렴되리라고 본다.


2. 회의와 부정이 떠올리는 '자연'
노자는 중국철학사에 있어서 최초로 '무(無)'의 철학을 연 선구자로서 회의와 부정의 논리를 통하여 진리의 세계를 모색한 인물이다. 그의 저서인 {노자}는 중국에서 처음으로 부정의 정신과 논리를 확립한 철학서이며,

인간존재에 대해 처음으로 부정적인 경고를 내린 문명 비판서였다.


노자는 일찍이 우리가 철학을 함에 있어서 일상의 상식이 지닌 오류를 인식하고 이를 타파하기 위한 철학적 방편의 하나로서 회의와 부정을 내걸었던 것이다. 회의와 부정은 우리의 분별적 의식에 대한 거부의 방식으로 나타난다. 우리의 의식의 반경으로부터 일어나는 분별력은 모든 것을 분열시키기 때문이다. 분열은 분열의 이전과 다르다. 노자는 그 분열의 이전을 '자연'이라고 본다. 따라서 '자연'은 우리의 의식의 반경으로부터 가장 먼 곳에 놓여진다. '자연'과 '인간' 사이에는 '현격한 거리'가 벌어져 있기 때문이다. 노자에게 있어서 이 '현격한 거리'는 우리의 분별적 의식의 반경 안에서 활동하고 있는 지식과 이로부터 표출되는 언어로 인하여 점점 더 벌어지게 된다. '자연'과 '인간' 사이에 놓여진 이 '현격한 거리'의 근원적 배제에 적극적으로 관여하는 것이 바로 회의와 부정의 논리인 것이다.


그래서 노자는 그의 저서 제1장부터 "도라고 규정된 도는 항구보편의 도가 아니요, 이름으로 제정된 이름은 영원불변한 이름이 아니다"라고 하는 부정적 진술을 제기함으로써 일체의 인위적 규정들에 대하여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태도를 보여준다. 진리란 특정한 것으로 의미화되어 규정될 수 없다는 것이다. 노자는 "진실로 도를 체득한 자는 말하지 않고, 말하는 자는 알지 못한다"고 한다. 이것은 언어의 기능적 한계를 역설적으로 지적한 말이기도 하다. 언어는 자·타를 구분해주는 기능을 충실히 수행하기도 하지만, 오히려 세계를 이원화시킴으로써 존재 자체와 심각하게 거리를 벌려놓는 부정적 기능을 담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언어는 인위적인 자의성으로부터 비롯된다.

 

따라서 언어는 자신이 드러내야 할 사태 자체와는 근원적으로 전혀 다른 양상으로 표현되곤 한다. 언어와 언어가 드러내고자 하는 세계는 기본적으로 단절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찍이 왕필은 언어화된 존재나 이름은 어떤 특정한 사태를 표출하여 지시하는 것으로서 이는 개념적으로 고정화된 것일 뿐 존재 자신과는 다른 종류의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언어가 세계를 정확하게 읽어낼 수 있다고 과신하기도 한다. 언어가 지닌 역기능적 한계가 너무나 명백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일상적으로 이것을 깨닫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래서 노자는 그 깨달음의 창구를 회의와 역설 내지는 부정의 방편으로부터 확보한다. 여기에 참된 실재로서의 도는 언어로 규정될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노자의 고민이 있다.

 

이러한 고민을 안고 노자는 일체의 언어를 부정하면서도 오히려 자신이 부정하는 언어를 통하여 오천여 언이 담긴 {노자}를 남기는 아이러니를 보여준다. 그러나 {노자} 전편에 '∼이다'라고 하는 긍정진술보다는 '∼아니다'라고 하는 부정진술이 주로 활용되고 있는 점을 감안한다면, 노자는 언어가 지닌 한계와 언어로 야기되는 오류로부터 최대한의 거리를 두려고 하는 언어 부정적 태도를 일관되게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노자가 언어를 사용하되 언어에 걸리지 않겠다는 언어 부정적 언어관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드러나는 현상이다.


노자는 또한 "천하사람들은 모두가 아름답다는 그것을 아름답다고만 알지만 이는 또한 추악한 것이요, 모두가 착하다는 그것을 착하다고만 알지만 이는 또한 착하지 아니한 것이다. …… 그러므로 성인은 작위를 일삼지 않고 말없는 가르침을 행한다"라거나 "현능한 자를 숭상하지 말아야 백성들로 하여금 다투지 않게 한다. …… 언제나 백성들을 무지·무욕하게 하며 아는 척 하는 자로 하여금 아예 하지 못하게 할 것이니 무위를 하면 다스려지지 않음이 없다"라고 하는 등 '아니요, 아니다' '하지 말아야 하지 않게 된다' 내지는 '불언무위(不言無爲)'·'무지무욕(無知無欲)'·'절성기지(絶聖棄智)'·'절학무우(絶學無憂)' 따위의 부정적 언사를 도처에서 사용하고 있다. 노자는 도를 참된 실재로 보고, 도를 인식하기 위해서는 언어와 감각의 오류성과 한계성을 자각해야 한다고 보고, 이를 탈피하기 위한 방법으로 특유의 회의와 역설, 그리고 부정의 논리를 전개하는 것이다. 그것은 우선 {노자} 안에서 '무(無)'·'불(不)'·'미(未)'·'비(非)'·'막(莫)' 등의 부정사와 '하(何)'·'오호(惡乎)' 등의 회의사가 다량으로 발견된다는 점에서도 확인된다.

