默照禪의 수행체계 _김호귀
Ⅰ. 서 언
선종은 다른 어떤 종파보다도 수행을 강조하는 특징을 지니고있다. 그것도 좌선을 위주로 한다는 점에서 다른 종파와는 또다른 입장에 서 있기도 하다. 그런데 좌선수행에 있어서도 예로부터 단일적인 방식으로 전개·발전되어 온 것은 아니다. 선과 선종의 역사만큼이나 오랫동안 다양하게 수행의 방식과 깨침에 대하여 여러 가지로 논의되어 왔다. 이 가운데 선수행의 여러 가지 종류 가운데 수행하는 방식에 따른 구분을 하자면 위빠사나, 간화선, 묵조선 등으로 구분할 수가 있다.
이와 같은 상황 속에서 당송대 선종의 융흥과 함께 등장한 선수행의 방식에 있어서도 이전시대보다 비교적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전 시대에는 석가모니의 경우를 보면 깨침의 방식인 좌선과 그 내용이기도 하고 동시에 방법이기도 했던 연기법이 주를 이루었다. 달리 경전에 나타나 있는 경우라 해도 觀想 觀相 觀像과 같은 觀法 위주의 수행법도 있었다.
그러나 이제 여기에서는 중국의 송대에 선종의 변화 가운데서 등장한 묵조선의 수행을 들어 그것이 어떤 체계를 지니고 있는가에 대하여 고찰해 보고자 한다. 이와는 상대적인 수행방식이었던 간화선은 이전의 경전과 선문답을 기록한 어록 등에서 정법안장을 터득하는 방편으로 공안을 채용하여 그 공안을 투득하는데 중점을 둔 수행이라 할 수 있다. 이에 비하여 묵조선은 경전과 선문답을 기록한 어록 등의 내용 하나하나에 대하여 간화선처럼 묵조로써 참구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은 아니다. 하나하나의 공안에 대하여 타파해야 할 대상으로서의 공
안이 아니다. 오히려 공안이 透得된 이후의 전개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그래서 간화선에서처럼 문제의식으로서의 성격이라기보다는 반대로 문제의식이 해결된 이후의 진리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따라서 수행의 출발점부터가 다르다. 간화선이 현실에 출발점을 두어 중생의 입장에서부터 전개되고 있는것과는 달리 묵조선은 같은 현실에서 출발하면서도 동시에 그 진리가 현성해 있다는 證上에서부터 출발한다. 따라서 굳이 간화선이 깨침을 향한 수행의 입장이라면 묵조선에서의 수행은 깨달은 상태에서의 수행의 입장이라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묵
조선의 기본적인 입장에서 그 수행체계에 대하여 세 가지 점에서 접근해보고자 한다.
Ⅱ. 默照禪의 형성
중국 송대에 조동종에 속하는 宏智正覺(1089-1157)은 默照라는 말에 대해서 默은 無分別에 대한 자각이고 照는 知에 대한 자각으로 해석하였다. 곧 [默照銘]에 나타나 있는 [묵조]는 마땅히 [默]과 [照]를 따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다. 그것이 서로 一如하게 될 때가 바로 默照의 현성이다. [默]이란 글자대로 말하면 [語]에 상대되는 개념으로서의 [默]이다. 그러나 [宏智頌古]의 제1칙에서 [고요하고 차갑게 소림사에 앉아 있어도 천하에는 묵묵하게 온 법령이 제대로 지켜진다] 라는 것처럼 형태상으로는 앉아 있는 자세를 가리키고 있기 때문에 이默을 좌선수행으로 이해할 수 있다. [照]는 일찍이 조승찬이[信心銘]에서 [텅 비고 밝아 저절로 비추니 애써 마음 쓸 일이
없다. 非思量의 경계는 알음알이로 알 수 있는 바가 아니다] 라고 말한 바와 같이, 텅 빈 體로부터 저절로 이루어지는 경지이므로 스스로 비추어 나타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本證의 現成 곧 本證의 自覺이라는 의미이다. 때문에 묵조선은 그 근거에 本證自覺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서 그 중점이 바로 깨침의 세계 곧 佛의 세계에 맞추어져 있다. 本證에 대한 自覺이기 때문에 그 깨침으로 나아가는 방법과 수행이 그대로 깨침이고 깨침의 現成이다. 이에 대하여 宏智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농사를 지으려고 바쁘게 밭을 가는 것은 가을에 곡식을 거두기 위함이다. 그러나 우리네는 그와 다르다. 벼가 익어도 나가서 거두어들일 생각을 않고, 그대로 비바람에 맞게 내버려 둘 뿐이다. 선지식들이여, 이 몸뚱아리는 몸뚱아리 그대로 완전하고, 두 눈은 두 눈대로 그대로 있어야 할 곳에 자리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깨침의 소식은 처음부터 털끝만치도 어긋남 없이 완전한 그대로이다. 그러니 늙은 여우같이 의심이 많은 사람이 아니라면 다시 무엇을 의심할 것인가. 본래의 자리에 앉아서 좌선을 하면 술잔에 비췬 것은 뱀이 아니라 바로 활의 그림자임을 알리라.
이것은 묵조선의 특색을 잘 보여주고 있다. 곧 애써 추수를 하지 않는 것은 바로 이미 우리네 가운데 깨침의 열매가 익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좌선을 통해서 그것을 맛보면 되기 때문이다. 그 좌선 속에서는 활을 뱀으로 잘못 보는 偏計所執과 같은 착각은 없다. 왜냐하면 실상을 보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당시에 선의 본질을 [깨침으로 법칙을 삼는다[以悟爲則]]는 것으로 간주한다든가 혹은 [수행하면서 깨침을 기다리는 마음이다[待悟之心]]라고 간주하는 病痛이 있었다. 그러나 묵조의 입장은 그와는 달리 곧바로 깨침을 기대하는 수행이 아니라 행위 그 자체를 깨침의 顯現으로 익혀나아가는 것이 묵조의 수행행위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깨침은 처음부터 개개인에게 갖추어져 있는 본증이라고 자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굉지는 그의 [法語]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좌선하는 사람은 수행과 깨침이 따로 없다. 본래 구족하고 있어 다른 것에 의하여 염오되지 않고 철저하게 청정한 상태이다. (중략) 비록 고요하게 비추나 진리에 다다른 빛이므로 中과 邊이 따로 없고 前과 後가 없다. 이처럼 打成一片이 되면 언제라도 어디에서라도 廣長說을 설하여 無盡燈을 전하고, 大光明을 내어 大佛事를 짓는다. 이것은 원래부터 있던 것이지 어디서 털끝만치도 빌려온 것이 아니다. 的的한 그 本證은 애초부터 자기 자신 속에 있기 때문이다.
