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緖言
Ⅱ. 性徹스님의 頓悟頓修說
見性卽佛
無心無念
三關突破
死中得活
公案參究
Ⅲ. 結語
Ⅱ. 性徹스님의 頓悟頓修說
見性卽佛
無心無念
三關突破
死中得活
公案參究
Ⅲ. 結語
1. 緖 言
性徹스님은 그의 대표적인 저작 가운데 하나인 {禪門正路}에서 頓悟頓修를 올바른 禪修證으로 力說하고 頓悟漸修說을 禪의 異端 修證論으로 批判하였다. {禪門正路}는 1981년에 처음 출판된 이래 한 차례 增補되었으며,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의 일부로 편찬되기도 했고 또한 후에는 {성철스님 법어집}의 하나로 版을 바꾸면서 거듭 重版되는 가운데 佛敎學界에서 禪修證의 頓漸論에 관하여 활발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周知하다시피, {禪門正路}가 출판되기 오래전부터도 性徹스님은 禪修證의 頓漸問題 및 이와 관련하여 普照 知訥스님의 正統性 問題를 提起한 바 있었다. 특히, 1967년에 性徹스님이 海印叢林의 方丈으로 취임하면서 說한 이른바 百日法門에서 이미 이 문제가 정식으로 거론되고 있다.
百日法門에서 性徹스님은 佛敎思想史를 전체적으로 정리하여 조망하는 가운데, 禪宗의 思想에 대한 說法에서는 근래에 韓國 佛敎思想史上 가장 위대한 인물 가운데 한 사람으로 추앙되어 온 普照 知訥스님이 力說한 바 頓悟漸修와 禪敎一致를 否認하였다. 나아가 1976년에 性徹스님의 法力으로서는 처음 책으로 출판된 {韓國佛敎의 法脈}에서는 知訥스님을 曹溪宗의 中興祖 내지 宗祖로 추앙하는 학설들을 論駁하고 知訥스님의 法脈上 正統性을 否認하였다. 그리고 그 뒤 5년 후에 출판된 {禪門正路}눈 禪修證의 頓漸問題와 知訥스님의 正統性에 관한 스님의 주장을 敎理的으로 論證하여 마무리 짓고자 하는 의도를 담고 있다.
이른바 頓漸論爭은 {禪門正路}가 처음 출판된 지 거의 10년 가까이 지나서, 百日法門으로부터는 20여 년이 지나서야 본격적으로 일어났다. 물론 그동안에 불교계와 불교학계의 일각에서 性徹스님이 제기한 문제를 둘러싸고 긴장감이 고조되어 오기는 했으나, 논쟁의 직접적인 발단이 된 것은 1990년에 順川松廣寺의 普照思想硏究院에서 [불교사상에 있어서 깨달음과 닦음]이라는 주제로 마련한 국제학술회의였다고 할 수 있다.
그 후 국내외에서 30여 편의 논문이 발표되고 국제학술회의도 두 차례 더 열렸다. 그러나 知訥스님의 位相問題와 禪修證에 관한 敎理上의 頓漸問題, 오늘의 社會 및 文化 實情에 있어서 禪佛敎傳統의 妥當性, 그리고 禪佛敎傳統과 現代佛敎學 사이의 관계 등의 문제가 表面에서, 또 裏面에서 한꺼번에 맞물린 까닭에, 論議의 가닥이 얽혀버린 감이 없지 않다. 특히, 頓悟頓修說과 頓悟漸修說이 言表하고 있는 禪修證 그 自體의 內容과 관련해서는 앞으로도 천착해야 할 것이 많이 있다고 생각된다.
본고에서는 {禪門正路}를 중심으로 해서 性徹스님이 표방하고 있는 頓悟頓修說이 어떠한 體系를 갖추고 있는가를 밝히는 노력을 傾注하고자 한다. 깨침도 "몰록 깨침"일 뿐 아니라 닦음도 깨침과 함께 "단박에 다 닦아 마친다"고 하는 이 槪念組合은, 닦음이란 어떤 境地를 성취하기 위해 傾注하는 인간의 노력으로서 여타의 인간 발전과 마찬가지로 시간의 흐름 속에서 漸進的으로 進行될 수밖에 없다고 하는 우리의 常識的 理解를 배반한다.
그런 상식에 입각해서 본다면 성철스님이 그토록 강조하는 寤寐一如니 公案參究니 하는 것이 모두가 사실상 漸修가 아니냐는 의문을 일으킨다. 특히 動靜一如, 寤寐一如, 熟眠一如의 三關突破를 究竟覺 以前의 절대요건으로 역설하는데, 그거야말로 점차 닦아 발전함을 말하는 것이니 성철스님은 頓修를 강조하고 漸修를 격렬히 배척하면서도 사실은 당신 자신이 漸修를 말하는 모순을 범하고 있지 않은가 하는 의문이 일어난다. 또한 많은 학자들이 頓修의 非理實性과 漸修의 不可避性을 들면서 頓悟頓修說은 最上根機에만 통하는, 普遍性과 現實性이 없는 理想의 修證論일 뿐이 아니냐는 비판을 가하였다. 과연 性徹스님의 頓悟頓修說은 도대체 어떤 構造, 體系로 엮어져 있기에 그처럼 서로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는 槪念과 命題들을 수용하여 하나의 修證論으로 제시되고 있는가?
상식에 입각해서 볼 때 일관성과 현실성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修證論을 성철스님이 그토록 힘주어 내세웠다면, 거기에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우선, 성철스님의 진짜 관심은 頓悟頓修說이라는 禪修證論의 제시가 아니라 다른데, 이를테면 荷澤宗과 知訥스님의 正統性을 否認하는 데라든가, 아니면 깨침과 닦음과는 관계없는 경력으로 佛子들의 관심이 기울고 그런 경력만으로도 禪僧의 권위가 보장되는 세태에 대하여 경종을 울리는 데 있기 때문에, 당신이 제시한 수증론의 일관성이나 현실적 유용성 따위에는 별로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을 수 있다. 그런 경우라면 성철스님의 돈오돈수설은 선수증론으로서의 의의보다는 다른 방면의 의미에서 입각해서 이해되어야 할 일이다. 과연 성철스님의 頓悟頓修說은 하나의 일관된 禪修證論으로 성립할 만한 構成과 體系를 결여하고 있으며, 다만 뭔가 다른 주장을 펴기 위해서 선수증론으로 포장되어 제시된 모순된 명제들의 조합일 뿐인가? 이런 의문에 바탕해서 본고에서는 性徹스님의 頓悟頓修說을 구성하는 주요 槪念과 命題들을 중심으로 하여 그들의 連結과 意味를 파악해 보고자 한다.
Ⅱ. 性徹스님의 頓悟頓修說
見性卽佛
'見性'은 성철스님이 {禪門正路}에서 개진한 禪修證論의 가장 핵심이 되는 개념 가운데 하나이다. 禪佛敎傳統에서는, 이 개념이 菩提達摩의 '直指人心見性成佛'이라는 구절에서 처음 도입된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六祖 曹溪慧能이 이 개념에 입각해서 '頓悟'를 선수증론의 핵심으로 확립한 것으로 되어 있어, 성철스님도 이 전통에 따라 {六祖壇經}을 '見性'의 典據로 삼는다. 아무튼 '見性'은 '見性成佛 卽心卽佛'로 표방되는 禪佛敎 宗旨의 하나로 확립된 바 있다.
