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노광우의 영화 사회학

醉月 2013. 9. 10. 01:30

정의와 불의, 그 사이의 어딘가

한국형 필름 누아르 신세계 영화 ‘신세계’의 한 장면.

 

영화 ‘신세계’(박훈정·2013)는 최근 300만 관객을 돌파했다. ‘신세계’는 흥행뿐만 아니라 작품성에서도 주목받을 만하다. 이 영화는 ‘부당거래’(류승완·2010)와 ‘특수본’(황병국·2011)을 잇는 2010년대 한국 필름 누아르(film noir)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다.

 

필름 누아르는 직역하면 ‘암흑의 영화’라는 의미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프랑스 영화비평가가 만들어낸 용어다. 이 시기 미국 영화가 승전의 기쁨과 희망찬 분위기를 연출하기보다는 범죄, 음모, 무기력한 남성, 위험한 여성(팜파탈), 음울한 사회를 주로 묘사한 데서 나왔다.

 

필름 누아르는 범죄사건을 다룬다는 점에서 범죄영화(crime film), 조폭영화(gangster film)와 비슷한 느낌을 주기도 한다. 그런데 범죄영화는 선인과 악인의 구분이 비교적 분명한 경우가 많다. 물론 주인공은 대체로 선인의 범주에 속한다. 반면 필름 누아르의 주인공은 대개 내면에 선과 악의 속성을 함께 가지고 있다. 이런 점에서 필름 누아르는 범죄영화와 구분된다.

 

조폭영화의 경우 주로 남자 주인공이 범죄조직 내에서 승승장구하다 결국 파멸에 이른다는 이야기 구조로 되어 있다. 이에 비해 필름 누아르의 주요 인물들은 반드시 범죄조직에 속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미스터리를 풀어가는 탐정이나 범죄를 수사하는 경찰의 모습으로 자주 등장한다.

 

무엇보다도 필름 누아르가 다른 부류의 영화들과 구별되는 점은 이야기의 구조나 주요 인물의 기능보다는 냉소적이고 칙칙하며 도덕적으로 타락한 분위기에 있다. 또한 조폭영화가 깡패들끼리의 집단 난투극이나 총격전 등 시각적인 볼거리를 주로 내세우는 데 비해 필름 누아르는 인물 간 심리적 갈등에서 발생하는 팽팽한 긴장감을 부각한다.

 

‘신세계’는 필름 누아르의 이러한 문법을 충실히 따르는 편이다. 특히 좋은 경찰, 나쁜 경찰에 관한 묘사가 탁월하다. 많은 사람이 ‘굿캅, 배드캅(good cop, bad cop) 신드롬’을 알고 있다. 경찰은 우리 사회에서 애증이 교차하는 존재다. 어떤 때는 정의, 선, 약자 보호를 상징하는 좋은 경찰로 다가오기도 하고 또 어떤 때엔 불의, 부패, 위선, 개인 파괴를 상징하는 나쁜 경찰로 비치기도 한다.

 

수평적 갈등, 수직적 갈등

‘신세계’는 ‘골드문’이라는 범죄단체에 침투한 경찰 잠입요원 이자성(이정재 분)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간다. 골드문은 여러 폭력단체를 규합한 뒤 사업 다각화와 양성화를 통해 중견 그룹의 외양으로 성장한 대형 범죄조직이다. 어느 날 골드문의 총수 석동출(이경영 분)이 사망한다. 이후 후계자 자리를 놓고 골드문 내 최대 계파의 보스인 이중구(박성웅 분)와 두 번째 계파인 화교 폭력조직의 보스 정청(황정민 분)이 권력 암투를 벌인다. 경찰은 강 과장(최민식 분)의 발의로 ‘신세계 프로젝트’를 발동한다. 이 프로젝트는 골드문 수장의 공백 상태를 골드문 일망타진의 기회로 삼으려는 기획이다.

 

‘신세계’는 홍콩 영화 ‘무간도’와 설정이 비슷하다. 다만 ‘무간도’는 폭력조직과 경찰에 상대편 공작원들이 동시에 잠입해 활동하는 점에서 ‘신세계’와 다르다. 또한 ‘신세계’는 폭력조직에 잠입한 경찰 요원(이자성)이 주어진 경찰 임무만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심리적 갈등을 겪는 것으로 묘사한다.

 

즉, ‘신세계’는 두 개의 갈등 축으로 이뤄져 있다. 먼저 골드문 내에서 이중구와 정청 간의 권력투쟁이 수평적인 갈등 축을 이룬다. 이어 경찰 내에서 상사인 강 과장과 그 수하인 이자성이 불협화음을 내면서 수직적인 갈등 축을 형성한다. 이로 인해 영화는 ‘무간도’에 비해 훨씬 입체감을 준다.

 

이 영화에서 조직의 보스 자리를 놓고 벌이는 권력투쟁은 외양만 다를 뿐, 왕조의 왕위계승 다툼이나 대기업의 2세간 경영권 다툼과 유사한 맥락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경우에는 경쟁하는 두 인물의 서로 다른 개성을 대조시킴으로써 긴장감을 극대화할 수 있다.

‘신세계’에서도 이중구와 정청의 대립 양상은 이들의 성격 차이를 통해 강화된다. 황정민이 연기하는 정청은 전라도 사투리와 중국어를 입에 달고 사는 다혈질이다. 허세로 가득 차 있으면서도 주도면밀한 면을 보여준다. 박성웅이 연기한 이중구는 상대적으로 차갑고 말수가 적다. 평소엔 조용하지만 어느 순간 권력욕을 강하게 드러내는 식으로 형상화해 있다.

 

반면 또 다른 갈등축인 강 과장과 이자성 간 성격 대립은 그만큼 두드러져 보이지 않는다. 이로 인해 최민식과 이정재라는 스타 연기자가 각각 이 두 인물을 맡았음에도 두 인물 간 수직적 갈등 축은 상대적으로 약해 보인다. 영화에서 이자성은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화자 및 관찰자 역할을 맡았다. 그러나 이자성은 정청과 이중구의 갈등구도에서 피동적 역할만을 수행한다.

