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류, 술, 멋

김철관의 베트남 엿보기

醉月 2010. 2. 22. 09:04

동양의 파리, 오토바이 천국에서 쌀국수 먹다 

 하노이, 정치중심지에서 경제중심지로 부각

“씬 짜오”
 
베트남을 다녀온 사람들은 무슨 뜻인지 대충 짐작을 할 것이다. “안녕 하세요.” 라는 베트남어다. 참고로 인도에서는 “나마스타.” “마나깜.” 등이 인사말이다. 지난 60~70년대 베트남 전쟁에 참여해 이들 민족에게 비극적인 상처를 안겨줬던 대한민국.
 
하지만 그들은 한국 사람들에게 아낌없는 호감을 보였다. 현재 베트남 텔레비전에서는 매일같이 한국 방송드라마가 상영되고 있고, 장동건, 김남주 등 드라마 스타들에 대한 한류 열풍도 대단하다. 물론 우리와의 경제 교류도 활발한 나라다.
 
지난 2일부터 5일까지 인도차이나 동북부에 위치한 베트남 수도 하노이를 다녀왔다. KDI 국제정책대학원 경제정책과정 연수일정의 일환이었다. 지난 11월 2일 인천국제공항에서 오전 10시 15분발 베트남항공을 타고, 연수생 일행과 함께 하노이 노바이 국제공항으로 향했다. 출발 5시간 후인 오후 1시 15분(시차는 2시간) 노바이 공항에 도착했다.
 

▲ 베트남의 교통수단은 자동차 보다 소형 오토바이를 많이 이용한다.        © 김철관


마중 나온 가이드와 미팅을 한 후 버스에 타고 연수 장소인 대우호텔로 떠났다. 노바이 공항에서 하노이까지 거리는 버스로 30분정도. 가이드는 하노이로 가는 길에 베트남에 대한 정보를 들려줬다. 집이 남양주 별내면에 있어 새벽 6시 일어나 인천공항을 향했고 비좁은 의자에 앉아 5시간이나 비행기를 타서인지 너무 피곤했다. 그래서인지 가이드 말이 잘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열심히 듣고 중요한 부분을 메모했다.
 
베트남에 도착해 첫 번째 눈에 띈 이색 풍경은 시골의 두드러진 건축양식이었다. 형형색색에다 세련된 디자인에 고풍스러운 집들은 마음을 사로잡았다. 100여 년간의 프랑스 지배를 받았던 영향 때문인 듯했다. 프랑스풍 건축양식은 동남아에서 좀처럼 볼 수 없는 풍경이기에 너무 이채롭게 느껴졌다.
 
더불어 직사각형 모양으로 반듯반듯하게 정리된 농지의 모습은 우리 시골모습과 흡사했다. 홍강을 끼고 비옥한 토양, 오르막길이 없는 반듯한 평야지대가 한눈에 들어왔다.
 
하노이로 가는 길에 베트남의 젖줄인 홍강(붉은 강, 철분이 많다)을 가로지른 3.5km의 탕동 다리를 지나 하노이에 도착했다.
 
호치민시 등이 있는 중·남부지역은 밀림, 열대성 기후라면, 북부 하노이는 봄, 여름, 가을, 겨울 등의 4계절이 존재한 지역이다. 남부 베트남 호치민(사이공)이 경제중심지라면 북부 베트남 하노이는 정치 문화중심지다. 현재 나라 경제의 무게 중심도 호치민에서 하노이로 옮겨 가고 있는 상태다.
 
경제적으로도 무게 중심이 이동 중인 하노이는 현재 신도시 아파트 붐이 이를 반증했다. 하노이의 첫 모습은 신도시가 조성되고 있는 터였다. 아직 건축물 공사는 시작하지 않았지만 신도시를 알리는 입구는 아주 멋지게 디자인 돼 있었다.
 
물론 하노이 중심가로 들어서자 여러 군데 고급아파트가 눈에 띄었다. 2년 전부터 아파트 붐이 불기 시작했다. 하노이 중심가로 도착하자 또 다른 이색적인 풍경이 연출됐다. 바로 오토바이 행렬이었다. 대중버스나 승용차는 가뭄에 콩 나듯 드물게 보였다. 가끔 영업용 승용차로 우리나라 소형 승용차인 마티즈가 유난히 눈에 띄었다. 이곳에서는 승용차와 더불어 오토바이도 돈을 받고 영업을 할 수 있어, 이색적으로 느껴졌다.
 
하노이 450만 인구에 오토바이 인구가 180만대, 3명당 1명꼴로 오토바이가 존재한 셈이었다. 특히 러시아워시간은 개미 때처럼 오토바이 행렬을 볼 수 있다고 가이드는 귀띔했다. (참고로 우리나라보다 약 1시간 여정도 사이클이 빨랐다. 직장 일도 7시30분 시작하고, 학교수업도 오전 7시(고등학교)이거나 7시30분(초등학교) 시작한다.)
 
오토바이 천국 베트남. 오토바이 행렬을 보면서 도착한 곳은 베트남 전통식당이었다. 매캐한 냄새를 풍긴 식당의 메뉴는 단연 ‘베트남 쌀국수’였다. 점심이었다. 대부분 일행들은 배가고픈 탓인지 쌀국수를 맛있게 먹어 치웠다. 평소 고기를 좋아하지 않는 탓에 고기 맛을 느끼지 못했다. 하지만 국물 맛은 일품이었다.
 
점심을 먹고 대우호텔에 도착했다. 우리가 오기 바로 직전인 11월 1일 후진타오 중국 국가주석 내외가 이곳 대우호텔 스위트룸에서 숙식을 했다. 이곳 스위트룸에서는 김우중 대우그룹 전회장이 얼마 전까지 이곳에서 머물기도 한 곳이다.
 
고급 호텔답게 잘 꾸며져 있었다. 호텔 로비 샹들리에도 호화스러워 보였다. 베트남 여인들의 우아한 전통의상인 ‘아오 자이’를 입은 호텔 종업원들도 인상적이었다.
 
이날 호텔 로비에는 유난히 한국 관광객들이 눈에 띄었다. 1년에 30~40만 명의 한국 관광객들이 베트남을 찾고 있다. 호텔에 여장을 풀고 곧바로 호텔 3층에 위치한 세미나실에서 수업이 시작됐다.
 
첫 번째 강사는 김영웅 KOTRA 하노이 무역관장이었다. 그는 ‘베트남 경제 및 시장동향’에 관한 주제로 강의를 했다. 두 번째 강사 류향하 한베중공업 대표는 ‘베트남 투자’에 관한 설명을 했다. 수업이 끝나고 오후 7시 인근 ‘춘하추동’ 식당으로가 한정식과 더불어 찹쌀로 빚은 베트남 소주를 한잔 마시며 쌓인 피로를 달랬다

 

베트남 국회의사당 귀빈실이 1층인 이유는?

호치민의 3가지 유언을 지키지 못한 베트남

"씬 감언"

베트남 한 호텔 복도에서 청소를 하고 있는 한 아주머니에게 1달러 줬더니 고개를 숙이며 한 말이다. "고맙습니다"라는 베트남어다. 베트남 여행을 하면서 "씬 짜오(안녕하십니까)"와 "씬 감언(고맙습니다)"은 익숙한 말이 돼 버렸다.
 
특히 베트남 하노이에서 매력적으로 느낀 것이 있다면 남녀 평등의식이다. 아침 출근 시간에 비친 하노이 오토바이 행렬에서도 쉽게 이를 확인할 수 있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오토바이를 타고 출근하는 모습은 남자의 전유물같이 느껴졌던 오토바이가 이곳 여성들에게는 굉장히 매력적인 교통수단이었다.
 
