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창녕 우포늪 생태탐방로
겨울엔 움츠러들게 마련이다. 조금이라도 밖에 나가 걷다 보면 귀와 코끝이 시려 빨리 실내로 들어가고 싶다. 올겨울은 더 추웠다. 영하 20℃ 가까이 내려가는 기온과 칼바람, 폭설 때문에 5분 이상 걸어본 적이 있는지 가물거릴 정도다. 어느덧 몸 여기저기에서 두툼하게 살집이 잡히기 시작했다. 이럴수록 가벼운 걷기 등으로 몸을 움직여야 살찌는 것을 예방하고 유연성과 근력을 기르며 건강을 지킬 수 있다.
이렇게 꽁꽁 언 것은 몇십 년 만의 일
그런데 겨울철 걷기는 특히 유의해야 할 점이 많다. 추위로 몸이 굳어진 상태라 너무 오래 거친 길을 걸으면 관절과 근육에 무리를 줄 수 있기 때문. 그래서 겨울철 걷기 코스로 추천을 받은 곳이 경남 창녕 우포늪 생태탐방로다. 오르막과 내리막이 거의 없는 우포늪의 둘레를 산책하듯 천천히 걸으면 되는 코스이기 때문. 게다가 우포늪은 대표적인 겨울 철새 도래지이기도 하다.
“아이고예. 와 요즘 같을 때 왔노. 우포늪이 꽁꽁 얼어붙었다카이.”
1월 21일 어스름이 채 가시지도 않은 새벽녘, 우포늪을 찾았다. 그런데 ‘늪’ 하면 떠오르는 짙푸른 수생식물도 보이지 않고, 곤충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심지어 겨울이면 거대한 군락을 이룬다던 철새도 자그마한 무리로만 눈에 띄었다. 눈앞에 펼쳐진 우포늪은 맑고 하얗게 얼어붙어 있었다. 마치 거대한 스케이트장 같았다. 얼음 두께만 15cm에 이른다고 했다. 장대 조각배를 타며 우포의 생물을 채취하고 더러운 이물질도 치운다는 ‘우포지킴이’ 주영학 씨는 “이렇게 우포늪이 꽁꽁 얼어붙은 건 몇십 년 만의 일”이라고 했다. 우포늪에는 겨울철 눈이 별로 오지 않는다고 했지만, 기자가 찾았을 때는 늪 주위에 눈이 소복이 쌓여 있었다. 우포늪의 전형적인 모습은 아니었지만 몇십 년에 한 번 볼까 말까 한 풍경을 본다는 사실도 가히 나쁘진 않았다(한파가 지속되는 올겨울 내내 이런 모습이 이어질 것으로 예상된다).
전체 코스 돌아보려면 3시간 필요
창녕군 유어면과 이방면, 대합면과 대지면 일대에 우포늪은 낙동강 지류인 토평천 유역에 생성된 자연 늪지로 약 2313㎢에 펼쳐져 있다. 여기서 잠깐. ‘늪’이란 과연 뭘까. 영화 등을 통해 각인된 늪은 어둡고 칙칙하며, 어디선가 악어가 튀어나올 것 같은 음침한 이미지다. 하지만 늪은 물도 아니고 뭍도 아니기에 생물의 서식지로 최적의 환경을 제공한다. 다양한 생물의 보금자리인 것은 물론 홍수를 막아주고, 물을 깨끗하게 하며, 지구 온난화를 예방한다. 일반적으로 물의 깊이가 6m 이하인 지역을 늪이라 부른다.
1억4000만 년 전 한반도가 생성되면서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우포늪은 우포와 사지포, 쪽지벌, 목포 등 4개로 나뉜다. 현지인들은 우포를 ‘소벌’이라 부른다. 하늘에서 보면 모양새가 소를 닮았다는 설도 있고, 예전에 소가 이곳으로 와 풀을 많이 뜯어먹은 데서 유래했다는 설도 있다. 1997년 환경부에 의해 ‘자연생태계 보전지역’으로 지정됐고, 1998년 람사르 협약(국제적으로 중요한 습지를 보호하기 위해 각국의 협력으로 맺어진 조약)에 등록됐다. 2008년 한국에서 개최된 ‘람사르 총회’ 당시 우포늪은 공식 방문지로 지정돼 전 세계에 소개되기도 했다.
우포늪은 이른바 ‘자연사 박물관’으로 불린다. 태고부터 지금까지 명멸을 거듭하며 이어온 수많은 생물이 숨 쉬고 있는 ‘자궁’ 같은 공간이기 때문. 잎의 길이만 2~3m인 가시연꽃을 비롯해 부들, 마름, 창포 등 수생식물(水生植物)과 수서곤충(水棲昆蟲·성충 또는 유충의 상태에서 물속에 사는 곤충), 어류, 조류 등을 합쳐 총 1500여 종의 동식물이 이곳에 서식한다.
우포늪 생태탐방로에 들어서기 전 우포늪 생태관(www.upo.or.kr)에 들러 사전지식을 쌓는 게 좋다. 늪에 대한 설명과 늪에서 사는 동식물 표본, 모형 등이 전시돼 있고, 우포늪의 사계를 3D 영상으로 체험하는 공간도 있다. 안내 데스크에 요청하면, 해설사가 우포늪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준다.
탐방로는 생태관에서 시작된다. 코스는 도보 30분, 도보 1시간, 도보 2시간, 도보 3시간 4가지가 있는데, 기자는 우포늪을 전체적으로 둘러볼 수 있는 3시간 코스를 걷기로 했다. 생태해설사이자 시인인 김군자 씨가 함께했다. 생태관에 요청하면 누구나 해설사의 설명을 들으며 탐방로를 걸을 수 있다. 창녕의 한 병원에서 15년 동안 일하며 온갖 만성질환을 앓았다는 김씨는 “하루에 한 번씩 우포늪을 걷기 시작한 후, 모든 질환이 눈 녹듯 사라졌다”며 방긋 웃었다.
생태관에서 나와 탐방로를 따라 내려가면 정면에 우포가 보이고 두 갈래길이 나온다. 오른쪽으로 가면 대대제방이, 왼쪽으로 가면 우포전망대가 있다. 기자는 왼쪽 길로 갔지만, 어느 쪽으로 돌든 큰 차이는 없다.
우포늪은 겨울 철새 도래지로 유명하다. 따오기, 노랑부리저어새, 큰고니 같은 천연기념물과 댕기물떼세, 큰부리큰기러기, 가창오리 등이 이곳을 찾는데, 수만 마리가 함께 하늘로 날아오르는 모습은 그야말로 장관이다. 사진작가들이 겨울에 이곳을 찾는 이유는 화려한 새의 군무(群舞)를 보기 위해서다. 안타깝게도 기자가 이곳을 찾았을 때는 철새가 많지 않았다. 김씨는 “우포늪이 두껍게 얼어붙으니, 늪의 수면 위에서 먹을거리를 찾던 새들이 낙동강 등 다른 곳으로 떠났다”며 “그래도 물살이 세 얼음이 얼지 않거나 얇게 언 곳은 새들이 무리 지어 있다”고 전했다.
길을 따라 20여 분 걷자 따오기 복원센터가 나왔다. 따오기를 복원해 100여 마리를 자연에 방사하는 것이 이곳의 목표다. 동요에도 나올 만큼 우리에게 친숙했던 따오기가 멸종 위기에 처한 데는 가슴 아픈 사연이 있다. 따오기는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는 새로, 주로 농지 근처에서 먹을 것을 찾았는데 수확량을 늘리기 위해 농약을 친 것이 화근이었다. 엄청난 수의 따오기가 그 농약을 먹고 죽어버린 것. 자연생태계를 훼손하긴 무척 쉬워도 다시 가꿔나가긴 어렵다는 사실이 피부로 느껴졌다.
찬바람 속 고즈넉한 아름다움
우포를 오른편에 두면서, 억새와 갈대가 무척 아름다운 사초군락과 목포제방을 지나 쭉 걸어가니 이 지역 사람들이 사는 소목마을이 나왔다. 지역민들은 장대 조각배를 타며 우포의 어류 등을 잡고, 습지의 물을 빼 만든 경작지에 마늘, 양파 등을 재배하면서 생계를 유지한다. 최근 가장 큰 수익은 건강식품인 잉어즙과 붕어즙에서 나온다고 한다.
소목마을을 지나면 길을 따라 주매제방과 사지포제방, 대대제방이 이어진다. 이렇듯 우포 탐방로에는 제방이 무척 많다. 이런 제방은 과거 먹고살기 힘들었던 시절, 우포의 늪을 경작지로 만들기 위해 쌓은 것이다. 실제로 이 지역의 경작지 대부분은 한때 늪이었다. 탐방로 막바지에 있는 대대제방은 우포의 아름다움을 만끽할 수 있는 곳으로 겨울 철새도 가장 많이 볼 수 있다. 일몰이 특히 장관이다.
탐방로 시작점이었던 생태관에 다시 다다르니 오후 2시가 훌쩍 넘었다. 오전 10시에 출발했으니 4시간 정도가 걸린 셈. 그런데 우포늪 탐방로는 ‘누가 더 빨리 걸어 도착하나’를 경쟁하는 길이 아니다. 걷기로만 따지면 밋밋하기 그지없는 코스다. 하지만 천천히 걷다 보면 늪의 수많은 생물이 내뿜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특히 마음에 드는 곳이 있으면 쉬어 가는 것도 좋다.
우포늪은 사계절이 확연히 다르다. 봄에는 자줏빛 자운영이 피어나며 개구리밥이 물 위로 올라오고, 여름엔 수생식물이 마음껏 자태를 뽐낸다. 특히 수생식물이 뒤덮은 늪은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마치 녹색 융단을 깔아놓은 듯하다. 가을엔 갈대와 억새의 갈색빛, 은빛 물결이 눈앞에 펼쳐지고, 겨울엔 수많은 철새를 볼 수 있다. 사람들은 봄과 여름, 가을에 이곳을 자주 찾는다. 김씨는 “몇몇 사람은 겨울 오포는 볼 것이 없다고 투덜거리지만, 고즈넉한 우포도 그 나름의 아름다움이 있다”고 했다. 기자의 생각 역시 비슷했다.
화려한 수생식물도, 시끄러운 벌레 소리도, 억새의 은빛 물결도 없었지만, 모든 게 사라진 후 홀로 남은 우포늪도 매력적이었다. 연극이 끝난 뒤의 무대 같다고나 할까. 하지만 이곳의 모든 것은 사라진 게 아니다. 늪 밑 또는 주변 뭍에서 1500여 종의 생물이 다가올 봄에 활짝 피어나기 위해 조금 움츠리고 있을 뿐. 꼼지락꼼지락하는 기운이 느껴지는 듯했다. 우리네 인생 역시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
[ Basic info. ]
교통편
서울에서 가려면 경부나 중부고속도로를 타고 호법IC까지 가서 영동고속도로로 갈아타고, 여주에서 다시 중부내륙고속도로에 들어선 뒤 창녕IC로 빠지면 바로 우포숲을 가리키는 이정표가 보인다. 서울에서 4시간여 걸린다.
