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秦漢 時期 學術 環境의 變化
Ⅱ. 方士 및 方術의 興起
Ⅲ. 秦 時期 方術 影響의 확대
Ⅳ. 西漢初 方士 세력의 增長
Ⅴ. 西漢 中葉 이후 方術 發展의 推移
Ⅵ. 맺는 말
Ⅱ. 方士 및 方術의 興起
Ⅲ. 秦 時期 方術 影響의 확대
Ⅳ. 西漢初 方士 세력의 增長
Ⅴ. 西漢 中葉 이후 方術 發展의 推移
Ⅵ. 맺는 말
Ⅰ. 秦漢 時期 學術 環境의 變化
古代 중국사의 전개에 있어서 秦漢 시기는 매우 중대한 전환기였다. 정치·사회 구조상 큰 변화가 있었음은 물론, 학술·사상의 영역에 있어서도 前代未聞의 새로운 국면이 전개되었다. 특히 권력과 학문 사이의 상호 역학 관계에서 볼 때, 春秋戰國(특히 戰國)이 百家爭鳴 혹은 百花齊放으로 표현되는 학문적 자유와 활력으로 충만한 시대였다면, 秦漢은 專制皇權이 학술을 압도한, 조금 심하게 표현하면 학문이 국가 권력의 시녀로 매김질된 시기였다.
그런데 학술 풍토의 이러한 변화는 학문 내적인 선택의 결과라기보다, 당시의 정치·사회 구조의 변화에 기인하는 것이다. 사실상 춘추전국 시기의 백가쟁명은 周왕실의 쇠퇴와 列國爭覇, 그리고 이에 따른 西周 이래의 세습 귀족 질서 붕괴로부터 비롯된다. 세습 귀족에 의해 독점되던 世官 제도가 무너지자, 다양한 출신 배경의 지식인들("士" 계층)이 나름대로의 학설을 들고 국가의 政事에 간여하거나 대거 학술사상계에 진출해 百家 學術을 꽃피우는 것이다. 班固는 諸子學術의 王官起源說을 주장하는 한편, 다음과 같이 설파한다.
諸子는 모두 열 개의 유파로, 그 가운데 지금 알 수 있는 것은 아홉에 불과하다. 이들 모두는 王道가 이미 미약해지고, 제후들이 정치에 힘을 쏟는 데서 일어났다. 당시의 군주들은 조악하고 특수한 방편들을 좋아해서, 九家의 학설(학술)이 분분하게 함께 일어난 것이다. 이들은 고대의 왕도에서 각자 한 가지씩 단서를 끌어와 그 훌륭한 바를 숭상하고, 이로써 학설을 제창하여 제후들을 취합했다.
비록 諸子가 모두 고대 王官에서 기인한다는 반고의 주장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힘들지만, 위의 내용은 西周의 世官 제도가 붕괴하고 신흥 지식인 계층이 출현하는 역사적 상황을 잘 반영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秦漢에 이르면 중국 전역이 황제를 정점으로 하는 중앙 정부의 강력한 중앙집권적 專制 하에 통일된다. 이런 시대적 추세에서 볼 때, 여러모로 불안정한 춘추전국의 국면에서 발흥했던 諸子 사상의 상당 부분이 大一統의 지배구조를 확고히 하려는 專制 皇朝의 요구에 부합되지 않았음은 당연하다. 따라서 秦에서 漢初에 이르는 시기, 통일 제국의 皇朝는 완급을 조절하는 가운데 지속적인 사상 통제를 시행하게 되고, 권력자에 대한 지식인의 위상 역시 이전의 "조언자" 내지는 "스승"의 자리에서 "신하(臣)"의 위치로 뚜렷이 하향 조정된다.
이런 학술 환경의 변화를 반영하는 최초의 사건은 秦始皇의 焚書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지나치게 억압적이고 급격하게 진행된 秦의 학술·사상 통제 정책은 결국 실패로 끝나고, 그 뒤를 잇는 漢은 우선 秦의 실패를 거울삼아 보다 관대한 정책을 시행해 국력을 축적하고 민심을 모으는데 주력한다. 그러나 漢의 국력이 최고조에 달하는 武帝에 이르면, "罷黜百家, 獨尊儒術" 정책 시행과 더불어 帝國의 사상 통제 역시 일차적으로 완성되기에 이른다. 이러한 일련의 추이 속에서, 우리는 이 시기의 지식인과 그 학술의 운명이 점차 專制皇權의 정치적 이해에 의해 결정 지워지는 방향으로 선회하고 있음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말해, 어떤 학술사상이 皇朝의 정치·사상적 수요에 부합한다면 여전히 발전을 도모할 수 있었지만, 그 반대의 상황에서라면 더 이상 학파 혹은 사조로서의 존속을 기대하기 어렵게 되었던 것이다.
위에서 간략하게 서술한 시대 상황의 변화 아래서, "儒學 특히 儒家經學이 어떻게 漢朝의 통치 이념으로 자리 잡았는가?"의 문제는 이미 학계에서 충분한 논의를 거쳤다고 보여진다. 필자는 武帝 이래 유가경학이 漢朝를 풍미했다는 사실에 굳이 이의를 달고 싶은 생각이 없다. 그러나 "유학이 당시 주된 통치 이념으로 기능했다"는 것과 "漢 皇朝가 유학만을 유일한 학술로 인정하고 후원했다"는 것은 약간 다른 문제에 속한다. 필자는 전자에 동의하지만 후자는 좀더 신중한 검토를 필요로 한다고 판단한다.
