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류, 술, 멋

김학민의 주류인생

醉月 2010. 2. 11. 08:50

술은 맨 먼저 누가 만들었는가, 원숭이인가 인간인가 신인가
» 헨드릭 골치우스의 판화 <바쿠스>.
호모사피엔스 키키는 여느 날과 다름없이 먹을 것을 찾아 숲 속으로 들어갔다. 행여 돌도끼로 잡을 수 있는 작은 짐승이라도 걸리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않으면 오늘도 나무 열매로 온 식구가 배를 채워야 할 형편이다. 그러나 한나절을 쏘아다녀도 키키의 보잘것없는 사냥 도구에 잡힐 짐승은 한 마리도 만나지 못했다. 오늘도 허탕이군. 할 수 없지. 나무 열매라도 주워가자. 이제 막 돌과 흙으로 도구도 만들어보고 땅에 씨앗도 뿌려보았지만, 거기서 나온 알곡으로 식구들의 주린 배를 모두 채울 수는 없었다.

키키는 문득 며칠 전 불그스름한 열매를 주워먹었을 때 입 안에 가득했던 맛을 기억해내고는 그 나무들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나무에는 원숭이들이 가지가지 매달려 열매를 따먹고 있었다. 키키는 떨어진 열매를 허겁지겁 주워먹어 가면서 한편으로는 식구들을 위해 열심히 열매를 쓸어모았다. 한참을 먹다 보니 배는 부른데 목이 마르다. 바윗돌 우묵 팬 곳에 물이 고여 있다. 물속에는 떨어진 나무 열매들이 뭉개져 있었지만, 원숭이들은 그 물을 잘도 마시고 있다. 키키는 원숭이들을 쫓아버리고는 머리를 숙여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새콤달콤한 느낌이 사르르 목젖을 타고 넘어가는 듯하더니 머리끝까지 뜨거운 기운이 확 뻗쳐 올라왔다. 그리고 그 야릇한 맛은 입 안에 한참 동안 머물러 있으면서 온몸이 공중에 붕 뜨는 느낌을 갖게 했다. 키키는 나무 열매를 대충 챙기고는, 후들거리며 초막으로 돌아와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이처럼 최초로 술을 빚은, 또는 발견한 생명체는 신도 사람도 아닌 원숭이로 추정된다. 바윗돌 움푹 팬 곳이나 나뭇등걸 틈에 자연적으로 떨어지거나 원숭이가 숨겨놓은 과실이 우연히 발효된다. 이것을 처음에는 원숭이가, 나중에는 인간이 먹어보고 맛이 좋아 계속 만들어 먹은 것이 술로 발전했다는 설이다.

프랑스의 문호 빅토르 위고는 “신은 물을 만들었고, 인간은 술을 만들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렇게 단정하면 술의 발명을 놓고 신과 인간 사이에 분쟁이 생기지 않을까?

자연발효는 16도를 넘지 못한다. 16도에 이르면 효모는 더 이상 발효작용을 하지 못하고 죽어버린다. 그래서 나는 16도는 신이 인간에게 허용한 알코올의 최대 임계치이며, 이후 영악한 인간들이 16도 술을 증류하고 증류해 몇십 도짜리 독주로 발전시켰다고 생각한다.

어쨌거나, 서양에서는 로마신화 속의 바쿠스 신이 술을 처음으로 만들었다고 전해오고 있고, 동양에서는 하나라 때 의적(儀狄)과 두강(杜康)이 처음으로 곡류로 술을 빚어 왕에게 헌상했다는 전설이 있다. 또 이집트 신화에서는 오시리스가 사자(死者)의 나라의 왕이 된 뒤 보리로 술을 빚는 법을 최초로 가르쳤다고 하며, 구약성서의 ‘노아의 방주’ 이야기에는 하느님이 노아에게 포도 재배법과 포도주 제조법을 가르쳐주었다고 씌어 있다.

술은 인간의 슬픔을 잊게 하고 기쁨을 배가시키기도 한다. 술은 인간 사이의 경계심을 풀게 하여 사랑의 가교 역할을 하기도 한다. 술은 인간의 용기를 북돋워 진실을 드러내게 하기도 한다. 적당한 술은 인간의 정신적·육체적 기능에 자극과 활력을 주어 건강에 도움을 주기도 한다. 그러나 술은 인간으로 하여금 알코올 뒤에 숨어 태연하게 거짓을 뱉어내게 하기도 한다. 또 술은 인간의 염치를 쫓아내고 짐승의 본성을 드러내게도 한다. 술은 기억을 지워 인간의 일상을 뒤흔들기도 한다. 그리고 지나친 술은 정신적·육체적 기능을 악화시켜 인간을 황폐화시킨다.


이처럼 술은 인간의 정신과 육체를 두 얼굴의 모습으로 지배하고 있다. 인간의 본성 속에 감추어진 복잡하고 미묘한 감정을 이렇게도 저렇게도 드러나게 희롱하는 물질을 왜 인간이 만들어냈겠는가? 물도 신이 만들고 술도 신이 만들지 않았을까? 다만 술이 16도를 넘은 뒤 술의 피폐성이 만연한 것은 신의 뜻을 거스른 인간에 대한 징벌이 아닐까?

 

술이 음식의 필수 코스인 동양과 기호품인 서양, 알코올중독자와의 상관관계는
 
세상이 남자와 여자로 구성돼 있는 것처럼, 다른 한편으로 세상은 술 마시는 사람과 술 마시지 못하는 사람들로 나누어져 있다. 술 좋아하는 사람의 눈으로 보면 천지가 술판이요, 모두가 술꾼으로 보이겠지만, 통계에 따르면 인류의 30% 정도는 아예 술을 못 마시거나 다른 여러 가지 이유로 입에 대지 않는다. 이런 사람들은 대개 종교적 이유나 알레르기 등 신체질환, 알코올을 분해시키는 간 효소의 활성도가 유전적으로 매우 낮아 술을 ‘이기지’ 못하는 이유 등으로 그런 현상을 보이는 것이다.

» 침대에서도 술을 마신다. 서양의 안주 없이 술을 먹는 문화에서 가능한 일이다. 술을 먹다 죽기 위해 라스베이거스로 떠난 남자가 나오는 영화 <라스베가스를 떠나며>의 한 장면.

술이란 존재를 알지 못한 인류도 있었다. 에스키모와 일부 아메리카 인디언,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이 그들이다. 최초의 술은 움푹한 바위틈에 떨어진 열매의 자연 발효에서 시작된 것으로 추정하는데, 에스키모가 살아온 영하 30, 40도의 얼음 벌판에는 과일나무도 없었을 뿐 아니라, 있었다 한들 그 온도에서 자연 발효가 이루어질 수 없었으니 이들이 술을 몰랐던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또 1년 내내 비가 거의 내리지 않아 자연 발효를 위한 적당한 습기를 제공하지 못하는 지역에서 살았기 때문에 일부 아메리카 인디언과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들 역시 술의 존재를 몰랐을 것으로 인류학자들은 추정한다.

이러한 사람들을 제외하면 인류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대부분 술을 즐겨 마셔왔으며, 문명의 발달에 따라 다양한 술의 제조법과 음주 방식, 음주 예절, 그리고 술과 관련한 숱한 도구들을 발전시켜왔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민족에 따라 술을 받아들이는 태도가 각기 다르다는 것이다. 그 하나는 술을 음식의 일종으로 대하는 부류이고, 다른 하나는 술을 술 자체로, 곧 기호품으로 여기는 인간들이다.

동양은 대체로 술을 음식으로 받아들였다. 동양에서는 술이란 식사 때 반주로 마시거나, 술만을 따로 마실 때도 안주(按酒·한자대로 풀이하면 술을 ‘어루만지는’ 음식)를 꼭 곁들여야 했다. 중국의 배갈(고량주)도 알코올 도수가 높기는 하지만, 그들 음식의 필수 코스로 취급된다. 곧 중국 음식은 기름기가 많고 향이 짙은데, 음식이 코스별로 나올 때 그 사이에 배갈을 한 잔 마심으로써 기름기와 향을 목에서 씻어내 다음 코스 음식의 제맛을 즐기게 하는 기능을 하는 것이다. 이에 반해 서양에는 대개 안주 개념이 없다. 영화에서 보듯, 그들은 책상 서랍 안에서, 또는 홈바에서 위스키병을 꺼내 안주 없이 맨술을 잔에 따라 홀짝 마신다.

대체로 보면 곡주나 과일주 등 알코올기가 약한 발효주 문화권은 술을 음식으로 받아들이고, 위스키, 보드카 등 알코올기가 높은 증류주 문화권은 술을 기호품으로 받아들인다. 곧 우리의 막걸리나 일본의 청주, 지중해 연안 국가들의 와인은 음식의 하나로 여겨지고 있지만, 위스키·보드카를 즐겨 마시는 영미·북구·러시아 사람들은 술을 기호품으로 즐긴다.

술을 음식으로 받아들이는 사회는 음주에 대해 비교적 관대한 데 비해, 술을 기호품으로 받아들이는 사회는 술에 대한 통제와 규제가 심한 편이다. 그러나 통계를 보면, 술이 지천으로 널려 있는 ‘술=음식’ 사회가 통제와 규제로 술을 사거나 마시기가 어려운 ‘술=기호품’ 사회보다 술로 인한 사회적 폐해가 적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상의 금주령과 금주운동은 대부분 ‘술=기호품’ 사회에서 일어났다.

또 술을 음식으로 받아들이면, 우선 다른 음식 때문에 술을 많이 마실 수도 없을 뿐 아니라, 안주가 알코올의 흡수를 완화하기 때문에 알코올중독자가 당연히 많지 않다. 동양인보다는 서양인이, 그리고 서양인 중에서도 영미인이나 러시아인들 사이에 알코올중독자가 많은 것도 그 때문이다. 우리나라도 요즈음 알코올중독자가 느는 등 술로 인한 폐해가 증대하고 있어 큰 사회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막걸리, 약주 등 전통 발효주들이 몰락하고 도수 높은 소주·양주가 우리 음주 문화를 휩쓸어버린 결과임이 틀림없다.

 

술이 ‘만병통치약’ 구실을 한 중세 유럽과 알코올중독이 천형의 질병이 된 오늘날
오랜만에 친구들과 둘러앉아 삼겹살에 소주잔을 기울이거나 직장에서 회식이라도 하게 되면 으레 이런저런 건배사들이 나오게 마련이다. 요즘에는 “건배!”라는 고전적이고 교과서적인 건배사는 그리 인기를 못 얻고 있고, 그 술자리를 있게 한 인연이나 동일성에 부합하는, 또는 세태를 반영하는 재치 있는 건배사를 해야만 이목을 끌 수 있다.

그래서 회식에 대비해 재미있고 창의적인 건배사를 철저히 준비하는 사람들도 있다. 순발력이 부족해 톡톡 튀는 건배사를 못하는 사람에게는 ‘위하여!’가 가장 무난한 건배사이다. ‘위하여!’ 앞에 자기의 희망사항이나 지향점, 또는 그 술자리에 모인 사람들의 공통 관심사를 정리해 짤막하게 덧붙이면 그런대로 판을 깨지 않는 건배사가 된다.

그러나 술자리가 무르익어가면 차츰 톡톡 튀는 건배사들은 밑천이 드러나고, 이후는 그냥 ‘위하여!’가 이어지게 되는데, 중년 이상의 세대라면 대개가 ‘(우리들의) 건강을 위하여!’가 단골 메뉴다. 건강을 위해 술을 마신다? 전국의 술꾼들이여,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보라! ‘위하여! 위하여!’를 숱하게 외친 그 다음날 아침의 당신의 머리와 위장을.

» 유럽의 연금술사들은 발효주를 증류한 뒤 신비의 묘약으로서 이 물질을 처방했다. 바로 이것이 인류 역사의 물줄기를 바꾼 증류수의 탄생과 확산이었다.

1만여 년 전 인류가 처음으로 술을 접한 이래, 술은 개인의 일상적 삶에서나 한 사회의 유기성을 유지하는 면에서나 숱한 논란을 야기했다. 특히 술은 그 기능과 관련해 많은 이야기들을 쏟아낸바, 백해무익하다는 한 극단에서부터 적당히 마시면 건강에 이롭다는 설, 심지어 술이 치료약이 될 수 있다는 연구까지 술과 건강과 관련한 담론은 끝이 없다. 그 논란은 정확한 결론 없이 지금도 현재진행형이다.

술이 백해무익하다는 근본주의적 시각은 오늘날과 같이 술의 존재가 인류 사회의 보편적 현상이 된 이상 더 깊은 논리 전개가 먹혀들지 않는다. 적당한 음주가 건강에 도움이 된다는 이야기는 오늘날의 발효주 문화권과 15세기 이전 증류주를 몰랐던 시대에는 당연한 상식이었다. 우리나라에서 술을 높여 약주라 부른 것, 그리고 유럽에서 와인이나 맥주를 건강식품으로 여겨 즐겨 마신 것에서 그 단서를 알 수 있다.

치료약으로서의 술, 술을 이용한 치료법을 ‘에틸로세라피’(ethylotherapie)라 한다. 12세기 아랍인들은 술의 영혼과 같은 술의 주성분 알코올을 알아냈다. 이 물질은 곧 살레르노 학파에 의해 유럽에 알려졌다. 유럽의 수도사·연금술사·이발사·의사들은 서로 다투어 자신들만의 비밀스러운 방법으로 발효주를 증류해 신비의 묘약이자 무병장수의 영약으로서 이 물질을 처방했던 바, 바로 이것이 인류 역사의 물줄기를 바꾼 증류주의 탄생과 확산이었다.

중세 유럽에서 독한 증류주는 젊음을 지켜주고, 쓸데없는 근심을 없애주며, 심장 기능을 강화하고, 복통·마비·치통을 치료해주는 동시에 페스트조차 예방할 수 있는 만능의 물질로 여겨졌다. 술의 주성분인 알코올이 가진 멸균 작용을 감안하더라도, 이렇게 치료약으로서 술이 광범위하게 취급된 것은 약이 흔치 않았던 시대적 상황을 반영한 것이다.


술이 건강에 좋고 웬만한 질병에 모두 약으로 치료될 수 있다는 중세 유럽인들의 생각은 많은 민간요법으로도 번져갔다. 프랑스의 한 인류학자가 수집한 자료에 따르면 프랑스 지방에서 대대로 내려오는 민속 전통에는, 타박상에는 비둘기 똥을 탄 백포도주를 끓여 마시고, 폐병에는 고급 적포도주에 집고양이의 오른쪽 귀에서 뽑아낸 세 방울의 피를 타서 마시면 낫는다는 황당한 처방전도 있다.

적당한 음주는 건강에 도움이 된다는 명제에서 출발해 술이 만병통치약으로 받아들여지면서 세상 천지에 술이 넘쳐나게 되고, 또 그로 인한 천형의 질환 알코올의존증이 만연하게 됐으니, 술을 치료약으로 보는 관점은 이제 폐기돼야 할 것이다. 한 달째 달고 산 감기가 온갖 약으로도 떨어지지 않는다. 오늘도 몸이 오슬오슬 춥고 골이 띵하다. 에라, 소주에 고춧가루 타서 한잔 마시고 푹 자볼까?

 

술을 빚고 생겨난 쾌락과 행복의 DNA, 그러나 쾌락에는 알코올중독 등 대가와 비용이 드는 법
» 자꾸만 먹고 싶네
무슨 잠을 이렇게 많이 잤담. 호모사피엔스 키키는 해가 앞산 중턱에 걸렸을 때에야 간신히 초막에서 깨어났다. 머리가 조금 아픈 것 같지만 기분은 상쾌하다. 아내 키니와 아이들은 곡식 낟알이나 훑으러 갔는지 보이지 않는다. 키키는 문득 어제 초막으로 돌아온 이후 아무것도 먹지 않은 것이 생각났다. 혹 요깃거리라도 있을까 초막 안을 둘러보니 어제 주워왔던 나무 열매들만 덩그러니 남아 있다.

열매 몇 알을 입에 넣어본다. 아, 이 맛! 그렇지. 어제 저 숲에서 이 열매들이 뭉개져 섞인 물을 마셨었지! 키키는 불현듯 그 물을 들이켰을 때 입안에 가득했던 그윽한 향기와, 몸이 붕붕 뜨는 듯한 야릇한 느낌, 그리고 다리가 후들거려 간신히 초막까지 돌아왔던 일들을 기억해냈다. 갑자기 입안에 침이 돈다. 키키는 초막을 나와 부지런히 주위 숲속을 뒤지며 나무 열매가 으깨어진 물을 찾아 헤매었다.

신비의 물을 마시기 위해 매일매일 숲속을 뒤지는 일은 너무나 힘들었다. 어렵게 그 액체를 찾아내도 한 모금 마실 만큼의 양도 안 된다. 이리저리 궁리 끝에 키키는 자신의 보잘것없는 토기 그릇에 나무 열매를 직접 으깨어 이 신비스러운 액체를 양적으로 얻는 지혜를 터득하게 된다. 이 지혜는 키키의 부족 모두에게 전해지게 되고, 모두가 나름의 방법으로 이 액체를 빚어 즐기게 되었다. 오호, 쾌재라! 키키의 이러한 호기심은 인류의 70%에게 술을 빚고 이를 즐기게 하는 DNA를 심어주어 쾌락과 행복을 전해준 것이다.

이후 이 신비스러운 액체는 키키의 아들과 손자, 증손자, 고손자 그리고 수천 년 뒤 키키와는 촌수를 따지지 못할 수많은 그의 후손에게까지 두고두고 이어지며 변증적으로 양과 질을 발전시켜 인류를 즐거움에 빠지게 했다. 이로써 바로 음주자에게는 건강 등 어떤 악영향도 주지 않고, 사회적으로도 용납되는 범위 안에서 음주가 이뤄지는, 인류 초기의 소박한 알코올화가 시작된 것이다.

그러나 쾌락에는 언제나 대가와 비용이 드는 법. ‘즐거움을 위하여!’ ‘건강을 위하여!’ ‘병을 치료하기 위하여!’ 등 온갖 이유와 핑계를 대고 마셔댔던 알코올화의 폐해 또한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지나친 음주, 곧 지속적이고 폭력적인 알코올의 섭취는 신체의 모든 부분에 영향을 미쳐 간질환, 위염, 췌장염, 고혈압, 뇌졸중, 식도염, 당뇨병, 심장병 등 많은 질환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는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또 만성 과음자의 대다수가 알코올성 간질환, 간경화, 지방간, 심근증, 위염 등으로 사망할 확률이 높으며 위암, 식도암, 구강암, 대장암 등 각종 암에 걸릴 가능성도 평균치를 훨씬 웃돈다.

만성 음주자의 종착역은 알코올의존증, 곧 알코올중독이다. 알코올중독은 알코올화의 특수한 현상으로서 술의 금단 증세를 보이는 질병이다. 그러나 알코올중독은 1849년 스웨덴의 의사 마뉴스 후스가 처음으로 그 용어를 사용하기 전까지는 술꾼들의 나쁜 버릇, 곧 오늘날의 술주정 정도로 여겨져왔다. 그래서 그즈음까지는 버릇 나쁜 술꾼들에 대한 대책으로 개인의 자유의지가 유일한 해결책이라고 생각해, 감옥 비슷한 강제 수용 시설을 만들어 자유의지를 제어함으로써 그 골치 아픈 문제들을 해결하려 했다.

알코올중독은 한 인간의 존엄성을 피폐화하고 개인의 삶과 가족의 행복을 갈가리 찢어놓는다. 곧 개인의 비극이자 온 가족의 질곡인 것이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한 공동체에 범죄, 무질서 등 무시하지 못할 폐해와 많은 비용을 부담시키는 사회적 질환이기도 하다. 이것이 하나의 질병으로 간주돼 격리 수용에서 벗어나 약물적 치료법이 개발된 것은 20세기 중반이었다.

그때까지 수천 년 동안 풍류와 멋으로 포장된 술주정으로 스러져간 술꾼들의 운명이 애달프다. 개인의 자유의지만으로 술의 홍수, 술 권하는 사회에 대처하기는 벅차지만, 어쩌랴! 술꾼 자신이 알코올중독의 1차 방어선인 것을. 나를 비롯해 모든 술꾼들에게는 하나 마나 한 소리지만, 덜 마시자, 건강을 위하여!