   

영웅본색類 형제애

또 한 가지 주목할 만한 점은 정청과 이자성이 여수 출신의 화교라는 점이다. 이러한 지리적, 민족적 동질성은 범죄인과 경찰의 경계를 허물어뜨린다. 이는 한국 사회에서 충분히 있을 법한 일로 관객에게 받아들여진다. 정청은 이자성이 경찰 요원임을 알아차린 뒤에도 이자성을 처단하지 않고 비호한다. 자신과 같은 여수 출신 화교라는 이유만으로 이자성을 동생처럼 아낀다. 사회적으로 열세에 놓인 이들의 결속력이 다른 집단에 비해 남다르다는 것으로 어렴풋이 설명된다. 이와 대비되는 맥락에서 강 과장은 이자성에게 경찰임을 끊임없이 상기시킨다. 또한 이자성을 끊임없이 감시하고 소외시킨다.

 

주윤발, 적룡, 장국영이 나온 ‘영웅본색 1’(오우삼·1986)과 ‘영웅본색 2’(오우삼·1987)도 폭력조직과 경찰로 처지가 갈린 진짜 형제간 형제애, 폭력 조직 내 의형제간 형제애를 다뤘다. 정청과 이자성이 활동하는 2010년대 서울이나 소마(주윤발)와 아호(적룡)가 결의하는 1980년대 홍콩은 자본주의의 고도화와 세계화로 개인의 소외와 좌절이 깊어지는 공간이다. 이런 상황을 타개할 대안이 보이지 않을 경우 개인은 형제애라는 가장 원초적인 정서에 입각한 인간관계에 더 의존한다는 게 이들 영화가 주는 메시지일 것이다. ‘신세계’의 정청-이자성과 ‘영웅본색’의 소마-아호는 비슷한 상황에 처해 어느 한쪽이 다른 쪽을 위해 희생하고 죽어가는 비슷한 결말을 보여준다.

 

이자성의 소외와 불안은 바둑알과 인사보고서라는 소품을 통해 극명하게 드러난다. 이자성은 바둑 교습을 받는다는 핑계로 여자경찰 신우(송지효 분)와 접선한다. 이때 바둑알은 누군가에 의해 어디에 놓여진다는 의미에서 이자성의 피동성을 상징한다. 아울러 정청은 자신의 금고 안에 경찰이 작성한 이자성의 인사보고서를 감춰두고 있다. 이 설정은 이자성이 언제든 제거될 수 있는 매우 불안한 삶을 살아가는 존재라는 점을 상징한다. ‘범죄와의 전쟁’에서 최익현(최민식 분)이 지니고 다니는 총알 없는 리볼버 권총은 허세로 출세한 주인공의 정체성을 보여준다. 이와 비슷한 방식으로 ‘신세계’는 바둑알과 인사보고서 소품들로 주인공의 무기력함을 형상화했다.

 

무기력한 삶

영화는 결국 정청이 죽고 이중구도 제거된 뒤 이자성이 골드문의 보스가 되는 것으로 끝난다. 흔히 주인공이 최고의 자리에 오르면 해피엔딩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경우는 해피엔딩이라고 할 수 없다. 결국 경찰의 범죄소탕작전이 실패했음을 의미한다. 또한 경찰관이 정의의 세계와 불의의 세계를 오가다가 불의의 세계로 귀속되고 만 것이다.

영화는 에필로그 격으로 이자성이 어떻게 강 과장에 의해 골드문 잠입요원으로 선출되는지를 보여준다. 이는 사실 선출이 아니라 경찰조직으로부터 버림받은 것에 더 가까운 일이라는 점이 드러난다. 반면 이자성이 정청과 공유한 고향 여수는 티 없이 순수하고 아름다운 공간으로 묘사된다.

이렇게 ‘신세계’는 한 인간의 삶이란 경찰과 범죄인, 정의와 불의를 오가는 음울하고 무기력하기 그지없는 어떤 것이라는 점을 암시하고 있다.

 

할리우드는 주전파(主戰派)일까?

 

미국의 아카데미 영화상 시상식은 세계적으로 관심을 모으는 행사다. 지난 2월 열린 2012년 아카데미 시상식에선 ‘아르고’(Argo·벤 애플렉 감독)가 작품상을 받았다. 아카데미 작품상을 받는 영화는 일반적으로 그전에 몇 개 부문에서 수상하고 마지막에 작품상을 받는다. 대체로 훌륭한 시나리오에 바탕을 두고 제작된다는 점을 감안하면 오리지널 각본 또는 각색상을 받은 작품이 작품상도 받을 가능성이 높다. ‘아르고’도 각색상과 편집상을 받은 뒤 작품상을 받았다.

 

참전과 작품상의 상관관계

그러나 역대 작품상 수상작이 대개 5, 6관왕인 반면 아르고는 3관왕에 그쳤다. 이는 ‘아르고’가 기술적으로, 예술적으로 그리 뛰어난 작품은 아니라는 의미다. 이런 작품이 작품상을 수상하는 경우는 충분히 정치적 해석이 가능하다. 해당 작품이 미국 사회의 정치적, 사회적 경향성에 편승한 덕에 수상의 영예를 누리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미국 사회의 정치적, 사회적 경향성 중 대표적인 것이 미국이 벌이는 전쟁 내지 무력사용에 대한 지지 여론이다. ‘아르고’는 이란 주재 미국대사관 인질 구출작전을 다뤘다. 9·11테러 이후 이라크, 아프가니스탄에 이어 이란이 미국의 다음 전쟁 타깃이 될 것이라는 예측이 나오는 가운데 이러한 영화가 제작됐고 작품상을 받은 것이다.

 

실제로 역대 아카데미상 수상작 목록을 보면 미국이 개입한 전쟁과 작품상이 일정한 관계를 맺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941년 12월 일본의 진주만 기습 이후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 그러자 1942년 독일의 공격을 견디는 영국인들을 우호적으로 그린 ‘미니버 부인’(윌리엄 와일러 감독)이, 1943년 유럽에서의 로맨스로 시작해서 결국 항독(抗獨) 레지스탕스 운동으로 주인공의 입장을 정리하는 ‘카사블랑카’(마이클 커티즈 감독)가 아카데미 작품상을 받았다.