성철스님은 "見性은 眞如自性을 徹見함"이라고 定義한다. 즉, 자기가 본래 지니고 있는 眞如 그 자체인 완전한 성품, 또는 다른 말로 佛性을 보는 것이다. 성철스님은 見性하려면 모든 妄念을 그 가장 미세한 것까지, 즉 第八阿賴耶識의 微細妄念까지 다 끊어야 한다고 역설하는데, 이를 설명하기 위해 동원되는 것이 '구름과 해'의 비유이다. "眞如慧日의 無限光明은 항상 法界를 照耀하고 있지마는, 三細六 의 無明暗雲이 掩蔽하여 衆生이 이를 보지 못한다. 雲消長空하면 靑天이 現露하여 白日을 보는 것과 같이, 三細의 極微妄念까지 減盡無餘하면 廓徹大悟하여 眞如本性을 洞見한다."
衆生을 衆生이게 하는 妄念을 남김없이 여읜다면, 즉 無心無念을 이룬다면 그것이 곧 成佛이니, 성철스님은 經論等 여러 문헌에서 究竟覺, 無上正覺, 證悟, 無餘涅槃, 佛地, 如來地, 解脫 등으로 지칭하는 것이 모두 바로 이 見性을 가리킴에 다름아니라고 말한다. "이에 佛敎 萬世의 標準인 宗鏡 起信涅槃 瑜伽 등의 正論으로써, 見性은 妄減證眞한 無心, 遠離微細한 究竟覺, 不生煩惱한 大涅槃이니 이로써 見性이 如來地 즉 成佛임이 確然明白하다."
나아가 성철스님은 禪門에서 말하는 '頓悟'는 바로 그런 '見性'을 가리킨다고 역설한다. 여기에서 '頓'이라는 개념이 단순히 시간상의 짧은 한 순간이라는 뜻만을 가지는 게 아님은 말할 필요도 없이 분명하다. Bernard Faure는 禪門에서 말하는 '頓'의 개념에는 多重의 相補的인 意味가 있음을 지적하고, 그것을 (1) 迅速(fast), (2) 絶對(absolute), (3) 無所依 또는 다른 말로 無媒介라는 뜻에서 卽核(immediate or not mediated)등으로 제시한다. 이 세 가지 의미는 성철스님이 말하는 '頓'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겠는데, 그러나 성철스님에 있어서는 '迅速' 보다는 '同時(simultaneous)', '絶對' 보다는 '完全' 또는 '完璧(perfect)'이라는 풀이가 더 적합할 성 싶다. 성철스님이 말하는 頓悟의 意味를 하나씩 짚어보기로 한다.
우선 위의 '구름과 해'의 비유에서 단적으로 드러나는 '頓'의 의미는 妄念의 除去와 見性은 사실상 하나의 사건이라는 것이다. 이 명제는 이를테면 覺과 不覺, 佛性과 (굳이 말을 만들자면) 衆生性의 엄격한 구분에 바탕한다고 풀이할 수 있다. 不覺의 境地가 완전히 단절되어야 覺이요, 衆生性(妄念)이 완전히 제거되어야 佛性(無心無念의 眞如自性)이 발현한다는 것이다. 또한 不覺의 終焉이 곧 동시에 覺이요, 衆生性의 斷減이 곧 동시에 佛性의 現前이라고 하는, 두 가지로 서술되는 일이 실제로는 同時性을 가지면서 한 사건을 구성함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성철스님은 또한 妄念, 즉 不覺 또는 衆生性의 기미가 조금이라도 남아 있으면 見性할 수 없다고 역설한다. 完全이 아니면 全無라는 것이다. '頓'에서 '完全'이라는 의미를 읽는 근거가 여기에 있다. 究竟地의 等覺도 微細妄念은 아직 남아 있으니 진짜 見性이 아니며, 따라서 일개 중생일 뿐임은 여느 凡夫와 다름이 없다는 것이다. "金剛喩定이며 金剛無間道인 等覺도 아직 極微細妄念을 未端한 故로 衆生이라 하며, 等覺이 金剛心으로써 最微細念인 第八阿賴耶를 斷盡하고 妙覺에 頓入함을 見性 또는 成佛이라 하나니 이것이 頓悟이다. 그러므로 衆生과 諸佛의 차이는 有念과 無念에 있다." 이 또한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覺과 不覺, 부처와 중생의 철저한 구분에 바탕한다고 하겠는데, 불교에서 궁극의 종교적 가치로 삼는 覺, 成佛을 下位價値에 대한 考慮라는 타협없이 그대로 궁극적 가치로서 삼을 때에는 깨쳤느냐 못깨쳤느냐, 성불했느냐 못했느냐만이 문제될 뿐인 것이다. 諸聖이 완전치는 못하더라도 그래도 어느 정도 경지를 이룸(分證)은 중생의 질곡 안에서는 그나마 대단한 의의를 가질 수 있겠으나, 究竟覺 成佛과 관련하여 그에 어떤 가치를 부여하는 것은 "金沙를 不分하며 玉石을 混同"함이라는 것이다.
이와 같은 覺·不覺, 부처·중생의 철저한 구분은 '頓'의 세 번째 의미, 즉 '無媒介'에도 그대로 이어진다. 여기서 '無媒介'란 풀어서 말하자면 不覺에 해당하는 그 어떤 것도 覺을 매개할 수는 없다는 뜻이다. 不覺, 衆生性을 대변하는 것이 無明妄念이다. 覺을 이루려면 無明妄念을 제거해야 할 일이지 覺을 위해 無明妄念을 동원할 일이 아니다. 해를 보려면 구름이 말끔히 걷혀야 할 일이지, 어떤 멋진 모양의 구름이라 할지라도 해를 가리기는 먹구름과 마찬가지이다. 해의 본모습을 굴절시키며 멋지게 보이게 하는 구름이 더 큰 문제이다. 그런 無明妄念의 欺瞞的 媒介로 禪門에서 대표적으로 꼽는 것이 이른바 알음알이와 言語文字이다. 언어문자를 통한 知的 理解는 分別에 바탕할 수밖에 없으며 不覺의 桎梏을 형성하는 材料이다. 그러므로 正覺을 위해서는 그것을 제거해야 할 일이지 거기에 기대는 것은 "東으로 간다면서 西로 가고 南으로 간다면서 北으로 감"과 마찬가지이다. 성철스님이 知解, 解碍를 가장 심각한 문제로 여기고 여러 저술에서, 특히 {禪門正路}에서는 세 章을 따로이 그 비판에 할애하는 이유가 위와 같이 정리될 수 있겠다.
無心無念
성철스님에 의하면, 見性으로써 이루어지는 究竟覺의 境地는 無念無心으로 언표된다. 성철스님은 無念無心을 우선 妄念의 不在로 정의한다. "이에(見性함에) 一切妄念이 斷無하므로 이를 無念 또는 無心이라 부르나니, 이것이 無餘涅槃인 妙覺이다." 그러니까 妄念은 無念無心에 상대되는 것이지, 중생의 念中에 眞念이 따로 있어서 살려내야 하고 妄念이 따로 있어서 끊어야 한다는 식의 문맥을 전제로 하는 게 아니다.
