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만원을 200만원으로 늘려 쓰는 법,
자연이 알려줬죠” 지리산의 부부 파수꾼, 나무꾼과 햇살
칼럼니스트 김서령씨가 새로운 길을 개척한 이들의 인생과 철학을 세밀하게 들여다보는 인터뷰 연재를 시작한다. 첫 번째 주인공은 지리산에서 자급자족하며 네 아이를 키우는 ‘인텔리 부부’ 나무꾼과 햇살이다.<편집자 주>
지리산에 나무꾼과 햇살이 산다고 했다. 나무해서 불 때고 직접 농사지은 것만 먹으면서 최소한의 소비를 실천하는 부부라고 했다. 그러면서 아이를 넷이나 낳아 기르고 있다는 소문이었다. 아빠인 나무꾼이 소문난 수재로 서울대를 졸업하고 해외 유학까지 다녀왔다는 얘기에 더욱 호기심이 생긴 것도 사실이었다.
경남 함양군 마천면은 서울에서 아주 멀지는 않았다. 세 시간 반을 달려가니 눈앞에 천왕봉이 우뚝 서 있었다. 발 아래로는 집채 같은 바위가 굴러다니고 그 사이로 도랑물이 돌돌 흘렀다. 대숲과 감나무와 늙은 호두나무 위로 몸이 날랜 물까치들이 좌르륵 날아다녔다. 우린 자연 앞에 절로 탄성을 토하는 피를 가지고 있다. 눈앞을 가로막는 철근 콘크리트 빌딩 대신 천왕봉과 고목과 바윗돌을 보자 내게서도 한숨 같은 탄성이 절로 흘러나왔다.
무슨 이야기부터 해야 할지 모르겠다. 산속에 숨어 자급자족하는 젊은 부부의 삶을 예찬하려는 것은 내 의도가 아니다. 그들의 희로애락을 들여다보고 도시적 삶과의 대차대조표를 만들어보겠다는 쪽이랄까. 그 또한 한두 차례 피상적인 관찰로 가능할 일은 아니다.
내 의도의 최소한은 ‘다른 삶’을 선택한 이들과 대화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누구든 독자적이고 유일무이한 삶을 살지 않으랴마는 방금 말한 ‘다른 삶’이란 우리 시대 거대 시스템 안에 들어 있지 않은 삶이다. 시스템이 절로 굴러가는 컨베이어 벨트라면 다른 삶이란 스스로의 힘으로 거기서 내려서서 새 길을 개척한 쪽이다. 남이 다 가는 길을 마다하자면 뜻과 결단과 용기가 필요했을 것이다. 나는 바로 그 뜻에 주목하고 싶었다.
햇살네 집에서 아침을 먹었다. 식탁에선 천왕봉이 마주 보였고 눈을 아래로 깔면 겨울인데도 뜰에 자라는 푸른 푸성귀가 내다보였다. 대단한 메뉴일 건 아무것도 없다. 감자와 양파 넣은 된장국, 무생채, 배춧잎을 큼직하게 썰어 부친 배추전, 깻잎절임, 그리고 망초나물! 밥은 쌀에 밀과 보리, 콩을 고루 섞은 것이었다. 이 메뉴는 지난해 이 집 농사의 내용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밥상에 오른 내용물은 모조리 이집 부부가 직접 기르거나 뜯어온 것들뿐이다. 푸드 마일리지 100m 미만, 글자그대로 자급자족이다.
식생활에 돈 들이지 않고 사는 것, 이것이 나무꾼 햇살 부부의 시골살이 수칙 제 1조였다. ‘시골 가서 농사짓지 않고 살기’를 실천하거나 매실진액, 녹차, 된장을 만들면서 지리산에 깃들여 사는 많은 이를 봐왔다. 그들에 비하면 나무꾼 햇살 부부의 삶은 보다 근본주의에 가깝다.
밥상 내용을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자. 먼저 된장! 햇살은 서른네 살밖에 안 된 주부다. 첫아이 맑음이 아홉 살이니 지리산에 내려와 나무꾼과 살림을 합한 지 열 해째가 된다. 그 후로 된장을 직접 담근다. 심지어 서울 사는 친정어머니, 부산 사는 시어머니께 된장을 보내드리기까지 한다. 제 별칭 햇살처럼 표정이 환하고 집 앞 감나무 가지에 잔뜩 내려와 앉은 물까치처럼 몸이 재고 연신 즐겁게 재잘재잘 이야기하는 엄마이고 선생님이고 농부다.
