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말
초의의순(艸衣意恂, 1786-1866)은 조선 후기의 대표적 불교인으로서 출가 수도자였지만, 여러 분야에도 탁월한 소양을 갖춘 팔방미인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에 대한 호칭은 여러 가지가 있다. 시서화삼절(詩書畵三絶)로 불렸듯이 그는 당대의 뛰어난 예술가였으며, 다성(茶聖)으로도 칭송된 것처럼, 한국의 차문화를 중흥시킨 다인(茶人)이기도 하였다.
"頌": 그 뜻을 선전함이다.
"選要疏": 그 요긴하고 오묘한 것을 골라내어 근원적 흐름을 소통하게 함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초의가 정통성과 권위를 인정받고 있는 선사들의 어록과 경전을 인용함으로써, 선의 어원과 개념 및 수행법과 관련된 자신의 입장을 보다 객관적, 합리적으로 밝히려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는 중국 임제종(臨濟宗)의 저명한 중펑선사의 설명을 인용함으로써, 선의 연원이 불교의 발원지인 인도에서 전래되었음을 강조하고 있다. 특히, 그가 중국에서 선종이 흥성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을 뿐 아니라, 한국선종의 중국적 원조가 되는 후이넝보다 훨씬 후대의 법손인 중펑의 설명을 먼저 들어 선의 근원을 밝히려 한 점은 주목된다.
선문에서 사용된 염송은 긴 세월을 통해 수 많은 선사들에 의해 지어지고 전해져 왔으므로 그 수를 정확히는 알 수 없다.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진각국사 혜심(眞覺國師 慧諶, 1178-1234)이 그의 문인이었던 진훈(眞訓) 등과 함께 1125칙(則)의 공안(公案)과 그에 관한 염송 및 고화(古話)를 채집하여 {선문염송집禪門拈頌集} 30권을 간행하였다. 여기에 각운(覺雲)이 338칙을 추가한 후, 총 1463칙의 모든 공안에 대한 해설을 붙인 {염송설화拈頌說話}를 간행하였다. 초의는 그 중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40여 칙을 임의로 발췌하여 주석(註釋)과 사기(私記)를 붙여 {선문염송선요소}라고 이름지었던 것이다. 따라서, 이 책에는 초의의 선수행관과 공안관이 잘 나타나 있으며, 이를 통해 우리는 초의의 선에 대한 포괄적 사상을 더욱 잘 살펴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초의의 선사상을 알 수 있는 또 하나의 자료인 {선문사변만어}는 {선문수경禪門手鏡}에 나타난 백파의 선론 비판에 치우친 한계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선문사변만어}에 대한 분석을 통하여 백파의 선사상과 구별되는 초의 선의 특징을 살필 수 있으므로, 이 논문에서는 같이 검토하기로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승려였던 그가 초의 선사(禪師)로 불렸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는 또한 초의 율사(律師)로도 호칭되듯 근대 한국의 율맥을 형성하고 전승하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으며, 화엄산림(華嚴山林)의 회주였던 사실이 보여주듯 교학에 밝은 법사(法師)이기도 하였다. 아울러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 1762-1836),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 1786-1856) 등의 유학자들과도 교유한 사실은 현대의 다종교적 사회에 부여하는 의미도 크다. 이 논문에서는 초의가 100여년 간에 걸쳐 전개된 선 논쟁을 불러 일으킨 장본인이었음에 주목하여, 그 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던 그의 선에 관한 중요한 자료의 하나인 {초의선과艸衣禪課}와 이미 잘 알려진 {선문사변만어禪門四辨漫語}를 중심으로 그의 선에 대한 특징을 새로운 시각에서 고찰해 보려고 한다.
초의의 선 사상에 관한 근래의 주목되는 연구로는 1970년대에서 1990년대에 걸친 한기두에 의한 일련의 연구와 최성열의 연구를 들 수 있다. 한기두의 연구업적들은 {선문사변만어}를 중심으로 초의의 선사상을 분석하고 그 역사적 평가를 시도하였다. 그는 초의의 선사상을 백파의 선 사상보다 더욱 합리적인 것으로 평가하였으며, 다시 다른 논문에서는 {초의선과}의 일부를 임의로 발췌하고 이를 의역하여 인용하면서 초의의 선 사상을 논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최성열은 앞에서 언급한 논문을 통하여 초의가 그의 {선문사변만어}에서 백파의 선론을 비판한 것이 정당함을 밝혔다. 또한, 김종명은 백파와 초의 사이에 전개된 이종선과 삼종선 논쟁의 배경과 내용을 분석하고 철학사적 의의 및 현재적 의의와 아울러 그 한계성까지 논술하였다. 권기종과 채택수(印幻)도 초의의 선사상을 언급하면서, 조선후기의 선 논쟁에 대한 개요를 영문판 한국불교 개설서에서 간명하게 소개하였다.
{초의선과}는 초의가 자신과 후학들의 선 수행을 위한 실천적 교안으로 쓴 것이었는 데, 이를 통해 그의 선사상의 지향점이 어디에 있었는 지를 살펴 볼 수 있다. 이 책의 본명은 {선문염송선요소禪門拈頌選要疏}로서 초의가 스스로 지어 40여년 간 머물렀던 수도장인 대둔사(大芚寺)의 일지암(一枝庵)에서 집필한 것이다. 이 책은 간기(刊記)가 없는 필사본(筆寫本)으로만 전해지고 있는 데, 용운(龍雲)이 편집한 {초의선사집艸衣禪師全集}에 수록되어 있다. 초의 자신이 쓴 이 책의 해제의 일부분에 대한 초역을 통하여, 이 책의 성격을 살펴 보면 다음과 같다:
"禪": [중국의] 중봉(中峯중펑, 1263-1323)선사는 "[선은] 산스크리트어인 선나(禪那, dhy na) [를 줄인 말]이니, 이는 사유수(思惟修)라 불리며 또한 적멸(寂滅)이라고도 불리니 곧 한 마음의 극치를 가리킨다"라고 말씀하셨으며, 육조(六祖) 혜능(慧能후이넝, 638-713)선사는 "자기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 것을 안으로 관찰하는 것을 이름하여 선이라 한다"라고 하셨다. 구곡(龜谷)선사가 이르기를 "이는 교학적 가르침과는 다르게 특별히 전해온 일미선(一味禪)이다. 귀종( 宗꾸이쭝, 9세기 활동)선사가 작별 인사차 온 한 스님에게, '어디로 가려느냐?'라고 물으니, 그 스님이 '오미선(五味禪)을 배우러 여러 곳을 다니려 합니다'라고 대답하므로 선사께서 말씀하시기를 '여러 곳에는 오미선이 있겠지만 내게는 오직 일미선이 있을 뿐일세' 하니....."
"門": {선요경禪要經}에 따르면, 기제개(棄諸蓋)보살은 부처님께 "선수행에 필요한 비결은 한 가지 뿐입니까? 여러 가지가 있습니까? 만약 여러 가지가 있다면 두 가지의 법칙이 있다고 할 것이며, 한 가지 뿐이라면 한없는 중생들을 포용하는데는 부족하지 않겠습니까?"라고 여쭈었다. [이에] 부처님께서는 "훌륭한 집안의 아들이여! 선수행에 필요한 방법은 한 가지도 아니며, 또한 여러 가지도 아니다. 모든 생명의 성품은 허공과 같은 것이다..... 모든 객관적 현상들을 포섭하여 둘이 아닌 문에 들어가 넓고도 철저히 그리고 깨끗이 [마음을] 비워 담담하게 선정에 드는 것이 선문[의 가르침]이다"라고 하셨다.
"拈": 그 그물의 벼리를 떨쳐 들어올림이다.
"頌": 그 뜻을 선전함이다.
"選要疏": 그 요긴하고 오묘한 것을 골라내어 근원적 흐름을 소통하게 함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초의가 정통성과 권위를 인정받고 있는 선사들의 어록과 경전을 인용함으로써, 선의 어원과 개념 및 수행법과 관련된 자신의 입장을 보다 객관적, 합리적으로 밝히려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는 중국 임제종(臨濟宗)의 저명한 중펑선사의 설명을 인용함으로써, 선의 연원이 불교의 발원지인 인도에서 전래되었음을 강조하고 있다. 특히, 그가 중국에서 선종이 흥성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을 뿐 아니라, 한국선종의 중국적 원조가 되는 후이넝보다 훨씬 후대의 법손인 중펑의 설명을 먼저 들어 선의 근원을 밝히려 한 점은 주목된다.