도보 코스
1) 30분 코스 - 생태관 → 전망대 → 숲탐방로 1길 → 생태관
2) 1시간 코스 - 생태관 → 대대제방 → 전망대 → 숲탐방로 1길 → 생태관
3) 2시간 코스(목포늪 둘레 탐방) - 소목마을 주차장 → 숲탐방로 3길 → 목포제방 → 우만제방 → 왕버들군락 → (사)푸른우포 사람들 → 소목마을 주차장
4) 3시간 코스(우포늪 둘레 탐방) - 생태관 → 대대제방 → 사지포제방 → 소목마을 → 사초군락 → 전망대 → 생태관(반대로 걸어도 상관없음) |
竹이는 사연 … 이국적 분위기 … 시간이 날 껴안아주더라 |
전남 담양 죽녹원 ~ 메타세쿼이아길
이 추운 겨울에도 나무들은 꺾이지 않았다. 대나무, 전나무, 메타세쿼이아 모두 제각기 살아갈 방법을 찾았다. 줄기가 얇은 대나무는 이리저리 바람에 휘날리며 잎에 쌓인 눈을 툭 털어냈다. 기둥이 두꺼운 전나무는 성가신 잎을 벗고 묵묵히 비바람을 견뎠다. 가을 내내 오묘한 색을 뽐내던, 이름부터 생경한 메타세쿼이아는 겸손하게 몸을 숨겼다.
눈 내린 전남 담양군 죽녹원~메타세쿼이아길 일대를 걸으며 새삼 다짐했다. 새해에는 나무처럼 살아야겠다고. 휘날리고 잎을 빼앗기고 색을 잃어도 묵묵히 제자리를 지키며 말이다.
며칠째 ‘올 들어 가장 추운 날’이던 1월 넷째 주, 서울을 출발할 때는 내복에 점퍼까지 껴입어도 오들오들했는데, 남쪽으로 갈수록 창밖으로 스미는 조각볕이 따스했다. 담양 여행이 즐거운 이유 중 하나는 편리한 교통에 있다. 서울에서 출발한다면 용산역에서 광주역까지 KTX를 이용한 뒤 시내버스로 30분 정도만 가면 담양이다. 용산역에서 광주역까지 KTX로 3시간 남짓. 자다 깨다를 반복하며 창밖의 눈 쌓인 산천을 구경하다 보면 금방이다.
담양 가는 버스를 타려면 ‘중흥사거리’ 방면 뒷문으로 나가야 한다. 계단을 내려가면 바로 앞에 버스정류장이 있다. 10분에 한 대씩 다니는 311번 버스를 타면 30분 안에 담양 죽녹원에 도착한다. 죽녹원까지 요금은 2200원. 이동 거리에 따라 요금이 다르므로 탑승 전 기사에게 행선지를 말해야 한다. 번번이 대답해야 하는 기사가 안 됐는지, 맨 앞에 앉은 아주머니가 대신 얼마라고 말해준다. 구수한 사투리를 흘려들으며 꾸벅꾸벅 졸다 보니 버스는 어느새 죽녹원에 도착했다.
관방제림 위에 가득 찬 침엽수
쭉 뻗은 대나무 덕에 눈이 시원했다. 죽녹원은 2003년 5월 조성된 대나무숲으로 16만㎡에 걸쳐 대나무가 우거져 있다. 운수대통길, 죽마고우길, 철학자의 길 등 8가지 주제의 길로 구성돼 이름 따라 걷는 재미도 쏠쏠하다. 천천히 걸어도 40분이면 다 둘러볼 수 있어 완주라는 말이 민망할 정도다. 길이 평탄한 데다 빙판도 없어 설설 걷기 좋다.
사각사각? 살랑살랑? 아니면 소곳소곳? 대나무가 흔들리며 잎끼리 부딪치며 내는 소리를 어떻게 글로 옮길 수 있을까? 귓가를 간질이듯 손짓하는 소리에 멍하니 귀를 기울였다. 숨을 깊이 들이마시면 그만큼 마음이 더 넓어지는 듯했다. 사람 다니는 길은 눈이 이미 다 녹았지만 나무 우거진 길에는 여전히 한 뼘 넘게 쌓였다. 길에서 조금 벗어나 눈 쌓인 곳을 아이들처럼 발길로 툭툭 찼다. 예상치 못한 공격을 받은 흰 눈이 스르르 바스라졌다.
여기서 질문 하나. 좋은 풍경 사진을 찍기 위해 가져야 할 습관은? 바로 ‘뒤돌아보기’다. 앞서서 보는 길도 ‘억’ 소리 나게 좋지만, 문득 뒤돌아보면 미처 보지 못한 비경(秘境)이 펼쳐진다. 특히 그 진리가 통하는 곳이 바로 대나무숲이다. 빛을 받아 반짝거리는 대나무의 앞모습도 아름답지만, 그림자가 져서 색다른 분위기를 연출하는 뒷모습도 오랫동안 가슴에 남는다.
대나무숲 산책을 뒤로하고, 이제 추위에 정면으로 맞선 용감한 나무들을 만나러 갈 차례다. 정문으로 나와서 오른쪽 다리를 건너면 ‘관방제림(官防堤林)’이란 돌 표식을 만날 수 있다. ‘관방제’란 담양천 변의 제방이다. 즉 관방제림이란 관방제 위에 이뤄진 숲을 뜻하는 것.
담양천 때문에 이 일대는 상시 침수(沈水) 지역이었다. 조선 인조 26년, 홍수를 막기 위해 담양천 중간에 제방을 짓고 나무 700여 그루를 심었다. 느티나무, 푸조나무, 팽이나무, 벚나무 등 관방제에 자리 잡은 나무는 모두 거센 강바람, 바닷바람을 잘 견디는 종류다. 1.2㎞에 걸쳐 이어지는 이 길은 수령 몇백 년의 나무들이 신묘한 기운을 뿜으며 장관을 이루는 까닭에 천연기념물 제366호로 지정됐다.
그토록 물이 많았다는 담양천. 지금은 물이 말랐다. 길 초반에는 여전히 내천이 남아 있지만 예전의 위엄은 찾아볼 수 없게 얕고, 그마저 추운 날씨 탓에 꽁꽁 얼어붙었다. 그 위에는 눈이 소복하게 쌓였고 햇빛이 눈 위에 다가와서 반짝반짝 빛났다. “눈 때문에 눈이 시리다”는 말은 바로 이럴 때 하는 말이 아닌가 싶었다.
길 사이사이에 평상과 벤치가 많다. 지금이야 추워서 엉덩이도 못 대지만 여름의 이곳 모습이 훤히 보이는 듯싶었다. 동네 주민들이 모여 앉아 수박을 나눠 먹고, 길 가는 사람에게 “막걸리 한잔으로 목 좀 축이시라”며 주저앉힐 모습이.
길을 따라 30분가량 걸었을까, ‘메타세쿼이아길 가는 길’이란 표지판이 보였다. 다시 길 따라 가니 저 멀리 4차선 도로 곁으로 나란히 뻗은 메타세쿼이아 나무들이 나타났다. 갈래 길이 나왔을 때 왼쪽 흙길로 가지 말고 직진해서 터널을 지나야 한다. 그러면 눈앞에 메타세쿼이아길이 펼쳐진다.
메타세쿼이아, 이국적인 발음 덕에 은은한 분위기가 풍긴다. 메타세쿼이아는 중국을 원산지로 하는 낙엽 침엽수다. 기둥은 높고 가지는 양옆으로 퍼지며, 앙상한 가지를 덮은 잎은 회색빛을 띤 갈색이다. 봄, 여름에는 푸른 침엽수지만 가을에는 붉은 단풍이 든다. 겨울에는 잎의 회색빛이 더 강해지다 2월경 아카시아처럼 수술이 늘어진 꽃이 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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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세쿼이아길을 걷는 연인들.
입 안에서 살살 녹는 떡갈비
2006년 개봉한 영화 ‘가을로’에서 얽히고설킨 인연으로 서로를 바라보던 남녀가 마침내 사랑을 결심하는 마지막 장면의 배경이 바로 이 메타세쿼이아길이다. 연한 갈색 잎이 만들어내는 분위기는 따뜻하고 다정하다. 가을 내내 화려하게 빛나던 메타세쿼이아. 하얀 눈과 강한 바람이 휩쓸고 간 그 길은 화려한 색을 잃었지만, 가을엔 볼 수 없었던 묵묵함이 강렬하다.
이 길을 걷는 데 시간은 중요하지 않다. 언제든 다시 길을 돌려도 되고, 다시 한 번 뒤돌아 걸어도 좋다. 천천히 손끝에서 시간이 빠져나가는 것을 즐기며 걷다 보면 문득 겨울이 가슴속에 내려앉는다.
길 초입에는 작은 점포가 있다. 주인은 불쑥 문을 열고 아무것도 사지 않은 채 버스 시간을 물어도, 마치 자기 일처럼 나와서 설명해줬다. 자전거를 빌릴 수도 있고 율무차, 대잎차 등 꽁꽁 언 몸을 녹일 차 한잔 청해 마실 수도 있다.
좋은 길, 좋은 벗까지 있다면 그다음 필요한 것은 좋은 음식이다. 담양에서 꼭 먹어야 하는 음식은 떡갈비와 대통밥. 담양의 명물을 맛보려면 왔던 길을 되돌아 죽녹원 입구로 가야 한다. 많이 지친 상태라면 담양 어디든 5분 안에 달려오는 담양콜택시를 이용하는 것도 좋다. 메타세쿼이아길에서 죽녹원 입구까지 요금은 4000원 내외. 죽녹원 입구 가득 들어선 떡갈비 식당 중 ‘죽녹원 첫집’이라는 식당을 선택했다. 대향 가득한 대통밥(1인분 1만 원)도 일품이지만, 맑은 물과 깨끗한 공기를 마시고 자란 한우로 만든 떡갈비(1인분 2만 원)는 입 안에서 사르르 녹았다. 남도답게 상 위에 빈 곳을 찾을 수 없게 가득 들어찬 밑반찬도 일품이었다. 간고등어 한 입 먹고, 회무침 한 젓가락 먹고 마무리는 시원한 꽃게된장찌개로. 담양 주변의 대통밥 식당은 밥을 담았던 대통을 재활용하지 않기 때문에 자기가 먹은 대통은 들고 와 그릇, 연필꽂이 등으로 사용할 수 있다.