된장을 담그자면 콩이 필요하다. 콩 농사는 물론 나무꾼이 직접 지었다. 된장국에 들어간 감자, 양파도 물론 직접 키운 것이다. 무생채 한 무도 농사를 지었을 테고, 배추전을 부친 배추, 깻잎김치를 담근 들깨도 직접 심고 거뒀다는 얘기다. 아니 무생채에는 고춧가루와 마늘과 참기름도 들어가니 고추, 마늘, 깨 농사도 고루 지었을 것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쌀이다. 고추와 무, 배추는 아마추어라도 밭이랑에 대충 뿌려 거둔다 해도 벼농사는 본격 농사꾼이 아니면 손대기 어려웠을 텐데 나무꾼은 처음부터 쌀과 밀, 보리 같은 주곡을 중심으로 농사를 시작했다.
그릇을 정갈하게 비우는 아이들
이 집 밥상에 올라온 음식은 한 톨 한 잎이 모조리 봄부터 가을까지 정성의 결실이다. 사 먹는 곡식과 채소인들 정성이 들지 않았으랴만 어디서 누가 지은 것인지도 모르는 음식과 직접 씨 뿌려 싹 나기를 기다렸다 풀 뽑고 거름 줘서 거둔 음식은 가치가 천양지차다.
이 집 밥상을 관찰하면 그건 절로 깨달게 된다. 첫아이 맑음(9)과 둘째 노을(7), 셋째 연두(4)와 막내 찬유(2)! 네 아이가 밥 먹는 양을 보면 도시 아이들 밥상에선 느끼지 못하는 진지함이 있다. 각자 그릇에 엄마가 밥을 퍼주면 넷 다 아주 열중해서 밥을 먹는다. 투정도 없고 소란도 없다. 가끔 ‘맛있어요!’라는 감탄만 나온다.
맑음과 노을과 연두의 밥 먹은 그릇을 보고 나는 천왕봉을 처음 볼 때보다 더 크게 신음한다. 아아. 이것이로구나! 나무꾼이 굳이 농사를 직접 짓는 까닭이 여기 있구나! 단 한 톨의 밥알도 그릇에 묻어 있지 않았다. 강제된 교육에 의해서는 이럴 수가 없을 것이다. 먹을 것이 귀하고 소중하다는 것이 체득됐을 때만이 이런 장면이 가능할 것이다.
햇살과 나무꾼이 한때 환경운동단체 ‘에코붓다’ 소속 활동가였다는 말이 새삼 떠올랐다. 네 살 꼬마가 수도하는 승려처럼 제 먹은 그릇을 정갈하게 비워내는 모양은 낯설고 신통했다. 두 살 찬유 또한 다르지 않았다. 셋은 밥그릇을 싱크대 안으로 운반하는데 찬유는 아직 숟가락질이 서툴러 부스러기를 조금 흘렸을 뿐이고 싱크대까지 가져가는데 시간이 좀 더 걸릴 뿐이다.
나무꾼은 좀체 입을 열지 않는다. 자신의 얘기는 되도록 빼달라고 한다. 보이는 그대로의 삶이지 더 이상 숨은 철학이 있을 리 없다고 손사래를 친다.
우리(사진기자와 나)를 그 마을에 데려다준 택시기사가 이렇게 말했다.
“취재하러 간다꼬예? 저렇게 많이 배운 사람이 농사짓고 사는 것은 장려할 일이 아니지예. 배운 사람은 배운 사람대로 도시에서 할 일이 따로 있는 거잖아예. 큰 공부해놓고 농사지으면 학비가 아깝잖아예.”
그 말에 마땅한 대답을 찾지 못했는데 아이들의 밥상을 보고 있자니 답이 절로 정리된다. 머릿속의 생각을 제 삶 속에서 직접 실천하겠다는 것이다. 백번 선언하고 구호를 외치는 것보다 한걸음 실천이 시급하다는 것을 말없이 보여주려는 것이다. 논농사가 수월치 않음에도 고집스럽게 논을 부쳐 스스로 만들어낸 식량으로 아이를 키우겠다는 것이 나무꾼의 철학임을 나는 어렵지 않게 납득한다.
돌배나무의 선물
우린 지금 음식이 지천인 시대에 살고 있다. 한 해 버려지는 음식쓰레기가 15조원 상당이라던가. 음식이 귀하지 않다는 것은 그걸 기른 흙에 대한 존귀함을 잃어버렸다는 뜻이다. 흙은 자연이다. 자연을 소홀히 여기는 것이 인간생존의 토대를 무너뜨리는 일임을 우리는 뒤늦게 허겁지겁 깨닫고 있다. 인류는 지금 커다란 전환점에 놓여 있다. 돈을 지급하고 탄소배출권을 사지 않으면 탄소를 함부로 내뿜을 수도 없는 지점에 당도했다. 가장 편리하고 진보적인 문명기인 줄 알았던 이 시대가 오히려 가장 어리석고 파괴적일 수도 있다는 자각은 당황스럽다.
