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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도 조약과 함께 일제의 한국침략이 본격화된 1876년. 네덜란드의 유복한 가정에서 오남매 중 고명딸로 태어나 행복한 유년기를 보낸 마가레타 젤러는 넘치는 상상력과 지나친 분방함으로 자주 부모님을 놀래키다 열여덟에 스무살 많은 해군장교와 눈이 맞아 후다닥 시집가면서 내 인생은 내가 산다고 선언했건만, 식민지였던 인도네시아 자바섬에서 시작된 신혼의 꿈은 망나니 짓만 골라하던 남편의 폭력까지 겹치며 박살이 난다. 그러나 새옹지마. 고향 암스테르담에 돌아왔을 때 현지에서 배워온 배꼽춤 솜씨가 일품이었다.
요즘 취향으로는 두리둥실 삼순이 살집이 뭐 그리 고혹적이었을까 싶지만, 당시 기준엔 그게 명품이었던지 빙글빙글 돌아가는 그녀의 배꼽에 암스테르담은 물론 베를린과 비엔나와 파리 남자들의 눈이 함께 휙휙 돌아간다. ‘낮의 눈’, 즉 태양이란 뜻의 ‘마타 하리’로 다시 태어난 그녀는 자기가 자바에서 온 공주라나, 그렇게 신비하고 관능적인 원주민 여자라는 황당한 소문을 퍼뜨리며 날이 갈수록 으리으리한 전설을 창조해갔다.
어느덧 요염하고 사악한 팜므파탈 혹은 전설적 여간첩의 대명사가 된 마타 하리는 포르노도 텔레비전도 없던 시절, 파리 최고의 술집 물랭루주를 대표하는 누드 무용수로 프랑스 장관과 네덜란드 총리, 프로이센 황태자와 스위스 백작 등 유럽 최고 막강 권력들을 고객으로 확보한 연예계의 태양이었다.
인기 관리하느라 언제 해가 뜨는지 달이 지는지 모를 정도로 스타덤을 누렸으나 박복한 그녀, 어느 은행가의 청혼을 받아들이자마자 파산한 남편 탓에 알거지가 돼 베를린으로 도주하고 재기를 꿈꾸지만 전쟁이 임박한 그곳에서 연애의 쓴맛만 보고 돌아오는데. 이때 프랑스와 연합군 진영 정·관계 고위 인사들을 통해 입수한 정보 “연합군 5만명의 목숨을 잃게 할” 무시무시한 군사기밀을 독일군 장교에게 넘겨줬다는 혐의로 1917년 프랑스 군법회의에 회부된다. 그해 10월15일, 이중간첩 암호명 ‘H21’은 파리 외곽에서 12명의 총잡이가 쏘아대는 탄환에 몸을 비틀며 41살의 나이로 생을 마감한다.
영국 정보부는 H21을 프랑스에 넘기기 전 세 차례나 심문했으나, 1999년 비밀 해제된 영국의 제1차 세계대전 관련 문서에는 마타 하리가 그 어떤 군사 정보도 독일쪽에 넘긴 증거가 없다고 밝히고 있다. 그녀가 간첩 혐의로 붙들리자 그녀 주변을 맴돌며 염문을 뿌린 숱한 인사들이 재판정에 불려왔지만, 누구 하나 그녀를 위해 변호해주지 않았고 제 한 몸 살아남기에 바빠 꽁무니를 뺐다.
거짓말을 일용할 양식으로 삼았던 그녀가 진짜 스파이였는지, 전쟁의 광기 속 가엾은 희생양이었는지, 한동안 그 수수께끼마저 마타 하리의 이름을 빛내는 전설이었으나 이제 눈길을 끄는 건, 포르노 혹은 연예산업의 원동력이 되는 남성 판타지를 조작하고 그걸 자유자재롤 구사하며 파란만장한 생을 살았던 마가레타 젤러의 탁월한 연출 능력이다.
무엇이든, 비올레타 스타일
유럽이 러시아혁명과 제1차 세계대전의 포화로 자욱했던 1917년, 가난하지만 평온했던 칠레 남부 시골, 마을의 음악교사인 아버지와 아홉 아이를 기르며 틈틈이 기타 반주에 맞춰 노래하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비올레타 파라는 열두살에 작곡을 시작해 동네 아이들 앞에서 들려주고 산티아고 국립음악원에 들어가면서부터는 작곡한 노래들을 동네 술집과 서커스, 마을축제 등에서 연주하고 다녔다.
