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도오딧세이]청나라 강희제 백두산 야욕
1677년 강희제는 내대신 우무누에게 명하여 백두산(중국명 장백산)을 답사한 후 제사를 드리고 돌아오라고 명했다. 8살의 나이에 황제 자리에 오른 강희제가 재위 16년째를 맞이하던 해였다. 이때는 장성해 나이 24세였다. 청의 4대 임금인 강희제는 청조의 발상지로 전해오던 백두산에 관심이 많았다.
우무누는 오라 지방(현재의 길림)을 거쳐 백두산 천지에 도달했다. 이 조사 결과를 강희제에게 보고했다. 강희제는 우무누의 보고를 듣고 “장백산은 열조 발상의 성지로서 매우 중요한 곳이므로 장백산신에게 마땅히 봉호하고 제사를 받들어 나라가 보살핌을 받는 뜻을 밝히도록 하라”고 명하였다.
목극등 파견 국경 조사
간도연구가인 김득황 박사의 저서 <만주의 역사>에는 이 부분이 잘 나타나 있다. 당시 강희제는 삼번의 난을 완전히 평정한 후 영토 확장에 눈을 돌렸다. 이중 하나가 백두산 지역이었다. 1684년 강희제는 러추로 하여금 백두산을 탐사토록 했다. 하지만 러추 일행은 백두산을 탐사하는 데 실패했다. 러추 일행은 압록강 상류의 삼도구에서 측량하다가 강을 넘어온 조선 백성들을 향해 총을 쐈다. 조선 백성 역시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조선인 사냥꾼이 쏜 총에 러추가 맞아 부상했다. 1685년 청은 조선 정부에 문서를 보내 강력히 항의했다. 이때 붙잡힌 백성이 한득완이었다. 한득완과 그 무리들은 결국 사형당했다.
1710년 조선의 이만지 일행이 청인을 살해했을 때에도 청의 조정은 사건 조사를 빌미로 백두산을 탐사하고자 하였으나 조선 관리의 거부로 실패했다. 1712년에 청은 노골적으로 백두산 탐사의 야욕을 드러냈다. 청의 조정에서 공식적으로 문서를 보낸 것이다. 오라총관 목극등 일행을 보낼 것이니 협조해달라는 것이었다. 청의 야욕은 백두산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청은 이참에 조선과 청의 국경선을 긋기를 원했다. 청의 역사서인 <청사고>에서 1711년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타난다.
강희 50년 5월 황제가 대학사에게 유시하기를,
“장백산의 서쪽은 중국과 조선이 이미 압록강을 경계로 삼고 있는데 토문강은 장백산 동쪽 변방에서부터 동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가니 토문강의 서남쪽은 조선에 속하고 동북쪽은 중국에 속하여 역시 이 강으로 경계를 삼도록 하였다. 그러나 압록과 토문 두 강 사이의 지방은 그것이 어디에 속하는지를 확실히 알지 못한다”
라고 하였다. 이에 목극등을 그 곳에 파견하여 국경을 조사하게 했다.
<청사고> 1712년 구절에는 “이 해에 목극등이 장백산에 이르러, 조선 접반사 박권, 관찰사 이선부와 함께 소백산 위에 비석을 세웠다”고 나타나 있다. 청의 야욕은 오래전부터 시작됐고 청은 1711년부터 준비했다가 1712년 본격적으로 영토 긋기에 나섰다. <청사고> 구절을 보면 청은 토문강을 두만강으로 잘못 알고 있었다. 정확한 지리적 정보가 없었기 때문이다. 토문강은 원래 송화강으로 흘러들어가는 강이었다.
청은 자신의 발상지로 알려진 백두산 천지를 차지하려는 욕심에 눈이 멀었다. 국경을 넘은 조선 백성을 처벌한다는 구실로 백두산을 찾았지만 백두산 천지뿐 아니라 토문강에 대해서도 청은 자세히 알지 못했다. 그들은 결국 엉뚱한 곳에 정계비를 세우는 오류를 범하고 말았다.
[간도오딧세이]청나라 관리 다쳐 사형당한 조선 백성
1685년 숙종 3년 11월 때 일이다. 조선 백성 한득완이 한양 의금부로 끌려왔다. 한득완뿐만이 아니었다. 무리는 한득완을 포함해 25명이었다. 영의정·좌의정·우의정도 앉아 있었지만 청나라 칙사 2명도 앉아 이들이 죄상을 자백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청나라 칙사가 지켜보고 있기에 문초는 더욱 엄했다.
불과 1년 전에는 온성 유원진에 사는 한 백성이 나무를 하기 위해 두만강을 건넜다가 청나라 영고탑 수장에 사로잡혔다. 때문에 청나라 칙사가 조정으로 와서 사건을 조사했다. 이 백성은 사형에 처해졌고 변방 관리는 파직 또는 강등되는 처벌을 받았다.