6시간 동안의 호사(好事)를 마치고 서울로 돌아오는 길. 문득 신석정의 ‘대숲에 서서’란 시가 떠올랐다. 시인이 본 대숲은 “자욱한 밤안개에 벌레 소리 젖어 흐르고, 벌레 소리에 푸른 달빛이 배어 흐르는” 곳이었다. 어떠한 족집게 과외 없이도 시인의 마음을 오롯이 이해할 수 있었다. 그 마지막 문장마저도 완전히 동감이었다.
“꽃가루 날리듯 흥근히 드는 달빛에, 기척 없이 서서 나도 대같이 살거나.”
[ Basic info. ]
☞ 교통편
승용차 | 호남고속도로 백양사IC에서 담양 방면으로. 광주지방법원 담양군법원에서 전남도립대학 방향
대중교통 | 서울 용산역에서 광주역까지 KTX(하루 7회), 광주역에서 311번 버스 탑승 후 죽녹원 하차
문의 | 죽녹원 061-380-3244 |
바람이 놀다 간 언덕 너머 동백꽃 봉오리가 ‘눈인사’ |
바다의 금강산 거제 해금강길·외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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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네덜란드 풍의 풍차가 인상적인 바람의 언덕.
북녘 땅에 위치한 금강산은 계절별로 다른 이름을 지닌다. 봄에는 금강산, 여름에는 봉래산, 가을에는 풍악산, 겨울에는 개골산. 산세가 수려하고 물도 맑은 데다 계절의 변화에 따라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남북 화해 분위기 속에 1998년부터 금강산 유람이 가능해졌지만, 마음이 동할 때 언제든지 길을 나서기에는 여전히 거리감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렇다면 바다로 발길을 돌려보자. 북쪽에 금강산이 있다면 남쪽 거제에는 ‘바다의 금강산’이라 불리는 해금강(海金剛)이 있다. 경남 거제시 남동쪽 바다에 불쑥 솟은 돌섬이 ‘어서 오라’며 길을 재촉한다.
파도에 따라 스스로 다듬어낸 몽돌
1월 16일 서울 남부터미널에서 고속버스를 타고 4시간을 내달려서야 거제시 고현시외버스터미널에 도착했다. 터미널에서 해금강까지는 시내버스로 30분 남짓 더 가야 한다.
“이른바 거제현이란 데는 남방의 극변으로 물 가운데 집이 있고, 사면에는 넘실거리는 바닷물이 둘러 있으며, 독한 안개가 찌는 듯이 무덥고 태풍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여름에는 벌보다 큰 모기 떼가 모여들어 사람을 문다고 하니, 참으로 두렵다.”
고려시대 시풍으로 당대를 호령한 명문장가 이규보(1168~1241)의 표현처럼, 난생처음 거제도 들머리에 도착한 이의 떨리는 마음은 예나 지금이나 별반 다르지 않다. 복잡한 거제 시내를 벗어나자 푸른빛 바다가 펼쳐진다. 거제 8경 중 하나인 해금강으로 다가서는 길은 함목몽돌해수욕장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러고 보니 거제도 해변에는 유독 몽돌이란 이름이 들어간 해변이 많다. 거제도 북쪽 끝의 유호몽돌해수욕장부터 남단의 여차몽돌해수욕장까지, 해수욕장 이름에는 어김없이 몽돌이 들어 있다. 모가 나지 않은 둥근 돌을 일컫는 몽돌은 거제도 해안가에서만 볼 수 있는 특색 있는 돌이다. 몽돌의 크기는 작은 조약돌부터 어른이 혼자 들기 무거운 것까지 다양하다.
몽돌은 억겁의 세월 동안 파도를 따라 다니며 이리저리 뒹굴었다. 스스로를 다듬고 또 다듬다 보니 뾰족했던 감정은 사라지고 성자로 변모했다. 그런 몽돌을 보니 가슴속에 날카로움을 안고 살아가는 자신이 부끄러워진다. 많은 사람과의 경쟁에서 뒤처지지 않기 위해 얼마나 많은 가시를 드러내고 살았던가. 몽돌처럼 서로 부대끼며 모나지 않은 동그라미가 되겠다고 다짐해본다. 몽돌해변을 걷다 보면 귀가 즐거워진다. 파도가 밀려왔다 도망치면 몽돌끼리 부딪히면서 데굴데굴 구르는 소리가 마치 까르르 웃는 여고생들 웃음소리 같다. 그 웃음소리에 나도 모르게 몽돌에 손이 간다. 부드러운 감촉에 온기가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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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가 나지 않은 몽돌은 거제 해안의 특징이다.
몽돌해변에서 나와 신선대 쪽으로 발길을 돌리자 동백나무가 반갑게 인사를 건넨다. 해금강 입구 신선대 주변과 학동 해안을 따라 효자산 아래까지 우거진 동백숲은 국내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야생 동백군락지 중 하나다. 천연기념물로 지정돼 있으며 약 38ha 땅에 3만여 그루의 동백이 무리 지어 있는 모습이 장관이다. 1~4월에 새빨간 꽃을 피우는 동백나무지만 일부에선 벌써부터 꽃봉오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전국이 한파로 꽁꽁 얼어붙은 가운데서도 봄은 오고 있었던 것이다. 작은 봄기운만으로도 천군만마를 얻은 기분이다.
신선들이 내려와 풍류를 즐긴 곳
“바람만 불지 않으면 봄 날씨를 느낄 수 있다”는 거제 주민의 말처럼 바닷바람이 세게 불어올 때는 옷을 단단히 여며야 했지만, 바람이 잠잠해지면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힌다. 10여 분을 걷자 갈림길이 나타난다. 오른쪽으로 빠지면 ‘신선대’이고 왼쪽으로 가면 ‘바람의 언덕’으로 이어진다.
먼저 신선대를 향해 걸음을 옮긴다. 잘 다듬어진 탐방로 덕에 걷는 데는 무리가 없다. 내리막길을 지나 바닷가에 이르자 기암절벽이 보는 이를 압도한다. 신선들이 내려와 풍류를 즐겼다는 말이 허무맹랑하게 느껴지지 않을 정도다. 갓처럼 생긴 큰 바위 아래로는 자줏빛 너럭바위가 펼쳐져 있다. 이 바위에 제를 올리면 벼슬을 얻는다는 전설이 있다. 이런 절경을 눈으로만 담아 가는 것이 성에 안 차서일까. 잠시 걸음을 멈추고 팔을 위로 쭉 뻗고는 아기가 엄마의 젖을 물 듯 있는 힘껏 공기를 들이마셔본다. 차디찬 바닷바람이 몸속 깊숙한 곳까지 후벼 판다.
왔던 길을 거슬러 올라가 바람의 언덕 쪽으로 발길을 돌린다. 커다란 네덜란드 풍의 풍차가 멀리서도 시선을 잡아끈다. 바람의 언덕으로 가는 길 또한 운치가 있다. 차도를 따라 탐방로가 이어지다가 오른쪽으로 꺾이면서 작은 어촌 마을 끄트머리와 연결된다. 사람이 겨우 들어갈 만한 슬레이트 지붕의 작은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집 마당 한편에 생선을 한두 마리씩 놓고 말리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고양이들이 살짝 뛰어오르기만 해도 물고 갈 텐데’라고 괜한 걱정도 해본다.
길은 일자로 쭉 이어져 있지 않다. 굽이굽이 집들을 둘러가야 도장포 선착장이 있는 바다 쪽으로 갈 수 있다. 꼬르륵. ‘금강산도 식후경’. 허기진 배부터 달랜다. 게, 조개 등 각종 해물을 넣고 펄펄 끓인 해물된장찌개로 밥 두 그릇을 뚝딱 비운 뒤에 본격적으로 바람의 언덕을 향해 나간다. 이제부터는 다시 오르막길이다. 5분여를 걷자 왼쪽으로 벤치들이 놓여 있는 작은 언덕이 보인다. 영화 ‘쉬리’의 마지막 장면으로 유명한 제주 신라호텔 숨비 정원 내 ‘쉬리 벤치’가 정확하게 오버랩된다.
과거 띠밭등, 망너메 등으로 불렸던 바람의 언덕은 염소들이 노니는 도장포 마을의 바닷가 언덕이었다. 바람의 언덕이란 새로운 이름을 얻으면서 거제도를 찾는 관광객이 꼭 들르는 곳이 됐지만 구수한 옛 이름이 더 정이 간다. 커다란 풍차 앞에서 사람들은 연방 사진을 찍어댄다. 바람이 놀다 가는 이곳에선 손만 갖다 대도 한 편의 예술작품이 만들어진다. 두 손을 가위 모양으로 한 뒤 서로 맞닿게 해 직사각형을 만들어본다. 그것의 방향이 바다로 향하든, 풍차로 향하든 일단 네모난 손가락 상자에 날것 그대로의 풍경이 담기면 그 아름다운 모습에 심장마저 가쁘게 요동친다.
바람의 언덕에서도 해금강은 아스라이 보이지만 제대로 맛보기 위해선 배를 타고 직접 나가야 한다. 도장포 선착장에는 해금강을 둘러 외도까지 갔다 오는 유람선이 운항되고 있다. 이참에 ‘환상의 섬’으로 알려진 외도까지 가보기로 결심하고 표를 끊는다. 2시간 남짓 간격으로 배가 있기에 시간을 잘 맞춰야 한다. 오후 1시 반, 드디어 배가 출발한다. 10여 분을 내달리자 불쑥 솟은 돌섬이 당당하게 서 있다. 거제 해금강은 원래 갈도(葛島·칡섬)였지만 그 풍경이 아름답다고 해서 1971년 명승 2호인 거제 해금강으로 등재됐다. 몸체는 한 덩어리처럼 보이지만 바닷속에서 갈라진 4개의 절벽 사이로 십(十)자형 수로가 뚫려 있어 파도가 잠잠할 때면 배가 드나들 수 있다.
천년의 전설 수많은 사연 머물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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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언덕으로 올라가는 길 옆으로 ‘쉬리 벤치’를 연상시키는 벤치들이 놓여 있다.
당장이라도 무언가를 집어삼킬 듯 포효하고 있는 사자 한 마리가 해금강을 듬직하게 호위한다. 해금강의 수호자 ‘사자바위’다. 원래 사자바위 이빨은 3개였는데 하나씩 빠져 이제는 하나만 남았다. 그러고 보니 입을 벌리고 있는 사자바위에서 유독 뾰족하게 튀어나온 암석만이 외롭게 자리를 지킨다. 세월의 흐름을 이기지 못하는 것은 비단 사람만이 아닌가 보다. 사자바위 건너편으로 한 그루 소나무가 자리를 지키고 있다. 언뜻 육안으로 봤을 때는 어른 키 남짓한 크기지만 그래 봬도 1300년의 나이를 자랑하는 천년 송(松)이다.