앞에서 이미 지적한 바와 같이, 漢代는 학술·사상에 대한 권력의 우위가 분명해지고, 동시에 皇權의 지지를 바탕으로 儒家經學이 크게 번창한 시대다. 그러나 본 논문의 주제와 관련해, 우리는 漢 제국의 최고 통치자들이 유가 이외의 사상에 대해서도 줄 곳 지대한 관심을 보여왔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漢代는 권력의 관심과 선택이 특정 학술의 존립과 계승의 관건이 된 시대라는 사실을 염두에 둘 때, 이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물론 思想史나 學術史 발전 과정을 외적 환경 중심으로 설명하는 것은 다소 위험한 일이다. 이는 자칫하면 사상 혹은 학술 내부의 논리 전개 과정을 피동적이고 환경 지배적인 것으로 오해하게 만들 소지가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가 학술의 외적 환경으로부터 논의를 전개하는 것은 그 동안 이 문제에 대해 심각한 오해가 있어왔다고 판단되기 때문이다.
Ⅱ. 方士 및 方術의 興起
秦漢 제국 시대의 학술과 사상에 대해 가장 강력한 정책을 폈고 깊은 영향을 끼친 두 帝王, 秦始皇과 漢武帝는 서로 닮은 점이 많다. 이들은 모두 강력한 카리스마를 지녔으며, 무한 권력에의 의지가 충만했고, 정복과 팽창으로 점철된 삶을 살았다. 무엇보다 이들은 "絶對性"을 추구했으며, 이러한 절대성의 추구는 "神仙"과 "不死"에 대한 관심으로 표현되었다. 진시황과 한무제는 모두 神仙說의 열렬한 신봉자들로, 대량의 方士를 招致하고 육성하는 한편, 三神山을 찾기 위해 많은 사람들을 渤海에 띄워 보냈다.
하지만 역사를 몇몇 영웅의 활극장으로 만드는 이야기꾼이 아닌 진지한 연구자라면 이쯤에서 이 두 帝王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친 "方士"와 그들의 지적 배경 쪽으로 관심을 선회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史記·封禪書』는 이렇게 전한다.
齊의 威王과 宣王의 때에, 鄒衍의 무리가 五德終始의 流轉에 관한 이론을 세워 저술했다. 秦始皇에 이르러 齊나라 사람이 이를 奏上하니, 始皇은 이를 받아 들였다. 그리고 宋毋忌·正子僑·充尙·羨門高·最後는 모두 燕나라 사람으로, "方僊道"를 행했는데, 形解銷化를 鬼神의 제사에 의지했다. 騶衍은『陰陽主運』으로 諸侯들에게 이름을 날렸는데, 燕·齊 해안 지역의 방사들이 그 術을 전했으나 통하지 못했다. 그러자 괴이하고 아첨하며 경솔하게 영합하는 무리들이 이로부터 일어나니, 그 수가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齊 威王과 宣王 그리고 燕 昭王 때부터 사람들을 바다로 들여보내 蓬萊·方丈·瀛洲를 찾았다. 이 三神山은 渤海의 가운데 있다고 전해졌다.… 秦始皇이 天下를 병탄함에 이르러, 해안 지역에 도달하니, 三神山에 관해 이야기하는 方士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이에 始皇 스스로 바다로 가려고 했으나 도달하지 못할 것을 두려워하여,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童男·童女를 데리고 바다로 들어가 三神山을 구하도록 했다.…
위의 문헌 자료를 통해 우리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위의 인용문에서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또 다른 사실은 司馬遷이 方士 및 이들의 활동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었다는 점이다. "鄒衍의 학설을 전했으나 통하지 못했다"던가 "괴이하고 아첨하며 경솔하게 영합하는 무리"라는 등의 표현에서 사마천이 방사에 대해 지녔던 부정적 시각의 일단을 엿보게 된다.
ⅰ. 方士가 중국사에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시기는 대체로 三神山 탐사대가 渤海로 파견되고 鄒衍이 五德終始에 관한 이론을 세운 齊 威王과 宣王 무렵(B.C.356 - BC300)이거나, 혹은 이보다 약간 뒤진다.
ⅱ. 方士는 주로 燕·齊의 海岸 地域을 주무대로 활동했다.
ⅲ. 方士의 학술은 크게 두 갈래의 淵源이 있다. 하나는 騶衍("鄒衍" 혹은 "騶子"라고도 함)으로부터 비롯되는 五德終始·陰陽主運의 이론, 즉 陰陽五行說이다. 다른 하나는 "方僊道"로 불리는 仙術로, 形解銷化 및 鬼神을 섬기는 祭祀 등과 관련이 있다.『史記集解』는 "形解銷化"에 대해 "尸解"라는 풀이를 인용하고 있다. 尸解는 곧 몸은 남겨둔 채 仙化하는 것을 가리킨다.
ⅳ. 秦始皇은 方士를 통해 五德終始說과 三神山說을 전해 듣고, 이를 받아 들였다. 특히 秦始皇은 五德終始說에 의거해 定德改制와 封禪의 受命祭典을 거행한다. 이 이론의 영향은 漢代 이후로도 지속되어, 중국의 政治·社會·文化·學術·思想의 각 방면에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긴다.
위의 인용문에서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또 다른 사실은 司馬遷이 方士 및 이들의 활동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었다는 점이다. "鄒衍의 학설을 전했으나 통하지 못했다"던가 "괴이하고 아첨하며 경솔하게 영합하는 무리"라는 등의 표현에서 사마천이 방사에 대해 지녔던 부정적 시각의 일단을 엿보게 된다.
한편 우리는『漢書·藝文志』의「方技略」과「數術略」을 통해 方士 學術의 早期의 면모를 보다 객관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 우선「數術略」은 天文·曆譜·五行·蓍龜·雜占·形法의 여섯 분야를 포함하며,「方技略」은 醫經·經方·房中·神僊을 포괄한다. "數術"은 곧 天文·曆法 지식과 占卜이 결합된 지식·기술 체계이고, "方技"는 醫學(醫經)·藥學(經方)과 養生·神仙術이 어우러진 古代 生命學의 종합적인 이론·기술 체계에 속한다. 이를 종합하면, 方術은 곧 天文·曆法·醫藥·養生 등과 관련된 고대의 실용 지식·기술 체계와 占卜·神仙 등의 신비주의적 요소가 융합된 고대 학술 체계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는 중국 고대 방술의 구체적 내용과 그 사상적 특징에 대한 보다 상세한 해명이 뒤따라야 할 것이나, 본 논문의 지면 관계상 이 문제에 대한 토론은 다음으로 미루고자 한다. 본 논문의 주제와 관련해, 우리는 方士 계층과 方術이 秦漢 제국에서 누렸던 지위와 영향력의 문제를 보다 중요하게 취급할 것이다.