그러나, 그도 후이넝처럼, '내관(內觀),' '자심(自心),' '부동성(不動性)'의 중요성은 강조하고 있다. 또한, 그는 일미선에 대한 강조를 통하여, 비록 선사들의 가풍은 일정치 않다 하더라도, 그들에 의한 가르침의 내용은 한결같음을 주장하고 있으며, 이를 통한 선수행의 지향점도 제시하고 있다. 따라서, 그 당시 승려로서의 본분을 망각한 채, 세속사에 관심을 쏟던 이들에게 간접적인 경종을 울려주려 한 그의 의지를 읽을 수 있다.
초의는 {선요경}을 인용하여 선수행의 방법을 설명하고 있는 데, 이 점은 조사들의 어록(語錄)이 중요시되던 당시의 선문에서는 특이한 경우라 할 수 있다. 즉, 그는 선사의 가르침과 함께 부처와 보살의 가르침을 통한 불교의 전통성을 강조하면서, 일체의 차별을 부정하는 불이선(不二禪)도 내세웠다. 이는 불보살의 교설과 선사들의 가르침이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는 것을 보이려 한 의도인 것 같다. 특히, 아집과 독선에 얽매여 있던 당시의 선수행자들에게는 마음을 비우고 융통성을 갖출 것을 강조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초의는 염송(拈頌)을 통하여 선의 요지를 나타내려 하였으며, {선요소}는 선수행법의 핵심을 보여주기 위하여 집필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선문에서 사용된 염송은 긴 세월을 통해 수 많은 선사들에 의해 지어지고 전해져 왔으므로 그 수를 정확히는 알 수 없다.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진각국사 혜심(眞覺國師 慧諶, 1178-1234)이 그의 문인이었던 진훈(眞訓) 등과 함께 1125칙(則)의 공안(公案)과 그에 관한 염송 및 고화(古話)를 채집하여 {선문염송집禪門拈頌集} 30권을 간행하였다. 여기에 각운(覺雲)이 338칙을 추가한 후, 총 1463칙의 모든 공안에 대한 해설을 붙인 {염송설화拈頌說話}를 간행하였다. 초의는 그 중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40여 칙을 임의로 발췌하여 주석(註釋)과 사기(私記)를 붙여 {선문염송선요소}라고 이름지었던 것이다. 따라서, 이 책에는 초의의 선수행관과 공안관이 잘 나타나 있으며, 이를 통해 우리는 초의의 선에 대한 포괄적 사상을 더욱 잘 살펴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초의의 선사상을 알 수 있는 또 하나의 자료인 {선문사변만어}는 {선문수경禪門手鏡}에 나타난 백파의 선론 비판에 치우친 한계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선문사변만어}에 대한 분석을 통하여 백파의 선사상과 구별되는 초의 선의 특징을 살필 수 있으므로, 이 논문에서는 같이 검토하기로 한다.
Ⅰ. 초의의 두 선서와 선 사상
1. {선문염송선요소}와 초의의 선 사상
우리는 앞에서 소개한 {초의선과} 즉 {선문염송선요소}의 편성과 내용을 통하여 초의의 선 이해와 그가 강조한 수행의 핵심을 살펴볼 수 있다. 전통적으로 공안의 수는 1,700가지로 알려져 있으나, 실제로 수행자들이 참구하는 데 쓰이거나 그들에 의해 자주 거량되는 것은 수 십가지에 불과하다. 공안은 깨달음을 얻기 위한 수행 과정에서 필요하기도 하며, 깨달음을 점검하기 위한 기준으로도 쓰이고 있다. 그러나, 각각의 공안 내용 자체에는 본질적인 우열은 없다고 본다. {초의선과}에 수록된 40여 가지의 공안들과 그에 대한 염송들 가운데 우선 순위로 보아 상대적으로 중요성이 더 큰 것으로 보이는 앞부분의 것부터 검토해 보자. 첫 번째 인용된 공안은 돼지(猪子)가 화제이다.
"古則": 어느날 부처님께서 두 사람이 돼지를 마주 들고 지나가는 것을 보시고 "이것이 무엇인고?" 하고 물으시니, 두 사람이 말하기를, "부처님은 모든 것을 다 아시는 지혜(一切智)를 갖추셨다고 하는 데 돼지도 모르십니까?"하니, 부처님께서 이르시길, "잠깐 그냥 지나쳐 가는 물음일세"라고 하셨다.
여기서 초의는 부처님이 꽃을 든 것은 청중의 뼈를 뚫어 버리고, 눈동자까지도 바꾸어 놓을 만큼 엄청난 사건이지만, 그러한 상황에 동요하지 않는 선수행자라면, 오히려 그 상황에 도전하려 할 것이기 때문에, 부처님도 그런 사람은 부담스러워 하여 피하려 할 것이라는 후앙룽의 자신감 넘친 주장에 공감하고, 그러한 선수행자의 기상을 북돋우려 하고 있는 것이다. 아울러 초의는 그러한 안목도 갖추지 못한 채 허세와 만용을 부리는 사이비 선수행자가 스스로를 반성하게하는 계기도 만들어 주고 있다.
1463칙을 망라한 {염송설화}는 모두 30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1권은 석존과 관련된 30칙을 다루고 있으며, 제2권은 보살과 아라한을 비롯한 인도의 불교 성인들과 관련된 공안을 포함하여 41칙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3권은 마하가섭, 아난, 아쉬바고샤(A vagosha, 馬鳴), 나가르주나(N g rjuna, 龍樹) 등의 인도 조사들과 뿌티타모(菩提達摩, Bodhidharma), 후이커(慧可, 487-593), 훙런(弘忍, 601-74)을 비롯한 중국의 조사들에 관한 36칙의 공안을, 제4권 이하는 후이넝과 그 이후의 중국 선사들에 관한 공안과 염송으로 이루어져 있다. 초의가 {선문염송선요소}를 편찬하기 위해 선택한 40칙의 공안들은 모두 제1권과 제2권에 있는 것들로서, 처음의 20칙은 부처와 관련된 것들이며, 나머지 20칙은 {화엄경}, {법화경}, {금강경} 등 대승불교의 중심 경전들에서 추출한 것들이다.
우리는 앞에서 소개한 {초의선과} 즉 {선문염송선요소}의 편성과 내용을 통하여 초의의 선 이해와 그가 강조한 수행의 핵심을 살펴볼 수 있다. 전통적으로 공안의 수는 1,700가지로 알려져 있으나, 실제로 수행자들이 참구하는 데 쓰이거나 그들에 의해 자주 거량되는 것은 수 십가지에 불과하다. 공안은 깨달음을 얻기 위한 수행 과정에서 필요하기도 하며, 깨달음을 점검하기 위한 기준으로도 쓰이고 있다. 그러나, 각각의 공안 내용 자체에는 본질적인 우열은 없다고 본다. {초의선과}에 수록된 40여 가지의 공안들과 그에 대한 염송들 가운데 우선 순위로 보아 상대적으로 중요성이 더 큰 것으로 보이는 앞부분의 것부터 검토해 보자. 첫 번째 인용된 공안은 돼지(猪子)가 화제이다.
"古則": 어느날 부처님께서 두 사람이 돼지를 마주 들고 지나가는 것을 보시고 "이것이 무엇인고?" 하고 물으시니, 두 사람이 말하기를, "부처님은 모든 것을 다 아시는 지혜(一切智)를 갖추셨다고 하는 데 돼지도 모르십니까?"하니, 부처님께서 이르시길, "잠깐 그냥 지나쳐 가는 물음일세"라고 하셨다.
"艸衣疏": {설화說話}에는 처음 교학적인 뜻을 나타낸 것이라 했다. 그 뜻이 있다는 것은 저 두 사람에게 이 [깨닫는] 도리를 터득하게 하고저 하셨는데, 두 사람이 물음의 뜻을 알지 못하고 어긋나게 대답하므로 부처님이 그에 대해 실없어 하시고 없던 일로 덮어두시며, 재미없어 하시며 돌아오시게 되었다. 무의자(無衣子)의 뒷 게송은 이 뜻을 읊은 것이다. 대개 부처님은 일체지를 갖추셨기 때문에 그 두 사람이 돼지를 메고 가는 것을 보시고 일부러 그렇게 물어 보심으로써 그들이 메고 가는 바의 도리를 깨닫게 하려 하신 것이었다. 이는 자비에서 나온 것으로서 가시덤불에 몸을 던지는 것과 같은 경우였지만, 그 두 사람은 어리석어 그 뜻을 알지 못하고 어긋나게 대답하였다. 결국, [부처님은] 물음에 대한 마땅한 대답을 얻지 못하셨기 때문에, 물음을 던진 의도를 숨기시고, 그 상황에 맞추어 담담히 [대화의] 방향을 돌이키셨던 것이다. '반드시 이 죽은 뱀이.....' 이하는 선지(禪旨)로서 조사의 뜻을 희롱조로 나타낸 것이다. 즉 그 두 사람도 바른 안목을 갖추게 되어, 부처님의 훈계와는 상관없이 활발하게 걸어 나가며 이르되, '우리의 이 돼지는 다만 돼지라고 이름지어 불렀을 뿐인데 부처님이 어찌 이를 모르시겠는가?'하고, 부처님께서도 '내 어찌 모르겠느냐? 다만 시험삼아 한번 물어봤을 뿐일세'라고 대답하셨다면, 두 사람 모두를 인정하는 것이 되었을 것이다. 이것이 그들에게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 깨달음을 얻는 길이 되었을 줄 안다. 무의자의 앞 게송은 이 뜻을 들어내 보인 것.....