청나라가 총 쏘자 조총으로 맞대응
한득완 무리는 삼을 캐기 위해 압록강을 건넜다. 이들은 조총으로 청나라 관리를 쏘았다. <숙종실록>에는 ‘상해’라고 표현했다. <만주의 역사>에는 이 사건을 ‘러추 사건’이라고 이름 붙였다. 청의 관리인 러추 일행이 측량을 하다 조선 백성의 범월을 막으려고 먼저 총을 쏘았다. 맞서던 조선인 사냥꾼이 쏜 총에 맞아 러추가 부상했다. 이 사건은 청나라에서 칙사를 파견함으로써 양국의 외교적 문제로 비화했다. 함경감사 이수언은 이 사건의 주동자들을 잡았다. <숙종실록>에는 청나라 칙사들이 한양에 도착하기 전에 함경감사를 비롯한 관리들이 미리 와서 기다려야 한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함경감사 이수언은 이 사건과 관련해 압록강과 두만강을 넘은 범월인을 샅샅이 뒤지면서 “변방의 백성들이 놀라고 소란하기를 마치 새가 도망가듯 물고기가 놀라듯 한다”고 보고했다.
형조판서 이사명이 이들을 문초하기 시작했다. 숙종이 범인의 우두머리에 대해 묻자, 형조판서 이사명은 “그의 사람됨은 매우 용맹스럽고 침착, 강인하여 입 밖에 나온 말은 다시 바꾸지 아니한다”고 말했다. 이날 <숙종실록> 기사에는 범월인 이름이 등장하지는 않았지만 이 사람은 한득완으로 추정된다. 숙종은 한편으로 변경 백성을 걱정했다. 이때 이사명은 “산삼의 채취를 금지함은 엄하게 단속하지 않을 수 없지만, 이 길이 끊어지고 나면 미천한 백성들의 살아갈 도리가 또한 어렵게 될 것이니 조정에서 이 점을 파악해 대비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청의 칙사가 한양에 오면서 범월인 25명에 대한 취조가 이뤄졌다. 칙사는 영의정·좌의정·우의정과 배석, 취조에 참여했다. 칙사는 인삼을 판매한 곳과 판매한 양을 범월인에게 물었다. 함경감사 이수언을 비롯한 관리들에게는 이들과 같이 공모하지는 않았는지, 이들을 고의로 풀어주었는지 따져 물었다.
그해 12월 1일 조선 백성 한득완에게 사형이 내려졌다. <숙종실록>에 세 차례 등장하는 한득완은 청나라의 실록인 <청사고>에도 나타난다. 강희 25년(1686년) “조선 백성인 한득완 등 28명이 강을 건너 산삼을 채취하고 창으로 회화여도관리(繪畵輿圖官吏)를 찔러 상처를 입혔다. 이를 상부에서 심리하여 우두머리에 해당하는 한득완 등 6명을 참형에 처하고 나머지는 죽음을 면하게 하여 등급을 감해 각각 집행하였다”고 나와 있다.
한득완은 과연 어떤 인물이었을까. <숙종실록>에 나타난 것처럼 용맹했고 강인했던 한득완은 삼을 캐기 위해 압록강을 넘은 무리를 이끌었다. <만주의 역사>에서 저자 김득황 박사는 “(청의 관리가) 조선인에게 총질하다가 얻어맞고 조선 국왕에게까지 책임을 추궁하여 조선인을 30여 명이나 극형에 처한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며 국가적인 참극이 아닐 수 없다”고 표현했다. 의금부에 잡혀 왔어도 꿋꿋한 태도를 보였던 조선 백성 한득완은 사형으로 역사에서 이슬처럼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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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산 정계비 부근. <초석 제공> |
1677년 강희제는 내대신 우무누에게 명하여 백두산(중국명 장백산)을 답사한 후 제사를 드리고 돌아오라고 명했다. 8살의 나이에 황제 자리에 오른 강희제가 재위 16년째를 맞이하던 해였다. 이때는 장성해 나이 24세였다. 청의 4대 임금인 강희제는 청조의 발상지로 전해오던 백두산에 관심이 많았다.
우무누는 오라 지방(현재의 길림)을 거쳐 백두산 천지에 도달했다. 이 조사 결과를 강희제에게 보고했다. 강희제는 우무누의 보고를 듣고 “장백산은 열조 발상의 성지로서 매우 중요한 곳이므로 장백산신에게 마땅히 봉호하고 제사를 받들어 나라가 보살핌을 받는 뜻을 밝히도록 하라”고 명하였다.
목극등 파견 국경 조사
간도연구가인 김득황 박사의 저서 <만주의 역사>에는 이 부분이 잘 나타나 있다. 당시 강희제는 삼번의 난을 완전히 평정한 후 영토 확장에 눈을 돌렸다. 이중 하나가 백두산 지역이었다. 1684년 강희제는 러추로 하여금 백두산을 탐사토록 했다. 하지만 러추 일행은 백두산을 탐사하는 데 실패했다. 러추 일행은 압록강 상류의 삼도구에서 측량하다가 강을 넘어온 조선 백성들을 향해 총을 쐈다. 조선 백성 역시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조선인 사냥꾼이 쏜 총에 러추가 맞아 부상했다. 1685년 청은 조선 정부에 문서를 보내 강력히 항의했다. 이때 붙잡힌 백성이 한득완이었다. 한득완과 그 무리들은 결국 사형당했다.
1710년 조선의 이만지 일행이 청인을 살해했을 때에도 청의 조정은 사건 조사를 빌미로 백두산을 탐사하고자 하였으나 조선 관리의 거부로 실패했다. 1712년에 청은 노골적으로 백두산 탐사의 야욕을 드러냈다. 청의 조정에서 공식적으로 문서를 보낸 것이다. 오라총관 목극등 일행을 보낼 것이니 협조해달라는 것이었다. 청의 야욕은 백두산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청은 이참에 조선과 청의 국경선을 긋기를 원했다. 청의 역사서인 <청사고>에서 1711년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타난다.