굉지에게 있어서는 곧 默默하게 좌선을 할 때에 그대로 透脫된 깨침의 세계가 현현해 있다. 그 세계는 새로운 것이 아니라 자신이 원래부터 도달해 있는 세계이다. 이와 같이 묵조에 있어서 宏智禪의 특색은 默으로서의 좌선의 修와 照로서의 현성된 證을 달리 보지 않고 證이 자체 속에 본래부터 구족되어 있음을 설하고 있다.
이와 같이 묵조의 입장은 그 근저에 佛心의 本具를 두고 있기때문에 그것이 자기에게 있어서는 불심의 本具性과 無分別智 있어서 默照의 참구 그 자체가 無媒介的·非間隔的·非時間的인 것으로서 자기에 대한 卽今의 當處라는 사실로 향하게 된다.
그래서 佛心의 本具性에로의 回歸와 그 현현을 통한 자각적인 受用은 대혜측에서 주장하는 단순한 寂靜 내지 退 이라는 의미와는 엄밀하게 구별된다.
곧 굉지는 그의 [소참법문]에서 自家의 조동가풍을 곧 果가 원만하다[果滿]는 것은 正位에 들어간 도리로서 諸佛諸祖가 증득한 바이기 때문이며, 꽃이 핀다[花開]는 것은 正位로서의 果가 철두철미하게 원만해지면 시방세계에 應物顯現하여 온 천지를 두루 뒤덮는 것을 말한다고 표현하고 있다. 이것은 果의 원만은 근본적인 正位의 體이고 꽃이 피는 것은 偏位의 用을 말한 것이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말하는 [조동선에서는 많은말을 모두 부정해 버리고 묵묵한 상태를 道라 한다]는 비판은 천하의 선지식들이 正眼을 상실하여 조동의 종지를 잘못 묵조의 邪禪이라 비방하고 있는 데서 비롯된 것이다. 虛가 단순한 虛談寂照의 것이 아니고 靈도 正位가 寂默의 것만을 가리키는
것도 아니다. 空으로서의 虛이고 妙로서의 靈이다. 그런데도 虛中의 靈이요 空中의 妙인 도리를 모른 체 당시의 사람들은 묵조를 邪禪이라 하여 단지 默默地 만을 조동의 禪旨라 비방하고 있는 것이다. 실로 그것은 눈이 먼 사람들이요 刻舟求劍의 행위와 같은 것이다. 바로 묵조선에서의 이 점이 공안을 가지고 망심을 끊어가는 방편으로 삼는 간화선과의 하나의 차이라 할 수 있다. 묵조선은 바로 이와 같은 바탕에서 형성되고 전개 되어 갔다.
Ⅲ. 默照禪의 수행
묵조선은 修證不二·本證妙修(本證自覺)·現成公案·只管打坐를 특징으로 한다. 이에 대하여 구체적인 수행으로는 좌선을 통한 只管打坐의 행위, 본래적인 깨침을 자기체험으로 확인해 나아가는 本證妙修(本證自覺), 몸과 마음과 감각까지도 궁극적으로 진리의 현성으로 귀착하는 身心脫落 등으로 요약할 수 있다.
특히 수증불이는 본래의 깨침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수행[本修,妙修]이 증득과 다르지 않고 증득이 수행[本修, 妙修]과 다르지 않다는 입장이다. 본증자각은 본증의 입장이기 때문에 그것을 특별히 다른 것을 얻는다는 입장이 아니라 본래적인 것을 말 그대로 자각하는 행위일 뿐이라는 입장이다. 그리고 현성공안은 자각한 사람에게는 공안(진리)이 감추어진 것 없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는 입장이다. 이와 같은 묵조선의 바탕을 몸소 체득하는 방식 곧 수행이 지관타좌이고 본증묘수이며 신심탈락이다. 이제 이와 같은 세 가지 입장을 중심으로 묵조선의 수행에 대한 그 체계를 살펴보고자 한다.
1. 只管打坐 - 좌선의 가치
선수행에 있어서 그 기본방식은 좌선이다. 좌선은 그만큼 선수행의 수단이고 방법이며 수행형식이기도 하다. 그런데 묵조선에서 말하는 좌선은 그와 같은 수단 내지 몸의 자세처럼 형식만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좌선이 수행이고 수행의 완성이며 깨침으로 부각되어 있다. 이것을 只管打坐(祇管打坐)라 한다.
그래서 지관타좌로서의 좌선은 깨침의 수단을 넘어 깨침의 본질을 의미한다.
묵조선 수행의 근본은 本證의 自覺에 있다. 이 本證自覺 위에 서 그것을 터득해 나아가는 방식으로 요구되는 것이 곧 좌선이다. 여기에서의 坐禪은 단순히 앉음새만의 형태가 아니라 全是覺의 현성으로서의 좌선이다. 당연히 가부좌로서의 몸의 자세와 함께 자각으로서의 마음의 자세이다. 그래서 가부좌라 해도 두 다리를 겹쳐 앉는 몸의 형식으로서의 앉음새만이 아니라 안으로 마음의 형식에 이르는 가부좌이다. 그래서 이와 같은 가부좌는 몇 가지 특징을 지니고 있다.
가부좌의 첫째 의의는 앉음새의 형식에 있다. 형식을 떠나서는 좌선이란 있을 수 없다. 형식을 떠난 좌선이란 단순한 형이상학의 哲理에 불과하다. 그래서 只管打坐는 앉아 있는 모습 그대로가 좌선이고 좌선 그대로가 깨침의 현성으로 간주된다는 말이다. 좌선의 형식에 대해서 여러 {坐禪儀}에서 누누히 강조하고 있는 것은 비단 초심자에만 한정되는 것은 아니다. 숙련된 사람의 경우야말로 그 숙련의 경지가 올곧하게 좌선이라는 형식으로 통해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佛法卽威儀라 하였다. 이 좌선의 가부좌라는 형식은 좌선의 실천을 상징하면서 동시에 실천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몸으로 직접 앉지 않고 깨침을 얻는다든가 좌선을 한다고 말하는 것은 설령 삼세제불이 와서 설법한다 해도 혀끝의 희롱에 지나지 않는다. 특히 묵조에서의 좌선은 默과 坐·照와 禪이 동일시되는 입장이기 때문에 좌선이라는 앉음새 자체가 곧 묵조이기도 하다.