세살 터울의 오빠 니카노르 파라는 피노체트 군부 독재를 마감시키기까지 거리의 언어와 비속한 표현, 법률 용어, 장례식 조문, 정치 연설에 사용되는 진부한 표현을 자기 시에 구겨넣으며 부적절한 조합을 통해 유머와 풍자를 끌어냈던 반(反)시 운동의 기수로, 군사정권에 의해 살해된 살바도르 아옌데, 파블로 네루다 등과 뜻을 함께하며 중남미 현대시를 주도한 대표 시인인데, 영혼의 교감을 나누었던 오빠의 독려와 지원에 힘입어 그녀는 1952년부터 전국을 돌며 구전민요와 노랫가락을 수집한다. 이 여행에서 남미의 다양한 소리와 문화에 눈을 뜨고, 정형화된 외래 음악을 극복하는 민속음악의 뿌리 찾기와 보존에 열정을 바쳐 전통음악을 대중가요로 새로 빚은 이른바 ‘누에바 칸시온’(새 노래) 운동을 일으켰다. 사회비판과 저항정신으로 빛나는 이 노래들은 1973년 쿠데타 이후 악!랄한 군사독재 치하에서 고통받던 칠레 민중에게 희망과 위로의 원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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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결하고 고지식한 비올레타는 사회적 불평등과 정치적 탄압에 결연한 의지로 저항하며 노동자와 농민의 가난한 삶을 끌어안고 그들과 연대했지만, 계급적인 적대감을 직설적으로 표현하기보다 가톨릭 정서에 뿌리를 둔 휴머니즘 입장에서 더할 나위 없이 서정적인 감성으로 인간의 삶에 가해지는 제도적 굴레와 억압에 묵묵히 저항하는 쪽이었다. 이러한 서정성은 엄마의 재능을 이어받은 그녀의 두 딸을 비롯해 중남미의 ‘새 노래 운동’을 주도한 음악인들의 생명력을 유지하는 비결이기도 했다.
사회당의 당원으로 열심히 활동한 덕에, 냉전 시대 동유럽과 서유럽 모두에서 대대적인 찬사와 환영을 받으며 순회공연을 하던 그녀는, 유럽 각지에서 만난 지식인과 예술가들을 통해 자기 안에 있던 다른 재능들을 일깨워 감성이 뭉클뭉클한 시를 지었다. 어느 날은 문득 전문 요리사 솜씨를 능가하는 뛰어난 솜씨로 만찬을 준비하고 ‘낭송의 밤’을 여는가 하면, 그림과 도자기와 수예에도 놀라운 기량을 드러내 모든 분야마다 ‘비올레타 스타일’을 창조해내는 식이었다.
하지만 팔방미인과 미인박명이란 말은 딱 그녀를 두고 한 말이다. 그토록 탁월하고 총명하며 순수한 영혼의 소유자인 비올레타 파라의 죽음은 너무 안타깝고 김이 빠진다. 1967년 반전 혹은 평화운동의 상징으로 꼽히는 존 바에즈와 메르체데스 소사의 목소리로도 유명한 ‘삶에 대한 감사’(gracias a la vida)라는 감동의 시를 쓰고 노래까지 붙인 그녀, 쉰이 채 안 된 나이로 실연의 아픔과 경제적 곤궁을 비관한 나머지 그 ‘감사한 삶’을 자살로 마감한다.
형제애, 구주에게 물어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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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혁명의 정신이라는 자유·평등·박애 중 ‘박애’는 원래 서양말의 ‘형제애’(brotherhood)를 의역한 것이니, 여자는 빼놓고 남자들끼리의 우애라, 자유와 평등도 결국 남자들의 자유와 그들 사이의 평등이었다. 이를 동양에 들여오며 한결 더 넉넉하게 그 경계를 허물고 ‘박애’라 표현했던 그 누군가의 양성평등적 감수성에 우리는 진심으로 경의를 표해야 한다. 대부분의 서양말에서 인간은 곧 남자와 한 단어라, 그들의 무의식에는 종종 “여자도 인간일까?” 하는 의심이 들 수밖에 없었을 듯하다. 하긴 인본주의의 화신인 공자님을 봐도 그렇고 “네 이웃의 여자를 탐하지 말라!”는 구약성서 10계명부터 (레즈비언을 제외한) 여자는 사실 ‘사람 인(人)’으로 치지도 않았던 거다.
1791년, 프랑스혁명 2년 뒤 이 엄청난 과오를 발견하고 자기보다 일곱살 아래인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자매애에 대한 언급이 빠진) 프랑스의 인권선언은 여성이 빠진 반쪽짜리라며 ‘여권선언’을 새로 작성해서 보냈던 올랭프 드 구주, 왕정과 공화정의 극단적 대립 상황에서 공포정치의 폐해를 서슴없이 비판하고 심지어 루이 16세의 재판에서 왕을 변호하겠다고 공개서한까지 작성해 보내며 사회 구성원으로서 자신도 마땅히 혁명에 참여할 권리가 있다고 굳게 믿었던 그녀, “여성이여, 깨어나라! 인간 이성의 각성이 온 우주를 뒤흔들고 있으니, 네 권리를 깨달으라!”고 외치며 “여성은 연단에도 단두대에도 오를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다 결국 2년 뒤 왕비마마의 뒤를 이어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진 이 각별한 선각자의 존재는 100년도 더 지나 여성운동의 역사를 추적하던 후배(!)들에 의해 비로소 드러나기 시작했다.