 

조선은 금주령 내리고도 음주 묵인, 미국은 헌법으로 엄격히 금했으나 밀주만 성행한 결과 낳아
개인이 자신의 뜻으로 술 마시기를 금하고자 결심하면 금주맹세요 금주선언이고, 한 집단이나 사회가 자율적으로 술 마시기를 줄이거나 금하고자 하는 의지와 풍조를 퍼뜨리면 금주운동이다. 또한 봉건사회에서 백성들에게 군주의 판단과 명령으로 술 마시기를 금하게 하는 것은 금주령이요, 근대 입헌국가에서 법률로써 술의 생산과 판매, 소비 전반을 통제하거나 금하고자 하면 금주법이다. 개인이나 집단이 자율적이고 자발적으로 술에 대한 자신의 태도를 보이는 금주맹세, 금주선언, 금주운동 등이 공동체에 끼치는 파장은 그리 높지 않다. 그러나 나라님의 이름으로 내려지고 나라님의 힘으로 닦달을 하는 금주령과 금주법은 역사적으로 한 국가, 한 사회에 숱한 이야기를 남겼으며, 그것이 야기한 사회적 파장과 유산 또한 작지 않았다.

» 조선시대에 강력한 금주령이 여러 번 내려졌지만 잘 지켜지지는 않았다. 신윤복은 <주사거배>에서 양반들이 주막에서 쫓기듯 술을 마시는 모습을 풍자적으로 그렸다.

우리나라에서도 조선시대에 여러 번의 금주령이 있었다. 조선시대의 금주령은 일단은 인본적이었다. 큰 가뭄이나 기근, 흉작이 들면 금주령을 내렸고, 처음에는 왕이나 고관들이 금주의 수범을 보였다. 지도 그룹이 솔선해 근신·절제함으로써 하늘의 노여움을 풀고, 굶주린 백성들을 위로하며, 국가적으로 식량과 비용을 절약하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금주령에도 불구하고 국가의 제향, 사신 접대, 상왕에 대한 공상, 백성들의 혼인·제사, 노병자의 약용으로는 술이 허용되었다. 또 술을 팔아 생계를 유지해야 하는 빈민의 소규모 양조 행위도 묵인되었다. 이렇게 차 떼고 포 떼고 빠져나갈 구멍을 여럿 만들다 보니, 지방과 힘없는 백성들에게서는 금주령이 비교적 엄격히 준행됐으나, 중앙의 사대부 관료사회에서는 잘 지켜지지 않았고 단속도 사실상 어려웠다. ‘유권유주 무권무주’라고나 할까.

1920년 초 미국에서 시행되었던 금주법은 술의 역사에서 나라님이 대대적으로 개입한 대표적 사건으로 꼽히고 있다. 술의 생산과 판매, 소비를 전면 금지하는 미국의 금주법은 일개 법률이 아니라, 헌법 안에 술 금지 조항을 넣는 헌법의 수정이었다. 이 수정헌법은 19세기 초부터 대대적으로 금주운동을 벌여온 미국민들의 열렬한 호응으로 통과됐으나 13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시행되다가 곧 역사의 장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초기에는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이 수정헌법이 당시 미국의 총 48개 주 중 46개 주에서 비준되어 발효되자 즉각 236개의 위스키 공장과 1090개의 맥주 양조장이 문을 닫았고, 전국 17만790개의 술집들이 폐쇄되었다. 각종 범죄 발생률도 현저히 낮아졌다. 너무나 확신에 찬 나머지 어떤 지역에서는 교도소를 없애기까지 했다. 하지만 금주법 초기 재소자 4천 명이었던 연방교도소는 13년 뒤 금주법이 폐지될 때는 2만6천 명이 바글거렸다.

금주법으로 미국에서 술의 생산, 판매, 소비가 줄어들었을까? 우선 수많은 밀주업자들이 등장했다. 금주법이 시행된 지 1년도 되지 않아 경찰이 10만여 곳을 적발할 정도로, 깊은 숲 속이나 한적한 곳에는 밀주공장이 널려 있었다. 농부, 은행가, 독신여성, 대학생 등도 저마다 목욕탕이나 지하실에 소규모 밀주시설을 차렸다. 디트로이트의 한 밀주업자는 1년 만에 2억달러 이상을 벌었다는 소문도 있었다. 인접 국가들로부터의 밀수에도 속수무책이었다. 위스키는 캐나다로부터 오대호를 통해 쾌속정으로 실려왔고, 테킬라는 멕시코에서 남부 국경을 넘어 흘러넘쳤다. 미국 해안 3해리 밖 공해에 정박한 유럽 선박에서는 밤을 틈타 숱한 화물들이 작은 배로 옮겨졌으며, 럼주통들도 보잘것없는 동력을 가진 통통배에 실려 카리브해를 건너왔다. 수륙 양면 공격에 나라님이 허둥지둥했던 것은 너무도 당연했다.

금주법이 시행되기 전 18만여 개였던 미국의 합법적인 술집은 이 법이 수명을 다할 즈음에는 50만여 개의 불법 밀주집으로 변해 있었고, 1년에 1인당 1.46갤런이었던 미국인의 술 소비량은 1.63갤런으로 오히려 늘어버렸다. 그리고 밀주가 황금알을 낳는 거위인 것을 재빨리 알아챈 알 카포네 등 미국의 전설적 총잡이 갱단들은 술의 생산·판매·소비를 그들의 총구 아래 통제하는 ‘유총유주 무총무주’의 시대를 구가했으니, 금주법 때문에 미국이란 나라님만 이래저래 스타일을 구긴 셈이다.

 

인간을 시험하기 위해 만든 듯한 ‘금주’ 교리…
이슬람은 철저한 금주, 유교는 합리적인 가이드라인 제시해
거칠게 이야기하면, 종교의 교리는 하라는 것과 하지 말라는 것으로 나누어져 있다. 하라는 것은 그 종교의 창시자나 교리, 신앙 체계에 절대적 믿음을 갖고 따르라는 지시요, 인류의 보편적 도덕·윤리·규범을 지키라는 명령이다. 또 하지 말라는 것은 불신앙과 의심, 불경이요, 윤리 도덕과 어긋나는 원초적 욕망과 본능적 행동, 그리고 그 종교가 그은 각종 금기의 선을 넘어서는 일탈이다. 그러므로 대개의 교리는 하라는 것을 잘 하고 하지 말라는 것을 잘 지키면 현세에서 큰 복을 받거나 죽음을 넘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되지만, 그 반대면 죄인이 되어 인과응보의 벌을 받는다고 경고한다. 그러나 인간은 어쩐 일인지 하라는 것은 행하기 싫어하고 하지 말라는 것은 하고 싶어한다.

»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 이 장면에 포도주는 주제로 등장한다.

이 중에서도 인간을 시험하기 위해 만든 듯한, 신도들을 쉽게 통제하기 위해 설정한 듯한 종교적 금기는 항시 그 선을 넘고 싶도록 유혹한다. 금기는 종교적 관습에서 어떤 대상에 대한 접촉이나 언급이 제한 또는 금지되는 것을 말한다. 금기로서 제한 또는 금지하는 대상 중에는 술도 있다. 왜 술이 여러 종교에서 금기의 대상이 되었을까?

술은 고대사회의 제사의식에서 성스러운 음료였다. 고대인들은 제사에서 희생으로 잡은 짐승의(또는 사람의) 고기와 피를 신께 바침으로써 풍요와 안녕을 빌고, 신의 힘을 빌려 재해·혼돈·무질서를 막으려 했다. 이후 사회경제의 발전과 함께 고기에 곡식과 과일 등 다양한 생산물이 더해졌다. 또한 피는 대량생산이 가능한 술로 대치돼 신(神)만이 아니라 제상 아래 인간도 나눠 마시게 됨으로써 술은 성(聖)과 속(俗) 모두에 걸치는 존재가 됐다. 그리고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이라는 이원론적 대립에서 속된 것은 부정으로 간주되고, 그래서 속된 인간이 마시는 술에 특정한 제한을 가하는 금기가 걸리게 된 것이다.

세계 5대 종교에서 술을 규제하거나 금지하는 강도를 보면, 이슬람교-불교-힌두교-기독교-유교 순이다. 이슬람은 원칙적으로 철저한 금주를 명하고 있다. 예언자 마호메트는 술은 “하늘과 땅, 어머니와 아내를 구별할 수조차 없게” 하고 “맑은 것과 혼탁한 것도 구별하지 못하게 해버리기” 때문에, 그리고 “저마다 다르게 살아가는 인간들로 이루어진 공동체 사회를 무너뜨리기” 때문에 철저한 금주령을 내렸다. 그러나 오늘날까지 금주령을 철저히 지키는 나라는 아랍 21개국 중 사우디아라비아를 비롯한 5개국뿐이다. 불교는 출가해 승려가 된 사미나 재가의 신도들이 필히 지켜야 할 오계의 다섯 번째 계율로 술을 마시지 말라고 하나, 곡차(술이 아닌!)를 마신다. 힌두교는 불교와 마찬가지로 금주를 명하고 있지만, 카스트 제도 속에서 신분이 높은 사람과 낮은 사람은 제한을 받지 않으니 금주령은 있으나 마나.

성경은 모세의 십계명을 비롯해 어디에서도 금주를 말하고 있지 않다. 오히려 숱한 구절에서 포도나무와 포도열매, 포도주를 긍정적인 비유와 상징물로 이야기한다. 복음서는 두 번이나 포도주를 주제로 삼았다. 가나안의 결혼잔치에 참석한 예수는 변질된 포도주를 정화시킴으로써 잔치를 영원불변의 완벽함으로 만든다. 최후의 만찬 때에도 포도주가 등장한다. 예수는 잔을 들고 제자들에게 “이 잔은 새롭고 영원한 계약을 맺는 내 피의 잔이니 너희와 온 누리를 위한 것이다”라고 말한다. 기독교는 교리보다는 해석을 통해 술음 금지한다. 가톨릭은 술에 대해 비교적 관용적인 반면 개신교는 금주 쪽이 많다. 그러나 가톨릭을 뛰쳐나와 종교개혁에 앞장선 캘빈이나 루터도 술 앞에선 맥을 못 추던 사람이었으며, 금주법 시대 미국 교회에서는 성찬식을 핑계 삼아 매년 수백만 갤런의 포도주를 마셔댔다.

유교에서 술은 제사 의식의 중심이 되기 때문에 금지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다만 유교는 술 마시는 데 정교한 격식과 예법을 두어 절제된 음주문화를 유도하고 있다. 공자가 이미 2500여 년 전에 “오직 술만은 양을 정하지 않고 마시되, 취하여 난잡한 지경에 이르러서는 안 된다”며 스스로 합리적이고 타협적인 음주 가이드라인을 제시했으니, 술에 관한 한 유교의 입장이 가장 그럴듯하다.

 

기업 접대비 한도액을 올리거나 없앤다는 정부의 정책…
20년 전으로 돌아가는 세상에 어찌 음주문화가 빠지랴
이명박 정부의 ‘강남 살리기’가 눈물겹다. 서울 강남 부자들의 가슴에 꽂힌 비수를 뽑아주겠다며 종부세를 너덜너덜 빈껍데기로 만드는가 하면, 강남의 아파트 경기를 끌어올리겠다며 재건축 요건을 대폭 완화한다. 강남 3구의 투기지역 지정을 전면 해제하고 분양가 상한제를 폐지하겠다며 국토해양부와 기획재정부, 청와대가 생쇼를 벌인다. 다주택 소유자들의 주택 매매를 쉽게 하기 위해 양도소득세의 한시적 면제를 검토하겠다고도 한다.

» 프랑스의 살롱, 미국의 설룬을 함께 비비고 쪼개서 룸살롱이라는 종합 엔터테인먼트가 만들어졌다. 서울 북창동의 룸살롱식 클럽들. 한겨레 김종수 기자

여기에 코미디극을 하나 더 추가한다. 서민경제 활성화의 일환으로 기업들의 접대비 한도액 50만원을 100만원으로 올리거나 아예 그 한도 규정을 없애겠다는 것이다. 과거 투명하지 못한 공공기관의 업무추진비와 기업의 흥청망청 접대비가 어떤 용도로 쓰여졌고, 그 쓰인 곳이 대부분 어디인지는 삼척동자라도 다 안다. 그간 부정부패를 줄이기 위해 어렵사리 접대비 한도액을 시민들의 상궤 수준으로 정했고, 그래서 강남의 호화 룸살롱들이 직격탄을 맞은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다시 접대비 한도액을 올려 서민경제를 활성화하겠단다. 그렇다면 룸살롱 경기를 살리겠다는 것인데, 내년에 쏟아져나올 백수 여대생들의 일자리 창출 때문일까?

프랑스어 ‘살롱’(Salon)은 객실·응접실이라는 뜻이다. 프랑스 상류층 부인들이 끼리끼리 모여 문학과 예술 등을 주제로 친교를 나누는 사교 공간이 곧 살롱이었으니, 애초부터 본격적인 술집과는 거리가 멀었다. 정확히 이야기하자면, 프랑스어 살롱과 동계어인 영어 ‘설룬’(Saloon)의 본뜻은 대저택, 호텔 따위의 큰 홀, 여객기의 객실, 여객선의 담화실인데, 여기에 술집의 의미가 추가돼 영국에서는 선술집을, 미국에서는 서부개척 시대 개척마을에 생긴 작은 술집을 가리키게 된 것이다. 어쨌거나 우리는 프랑스의 살롱이나 미국의 설룬을 함께 비벼, 큰 홀을 잘게 방으로 쪼개 룸살롱이라는 종합 엔터테인먼트를 만들었다. 그 방에서 정치도 하고, 경제활동도 하고, 노래도 부르고, 쾌락도 나누고, 술도 마시고, 가끔은 칼싸움도 벌이니 우리 민족의 창발력 하나는 끝내준다.

근대 이후 우리는 어떻게 술을 마셔왔는가? 1910년 한-일 병합에서 1950년대 말까지는 양과 질에서 크게 뒤떨어졌던, 맛도 멋도 없었던 음주문화 폐퇴의 시기다. 일제는 1909년의 주세령으로 우리 전통주 양조를 금지하고 개량식 약주와 막걸리, 희석식 소주로 술을 획일화했던바, 이는 해방 뒤 이승만 정권까지 계속됐다. 60~70년대 박정희 시절은 만취의 시대, 술 권하는 사회였다. 우선 술의 공급이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막걸리 양조장이 마을마다 널려 있었고, 희석식 소주는 텔레비전 메인 시간대 광고에 흘러넘쳤다. 농촌에서 도시로 옮겨온 수많은 근로자들이 끼리끼리 어울리며 노동의 고통을 술로 잊었고, 개발독재에 저항하던 인사들 역시 그 좌절과 절망을 술로 달랬다.

80년대 전두환 시절은 야간통행 금지 해제에 따른 폭음의 시대, 밤문화의 시대였다. 성공한 쿠데타의 시대는 수단과 방법을 묻지 않았다. 돈! 돈만 벌어라. 막걸리·소주가 맥주로, 맥주가 어느새 진·코냑·위스키로 바뀌었다. 술 즐기는 장소 또한 고급화·대형화됐고, 강남 여기저기에 호화스러운 룸살롱이 자리잡으면서 검은돈, 정경유착, 폭탄주, 쾌락, 폭력, 낭비 등이 일상화됐다.

전두환 정권 이후 한국 사회는 민주화와 함께 음주문화에서도 차근차근 합리성을 찾아갔다. 투명성 강화로 2차·3차로 흥청망청 마실 수 있는 검은돈이 줄어들었고, 소득 증대에 따른 웰빙 바람과 자가 운전도 절제된 음주문화에 한몫했다.

이렇게 음주문화는 변증적으로 발전한다. 그래서 대부분의 술꾼들은 질풍노도의 지나가버린 음주문화를 그리워하지 않는다. 다만 추억할 뿐이다. 그런데도 이명박 정부에는 20여 년 전, 탤런트같이 예쁜 아가씨를 옆에 앉히고, 관리는 건설업자와, 원청업자는 하청업자와 함께하며 은밀히 현찰이 오가던, 살이 타고 뼈가 부딪던 그 밤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모든 것을 20년 전으로 되돌리려는데, 어찌 음주문화가 빠질 수 있겠는가.

 

물도 화장실도 마음대로 쓰게 해준 고마운 사람들 덕에 ‘진급’한 누이의 금산집
나는 2000년 가을부터 <한겨레21>에 ‘김학민의 음식 이야기’를 연재했다. 매주 좋은 음식점 한 곳을 골라 독자의 지적 취향에 맞춰 설을 풀어내기가 그리 쉽지는 않았지만, 재미있다는 독자의 반응 속에서 그럭저럭 2년여 동안 연재를 이어갈 수 있었다. 나는 영양소, 조리법 등 구태의연한 소개보다는 음식의 유래와 문화인류학적 또는 사회적 성격, 그리고 그에 얽힌 인간들의 이야기를 주로 기술했는데, 음식점 선정만은 위치, 인테리어, 서비스, 심지어 위생조차 무시하고 가장 ‘맛있는’ 집을 기준으로 하려 했다.

앞으로 이 연재에서도 좋은 술집을 찾아 소개하려 한다. 그러면 좋은 술집이란 무엇이뇨? 나는 ‘멋있는’ 집이라 정의한다. 멋있는 술집을 가리기 위해 우선 주인의 넉넉한 인심과 거기에 출몰하는 인간들의 따뜻한 정, 그리고 술집 공동체의 소통에 주목하고 싶다. 물론 단숨에 한 사발 들이켤 수 있는 잘 담근 막걸리가 있는 집, 맛깔스러운 안주가 척척 나오는 집도 당연히 멋있는 술집에서 빼놓을 수 없다. 서울 마포 ‘최대포집’처럼 짧지 않은 역사를 자랑하며 서민들의 애환이 묵은 김장 김치처럼 푹 녹아 있는 집도 멋있는 술집이다.

» 금산집의 소박한 술상. 주인 송영애씨(왼쪽)와 심재방 시인. 사진/ 김학민

사연이야 어떻든

중요한 건/ 우리가 이렇게 마주함이다

기뻐서 한 잔/ 슬퍼서 한 잔

어금니 깨물고 살아온 날들/ 어느덧 이마엔 주름이 패고


세월은 아프지만/ 추억은 아름답구나

삶이란 기뻐도 눈물/ 슬퍼도 눈물

눈물 같은 잔을 비운다/ 잔은 비워도 술은 남는다.

(심재방, ‘금산집에서’)

찢어지게 가난한 소작농의 맏딸인 누이는 간신히 중학교를 마쳤다. 그러고는 열일곱의 나이로 장날 소 팔려가듯 봉제공장의 공순이로 내던져졌다. 누이는 봉제공장의 열악한 환경과 저임금, 가난과 멸시가 일상화된 현실과 맞서며 억척스레 청춘을 보냈다. 그리고 그 절망 속에서 누이는 사랑을 만났다. 결혼 뒤 누이는 자기가 다니는 인천의 한 교회 앞에서 꼬맹이들을 상대로 떡볶이 장사를 시작했다. 생리적 문제는 교회 화장실에서 해결하고, 또 화장실에서 허드레 물을 받아와 설거지를 했다.

어느 날 교회 관리담당 권사가 찾아와, 외부인들이 화장실을 더럽히기 때문에 예배 시간 이외에는 화장실을 폐쇄하겠다고 통고했다. 힘들지만 물은 집에서 매일 한 통씩 가져와 해결했다. 그러나 생리 현상은 좀 멀리 떨어진 공중화장실을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가을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어느 밤, 소변을 보러 바삐 공중화장실에 가보니 웬일인지 출입문이 꽉 잠겨 있다. 포장마차로 다시 돌아왔지만 달리 해결책이 없었다. 그날 30대의 젊은 누이는 포장마차 뒤에서 빗물 반 눈물 반의 소변을 보았다.

“물도 마음껏 쓰고, 화장실도 마음대로 갈 수 있었으면….” 누이의 이 사연이 인터넷에 올라와 네티즌들에게 애잔한 감동을 주었다. 영화배우 문성근, <서울의 달>의 작가 김운경 등 연예계 종사자들이 참여하고 있는 금산산악회 멤버들과 몇몇 네티즌들이 십시일반하여 물도, 화장실도 마음대로 쓸 수 있도록 누이에게 도움을 주었다. 경기 고양시 일산동구 장항동 저동초등학교 옆 카페 골목에 있는 ‘금산집’(주인 송영애, 031-913-5593)이 바로 그 집이다.