달리 말하면, 여기에서 妄念은 모든 중생이 본래 분별하는 無明의 성향과 습관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無明妄念이라고 한 데 붙여서 말하기도 하는 것이다. 分別의 習性은 無明業報이자 그 業의 因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넓은 의미에서 妄念은 無明의 業을 짓고 그 지은 業으로 인하여 또 業을 짓게 되는 衆生事 전체를 가리킨다고도 볼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굳이 妄字를 붙일 필요도 없이 念이, 또 心이 있다 하면 이미 衆生이고("衆生과 諸佛의 차이는 有念과 無念에 있다") 그 '一切心念'이 '無量衆生의 本病'이라고 진단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頓'의 의미 가운데 특히 媒介의 否認이 다시 한번 확인된다. 어떤 경지와 종류의 心念도 斷盡되어야 할 것이지 究竟覺의 매개가 될 수는 없다는 뜻을 성철스님의 '無心無念'에서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禪門正路}의 제3장에서 제5장에 걸쳐서, 또 특히 제8장과 9장에서 성철스님은 산발적으로 주로 {大乘起信論} 및 賢首 法藏의 {大乘起信論義記}에 의거, 세 가지 미세한 망념과 여섯 가지 추중한 망념을 菩薩十地와ㅑ 配對시켜 설명하고 있다. 이것을 두고 성철스님이 '頓'을 역설하면서 온통 '漸'의 구도를 말하고 있다는 식으로 비판할 수도 있겠는데, 그러나 그러한 '漸'의 구도를 도입하는 의도가 '頓'의 표명에 있음은 분명히 볼 수 있다. 十地菩薩이라 할지라도 業相動念이라는 最微細妄念이 남아 있으므로 有念有心이지 無念無心이 아니며, 따라서 '見性'했느냐 못했느냐, 깨쳤느냐 못깨쳤느냐를 문제 삼자면 일반 범부와 마찬가지로 未見性이요, 不覺이라는 것이다. 여기에서는 '頓'의 의미 가운데 '完全性'을 다시 확인할 수 있겠다.
無念無心의 개념을 매개로 해서 見性과 究竟覺, 頓悟를 연결하는 이러한 맥락은 '頓修'의 의미와 관련해서도 시사점이 있는데, 이에 대해서는 뒤에 三關突破 및 公案參究에 대한 節에서 논의하도록 하겠다.
三關突破
微細重 無明妄念과 菩薩十地를 配對시키는 것과 함께 성철스님은 動靜一如, 夢中一如, 熟眼一如라는 三關을 또 거기에 연관시켜 설명한다. 動靜一如와 夢中一如는 七地에, 熟眼一如는 八地 以上과 佛地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나아가 성철스님은 佛地를 菩薩地와 구별하여 眞如恒一이라 특징짓고, 또한 如來地만이 진정한 究竟無心이요, 自在菩薩地는 假無心, 無記無心이라고 한다.
이런 구도를 도입하여 성철스님이 말하려는 實修上의 지침은 분명하다. 十地菩薩조차도(그 이하는 말할 것도 없고) 아직 未見性, 不覺이니 無明妄想에 끄달리는 衆生임에는 근본적으로 여느 衆生과 다를 바 없는지라, 恒一, 一如의 기준에 의거하여 늘 엄격히 自省하면서 不斷하고 熾烈하게 닦아야 한다는 것이다.
바로 이 대목에서 修行境地의 階位와 관련하여 성철스님이 頓의 구호와는 모순되게 漸을 말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의문을 다시 제기할 수 있겠다. 성철스님이 여러 곳에서 그런 혐의를 살 만한 이야기를 하는 게 사실이다. 어떤 곳에서는 境地의 漸進을 인정하는 듯하고 다른 곳에서는 그것을 무시하는 것이다. 한 예로, 앞에서도 인용했지만, "等覺이 金剛心으로써 最微細念인 第八賴耶를 斷盡하고 妙覺에 頓入함을 見性 또는 成佛이라 하나니 이것이 頓悟"라고 해서, 見性頓悟는 多重의 無明妄念을 차근차근 斷滅하며 修行階位를 밟아 오르다가 마지막으로 第八識의 微細妄念까지 斷盡하는 그 순간을 가리키는 듯하다. 그렇다면 성철스님이 비판하여 마지 않는 漸修論者인 奎峯 宗密스님이 {禪源諸詮集都序}에서 頓悟頓修說에 대해서 비평하였고 이번의 頓漸論爭에서도 여러 학자가 지적한 바 있듯이 頓悟頓修라 하여도 頓悟에 이르기까지는 無量劫의 漸修가 필요하다는 뜻이 되겠다.
성철스님이 '無量劫'이라고 수식될 만한 치열한 實修의 노력을 포폄하기는커녕 엄격히 강조하고, 당신이 직접 실행하고자 했음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 바탕에는 인간의 노력에 의한 境地의 發展을 중시하는 수행관이 깔려 있음에 틀림없다. 그렇다면 성철스님은 頓修를 내세우면서도 漸受를 강조하는 모순을 저지르는 게 아닌가?
한편, 성철스님은 모든 계위를 차근차근 다 밟아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뜻을 말한다. 大慧 宗 스님이 七地에서 究竟地까지 곧바로 透過한 예를 드는 등 見性만 하면 如來地에 直入하므로 頓悟란 漸進的 修行階位를 뛰어넘는 것임을 도처에서 강조하고 있다. "妄念이 俱滅하면 自性을 明見하고 自性을 明見하면 이것이 正悟이며 無念이니, 地位와 階級을 經歷하지 않고 究竟覺인 佛地에 頓入한다. 이것이 一超直入如來地의 妙訣이어서, 他宗들의 追隨를 不許하는 禪門의 특징이다."
이처럼 相違하게 들리는 두 가지 言表가 어떻게 한 자리에 있을 수 있는가? 이 문제와 관련해서 우선 분명히 해두어야 할 것은 성철스님이 다분히 漸의 개념으로 말하는 頓悟 이전의 수행과 頓悟와 짝을 지어 頓修로 언표하는 수행은 같은 수행이 아니라는 점이다. 이 점은 조금만 따져보아도 명백한데도 흔히 看過 내지 忘劫되곤 하는 것 같다. 頓悟 이전의 수행은 不覺의 수행이요, 방편의 수행인 반면 頓悟와 짝을 이루는 '頓修'는 覺과 수행은 어떤 관계에 있는가 하는 문제에 대한 언표이다. 不覺인 衆生의 현실 속에서 修行境地의 漸進은 그런대로 의미를 가질 수 있다. 그러나 究竟覺을 두고 볼 때에는 그 모두가 不覺의 行爲일 뿐이요, 漸次의 階位도 아무 의미의 차이가 없다. 不覺的인 것이 覺을 媒介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모든 不覺的인 것이 斷盡되어야 覺을 이룬다는 구도에서는, 不覺에 意味를 부여하며 안주함은 究竟의 깨침을 문제삼는 수행자에게는 치명적인 일이다. 이런 문제의식에 바탕하여 성철스님은 究竟에 못미친 경지에 타협하여 안주하지 않는, 부단하고 간절하며 치열한 實修를 강조하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성철스님이 頓悟 이전의 수행을 사실상 漸的인 槪念으로 설명하면서도 漸을 극력 부정하는 의도를 짐작할 만하다. 漸次를 인정하면 그 階位 하나하나에 의미와 가치를 두는 셈이 되는데, 거기에 도사리고 있는 함정을 경계하면서, 不覺의 범주에 속하는 경지는 그것이 아무리 고매하다고 해도 究竟覺에 비추어 볼 때 무가치함을 깨닫고 수행의 노력을 놓지 않는 것이 중요함을 강조하고자 하는 의도라고 생각된다.
이렇게 보면 성철스님의 수행론을 두고 아무런 수행의 노력도 필요없다는 뜻이라거나 '頓修', 즉 '단박 닦아 마친다'라는 말의 語感을 흔히 오해해서 '쉽다'는 뜻으로 생각함은 그릇된 것임에 분명하다. 성철스님의 제자 圓融스님에 의하면, '頓修'란 頓悟한 뒤에는 不覺의 修行方便이 필요없음을 말하는 개념이다. 그러니까, 頓修說은 頓悟 以前의 修行方便이 필요없다고 말하는 게 아니다. 그것은 다만 (1) 깨침은 더 이상 修行方便이 아무런 의미가 없는 완벽한 깨침, 즉 究竟의 證悟이어야 하며, (2) 修行階位의 漸次라는 方便은 覺과 不覺의 근본적인 구분에 입각하건대 전혀 무의미할 뿐 아니라, 究竟覺이 아닌 경지에 가치를 두고 타협하게 함으로써 修行에 치명적이라는 뜻을 표방하는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겠다.