스페인 가까운 프랑스 시골 마을, 그 동네의 ‘볼테르’였던 퐁피냥 후작과 사랑했으나 신분의 차이로 맺어지지 못했던 세탁부 어머니 사이에서 1748년 사생아로 태어난 그녀는 열여섯에 나이 많고 돈 많은 남자에게 시집가지만 아들 하나 낳고 과부가 되어 큰 뜻을 품고 파리로 올라간다. 사교계 문사들과 재치를 겨루며 숱한 남자들의 구애를 받던 지성과 미모의 그녀, 결혼은 단호히 거부한 대신 재정적 후원자 노릇을 해준 첫 애인과 사이좋게 지내며 세태를 꼬집는 소설과 희곡을 줄줄이 발표하는데, 학교 문 앞에도 가보지 못한데다 제주도 말 정도로 표준어와 차이가 나는 사투리를 쓰던 그녀였으니 맞춤법과 철자가 엉망이라 글쓰기는 대필 작가에게 맡겼다 한다.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했던 여자 홍길동, 때는 바야흐로 혁명의 시대, 냉철한 두뇌와 뜨거운 가슴의 소유자 올랭프 드 구주의 타오르는 정의감과 시대를 뛰어넘는 각성에 대해 1904년 프랑스의 정신과 전문의 길루아는 자신의 박사 논문 ‘혁명 시기 여성들의 정신 상태에 대한 논고’에서 “8만권을 남긴 그녀의 서가”를 증거로 꼽으며 여성이라는 정체성을 망각하고 ‘혁명 광기’에 시달린 “편집증과 히스테리”의 전형이었다고 히스테리를 부렸다.
오리엔트 특급인생 애거사 크리스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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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거사 크리스티는 대영제국의 팍스 브리태니커가 아직도 위세를 떨치던 1890년, 유복한 가정의 늦둥이 막내딸로 태어나 가정교사의 개별 지도를 받고 음악에도 재능을 보여 파리음악학교에 유학할 만큼 풍족한 유년기를 보냈으나, 남들 앞에 나가 하는 연주를 감당 못할 만큼 수줍음이 심각해 글쓰기쪽으로 재능을 몰아갔다고 한다.
상상력만 쏟아지고 세상 물정 몰라 갑갑했던 그녀, 홀어머니의 목숨 건 반대를 무릅쓴 채 친절하고 인물 좋은 청년과 결혼을 하고, 제1차 세계대전 동안 남편이 프랑스 전선의 전투기 조종사로 복무할 때는 간호사로 지원해 적십자병원에서 일하며 약사자격증을 따기도 했다. 하나를 보면 열을 깨치는 그녀, 약국에 근무하며 온갖 독약의 쓰임새를 알아내고, 독수공방 외로운 밤이면 서방님을 그리는 대신 퍼즐 조각을 맞추며 추리소설의 구조를 연구했다.
전쟁터에서 돌아온 뒤 제 일을 찾기보다 아내의 재능을 돈으로 바꾸는 일에 더 열성적인 사위와 반목하던 어머니가 화병으로 세상을 뜨자, 어느덧 탐정소설 작가로 자리를 굳힌 그녀는 슬픔에 몸져눕는다. 정신 차리고 일어나보니 남편은 새 여자가 생겼다며 냉혹하고 뻔뻔한 뒷모습을 보이며 돌아섰다. 이 괘씸한 행각에 분노하다 맛이 간 그녀, 열하루간 실종 상태에서 지명수배된 포스터와 이를 대서특필한 신문에 실린 사진은 금자씨처럼 신비로웠다.