가부좌의 둘째 의의는 觀照하는 것이다. 단순히 앉아서 묵묵히있는 것이 아니다. 묵묵히 앉아 있되 이 默坐는 삼천대천세계에 두루하는 默坐이다. 곧 照가 수반되는 默이다. 그래서 [默照銘]에서는 默과 照의 관계를 제대로 살펴야 한다는 것을 [묵조의 좌선에서 照가 默을 상실한 照라면 그 照는 虛像으로서 邪魔와 같이 나타난다]고 하였다. 여기에서 [照中失默]은 洞山良价의 [寶鏡三昧]에서 말하는 [이빨 빠진 호랑이와 같고 절름발이 말과 같다]는 말을 뜻한다. 그리고 [侵凌]은 邪摩가 얼굴만 온화한 모습으로 등장하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默坐는 묵조의 坐이지 단순한 침묵만의 坐가 아니다. 이것은 몸의 坐이면서 동시에 마음의 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가부좌의 첫째 형식은 여기에서 바로 내용의 觀照로 이어진다. 관조가 없는 형식의 坐는 한낱 껍데기일 뿐이다. 그래서 [묵조명]에서는 다시 [묵조 가운데에서 照를 상실한 默이라면 그것은 바로 대혜종고가 비판한 默照邪禪이 되고 마는 것]으로 보았다. 따라서 默과 照의 좌선에서 默과 照의 어느 것 하나라도 상실한 불완전한 묵
조에 떨어져서는 안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래서 照中失默과 默中失照는 좌선에 있어서 서로 宛轉한 傍提의 관계로 작용하고 있다. 이 모습은 마치 좌선에 있어서 默과 照가 一合하게되어 그 경지는 修와 證의 합일로 나타난다. 이것을 宏智는 [蓮開夢覺]라는 말로 표현하여 默照坐禪을 하는 當人의 경지는 곧蓮이라면 蓮華를 피우고 夢이라면 꿈을 깨는 경지처럼 위없는 경계가 된다고 하였다. 그 경지는 다음과 같다.
불지의 경계는 일체지와 일체종지를 갖추어 번뇌장과 소지장을 여읜다. 그리하여 一切法과 一切種相에서 스스로 깨침을 열며, 또한 나아가서 일체유정까지도 깨닫게 한다. 그 모습은 마치 잠에서 꿈을 깨듯하고 蓮이 그 꽃을 피우듯 한다. 그러므로 불지라 한다.
이것은 가부좌의 형식이 그 내용으로서의 관조에까지 다다른 것을 나타낸 것으로서 正傳의 삼매에 안주하여 곧 위없는 깨침에 이르는 것을 말하고 있다. 永嘉玄覺의 [證道歌]에서 말하는 [곧 바로 여래의 지위에 오른다]는 것과 같은 소식이다.
가부좌의 셋째 의의는 默과 照가 宛轉의 작용으로 현성된 모습이다. 宛轉이란 본래 曹山本寂의 접화방식에서 유래한 말이다.
조산은 바로 [八要玄機]라는 것을 통해서 교화를 폈다. 이 八要玄機라는 것은 조산에게 있어서 여덟 가지의 玄妙한 機關을 의미한다. 機關은 공안의 구조를 설명함에 있어서 그 공안의 체계화를 가장 잘 나타내고 있는 용어 가운데 하나이다. 따라서 여덟 가지의 玄妙한 機關에 대하여 조산은 [回互·不回互·宛轉·傍參·樞機·密用·正按·傍提] 등을 말하고 있다. 이 가운데 宛轉은 彼와 此가 서로 융통[回互]하기도 하고 동시에 융통하지 않기도 하는[不回互] 자유자재의 경지로서 彼는 彼이면서 동시에 此이고 此는 此이면서 동시에 彼가 되는 도리를 말한다.
여기에서 默과 照의 宛轉이란 가부좌의 형식으로서의 의의와 내용으로서의 관조라는 의의가 완전함을 나타낸다. 이것은 默과 照가 상대적인 입장에 처해 있으면서도 상대성을 뛰어넘은 입장으로 바뀌며 分立의 입장에서 全一의 입장으로의 사고전환이다. 全一的인 입장이기 때문에 아직 보지 못한 大活底의 현성이다. 그렇지만 그것은 法의 자기에 투철한 것이기 때문에 실제로는 本來面目의 자각이며 本地風光에 대한 체험으로서 전혀 새로운 곳을 밟아가는 것이 아니다. 本家에로의 귀향이다. 굉지는 返本還源의 소식이라 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대 형제들이여, 만약 이 도리를 논할 줄 안다면 천 리에 부는바람과 같은 것이니, 어찌 彼와 我가 서로 멀겠으며, 어찌 形과聲에 간격이 있겠는가. 물과 구름이 농담을 주고받으며 모래와 나무가 서로 봄빛을 머금는다. 이르는 곳마다 本地風光이 드러나고, 百千의 강이 모두 한 맛이다. 모든 시방세계가 우리의 가풍을 구족하고 있으니 삼라만상에 우리 家風 이외에 달리 법이 없다. 온 몸은 자유로와 걸림이 없고, 손은 모든 것을 놓아버려 의지할 바가 없다. 그리하여 지척에서 그 도리를 터득할 수 있으니 모여서 무슨 도리를 논하겠는가.
따라서 가부좌는 특별한 무엇으로 규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형식과 내용의 구분이 엄밀하게 존재한다고 규정해 버리면 깨침은 필연성이 아니라 목적성이 되어 버린다. 가부좌는 본래의 자기가 현성하는 것일 뿐이다. 일상의 모든 사사물물이 다 가부좌의 구조 속에서 본래의 자기체험으로 다가온다. 그리하여 주변의 어느 것 하나 가부좌의 현성 아님이 없다. 그래서 가부좌는 부단한 깨침의 체험으로 연속되어 간다. 과거의 깨침의 체험과 미래의 깨침의 체험이 따로 없다. 지금 그 자리에서의 깨침이다. 깨침에 전후가 없다. 全一的인 입장이라서 미혹한 중생의 입장에서의 고매한 깨침과 진리를 통한 覺者의 입장에서의 일상적인 깨침에 구분이 없다. 여기에서는 벌써 돈오점수가 문제되지 않는다. 一切處 一切時가 깨침의 현현이므로 迷悟가 없고 凡聖이 없으므로 깨침의 횟수가 없다. 묵조의 宛轉이가부좌로 나타나 있을 뿐이다. 그래서 가부좌는 깨침의 다른이름이다. 깨침은 일회성의 특수경험과 동시에 그 이후의 생활경험 속에서 연속되기 때문에 더욱더 妙用을 발휘해 나아간다.
이것이 바로 가부좌의 宛轉한 작용이고 가부좌의 일상성이다.