 

제2차 세계대전 기간 독일이 점령한 유럽 지역과 일본이 점령한 아시아 지역에선 미국 영화의 수입이 불허됐다. 할리우드 처지에선 해외시장의 대부분을 잃은 셈이다. 할리우드가 2차대전 기간 중 미국 정부의 주전론(主戰論)에 입각한 영화를 많이 제작한 데에는 판로 회복이라는 상업적 이유도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2차대전이 끝난 후 평화의 시기가 찾아오자 아카데미상은 태도를 바꾼다. 1953년과 1957년 각각 반전론을 펴거나 군에 회의적인 시선을 담은 ‘지상에서 영원으로’(프레드 진네만 감독)와 ‘콰이강의 다리’(데이비드 린 감독)에게 작품상을 줬다.

이후 미국이 베트남전쟁에 돌입하자 아카데미상은 다시 주전론을 주창하는 영화 ‘패튼’(프랭클린 샤프너 감독)에 작품상(1970)을 안겼다. 베트남전쟁이 끝난 뒤엔 다시 반전론으로 돌아서 1978년과 1986년 각각 ‘디어 헌터’(마이클 치미노 감독)와 ‘플래툰’(올리버 스톤 감독)이 작품상을 받았다.

 

할리우드의 이러한 경향은 미국이 1991년 제1차 이라크전쟁, 2001년 9·11테러, 2001년 아프가니스탄전쟁, 2003년 제2차 이라크전쟁을 치르는 과정에서 더 견고해졌다. 다만 최근 들어선 반전론에 입각한 작품들이 과거에 비해 좀 더 자주 발표되고 있다. 그 이유 중 하나는 미국 내에서 전쟁 찬반 여론이 일상적으로 갈리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제2차 세계대전이나 베트남전쟁 시기에 비해 할리우드 영화산업이 훨씬 세계화했고, 해외시장을 잃을 우려가 사라졌으며, 굳이 미국 정부에 의존할 까닭이 없어졌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지금도 할리우드와 아카데미상의 기본적 기조는 ‘미국 정부가 수행하는 전쟁에 대한 우호적 태도의 견지’라고 할 수 있다.

 

反美엔 무관심

 

이라크전쟁이 정리되는 시점인 2009년 이라크전쟁을 다룬 ‘허트 로커’(캐스린 비글로 감독)가 작품상을 받았다. ‘허트 로커’는 이라크 내 테러가 일상적으로 발생하는 지역에서 폭발물 제거라는 위험천만한 작업을 하는 미군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전투의 격렬함은 마약과 같아서 종종 빠져나올 수 없을 정도로 중독된다”라는 내용을 남겼다. 이 작품은 이듬해 전 세계적으로 ‘3D 열풍’을 일으킨 영화 ‘아바타’와 작품상을 놓고 경합했다. 미국이 참전한 이라크전쟁을 다뤘다는 점이 당대의 영화인 아바타를 누른 요인 중 하나일 것이다.

 

영화 ‘허트 로커’의 한 장면.

 

이번 아카데미 시상식에서는 ‘아르고’와 ‘제로 다크 서티’(캐스린 비글로 감독)가 작품상 후보에 올랐는데 두 영화 모두 미국의 전쟁 영웅담을 그렸다. 우연의 일치라기보다는 아카데미상의 전략적 선택으로 보는 편이 더 합리적인 판단인지 모른다.

‘제로 다크 서티’는 9·11테러의 주범이자 ‘미국의 원수’인 오사마 빈 라덴의 행적을 추적하는 CIA 여성 정보원의 무용담으로 풀어간다. 캐스린 비글로 감독은 이 영화 이전에도 강한 여성을 주인공으로 자주 내세웠다.

 

자기에게 집착하는 범죄자를 천신만고 끝에 체포하는 여자 경찰을 다룬 ‘블루 스틸’(1989), 세기말의 혼란기에 신종 마약 사건을 해결하는 여성을 다룬 ‘스트레인지 데이스’(1995), 여성 사립탐정을 다룬 TV 드라마 시리즈 ‘카렌 시스코’(2004)가 그것이다.

 

‘제로 다크 서티’에서 2003년 CIA 조사관이 된 여주인공 마야(제시카 채스타인)는 상관인 댄(제이슨 클라크)의 가혹한 심문 방식 때문에 일에 잘 적응하지 못한다. 유능한 상관과 선배가 좌천되거나 사망한 뒤 마야는 모아놓은 자료를 집요하게 분석한 끝에 파키스탄 내 알 카에다 지도자의 은신처로 추정되는 장소를 알아낸다. CIA와 백악관 내에서는 이 정보의 신빙성을 놓고 의견이 갈린다. 그러나 마야의 헌신을 높이 산 CIA 국장(제임스 갠돌피니)은 대통령의 승인을 얻어 파키스탄 내 은신처에 특수부대를 보낸다. 결국 특수부대는 이곳에서 오사마 빈 라덴을 사살한다. 이 영화는 큰 공을 세운 마야가 전세기를 타고 워싱턴으로 귀환하는 장면에서 끝난다.

 

이 영화는 마야의 추적-성공에 집중함으로써 지루하지 않게 이야기를 끌고 간다. 반면 이슬람 사회의 반미(反美) 논리에는 거의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비록 CIA 요원들이 저지르는 잔혹한 고문을 보여주기는 하지만 이마저 CIA 요원 댄이 말하는 “선량한 사람 3000명이 빈 라덴 때문에 죽었다”라는 대사에 묻히고 만다.

 

‘우린 정부 시책에 협조했다’

‘아르고’의 내용은 1997년 기밀 해제된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 영화는 1979년 이란혁명 당시 테헤란 주재 미 대사관이 이란의 시위대에게 점령되자 대사관 직원 6명이 대사관을 빠져나와 인근 캐나다 대사관저로 피신하는 데서 시작된다. CIA는 이들을 구출하고자 인질구조 전문가 토니 멘데즈(벤 애플렉)를 기용한다. 멘데즈는 할리우드의 특수분장 전문가 존 챔버스(존 굿맨)와 영화제작자 레스터 시겔(알란 아킨)의 협조를 얻어 ‘아르고’라는 공상과학영화를 제작하기로 한다. 이어 테헤란의 캐나다 대사관저에 숨은 대사관 직원 6명을 ‘아르고’ 촬영지 섭외를 온 캐나다 국적의 영화인들로 신분을 위장시켜 테헤란에서 탈출하도록 한다.