안주 마련에 바쁜 누이에게, 조금은 상투적인 질문을 던졌다. “지금 행복하십니까?” “그럼요. 사람이 좋아서, 좋은 사람이 많아서, 그리고 사랑과 정을 가슴에 담을 수 있어서 정말 행복하지요. 그리고 진급했잖아요. 떡볶이 노점에서 술집 주모로….” 아하, 정이라! 나는 이날 금산집에서 우연히 만난 가톨릭대 김만흠 교수와 일산 풍물패 일행, 시인 심재방·김철향·성백선과 어울리다 보니 전라도 장성에서 올라온 막걸리와 톡 쏘는 홍어로 버무린 정에 취해 서울행 막차까지 놓쳐버렸다.

 

다시 살아난 듯한 ‘막걸리보안법’,
‘청산’에서 한계령 막걸리는 한계 없이 마시되 인터넷은 조심할지어다
» ‘청산’은 수원의 사랑방이다. 왼쪽부터 수원시 학예연구사 이달호 박사와 한동민 박사, 경기문화재단 이지훈씨. 사진 / 김학민
요즈음 인터넷 논객 미네르바의 구속 사건으로, 역사 속으로 사라진 것으로 생각됐던 ‘막걸리보안법’ 이야기가 다시 장안에 회자되고 있다. 박원순 변호사가 쓴 <국가보안법 연구>에는 별별 막걸리보안법 사건들이 소개돼 있다. 박정희 정권 시절인 1970년대, 강원도 산골에 사는 어떤 농부는 동네 사람들과의 술자리에서 “우리나라가 통일되려면 박근혜를 김정일에게 시집보내면 된다”는 기묘한 ‘통일 방안’을 주장했다가, 이튿날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갖은 고초를 겪고는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됐다. 같은 시기 서울의 어떤 달동네 서민은 재개발로 집을 강제 철거당하게 되자, 사람들이 운집한 곳에서 철거반원들을 향해 “김일성보다 더 나쁜 놈들!”이라고 내뱉은 것이 화근이 돼 징역을 살았다. 북괴의 학정을 겪지 못한 이들에게 북괴에서는 대한민국보다 나은 행정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암시하게 되고, 그곳에 가서 살아보겠다는 의사도 내포됐다 할 것이어서 반국가단체를 이롭게 하는 행위에 해당된다는 이유였다.

막걸리반공법, 또는 막걸리보안법이란 무엇인가? 이는 흔히 술자리에서 북괴를 고무·찬양하거나, 독재정권 시절 국가원수를 모독하거나, 우리 정부를 근거 없이 북괴와 비교해 비판하는 장삼이사들의 막걸리에 취해 내뱉어진 ‘허튼소리’가 발고돼 모진 고문 끝에 중죄인으로 단죄되던 지난 시절의 블랙코미디를 상징하는 언어다. 그러나 막걸리보안법 사건 모두에 막걸리가 관련돼 있지는 않다. 막걸리보안법 적용 사례들을 보면, 이웃 간의 사소한 다툼이 확대돼 무고로 이어지거나, 정보기관의 ‘한건주의’가 독재권력의 강압 통치에 편승해 사회 불평·불만 세력 적발에 악용된 사건들도 많이 있다.

물론 막걸리 몇 잔에 취해 내뱉은 몇 마디로 정보기관에 끌려가 치도곤을 당한 사람들도 꽤 있겠지만, 이게 왜 막걸리 때문인가. 이 코미디극을 막걸리 몇 잔에 취한 칠칠치 못한 장삼이사의 실수로 책임지울 수 있는가. 실상은 국민의 권리와 기본적 자유를 독재권력이 마음대로 재단하고 제한할 수 있게 한 국가보안법 때문이 아닌가. 달을 보라는데,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만 쳐다보는 격이다. 일에 지친 농민이 노동의 고통을 위로받기 위해, 또 주머니 얇은 도시 서민이 한 끼 허기를 때우기 위해 마시는 술이 막걸리인데, 이 술에 국민을 억압하는 보안법을 끌어다 붙이는 것은, 단언하건대 막걸리에 대한 모독이다!

경기 수원시에는 내 단골 술집이 둘 있다. 그중 하나가 이번에 소개하는 ‘청산’(수원시 장안문 옆 농협 뒤·031-243-8177)이다. 처음 이 집의 여주인 이선경(39)씨를 보았을 때가 생각난다. 희고 예쁘장한 얼굴에다 얇은 금테 안경이 도시의 먹물처럼 보여, 그가 안주나 제대로 만들 수 있을까, 또 걸퍽진 술자리 분위기를 툭툭 털며 견뎌낼 수 있을까, 혼자 속으로 조바심하던 기억이 난다.

그러나 그런 걱정은 기둥에 붙들어맬 일이다. 이씨는 배화여자대학 전통요리학과 출신으로, 유명 백화점에서 음식 상품을 개발했고, 유명 호텔의 한식 뷔페에서도 오래 일했다. 갓 담은 듯 사각사각 씹히는 김치를 곁들인 두부김치, 톡 까면 촉촉이 조개 국물이 밴 꼬막, 부드러우면서도 감칠맛을 내는 어묵탕 등 ‘청산’의 상큼한 주안상 차림에서 고수의 품격이 만만치 않게 느껴진다.

‘청산’의 또 하나의 자랑거리는 막걸리다. 달지도 텁텁하지도 않은 그 시원한 한계령 막걸리 맛에, 날이 어스름하면 진보신당 당원에서 한나라당 남경필 의원 지지자에 이르기까지 제 정파가 모여든다. 또 ‘청산’은 수원의 시민단체 활동가, 문화예술인 등을 비롯해 온갖 글쟁이·말쟁이들이 모여 생각과 술잔을 나누는 사랑방이기도 하다. 그러나 수원의 말쟁이·글쟁이들이여, 경계하라! 에비가 돌아왔다. 막걸리보안법을 상기하라! 한계령 막걸리는 한계 없이 마시되, 인터넷은 조심할지어다.

 

공부하며 노는 ‘화백’ 모임 뒤풀이 장소 ‘낭만’…
독재정권 시절 관철동의 맥줏집에서 나누던 이야기와 비슷하네
나는 2009년 1월부터 놀며 공부하고, 공부하며 노는 ‘화백’이라는 어정쩡한 모임에 참여하고 있다. 화백은 ‘진지하게 세상을 공부하고 즐겁게 문화와 만날 수 있는 열린 광장, 장년의 경륜과 지혜, 젊음의 감성과 열정이 소통하는 용광로, 민족공동체의 과거와 현재, 미래에 대해 고뇌하고 행동하는 만민공동회’임을 표방한다. 모임은 대부분 오프라인에서 열리지만, 운영은 회원들에게 일절 구속감을 주지 않도록 온라인식을 채용하고 있다. 그래서 거창한 정관이나 회칙도 없이, 다음의 ‘화백 약법삼장’에만 동의하면 누구나 이 모임에 참여할 수 있다. 첫째, 회원의 몫을 다한다. 둘째, 혼자서만 말하지 않는다. 셋째, 주정부리지 않는다.

» ‘화백’의 뒤풀이가 ‘낭만’에서 열리고 있다. 매주 화요일 강좌 뒤 벌어지는 풍경이다. 사진 김학민

화백은 중층적 의미를 갖는다. 모임이 매주 화요일 저녁(춘분~추분 7시, 추분~춘분 6시)에 열리기 때문에 ‘화’이고, 백수들이 대거 참여하고 있고 또 백 명 곧 많은 사람이 참여할 것을 지향해 ‘백’이다. 또 ‘화백’에는 한국적 민주주의의 옛 형태였던 신라시대 화백회의의 의미도 담겨 있다. 그래서 화백에는 회장이나 간부진 없이 몇몇 도우미만 두고 있다. 매주 화요일은 정해진 프로그램이 진행되는 정기 모임이자 신라시대 화백회의처럼 전원회의가 열리는 날이고, 여기에서 회비를 책정하거나 시의적절한 다음 프로그램을 정한다.

화백에서 노는 것은 문화 체험이고, 공부하는 것은 강좌 듣기인데, 이 둘을 격주로 진행한다. 지난 1월20일 창립총회에서는 원로 언론인 임재경 선생의 2009년 시국 전망을 들었고, 2월3일에는 ‘오바마의 미국과 한반도의 운명’, 10일에는 모노드라마 <염쟁이 유씨> 관람과 배우와의 대화, 17일에는 강좌 ‘300만 실업시대의 한국’이 열렸다. 앞으로도 우리 소리 배우기, 독립영화 감상, 인디 음악인 초청공연 등의 프로그램과 ‘대한민국사 특강’ ‘너희가 미국식 교육을 아느냐’ ‘이명박은 왜 언론관계법 개정에 목매는가’ 등 눈 똑바로 뜨기 강좌가 이어진다(cafe.naver.com/tus100).

문화 프로그램은 공연장이나 극장에서 진행되겠지만, 그러면 강좌는 어디에서? 술집에서 열린다. 서울 종로구 경운동에 위치한 포근한 한옥 술집 ‘낭만’(덕성여대 평생교육원 담을 끼고 골목 안으로 80m, 02-741-5002)이다. 그리고 강좌가 술집에서 열리기 때문에 내 친구이자 화백의 회원인 조성우군 등 몇몇의 평소 행태를 모델로 삼아 토론 때 혼자서만 말하지 않기, 뒤풀이 때 주정부리지 않기의 약법삼장 둘째·셋째 조항이 들어간 것이다.

‘낭만’은 전통 한옥에, 방에는 주인의 그림쟁이 남편 덕인지 그럴듯한 유화도 몇 점 걸려 있어 제법 고상함과 운치를 느끼게 한다. 이 집을 연 지 아직 1년밖에 안 돼 제대로 자리를 잡기까지 상당 기간 어설퍼 보였지만, 충남 홍성군 갈산면 남당리 바닷가 출신의 유전자가 흐르는지 박영애 사장의 생태찌개, 홍어무침, 어리굴젓, 조개젓 등 갯것 다루는 솜씨가 일취월장했다. 좀 눅게, 그러나 깔끔하게 한잔 걸치려면 녹두지짐에 어리굴젓, 그리고 보성 녹차 막걸리를 추천한다.

박정희 독재정권 시절, 긴급조치로 감옥살이하고 나온 제적 학생들, 자유언론을 외치다 쫓겨난 <동아일보> <조선일보> 기자들, 독재권력에 밉보여 대학에서 추방당한 해직교수들이 즐겨 찾던 ‘낭만’이라는 맥줏집이 서울 종로구 관철동에 있었다. 매일 저녁 그곳에 가면 누가 정보부에 끌려갔는지, 어느 대학에서 시위가 일어났는지 등 은밀한 정보가 오갔고, 추방당한 자들끼리 서로서로 고단한 삶을 위로하며 희망을 나누었다. ‘관철동 낭만’이 낭만 속으로 사라진 지 어언 30여 년, 이제 다시 ‘경운동 낭만’에서 권력의 언론 장악, 독재와 민주주의, 참교육운동, 남북 문제, 실업 문제 등을 이야기하고 있다. 역사는 돌고 도는가.

 

성스러운 물과 인류 문명 그 자체인 불, 상생관계인 둘이 ‘불화’할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 알코올 농도 40도의 술이 가장 맛이 좋다고 주장한 러시아 화학자 멘델레예프.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탈레스는 ‘물은 만물의 근원’이라고 주장하였다. 또 생명체를 구성하는 여러 물질 중에서도 생명체 중량의 70~80%를 물이 차지하고 있으니, 물은 곧 생명의 모태인 것이다. 그러므로 위성을 쏘아 달, 화성 등 태양계의 별들을 탐사할 때도 생명체의 가능성을 물의 존재 여부와 관련하여 분석·추론한다. 우리 민족은 고래로부터 물을 물리적·지리적 형상이 아니라 정신적·정서적 위상으로 받아들여왔다. 물의 원형성을 곧 세상의 창조력, 영원한 생명력, 풍요의 근원, 청정한 정화력 등으로 생각해왔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 물은 농경생활의 실용성을 훨씬 뛰어넘어 약수나 정화수처럼 성스러움 그 자체였던 것이다.

불은 산소와 물질이 화합하여 연소하는 현상이다. 불은 빛과 열을 내는 에너지로서, 인간이 다른 동물과 크게 다른 존재로 이 세상에 군림할 수 있도록 인류 문명을 떠받쳐준 중요한 요소다. 우리는 예로부터 물처럼 불도 생명력 또는 창조력의 상징으로 여겨왔으며, 제사에서의 소지나 향불, 정월 대보름의 쥐불놀이처럼 흔히 사악한 것을 물리치는 청정의 힘, 정화의 힘으로도 받아들였다. 불은 물질이 아니라 현상이기 때문에 물처럼 형상화하지는 못하지만, 화약·알코올·기름 등 화인성 물질을 통해 그 이미지를 연계할 수 있다.

흔히 물과 불을 상극관계로 생각하지만, 물과 불의 원형성은 동일하므로 오히려 상생관계라고 하는 것이 옳다. 다석 유영모 선생도 “물을 부리는 것이 불이다. 불을 다스리는 것이 물이다. 물과 불은 서로 작용한다. 우리는 물·불 없이는 살 수 없다. 또 우리 마음속에 평화를 일으키려면 푸른 것이 있어야 한다. 여기에서 물·불·풀이 깊은 연관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고 말하였다. 물과 불은 서로 밀어내고 서로 이기는 것처럼 보이지만, 서로 조화하고 보완하는 신비가 있다. 물과 불의 조화는 푸른 열매인 벼(禾)로 변화한다. 평화(平和)는 밥(禾)을 먹는 것(口)을 고르게 하는 것이다. 곧 물과 불의 조화로 만들어진 밥을 나누어 먹는 것이 평화다.

나는 물에 불(알코올)이 들어간, 곧 물과 불이 상생적으로 조화되어 만들어진 음식을 술이라고 생각한다. 막걸리처럼 불이 적게 들어가면 마실 때 ‘물처럼’ 시원하고, 보드카처럼 불이 많이 들어가면 속이 ‘불처럼’ 탄다. 술의 알코올 농도를 나타내는 단위로 프루프(Proof)와 %가 있다. 프루프는 알코올의 비중을 측정하는 기술이 개발되지 못했을 때, 영미 계통에서 화약에 위스키를 부어 불이 붙지 않으면 언더(Under) 프루프, 불꽃이 꾸준히 붙어 있으면 프루프, 화약이 폭발하면 오버(Over) 프루프라 한 데서 온 주관적 측정 단위다. %는 19세기 정확한 주정 측정기가 발명된 뒤 상용되는 알코올 농도의 미터법 표시다. 미국은 100Proof를 50%로 정했다. 우리의 ‘도’는 %다.

당연히 발효주는 알코올 농도가 낮고 증류주는 높은데, 보통 막걸리 5~6%, 청주 7%, 배갈 40~50%, 맥주 8%, 와인 9~15%, 샴페인 15%, 브랜디 40%, 위스키 35~40%, 진 40%, 보드카 40~45%의 알코올 농도를 보인다. 그러면 왜 양주는 대개 40도일까? 원소주기율표를 만든 러시아 화학자 멘델레예프는 유명한 술꾼이었다. 그는 평생 보드카를 즐겨 마셨는데, 화학자답게 도수 높은 보드카에 물을 부어가며 어느 알코올 농도에서 가장 술맛이 좋은가, 내 식으로 이야기하면 물과 불의 조화를 수백 차례 실험한 끝에 40도라는 결론에 도달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 ‘실험 결과’가 유럽의 위스키·브랜디 업계에도 전해진 것이다.

2008년 이명박 대통령 취임을 즈음해 숭례문이 불탔는가 하면, 2009년 들어 용산 철거민 화재 참사, 화왕산 산불 참사로 많은 사람들이 억울하게 목숨을 잃었다. 왜 이명박 정부 들어 유난히 불로 인한 사건이 자주 벌어질까? 물과 불은 상생인데, 이명박 정부가 물을 갖고 너무 장난을 치자 불이 화를 낸 결과라고 나는 풀이한다. 물은 높은 데서 낮은 데로, 막히면 돌아서 자연히 흐르는 것이 본성인데, 이를 운하로 맞창 뚫겠다고 기고만장하고, 생명을 살리는 물로 물대포를 만들어 생명을 앗아갈 정도로 마구 쏘고 있으니, 어찌 불이 화를 내지 않겠는가? 단언컨대 MB 정부가 속도전 운운하며 사회적 마찰을 계속 일으키면 불로 인한 참사는 계속 벌어질 것이다. ‘속도’가 빠르면 열이 나고, ‘마찰’하면 불이 나는 것은 당연하지 않은가.

 

연산군 시절 두 번 목숨을 건지고 두 번 죽음을 당한 정여창의 집안에서 내려오는 술
» 40도 솔송주. 확 쏘는 맛에 은은한 솔향기가 난다. 사진 김학민
서울 양재동 옛골에서 청계산을 오르다 보면 망경대 못 미쳐 이수봉(貳首峰)이 있다. 이 봉우리에는 지난 2000년 산 아래 상적동 주민들이 세운 이수봉 유래 기념비가 있는데, 그 내용인즉 “조선 연산군 때의 유학자인 정여창(鄭汝昌) 선생이 스승 김종직(金宗直)과 벗 김굉필(金宏弼)이 연루된 무오사화의 변고를 예견하고, 한때 이 산에 은거해 생명의 위기를 두 번이나 넘겼다 하여 후학인 정구(鄭逑) 선생이 ‘이수봉’이라 명명하였다”고 한다.

정여창은 1450년 세종 때에 태어나 성종을 거쳐 1504년 연산군 10년에 죽은 학자이자 문신이다.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혼자서 독서에 힘쓰다 김굉필과 함께 김종직의 문하에서 학문을 연마했다. 정여창은 <논어>에 밝았고 성리학의 근원을 깊이 탐구해 나라 안에 명성이 드높았으나,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지리산 아래 섬진 나루에 집을 짓고 대나무와 매화를 심으며 평생을 마치려 했다. 1490년 문과에 급제해 예문관 검열을 거쳐 시강원 설서로서 동궁(연산군)을 가르치는 일을 맡았으나, 연산군은 정여창의 정도(正道)를 좋아하지 않았다.

1494년 성종이 죽자 연산군이 즉위하고 1498년 <성종실록>을 편찬하기 위해 실록청이 개설됐다. 이때 춘추관의 사관인 김일손이 기초한 사초 속에 김종직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이 실려 있었는데, 유자광 등 훈구파는 이 글이 세조가 단종에게서 왕위를 빼앗은 일을 비방한 내용이라 문제 삼아 김종직 이하 사림파를 대대적으로 숙청하는 무오사화를 일으켰다. 이미 죽은 김종직은 대역죄로 부관참시하고, 김종직의 제자 김일손 등 6명이 간악한 파당을 이루어 세조를 능멸·무고하였다는 죄명으로 능지처참됐다. 이때 정여창도 불고지죄로 곤장 100대를 맞고 함경도 경성으로 귀양을 갔다.

정여창은 1504년에 죽었지만, 그의 비극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정여창이 죽은 직후 연산군이 자기의 생모 윤씨의 복위 문제를 거론하면서, 윤씨를 폐비하고 사약을 내려 죽인 성종 때의 사건을 다시 조사해 당시 이를 주장한 사람이거나 방관한 사람들을 모조리 처형한 갑자사화가 일어났다. 이 사화로 김굉필 등 10여 명이 사형됐고, 이미 죽은 한명희·정여창 등 8명을 부관참시했다. 정여창이 청계산 아래에서 두 번 목숨을 건졌다 하지만, 그의 죽음 또한 이렇게 두 번이었으니, 하늘이 하는 일은 참으로 기이하다.

경남 함양군 지곡면에 가면 백성들에게는 끝없이 어질었지만 옳고 그른 일을 가리는 데는 추상같았던 선비 정여창이 산 500여 년 된 고택이 있다. 하동 정씨 집성촌인 이 마을에는 아직도 200~300년 된 기와집들이 즐비해 마치 민속촌에 온 듯한 느낌이 든다. 정여창 고택은 십수 년 전 한국방송에서 방영된 대하드라마 <토지>의 최참판댁 촬영지이기도 하다. 대전~진주 고속도로 지곡 나들목으로 나가 10분쯤 가면 있다.