앞의 고칙은 {선문염송집}의 11번째 공안이다. 이 공안은 "부처님이 도솔천을 떠나시기 전에 이미 [정반]왕궁에 내려 오셨고, 모태에서 나오시기 전에 이미 [세상] 사람들을 제도하셨다"라는 등의 첫 번째 공안을 비롯한, 신비성을 지닌 10번째까지의 것들과는 차원이 다르다. 오히려, 이 공안을 통해서는 사냥꾼, 목축인, 농부, 백정 등의 평범한 세상 사람들과 함께 하는 부처님의 모습을 살펴 볼 수 있다. 나아가 이 공안은 사냥꾼이나 백정 같은 이들로부터 '돼지를 보고도 몰라서 물어 보느냐'는 식의 불경스러운 언사에 의해 부처님이 면박당하는 듯한 정황을 보여주기도 한다. 초의가 이러한 공안을 첫 번째로 선택하여 소개한 의도는 선이란 서민들의 일상생활 속에 자연스럽게 실현되어야 하는 것임을 보이기 위한 것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아울러 '마음이 부처,' '마음과 중생과 부처는 하나,' '깨달으면 부처요 깨닫지 못하면 범부 중생' 등과 같은 선문의 가르침에 입각하여 사회적 신분과는 상관없이, 본질적으로 평등 무차별한 인간의 존엄성을 강조함으로써, 누구라도 선 수행에 동참할 수 있게 하려는 의도도 엿볼 수 있다. 혜심과 각운의 말을 인용한 그의 주석도 중국선사들보다는 한국선사들의 견해에 더 큰 비중을 두고 있다. 이러한 점들을 통해 우리는 초의가 선불교의 가르침을 특정 계층의 인사들에만 국한시킨다든지, 현학적인 논변에만 머문다든지, 아니면 중국선사들의 어록에 맹목적 권위를 부여한다든지 하는 교단의 분위기에 경종을 울리려 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는 또한, 조선 불교의 중흥조로서 사교입선(捨敎入禪)의 전통을 확립한 청허휴정(淸虛休靜, 1520-1604)의 사상과 법통을 계승하면서, 부처와 중생이 다르지 않음도 강조하고 있다.
두 번째 화제는 '꽃을 들어 보임(拈花)'이다. 이는 삼처전심설(三處傳心說)의 하나로서, {선문염송집}의 제5칙을 구성하고 있다. 그 내용은 "부처님이 영산(靈山)에서 설법을 하실 때 하늘에서 네 가지 꽃비가 내리자 부처님은 그 중의 꽃 한송이를 들어 청중에게 보이시니 [아무도 그 뜻을 몰라 망연히 있는데] 가섭(迦葉)이 미소를 지었다. 부처님이 이르시기를 '나의 정법안장(正法眼藏)을 마하가섭(摩訶迦葉, Mah k apa)에게 부촉하노라'고 하셨다"는 것이다. 그러나, 초의는 이 공안의 제목만 열거하고 다른 설명은 없이 곧 바로 염송을 보이고 있다. 이 주제는 유명한 만큼 {선문염송집}에 수록된 선승들만 하더라도 30여명이 이 공안에 대한 염송을 붙였는 데, 그 중 초의는 뒷부분에 있는 중국 송나라의 후앙룽쭈신(黃龍祖心, 1025-1100)의 송을 인용하였으며, 그 송은 다음과 같다: "납승(衲僧)의 해골을 뚫고 지나가 눈동자도 바꿔 버린다. 위험에 부닥쳐도 두려워하는 사람이 없으니 어디에서 석가 노인을 뵈랴!" 이 공안에 대한 초의의 주석은 다음과 같다:
처음 두 구절은 장차 빼앗으려고 (기세를 제압하려고) 하면서 먼저 북돋아 추어 주는 것이요, '위험에 부닥쳐도.....' 이하는 다시 빼앗아서 그를 두렵게 하는 것이다. '납승의 해골을 뚫어 버리고 눈동자를 바꿔 버린다'고 말하는 것은 비록 이 것이 좋은 방법이라 하더라도 만약 뚫어버리고 바꿔버리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는 제대로 된 승려를 만나면, 그는 도리어 이 뚫어버리고 바꿔버리는 것을 세존에게로 옮기려 할 것이니 어찌 위험하지 않겠는가? 부처님도 세상의 의심 많고 두려움 많은 사람들이 위험한 곳에는 가지 않는 것처럼, 저런 위험한 선수행자는 피하려들 것이다. 그렇다면 '어느 곳에서 석가 노인을 뵈랴'함은 황룡이 스스로 제대로 된 선수행자로 자처하고 이렇게 농담을 한 것이다.
여기서 초의는 부처님이 꽃을 든 것은 청중의 뼈를 뚫어 버리고, 눈동자까지도 바꾸어 놓을 만큼 엄청난 사건이지만, 그러한 상황에 동요하지 않는 선수행자라면, 오히려 그 상황에 도전하려 할 것이기 때문에, 부처님도 그런 사람은 부담스러워 하여 피하려 할 것이라는 후앙룽의 자신감 넘친 주장에 공감하고, 그러한 선수행자의 기상을 북돋우려 하고 있는 것이다. 아울러 초의는 그러한 안목도 갖추지 못한 채 허세와 만용을 부리는 사이비 선수행자가 스스로를 반성하게하는 계기도 만들어 주고 있다.
세 번째 화제는 '자리에 오름(升座)'이다. 이것은 {선문염송집}의 제6칙을 구성하고 있으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어느날 대중이 모여 [마음을 고요히] 안정시키고 있는 사이에 부처님이 [설법] 자리에 오르셨다. 문수[보살]이 종을 치고 이르기를 '법왕의 법을 살펴 보라. 법왕의 법이 이와 같으니라' 하니, 부처님은 곧 그 자리에서 내려오셨다." 초의는 이 화제의 제목만 적고 이어 송나라의 징옌(淨嚴, 1072-1147)의 송을 들고 있는 데, 그 송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수미산은 바다에서 솟아 하늘 밖에 누었으나, 동서남북 [어디에서도] 그 끝을 볼 수 없어라. [또한,] 한 폭의 캔버스에도 누일 수 없으나 마침내 천하의 사람들에게 그러함을 전하네." 이에 대한 초의의 주석을 살펴 보자.
부처님이 법좌에 오르시자 말없이 계시니 그 기품과 모습이 거룩하고 위대하여 그 속을 헤아리기 어려운 것은 수미산(須彌山)이 향수해(香水海) 가운데에서 솟아올라 하늘 밖에 높이 누어 있어 사천하의 사람들이 그 끝을 볼 수 없는 것과 같다. 보려해도 볼 수 없거늘 하물며 한 폭의 좁은 캔버스에 그려내어 마침내 천하의 사람들에게 전할 수 있겠는가? 대개 문수가 종을 치고 부처님의 법좌에 오르신 뜻을 들어내 펼치려 하나, 이는 작은 캔버스에 수미산을 그려 세상 사람들에게 전하려는 것과 같다. 백파 노인이 여기에 삼구(三句)를 안배하려고 그것을 조각하듯 쪼아냄은 글의 이치를 해치는 줄도 모르는 것일 뿐 아니라 지극히 구차하기도 한 것이다.
즉, 부처님이 자리에 올라 침묵하는 모습이 한없이 위대하기 때문에, 지혜 제일로 알려진 문수보살조차도 그것을 표현하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이는 언어나 문자로는 실상을 제대로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을 지적한 것이며, 또한 언설보다 침묵이 더욱 중요함을 강조하려는 것으로도 볼 수 있다. 그리고 당시 풍미하고 있던 백파선사의 {선문수경}에서 임제 삼구에 모든 선을 배당하여 분류하려 한 시도는 상식에도 어긋난다. 이 부분은 {선문사변만어}에서 본격적으로 다루고 있으므로 자세한 논변은 뒤로 미룬다.