Ⅲ. 秦 時期 方術 影響의 확대
秦始皇은 方術을 매우 중시했다. 한 예로 方士는 이미 "博士" 職에 진출해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博士는 "古今의 학술을 관장(掌通古今)"하는 秦의 대표적 學官으로 황제의 顧問 역을 담당했다.『淮南子·道應訓』의 許愼 註에 "盧敖는 燕나라 사람이다. 秦始皇이 불러 博士를 삼았으며, 그로 하여금 神仙을 찾게 했으나, 도망가서 돌아오지 않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노오는 곧 方士 盧生이다.『史記·秦始皇本紀』는 盧生이 진시황의 학정과 포악한 성품을 비판하고, 방사인 侯生과 함께 달아난 사건을 기록하고 있다. 비록 이 사건은 진시황의 분노를 일으켜 저명한 "坑儒"의 발단이 되기도 하지만, 그 뒤에도 진시황이 "博士를 시켜『仙眞人詩』를 지었다"거나 "博士에게 占夢을 물었다"는 등의 기록이 남아있는 것으로 보아, 당시의 博士 가운데는 여전히 方技·數術에 능한 인물들이 남아 있었음을 알 수 있다.
秦에서 方術의 저변이 확대되는 중대한 계기의 하나는 "焚書"였다. 焚書는 일체의 私學을 금지하고, 博士가 소장한 책을 제외한 천하의 모든 서적을 불태운 사건이다. 그런데 이런 엄청난 사건의 와중에서도, 方士 계층은 官方의 제재를 받지 않았고, 方技와 數術 방면의 서적은 불태워지는 재앙에서 제외되었다. 이런 사실은 焚書를 주청하는 李斯의 건의에 포함된 "없애지 않는 것은 醫藥·卜筮·種樹의 서적이다(所不去者, 醫藥 卜筮 種樹之書)"라는 구절을 통해 확인된다.
『漢書·藝文志』의 분류에 따르면,「方技略」의 醫經·經方·房中·神僊은 모두 "醫藥"과 관련이 있다. "醫經"은 곧 醫方이고, "經方"은 藥方이다. "房中"은 "약을 제조(制外藥)"하는 처방을 포함하고, "神僊" 역시『黃帝芝菌』 같은 服食을 중시한다. 한편 "卜筮"는 占卜을 통칭하는 것으로,「數術略」의 여섯 분과는 모두 점복과 관련된다. "天文"은 "二十八宿의 차례를 매기고, 五星과 日月 운행의 뒤를 밟아, 이로써 吉凶이 드러나는 天象의 실마리를 잡는(序二十八宿, 五星日月, 以紀吉凶之象)" 占星術의 성격을 지니며, "曆譜"는 "재앙이 길을 막는 근심과 복이 내리는 기쁨이 모두 이에서 나오는(凶 之患, 吉降之喜, 其術皆出焉)" 일종의 "知命之術"이다. "五行" 은 五行의 形氣가 相生相剋하는 원리에 입각해 "그 극단까지 미루어도 미치지 못함이 없는(推其極則無不至)" 式占의 공능을 포함하며, "蓍龜" 는 곧 시점(蓍占)과 구복(龜卜)이고, "雜占" 역시 "모든 일에 나타나는 象의 실마리를 잡아, 善惡의 기미를 묻는(紀百事之象, 候善惡之微)" 점술이다. "形法" 은 곧 만물의 形象에 대한 분석을 통해 "그 聲色氣味의 貴賤과 吉凶을 구하는(求其聲氣貴賤吉凶)" 일종의 骨相占의 성격을 지닌다. 전국 중엽이래, 燕·齊 해안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한 방사는 方技와 數術의 專門家 집단을 형성했다. 앞에서 인용한『史記·封禪書』의 내용 가운데, 方士의 학술적 연원을 方僊道와 鄒衍 이래의 陰陽五行說에서 찾고 있는데, 사실상 전자는 "方技"에 속하며, 후자는 "數術" 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진시황은 일찍이 방사를 우대하고 그들의 주장에 깊은 관심을 표명해 왔다. "내가…, 文學之士와 方術之士를 남김없이 불러 그 수가 매우 많다"고 했는데, 여기서 "文學之士"는 儒生을 골간으로 하는 文士를 가리키며, "方術之士"는 곧 方士다. 당시 方士는 儒生을 포함한 文士와 동등한 위치에 놓여져 있었고, 함께 "士" 계층을 구성했다.
일체의 私學을 금지하고 서적들을 불태운 "焚書"는 특히 儒生에게 큰 타격을 입혔다. 그러나 方術 서적들은 焚書의 대상에서 제외되고, 방사의 활동 역시 官方의 제재를 받지 않는다. 비록 農家(種樹)의 서적 역시 焚書의 재앙을 피할 수 있었지만, 農家가 方術에 비견할 만한 學術·思想的 영향력을 지니지 않았음은 매우 자명하다. 사실상 方術은 焚書 이후 秦 帝國에서 私傳이 허용된 유일한 학술이었다. 게다가 秦 朝廷은 神仙方術의 私傳을 허용하는데 그치지 않고, 천하에 이를 보급하는데 앞장서기까지 한다. 진시황이 그 말년에 博士로 하여금『仙眞人詩』를 지어 천하에 널리 유포시키도록 한 일은 그 대표적인 사례로 볼 수 있다. 이런저런 사정에 비추어볼 때, 방술이 당시 학술·사상계와 민간에 그 영향력을 날로 더해 갔음은 明若觀火하다.