물론 새벽 오토바이 경적소리에 잠은 깼지만(너무 경적소리가 심하다) 오토바이를 타고 출근한 모습이 정감 있게 다가왔다. 인간이란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힘이 강하거나 약하거나 관계없이 누구나 특정 오토바이를 다룰 수 있다는 것 자체가 평등한 의미를 담고 있는 듯했다. 이로 인해 은연중에 배여 있는 나의 의식 속의 고정관념을 완전히 깨버렸다.
 

▲ 호치민 시의 구찌터널.                          © 김철관


한국여성은 오토바이를 즐기는 경우가 거의 없고, 위험한 교통수단으로 알려져 회피한데다가 폭주족 같이 젊은 거친 남성들의 몫으로 각인돼 왔기 때문이다. 특이한 모습은 정말 심할 정도로 이곳 오토바이는 경적소리를 냈다. 물론 버스도, 택시도, 열차도 경적을 많이 울린단다.

도시가 시끄러울 정도다. 이들에게는 습관이지만 소음을 싫어하는 나에게는 정말 곤혹이었다. 또 하나 유심히 관찰을 통해 발견한 것이 있다면 하노이 주민들은 뚱뚱하고 비만한 사람, 안경을 쓴 사람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고기와 기름진 음식을 좋아해도 살이 찐 사람이 거의 없는 것은 고유차를 많이 즐겨 마시는 전통문화의 영향이라는 것이 정설이다.
 
마시는 물이 석회성분이 많은 탓에 어릴 적부터 전통차를 끓여 마시는 것이 습관화 됐다. 몸에 악영향을 미치는 석회성분을 없애는 효과가 있는 것이다. 하지만 전통차로 인해 치아가 약해지고 탈색이 돼 이곳에서는 치과 의사가 인기 있는 직업 중의 하나이다.
 
(참고로 이곳 하노이에서 중국 건영으로 가는 열차가 있고, 하노이에서 호치민까지 열차로 30시간 걸린다. 열차도 운행하는 철길을 넘나드는 소수민족이 많기 때문에 경적을 심하게 울린다고.)
 
베트남하면 북부의 수도 하노이(HANOI)와 남부의 호치민( HO CHI MINH CITY, 사이공) 그리고 하이퐁을 생각한다. 베트남의 3대도시이다. 한마디로 베트남을 대표한 대도시에다 자치행정을 하고 있기 때문에 잘 알려진 도시다.
 
호치민은 서울의 3배에 달하는 면적을 자랑한다. 540만 인구로 해발10m내외의 낮은 평야에다 사이공강으로 둘러싸인 아름다운 곳으로 알려져 있다. 수도 하노이와는 1738km 떨어져 있다. 이 거리는 열차로 30시간 거리에 해당된다.
 
폭 50cm 높이 70cm의 구찌터널이 호치민에서는 유명하다. 프랑스 식민지 통치시대인 1940년대부터 무기를 감추거나 비밀 통로를 만들기 위한 목적으로 지방 게릴라들이 파 놓은 곳이다. 키가 큰 군인들이 들어가면 거동이 불편할 뿐만 아니라 적이 굴의 구조를 모르고 추적할 경우 함정에 빠지기 십상으로 설계됐다. 호치민시 얘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하노이를 다녀왔기 때문이다. 하노이는 베트남의 수도로, 지리적으로 홍강을 낀 삼각주 델타지대 비옥한 평야가 많은 곳이다. 4계절이 뚜렷하고 무려 300여개의 호수와 숲으로 둘러싸인 하노이는 유서 깊은 사찰도 많고, 프랑스 풍 건물도 많다. 특히 무채색의 건물들이 빚어내는 조화와 아기자기한 골목 그리고 포장마차와 가게들이 몰려 있는 거리의 풍경은 나름대로 운치가 있다. 하노이로부터 버스로 3~4시간 거리에는 유네스코 문화보존 관광도시로 지정된 하롱베이가 있다. 물론 하롱시에 있는 하롱베이도 다녀왔다.
 
한국개발연구원 경제정책과정 경제세미나에 이어 문화체험교육의 일환으로 지난 2005년 11월 3일 하노이시에 있는 문화관광지를 관람했다. 하노이 대우호텔에서 아침에 일어나니 부슬비가 내렸다. 그 속에서 오토바이 행렬은 여전했다.
 
하지만 우산을 쓴 사람은 별로 없었다. 우비를 많이 착용했다. 우산을 많이 쓰는 우리와 대조적이었다. 호텔에서 아침 식사를 마치고 시내관광을 나서는데 다행히 비가 그쳤다. 먼저 호치민 생가, 영묘, 주석궁, 박물관 등 호치민 유적지가 있는 바딘광장을 찾았다.
 
바딘광장은 1945년 9월 2일 호치민이 미국의 독립선언서를 기초해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곳으로도 유명하다. 과거 우리 여의도광장을 상상케 했다. 바딘 광장 전면에 위치한 호치민 영묘. 영묘를 기준으로 양편에는 현수막처럼 보이는 두 개의 긴 직사각형 모양의 현판에는 녹색 바탕의 빨간 베트남어로 쓴 문구가 확연히 눈에 띄었다. 바로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이여 영원하라”라는 의미심장한 문구였다.
 
영묘는 베트남의 민족지도자 호치민이 잠들어 있는 곳이다. 베트남 참배객들에게는 매우 의미 있는 장소로 알려져 있다. 사회주의 체제 하에서 세속적인 면과 종교적인 면을 고루 갖추고 있는 것인 퍽 인상적이었다. 다양한 민족, 많은 외국 관광객들도 참배하느라 붐빈 곳으로 알려졌다. 레닌과 스탈린, 마오쩌뚱을 연결시켜 주는 사회주의 전통에 따라 호치민 시신도 방부 처리돼 순례지가 됐다. 이후 북한 김일성 주석도 묘에 안치돼 순례지가 됐지만 그 뒤를 이은 사회주의 지도자는 아직 나오지 않고 있다.

하지만 호치민 시신은 방부처리 관계로 볼 수가 없었다. 올 10월 3일부터 12월 20일까지는 부패방지를 위한 방부처리 기간이기 때문이다. 이 기간에 방부제처리 기술이 뛰어난 러시아로 옮겨, 새 단장을 해오게 된다. 호치민 시신을 꼭 봐야겠다고 마음먹은 사람은 이 기간을 피해 여행을 해야 한다. 사실 너무 아쉬웠다. 가장 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다산 정약용 선생을 좋아했고 다산이 고을의 수령을 다스리는 법을 기술해 놓은 '목민심서'에 심취했다고 알려진 호치민.
 
평소 검소한 생활과 베트남의 자주독립과 민족통일을 위해 일생을 바친 사람이다. 1890년에 태어나 1969년에 사망한 호치민의 본명은 '응우엔 떳 타인'이고 호치민은  '빛을 가져온 사람'이라는 뜻으로 50여개 별명 중 가장 널리 사용하고 있는 이름이다. 대부분의 베트남 국민들은 "호치민은 죽지 않았다. 영원히 우리의 가슴속에 살아 계신다"라는 말을 서슴지 않는다. 그는 베트남 국민들의 영웅이었다.
 
1930년 베트남 사회주의 공산당을 창건해 1946년부터 1969년 사망할 때까지 베트남 대통령을 역임했다. 1969년 9월 2일 숨을 거둘 때까지 평범하고 검소한 생활로 국민들에게 칭송을 받았고 '호 아저씨'라는 애칭까지 붙게 됐다. 그는 측근 정치인들에게 3가지 유언을 남겼다고 전해지고 있다.
 