여기에는 재미있는 전설이 전해진다. 영원한 생명을 꿈꿨던 진시황은 불로초를 구하고자 서불과 동남동녀 3000명을 이곳 해금강에 보냈는데 이들이 백일기도를 하던 중 무료함을 달래려고 사자바위와 천년 송 사이에 줄을 달아 그네를 탔다는 것. 머릿속으로 그네 줄을 그려본다. 그네 밑은 파도가 거세게 치는 망망대해다. 자칫 빠지기라도 하면 영영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간다. 그런 곳에서 외줄의 그네를 탔다고 하니 살짝 현기증마저 인다.
사자바위 뒤편으로 미륵바위가 나타난다. 시커먼 얼굴에 눈과 코가 뚜렷한 모습이, 충남 논산시 은진면 관촉사에 있는 동양 최대 석조 미륵불을 연상시킨다. 부처님 바위라 불리는 이곳에서 어부들은 출항에 앞서 만선의 소원을 빌었다. 지금도 간절히 빌면 소원 하나는 꼭 들어준다고 전해진다. 지그시 눈을 감고 가족의 건강을 빌어본다.
해금강 주변 바위 중 단연 눈길을 끄는 것은 ‘신랑바위’로 불리는 촛대바위다. 우뚝 솟은 바위가 마치 사모관대를 쓰고 조랑말을 탄 신랑의 모습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원래는 신랑바위 앞에 신부바위도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1959년 사라호 태풍에 신부바위는 부서지고 말았다. 신랑 신부의 다정한 모습을 질투한 태풍이 이들의 사랑을 갈라놓은 것이다. 이 밖에 두 쌍의 바위가 뽀뽀를 하는 ‘뽀뽀바위’, 선녀가 공손히 합장기도를 하는 ‘선녀바위’ 등 다양한 모습의 바위섬이 해금강을 에워싸고 있다.
해금강을 지나 10여 분을 달리자 ‘환상의 섬’ 외도가 바다 위에 다소곳이 앉아 객을 맞이한다. 외도는 1969년 이창호·최호숙 씨 부부가 섬을 사들였다가 1995년 4월 14일 외도 해상농원이란 이름으로 개원했다. 2005년 9월부터 ‘환상의 식물원’이라는 뜻을 가진 외도 보타니아(Oedo-Botania)로 이름을 바꾸었다. 2007년 8월 입장객 1000만 명을 돌파하는 등 매년 100만 명 안팎의 관광객이 찾는 거제의 대표적인 명소다.
빨간 기와가 앙증맞은 아치형 정문을 지나 섬 둘레 길을 걷는다. 14만5000여㎡(4만4000여 평)의 천연 동백 숲으로 이뤄진 외도는 섬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식물원이다. 아열대 식물인 선인장, 코코스 야자수, 가자니아, 선샤인, 유카리, 병솔, 잎새란, 용설란 등 3000여 종의 수목이 어우러져 있는 그 풍치는 한국의 파라다이스라 할 만큼 아름답다. 섬에서 흘러나오는 클래식 음악은 또 다른 보너스. 음악에 귀를 기울이며 길을 걷다 보면 마치 파티에서 춤을 추고 있는 듯한 환상에 빠져든다.
10여 분을 걸으니 남국의 멋을 자랑하는 야자나무가 의젓하게 줄지어 서 있다. 그런데 그 모양이 요상하다. 마치 반쯤 물어뜯은 프라이드치킨 다리 조각 같다. 치킨 다리가 줄지어 서 있다고 생각하니 괜스레 배가 부르다. 야자나무를 지나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면 50여 종의 선인장이 있다는 ‘선인장 동산’이 나타난다. 겨울에는 비닐하우스에 들어 있어 그 모습을 볼 수 없었지만 봄이 되면 야외로 얼굴을 슬그머니 내민다.
이국적 향취로 가득 찬 외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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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국적 향취가 물씬 풍기는 외도 보타니아 ‘비너스 가든’.
지중해 한 섬에 와 있는 듯한 착각에 빠져들게 할 만큼 외도는 섬 전체가 이국적 풍취로 가득하다. 외도에서 가장 아름다운 풍광을 자랑한다는 ‘비너스 가든’에 들어서면 더욱 그렇다. 이탈리아에서 수입했다는 10여 개의 조각상이 어우러져 프랑스 베르사유 궁전의 정원을 축소해놓은 듯하다. 비너스 가든에는 2002년 드라마 ‘겨울연가’ 마지막 회 촬영지로 유명한 리스하우스가 있다. 외도를 찾는 관광객 중 일본인이 10%에 이르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아무것도 없는 돌섬이 어떻게 이런 환상의 섬으로 바뀌었을까. 비너스 가든의 개발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다. 조그만 분교가 있던 곳에 잔디를 가꾸고 동백나무를 심어 지금의 절경이 완성됐다. 최소한의 훼손과 제한된 개발로 자연과 인공의 조화로움을 유지하겠다는 설립자의 마음 씀씀이가 이런 환상의 공간을 가능케 한 것이다. 이제 바다 냄새와 꽃향기에 취해 자유로이 정원을 거닐어본다. 이 순간만은 호사로운 왕궁을 거니는 유럽의 왕이 부럽지 않다.
외도 산책로는 마실 나가듯 가벼운 걸음으로 한 시간 남짓 걸으면 섬 전체를 둘러볼 수 있는 코스다. 물론 빼어난 풍광에 눈을 뺏겨 걸음을 멈춘다면 시간은 좀 더 길어질 수 있다. 오감으로 외도를 흠뻑 느꼈다면 이제는 선착장으로 내려가야 할 때. 그 길목에 ‘천국의 계단’이 장엄하게 펼쳐져 있다. 아왜나무와 여러 가지 모양으로 잘 다듬어진 정원수들이 어우러져 아름다운 태피스트리(tapestry)를 만들고 있다. 원래 주민들이 밭을 일구던 자리에 밀감나무 3000그루를 심고 매서운 바닷바람을 막기 위해 방품림으로 심은 편백나무 8000그루가 자연스레 천국의 계단으로 변모했다.
천국의 계단에 들어서면 생의 마지막 길목에 들어선 듯한 느낌을 받게 된다. 계단을 따라 내려가다 보니 양옆으로 다양한 희귀식물이 진한 꽃향기를 내뿜는다. 꾹꾹 감춰둔 생의 비밀이 밝혀지려는 찰나, 어느새 입구에 다다랐다. 짙푸른 파도를 헤치며 다시 도장포 선착장으로 돌아오는 것으로 해금강 여행은 끝이 난다. 명불허전(名不虛傳). 바다의 금강산이란 풍문이 결코 헛말이 아니라는 말이 꼭 들어맞는 곳이 바로 거제 해금강이다.
Basic info.
☞ 교통편
버스 | 서울 남부터미널에서 고속버스를 타고 거제 고현시외버스터미널로 간다(20~30분 배차간격, 4시간 30분 소요). 고현시외버스터미널에서 내려 66번 버스나 택시를 타고 가다 함목몽돌해수욕장에서 내린다.
자동차 | 한남오거리 고가도로에서 경부고속도로 한남 IC → 비룡분기점에서 통영대전 중부고속도로 → 통영톨게이트 지나 거가대교/시청/고현동 방면으로 우회전 → 상동삼거리 우측 방향(1018번 지방도) → 학동삼거리 해금강/남부 방면으로 우회전(거제대로) → 함목삼거리 해금강테마박물관/해금강 방면으로 좌회전(해금강로)하면 도장포 유람선터미널(055-632-8787). 경남 거제시 남부면 갈곶리(도장포) 292-6
코스
함목몽돌해수욕장 → 신선대 → 바람의 언덕 → 도장포 선착장 → 해금강 → 외도 보타니아 → 선인장 동산 → 비너스가든 → 천국의 계단 → 도장포 선착장
쉿, 바람이 잠시 머물면 신라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
경주 동남산 산책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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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산 통일기원전각, 서출지를 지나 봉화골 쪽에 이르면 푸른 하늘을 품은 신선암 마애보살좌상과 만날 수 있다.
1월 15일. 점심식사를 하고 간편한 운동화 차림으로 길을 나선다. 오늘따라 경주 동남산 사적지를 둘러보는 일정이 산책의 범위를 벗어나지 않는 듯 가볍게 느껴진다. 하지만 신라의 보물 길을 걷는다는 역사적 무게감은 절대 가볍지 않다. 몸은 현재, 정신은 과거로 돌리는 제법 환상적인 순간의 끌림이다. 수년 전 SBS 드라마 ‘연개소문’에서 김유신 역을 맡았던 나는 그때를 떠올리며 신라의 기풍이 스며든 이곳을 마음으로 걷고자 한다.
곳곳에 유물 유적 거대한 ‘노천박물관’
남산은 금오산과 고위산 두 봉우리를 비롯해 도당산과 양산이 합쳐져 있다. 동서 4km, 남북 8km에 불과하지만 산에 깃든 문화적 가치만큼은 어느 산에 비교할 수 없다. 남산에는 왕릉 13기, 산성지(山城址) 4개소를 포함해 사지(寺址) 147개소, 불상 118구, 탑 96기, 석등 22기, 연화대 19점 등 무려 672점의 문화 유적이 곳곳에 자리한다. 이 중 44점이 보물, 사적, 중요민속자료 등으로 지정돼 있다. 2000년 12월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돼 그 가치를 세계적으로 인정받았다. 그래서 사람들은 남산을 ‘경주의 심장’이라 부른다. “남산을 오르지 않고 경주를 봤다고 하지 마라”는 말도 그래서 나온다. 역사에 문외한이라도 남산을 오르다 보면 ‘노천박물관’이 따로 없음을 금세 느낄 수 있다. 발에 차이는 게 유물, 유적이다 보니 전설 같은 ‘스토리’도 많다.
전체 남산 중 동남산은 보문단지나 토함산 등에 인접한 서남산 일대보다 덜 알려졌지만 숨겨진 보물이 많다. 조용하게 신라의 역사를 음미하며 걷기에는 서남산보다 이곳이 더 좋다. 동남산은 경주 시내를 기준으로 했을 때 시가지를 마주하고 선 남산의 북쪽 끝 통일기원전각 방향이라 생각하면 된다. 동남산 코스 길의 시작은 국립경주박물관이다. 박물관 입구에서부터 전국 각지에서 몰려든 관광객이 제법 보인다. ‘설마 나를 알아볼까.’ 최근 주말드라마 ‘근초고왕’에서 비류왕 역을 맡은 나를 보고 그냥 지나치는 사람이 많다. 백제왕이라서 모른 체하는 걸까. 모두들 신라의 과거와 현재에 빠져드느라 신경을 빼앗긴 탓이겠지만 그래도 서운한 건 어쩔 수 없다.