Ⅳ. 西漢初 方士 세력의 增長
西漢初에 이르러도 方術은 여전히 통일 제국 최고 통치자에 의해 중시되었다. 高帝 劉邦은 예전의 秦 祝官을 모두 소집하고, 泰祝과 太宰를 다시 세우는 한편, "나는 사당을 모시고 제사 지내는 일을 매우 중요하게 여긴다. 지금 上帝에 대한 제사 및 山川 諸神 가운데 마땅히 사당을 모셔야 하는 것은, 각자 옛 예법에 따라 사당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라"는 詔令을 내린다. 이에 따라 漢朝는 秦 당시의 神祠를 중건하고, 또한 蚩尤·天社·天水·房中·堂上·五帝·東君·雲中[君] 등의 사당을 설치하며, 각 지역 출신의 巫覡으로 하여금 이들 祠廟의 제사를 관장하게 한다.
高帝 이후로 漢朝는 줄 곳 사당을 모시고 제사 지내는 일을 중시하는 정책을 시행하는데, 이는 "鬼神의 제사에 의지하는(依於鬼神之事)" 方士 계층의 勃興에 대단히 중요한 변수로 작용하게 된다. 실제로 兩漢 시기 전국 각지에 산재한 神祠들은 방사들이 학술을 전수하고 方藥을 제조하는 산실로서의 기능을 수행하며, 方士가 유력한 士族 세력의 하나로 성장하는 중요한 社會·經濟的 토대의 역할을 담당한다. 西漢 成帝 초년이 되면, 국가가 지원하고 方士들에 관리하는 사원이 전국적으로 683 군데에 달하고, 王莽 정권에 이르면 1,700 곳으로 늘어날 정도다. 여기에 민간에서 운영하던 기록에 남아있지 않은 크고 작은 사당까지 합한다면, 그 규모가 얼마나 컸을지 가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이처럼 제사를 중시하는 漢朝의 전통이 方士가 士族化 되는데 필요한 社會·經濟的 토대를 제공했다면, 漢 皇室의 方術에 대한 관심과 方士에 대한 지극한 예우는 方士 계층의 政治·文化的 위상을 提高 시킨다. 한초 文帝에 이르면 방사가 이미 황제의 우대를 받기 시작한다. 史書의 기록에 따르면, 文帝는 方士 新垣平의 말에 의지해 渭陽과 五帝의 사당을 건립하는 동시에, 그를 上大夫로 삼고 千金의 하사금을 내리기까지 한다. 신단평은 漢朝의 定德改制에 관한 논의에도 깊숙이 간여해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하며, 文帝의 신임을 받는다. 비록 垣平은 그 언행이 사기라는 고발을 당해 결국 誅殺을 면치 못하지만, 황실의 方術에 대한 관심은 그 뒤로도 끊이지 않는다. 더불어 한 가지 지적할 필요가 있는 것은 西漢 初에 방사를 육성한 것이 단지 중앙의 황제만이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지방의 侯王들도 방사를 招致하고 예우하기는 마찬가지였는데, 그 대표적인 인물이 淮南王 劉安이다.『漢書·淮南王劉安傳』은 그가 "賓客·方士 수천 명을 招致했다(招致賓客方術之士數千人)"고 기록하고 있다. 그가 편찬한『淮南子』에서 당시 방술 사상의 일단을 읽을 수 있는 것도 이런 사정에 기인한다.
비록 漢武帝가 지방의 왕국 할거 세력을 강력하게 제재함으로써, 侯王들은 더 이상 方士를 육성할 수 없게 되었지만, 무제 본인은 方術에 대단히 심취했던 군주였다. 무제는 특히 諸神에 대한 제사를 공경했으며, 대량의 방사를 招致했다. 그리하여 武帝의 재위 기간 중 李少君·少翁·欒大·公孫卿·公玉帶 등의 방사가 세상에 이름을 떨치게 된다. 武帝 당시 "罷黜百家, 獨尊儒術"의 정책이 시행되기는 했지만, 方士의 學術은 아무런 제재도 당하지 않았고, 오히려 皇朝에 의해 더 한층 비호되기에 이른다. 무제는 방사를 극진히 優待했다. 그 대표적인 사례를 모아 본다.
【少翁】"少翁에게 文成將軍의 벼슬을 내리고, 매우 많은 상을 주었으며, 賓客의 禮로써 그를 예우했다."
* 【 】는 해당 방사 이름.
【欒大】"欒大에게 五利將軍의 벼슬을 내렸다. 몇 달이 지나 네 개의 信印을 얻으니, 五利將軍 그리고 天士將軍·地士將軍·大通將軍의 信印을 몸에 지녔다." "侯王의 지위와 최고의 저택, 그리고 천 명의 시종을 하사했다. 수레와 마차 휘장과 기물로 그 집을 가득 채웠다. 또한 衛長公主를 그에게 시집보내고, 萬斤의 금을 주어 보냈으며, 그의 食邑을 다시 '當利公主'라고 命名했다. 天子가 친히 五利(즉 欒大)의 제자로 자처했다. 문안을 올리고 공양하는 使者가 길 위에 연속하여 서로 이어져 있었다. 大主와 將相 밑으로 모두가 그의 집에 술을 올리고, 선물을 바쳤다. 이 때에 天子는 다시 '天道將軍'의 玉印을 새겨, 御使로 하여금 날개옷을 입고 한 밤에 흰 띄풀 위에 서 있게 했다. 五利將軍 또한 날개옷을 입고 흰 띄풀 위에서 玉印을 받으니, 이로써 그가 제왕의 신하가 아님을 드러내 보였다. '天道'의 글씨가 새겨진 玉印을 몸에 지닌 것은, 또한 天子를 天神에게 인도한다는 의미다."
【公孫卿】"公孫卿에게 郞의 벼슬을 내리고, 동방의 太室에서 神을 제사 지내게 했다" "公孫卿에게 中大夫의 벼슬을 내렸다."
* 【 】는 해당 방사 이름.