우린 날마다 화학비료, 제초제, 방부제, 착색료, 조미료, 방사선이 범벅된 밥상 앞에 앉게 됐다. 이런 식품을 공급하는 거대 곡물회사와 식품회사, 유통회사에 피땀 흘려 번 돈을 갖다 바칠 수밖에 없는 시스템이다. 이건 목숨의 존엄에 대한 모독이다. 그러나 개인의 힘으론 좀체 그 사슬을 끊기도 어렵다.
나무꾼이 비료 없이 퇴비만 줘서 키운 무는 크기가 그저 갓난아기 팔뚝만했다. 서울서 씨름선수 장딴지만한 무만 보던 내 눈에 그건 미니어처처럼 장난스러워 보였다. 그러나 맛은 기가 막혔다. 달고 야물고 향긋했다. 그건 배추도 마늘도 깨도 마찬가지였다.
“우린 제초제 안 쓰고 멀칭도 안 해요.”(나무꾼)
“멀칭이 뭐예요?”(나)
“비닐 씌우는 농법이지요. 그것 하면 김매는 품이 안 들지만 잡초 뽑기 싫으면 나는 대로 그냥 내버려둬요.”(나무꾼)
“인제 한 10년 했으니 베테랑 농부가 됐나요?”(나)
“아니요. 아직 얼치기예요. 농사는 어릴 때부터 몸에 배지 않으면 진짜 꾼이 되긴 힘들어요.”(나무꾼)
햇살네 집 앞엔 늙은 거목이 여러 그루 있다. 아무렇게나 솟은 품이 누가 일부러 심은 게 아니라 어디선가 씨가 날아와 절로 솟아난 것 같다. 물론 햇살 가족이 이 마을에 들어오기 전부터 뿌리박고 자라던 놈들이다. 뽕나무는 여름에 오디를 무진장 쏟아내고 돌배나무는 가을에 탱자만한 열매를 비처럼 뿌려준다.
“오디는 한번 털면 20㎏는 족히 떨어져요. 한 해에 대여섯 번 하니까 아마 100㎏쯤 수확할 걸요.”
아이들의 좋은 간식이지만 다 먹을 순 없으니까 햇살은 가마솥에 불 때서 오디잼을 만든다. 그걸 알고 몇 해 전부터 여기저기 친구들이 이 야생 오디잼을 주문해온다.
돌배도 마찬가지다. 그냥 먹긴 알이 잘지만 돌배열매를 잔뜩 주워 읍내의 즙 내리는 곳에 가져다주면 겨우내 아이들 마실 음료가 된다. 야생열매이니 과수원 배보다 효능이 좋을 것도 확실하다.
“돌배를 줍자 하면 아이들이 무척 좋아해요. 큰아이 현승(맑음)이가 동생들 데리고 단숨에 두 박스쯤은 거뜬히 주워요. 물론 찬유는 두 개 주워 넣고 세 개는 밖으로 버리지만….” 돌배나무 진액은 정말 달콤했다. 따로 노동하지 않고도 절로 자연이 내미는 선물을 아이들과 함께 받아 안는 것이 지금 햇살이 지리산에서 누리는 특혜다. 게다가 돌배나무엔 그물 침대를 매어놓고 아이들이 학교에서 돌아오는 오후엔 거기 누워 놀 수 있다.
“햇살은 아이들이 어떤 사람이 되기를 바라나요?”(나)
“자기가 좋아하는 일 하면서 행복한 사람이요.”(햇살)
“도시 아이들처럼 호된 공부를 시키지 않는 게 불안하진 않나요?”(나)
“첨엔 그런 생각이 아주 없진 않았지요. 그러나 언젠가부터 여기서 우리처럼 농사지으며 살아도 참 좋겠구나 싶었어요. 그게 제겐 큰 전환이었어요. 이후로 아이들과 뱀사골로, 백무동계곡으로, 칠선계곡으로 놀러 다니는 게 아주 편안해졌거든요.”(햇살)
또 하나 햇살네 집에서 처음 먹어본 것은 개망초나물이다. 취나물 못지않은 맛이었다. 개망초는 묵은 땅에 지천으로 나는 풀이다.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잡초인 줄 알았더니 이게 말렸다가 삶아 무쳐 먹으면 맛이 기막힌 야생나물이란다.
“뱀사골 환영가든에 가면 나물 박사가 살아요. 여기 내려와서 그 언니에게 산나물과 들나물 조리법을 다 배웠어요. 동네 할머니들 나물바구니 뒤에서 이렇게 들여다보면서도 배우고!”
토종 씨앗에서 발굴하는 이야기
그러나 햇살에게 가장 좋은 나물 교과서는 ‘쉽게 찾는 우리 나물’이란 책이었다.