박물관을 뒤로하고, 지난해 인기리에 종영된 드라마 ‘선덕여왕’으로 일반에게 널리 알려진 신라의 ‘명물’ 선덕여왕릉으로 발걸음을 재촉한다. 박물관 옆 배반사거리에서 울산 방향으로 500m 정도 가면 이리를 닮았다 해서 이리메라 이름 붙여진 산(낭산(狼山), 104m)이 보이는데 왕릉은 이곳의 중허리에 있다. 산이라고 해봐야 언덕 수준이고, 조금 올라가면 왕릉에서 풍기는 냄새를 맡을 수 있다.
소나무가 빽빽이 들어선 능 옆으로 뻗은 길을 따라 내려오면 50m, 100m마다 사천왕사, 망덕사 터와 벌지지(伐知旨) 등이 이어진다. 일제강점기에 개설된 동해남부선 열차가 교차하고 국도가 지나갔던 사천왕사지(四天王寺址)는 원형이 파괴되고 말았다. 낭산 남동쪽 기슭에 자리해 절묘하게 자연과 어우러진 이곳 절터의 옛 모습을 볼 수 없게 만든 건 다분히 고의적이라는 느낌마저 든다.
월명대사 피리소리 충신 박제상의 외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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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남삼에서 서남산으로 이어지는 절경. 벼랑 끝에서 산 전체를 바라보고 서 있는 용장사지 3층 석탑.
사천왕사지 앞 큰길을 따라 수백m를 걷다 보니 월명대사가 피리를 불며 걸었다는 월명로와 만난다. 여기서 문천(蚊川)을 건너지 않고 왼쪽으로 보이는 길로 가다 보면 반대쪽에 다복솔(가지가 탐스럽고 소복하게 많이 퍼진 어린 소나무)이 무성한 곳이 보이는데, 바로 망덕사지(望德寺址)다. ‘삼국유사’에는 애장왕 5년(804) 망덕사의 목탑 2기가 크게 싸웠다고 적혀 있다. 그런데 그해 우두주(강원 영서지방의 행정구역)에서는 쓰러져 있던 돌이 일어서고, 웅천주의 부포(釜浦)에서는 물이 핏빛으로 변하는 현상이 나타났다고 한다. 사람들은 그것을 괴변(怪變), 국가적인 불상사로 여겨 염려했는데, 실제 그 후 애장왕이 왕위쟁탈전을 벌이다 죽었다고 전해진다. 신라가 극도의 혼란에 빠져 망국의 길을 걷는 계기가 됐던 곳이 이 자리라고 생각하니 비장함이 엄습한다.
다시 문천을 건너 오른쪽으로 향하면 보리사지, 탑곡마애조상군이 나오고 왼쪽으로 큰길을 따라 걸으면 서출지(書出池)가 나온다. 사적 제138호인 이 저수지는 신라 21대 왕인 소지왕(炤知王)이 서출지라는 말 그대로 못에서 얻은 글을 읽고 궁중의 간계를 막았다는 전설이 내려오는 곳이다. 내 마음은 잠깐 신라 눌지왕 때로 돌아가 상념에 잠긴다.
변장을 하고 고구려로 간 충신 박제상(朴堤上)은 볼모로 잡힌 왕의 아우 복호(卜好)를 만나 천신만고 끝에 서라벌로 데려오는 데 성공한다. 하지만 박제상은 집에 들를 겨를도 없이 왜국(倭國)에 잡혀 있는 미사흔(未斯欣)을 구하기 위해 동해 율포(栗浦)로 말을 몰았다. 뒤늦게 소식을 들은 박제상의 부인이 동해로 그를 마중 나갔지만 아무런 자취도 발견하지 못한다. 돌아오는 길, 부인은 서라벌이 바라보이는 모래벌판에 이르자 두 다리를 뻗은 채 넋 놓아 운다. 그 때문일까. 훗날 사람들은 이곳을 장사(長沙)라 부른다. 박제상의 인척이 부인을 일으키려 했지만 뻗은 다리가 돌이 돼 일어나지 못했다고 해서 ‘벌지지’(양지버들, 벋디다리벌)라 부르기도 한다. 돌아나오는 길, 망덕사지 입구 냇가에서 새삼 충신의 의미를 되새겨본다.
망덕사지 입구에서 왼쪽 논둑길을 100여m 지나 화랑교를 건너면 화랑교육원이 나온다. 여기서 잠시 김유신의 어린 시절을 떠올리다 통일기원전각으로 가는 길옆 산기슭으로 발걸음을 옮기니 49대 헌강왕릉, 50대 정강왕릉과 만난다. 왕릉을 보고 다시 서출지로 돌아오니 10여 년 전 어느 여름의 추억이 떠오른다. 천년의 세월 지나면 저렇게 될까? 묵은 배롱나무 둥치에는 각혈을 하듯 붉은 배롱꽃이 뭉텅뭉텅 무더기로 피었다. 그날은 먼 산안개가 겹겹으로 산허리를 타고 왔고, 는개(늘어진 안개라고 할까)가 수만 뿌리 연꽃을 촉촉이 적시고 있었다. 생각만 해도 숨이 막힐 듯이 조여드는 고요한 연못 속에 온갖 기기묘묘한 갖춤이 있었다. 배롱꽃과 수련이 연못을 싸고 있는 모습을 가슴에 안고 서울로 올라온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러나 지금은 한겨울. 몇 년 전 배롱꽃은 생명을 다해 시들고, 수련도 뿌리를 땅속에 박고 깊이 잠들었다. 칼바람 소리 잠재우고 거친 황초를 다스린 후 수련은 제철이 되면 다시 돌아올까.
탑골마애조상군(부처바위)을 가기 위해서는 처음 왔던 문천 쪽으로 되돌아나와야 한다. 둑길을 따라가면 마을이 나오는데, 거기서 왼쪽으로 접어들어 계곡을 조금 거슬러 올라가면 옥룡암(불무사)이 나온다. 이 절은 일제강점기에 민족시인이었던 이육사가 지병을 치료하면서 ‘청포도’ 시를 지은 곳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경내의 툇마루가 있는 방을 지나 몇 걸음 떼면 불쑥 눈앞에 높이 10m의 바위가 나를 가로막는다. 이 바위가 바로 부처바위다. 부처바위엔 사방 전면에 불교 세계의 갖가지 형상이 새겨져 있다. 탑, 불상, 승려 외에 비천상, 사자상도 있는데 그 수가 30개가 넘는다.
왜 신라인들은 사방불(四方佛·동방 약사우리광불, 서방 아미타여래불, 남방 석가모니불, 북방 비로자나불) 외에 이러한 형상을 새겼을까. 이는 단순히 서쪽에 이상향이 있다는 아미타불의 정토, 서방정토를 표현한 게 아니라 정토를 향한 속인들의 마음을 상징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부처바위는 암자를 마주보고 있는 북쪽 암벽을 중심으로 조성된 듯 이면에 석가여래좌상이 있고, 그 좌우에 크고 화려한 탑을 배치했으며, 각각 한 마리의 사자가 지키고 있다. 부처님 위에는 천개(天蓋)가 있고 그 위에는 비천상(飛天像)이 있으니, 석가여래를 중심 삼은 부처님 세계를 나타낸 게 아닌가 싶다. 2개의 탑은 목탑으로 보이며 기단부, 탑신부, 상륜부를 완전히 갖췄다. 특히 상륜부는 노반, 용차, 보주에 이르는 전 부분이 나타나 있어 신라 목탑을 연구하는 데 귀한 자료가 된다. 동탑은 9층이고 서탑은 7층이다.
어머니처럼 덕성 있고 온화한 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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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망국을 예언했던 망덕사지의 당간지주.
부처바위의 서면은 면적이 작아 불상 1구와 불상 주위의 장식물, 그 위를 나는 비천(飛天)상이 그려져 있다. 3개로 갈라진 바위가 3면을 이루는 부처바위의 동면은 산으로 오르는 길가에 있다. 산으로 오르는 가파른 언덕에 자리하다 보니 가장 낮은 지면에서 솟은 암벽의 높이가 10m가 넘는다. 여기에는 삼존불이 연화대에 앉은 모습이 새겨져 있다. 앞에는 향로를 받든 수도인이 있고, 부처님 머리 위에는 비천들이 하늘에서 내려온다.
부처바위에서는 어디서도 볼 수 없는 성불 과정 그리고 과거, 현재, 미래 3세 부처님 세계를 담은 독특한 조각이 눈에 들어온다. 남면 바로 앞에는 여래보살 1구가 있고, 기도하는 스님이 조각된 바위가 있다. 주위에는 3층 석탑의 탑재와 석등 자리 등이 있다. 금강역사가 조각된 문주형(門柱形)의 석주도 있다.
옥룡암에서 서쪽으로 능선을 넘으면 불곡(佛谷)이 있다. 여기엔 감실(불교·유교·천주교 등 종교에서 신위(神位) 및 작은 불상·초상 또는 성체(聖體)를 모셔둔 곳)처럼 석굴 안에 불상을 모셔놓았다. 불상은 약간 숙인 얼굴에 수줍은 듯 미소를 띤 표정이 친밀감을 느끼게 한다. 머리에는 혹 같은 불정(佛頂)이 솟아 있다. 두 손은 소매 속에 들어가 있으며, 법의는 넓게 주름이 져서 두 무릎 밑까지 흐른다. 남산의 불상 중에서도 가장 오래됐다는 이 불상을 두고 선덕여왕을 모델로 했다느니, 불교가 우리나라에 들어오기 전 도교의 흔적을 말한다느니 호사가들의 전언이 적잖다. 분명한 건 어머니처럼 덕성스럽고 온화한 불상의 분위기에서 신라 조상의 모습을 떠올릴 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한때 사업에 손을 댄 적이 있다. 세월이 흘러 참담한 패배를 맛보고야 장사와 경영의 차이를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다. 그때 나는 이곳 남산을 찾았고, 목 없는 불상을 보며 저렇게 천년을 인고하며 기다리는 자세에서 깊은 감동을 받았다. 연꽃 자욱한 서출지에서 한없는 여유를, 부처바위에서 준비된 자의 갖춤을, 그리고 불곡 감실 불상에서 어머니의 사랑을 가슴 깊이 느꼈다.
나는 남산을 찾으면서 새로운 발견을 한다. 경주 남산. 그것은 아름다운 마음의 출발이다. 찢기고 상처 난 마음을 풀어놓으면 남산은 부드럽게 다가와 속삭여준다. 두세 시간 걸었다는 성취감은 가장 작은 만족일 뿐이다. 시간이 허락하는 대로 서남산, 북남산 가리지 않고 KTX를 타고 와서 오후 한때 즐기고, 다시 서울로 돌아가 일상에 몰두할 것이다. 마음 같아선 매일 반복하고 싶다. 남산이여, 영원하라.