위에서 인용한 史料에 근거할 때, 武帝는 작위와 벼슬 그리고 물질적 보상을 후하게 내리고 지극한 예의로 공경하는 등의 다양한 방법으로 方士를 우대했다. 그의 方士에 대한 대우는 종종 儒生에 대한 그것을 훨씬 뛰어 넘었다. 皇室 공주를 시집보내거나, 자신이 제자로 자처하는 등의 사례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大主와 將相 밑으로 모두가 그의 집에 술을 올리고, 선물을 바쳤다"는 기록은 또한 당시 方士 欒大의 威望이 얼마나 대단했는가를 짐작케 한다.
이처럼 방사를 우대하니, 곧 바로 方術의 열풍이 일지 않을 수 없었다.『史記·封禪書』는 "神異하고 괴상한 방술을 상소하여 말하는 齊 땅 사람이 수만 명을 헤아렸다"고 기록하고 있다.「封禪書」에 의하면, 方士 少翁과 欒大는 그 방술이 끝내 큰 효험이 없어 죽임을 당하고 말았으며, 武帝 역시 점차 "方士들의 怪異하고 迂遠한 말에 염증을 느꼈다"고 한다. 그렇지만 무제는 끝내 신선방술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않는다. 그는 일생 동안 仙人을 만나기를 기대하고 不死의 奇藥을 구했으며, 이로 인해 무제의 주위에는 方士의 행렬이 끊기지 않았다.
Ⅴ. 西漢 中葉 이후 方術 發展의 推移
秦에서 東漢末에 이르는 400여년 동안 많은 제왕들이 方術에 주력하고 方士를 육성했다. 이에 따라 방사 계층은 점차로 儒生 士族에 대항하는 또 하나의 士族 세력을 형성한다. 西漢에서는 景帝·武帝·成帝·哀帝 등의 군주가 모두 神仙事를 일으켜, 神祠를 세우고 제사를 지내며, 金丹 제조를 시도하고, 不死藥을 구하는 등의 갖가지 방술에 주력했다. 西漢 정권을 탈취하고 新을 건립한 王莽은 神仙方術을 극도로 좋아해, 심지어 여러 차례에 걸쳐 자신이 신선이 되었음을 선포할 정도였다. 東漢에 이르면 몇몇 皇帝와 侯王들이 여전히 신선방술을 좋아해 궁중에 황제와 노자의 사당을 세우고 長生을 기원하기도 한다.
明帝 때의 楚王 英은 "晩年에 黃老를 더욱 좋아하고, 부처가 되기를 배우며 齋戒하고 제사를 올렸다". 桓帝는 黃老道를 섬겼는데, 궁중에 黃老와 부처의 사당을 건립하기도 했다. 한편『後漢書』는 靈帝 때의 陳王 寵이 "黃帝와 老子를 제사지내고, 長生의 福을 빌었던" 일을 전하기도 한다. 여기서 특히 주목할만한 점은 당시 중국에 막 전입된 불교가 黃老와 동일한 方術의 일종으로 이해되고 있다고 사실이다. 이에 대해 湯用 은 "漢代의 불교는 道術에 의존했다. 중국의 人士, 襄楷 같은 사람들은 이에 기인하여 불교가 黃老와 一家라고 여겼다"고 본다. 당시 사람들은 황제와 노자를 成道한 仙人으로 보는 경향이 강했으며, 부처 역시 黃老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했다. 심지어 "老子가 西方의 夷狄 사이로 들어가 부처가 되었다(老子入夷狄爲浮屠)"는 老子化胡說까지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佛敎가 黃老方術의 일종이라는 인식이 상당히 광범위하게 유통되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어찌 되었건, 兩漢 시기에 方術이 매우 폭 넓은 저변을 확보하고 있었던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范曄은『後漢書·方術傳序』에서 다음과 같 말한다.
漢나라는 武帝가 방술을 매우 좋아한 이래, 道藝를 지닌 천하의 방사들이 크게 고무되어 순풍을 타고 일어났다. 뒤에 王莽이 符命을 속여 사용하고, 光武帝가 圖讖을 더욱 믿는데 이르러, 때를 만난 방사가 모두 내달리고 穿鑿하여 다투어 이를 논의했다.
이 글은 方術의 屈起와 流行이 군주의 취향 혹은 정책 등과 깊은 연관을 맺고 있었음을 여실히 드러낸다. 이와 관련해, 우리는 漢朝의 仕進 項目 가운데 方術이 포함돼 있었다는 사실을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이는 군주 개인의 취향도 취향이지만, 당시 朝廷이 방술에 능통한 인물을 필요로 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西漢 후기 이후 "道家"와 "黃老" 개념의 지시 대상과 내포에는 큰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이런 변화의 징후는 우선 東漢의 사상가 王充(A.D.27-100)의『論衡』에서 뚜렷이 감지된다. 왕충은『論衡·道虛』에서 이렇게 말한다.
武帝가 獨尊儒術의 정책을 시행한 뒤로, 經學은 仕進의 표준이 돼 있었다. 전국 각지의 유생들은 經學의 소양을 주된 항목으로 하는 추천 방식의 仕進制度(察擧)를 통해 漢朝의 관리로 등용될 수 있었다. 그렇지만 漢朝에서 經學만이 유일한 察擧의 과목으로 채택되었던 것은 아니다. 우리는 武帝가 方士에게 작위와 벼슬을 내렸던 사실을 기억한다. 그 뒤로도 兩漢 朝廷은 方術에 능통한 인물을 필요로 했다. 예를 들어, 元帝 初元三年(B.C.46년) 6월에는 陰陽災異에 밝은 인재를 천거하라는 조령이 하달된다. 平帝 元始五年(A.D.5년) 王莽이 執政했을 당시, 兩漢을 통 털어 가장 큰 규모의 察擧가 있었는데, 이 때도 역시 天文·曆算·方術·本草 등의 科目이 포함돼 있었다. 東漢에 들어서면, 安帝 永初二年(A.D.108년)에 災異陰陽의 度數에 밝은 道術의 소유자를 察擧하는 또 한 차례의 조령이 내려지기도 한다.