충격 반복에 의한 기억상실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본인은 아무것도 모른다고 잡아떼니 그녀의 미스터리는 더욱 주목을 받고, 이혼의 아픔을 잊으러 먼 길 떠나 올라탄 ‘오리엔트 특급열차’는 마흔 너머 새로운 삶을 향해 초특급으로 내달렸다. 같은 제목의 소설은 수많은 그녀 작품 중 최고 역작으로 올여름 우리 극장가를 잔뜩 달군 서늘한 영화 <친절한 금자씨>를 비롯해 많은 스릴러물의 원조가 되고, 내처 달려간 메소포타미아 문명 발굴 현장에서 만난 열다섯살 아래 고고학자는 그녀의 새 남편이 되어 이후 빛나는 영감으로 뒤엉킨 갖가지 실타래들을 작품 곳곳에 공급하며 1930년대 불멸의 작품들이 탄생하도록 도와주었다. 1976년 85살의 나이로 죽음을 맞을 때까지 장편 66권과 단편집 20권을 발표한 그녀는 명실공히 추리소설의 여왕으로, 그 누구의 추종도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삶은 그렇게 단순한 게 아니어서, 그녀의 죽음 이후
히자브의 변호사, 시린 에바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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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중반, 새벽종이 울리고 새 아침이 밝아서 우리도 한번 잘 살아보려 할 적에 난데없이 터진 석유 파동, 그 무렵 우리는 눈부시게 ‘있어 보이는’ 외국 애들과 우리 선수들이 벌이는 농구경기에 전교생이 동원돼 장충체육관에 갔다. 체육 선생님은 상대팀을 응원하라고 거듭 강조했고, 그래서 ‘우리 편’이 된 그녀들은 ‘두발 자유’는 물론 우리와는 비할 바 없이 자유롭고 발랄하며 윤기가 흘렀다. 비록 경기는 깨졌지만, 가진 건 미모와 석유밖에 없던 부자 나라 소녀들은 우리 앞에서 충분히 뻐길 만했다.
이 무렵 20대 후반의 나이로 그 나라에서 최초의 여성 판사가 된 시린 에바디는 그러나 1979년 호메이니의 귀국과 함께 “여자는 ‘너무 감정적이라’ 재판권을 줄 수 없다”는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의 판단에 따라 법복을 벗고 대신 (검은 두건) 히자브를 쓴 채 변호사 활동을 하게 된 것만도 다행, 아니 그 가시밭길에서 새로 태어났다.
여성의 전통적 역할을 강요하며 과거로 회귀하는 사회구조적 모순에 반발하고 대항하기 시작한 두 딸의 어머니 에바디는, 마누라를 넷까지 둘 수 있고 이혼시 위자료 한푼 안 줘도 딸은 일곱살, 아들은 두살까지만 어머니에게 양육권을 허용하는 그 나라에서 여권을 보호하는 판례들을 줄줄이 통과시켜 가족법 개혁에 막대한 공헌을 했다. 20년 넘게 여성과 아동의 권리향상을 위해 애쓰다 보니, 억울한 반체제 인사들까지 그녀 품으로 찾아들어 이들과 교류하다 체포되고 투옥되기도 여러 차례였다. 이 모든 공로를 인정받아 2003년 이슬람 여성으로는 최초로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내가 문제 삼는 건 이슬람이 아니라 가부장적 문화다. 코란의 어디에서도 부정한 여성에게 돌을 던지는 형벌의 근거는 찾을 수 없다”는 시린 에바디의 노벨상 수락 연설에 대해 그 나라, 이란의 보수파들은 “서방이 노벨상을 미끼로 이란을 자기들 입맛에 맞게 바꾸려는 저열한 시도를 했다”고 반발하며 “정통 이슬람 문화에 대한 전쟁 선포”라고까지 비난했다. 어느덧 이란 여성들에게 희망과 저항의 상징으로 “차기 대통령은 에바디”라는 탄성을 받게 된 그녀, 이슬람의 제1호 ‘공공의 적’이며 묵시록에 나오는 ‘암말’로 낙인되는 동안 가슴에 쌓인 말이 얼마나 많았겠는가! 그 길고 긴 사연을 정리해, 최근 모씨의 회고록과 비할 바 없는 세계적 반향을 일으킬 회고록을 완성했다고 한다. 그러나 자신들을 ‘악의 축’이라고 했던 ‘적과의 교역’을 금하는 율법에 따라 미국 내의 출간은 강력 저지당하고 있다.
한편 그녀의 회고록이 상당 부분 미국의 치부도 폭로하고 있어 ‘악의 축’인 이란의 국익에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적국의 남자들 또한 수단과 쿠바와 북한의 작가들에게도 적용되는 엄격한 판금 규정에 따라, 이 책을 내겠다고 계약하는 출판사에는 최소 10년 징역과 25만달러 혹은 100만달러의 벌금형을 때릴 준비를 마쳤다 한다.
천년의 수학, 히파티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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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아시아를 가로지른 흉노족이 다뉴브 강가에 닿고, 게르만족은 좀더 살 만한 남쪽으로 민족의 대이동을 시작하던 4세기 말, 기독교를 국교로 삼은 로마제국은 ‘예수는 인간보다는 훨씬 더 신에 가깝다’는 니케아회의의 결정을 팍팍 밀며 ‘못 믿는 자’들을 엄단했다.