강희 50년 5월 황제가 대학사에게 유시하기를,
“장백산의 서쪽은 중국과 조선이 이미 압록강을 경계로 삼고 있는데 토문강은 장백산 동쪽 변방에서부터 동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가니 토문강의 서남쪽은 조선에 속하고 동북쪽은 중국에 속하여 역시 이 강으로 경계를 삼도록 하였다. 그러나 압록과 토문 두 강 사이의 지방은 그것이 어디에 속하는지를 확실히 알지 못한다”
라고 하였다. 이에 목극등을 그 곳에 파견하여 국경을 조사하게 했다.
<청사고> 1712년 구절에는 “이 해에 목극등이 장백산에 이르러, 조선 접반사 박권, 관찰사 이선부와 함께 소백산 위에 비석을 세웠다”고 나타나 있다. 청의 야욕은 오래전부터 시작됐고 청은 1711년부터 준비했다가 1712년 본격적으로 영토 긋기에 나섰다. <청사고> 구절을 보면 청은 토문강을 두만강으로 잘못 알고 있었다. 정확한 지리적 정보가 없었기 때문이다. 토문강은 원래 송화강으로 흘러들어가는 강이었다.
청은 자신의 발상지로 알려진 백두산 천지를 차지하려는 욕심에 눈이 멀었다. 국경을 넘은 조선 백성을 처벌한다는 구실로 백두산을 찾았지만 백두산 천지뿐 아니라 토문강에 대해서도 청은 자세히 알지 못했다. 그들은 결국 엉뚱한 곳에 정계비를 세우는 오류를 범하고 말았다.
[간도오딧세이]조선 긴장시킨 ‘이만지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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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국여도. 왼쪽 위에 압록강 변의 위원(渭原) 지명(동그라미)이 보인다. <규장각 소장> |
1710년 조선 숙종36년 조정은 발칵 뒤집혔다. 1685년(숙종 3년) 한득완이 청나라 관리를 다치게 했을 때도 청나라에 한 차례 곤욕을 치렀지만 이번에는 조선 백성이 압록강을 건너가 청나라 사람을 살해한 일이 발생한 것이다. 좌의정과 우의정, 병조판서가 숙종에게 이 사실을 보고했다. 이해 11월 9일 기사에는 이 같은 상황이 생생히 기록돼 있다.
좌의정 서종태·우의정 김창집·병조 판서 민진후가 청대(請對)하여, 위원(渭原) 사람들이 범월(犯越)한 일을 올리니, 임금이 말하기를 “저들이 혹 조사하는 사신을 보내어 오는 일이 있을까 지극히 염려스럽다.”하였다. 서종태가 말하기를 “장계 가운데 각 사람들의 범행 진술을 보건대, 살해하였다는 것은 허언이 아닌 듯합니다. 만약 저들이 먼저 사문(査問)한다면, 일이 장차 순조롭지 못할 것입니다. 갑신년(1704년)에도 이자(移咨)한 것으로 말미암아 마침내 무사하였으니, 지금도 먼저 자문(咨文)을 보내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여러 대신과 경재들의 뜻도 모두 이와 같습니다” 하니, 임금이 그 말을 옳게 여겼다.
청나라와 외교적 마찰 발생 우려
숙종의 발언이 시사하는 것처럼 조선은 청이 외교적인 문제로 압박을 가해올 것을 두려워했다. 그래서 찾아낸 묘안이 전에 했던 것처럼 미리 공문을 청에 보내자는 것이었다. 시쳇말로 하자면 ‘자수하여 광명찾자’다. 여기에다 어사까지 보내서 미리 사건을 조사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청나라가 나서서 조사한다면 더 큰 굴욕을 당할 수도 있을 사안이었다.
실록에 나타난 사건의 전말을 보면, 압록강변 위원의 백성 이만건·이만성·이만지·이지군·이선의·이준건·이준원·송흥준·윤만신 등이 밤을 틈타 압록강을 건넜다. 이들은 청인들이 삼을 캐기 위해 설치한 장막으로 들어가 청인 5명을 죽였다. 그리고 삼과 돈을 약탈했다. 이때 청인 1명이 달아났다. 이 청인이 20여 명의 사람과 함께 위원으로 와서 “조선 백성이 대국의 사람 5명을 죽였다”고 소란을 피웠다. 이들은 범인을 인도하라며 순라장(巡邏將)을 납치해 인질로 삼았다. 위안군수 이후열은 이들에게 술을 먹이고 뇌물을 주면서 사건을 무마시켰다. 하지만 나중에 이 사실을 알게 된 관찰사가 범인을 가두었다. 이들은 이송 도중 도주했다가 다시 잡혔다. 실록의 내용에 따르면 이들 중 3형제, 4형제가 있어 청에 조사 사실을 보고하자, 청에서는 대국(大國)임을 내세워 이 중 한 명씩 살려 부모를 봉양하도록 했다. 이만건·이만성·이만지·이지군의 형제 중 이만건은 살아남았고, 이선의·이준건·이준원의 형제 중 이준원은 살아남았다. 여러 범인이 있었지만 이 사건은 ‘이만지 사건’으로 전해온다. 이 사건을 빌미로 청나라는 백두산 탐사에 나섰으나 실패했다. <북정록> 서문에는 다음과 같은 사실이 나타나 있다.