죽으면 시신을 태워 베트남 남부, 중부, 북부에 뿌릴 것, 전쟁에서 홀로된 아주머니와 고아들에게 선정을 베풀 것, 정치범들에게 베트남에서 살 수 있게 선심을 베풀 것 등이었다. 아이러니하게 호치민 유언은 하나도 지켜지지 않았다.
 
시신을 태워 뿌리라는 유언도 75년 9월 2일 호치민의 기일날 영묘로 모셔 시신을 안치했고, 전쟁에서 남편을 잃은 과부와 고아에게 선정 베풀라는 유언도 전쟁의 후유증으로 인해 경제적 여력이 없었다. 75년 4월 30일 베트남 통일 이후 남부 베트남 정치범들이나 부르주아 계급 등을 인간개조 합숙소로 보내 격리 차별해 화전을 일구어 살게 했다. 이렇게 정치범에게도 선심을 베풀라는 유언도 지켜지지 않았다.

전쟁이 끝나고 남부 베트남 국민 100만 명 이상이 보트를 타고 태평양을 건너다 15만명이 수장되기도 했다. 역사는 이를 흔히 '보트피플' 이라고 말하고 있다.
 
바딘광장 주변에는 국회의사당과 외무부 등 정부 관청이 들어서 있다. 국회의사당 2층에 있던  VIP실이 1층으로 옮긴 일화는 유명하다. 김대중 대통령 때문이었다. 김 대통령 재직 때 국빈으로 방문한 김 대통령의 불편한 다리를 알아차린 베트남 정치인들이 국빈으로 모신 그를 힘들게 할 수 없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1층으로 옮기게 됐다. 그 이후 VIP실은 영원히 1층에 있게 됐다. 정치인들의 배려가 돋보인 대목이다

 

한반도 1.5배, 인구 1억, 동남아 사회주의 국가는?

새로운 투자 대상국으로 떠오르는 베트남

지난 2일 오후 3시 베트남 하노이 대우호텔 3층 세미나실에서 김영웅 KOTRA(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 하노이 무역관장이 KDI(한국개발연구원) 국제정책대학원 경제정책과정 학생들을 대상으로 '베트남 경제 및 시장동향'에 대한 강의를 시작했다. 그는 "베트남 경제의 호전성과 투자 전망이 상당히 낙관적"이라고 밝혔다.

▲ 베트남 하노이 대우호텔 3층 세미나실에서 김영웅 KOTRA 하노이 무역관장이 '베트남 경제 및 시장동향'에 대한 강의를 했다.     © 김철관


본 강의에 앞서 먼저 베트남의 일반 현황을 간략히 요약했다.

"베트남은 사회주의 공화국이다. 면적은 남북한 크기의 1.5배이고 인구는 1억에서부터 8천만명 정도로 추산되고 있다. 행정구역은 5개의 중앙직할시와 59개의 성으로 구성됐고, 전체인구의 90%정도가 비엣족이다. 기타 54개 소수민족이 살고 있다. 60%가 불교를, 20%가 가톨릭을, 기타 종교를 믿고 있다. 화폐는 동(VND)을 단위로 1달러가 1만 5천 888동이다. 우리나라의 천원인 셈이다."

이어 김 관장은 베트남 사업 투자에 대해 설명하면서 낙관적 전망을 내놓았다.

"베트남은 지난 86년부터 시장경제를 도입한 나라다. 지난 2004년 7.7%이상 경제성장 등 상승세가 지속되고 있고, 소비자물가도 5.5% 정도 증가하고 있다. 물론 외부환경의 불확실한 점도 있지만 전반적인 통계수치는 양호한 편이다. 품목을 잘 선택해 투자만 하면 성공할 수 있는 곳이 베트남"이라고 피력했다.

그는 "국가 전체기업 매출액의 80%가 국영기업체가 담당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국영기업 비중이 높다"며 "자국의 민간 기업은 상대적으로 영세한 상태"라고 밝혔다.

이날 베트남 투자에 대한 주의점도 아울러 당부했다. "시장주의를 도입한 상태에다 사회주의 체제다 보니 경제관련 세부규정이 미흡하다"며 "관련 공무원의 의견에 따라 해석이 달라지는 경우도 있다"고 밝혔다.

또 "급변한 시장 변화에 관계법규가 따라가지 못한 상태에서 관련 사업 담당자들의 영향력이 지대하다"며 "한사람이라도 반대를 하면 사업을 추진할 수 없는 사회주의 의사결정 형태인 이사회의 만장일치제가 존재하고, 베트남사람 한 명이 반드시 이사회에 들어가야 하니 사업주의 의사결정에 조금 어려움이 있다"고 토로했다.

하지만 그는 "이런 문제는 우리 정부를 통한 양국 간의 외교로 충분히 해결 가능하다"며 "값싼 젊은 노동력과 여성의 사회진출이 활발한 점이 투자에  매력을 갖게 한다"고 밝혔다.

지난 2일 오후 하노이 대우호텔 3층 세미나실에서 두번째 '베트남 투자'와 관련해 강의를 한 류향하 한베중공업 대표도 베트남 투자에 대한 낙관적인 전망을 했다.

그는 베트남 외국인투자법에 의한 투자형태로 ▲ 경영협력계약(법인체를 설립하지 않고 외국사와 베트남 기업간의 계약) ▲ 합자투자기업(유한책임회사로 베트남 법에 의해 베트남 법인으로 간주) ▲ 외국인단독투자기업 (유한책임회사로 기업의 소유권을 외국기업이 보유, 베트남 법인으로 간주) 등 3가지가 있다고 말했다.
 
그는 3가지 중 협력투자보다 단독투자와 합자투자에 대해 자세히 설명했다. "단독투자 형태는 경영이익이 독점돼 우리방식대로 추진이 가능하고 이익의 본국 회수가 유리하다"며 "하지만 초기비용을 과다 투자해야 하고 정부 기관과의 유착관계 구축의 애로점이 존재 한다"고 밝혔다.
반면 "합자투자 형태는 초기투자비용 경감과 베트남의 현물출자 등으로 인허가를 베트남에게 맡길 수 있다"며 "중요한 의사결정 과정 때 만장일치제로 인한 베트남 측과의 의견조정의 어려움이 있다"고 토로했다.

그는 베트남 투자의 장점으로

 ▲ 젊고 풍부한 인력자원

 ▲ 양질의 기능 인력자원

 ▲ 저렴한 비용

 ▲ 문화 동질성(한류열풍)

 ▲ 저렴한 생활비

 ▲ 안정된 치안 등을 들었다.

단점으로

 ▲ 도로, 항만 등 주변 인프라 취약

 ▲ 사회 전반에 만연된 평등의식

 ▲ 공무원 부패

 ▲ 자국 우선정책

 ▲ 국영 대기업의 문어발식 확장

 ▲ 세법, 소득세법 등 법 제도적 장치 취약

 ▲ 교육의료 취약

 ▲ 지역주의

 ▲ 인건비 지속적 상승

 ▲ 인력 중 엔지니어 비중이 낮음 등을 들었다.

하지만 그는 "베트남은 품목 선택만 잘하면 굉장히 투자하기 좋은 곳"이라고 덧붙였다.

 

‘똥통’ 호치민? 베트남어로 ‘똥통’은 무슨 뜻?

과거에 급제하면 진사재명비 등록된 유교국가

베트남어의 똥통(Tong Thong)은 무슨 뜻일까. 변기통을 의미하는 것일까. 아니다. 똥통은 외교를 담당하고 조약체결을 하는 '대통령'을 뜻한다. 대통령은 해외사절이 오면 관례에 따라 주석궁으로 모셔 영접을 한다.
 