 

이러한 부정사와 관련된 언어적 진술이 {노자}의 각 장마다 직접적이거나 혹은 간접적인 방식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점에 주의를 환기한다면, 노자철학의 논리적 전개는 기본적으로 회의와 부정을 그 기반으로 하고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회의와 부정은 무엇인가가 결여된 상태로부터 생겨난다. 이런 면에서 회의와 부정은 일종의 자기 요구이다. 그래서 노자에 나타나는 모든 회의는 지금까지 우리가 알고 있던 것, 아름답다고 생각했던 것, 확실하다고 믿고 있던 것들이 과연 틀림없는 진리인가 하는 확실성의 요구로부터 비롯된다. 이러한 확실성의 요구를 달리 말하면 '진지(眞知)'의 요구라고 할 수 있다. 회의는 언제나 그 자체가 '진지'와 밀착해 있는 것이다. 따라서 '진지'의 절실한 요구가 회의를 가져오며, 이 요구에 충족되지 않는 사실 앞에서 그것은 부정으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노자철학에 있어서 회의와 부정은 '진지' 구현의 가능근거이며, 동시에 진리도출의 논리적 기반이 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노자의 회의와 부정은 춘추전국시대의 특정한 시대상과 무관하지 않다. 노자는 자신이 살고 있던 시대상을 단적으로 표현하여 "대도가 쇠잔함으로써 인의의 도덕이 나타났고, 지혜를 짜냄으로써 인위적인 위계가 있게 되었다. 가족 사이가 화락하지 못하므로 효자(孝慈)와 같은 윤리를 내세우게 되었고, 국가가 어둡고 흐트러짐으로써 충신의 존재가 두드러지게 되었다"고 하였다. 일반적으로 노자가 살았던 춘추전국시대는 주나라 황실의 쇠미와 제후 군웅의 역쟁각축(力爭角逐)이 그 강도를 더해가는 가운데 흉역이 횡행하고 수탈과 살육이 거침없이 자행되었으며, 기성의 가치체계에 의하여 조성되었던 사회풍조도 패도정치와 빈부격차의 심화, 그리고 각종 무력화된 규범의 선전 내지는 위선적 가치의 구호화 등이 만연되면서 타락의 극을 치닫고 있었다.

 

그래서 이른바 인의예지나 효자충신과 같은 유가의 도덕규범이 당시의 가치규범으로 표방되기도 하였으나 그 본질은 이미 철저히 왜곡되고 굴절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국가적으로는 정치질서의 혼미와 전쟁상태의 가열화만 계속되고 각종의 사회기풍은 문란과 타락의 사태를 빚기만 하였으며 심지어는 가정의 파탄마저도 막을 수 없는 지경이었던 것이다.


노자의 철학사상은 이와 같은 시대상황에서 허위와 가식으로 점철된 세속적 사고방식이나 가치관에 물들어 타락적 작태를 일삼던 인간 자신에 대하여 냉철한 자기 각성을 촉구하는 동시에 인간사회의 근본적 병폐를 치유하고자 하는 문제의식으로부터 전개된 것이다. 즉 노자의 부정적 언사는 세상사람들의 타락적 작태를 두고 한 말이었지 결코 인간의 모든 언어와 행위, 그리고 지식과 욕망을 단절하라는 것은 아니었다. 이러한 점을 상기할 때 노자철학에 있어서 진리도출의 기반이었던 회의와 부정은 단순히 회의만을 위한 회의, 부정만을 위한 부정의 단계에 머물고 마는 것이 아니라 시의성에 적극적으로 부합하면서 보다 고차적인 긍정의 차원으로 승화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노자는 현실의 회의와 부정을 통하여 절대 긍정의 이상세계를 드러내고자 하였던 것이다.


요컨대 노자철학에 있어서 회의와 부정은 언제나 노자가 자신의 철학적 목표를 분명하게 드러내기 위한 하나의 방편으로서 기능할 때 의의가 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노자의 인물과 그의 저서를 오독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노자가 전략적으로 채택한 회의와 부정의 기표를 노자철학의 기의로 혼동함으로써 발생하는 현상이다. 노자의 회의와 부정은 진실한 세계를 드러내기 위한 하나의 방편에 불과하다. 노자가 회의와 부정을 통하여 드러내고자 한 것은 다름 아닌 진실한 세계로서의 '도'이며, 또한 그가 '자연'이라고 본 세계이다.


3. '자연'의 철학적 의미
'자연'은 노자철학에서 매우 중요한 개념이다. 그리고 {노자} 이전의 그 어떠한 문헌에서도 '자연'이라는 두 글자는 나타나지 않는다. 위대유(危大有)는 {도덕진경집의(道德眞經集義)}에서 {도덕경}이 '무위자연'으로 체를 삼았다고 보았고, 양구산(楊龜山)은 {구산집(龜山集)}에서 노자는 '자연'으로써 근본을 삼았다고 하였다. 이들은 모두 노자철학에서 '자연'이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크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

 

그런데 {노자} 안에서 '자연'이라는 말은 불과 다섯 차례 밖에 등장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자철학에서 '자연'의 개념이 차지하는 비중이 대단히 크다는 것은, {노자} 안에서 '자연'의 용어가 직접적으로 나타나지 않았더라도 간접적인 방식으로나마 그 내용이 전체적으로 일관되게 주장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하겠다. 이에 다음에서 '자연'이라는 두 글자가 등장하는 {노자}의 다섯 장의 문구를 예거하여 그 문구를 중심으로 노자의 '자연'이 뜻하는 바가 무엇인지 검토해보기로 한다.

 

제①용례 : "人法地, 地法天, 天法道, 道法自然."(제25장)
"사람은 땅을 본받고, 땅은 하늘을 본받고, 하늘은 도를 본받고, 도는 '스스로 그러함'을 본받는다"

 

제②용례 : "功成事遂, 百姓皆謂我自然."(제17장)
"공이 이루어지고 일이 완수되면, 백성들은 모두 내가 '스스로 그러하다'고 말한다."

 

제③용례 : "希言自然"(제23장)
"말없음은 '스스로 그러하다'."