“일단 거기 나오는 풀을 다 뜯어서 조리해봤어요. 성공한 게 광대나물과 개망초이고, 지칭개나물이란 건 정말 너무 쓰던데요.”
산천에 온통 풀들이 돋는 5월이면 엄마 햇살은 아이 넷을 데리고 들로 산으로 나간다. 먹을 수 있는 풀이 나물이다. 그걸 뜯고 캐서 갈무리한다. 아이들에게 개망초 줄기를 한번에 100개씩 뜯어오라고 시키면 두 살 찬유까지 질세라 뒤뚱뒤뚱 끼어든다. 마른 나물 한 자루 갈무리하기는 일도 아니다. 그냥 아이들과 더불어 즐기는 놀이가 된다. 쑥을 뜯어 전을 부치고 아카시아 꽃으로 튀김을 하고 오디를 따고 산딸기를 따고! 봄부터 가을까지 산과 들엔 먹을 것이 지천이다.
나무꾼과 햇살은 집 가까운 밭에 온갖 종류의 씨앗을 다 심는다. 주로 사라져가는 재래종 씨앗들이다. 먼 데 가서 일부러 종자도 구해오고 책을 찾아 탐구도 한다.
“상주에 사는 박명희 선생이 토종 씨앗 방면에선 제 스승이에요. 흑보리와 찰보리도 심었더니 이 동네 어른들이 이렇게 얼룩진 보리는 처음 보신대요. 파란 빛깔 나는 청태도 길렀는데 청태로 만든 두유는 맛이 특별하더라고요.”
나무꾼이 처음에 “우리는 돈 안 되는 농사를 다양하게 짓지요” 하더니 그게 이 말인가 보다. 지난 10년간 사라진 씨앗을 뿌려본 것이 100여 종에 가깝다.
“씨앗이 하나 발견되면 거기 이야기가 하나 따라와요. 추수하면 그걸로 또 새로운 음식을 만들게 되잖아요. 그러면 음식 이야기가 또 하나 따라오지요. 그래서 우리 밭엔 온갖 이야기가 있어요. 아이들과 더불어 그걸 찾아내려고 해요. 토종 씨앗을 이어가는 것과 거기 담긴 이야기를 발굴해내는 것, 그게 시골 사는 사람들의 소명이라고 생각해요.”
지금 우리 땅에 심는 작물 대부분은 이듬해 씨를 받을 수 없는 종자다. 거대 곡물회사가 그렇게 조작해놓았다. 이제 힘없는 나라는 자신의 종자조차 가질 수 없게 됐다. 일본에서 고추종자를 팔지 않으면 우린 꼼짝없이 허연 백김치를 먹게 될 수도 있다는 소리다. 햇살 부부는 그래서 ‘이 농사를 지으면 어디에 쓸 거냐’ ‘양은 얼마나 할 거냐’를 다 제쳐두고 그때그때 씨 뿌려야 할 토종씨앗을 찾아 땅에 묻는다.
햇살네 집 곡간에는 지금 도시에선 볼 수 없는 온갖 알곡이 가득하다. 몸에 좋고 색도 고운 청태, 수수부꾸미 해먹을 찰수수, 입맛 없을 때 먹을 속푸리태, 피부에 좋다는 율무, 아프면 죽쒀 먹을 녹두, 생일떡에 올릴 이팥, 쫄깃쫄깃한 찰보리까지! 작은 밭을 쪼개고 쪼개 그런 잡곡들을 심어 거둬놓고 부부는 뿌듯하게 마주 본다.
“다 살아지던데요”
햇살네 집은 자그마하다. 낡은 산골집을 조금만 수리해서 산다. 영화 ‘집으로’에 나오는 것보다 조금 더 나은 집이라고 햇살이 미리 말했더랬다. 거기다 여섯 식구가 모여 사니 옹기종기 빼곡하다. 벗어놓은 옷이 많으니 벽에는 자그만 셔츠와 가방과 외투들이 가득 걸려 있고 이런저런 주머니엔 아이들 양말과 장갑과 머리장식들이 잔뜩 들어 있다. 장롱 안에 착착 개어 넣는 살림이 아니고 횃대에 걸쳐뒀다가 각자 필요한 사람이 찾아 입는 방식이다.
내가 나무꾼과 햇살에게 묻고 싶은 것은 크게 세 가지였다. 첫째, 왜 이런 방식의 삶을 선택했느냐? 둘째, 무얼 먹고 사느냐? 셋째, 이곳 삶의 무엇이 좋고 무엇이 어려우냐. 혹 그 목록을 말해줄 수 있느냐? 그러나 두 번째 질문이 대뜸 먼저 튀어나왔다.
“도대체 뭘 먹고 살아요?”