이 무렵 국제도시 알렉산드리아는 세계적인 첨단 학문의 집결지일 뿐 아니라 대립하는 종교들의 본거지여서 ‘종교간의 갈등’으로 스산했다. 유대인과 비기독교신자들은 힘 좀 쓰는 교회 권력자들의 손에 의해 추방되고 배척당하는 일이 잦았으나, 헬레니즘의 본산지인 만큼 철학과 자연과학의 전통으로 성령의 불길에 저항하는 지식인 또한 적지 않았다. 이들 중에 수학자 테온은 유난히도 영특한 딸 히파티아를 무릎에 앉히고는 예술과 문학, 자연과학과 철학에 눈을 뜨게 하고 여러 나라에서 온 지식인들과 교류를 통해 지적 소양을 쌓게 했다. 또한 다양한 종교의 교리를 빠짐없이 가르치고 그에 대한 ‘분별력’까지 북돋아 어떤 신앙도 딸의 삶을 지배하지 못하도록 단속했다.
히파티아는 아테네에 가서 플루타르크와 그의 딸이 운영하는 신플라톤 학파 계열의 학교에 유학하고 돌아온 뒤 처음에는 귀족 젊은이들을 대상으로 일종의 ‘비밀과외’를 하며 냉철한 사유법을 가르쳤다. 또한 아버지와 함께 ‘원추곡선의 계산법’을 추가시킨 유클리드 기하학의 개정판을 냈는데, 근대에 이르러 데카르트와 뉴턴 등이 새로운 과학을 시작하기 전까지 그녀의 교본은 1천년이 넘는 세월 내내 ‘수학의 정석’ 자리를 굳건히 지킨 셈이다.
수학사에 등장하는 최초의 여성, 아버지를 능가하는 명성을 얻게 된 히파티아 선생님은 하얀 무명의 망토 차림으로 여러 학교에 출강하며 시내를 활보했는데, 절세미인이던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은 유럽과 아시아와 아프리카에서 유학 온 학생들의 혼을 빼놓기에 충분했고, 숱한 왕자와 철학자로부터 구혼을 받았으나 “나는 진리와 결혼했노라”는 깜찍한 화법으로 모두 물리치며, 물질세계를 벗어난 인간 본성의 신적 요소, 즉 영혼을 찾으라고 이 불쌍한 영혼들을 다독였다. 영혼은 “우리 내부의 진실한 눈”이니, 이를 통해 미모무상도 깨우치고 대신 모든 존재의 궁극적 원인인 ‘철학적 신’에 이르기를 독려했으니, 기독교도들의 ‘아버지 하느님’은 좀 무안했겠다.
결국 그녀는 ‘아버지 하느님’의 제단에 바칠 ‘처녀 제물’로 낙인찍히고 415년 어느 날, 주교였던 키릴로스의 앙숙인 남자와 친하게 지낸 일이 화근이 되어 비참한 최후를 맞는다. 출강을 나가던 그녀의 마차에 달려든 기독교 광신도들은 히파티아를 낚아채 발가벗긴 뒤, 성소로 끌고 가 굴 껍데기로 온몸을 짓이기고 불길에 처넣어버리는 것으로도 부족했던지,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에 있던 그녀의 저작은 죄다 꺼내서 분서갱유를 하고, 다양한 소문을 퍼뜨리며 ‘완전범죄’를 감행한 탓에 최근까지도 ‘여성은 수학을 못 하거나, 하면 못 쓴다’는 편견 혹은 미신이 잔존했다고 한다.
루이제 푸슈와 부조리한 3인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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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영어의 남성 중심 어법에 눈뜬 언어학자들은 ‘English’를 남성(men)의 소유물인 ‘Menglish’라 꼬집으며, 3인칭 대명사를 ‘그녀’로 대체하는 실험을 감행했다. 과학잡지 <사이언티픽 아메리칸>의 표지 그림에는 다음 설명이 붙어 있었다.
“By age 17 a human being may know 80,000 words; how does she do it?”(열일곱이면 사람은 8만개의 어휘를 습득하는데, 그녀는 대체 어떻게 그렇게 할까?)
‘사람’을 받는 인칭대명사를 관행인 그(he) 대신 그녀(she)로 바꿔 써본 것이다. 매사를 남성이 대표하고 여성의 존재는 증발시켜버리는 문법 효과는, 명사와 형용사를 여성·남성·중성 등 젠더로 나눠 쓰는 독어나 불어의 경우 더욱 강력해서 사사건건 여성을 뺀 ‘사람’들이 득시글거리는 상황이 된다.
독일 축구 국가대표 감독 왈, “건강한 ‘사람’은 여자 없이 6주 동안 견딜 수 없어요“.