그래서 이 도리를 굉지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달빛이 황금의 대지 위에 펼쳐진 모습으로 본체[正]가 우뚝 드러나 막힘이 없어 현상[偏]과 함께 작용하는 것이다. 그래서 펼친 즉 三世에 두루하여 부족함이 없다. 그러므로 진시방세계가 그대로 하나의 눈이요, 진시방세계가 그대로 자기이며, 진시방세계가 그대로 광명이고, 진시방세계가 바로 해탈문이다.
따라서 어느 곳인들 成佛處가 아니겠으며, 어느 때인들 說法時가 아니겠는가.
다음 가부좌의 넷째 의의는 수행과 더불어 깨침의 의의를 함께 나타내준다. 굉지는 이에 대하여 [吾家底事 中規中矩]라 하여 가부좌의 의의를 묵조의 속성에 비추어 설명하고 있다. 곧 묵조의 가풍은 現今의 當事를 중시하여 그것이 周到綿密하고 用意周到한 것을 中規中矩라 말한다. 그래서 默으로서는 矩에 치우치지 아니하고 照로서는 規에 어긋나지 않는 것을 中이라 한다. 規와 矩는 默과 照이고, 正과 偏이며, 功과 德이요, 眞如와 隨緣의 관계와 같다. 이것이야말로 가부좌를 통한 묵조의 좌선이 바로 중도에 입각한 久遠의 본증임을 설파한 말이다. 일체
의 兩端을 떠나 있어서 默의 근본[樞機]에만 떨어지지도 않고, 照의 작용[傍參]으로만 현성하지도 않는 宗通과 說通의 宛轉이다. 이것은 가부좌가 지니고 있는 깨침의 속성이 일상성과 함께 지속성임을 말한다. 가부좌 자체는 곧 깨침의 현성으로서 깨침을 증상의 수행이라고 말하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가부좌의 모습은 깨침의 연속성이기 때문에 그 속에서 행하는 좌선수행이 비로소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따라서 가부좌는 그대로 깨침의 현현으로서 나타난 몸의 구조이고 마음의 구조이다. 이러한 가부좌야말로 묵조가 나타내는 일상성이고 본증성이다. 그래서 굳이 깨침을 얻으려고 목적하지 않아도 저절로 수행의 필연성이 구현되어 온다. 그래서 올바른 수행은 올바른 가부좌이고, 올바른 跏趺坐는 올바른 수행이며, 올바른 좌선은 올바른 깨침이다. 좌선 그대로가 깨침의 작용이므로 一時坐禪은 一時佛이고 一日坐禪은 一日佛이다. 즉 坐禪卽佛이요 佛卽
坐禪이다. 이것이 지관타좌로서의 가부좌가 나타내는 본래 의의이다.
깨침에서의 몸은 가부좌가 본격을 이루고 있다. 가부좌는 형식적으로는 몸의 자세이면서 내용적으로는 마음의 자세인데 그것은 證上의 자세이기 때문으로서 바로 보리달마의 面壁觀心이기도 하고 육조혜능의 見佛性이기도 하다. 곧 좌선하는 直心이 도량이고 좌선하는 深心이 도량이며 좌선하는 보리심이 도량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가부좌의 좌선은 모든 좌선의 전체인 只管打坐이다.
다만 좌선수행의 방식 내지는 깨침에 대한 견해에서 깨침에 도달할 때까지의 좌선이 깨침을 목표로 하는 좌선수행이라면 그것은 곧 깨침의 수단[熏修, 作修]이지만, 깨침을 얻은 상태에서의 좌선수행이라면 그것은 곧 수단으로서의 좌선수행이 아니다[本修, 妙修]. 곧 自受法樂의 좌선이다. 특히 좌선수행은 석존의 좌선과 같은 깨침의 분상에서의 좌선을 말하고 있기 때문에 새삼스레 깨침을 목표로 하지는 않는다. 다만 깨침이 성취된 불성임을 믿고 그대로 똑같이 닮아가려는 연습이다. 따라서 붓다의 좌선을 자신이 그대로 흉내내면서 좌선하는 속에서 스스로가 닮아가는 것이다. 이러한 때에 자신을 구속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좌선 그대로일 뿐이다. 그래서 굉지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선지식은 본래부터 그 변화의 경계 속에 들어가 있으니 자연히 일체처에서 주인이 되고 住處를 얻는다. 이리하여 달리 의지할 하나의 가르침[一乘]도 없고, 달리 닦을 만행도 없으며, 달리 벗어날 삼계도 없고, 달리 알아야 할 법도 없다. 그러니 만약 도가 삼계를 벗어난 즉 삼계가 없어지고, 도가 삼계에 있으면 삼계에 걸림이 되며, 만약 만법 깨치기를 기다리면 만법은 紛然할 것이고, 만법을 굴리기를 기다리면 만법이 소란스러울 것이다. 이러한 경지에 이르러서는 모름지기 벗어나려고도 않고 [不出] 남아 있으려고도 않으며[不在], 없어지지도 않고[不壞] 걸림도 없으며[不 ], 굴리려고도 않고[不轉] 알려고도 않으며[不了], 분연도 없고[不紛] 소란스러움도 없다[佛擾]. 그래서 문득 확연히 드러난 몸을 보게 된다. 이 놈이 바로 쇄락한 놈이어서 소리와 색깔 속에서도 방해받지 않고 잠을 자며, 소리와 색깔 속에서도 앉고 누우면서 모든 상대적인 것들을 끊어버린다. 그리고 항상 광명이 현전하여 깨침을 열어 알음알이의 경계를 초탈한다. 이처럼 될 때 비로소 信은 원래 닦아 지닐 것이 없고, 일찍이 염오된 적이 없어서, 무량겁 동안 本來具足되어 고 圓陀陀地하여, 일찍이 털끝만치도 모자람이 없고, 일찍이 털끝만치도 남음이 없음을 믿게 된다.
여기에서 좌선은 그대로가 깨침으로 나타나 있다. 이것을 비유하면 不立文字와 敎外別傳이 깨침의 형식이라면 直指人心 見性成佛은 그 내용이기도 하다. 直指는 이론적인 모색이나 추론의 결과나 매개체를 의지한다든가 하는 것이 아니라 대상에 직접 부딪치는 것이다. 여기에서 直指人心의 人心은 범부중생의 自心이다. 이러한 自心을 직접 철견하여 그 본성을 현현함으로써 성불에 이른다. 成佛은 斷惑證理·證得涅槃·成就正覺 등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교리상 치밀하게 짜여진 단계과정을 거치지 않고 現身에 곧 證悟하여 해탈의 경지에 나아가는 것이다.