정여창 문중에는 예로부터 내려오는 가양주(家釀酒)가 있다. 소나무처럼 늘 푸르름을 잃지 않고 꼿꼿하게 절개를 지켰던 선조들의 선비정신을 기리려 했음인지 이름하여 ‘솔송주’다. 지곡의 정씨 문중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종중이나 집안의 제사 등 대소사가 있으면 꼭 이 술을 빚어 사용했지만, 세월이 지나 농촌이 피폐해지고 술 담그는 일이 번거로워 그 맥이 끊어질 지경이 됐다. 정여창의 16대손 정천상씨와 그의 부인 박흥선(58)씨가 이를 안타까이 여겨 현재 100살 된 어머니 이효의씨로부터 가양주 담그는 법을 배워 조심스레 상품화하니, 이것이 명가원의 솔송주다.

솔송주에는 발효주(약주)와 증류주(소주)가 있다. 함양에서 나는 찹쌀에 누룩·솔잎·송순을 잘 버무려 지리산 자락의 지하 암반수를 부어 발효시키면 13% 약주가 되고, 함양 토종 멥쌀에 누룩·솔잎·송순을 원료로 하여 20여 일 발효시킨 뒤 증류해 숙성시키면 도수는 높지만 부드럽고 향기가 은은하며 뒤끝이 깨끗한 40% 소주가 나온다. 현재 며느리 박흥선씨가 솔송주 명인으로 지정돼 있으며, 맏딸 정가영(32)씨가 그 뒤를 이을 준비를 하고 있다. 문의 명가원 055-963-8992~3.

 

한강물이 다 술이라도 술잔 없으면 못 마시네…
다양하게 진화한 동서양의 술잔들
» 임동환(42·사진 오른쪽)씨. 사진 김학민
서영춘 선생의 사설을 빌리자면, 인천 바다가 사이다라 해도 ‘고뿌’가 없으면 못 마시는 것처럼, 한강물이 술이라 해도 술잔이 없으면 못 마신다. ‘고뿌’는 컵(cup)의 일본식 발음으로, 영어에서 컵은 대개 손잡이가 달린 찻잔을 뜻한다. 예외적으로 성찬식에서 포도주를 담는 술잔을 일컬어 컵이라고 하기도 하지만, 술잔은 대개 글라스(glass)라고 부른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승전, 왕의 즉위나 결혼 등 나라의 경사가 있거나 축제라도 있게 되면 많은 사람들이 운집하게 되고, 또 거기에서는 당연히 술을 곁들이게 된다. 그리고 의식이 진행되고 나면 참여자 전원은 술잔에 술을 가득 채우고 수장의 선창에 따라 축배를 들게 된다. 이때 수장은 경사의 공로자·수고자에게 술잔을 하사하거나 술을 부어줘 공을 치하하고 만인에게 그 신임을 공표한다. 이것이 오늘날까지 이어져 스포츠 경기에서 우승팀이나 우승자에게 우승의 징표와 인증으로 우승컵을 주는 관례로 된 것이다.

서양의 술잔은 ‘글라스’라고 하는 데서 유리가 그 재질임을 알 수 있다. 위스키를 마실 때 쓰는 작은 술잔은 올드 패션드 글라스 또는 록 글라스라 하고, 이 밖에 칵테일 글라스, 리큐어 글라스, 샴페인 글라스, 와인 글라스, 셰리 글라스, 콜린스 글라스, 사워 글라스, 브랜디 글라스 등이 그 모양을 달리한다. 또 우리가 흔히 컵이라고 부르는, 진토닉이나 소프트드링크에 사용하는 텀블러(tumbler)가 있고, 텀블러에 발을 붙인 모습 같은, 맥주나 소프트드링크, 얼음을 가득 채운 칵테일에 사용하는 고블릿(goblet)도 있다. 양주잔의 경우 일반적으로 향기가 강하거나 그렇게 감미롭지 않은 술을 마실 때는 잔 주둥이가 넓은 글라스를 사용하고, 향기가 약하거나 은은한 술을 마실 때는 향이 모아져야 술맛을 제대로 음미할 수 있으므로 튤립처럼 잔 주둥이가 오므라진 글라스를 사용한다. 저그(jug)는 밑바닥이 평평하고 손잡이가 달린 잔으로, 흔히 생맥집에서 ‘조끼’라고 부르는 술잔이다. 맥주는 알코올 농도가 낮아 입 안에서 음미하지 않고 단번에 시원하게 목으로 넘겨야 그 맛을 만끽할 수 있으므로, 저그잔은 당연히 크고 마시기 좋게 주둥이가 넓다.

서양 술잔이 재질은 한가지인데 술의 종류에 따라 모양이 달랐다면, 동양 술잔은 모양은 비슷했지만 재질에 따라 이름을 달리했다. 한자에서 잔(琖)은 옥·수정·곱돌 등 석재를 갈아 만든 술잔이고, 배(坏)는 토기·청자·백자·분청 등 흙을 원료로 구워 만든 술잔이다. 배(杯)는 나무를 깎아 만든 술잔이고, 작(爵)은 금·은·청동·금동·쇠·구리 등 금속을 가공해 만든 술잔이다. 잔(盞) 또는 배(盃)는 ‘그릇 명’(皿) 변이 들어간 데서 보듯, 불로 구운 도자기 재질을 뜻하면서 굽이 있는 잔임을 나타낸다. 또 술잔의 크기에 따라 한 되들이 잔은 작(爵), 두 되들이 잔은 고(觚), 석 되들이 잔은 치(觶), 넉 되들이 잔은 각(角), 닷 되들이 잔은 산(散)이라 하기도 했다.

임동환(42·사진 오른쪽)씨는 민족무예 태껸 전수관을 운영하면서 한편으로 전통 방짜 유기의 전승과 실용화에도 온 힘을 쏟고 있는 사람이다. 놋쇠는 주석 22%, 구리 78%의 절묘한 합금으로, 예로부터 우리 민족이 그릇·제기·악기 등을 만드는 데 써왔다. 놋쇠는 열전도율이 낮아 그릇이나 잔으로 사용할 경우 따뜻함과 차가움을 유지하는 시간이 길고 살균 작용도 한다. 임씨는 이에 착안해, 값비싼 서양의 주석잔을 대신할 수 있는 놋쇠 맥주잔을 만들었다. 그리고 끝내는 호프집 ‘짬’(경기 시흥시 대아동 531-2 신주씨티프라자 2층, 문의 031-316-6289)까지 열어 놋쇠잔의 효능을 시험하고 있는 중이다. ‘짬’을 취재하면서 시흥의 지인 몇몇을 불러 ‘놋쇠잔 맥주맛’을 평가하게 했다. 결과는 더 맛이 있는 것 같다는 사람이 절반이다. 나머지도 맥주맛이 더 좋은지는 모르겠으나 놋쇠잔이 품격 있고 특이해서 좋다고 한다. 임씨에게 이만하면 놋쇠잔 효과를 본 것 아니냐 하니, 손님들이 술보다 술잔이 더 좋은지 가끔 한두 개 없어지는 것이 걱정이란다.

 

<난중일기>에 나타난 술자리와 앓아누운 기록을 한의사와 양의사에게 물어보았더니…
» 이순신 장군은 알코올성 위염?
4월28일은 이순신 장군이 탄생한 지 464년 되는 날이다. 애족·애민 정신, 리더십, 군사적 지략 등 이순신 장군의 위대함에 대해서는 더 부연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러한 위대함에 더해 내가 그분을 높이 평가하는 것은 중요한 시기에 자신의 공사 일거수일투족을 진솔하게 일기로 남겼다는 점이다. 나는 몇 년 전 <난중일기>를 읽으면서 일기 곳곳에 등장하는 장군님의 숱한 술자리와 병이 나 자리에 누운 사례들의 관련성에 대해 관심을 가졌다. 이순신 장군은 술을 즐겨 마셨는데, 그것이 술병으로, 또는 질병으로 발전하지 않았을까 하는 가설이었다. 우선 일기에서 이순신 장군의 술 마신 기록과 앓아누운 기록을 날짜별로 뽑아 한의사 두 분, 양의사 한 분에게 진단을 부탁했다.

한의사 이유명호씨는 이순신 장군의 병인에 대해 이렇게 진단했다. “외상(外傷·기후가 감당이 안 돼 오는 병)으로, 해풍과 찬 기후에 노출돼 늘 상한병(傷寒病)에 시달렸을 것이다. 고된 업무와 전투훈련으로 자주 부상을 당했으나 치료는커녕 휴식도 없는 상황이라 심한 관절통·근육통을 앓았을 듯싶다. 그리하여 신음 소리를 내며 통증으로 앉지도 눕지도 못하고 고통스럽게 밤을 지새운 듯하다. 한의학에서의 병명은 역절풍(歷節風)으로, 전신 마디마디가 다 아팠을 것이다. 또 내감(內感·안에서 생기는 병)으로, 끼니가 불규칙하고 조악해서 위장에 탈이 난 경우가 많았을 터이다. 온백원을 먹고 변을 본 후 시원하다는 걸 보면 변비 기운도 있었던 듯하다. 하루 중 가장 체온이 떨어질 때인 새벽에는 땀이 나지 않는 것이 건강한 상태다. 밤사이에 식은땀을 흘리는 것은 몸을 호위하는 위기(衛氣)가 약해져서 오는 허증으로 도한증(盜汗症)이라 부른다. 원인은 기혈이 쇠약한 몸에 허열이 떠서 음허화동(陰虛火動)이 겹칠 때 나타난다. 칠정(七情)은 요즘의 스트레스다. 여러 감정이 과도하게 압박하면 칠정병이 된다. 생각을 골똘히 하다 보면 식욕을 잃고 안색이 나빠지는데, 장군도 늘 고뇌와 번민으로 칠정 손상을 면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리하여 번민과 고통을 견디려고 술을 통음해 잠을 청했을 것이다.”

한의사 강경태씨는 이순신 장군의 많은 음주량과 잦은 음주 회수에 주목했다. “이순신 장군의 증세는 한의학적으로 주상(酒傷)에 해당하고, 서양의학적 병명으로는 알코올성 위염 및 알코올성 췌장염에 해당될 것으로 판단된다. 과음으로 위나 췌장에 염증이 생길 경우 속이 쓰리고 복통이 심하며, 식은땀이 날 수 있다. 그리고 심하면 구토·설사(토사곽란)를 하는 경우도 생긴다. 다만 간은 이상이 있어도 특별한 증상이 없기 때문에 이순신 장군에게 알코올성 간염이나 간경변증이 있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연세대 의대 문병수 교수의 진단은 정신적 측면에 무게를 뒀다. “<난중일기>에 이순신 장군의 병세에 대한 확실한 징후가 없어 상상력으로 진단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다. 이순신 장군은 활도 잘 쏘고 술을 자주 드실 정도여서 육체적으로 쇠약한 상태는 아닌 것으로 판단된다. 다만 정서적으로 민감한 분인 것 같다. 어머니를 걱정하거나 아들이 떠난 것에 대해 안절부절못하고 측은해하는 다정다감한 분이다. 이순신 장군은 신열과 오한이 나고 식은땀이 자주 난다고 하며, 이것이 자기 병의 근원이라고 스스로 진단한다. 이런 증상은 신경이 예민하거나 잘 놀라거나 스트레스를 해소하지 못하고 쌓아놓는 성격의 사람에게서 흔히 나타나는데, 내분비계 자율신경의 조절에 이상이 생겨서 발생한다.”

싸움에 나가 죽는 병사보다 병들어 죽는 병사나 굶어 죽는 병사가 더 많았던 전선 현실과, 이러한 현실을 외면하는 봉건왕조의 무능과 부패 사이에서 뼈와 살을 깎아가며 외로이 왜적과 맞섰던 이순신 장군! 술이 질병의 원인인지 아니면 질병의 고통을 잊으려 술을 마셨는지는 모르지만, 이순신 장군이 술이라도 마시지 않았더라면 그 엄청난 스트레스를 이겨내지 못해 임진왜란의 결말과 우리 민족의 운명이 달라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청와대 행정관 성매매·장자연 자살 사건으로 살펴본 술과 접대의 역사
» 김홍도의 <주막>
인간은 왜 술을 마실까? 인간의 모든 행위는 대개 합리적이거나 특별한 이유가 있을 때 이뤄진다. 인간이 술을 찾게 되는, 또는 술에 끌리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한 연구 결과에 따르면, 보편적으로 인간은 기쁠 때나 슬플 때, 화날 때, 우울할 때, 스트레스를 받을 때, 죄의식을 느끼고 이 죄의식을 잊으려 할 때, 어려운 일에 부딪쳐 이를 극복하려고 할 때 등의 상황에서 술을 마시고 싶어한다. 그리고 특수적한 예로, 제례나 의식을 주도하거나 참여할 때는 본인의 의지와 선호에 관계없이 술을 마시게 된다. 물론 술을 탐닉한 결과이기는 하지만, 알코올중독 때문에 더욱 술을 찾기도 한다. 그리고 한국적 특수성을 하나 더 보탠다면 접대 때문에 술자리가 마련되기도 하는데, 여기서는 청탁·뇌물·성매매 등이 본질을 이루고 술 자체는 부차적인 의미를 갖는다.

우리 조상들은 어떻게 술을 마셨을까? 삼국시대 이전 부족국가 시대에는 식량이 부족해 제천의식을 거행할 때만 마을 위로 술을 빚어 음주와 가무를 즐겼다. 개인이 술을 빚게 된 것은 삼국시대 귀족층에서였다. 그리고 삼국시대 후기에 오면 김유신과 천관녀의 이야기, 원효대사의 이야기 등에서 보듯 전문 술집도 등장했다. 고려시대에는 술을 금지하는 불교 계율 때문에 일반 서민들은 술을 마실 기회가 거의 없었지만, 원나라로부터 증류법이 전해져 왕실과 문무 귀족층은 오히려 소주 등 더 다양한 술을 즐겼다. 그리고 팔관회를 빙자해 절에서 여승들이 술을 빚어 팔기도 했다. 조선시대에는 유교 제례에 술이 필수적이었으므로 사대부들뿐만 아니라 서민들에게도 술을 마실 기회가 많이 늘었다.

단지 술을 파는 것을 넘어 술 마시는 남자들을 시중들기 위해 여자가 술자리에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은 조선시대다. 양반층에게는 일정한 문화적 소양을 갖추고 술시중을 드는 기생이 있는 기방이 있었고, 일반 서민들에게는 여자가 나와서 노래를 부르고 아양을 떨며 술을 파는 색주가가 있었다. 기방은 고급 술집이었지만, 색주가는 여자만 있다뿐이지 안주도 술도 맛없는 곳으로 손님들에게 바가지를 씌우기 일쑤였다고 한다. 기생은 가곡이나 시조를 부르지만, 색주가의 여자는 오직 잡가만 불렀다. 기생은 일종의 연예인으로 정분이 난 특정인이 아니면 잠자리를 같이하지 않았지만, 색주가의 작부는 장삼이사 취객들의 요구에 따라 성매매도 하는 신산한 삶을 살았다.

색주가는 한양의 홍제원(지금의 홍제동)에 집단적으로 있었고, 뒤에 남대문 밖과 파고다공원 뒤에도 생겼다고 한다. 뒤 두 지역의 색주가는 근래에까지 이어져 이른바 ‘양동’과 ‘종삼’의 집창촌이 되었다. 색주가는 밖에서 보면 금방 알 수 있었다. 색주가 문 앞에는 술을 거르는 도구인 용수에 갓모(비가 올 때 갓 위에 덮어쓰는 모자)를 씌워 긴 나무에 꽂아 세우고, 그 옆에 자그마한 등을 달아놓았다. 그러므로 밤이 되면 색주가가 있는 동네는 붉은 등으로 온통 뒤덮이게 되어 ‘홍등가’가 된다. 낮에는 나무에 용수 씌운 것으로 표시를 한다. 용수와 갓모는 각각 남자와 여자의 성기를 은유하는 것으로, 조선시대 색주가 사장님들의 홍보 마인드가 흥미롭다.

얼마 전 청와대 행정관 두 명과 방송통신위원회 과장이 종합유선방송사업자로부터 룸살롱에서 술접대를 받은 뒤 여종업원과 성매매를 한 사실이 밝혀졌다. 또 기획사 사장의 협박으로 유력 인사들을 상대로 술시중을 들고 성접대를 강요당했다는 한 여배우가 자살했다. 서민 전용 조선시대 색주가와 돈과 권력으로 술과 몸을 흥정하려는 현대판 색주가가 비교되는 풍경이다.

 

술과 노래가 이원화된 서양식 술자리 문화가 대세 됐지만 우리의 전통은 ‘부르는 술판’이었으니…
» 마시면서 듣기? 마시면서 부르기!
바늘에게 “너는 왜 항상 실과 같이 다니느냐”고 물을 필요가 없는 것처럼, 술에게 “너는 왜 항상 노래와 같이 다니느냐”고 물을 필요가 없다. 바늘과 실도 한 몸이고, 술과 노래도 한 몸이기 때문이다. 거칠게 이야기하자면, 고대에 하늘이나 산천에 제사 지낼 때 무당은 가장 신성한 음식, 곧 신의 음식인 술을 정성스럽게 올리고 나서, 공동체의 당면한 희망과 염원을 신께 아뢰고, 신이 이를 기쁘게 받아들이도록 하려고 흥겨운 몸짓을 보였다. 이 제사 때의 무당의 비나리가 서사문학이 되고, 그 읊은 선율이 노래가 되고, 그 몸짓이 춤이 되었으니, 술은 인간 이외에 예술의 탄생을 함께한 유일한 존재였다.

중국 서진(西晉)의 진수(陳壽·233~297)가 편찬한 <삼국지 위지 동이전>은 부여의 영고(迎鼓), 고구려의 동맹(東盟), 예의 무천(舞天), 삼한의 5월제와 10월제 등 농경의례에서 술과 노래를 늘 가까이했던 우리나라 고대사회의 풍속을 잘 전해주고 있다. “사람들은 씩씩하고 용맹한데, 젊은이들이 집을 지을 때 등가죽을 뚫어 줄을 꿰고 큰 나무를 매달고 힘 있게 외치며 일하는 것을 강건함으로 여긴다. 매 5월에 밭일을 끝내고 귀신에게 제사하는 때는 밤낮으로 모여 술을 마시고 떼를 지어 가무를 즐기는데, 춤출 때는 수십 명이 함께 땅을 밟아 음률을 맞춘다. 10월에 농사일이 끝나면 또한 이와 같이 한다.”

술과 노래의 아우러짐은 동서와 고금을 막론한 보편적 현상이지만, 가만히 살펴보면 서양과 동양, 특히 우리나라는 그 수용 양태에서 차별성을 보인다. 대체로 서양은 술을 마시면서 다른 사람의 서비스 노동인 노래를 수동적으로 ‘듣는’ 데 비해, 우리는 술을 마시면서 그 참가자들이 함께 능동적으로 노래를 ‘부른다’. 술자리에서 술 마시는 자와 노래 부르는 자의 분리는 계급적 층위를 가지면서 참가자들을 주체적 인간과 비주체적 인간으로 개별화·이원화한다. 그러나 술 마시는 자와 노래 부르는 자의 합일은 열정과 흥겨움을 한데 소통시킴으로써 노동의 고통을 함께 풀어내고, 그 힘으로 공동체의 발전과 단결을 이끌어낸다.

그러나 이제는 우리나라에서도 술자리에서 노래를 부르기가 쉽지 않게 됐다. 한동안 우리 전통 술인 막걸리판에서는 창이나 민요를, 전통 술은 아니지만 서민의 술로 자리잡은 소주판에서는 ‘뽕짝’ 대중가요를 즐겨 불렀지만, 맥주·와인·양주 등 서양 술이 우리 술판을 점령하고, 그들의 팝송·클래식을 ‘듣는’ 문화가 주류를 이루면서 노래 ‘부르는’ 술판은 사라지게 됐다. 그러나 술 마시면서 노래 부르고 춤추던 배달민족의 ‘음주가무’ 전통은 도도한 동도서기(東道西器)의 물결을 헤치고 굳건히 살아남았으니, 오늘 밤에도 방방곡곡의 2차 노래방에서 한껏 목청을 뽐내는 장삼이사들을 보라.

서울 압구정동 현대고등학교 건너편 가로수길 초입에 가면 ‘트래픽’(TRAFFIC·02-3444-7359)이란 카페가 있다. 이 집 주인 오영길(54)씨는 20살부터 LP 레코드판을 수집해 현재 2만여 장을 보유하고 있다. 1980년대 초에는 경희대 앞에서 음악다방을 운영하기도 했고, 90년대 초 종로에서 음반 가게를 하다가 7년 전 이 자리에 항상 올드 팝이 흐르는 카페를 열었다. 이제는 압구정동의 명소로 자리잡은 카페다.

