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류, 술, 멋

가야산품은 '성주'

醉月 2022. 4. 29. 14:33

기기묘묘한 바위들이 능선을 따라 줄지어 늘어선 가야산 만물상의 모습. 만물상 코스는 난도 최상의 가파르고 험준한 길이지만, 바위 군(群)이 빚어내는 빼어난 풍광이 몰아쉬는 가쁜 숨쯤은 잊게 만든다.

 

# 성난 짐승의 갈기…가야산 암릉



경북 성주를 대표하는 건 단연 ‘가야산’이다. 가야산만큼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산이 또 있을까. 성난 짐승의 갈기처럼 기암이 길게 이어지는 가야산 만물상 능선에 한 번이라도 올라 본 사람들은 가야산을 쉽게 잊을 수 없다. 가야산을 오를 때마다 가장 많이 들었던 얘기는 “언제고 다시 한 번 와야겠다”는 것이었다. ‘지금 거기 있으면서도, 그곳에 다시 와보기를 꿈꾸는’ 정도라면 말 다 한 거 아닌가.


조선 시대 인문지리서 ‘택리지’를 쓴 이중환은 가야산의 만물상을 ‘석화(石火)’라고 표현했다. ‘돌로 만든 불꽃’이란 뜻이다. 그 표현 그대로 가야산의 암봉은 맹렬하게 타오르는 불길의 형상이다. 이중환은 “뾰족한 돌이 줄을 잇달아서 불꽃 같으며 공중에 솟아서 극히 높고 빼어나다”고 가야산을 묘사했다. 험준한 만물상 능선에 직접 올라봤는지는 알 수 없지만, 경탄과 감격은 문장에 그대로 묻어난다.

가야산의 이런 매력은, 그러나 잘 알려지지 않았다. 자그마치 반세기 전인 1972년에 국립공원으로 지정됐는데도 말이다. 그건 가야산의 최고 경관인 만물상이 오랫동안 닫혀 있었기 때문이다. 짐승의 갈기처럼 아찔한 암릉이 이어지는 가야산 만물상은 국립공원 지정 이후에 안전을 이유로 출입이 통제됐다. 국립공원 지정 전에도 발 디딜 엄두를 내기 힘들었으니 만물상은 먼발치에서나 볼 수 있는, 전설처럼 전해지는 곳이었다.

가야산 만물상은 지난 2010년에야 개방됐다. 집채만 한 바위와 바위 사이에 가느다란 길을 내고, 현기증이 날 정도로 험준한 지형에는 계단과 사다리를 덧댔다. 탐방로를 새로 놓으면서 길을 눕혔는데도, 가야산국립공원 안내지도에 만물상코스는 검은색으로 표시돼 있다. 난도 최상의 ‘매우 어려운’ 구간이란 얘기다. 코스 중간중간 쉼터를 마련해 놓았는데 쉼터 이름이 ‘심장 안전쉼터’다. 자칫 심장에 무리가 올 정도로 가파르고 힘든 길이라는 뜻이다.


# 만물상…신(神)의 공간이 되다

▲ 무흘구곡의 마지막 제9곡인 용추.


가야산 만물상 능선의 가장 높은 자리에 거대한 바위무더기 ‘상아덤’이 있다. 달에 산다는 미인을 뜻하는 ‘상아(嫦娥)’에다 ‘바위 암(巖)’을 뜻하는 ‘덤’을 합친 이름이다. 상아덤에는 가야국의 시작을 알리는 전설이 깃들어 있다. 가야산 여신 ‘정견모주(正見母主)’가 여기 상아덤에서 하늘에 기도를 드리다 오색구름 수레를 타고 내려온 하늘의 신 ‘이비가지(夷毗訶之)’와 부부의 연을 맺었다는 얘기다. 이 부부 사이에서 난 큰아들이 대가야의 첫 왕이 됐고, 둘째 아들은 금관가야의 수로왕이 됐다고 전한다.

상아덤에 올라서면 왜 그곳이 신의 영역이 됐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발아래로 딛고 온 만물상 능선의 기암이 펼쳐지는 풍경 따라 온갖 기이한 바위들이 늘어선 풍경의 장엄함이라니…. 신라의 최치원이 여기 가야산으로 걸어 들어가 산신이 된 것도 우연이 아니었으리라. 정견모주의 10대손이자 대가야의 마지막 태자 월광도, 신라 마지막 왕 경순왕의 둘째 아들 그러니까 마의태자 동생인 김황도 가야산을 찾아들었다. 하나같이 상처받고 좌절한 이들이었다.