이 점은 다른 것이 끼어들 틈새없이 순일한 疑團만으로 不單하고 懇切하게 이어지는 것을 생명으로 하는 話頭參究, 즉 看話의 修行을 성철스님이 見性의 捷徑으로 극력 강조하는 것과도 연관된다고 생각되는 바, 이에 대해서는 公案參究에 대한 節에서 논의하도록 하겠다.
성철스님은 修行階位의 漸次에 매달릴 필요가 없음을 말하면서도, 寤寐一如만은 생략될 수 없는 關門으로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이처럼 三關突破를 力說하는 일차적인 뜻도 動靜一如에서 夢中一如로, 그리고 熟眼一如로 나아가는 修行階位의 漸次를 말하는 데 있기보다는 究竟覺에 못미친 데에서 멈추고 마는 것을 경계하는 데 있다고 하겠다. 寤寐一如는 엄연한 '實境'인데도 不信하는 것이 '修道人의 古今通病'인 바, 大慧스님과 같이 寤寐一如를 이루고서도 '明眼宗師를 만나 回心'하고 不斷히 修行해야 할 일이지, "寤寐一如의 境地에도 도달하지 못하고서 頓悟見性이라고 自負한다면 이는 自誤誤人의 大罪過이며 修道過程에 있어서 可恐할 病痛이요, 障碍"라고 경고하는 것이다.
더군다나, 성철스님은 寤寐一如를 이루었다고 해서 수행을 마치는 것은 아니고, 오히려 가장 결정적인 대목이 남아 있으니 곧 無記의 死境에서 大活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이 점은 다음 節에서 서술하기로 한다. 요컨대, 성철스님이 寤寐一如의 實境을 강조하는 뜻은 수행자로 하여금 不斷한 수행의 노력을 究竟覺 이전에 완화시키는 일이 없도록 自省의 잣대로서 들이대고자 하는 데 있다고 보는 것이다.
死中得活
부단한 수행의 노력을 놓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하는 맥락에서, 성철스님은 寤寐一如에 이어 死中得活을 역설한다. 見性은 妄念을 모조리 끊음으로써 성취되는 만큼, 禪修行은 念의 相續을 끊고 無念無心을 이루는 데 핵심이 있다. 여기에서 빚어지는 문제가 수행자들이 흔히 빠지는 無記의 함정이다. 마치 죽음과도 같은 寂滅에 빠져 安住할 위험은 無念無心의 추구에 이미 내포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心念의 滅盡에 모든 노력을 경주할 것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心念의 生住異滅 相續을 끊음이 이른바 前後際斷인데, 성철스님은 이것이 곧 見性이라고 한다. 觀스님의 {心要}에서 "만약에 一念不生하면 前後際斷하여 照體가 獨立하며 物我가 一如하여 곧 心源에 도달하여 無知無得하고 不取不捨하며 無對無修니라[若一念不生 則前後際斷 照體獨立 物我一如 直造心源 無知無得 不取不捨 無對無修]"라는 구절을 인용하고, 성철스님은 다음과 같이 評釋한다. "萬念이 俱寂하면 眞如自性을 徹證케 되나니, 즉 見性이며, 頓悟며 成佛이다."
그러나 다른 곳에서는, 특히 心念의 滅盡으로써 無記에 빠짐을 경계하는 문맥에서는, 前後際斷으로써 곧 成佛은 아님을 분명히 한다. 七地 以上 十地 等覺까지는 "心身의 寂滅하여 一念不生하고 前後際斷한 僧妙境界"로서, 수행자가 흔히 이를 究竟의 境地로 알고 安住하지만, 이는 '正悟'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는 다만 '假無心'의 경지일 뿐이요, 泥塑나 木彫, 牆壁, 不石과 다름없는 상태이다. 성철스님은 "勝妙境界인 一念不生 前後際斷도 七地無想定과 八地(以上) 滅盡定의 차별이 있다"고 지적하고, 前者를 '死境'이라고 부르고 後者, 즉 '第八梨耶의 無記'를 좀더 강하게 '大死'라고 표현한다. 常活하는 '眞大死'인 究竟覺을 이루어 大圓鏡智로 常寂常照하고 內外明徹하는 '禪門의 本分宗草', 즉 '佛祖의 正眼'이 된다는 것이다.
死地인 勝妙境界와 그로부터 大活한 경지에 대한 묘사를 비교해 보면, 적극적 자질과 기능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차이를 볼 수 있다. 勝妙境界는 수행자가 하나의 個別者로서 책임지는 모든 中生的 認識과 行爲의 媒介를 斷盡한, 즉 個別者로서의 心念과 業이 더 이상 일하지 않는 그런 無記의 상태를 가리킨다고 풀이할 수 있겠다. 특정 時空上의 한 個別者로서 가지는 온갖 分別의 心念이 다 멈춘 寂靜한 無心無念의 경계이다. 하지만 個體를 넘어서 中生이라는 種 전체의 生得的條件이라고도 할 수 있는 第八識의 微細妄念은 아직 일하고 있으므로, 성철스님은 이를 佛地의 眞無心이 아니라 假無心일 뿐이라고 구분한다.
여기에서도 다시한번 부각되는 것은, 究竟覺을 이루기 전에는 아무리 境地가 殊勝하더라도 거기에 빠져버리는 일 없이 치열한 수행의 노력을 부단히 경주해야 한다는 메시지이다. 성철스님이 가장 힘주어 강조하는 메시지가 바로 그것이다. 佛地 이전의 경지를 대단히 여겨서 만족하며 안주해 버림은 마치 원수를 아들로 착각함과 같다는 것이다. 성철스님이 인용하는 圓悟스님의 말도 이와 같은 맥락이라고 할 수 있다. "이 大死劫活한 深處는 古佛도 도달치 못하였으며 天下老和尙도 또한 도달치 못하였으니, 설사 釋迦와 達磨라도 반드시 再參하여야 된다[只這大死劫活處 古佛亦不曾到 天下老和尙不曾到 任是釋迦老子碧眼胡僧也須再參]." 이에 대한 성철스님의 評釋은 그가 말하고자 하는 초점이 어디에 있는가를 명쾌하게 지적해준다. "이는 古佛도 未曾到인 最後 極深深處이니 오직 實參實悟에 있을 뿐이다."
勝妙境界조차 만족해서 머물러서는 안 될 곳임을 말하면서, 성철스님은 특히 그 死地로부터 活路를 찾는 修行方便의 마지막 대목에서 寤寐一如라는 자기 점검의 기준과 아울러 스승의 역할을 필수적으로 강조하고, 그 대표적인 예로는 大慧 宗 스님과 太古 普愚스님의 경우를 들고 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다. "寤寐가 一如한 後에 了徹하여 無餘하면 自性을 洞見하는 것이다. 그러나 根器에 따라서는 或 未徹함이 있을 수 있으니, 正眼 宗師를 기필코 往參하여 印證을 받아야 참으로 의심을 놓는 것이다."