『後漢書·方術傳』에 따르면 東漢에는 方技와 數術에 밝은 人士가 매우 많았다. 그 가운데는 대대로 방술에 능통한 世家方士가 있는가 하면, 은거하여 벼슬을 마다하는 방사도 있고, 方術과 儒學的 소양을 겸비한 官僚도 발견할 수 있다. 이들은 東漢 사회의 각계 각층에서 활약하는데, 위로는 조정에서 아래로는 촌락에 이르기까지 폭 넓게 분포해 있으면서, 東漢 時期의 학술과 사상계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 더불어 방술의 영향이 미치는 지역이 크게 확대된다는 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전국 중엽에서 서한 초에 이르는 시기에 방사의 활동 무대는 주로 燕·齊 해안 지역에 국한되어 있지만, 그 뒤로 점차 內地로 확산되고, 東漢에 이르면 거의 전국으로 확대된다.
儒家經學과 方術의 발흥에 따라, 兩漢 시기에는 儒生이 方術을 더불어 익히거나, 혹은 方士가 儒術을 표방하는 추세가 널리 확산된다. 西漢의 董仲舒는 일찌감치 陰陽五行의 數術과 儒家 이론을 서로 결합시켰다. 그 뒤로도 양자가 상호 융합하는 추세는 계속되는데, 劉向·劉歆 父子 등의 저명한 漢儒가 모두 陰陽災異의 數術에 능통한 면모를 보인다. 그 외에도,『後漢書·方術傳』등의 史料에 의거해 볼 때, 東漢 時期에 陰陽災異·圖讖·占卜 등의 數術에 밝았던 方術之士들은 여러 상황 아래서 經學을 겸비하고 있었다. 한 讖緯 전문가는 최근 자신의 저작에서 兩漢 교체기의 方士들이 儒家 經術에 빙자하여 대량의 緯書를 제작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당시 王莽은 천하에서 한 가지 기예라도 통한 인재라면 모두 불러들였다. 이들의 특기는 天文·圖讖·鍾律·月令 등을 포괄했으며, "천하에서 기이한 재능을 가진 士人이 총망라되어, 도착한 사람이 전후로 수천 명에 달했다"고 한다.
이들 가운데 상당수는 方術之士로, 이들에 의해 대량의 緯書가 제작되었을 가능성이 높게 점쳐진다. 王莽과 光武帝는 모두 讖緯를 좋아했고, 이에 의존해 권력을 탈취했는데, 특히 光武帝는 "圖讖을 天下에 공포(宣布圖讖於天下)"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 뒤로 讖緯는 東漢 사회에서 思想的 권위를 획득하고, 통치 이념의 성격마저 지니게 되는데, 이런 상황 아래서 數術이 儒術을 빙자하는 추세가 더욱 가속화 된 것은 물론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方術과 儒術 사이에 상호 융합하는 경향만 두드러졌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방사와 유생 사이에는 팽팽한 긴장과 대립의 관계도 常存했는데, 이들이 빚어내는 갈등은 이미 西漢 중엽부터 밖으로 드러나기 시작한다. 무엇보다 방사 계층에 의해 주도되는 祠廟·祭祀 및 方術의 발흥이 유생의 거센 비판을 불러일으킨다. 張敞이 宣帝에게 "方士의 虛言을 배척하고 멀리할 것(斥遠方士之虛語)"을 주청한 것을 비롯해, 方術을 좋아했던 황제의 재위 기간에는 이를 비판하는 유생의 목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元帝 때는 貢禹·韋玄成 등의 儒生이 方術 계통의 祠廟를 철폐할 것을 주장한다. 成帝의 재위 중에는 匡衡·張譚 등의 유생이 유사한 건의를 하며, 谷永은 방사를 멀리할 것을 청하는 상소를 올린다.
그러나 유생들의 연이은 공격에도 불구하고, 方士 세력과 方術의 영향력은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는다. 儒生의 공격에 직면한 方士들은 오히려 산발적이고 은밀하게 전수되던 方術을 종합하고 다듬어 보다 체계적인 이론·사상적 반격을 준비한다. 成帝 때 方士 甘忠可가 지은『天官曆包元太平經』은 당시까지의 方術 이론과 사상·지식을 집대성하고 새롭게 해석한 최초의 方術大典으로, 甘忠可는 이를 "經"으로 부름으로써 유가경전에 버금가는 권위를 부여한다. 이는 당시의 方士들이 스스로의 사상적 정체성을 뚜렷하게 자각하고 있었다는 증거로, 甘忠可는 자신의 저서가 담고 있는 내용을 "此道"로 부르며 夏賀良·丁廣世·郭昌 등의 門徒에게 이를 전수한다. 그러나 甘忠可의 이런 사상적 시도는 이내 儒生의 공격을 초래하는데, 劉向은 결국 甘忠可를 "鬼神에 가탁하여 군주를 속이고 대중을 미혹시킨다(假鬼神罔上惑衆)"는 죄목으로 고발하여 옥중에서 사망하게 만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甘忠可의 문도인 夏賀良 등은 여전히『天官曆包元太平經』을 私傳하며 자신들의 道를 펼칠 기회를 도모한다. 그리고 오래지 않아 哀帝의 재위 기간 중 그 기회는 찾아온다. 哀帝는 오랜 동안 병을 앓아 이를 치유하기 위해 方士들을 널리 불러모았는데, 이 때 夏賀良·郭昌 등은 海光·李尋과 연대해 "漢의 曆運이 중도에 쇠퇴했으니, 마땅히 다시 天命을 받아야 한다(漢曆中衰, 當更受命)"는 주장을 내걸고 改元易號 운동을 조직한다. 이는 劉歆 등을 중심으로 하는 儒生의 반대에 직면하고, 이로써 方士와 儒生 사이에 雌雄을 겨루는 한 판의 정치·사상적 대결이 펼쳐진다. 哀帝는 우선 방사 측의 견해를 수용해 建平二年을 "太初元年"으로 정하고, 자신의 號를 "陳聖劉太平皇帝"로 하는 改元易號를 시행한다. 그러나 이는 결국 한달 여만에 철회되고, 夏賀良 등은 하옥돼 사망하며, 李尋 등은 강등되어 외지로 밀려나는 것으로 사건은 일단락 된다.