 

‘제로 다크 서티’와 ‘아르고’는 작품의 질로는 우열을 가리기 어렵다. 할리우드의 주전론을 대변한다. 다만 ‘아르고’가 아카데미 회원들이 더 좋아할 만한 메시지를 담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아르고’는 ‘할리우드는 미국 정부의 시책에 협조했다. 그런데 이 사실이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우리가 이를 알린다’라고 말하고 있다. 이는 아카데미상의 구미에 딱 맞는 메시지인 것이다

 

모방과 짜깁기의 포스트모던 영상 시대

‘스타워즈’의 우주제국군 복장을 한 사람들이 미국 뉴욕 타임스퀘어 거리를 걷고 있다.

톰 크루즈가 주연한 공상과학영화 ‘오블리비언’(Oblivion·조셉 코신스키 감독, 2013)은 중후장대한 규모와 현란한 액션으로 관객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이와 더불어 등장인물의 캐릭터, 이야기의 구조, 스펙터클(spectacle·구경거리)로 이어지는 구성이 돋보인다. 동시에 이 영화는 ‘혼성모방’과 ‘패러디’라는 포스트모던 공상과학영화의 문법을 충실히 따른다.

 

외계인과의 전쟁, 기계와의 전쟁이라는 묵시록적인 설정은 핵전쟁 이후의 시대를 배경으로 한 공상과학영화 ‘우주전쟁’(1958)이나 텔레비전 시리즈 ‘V’(1983) 등을 연상시킨다. 주인공의 기억이 이식된 것이고 주인공이 알고 있는 현실이 거짓이라는 설정은 ‘매트릭스’(1999)와 유사하다. 또한 주인공이 원본인간의 복제인간이라는 설정은 ‘솔라리스(1972)’나 ‘에일리언 4’(1997)와 닮았다. 잭과 줄리아가 헬리콥터를 타면서 공중전을 펼치는 장면은 ‘스타워즈’(1977)와 ‘인디펜던스 데이’(1996)에서 펼쳐지는 공중전을 떠올리게 한다.

 

‘스타워즈’에서 ‘오블리비언’까지

‘오블리비언’은 이렇게 기존의 여러 영화로부터 설정과 장면을 따와 짜깁기하는 혼성모방(pastiche) 기법으로 제작된 영화라고 할 수 있다. 혼성모방은 패러디(parody·기존 작품의 소재 등을 흉내내 익살스럽게 표현하는 기법)와 함께 가장 중요한 포스트모더니즘 스타일로 꼽힌다.

미국의 문학평론가 프레데릭 제임슨이 1984년에 쓴 ‘포스트모더니즘, 후기자본주의의 문화 논리’라는 논문은 영화의 혼성모방과 패러디 문제를 논할 때 자주 인용된다. 제임슨은 이 논문에서 1970년대부터 미국 영화에서 고전적인 할리우드 영화로 돌아가는 복고 경향이 나타났다고 말한다.

 

‘빅슬립’(마이클 위너 감독, 1978)처럼 고전 영화를 단순히 리메이크하는 경향, ‘차이나타운’(로만 폴란스키 감독, 1974)처럼 고전 영화가 풍미했던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경향, ‘보디히트’(로렌스 카스단 감독, 1981)처럼 고전 영화의 관습으로 현대적 이야기를 풀어가는 경향이 그것이다. 이외 각기 다른 영화 장르의 관습을 뒤섞어 전혀 다른 영화 장르를 만들어내는 경향도 나타나는데 상당수 공상과학영화가 여기에 해당한다.

 

TV도 혼성모방, 패러디 유행

예를 들어 공상과학영화의 바이블에 해당하는 ‘스타워즈’(조지 루카스 감독, 1977) 시리즈는 서부영화, 전쟁영화, 사무라이 영화와 같은 여러 고전 영화 장르를 뒤섞어 공상과학영화 장르를 개척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영화들은 유명한 영화들의 유명한 장면이나 설정을 그대로 모방하기도 한다. 혼성모방과 패러디의 차이점은, 풍자 목적 없이 다른 작품의 설정을 빌려오는 것이 혼성모방이고 풍자 목적으로 그렇게 하는 것이 패러디라는 데에 있다. 관객은 영화의 특정 장면을 보면서 ‘아, 이것은 이 영화에서 가져온 거구나’라고 알아내가면서 감상한다. 이렇게 영화의 문법이 바뀌면 영화를 감상하는 방식도 달라진다.

 

사실 영화뿐만 아니라 TV 프로그램에서도 혼성모방과 패러디는 광범위하게 활용되고 있다. tvN에서 방영하는 ‘새터데이 나이트 라이브 코리아’(SNL 코리아)의 거의 모든 코너는 패러디 전략을 구사한다. 매주 유명 연예인이 나와 고정 출연진과 함께 평소의 자신과는 다른, 야하고 망가지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 과정에서 다른 영화나 TV 프로그램을 거침없이 모방한다. 신동엽이 출연하는 ‘이영돈 PD의 먹거리 X파일’은 채널A의 ‘이영돈 PD의 먹거리 X파일’을 패러디한 코너다. 그런데 사실 ‘이영돈 PD의 먹거리 X파일’이라는 제목도 미국의 유명 TV 드라마 시리즈인 ‘X File’에서 빌려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ㅉㅑㄱ’이라는 코너는 SBS TV의 리얼리티 쇼 ‘짝’을 패러디한 것이다.

 

KBS 2TV의 개그 프로그램 ‘개그콘서트’에 등장하는 여러 프로그램 역시 유명 영화, 드라마, TV 프로그램의 한 장면을 모방하거나 짜깁기한다. 일부 프로그램은 흥행에 성공한 영화나 드라마의 주된 내용을 재연하기도 한다. MBC TV의 ‘무한도전’은 KBS TV의 ‘공부의 신’ 프로그램 형식을 빌려와 ‘예능의 신’이라는 에피소드를 꾸리기도 했다.