경인년(1710년)에 백두산 서쪽 변방의 백성이 국경을 넘어가서 살인을 범했다. 청나라는 이듬해 신묘년에 조사관을 보내서 변고가 일어난 위원 지역을 조사하고 이어서 내지로 들어와서 백두산에 가보려고 하였다. 조정에서는 재신에 명하여 접대하게 하고 또 길을 빌려주는 문제를 가지고 쟁론하게 하였다. 이때 광천 김공이 추운 겨울날 서쪽에서 열흘을 보내면서 끝까지 고집하자, 북경 사신이 그만 기가 꺾여 돌아간 일이 있었다. ‘이만지 사건’은 역사상 중요한 변환점을 가져왔다. 이 사건이 일어난 후 2년 만인 1712년 청나라의 압력으로 백두산 정계비를 세우게 된 것이다.
좌의정 서종태·우의정 김창집·병조 판서 민진후가 청대(請對)하여, 위원(渭原) 사람들이 범월(犯越)한 일을 올리니, 임금이 말하기를 “저들이 혹 조사하는 사신을 보내어 오는 일이 있을까 지극히 염려스럽다.”하였다. 서종태가 말하기를 “장계 가운데 각 사람들의 범행 진술을 보건대, 살해하였다는 것은 허언이 아닌 듯합니다. 만약 저들이 먼저 사문(査問)한다면, 일이 장차 순조롭지 못할 것입니다. 갑신년(1704년)에도 이자(移咨)한 것으로 말미암아 마침내 무사하였으니, 지금도 먼저 자문(咨文)을 보내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여러 대신과 경재들의 뜻도 모두 이와 같습니다” 하니, 임금이 그 말을 옳게 여겼다.
청나라와 외교적 마찰 발생 우려
숙종의 발언이 시사하는 것처럼 조선은 청이 외교적인 문제로 압박을 가해올 것을 두려워했다. 그래서 찾아낸 묘안이 전에 했던 것처럼 미리 공문을 청에 보내자는 것이었다. 시쳇말로 하자면 ‘자수하여 광명찾자’다. 여기에다 어사까지 보내서 미리 사건을 조사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청나라가 나서서 조사한다면 더 큰 굴욕을 당할 수도 있을 사안이었다.
실록에 나타난 사건의 전말을 보면, 압록강변 위원의 백성 이만건·이만성·이만지·이지군·이선의·이준건·이준원·송흥준·윤만신 등이 밤을 틈타 압록강을 건넜다. 이들은 청인들이 삼을 캐기 위해 설치한 장막으로 들어가 청인 5명을 죽였다. 그리고 삼과 돈을 약탈했다. 이때 청인 1명이 달아났다. 이 청인이 20여 명의 사람과 함께 위원으로 와서 “조선 백성이 대국의 사람 5명을 죽였다”고 소란을 피웠다. 이들은 범인을 인도하라며 순라장(巡邏將)을 납치해 인질로 삼았다. 위안군수 이후열은 이들에게 술을 먹이고 뇌물을 주면서 사건을 무마시켰다. 하지만 나중에 이 사실을 알게 된 관찰사가 범인을 가두었다. 이들은 이송 도중 도주했다가 다시 잡혔다. 실록의 내용에 따르면 이들 중 3형제, 4형제가 있어 청에 조사 사실을 보고하자, 청에서는 대국(大國)임을 내세워 이 중 한 명씩 살려 부모를 봉양하도록 했다. 이만건·이만성·이만지·이지군의 형제 중 이만건은 살아남았고, 이선의·이준건·이준원의 형제 중 이준원은 살아남았다. 여러 범인이 있었지만 이 사건은 ‘이만지 사건’으로 전해온다. 이 사건을 빌미로 청나라는 백두산 탐사에 나섰으나 실패했다. <북정록> 서문에는 다음과 같은 사실이 나타나 있다.
경인년(1710년)에 백두산 서쪽 변방의 백성이 국경을 넘어가서 살인을 범했다. 청나라는 이듬해 신묘년에 조사관을 보내서 변고가 일어난 위원 지역을 조사하고 이어서 내지로 들어와서 백두산에 가보려고 하였다. 조정에서는 재신에 명하여 접대하게 하고 또 길을 빌려주는 문제를 가지고 쟁론하게 하였다. 이때 광천 김공이 추운 겨울날 서쪽에서 열흘을 보내면서 끝까지 고집하자, 북경 사신이 그만 기가 꺾여 돌아간 일이 있었다. ‘이만지 사건’은 역사상 중요한 변환점을 가져왔다. 이 사건이 일어난 후 2년 만인 1712년 청나라의 압력으로 백두산 정계비를 세우게 된 것이다.
[간도오딧세이]청나라 관리 다쳐 사형당한 조선 백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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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구도 본조팔도성경합도에 나타난 간도지역. <규장각 소장> |
1685년 숙종 3년 11월 때 일이다. 조선 백성 한득완이 한양 의금부로 끌려왔다. 한득완뿐만이 아니었다. 무리는 한득완을 포함해 25명이었다. 영의정·좌의정·우의정도 앉아 있었지만 청나라 칙사 2명도 앉아 이들이 죄상을 자백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청나라 칙사가 지켜보고 있기에 문초는 더욱 엄했다.