Basic info.
☞ 교통편
대중교통 | 서울-신경주 KTX(5시 30분부터 30분~1시간 간격 운행, 2시간 소요) → 시내버스 50, 51, 60, 700번(10분 간격) → 고속터미널 → 시내버스 11, 600, 601, 603, 604, 605, 607, 608, 609번 → 국립경주박물관
서울-경주고속버스터미널(6시 5분부터 25분~1시간 간격 운행, 4시간 30분 소요) → 시내버스 11, 600, 601, 603, 604, 605, 608, 609 → 국립경주박물관
자동차 | 서울 → 경부고속도로 → 경주IC → 국립경주박물관
코스
국립경주박물관 → 낭산 → 선덕여왕릉 → 사천왕사지 → 망덕사지 → 서출지 → 벌지지 → 화랑교육원 → 헌강왕릉 → 서출지 → 부처바위 → 불곡(5km, 3시간 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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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은 변함없이 묵언정진 인간만이 늘 분주하구나 |
지리산 둘레길 산청 수철마을~갈티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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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철마을~갈티재 구간의 시작 지점인 수철마을 입구.
빠르고 높고 넓고 편한 길을 버리고
일부러 숲길 고갯길 강길 들길 옛길을 에둘러
아주 천천히 걷고 또 걸어서 그대에게 갑니다
잠시라도 산정의 바벨탑 같은 욕망을 내려놓고
백두대간 종주 지리산 종주의 헉헉
앞사람 발뒤꿈치만 보이는 길 잠시 버리고
어머니 시집올 때 울며 넘던 시오리 고갯길
장 보러 간 아버지 술에 취해 휘청거리던 숲길
애빨치 여빨치 찔레꽃 피는 돌무덤을 지나
밤이면 마실 처녀총각들 물레방앗간 드나들고
당산 팽나무 달 그늘에 목을 맨 사촌누이가
하루 종일 먼 산을 바라보던 옛길
그 잊혀진 길들을 걷고 걸어 그대에게 갑니다
<이원규 ‘지리산 둘레길’ 중에서>
산청(山淸)에 눈이 내렸다. 지리산 머리가 희끗희끗 백발로 변했다. 지리산 아래 산청은 양지바른 땅이다. 눈이 와도 봄눈처럼 금세 녹아버린다. 눈은 응달에만 한 줌씩 웅크리고 있다. 산청은 지리산에서 가장 높은 천왕봉(1915m)을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오를 수 있는 땅이다. 겨울 지리산은 맑고 쇄락하다. 공기는 차고 알싸하다. 강물은 얼어붙었다. 물은 군데군데 쫄쫄 흐른다.
구제역 파동 둘레길 공식 폐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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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덕산은 온통 감나무 천지다. 이곳 감은 고종시(高宗枾)다. 보통 감보다 잘고 씨가 없고 맛이 달다. (아래) 고둥과 산나물이 어우러진 삼거리식당 정식.
요즘 지리산 둘레길 산청 수철마을~갈티재 구간(47.1km)은 한적하다. 한동안 산청 둘레길은 북새통이었다. KBS 2TV ‘1박2일’ 팀이 다녀간 뒤로 인기몸살을 앓았다. 개그맨 이수근이 걸었던 동강~수철마을 구간(11.9km)은 서울 명동이나 마찬가지였다. 전국 각지에서 사람들이 몰렸다. 수철마을은 주차장이 모자라 아우성이었다. 관광객을 가득 실은 대형 버스들은 설 곳이 없어 뱅뱅 겉돌았다. 마을 개들은 짖다가 목이 쉬어 풀이 죽었다.
산청 둘레길은 공식적으로 문을 걸어 잠갔다. 구제역 파동 때문이다. 그렇다고 걷기꾼들이 안 갈 리가 없다. 발이 근질근질한 걷기꾼들은 ‘소리 없이 살그머니’ 둘레길을 다녀간다. 산청군에서도 그걸 물리적으로 막을 수 있는 방법이 없다. 걷기꾼들과의 ‘느슨한 공존’인 셈이다. 산청군은 1월 25일 현재 ‘구제역 청정지역’이다. 일단 둘레길 걷기꾼들은 방역에 철저해야 한다. 스스로 조심해야 한다. 산청군도 이들을 대상으로 적극적으로 방역 대책을 세워야 한다. 걷는 것이 결코 먹고사는 것보다 우선일 수 없다.
동강~수철마을 구간은 계곡을 따라 걷는 길이다. 제법 높은 고개가 2개나 있고, 폭포도 있다. 흙길보다는 시멘트 임도와 아스팔트길이 많다. 어르신들은 오를 때보다 내려갈 때 더 힘들다. 그만큼 무릎에 압박을 많이 받는다. 스틱은 필수다. 내리막에선 그만큼 무릎의 부담을 덜어준다.
겨울 지리산은 뼈만 남았다. 둘레길도 바늘잎 소나무만 빼놓고 모두가 꾀를 벗었다. 상수리나무, 떡갈나무, 신갈나무, 졸참나무, 굴참나무, 갈참나무 등 참나무 밑에는 도토리 껍질이 수북하다. 다람쥐, 멧돼지 등의 다급한 식사 흔적이다. 먹을 게 부족하니 쭉정이 이삭이라도 주워 먹어야 한다. 올해처럼 도토리가 흉년이면 산짐승은 죽느냐 사느냐의 보릿고개를 넘어야 한다. 이제 봄은 머지않았다.
단속사 옛터와 겁외사를 찾아온 겨울바람
수철마을에서 성심원까지는 마을을 지나 경호강을 따라 가는 길이다. 산청읍내의 옆구리를 거쳐 간다. 지루하다. 강바람이 제법 맵다. 오른쪽에 웅석봉(1099m)이 말없이 굽어보고 있다. 길은 성심원을 지나 아침재부터 거의 수직 오르막이다. 숨이 가쁘다. 아침재~어천마을~원정마을까지 약 13km 구간은 호젓한 숲길이다. 바람이 “윙~윙~” 깔깔대며 지나간다.
구름마을 운리(雲里)엔 단속사(斷俗寺) 옛터가 있다. 단속사는 글자 그대로 ‘속세와의 인연을 끊은 땅’이다. 성철스님(1912~1993) 생가 터에 지은 겁외사(劫外寺)도 비슷한 뜻이다. ‘시간 밖의 절’인 것이다. 겁외사는 산청 단성면 묵곡리에 있다. 단속사 터엔 탑만 덩그러니 남아 있다. 운리 일대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토종매화가 2그루나 있다. 정당매와 원정매가 그것이다. 남명 조식 선생이 심은 산천재의 남명매와 함께 ‘산청3매’라 불린다.
정당매는 고려시대 문인 강회백(1357~1402)이 젊은 날 단속사에 심었다는 매화다. 강회백은 정당문학(政堂文學)이라는 고위직에까지 올랐던 선비. 정당매는 산청군 단성면 운리 탑동 단속사 터에 있다. 현재 3개 줄기가 외과수술을 받고 남아 있지만 거의 고사 상태다. 봄마다 원줄기에서 뻗어 나온 손자줄기에서 꽃망울을 토해내고 있다. 원정매는 원정(元正) 하즙(1303~1380)이 심었다는 매화다. 정당매가 있는 탑동 윗동네 원정마을에 있다. 원줄기는 말라 죽었으나 밑둥치 옆에서 가지가 나와 분홍꽃을 토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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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청군 금서면 화계리의 전(傳)구형왕릉. 금관가야 마지막 왕인 구형왕(재위 521~532)의 능으로 전(傳)해 내려온다. 그는 ‘나라를 보존하지 못한 죄인이니 돌로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남명 조식 선생의 산책 코스 백운계곡
남명매는 1562년 남명(南冥) 조식이 61세 때 산천재 앞뜰에 심은 홍매다. 남명매는 아직도 헌걸차고 꼿꼿하다. 봄마다 사진작가들의 단골 주인공이다. 향기도 은은하고 그윽하다. 토종매화는 꽃이 작다. 꽃도 띄엄띄엄 성글게 돋는다. 향이 은은하고 오래간다. 검버섯 마른 명태 같은 몸에서 어느 날 화르르 꽃을 토해낸다. 섬진강변의 매화는 대부분 매실을 따기 위해 양계장 닭처럼 ‘대량 양식’을 하는 꽃이다. 일본 개량 매화다. 꽃이 덕지덕지 붙는다. ‘매화나무’라기보다는 ‘매실나무’인 셈이다. 고고한 기품이 덜하다. 향기도 오래가지 않는다. 벚꽃처럼 우르르 피었다가 우수수 진다.
백운계곡은 조식 선생의 산책 코스다. 그는 산천재에서 제자들을 가르치다가 머리를 식히려 이곳을 찾아 노닐었다. 그의 글씨 ‘白雲洞(백운동)’ ‘龍門洞天(용문동천)’ ‘嶺南第一泉石(영남제일천석)’ 등이 바위에 새겨져 있다. 마근담(摩根潭)계곡은 ‘마의 뿌리처럼 곧은 골짜기’다. 물이 맑다. 백운계곡~마근담계곡 구간 둘레길은 겨울철에 한해 문을 닫는다. 눈과 빙판길 미끄럼으로 사고가 염려되기 때문이다. 걷기 도사들의 안내가 필요한 구간이다. 단체로는 몰라도 1,2명이 가는 것은 무리다. 길은 비교적 잘 정비돼 있지만 가파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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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속사지삼층석탑.
지리산은 겨울에 보는 게 제격이다. 뼈만 남아 황소처럼 웅크리고 있는 산. 수천 년 동안 묵언 정진하고 있는 산. 산은 말이 없고, 그 아래 사는 사람들은 늘 분주하다. 도대체 무슨 말이 그렇게 많은가. 무엇 때문에 그렇게 앙앙불락하는가. 거친 말은 하늘을 찌르고 분노의 소리는 차고 넘친다.
겨울 지리산 둘레길은 호젓하다. 혼자 걷다 보면 분노에 찌든 내가 보인다. 왜 그리 살았는지 부끄러워진다. 산청 덕산은 감나무 천지다. 감나무 끝엔 까치밥이 달려 있다. 검은 나뭇가지 위 붉은 꽃이 흔들린다. 그것은 여유다. 배려다. 그렇다. 모든 게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헛된 것’이다.
Basic info.