CD는 음질은 깨끗하지만 음을 깎아 이어붙이기 때문에 사람이 들을 수 없는 음까지 모두 포괄하는 LP판에 비하면 포근한 맛이 적다는 것이 오씨의 설명이다. 주인이자 DJ인 오씨는 손님들로부터 신청곡을 받으면, 김민기에서 비틀스에 이르기까지 카페 한 면의 벽을 꽉 채운 2만여 장의 레코드판 속에서 금세금세 찾아낸다. 30여 년 전 더벅머리 송창식의 <고래사냥>처럼 술 마시고 노래하고 춤을 출 수는 없지만, 손목시계를 자주 들여다볼 일이 없을 때 한번 느긋하게 ‘트래픽’에 와보시라. 사람과 사람, 사람과 노래 사이의 소통(traffic)에 목말라 하시는 분, 지나간 70년대의 정서와 추억을 그리워하시는 분 말이다. 박정희는 빼고.

 

망자와의 일심동체를 확인하는 음복주를 들이키며
안타깝고 미안한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을 애도하다
» 5월24일 오전 경남 김해시 봉하마을회관 앞에 마련된 노무현 전 대통령의 임시분향소를 찾은 추모객이 술 한 잔을 영정 앞에 올리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나(生)는 것은 죽음의 시작이요 성(盛)한 것은 쇠하는 것의 발단이다. 영화스러운 것은 욕되는 일의 조짐이요 얻는 것은 잃는 것의 원인이다. 그런 때문에 나면 반드시 죽음이 있고, 성하면 반드시 쇠함이 있고, 영화스러우면 반드시 욕됨이 있고, 얻으면 잃게 되는 것은 반드시 그렇게 되는 정당한 이치로서, 어리석거나 지혜가 있거나 간에 아무도 면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런데 세상에 어두운 사람은 매양 살면서도 부끄러움을 알지 못하고, 성한 데에 처해 있으면서도 이를 그칠 줄 알지 못하고, 영화를 탐내어 피할 줄 알지 못하고, 얻는 것만 힘쓰고 경계할 줄 모르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이수광, <지봉유설> 권17 사망)

살아오면서도 부끄러움을 안 사람, 대통령이라는 무한에 가까운 권력을 가졌으면서도 누리기를 버린 사람, 도회의 모든 영화를 훌훌 털어버리고 태를 묻은 궁벽한 고향땅으로 돌아온 사람, 노무현 전 대통령이 5월29일 한 줌의 재로 돌아갔다. 그야말로 “날 때에는 한 가지 물건도 가지고 오지 않고 죽을 때에도 한 가지 물건도 가지고 가지 않는다”는 옛사람의 말처럼, 부귀도 영화도 미련도 후회도 모두 버리고 저 세상으로 가버린 것이다. 아, 노무현 대통령이여, 죽어서 돌아가 천명(天命)을 즐길 것이니 무엇을 다시 의심하랴. 하나 속진의 인연을 끊지 못하는 자 슬프고 슬플 뿐이니, 곡(哭)하며 이 글을 메워간다.

사람이 죽는 것은 정한 이치다. 그러나 죽음의 세계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는 아주 일찍부터 인간들의 관심을 지배했다. 이러한 관심은 그 극복의 도구로서 장례와 제례 문화의 탄생과 발전으로 이어졌다. 곧 이승과 저승을 잇는 무언가가 절실하게 필요했던 것이다. 궁극적으로 피할 수 없는 일이라면 탄생이 축복인 것처럼 죽음도 축복 속에 새로운 세계로 떠나보내고 싶었던 것이다. 하여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은 장례의식을 행하는 동물’이라 했고, 볼테르는 “인간은 자기가 죽으리라는 것을 아는 유일한 종(種)으로서, 그들은 경험을 통해 죽음을 인식한다”고 말했다.

장례와 제례 의식은 믿음에 따라 하늘에서의 영원한 삶을 구하거나, 땅으로의 새로운 환생을 비는 구조로 이뤄진다. 그러나 현상적으로 보면, 장례는 산 자와 죽은 자의 이별 의식이고, 제례는 죽은 자에 대한 산 자의 기억을 이어가는 회상 의식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과 이별하고자, 그에 대한 사연과 기억을 공유하고자 전국 방방곡곡 수백 군데에 분향소가 차려지고, 수백만의 사람들이 향을 피우고 술잔을 올렸다. 그리고 미안한 마음으로, 안타까운 마음으로 눈물 반 술 반의 음복(飮福) 잔을 입 안에 털어넣었다.

<설문해자>에 보면 복(福)자에는 ‘제사 때 바치는 술과 음식’이란 뜻도 있다. 그러므로 음복은 제사를 지내고 난 뒤 죽은 사람과의 일심동체를 확인하기 위해 제상에 올라왔던 제주와 제수를 나눠먹는 절차인데, 음식보다는 술이 중심이다. 곧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이 술과 음식을 나눠먹음으로써 하늘과 땅, 조상과 후손이 이어지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원래의 뜻이 발전해 요즘에는 음복을 해야 제사에 참여한 사람들이 골고루 복을 받는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장례와 제례가 축복의 의식인 만큼 그렇게 해석해도 나쁠 것은 없다.

사악한 패거리들에 의해 평생을 지켜왔던 자존심이 능멸되고, 상식과 의식을 가진 한 인간의 품격이 조롱당하고, 일국의 대통령으로서 이뤄왔던 숱한 성과와 가치들이 부인되고 유린되는 것을 보다 못해 스무 척 바위 아래로 육신을 던진 그. “너무 슬퍼하지 마라. 삶과 죽음이 모두 자연의 한 조각 아니겠는가. 미안해하지 마라. 누구도 원망하지 마라. 운명이다”라며 남은 이들을 위로한 그이지만, 뼈에 사무치는 이 한과 슬픔은 어찌할꼬. 오늘 밤에도 신갈 오거리 분향소에서 술 한 잔 올리고 음복, 또 음복으로 당신과의 끈을 이어가는, 그리하여 이뤄지는 이별을 연습한다.

 

잡지 <전라도닷컴>에 선문답 같은 광고 내온 ‘소야촌’…
테이블 회전 생각 안 하는 주인장의 철학이 밴 맛
» ‘소야촌’ 사진 김학민
광주에서 발간되고 있는 <전라도닷컴>이란 월간지가 있다. 표지까지 합해도 84쪽밖에 안 되는 자그마한 잡지이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그야말로 주옥같은 글들로 꽉 채워져 있다. 서민들의 삶과 생각에 친근한 테마를 골라 다양한 시각으로 접근하는 기획특집, 전라도 각 지역 오일장의 오래된 풍경 이야기, 노인뿐이지만 인심 넉넉한 전라도 구석구석의 농촌 기행, 예향 호남의 자존심을 전하는 문화예술 한마당 등 매호마다 잊혀지고 사라져가는 사연들이 구수한 생짜 전라도 사투리로 독자들의 가슴을 잔잔하게 적셔준다.

나는 <전라도닷컴>이 우편으로 부쳐져 오면 거대담론 하나 없는 이 잡지가 하도 재미있어 어느 때는 하룻밤 사이에 기사는 물론 광고까지 모두 읽어버린다. 이 잡지에는 2007년 재창간 때부터 지금까지 각 호의 마지막 페이지에 ‘소야촌’이라는 식당의 1단 광고가 실려 있다. 그런데 그 홍보 카피라는 것이 자기 식당 음식 맛이 좋다는 것인지 아닌지, 그래서 꼭 오라는 것인지 말라는 것인지 보는 이의 마음을 헷갈리게 한다. 이를테면 이런 것들이다.

“입 틀어막는다고 말 안 합디여? 숨어서 말한다고 모릅디여? 나랏일 허는 사람이 즈그들 밥그륵만 챙기믄 쓰갔소?”(2009년 5월호)

“하루해 뉘엿거린디, 그 짜투리에 서서 더듬거림서 온 길 돌아본께, 이파리 떨어진 가을 신작로맨키로 텅 비었네.”(2008년 10월호)

“놈이 안 본디서 잘 해야겄습니다. 사람들은 안 본 것 같아도 다 알아불드만요. 함부로 말하지 않아야겄습니다. 사람들은 안 들은 것 같아도 다 알아불드랑께요.”(2008년 6월호)

이 홍보 카피가 소비자의 구매 욕구를 자극해 손님들을 얼마나 많이 오게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항상 이 광고를 보고는 광주에 갈 기회가 있다면 ‘소야촌’에 꼭 들러볼 작정을 했다. 그리고 드디어 올해 5·18 광주민주화운동 기념일 즈음에 이런저런 일로 광주에 가게 되었다. 광고에 나온 “금호지구 시비에스 뽀짝 옆에”라는 ‘소야촌’의 위치 설명 중 내가 해독하지 못한 ‘뽀짝’은 전라도 토종 후배를 통해 ‘바짝’이라는 뜻이라고 확인받았다.

소야촌(素野村)은 씨 뿌리기에 앞서 펼쳐져 있는 하얀 들판, 나락을 거둬들인 뒤에 펼쳐진 하얀 들판을 뜻한다. 주인장 김요수(44)씨는 원래 담양에서 같은 이름의 찻집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찻집이 좀 되는 듯하자 집주인이 욕심을 부려, 거기에서 나와 김치공장을 경영하다가 현재의 식당을 열게 된 것이다. 이 집은 ‘찹쌀과 엄나무가 만나서 청주가 된 엄나무술’이 기가 막히게 좋다. 전부터 찹쌀막걸리를 쭉 담가왔는데, 우연히 약재로 사온 엄나무가 술독에 빠진 것을 모르고 있다가 나중에 걸러보니 일품이더란다. 색깔이 나지 않아 고민하기에 지초를 같이 넣어 담가보라고 권했다.

소야촌의 차림표 음식 이름을 보면 음식을 만든 사람의 마음씨와 정성이 바로 환하게 떠오른다. ‘아삭한 콩나물에 매콤한 해물찜’ ‘한약재로 기름기 쫙 뺀 삶은 고기와 홍어’ ‘탁 까서 한 입에 척 묵는 찐 새우’ ‘하나하나 손질한 돌판 장어’ ‘노릇노릇 먹음직스런 생선구이’ ‘쫄깃쫄깃한 참꼬막’ ‘잘 다진 소고기와 돼지고기에 갖은 양념을 한 떡갈비’ ‘몸이 먼저 알아보는 맛난 버섯죽’ ‘소야촌에서 직접 담근 우리 차’ ‘계절에 따라 나오는 과일’ 등 긴 음식 이름이 재미있다.


김요수씨는 “광주의 식당들은 웬만하면 맛이 다 있다. 전라도 사람들이라면 웬만하면 맛을 다 낼 줄 안다. 그러나 식당이 맛있는 음식과 술만으로 승부해서는 안 된다. 식당·술집은 손님들이 시간에 쫓기지 않고 편안하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사랑방 같아야 한다”고 말한다. 소야촌은 그러한 생각에 맞추기 위해 그가 손수 설계해 지은 단층 건물이다. 숟갈을 놓자마자 자리를 서둘러 비워줘야 하는 ‘테이블 회전’을 생각하지 않고 5개의 방만 꾸며 저녁에도 서너 팀 외에는 예약을 받지 않는다. 그래서 분위기에 좀 까다로운 광주의 학계, 문화예술계, 언론계 등 지식인층이 주로 애용하는 곳이 소야촌이다. 문의 062-431-3693.

 

아메리카 정복자들, 노예 거래와 인디언 말살에 술을 이용
» 인디언의 수난은 진행형이다. 캐나다 원주민 의회 의장이 2007년 정부로부터 차별정책에 대한 사과를 받은 뒤 연설하고 있다. 사진 로이터
제44대 미국 대통령 버락 오바마는 1776년 7월4일 미국이 영국의 식민지로부터 독립한 이래 최초로 당선된 아프리카계 혼혈 대통령이다. 미국 독립 당시 북아메리카 지역에 살고 있던 사람들은 크게 세 부류로 나뉜다. 첫째는 유럽에서 신교의 자유를 찾아 들어온 300만여 명의 백인, 둘째는 아프리카로부터 강제로 끌려온 70만여 명의 흑인 노예, 그리고 마지막으로 1만5천 년 이상 아메리카 대륙에서 평화롭게 살아왔던 50만여 명의 원주민(콜럼버스의 이른바 신대륙 ‘발견’ 당시 100만여 명의 원주민이 북아메리카 지역에 살았던 것으로 추산되나, 거듭된 학살로 미국 독립 당시 원주민 인구는 반으로 줄어들었다)이다.

결국 세계 최강대국 미국의 출발은, 그들이 어떻게 포장을 하더라도, 자기들의 고결한 신앙을 지키기 위해 ‘느닷없이’ 남의 땅에 몰려들어와 수만 년간 터 잡고 살아왔던 그 땅의 원주민들을 무자비하게 말살하고, 그 드넓은 땅덩어리에서 농사를 짓기 위해 아프리카인들을 사냥해 길들인 노예를 부리는 체제의 수립이 그 본질인 것이다. 그러하니 건국 이래 200여 년이 지나도록 백인들이 대통령을 정점으로 한 국가의 상층부를 지배해 권리를 독점하면서 흑인과 원주민의 권리와 자유를 침탈하고 차별해온 것이 미국 사회의 흐름이었다. 흑인 노예들의 강제노동으로 지은 백악관에 흑인의 후예인 오바마가 대통령으로 입성한 것이 큰 사건인 것도 바로 그 이유이다.

‘술 식민주의’(alchoolosialisme)란 말이 있다. 이 프랑스말 신조어는 한 나라의 국민을 식민지 노예로 만들기 위해 국가 내에서 제조되었거나 수입해온 술의 공급과 사용을 조작하는 것을 가리킨다. 순진하고 힘없는 세계의 사람들이 이전에 접해보지 못한 술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한 무기였다. 이 무기의 희생자들은 이에 길들여져 술을 더 달라고 아우성치게 되고, 그럴수록 더욱 술을 공급하는 자들에게 예속돼갔다. 파렴치한 이 수법은 17세기부터 아프리카와 아메리카의 정복자들이 노예를 거래하는 데, 원주민을 축출·말살하는 데 사용해왔다.

술은 포르투갈 등 유럽의 노예상인과 아프리카인 노예 중개인들의 거래에 널리 이용되었다. 술을 먹임으로써 부족 전체를 사냥하거나 사냥감의 판단을 둔하게 할 수 있었다. 또 유럽의 독한 증류주는 총, 화약 다음으로 노예 거래에서 교환가치가 큰 물건이었다. 술 서너 병, 심지어 술 한 병으로 쓸 만한 노예 한 명을 바꿀 수 있었다. 한 부족장 노예 중개인은 오늘날의 정찰제처럼 노예 한 명당 교환될 물건의 양을 엄격히 정해놓기도 했다. 건강한 남자 노예의 경우 스물다섯 내지 서른 자루의 총이나 화약 300ℓ, 또는 4.5배럴의 증류주를 주어야 했다. 이렇게 ‘확보된’ 아프리카인들이 노예선에 차곡차곡 실려 미국의 목화밭으로 끌려갔던 것이다.

아메리카 대륙에 들어온 백인들은 오드비(유럽의 독한 증류주), 럼과 같은 독이 발린 선물로 원주민들의 씨를 말려가고 있었다. 백인들은 처음에는 원주민들에게 술을 허용하지 않았다가, 그들이 잡은 짐승 털가죽이 탐나자 “가장 정직한 사람들을 사회와 무역업에 편입시킨다”는 명목으로 털가죽과 술의 교환을 용인했다. 원주민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짐승 가죽을 내다팔아 술을 구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짐승 가죽을 얻기 위해 사냥하는 백인을 돕는 대가로 증류주를 받는 원주민도 나타났다. 원주민들에게 술의 자유를! 그런데 그 결과는? 아메리카 인디언의 알코올중독 비율은 백인의 2배에 달하고 있고, 독립 당시 12%를 차지했던 인구가 현재 0.2%인 것이 ‘의도하지 않은 진실’인 것이다.

200여 년 전 미국 독립 전후 아메리카 대륙의 정복자 백인들, 그리고 그 신산한 삶을 살았던 아프리카 흑인들과 인디언 사이에 얽힌 술 식민주의의 화두는 일찍이 로마의 역사학자 타키투스가 독일의 바르바리아인들을 이야기하면서 갈파한 적이 있다. “그들을 술에 취하게 만들면 우리는 무기를 사용하는 것보다 악을 동원해 더 쉽게 정복할 수 있다.”

 

전봉준 장군이 치료차 마셨다던 대나무 진액으로 빚은 술…
‘조선 3대 명주’로 꼽히나 겨우 명맥 이어
“아! 재앙과 변괴가 일어나는 것이 어찌 우연한 일이겠는가! 국가정치의 순탄함이나 혼란에는 나름대로 주어진 운수가 있고, 일이 꼬이거나 풀리는 것은 순환되게 마련이다. 이런 일들은 비록 당시의 운세와 시대적 상황에 따라 어쩔 수 없이 결정된 것이라 바꿀 수 없다고는 하나 더러는 일을 담당한 사람들의 잘잘못에 기인하기도 하는데, 아마도 오랫동안 누적된 추세로 그렇게 되는 것이지 일조일석에 조성된 것은 아니다.”

» 송명섭씨

위 글은 1910년 한-일 합병 조약이 체결되자 “새도 짐승도 슬피 울고 강산도 찡그리네/ 무궁화 온 세상이 이젠 망해 버렸어라/ 가을 등불 아래 책 덮고 지난날 생각하니/ 어렵구나, 세상에서 글 아는 사람 노릇 하기가”라는 절명시를 남기고 자결한 매천 황현의 저서 <오하기문>의 첫 구절이다. 100여 년 전 망국의 현실을 한마디로 압축한 이 구절은 시대의 흐름을 거꾸로 치달아가는 오늘의 이명박 정권과 맞닿으며, 매천 절명시의 비분과 강개는 한 세기를 지나 노무현 전 대통령의 피눈물 유서에 함축된다.

<오하기문>은 19세기 당쟁의 폐해, 동학농민전쟁의 시말, 일제의 침략과 항일의병 투쟁 등을 자세히 다루고 있다. 그러나 이 중에서도 동학농민전쟁에 대해서는 그 발단에서부터 관군과의 전투와 일본군의 개입, 전봉준 등 지도부의 체포, 농민군의 패배에 이르기까지 전 과정을 상세히 기술하고 있어 이 분야 연구에서 가장 많이 인용되고 있는 전적이다. 이 책은 전봉준이 사로잡혀 서울로 압송되기 직전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봉준은 지방관청의 관리들에게 모두 ‘너’ 또는 ‘자네’라고 하면서 꾸짖고 배척하며 조금도 굽히지 않았다. 압송 도중에는 푸른 대쪽을 불에 구워서 받은 진액과 인삼을 구하여 상처를 치료하였고, 쌀밥을 먹는 등 행동에 두려움이 없었고, 만약 조금이라도 자신의 뜻에 거슬리면 ‘내 죄는 종사와 관련되어 죽게 되면 진실로 죽을 뿐인데, 감히 너희 같은 것들이 어찌 이럴 수 있단 말인가?’라고 꾸짖었다. 압송하는 사람들이 모두 공손하고 조심스럽게 대하였다.”

위 인용 중 체포 뒤의 고문 과정에서 망가진 몸을 추스르기 위해 녹두장군이 드셨다는 ‘푸른 대쪽을 구워서 받은 진액’은 바로 ‘죽력’(竹瀝)을 말한다. 죽력은 대나무를 쪼개 항아리에 넣고 황토와 왕겨를 이용해 간접 열을 쏘여 약 성분이 진의 형태로 흘러내린 액체를 말하는데, 전통적으로 대나무기름이라고 불려왔다. 한방에서는 예로부터 중풍과 반신불수에 긴요하게 써왔으며, 혈압을 다스리고 피를 맑게 하며, 담을 멎게 하고, 뇌졸중으로 인한 언어장애와 팔다리가 아픈 것을 치료하는 데 활용해왔다.