 

제④용례 : "道之尊, 德之貴, 夫莫之命而常自然."(제51장)
"도를 존중하고 덕을 귀중히 함은 억지로 명령을 받아서 그러한 것이 아니라 언제나 '스스로 그러하다'."

 

제⑤용례 : "以補萬物之自然而不敢爲."(제64장)
"만물의 '스스로 그러함'을 도울 뿐이지 감히 작위하지 않는다."

 

이상에 표현된 다섯 차례의 '자연'의 용례는 모두 현대어의 '자연'이라는 말로 대치되거나 이전될 수 없는 말이다. 왜냐 하면 우리가 쓰고 있는 현대어 속의 '자연'은 서양의 'nature'라는 명사의 번역으로서 그것과 동일한 외연과 내연을 갖는 명사이다. 그러나 노자의 '자연'은 한 자 한 자의 훈 그대로 '스스로 그러하다'라는 기술(description)이지 그것 자체가 명사로 쓰인 적은 없다. 즉 그것 자체로 하나의 실체가 아닌 상황의 묘사에 불과하다.

 

따라서 노자의 '자연'은 'nature'라는 말보다는 'self-so' 'naturally-so' 'what-is-so-of-itself'라는 의미에 가깝다. 한편 진고응(陳鼓應)은 노자의 '자연'을 명사가 아니라 부사(狀詞)라고 보면서, '자연'이 구체적으로 존재하는 어떤 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이와 같다(自己如此)'는 어떤 상태를 형용한 말이라고 주장한다. 그런가 하면 유소감(劉笑敢)은 이와 같은 '자연'에 대한 의미들을 인정하면서도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자연'은 '자'라는 부사가 '연'이란 형용사에 보태진 서술어이다. 그러나 이것이 철학 개념으로 될 때는 명사로도 사용된다. 그리고 {노자}에 표명된 일부의 '자연' 개념은 분명 철학 개념으로 사용되었다. 그러므로 {노자}에서 '자연'은 일반적인 부사 또는 형용사일 뿐만 아니라, 철학 개념으로서 명사이기도 한 것이다. '자연'이 철학 개념으로 사용된 것은 노자가 최초이며, 이것은 노자가 도를 존재의 근원으로 여긴 것과 같은 종류의 중요성을 갖고 있다.

 

그런데 고대 중국의 한어(漢語)에서 품사는 상황에 따라 늘 가변적이기 때문에 '자연'이 과연 형용사인지 부사인지 아니면 명사인지 가름한다는 것은 불필요한 논의일 수도 있다. 그러나 위의 주장들은 모두 한결같이 '자연'이 대상화될 수 없는 것이라는 점에서 오늘날의 '자연계'와는 다른 차원에 있는 것이라는 점만큼은 분명히 밝히고 있다. 문법적인 요소로 보아 위의 다섯 가지 '자연'의 용례 중 적어도 제①용례와 제⑤용례에 나타난 '자연'은 다분히 명사적인 성격을 보이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그것이 대상화된 물상적 자연계라는 의미가 아닌 것만큼은 확실하다. '자연'이란 인위적으로 변화되거나 왜곡되지 않은 것이라는 점에서 '비대상적인 개념'으로서 그 '개념'이라는 것도 '도'와 같이 역시 '개념 아닌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자연'이란 어떤 특정한 대상을 가리키는 개념이 아니라는 말이다. 특히 '자연'의 의미가 '스스로 그러하다'라는 것은 우리에게 어떤 새로운 정보를 제공해 주는 종류의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것은 의미화되어 규정된 개념어라고 볼 수도 없다.

 

그러면 이제 {노자}에 표현된 다섯 가지 '자연'에 관한 용례 중에서 먼저 제①용례인 '도법자연(道法自然)'을 중심으로 노자의 이른바 '자연'이라고 하는 것이 어떠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살펴보도록 하겠다. '도법자연'에 대한 해석은 전통적으로 두 가지의 방법을 들 수 있다.

 

첫째, {노자}를 주석하면서 '자연'을 주지로 삼았던 왕필은 '도법자연'에 대한 주석에서 "도는 '자연'을 어기지 않음으로써 그 본성을 얻는다. '자연'을 법칙으로 한다는 것은 모난 것에서는 모난 것을 법칙으로 하고 둥근 곳에서는 둥근 것을 법칙으로 하여 '자연'에 위배되는 것이 없음을 말한다. 그러므로 '자연'이란 일컬을 게 없는 것을 말하는 것이며 궁극적인 것을 형용하는 말이다"라고 하여 '도' 위에 다시 '자연'이라는 개념을 사용하고 있다. 이러한 자연관은 왕필 이외에 소철(蘇徹)과 위원(魏源)에게서도 발견된다. 즉 소철은 "도는 자연만 같지 못하다"고 하였고, 위원은 "도는 '자연'을 근본으로 한다. …… 도는 천지의 부모이기는 하지만, 자연의 자식이다"라고 하여 왕필이나 소철보다도 더 분명하게 '도'와 '자연'을 부자관계에 비유함으로써 '도' 위에 '자연'의 개념을 배치하고 있다.

 

둘째, '도법자연'에 대하여 하상공(河上公)은 "도의 본성이 '자연'이어서 본받는 바가 없다"고 하였고, 당현종은 "자연을 본받음은 도가 준칙이 되는 것이 자연임을 말하는 것이니, 다시 자연을 모방한다는 말이 아니다"라고 하며, 오징(吳澄)은 "도가 위대한 까닭은 그 자연함에 있다. 그러므로 '법자연'이라 한다. 도의 밖에 따로 자연이 있는 것은 아니다"라고 하였다. 또한 동서업(童書業)은 "노자서 가운데에 이른바 '자연'이라는 말은 '스스로 그러하여 그러하다(自然而然)'는 뜻이며, 이른바 '도법자연'이라는 말은 곧 도의 본질이 자연이라는 것을 말한 것이다"라고 주석하였다. 이러한 해석들은 다 같이 자연의 의미를 '스스로 이와 같다(自己如此)'는 의미로 해석한 것이다.