따라서 성불은 범부가 換骨脫胎하여 佛이 되는 것이 아니라 범부로서의 인간 그대로 불타의 覺證을 얻는다는 의미가 강조되는 말이다. 즉 범부로서의 인간이 변화하여 佛이 되는 것이 아니라 범부의 인간 그대로 佛智를 터득하는 것이다. 이 성불이 바로 見性을 계기로 하여 성취되기 때문에 見性成佛이라 한다.
그런데 見性 곧 成佛은 人心의 直指이기 때문에 見性과 直指의 관계는 見性直指로서 回互의 관계이다. 見性이라는 것은 곧 直指가 바탕이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見性은 실상적인 행위이고 直指는 현상적인 행위이기 때문에 見性과 直指는 不回互의관계이다.
여기에서 直指의 人心은 이론적으로는 양자를 가리키는 말이지만 구체적으로는 心相을 直指하는 것이다. 心相을 直指하는것은 곧 無相이면서 無自性이기 때문에 見性 즉 人心과 直指는 앞에서의 回互와 不回互의 昇華로서 兼帶가 된다. 이리하여 直指의 당처에서는 見性과 人心과 直指와 成佛 등이 純一한 작용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洞山良价가 말한 [如是之法]이요, 宏智正覺이 말한 [中規中矩]이다. 따라서 直指人心의 현상 그대로 나타나는 見性이기 때문에 見性의 性은 心性·理心·一心·心의 本質 등으로 불리울 수 있다. 결국 人心이라는 구체적인 事心을 취하여 보편적인 理心으로 철저화하여 一心의 心性을 파악하고, 그에 의해서 事心인 心相의 본래성의 작용을 자유로이 도출해 내는 것이 見性이요 見法이며 見眞如이고 見法性이다.
이리하여 不立文字와 敎外別傳은 直指人心의 顯現으로서의 見性을 말하는 형식이라면 直指人心과 見性成佛은 그 작용으로서의 내용이다. 곧 見性은 直指人心의 현현이기 때문에 見性은 現成成佛이고 現成公案이다. 그래서 理佛性의 입장은 見性成佛에, 行佛性의 입장은 直指人心에 그 초점이 맞추어진다. 默照禪에서는 바로 行佛性에 입각한 坐禪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坐禪은 곧 깨침의 외형이고 깨침은 坐禪의 내용이다. 그래서 宏智에게 있어서는 坐禪의 默은 妙行으로서 곧 깨침의 默이고, 깨침의 작용인 照는 오히려 不動의 照로서의 설법이다. 곧 [默
默하나 머물지 않고 照耀하나 흐르지 않는다] 라든가, [묵묵하게 노닐고 여여하게 설한다] 라든가, [침묵이 곧 설법이고 설법이 곧 침묵이다] 라고 말하는 경우가 그것이다.
2. 本證自覺 - 본래자기의 깨침
깨침에 대하여 大慧는 [그러나 이러한 (깨침의) 도리는 사람들마다 두루 갖추어지지 않은 바가 없다] 라고 말한다. 곧 大慧의 입장은 수행인이 本覺의 도리를 구비하고 있으면서도 현실적으로 그것을 드러내지 못하고 있는 강조하고 있기 때문에 始覺門의 입장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宏智는 證에 대하여 [모든것이 覺]으로서 始覺[無言默然]이 곧 本覺[威音王那畔]이라 말한다. 이에 대해서는 곧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實相은 곧 無相의 相이고 眞心은 곧 無心의 心이며 眞得은 곧 無得의 得이고 眞用은 곧 無用의 用이다. 만약 이와 같다면 그것은 곧 탁 트인 행위이고 진실한 행위로서 일체의 법이 이르는 바 그 성품이 허공과 같다. 바로 이러한 때는 空마저도 얻을수 없어서 비록 空하지만 妙하고 비록 虛하지만 신령스러우며 비록 고요하나 밝고 비록 默하나 照한다.
여기에서 굉지는 默照 뿐만 아니라 虛而靈·廓谷·空而妙 등의 말을 통해서 證이 본래부터 누구에게나 구비되어 있는데 그치지 않고 그것이 현실적으로 확연하게 드러나 있는 것으로 보고있다. 굉지의 다음 말 속에는 이와 같은 내용이 더욱 분명하게나타나 있다.
우리 출가수행자의 본분사에는 원래 실 한 오라기의 부족함도 없고 벗어남도 없다. 그래서 근본으로부터 텅 비고 확철하다. 이것은 모든 사람에게 불심이 本具되어 있음을 전제로 삼은것이다. 그래서 범부가 바로 이 불심의 本具性을 모르고 밖의 경계에 대한 취사분별에 끄달리고 있지만, 그러한 상황으로부터 벗어나 본래부터 갖추고 있는 깨침의 本源을 원만하게 드러내 가는 과정이 바로 초심으로부터 자각에 이르는 수행과정이 된다. 각자 그 본증임을 자각하는 수행을 통해서 [깨친 존재로 서의 佛을 닮아가는 행위]가 곧 참구행위이다. 따라서 묵조에서의 무분별의 참구는 외부로 치달리는 마음을 멈추고 本具한 자기의 본래성을 되돌이켜 자각하는 것이다. 그 本具性의 자각을 아는 것으로부터 깨침으로서의 본증이 가능한 것이다. 따라서 묵조라는 무분별지의 참구는 제불과 동체라는 지견을 터득해 나아가는 것으로서 자기에게 본래부터 구비되어 있는 무분별지를 자기 자신에게 현성시키는 것이다. 그 현성이란 일체의 번뇌와 분별을 放下하여 本具한 불심의 虛明을 어둡지 않게 하는 참구의 행위이다. 그래서 묵조의 본증을 자각하는데 있어서는 깨침의 당체, 곧 本具한 무분별지를 그 본래의 무분별에 따르게 하고(가부좌를 통한 참구) 그대로 존재케 하는(본증을 현성시키는 자각이라는) 태도가 중요한 관건이 된다.