우리가 여기서 方士와 儒生의 대결 장면을 이처럼 장황하게 설명한 이유는, 이 사건이 漢代의 方術이 나름대로 이론적 계통성을 확립하는 계기와 과정 그리고 그 결과까지 함축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볼 때,『天官曆包元太平經』의 출현으로 방사 계층은 비로소 자신의 경전을 소유하게 되었으며, 甘忠可 등의 政治·思想 운동은 方術을 중심으로 하는 독립적이고 계통적인 모종의 思潮가 형성되고 있음을 알리는 신호탄이 되었다. 이 사조는 方技·數術의 이론과 지식 그리고 道家 철학의 상호 결합을 가장 큰 특징으로 하며, 東漢에 이르러 "道家"로 지칭되거나 "黃老" 혹은 "黃老道" 등으로 불리게 된다. .
"道家"·"黃老"의 개념은 모두『史記』에 처음 보이는 것으로, 司馬遷은 이 용어들을 사용해 우리가 보통 "黃老學"으로 부르는 道家 사조를 지칭하고 있다. 오늘날의 학자들은 일반적으로 老子의 사상과 形名法術이 결합된 君人南面之術을 "黃老學"의 두드러진 특징으로 여긴다.
그러나 西漢 후기 이후 "道家"와 "黃老" 개념의 지시 대상과 내포에는 큰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이런 변화의 징후는 우선 東漢의 사상가 王充(A.D.27-100)의『論衡』에서 뚜렷이 감지된다. 왕충은『論衡·道虛』에서 이렇게 말한다.
세상 사람들은 때로 穀不食하는 사람을 道術之人이라고 여긴다.
道家는 서로 과장하여 이렇게 말한다 : "眞人은 氣를 먹는다"하니 氣를 음식으로 삼을 수 있다. 그러므로 전하여 말하기를 "氣를 먹는 사람은 오래 살고 죽지 않는다. 비록 곡식으로 배를 채우지 않아도, 또한 氣로 배가 가득 찬다"고 했다.
道家는 때로 導引으로 신선이 되고 죽지 않는다고 한다.
道家는 때로 약물을 복용하여, 몸을 가볍게 하고 氣를 增益하며, 수명을 연장하고 신선이 된다고 한다.
위에서 왕충이 "道家"로 부르는 것은 분명 神仙方術로, 穀( 穀不食)·吐納(眞人食氣)·導引(導氣養性)·服食(服食藥物)의 양생술을 그 내용으로 한다. 이 밖에도『論衡·道虛』는 당시 世人들이 黃帝·老子·劉安·盧敖·曼都·文擊·李少君·東方朔·文成(少翁)·五利(欒大)·王子喬 등을 道人으로 여기고 있다고 지적한다. 黃帝와 老子는 "道"를 상징하는 인물들이고, 劉安에서 王子喬까지는 모두 方士 혹은 方術에 심취했던 인물들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道"가 무엇을 지칭하는지는 매우 분명하다. 곧 黃老方術之道인 것이다. 王充은 "方術" 을 "仙者之業"이라고 하며, 이를 다시 "道術" 혹은 "道"라고도 부른다. 그리고 그가 말하는 "道人"·"道術之士"·"道術之人" 역시 方士의 다른 칭호에 불과하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論衡』에서 말하고 있는 "道家"는 黃老를 표방하되, 治身養性을 위주로 하는 長生의 道術로, 이전의 黃老學과는 성격을 달리한다.
道家는 서로 과장하여 이렇게 말한다 : "眞人은 氣를 먹는다"하니 氣를 음식으로 삼을 수 있다. 그러므로 전하여 말하기를 "氣를 먹는 사람은 오래 살고 죽지 않는다. 비록 곡식으로 배를 채우지 않아도, 또한 氣로 배가 가득 찬다"고 했다.
道家는 때로 導引으로 신선이 되고 죽지 않는다고 한다.
道家는 때로 약물을 복용하여, 몸을 가볍게 하고 氣를 增益하며, 수명을 연장하고 신선이 된다고 한다.
위에서 왕충이 "道家"로 부르는 것은 분명 神仙方術로, 穀( 穀不食)·吐納(眞人食氣)·導引(導氣養性)·服食(服食藥物)의 양생술을 그 내용으로 한다. 이 밖에도『論衡·道虛』는 당시 世人들이 黃帝·老子·劉安·盧敖·曼都·文擊·李少君·東方朔·文成(少翁)·五利(欒大)·王子喬 등을 道人으로 여기고 있다고 지적한다. 黃帝와 老子는 "道"를 상징하는 인물들이고, 劉安에서 王子喬까지는 모두 方士 혹은 方術에 심취했던 인물들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道"가 무엇을 지칭하는지는 매우 분명하다. 곧 黃老方術之道인 것이다. 王充은 "方術" 을 "仙者之業"이라고 하며, 이를 다시 "道術" 혹은 "道"라고도 부른다. 그리고 그가 말하는 "道人"·"道術之士"·"道術之人" 역시 方士의 다른 칭호에 불과하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論衡』에서 말하고 있는 "道家"는 黃老를 표방하되, 治身養性을 위주로 하는 長生의 道術로, 이전의 黃老學과는 성격을 달리한다.
그런데 東漢에서 "黃老"는 단지 治身養性 위주의 方技만을 가리켰던 것이 아니다. 安·順帝 때의 楊厚는 대대로 圖讖學에 종사한 方術世家 출신으로, 侍中의 자리까지 올랐다.『後漢書·楊厚傳』은 그가 晩年에 病을 핑계로 귀향한 뒤, "黃老를 修學하고, 제자를 가르쳤는데, 이름을 올린 자가 3천여 명에 달했다"고 적고 있다. 여기서 楊厚가 修學한 "黃老"는 당연히 圖讖을 포함한 數術과 관련된 것이다.