“다 살아지던데요. 하하.”(나무꾼)
“저기 저 나무에서 떨어지는 오디로 잼을 만들면 두 달은 먹고살 수 있어요. 호호.”(햇살)
먹고산다는 건 단순히 식(食)을 말하는 게 아니라 의식주 전체를 말하는 것임은 물론이다. 월급쟁이는 월급으로 먹고살고 자영업자는 뭔가를 만들고 팔아서 먹고산다면 농사꾼은 땅에서 나온 산물로 먹고살아야 한다. 이게 음식뿐이라면 문제없겠으나 옷과 집과 학비와 땔감을 해결해야 한다는 것이 문제다. 그뿐 아니라 21세기를 사는 한국인은 전기와 전화와 자동차에 또 돈을 들여야 한다. 그것이 혼자 짓는 농사에서 다 나오나? 내 물음의 뜻은 그것이었다.
나무꾼은 십수 년 전 뜻을 세워 경남 함양군 마천면으로 들어갈 때 산 아래의 논 1000여 평(3300m2)을 샀다. 당시 가격이 평당 1만원 정도였다 한다. 약 안 치고 농사짓기 적당한 면적이 일인당 500평이라고들 했고 가진 돈에 맞춘 크기이기도 했다. 그러나 들어오고 보니 산골짝에 노는 땅이 흔전만전이었다. 그게 아까워 지금은 남의 땅도 1000여 평 더 얻어 농사를 지으니 2000평 농사에서 여섯 식구 먹을 식량과 반찬은 충분히 나온다. 그러나 내놓고 팔 만큼 충분치는 않다. 오히려 돈으로 바꿀 수 있는 건 다른 데 있었다.
생활비는 한 달 가장 적게 쓸 때가 30만원쯤이고 대개 60만~70만원이면 가능하다. 아무리 많아도 100만원을 넘기지는 않는다.
“우리는 20만원을 200만원으로 늘려서 써요. 지리산이 그 방법을 알려줬어요. 우리 20만원이 도시 사람들 200만원보다 더 풍요로울지도 몰라요.”
그러나 그게 어디 쉬운 일일까. 아내 햇살은 햇살처럼 웃지만 남편 나무꾼은 옛이야기 속의 나무꾼처럼 순박할 수만은 없어 보인다. 산촌이나 도시나 경제에서 온전히 자유로울 수 있는 삶은 없다.
먹을 것은 직접 생산하고 아이 옷과 신발은 주로 얻어 입히고 어른 옷은 안 사거나 정 필요하면 만들어 입는 쪽을 택하고 난방은 나무꾼이 해오는 나무로 충당한다.
의식주 해결은 가뿐하지만 ‘자발적 가난’이 충만과 자족만을 안겨줄 수는 없겠지. 그러나 둘은 의연하다. 햇살이 함양읍내 도서관으로 아이교육에 관한 강의를 들으러 갔을 때 나무꾼과 나는 상림 숲 속에 앉아 찬유와 연두와 이웃아이 둘이 볕 아래 어린 토끼들처럼 뛰노는 것을 지켜봤다. 그는 미국 버팔로 쪽에서 4년 남짓 인지심리학을 공부했으나 박사학위를 받기 직전 귀국, 지리산의 빈 절간으로 내려왔다고 한다.
이건 실험인가요? 가족과 함께 하는 실험? 그 질문을 나는 안으로 삼켰다. 헛된 물음이란 것을 스스로 알았기 때문이다. “대단한 철학이 아니라 그저 삶과 자연과 생명에 대한 깊은 애정일 뿐이다”라는 나무꾼의 대답을 이미 수차 들었기 때문이다.
“오디가 두 달 해결해주고 나무꾼이 산야초로 담가 만드는 효소가 또 두 달을 해결해줘요. 들살이 오는 아이들이 또한 서너 달 먹을 것을 갖다 주고!”
도시 아이들의 산골 체험
들살이란 도시 아이들의 산골체험이다. 햇살은 제 아이들하고만 들로 산으로 놀러 다니며 먹을 것을 뜯는 경험이 아까워 ‘들살이’라는 것을 제안했다. 누구든 도시에 사는 아이들이 햇살네 들살이를 신청하면 이 집 아이들의 들놀이에 동참할 수 있다. 초등학교 3학년 맑음과 1학년 노을, 네 살 연두의 또래들이라면 더더욱 좋다.
요즘엔 법에서 농촌교류학습을 인정해 석 달 이하라면 전학 오지 않고도 아이들이 산골체험을 할 수 있게 제도적 뒷받침이 돼 있다. 물론 아예 이 마을 마천초등학교로 전학 와서 한 학기씩 산골체험을 하고 가는 이들도 간혹 있다. 2박3일짜리 짧은 들살이 프로그램도 만들어뒀고 여름방학과 겨울방학엔 1주일짜리 캠프도 운영한다.