 

이러한 두 가지 해석 중 우리는 전자의 해석보다는 후자의 해석이 노자의 '자연' 개념에 좀 더 근접해 있다고 생각한다. 왜냐 하면 '자연'은 '도'보다 상위에 있는 궁극적 실체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전자의 해석은 '도'와 '자연'을 서로 별개의 차원으로 보면서 '자연'을 최상급으로 간주하지만, 후자는 '도'와 '자연'을 서로 동등한 것으로 보고 있다는 점이 서로 다르다. 이 점은 노자의 '자연'에 관한 제④용례에서 "도를 존중하고 덕을 귀중히 함은 억지로 명령을 받아서 그러한 것이 아니라 언제나 '스스로 그러하다'"라는 구절로부터도 확인된다. 노자에 있어서 '자연'이란 개념은 '도'의 상급에 위치하고 있다는 의미로서 사용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도의 성격을 보다 구체적으로 표현하기 위한 개념으로 사용되고 있다.

 

진고응은 "소위 '법자연'은 도가 자기의 상황에 의거하여 자기의 내재원인으로써 자신의 존재와 운동을 결정할 뿐이며, 그 밖의 다른 외재적 원인에는 절대로 따르지 않음을 말하는 것이다"라고 하여 "'자연'이라는 말은 결코 구체적인 존재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고 '스스로 그러하다'라고 하는 일종의 상태를 형용한 것이다"라고 주장한다. "사람은 땅을 본받고, 땅은 하늘을 본받고, 하늘은 도를 본받고, 도는 자연을 본받는다(人法地, 地法天, 天法道, 道法自然)"에서 상급은 하급의 법칙이 되지만, '도'는 최상급이기 때문에 다른 어떤 것을 본받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도가 자연을 본받는다'고 한 것은 도가 자기 자신을 본받아 이루어진다는 의미이며, '도'와 '자연'은 별개의 것이 아닌 한 가지일 뿐이라는 말이다. 왜냐 하면 도는 자기 자신이 스스로 근본이 되기 때문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제①용례에 나타난 '도법자연'의 의미는 두 가지 방식으로 해석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왕필의 주에 있어서 '자연'을 어떤 대상을 가리키는 개념으로 볼 수는 없다. 이것은 도의 본체적 의미로서 이해할 수가 있는 것이다. '자연'이라는 말은 어떤 대상을 가리키는 개념이기 이전에 한 대상이 존재하는 형태를 강조해서 쓰이는 말이기 때문이다. 즉, 서술적 의미로서의 '자연'이라는 명사를 사용할 수 있는 것이다. 결국 노자철학에 있어서 '법자연'의 '자연'은 다른 외부적인 것에 의해서 그러한 것이 아닌 '스스로 그러하다'는 방법적 의미와 더불어 상태서술의 명사적 의미를 동시에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노자의 '자연'은 자기 자신 밖에 또 다른 어떤 것도 전제되지 않는 포괄자로서, 그 안에는 일체의 대립이 없고 오직 자발적인 순수생동만이 있을 뿐이라는 것을 형용한 것이다. 그러므로 노자의 '자연'은 한정적 '유위'의 개념을 넘어서 있다. '자연'은 결코 물리적 자연세계가 아니고 물성의 본연을 가리킨다. 따라서 '자연'이라는 말은 현재 통용되는 자연계란 뜻이 아니라 본연, 즉 본래의 모습을 말하는 것이며, 그 내용은 '무위'라고 할 수 있다. 노자는 인류나 자연계나 모두 자연을 법칙으로 삼고 '무위'를 활동의 준칙으로 삼아야 한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도는 절대적이어서 자기 이외의 다른 것을 본받는 바가 없고, 그 자신을 본받는 것이다. 따라서 노자의 '자연'은 모두 특정관념으로 성립하기 이전의 의미, 즉 우리가 사물을 다루는데 있어서 사물이 지닌 그 스스로 그러한 변화성에 좇을 뿐, 어떠한 인위적 틀을 씌워 보아선 안 된다는 서술어로 사용되고 있다. 다시 말하자면 노자의 '자연'은 우리의 사변적 의식기능의 고정화적 성질의 재료가 아니라 우리가 사물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그 스스로 그러한 사실 자체에 의거해야 한다는 방법적 서술어로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자연'에 관한 제①용례를 제외한 나머지 용례들에 나타나 있는 '자연'의 개념은 일반적으로 방법적 서술어로 사용되고 있다. 다만 제⑤용례의 '자연'은 '법자연'의 '자연'처럼 상태서술의 의미와 함께 방법적 의미를 동시에 지니고 있는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엄영봉(嚴靈峯)은 나머지 네 가지 '자연'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분류하여 설명한다. '백성개위아자연(百姓皆謂我自然)'과 '희언자연(希言自然)'의 '자연'은 '소요자재'의 의사로서 'Natural'의 의미이고, '부막지명이상자연(夫莫之命而常自然)'과 '이보만물지자연(以補萬物之自然)'의 '자연'은 '스스로 그러함'의 의미이며 또한 '만물장자화(萬物將自化)'의 '자화'의 의미를 지니는데, 'Spontaneous development' 혹은 'Self transformation'의 뜻에 해당한다. 제①용례를 제외한 나머지 네 가지 종류의 '자연'의 용례에 관해서는 다음 장에서 좀더 자세히 언급하도록 하겠다.