베트남 바딘광장 옆에 있는 노란색 바탕의 주석궁은 호화스럽게 보이는 프랑스풍의 건축양식이다. 1906년부터 주둔한 프랑스 식민지시대 인도차이나 총독관저로 알려지고 있다.

평생 결혼하지 않고 독신으로 산 호치민이 1946년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 대통령으로 취임해 3개월을 기거하기도 했던 곳이다. 현재 주석궁은 국빈 영접이나 중요한 손님이 왔을 때 회담 장소로만 사용하고 있다.

 ▲ 베트남 대통령 주석궁                      © 김철관
호치민이 이곳에 기거할 때 국민들처럼 평범한 주택에서 살고 싶다는 그의 말에 따라 주석궁에서 200~300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베트남 소수민족이 사는 전통가옥을 지어 직무를 봤다.

이곳에서 직무를 본 호치민은 또 다른 주상가옥으로 집무실을 옮기게 된다. 전통가옥에서 500미터 떨어진 곳에 위치한 주상가옥은 땅으로부터 1.2미터정도 떨어져 지은 집이다. 뱀, 쥐 등의 침입을 막기 위한 소수민족의 아이디어를 그대로 살렸다. 

 

▲ 호치민 생가                                    © 김철관
호치민은 1.2미터 높이의 주상가옥 밑 공간을 간부 회의실로 활용했다. 지붕은 전통가옥답게 야자나무 잎으로 덮여있다.

하지만 대통령의 집이라고 부를 수 없을 정도로 아주 소박하고 초라하기까지 했다. 주변 잉어로 가득한 연못가에 잘 가꾸어진 정원이 눈길을 끌었다. 첫 번째 생가와 두 번째 생가로 이어진 주변은 생태환경이 잘 보존돼 있었다. (참고로 호치민은 일당독재를 막기 위해 일찍이 집단지도체제를 도입했다. 모택동 등 일당독재의 최후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서열이 가장 높은 사람은 공산당 서기장이다. 그 뒤를 이은 주석은 대통령과 같은 외국과의 조약, 대외활동을 담당한다. 세 번째가 국무총리 격인 수상이다. 그다음은 국회의장격인 국회 주석이고, 다섯 번째가 베트공(북부 베트남) 하부 게릴라조직이었던 조국통일전선 의장, 다음이 국방위원장이다. 6명의 집단지도체제로 움직인다.)

 

▲ 호치민 주상가옥 생가                        © 김철관
바딘광장, 호치민 영묘, 주석궁, 호치민 생가에 이어 호치민박물관으로 향했다. 호치민 영묘 옆에 위치한 거대한 시멘트 건물이었다. 1990년 5월 17일 호치민 탄생 100주년 기념을 위해 개관했다. 박물관 입구 들어설 때는 가방과 카메라는 맡겨야한다. 사진촬영이 금지돼 있기 때문이다. 일행도 입구에서 짐을 맡겼다. 

디지털 소형 카메라를 호주머니에 넣고 있었다. 그리고 입장을 했다. 호주머니 검사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기왕 카메라가 있어 관심 있는 부문을 촬영했다.

 

▲ 호치민박물관에 걸려있는 호치민 사진                              © 김철관
사진을 촬영하는데도 관리인들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질 않았다. 이상한 일이였다. 계단 상단 우측에 출발해 박물관 아래층을 향해 시계방향으로 걸어가면서 관람을 했다. 먼저 호치민과 관련된 게릴라 전투 시절의 활동사항, 비밀 외교편지, 쓰던 물건 등 유물을 즐겨봤다. 물론 베트남 전통문화와 풍습도 한눈에 볼 수 있었다. 박물관에서 가장 눈에 띈 곳은 베트남 국화인 연꽃이었다. 크게 단장된 연꽃은 베트남이 불교국가라는 것을 말해 주는 듯했다.

이후 들린 곳이 하노이 재래시장이다. 우리의 재래시장의 모습과 비슷했다. 망고, 야자수, 수박 등 베트남 전통 과일이 많이 즐비해 있었다. 여러 과일을 골고루 시식도 했다. 모든 과일들이 당도가 높고 맛이 있었다.

 

▲ 하노이 재래시장                               © 김철관
특히 우리의 찐쌀과 같은 베트남 야자나무 잎으로 찐 녹색 빛깔의 쌀은 쫄깃쫄깃해 씹을수록 감칠맛이 났다. 재래시장과 더불어 하노이는 작년에 백화점이 개장됐단다. 상품도 비싸고 대중화가 되지 않아 아직 썰렁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노이 부유층을 제외한 대부분의 주민들은 상품을 사기 위해서는 백화점보다 재래시장을 아직 많이 이용한다.

버스 창문으로 보이는 큰길가에 빼곡히 들어서 있는 하노이 가정집의 모습은 너무 이채롭게 느껴졌다. 폭이 좁고 긴 형태의 모습 때문이다. 화재가 나면 이웃집과 틈새가 없어 잇달아 타버릴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1980년 베트남 신진정치세력들이 시장경제를 받아드리면서 사유재산을 인정해 토지를 분배했다. 이때 습지가 많은 나라이기 때문에 국민들 대다수가 길가에 햇빛이 들어오는 집을 선호했다.

이런 이유로 베트남 정부는 햇빛이 들어온 양지바른 곳에 4미터로 폭을 제한해 집을 짓게 했다. 그래서 4미터 폭에 뒤로 길게 늘어진 형태의 집이 많아졌다. 정치적 이유 때문인 것이다. 하지만 프랑스풍의 건축 형태로 아주 멋있고 아름답고 아기자기한 형태들이 유난히 돋보였다.

특히 하노이 시내 중심에는 여러 개의 매력적인 호수가 있다.  대표적인 호수가 호완 끼엠 호수다. 버스를 타고 지나면서 본 호완 끼엠 호수 주변에는 데이트를 즐기는 여인, 배드민턴과 조깅을 즐기는 사람들이 엿보였다. 호완 끼엠(일명 還劍湖, 환검호)은 거북이가 검을 하늘의 주인에게 돌려줬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호수 중앙의 작은 섬 위에 있는 붉은 별이 꼭대기에서 밝힌 버려진 탑으로 알려진 주어(거북이탑)는 하노이의 정신적 상징으로 불리고 있다.

하노이에서 가장 큰 호수는 서호다. 호수가에 선상카페도 즐비해 있다. 그 주변에는 고관대작들의 유럽풍 호화별장들도 많다. 이렇게 하노이는 빈익빈 부익부, 극과 극의 사회지만 아직 국민들의 불만은 없는 듯 보였다. 

 

▲ 130년 전통의 베트남식 뷔페식당        © 김철관
130년 전통의 베트남 뷔페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다. 베트남 음식을 골고루 맛보았다. 베트남 쌀국수는 물론이고, 과일, 빵, 고기, 생선 등 푸짐하게 쌓여 있었다. 가장 맛있는 음식은 짜카였다. 짜카는 가물치 찜이다. 세우소스에 찍어 먹으니 정말 한사람이 죽어도 모를 정도였다. 짜카는 살아 생전 호치민이 무척 좋아한 음식이다. 이곳에서 음식을 만들거나 서빙을 한 종업원들의 한 달 월급은 100달러(10만원)를 넘지 못했다. 베트남 노동자들의 평균 월급인 셈이다.