이 죽력과 다른 약재 서너 가지를 넣어 빚은 ‘죽력고’라는 술이 있다. <동국세시기>에는 ‘호서죽력고’라는 표현을 쓰고 있어 그것이 대나무와 연고가 있는 술이며, 호서 지방의 특주로 유명했음을 알 수 있다. 또 <증보산림경제>에 보면 “(죽력고는) 대나무의 명산지인 전라도에서 만든 것이 유명하다. 청죽을 쪼개어 불에 구워 스며 나오는 진액과 꿀을 소주병에 넣고 중탕하여서 쓰는데 생강즙을 넣어도 좋다”고 그 제조법이 나온다. 최남선도 <조선상식문답>에서 평양의 감홍로, 전주의 이강고와 함께 죽력고를 조선의 3대 명주로 꼽고 있다.

그러나 우리 비전 가양주(家釀酒)들이 대개 그렇듯이, 죽력고도 한동안 문헌으로만 남아 있을 뿐 실제 술은 전해내려오지 않았다. 그런데 전북 정읍시 태인면에서 양조장을 경영하는 송명섭씨(사진)가 죽력고 내리는 법을 어머니 은계정(1917∼88)씨에게서 배워 재현했다. 그의 어머니는 할아버지 은재송(1864∼1945)씨로부터 죽력고 기술을 배웠다고 한다. 은씨는 전북 고부에서 한약방을 운영했는데, 늘 치료에 도움이 될 만한 술의 비방을 모아 죽력고 등 약술을 빚어 치료 보조제로 이용했다고 한다. 죽력고는 아직도 가내수공업적으로 가까스로 그 명줄을 이어가고 있다. 죽창이니, 죽봉이니, 죽대니 헛소리 말고 가물가물 명맥을 이어가고 있는 전통술 죽력고나 좀 지원했으면 좋겠다.

문의 063-534-4018.

 

서북지방의 전통적인 손님 대접 방식 ‘선주후면’…
지역 특성에 음식궁합까지 잘 맞춘 선조의 지혜 담겨
» 평양식 식사법: 술부터 들이켠 뒤 국수를. 사진 김학민
‘선주후면’(先酒後麵)이란 단어를 국어사전에서 찾아보면 ‘[명사] 먼저 술을 마시고 나중에 국수를 먹음’이라고 너무 재미없게 풀이돼 있다. 애주가들은 술과 밥이 같이 나오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자기 주량만큼 어느 정도 술을 마신 뒤 곡기를 조금 채우는 게 보통이고, 술자리에서는 아예 식사를 하지 않는 술꾼들도 많다. 속이 비어야 첫 잔을 털어넣을 때 짜르르한 맛이 나고, 또 술도 양껏 마실 수 있기 때문이리라.

실전에서도 ‘선주후면’은 술부터 마시고 밥은 나중에 먹으라는 공리로 암암리에 자리잡았는데, 술 다음에 왜 밥이 아니고 국수일까? 술도 술술 넘어가고 국수도 술술 넘어가기 때문일까? 인터넷에서 찾아보니 어떤 술꾼은 ‘선주후면’을 “냉면을 먹기 전에 술을 몇 잔 마셔야 냉면 맛이 좋다”고 자기 편하게 풀이하기도 했다. 그러나 북한에서 나온 <조선어어원편람>은 아래와 같이 ‘선주후면’이 평양 지방 고유의 식생활 격식이었음을 설명한다.

“‘선주후면’이라는 말은 ‘자리에 앉으면 먼저 술을 들고 후에 국수를 먹는다’는 평양 고유의 속담을 한문으로 옮긴 것으로서 술을 마신 다음 국수를 먹어야 속이 거뜬하다는 사람들의 식성을 반영하고 있다. 술과 국수는 이렇게 서로 뗄 수 없는 것으로 되고 있다. 예로부터 우리나라 사람들은 훌륭한 민족적인 음식을 가지고 있었을 뿐 아니라 각 지방마다 독특한 요리 및 식사법도 가지고 있었다. 선주후면은 평양을 중심으로 한 관서지방에서 우리 선조들이 가장 귀한 손님들에게 대접하는 식사법의 하나로 전해지고 있다.

성격이 용맹하고 강직한 평양 사람들은 연한 술과 떡을 좋아하는 남도 사람들과는 달리 보통 40%가 넘는 독한 술을 즐겨 마셨다. 특히 빛깔 좋고 단맛이 있으면서도 40~50%의 독한 감홍로는 평양 특산물로서 이름이 높았는데, 조선 후기에 쓰인 <평양지>에는 감홍로가 당시 왕에게 올리는 진상품의 하나로 돼 있었다. 옛 평양 사람들은 귀한 손님을 맞거나 경사가 나든가 하면 감홍로를 마시면서 즐겼으며, 술을 마신 다음에는 여러 가지 채소와 쇠고기 또는 닭고기 등으로 꾸미를 올려놓은 메밀국수를 먹었다. 이런 데로부터 평양 사람들은 예로부터 자기 지방의 독특한 손님 접대 방식으로 ‘선주후면’을 대대손손 내려오면서 전해왔다.

선주후면은 사람의 건강에 필요한 각종 영양물질들을 합리적으로 배합해 섭취하고 그것을 소화·흡수하도록 하는 좋은 식사법이라고 할 수 있다. 선주후면은 또한 산성 식품인 술과 알카리성 식품인 메밀국수를 배합해 마시고 먹게 함으로써 식사에서 산과 알카리의 균형을 잘 조화시켜준다고 한다. 선주후면이 이처럼 독한 평양 술에 시원한 냉면을 곁들여 즐겨 먹던 평양 사람들의 독특한 식사법이고, 평양이 냉면과 선주후면의 고향이라면 그에 대비되는 칼국수는 남부 조선, 특히 독한 술을 좋아하지 않던 경상도나 전라도 사람들과 기후 조건상 메밀을 심을 수 없는 남부 지방에서 귀한 사람들이 오면 햅밀과 닭고기로 만들어 내놓았던 음식이다.”

내가 사는 경기 용인 신갈오거리 부근에 ‘고향국수’(주인 김미자·031-283-9494)라는 아주 맛있는 국숫집이 하나 있다. 나는 정갈한 이 집의 국수 맛에 끌려 자주 들리곤 했는데, 어느 날 후배 몇몇과 선면(先麵)하다가 뜻이 맞아 밤늦도록 후주(後酒)까지 하게 되었다. 그런데 잘 삶아 찬물에 여러 번 헹궈 쫄깃한 면발, 멸치로 다시를 낸 시원한 국물만큼이나 이 집의 안주도 감칠맛이 있으면서 깔끔했다. ‘고향국수’의 안주는 7천원짜리 딱 세 가지로, 노릇노릇한 감자전, 두툼한 파전, 새콤하게 볶은 김치에 데친 두부가 나오는 두부김치이니, 2인 기준으로 안주 한 접시 7천원, 막걸리 두 병 6천원, 잔치국수 두 그릇 6천원 도합 1만9천원이면 선주후면의 ‘소박한 술상’이 떡하니 차려진다(사진). 물론 선주로 소주나 맥주를 택할 수도 있고, 후면 메뉴로는 값 4천원의 콩국수와 비빔국수도 있다. 1천원만 더 쓰면 어느 국수든 곱빼기이니, 국수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참으로 넉넉한 집이다.

 

전라도 양반 동네의 문화예술인·사회운동가들이 2차 때 단골로 찾는 술집…
집주인의 소리 한 자락은 덤
» 전주의 모든 강은 ‘새벽강’으로 흐르네. 김학민
인터넷 매체 <프레시안>은 아주 독특한 방법으로 오프라인에서 독자들과 만나고 있다. 인간의 삶에 깊이와 색채를 더해주는 것이 인문학인데, 그 인문학을 즐겨 공부하고 즐겨 생각하게 하는 문화공동체를 만들어가기 위해 인문학습원을 운영하는 것이다. 인문학습원은 국토학교(교장 소설가 박태순), 미술사학교(〃 서양미술사학자 노성두), 신화학교(〃 한국외대 교수 유재원), 미술심리학교(〃 미술치료사 박승숙), 앤티크학교(〃 자유여행가 김재규), 이슬람학교(〃 한양대 교수 이희수), 인도학교(〃 서울불교대학원대학교 교수 이거룡), 중남미학교(〃 외교안보연구원 객원교수 이성형) 등을 운영하고 있다.

인문학습원은 지난 6월 1박2일 일정으로 전북 전주의 역사와 문화예술, 한지, 한식, 소리 등에 대해 강의를 듣고 체험하는 ‘전주학교’를 열었다. 전주학교가 열리기 전에도 전주의 문화와 멋을 사랑하고 널리 알리자는 모임인 ‘천년전주사랑’에서 비슷한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이번에 더 체계적이고 지속적인 전주 역사문화 답사 과정이 마련된 것이다. 전주 토박이로 전주학교 교장을 맡고 있는 이두엽 군산대 겸임교수가 사근사근 설을 푸는 전주 이야기, 전주로의 초대 말씀은 이렇다.

“전주는 시간이 천천히 흐르는 곳입니다. 누구에게나 고향 같은, ‘고향지수’가 아주 높은 곳이지요. 나지막한 한옥 담장 햇살 가득한 골목길에서 오래전에 잃은 나를 찾을 수 있는 곳입니다. 전주 막걸리를 마시면 네 번 취한다고 합니다. 첫 번째는 흥에 취하고, 두 번째는 안주에 취하고, 세 번째는 맛에 취하고, 네 번째는 정에 취한다고 합니다. 막걸리뿐 아니라, 전주에 오면 네 가지 취할 거리가 있습니다. 첫째 그리운 한옥 골목길이요, 둘째 ‘간장(肝腸)의 눈물’을 토해낼 만큼 애절하면서도 ‘금세 숨이 탁 막히게 벌어지는 사랑놀이’처럼 흥미진진한, 옹골차고 푸진 우리 소리요, 셋째 심성 고운 여인네들의 섬세한 손맛이요, 넷째 천지만물에 깃든 한울을 공경하고 모시는 ‘전라도의 속 깊은 마음’입니다.

<혼불>의 작가 최명희는 전주를 ‘꽃심의 땅’으로 불렀습니다. 꽃의 심(心), 무엇인가를 간절히 바라면서, 기운을 다해 꼿꼿이 버텨온 땅이 전주입니다. 동학혁명의 중심 지역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민주자치기구인 집강소가 설치됐던, 자유와 평등의 꽃이 한때 피었던 곳입니다. 전주는 또한 전통문화의 법고창신(法古創新·옛것을 본받아 새로운 것을 창조함)을 꿈꾸는 도시입니다. 전통문화는 우리들 삶을 든든하게 하는 ‘뿌리 깊은 나무’와 같습니다. 또한 우리들 마음을 너그럽게 적시는 ‘샘이 깊은 물’과도 같습니다. 그동안 우리는 삶의 근본이 되는 전통문화를 잊고 살았습니다만, 힘겹게나마 이를 껴안고 지켜온 도시가, 바로 여러분이 사랑하는 천년의 도시 전주입니다.”

‘새벽강’(063-283-4388)은 전주시 경원동 한옥거리 부근에 있는 ‘24시 술집’이다. 풍물미학자 김원호, 시인 박남준 등과 함께 풍물패 ‘갠지갠’ 활동을 했던 강은자씨가 20여 년 전 전주의 문화예술인, 민주화운동권, 사회운동가들의 사랑방 삼아 연 집이다. 새벽강은 특별한 민속주나 칼칼한 전라도식 안주가 있는 집은 아니다. 그러나 밤이 이슥해 ‘2차 타임’이 되면 작은 개천이 큰 강으로 모이듯, ‘맛있고 멋있는 전주 각계 사람들’이 여기로 몰려들어, 끼리끼리 노무현에, 이명박에, 정동영에 침방울을 튀기기도 하고, 한옥·한지·한식을 어떻게 가꿔 발전시킬 것인가로 머리를 맞대고 소곤거리기도 한다.

새벽강의 하이라이트는 언제나 북장단에 맞추어 부르는 강은자씨의 우리 소리 한마당이다. 이때쯤에는 걸걸한 전라도 소리 한 자락 뽑는 사람, 사뭇 비장하게 운동가요를 합창하는 사람들, 흘러간 가요를 맛깔스럽게 부르는 사람으로 작은 음악회가 열리기도 한다. 새벽 5시 새벽강이 문을 닫을 즈음이면 손님들은 강물이 흘러가듯 같은 동네 콩나물해장국집들로 끼리끼리 흩어지고, 오래된 도시 전주에는 또다시 하루가 시작되는 해가 떠오른다.

 

사람 살리는 약초로 환생한 금화·은화 자매 이야기처럼
노·김 전 대통령의 잇단 서거가 민주주의 살리는 계기 되길
» ‘인동주마을’의 상차림. 김학민
옛날 어느 부부가 결혼한 지 한참이 지나도록 아이를 낳지 못해 애를 태우다가 천지신명께 빌어 쌍둥이를 낳았는데, 두 딸이 너무 예뻐서 언니는 금화(金花), 동생은 은화(銀花)라고 이름을 지었다. 금화와 은화 두 쌍둥이는 건강하고 착하게 잘 자랐으며, 서로 우애도 깊었다. 어느덧 세월이 흘러 둘은 시집갈 나이가 되었지만, 서로 떨어지지 않으려고 고집을 피웠다. 부부가 몹시 걱정을 하던 중 어느 날 갑자기 언니 금화가 열이 심하게 나면서 얼굴과 몸이 온통 붉게 변했다. 급히 의원을 불렀지만, 금화의 열병에는 드는 약이 없다고 하고는 치료를 포기했다. 결국 금화는 동생 은화의 정성스러운 보살핌에도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런데 며칠 뒤 동생 은화도 시름시름 기력을 잃더니 언니와 똑같은 병을 앓게 되었다. 순식간에 두 딸을 잃게 되어 망연자실한 부부에게 은화는 “저희들은 비록 죽지만 죽어서라도 열병을 치료할 수 있는 약초가 되겠습니다”라는 말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해가 바뀌고 봄이 되자 자매의 무덤에서는 이름 모를 새싹이 올라왔다. 이 풀에서는 여름에 노란색 꽃과 흰색 꽃이 피었는데, 처음 필 때는 흰색이었다가 점점 노란색으로 변하는 것이었다. 얼마 뒤 마을에 열병이 돌았는데, 마을 사람들이 은화의 말을 기억하고 그 꽃을 달여 먹자 열병이 낫게 되었다. 마을 사람들은 금화와 은화의 고마움을 잊지 않기 위해 자매의 이름을 따서 꽃의 이름을 ‘금은화’(金銀花)라고 붙였다.

금은화는 여름에 흰색의 꽃이 피어 노란색으로 변하기 때문에 마치 두 가지 꽃이 동시에 피어나는 것처럼 보이고, 또 한 겨울의 매서운 추위에도 버텨낸다고 하여 인동초(忍冬草) 또는 인동덩굴이라고도 한다. 그래서인지 인동초는 강한 항균 작용과 독을 풀고 열을 내리는 작용이 있어서 유행성 감기 같은 데 효과적인 약재로 사용한다. 또 인동초 잎을 따서 그늘에 하루쯤 두었다가 은근한 불에 가볍게 덖어내어 종이 봉지에 담아두고 한번에 2∼3g씩 더운 물에 우려내 차로 마시면 해열, 이뇨, 감기 예방과 만성간염 치료에도 효과가 있다고 한다.

목포 부근 전라도 남해안 지방에 가면 인동초를 넣어 담근 막걸리를 내오는 식당들이 많이 있다. 인동초 막걸리는 쌉쌀하면서도 달착지근한 맛을 내어 한 번 마셔보면 다시 찾게 된다. 목포시 옥교동의 식당 ‘인동주마을’(061-284-4068)에 가면 눈물이 나오도록 확 쏘는 홍어에, 인동초 술을 즐길 수 있다. ‘인동초 막걸리’와 이를 약주로 걸러낸 ‘인동초 평화주’가 나온다. 인동초 꽃을 송이가 피기 직전에 따서 그늘에 말리고, 잎과 줄기도 가을에 베어 그늘에서 말려 소주에 담가 마셔도 좋다. 또 초여름께 금방 핀 꽃을 따 말려서 소주 1.8ℓ에 꽃 100g 정도를 넣고 따뜻한 곳에서 1개월가량 숙성시켜 색깔이 노랗게 우러나면 그럴듯한 인동주가 된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서거한 지 석 달도 되지 않아 김대중 전 대통령까지 돌아가셨다. 삶과 죽음의 문턱을 숱하게 넘어 마침내 대통령에 당선되고 노벨평화상까지 받으신 그분의 파란만장한 일생은 흔히 인동초에 비유된다. 연이은 두 전직 대통령의 서거를 황망하게 겪으면서 금화와 은화의 애잔한 ‘인동초 전설’을 오늘의 현실에서 곱씹어본다. 부부가 아이가 없어 노심초사하다 쌍둥이를 얻듯, 대한민국 국민은 이승만·박정희·전두환 등 역대 독재정권의 압제에 희망을 잃고 살다가 천신만고 끝에 김대중·노무현 두 대통령을 만난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금화와 은화의 죽음처럼, 두 분은 수구꼴통들의 모략과 행패 속에 연이어 이승을 하직한다. 그러고는 마을에 죽음의 열병이 돈 것처럼, 퇴행과 거짓의 이명박 시대를 맞은 것이다. 해피엔딩으로 끝난 이 전설처럼, 금화와 은화의 무덤에서 피어난 인동초가 열병을 몰아내 마을을 살렸듯, 아무쪼록 노무현·김대중 두 분의 죽음의 의미가 이명박 대통령을 성찰케 하여 이 땅의 민주주의를 다시 살리는 계기가 되기를 빈다. ‘전설 따라 세 대통령’ 끝.

 

쇠막대에 꽂힌 닭이 빙빙 돌아가며 익어가던 ‘전기구이 통닭집’은 50년 전 한 소년의 무한한 동경의 대상이었으니
» 추억 속 ‘영양센터’가 아직 있구나. 사진 김학민
내가 중학생 무렵인 1960년대 초에 전기구이 통닭집이 등장한 것 같은데, 그때 받았던 충격(?)이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닭 한 마리로 죽을 쑤거나 국으로 끓여 여러 식구들이 오순도순 둘러앉아 먹는 것이 아니라, 닭을 통째로 구워 한두 사람이 뜯어먹다니! 해가 뉘엿뉘엿 져 학교에서 돌아올 즈음, 동네 전기구이 통닭집의 불이 훤히 밝혀져 있고, 유리창 안 그릴에서는 쇠막대에 꿰인 닭들이 빙빙 돌아가며 전기 열기에 기름이 빠지면서 껍데기가 노릇노릇 익어가는, 그리하여 집에 가는 것도 잊고 잠시 성장기의 끝 모를 허기를 눈으로 해결하던 내 어릴 적 로망의 한 풍경이다. 영양센터! 아, 그 통닭집 이름은 또 얼마나 멋졌던가.

그 무렵 청량리에 살던 내 사촌형님이 맞선을 보기로 했는데, 만나는 장소가 지금은 없어진 답십리 입구 오스카극장 건너편 ‘청량리영양센터’였다. 언젠가 사촌형수에게, 그날 선보면서 두 분이 통닭을 뜯어먹었느냐고 물으니, 그때는 청량리 부근에서 그 집이 제일 고급이었다고 에둘러 대답했다. 우리 집은 칠남매로, 10년 이상 중학생·고등학생·대학생이 줄곧 재학하고 있어 항시 살림이 쪼들렸다. 그러므로 내가 대학에 들어가기까지 알뜰살뜰한 우리 어머니의 닭은 죽이요 국이었지 ‘영양센터’는 아니었다. 나는 대학에 들어가자 바로 가정교사 아르바이트를 했다. 그리고 첫 월급을 타자마자 그날 저녁 영양센터 통닭을 사가지고 가 어릴 적 그 못다 한 로망을 이루었다.