특히 굉지의 본증에 대한 자각으로서의 활작용은 가부좌라는 좌선과 자각이라는 본증이 어우러져 있으면서 그 어우러짐에 떨어지지 않는 자태이다. 일체의 幻化를 여읜 [無相의 相]과 [無心의 心]과 [無得의 得]과 [無用의 用]이기 때문에 가부좌를 통한 좌선은 동시에 늘상 자각된 본증과 다르지 않다. 바로 굉지가 말한 침묵이 곧 설법이고 설법이 곧 침묵이다. 그래서 자각이 가부좌의 현성이라면 본증은 자각의 본구성이다. 이러한 내면 속의 심리는 고요하여 신령스럽고 默默하여 참되어 있는 默默의 공부로써 마음을 일구는 본증 그대로이다. 그 까닭
은 곧 [默 가운데에 味가 있고 照 가운데에 神이 있다. 이것이 제불께서 전하신 바이고, 납승이 本得이다]. 굉지에게 있어서 자각이라는 말은 여여하게 사려가 끊어진 자리이다. 이것을 굉지는 다음과 같이 [묵묵히 아니 신령스럽고 모양 없이 근본만이 우뚝하니 말 있는 곳에 놀랄 일도 없는 모습이다. 차가운 밤하늘엔 은하수 가득하고 찬서리 내린 곳에 북두성 빛나는 것과 같은 흔적 없는 자취로서 반연 따라 세상에 나투어도 완전한 조화로 현성해 있다]고 표현하고 있다. 그 모습을 형용해 보자
면 큰 산 속에 구름이 안기고 맑은 물 속에 달이 목욕하는 모습이다.
이와 같이 본증의 자각에 대한 굉지의 입장은 그 근저에 불심의 本具를 두고 있기 때문에 그것이 자기에게 있어서는 불심의 本具性과 無分別智에 있어서 묵조의 참구 그 자체가 無媒介的 非間隔的 非時間的인 것으로서 자기에 대한 卽今의 當處라는 사실로 향하게 된다. 그래서 불심의 本具性에로의 회귀와 그 현현을 통한 자각적인 受用은 대혜측에서 주장하는 단순한 寂靜하고 退 하다는 것과는 엄밀하게 구별된다. 곧 굉지는 그의 [소참법문]에서 自家의 조동가풍에 대하여 [果가 원만하다 [果滿]는 것은 正位에 들어간 도리로서 諸佛諸祖가 증득한 바이기 때문이며, 꽃이 핀다[花開]는 것은 正位로서의 果가 철두철미하게 원만해지면 시방세계에 應物顯現하여 온 천지를 두루 뒤덮게 되는 것을 말한다]고 하였다. 나아가서 이것은 일상의 모든 행위를 본증의 현현으로 간주하기 때문에 달리 一切衆生悉有公案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굉지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그것은 닦아서 증득하는 것이 아니다. 본래 구족되어 있기 때문에 달리 染汚되지 않으며 철저하게 청정한 것이다. 진실로 이렇게 청정한 그것을 구족하고 그 눈을 얻으며 철저하게 비추고 완전하게 탈락하며 분명하게 체득하고 안온하게 실천해야 한다. 生死에는 원래 뿌리가 없고 出沒에도 원래 흔적이 없다.
本光은 봉우리를 비추니 그것은 텅 비었으되 신령스럽고, 本智는 緣에 응하니 고요하되 빛을 낸다. 이처럼 진실로 가운데와 가이 없고 앞과 뒤를 끊은 곳에 이르러서야 打成一片하게 된다. 이러한 경지에 이르러서는 根根과 塵塵이 그리고 在在와 處處에서 모두 廣長說을 내고 無盡燈을 전하며 大光明을 내고 大佛事를 짓는다. 이처럼 원래부터 털끝만치도 밖의 법을 빌림이 없이[不借] 的的한 이것이 바로 우리 가풍의 일대사이다.
곧 외부로부터의 빌림이 없이 본래 완성되어 있는 것을 철저하게 터득하는 것이 요구되고 있다. 여기에는 달리 본래부터 뿌리가 없고, 생사와 흔적이 없는 출몰에 철저하게 탈락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그 脫落의 상태가 바로 일체처 일체물이다 깨침의 빛으로 다가와 법을 설하고 광명을 내며 불사를 짓고 법을 전한다. 이것은 저 공안이 본래구족되어 있는 까닭에 철저한 탈락을 통한 내면의 긍정이 필요함을 말하고 있어 어떤 외부로부터의 유위적인 작위가 소용이 없음을 말해주고 있다.
이처럼 굉지는 조동의 면밀한 종풍을 잇고 본래 成佛作祖로서 걸음걸음이 광명 속에서 노닌다는 것을 설했다. 따라서 그 수행의 근간이 본증에 대한 자각을 내세우는 입장이므로 本妙修라는 의미에서 慧와 定의 성격이 동시에 등장한다. 그러나 가부좌라는 좌선의 형식에 국한시켜 잘못 定에만 머물러 枯木禪에 빠져 있는 무리를 향하여 대혜는 默照邪師輩라 하여 비판하였던 것이다. 이에 대한 宏智의 본래 입장은 다음과 같이 철저한 본증의 자각이었다는 것이 다음과 같은 말에 나타나 있다.
묵묵하여 자재롭고 여여하여 반연을 떠나 있어서 훤칠하게 분명하여 티끌이 없고 그대로가 깨침의 드러남이로다. 본래부터 깨침에 닿아 있는 것으로서 새로이 오늘에야 나타난 것은 아니다. 깨침은 광대겁 이전부터 있어서 확연하여 어둡지 않고 신령스레 우뚝 드러나 있는 것이다. 비록 그렇다고는 하나 부득불 수행을 말미암지 않으면 안된다.
여기에서 묵조의 자각이라는 본래 기능이 되살아난다. 즉 묵조가 단순한 默과 照가 아니라 묵묵히 앉아 마음은 텅 비고, 묘하게 전하여 道가 존귀하게 되고, 깊이 침묵하여 밝게 드러나고, 고요히 있어 묘한 존재로 나타난다는 의미의 默과 照이다.
그래서 默은 본증의 體로서의 默이어야 하고 照는 본증의 用으로서의 照여야 한다. 이러한 묵조가 전제된 좌선은 바로 是非를 떠나고 離微를 경험한다. 그 묵조는 곧 묘용으로 나타나지만 有가 아니고 空으로 숨어 있지만 無가 아닌 원리이다. 굉지는 이러한 現成公案의 의미를 간혹 見成公案으로 표현하기도 하는데 이것도 공안의 현현이라는 범위를 벗어나지 않고 있다.
그리하여 묵조선에서는 마음의 수행 못지 않게 몸의 수행이 강조되고 있기 때문에 定慧觀에 있어서도 定과 慧가 동시로 나타나고 있다. 곧 앉아 있는 그 자체를 깨침의 완성으로 보기 때문에 定이 慧의 형식이 아니라 慧의 내용이고 慧는 定의 내용이 아니라 定의 妙用이라 할 수 있다. 그리하여 비유하자면 간화선에서의 定과 慧의 관계가 각각 燈[體]과 등불[用]의 관계라면, 묵조선에서의 定과 慧의 관계는 定이 곧 慧이고 慧가 곧 定으로서 定과 慧가 서로 卽入되어 있는 관계이다. 그리하여 간화선에서의 공안의 透過가 묵조선에서는 본증의 자각으로 대체된다.