네 번째 화제는 '정해진 법 (定法)'으로서 이는 {선문염송집}의 제13칙을 구성하고 있으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어떤 외도가 '어제는 어떤 법을 말씀하셨습니까?'라고 [부처님께] 여쭈어 보자, 부처님은 '정법을 말했네'라고 하셨다. 외도가 '오늘은 어떤 법을 말씀하시렵니까?'라고 다시 묻자, 부처님은 '부정법(不定法)을 말하려네'라고 하시니, 외도가 '어제는 정법을 말씀하셨는 데 오늘은 왜 부정법을 말씀하시려 하십니까?' 하므로, '어제는 정해졌지만 오늘은 정해지지 않았네'라고 하셨다." 초의는 처음 다음과 같은 지옌푸(薦福, ?-1045)의 송을 들었다: "영산회상(靈山會上)의 여래선(如來禪) 문답 별로 현묘한 것 없네. 오늘은 정해지지 않았지만 어제는 정해졌다하니 할미 치마 빌려 입고 할미 같이 절하네." 다음은 이에 대한 초의의 주석이다:
곧 여기서 논의된 문답과 영산 회상의 문답이 모두 여래선으로서 전과 다름이 없음을 밝힌 것이다. 대개 영산회상 시절부터 본래 두 가지 선이 있었으니, '꽃을 들어 보이심'은 격외선(格外禪)으로서 말로 가르친 것에 포함되지 않는 바, 조사선(祖師禪)이다(난취옌[南泉, 748-834]의 이른바 활구[活句]요, 린지의 이른바 제1구다). [그리고,] 방편으로 문답을 개설하여 실상을 나타내 보인 것이 여래선이다(린지의 이른바 제2구이며, 진각의 이른바 반사반활구[半死半活句]이다)..... 어떤 노인은 이 두가지 선이 전래한 뜻을 잘못 알았기 때문에, 그 뜻을 말하기를 "영산회상에서 '꽃을 들어 보인 것'만 조사선에 해당할 뿐, 그 밖의 말씀은 모두 교"라하였다. 천복이 왜 영산회상의 것을 [모두] 여래선이라 했는지 그 저의가 괴이하다. 이렇게 생각하면 홀연히 왜곡된 견해로 말하기를 '꽃을 들어 보임'은 비록 조사선이지만 원래 여래께서 가르치신 바이기 때문에 여래선이라 한다는 것을 알리라. 이 사람처럼 고루하게 선을 이해해서는 안된다. 이 노인은..... 여래선이란 이름만 알았지 여래선 전래의 뜻은 알지 못했다. 그리고 여래선을 격외선으로 간주한 것은 여래선만 존귀한 줄로 알았을 뿐, 가르침의 격식에 내외의 구별이 있음은 모른 것이다. 또한, 삼처전심설 가운데서 분반좌(分半座)설만 뽑아내어 여래선으로 간주한 것은 여래선 뿐 아니라 조사선도 모르고 있는 것이다..... 슬프고도 괴로운 일이라고 하겠다.
위에서 우리는 초의가 선의 시간적, 공간적 초월성과 아울러 조사선과 여래선의 차이에 대하여 논한 것을 볼 수 있다. 즉 약 2,500여년 전 석존이 인도의 영취산에서 대중과 함께 머무시며 설법 교화하시던 시절의 상황과 근대의 한국에서 선을 지도하는 초의의 진리 인식에 대한 근본적 상황은 다름이 없다는 의식을 그는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어서, 그는 조사선이란 말과 글을 쓰지 않고, 일반적 격식도 초월한 선을 의미하는 격외선을 뜻한다고 하며, 언설로 교시한 선은 여래선으로 규정하고 있다. 따라서 그는 영산회상에서 보인 선을 모두 여래선이라고 한 지옌푸의 잘못을 지적함과 아울러, 영산회상에서의 염화는 조사선의 가르침에 해당하며, 그 외의 가르침은 선이 아니라 모두 교학적 가르침이라고 주장하면서 여래선을 인정하지 않은 어느 노인, 즉 백파의 그릇된 이해를 비판하고 있음을 우리는 알 수 있다. 그들은 모두 선과 교, 격외와 격내(格內) 혹은 교격(敎格), 조사선과 여래선의 이름과 내용에 대해 잘못 이해하고 있거나, 그 개념들의 차이점에 대해서도 혼동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조사선과 여래선을 모두 격외선으로 취급하고, 삼처전심설 중 오직 분좌설만 여래선의 가르침에 배당한 백파는 스스로의 무지를 드러내었을 뿐 아니라, 많은 불교인과 수행자에게 모범을 보여야 할 입장에 있는 이로서 선문에 끼친 악영향이 큼을 초의가 개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논변은 {선문사변만어}에서 집중적으로 다루어지게 된다.
다섯 번째 화제는 '오통(五通)'인데, 이 공안은 {선문염송집의} 제14칙을 구성하고 있으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오통선인(五通仙人)이 '부처님에게는 여섯가지 신통(六通)이 있으시며, 저는 다섯가지 신통(五通)을 가지고 있습니다. 제게 없는 한 가지 신통은 무엇입니까?' 하고 여쭈니..... 부처님이 '그 한 신통이란 네가 내게 물은 것을 말한다'라고 말씀하셨다." 초의는 따이훙빠오인(大洪報恩, 1058-1111)의 염송에 의해 이 공안을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외도가 여쭌 우연한 물음에 대해 부처님이 '이것이 그 한 신통이다'라고 하셨으니, 이는 바로 벌레가 나무를 파먹은 결과 우연히 글자를 만든 것과 같다. [그리고,] 부처님이 잘 가르쳐 주셨기 때문에 그 선인이 나머지 한 신통에 대해 알게 된 것은 마치 불어온 바람에 [적은] 불이 불길이 되어 땅에 번지는 것과 같다. [또한,] 선인이 마침내 그 신통을 얻은 것은 마치 작은 양의 물이 드디어 시내를 이룬 것과 같다. "예절을 안다"는 것은 차라리 성인(成人)이란 깊이있게 성취한다고 하는 말이니 [즉, 그가] 성인이 아니겠는가?
여기서 우리는 열린 자세로 불교를 이해하려는 초의의 시각을 살펴 볼 수 있다. 즉 부처는 중생의 신분에 관계없이 누구나 지혜와 자비로써 포용하여 깨달음으로 인도하였으며, 선인도 그 가운데 하나다. 비 불교인이라도 불교를 접하여 불법을 터득하게 된다. 선인은 신선으로 통하는 도교적 인물로 볼 수 있다. 초의는 초종교적으로 열린 삶을 살았다. 따라서, 초의는 바른 구도의 자세를 가지고 정직하고 진지하게 정진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부처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음을 강조함으로써, 그 당시의 유학자나 비불교 수도자들에게도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가능성이 있음을 알려 주는 한편, 불교인들에게는 독선과 자만심을 경계하도록 한 것으로도 보인다.
여섯 번째의 화제는 '말없이 있음(良久)'이다. {선문염송집}의 제13칙을 구성하고 있는 이 공안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어떤 외도가 부처님에게 '말 있음도 묻지 않고 말 없음도 묻지 않습니다'라고 하니 부처님은 말없이 계셨다. 그 외도가 찬탄해 이르기를 '부처님께서는 크신 자비로 저의 어리석음의 구름을 헤쳐 열어 주셔서 저로 하여금 [깨달음에] 들게 하셨읍니다'라고 하였다. 외도가 간 후에, 아난(阿難, nanda)이 부처님께 '그 외도가 무엇을 증득했기로 [깨달음에] 들어갔다고 말했습니까?'라고 여쭈니, 부처님은 '세상의 훌륭한 말은 채찍 그림자만 보고도 간다'라고 하셨다." 이 공안과 관련, 초의가 처음 인용한 염송은 따이훙빠오인의 것으로서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말 있음도 묻지 않고 말 없음도 묻지 않음이여, 봄바람은 크게 불고 산새는 지저귀네. 늙은 오랑캐는 방금 졸고 있고 그의 콧구멍은 하늘을 뒤흔드누나. 사십 구년 동안 사람들은 알지 못했네, [부처님이] 헛되게 누런 잎새를 들고 돈이라고 이른 것을. (내려 놓아라)." 이 공안에 대한 초의의 주석을 검토해 보자.