산과 들에서 아이들끼리 어울려 뒹구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공부라고 나무꾼과 햇살은 믿는다. 그 아이들을 먹이고 재우고 나물 뜯고 땔감 구하러 데리고 다니는 것이 그들이 지리산에 깃들여 살며 후세를 위해 기꺼이 맡은 일이다.
햇살은 서울에서 자랐지만 자연과 어울려 사는 삶을 동경하던 처녀였다. 갓 대학을 졸업하던 2001년 굳이 일본에 가서 그곳의 산촌유학 프로그램을 견학하고 왔다. 그때 보고 배운 것이 지금 현실화되고 있다. 나무꾼은 묵묵한 후원자다. 아니 햇살의 꿈을 실현해줄 남자로 해발 500m 지리산 어름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인지심리학’이란 나무꾼의 전공이 아이들의 들살이와 산골유학 프로그램에 보이지 않는 저력이 된다.
“많을 때는 여덟 명이 온 적도 있고 적을 때는 한두 명이 오기도 해요. 도시에서만 자라는 아이들이 농촌과 자연을 체험한다는 것은 아주 중요한 의미예요. 숲 속에서 먹을 수 있는 풀과 열매를 골라내고 제가 주워온 나무로 난방을 하고 제가 뜯어온 재료로 음식을 만들어 먹어보고…. 그런 경험은 어떤 환경운동보다 중요해요. 자신에게 필요한 것을 스스로 찾아내고 해결하는 것은 아이들에게 큰 기쁨이죠. 두 살짜리 우리 찬유도 배추 한 포기를 들고 오겠다고 낑낑댄다니까요. 나이에 맞는 일을 시키기만 하면 아이들은 일하는 걸 굉장히 기뻐하거든요.”
들살이는 놀면서 일하는 공부다. 도시에선 좀체 경험하기 어려운 방식일 뿐!
“자연과 내가 별개의 존재가 아니라 사람이 즉 자연이라는 건 어릴 때 몸으로 느끼는 게 최고거든요. 요즘은 산골유학에 관심 있는 활동가가 많아졌어요. 우리 집은 아이가 여럿이라서 저희끼리 맡겨놔도 형이 되고 아우가 돼서 아주 잘해요.”
실제로 네 살 연두는 두 살 찬유를 살뜰히 돌본다. 동화책 읽어주는 시늉도 하고 의젓하게 콧물도 닦아주고 보채면 안아줄 줄도 안다. 또래 형제들이 함께 자라면 절로 배울 수 있는 것을 아이가 한둘뿐인 요즘은 놓치는 경우가 많다. 배려하기, 나누기, 보살피기, 책임지기를 생활 속에서 숨쉬듯 배우지 않고 의도적으로 따로 떼어내서 가르친다는 것은 얼마나 힘든 일인가.
지난 8년간 햇살네 집을 다녀간 아이는 60명 정도 된다. 한번 왔던 아이들이 다시 오는 경우가 많아 다들 한가족이 되었다. 집 옆에 ‘큰엄마집’이라는 빈 집이 있어 사람 수가 많으면 거기 묵는다. 한달 25만원이면 부모와 아이가 함께 그 집에 머물 수 있다고 한다. 햇살이 만든 가을 들살이 프로그램을 들여다봤더니 이렇게 적혀 있다.
● 놀이거리: 논으로 가는 농로를 따라 걷습니다. 가을열매들의 맛을 보기도 하고 손에 들꽃을 꺾어보기도 하고 묏등에서 미끄럼도 타며
가을볕을 온몸에 받지요. 마을 어르신들 일하는 거 거들기도하고 구경도 합니다. 마을 이곳저곳에 같이 사는 집짐승들 밥도 주고 원하는
만큼 짐승들을 바라봅니다.
● 살림살이: 햇살네 밭일을 거듭니다. 먹거리를 마련하기도 하고 못다 한 콩타작도 돕습니다. 봄에 오디잼 모둠 아이들이 심고 간 고구마를
거둘 생각입니다. 해질 무렵에는 나무하러 갑니다. 굵은 나무는 아니지만 아이들이 들고 올 만한 잔가지들 솔잎들 솔방울들을 모아 밤새
방을 따뜻하게 데울 땔감을 직접 마련합니다. 집에 돌아와서 그걸로 불을 직접 땝니다.