▲ 문묘 앞 하마(下馬)비        © 김철관

점심을 끝내고 공자 사당인 문묘에 들렸다. 호완 끼엠 호수에서 약 2km지점에 위치한 문묘는 베트남의 전통 건축양식이 잘 보존된 곳이다. 이곳 문묘를 가기 바로 직전, 하마(下馬)비가 세워져 있다. 바로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이곳을 지날 때는 말에서 내려 예의를 갖추라’는 의미였다. 우리와 같이 뿌리 깊은 공자중심의 유교 사상 전통이 엿보인 대목이다. 이곳은 1070년 레 탄 똥 황제가 문인들의 학문적 업적을 기리기 위해 공자에게 바친 사원이다.

관료자식들을 교육시키기 위한 베트남 국자감도 1076년 이곳에 설립됐다. 재직 때 레 탄 똥 황제가 3년시(3년마다 치루는 과거 회시라는 뜻)에 급제한 1302명의 진사의 이름, 출생지와 업적을 돌거북위 비석에 기록해 놓았는데 이를‘진사재명비’라고 부른다. 십장생인 거북이 등에 비석을 세워 이름을 새겨둔 것은 ‘오래토록 빛나라’는 의미이다.

당시 ‘오지임’이라는 사람은 과거시험에 8등으로 급제해 이름을 새겼는데 희미하게 보일정도로 이름이 지워져 있었다. 관료로 있으면서 역적으로 몰려 사형을 당했기 때문이었다. 문묘마당은 임금을 앞에 두고 공자사상으로 과거시험을 치렀다. 3년시에 합격하면 1등부터 6등까지의 우수한 인재는 어사가 됐다. 우리 조선과 똑같이 이들은 임금을 대신해 지방 관리를 감찰하는 암행어사로 활동을 했다.

‘진사재명비’에 별로도 이들의 행적도 적고 있다. 과거에 합격해 관료 활동을 잘한 강희재라는 사람을 두고 만세사표(萬世師表)로 불렀다. ‘만세에 사표로 삼으라’는 뜻이다. (참고로 현재 베트남은 학사 석사 박사 외 진사라는 제도가 있다. 진사는 박사를 마치고 훌륭한 학문적 업적이 있는 박사에게 진사라는 자격이 주어진다. 진사는 베트남 전체에서 5~6명 정도로, 교수로는 인민교수를 말한다. 유교의 영향 때문인 것이다.)

▲ 문묘안 진사재명비                 © 김철관

문묘는 5개의 정원으로 구성됐다. 중앙 통로와 문은 황제전용이다. 한쪽 통로는 문관전용이고 또 다른 통로는 무관전용 통로다.

문묘 공자 사당에는 공자를 중심으로 좌우측에 각각 두 사람씩, 총 4사람이 앉자 있다. 한사람을 빼고 3사람은 공자의 제자들이다. 수제자 중 맏형으로 종가집 종손격인 ‘증자’가 있고, 그 옆에는 증자와 선의의 라이벌 관계에 있었던 ‘안자’가 있다. 반대편 두 사람 중 한명사람이 바로 ‘맹자’로서 공자보다 200년 후의 사람이다. 그가 제자의 반열에 함께 끼어 있는 것은 공자사상을 발전시키는데 가장 공로가 컸기 때문이다. 그래서 제자에 버금가는 대우해 후세사람들이 그를 기리고 있다.

맹자 옆에 있는 ‘자사’는 공자가 무척 사랑했던 제자로 공자의 친손자다. 천부적으로 천재적 머리에 명석하고 사리에 밝았던 자사는 32살에 단명했다. 이들 4사람을 흔히 ‘사성’이라고 부르고 공자와 함께 이곳에서 제를 지내고 있다.

문묘 문화체험 관광을 마치고 버스에 탔다. 부슬비가 내렸다. 오토바이는 줄고 얼마되지 않는 버스나 승용차의 움직임이 분주했다. 비가 온 탓에 오토바이가 밖으로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각 오후 5시 사이렌 소리가 울렸다. 궁금했다. 사회주의 국가의 전통에 따라 일과시간을 마감한 소리였다. 과거 우리 군사정권시절의 국기 하강식 싸이렌 소리가 떠올랐다.

버스에서 본 큰길가에 도자기를 판매한 사람이 간간이 보였다. 과거부터 베트남은 질 좋은 점토가 많은 곳으로 익히 알려졌다. 그런 탓에 도자기가 많이 나온 듯했다.

세계 최대 탄광인 노천탄광이 있는 곳도 베트남이다. 프랑스가 침범한 이유 중 하나도 역사는 석탄 채굴로 막대한 부를 창출하기 위해서였다고 적고 있다. 프랑스 지배하던 시대에 베트남 석탄을 해외 각지에 팔아 본국의 수익을 올리기도 했다. 또 베트남은 세계 최고의 계피생산지로 유명하다. 흔히 코카콜라에 톡 쏘은 맛을 내는 재료가 계피인데, 코카콜라는 상당부분 이곳 베트남에서 계피를 수입하고 있다.

베트남 중부는 세계 3대 커피생산지이다. 베트남 중남부지역은 고무를 많이 수출한다. 고무는 수분이 많은 알칼리성 땅에서 잘 자란다. 동남아시아 3대 고무수출국이면서 세계 9대 고무수출국이 베트남이다. 편안한 잠을 재촉하는 침대 쿠션의 라텍스, 베개 라텍스 등은 고무나무에서 나온 재료로 만든 것으로 현재 베트남에서 가장 인기 있는 효자 수출품이다.

고무나무에서 약 20년간 고무를 재취하면 그 땅에는 어떤 식물들도 자라지 않는다. 고무나무에서 채취한 힌 액체가 땅 토양성분(영양분)을 빨아드려 토양이 변질되기 때문이다. 이런 것을 방지하기 위해 베트남 원예 연구원들이 연구 끝에 대안을 발견했다.

고무나무를 심은 땅에 알칼리성 파인애플 나무를 심은 것이다. 고무나무가 빼앗아간 알칼리성을 보충해 땅의 토양을 유지하게 된 것이다. 덧붙여 그곳에 나온 파인애플은 크지 않고 신맛과 단맛이 잘 어우러져 맛이 있다. 베트남 중부에서 많이 생산되지만 남부 하롱시에서도 생산된다. 베트남 특산품으로 상당한 인기를 누리고 있다. 하노이시 문화체험 관광이 끝나고 하롱베이로 이동했다.

 

용이 내려온 곳, 하롱베이의 '다름바리' 맛 일품

 세계문화유산, 동양 3대 절경을 가다

베트남 하노이시에서 하롱베이까지 200km다. 버스로 3~4시간 정도 걸리는 거리다. 하노이에서 하롱베이까지 가려면 두 번에 걸쳐 강을 횡단한다. 과거 다리가 없던 시절, 바지선을 갈아타고 다시 버스를 타는 등 번거로움이 많았다. 당시는 버스로 8시간여 소요됐단다.

현재 버스를 타고 쉬지 않고 가면 3시간, 휴게실 등을 들리면서 천천히 관광을 해도 4시간이면 하롱베이에 도착한다. 과거에 비해 절반 가량 시간이 줄어든 셈이다. 바로 강에 다리를 놓았기 때문이다. 우리 일행도 4시간에 걸쳐 하롱베이에 도착했다.

 ▲ 하롱베이                         © 김철관


숙소인 하롱베이 프라자호텔 로비에 들어서자 베트남 전통의복 아우자이를 입은 30대 여성과 남성이 베트남 전통악기로 ‘아리랑’을 연주했다. 한국 관광객들에 대한 애정 표시였다. 여성은 자신의 음악을 CD음반으로 출시했다며 CD를 보여줬다. 그와 사진도 찍고 CD도 구입했다.