김황은 불교에 귀의해 ‘범공’이란 법명을 받았는데, 범공 스님이 여생을 보냈다는 가야산 아래 대가람 법수사는 탑 한 기만 서 있는 쓸쓸한 빈터로 남아 있다.


# ‘합천 가야산’이 아니라 ‘성주 가야산’인 이유

가야산은 성주의 산이다. 그런데, 대부분 성주가 아니라 ‘경남 합천’ 땅으로 알고 있다. 가야산 해인사가 합천에 있어서 그렇다. 합천에 해인사가 있고, 해인사는 가야산에 있다. 그러니 가야산이 합천이라고 믿는 건 당연한 일. 그런데 틀렸다. 성주와 합천, 경남 거창이 나눠 갖고 있는 가야산의 진짜 주인은 합천이 아닌 성주다.

이유는 두 가지다. 하나는 가야산국립공원 전체 면적의 61%쯤이 성주 땅이라는 것. 합천이 가진 가야산 지분이 고작 30% 남짓이란 얘기다. 더 결정적인 건 가야산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인 칠불봉이 성주 땅에 있다. 무슨 법이 따로 있는 건 아니지만, 산은 대개 정상이 있는 곳을 기준으로 지명이 정해지는 법이다.

그런데 왜 ‘성주 가야산’이 아니라 ‘합천 가야산’으로 알려졌을까. 그건 오랫동안 가야산 정상을 성주 땅의 칠불봉이 아니라 합천 땅인 우두봉(상왕봉)으로 잘못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두봉이 가야산의 정상이란 건 아무도 의심하지 않았던 사실이었다. 그걸 서울경찰청장 출신의 김용판 국민의힘 의원이 1999년 성주경찰서장으로 재직 중 바로잡았다.

등산을 좋아해 경찰서장으로 있으면서 서른 번 넘게 가야산에 올랐던 그는 성주군청과 국립공원공단에다 ‘칠불봉과 우두봉 높이를 정확히 측정해달라’는, 직무와 별 관계없어 보이는 공문을 보냈다. 가야산에 올라보면 아무리 봐도 칠불봉이 더 높아 보인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국토지리정보원 정밀측정이 이뤄졌고, 김 의원 말대로 칠불봉이 해발 1432.4m로 우두봉보다 2.6m가 더 높다는 결과가 나왔다. 가야산의 주인이 합천이 아닌 성주로, 경남이 아닌 경북으로 옮아지게 된 사연이다. 이렇게 성주는 가야산이라는 엄청난 자원을 얻게 됐다.


왕버들 노거수가 자라는 성주의 성밖숲.

# 자연에서 세상의 이치를 보다

만물상을 거쳐 정상 칠불봉으로 오르는 탐방로는 50도가 넘는 급경사다. 암벽길과 수직의 계단을 숨 가쁘게 반복해서 오르다 보면 이내 정상이다. 정상에 서면 모든 것이 다 발아래다. 장쾌한 산줄기 너머 지리산 천왕봉까지 또렷하다. 말 그대로 ‘일망무제’의 조망 앞에서 443년 전 가야산에 오른, 성주가 자랑하는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학자 한강 정구를 생각한다. 그는 1579년 9월 11일부터 24일까지 14일 동안 가야산을 누비고 기행문 ‘유가야산록’을 남겼다. 그 기행문에는 이런 글귀가 있다. ‘높은 곳에 오르는 뜻은 마음 넓히기를 힘씀이지, 안계(眼界·눈으로 보는 세상)를 넓히기 위함이 아니다.’

한강 정구는 가야산을 오르면서도 경치를 구경하는 데만 의의를 두지 않고, 여행에서 마주하는 자연이나 풍경을 마음을 닦는 하나의 과정으로 여겼다. 이른바 ‘성리학적인 여행’을 즐겼던 셈이다. 이런 그의 시선과 안목을 잘 볼 수 있는 곳이 무흘구곡이다. 정구는 성주에서 경북 김천으로 대가천의 물길을 거슬러 올라가며 풍광이 빼어난 아홉 곳을 골라 차례로 이름 붙이고 시를 남겼는데 그게 바로 무흘구곡이다.