 

혼성모방과 패러디는 방법이 다른 만큼 효과도 다르다. 패러디는 주로 코미디에서 많이 구사되고 그 효과는 관객의 웃음을 자아내는 것으로 나타난다. 반면 혼성모방은 (때로는 웃음을 자아내기도 하지만) ‘오블리비언’이 보여주듯이 반드시 웃음을 수반하지는 않는다. 1970년대 이후의 블록버스터급 공상과학영화에서 혼성모방을 자주 구사했는데 이때의 효과는 웃음과는 다른 재미나 스릴을 일으키는 것으로 표출됐다.

제임슨은 포스트모더니즘을 리얼리즘이나 모더니즘 이후에 등장하는 문화적 현상으로 간주한다. 시기 순으로 보면 리얼리즘-경쟁자본주의, 모더니즘-독점자본주의에서 포스트모더니즘-후기자본주의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이에 따르면 영화와 TV도 문화적 현상의 하나이므로 이러한 자본주의 발전 단계에 편승할 수밖에 없다. 현대 영화와 TV는 포스트모던의 속성을 자주 드러낸다고 할 수 있다.

 

현대의 영화 제작자들이 혼성모방과 패러디를 자주 사용하는 이유를 다른 차원에서 설명하는 시도도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 대학에서 영화를 전공한 사람들이나 미국 영화에 푹 빠진 이른바 ‘할리우드 키드’들이 미국을 포함한 세계 각지에서 영화를 제작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자신의 영화관(觀)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고전 할리우드 영화의 표현기법을 현대적 감각에 맞게 차용하는 기법을 자주 사용했다. 1950년대 말 프랑스의 누벨바그 세대는 1940년대 미국 영화의 장면들을 프랑스 스타일로 바꾼 영화들을 선보이곤 했다. 이러한 경향성은 고전 할리우드 영화에 대한 일종의 존경 차원에서 나온 것일 수 있다. 혹은 고전 할리우드 영화의 기법이 시대를 초월하는 완성도와 보편성을 지녔기에 이렇게 한 것일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2000년대부터 몇몇 영화와 TV 드라마가 유명 외국 영화의 한국어 제목을 그대로 차용하기 시작했다. 영화 ‘게임의 법칙’(장현수 감독, 1994)과 ‘비열한 거리’(유하 감독, 2007)’, MBC TV 드라마 ‘네 멋대로 해라’(장근수 연출, 인정옥 극본, 2002)가 대표적 사례다. 이전 영화들을 차용하는 현상은 영화 또는 영상 콘텐츠가 뉴 미디어에서 올드 미디어로 바뀌고 있으며 신진 제작자들에게는 고전의 지위에 올랐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념과 역사 배제한 ‘흉내 내기’

 

20세기 전반기의 영화는 문학, 회화, 연극, 사진, 건축과 같은 영화가 아닌 다른 분야로부터 표현기법을 전수받아 영상을 만들었다. 반면 20세기 후반~21세기의 영화는 기존 영화-영상 콘텐츠를 혼성모방하거나 패러디하는 포스트모던 기법을 자주 사용해 영상을 만들고 있다. 이러한 차용과 모방, 짜깁기는 원전(原典)의 사회·역사 맥락을 고려한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작업이 아니다. 마치 남미의 혁명가 체 게바라를 청바지와 셔츠 패션의 소재로 삼는 것과 같이, 이념을 배제한 분절적이고 즉흥적이며 지극히 감성지향적인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영화와 TV를 보면서 포스트모던 시대를 살고 있는 것이다.

 

미국 공상과학영화 속 ‘제국주의 향수’

 

공상과학영화는 ‘시간’과 ‘공간’이라는 두 차원으로 양분할 수 있다.

시간이 관건이 되는 대표적인 공상과학영화는 타임머신이 등장하는 시간여행물이다. ‘백 투 더 퓨쳐’(1985), ‘타임머신’(2002) 등이 이에 해당한다. 과거를 직접 본다는 것, 과거의 사건을 바꿔 현재의 상태를 바꾼다는 것은 인간이 오랫동안 꿈꿔온 일이다. 시간여행물은 현실에선 불가능한 이러한 일들을 가상으로 경험하게 한다. 그렇지만 시간과 운명에 대한 관점은 영화마다 조금씩 다르다.

‘백 투 더 퓨쳐’에서 주인공은 과거로 여행해 현재의 운명을 바꾸는 것으로 그려진다. 반면 ‘타임머신’에서 주인공은 사고로 죽은 약혼녀를 살려내기 위해 과거로 돌아가 사고를 막아내지만 다른 사건에 의해 약혼녀는 예정된 죽음을 맞는다. 시간에 대한 자연과학적 지식, 철학적 신념이 영화인마다 서로 다르고 이러한 가치관이 영화 내용에 반영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식민지 원주민 모습의 외계인

시간에 관한 공상과학영화의 또 다른 유형으로는 미래사회물을 들 수 있다. 공상과학영화가 그리는 미래는 유토피아(utopia·이상사회)라기보다는 통제된 디스토피아(dystopia·암울한 미래사회)에 더 가깝다. ‘공각기동대’(2011), ‘토탈 리콜’(2012), ‘가타카’(1997) 등이 이에 해당한다. 이 영화들에 따르면 과학기술은 현실 정치인과 과학자의 장밋빛 전망과는 달리 인간에게 물질적·정신적 자유를 가져다주지 않는다. 대신 인간을 저항할 수 없는 거대한 억압체제 속으로 밀어넣고 만다.

 

시간여행물과 미래사회물을 혼합한 유형도 있다. ‘터미네이터’(1984) 시리즈가 이에 해당한다. 이 영화도 대체로 인간의 과학기술, 이성, 도덕성에 대한 회의를 드러낸다.