여장을 풀고 호텔 1층 식당에서 풀 향기가 베어 있는 베트남 전통 음식으로 저녁 식사를 해결했다. 당초 저녁 식사는 호텔 꼭대기 라운지에서 하기로 예약을 해 놓은 상태였다. 하지만 베트남 고급관료들의 연회가 있어 호텔 측에서 취소하는 해프닝이 벌어졌다.

저녁식사를 마치고 한가한 시간을 이용, 호텔밖을 나갔다. 부슬비가 내렸다. 아랑곳하지 않고 인근 하롱만 항구를 관람했다. 이날 낚시를 즐기는 강태공들이 유난히 눈에 띄었다. 잡은 고기를 그물망에 넣거나 대하에 넣은 모습이 우리 강태공들의 모습을 떠올리게 했다.

옷이 부슬비에 젖어 축축한 듯했다. 항구를 돌아보고 호텔로 가는 길에 구멍가게에 들려 지인들에게 줄 베트남 손거울과 장식품을 샀다. 너무 쌌다. 손거울 하나에 1달러였다. 나중에 알고 보니 하노이 노바이 공항 면세점에서는 3배나 비싼 물건들이었다.

하노이를 찾는 대부분의 여행객들이 들린 곳이 바로 하롱베이다. 하노이하면 하롱베이를 떠올린 정도다. 중국 여행객이 연 60만 명으로 가장 많고, 우리나라 관광객도 30만명(작년 25만명) 정도로 중국에 이어 두 번째로 관광객이 많은 곳이다.

하롱베이의 하롱은 아래하(下), 용용(龍), 베이는 물굽이 만(灣)이다. 우리식으로 쓰면 하롱만이다. 하늘에서 ‘용이 바다에 하강한 곳’이라는 뜻이다. 하롱베이는 넓이가 1500km2로 약 3000여개의 섬이 산재해 있다.

이곳 전설에 따르면 하늘에서 내려온 용이 바다에 둥지를 틀기위해 바다 속으로 들어갔다 나왔다하는 모습이 울뚝 불뚝한 섬으로 재현했다는 설과 산에 사는 용들이 해안을 향해 내달리면서 꼬리를 휘저어 계곡과 협곡을 파냈고, 마침 용이 바다로 뛰어들자 꼬리로 파낸 지역이 바다로 채워지게 되면서 높은 땅만 보이게 되었다는 설이 있다.

어쨌든 용들이 하늘로 올라가지 않고 바다에 자리를 잡은 것이다. 그래서 이곳 주민들은 하롱베이를 용이 보호하는 신성한 장소로 여기고 있다. 세계 7대 자연 문화유산이면서, 중국 계림, 타이 남부의 크라비와 함께 동양 3대 절경으로 뽑힌 하롱베이는 지난 1994년 유네스코로부터 세계적 문화유산으로 인정받았다.

▲ 바위섬 하롱베이 전경                      © 김철관


하롱베이의 신비는 깊고 푸른 바다에 불쑥 불쑥 솟아있는 기기묘묘한 모습의 바위섬과 석굴이다. 이런 바위와 석굴이 자아내는 환상적 분위기가 관광객을 사로잡는다.

종영한 SBS 드라마 <하노이 신부>에 자주 등장한 곳도 하롱베이다. 영화 <인도차이나>에서 주인공 린딩팜이 은신했던 곳도 하롱베이다. 우리 한려수도를 확장해 놓은 듯했다. 웅장한 모습이었다.

하롱베이를 관람키 위해 호텔에서 10분 거리에 있는 선착장에서 배를 탔다. 전용유람선이었다. 배에 오르자 초등학생으로 보이는 아이들이 유람선 밖에서 쪽배를 타고 낚시도구와 과일을 사라고 극성을 부렸다. 배가 출발해도 위험을 무릅쓰고 계속 따라 붙었다. 보기드문 광경이었다.

이를 뿌리치지 못한 일행 중 베트남 전통과일을 산 사람도 있었고 낚시대를 사준 사람도 있었다. 이날 산 멍게처럼 생긴 과일은 정말 맛이 있었다. 세상에 태어나 처음 먹어본 과일이었다. 5시간 동안의 선상투어에서 훤히 트인 바다와 산의 조화는 자연의 극치였다. 유람선에서 일행들은 좋은 배경을 두고 사진을 찍으려고 정신이 없었다. 서로 사진을 번갈아 가면서 찍어줬다.

▲ 전용 유람선 1층 실내                       © 김철관


1~2층으로 된 유람선은 고급호텔 못지않은 탁자 등 실내장식이 비교적 우아했다. 1층은 탁자와 안락 의자를 구비해 편안하게 여행을 하게끔 돼 있었고 2층은 바다를 관람할 수 있는 전망대 역할을 했다. 계속된 작은 돌산들. 가도 가도 바위섬은 계속됐다. 이 작은 섬들은 바람과 파도에 씻겨 생긴 동굴과 해변으로 뒤덮여 있었고 나무가 적은 언덕에 산새소리의 울부짖음이 마음을 사로잡았다.

어느새 점심시간. 선상에서 식비를 걷었다. 왜냐면 귀한 생선을 사 식사를 해결하기 위해서였다. 일행은 바다 한 가운데에서 수상가옥처럼 돼 있는 고기배에 들려 직접 고기를 골랐다. 고기배 주변에는 하롱만 주변 빈민촌 주민들이 쪽배에 의지해 새까맣게 탄 갓난 아이를 껴안고 ‘원 달러’를 외치는 풍경 또한 이채롭게 느껴졌다.

▲ 쪽배에서 아이를 껴앉고 '원 달러'를 외치는 빈민촌                  © 김철관


이날 생전 처음 들어본 다름바리(민, 鰵)회와 탕을 먹기 위해 이곳 고기배에 들린 것이다. 농어과에 속한 바닷물고기로 전복만 먹고 산다는 다름바리. 이 고기는 우리나라 제주도에서만 잡히고 먹을 수 있다고 전해지고 있다. 베트남 소주와 함께 안주로 먹었던 다름바리회는 정말 신기할 정도로 입속에서 솔솔 녹았다.

배 전망대에서 본 계속된 바위섬은 정말 장관이었다. 절경에 흠뻑 빠져 연속 카메라 셔터를 눌렀다. 하롱베이의 석회암 섬들에는 온갖 크기와 모양의 동굴이 흩어져 있다. 말뚝동굴, 북동굴, 천궁동굴 등이 대표적인 동굴이다.

말뚝동굴(항 더우 고)은 13세기 베트남의 민족영웅 쩐 흥 다오 장군이 원의 쿠발라이 칸이 이끄는 침략군 함대를 함정에 빠뜨리기 위해 박 당 강 바닥에 설치한 대나무 말뚝을 저장하는데 사용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본토와 가장 가까운 동굴로 알려졌고 바로 이 동굴군을 이루고 있는 근처에 천궁동굴이 있다.

대한항공 광고를 찍었던 천궁동굴(항 띠엔 꿍)은 마치 만물상과 박물관을 보는 듯했다. 조각처럼 보이는 코끼리, 원숭이, 한반도 지도, 사자, 성모마리아상, 토끼, 독수리, 부처님, 용머리 등은 자연으로 이뤄진 기암괴석으로서 석회동굴인 천궁동굴(항 띠엔 꿍)에 즐비했다. 말 그대로 기이함 그 자체였다. 이곳은 종유석과 석순, ‘꽃양배추’ 종유석이 자라고 있다.