무흘구곡은 정구가 후학들을 가르치던 초당 자리에 제자들이 지은 회연서원 뒤 제1곡 봉비암에서 시작해 9곡 용추폭포까지 장장 30㎞ 넘게 이어진다. 1곡부터 4곡까지는 성주 땅이고, 5곡부터 9곡까지는 김천에 있다. 옛 정취가 그대로 남아 있는 곳도 있고, 흐려진 곳도 있다. 4곡 선바위와 5곡 사인암, 6곡 옥류동을 지나는 물길 주변에 한창 공사 중인 시멘트 둑이 경관을 해치는 듯해 실망스럽기도 하다. 그래도 구곡을 하나하나 찾아가기보다는 구곡을 길 안내의 이정표 삼아 성주에서 김천까지 호젓한 시골 마을의 천변 경관을 즐기며 드라이브를 즐기는 맛이 제법 각별하다.

무흘구곡 7곡 만월담과 8곡 와룡암 사이에는 한강 정구 무흘강도지가 있다. 정구가 무흘정사를 짓고 거주하면서 수많은 책을 쓰고 강의했던 공간이다. 주자가 무이정사를 짓고 무이구곡을 경영했듯이, 한강은 무흘정사를 짓고 무흘구곡을 경영했다. 무흘강도지의 무흘정사는 퇴락해 다 쓰러져가고 있어 아쉬웠는데, 반갑게도 옛 모습 그대로 복원작업이 한창이다.


# 늙은 것들이 보여주는 아름다움

성주에서 빼놓을 수 없는 명소 중 하나가 ‘성밖숲’이다. 성밖숲은 말 그대로 성주 읍성 성문 바깥에 조성된 숲이다. 왕버들 노거수 쉰두 그루가 다른 나무의 간섭 없이 저희끼리 자란다. 나무는 늙었다. 나이 많은 건 500살이 넘었고, 젊은 것도 300살은 족히 된다.

왕버들 노거수는 은행나무나 느티나무의 위풍당당한 기상과는 좀 다르다. 곧게 자라지 않고 구불구불 몸을 뒤틀면서 자란다. 흉터처럼 보이는 검은색 수피(樹皮)는 마치 마른 붓으로 먹을 찍어 그린 듯하다. 먹의 농담(濃淡)만으로 그려낸 그림처럼 보이는 나무도 있다. 노쇠한 나무는 어쩐지 지친 듯한 모습이다. 썩어 넘어져서 겨우 목숨만 부지하는 것도 있고, 기우뚱 뒤튼 가지가 위태로워 버팀목으로 부축을 받고 있는 것도 있다.

이 숲이 보여주는 건 ‘늙은 것들이 보여주는 아름다움’이다. 나무는 늙었으되 아름답다. 거대한 위용을 가져서가 아니라 나무 둥치와 가지에 살아온 시간이 그대로 새겨져서 그렇다. 늙은 나무도 새로 돋은 신록은 환한 연둣빛이다. 늙고 거친 가지 끝에 어찌 이렇게 보드라운 새잎이 돋는 것일까. 새로 돋은 새잎의 연두색은 어쩌자고 이렇게 맑은 것일까. 늙은 나무에도 봄날은 있다. 늙은 나무의 신록은 더 크고, 더 환하다.

성밖숲은 공원으로 잘 가꿔지고 있다. 너른 잔디밭 등이 너무 잘 단장돼 오히려 전통적인 미감이 덜하다고 생각될 정도다. 성밖숲은 성주군민에게는 광장 역할을 하는 곳이다. 성밖숲 공영주차장 앞에 성주군민헌장비를 비롯해 라이온스클럽, 로터리클럽 비석과 기독교백주년기념비 등 갖가지 비석이 늘어서 있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바르게 살자’는 구호를 적은 비석도 있다. 비석을 세운다고 바르게 살게 될 것 같지 않은데도 전국 곳곳에 이런 비석이 있다. 대략 600개쯤 된단다.