시간에 관한 영화가 아닌 다른 공상과학영화들은 공간이 관건이 되는 공상과학영화라고 할 수 있다. ‘혹성탈출: 진화의 시작’(2012), ‘아바타’(2009), ‘화성침공’(1996) 등이 이에 해당한다. 공간에 관한 공상과학영화는 상대적으로 시간보다는 공간을 더 중요한 모티프로 삼는다. 예를 들어 ‘혹성탈출: 진화의 시작’의 경우 사건이 전개되는 시점은 ‘현재’ 또는 ‘가까운 미래’로 별 특이점이 없다. 반면 공간 차원에선 실험실의 원숭이들이 대도시를 점령하려는 것과 같은 놀라운 일이 벌어진다. 공간에 관한 공상과학영화는 주로 강력한 타자와의 조우(遭遇) 같은 모티프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필자가 주로 이야기하고자 하는 ‘스타 트렉: 인투 다크니스’(Star Trek: Into Darkness, 2013, J J 에이브럼스 연출)도 공간에 관한 공상과학영화라고 할 수 있다. 이 영화는 1966년부터 1969년까지 텔레비전에서 방영된 시리즈물을 영화화한 동명의 시리즈 중 최신판이다. 이번 다크니스 편까지 넥스트 제너레이션 편, 엔터프라이즈 편, 보이저 편 등 총 12편이 제작됐다. ‘스타 트렉’의 팬 활동을 다룬 ‘트레키스’(Trekkies, 1997)라는 다큐멘터리도 나왔고 스타 트렉의 텔레비전 시리즈와 영화 시리즈 간의 상호관계를 패러디한 코미디 영화 ‘갤럭시 퀘스트’Galazy Quest, 1999)도 상영된 바 있다. ‘스타 트렉’ 시리즈가 미국인들에게 가장 널리 인기를 끌어온 공상과학물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현대판 일리아스·오디세이 신화

‘스타 트렉’ 시리즈는 서기 23세기 행성연합(United Federation of Planets) 소속 선원들이 탐사우주선 엔터프라이즈 호를 타고 미지의 우주로 탐험을 떠나는 과정에서 겪는 다양한 에피소드로 구성돼 있다. 선장은 대개 백인 남성이 맡는데 ‘보이저’ 편에서는 최초로 백인 여성이 선장으로 등장한다. 선원들은 여행 과정에서 다른 지적 생명체들을 만나게 되며 행성연합에 대적하는 클링온 제국과의 분쟁에 휘말린다.

스타 트렉 시리즈는 주인공이 신비한 여행을 체험한다는 점에서 ‘일리아스’ ‘오디세이’와 같은 고대 신화와 유사한 구조를 갖고 있다. 헤라클레스의 영웅담은 신의 명령에 의해 다양한 모험을 하는 것으로 구성돼 있다. 집단이 모험을 하게 되는 이야기로는 콜키스의 황금양털을 구하러 가는 아르고호 원정대 이야기가 있다. 이들은 여행 중 다양한 인물, 괴물과 조우한다. ‘스타 트렉’ 시리즈는 신화의 등장인물들을 외계인으로 바꿔놓는다.

 

 

2006년 8월 2일 영국 크리스티 경매사 직원이 경매 출시 예정인 ‘스타트렉’ TV시리즈 우주선 모델을 보고있다.

 

 

공간이 관건이 되는 공상과학 영화들은 영화사에서 기원이 꽤 오래됐다. 최초의 공상과학 영화인 ‘월세계 여행’(1902, 프랑스)에서 프랑스 원정대는 달을 향해 포탄을 쏜다. 이어 원정대는 달에 도착해 외계인들과 일전을 치르고 귀환한다.

이때 영화에서 프랑스 원정대가 만난 달의 외계인들은 당시의 아프리카 원주민들과 비슷한 모양새였다. 프랑스인들이 아프리카에서 식민지를 개척하면서 상대했던 원주민들이 공상과학영화에선 외계인으로 탈바꿈한 것이다. 공상과학영화가 보여주는 가상세계는 완전히 창작된 가상이 아니라 상당부분 현실을 투영하는 가상이라고 할 수 있다.

 

‘스타 트렉: 인투 다크니스’의 도입부에서 주인공인 커크 선장과 본즈 부선장이 미지의 행성에서 외계인들에게 쫓기는 장면이 나온다. 이때의 외계인들도 ‘인디애나 존스’ 시리즈에서 볼 법한 미개한 인종으로 그려진다. 반면 본즈 부선장은 화산의 분화를 멈춤으로써 이 행성을 구해주는 구세주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월세계 여행’이 나온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는 서구 열강이 아시아 아프리카 아메리카의 제3세계를 점령하고 분할하던 제국주의 시대였다. 이 시기에 ‘해저 2만리’ ‘80일간 세계일주’ ‘어둠의 심연’과 같이 전 세계를 돌아다니는 백인 남성 모험가의 이야기를 다룬 소설들이 주로 등장했다. 미국에선 서부지역의 토착민들을 복속시키고 백인들이 이주하는 서부개척이 완료되던 시기였다. 이때의 많은 이야기가 훗날 서부극 영화의 주요 소재가 됐다.

 

서구 대 비서구, 문명 대 야만의 이분법이 여행영화, 민속지학영화, 서부영화를 거쳐 공상과학영화에 지대한 영향을 주어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스타 트렉’ 시리즈에서 엔터프라이즈 호 대원들이 마주치는 클링온 제국의 군대는 사실 다른 언어와 문화를 향유하는 다른 인종이 치환된 형태다. 서구에서 제작한 공상과학영화 속 우주여행 모험담에는 19세기 제국주의에 대한 향수(鄕愁)가 고스란히 녹아 있다고 할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론 ‘스타 트렉’ 시리즈는 냉전의 산물이기도 하다. 1950~60년대 미국과 소련은 우주탐사 경쟁을 본격화했는데 스타 트렉 시리즈는 1960년대 텔레비전 시리즈로 처음 제작됐다. 이를 반영하듯 행성연합은 유엔 또는 다민족으로 구성된 미국을 닮아 있다. 엔터프라이즈 호의 선원들은 유엔군이나 다국적 군대와 유사하다. 커크 선장이 이들을 지휘하는 것은 미국인 장성이 유엔군이나 다국적군의 총사령관을 맡는 것과 같다. 커크 선장의 조력자인 미스터 스포크는 벌컨 행성인과 지구인의 혼혈인이다. 미스터 스포크의 정체성은 서부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백인 주인공에게 협조하는 인디언’과 거의 유사하다. 행성연합에 맞서는 클링온 제국은 부분적으로 소련과 공산주의 진영을 상징하기도 한다.