4. '자연'과 '무위'의 상관관계
사마천의 {사기}에 의하면, "이이(노자)는 무위함으로써 스스로 변화하고 청정함으로써 스스로 올바르던 사람이었다"고 한다. 이 때 무위함으로써 스스로 변화한다는 것은 작위함이 없이 자연의 도에 따라 행함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이 이른바 노자의 '무위자연'설이다. 그런데 이 '무위자연'설은 그 동안 일반인들이 노자의 사상을 소극적이라거나 염세적 혹은 출세간적이라고 오해하는 근거가 되었고, 또한 음모사술적이라고 비난하는 바탕이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노자에 있어서 '무위'란 어떠한 강제력이나 특정한 작위를 배제하는 행위를 말한다.

 

그러므로 '무위'로써 행하는 것은 하지 않음이 없는 상도(常道)를 따르는 것이다. 그래서 노자는 "도는 언제나 무위함으로써 하지 않음이 없다(道常無爲而無不爲)"고 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점을 염두에 두고 여기에서는 노자의 '자연'과 '무위'에 대한 고찰을 주로 정치사상적인 측면에 초점을 맞추어 시도해보고자 한다.

 

노자가 말하는 제②용례의 '백성개위아자연(百姓皆謂我自然)'(제17장)은 정부의 작위로써 백성에 간여하는 것은 상책이 될 수가 없고, 정부의 직책은 인민을 보조하는 데에 있는 것이라고 하여 자연방임을 주장하는 표현이다. 가장 훌륭한 위정자는 하늘과 땅이 만물을 말없이 그리고 인위적으로 작용하는 일이 없이 생겨나게 하고 자라나게 하듯이 '무위'와 '자연'의 도에 따라 백성들을 다스리는 것이다. "무위로써 하면 다스려지지 않음이 없다." 그러므로 이것은 백성이 그 군주의 은택이라는 것은 알지 못한다는 의미이다.

 

백성이 자유로울 수 있는 이유는 그 누구의 은총도 아니며 오직 백성 스스로가 '자연'하기 때문인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노자가 같은 장(제17장)에서 이야기한 통치자의 존재가 있다는 것조차 백성들이 알지 못할 때 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정치를 인위적으로 처결하는 행위는 상급의 정치일 수 없다는 것이 노자의 주장이다.

 

그리고 제③용례의 '희언자연(希言自然)'(제23장)에 있어서 '희언'이란 '자연'의 도에 부합하는 것이다. 그래서 노자는 "말이 많으면 자주 막히는 법이니, 풀무처럼 속을 비워 지킴만 같지 못하다"라고 한 것이다. 이때 '희언'의 '언'은 정치철학적으로 '성교법령(聲敎法令)'을 가리키는 것으로 '희언'은 정치적 법령을 더하여 시행하지 않음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무위의 일을 처리하고 말없는 가르침을 행한다"는 '불언지교(不言之敎)'와도 그 뜻이 서로 부합한다. 그러므로 '희언'은 어떠한 흠도 찾을 수 없는 온전한 언어이며, 우리의 감성과 이성을 포월하는 언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인간에 의하여 어떠한 작위도 개입되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언어이다. 만일 법령이 번잡하게 많아서 마치 소낙비와 폭풍과 같다면 '자연'의 연고에 맞지 않아서 오래 갈 수가 없는 것이다. 법령이란 일차적으로 사회적 혼란을 금지하는 기능을 담당하기도 하지만, 그런 반면에 일단 법령이 성문화되면 그것을 교묘히 뚫고 빠져나가는 지모와 사술이 생겨나게 마련이다. 따라서 일단 법령이 생겨나면 그 법령을 빠져나가는 자가 생겨나기 때문에 또한 이것을 규제하기 위해 또 다른 법령을 만들어야만 하는 악순환이 계속될 수밖에 없다.

 

이렇게 되면 결국 세상은 온통 법망이요, 산다는 것은 모두 범법이 되는 상황이 야기된다. 그래서 노자는 법령이라는 것도 결국은 사회적 악순환의 한 고리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고 비판한 것이다. 그렇다고 현실적인 문제들이 법령을 없애는 행위만으로 모두 해결되지는 않을 것이다.

 

노자는 법령을 통한 사회적, 정치적, 제도적, 법률적 측면의 외부적 해결책이 중요한 것이라기보다는 보다 근원적인 문제를 우리가 잊고 있다는 것을 환기시킨다. 노자는 법령만으로는 현실적인 문제의 해결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정하라는 것이다. 문제의 해결은 보다 내면적인 곳에 있다. 그것은 도를 존중하고 덕을 귀하게 여기는 종류의 것이다. 그런데 노자에게 있어서 도가 존중을 받고 덕이 진귀하게 여겨짐은, 곧 그것이 간섭하지 않고 만물에 있어서 '자연'에 따랐기 때문이다.

 

'자연'의 제④용례인 '부막지명이상자연(夫莫之命而常自然)'(제51장)과 제⑤용례인 '이보만물지자연이불감위(以輔萬物之自然而不敢爲)'(제64장)의 뜻은 도가 만물에 대하여 보조적 입장에 있다는 측면에서 서로 통한다. '보조한다'고 하는 것은 만물이 스스로의 본연적 상태에 따라서 전개되는 것을 단지 '자연'에 맡길 뿐 의도적인 목적의식을 가지고 만물의 전개에 관여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이것은 곧 '보조한다'는 것이 '유위'의 범주에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무위'의 범주에 해당한다는 의미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훌륭한 정치가는 백성들의 자아발전을 보조하고, 제약하지는 않는다.

 

노자는 '무위'를 통하여 이상정치를 구현하고자 하지만, 그렇다고 그가 군주나 위정자를 부정한 것은 아니다. 노자가 말하는 '무위'의 정치는 군주나 위정자가 그 자리에 있으면서 일체의 대립적인 모든 것들을 포월하여 시대나 장소의 변화에 대응하는 정치를 말한다. 또한 이것은 사물을 그 '무'의 사이, '기미(機微)'의 사이에서 처리하는 정치이며, 무심·허심으로 행하는 정치인 것이다.