3. 身心脫落 - 非思量의 행위
이제 이 본증을 자각하는데 있어서 그 심리는 어떻게 작용하는가에 대하여 굉지의 입장을 중심으로 살펴보기로 한다. 좌선수행의 근본은 調身·調息·調心을 근본으로 하여 전개되어 왔다.
이와 같은 방식에 대해서는 竺法護의 [결가부좌로 단정하게 앉아 움직이지 않으니 마치 태산과 같았다] 라는 말처럼 인도의 선정수행에서부터 언급은 되어 왔다. 그런데 이것도 [結跏趺端坐]라고만 할 뿐이어서 그 좌법의 상세한 내용은 분명치 않다고 밖에 할 수 없다. 또한 鳩摩羅什(350 무렵-409)이 弘始年中에 漢譯한 경전에는 좌법에 대하여 비교적 상세한 기록이 남아있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그 [結跏趺坐]라는 형태는 오늘날 처럼 정형화되어 설명되고 있지는 않다. 아울러 선정수행의 장소도 대부분은 樹下石上을 가장 보편적인 방법으로 삼았던 것으
로 보인다. 그리하여 특별히 좌선을 위한 장소가 설치되거나 몸 자세에 관한 자세한 내용을 엿보기가 쉽지 않다.
이와 같은 좌선수행의 방식에서 가장 중심이 된 것은 調心이다. 좌선수행에서 마음을 어떻게 유지하는가에 따라 다양한 수행방식이 전개되었기 때문이다. 곧 마음의 흐름과 주변 일체의 것을 알아차림에 집중하는 위빠사나, 하나의 화두를 들어 직접 수행인이 화두일념으로 몰입해 가는 간화선, 그리고 본래부터 일체는 깨침의 현성임을 자각하는 묵조선 등의 방식으로 전개 되었다. 이 가운데서 묵조선의 마음자세 곧 심리는 어떤 것인가.
그러나 묵조선에서의 심리는 비사량이라는 무분별한 사량의작용이다. 그 비사량 전체속에 그대로 자신을 내맡겨 버리는 가운데서 궁극적으로는 다시 사량을 벗어난 脫體現成의 의식으로 돌아오는 심리이다. 여기에서 비사량은 사량이 없다[無思量]든가 사량을 하지 않는다[絶思量]든가 사량을 없앤다[沒思量]든가 사량이 아니다[不思量]는 의미가 결코 아니다. 無分別의 思量이고 無心의 思量이며 無煩惱의 思量이다. 따라서 非의 思量이다. 곧 一切의 分別과 有心과 煩惱를 여읜[非] 思量이다. 굉지는 이 비사량에 대하여 그 비사량은 곧 일체의 체성에 대한 무분별과 그 작용으로서의 知를 일여하게 구비한 입장으로 파악하고 있다.
비사량처는 머무르지 않으면서 머무는 것이고, 그것이 이름과 모습을 여위었을 때에는 행위가 없으면서도 행위를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마치 큰 코끼리가 깊은 물을 건너고, 차가운 겨울달빛이 다시 비추는 것과 같다. 세간은 분명하여 허공처럼 걸림이 없고 人間事는 번잡한 혼돈을 벗어났다. 이러한 가운데서 어떤 가르침을 들어야 할까. 배불리 밥먹고는 배만 두드리는구나.
곧 굉지에게 있어서 [비사량처]의 본래의 의미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 선악과 애증 등의 二見에 떨어지지 않는 任運無作의 思量이며, 情解의 分別事識이 미치지 않는 초연한 사량이다.
이처럼 [비사량]의 경계에는 문자가 없어 시비와 선악을 떠나있는 父母未生已前의 事이다. 따라서 이것을 파악하고 사유하며 표현하기 위해서는 여기에서 말한 [비사량]이라는 좌선의 심리를 체험하는 것이 필요하다 곧 이 좌선의 체험은 일상의 行住坐臥·語默動靜·見聞覺知 등 일상생활의 모든 威儀에서의 체험으로 다가오는 사량의 실체이다. 곧 영가현각이 말한 [행동하는 것도 선이고 앉아 있는 것도 선이며 말하고 침묵하며 움직이고 고요한 것에서도 항상 그 본체는 편안하다] 라는 바로 그 좌선에 통한다. 이처럼 굉지는 좌선속에서 체험하는 심리를 비사량으로 파악하고 있다. 이와 같은 비사량의 심리가 곧 가부좌라는 좌선의 자세로 드러난 것이 현성공안이다. 그래서 비사량의 외적인 표현이 현성공안이라면 현성공안의 내적인 좌선체험이 곧 비사량이다. 이것에 대하여 宏智는 [원만한우리 가풍의 지혜는 사유를 의지하지 않는다. 이처럼 사유를 의지하지 않는 것은 마치 갈대꽃이 눈에 비취는 것과 같다] 라고 말하고 있다. 굉지에게 있어 원만한 가풍의 지혜는 사유를 의지하지 않는다는 속성을 지니고 있다. 이처럼 사유를 의지하지 않는 것은 마치 하얀 갈대꽃이 하얀 눈에 비취는 것처럼 본래부터 하얀 것에다 하얀 것이 다시 덧비췬다는 것으로 주객이 모두 원래 한 가지로 완성되어 있어서 가감이나 증삭이 없다고
한다. 이것은 굉지가 묘용으로서의 照의 속성을 비사량의 비유로써 나타낸 것이다. 여기에서는 비사량이 단순한 비사량이 아니라 그 좌선체험으로서의 비사량, 이를테면 [非의 사량]이라서 좌선체험이라는 비사량의 본래의미로 회귀하고 있다. 비사량이 [非의 사량]으로 작용할 때에 비로소 [사량하지 않는 것을 사량한다]는 본분의 기능을 충분하게 발휘한다. 사유에 의지하지 않으면서 그 사유를 드러내는 대긍정의 원리가 [非의사량]으로 나타난다. 이것이 더욱 구체적으로는 그의 [묵조명]에 잘 드러나 있다.