이미 '말 있음도 묻지 않고 또한 말 없음도 묻지 않는 것'은 중도(中道)이니, 원만하여 흠이 없다고 외도에게 굳이 말할 필요는 없다. '봄바람은 크게 불고 산새는 지저귄다'는 것은 법이 법의 위치에 있음이다(자연스러운 이치이다). [감관에 보이고 들리는] 소리와 모양속에 적나라하여 이 시절에는 부처님이 묵언으로 응답하심으로 외도에게 [그 도리를] 가리켜 보이신 것이다. [평화롭게] 졸면서 코고는 소리가 하늘을 흔든다고 이를 만하다. 어찌 특별히 이처럼 나아가 49년 동안 공에 대해 설법하신 것이 누런 잎을 돈으로 만들려는 것이었다고 할 수 있겠는가? 대개 이는 그릇됨을 알아차린 사람이 없었기 때문으로 감히 이와 같은 부끄러운 일을 지었으리라. 그래서 '[의욕을] 내려 놓아라' 했으니 이는 외도를 세우고 부처님을 몰아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초의가 우선 침묵의 중요성을 강조함과 함께 설사 부처님의 말씀일지라도 그대로 받아들이지 말고 그 실상을 꾀뚫어 볼 것을 주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있고 없음을 묻지 않음이 중도라는 표현에서도 그의 탁월한 안목을 살필 수 있는 것이다. 초의가 살던 당시의 정치적, 사회적 상황은 혼란스러웠다. 유학자들로 구성된 기성 보수세력 집단은 자신들의 기득권 유지에 혈안이 되어 있었으며, 불교계 내부에서도 선맥을 인위적으로 조작하고 있었다. 이처럼 혼탁한 시대 상황 속에서 초의가 진리의 세계를 탐구하면서 보여 준 무애자재한 모습을 통해 불이(不二)사상과 중도사상에 입각하면서도 배타적이지 않은 그의 정신세계의 한 단면을 살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어서 초의는 다음과 같은 항목들에 대한 염송과 주석을 붙였다:[범지가 합환화를 든 이야기(梵志擎合歡花話)], [다섯개의 해골 이야기(五箇 話)], [늙은 여인 이야기(老母話)], [보안보살 이야기(普眼話)], [머리를 [진흙길에] 편 이야기(布髮話)], [절을 세움(建梵刹)], [현악기 연주에 대한 이야기(彈琴話)], [[부처님이 희론에 대해] 답하지 않은 이야기(不對話)], [[삼매에 든] 여자 이야기(女子話)], [스스로 반성하는 이야기(自恣話)], [녹야원 이야기(鹿野話)], [[부처님이] 가슴을 쓰다듬으며 한 이야기(摩胸話)], [[부처님이] 두 발을 내보인 이야기(雙趺話)], [[부처님의] 지혜 이야기(智慧話)], [대통지승불(大通智勝佛) 이야기(大通話)], [네 가지 들은 것에 대한 이야기(四聞話)], [[산스크리트어의 모음인] 이자 이야기(伊字話)], [마헤수라 이야기(摩醯話)], [원만한 깨달음에 대한 이야기(圓覺話)], [절 이야기伽藍話], [[{열반경涅槃經}의 毒을] 칠한 북 이야기(塗鼓話)], {원각경圓覺經}(1회)과 {능엄경楞嚴經}(5회) 및 {금강경金剛經}(3회), {문수보살소설반야경文殊菩薩所說般若經}의 구절들 및 [말없는 데 대한 이야기(默然話)]. 여기서는 그 모두를 낱낱이 고찰할 계제가 아니므로 제목들에 의해서 그 내용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초의가 선택한 앞의 주제들을 개괄해 보면 다음과 같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현상을 이해할 때는 물질적 형상에 집착하지 말고 보이지 않는 실상을 이해할 것; 발심 수도하여 본래 갖추어져 있는 덕성과 능력을 계발할 것; 수도를 할 때는 줄의 강도를 알맞게 하여 현악기를 연주해야 하는 것처럼 중도를 지킬 것; 부질없는 희론을 삼갈 것; 여자도 보리심을 내어 수도하면 남자에 못지 않는 삼매의 힘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알 것; 편협한 소승적 수행을 넘어 대승보살도를 닦을 것; 언어 문자 밖에 있는 가르침을 깨달아야 할 것; 부처는 가지도 않으며, 오지도 않는다는 것을 알 것; 망상 집착을 버릴 것; 이해와 수행에 균형과 조화를 이룰 것; 우리의 마음이 바로 수도장임을 알 것; 불교는 보편적인 가르침임; [존재의] 공함을 아는 것이 진리를 깨닫는 것임; 불법은 일상생활 속에 있음 등. 즉, 선수행자에게 요긴한 경구들로 이루어져 있다. 특히, 경전의 주요 구절들에 대한 염송이 적지 않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이는 초의가 옛 선사들이 경의 참뜻을 살려내려는 의도로 염송을 하였다는 점을 부각시키려 한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 초의가 선택한 염송 및 설화를 중심으로 그의 선에 대한 안목과 특징을 살펴 보자.
1463칙을 망라한 {염송설화}는 모두 30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1권은 석존과 관련된 30칙을 다루고 있으며, 제2권은 보살과 아라한을 비롯한 인도의 불교 성인들과 관련된 공안을 포함하여 41칙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3권은 마하가섭, 아난, 아쉬바고샤(A vagosha, 馬鳴), 나가르주나(N g rjuna, 龍樹) 등의 인도 조사들과 뿌티타모(菩提達摩, Bodhidharma), 후이커(慧可, 487-593), 훙런(弘忍, 601-74)을 비롯한 중국의 조사들에 관한 36칙의 공안을, 제4권 이하는 후이넝과 그 이후의 중국 선사들에 관한 공안과 염송으로 이루어져 있다. 초의가 {선문염송선요소}를 편찬하기 위해 선택한 40칙의 공안들은 모두 제1권과 제2권에 있는 것들로서, 처음의 20칙은 부처와 관련된 것들이며, 나머지 20칙은 {화엄경}, {법화경}, {금강경} 등 대승불교의 중심 경전들에서 추출한 것들이다.
그러나, 초의가 나머지 28권의 염송들 가운데에서도 공안을 발췌하여 거기에 대한 주석과 논평을 한 것이 있는지, 아니면 의도적으로 제1권과 제2권의 공안만 발췌했는 지는 현재로서는 확정할 수 없다. 앞으로 이 주제와 관련된 초의의 다른 저술이 다시 발견될 때까지는 앞에서 언급한 자료에 의하여 그의 선사상을 살펴볼 수밖에 없다. 현존 자료에 의하는 한, 초의는 교학적 전거를 바탕으로 선의 원류와 전통의 근본을 석존에게서 찾고 있었으며, 그의 이러한 의도는 중국 선사의 저술과 가르침만 중요시하던 당시의 선문으로 하여금 인도에 대한 관심을 높이게 하고, 당시의 잘못된 선 풍토를 바로 잡으려는 데 있었다고 할 수 있다.
2. {선문사변만어}와 초의의 선 사상
이 책은 초의가 대둔사에 있을 때 지은 것으로서 백파의 {선문수경}에 대한 비판서다. 그 내용은 전체적 총평을 가한 후, 24 가지 화제에 나타난 문제점을 네 가지로 나누어 논한 것이다.
백파는 당시의 유명한 율사인 동시에 선사로서 초의보다는 19세 년상이었다. 그러므로 관습에 따라 선배에 대한 예우로서 만어(漫語)라고 자기의 비판을 우회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아무튼 우리는 {선문사변만어}로부터도 초의의 선이해와 특징을 읽어 낼 수 있다. 우선 초의가 백파를 비판한 첫 번째 문제를 살펴 보자.
이 책은 초의가 대둔사에 있을 때 지은 것으로서 백파의 {선문수경}에 대한 비판서다. 그 내용은 전체적 총평을 가한 후, 24 가지 화제에 나타난 문제점을 네 가지로 나누어 논한 것이다.
백파는 당시의 유명한 율사인 동시에 선사로서 초의보다는 19세 년상이었다. 그러므로 관습에 따라 선배에 대한 예우로서 만어(漫語)라고 자기의 비판을 우회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아무튼 우리는 {선문사변만어}로부터도 초의의 선이해와 특징을 읽어 낼 수 있다. 우선 초의가 백파를 비판한 첫 번째 문제를 살펴 보자.
육은 노인이 말하기를, "'자리 나눔(分座)'은 죽임(殺)으로서 다만 죽임 뿐이고 살림(活)이 없는 까닭에 여래선이 되며, '꽃을 들음(拈花)'은 살림과 죽임을 겸한 까닭에 기틀(機)과 작용(用)을 갖추었으므로 조사선이 된다"고 했다.