불 때기 예찬
나무꾼은 농사가 본업이지만 못지않게 큰일은 산에서 땔나무를 해 오는 일이다. 나무하고 장작 패고 군불 때는 것을 특별히 좋아해서 닉네임도 나무꾼이다. 창원마을은 해발 500m에 위치해 있다. 여름에 서늘한 대신 겨울이 길다. 아궁이에 불 지피는 날이 연중 다섯 달은 된다는 의미다. 산골살이에서 난방을 기름에 의존할 수는 없으니 당연히 나무를 땐다. 이번 취재길에 나도 ‘큰엄마집’에서 묵었다. 툇마루에 앉으면 천왕봉이 코앞에 다가오고 집집마다 오래된 돌담을 둘러친 건 창원마을 어디나 마찬가지다. 해가 빨리 지고 겨울이 길다지만 그쯤은 감수하겠다는 각오가 있었으니 그 옛날 이곳에 마을이 형성됐으리라. 햇살네 집에 묵는 손(客)들은 예외 없이 제 손으로 아궁이에 불을 때야 한다. 아홉 살 현승이가 능숙하게 불 때는 시범을 보여준다. 종이에 불을 붙여 자잘한 회초리 속으로 들이밀고 입김을 두어 번 불어주면 금방 불이 활활 붙는다. 그 위에 굵은 나무를 올리면 끝!
“좋은 장작을 때면 자연스레 불길도 좋아져요. 좋은 땔감이 아니라도 좋은 기분으로 불을 때면 이상하게 불길이 잘 올라요. 게다가 좋은 장작을 좋은 기분으로 때는 날은 불길이 말할 수 없이 평화롭게 타오르지요.”
나무꾼의 불길 예찬이다. 그게 곧 해탈이라는 듯한 어투다. 타오르는 불길을 바라보는 것만으로 충만과 고요를 얻을 수 있다는 건 나 또한 일찍이 경험했다. 불 때기는 일종의 기도다. 그것이 경건하고 완벽한 시간임을 아무리 나이가 어려도 느낄 수 있다. 아이 때부터 그런 불길을 바라보고 자란다는 것은 웬만한 도서관 하나에 견줄 만한 지혜와 내공을 얻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지리산 둘레길
그런 창원마을에 최근 서울사람이 넘쳐났다. 강호동이 출연하는 TV 예능 프로그램에 지리산 둘레길이 나온 직후엔 하루 7000~8000명의 관광객이 마을 앞에 쏟아지기도 했다.
햇살과 나무꾼의 집에는 텔레비전이 없다. 그러나 ‘아마존의 눈물’이란 프로그램은 친구 집에 가서 일부러 시청했다. 점점 문명에 밀려 설자리를 잃어가는 조에족 이야기가 남의 일 같지 않아서였다. “당신들의 개발 탐욕이 우리를 죽이고 있습니다”라는 추장의 절규가 한꺼번에 수만 명이 훑고 지나간 지리산의 절규 같았다. 그 부모들의 생각이 3학년 현승이에게 전해졌나 보다. 햇살네 집 식탁 옆 벽면에 이런 편지가 붙어 있었다.
안녕, 지리산아! 나는 마천초등학교에 다니는 강현승이야. 넌 우리한테 먹을 것을 주기도 하고 맑은 공기를 주지 근데 요즘 지리산 둘레길 때문에 힘들지. 사람들이 너에게 쓰레기를 버리고 산불을 내고 담배를 피우고 너는 정말 힘들지. 그 많은 사람들을 너는 정말 감당하기 힘들지. 그리고 사람들이 너를 깎고 호텔을 짓고 케이블카를 만들려고 하지. 우리 마을도 지리산 둘레길이 지나가는데 사람들이 산에다 쓰레기를 마구 버리고 가더라고. 나는 니가 되게 힘들 것 같아. 사람들은 너를 생명 없는 관광지로만 생각할 거야! 하지만 널 보호하려는 사람들도 많으니까 걱정 마. 우리식구들도 그 중 한 명이지. 그럼 지리산아, 안녕.
햇살은 도시에서 환경교육에 참여할 무렵 물을 아끼는 매뉴얼을 홍보하곤 했었다.
“변기 물통 안에 벽돌 하나씩을 넣자는 거였어요. 그렇게 아끼는 물의 양이 한 해 얼마라는 식이었죠. 물론 안하는 것보다야 낫겠지만 이런 방식은 참 왜소하고 공허하구나 싶었어요.”
지금 햇살네 집 화장실에선 오줌은 큰 물통에 받아서 썩히고 똥은 재를 퍼부어 따로 모은다. 잿간과 오줌통의 내용물은 썩혀서 밭에 거름으로 낸다. 흙이 곡식이 되고 곡식이 우리 몸을 매개로 똥이 되어 다시 흙으로 돌아가는 순환 사이클을 고스란히 실천한다. 이럴 때 인류는 비로소 지구와 공생관계를 유지할 수 있다.
“지구의 주민이 단지 인간만은 아니잖아요. 무기물을 포함한 모든 생명체가 지구에 소속돼 있어요. 우리는 카메라의 눈이나 상상력을 동원하지 않으면 지구를 볼 수가 없잖아요?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단지 우리 마을, 내가 발 딛고 선 땅 뿐이에요. 먼저 내가 발 딛고 선 땅을 보살피는 것이 시급해요. 지리산이 망가지는 것을 두고 속수무책으로 볼 수는 없어요.”
