軍史관련

김경한_불편한 삼국지_06

醉月 2014. 3. 31. 19:21

조자룡, 유비·제갈량에 왕따당했다

영웅호색이란 말은 조자룡에게 어울리지 않았다. 그는 불행히도 `색(色)`과 거리가 멀었다.


조자룡은 좀 특이한 성품의 소유자였다. 나 홀로 스타일이었다고나 할까. 늘 주변의 주류적 의견과는 다른 견해를 품었다. 그리고 자신이 옳다고 생각한 바를 직설적으로 표현하거나 행동으로 옮겼다. 사람들은 그를 강직하다 평했다. 심지어 유비와 제갈량조차도 강직한 성품으로 인해 그를 꺼리고 중용하지 않았다.

'삼국지연의'에서는 조자룡이 무적의 용사로 늘 유비를 수행하며 그를 보호하는 최측근 인물로 등장한다. 남자다운 용모에 직선적이고 시원시원한 성격을 지닌 가장 매력적인 캐릭터라고나 할까. 조자룡이 유비의 경호대장격인 아문장을 지냈으므로 그가 유비의 측근이 아니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의 역할은 어디까지나 무력을 바탕으로 유비를 지켜내는 일에 국한됐다. 조자룡이 의견을 낼 때마다 번번이 무시되거나 묵살됐다.

기주 상산국 출신인 조자룡은 처음부터 모든 사람이 다 원소를 추종하는 상황에서도 홀로 따르는 무리를 이끌고 유주의 공손찬에게 귀순했다. 공손찬조차도 어이없어 했다. 원소의 치하에서는 그의 객장이 된 유비를 위해 은밀히 ‘유 장군 *부곡’을 모집하는 역주행을 감행했다. 그의 이러한 독특한 성품이 유감없이 발휘된 것은 성도가 함락된 후 논공행상을 하는 자리에서였다. 유비의 장수들은 그 동안 고생을 보상받으려는 듯 욕심을 부렸다. 먼저 유장이 축적해 놓은 재화와 보물을 다 분배하고 나자 일부 인사들은 성도 성 안의 주택들, 성 밖의 장원들과 뽕나무 밭들까지도 접수해 여러 장수들에게 나누어 주자고 논의했다. 누구도 손해 볼 일이 없었으므로 대부분의 장수들은 이에 동조했다. 오로지 조자룡만이 나서서 반대했다.

"국가의 적이 다 평정되지 않았는데 지금 벌써 편안하기를 바라서는 아니 됩니다. 천하가 다 평정되면 각자 조상의 무덤이 있는 고향으로 돌아가서 원래의 자기 땅에서 농사를 짓고 살면 될 뿐입니다. 그동안 익주의 인민들이 무장 병력들에게 피해를 입어 왔으므로 밭과 집은 다 원주인을 찾아 돌려주어야 할 것입니다."

유비는 지당한 말이었으므로 그 말에 따랐다. 아마 내심 좋아하는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그 후 유비가 관우의 원수를 갚겠다고 동오 정벌군을 일으켰을 때, 아무도 나서서 반대하는 사람이 없었다. 심지어 제갈량조차도 입을 닫았다. 또 다시 조자룡이 총대를 맸다.

“나라의 적은 조조이지 손권이 아닙니다. 또 먼저 위를 멸하면 오는 스스로 복종할 것입니다. 조조는 비록 죽었지만 그의 아들 조비는 제위를 찬탈한 도적입니다. 마땅히 *중망에 따라 조속히 위를 도모해야 합니다. 위를 벌해 다스리라는 사명에 부응하지 않고 먼저 오와 싸움을 벌여서는 아니됩니다.”

그가 고집스럽게 반대했으므로 유비는 동오 정벌에 나서면서 조자룡을 데려가지 않았다. 조자룡이 가장 인기 있는 주인공이다 보니 그의 무훈도 심히 과장되어 있다. 어떤 아마추어의 분석에 따르면 가장 많은 1대1 전투를 벌이고, 가장 빠른 시간 내에 가장 높은 승률을 보인 장수가 바로 조자룡이라 한다. '삼국지연의'에 따르면 최강의 무사였던 셈이다.