 

이러한 '무위'의 정치를 이룰 수 있는 사람이 바로 성인이다. 그래서 노자는 "성인은 '고집스러운 마음(常心)'이 없이 백성의 마음으로 자기의 마음을 삼는다"고 한다. 이러한 성인은 작위하지 않으므로 실패함이 없고, 집착하지 않으므로 잃는 일이 없다. 또한 성인은 헛된 욕망을 갖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에 얻기 힘든 보화를 귀하게 여기지 않고, 세상 사람들이 배우지 않는 것을 배워서 그들이 알지 못하고 지나쳤던 도에 복귀한다. 그리하여 성인은 만물의 스스로 그러함을 도울 뿐 감히 작위하지 않는 것이다.

 

노자는 '자연·무위'의 개념을 통하여 인격적 의지를 지닌 것으로 생각되어 온 전통적 천도관에 대하여 부정한다. 그래서 노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천지는 어질지 않아서 만물을 풀강아지로 삼고, 성인은 어질지 않아서 백성을 풀강아지로 삼는다." 이 때 '어질지 않다'는 것은 인간답지 못하다는 말이고, 그것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인간과 동류가 아니라는 뜻이다.

 

그리고 인간답지 못하다는 말은 일체의 정의적(情誼的) 태도가 배제되어 있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천지는 편사적이지 않아서 만물의 성장에 의도적으로 관여하지 않으며, 성인 역시 천도를 본받아 편사적인 사랑으로 백성을 대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이것은 바로 '자연·무위'에 대한 설명에 다름 아니다. '자연·무위'한 태도에는 대상을 특별히 대한다는 의식이 전적으로 배제된다. 그러므로 대상을 자기의 주관적 목적 하에 둠으로써 간섭하거나 조작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우리에게 '아주 특별한 의식'이 있다는 것은 우리의 마음이 일방향적으로 편벽되게 기울어져 있다는 말이므로, 이것은 곧 주객이 판연하게 갈라선 세계의 분열을 의미한다고 보아야 한다. 따라서 천지는 만물을 위하여, 성인은 백성을 위하여 존재한다는 발상의 목적론적 사고는 노자철학에 부적절한 것일 수밖에 없다.

 

한편 진고응은 '자연·무위'에 대하여 '자연'이 천지의 운행상태에 대하여 말한 것이라면, '무위'는 특히 사람의 활동상황에 대하여 말한 것이라고 한다. '자연'과 '무위'는 둘이면서 또한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이 점은 노자 자신이 '무위이무불위(無爲而無不爲)'라고 강조한 언구 속에서 보다 분명하게 드러난다.

 

왜냐 하면 노자의 '자연'은 곧 '무위'이기 때문이다. 이때 '무위'의 의미는 일체의 '인위적 조작의 결여(無僞)'를 뜻한다. 그러므로 노자는 "도는 항상 '무위'함으로써 하지 않음이 없다"고 한다. 노자는 이 '무위'의 동기는 '유위'의 정상에서 나온다고 제창한다. 특히 노자 당시의 정치적 상황 아래에서 '유위'란 통치자가 자기 마음대로 하여 자기의 욕망을 확장시킨다는 의미를 지닌다. 이러한 한에서 '유위'는 인위적인 조작을 가져오는 폐단이다. 노자는 '유위'의 정치적 해독을 중시하고, 이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천하에 금령이 많으면 백성들은 더욱 가난해지고, …… 법령이 점점 밝아질수록 도적들이 많이 나온다." "백성들이 굶주리는 것은 그 위정자가 세금을 많이 거두기 때문에 굶주리게 되는 것이다. 백성들을 다스리기 어려운 것은 그 위정자가 인위적으로 다스리기 때문이다."

 

노자는 이러한 '유위'의 해로움을 제거하기 위하여 정치를 함에 있어서도 '무위'로써 할 것을 주장한다. 노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내가 '무위'하면 백성들이 저절로 되고, 내가 고요함을 좋아하면 백성들이 저절로 바르게 되고, 내가 일삼음이 없으면 백성들이 저절로 부유해지고, 내가 욕망이 없으면 백성들이 저절로 소박해진다." 그래서 노자는 "말없는 가르침과 '무위'의 이로움은 천하에 이에 미칠 것이 없다"고까지 한 것이다. 이처럼 노자사상의 종지와 철학적 입론의 가장 큰 동기는 '무위'사상을 발휘하는데 있었다고도 볼 수 있다. 심지어는 그의 형이상학 또한 이 '무위'사상에 근거를 두고 있는 것이다. 노자의 '무위'는 일체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것은 편파적인 작위가 배제된 것이라는 의미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런데 이러한 '무위'사상은 그 동안 아주 커다란 오해를 낳았었고, '무위이무불위'의 문구는 많은 사람들에게 노자의 의사는 표면상으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어두운 속에서 모든 것을 행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갖게 하였다. 이러한 오해는 노자를 음모가로까지 생각하게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노자는 절대로 음모가가 아니며, 그의 저서 속에도 음모사상적인 경향을 보이는 것은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이러한 오해는 노자철학 술어의 특유한 의의를 명확하게 이해하지 못하고 있음에 전적으로 기인한다. '무위'는 '처사'하는 일종의 방법이며, '무불위'는 '무위'가 드러내는 효과인 것이다. 결국 '무위'란 절대적이며 무차별적인 '자연'의 상도에 따라서 망령됨이 없이 행위하는 것이다. 노자는 '무위'를 통하여 드러나는 세계를 '자연'이라고 본다. 따라서 노자가 '무위'를 통하여 비판하는 것은 일체의 인간 중심적인 분별이다.