[논평] "'세 곳에서 마음을 전함(三處傳心)' 가운데 '자리 나눔'은 죽임을 전함이요, '꽃을 들음'은 살림을 전함이며, '발을 보임(示趺)'은 죽임과 살림을 함께 보이심이다." 이는 구곡 노인의 말씀이다. 요즈음의 "'자리 나눔'은 다만 살림이요, '꽃 들음'은 살림과 죽임을 겸했다"란 말은 구곡의 말씀 가운데 없다. 대개 '죽임과 살림(殺活),' '기틀과 씀(機用),' '비춤과 씀(照用),' 등은 '본체와 작용(體用)'과 더불어 특별히 그 이름만 다를 뿐이다. 만약 '기틀과 작용'을 잘 이해한다면 '죽임과 살림,' '본체와 작용'도 역시 예로써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죽임과 살림'이 서로 어울려 돕고 떨어지지 않음이 또한 이와 같다. 그러므로 죽임을 전함은 반드시 살림을 겸하고, 살림을 전함은 반드시 죽임을 겸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이는 필연의 이치다.....
만약 다만 죽임 뿐이거나 살림 뿐이라면 솜씨가 좋지 않은 것이다. 만약 '자리 나눔'이 과연 죽임 뿐이라면 이는 부처님도 솜씨가 좋지 않은 이라는 것이다. 청원(淸源칭위엔, ?-740)이 다만 죽임만 전하고 살림을 알지 못했다면 그도 또한 솜씨가 좋지 않은 이다. 어찌 이럴 수가 있겠는가? 그러므로 마땅히 알라. '자리 나눔'은 다만 죽임 뿐이고 살림이 없다고 함은 옳지 않은 것이다.
백파가 삼처전심을 조사선과 여래선으로 분류함에 따른 오류를 논파하는 대목이다. 초의는 삼처전심설 자체에 대한 사실적 논급은 차치하고, 고려말 {염송설화}를 지은 구곡 각운 선사의 말을 인용했다. 부처님이 영산회상, 다자탑전(多子塔前), 입멸처(入滅處)에서 가섭에게 마음을 전하셨다는 세 곳 가운데 살활(殺活)을 배당하여 특성을 보이고자 한 것이다. 그런데 백파는 전통적 견해를 무시하고 독단적으로 이설을 내었다. 초의는 "삼처전심설"은 모두 한마음의 중요성을 전한 것으로서 그 설들 사이에는 어떠한 질적 차이도 없다고 본다. 따라서, 그는 백파가 부질없이 살ㆍ활과 여래선ㆍ조사선이란 말로서 긁어 부스럼을 만들고 있다고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살활은 기용과 같이 하나의 다른 측면 혹은 기능을 보이는 상대적인 용어로서 서로 표리관계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따로 떼어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부처가 가섭이란 동일한 인물에게 전한 동일한 내용의 사건들을 여래선과 조사선으로 분류할 수 있겠는가 하는 지적이다. 따라서, 초의는 백파의 그러한 억지 주장은 무지함의 결과로서 옳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을 잘못 인도하게 되고 나아가 부처를 욕되게 하는 것이라고 본다. 이어서 백파의 선관에 대한 초의의 비평을 들어보자.
육은 노인이 말하기를, "선에는 세 종류가 있다. 첫째는 조사선인 데 이는 상근기에 대한 것이기 때문에 하나하나의 말귀절이 허공에 도장을 찍는 것과 같다..... 두 번째는 여래선이며, 이것은 중근기에 대한 것이기 때문에 하나하나의 말귀가 물에 도장을 찍는 것과 같다..... 위의 두가지 선을 합하여 격외(格外)선이라 이름한다..... 세 번째는 의리선(義理禪)이니 이는 교화의 방법 중 하근기에 대한 것이기 때문에 하나하나의 말귀가 진흙에 도장을 찍는 것과 같다..... 이 세 가지 선을 임제 삼구에 배당하면, 첫 번째 조사선은 곧 제1구로서 기용을 갖추고 살활을 모두 겸한 것이다. 따라서, 제1구에서 깨달으면 조사 및 부처의 스승이 된다. 두 번째 여래선은 곧 제2구로서 살만 있고 활이 없기 때문에 제2구에서 깨달으면 인간 및 천상의 스승이 된다. 세 번째 의리선은 제3구로서 오직 신훈(新薰)만 있을 뿐, 본각(本覺)이 없기 때문에 제3구에서 깨달으면 자기도 구하지 못한다"고 하였다.
[논평] 대개 부처님과 조사들이 상근기를 가르칠 때는 말귀로서 하지 않고 다만 한 기틀을 보이신다. [그리고,] 직접 [제자의] 기틀에 따라 대응하실 뿐, 말로 설명하지 않으신다. 이제 "상근기에 대한 것이기 때문에 하나하나의 말귀절이 허공에 도장 찍는 것과 같다"고 말함은 구태어 말귀절로서 기틀을 대함이니 이러한 기틀을 가진 사람은 상근기가 아니다. 또한, '도장으로서 허공에 도장 찍는다'는 비유는 그 자체가 말귀절로써 말을 하는 것이다. 또 모모 등의 말귀절은 조사문 가운데에 있는 말귀절이므로 그것을 조사선이라고 이름한다면, 이는 곧 조사선이 본래 말귀절로써 이름을 얻은 것이 된다. 또한 '법마다 모두 다 참된 것'이라는 말 역시 조사문의 가르침이지만, 이것이 여래의 말씀과 완전히 같다는 이유로 이것을 폄하여 여래선이라고 한다면, 옛날부터 누가 감히 그 것을 폄하여 여래(如來)라는 이름을 붙였겠는가?. 또한 '여래선으로써 격외선에 배당함..... 여래선은 곧 제이구'라고 함은..... 자기말로 스스로를 공격하는 것이다. 또 '제 삼구중에는 오직 신훈만 있고 본각이 없다'는 뜻도 독단적인 판단에 의한 것이다.
결국, 초의는 백파가 주장한 조사선, 여래선, 의리선의 3종선 개념과 이 개념들에 대한 범주 설정의 타당성에 대하여 이의를 제기하고, 또한 임제 삼구를 독단적, 임의적으로 배치한 것도 잘못되었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초의는 선의 분류 기준을 언구를 사용하는가 사용하지 않는가의 차이에 두고, 언구를 사용하지 않는 경우를 조사선으로, 언구를 사용하는 경우를 여래선으로 본다. 따라서, 그는 언구를 사용하는 의리선도 여래선에 포함시켜야 한다고 간주한다. 이러한 기준에 따르면, 부처의 말씀이라도 '꽃을 들어 보임'과 '침묵함'과 같이 언구를 쓰지 않은 경우는 조사선으로 볼 수 있고, 조사로 불리는 선사들이 제자들과의 선문답에서 사용한 언구가 논리를 초월한 것이었다 하더라도, 그 때 사용된 언구는 여래선에 포함시킬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초의는 부처와 관련된 선을 여래선, 조사와 관련된 선을 조사선으로 구분한 인물에 따른 선의 분류법을 택하지 않고, 언구의 사용여부에 의해 선을 구분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결과적으로, 언어를 사용하여 깨우치는 선을 정격으로 본다면 언어를 사용하지 않고 깨우치는 선을 격외라 할 수 있고, 따라서 조사선을 격외선이라고 지칭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므로, 초의는 백파가 여래선과 조사선을 모두 격외선으로 분류하여 혼란을 일으키고 있다는 비판을 가하고 있다. 아울러 초의는 선에 근기의 차이를 두거나 선 자체에 우열 및 등급을 두는 것을 부정한다. 비록 근기의 차이가 없지는 않겠지만, 모든 인격은 동등하게 존중되어야 한다는 평등 무차별 정신에 입각하고 있는 것이다. 초의는 결국 모든 선을 여래와 조사, 정격과 격외의 차이에 따라 이종선(二種禪)으로 분류하는 것이 논리적으로 타당함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이어서 선종오가(禪宗五家)에 대한 백파의 인식을 초의는 어떻게 비판하고 있는 가를 살펴보자.
육은 노인이 말하기를 "두 가지 선을 다섯 종파에 배치시켜 본다면, 조사선에는 임제와 운문(雲門) 두 종파가 속한다. 그러나, 임제종은 기용을 모두 갖추었기 때문에 조사선의 정맥이 되지만, 운문종은 절단(截斷)만을 밝혔을 뿐, 기용을 설명해 내지 못한 까닭에 임제종에는 미치지 못한다. 여래선에는 조동(曹洞), 위앙( 仰), 법안(法眼) 등 세 종파가 속한다. 그 중, 조동종은 향상(向上)을 깊이 밝혀서 순금에 해당하므로 여래선의 정맥이 되며, 위앙종은 본체와 작용은 밝혔으나, 향상은 밝히지 못하여 순금에는 해당되지 못하므로 조동종에는 미치지 못한다. [그리고,] 법안종은 [작용은 무시하고] 마음만 밝힌 까닭에 위앙종에도 미치지 못한다.