心念이 相續하는 前後際를 끊어서 無心無念의 경지를 이루고 寤寐一如하면, 不覺의 個別者로서 그 수행자가 의지했던 모든 衆生的 媒介('心念'으로 요약 언표되는)가 끊어진 것이다. 寤寐一如라는 기준도 究竟覺이냐 아직 아니냐를 가름하는 데 더 이상 의지가 될 수 없는 것이, 그 최고의 경지인 熟眠一如는 八地 以上 十地와 佛地에 공통되기 때문이다. 바로 이 대목에서 그 수행자가 佛地인 眞無心이 아니라 죽음과 같은 無記의 無心에 있음을 지적하고 가책할 수 있는 이는 正眼뿐이라는 것이다.
많은 학자들이 禪門傳統의 師弟關係를 社會的인 面에서만 접근하여, 社會的 力學關係의 階級構造에서 빚어진 것이라든가, 家父長的 一般社會 構造의 반영이라는 등의 식으로 해석한다. 거기에는 禪師들이 누리는 表面의 宗敎的 權威는 사실은 裏面의 社會的要因으로부터 공급되었을 뿐이라고 보는 시각이 깔려 있다. 그 師弟關係를 실질적으로 결정하는 것은 사회적인 요인들이며, 종교적 진리에 관해 禪師들이 갖고 있다고 믿어지는 권위는 그 실질적인 요인들이 제도적으로 그렇게 포장되고 굴절되어 나타났을 뿐이라는 것이다. 한 예로, Bernard Faure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師弟關係, 그리고 그 관계를 통해 전승된다고 믿어지는(종교적 진리), 그 모든 것이 무엇보다도 우선 사회적으로 정의되어야 한다. 늘 궁극적인 진리를 들먹이기는 하지만, 그 師弟關係는 社會外的인 要因에 의거해서 그 가치가 성립되는 게 아니라 언제나 사회적 지위와 긴밀히 연관되어 있다. ……禪師들은…… 그들이 진리를 깨쳐서 가르칠 수 있기 때문에 그런 지위를 갖게 된 것이 아니다(물론 실제로 그런 경우도 있을 수 있겠지만). 그보다는, 禪師라는 사회적 지위 덕분에 그들이 가르치는 것은 곧 진리로서 역할하는 힘을 가지게 되며, 그런 연유에서 禪師들은 진리를 가르치는 것으로 인정받게 되는 것이다. ……'禪師로서의 역할'이라는 것은 談論(discourse)을 통해 형성되는 하나의 '지위'이다. 그것은 談論이 발휘하는 하나의 기능이지 談論을 낳는 원천이 아니다. 이런 의미에서, 禪師라는 지위가 일을 하려면 (진리전승이라는 사제 사이의 밀폐된 관계가 아니라) 광범한 사회적 합의가 바탕이 되어야 한다.
이것은 禪佛敎傳統의 여러 가지 제도화된 측면들을 분석하는 데 매우 유용한 시각일 수 있다. 여느 종교전통과 마찬가지로 선불교전통도 모든 측면에서 순수한 종교적 관심만을 바탕으로 해서 구축되어 온 것은 아니며, 禪門의 사제관계에서도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요소들이 결정적으로 작용하고 있음은 말할 필요도 없이 명백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종교경험 특유의 관심사에 대해서는 이런 시각이 과연 還元論의 오류를 범하지 않고 접근할 수 있을지 의심스럽다. 究竟覺에 대한 관심을 제쳐두고 모든 것을 사회적 요인으로 설명하려는 것은 역으로 모든 것을 종교적 관심의 산물로만 설명하려고 하는 태도와 마찬가지로 還元論的이고 敎條的이다. 각자 자기의 진리주장이 궁극적이라고 내세운다는 의미에서, 前者는 現代 世俗學問의 敎條主義이고 後者는 宗敎的 敎條主義이다.
아무튼, 성철스님의 禪修證論 構圖 속에서는 스승의 역할이 선수증 이외의 요소에다가 다 환원시켜 버릴 수 없는 필수불가결의 자리를 갖고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한 중생 개별자로서 자기를 점검할 기준도 心念이라는 매개도 더 이상 의미가 없는 死地의 수행자에게 그것이 死地임을 알려주고 活路를 지시하는 역할은 正眼을 가진 스승밖에 없다고 하는 宗敎的 境地論의 원칙이 거기에서 천명되고 있기 때문이다.
公案參究
성철스님은 {禪門正路}의 緖言에서 "見性 방법은 佛祖 公案을 參究하는 것이 첩경"이라고 하였다. 성철스님의 修證論은 話頭 根本主義가 아니냐는 비판도 있었다. 公案 그 자체에 대해서는 논의할 수 없겠지만, 여기에서는 公案參究를 강조하는 것이 성철스님의 修證論에서 어떤 자리를 갖는가에 대한 설명을 시도하고자 한다. 성철스님이 公案參究를 見性의 첩경으로 강조하는 것은 '無心無念'의 개념, 부단한 수행의 강조, 그리고 覺의 印證 등과 관련해서 그 의미를 고찰해 볼 수 있겠다.
성철스님의 公案參究 강조에 대해서 고찰하기 전에 먼저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曹溪禪의 公案參究는 臨濟禪脈에서 대혜 종고스님이 확립한 看話禪의 줄기를 이어받은 것이라는 점이다. 성철스님의 修證論에서 제기된 근본적인 문제들은 불교 일반에 적용되는 것도 많이 있겠으나, 적어도 公案參究와 관련된 문제는 그 傳統에 입각해서 접근해야 한다고 생각된다.
우선, 公案參究와 無心의 교리가 연관되는 면을 살펴보기로 한다. 無心의 교리가 핵심으로 하는 원칙 가운데 하나가 無所依 즉 無媒介인 바, 이는 곧 看話의 핵심이기도 한 것이다. 參句냐 參意냐를 가리는 대목에서 이 無所依의 원칙이 특히 중요하다. 주지하듯이, 이것은 公案에 두 가지가 있다는 말이 아니라 公案參究에 두 가지가 있다는 뜻이다. 參句, 즉 活句를 참구한다 함은 言語文字와 槪念, 觀念을 포함해서 모든 전거틀을 배제하는 것이다. 그 모두가 중생의 분별하는 心念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그렇지 못한 것은 參意, 즉 死句를 參究하는 것이다.
看話禪이 널리 퍼지게 된 것은 그것이 無心, 無所依, 또 다른 말로 하자면 無媒介의 수행에 효과적이기 때문이라고 풀이할 수 있다. 달리 말하자면, 看話는 不覺의 衆生이 覺의 心, 즉 無心과 가장 가까운 心念을 닦는 데 효과적이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圓融스님에 의하면, 自性을 깨칠 때까지 話頭는 禪定에서 妄想과 執着을 뿌리치고 의식을 집중시키는 역할을 하지만, 活句조차도 覺 이전에는 근본적으로 妄想에 속하는 것이어서 覺을 이룬 뒤에는 뗏목을 버리듯이 버려야 한다고 한다. 그러나 看話修行者의 정신상태는 다른 어느 不覺의 心念보다도 正念에 가까운 바, 分別心을 일으키지 않고 話頭만을 붙잡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성철스님이 公案參究를 강조하는 이유도 無心을 닦는 데 있어서 그것이 발휘하는 독특한 역할에서 찾을 수 있다고 생각된다.
또 한 가지 이유를 부단한 수행의 강조와 연관해서 찾아볼 수 있다. 圓融스님은 {博山禪警語}를 인용하면서 看話의 생명은 부단하고 간절함에 있다고 지적한다. 이처럼 부단하고 간절한 화두침구의 강조는 疑團의 개념과 직결된다. 參句, 즉 活句의 參究는 곧 疑團을 형성하는 것이라고 정의된다. 圓融스님은 疑團의 강조가 大慧스님에 와서 더욱 강해져서 그것이 곧 看話의 핵심이요, 疑團이 없이 집중만 하는 看話는 死句參究라고 여기게 되었다고 한다. 朴性焙 교수는 이 疑團의 看話를 信仰과 疑心의 역동적 관계로 풀이한다.