☞ 교통편
고속버스 | 서울 → 진주(진주에서 산청행 버스)
시외버스 | 서울남부터미널(3시간 소요)
자동차 | 서울 → 경부고속도로 → 대전통영고속도로 → 산청IC
산청에서 수철마을까지 버스로 10분 소요. 산청군내버스(055-973-5191), 산청버스터미널(055-972-1616)
코스
수철마을<1.3km> → 지막마을<2.9km> → 대장마을<2.4km> → 산청고교<0.5km> → 내리교<1.2km> → 내리한밭<1.5km> → 바람재<2.3km> → 풍현(성심원)<2.0km> → 어천마을<2.7km> → 헬기장<6.0km> → 점촌마을<1.2km> → 탑동마을<1.4km> → 원정마을<5.7km> → 백운계곡<3.0km> → 마근담계곡<3.9km> → 사리(고마정)<1.8km> → 사리(천평표)<3.2km> → 중태마을<1.9km> → 유점마을<2.2km> → 갈티재
먹을거리
고둥 전문 삼거리식당(055-973-2663)
메기찜 자라탕 전문 산청읍내 강변식당(055-973-2346)
해물콩나물밥 보쌈, 낙지전복탕 전문 덕산의 ‘수풀 林’(055-972-4066)
문의
산청군산림녹지과(055-970-6900), (사)숲길(055-884-0850)
지리산정신 남명(南冥) 조식(曺植) 지리산이 품고 키워낸 ‘칼 찬 선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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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명 조식이 심은 홍매. 남명 조식(1501~1572)은 조선 선비의 으뜸이다. ‘칼 찬 선비’다. 그는 산림처사를 자처하고 평생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다. 그는 선비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온몸으로 보여줬다. 그는 ‘선비는 천자(天子)조차도 마음대로 신하로 삼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선비는 인생의 꽃이요, 국가의 원기(元氣)이며, 민족의 마지막 보루’라고 굳게 믿었다. 선비가 글공부를 하는 것은 실천하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제자들에게 ‘알지 못하는 것을 걱정하지 말고, 실행하지 않은 것을 걱정하라’고 강조했다. 동갑내기 이황(1501~1570)과 생각이 전혀 달랐다. 이황은 어디까지나 학문을 이론으로서만 추구했다. 공부 잘하고, 말 잘 듣는 착한 ‘범생이’ 스타일이었다. 조식은 이황에게 충고의 편지를 썼다. “요즘 공부하는 자들을 보건대 손으로 물 뿌리고 빗자루질하는 절도도 모르면서 입으로는 천리를 말해 헛된 이름이나 훔쳐서 남들을 속이려 합니다. …십분 억제하고 타이르심이 어떻습니까?” 조식은 성리학만 고집하지 않았다. 도교, 불교, 양명학 등도 거리낌 없이 받아들였다. 그는 평생 어떤 스승으로부터도 일정하게 가르침을 받은 적이 없다. 그만큼 마음이 활짝 열려 있었다. 선비는 글공부뿐 아니라 활 쏘고 말 달리는 것도 해야 하며 음양, 천문지리, 의약도 두루 알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의 제자 중에서 임진왜란 당시 의병을 일으켜 싸운 사람이 60여 명이나 됐다. 정인홍, 곽재우, 김면 3대 의병장이 모두 그의 제자였다. 남명학파와 퇴계학파는 1589년 기축옥사를 계기로 북인과 남인으로 갈라져 정치적, 사상적으로 대립했다. 그러다가 1623년 인조반정 이후 북인은 대대적으로 숙청을 당했고 남인은 서인의 붕당정치 파트너로 그 맥을 이어갔다. 조식은 임금에게도 거침없이 할 말을 다 했다. 목에 칼이 들어와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명종(재위 1545~1567)에게 “전하의 국사가 이미 잘못되고 나라의 근본이 망해 하늘의 뜻이 떠나갔고 인심도 떠났습니다”라고 하는가 하면 “자전(慈殿·명종의 어머니 문정왕후)께서는 생각이 깊으시지만 깊숙한 궁중의 한 과부에 지나지 않고, 전하께서는 어리시어 단지 선왕(중종)의 한낱 외로운 후사(後嗣)에 지나지 않습니다”라고 직격탄을 날렸다. 국사를 좌지우지하는 문정왕후는 한낱 아녀자에 지나지 않고, 임금인 명종은 어린 고아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조식이 마흔셋일 때 중종(재위 1506~1544)이 죽었다. 조식은 시 한 수를 지어 감회를 드러냈다. “한겨울에 베옷 입고 바위굴 속에서 눈비 맞으며/ 구름에 가려진 햇살도 쬐어본 적 없건마는/ 서산으로 해가 진다고 하니 몹시 슬프구나!” 중종의 신하도 아니었고, 중종으로부터 손톱만큼의 은혜조차 받은 적이 없지만, 그래도 백성 된 도리로 슬픔을 이기지 못하겠다는 것이다. 조식은 열여덟 살 때 절에서 책을 읽다가 조광조(1482~1519)가 사약을 받아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기묘사화). 숙부 조언경도 그에 얽혀 죽임을 당했다. 1545년 마흔네 살 땐 절친한 벗인 이림, 곽순, 성우가 을사사화에 연루돼 죽었다. 과거시험에 뜻을 접은 이유다. 조식은 지리산을 닮았다. 그는 평생 지리산에 17번이나 올랐다. 그는 지리산을 무릉도원이라고 생각했다. “천석의 무게를 가진 큰 종을 보게나/ 크게 치지 않으면 소리가 없네/ 어떻게 하면 저 두류산처럼/ 하늘이 울어도 울지 않을 수 있을까?”라고 시를 짓기도 했다. 그는 나이 육십에 지리산 아래 덕산에 들어가 산천재(山天齋)를 짓고 제자를 가르쳤다. 산천은 ‘하늘이 산 가운데에 있는’ 주역의 대축괘(大畜卦)를 의미한다. 강건하고 독실하게 마음을 닦아, 날마다 그 덕을 새롭게 한다는 말이다. 조식은 1572년 덕산 산천재에서 일흔하나에 눈을 감았다. 그는 제자들에게 말했다. “나의 이름 앞에 어떤 벼슬도 쓰지 말라. 오직 ‘처사(處士)’로 쓰는 게 옳다. 만약 벼슬을 쓴다면 이는 나를 버리는 것이다.” | | |
원없이 쉼없이 바람 맞았다, 제주의 속살 보는 값으로 |
제주도 올레길7코스 |
대단한 바람이었다. 바닷가 돌섬 사이를 걸을 때 갑자기 바람이 불었는데, 키가 170㎝ 넘는 기자도 중심을 잃고 비틀거리다 돌에 무릎을 긁혔다. 바람을 정면으로 맞으며 걸을 때는 ‘이러다 얼굴이 뚫리는 건 아닐까’ 걱정했을 정도. 바람은 제주의 삼다(三多)에 이름을 올릴 자격이 충분했다.
하지만 걸음을 멈출 수는 없었다. 정수리에 따뜻하게 내리쬐는 햇볕이 반가웠고, 눈앞에 차례로 펼쳐지는 다양한 제주도의 풍광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걷다 보니 미운 정이라도 든 건지, 밉기만 하던 제주도의 바람이 시원하게까지 느껴졌다. 그 바람에 모든 걱정과 근심이 날아가는 기분. 나라는 작은 인간, 그 홑겹이 그대로 드러나는 느낌이랄까.
제주의 자연과 생활 집약해놓은 코스
올레길은 대한민국에서 가장 유명한 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혹자는 “제주도 관광은 올레길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고 말한다. 2007년 문을 연 올레길 덕에 2010년 제주도는 처음으로 ‘연간 관광객 700만 명 시대’를 열었다. 커플티를 맞춰 입은 신혼부부의 빈자리는 등산화에 트레킹 복장의 중장년이 채웠다. 관광 코스만 콕 찍듯 갔다 와서는 ‘볼 것 없다’고 실망하는 기존의 여행과 다르다. 올레길은 해안선을 따라 걸으며 ‘놀멍 쉬멍’ 제주도의 속살을 바라볼 수 있다. 사시사철 좋은 올레길이지만 겨울 올레길은 그만의 매력이 있다. 겨울 올레길의 키워드는 바람이다.
2011년 1월까지 올레길 17개 코스가 문을 열었다. 각 코스의 길이는 8~19㎞로 가장 긴 코스가 7시간 걸린다. 오름과 바다가 이어지는 풍경을 볼 수 있는 1코스(시흥~광치기),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해안산책로로 꼽히는 ‘큰엉 경승지’를 지나며 난대(暖帶) 식물이 울창한 5코스(남원~쇠소깍), 제주 농촌 풍경을 마음껏 즐길 수 있는 14코스(저지~한림) 등 코스마다 볼 수 있는 풍경이 다르다. 이 가운데 가장 많은 사람이 찾고 제주의 자연과 생활을 집약적으로 느낄 수 있는 길이 바로 7코스, 외돌개~월평이다.
7코스의 시작 지점인 외돌개까지 가는 대중교통은 없다. 제주국제공항에서 서귀포행 리무진(600번)을 타고 뉴경남호텔 앞에서 내린 뒤 택시를 타는 게 가장 좋다. 출발점이 중문이나 서귀포 시내라면 바로 택시를 타는 게 낫다. 기사에게 외골개 혹은 7코스 시작 지점에 데려다 달라고 하면 된다.
외골개 입구에는 제주올레 안내소가 있다. 올레길을 완주할 때마다 스탬프를 찍는 패스포트(1만5000원), 상큼한 색깔이 인상적인 ‘당근밭 스카프’(6000원), 제주도 여성들이 손으로 ‘한 땀 한 땀’ 꿰매 만든 조랑말 모양 인형(1만5000원) 등 제주올레 기념품을 판매한다. 기분 좋게 기념품을 구경하고 무료 지도 한 부를 챙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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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제주 올레의 상징인 조랑말 ‘간세’. 게으름뱅이라는 뜻의 제주어 ‘간세다리’에서 따온 말로 천천히 느릿느릿 걸으라는 뜻이다. 머리가 향한 쪽이 길의 진행방향이다. (오른쪽) 돔베낭길에 벌써 유채꽃이 피었다.
외돌개 할망 아직도 바다를 향한 그리움
바다를 바라보며 길을 따라 걷다 쑥 솟아오른 바위 하나를 만났다. 손 뻗으면 잡힐 것처럼 크고 생생했다. 바로 외돌개다. 외돌개는 ‘외롭게 서 있는 바위’라는 뜻으로, 바다 가운데 우뚝 서 있다. 약 150만 년 전, 화산이 폭발하면서 용암이 섬의 모습을 바꿔놓을 때 생성된 바위다. 오랜 시간만큼 켜켜이 쌓인 전설도 많다. 고려 말기 이곳에서 말을 키우며 살던 몽골족은, 고려에서 중국 명나라에 제주마를 바치기 위해 몽골족을 수탈하자 이에 반발해 목호(牧胡)의 난을 일으켰다. 최영 장군은 이들을 토벌하기 위해 외돌개를 장군의 형상으로 치장했고, 목호들은 외돌개를 보고 대장군이 진을 친 것으로 여겨 모두 목숨을 끊었다고 한다. 이 덕에 외돌개는 장군석(將軍石)이란 별칭도 얻었다.