1950년대 미국의 공상과학영화들은 소련과 핵전쟁에 대한 공포감을 드러낸다. 이들 영화가 그려내는 외계인은 지능이 발달했지만 그에 걸맞은 인성을 갖추지 못한 존재다. 소련인과 공산주의자를 외계인으로 자주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스타 트렉’과 미국적 세계관

‘스타 트렉: 인투 다크니스’는 제국주의, 냉전에 이어 테러와의 전쟁까지 담아낸다. 런던 문서보관소에 대한 테러는 여러 면에서 9·11 테러를 연상시킨다. 연합함대 본부가 급습당하는 장면은 9·11 때 미국 국방부(펜타곤)가 공격받는 모습, ‘007 제임스 본드’ 시리즈에서 영국 정보부가 폭파되는 모습과 비슷하다.

 

미국인들이 ‘스타 트렉’ 시리즈에 열광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대중 텍스트는 단순 오락이 아니라 그 시대에 맞는 설정과 상황의 암시를 담아냄으로써 대중의 가치관을 끊임없이 반영한다. ‘스타 트렉’ 시리즈를 통해 우리는 미국인이 어떠한 세계관을 유지하고 있는지를 유추해볼 수 있다.

 

중국 무협영화의 이데올로기 코드

 

박근혜 대통령의 방중으로 중국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영화 분야에서도 중국 영화, 특히 중국 무협영화(또는 시대극)는 우리나라 관객에게 친숙한 편이다. 중국 무협영화에는 어떠한 사회적, 이데올로기적 코드가 내재할까.

최근 국내에 개봉되는 중국 무협영화와 시대극은 크게 두 가지 흐름을 보이고 있다. 첫째는 고대 중국(주로 춘추전국시대부터 진·한 교체기)을 배경으로 실제 사건이나 역사 소설을 각색한 작품들이다. 둘째는 근대 중국을 배경으로 실존한 무술 고수들을 다룬 작품들이다.

전자를 대표하는 최근 작품들로는 병법가 손빈을 다룬 ‘전국 : 천하영웅의 시대’(금침, 2011)나 유비와 항우의 대전을 다룬 ‘초한지 : 천하대전’(이인항, 2010)이 있다. 후자의 예로는 견자단 주연의 ‘엽문’ 시리즈, 조문탁 주연의 ‘소걸아 : 취권의 창시자’(원화평, 2010)’ ‘타이치 0(풍덕륜, 2012)’가 있다.

전자의 영화에서는 연기력이 뛰어난 배우들이 주로 주연을 맡았다. 후자의 영화에서는 무술 고수들이 주연으로 발탁됐다. 또한 전자의 영화들은 개인주의를, 후자의 영화들은 중화민족주의를 이데올로기적 특성으로 가진다고 할 수 있다.

 

개인주의 혹은 중화민족주의

중국이 세계 자본주의에 편입되면서 중국인들 사이에선 세속적 욕망의 충족을 중시하는 개인주의가 득세했다. 중국이 G2의 위상에 오르면서부터는 중화민족주의가 강화됐다. 최근의 중국 무협영화는 이러한 중국 사회의 양대 특성을 이야기 구조 속에 반영하고 있다.

중국의 고대사를 다룬 ‘전국’과 ‘초한지’는 권력투쟁과 권모술수, 남녀 간의 사랑을 이야기의 중심 소재로 삼는다. 이는 우리가 TV 사극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유형이다. TV 사극은 방영기간이 길기 때문에 다양한 인물과 사건, 반전을 끊임없이 제시할 수 있다. 이에 비해 극장용 영화는 2시간 안팎의 제한된 시간에 이야기를 마무리해야 한다. 이야기와 등장인물의 생략, 요약 및 압축의 묘를 발휘해야 한다.

그래서 고대사를 다룬 중국 무협영화(시대극)는 중요한 사건이나 한두 건의 전투에 집중하고 나머지 부차적인 사연은 생략해버린다. 이때 관건은 대규모 전투 장면을 얼마나 화려한 스펙터클로 재현하는지다.

중국 무협영화는 결말에서 ‘통일’이나 ‘대업’같은 대의를 좇는 이들의 비극적 최후를 보여준다. 이어 이들이 지닌 가치관의 허망함을 강조한다. 이는 실패한 로맨스 또는 비극적 사랑 이야기와 결합한다. 중국 무협영화는 외적으로는 남성성이 두드러져 보이지만 내적으로는 로맨스를 부각해야 하므로 여성의 비중이 높은 편이다.

고대사를 다룬 중국 무협영화는 이렇게 전투 장면과 대의라는 두 축으로 이야기를 진행하므로 영화가 주는 시각적 즐거움 역시 ‘대의를 구현하기 위한 거대한 전투 장면’에 집중된다. 중국 사극의 이러한 재현 방식은 장이머우가 연출한 ‘영웅’(2004)에서 본격화했다.

영화 ‘전국’은 귀곡자의 제자인 방연(우진위)과 손빈(쑨훙레이)의 경쟁 관계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전개한다. 원래 역사책에선 방연과 손빈이 병법의 전수, 정치적 이해관계의 대립으로 갈등을 빚는 것으로 서술했다. 그런데 ‘전국’은 여기에 멜로드라마의 갈등요소를 추가한다. 영화에서 방연과 손빈은 전석(징톈)이라는 여성을 사이에 두고 연적 관계를 형성한다. ‘전국’은 위나라에 끌려간 손빈을 돕는 인물로 위나라 왕의 애첩 완(김희선)을 배치한다. 방연, 손빈, 전석, 완, 위나라 왕, 제나라 왕 등 여섯 인물 간 암투가 영화의 주된 흐름이다.

 

글로벌 자본주의 편입 이후엔?