불과 1년 전에는 온성 유원진에 사는 한 백성이 나무를 하기 위해 두만강을 건넜다가 청나라 영고탑 수장에 사로잡혔다. 때문에 청나라 칙사가 조정으로 와서 사건을 조사했다. 이 백성은 사형에 처해졌고 변방 관리는 파직 또는 강등되는 처벌을 받았다.
청나라가 총 쏘자 조총으로 맞대응
한득완 무리는 삼을 캐기 위해 압록강을 건넜다. 이들은 조총으로 청나라 관리를 쏘았다. <숙종실록>에는 ‘상해’라고 표현했다. <만주의 역사>에는 이 사건을 ‘러추 사건’이라고 이름 붙였다. 청의 관리인 러추 일행이 측량을 하다 조선 백성의 범월을 막으려고 먼저 총을 쏘았다. 맞서던 조선인 사냥꾼이 쏜 총에 맞아 러추가 부상했다. 이 사건은 청나라에서 칙사를 파견함으로써 양국의 외교적 문제로 비화했다. 함경감사 이수언은 이 사건의 주동자들을 잡았다. <숙종실록>에는 청나라 칙사들이 한양에 도착하기 전에 함경감사를 비롯한 관리들이 미리 와서 기다려야 한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함경감사 이수언은 이 사건과 관련해 압록강과 두만강을 넘은 범월인을 샅샅이 뒤지면서 “변방의 백성들이 놀라고 소란하기를 마치 새가 도망가듯 물고기가 놀라듯 한다”고 보고했다.
형조판서 이사명이 이들을 문초하기 시작했다. 숙종이 범인의 우두머리에 대해 묻자, 형조판서 이사명은 “그의 사람됨은 매우 용맹스럽고 침착, 강인하여 입 밖에 나온 말은 다시 바꾸지 아니한다”고 말했다. 이날 <숙종실록> 기사에는 범월인 이름이 등장하지는 않았지만 이 사람은 한득완으로 추정된다. 숙종은 한편으로 변경 백성을 걱정했다. 이때 이사명은 “산삼의 채취를 금지함은 엄하게 단속하지 않을 수 없지만, 이 길이 끊어지고 나면 미천한 백성들의 살아갈 도리가 또한 어렵게 될 것이니 조정에서 이 점을 파악해 대비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청의 칙사가 한양에 오면서 범월인 25명에 대한 취조가 이뤄졌다. 칙사는 영의정·좌의정·우의정과 배석, 취조에 참여했다. 칙사는 인삼을 판매한 곳과 판매한 양을 범월인에게 물었다. 함경감사 이수언을 비롯한 관리들에게는 이들과 같이 공모하지는 않았는지, 이들을 고의로 풀어주었는지 따져 물었다.
그해 12월 1일 조선 백성 한득완에게 사형이 내려졌다. <숙종실록>에 세 차례 등장하는 한득완은 청나라의 실록인 <청사고>에도 나타난다. 강희 25년(1686년) “조선 백성인 한득완 등 28명이 강을 건너 산삼을 채취하고 창으로 회화여도관리(繪畵輿圖官吏)를 찔러 상처를 입혔다. 이를 상부에서 심리하여 우두머리에 해당하는 한득완 등 6명을 참형에 처하고 나머지는 죽음을 면하게 하여 등급을 감해 각각 집행하였다”고 나와 있다.
한득완은 과연 어떤 인물이었을까. <숙종실록>에 나타난 것처럼 용맹했고 강인했던 한득완은 삼을 캐기 위해 압록강을 넘은 무리를 이끌었다. <만주의 역사>에서 저자 김득황 박사는 “(청의 관리가) 조선인에게 총질하다가 얻어맞고 조선 국왕에게까지 책임을 추궁하여 조선인을 30여 명이나 극형에 처한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며 국가적인 참극이 아닐 수 없다”고 표현했다. 의금부에 잡혀 왔어도 꿋꿋한 태도를 보였던 조선 백성 한득완은 사형으로 역사에서 이슬처럼 사라졌다.
[간도오딧세이]청나라 사람들도 살지 못했다
간도영유권 주장과 관련해 흔히 잘못 알고 있는 주장이나 지식이 있다. 첫 번째가 고구려 시대 땅이니까 우리 땅이라는 것이다. 물론 우리 조상들이 살았던 땅이니만큼 인연은 있지만 그것이 간도영유권 주장의 밑바탕이 될 수는 없다. 간도영유권의 문제는 1644년 만주족이 북경을 점령하면서 시작됐다고 볼 수 있다.
두 번째로는 17세기 이후에도 만주 지역에 만주족과 청인들이 정주해 살았다고 알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만주족이 엄연히 살았던 땅인데 우리가 영유권을 주장할 수 있나라는 의구심을 갖고 있는 사람도 있다. 1644년 이후 만주족이 북경으로 이주하면서 간도 지역 전체가 텅텅 비었다. 청은 이곳을 아무도 들어가지 못하게 봉금했다. 청의 행정력이 미친 곳은 오랄, 영고탑으로 표기됐던 현재의 길림과 두만강 오른쪽의 훈춘 정도다. 간도 지역은 아무도 살지 않는 무인지대였다. 이곳에 조선 백성들이 몰래 드나들었고, 19세기 후반에는 경작까지 했다.