수행자는 '내가 이미 부처'라는 祖信과 '나는 그래도 중생'이라는 정직한 고백 사이에서 信仰과 疑心, 肯定과 不定의 갈등을 경험할 수밖에 없다. 이걸 어떻게 풀것인가?
……禪佛敎 傳統에서는 疑團의 看話라는 방법을 고안해 냈는 바, 이는 그 갈등을 일으키는 두 명제의 어느 한쪽을 선택함으로써 갈등을 해결하는 게 아니라 부단한 의심을 통해 그 갈등을 최대로 일으키고 키우는 수행방법이다.
문제를 예, 아니오로 해결하는 것, 달리 말하자면 두 極의 命題 가운데 어느 하나를 선택하는 해답을 찾는 것은 分別心의 전형적인 作動樣相이다. 그러니까 疑團의 看話는 두 극 사이의 갈등을 일으키ㅗ 극대화함으로써 不覺의 心念을 無分別의 양상으로 작동시키는 것이라고도 풀이할 수 있다. 看話의 극치를 흔히 온 세상도, 자기 자신도 없이 오로지 疑團만이 또렷하다는 식으로 표현하는 것도 分別心이 끼어들 새 없을 만큼 극도의 밀도와 부단성을 가지고 화두만 붙들고 있음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하겠다.
그러므로 看話는 조금의 分別이라도 작동하면 무산되어 버린다. 分別 중에 가장 큰 힘을 가진 것 가운데 하나가 知的 辨別이며, 그런 이유로 해서 "公案을 해설하는 것은 아무리 잘 해도 간화수행에는 아무 의미도 없으며 심지어 그것을 망쳐버린다"고 하는 것이다. 조주스님의 無字 公案을 예로 들면서 박성배 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無字를 가지고 부단하게 의심을 일으키는 것이 중요하다. 화두참구에서 중요한 것은 無라는 말 그 자체가 아니라 '이 뭐꼬? 이 뭐꼬? 이 뭐꼬?'하고 의심을 놓지 않는 것이다. ……종국에 看話의 목적은 無門스님이 지적하듯이 '分別心을 끊어버리는 데' 있다." 성철스님이 부단한 수행을 강조하는 것도 이와 같은 看話禪의 성격과 연관이 있으리라고 짐작된다.
성철스님이 화두참구를 강조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앞에서 지적한 禪修證上의 師弟關係와 연관해서 찾을 수 있다고 생각된다. 公案打破의 여부는 수행자가 死地에서 大活해서 究竟覺을 성취했느냐 못했느냐를 가늠하는 기준이 된다. 祖師들이 정해 놓은 公的인 規則에 따른 일종의 試驗이며 그 關門을 통과해야 사사로운 認定이 아니라 公的으로 印證 받을 수 있고, 그런 뜻에서 公案은 祖師들이 설치해 놓은 관문, 즉 祖師關이라고도 불린다.
宗敎的 境地論의 원리에 입각하건대, 그 시험을 베풀 수 있는 이는 원칙적으로 오직 正眼의 善知識뿐이다. 특히 死境에 처한 수행자에게는 三關의 기준도 이미 無用인지라 더욱 그렇다. 여기에서 성철스님이 修證論에서 公案이 가지는 자리 하나와 함께, 그가 그토록 중시하는 正眼宗師의 자리도 찾아볼 수 있다고 생각된다.
Ⅲ. 結 語
이상에서 성철스님의 禪修證論에서 개진된 命題들이 어떻게 유기적으로 관련을 맺으며 하나의 체계를 이루고 있는가를 살펴보았다. 그런 가운데 覺과 不覺의 엄격한 구분이 그 修證論의 핵심 전제 가운데 하나이며, 이것은 覺의 超越視 내지 神秘化라기보다는 實修의 현장에서 그런 엄격한 구분이 늘 타협없이 前提되어야만 수행의 생명이 상실되지 않는다는 문제의식과 연관해서 이해해야 함을 서술하고자 하였다. 또한 많은 혼란을 일으킨 '頓'의 의미를 정리하는 시도를 하였으며, 同時, 完璧, 無所依라는 세 가지 뜻을 닻으로 삼아서 無心, 寤寐一如, 死中得活, 公案參究, 頓修 등 핵심 개념과 명제들을 서로 연관시키며 풀이해 보았다. 그런 가운데 필자가 보기에 그 동안의 頓漸論爭에서 그다지 확연하게 이해되지 못했거나 오해된 사항들, 또한 별로 주목되지 않았다고 생각되는 점들을 나름대로 파악해 본 성철스님 修證論의 전체 構圖속에서 풀이해 보고자 시도하였다.
이런 시도들이 성철스님의 사상을 왜곡하지나 않았는가 심히 걱정되는 가운데, 앞으로 先輩諸賢의 叱正을 통해서 모처럼 일어난 禪修證論에 대한 관심이 제대로 가닥이 잡히고 그 관심이 禪佛敎 傳統에 대한 이해와 이 시대 및 앞으로의 시대에 불교가 무엇을 가지고 어떻게 생명력을 키워갈 것인가에 대한 심각한 성찰로 이어질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禪門正路의 修證論에 대한 논평 _정경규(동국대 선학과 강사)
좀전에 발표자이신 윤원철 교수님에 대한 소개가 있었습니다만 교수님은 오랫동안 미국에서 공부하시다가 성철스님에 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취득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곧바로 한국 불교계 나아가서는 한국 종교계가 제도권 속에서 부여할 수 있는 가장 영광스럽고도 책임있는 자리의 하나라고 볼 수 있는 서울대학교의 종교학과 교수님으로 이번 학기에 부임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가 설정해 둔 그 자리에 많은 사람들 중에서도 유독 윤 교수님을 맞아들인 것은 우리 사회가 그만큼 성철스님의 사상을 연구하신 윤 교수님에게 큰 기대를 걸고 있기 때문이라고 확신합니다. 저 역시 불교를 전공하는 한 불자로서 불교를 전공하신 분이 그런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셨다는 점에서 반가운 마음으로 축하를 드리며 앞으로 불교계 및 모든 종교계와 모든 사상계에 정법으로서의 불교를 크게 선양해 주실 것을 진심으로 기대해 보겠습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본 토론에 들어가기로 하겠습니다.
이번 세미나의 성격이 주로 성철 큰스님의 열반 1주기를 맞이하여 그 생애와 사상의 정리 및 소개에 주된 초점이 맞추어진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발표자의 논문을 읽어 본 후의 대체적인 느낌도 대개 이러한 취지에 잘 맞추어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이 논문을 읽으면서 가끔은 내가 성철스님의 저술을 읽고 있는 것은 아닌가라고 착각하게 할 만큼 대체적으로 스님의 사상을 그 원형에 손상을 주지 않고 정리 전달한 것으로 보아집니다.