위나라와 제나라 간 계릉 전투와 마릉 전투는 축약돼 계릉 전투는 아예 생략되고 마릉 전투는 원래 역사와 다르게 변형된다. 방연과 손빈의 갈등이 연적 관계로 설정됨으로써 고사에서는 기회주의자이자 악당으로 묘사된 방연이 영화에선 악당의 성격이 약화된다. 영화에서 손빈은 세상 물정을 모르는 순진하고 자폐적인 천재로, 방연은 이상을 구현하려다 점점 권력에 눈이 어두워져 타락하는 인물로 그려진다.

대신 전면에 부각되는 것은 전석과 완의 활약이다. 두 여성은 기지를 발휘하고 강인한 의지를 보여준다. 이들이 손빈, 방연과 맺는 관계는 단순한 남녀 간 로맨스라기보다는 로맨스를 매개로 한 사적 욕망의 분출에 가깝다.

홍콩 반환 이전의 중국 영화들은 개인의 욕망을 표현하는 것을 금기시했다. 개인주의를 다루는 작품도 거의 없었다. 개인을 다루는 것은 국가 건설 과정과 관련된 개인의 이야기(‘붉은 수수밭’), 역사의 흐름에 휘말린 개인의 이야기(‘패왕별희’) 정도였다.

 

 

 

영화 ‘전국 : 천하영웅의 시대’ 포스터.

그러나 홍콩 반환 이후, 그리고 중국이 세계 자본주의 권역으로 편입된 이후 중국 영화들은 개인의 욕망을 적극적으로 담아내기 시작했다. 가장 두드러진 텍스트가 로맨틱 코미디 ‘소피의 연애 매뉴얼’(에바 진, 2009)이다. 이 영화는 한국 영화 ‘엽기적인 그녀’(2001)와 미국 TV 드라마 ‘섹스 앤 더 시티’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20대 후반 직장인 여성의 사적인 고민들을 소재로 한다.

 

고대 중국 역사를 배경으로 한 최근의 중국 무협영화(시대극) 역시 주인공은 황제, 황후, 장군, 협객 등 봉건적 인물이지만 스토리를 관통하는 중심 사상은 사적 욕망의 발현과 좌절 등 개인주의인 경우가 많다.

 

반면 ‘엽문’ 시리즈, ‘소걸아’‘타이치 0’ 등 근대 중국을 배경으로 한 중국 무협영화는 주로 청조 말기, 중일전쟁기와 같이 외세의 침략으로 중화민족의 존속이 위태로운 시대적 상황을 앞세운다. 이어 이러한 민족 공동체의 위기 상황에서 무술인들이 외세에 의롭게 맞서는 모습을 부각한다.

 

중국 사회 내면의 혼돈 반영

장르의 측면에서 이들 무술인 영화는 개인의 일대기를 다루므로 전기물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이들 영화는 주인공인 무술인이 무술을 연마하게 된 계기, 수련 과정을 보여준 뒤 무술을 사용해 악한을 무찌르는 구조로 되어 있다. 이때 악한은 서구 열강, 일본 그리고 중국 내 외세 추종 세력이다.

 

중국 무술인이 외국인을 무찌르는 영화의 기원은 1970년대 초 이소룡의 쿵푸 액션 영화들이라고 할 수 있다. ‘정무문’이나 ‘맹룡과강’과 같은 영화에서 이소룡은 중일전쟁 당시 상하이를 점령한 일본인들을 무찌르거나 로마의 콜로세움에서 백인 무술인과 결투를 벌인다. 그럼으로써 중국인에게 일종의 대리만족감을 제공했다.

이러한 ‘중화민족주의 무술인’ 인물형은 1990년대 이연걸과 조문탁이 주연을 맡은 ‘황비홍’ 시리즈로 계승된다. 이소룡이 맡은 주인공은 억압과 부당함에 맞서는 분노하는 중국인의 모습을 담아내는 데 비해 이연걸과 조문탁이 분한 황비홍은 관대함과 여유로움을 겸비한 유교적 덕목을 지닌 중국인의 모습을 보여준다. 견자단이 주연을 맡은 ‘엽문’ 시리즈의 주인공인 엽문은 중일전쟁 때 일본 무술인을 무찌르고 나중에 이소룡에게 영춘권을 가르쳐준 스승으로 그려진다.

 

올해 개봉된 ‘타이치 0’는 태극권의 창시자로 알려진 양로선의 일대기를 보여주는 신세대 무협영화다. 무성영화 양식과 ‘스트리트 파이터’류의 전자게임 양식을 결합했다. 영화에서 ‘삼화취정’이라는 특이한 신체적 능력을 지닌 양로선(위안샤오차오)은 청조 말엽 천리교에 가담해 무술을 연마하지만 기력을 너무 많이 써 죽게 될 처지가 된다. 이에 양로선은 목숨을 구하기 위해 진씨 집성촌인 진가구에 들어가 진가권을 배운다.

양로선이 배우는 진가권은 대대로 내려온 중국의 전통문화를 상징한다. 영화는 철도 등 서구 기계문명에 대한 반감을 고취하면서 대신 진가권으로 상징되는 중국식 대응방식을 찬미한다. 영화 ‘황비홍’에서 서구 문명의 부산물인 사진, 영화, 의학에 대해 황비홍과 그 주변 인물들이 보여준 반감과 유사한 것이다. G2 위상에 오른 중국은 무협영화를 통해서도 ‘만물을 서구의 세계관으로만 보아선 안 되며 그에 대척하는 중국의 세계관도 함께 고려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 같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외세 배격 무용담이 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것은 글로벌 체제 편입 이후 중국이 갖는 심리적 두려움을 반어적으로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중국 무협영화는 민족 차원을 초월한 인류 차원의 보편적 가치를 표현하는 데에는 아직 미숙한 것으로 평가될 수 있다. 이렇게 최근 중국 무협영화에서 개인주의와 중화민족주의가 뒤섞여 나타나는 것은 현재의 중국 사회가 겪는 내면의 혼돈을 반영한다고 할 수 있다.

'스크랩'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일본, 또 하나의 한국_01  (0) 2013.09.25
숨 막히는 우주 전쟁  (0) 2013.09.22
우주보다 복잡한 지도를 찾아서   (0) 2013.09.06
별박사 이태형의 별별 낭만기행_08  (0) 2013.09.04
BEYOND SCIENCE_07  (0) 2013.08.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