콜 전 독일총리 왈, “가족을 아끼는 ‘사람’은 부인도 소중히 여긴답니다”.
가난한 편모슬하에서 감성이 풍부한 문학소녀로 성장한 루이제 푸슈는 불혹에 접어든 1984년 <독일어는 남성전용 언어>라는 책을 통해 그토록 사랑했던 ‘모’국어의 곳곳에 숨은 남녀차별 전략을 질타하며, 20년 가까이 ‘독일어 뜯어고치기’에 매진한 결과 현대 독일어 곳곳에 양성평등 정신을 구현하는 개가를 이루었다.
‘여성주의 언어학’을 고집하다 교수직에서 밀려났지만, 그녀의 논리는 학문의 범주를 넘어 사회적으로 확산됐고, 1980년대 말 모든 법조문에 들어간 성차별적 표현을 깡그리 수정하는 기초가 된다. 그 존재가 명시적으로 드러나지 않은 법조문 탓에 여성은 자기 권한을 온전히 행사할 수 없다는 통찰의 타당성이 인정됨에 따라, 계약서에 간단히 ‘집주인’(남성)이라 쓰는 대신 ‘여성 집주인’과 ‘남성 집주인’을 이어 쓰다 보니, 안 그래도 조잔한 법조문들이 더욱 번거롭고 구차해졌다. 그러나 이런 식의 ‘강제’를 동원해 남성 위주의 편파적 시각을 교정하는 장치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그 효력은 엄청난 시너지를 발휘했다.
언어의 중요한 특성 중 하나인 경제성을 포기하면서 굳이 번거로운 혀놀림 혹은 손놀림을 실행하는 까닭은, 그 성가신 울림이 나의 개혁과 세계의 개혁을 동시에 실현하는 풀뿌리 혁명의 떨림이기 때문이라는 게 그녀와 나를 포함한 그녀들의 믿음이다. 여성과 남성의 ‘차이 드러내기’는 여성주의가 지향하는 다양성의 존중과 같은 맥락이다. 우리말에서 ‘3인칭 단수’라는 표현 자체가 서양어의 번역 형식이라는 비판도 가능하나, 기왕 쓰는 말, 영어 ‘she’에 해당하는 ‘그녀’를 삼가고 ‘그’나 ‘그이’로 무작정 통일하기는 여성주의 언어학의 기본 원리를 역행하는 오류다. 가를 건 가르고 구분할 건 구분하며, ‘그녀들’의 존재를 드러내는 노력이 요구된다. 여성의 존재를 무시하고 그 활동을 드러내서 표현하지 않는 언어는 성차별적이다.
팔레스타인의 왕언니, 아에샤 오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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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세계대전 뒤 ‘약속의 땅’으로 몰려오는 유대인들과 내내 그 땅에 살아온 원주민 사이엔 잦은 충돌이 있었다. 1948년 5월14일 이스라엘은 ‘몽땅 우리 땅’이라며 건국을 선포했고 북미에서 원주민을 몰아내듯 ‘더는 삶의 의욕이 남지 않을 때까지 죽어라 밀어내기’ 작전이 시작됐다. 막 네살이 된 아에샤 오우다는 암살과 억류, 통금과 폐쇄가 그치지 않는 팔레스타인의 잔혹한 현대사를 고스란히 몸으로 살았지만, 밝고 천진하고 지혜로웠다.
세계생명문화포럼에서 만난 그녀 앞에서 ‘미국의 똘마니’로 살아야 했던 우리의 현실이 다시 민망하고 부끄러웠다. 1967년의 이른바 ‘6일 전쟁’은 내 유년기의 스산한 기억으로 남은 몇몇 ‘역사적 사건’의 초절정 감동 중 하나로, 거대 아랍과 약소국 이스라엘 사이의 전쟁 때 아랍 애들은 비겁하게 도망가느라 바빴지만 이스라엘은 외국에서 공부하던 학생까지 모두 귀국해 젖 먹던 힘까지 다해 싸운 결과 이순신 아니 박정희 장교 말씀대로 ‘필사즉생’하여 일당백의 솜씨로 물리쳤으니, 우리도 반드시 그들을 본받으리라!
그 ‘비겁한 애들’ 중 하나였을 아에샤는 23살 순정으로 팔레스타인 해방전선에 가담해 온갖 궂은일을 하다 2년 뒤 체포돼 구타와 강간의 공포에 떨며 종신형을 선고받았고, 10년 넘게 옥살이를 하는 동안 간수들의 히브리어도 저절로 배우고 “아에샤와 친해지면 곧 팔레스타인의 친구가 된다”는 소문이 퍼져 간수를 감시하는 간수까지 따로 생길 무렵, 양 집단의 교환협상이 이루어져 거짓말처럼 석방됐다. 하지만 ‘죄수’들은 곧 요르단으로 추방돼 15년을 살다 중동의 평화를 약속한 오슬로협정 덕에 1994년 고향으로 돌아왔다. 요르단에서 남자를 만나 결혼했지만 그는 곧 색출돼 추방당하니 연락이 끊긴 세월이 이어졌고, 아이를 갖고 싶었으나 자신의 ‘가임기’가 끝날 때까지 그를 다시 만날 수 없었다고 말할 때, 그녀의 쓸쓸함이 내 가슴을 후볐다.