그러나 이번 세미나의 성격상 어쩌면 당연한 귀결인지도 모르겠습니다만 구태여 말을 하자면 본 논문은 소개에 치중한 정리의 글이라는 느낌이 들 정도로 발표자 자신만의 특별한 논지는 뚜렷이 주장되어 있지 않았다고 보아집니다. 그래서 토론자의 입장에서 이 논문의 요지를 비판하라고 한다면 그러한 것은 거의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표현 방법에 따라서 몇 군데 오해의 소지가 있는 부분에 대하여 확인해볼 필요성을 제외하면 본 논문에서 언급한 내용은 큰스님의 사상을 너무 잘 전달하고 있다고 보아지므로 비판을 하면 오히려 큰스님 사상을 비판하는 것이 되어 버릴 정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오히려 이번 세미나에서 큰스님의 사상을 {선문정로}와 {본지풍광}이라는 두 저술을 중심으로 소개함에 있어서 윤 교수님이 {선문정로} 쪽을 담당한 만큼 {선문정로}를 중심으로 조망해 볼 수 있는 스님의 사상이나 의도중 혹 소개에서 빠졌다고 보아지는 것이나 좀더 부각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되는 부분을 본 논문의 형식이나 구성체계와 연관지어 질문 드리겠습니다. 아울러 그 내용면에 있어서는 하나하나를 검토하기보다 독자에 대한 명확한 의사전달을 위하여 몇 군데 확인 질문만을 드리고자 합니다. 그러면 우선 첫 번째 질문사항부터 정리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禪門正路 思想의 요점분류>
Ⅰ禪門正論 내지 頓悟頓修에 입각한 사상
1. 일반적 사항
1) 禪門正路의 저술시기와 저술목적
2) 正眼을 갖춘 인물 및 저술사항
2. 見性 以前의 문제
1) 見性 以前의 妄念
2) 見性 以前에 대한 평가
3) 修行法
3. 見性 순간의 문제
1) 妄念의 양상과 頓的인 悟의 성취
4. 見性 그 자체의 문제
1) 見性의 證據
2) 見性에 대한 평가
5. 見性 以後의 문제
1) 悟後保任의 문제
Ⅱ. 禪門正論 내지 頓悟頓修에서 본 頓悟漸修的인 異說의 평가
1. 일반적 사항
1) 관련인물사항
2) 관련인물의 저술문제
3) 頓悟漸修와 관련된 思想에 대한 전반적인 평가
2. 頓悟漸修는 未見性 상태인 解悟漸修
1) 頓悟漸修의 頓悟
2) 頓悟漸修의 漸修
3. 圓頓死句의 문제
1) 華嚴과 事事無碍와 禪敎一致와 圓頓門
2) 圓頓死句와 知解의 病
3) 普照思想과 華嚴禪
4. 三句 三玄 三要의 문제
1) 三句 三玄 三要에 대한 解釋行爲의 문제
2) 三句 三玄 三要를 悟入次第로 配定하는 문제
Ⅰ禪門正論 내지 頓悟頓修에 입각한 사상
1. 일반적 사항
1) 禪門正路의 저술시기와 저술목적
2) 正眼을 갖춘 인물 및 저술사항
2. 見性 以前의 문제
1) 見性 以前의 妄念
2) 見性 以前에 대한 평가
3) 修行法
3. 見性 순간의 문제
1) 妄念의 양상과 頓的인 悟의 성취
4. 見性 그 자체의 문제
1) 見性의 證據
2) 見性에 대한 평가
5. 見性 以後의 문제
1) 悟後保任의 문제
Ⅱ. 禪門正論 내지 頓悟頓修에서 본 頓悟漸修的인 異說의 평가
1. 일반적 사항
1) 관련인물사항
2) 관련인물의 저술문제
3) 頓悟漸修와 관련된 思想에 대한 전반적인 평가
2. 頓悟漸修는 未見性 상태인 解悟漸修
1) 頓悟漸修의 頓悟
2) 頓悟漸修의 漸修
3. 圓頓死句의 문제
1) 華嚴과 事事無碍와 禪敎一致와 圓頓門
2) 圓頓死句와 知解의 病
3) 普照思想과 華嚴禪
4. 三句 三玄 三要의 문제
1) 三句 三玄 三要에 대한 解釋行爲의 문제
2) 三句 三玄 三要를 悟入次第로 配定하는 문제
이상은 제가 본 선문정로의 여러 가지 내용들에 대한 개략적인 분류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렸듯이 발표자께서는 선문정로의 수증론 그 자체만은 잘 전달해 주셨다고 봅니다. 그러나 스님의 이 수증론이 현재 한국 불교계를 크게 지배하고 있는 보조사상의 비판이란 점에서 그 큰 목적을 두고 있었다면 이 논문에서도 그러한 면을 조금 더 부각시키는 것이 좋지 않았겠는가라고 생각해 봅니다.
이상 오해의 소지를 가진 몇몇 구절들은 부분적인 문제이면서도 이 논문의 논지를 이끌어 가는 데 있어서는 중요한 골격을 이루는 요소이기도 하기에 독자의 이해를 도와주시기 부탁드립니다.
앞에서 말씀드렸듯이 발표자께서는 선문정로의 수증론 그 자체만은 잘 전달해 주셨다고 봅니다. 그러나 스님의 이 수증론이 현재 한국 불교계를 크게 지배하고 있는 보조사상의 비판이란 점에서 그 큰 목적을 두고 있었다면 이 논문에서도 그러한 면을 조금 더 부각시키는 것이 좋지 않았겠는가라고 생각해 봅니다.
특히 위의 분류 내용들 중에서 '圓頓死句의 문제'와 '三句 三玄 三要의 문제'는 본 논문에서 빠진 대표적인 부분의 하나라고 생각됩니다만 그러나 이 가운데는 선문정로의 비판대상이 실질적으로 어떤 수행방식을 행하고 있는 사람들인가를 알 수 있게 하는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이미 잘 알려진 바와 같이 보조의 사상은 그의 수행 중 득력한 계기에 따라서 惺寂等持門 圓頓信解門 看話徑截門의 三門으로 분류되고 惺寂等持門은 頓悟漸修와 定慧雙修로 圓頓信解門은 禪敎一致로 대변되곤 합니다. 간혹 선교일치를 '禪의 사상'과 '敎의 사상'이 그 사상적인 내용면에서 일치하는 이론적 일치의 문제라고 이해하는 경우도 있습니다만 사실은 보조가 敎의 행위를 통해서도 正覺을 이룰 수 있는가라는 고민 속에서 화엄사상을 통하여 체득한 가능성이 선교일치이므로 선과 교의 이론적인 일치문제라기보다 교의 행위가 그대로 선이 된다는 수행적인 문제였습니다. 결국 보조에게 있어서 돈오점수의 체계에 따라 행하는 실질적인 수행의 내용 중 가장 핵심적인 부분은 바로 선교일치라는 敎的行爲로서의 禪이었다고 할 수 있고 그러한 근거들은 그의 저술 도처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성철스님은 돈오점수와 선교일치를 원돈사상이라고 묶어서 비판을 하고 있으므로 소위 돈오점수의 원리 하에 있는 수행법은 모두가 그 비판 대상이 되겠지만 특히 성철스님의 이 비판에 가장 귀를 기울여야 할 대상은 바로 이 禪敎一致 내지 圓頓言句들에 입각하여 수행해 가는 사람들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선문정로}의 緖言이 "古今 善知識들의 玄言妙句는 모두 눈 속에 모래를 뿌림이다"로 시작할 뿐 아니라 본문의 첫구절도 "敎와 觀을 다 휴식하느라"라는 구절로 시작하는 것은 이 문제가 그만큼 {선문정로} 전체를 통하여 그 사상적인 색깔을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아울러 "십지의 보살들이 설법하기는 如雲如雨해도……"라든지 "法談하는 것을 보면 부처와 조사를 죽였다 살렸다 마음대로 하지만……"
등등을 언급하시며 '敎로서의 禪[선교일치]' 다시말해 '圓頓言句를 觀하는 수행'을 경계하고 있습니다. 성철스님이 비판한 敎家의 사람들이란 단순한 학자가 아니라 十地나 等覺에까지도 올라 선문답이나 법담을 자유로이 할 수 있는 소위 한국적 분위기 內에서의 선지식들을 지칭하는 면이 더 강했습니다. 이처럼 성철스님이 보조스님의 수행관에 크게 젖어있는 한국 조계종의 한계를 비판하셨다면 그 가장 실질적인 수행방식도 원돈언구를 관하는 선교일치법에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圓頓·圓頓言句·禪敎一致 등에 대한 연구는 성철스님이 평생 동안 비판한 그 대상이 무엇인가. 그리고 어떤 식의 수행을 하는 사람이 이 비판에 가장 귀를 기울여야 하는가를 결정짓는 중요한 문제입니다.