[논평] [백파는] 두 가지 선을 다섯 종파에 배대시키면서 "임제종은 기용을 모두 갖추었기 때문에 조사선의 정맥이 되고, 운문종은 절단만을 밝혔을 뿐, 기용을 설명해 내지 못한 까닭에 임제종에 미치지 못한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기용(機用)을 떠난 밖에 별도로 물결을 따름(隨波)을 절단함이 있고, 물결을 따름을 끊어 없애는 것 외에 별도로 기용이 있다는 것인가? 이는 말에 집착하여 그 뜻을 헤아리지 못한 것이다. 또한 기용을 설명해 내면 그 것이 있고 설명해내지 못하면 없다는 것인가?.....
"위앙종은 체용만 밝히고 향상을 밝히지 못하여 순금에 해당되지 못하므로" 오히려 조동종의 "향상(向上)을 깊이 밝혀서 순금(純金)에 두루미친 데에 함께 할 수 없다" 하니 향상을 밝힘과 못 밝힘 및 순금에 두루미침과 그렇지 못함을 어떤 기준에 따라 이렇게 자세히 알 수 있겠는가?..... 고불(古佛)로 통하면서, 백장(百丈)에게서 공부를 배운 후 1500명의 대중이 모인 곳에서 참선을 지도하는 선지식이 되었던 [위앙이] 기용을 다 갖춘 조사선을 전혀 알지 못했고 겨우 여래선의 진금포의 반정도만 알았단 말인가?...... 법안도 일찍이 조사선을 설했거늘 이제 말하기를 "오직 마음만 밝혀 즉 용(用)을 거두어 체(體)에 돌이키기만 하는 까닭에 (다만 여래선만 알고), 위앙종에도 미치지 못한다"고 하니 이와 같은 여러 가지 이야기는 누구한테 배운 것인가? 누가 전해 준 것인가?.....
백파가 중국 선종의 다섯 종파와 두 종류의 선 형식을 잘못 이해한 이유는 그가 당시 풍미하고 있었던 임제종에 소속되어 있었기 때문에 자기 종파의 가르침을 더욱 우수한 것으로 간주하면서, 다른 종파의 가르침들을 평가절하시키려 하였기 때문이다. 신라 하대에 선종이 한국에 처음 전래된 후 구산선문(九山禪門)이 형성되었으며, 구산선문의 개산조는 대부분 마쭈따오이(馬祖道一, 709-88) 문하의 후예들로서 그들은 중국의 선종이 오종으로 분파되기 이전의 전통을 따른 것으로 볼 수 있다. 고려말 태고보우(太古普愚, 1301-1382) 선사는 중국 임제종의 쉬우칭꿍(石屋淸珙, 1272-1352)의 법을 받아 온 후, 조정의 힘을 빌어 원융부를 두고 구산문을 통합시켰다.
그리고, 조선에 들어와서는 교단의 주류를 이룬 서산휴정(西山休靜, 1520- 1604)의 후예들이 조계 전통의 유일한 계승자로 간주한 태고를 해동의 초조(初祖)로 삼아 임제종풍을 선양해 왔던 까닭에 백파는 그 전통의 흐름에만 매몰된 채 표류하고 있었던 것이다. 초의도 그와 같은 법맥의 전통 속에 있었으나 백파의 독단적 주장을 묵과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백파는 오종을 서열화시켜 임제종을 최우수 종파로 평가하였으며, 그 다음 운문종, 조동종, 위앙종, 법안종의 순서로 우열을 매겼다. 그리고, 임제종과 운문종만 조사선으로 인정하고 나머지는 여래선으로 분류하였다.
그 당시의 한국 선종은 임제종 일색이었기 때문에 설사 백파가 다른 전통을 무시하는 글을 썼다 하더라도 다른 종파와의 불화나 논전이 있을 리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백파의 선종에 대한 평가는 다만 임제종도들에게 자기 전통에 대한 자긍심을 갖고 수행에 매진하게 하려는 격려의 의도에서 비롯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에 대하여, 초의는 불편부당한 입장에서 서서, 과거의 그 어느 선사도 백파가 한 것 같이 선종을 분류한 예가 없었음을 주장하고, 오종의 개조와 대표적 제자들의 사례 및 그들에 대한 전통적인 평가들을 열거하면서 백파의 독단이 얼마나 편협하며, 부적절한 지를 설명하였다. 초의에겐 오종의 조사들 모두가 우열을 가릴 수 없는 빼어난 인격과 법력을 지닌 조사선의 동등한 선지식들로서 그들은 각자의 개성이 달라 제자들을 가르치는 방법만 달리 했을 뿐, 그들의 목표는 한결 같이 제자들로 하여금 깨달음을 얻게 하려는 데 있었던 것이다. 한마디로 오종은 한뿌리에서 생겨난 여러 줄기였던 것이다. 따라서, 초의는 자기 종파의 전통을 중요시 여긴 만큼 다른 종파의 전통도 존중해 줄 줄 아는 공평무사한 식견을 가진 선승이었던 것이다.
또한, 초의는 따로 항목을 정하여 즉 "이선래의(二禪來義)"와 "격외의리변(格外義理辨)"을 통해 선 분류의 유래를 권위있는 선사들의 어록 등을 인용하여 고증하고 그것의 역사적 전개와 까닭을 논리적으로 자세히 밝혔다. 그의 변증방식은 당시 사대부를 중심으로 한 지식계층에 새롭게 대두되었던 실사구시(實事求是)의 실학적(實學的) 기풍과 청조(淸朝, 1616-1911)에서 풍미한 학문적 사조인 고증학(考證學)의 방법이었다. 보수적 입장에 서서 자의적 해석을 시도한 백파와는 달리, 초의는 사실에 입각하여 잘못을 바로잡으려는 비판적, 진보적 사상을 견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방법론을 사용할 수 있었다.
백파의 견해에 대한 그의 합리적 논증은 주관적 견해 위에서 전개었던 것이 아니라, 객관적 증거를 바탕으로 하고 있었다. 초의는 백파의 선에 대한 저술 내용을 단순히 백파 개인의 오류 문제로만 보지 않고, 그 오류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무비판적으로 따를 수 있는 후학들에게 끼칠 악영향을 고려하여 그 오류를 밝혀서 수행자들에게 올바른 안목을 보여 주려한 자상한 선사였다고 하겠다.
Ⅱ. 초의 선 사상의 특징
앞에서 검토한 초의의 두 가지 선서를 기초로 초의의 선에 관한 특징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초의는 {선문사변만어}를 통해 백파의 '삼종선'을 비판하고 그 대안으로 이종선을 주창하였다. 당시의 보수적 선문에서 풍미하고 있던 백파 선사의 {선문수경}에서는 임제삼구에 모든 선을 배당시켜, 조사선ㆍ여래선ㆍ의리선으로 분류하고, 그 셋을 다시 격외선ㆍ의리선으로 분류하였다. 그러나, 초의는 백파가 '조사와 여래'라는 인물 및 '격외와 의리'라는 제접 방법의 분류에서 혼돈을 일으키고 있음을 지적하고 그 문제점을 합리적으로 정리해 낸 것이다. 즉, 초의는 선 전통을 인물과 방법의 두가지 측면에서 분류하여, 각각 조사선과 여래선 및 격외선과 의리선으로 구분하였다.
첫째, 초의는 {선문사변만어}를 통해 백파의 '삼종선'을 비판하고 그 대안으로 이종선을 주창하였다. 당시의 보수적 선문에서 풍미하고 있던 백파 선사의 {선문수경}에서는 임제삼구에 모든 선을 배당시켜, 조사선ㆍ여래선ㆍ의리선으로 분류하고, 그 셋을 다시 격외선ㆍ의리선으로 분류하였다. 그러나, 초의는 백파가 '조사와 여래'라는 인물 및 '격외와 의리'라는 제접 방법의 분류에서 혼돈을 일으키고 있음을 지적하고 그 문제점을 합리적으로 정리해 낸 것이다. 즉, 초의는 선 전통을 인물과 방법의 두가지 측면에서 분류하여, 각각 조사선과 여래선 및 격외선과 의리선으로 구분하였다.