이곳에 1992년 세운 ‘백년설 노래비’가 있다. 백년설은 여기 성주읍 출신이다. 1915년생, 백년설은 예명이다. 본명은 김갑용이었다가 후에 김창민으로 개명했다. 노래비에는 가수 백년설의 대표곡 ‘나그네 설움’의 가사를 새겼다. ‘번지 없는 주막’이나 ‘대지의 항구’도 그가 부른 노래다. 비석 기단의 취지문에 노래 ‘나그네 설움’의 작사 뒷얘기를 적어뒀다. 공연을 위해 함경도에 간 백년설은 작사가 조경환과 함께 일본인 습격사건의 배후로 의심받아 일본 경찰에 끌려가 혹독한 문초를 받다가 풀려났는데, 새벽에 풀려난 조경환이 담뱃갑 뒷면에다 적은 “오늘도 걷는다마는…”으로 시작하는 글이 ‘나그네 설움’의 가사였다는 얘기다.


성주의 전통 한옥마을인 한개마을에서 가장 빼어난 경관을 보여주는 한주종택의 사랑채 겸 누각인 한주정사.


# 화려한 누각과 한 칸짜리 정자

성주에는 정통 민속마을 한개마을이 있다. 한개마을에서 가장 압도적인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건 마을 가장 뒤쪽의 한주 종택의 누각식 정자 한주정사다. 대청마루 누각은 양옆의 소나무와 수양 버드나무와 어우러져 기막힌 아름다움을 뽐낸다. 한주정사가 자연과 어우러진 건축적 아름다움이 있는 곳이라면 한개마을의 응와종택은 거기 살았던 이들의 올곧은 정신이 빛나는 곳이다.

응와종택은 북비고택으로도 불린다. 북비(北扉), 그러니까, 북쪽으로 사립문을 냈다는 뜻이다. 이 집은 사도세자의 호위무사였던 이석문이 살았던 집이다.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혔을 때 세손 이산(훗날 정조)을 둘러업고 문초가 이뤄지던 창덕궁으로 뛰어가 사도세자의 구명을 간청했던 인물이다. 이 일로 이석문은 삭탈관직당하고 낙향했는데, 고향에서 사도세자를 추모하는 뜻에서 북쪽으로 문을 내고 북비라 한 것이다.

이석문의 증손자가 응와 이원조다. 열여덟에 대과에 급제해 경주부윤까지 올랐고, 한성판윤과 공조판서를 제수받았다. 그런 그가 40여 년의 벼슬살이를 끝내고 고향 땅에 지은 정자가 가야산 아래 옥계천에 있다. 정자 현판에다 내건 이름이 ‘만귀정(晩歸亭)’이다. ‘늦은 귀향’이란 뜻이다. 만귀정의 화룡점정은 담장 밖 폭포가 쏟아지는 물가 언덕에다 놓은 한 칸짜리 정자 만산일폭루(萬山一瀑樓). 자연은 크고 정자는 겸손하니 운치가 훨씬 더하다.

만귀정이 있는 옥계천변의 계곡을 포천(布川)계곡이라고도 부른다. 바위를 타고 흐르는 물이 마치 베(布)를 늘어놓은 것 같다고 해서 붙인 이름이다. 굽이마다 너럭바위가 펼쳐지고 크고 작은 폭포가 흘러내린다. 희미해져서 잘 찾을 수 없지만 이 계곡에도 이원조가 경영하던 ‘포천구곡’이 있다.


# 성주에서 즐기는 ‘요즘 여행’

이번에는 성주에서 요즘 뜨는 새로운 명소 이야기. 코로나19로 사회적 거리두기가 유지되고 있는 상황에서도 성주에서 여행지로 인기를 끄는 곳이 있다. 성주 하늘목장이다. 김천 농소면에서 남쪽으로 도로번호도 없는 구불구불 좁은 길을 한참 달려서 성주 벽진면으로 들어서면 ‘달창마을’이 있다. 혐오와 비하로 얼룩진 일베식 용어로 오해하지 마시길…. 300년 전쯤 지금으로 치면 도지사격인 목사 김치온이 달밭(月田)마을에다 세금으로 받은 곡식 등을 보관하는 창고를 지었다고 해서 달밭마을의 창고라 해서 ‘달창’이라 불렀는데, 그걸 발음 그대로 한자로 옮기는 과정에서 하늘의 달(月)이 아니라 ‘통달할 달(達)’ 자를 쓰는 ‘달창(達倉)’이 된 것이다. 그리고 이건 여담. ‘달창’이란 지명은 대구와 경남 창녕의 경계쯤에도 있다. 두 지역의 경계에 저수지가 있는데 절반은 대구 달성에 속하고, 나머지 절반은 창녕이어서 저수지 이름을 달성과 창녕에서 한 자씩을 따서 ‘달창(達昌)’으로 쓴 곳이다.