고향에 돌아온 그녀는 마을 곳곳에 군대가 들어서고 이스라엘 정착촌이 건설되는 현장을 목격하며 목이 멨지만, 땅도 싫고 싸움도 싫어 이스라엘 여성들과 손잡고 더는 피를 흘리지 않을 평화의 그날을 꿈꾸며 진정한 평화운동가로 거듭났다. 하지만 ‘완전한 승리’를 꿈꾸는 이스라엘 ‘전쟁영웅’ 출신들의 권력은 온건하고 합리적인 팔레스타인 지도자들을 제거하고 급진적인 인물을 키워 갈등을 부추기는 쪽으로 사태를 자꾸 악화시키고, 지금 팔레스타인 원주민들은 실험에 걸려든 쥐들처럼 8m 높이의 장벽으로 곳곳을 막은 미로 속을 헤매며 지옥 탈출을 꿈꾸고 있다. 아에샤는 작은 관심도 힘이 되고 위로가 된다고, 멋진 가전제품과 드라마를 만들어내는 한국에 이만큼의 자유와 평화와 풍요가 넘치기까지 어떤 고난과 인내와 용기가 있었는지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꼭 알려달라고 맑고 고운 눈을 깜박이며 몇번이나 당부했다
태워없앨 수 없었던 허난설헌의 판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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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63년 임진왜란이 터지기 서른해 전에 세상에 나타난 초희라는 계집아이는, 자신의 운명을 세 가지로 압축해 이 넓은 세상에서 하필 조선 땅, 그것도 여자 몸으로 태어나 열네살에 시집가 낳은 아이 둘은 다 죽고, 하필이면 또 김성립이란 졸장부의 아내가 되었는지! 자신의 원통한 심정을 절절히 토로했다. 함께 신동 소릴 듣고 자란 지봉 이수광 같은 이는 같은 해 같은 땅에 태어났어도 고추 하나 달고 나온 덕에 당쟁이 치고받고 시절이 그토록 고약해도 묵묵히 양반 사회의 모순을 성찰하며 벼슬길에서 물러나 자기 정진하면 그만이었다. 때론 못난 왕을 보필해 의주까지 피난 가는 수난도 겪었지만 전쟁이 가라앉은 후에는 이웃나라 사신으로도 가고, 돌아와선 다시 새로운 세상을 꿈꾸면서 실학운동의 선구자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여성의 천부적 재능 따위는! 도리어 재앙이던 답답한 시대, 그녀는 숨 막히는 시댁에 갇혀 죽었다.
아버지 허엽은 최고 벼슬을 했던 유교 전통의 선비임에도 황진이와 더불어 화담 서경덕 밑에서 동문수학했던 도나 기에 도통한 남자라 오라비들 틈에서 뭐를 배우든 말든 ‘걍 냅두는’ 일명 ‘냅도(道)’를 잘 실천했고, 호방하고 명석한 오라비들은 ‘호부호제 못하는’ 서러운 서자 출신 탁월한 시인 친구를 불러 보물덩어리 누이의 재능이 빛나도록 개인 교습도 시켜주었다.
그게 화근이었다. 곧 스승을 능가하고 세월을 건너뛰는 규방 아씨 초희는, 무지막지하게 강요되는 인내와 순종, 구질구질한 현세 따위에서 가볍게 벗어나, 성과 속에도 구애됨이 없는 호호탕탕한 세계를 향한 우주적 상상력을 발휘하며 선녀와 신선이 노니는 판타지 세상을 거침없이 창조하고, 거기 머물러 살고자 했다. ‘난설헌’이란 청초한 이름으로 다시 태어난 시인의 그 행복한 세계와 스물세살에 써내려간 자신의 죽음을 예언한 외롭고도 구슬픈 내용까지 담아낸 200여편의 주옥같은 시는, 스물일곱의 나이로 요절하면서 모두 태워 없애달라는 유언에도 불구하고 치열하게 시대와 불화하는 한편으로 누나에 압도당했던 그녀의 막내동생 허균 덕에 뒤늦게 살아나 중국과 일본에서 베스트셀러가 되기도 했다.