▲ 천궁동굴                     © 김철관


천궁동굴은 1991년 첫 발견됐다. 해저에서 화산이 폭발해 지반이 융기됐다는 이 동굴은 지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지상보다 높은 곳에 위치한 동굴이다. 보통 동굴하면 고수동굴, 석류굴 처럼 지하로 내려가 관람하는 습한 동굴을 말한다. 그리고 시원한 느낌의 동굴을 말한다. 하지만 이곳 동굴은 외부 온도와 실내 온도가 거의 비슷해 실내가 비교적 덥게 느껴진다.

동굴은 습기가 없는 산중턱 지상 동굴로 수분이 부족하다. 돌에 수분을 보충하기 위해 인공분수를 만들어 동굴을 보호하고 있다. 즉 석회암 종유석의 균열이 날것을 대비한 수분조직을 활성화 시키려는 묘수인 것이다. 특이한 것은 우리와 같이 좁은 동굴이 아니라 동굴 형태가 넓다는 것이다.

이어 전망대가 있는 띠톱(Dao Titop) 섬에 들렸다. 해변에서 수영을 즐기는 사람도 엿보였다. 섬 꼭대기에는 전망대가 있었다. 전망대에 올라가니 하롱베이 주변 섬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다. 공기 또한 맑았다. 전망대 위에서 바라본 하롱베이 전경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다. 전망대를 내려와 마시는 망고 생과일주스 역시 꿀맛이었다.

소련의 우주비행사 유리가가린 스승인 띠토프는 평소 호치민과 친분관계에 있었다. 호치민은 그와 함께 하롱베이에서 선상유람을 하는 도중 이곳을 발견해 함께 간 띠토프의 이름을 따 섬 이름을 띠톱이라고 지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띠톱섬에서 배를 타려 선착장으로 가는 길에 맛있게 보이는 코코넛(야자수)을 샀다. 섬유질이 많다는 야자수. 빨대를 끼어 입심으로 뽑아내는 물맛은 더운 날씨속의 갈증해소에 그만이었다. 특히 야자나무는 하나도 버릴 때가 없는 식물로 알려졌다.

▲ 띠톱섬의 야자수와 배경                 © 김철관


흔히 우리가 알고 있는 화장품, 비누, 알칼리성 음료 등을 만드는 재료로 많이 쓰이고 있다. 야자수 잎은 전통가옥의 지붕을 덮는데 사용된다. 하롱베이 문화체험관광은 선상유람과 석회암동굴, 띠톱섬 전망대로 이어진 코스였다.

이날 하롱베이 문화체험을 마치고 하노이를 향했다. 버스에서 가이드에게 베트남도 주5일제를 하느냐 묻자. 그는 “베트남은 90년초 주5일제가 도입됐다. 우리가 작년에 주5일제 근무를 실시한 것에 비해 빨리 정착됐다. 기업이나 관공서나 철저히 주5일제는 지킨다”고 알려줬다. 하노이 대우호텔에 여장을 풀고, 다음날 아침 호화빈에 있는 소수민족인 므엉족촌을 향했다.


베트남에는 '묘'가 논 한가운데 있다? 

 논에 묘를 쓰면 조상이 돌본다는 풍속지켜

베트남어로 ‘쪼다냐 (Cho DA Nhe)’라는 말이 있다. 바보라는 의미가 아니다. “얼음 좀 주세요”라는 뜻이다. 11월초 들린 베트남 하노이는 우리나라 초여름과 흡사했다. 날씨가 후덥지근했다. 날씨 탓으로 얼음을 파는 상점이 많다. 그래서 '쪼다냐'라는 말을 많이 쓴단다.
 
육지의 하롱베이라고 불린 베트남 닌빈 호아르에 가 전통 대나무 배를 타고 수로탐사 및 수상동굴을 지나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체험하고 싶었지만 일정이 갑자기 변경됐다. 일행 대부분이 소수 민족촌을 체험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선택한 하노이에서 남서쪽으로 80km떨어진 호아 빈은 흐몽족, 므엉족 등 많은 부족들이 살고 있는 소수민족촌이 많다. 참고로 베트남은 타이족, 따이족, 므엉족 등 54개 소수민족이 살고 있다.
 
 

▲베트남 소수민족 농촌 풍경     © 대자보 김철관  
아침 식사를 호텔 뷔페식으로 마치고 버스에 올라 호아 빈으로 향했다. 여전히 하노이 사람들은 자전거를 타고 분주하게 움직였다. 하노이 중심부를 지나 호아 빈으로 가는 주변부로 접어들자 우리 농촌과 똑같은 모습이 재현됐다. 들판에서 농부들은 바쁜 일손을 분주히 움직였다. 소가 쟁기를 끌고 가는 모습은 어릴 때 우리 농촌의 모습을 연상케 했다.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소가 경운기나 트랙터로 대체돼 농사를 짓고 있는 현재 우리 농촌의 모습과 사뭇 대조를 이뤘다.
 
특이한 모습도 엿보였다. 논 한가운데 시멘트 구조물이 군데군데 우뚝 서 있었다. 궁금했다. 바로 조상의 묘였다. 과거 우리와 마찬가지로 베트남은 불교를 숭상한 국가다. 그래서 우리같이 매장을 한 풍습도 그대로였다. 하지만 물이 고여 있는 논 한가운데 묘를 쓰다는 것 자체가 우리와 상반됐다.
 
이런 모습은 나에게 문화적 충격으로 다가왔다. 우리 풍습대로라면 훤히 트인 산위에, 그리고 양지바른 곳에 묻어야 후손들에게 우환이 없다는 것이 상식이 아닌가. 특히 수맥이 흐르는 곳에 묘를 쓰지 않고 설령 묘를 봉안했더라도 수맥이 발견되면 이장을 해야 자손 대대로 평안하다고 알려져 있지 않는가. 그런데 물속에 조상을 묻다니. 뭔가 이상해도 한참 이상했다.
 
하지만 이해가 됐다. 베트남은 전통 농업 국가이다. 대대로 내려온 전통에 의하면 논에 묘를 쓰면 조상들이 돌봐 풍작을 이룬다는 것이었다. 또 우리나라 과거 풍습에 사람이 죽으면 3년 상을 치르는 것과 맥을 같이 한 듯, 이곳도 3년마다 조상의 묘를 새 단장한단다.
 
묘를 시멘트 구조물로 만든 이유는 조상이 사는 집이기 때문이다. 이 구조물에는 망자의 약력과 활동사항, 초상화 등이 새겨져 있다. 우리나라 추석 같은 명절에 벌초를 하듯 이들도 명절에는 구조물 묘에 세련되게 페인트칠을 한다.
 
호아 빈을 가는 길은 산과 들이 잘 조화를 이뤄 운치 있게 보였다. 가다 전통가옥으로 지어진 허름한 휴게실에 들렸다. 화장실을 가기 위해서기도 하지만, 휴게실 내부를 구경하고 싶어서였다. 휴게실은 온통 전통술로 진열됐다. 코브라술, 도마뱀술, 지렁이술, 약초술, 구더기술 등 듣지도 알 수 없는 수많은 술들이 즐비해 있었다.
 
우선 청량음료를 시켜 오프너로 병마개를 열었다. 우리 일행은 오래된 음료수라는 것을 금방 눈치 챘다. 떨어져 나온 병마개 주위가 녹으로 가득했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컵에 따라 돌려가면서 한잔씩을 마셨다. 조금 있으니 주 메뉴인 베트남 찐쌀 밥이 나왔다.
 