세 번째로 잘못 알고 있는 지식은 무인지대로 들어간 조선 백성들만 처벌됐지 청나라 백성들은 마음대로 무인지대로 돌아다니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다. 실록에는 청나라 백성 역시 간도 지역에 살 수 없었으며 조선이 엄중히 항의한 대목이 나타나 있다.
이조참판 권상유가 소를 올려 연석에서 진달한 말을 거듭 아뢰어 청하기를,
“청국(淸國)에 자문(咨文)을 보내어 경원·훈융의 건너편에 호인(好人)이 전지(田地)를 개간하고 집을 짓는 일을 금지하게 하여 앞날의 염려가 없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전석(前席)에서 이미 내 뜻을 효유하였고, 재자관이 오래지 않아 돌아올 것이니, 사정을 상세히 안 뒤에 이자(移咨)함이 완전할 듯하다.”
<숙종실록> 1714년 10월 28일
강희(康熙) 54년 상국(上國)의 백성들 가운데 토문(土門) 건너편 강가 근처에 집을 짓고 전지(田地)를 개간한 사람들이 있었으므로, 소방에서 자문을 올려 진달하자 성조 인황제(聖祖仁皇帝)께서 속히 철거시키라는 명을 내렸다.
<영조실록> 1746년 4월 19일
“청나라 백성 무단거주” 조선서 항의
<영조실록>에서 ‘강희 54년’이라고 나온 부분은 1715년이다. <숙종실록>에 나타난 내용을 의미한다. 1714년 말 조선이 항의해 1715년 청의 강희제가 청나라 백성이 두만강 이북에 정주하지 못하게 했다는 것이다. 이 내용을 보더라도 무인지대의 성격을 분명히 알 수 있다. 물론 조선에서 이 지역에 들어간 조선 백성을 범월(犯越)죄로 다스려 처벌했지만 청나라 백성들이 마음대로 살 수 있는 지역이 아니었다. 만약 청의 땅이었고 청의 마음대로 봉금한 땅이라면 조선에서 철거를 요구할 근거가 없다. 무인지대는 사실상 중립지대였다. 우리도 땅의 주권을 주장할 수 없었지만 청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 빈 곳에 1870년대 이후 조선 백성들이 대거 이주해 벼농사를 지었다. 이런 역사적 상황을 살펴본다면 중립지대는 과연 누구의 땅이라고 할 수 있을까.
[간도오딧세이]압록강 넘으면 범월죄로 사형
조선왕조실록에 ‘犯越’(범월)이라는 한자 검색어를 치면 모두 177건(국역 부분)이 검색된다. 현종개수실록에 1건으로 처음 나타나더니 숙종실록에는 무려 63건으로 늘었다. 이후 경종실록에는 나타나지 않다가 영조실록에는 다시 81건으로 대폭 증가했다. 이후 정조실록에 4건, 순조실록에 13건, 헌종실록에 3건, 철종실록에 7건, 고종실록에 5건이 실렸다.
범월이란 국경선을 넘어가는 죄를 뜻한다. 압록강과 두만강을 넘어간 조선 백성들은 범월죄로 사형에 처해졌다. 이를 방치한 관리에게도 엄격한 죄를 물었다. 처음 범월이라는 내용이 실린 1672년의 현종개수실록(1월 25일)을 보면 서·북 변경을 범월한 자에 대해서는 ‘삼진 아웃제’처럼 세 번 걸릴 경우 목을 매달아 효시하는 것으로 나타나 있다. 이전에는 우두머리는 목을 매게 하고 다른 사람들은 군대에 부역토록 했으나 이들이 달아나 문제가 되고 있다는 것이다.
숙종실록에는 범월의 문제가 본격적으로 드러난다. 1680년 윤 8월 14일 기사를 보면 범월이 어떻게 사회적으로 문제가 됐는지 잘 나타나 있다.
임금이 남별궁에 나아가서 청나라 사신을 접견하고 사건 조사를 행하였다. 전에 온성의 유원진 사람이 나무를 하는 일 때문에 강계를 범월하였다가 영고탑 수장에게 사로잡혔는데, 이때에 이르러 청나라 사신이 그 임금의 칙서를 가지고 와서 드디어 사건 조사를 행하였다. 범월인 등은 사죄(死罪)로 처단되었으며, 본진의 첨사 한시호는 정배되고, 부사 이혜주는 파직되었으며, 본도의 감사 이당규와 병사 유비연은 5자급을 강등하였다.
간도는 삼 많이 나는 천혜의 땅
북쪽 변경 온성에서 백성이 두만강을 넘어가 청나라 관리에 붙잡혀 청나라와 분쟁에 이르게 됐다는 것이다. 범월인은 사형당했고, 관리들은 유배·파직 등의 처벌을 받았다. 당시 압록강과 두만강 이북은 사람들이 살지 않는 무인지대였다. 청나라에서 만주족이 살던 곳이라 하여 한족은 물론 어느 쪽의 백성도 이곳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봉금했다. 심양의 동쪽에는 유조변이라는 버드나무 울타리로 청나라 백성의 출입을 막았다. 하지만 이곳은 삼(蔘)이 많이 나고, 나무를 마음대로 얻을 수 있었다. 곤궁한 백성들에게 간도는 천혜의 땅이었다. 이와 같은 현실 때문에 그 지역에 살고 있는 관리들은 처벌받는 위험을 무릅쓰고 백성들에게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지 않았다. 숙종실록에는 이 같은 현실이 그대로 드러난 기사가 있다. 1693년 12월 26일 기사를 보면 우의정 민암은 숙종에게 다음과 같이 아뢰었다.