300년 뒤 그녀의 혼을 닮은 여자들은 나혜석도 되고 전혜린도 되고 고정희도 되었으며 버지니아 울프도 되고 애거사 크리스티도 되고 심지어 조앤 롤링도 되어 돈벼락을 맞고 세상의 찬사를 받나 싶더니, 이젠 대부분의 계집애들이 같은 동네 출신인 현모양처 신사임당 할머니 말고 멜랑콜리하고 관능적인 허난설헌을 따라 점점 더 제멋대로 삶을 꾸릴 작당을 하고 있다. 존재의 평화 혹은 평등을 꿈꾸던 아름답고 매혹적인 여성 작가로 다시 태어나는 허난설헌과 그녀의 동생 허균의 분방하고 진취적인 혼을 기리는 사람들은 최근 이 오누이의 생가, 아름다운 강릉의 경포호반, 솔밭을 끼고 위치한 풍취 그윽한 고옥 주변에서 역사상 각별했던 두 사람을 흠모하는 축제를 가을마다 한 차례씩 벌이고 있다.
조선 초경제도 기록한 이사벨라 비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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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구인의 시각치고 조선 후기 풍속도를 덜 혐오스레 그려낸 <조선과 그녀의 이웃들>의 저자 이사벨라 비숍은 1831년 태어나 1904년 세상을 떠났으니, 절정기 대영제국의 전설적 주인공 빅토리아 여왕의 64년 통치 시기를 꼬박 산 셈이다. 당시 부상하던 중산층의 ‘행복한 현모양처’ 모델과 동떨어진 삶을 부추긴 그녀 아버지는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을 신봉하던 목사님이라, 어둠에 잠긴 세상을 복음의 빛으로 구원하려는 열망으로 신체 허약에 시달리던 스물 갓 넘은 딸을 이교도들의 땅으로 떠나보냈으나 위기를 기회로 삼은 그녀, 100년 먼저 태어난 셈치고 온 지구를 헤집고 돌아다녔다.
먼저 간 곳은 북미 대륙, 홀로 떠난 십자군 전쟁에서 다양한 정보를 모아왔으나 부친은 곧 세상을 떠나고, 이를 정리해낸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어 생계 해결에 큰 도움이 되었다. 이후에도 역마살은 오스트레일리아와 뉴질랜드를 거쳐 미국의 황야와 로키산맥으로 그녀를 이끌었고, 마흔 넘어 결혼한 열살 아래 의사 남편 또한 신앙심 돈독한 크리스천으로 험난한 여정이 오히려 아내의 체력을 지켜준다 믿고, 그녀를 따라 의료 선교의 길을 떠나길 희망했지만 곧 세상을 뜨고 말았다.
슬픔과의 이별 겸 다시 길을 떠난 그녀, 터키와 쿠르디스탄, 페르시아와 티베트를 거쳐 일본과 말레이반도, 중국과 러시아 특히 만주에서 시베리아까지 떠돌다 1894년 예순 넘은 나이로 조선반도에도 발을 들였다. 이후 1897년까지 네 차례 한국을 방문했고 다 합해 1년 남짓 전국을 누비며 명성황후와 고종을 비롯해 한국인 친구를 여럿 만드는 한편 동학운동과 청일전쟁, 갑오경장과 을미사변 등 열강들의 세력다툼에 신음하던 슬픈 왕국의 여러 면모를 지켜보고 기록했다. 거기 등장한 다음 정경은, 사극 작가들이 신나게 활용해도 좋을 듯하다.
“도성에는 신기한 제도가 실시되고 있었다. 저녁 8시면 큰 종이 울려 남자들에겐 귀가할 시간을, 여자들에겐 외출해 스스로 즐기고 친구들도 방문할 수 있는 시간임을 알려주었다. 거리에서 남자들을 사라지게 만드는 이 제도는 폐지된 적도 몇번 있지만, 그러면 사고가 발생해 더욱 강력하게 시행되었다. 내가 도착했을 때, 깜깜한 길에 등불 들고 길을 밝히는 몸종을 대동한 여인들이 길을 메운 진기한 풍경을 볼 수 있었다. …자정이 되면 다시 종이 울리는데, 이때 여자들은 집에 돌아가고 남자들은 다시 외출의 자유를 누린다. 한 귀부인은 내게, 자기는 아직 한번도 한낮의 한양 거리를 구경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다양한 문명권을 헤매며 여섯권의 방대한 지리지를 완성한, 빅토리아 시대 보통 여자들의 꿈과 모험을 대신 실현하고 찬사를 받던 그녀. 조선시대 초경(初更)제도의 기록을 통해 두려울 일 없는 밤, ‘피도 눈물도 흘릴 일 없는 밤’의 연원까지 전해준 할머니 이사벨라 비숍에게 21세기 한반도 여자들 또한 고마움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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