영양(營養)은, 생물이 생명을 유지하고 몸을 성장시켜나가기 위해 필요한 성분을 섭취하는 작용, 또는 그 성분을 뜻한다. 생리학 용어인 ‘영양’을 지금은 모두 영양(營養)이라고 쓰고 있지만, 1950년대까지만 해도 우리나라에서는 영양(榮養)으로 표기했다. 동양에서는 애초부터 영양(營養)이라는 개념이 확실하지 않았을뿐더러, 동양에서 처음으로 서양의학을 도입한 일본이 영양(榮養)으로 표기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영양(榮養)의 원뜻은 ‘지위가 높아져서 부모를 영화롭게 봉양하는 일’이므로, 이것을 생리학상의 용어로 차용하기에는 어색하다고 생각돼 일정 기간 두 용어가 혼용되다가 이제는 영양(營養)으로 확정된 듯하다. 그런 뜻에서 보면 ‘영양센터’는 통닭으로 자기 몸의 원기를 보충하는 곳, 그리고 견강부회하자면 어려운 시절 통닭으로 부모님을 봉양하는 곳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 영양센터가 대부분 사라져버렸다. 1970년대 들어 소득 증대로 육류 소비가 늘자 통닭도 빠르게 기름에 바싹 튀기는 방법으로 바뀌었고, 곧이어 프라이드치킨류의 국내외 브랜드가 유행하면서 쇠막대에 꿰어 긴 시간 빙빙 돌려가며 굽는 방식을 사람들은 더 이상 참아내지 못했다. 더구나 삼겹살이라는 ‘국민 술안주’가 등장하면서 영양의 상징이던 통닭의 위상도 크게 떨어졌다. 결국 영양센터는 새롭고 빠르고 자극적인 것을 찾는 사람들의 기호에 따라 그 촌스러운 이름과 함께 대부분 사라지고, 닭을 쇠막대에 꿰어 돌리는 기술은 중앙정보부에 ‘이전’돼 박정희 유신독재 시절 학생과 재야 민주인사를 빨갱이로 몰 때 사용하는 ‘통닭구이’ 고문 수법으로만 남게 된 것이다.

서울에 남아 있는 영양센터로는 명동에 본점과 모래내·대치동에 체인을 둔 ‘명동영양센터’가 유명하다. 지하철 2호선 신촌역 3번 출구로 나와 연세대 방향 ‘걷고 싶은 거리’ 쪽으로 가다 보면 제법 오랜 역사와 맛을 자랑하는 전기구이 통닭집 ‘신촌영양센터’(주인 송송심·02-312-5460)가 있다. 이 집의 전기구이 통닭은 적정 온도로 알맞게 구워 기름기를 쫙 빼기 때문에 고소하고 담백하다. 과자를 씹는 듯한 껍데기의 고소한 맛, 퍽퍽하지 않으면서도 졸깃졸깃 담백한 가슴살 뜯어먹는 맛에 맥주잔을 연방 채우기가 바쁘다. 인삼과 대추를 넣어 폭 곤 삼계탕도 한여름 무더위로 지친 몸을 추스르는 데 추천할 만하다(전기구이 통닭, 삼계탕 각 1만1천원).

 

야외활동 디자이너’ 안종관 울릉도학교 교장과 함께 트레킹 하며 즐긴 홍합밥·따개비칼국수·호박막걸리…
네이버에서 인물검색을 해보면 세 사람의 ‘안종관’이 나온다. 그중 제일 많이 기사가 올라와 있는 사람이 국가대표여자축구팀 안종관 감독이고, 두 번째가 인터넷신문 <프레시안>에서 운영하는 울릉도학교의 안종관 교장 선생이다.

안종관 선생은 희곡 <늙은 수리 나래를 펴다> <객사> <토선생전> <선녀, 마레끼아레> 등을 쓴 극작가이지만, 지난 20년 가까이는 오지 여행과 등산, 트레킹을 전문으로 해오면서 여행지를 찾고, 산행로를 개척하고, 숙소를 물색하고, 운치 있는 술집과 맛있는 식당을 섭외하고, 계절·날짜·시간 등 전체 일정을 분배·조정하는 ‘야외활동 디자이너’로 더 유명하다.

» 울릉도 ‘산마을식당’의 상차림. 사진 김학민

그는 일찍이 경기고를 문과 꼴찌로 졸업하고 서울대 국문학과에 간신히 입학했다. 대학 시절에는 학문보다는 벗 사귀기를 좋아해 주야장천 술집을 제집 드나들듯 했다. 이를 보다 못한 이숭녕 등 보수 엄숙주의 교수들이 엄히 꾸짖으려 했으나, 캠퍼스에서는 그를 찾을 길이 없었다. 이리저리 학점을 구걸해 천신만고 끝에 대학을 졸업하고 첫 직장을 얻은 곳이 문학평론가 윤영천, 시인 정희성, 인하대 교수 정학성 등 문리대 국문과 동문들이 국어 교사로 똬리를 틀고 있던 숭문고였는데, 국문과 놀량패들이 앞에서 끌어주고 뒤에서 밀어준 덕을 보지 않았을까 심증이 든다.

안종관 선생은 숭문고에서 연금을 받을 수 있는 20년을 채우고는 바로 퇴직했다. 본격적으로 ‘창작 활동’에 전념하기 위해서라고 했지만, 탁월한 외환 딜러로 상당한 경제적 토대를 구축한 부인 김상경씨에 의탁한 퇴직이 아니었을까라는 심증이 든다. 퇴직 이후 그의 ‘창작 활동’은 별 성과를 보이지 못했지만, ‘야외 활동’은 달인의 경지에 올랐다는 평가를 받는다. 좋다는 곳, 맛있다는 집에는 항상 그가 있었다. 그의 자리에는 언제나 사람과 술, 노래와 웃음이 넘쳤다. 하여 탈춤 부흥의 중시조이자 부산대 무용과 교수인 채희완은 안종관 선생을 ‘동북아에서 제일 잘 노는 현대놀이 전문가’로 헌정했다.

지난 9월 초 안종관 교장의 울릉도학교에 동참해 울릉도 트레킹을 다녀왔다. 울릉도는 겉만 아름다운 게 아니라 속도 아름답다. 도동에서 성인봉을 넘어 안쪽으로 들어가면 울릉도가 하나의 거대한 보석임을 확인하게 된다. 나리분지와 추산, 천부, 석포, 와달리 옛길, 내수전을 걸으면 그야말로 감동 그 자체다. 특히 와달리 옛길의 아름다움은 세계적인 트레킹 코스로 꼽힐 만하다. 안종관 선생은 울릉도학교가 이 길을 행복하게 걷는 학교가 되었으면 한다. 그리고 단지 길을 걸을 뿐만 아니라 다른 귀한 옛길들을 더 많이 찾아내어 가꾸고, 인문학적 스토리텔링도 쌓아가는 일을 하겠다고 한다.

안종관 선생과 나는 무명산악회 멤버로 오랫동안 같이 놀러 다녔다. 목적지만 정하면 술집·맛집은 말 안 하고도 쉽게 합의한다. <삼국지>에서 적벽대전을 앞두고 제갈량과 주유가 조조군을 격파할 전략을 세울 때, 서로 의논하지 않았는데도 똑같이 손바닥에 ‘불 화’(火)자를 써 보였듯 말이다.

울릉도의 2박3일 맛집·술집도 마찬가지였다. 점심께 도착하는 배를 타면 도동항에 내려 ‘보배식당’에서 홍합밥을 먹고 서둘러 성인봉을 오른다. 성인봉에서 나리분지로 내려가 ‘산마을식당’에서 오리불고기에 씨껍데기막걸리를 마신다. ‘산마을식당’에서 자고 이튿날 구수한 시골 된장국으로 해장을 하고 용출수를 거쳐 천부 ‘신애분식’에서 따개비칼국수로 이른 점심을 때운다. 석포전망대에서 울릉도 옛길을 3시간 정도 걸으면 내수전전망대에 이르는데, 전망대 가는 길 입구 매점에는 호박막걸리가 기다리고 있다. 둘쨋날 숙박지인 저동에서의 방어·오징어·쥐치에 소주는 그냥 꿀물이다. 마지막날 환상의 저동~도동 해안 산책로가 끝나면 ‘혜솔식당’의 약소불고기에 소주가 피날레를 장식한다.


그런데 이 2박3일 동안 안종관 선생은 며칠 전부터 온 통풍으로 술 한 잔 못하고 홀로 시내버스로만 이동했다. 좋은 곳, 맛있는 집만 밝혀온 자의 말로라고나 할까. 모두들 겉으로는 안됐다고 하지만, 속으로는 고소해하는 것 같았다.

 

청주 마시는 양반 대신 막걸리 마시는 상민만 걸려들던 조선시대 금주령…
‘유전유주 무전무주’ 법칙 적용된 셈
» 능서막걸리. 사진 김학민
조선시대에는 종교적 교리와는 관계없는 이유로 금주령이 자주 내려졌다. 조선 개국 직후인 1392년 흉작으로 인해 금주령을 내린 것을 시작으로 태종 때는 거의 매년 금주령을 내렸다. 이성계가 쿠데타로 고려를 뒤엎고 나라를 연 조선조는 당연히 흉흉한 민심을 안정시키기 위해 일차적으로 백성들 먹을거리 확보에 최대한의 노력을 기울여야 했는데, 한편으로 토지 정리와 황무지 개간으로 식량 증산에 힘쓰고, 다른 한편으로는 술을 빚는 데 소요되는 곡식이라도 줄이기 위해 자주 금주령을 내렸던 것이다. 5·16 쿠데타로 정권을 탈취한 박정희도 막대한 미국산 밀가루를 들여와 시중에 풀고, 막걸리 양조에 일절 쌀을 사용하지 못하게 했다.

금주령은 원칙적으로 메뚜기해(害)·풍해·가뭄·수해 등 자연재해가 극심해 식량이 크게 부족할 것으로 예상되면 왕의 명령으로 내려지곤 했는데, 생각만큼 금주가 엄격하게 지켜지지는 않은 것 같다. 권력이나 재산 있는 자에게는 그물코가 성기고, 힘없고 가난한 자에게는 그물코가 총총한 유전유주(有錢有酒)·무전무주(無錢無酒)의 세상이었던 것이다. 나라의 기틀이 비교적 반듯하게 잡혀 있었던 세종 때에도, 청주 마시는 자는 금주령을 면하고 막걸리 마시는 자만 걸려들고 있다고 원성이 드높아 세종이 할 수 없이 금주령을 풀어보기도 했다(<세종실록> 세종 2년조).

어차피 항시적 식량 부족으로 마음 놓고 술을 빚어 마실 수 없는 백성들은 금주령의 최대 피해자이면서 또한 금주령 대상과는 거리가 멀었다. 문제는 사대부였다. 건국 시기 쿠데타로 네 편 내 편으로 갈려 죽이고 죽임을 당하던, 또 태조 이후 왕권을 둘러싸고 벌어지던 골육상쟁의 시대가 태종·세종대에 들어 안정을 찾아가자 사대부들은 생멸의 긴장에서 벗어나 평화를 만끽한 나머지 술독에 빠져 그 폐해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하여 세종대왕은 술을 경계하라는 대국민 호소문인 ‘계주교서’(誡酒敎書)를 발표하기에 이른다. 원래는 예문응교 유의손이 지은 글인데, 내용이 좋아 세종이 교지를 내려 주자소에 명령해 인쇄한 뒤 중앙과 지방에 배포하도록 했던 것이다.

“대개 들으니 옛적에 술을 만든 것은 그저 마시려고만이 아니라, 신명을 받들고 빈객을 하고 늙은이를 봉양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제사로 인해서 마실 때는 헌수를 절차로 삼고, 활을 쏨으로 인해서 마실 때는 읍하고 사양하는 것을 예로 삼았다. 향음의 예는 친목을 가르치는 것이요, 양로의 예는 치덕을 높이는 것이다. 그렇건만 오히려 말하기를, ‘손과 주인이 백 번 절하고 술은 세 순배를 돌린다’ 하였고, 또 말하기를 ‘종일토록 술을 마시어도 취하게 하지는 않는다’ 하였으니, 선왕이 술의 예를 제정하여 술의 화를 방비한 것이 지극하였다.

후세로 내려오매 풍속과 습상이 옛날과 달라서 오직 황료하고 침혹을 주장하므로, 금주하는 법이 비록 엄하나 마침내 그 화를 면하지 못하였으니 얼마나 한탄스러운 일이냐. 대개 술이 화가 됨은 심히 크다. 어찌 특별히 곡식을 없애고 재물을 허비할 뿐이랴. 안으로는 심지를 어지럽히고 밖으로는 위의를 잃어서 혹은 부모의 봉양을 폐하고, 혹은 남녀의 분별을 문란하게 하며 크게는 나라를 잃고 집을 망치고, 작게는 성품을 해치고 생명을 잃어버리어 강상을 더럽히고 풍속을 무너뜨리는 것은 이루 다 말하기 어렵다….”

10월9일은 한글날. 한글을 창제한 세종대왕의 능이 경기 여주군 능서면에 있는데, 여기에서 양조되는 ‘능서막걸리’가 아주 좋다. 그리 달지 않으면서도 적당하게 구수한 발효 맛이 밍밍한 물맛을 살짝 덮어준다. 면소재지의 능서막걸리양조장과 붙어 있는 식당 ‘능서막걸리’(주인 이정임·031-883-6711)에는 능서막걸리와 어울리는 소박한 손맛 안주가 있다. 생족발을 무 썰듯 가로로 썰어 삶은 다음, 무·양파·파·팽이버섯·호박을 넣고 주인 아줌마의 눈대중으로 고추장을 풀어 폭 끓이는 족발탕이다. 주인이 생족발만을 고집하므로 전화로 확인하고 가야 한다.

 

일제시대 이후 집에서 빚는 술에도 고율의 세금 매기면서 100여 가지 전통 명주 맥 끊기고 화학주 대량생산 시대로
» 문명충돌론과 전통술의 종말. 사진 김학민
새뮤얼 헌팅턴은 그의 저서 <문명의 충돌>에서, 세계를 기독교권·중국·아프리카·아랍 등으로 나눠 조명하고, 앞으로 이슬람교를 중심으로 한 세력과 중국이 크게 부상할 것이라고 예상한다. 이런 흐름에서 현재 중동에서 벌어지는 분쟁은 미국을 중심축으로 하는 서구 문명의 진출과 이에 조응하는 아랍 이슬람 문명의 충돌이다. 하지만 헌팅턴의 ‘문명충돌론’은 현재의 중동전쟁이 18세기 이래 서구제국이 벌인 무자비한 영토 확장과 식민지 쟁탈, 석유 등 자원 갈취라는 탐욕의 역사에 그 뿌리가 있음을 간과하고, 기독교와 이슬람교의 종교적·문화적 갈등 현상으로만 설명하려는 한계가 있다. 헌팅턴은 냉전 종식 이후 달라진 세계정치의 성격을 규명하려는 시도로 ‘문명충돌론’을 제기했지만, 이 책에는 서구와 비서구 사이의 문화적 질서와 그 재편 문제도 함께 다루고 있다.

한 사회의 전통문화가 침체되거나 멸실되는 데는 여러 원인이 있겠지만, 대개는 느슨한 전통사회에 막강한 외세가 들어오고 이를 등에 업은 외래문화가 침투해 착근하면서 토착 전통문화는 서서히 그 생명력을 잃어가는 식으로 전개된다. 산업혁명 이전에는 세계 각 사회의 문화적 층위가 그 특성과 고유성을 유지하고 있었으므로 전통사회에 외래문화가 도입되더라도 문화끼리 충돌해 전통문화가 쇠미해져 사라지기보다는 외래문화의 내용을 습합·수용해 변증적으로 새로운 문화로 발전해갔다. 그러나 산업혁명으로 서구사회가 물질문명을 독점하고 범세계적으로 주도권을 쥐어가자, 덩달아 서구문화가 비서구문화를 지배·압도하며 문화질서를 재편하게 됐다.

술은 음주문화와 마찬가지로 해당 사회의 문화적 전통을 반영하고 있다. <임원십륙지> <증보산림경제> <주찬> 등 우리 전통술의 제조법을 기술한 전적들을 보면 조선조 말까지 100여 가지 술이 있었다. 그리고 다른 기록에는 고려시대에 포도주 등 12가지 술이, 조선시대에 천축주 등 74가지 술이 외래 술로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으로 나타난다. 하지만 조선 말기까지 대중의 입맛을 사로잡은 외래 술은 없었다. ‘문명충돌론’을 빌려 이야기하자면, 1천여 년 동안 우리 전통술 100여 가지와 외래 술 100여 가지가 충돌했는데 나중에는 전통술만 남았으니 곧 외래문화에 대한 전통문화의 승리라 할 수 있겠다. 그런데 그 다양했던 우리 전통술들은 모두 어디로 사라졌을까?

우리나라에서는 예로부터 술에 세금을 부과하지 않았다. 술을 음식의 하나로 간주했으므로 김치 담그기처럼 술 빚기에 정부가 간섭하지 않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던 것이 1904년 대한제국의 재정고문이던 일본인이 일본을 따라 주세법을 구상하고, 1909년에 그 법이 반포됐다. 판매용·가용(家用)을 가리지 않고 양조 면허제가 도입되고, 그 생산량에 일종의 간접세를 부과해 정부 통제를 강화한 것이다.

1910년 한-일 병탄 뒤 일제는 종래의 주세법을 주세령으로 고쳐, 가용 술에는 고율의 세금을 매겨 억제하고 양조업자에 의한 화학주의 대량생산만 가능토록 정책을 펴나갔다. 이때의 발효 가양주(家釀酒)의 근절, 바로 이 때문에 우리 전통 명주들이 사라지고 조선인 수탈의 수단으로서 화학주만 남아버린 것이다. 그리고 해방 이후 대한민국에서도 반세기가 지나기까지 술은 식량 부족의 원흉이거나 손쉽게 거둘 수 있는 세금의 원천일 뿐이었으니, 국권 회복은 되었으되 가양주의 회복, 전통문화의 복원은 요원했던 것이다.

충남 홍성군 서부면에서 낚싯배를 운영하는 김병채씨는 아주 기가 막힌 가양주를 개발했다. 찹쌀을 원료로 해 밑술을 담근 뒤 여기에 인삼·구기자·감초·당귀 등 한약재를 넣고 두 번을 더 발효시킨다. 지금은 술을 많이 마시지 않지만, 20여 년 전 동동주를 마시고 너무 머리가 아파 직접 술을 개발했다 한다. 이 술은 아무리 마셔도 뒤가 깨끗하고, 냉장 보관하면 몇 년이 가도 변하지 않는다. 특허를 냈지만 대량생산은 못하고 있다. 경기 용인시 이동면에서 동생 김병기씨가 운영하는 ‘전라도홍어집’(031-334-4477)에 가면 ‘민속맑은술’이란 어정쩡한 이름의 이 술을 시음할 수 있다.

 

술과 장작만 있던 주점이 화폐 유통과 더불어 식당·여관을 겸한 영업집으로
» 우리나라의 마지막 주막 ‘삼강주막’. 김학민
여러 사람이 함께 모여 술을 마신다는 행위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예로부터 특별한 공동체를 형성한다는 것을 함축한다. 대개 술자리에서 손님은 상징적으로 초대자의 가족공동체로 받아들여진다. 주인·손님을 불문하고 참석자 모두는 최소한 술 마시는 동안만은 성공을 축하하며, 건강을 기원하며, 서로의 우애와 친목을 도모하며, 공통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단결을 다지며 하나의 집단처럼 단단히 묶여진다. 이러한 고전적 술자리의 의미는 술을 공개적으로 마실 수 있는 술집에서 더 명확하게 나타난다. 그리하여 술집에서는 술집 밖의 일상적·시민적 삶과는 전혀 다른 법칙과 규칙들이 지배한다.

술집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서로 알건 모르건 다른 사람을 이야기에 끌어들일 수 있는 권리가 있고, 상대도 말을 걸어오면 응답해줘야 할 의무가 있다. 술집 입구는 상징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누구나 문지방을 건너오는 사람은 술집에 머무르는 동안 모르는 사람과도 대화할 준비가 돼 있음을 암묵적으로 승인한다. 손님들은 연령에 상관없이 열려 있는 인물로서 술집에 들어온다. 그것은 술집에 있는 다른 사람에게 말을 거는 데 열려 있고, 스스로가 그런 접촉을 통해 친교할 수 있을 정도로 열려 있음을 의미한다. 서로가 서로에게 열려 있다는 점에서 술집은 고전적이지만, 여기에서 제공되는 모든 재화와 서비스의 값을 치러야 하는 점에서 술집은 근대적이다.