“북도 어사(北道御史) 이우겸(李宇謙)이 삼수(三水)에 가서 인삼을 캐는 자 30여 인(人)을 잡아다 가두어 한 지경의 백성들이 전부 도망하여 피하므로 어쩔 수 없이 도로 석방하니 그제야 모두 되돌아와 일제히 호소했다 합니다. 이곳 백성들의 명맥은 단지 인삼을 캐는 데 달려 있어 인삼을 캐게 되면 살아가고 캐지 못하면 죽게 되는 것이므로, 국가에서 비록 이와 같이 금단(禁斷)하더라도 달리 생활할 방도가 없습니다. 그래서 내년에도 또 가서 캐려고 할 것이니, 만약 금하는 법을 늦추려고 하지 않는다면 삼수(三水)와 갑산(甲山) 한 지경은 반드시 모두 텅빈 땅이 될 것이라고 하였으니, 실로 잘 처리할 계책이 없습니다.”
다른 관리들도 이같이 아뢰자, 숙종은 “헤아려 의논해 잘 처리하라”고 명했다. 숙종실록의 또 다른 기사(1691년 11월 28일)에서 숙종이 “변방의 백성이 금령을 범하는 것은 실로 살 길에 관계되는 것이므로 정상이 가엾다”고 말하는 부분이 있다. 숙종 역시 국경 지역의 현실을 잘 알고 있었다. 실록에 나타난 것처럼 변방의 백성들은 ‘살 길’을 위해 처벌을 무릅쓰고 압록강과 두만강을 넘나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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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도로 이주한 조선족들이 농사일을 하고 있다. |
간도영유권 주장과 관련해 흔히 잘못 알고 있는 주장이나 지식이 있다. 첫 번째가 고구려 시대 땅이니까 우리 땅이라는 것이다. 물론 우리 조상들이 살았던 땅이니만큼 인연은 있지만 그것이 간도영유권 주장의 밑바탕이 될 수는 없다. 간도영유권의 문제는 1644년 만주족이 북경을 점령하면서 시작됐다고 볼 수 있다.
두 번째로는 17세기 이후에도 만주 지역에 만주족과 청인들이 정주해 살았다고 알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만주족이 엄연히 살았던 땅인데 우리가 영유권을 주장할 수 있나라는 의구심을 갖고 있는 사람도 있다. 1644년 이후 만주족이 북경으로 이주하면서 간도 지역 전체가 텅텅 비었다. 청은 이곳을 아무도 들어가지 못하게 봉금했다. 청의 행정력이 미친 곳은 오랄, 영고탑으로 표기됐던 현재의 길림과 두만강 오른쪽의 훈춘 정도다. 간도 지역은 아무도 살지 않는 무인지대였다. 이곳에 조선 백성들이 몰래 드나들었고, 19세기 후반에는 경작까지 했다.
세 번째로 잘못 알고 있는 지식은 무인지대로 들어간 조선 백성들만 처벌됐지 청나라 백성들은 마음대로 무인지대로 돌아다니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다. 실록에는 청나라 백성 역시 간도 지역에 살 수 없었으며 조선이 엄중히 항의한 대목이 나타나 있다.
이조참판 권상유가 소를 올려 연석에서 진달한 말을 거듭 아뢰어 청하기를,
“청국(淸國)에 자문(咨文)을 보내어 경원·훈융의 건너편에 호인(好人)이 전지(田地)를 개간하고 집을 짓는 일을 금지하게 하여 앞날의 염려가 없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전석(前席)에서 이미 내 뜻을 효유하였고, 재자관이 오래지 않아 돌아올 것이니, 사정을 상세히 안 뒤에 이자(移咨)함이 완전할 듯하다.”
<숙종실록> 1714년 10월 28일
강희(康熙) 54년 상국(上國)의 백성들 가운데 토문(土門) 건너편 강가 근처에 집을 짓고 전지(田地)를 개간한 사람들이 있었으므로, 소방에서 자문을 올려 진달하자 성조 인황제(聖祖仁皇帝)께서 속히 철거시키라는 명을 내렸다.
<영조실록> 1746년 4월 19일
“청나라 백성 무단거주” 조선서 항의
<영조실록>에서 ‘강희 54년’이라고 나온 부분은 1715년이다. <숙종실록>에 나타난 내용을 의미한다. 1714년 말 조선이 항의해 1715년 청의 강희제가 청나라 백성이 두만강 이북에 정주하지 못하게 했다는 것이다. 이 내용을 보더라도 무인지대의 성격을 분명히 알 수 있다. 물론 조선에서 이 지역에 들어간 조선 백성을 범월(犯越)죄로 다스려 처벌했지만 청나라 백성들이 마음대로 살 수 있는 지역이 아니었다. 만약 청의 땅이었고 청의 마음대로 봉금한 땅이라면 조선에서 철거를 요구할 근거가 없다. 무인지대는 사실상 중립지대였다. 우리도 땅의 주권을 주장할 수 없었지만 청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 빈 곳에 1870년대 이후 조선 백성들이 대거 이주해 벼농사를 지었다. 이런 역사적 상황을 살펴본다면 중립지대는 과연 누구의 땅이라고 할 수 있을까.