직접 비사량이라는 용어를 회피하면서도 앞서 굉지가 구사했던 비사량의 의의를 충분히 되살려서 나아가 비사량의 작용 뿐만이 아니라 그 행태와 현성공안으로의 양상까지를 전개하고 있다. 즉 [불조의 좌선을 할 때에는 언어를 떠나니 밝고 밝게 깨침이 현전한다]는 것이 비사량으로서의 [非의 사량]의 작용이라면, 그 행태는 [어둠과 밝음을 뛰어 넘고 숨음[隱]과 나타남[顯]을 초월하여 어두워도 더욱 밝고 숨어도 더욱 드러난다]는 것처럼 비사량이 [非의 사량]으로서 작용하는 모습 내지 비유로 나타나 있다. 어쩌면 굉지에게 있어서 [非의 사량]은 [무분별의 사량]이라서 비유로써만이 간접적으로 표현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더욱이 비사량이 현성공안으로 전개되는 양상은 [언어분별을 초월한 깨침의 세계는 묵묵한 좌선속에 있고, 그 속에서 나온 깨침이 끝없이 세계를 비춘다. 언어분별을 초월한 세계의 존재모습은 반야지혜가 밝게 드러나 어둠을 물리치는 모습이다]와 같은 묵조의 작용과 그 현성으로 대체되어 있다. 이로부터 비사량은 좌선의 체험에서 현성공안의 내면화된 자신이다.
이 비사량이 몸과 마음과 감각까지 투여되어 나타나는 행위가 곧 身心脫落이다. 곧 비사량에 대한 구체적인 수행방식이 곧 身心脫落이다. 신심탈락은 믿음에 대한 자각이다. 믿음을 자각 한다는 것은 자신이 내세운 좌선삼매의 주제에 대한 자각을 말한다. 수행을 하는데 그 기본은 무엇보다도 우선 반드시 근원을 알아야 한다. 그런데 그 근원을 알기 위해서는 일정한 행위가 요구된다. 그것이 마음이든 몸이든 언설이든 몸과 마음과 언설의 상호간의 행위든 간에 반드시 어떤 유형 내지 무형의 작용을 필요로 한다. 그런데 이 바탕에는 언제나 주체가 있어야 한다.
그 수행의 주체는 다름 아닌 자기 자신으로서 자기의 몸이며 자기의 마음이고 자기의 언설이다. 그러나 이 모두를 한꺼번에 이행할 필요는 없다. 누구에게나 깨침을 구하는 것은 마음을 말미암지 않고서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또한 모름지기 마음의 본성을 알아 분명히 미혹함을 없애면 功業 내지 功能을 이룰 수 있다. 한 가지를 알면 천 가지를 알고 한 가지에 미혹하면 만 가지에 미혹한다. 그런즉 마음이 무심함을 알면 즉 그것이 항상 定이다. 그리고 色이 無色임을 알면 항상 지혜의 자리에 노닌다. 그러니 자신이 깃들어 살고 있는 그곳의 상황이 그대로 여법한 생활이고 수행임을 알아야 한다. 그래서 진리와 일상의 행위에 있어서 주변사를 여의지 않으면서 주변사를 구하는 것도 구하려는 집착이 없으면 된다. 말하자면 我에 있으면서 我를 없애면 我에 즉하여 법신이 되는 것이다. 마치 연꽃이 더러운 곳에서도 청아하게 피어나듯이 무분별하고 고요한 마음의 경지는 현재의 지금에서 자기를 직시하는 것이다. 집착하면 걸림이 있고 해탈하면 구속됨이 없다. 무심하여 심과 아가 여여하고 항상 실상으로 돌아가 마음이 일체법에 머물러 움직이지 않으면 곧 선정에 드는 것이다. 이것을 法眼淨이라 한다. 이 경지가 되고보면 일체법은 마음이 지은 것이므로 법을 보는 것은 空寂法門이고, 解脫法門이며, 無相法門이고, 眞如法
門이며, 智慧法門에 들어가는 방법을 아는 것이다. 따라서 道心이란 得道에 이르는 방법을 보여주는 것이다. 궁극에는 그 修道마저도 닦아야 할 도가 없다는 생각을 가지도록 해야 한다. 이것이 수행에 들어가는 第一心이다.
이제 제일심을 지니기 위해서는 반드시 자신의 몸을 필요로 한다. 그 몸의 자세와 작용이 다름아닌 좌선이라는 행위라면 그 내면의 마음의 작용이 곧 비사량이다.
Ⅳ. 결 론
아직까지 선종 가운데서도 묵조선의 수행방법은 간화선에서만큼 활발하게 논의되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수행의 목적성과 필연성으로 볼 경우 묵조선은 당연히 필연성으로 제기된다는 것은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다. 묵조선은 곧 일체의 진리가 본래부터 어디에나 갖추어져 있다는 본증과 그것이 실제로 어디에나 언제나 생생하게 드러나 있다는 현성공안의 입장이다. 때문에 본래 완성되어 있는 것을 어떻게 자각하느냐가 곧 묵조선에서 수행의 문제로 부각된다. 혹자는 깨침이 본래부터 갖추어져 있고 드러나 있다면 수행의 무용론을 말할런지도 모른다. 그러나 오히려 그러한 이유로 인하여 그것을 자각할 필요가 대두된다. 곧 자신이 어떤 존재이며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하는 것이 활작용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모르고 드러내지 못하는 존재는 인간으로서 자각이 결여되어 있기때문이다.
따라서 그것을 드러내려는 행위가 곧 只管坐禪으로서의 가부좌이다. 이것은 깨침을 얻기 위한 준비나 수단이 아니라 깨침의 현성으로서의 본증이다. 그리고 그 본증을 마음속에서 체득하는 방식이 비사량으로서의 심리체험 곧 자각이다. 이것을 몸소 좌선삼매속에서 경험하는 행위가 신심탈락이고 감각탈락이다. 그리하여 탈락을 거친 본증과 그것의 자각에 의하여 비로소 모두에게 진리로서의 공안이 투득되고 현성된다. 따라서 묵조선의 수행체계는 가부좌의 좌선과 본증의 자각과 그것을 탈락을 통하여 내면으로 체험하는 비사량이 근거가 되어 있다.
그래서 좌선을 통하지 않은 깨침은 무의미하고, 자각이 결여된본증은 공허한 이론일 뿐이다. 이것이 자신에게 비사량을 통한 탈락의 체득이 아니라면 그 좌선과 그 자각은 제각각 단순한 형식으로서의 좌선일 뿐으로 영원히 드러나지 않은 깨침의 이치에 지나지 않는다. 이로써 가부좌의 좌선은 더 이상 수행형태만의 좌선이 아니다. 이미 깨침의 모습으로 당당하게 앉아있는 모습으로 드러나 있다. 그래서 좌선은 몸의 默과 마음의 照가 어우러진 모습이다. 따라서 좌선이 깨침의 體性이라면 그 깨침이 탈락을 통하여 비사량으로서 체득된 본증에 대한 자각이야말로 깨침의 내용이다. 이러한 경우에 비로소 묵조는 자신의 내면에서 일체의 번뇌와 분별이 없는 탈락의 체험으로 다가오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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