햇살네 가족의 현재 삶은 지구 사랑의 실천이다. 물론 그 실천은 쉽지 않다. 아이들 뺨은 찬바람에 트고 흔한 외식 한번 쉽지 않고 어지간히 공들이지 않으면 아이들 간식도 해먹일 수가 없다. 유별나게 군다는 마을 사람의 손가락질도 없다고는 할 수 없다. 마을 어른들과 친해지기 위해 햇살이 궁리해낸 것은 할머니 공부방이다. 농한기엔 글 모르는 할머니들이 햇살에게 공책을 들고 찾아온다.
“우리 공부방에 와서 공부한 할머니가 이번에 요양보호사 자격증을 땄어요. 처음에 이름 쓰기도 쑥스러워하시던 분들이 덧셈 뺄셈을 자유롭게 하시는 걸 지켜보면 얼마나 신이 나는지!”
그 결과 햇살이 찬유를 임신했을 때는 공부방 할머니들이 동시에 다같이 입덧을 했을 정도로 친숙해졌다. 엄마와 떨어져 사는 아이들을 위한 놀이방도 열었다. 숙제를 봐주고 간식을 먹이고 시험지 채점을 해준다.
“처음에는 학습을 도와주는 것인 줄 알았어요. 그런데 그게 아니었어요. 간식도 채점도 애정을 전달하는 방법이더라고요.”
자연에 대한 감각 일깨우기
잘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햇살네 가족은 우리에게 새삼 그런 질문을 던진다. 겨울 추위도 여름 더위도 아랑곳없이 일정한 온도가 유지되는 공간을 넉넉히 확보하는 것인가. 한겨울에 수박과 딸기를 원 없이 먹고 산해진미를 원 없이 즐기는 것인가. 명품의상과 장신구와 자동차로 으리번쩍 치장하는 것인가.
지난 세기 우리 삶은 산업과 문화뿐 아니라 일상 자체도 자연을 착취해서 이루어진 감이 있다. 더 많이 착취하는 것이 더 잘사는 법일 리는 없다. 삼라만상이 신성한 존재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 우리가 더 잘사는 법임은 분명해 보인다. 자연에 대한 감각을 일깨우고 신성함에 대한 감각을 회복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우리의 존엄도 덩달아 무너지게 돼 있다. 햇살은 지난 봄, 봄비 내리던 날 아이들을 데리고 이런 시를 썼다.
지난번 비는/ 풍게꽃 피라고 내리는 비 / 흰 민들레 꽃피라고 내리는 비// 이번 비는/ 돌배꽃 피라고 내리는 비/ 우리밭 강낭콩 싹 틔우라고 내리는 비// 어제 비는/ 두릅 새 순 내놓으라고 내리는 비/ 저 산 속 취나물 새순 쑥쑥 돋으라고 내리는 비// 아이들도 엄마 곁에서/ 비에 이름을 붙입니다.// 오늘 내린 가랑비는/ 우리 찬유 연두 노을 맑음이 쑥쑥 크라고 내리는 비
참! 오디와 효소와 들살이로 살고 난 나머지 넉 달은 무엇으로 사느냐고? 햇살의 대답은 ‘중개무역’이다. 동네할머니들이 생산한 곡식과 나물을 자신의 블로그(http://blog.naver.com/hieri/40108317529) 내 마을장터에 올리고 구매자가 나타나면 중개해준 후 약간의 수수료를 챙긴다. 참기름, 고춧가루, 호두, 고구마. 창원마을에서 생산한 농산물을 햇살 주변 사람들이 주문해 간다.
햇살은 정말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랄 지경이다.
“조용하게 살려고 내려왔는데 여기 와서 더 번잡해졌어요!”
● 1956년 경북 안동 출생
● 경북대 국문과 졸업
● 대구 중앙중 국어교사, 매일경제신문·샘이 깊은 물 객원기자
● 월간 ‘동서문학’ 신인상
● 저서 : ‘여자전’ ‘김서령의 家’ ‘삶은 천천히 태어난다’ 등
아이 넷 키우는 엄마가 어딜 가든 번잡하지 않을 수 있으랴. 나무꾼은 그런 아내를 빙그레 웃으며 바라본다. 그러면서 은근슬쩍 티 안 나게 돕는다. 나무꾼은 아이 넷이 동시에 무동을 타도 제 안의 고요를 잃지 않는 표정이지만 어쨌든 그들의 삶은 치열한 현재진행형이다. 앞으로 어떻게 변해갈지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 햇살의 이름은 김일복이고 햇살보다 열네 살 많은 나무꾼의 이름은 강남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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