[간도오딧세이]압록강 넘으면 범월죄로 사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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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국여도. <규장각 소장> |
조선왕조실록에 ‘犯越’(범월)이라는 한자 검색어를 치면 모두 177건(국역 부분)이 검색된다. 현종개수실록에 1건으로 처음 나타나더니 숙종실록에는 무려 63건으로 늘었다. 이후 경종실록에는 나타나지 않다가 영조실록에는 다시 81건으로 대폭 증가했다. 이후 정조실록에 4건, 순조실록에 13건, 헌종실록에 3건, 철종실록에 7건, 고종실록에 5건이 실렸다.
범월이란 국경선을 넘어가는 죄를 뜻한다. 압록강과 두만강을 넘어간 조선 백성들은 범월죄로 사형에 처해졌다. 이를 방치한 관리에게도 엄격한 죄를 물었다. 처음 범월이라는 내용이 실린 1672년의 현종개수실록(1월 25일)을 보면 서·북 변경을 범월한 자에 대해서는 ‘삼진 아웃제’처럼 세 번 걸릴 경우 목을 매달아 효시하는 것으로 나타나 있다. 이전에는 우두머리는 목을 매게 하고 다른 사람들은 군대에 부역토록 했으나 이들이 달아나 문제가 되고 있다는 것이다.
숙종실록에는 범월의 문제가 본격적으로 드러난다. 1680년 윤 8월 14일 기사를 보면 범월이 어떻게 사회적으로 문제가 됐는지 잘 나타나 있다.
임금이 남별궁에 나아가서 청나라 사신을 접견하고 사건 조사를 행하였다. 전에 온성의 유원진 사람이 나무를 하는 일 때문에 강계를 범월하였다가 영고탑 수장에게 사로잡혔는데, 이때에 이르러 청나라 사신이 그 임금의 칙서를 가지고 와서 드디어 사건 조사를 행하였다. 범월인 등은 사죄(死罪)로 처단되었으며, 본진의 첨사 한시호는 정배되고, 부사 이혜주는 파직되었으며, 본도의 감사 이당규와 병사 유비연은 5자급을 강등하였다.
간도는 삼 많이 나는 천혜의 땅
북쪽 변경 온성에서 백성이 두만강을 넘어가 청나라 관리에 붙잡혀 청나라와 분쟁에 이르게 됐다는 것이다. 범월인은 사형당했고, 관리들은 유배·파직 등의 처벌을 받았다. 당시 압록강과 두만강 이북은 사람들이 살지 않는 무인지대였다. 청나라에서 만주족이 살던 곳이라 하여 한족은 물론 어느 쪽의 백성도 이곳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봉금했다. 심양의 동쪽에는 유조변이라는 버드나무 울타리로 청나라 백성의 출입을 막았다. 하지만 이곳은 삼(蔘)이 많이 나고, 나무를 마음대로 얻을 수 있었다. 곤궁한 백성들에게 간도는 천혜의 땅이었다. 이와 같은 현실 때문에 그 지역에 살고 있는 관리들은 처벌받는 위험을 무릅쓰고 백성들에게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지 않았다. 숙종실록에는 이 같은 현실이 그대로 드러난 기사가 있다. 1693년 12월 26일 기사를 보면 우의정 민암은 숙종에게 다음과 같이 아뢰었다.
“북도 어사(北道御史) 이우겸(李宇謙)이 삼수(三水)에 가서 인삼을 캐는 자 30여 인(人)을 잡아다 가두어 한 지경의 백성들이 전부 도망하여 피하므로 어쩔 수 없이 도로 석방하니 그제야 모두 되돌아와 일제히 호소했다 합니다. 이곳 백성들의 명맥은 단지 인삼을 캐는 데 달려 있어 인삼을 캐게 되면 살아가고 캐지 못하면 죽게 되는 것이므로, 국가에서 비록 이와 같이 금단(禁斷)하더라도 달리 생활할 방도가 없습니다. 그래서 내년에도 또 가서 캐려고 할 것이니, 만약 금하는 법을 늦추려고 하지 않는다면 삼수(三水)와 갑산(甲山) 한 지경은 반드시 모두 텅빈 땅이 될 것이라고 하였으니, 실로 잘 처리할 계책이 없습니다.”
다른 관리들도 이같이 아뢰자, 숙종은 “헤아려 의논해 잘 처리하라”고 명했다. 숙종실록의 또 다른 기사(1691년 11월 28일)에서 숙종이 “변방의 백성이 금령을 범하는 것은 실로 살 길에 관계되는 것이므로 정상이 가엾다”고 말하는 부분이 있다. 숙종 역시 국경 지역의 현실을 잘 알고 있었다. 실록에 나타난 것처럼 변방의 백성들은 ‘살 길’을 위해 처벌을 무릅쓰고 압록강과 두만강을 넘나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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