더욱 애절한 버전의 전설도 있다. 한라산 밑에서 서로 의지하고 살던 한 노부부. 어느 날 할아버지가 고기를 잡으러 바다에 나갔다가 풍랑을 만나 돌아오지 못하자 할머니가 바다를 향해 “하르방, 하르방” 하고 외치다 결국 그 자리에서 바위가 됐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할망바위’라고도 불리는 외돌개는 가만히 보면 할머니의 주름진 얼굴과 ‘하르방’을 외치는 입을 닮은 듯하다. 그 왼편으로 납작 엎드린 바위는 할아버지바위로, 할아버지의 시신이 떠올라 바위가 됐다고 한다. 과학적 근거도, 역사적 배경도 없지만 사람의 마음을 잡아끈다.
산책로를 따라가다 보면 관광객이 바글바글하다. 바로 한류 드라마 ‘대장금’ 촬영지. 장금(이영애 분)의 스승 한상궁(양미경 분)이 제주도 유배길에서 장금이에게 업힌 채 숨지는데, 그 장면을 바로 외돌개에서 찍었다. 현재는 드라마 사진이 담긴 표지판만 덩그러니 있다. 한국인은 물론 중국, 일본, 중동 등 해외 관광객도 많았다. 드라마 때문에 이곳을 찾은 관광객들은 제주의 아름다운 풍경이라는 더 큰 선물을 받았다.
다시 길을 재촉해 ‘돔베낭길’에 닿았다. ‘돔베’란 제주어로 도마, ‘낭’은 나무를 뜻한다. 이 길에 도마처럼 잎이 넓은 나무가 많아 생긴 이름이다. 상록수가 울창해야 할 길이지만 겨울이라 군데군데 색 바랜 잎과 엉킨 나무줄기만 가득했다. 바람은 여전히 거셌다. 바닥의 흙이 조금씩 날리면서 눈이 따끔거렸다. 때로는 왼편으로 펼쳐진 빛나는 바다를 볼 여유도 없었다.
그런데 저 멀리 작고 노란 무언가가 반짝거렸다. 가까이 가서 보니 유채꽃이었다. 키 큰 나무들은 색을 잃고 덩치 큰 기자도 눈도 못 뜰 만큼 바람이 부는데, 저 한 뼘 조각볕이 닿는 곳에는 작은 유채꽃이 피어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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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정포구를 지나는 길. 흰 갈매기떼가 반긴다.
조각볕에도 피어나는 유채꽃
바다의 색은 매번 다르다. 장소, 각도 그리고 보는 이의 마음에 따라 다르다. 멀리 바라다보이는 바다는 한없이 맑고 푸르다. 가까이서 보는 바다는 회색빛이다. 파도는 희게 부서지고 바닥은 검다. 제각기 색을 뽐내는 바다를 보고 또 보면서 넘칠 만큼 마음에 담았다.
40분가량 걸으니 수봉로에 닿았다. 이름부터 정겨운 수봉로는 제주도민 김수봉 씨가 2007년 12월 올레꾼들을 위해 삽, 곡괭이만으로 만든 길이다. “올레꾼이 가장 사랑하는 자연생태길”이지만 겨울에는 푸른 숲을 볼 수 없어 아쉽다.
제주의 겨울은 흰색이 아니다. 제주도는 몇몇 경우가 아니면 한파에도 기온이 영상이라 눈이 잘 오지 않고, 눈이 와도 금방 녹는다. 길을 걷던 날도 서울에는 기록적인 폭설이 왔지만 제주에는 10분가량 눈가루만 날렸을 뿐이다. 대신 제주의 겨울은 갈색이다. 색을 숨기고 몸을 숙인 나무들을 벗하며 걷다 보면 덩달아 겸손해진다.
이젠 길이라기보다 돌밭이다. 제주도 특유의 화강암이 해안을 따라 널려 있다. 요리조리 바위를 밟으며 한 걸음씩 내디뎠다. 갑자기 훅 불어오는 바람에 정신을 못 차리고 휘청거렸다. 왼편 바다는 이 상황을 아는지 모르는지 평온하기만 했다. 야속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더 조심스럽게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뎠다. 그렇게 1시간여, 마침내 법환포구에 다다랐다.
법환포구의 한 식당에서 점심식사를 했다. 늙은 호박을 넣고 끓인 갈치국과 짭조름한 옥돔구이를 반찬으로 보리밥 한 공기를 뚝딱 먹어치웠다. 제주도 소주인 ‘한라산물 순한소주’도 한 병 곁들였다. 물이 좋아서인지 소주 특유의 알싸함이 덜했다. 조금은 알딸딸해서 따뜻한 온돌방에 거의 눕듯 기대앉으니 몸이 사르르 녹아내렸다.
음식점 앞 그림이 눈길을 잡아끌었다. 어린아이가 물고기를 안고 있는 그림은 화가 이중섭의 작품. 이중섭은 평안남도 정주 출신이지만 ‘제주도의 화가’다. 직접 물어보진 않았지만 이중섭도 왠지 그 애칭을 좋아할 것 같다. 평생 가난과 불안 속에서 살았던 이중섭이 가장 행복했던 시기는 일본인 아내와 두 아이, 그렇게 네 식구가 제주도의 5㎡(약 1.5평) 내외의 작은 토방에서 살았던 1년 남짓이었다. 기자가 먹은 갈치국도 일품이었지만, 이중섭의 네 식구가 이마를 마주하고 먹었을 갈치국보다는 덜했을 것 같다.
시원한 갈치국 이중섭도 맛보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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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평포구 지나 있는 해녀상. 제주도 엄마들의 모습이다.
길 가운데 해녀 동상이 눈길을 잡았다. 막 물에서 나온 듯 지친 얼굴에 뱃살 접힌 것까지 표현돼 재미있다. 사시사철 물질 하나로 가족을 부양한 제주도 엄마들의 모습 그대로다. 일강정 바당올레길에 들어서니 다시 자갈밭이 펼쳐졌다. 험하디험한 바위 밭이었던 이 길은 올레꾼들을 위해 일일이 손으로 돌을 골라낸 끝에 검은 돌이 융단처럼 깔린 걷기 좋은 길로 변신했다.
길을 재촉하다 보니 저 멀리 까만 섬 하나가 시야에 들어왔다. 바로 서건도다. 서건도는 썩은 도(島), 즉 썩은 섬이란 뜻이다. 섬 둘레에 해초가 가득해 마치 섬이 썩은 것처럼 보인다. 서건도는 하루 두 번 간조 때마다 뭍에서 섬으로 가는 바닷길이 열린다. 날씨가 좋은 날은 바닷게와 보말을 잡는 해녀들도 볼 수 있다.
길은 제주풍림리조트 안 올레꾼 쉼터로 이어졌다. 걷기에 지친 올레꾼들이 잠깐 앉아 쉬며 커피나 간단한 차를 마실 수 있는 카페도 있다. 풍림리조트 바로 뒤편에는 제주도에서 가장 맑은 물, 강정천이 흐른다. 제주도민의 식수원인 강정천은 1급수로 봄에는 은어도 있다. 추운 날씨도 잊었는지 아이들이 물가에서 첨벙거렸다. 한 아이는 더운지 점퍼까지 벗어던지고 반팔 차림이었다. 새우를 잡았다기에 달려가 봤더니 새끼손가락 한 마디도 안 돼 잘 보이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아이들은 신기한다며 연방 감탄을 했다.
다시 풍림리조트 쪽으로 올라와 길을 이어 걸었다. 왼편으로 꺾어 다리를 건넌 뒤 우측으로 갔다. 강정마을로 가는 길. 사람보다 개들이 먼저 맞았다. 팔자 좋아보이는 개들은 외지 사람에게도 신나게 꼬리를 흔들었다. 아름다운 시골 풍경 속에서 ‘해군기지 결사반대’란 노란 현수막이 눈에 거슬렸다. 2007년 정부는 서귀포시 대천동 강정마을 52만㎡에 걸쳐 전략기동함대 기지를 조성하겠다고 밝혔다. 함정 20여 척과 15만t급 크루즈 선박 2척이 동시에 계류할 수 있는 ‘민·군 복합형 관광미항’을 건설하는 것. 해군기지가 생겨도 이 올레길의 아름다움이 지켜질 수 있을까? 올레길을 지키려는 사람들의 싸움이 안쓰러웠다.
마을을 지날 때 비닐하우스에서 한라봉, 귤, 금귤 등이 탐스럽게 익어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침만 꼴깍꼴깍 삼키다 강정마을 길목에서 한라봉을 직접 맛볼 수 있는 가게를 찾았다. 올레꾼을 대상으로 판매하는 한라봉은 1개에 2000원. 달달하고 시원한 향이 입 안에 번졌다. 또한 필리핀, 홍콩 등에서나 맛봤던 이국적인 과일 용과(dragon fruits)도 있다. 용의 알처럼 붉고 울퉁불퉁한 모양의 용과는 마의 일종으로 단맛이 별로 없는 ‘덜 익은 수박맛’이지만 건강에 좋고 왠지 분위기도 색달랐다.
빨간 등대가 반겨주는 강정포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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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정포구에서 망중한을 즐기는 낚시꾼.
강정마을을 굽이굽이 지나 다시 해안선을 따라 걷다 강정포구를 만났다. 하얗게 늘어진 제방 위에 불쑥 솟은 빨강 등대가 이국적이고 아름다웠다. 그리고 다시 바람에 맞서 길을 재촉했다. 하도 바람이 세다 보니 얼굴뿐 아니라 장갑 낀 손까지 얼얼해졌다. 월평포구에 다다라 길을 오르면 ‘선교사의 집’이라는 펜션이 있다. 이곳에서 콜택시를 불러 여정을 마쳐도 좋고, 1.3㎞ 2차선 도로를 따라 더 걸어 월평마을 아왜낭목 월평 송이슈퍼마켓까지 닿아도 좋다.
송이슈퍼 앞에서 콜택시를 불렀다. 그곳에서 외돌개까지 돌아가는 데 걸린 시간은 딱 13분. 그 짧은 거리를 6시간 동안 돌아 걸으며 많은 생각을 했고, 그보다 많은 바람을 맞았다. 능금보다 붉어진 양 뺨과 거칠어진 손등은 즐거운 겨울 여행에서 얻은 기념품이었다.
Basic info.
☞ 교통편
올레길 7코스 외돌개 시작. 제주국제공항~서귀포행 리무진(600번) 뉴경남호텔 하차, 외돌개까지 택시 이용
문의
7코스 올레지기(010-9887-1044)
홈페이지
www.jejuolle.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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