 

노자의 '무위'란 모든 인간 중심적인 분별을 더 이상 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노자가 말하는 '무위'는 지나친 인간 중심의 대립적 또는 편파적 작위가 지양된 대립과 갈등을 초월한 '무불위'적인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그래서 노자는 '무위이무불위'라고 한 것이다. 노자가 '자연·무위'라 하여 함께 일컫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하겠다.

5. 노자적 '자연'의 현재적 의의
이상에서 우리는 노자철학에 등장하는 '자연'의 의미가 일반적으로 우리가 말하는 '자연'과는 다르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일상적으로 우리가 인식하고 있는 '자연'이란 인간 외적 경험 대상의 총체로서 다분히 기계론적이고 목적론적이며, 물리적인 자연세계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지만, 노자에 있어서의 '자연'은 본연한 세계의 상태를 형용한 '스스로 그러하다'는 의미를 지니는 '그 자체로서의 자연'의 의미였다. 즉 노자에 있어서의 '자연'은 인간의 의식에 대상화되어 의미화되기 이전의 세계 자신이 지닌 존재상태를 형용한 말에 지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노자적 '자연'의 의미가 우리에게 어렵게 인식되고, 제대로 인식되지 못하는 것은 우리가 서구적 자연관의 안경을 끼고 노자의 '자연'을 읽어내려고 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서구적 자연관은 무엇보다 '자연'과 '인간'의 이분법을 토대로 한다는 점이 특징일 것이다. 우리는 그 '이분법적 의식(dualistic consciousness)' 위에서 자연 정복적 존재로 나타나는 인간을 만난다. 이 때 '자연'은 상대적으로 인간에 의하여 예속되고 지배되는 존재이다. 이러한 점에서 서구의 역사는 '자연 정복'의 역사라고 말해질 수 있는 종류의 것이다. 서구 역사에 있어서 '자연 정복'의 관념은 일찍이 종교적 교리에 그 근거를 마련한 후 과학의 힘을 절대적으로 신봉하는 일종의 '과학주의(scientism)'에 의하여 결정적인 힘을 갖게 되었다.

 

'과학주의'는 근대 자연과학의 발전과 더불어 나타나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더 한층 강하게 분열시켰고, 급기야 과학의 권위를 빌어 과학의 미래를 긍정적으로 낙관하는 방식의 '과학적 진보주의'를 창출하기도 하였다. 진보란 과학의 고도화로 이루어지며 이것은 부정될 수 없다는 신념이 그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신념을 '진보의 이데올로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신념에 의한다면, 자연은 항상 과학의 영역 안으로 수단화되고 도구화되어 수용될 성질의 부산물 이외의 다른 것으로는 평가되지 못한다. 이러한 서구적 자연관은 필연적으로 '자연의 파괴'를 예기하고 있다. 서구적 자연관의 중심에는 '기계론적 자연관'과 '도구적 자연관' 내지는 '인간 중심적 세계관'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 때 '인간 중심적 세계관'은 항상 '유위'를 통한 '작위성'의 원리를 근거로 삼는다는 점에서 노자적 의미의 '무위적 자연'과는 그 궤를 달리한다.

 

그런데 현대인들은 인간이 진실로 실현해야 할 가치가 무엇인가에 대해 근원적인 반성 없이, 물량이나 기술에 의한 편리한 생활이 곧 행복이라는 막연한 믿음으로 자연의 생태계를 계속해서 파괴하는 방향으로 돌진하고 있다. 이런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인간 의식의 근원적 전환이 필요하다. 즉 현재의 서구적 자연관, 예컨대 '기계론적 자연관'과 '도구적 자연관' 내지는 '인간 중심적 자연관'으로부터의 새로운 패러다임의 전환이 요청되는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노자의 자연관은 서구적 자연관과 이로부터 비롯된 현대 과학 문명의 한계에 대하여 나름대로 비판적 대안을 제시할 수 있다고 본다. 왜냐 하면 과학 문명으로 대표되는 현대 문명이 가져 온 자연 환경의 파괴, 인간 삶의 황폐화, 정치 사회적 모순 등은 어떤 면에서 분명히 노자가 주장한 대로 자연적인 것을 거부하고 인위적인 것만을 추구한 데서 생겨난 부작용이기 때문이다.

 

노자는 인간이 세계의 주체로 등장함으로써 발생하는 일련의 사태들에 대하여 경고한다. 그 중에서도 노자는 인간이 세계의 주체로 등장하면서 함께 수반하는 문명적인 요인에 대하여 경계한다. 문명적인 것은 과학과 기술의 힘에 의존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바꾸어 말하면 문명은 과학과 기술의 지지를 받고 창출되는 것이다. 그런데 문명이 발달할수록 자연의 본질적 권능은 문명의 힘에 의하여 오히려 더 은폐되고 무력화된다. 이로부터 문명과 야만이라는 전형적인 서구적 이분법이 제기되기도 한다. 그리고 이러한 서구적 이분법에서는 스스로 문명적 범주의 영역을 차지했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이 항상 야만적 범주에 속한다고 자신들이 규정한 타방의 사람들을 일방적으로 비난하고, 자연을 야만과 동일하게 취급하는 독단을 범한다.

 

서구의 역사는 오늘날까지도 은연중에 이러한 사유를 자체적으로 반영하여 기술하고 있다. 그리고 서구적 역사에서 문명의 영역은 대체적으로 '서양적인 것'임에 반하여 자연은 '동양적인 것'이라고 표상된다. 이러한 사유의 전형을 우리는 '오리엔탈리즘(Orientalism)'이라고 부른다. 지금까지의 서구적 자연관은 역사적으로 이러한 문명과 야만의 이분법에 토대를 둔 것이었다 하더라도 과언이 아닐 정도인 것이다.