찐쌀 밥은 깨와 소금 등을 섞은 조미료 가루소스에 찍어 먹는 음식이었다. 정말 소스에 찍어먹으니 담백하고 고소한 맛이 났다. 베트남 찹쌀로 찐 간식은 정말 맛이 있었다. 먹고 남긴 찐쌀을 비닐에 넣어 소스와 함께 가방에 넣고 다녔다. 배가 고플 때 조금씩 띠어 먹으니 그 맛이 꿀맛이었다. 어쩌다보니 가방에 넣어 먹다둔 찐쌀을 나도 모르게 귀국해 집에 까지 가지고 오게 됐다. 모친께서 짐 가방을 정리하면서 발견한 진쌀을 너무 맛있게 먹었다고 흐뭇했다. 기막힌 사연이었다.
 
어쨌든 휴게소를 떠나 들린 곳이 호아 빈 수력발전소. 128미터 높이 743미터 길이의 거대한 수력발전소 댐이 퍽 인상적이었다. 주변 산꼭대기에는 베트남의 상징인 호치민 주석의 동상이 위엄을 자랑했다. 지난 79년부터 94년, 공사가 완료될 때까지 목숨을 잃은 161명의 노동자들의 위령탑도 인근에 위치해 있었다.
 
러시아 기술지원을 받아 94년 완공된 이 댐은 8개 터빈을 돌려 베트남 전체 24% 전력을 담당하고 있다. 연간 60만 메가와트를 발전하는 소양강 댐의 4배 정도인 240만 메가와트의 전력을 생산한다. 이날 수문은 굳게 닫쳐있었다. 댐 옆에 위치한 수문에서 쏟아질 장엄한 물줄기를 잠시 생각하기도 했다.
 
호아 빈 수력발전소를 지나 소수민족촌으로 가는 길은 우리 구불굴불한 시골길의 모습과 흡사했다. 소수민족촌에 도착하자 호텔이 엿보였다. 우리가 생각했던 고층 건물의 호텔이 아닌 전통가옥으로 지어진 호텔이었다. 호텔을 지나 민속촌 공연장으로 갔다. 공연장은 주상가옥 2층에 마련된 아주 작은 공간이었다. 공연장 주변 벽에는 두 줄 바이올린, 팬 파이프 등 신기한 전통악기들이 나란히 걸려있었다.
 
우리와 비슷하게 닮은 소수민족인 므엉족은 징, 북, 피리, 팬 파이프, 두줄 바이올린 등 전통악기와 춤, 노래를 앞세워 흥겨움을 연출을 했다. 므엉족의 미소에 찬 얼굴이 눈길을 끌었다. 공연이 끝나고 사진 촬영도 함께했다. 또 이들과 둘러앉아 ‘훠이 훠이’를 외치며 즐겁게 술을 마셨다. 함께 마시는 전통 대나무 빨대술 맛은 정말 일품이었다. 베트남 전통소주 넵 모이(Nep moi)가 증류주라면 이날 먹은 대나무 빨대술은 곡주였다.
 
가느다란 대나무 빨대를 술이 들어 있는 항아리 속에 여러 개를 집어넣고 빨대를 하나씩 골라 입심으로 빠는 대나무 빨대술은 빨아도 빨아도 끝없이 술이 나왔다. 물을 계속 부으면 숙성돼 나오는 마술의 술이었다. 어떻게 계속 물만 부으면 자동으로 술이 되는지. 동료들은 궁금해 했다. 하지만 시간이 없어 이유를 물어보지 못했다. 동료 한분이 대나무 빨대술을 사서 나에게 선물했다. 현재 고이 간직해 집에 보관해 뒀다.
 
함께 베트남 문화체험을 했던 동료들을 만나 그 때의 추억을 되새기면서 즐겁게 마시기 위해서다. 쌀과 약초 등이 주원료로 만든 대나무 빨대술은 이곳 소수민족의 특산품으로 명절 때 자주 마시는 술이다.
 
공연관람을 마치고 이곳 소수민족 전통 향토음식으로 점심을 해결했다. 다양한 전통 메뉴의 음식이 나왔다. 나름대로 의미 있는 전통음식 시식이었다. 점심을 마치고 므엉(Muong)족이 모여 사는 마을입구에 도착했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많은 동네 사람들이 나와 손을 흔들며 반가이 맞이했다.
 
버스에 내리자 일행들을 각자 붙들고 집을 향해 가자고 손짓했다. 호객 행위를 하는 사람들처럼 끈질겼다. 한 어린애를 따라 도착한 곳은 므엉족 전통 가옥인 주상가옥. 산기슭 평야지대에 있는 주상가옥은 뱀, 쥐 등의 동물 침입을 막기 위해 2층 정도의 높이에 지은 집이다.
 
집에 도착하자 아이 엄마, 언니, 자녀 등이 모여 서로 인기자랑을 했다. 집에서 비진 곡주를 한잔 줬고, 옥수수도 내놓았다. 말이 전혀 통하지 않지만 그들의 손짓이 무슨 의미인지는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베트남식 담배 피는 모습     © 대자보 김철관
어린애의 어머니는 큰대나무 모서리에 불을 붙이더니 연달아 빨았다. 담배였다. 어릴 적 가느다란 대나무 속을 뚫어 만든 빨대 앞에 박카스 뚜껑처럼 오목한 쇠구멍을 만들어 봉초(골연)를 넣고 불을 지펴 담배를 피우던 할아버지의 담뱃대가 생각났다. 하지만 그런 담뱃대가 아니었다.
 
인사동에서 대나무 통밥을 먹을 때나 쓰인 대나무 통밥 크기의 둘레에다 50센티 정도 길이의 담뱃대였다. 그 큰 구멍으로 담배를 피운다는 자체가 신기했다. 담뱃대 안에 물을 넣어서인지 빨 때마다 물 끓은 소리가 들렸다.
 
한참 후 담뱃대를 놓은 그는 그가 만든 옷이며, 가방이며 신발을 선보였다. 사라고 하는 사인을 보낸 것이다. 자식들도 번갈아가면서 어머니가 만든 상품을 선보였다. 그들에게는 실용적인 물건일지 몰라도 우리에게는 실용적인 상품이 아니었다. 얼마 있었을까. 시간이 다돼 일어났다. 그리고 가족들에게 원 달러씩을 주었다. 다섯 명이었으니 5달러였다. 좀 더 돈을 주라는 손짓은 계속됐다.
 
한 사내아이는 버스가 정차돼 있는 마을 입구까지 따라와 ‘원 달러’를 외쳤다. 또 다른 아이는 한국 지폐 천원자리를 여러 장을 모아 보여주면서 달러로 바꿔달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상당수의 한국 관광객들이 다녀간 것을 쉽게 느낄 수 있었다.
 
소수 민족촌을 떠나 하노이의 명물 수상인형극을 관람하려 했다. 하지만 러시아워 시간인데다가 차가 밀리는 등 정시에 도착하지 못해 관람을 못했다. 저녁 식사를 하고 다시 바딘광장을 찾았다. 국기하강의식을 보기 위해였다. 하얀 제복을 입은 경비병들이 웅장한 음악에 발을 맞춰 나타난다.
 
 

▲하노이 바딘광장에서의 국기강하식 모습     © 대자보 김철관  
이들은 바딘 광장 정면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이여, 영원하라’라고 (베트남어)적힌 표어 옆에서 바딘광장 한 가운데에 있는 걸려 있는 국기를 향해 절도 있는 걸음을 내딛었다. 국기하강 의식의 화려함은 영국 버킹검 궁전의 근위대 교대장면과 흡사했다. 저녁 8시 45분부터 정각 9시까지 15분간 진행된 국기하강식을 보기 위해 많은 하노이 시민들과 관광객들이 바딘 광장을 꽉 메운 것도 이색적인 광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