이상과 같은 고찰을 통해, 우리는 東漢의 "黃老"가 數術과 方技를 아우르는 폭넓은 의미로 사용되고 있음을 확인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당시의 "黃老道"는 곧 "黃帝와 老子를 표방하며 數術과 方技를 포괄하는 道"라고 일단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현재 남아 있는 漢代 文獻 가운데, 黃老道의 이런 특징을 가장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책은『太平經』이다. 이 밖에『老子河上公章句』와『周易參同契』·『列仙傳』등도 黃老道 계통의 저작으로 분류할 수 있다. 이 작품들은 黃老道 연구의 1차 자료라고 볼 수 있는데, 본 논문의 성격상 이에 대한 본격적인 고찰은 다음 기회로 미룬다.
"西漢 中葉 이후 方術 발전의 推移"를 다루는 본 절의 주제와 관련해, 우리는 마지막으로 東漢의 방사들이 많은 門徒를 거느리고 방술을 전수했다는 사실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이미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楊厚에게 3천명의 제자가 몰려들었던 것은 그 하나의 예이다.『後漢書』는 이 밖에도 여러 사례를 소개하고 있는데, 다음 세 가지가 그 중 대표적인 것이다. 郞 는 대대로 風角·星 ·六日七分 등의 數術에 정통했던 方術世家 출신이었다. 그는 은둔하여 벼슬길에 오르지 않고 가업을 이었으며, 항상 수 백명의 제자가 그를 따랐다.
蘇子訓은 神異한 道가 있어서 나이가 이미 5백세에 가깝다고 알려졌다. 그리하여 사대부들이 모두 그를 받들고, 늘 수천 명의 사람들이 그를 따라 다녔다. 그가 國都에 이르렀을 때는 公卿을 비롯한 수백 명이 늘 그의 시중을 들었다. 劉根은 崇山에 은거해 있었는데도 많은 사람들이 멀리서 찾아와 그에게 道를 배웠다. 이런 사례들은 數術과 方技가 사람들이 보통 믿고있는 것처럼 그렇게 민간을 중심으로 유행했던 저급 思想·知識 체계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 준다. 저명한 방사에게는 심지어 수천에 이르는 제자들이 늘 따랐고, 이들 가운데는 公卿에서 士大夫에 이르는 인물들이 망라되어 있었다. 漢代의 方士들은 사회 상층에서도 홀시할 수 없는 학술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던 것이다.
Ⅵ. 맺는 말
지금까지 秦漢代 전반에 걸친 방사의 활약상에 대해서 알려진 것이 그리 많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왜곡되게 이해되는 경향이 있었다. 方士는 그저 민간에 뿌리를 둔 好事家 정도로 평가되고, 허황한 神仙 이야기 따위로 권력자를 홀려 출세해 보려는 사기꾼의 무리쯤으로 여겨졌다. 그리고 그들이 내세우는 방술도 저급하고 세속적인 巫術의 변종에 불과한 것으로 보는 시각이 지배적이었다.
원래 秦漢의 方士와 方術에 대한 본 연구는 보다 거시적인 연구 계획의 일부로 기획된 것으로, 이 자체로 完結性을 가지기에는 부족한 점이 많다. 본 논문이 미처 언급하지 못한 적지 않은 학술적 공백은 다음 기회를 기다려야 다시 보충될 수 있을 것이다. 본 논문이 다루고 있는 내용은 연구의 종점이 아니라, 단지 시작에 불과할 뿐이다.
그러나 우리는 위에서 秦漢 時期 方士 계층의 성장과 方術 발전의 과정을 간략히 살펴보면서, 方士가 秦漢의 政治·社會·學術·思想 및 종교성이 농후한 國家 祭祀 등의 각 영역에서 폭 넓게 활동하며, 儒生에 비견되는 士人 세력으로 성장했었던 사실을 확인했다. 그리고 이처럼 방사 세력이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 秦漢 帝國 권력자들의 관심과 지원이 유효하게 작용했기 때문이라는 것이 본 논문의 일관된 주장이다.
원래 秦漢의 方士와 方術에 대한 본 연구는 보다 거시적인 연구 계획의 일부로 기획된 것으로, 이 자체로 完結性을 가지기에는 부족한 점이 많다. 본 논문이 미처 언급하지 못한 적지 않은 학술적 공백은 다음 기회를 기다려야 다시 보충될 수 있을 것이다. 본 논문이 다루고 있는 내용은 연구의 종점이 아니라, 단지 시작에 불과할 뿐이다.
*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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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孟子』, 위의 책.
3.『呂氏春秋』, 諸子集成本, 上海書店, 1991년 6차 인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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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論衡』, 中華書局『論衡校釋』本, 1990년,
7.『漢書』, 中華書局點校本, 北京, 中華書局, 1990년 6차 인쇄.
8.『後漢書』, 中華書局點校本, 北京, 中華書局, 1991년 5차 인쇄.
9. 湯用 ,『漢魏兩晋南北朝佛敎史』, 上海書店, 1991년.
10.湯其領,『漢魏兩晉南北朝道敎史硏究』, 河南大學出版社, 1994년.
11.鍾肇鵬,『讖緯論略』, 遼寧敎育出版社, 1992년.
12.金春峰,『漢代思想史』, 中國社會科學出版社, 1997년 修訂第2版.
13.徐復觀,『(增訂)兩漢思想史』第2卷, 臺灣, 學生書局, 1993년 초판 5차 인쇄.
14.金晟煥,「黃老道學形成及其思想探源」, 北京大學 박사학위 논문, 1999년.
15.金晟煥,「陰陽五行說與中國古代天命觀的演變」,『周易硏究』1999年第3期(總第41期), 中國周易學會, 199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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