둘째, 초의는 선종 전통의 기원과 정통성의 근거를 석존에게 두었으며, 인도 조사들의 선 사상도 상당히 중요시하였다. 그는 자신의 이러한 주장을 입증하기 위하여 대승불교의 중심 경전들로서 교종의 소의경전들이 된 {화엄경}, {법화경}, {금강경}등을 인용하였다. 그러므로, 초의가 중국선사들과 한국선사들의 염송을 인용하고 있었지만, 그의 저의는 교학적 전거를 통해 선의 원류와 전통의 근본을 석존에게서 찾고, 중국 선사들의 선사상에만 몰두해 있던 당시 선승들의 관심을 인도 조사들의 사상에로 유도함으로써 고착화 된 선풍토를 개선하는 데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셋째, 초의는 선의 시간적, 공간적 초월성과 민족적 주체성을 강조하였다. 그는 약 2500 여년 전 인도의 영취산에서 석존이 대중과 함께 머물며 설법 교화하던 시절의 상황과 근대의 한국에서 선을 지도하던 초의 자신의 진리 인식에 대한 근본적 상황은 다름이 없음을 보여 주고 있었다. 그는 선사들의 견해를 인용할 때도 중국선사들보다 한국선사들의 것에 더 많은 관심과 비중을 두고 있었는 데, 선에 대한 전거로서도 중국선사들의 어록에 권위를 의존하던 교단의 비주체적 분위기에서 벗어나 국내 선적을 보다 많이 예시함으로써 민족문화에 대한 자부심을 드러내 주고 있었다.
넷째, 초의는 선 이해에 있어서 근기의 차이를 인정하지 않았으며, 선종 종파의 우열을 정하는 것도 부정했다. 수행자들 사이에 근기의 차이가 없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모든 인격을 동등하게 인정하고 존중해야 한다는 평등 무차별 정신을 보여주고 있었다. 초의는 오종의 조사들이 모두 우열을 가릴 수 없는 빼어난 인격과 법력을 지닌 동등한 조사선의 선지식들로서 개성과 제자들을 가르치는 방법이 다를 뿐, 그 본질은 한결 같이 깨달음을 얻게 하려는 데 있었으므로 결과적으로 일치한다고 평가했다. 그는 백파가 임제종을 중심으로 삼으면서 다른 종파들은 상대적으로 격하시키고 있다고 비판하면서 자기 종파와 전통이 중요한 만큼 다른 종파와 전통도 평등하게 인정하고 존중해야 함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그는 무시되고 소외되었던 여래선과 의리선의 가치를 회복시켰으며, 그것들을 조사선 및 격외선과 동등하게 인정하고 있었다.
다섯째, 초의는 선문에서 흔히 쓰는 기본용어의 참뜻을 해설하였으며, 그 용어들을 사용할 때는 합리적으로 적용할 것을 강조했다. 이를테면 조사선과 여래선의 특성에 대하여 초의는 석존이 관련된 선을 여래선으로 치부하면서 석존 이후의 선종 발달에 따라 형성된 정통 법맥을 이어간 선사들의 선을 조사선으로 지칭하는 식의 인물에 따른 피상적 명칭보다 언구의 본 뜻에 따른 내용에 착안할 것을 제시했다. 초의는 조사선이란 꽃을 들어 보임과 같이 언설을 쓰지 않음으로써 일반적 격식을 초월한 선 즉 격외선을 말하며, 의리선은 언설로 교시한 선이라고 주장하였다. 즉 언어를 사용하여 깨달음을 얻으려는 의리선을 정격으로 본다면 언어를 사용하지 않고 깨우치는 선을 격외선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언설을 쓰지 않았다는 점에서 석존의 삼처전심설은 모두 한결 같이 격외선이며, 조사들의 언구는 비록 내용이 논리에 벗어났다 하더라도 언설을 썼다는 점에서는 의리선이라고 본다. 그러므로 교학의 뜻을 바르게만 이해하면, 의리선을 통해서도 깨달음을 얻을 수 있고, 격외선을 한다고 하더라도 형식에만 집착하고 그 뜻을 깨닫지 못하면 헛수고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다. 즉, 초의는 선을 분류할 때도 무비판적 관행을 묵수하지 않고, 본질적 성찰을 강조하였다.
여섯째, 초의는 선수행자의 상황윤리를 강조했다. 초의는 신분에 관계없이 각자가 본래 갖추어져 있는 덕성과 능력을 믿고 계발할 것과 다른 이의 입장도 존중하도록 가르쳤다. 수도의 과정에서는 중도를 지키며, 이해와 수행에 있어서는 균형과 조화를 이루고 부질없는 희론을 삼갈 것, 보리심을 내면 남녀를 초월하여 평등하게 삼매의 힘을 얻을 수 있음을 알 것, 수도장은 바로 우리 마음임을 알고 일상생활 속에서 불법을 깨달아 갈 것, 현상의 이해에 있어서 형상에의 집착을 버리고 실상을 이해해야 하며, 언어와 문자밖에 있는 가르침을 깨달아야 할 것 등 수행자가 현실 상황에 적응할 지침도 제시해 주었다.
일곱째, 초의는 진보적, 개방적 자세를 가지고 실학적, 고증학적 방법에 의해 자신의 담론을 전개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주관적 견해에 바탕을 둔 것이 아니라 전통적 입장에 서서 객관적 증거를 통해 당시 선문의 독단성을 합리적으로 비판하고 있었다. 즉 초의의 비판적 담론은 비판을 위한 비판이 아니라 당시의 사람들에게 올바른 깨달음의 안목을 보여 주려한 선각자적 자비심의 발로로서 표출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맺음말
우리는 앞에서 초의의 두 저술을 통하여 그의 선사상의 특징을 살펴 보았다. 원문을 많이 인용하였는데 독자들이 그의 주장을 직접 듣는 것이 효과적이라는 판단에서였다. 결과적으로, 긍정적 측면들만을 지적해 낸 것으로 지적될 수도 있을 것이다. 따라서, 앞으로는 그의 사상적 한계성을 다루는 작업도 시도될 필요가 있겠다. 예컨대, 초의의 선론은 그 당시는 물론이고 지금까지도 대체로 학계의 공감을 얻고 있으면서도, 정작 선문의 현실에서는 대다수의 수행자들이 백파가 강조한 임제종 위주의 격외선 즉 조사선 전통을 지켜온 탓에 여타의 종파나 수행방법에 대해서는 체계적으로 논의해 오지 못했음을 부정할 수는 없다. 따라서, 그 이유는 무엇이며 어떠한 이론적 혹은 상황적 한계가 있는지를 검토해 봐야 할 것이다. 그리고, 석존의 격외적 즉 비언설적 교시는 조사선의 범주로 보아야 한다고 하면서도 여래가 보인 것이므로 여래선 안에 가두어 두어야 한다고 주장한다면,혼란감을 줄 수도 있으므로, 인명과 법명에 의한 선 분류만으로는 충분치 못한 감이 들기도 한다.
초의는 당시의 사회 문화적 상황을 감안한 주체적 관점에서 타성에 젖은 보수적 선문에 개방적 담론을 제시하였다. 즉, 그는 선이 전문 수행자 뿐만 아니라 서민들의 일상생활 속에서도 자연스럽게 실현되어야 함을 지적하면서 선의 보편성을 강조했던 것이다. 초의에게는 선과 삶이 둘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는 일체가 선 아님이 없는 삶을 살았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는 교외별전(敎外別傳)만 내세우거나 문자에 의한 현학적 지식에만 매몰되지 않고, 석존의 지혜와 자비어린 교학적 가치의 중요성을 일깨운 후, 선적 장점을 드러내어 부처와 중생이 평등하고 활발하게 절대진리의 세계에 함께 호흡할 수 있음을 제시했다. 또한, 그는 진지한 참구와 깊은 체험이 따르지 않은 천박한 교학자의 구두선(口頭禪)을 질타함과 아울러, 본분에 충실한 수행자가 못되면서도 허세와 만용으로 날뛰던 사이비 선수행자가 자기도취에 빠진 것을 스스로 반성하게도 해 주고 있는 것이다.
초의는 자신의 열린 삶을 통해 누구라도 정직하고 편견없이 구도의 자세를 갖추고 진지하게 정진하면, 부처와 같은 경지에 도달할 수 있음을 알려주었다. 또한, 그 당시의 유학자를 포함한 비불교 수행자들에게도 수도의 가능성을 열어 준 반면, 불교인들에게는 독선과 자만심을 경계하도록 충고도 하고 있었다. 당시의 정치 사회와 종교 문화 등 전반적 여건을 감안해볼 때, 사대부들로 구성된 기성 보수세력은 자신들의 기득권 유지에 급급하였고, 불교계 내부도 선 전통 해석에 대한 독선적 주장으로 혼란했던 상황에서, 초의는 자신의 삶을 통해 달관한 사람들은 무위(無爲)와 자연(自然)을 즐기고 천진난만함을 누릴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온갖 분별을 넘어서려 한 그의 불이(不二)적, 중도(中道)적 삶을 통해서는 그의 대범한 기상도 느낄 수 있다. 초의가 보여 준 열린 자세와 진솔한 삶의 향기는 오늘을 사는 종교인들은 물론 일반 지성인들에게도 각박한 상황을 타개해 나갈 수 있는 지혜와 위안이 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