아무튼, 성주 달창마을에는 하늘목장이 있다. 본래 소를 기르던 드넓은 목장이었는데, 지금은 새로운 개념의 복합 나들이 공간이 됐다. 18년 전 문을 닫아 버려진 목장을, 고향으로 돌아온 젊은이들이 의기투합해 농업회사 법인을 세우고 힘을 합쳐 3년 전 지금의 공간으로 조성했다. 새로 내건 간판은 ‘팜0311’. ‘3월부터 11월까지’ 자연을 만날 수 있는 곳이라는 의미에서 그렇게 지었다는 게 여국현(38) 농업법인 우리동네 대표의 설명이다.


캠핑과 피크닉을 결합한 ‘캠프닉’의 명소인 성주 하늘목장에 설치해 놓은 붙박이 텐트. 이용객들은 텐트를 빌리고 고기 등이 포함된 농산물꾸러미를 구입해 바비큐를 해먹으며 하루를 즐긴다.

# 캠핑도 피크닉도 아닌 ‘캠프닉’

목장은 사실 별다른 게 없다. 번듯한 새 건물이 있는 것도 아니고, 세련되거나 화려한 시설을 들여놓은 것도 아니다. 주변 풍경도 ‘와’ 하는 탄성이 나올 정도는 아니다. 그래도 그런대로 드문드문 민가가 있는 고즈넉한 시골 마을 분위기를 간직하고 있고, 목장은 낡았지만 구석구석 손이 여러 번 간 게 느껴질 만큼 단정하다.

이곳에서 즐기는 건 ‘캠프닉’이다. 캠프닉이란 ‘캠핑’과 ‘피크닉’의 합성어. 멀리 떠나지 않고 소풍하듯 도시 인근에서 가볍게 즐기는 당일치기 캠핑이라 이해하면 된다. 돗자리만 들고 가볍게 떠나는 피크닉은 간편하지만 왠지 좀 아쉬운 듯하고, 그렇다고 본격적인 캠핑을 하자니 복잡하고 번거롭다. 캠프닉은 이 둘의 장점을 합쳐서 누리는 것이다.

캠프닉을 위해 팜0311은, 목장의 소를 먹이기 위해 청보리를 키우던 4만여 평의 드넓은 초지에다 앉은뱅이 밀을 심었다. 그 초지를 내려다보는 자리에는 튼튼한 붙박이 텐트를 넣고 그 앞에 바비큐를 즐길 수 있는 시설을 들였다. 여름에는 텐트 한 동 한 동 옆에다 아이들이 물놀이할 수 있는 튜브로 만든 개인 풀을 설치한다. 목장 살림집은 레트로 분위기의 커피숍으로 변신했고, 피자 만들기 등을 할 수 있는 체험공간도 마련됐다. 목장에는 닭과 염소, 토끼를 키우면서 먹이주기 체험을 진행한다.


■ 성주의 사계절 명소

성주에는 계절마다 그 계절에 딱 맞는 명소가 있다. 봄에는 회연서원이다. 서원에는 한강 정구가 초당을 짓고 후학을 가르치던 시절 100그루의 매화나무를 심어 조성했다는 ‘백매원(白梅園)’이 있다. 그때 심은 매화나무는 3그루만 남았지만, 주변에다 매화나무를 심어 과거의 백매원을 재현해 놓았다. 성주의 여름은 맥문동 꽃이 피는 성밖숲이다. 맥문동 꽃이 왕버들 노거수의 발치에 보라색 융단을 깔아놓은 듯 펼쳐진다. 가을에는 노란 단풍으로 물드는 독용산성의 경관이 좋고, 겨울에는 가야산 만물상의 모습이 압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