주막(酒幕)은 고전성과 근대성 두 모습을 띤 우리의 전통 술집이었다. 조선시대 시골길의 큰 길목이나 고개 아래, 장터, 나루터에는 반드시 주막이 있어서 나그네의 허기와 갈증을 풀어주었다. 마당에 좌판을 펼쳐놓고 쇠머리나 돼지족 삶은 것을 늘어놓고 초가지붕 위로 바지랑대에 용수를 높이 달아놓은 집이면 주막임이 틀림없다. 주막은 현대적 의미로 볼 때 술집과 식당, 여관을 겸한 영업집이라고 할 수 있다. 신라 시대부터 조선 말기까지 우리나라 역대 기녀들에 관계되는 모든 실상을 밝힌 이능화(李能和)의 <조선해어화사>(朝鮮解語話史)에는 주막의 유래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고려 숙종 9년(1104) 주식점(酒食店)을 열어 화폐의 유통을 꾀하였으나 실패하고 조선 시대에 접어들어도 역시 화폐가 쓰이지 않으니 여행자는 양식을 갖고 다녀야 할 지경이었다. 선조대에 윤국형(尹國馨)이 지은 <문소만록>(聞韶漫錄)에 따르면 ‘영호남의 대로에 주점이 있기는 하나 술과 장작이 있을 뿐이다. 여행자는 식량과 여행 필수품을 말에 싣고 다닌다. 명나라 장군 양고(楊稿)가 중국처럼 노변에 생활필수품을 파는 가게를 만들자고 권하니 수령이 명나라 군인이 지나가는 길가에 관에서 노점을 차려두었다가 그들이 지나간 후 거두어들였다’는 것이다. 그러다가 효종대 이후부터 화폐가 점점 유통됨에 따라 음식도 팔고 접대하는 여자도 있는 주막이 생겨난 것이다.”

경북 예천군 풍양면 삼강리의 낙동강·내성천·금천이 만나는 수려한 경관의 세물머리에 우리나라 마지막 주막이 남아 있다. 1900년 전후 세 물길이 만나는 삼강리 나루터에 세워져 소금과 쌀, 소소한 생활필수품 등을 이고 지고 오가던 보부상·장돌뱅이는 물론, 근교의 시인 묵객, 서울로 향하는 나그네들의 허기와 갈증을 풀어주던 곳이다. 100년이 넘게 명맥을 유지해오던 ‘삼강주막’은 제2대 주모이자 ‘낙동강의 마지막 주모’로 불렸던 유옥연 할머니가 2005년 90살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면서 발길이 끊겼다가, 2008년 1월 예천군에 의해 수리·복원돼 현재 삼강마을 부녀회가 운영하고 있다.

예천은 음식에 관한 경상도의 ‘악명’을 훌쩍 뛰어넘은 곳이다. 묵은 김치와 돼지고기를 채 썰어 양념해 볶다가 멸치 삶은 국물을 자작하게 붓고 메밀묵이나 도토리묵, 청포묵을 채로 썰어 올려 끓여 국물이 닳아지면 김치 썬 것을 올려 끓이면서 먹는 태평추(탕평채) 전문 ‘전국을 달리는 청포집’(054-652-0264)도 특별하고, 백수정육식당(054-652-7777)의 예천 한우 육회는 입안에서 살살 녹는다(육회 400g 2만원, 육회비빔밥 1만원). 지난 10월14일 예천이 고향인 강남대 김필영 교수와 그 아들과 같이 ‘예천아리랑’ 복원 공연을 보러 갔다가 육회 한 접시, 비빔밥 세 그릇으로 소주를 세 병이나 비웠다.

 

음식맛의 기본은 단맛·쓴맛·신맛·짠맛의 ‘사원미’지만
맛의 수준·농도·깊이에 따라 표현은 수만 가지라네
» 새콤개운달착지근한 홍어탕의 맛. 김학민
모든 빛깔을 재현할 수 있는 기본적인 세 빛깔을 삼원색이라 한다. 그림물감에서는 빨강·노랑·파랑을, 빛에서는 빨강·녹색·파랑을 삼원색이라 하니, 그림물감으로 말하면 빨강·노랑·파랑의 수없는 조합이 기기묘묘한 색깔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빛깔의 삼원색처럼, 모든 맛을 재현할 수 있는 기본적인 네 가지 맛을 사원미라 한다. 곧 모든 맛은 사원미인 단맛·쓴맛·신맛·짠맛이 하나둘, 두셋 또는 네 가지 모두 적당히 조합돼 나오는 것이다. 매운맛은 혀에서 느끼는 순수한 미각이 아니라 생리적 통각, 곧 미각신경을 강하게 자극함으로써 느끼는 기계적 현상이기에 사원미에 포함하지 않는다.

단맛은 인간이나 동물, 곤충이 가장 강하게 원초적 욕구와 집착을 가지는 맛으로, 감상적으로는 편안함·이익·사랑·쾌락·즐거움을 상징한다. 쓴맛은 심하면 불쾌감을 보여도 적당히 섞이면 입맛을 돋우고 다른 맛에 혼합돼 독특한 풍미를 주지만, 그 불쾌감 때문에 실패·좌절·패배·고통을 상징한다. 신맛은 약간의 향기를 수반하며, 첨가할 경우 본래의 맛과 어울려 식품의 맛을 좋게 하고 식욕을 증진시킨다. 신맛은 고난·괴로움·노동·좌절·어려움을 상징한다. 짠맛은 인간과 동물의 생명을 유지해주는 필수불가결의 기본 맛으로, 어려움·결핍·인색 등을 상징한다. 우리나라 음식은 이러한 사원미에 매운맛, 떫은맛, 구수한 맛, 아린 맛, 교질맛 등이 더해지고 보태져 독특한 풍미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사원미를 표현하는 데도 참으로 복잡하다. 상당히 단맛이 날 때는 ‘달큼하다’ ‘들쩍지근하다’ ‘들척지근하다’라 하고, 약간 단맛이 날 때는 ‘달곰하다’ ‘달짝지근하다’라 한다. 또 조금 단맛이 들 때는 ‘들큼하다’ ‘달착지근하다’고 하고, 감칠맛이 돌 정도의 알맞은 단맛은 ‘달콤하다’ ‘달차근하다’고 한다. ‘쓰다’도 제법 쓴맛이 날 때는 ‘씁쓸하다’ ‘씁쓰레하다’이고, 약간 쓴맛이 날 때는 ‘쌉쌀하다’ ‘쌉싸래하다’이다. ‘시다’의 경우 신맛이 강할 때는 ‘시쿰하다’ ‘시굼하다’ ‘시큼하다’ ‘새큼하다’이고, 약간 신맛이 날 때는 ‘새콤하다’ ‘새곰하다’ ‘새금하다’ ‘시금하다’이고, 신맛이 변한 맛은 ‘시금털털하다’이다.

좀 짠맛이 날 때는 ‘짭짤하다’ ‘찝찔하다’ ‘짭조름하다’이고, 딱 알맞은 짠맛은 ‘간간하다’ ‘건건하다’이다. 매운맛도 자극적이게 매울 때는 ‘칼칼하다’ ‘컬컬하다’ ‘매콤하다’ ‘얼큰하다’ ‘얼얼하다’ ‘얼쩍지근하다’라 하고, 약간 매운맛을 느낄 때는 ‘알알하다’ ‘알큰하다’ ‘알근하다’ ‘매옴하다’ ‘매움하다’ ‘알짝지근하다’ ‘알찌근하다’, 가볍게 매울 때는 ‘매큼하다’이다. 또 많이 싱거울 때는 ‘밍밍하다’ ‘맹맹하다’ ‘밍근하다’ ‘맹근하다’요, 조금 싱거울 때는 ‘승겁다’ ‘심심하다’이며, 맛있는 싱거운 맛은 ‘삼삼하다’이다. 느끼한 맛이 없을 때는 ‘담담하다’ ‘깔끔하다’이고, 텁텁하지 않고 산뜻한 맛이 날 때는 ‘시원하다’ ‘개운하다’ ‘산뜻하다’이다.

맛에 대한 이러한 다양한 표현이 외국어에도 있는가 궁금해 수개 국어에 능통한 강남대 김필영 교수에게 물으니, 영어의 경우 ‘sweet’(달다), ‘bitter’(쓰다), ‘sour’(시다), ‘salty’(짜다), ‘hot’(맵다), ‘astringent’(떫다) 등과 같이 맛을 표현하는 딱 떨어지는 단어 이외의 복잡한 맛은 대개 형용사를 사용해 관형적으로 표현한다고 한다. 그러나 언어의 귀재 김 교수도 모르는 게 있을 수 있는 일, 언젠가 기회가 되면 영어의 달인 ‘아륀지’ 총장님께 ‘달차근하다’ ‘쌉싸래하다’ ‘시금털털하다’ ‘짭조름하다’ ‘칼칼하다’ ‘밍밍하다’가 영어로 무엇인지 물어봐야겠다.

지난 9월 하순, 후배 사진작가와 함께 전남 화순군 능주면에 있는 신비의 사찰 운주사를 들러보고 오는 길에 화순시장 언저리에 자리 잡고 있는 금성식당(061-374-4365)을 찾았다. 어머니 김복순(58)씨에 이어 아들 공흥배(37)씨가 같은 자리에서 30년째 홍어탕을 끓이고 있다. 1만5천원짜리 홍어탕 ‘중’을 시키려니 다 못 먹는다며 1만원짜리 ‘소’를 하란다. 다른 음식을 더 못 시키게 하는 것을 사정사정해 1만원짜리 삼합 한 접시를 더 주문했는데, 아! 어찌 우리 잊으랴, 그날을. 새콤하면서 달착지근하고, 알짝지근하면서 개운한 홍어탕의 국물맛! 그리고 국물을 어느 정도 비우고 나서 끓여먹는 날근한 홍어애의 말캉한 맛! 막걸리는? 그건 묻지도 따지지도 마시라.

 

술을 통제하면서도 세금 때문에 이용해온 지배층…
그나마 주세법 완화됐으니 이젠 다양한 술 좀 나오려나
» ‘매생이淸막걸리’. 김학민
지구상 대부분의 나라에서 술과 법은 늘 불편한 관계에 있었다. 그냥 내버려두자니 백성들이 알코올에 항시적으로 노출될 위험이 있고, 확 나사를 조이자니 백성들의 일상적인 기호품을 지나치게 통제해 폭동이 일어날까 두려웠다. 그래서 백성들의 안녕과 건강을 위하는 척 적절하게 술의 공급과 소비를 통제·관리하려던 것이 대개 나라들의 정책인데, 소비 통제는 이런저런 이유로 내려지던 금주령이었고, 공급 통제는 술의 제조와 유통에 대한 면허제 또는 허가제였다. 그러나 사실 술이 누구보다도 더 필요한 것은 백성이 아니라 나라였다. 중세 이후 근대국가에 이르기까지 많은 나라들이 상당 기간 국가의 금고를 주세에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제조한 자가 제조장에서 술을 출고하거나, 유통하려는 자가 외국산 술을 수입한 때에는 납세 의무가 발생하므로, 제조업자거나 유통업자거나 술의 공급자는 주세의 납부 의무를 진다. 그런데 주세는 소비자인 술꾼이 술의 제조원가에 부가된 간접세를 부담하는 것이고, 공급자는 출고된 술의 수량과 가격을 표준으로 매겨진, 소비자가 한 병 한 병 마셔서 전가해준 주세를 대신 납부할 뿐이다. 그러므로 소비자는 주세의 그물망에서 전혀 빠져나갈 수 없고, 주세를 효율적으로 거두려면 공급자만 관리·통제하면 된다. 이때 공급자로서 제조의 총총한 그물망을 뚫으려는 시도가 밀주이고, 유통의 총총한 그물망을 뚫으려 한 것이 가짜 양주다.

양조의 독과점은 ‘하늘 사업’을 하는 사람들에서 시작됐다. 중세의 수도원들은 대부분 포도를 재배하거나 곡식을 심어 와인을 만들거나 맥주를 빚었고, 곧 막대한 금력과 인력으로 증류주를 대량생산하기 시작했다. 술은 ‘하나님의 위대한 창조물’로 목자나 양떼 모두에게 소중한 피조물이었지만, ‘하늘 사업’의 명분과 주세에 눈독을 들인 봉건영주의 이해가 맞아떨어져 ‘공급은 목자, 소비는 양떼’의 구조로 급속히 정리됐다. 일본에서도 사원에서 주조업이 시작돼 막부 정권의 비호 아래 전문적인 양조업으로 발전했다. 왕실에 밀착된 고려시대 사찰은 막대한 전답과 노비를 이용해, 이러저러한 수익사업 외에 술까지 독점적으로 주조해 백성에게 팔기도 했다.

‘하늘 사업’을 하는 사람들의 주조 독점은 상공업의 발달과 산업혁명을 거치면서 무너졌다. 우리나라도 불교가 압박을 받게 된 조선시대가 되자 더 이상 사찰에서 술을 주조하지 못하게 되고, 술이 제례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에 유교사회 조선에서는 당연히 ‘만민 자유 주조’가 허용될 수밖에 없었다. 일제가 식민통치를 위해 조사한 자료에 따르면, 1916년 현재 조선에는 12만 개 이상의 양조장이 있었다. 일제는 주세령을 발포해 양조장들을 대폭 정비하는 한편, 가정에서 소비하는 술에 대해서는 이른바 ‘자가용 면허’를 내주었는데, 그 수가 37만 건이었으니 박목월이 “길은 외줄기/ 남도 삼백리/ 술 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 놀/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라고 읊을 만도 했다.

일제는 조선인들의 반발을 무마하기 위해 과도기적으로 운영했던 ‘자가용 면허’를 10년도 안 돼 폐지해 민간의 양조를 엄금하는 한편, 전국의 양조장을 군별로 4천여 개로 통폐합함으로써 본격적으로 주세 확보에 나섰다. 일제가 술마다 세금을 붙여, 주세는 총독부 전체 예산의 30%에까지 이르렀다. 해방 이후 역대 정권은 술에 관한 한 일제의 제도를 그대로 계승·발전시켰다. 양곡 부족에 대처하고, 국민 건강을 고려하며, 주류업을 육성하기 위해 민간의 양조를 금하고 주조 면허를 엄격히 통제한다고 했지만, 실상은 세수 확보에만 진력한 것이다. 해방 이후 50년간 술 생산량이 10배 이상 늘어났으니, 주류업은 육성됐는지 모르지만 국민 건강은 무슨 국민 건강?

주조 면허, 제조할 술의 종류, 제조 방법, 원료 및 첨가물까지 법으로 세세하게 제한하던 주세법은 김영삼 정권 때 많이 완화됐다. 그리하여 기존 주조장들에서도 새로운 술, 특정한 풍미를 나게 하는 기능성 술의 개발이 유행했고, 100여 년 만에 민간에서도 가양주 전통을 복원시킬 수 있었다. 그중 수출은 물론 국빈 만찬 때 건배주도 되고 기내식에도 따라 나오는 막걸리의 약진이 볼 만하다. 얼마 전 우연히 일종의 기능성 막걸리인 ‘매생이淸막걸리’를 맛보았다. 부산에서 매생이로 건강식품을 만드는 기업(엔존·051-329-8441)을 운영하는 김영진씨가 개발한 막걸리로, 달지도 시지도 않은 시원한 맛에 매생이의 파르스름한 빛이 바다의 냄새를 물씬 풍기게 한다.

 

진로 창업자의 한 우물 파기와 2세 회장의 여러 우물 파기, 그리고 80년 묵은 덕산양조장의 미덕
내 둘째 처남은 서울 강서구 등촌동의 ‘진로’아파트에 살고 있다. 1년에 한두 번 둘째 처남 집에서 처갓집 모임을 여는데, 진로 소주병처럼 디자인 개념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밍밍한 외양에 내부 구조조차 그저 그런, 싸구려 3류 건설업자가 지은 듯한 그 아파트에 들어설 때마다 한심한 생각이 든다. ‘진로’가 어떤 회사인가. 우리나라 최고 최대 소주회사이니, 당연히 세계 최고 최대 소주회사가 아니겠는가. 그런 회사가 건설회사 만들어 아파트를 지을 생각을 하다니, 코카콜라가 건설회사를 계열사로 둔 꼴이라고나 할까.

확인할 길은 없지만, 고인이 된 삼성의 이병철 회장이나 현대의 정주영 회장도 생전에 진로를 부러워했을지 모른다. 단순화하자면, 국세청에서 배정해주는 주정에 우물에서 무한정 뽑아올릴 수 있는 물을 붓고 약간의 첨가물을 넣어 병에 담아내면 그날 저녁 전국의 장삼이사들이 다투어 현금으로 바꿔주니, 세상에 그런 장사가 어디 있겠는가. 상당 기간 술꾼들에게 ‘소주는 진로이고 진로는 소주’를 넘어 ‘술 자체가 곧 진로’였다. 공장에서 막 나온 따끈따끈한 소주를 차떼기로 도매상이나 술집으로 바로 운송하는, 제조업체로서는 유일하게 완제품 창고가 없는 회사가 진로였던 것이다.

» 백두산 삼나무로 지은 세왕주조 건물 안에는 70년 이상 된 술독들이 즐비하다. 김학민

진로의 창업자는 1985년 81살로 세상을 등진 장학엽씨다. 그는 1924년 평안남도 용강군에서 진천양조상회를 설립하고 ‘진로’를 생산하기 시작했다. 장학엽씨는 6·25 전쟁 시기에 남쪽으로 내려와 부산에서 소주 ‘금련’을 생산하다 환도 뒤 영등포에서 소주 생산을 본격화했다. 진로는 1965년 제조 방식을 증류식에서 희석식으로 바꾸면서 크게 도약해, 5년 만에 업계 1위인 삼학소주를 제쳤다. 그러나 흥하면 언젠가는 이지러지는 것이 자연의 이치. 1985년 한 우물을 파던 창업자가 타계하고 제2대 회장을 이어받은 장진호씨가 여러 우물을 파면서 진로는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다.

소주·위스키·매실주 등을 생산·판매하는 (주)진로 외에 음식료품 전문 진로종합식품, 진로쿠어스맥주, 진로식품판매, 고려양주, 진로지리산샘물, 화장품을 생산하는 쥬리아, 유리병 제조업체 진로유리, 전선 제조업체 진로산업, 삼원, 도·소매 유통업의 진로종합유통, 진로출장연회, 진로하이리빙, 진우통신, 청주진로백화점, 진로인더스트리, 건설업과 운송업의 남부터미널, 진로건설, 남부화물터미널, 우신공영, 진로엔지니어링, 금융업의 우신상호신용금고, 우신선물, 우신투자자문, 광고업의 GTV, 우신중·고등학교 등이 소주 팔아 만든 진로그룹의 ‘계열사’였다.

그러나 아파트 건설, 제약, 화장품, 전자, 전선, 백화점, 유통 등의 사업은 ‘주정에 물 붓기’가 아니라 ‘깨진 독에 물 붓기’였다. 무리한 인수·합병과 사업 확장으로 극심한 자금난을 겪게 돼 1997년 9월 법정관리와 함께 화의 신청을 하고 부도를 냄으로써 망하려야 망할 수 없는 ‘국민기업 진로’는 도산하고, 결국 장진호씨의 ‘재벌 놀음’ 10년도 파탄을 맞았다. 이후 진로는 채권단의 관리하에 간신히 연명하다 2005년 7월 하이트맥주에 인수됨으로써 장씨 일가의 80년 ‘진로 시대’는 막을 내리고, 박씨 일가의 ‘하이트·진로 시대’로 바뀌었다.


충북 진천군 덕산면에 가면 진로와 같은 시기인 1924년에 세워진 ‘세왕주조’ 덕산양조장(043-536-3567)이 있다. 할아버지 이장범, 아버지 이재철씨에 이어 아들 이규행(50)씨가 3대째 정직한 마음, 정직한 주질, 정직한 제품 생산으로 장인 정신의 한 우물만 파고 있다. 이규행씨는 오로지 가계 전승과 독학으로 상당 수준의 양조 기술을 익혔다. 선대 때부터 유명한 약주와 그가 직접 개발한 ‘천년제례주’, ‘천년주’, ‘천마활보주’가 지난 9월 국세청에서 주류품질인증을 받았다.

할아버지 이장범씨가 백두산 삼나무를 벌채해와 1930년에 완공한 덕산양조장은 대한민국 근대문화유산 제58호로 지정돼 있는데, 건물 안 발효실에는 70년 이상 된 큰 술독들이 아직도 현역으로 ‘근무’하고 있다. 최근 오크통과 술독을 형상화해 지은 저온창고에는 멋진 시음장이 딸려 있어 덕산양조장의 갖가지 술을 맛보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고, 눅은 값으로 술도 살 수 있다. 관광 코스 강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