 

노자의 입장에서 본다면 문명이라는 것 자체는 이미 인위적인 것이며, 그것은 자연의 실재가 아닌 허망한 것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노자는 인류가 이룩한 문명을 전면적으로 비판한다. 노자는 문명이 인간 중심주의적 세계관으로부터 비롯되는 비자연성과 비생명성에 기초하여 형성된다고 본다. 사실상 문명이 보다 적극적으로 자신의 범주를 자연의 범주로 확대시켜 여기에 자신을 이식한 후 자연을 보호하면 할수록 자연은 역설적이게도 더욱 더 가혹하게 문명에 의하여 제압된다.

 

이것은 인간이 거대한 자연으로부터 개개의 표본을 선택하고 이를 제어할 뿐 아니라 완전히 정복하려는 야심 때문에 빚어지는 현상이다. 그러나 노자는 우리에게 자연에 대한 '완전 정복'의 꿈을 버리라고 한다. 그래서 문명 이전의 본래의 자리인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것이다. 문명의 요소가 배제될 때 남는 것은 '자연'이며, 노자에게 있어서 이것은 다름 아닌 본원의 세계로서 '도'의 세계이다. 인간은 세계의 중심일 수 없다.

 

인간이 존재세계를 자신의 이기적 욕망을 위하여 대상적 목적으로 정립하거나 수단시하는 것은 독단이며 오만일 뿐이다. 그리고 인간의 오만과 독단은 '그 자체로서의 자연'의 기준에서 볼 때 자연을 초과한 '욕망의 과잉'으로부터 발생하는 일종의 관념적 폭력이다. 그래서 노자는 '자연'이 그 자체로서 '형평의 질서'를 유지하는 종류의 것임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일상적으로 보유하고 있는 '욕망의 과잉'을 해제할 방안으로 역설적이게도 '결여된 욕망'의 족함을 제시한다.

 

인간이 '자연'을 대하는 관념적 폭력이 그만큼 극에 달했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노자는 '자족(自足)'할 줄 모르는 위험에 대하여 경고한다. "화로 말하면 자족할 줄 모르는 것보다 더 큰 것이 없다. 허물로 치면 갖고자 하는 욕망보다 더 큰 것이 없다. 그러므로 자족할 줄 아는 데서 얻는 족함만이 영원한 족함이다."

 

사실상 '자연'에 대하여 오만과 독단의 절대적 폭력을 보유하고 있는 현대인은 모든 욕망의 충족보다는 '자족'의 족함을 아는 것이 보다 더 소망스러운 덕목일 것이다. 인간이 자신을 위한 특정한 목적의식을 버리고 세계의 중심자로서의 역할을 포기함으로써 '자연'으로 환원될 때 주체와 대상의 갈등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된다. 주체와 대상의 간극 자체가 사라져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주객의 갈등을 해체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인간이 자기 중심주의, 저차원적 이기주의, 자의식 등으로부터 벗어나 자기를 비우고 자기 자신을 잊으며 자기의 욕망을 부정하는 등의 '무위'의 논리에 따라 행위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논의를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노자의 '그 자체로서의 자연'이 인간 중심주의적 세계관을 근원으로 삼고 있는 서구적 자연관에 대한 하나의 대안적 패러다임으로서도 전연 손색이 없는 철학적 사유물이었음을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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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文抄錄]
關于老子的自然觀
李 鍾 晟(忠南大)
對于老子哲學來說, 最能說明其基本立場的無疑是'自然'和'無爲'這兩 槪念. 本文的目的在于通過考察老子哲學思想中的有關'自然'的哲學含義, 進而再考察'自然'和'無爲'之間的相互聯關性.
老子的{道德經}中, '自然'二字共出現五次, 其內容如下.
① "人法地, 地法天, 天法道, 道法自然."(第二十五章)
② "功成事遂, 百姓皆謂我自然."(第十七章)
③ "希言自然"(第二十三章)
④ "道之尊, 德之貴, 夫莫之命而常自然."(第五十一章)
⑤ "以補萬物之自然而不敢爲."(第六十四章)
作者在本文中, 首先通過對上述五 句子的分析, 揭示了老子所說的'自然'的含義, 幷非如我們在日常生活中所說的'自然'. 我們所認識的'自然', 指的是脫離人的經驗之外的對象之總體, 大體上來說, 具有機械論, 目的論的物理的自然世界之含義. 然而老子所說的'自然'則有着形容本然世界之狀態是'自己如此'的含義, 這一點通過對上述的五 句子的分析而可以得到確認. 則老子所說的'自然'只不過是用來形容被人的意識對象化, 意味化以前的世界自身原來的存在狀態. 不過, 老子所說的這種'自然'本身必然內含着'無爲'的槪念. 所謂的'無爲'指的是排除任何强制力或者是特定的作爲的. 老子所說的'無爲'是'處事'的一種方法, 而'自然'是'無爲'呈現出來的一種效果. 老子通過'無爲'來批判的是一切以人爲中心的分別意識. 所以老子所說的'無爲'思想,  强調的是不要以人爲中心來分別自他與所有的事物. 立足于這一點, 本文對老子的'無爲'槪念從政治哲學的角度作了批判性的考察, 從而得出老子所向往的理想政治的哲學根據就是'自然無爲'的結論.
總之, 老子的'自然無爲'的哲學思想, 對于生活在現代社會中的我們來說, 亦有着重要的啓示作用. 對于自然界持一種傲慢與獨斷態度, 幷且保有强大的征服能力的現代人類來說, 老子的'自然無爲'的思想則在勸說我們應當學會'自足'. 從這種角度來看, 老子的'自然無爲'的思想, 對于建立在以人爲中心的世界觀基礎之上的西歐的自然觀可以起到批判警醒的作用.
關鍵詞 : 老子, 道, 自然, 無爲, 否定