조자룡이 온몸이 '담덩어리'란 칭찬을 받게 된 것은 조조와 유비와의 한중싸움 시, 그가 보여준 *공성계 때문이었다. 조자룡은 조조군의 식량운송을 차단하러 나갔던 황충을 구하러 갔다가 조조군에게 포위됐다. 조자룡은 격전 끝에 포위망을 뚫고 영채로 돌아온 후 성채의 문을 열어 제치고, 기치창검을 모두 눕혀 마치 빈 성처럼 보이게 했다. 조조의 대군은 매복이나 속임수가 있을까 두려워 곧바로 후퇴했다. 이를 보고 유비가 조자룡을 칭찬했다고 한다.

"자룡은 온 몸이 담덩어리구나!"
 
조자룡은 죽는 날까지 그 올곧음을 잃지 않았다. 기곡싸움에서 압도적인 조진의 대군에 밀려 패배하고 돌아온 후, 제갈량이 그의 공적을 기려 비단을 하사하려 하자 조자룡은 이를 거부했다. 패전했으므로 상을 받을 이유가 없다는 것이었다. 조자룡은 이 기곡의 싸움을 마지막으로 그 이듬해 숨을 거두었다. 필생의 소원이던 국가의 적을 제거하지 못한 채 말이다.

 

미인 헌납받자 “천하에 여자는 많소” 쿨하게 거절

 
중국 하북성에 자리한 조자룡 사당. 조자룡(맨 왼쪽) 인형이 유비·관우·장비와 함께 서 있다. 사진제공=홍은택


'삼국지연의'에는 조자룡(?~A.D 229)의 여자들에 대한 이야기는 거의 나오지 않는다. 평생 유비를 수행하고 다녔으므로 그와 관련된 여자 이야기들도 대부분 유비의 여자와 관련된 일화들일 뿐이었다. 조자룡이 당양·장판에서 감부인과 아두를 구해냈으며, 손부인으로부터 유비와 아두를 구해냈다는 이야기가 거의 전부이다. 조자룡에게 두 명의 아들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장가를 가기는 갔던 모양이다. 조자룡의 둘째 아들 조충은 후일 강유와 함께 농서에 출격했다가 전사했다.

조자룡 개인과 관련된 여자로는 조범의 형수 번씨가 유일하다. 그것도 꽤나 싱거운 이야기였다. 적벽대전에서 승리한 후 유비는 장강 이남의 땅을 할애받았다. 유비는 제갈량과 관우·장비·조운을 나누어 보내 강남의 네 개 군을 정벌하게 했다. 무릉태수 김선, 장사태수 한현, 계양태수 조범 등이 유비군의 위력에 굴복해 항복했다. 이때 유비는 조운에게 조범을 대신해 계양태수 직을 맡아보게 했다.

조범은 계양군 경내에 머물러 있으면서 조자룡을 미인계로 꾄 후 틈을 보아 다시 군을 되찾아 보려고 했다. 조범에게는 혼자된 형수 번씨가 있었는데 가히 경국지색이라 할 만한 미모였다. 조자룡이 그 때까지 부인이 없었으므로 조범이 번씨를 조운의 배필로 삼기를 원했다. 조자룡이 사양하며 말했다.

"경과 나는 서로 성이 같으니 경의 형은 바로 나의 형이오."
조자룡이 고사하고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그 때 어떤 사람이 이를 받아들이라고 권하자 조자룡이 말했다.

"조범이 궁박하여 항복했지만 그 마음을 예측할 수 없소. 천하에 여자는 많소."
마침내 조범의 형수를 취하지 않았다. 과연 조범은 이 일이 실패로 돌아가자 북쪽으로 도주했다. 참으로 조자룡은 멋대가리 없이 강직하기 만한 성품이었다. '삼국지연의'에서는 이 짤막한 일화를 바탕으로 제법 그럴듯한 로맨스를 지어냈다.

[거짓말 벗겨보기] 조자룡이 당양장판에서 홀로 백만대군을 상대했다고?

당양·장판에서 조조의 백만대군 사이를 무인지경처럼 달린 조자룡. 그가 수많은 조조의 용사들을 무찌르고 감부인과 아두를 구해냈다는 이야기는 다 후세 사람이 지어낸 허구이다. 조자룡은 백만대군과 싸울 수가 없었다. 조조가 끌고 내려온 병력이 5000명 밖에 안 되었으니까. 그것도 유비를 따라오던 형주의 사민들을 약탈하느라 흩어져 있는 상황이었다. 조자룡은 이미 승부가 끝난 혼란한 전장을 누비고 다니며 유비가 버리고 달아난 가족들을 찾아 헤맸을 뿐이었다. 이 과정에서 앞을 막는 조조의 기병 몇 명 정도를 해치웠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