자신이야말로 {선문정로}에서 비판되는 바로 그 공부를 하면서도 그 비판이 정작 자기에게 해당되는 내용인지는 모르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물론 자기가 과연 성철스님의 그 비판 대상인가를 판별하는 전형적인 기준은 寤寐一如되었는가라는 문제로서 점검해 볼 수 있다고는 하지만 오매일여 안 된 수행인이라도 자기의 수행법이 오매일여를 뚫는 데 있어서 취해서는 안 될 수행법은 아닌가를 판별하는 것은 중요한 문제일 것입니다. 그래서 성철스님께서는 선교일치·원돈언구를 관하는 수행으로는 미래제가 다하도록 닦아도 구경각은 이룰 수가 없다고 하셨는데 그 원돈관법이 과연 자신의 수행법과는 다른가 아닌가를 판별하는 것은 중요한 의의를 가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일반인들로서도 쉽게 알 수 있도록 설명해 두지 않으면 {선문정로}에서 애써 밝힌 그 正路가 구체적으로 어떠한 것이며 어떠한 대상에게 내린 처방약인지를 이해하지 못할 뿐 아니라 힘들여 저술한 노고가 제대로 효과를 거두지 못할 것이라고 보아집니다. 발표자께서는 [선문정로의 修證論]이라는 논문을 쓰셨습니다만 이 논문을 읽고 실제로 도움을 받아야 할 원돈언구를 관하는 수행자가 과연 자기자신인지 아닌지를 쉽게 구별하여 알 수 있도록 '원돈', '원돈언구', '선교일치'에 대해서 보충 설명을 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다음에는 부분적인 표현의 문제에 있어서 오해의 소지를 남길 만한 구절에 대한 해명을 듣고자 합니다. 논문의 '見性卽佛' 부분에서 성철스님의 사상골격은 覺과 不覺, 佛性과 衆生性의 엄격한 구분에 바탕한다고 했습니다. 經에는 '心佛及衆生 是三無差別'이라 했고 禪宗의 큰 宗旨도 '平常心是道'에서 찾았으며 '煩惱卽菩提'라고도 했습니다. 證道歌에도 "도인은 망상도 없애지 않고 참됨도 구하지 않으니, 무명의 참 성품이 곧 불성이요, 허깨비 같은 빈 몸이 곧 법신이로다"라는 구절로부터 시작되어 있고 성철스님은 이를 특별히 번역하고 주해서까지 내셨습니다. 그러면 발표자의 위 논지는 자칫 독자에게 오해를 불러일으킬 소지가 있으므로 해명을 부탁드립니다.
아울러 발표자께서는 이와 연관하여 '無心無念'을 거론하셨습니다. 이 어휘들은 물론 {선문정로}의 목차에도 모두 등장하는 성철스님의 주된 사상이겠습니다만 위 중도가 첫 구절의 내용과는 어떤 관계가 있는지를 좀더 세부적으로 언급해 주셨으면 합니다. 가령 망상이 10개에서 9개……2개·1개·0로 된 것이 無念인지, 가령 그렇다면 증도가에서 망상을 없애지 않는다고 한 것은 무엇인지, 만일 망상 10개가 일어나는 그대로가 본래 空했으므로 이것을 이름하여 무심이요 무념이라고 말한 것인지, 만일 그렇다면 {선문정로}에서 삼세육추의 과정에 따라 거친 망상을 제거한다느니, 또 거친 망상은 제거했지만 미세망상은 남았다느니, 나아가 心念의 滅盡이라느니, 이 미세망상까지 제거한 결과가 비로소 무심이요 무념이라고 한 것은 어떤 입장인지에 대하여 독자의 이해를 도와주시기 바랍니다.
아울러 발표자께서는 頓의 의미를 無媒介라고 해석하면서 "不覺的인 것이 覺의 '매개'가 될 수 없다"고 하셨고 三關突破 부분에서는 "돈오이전의 수행 '방편'이 필요없다고 말하는 게 아니다"라 하셨습니다. 얼핏보면 일관성을 잃은 것처럼 보이는데 여기서 '매개'와 '방편'의 차이가 무엇인지 좀더 상세히 설명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가령 돈오 이전의 수행 '방편'으로서 화두참구를 택했다면 이것의 필요성은 인정한 것으로 되는데 이 돈오하기 이전의 不覺的인 화두참구가 다시 覺의 '매개'가 될 수는 없다고 한 것은 어떤 의미인지를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이상 오해의 소지를 가진 몇몇 구절들은 부분적인 문제이면서도 이 논문의 논지를 이끌어 가는 데 있어서는 중요한 골격을 이루는 요소이기도 하기에 독자의 이해를 도와주시기 부탁드립니다.
논평 및 질문에 대한 답변_윤원철
정경규 선생님의 논평과 질문에 대하여 깊이 감사드립니다. 특히 저의 졸고에서 돈오점수설에 대한 성철스님의 비판이 그다지 부각되지 않은 점을 지적하시고, 또한 그와 관련된 제반 핵심 사항을 정리해 주신 것은 선수증론에 대한 논의에서 꼭 천착되어야만 할 근본적인 문제들을 정확하게 짚어주신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다시한번 정경규 선생의 논평과 질문에 감사드립니다.
돈오점수설에 대한 성철스님의 비판이 저의 발표에서 그다지 부각되지 않은 것은 무엇보다도 발표 길이의 제약 때문임을 양해해 주실 줄로 압니다. 돈오점수설에 대한 성철스님의 비판 분석으로부터 출발해서 스님의 수증론에 접근해 가는 방법을 취할 수도 있었겠습니다만, 그러자면 아무래도 두 배 길이의 발표가 될 것 같아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정 선생께서 제기하신 질문사항에 대해 저의 의견을 간단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우선 圓頓門의 문제에 대해 말씀하셨는데, 원돈문이란 看話徑截門에서 문제삼는 死句냐 活句냐 하는 관심에 입각해 보자면 역시 死句의 參究에 해당하는 수행의 길임에 異論이 있을 수 없겠습니다.
잘 아시다시피, 이 점은 圓頓信解의 길을 선양한 지눌스님께서도 자신이 직접 지적하신 바입니다. {看話決疑論}에서 지눌스님은 禪門徑截門에서 보건대 원돈문도 知解에 의지하는 수행이라 解碍의 병통을 안고 있음을 바로 짚어 말씀하셨습니다.
성철스님이 돈오점수설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점을 知解에 의지함으로 꼽은 것과, 지눌스님의 이러한 지적은 그 문제의식에 있어서 바로 일치하는 것입니다. 禪門의 修證에서 가장 문제되는 것이 知解의 병통임을 두 선사가 모두 힘주어 말씀했다고 하는 사실은 우리가 선수증론을 가지고 논의할 때 반드시 주목해야 할 점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런데 지눌스님은 그래도 지해에 의지하는 원돈문의 가치를 인정하였고 성철스님은 그것을 전적으로 부인하였다는 엄연한 차이가 또 있습니다. 이것을 어떻게 풀어내는가 하는 것이 돈점문제의 실마리를 잡는 하나의 중요한 관건이라고 생각됩니다. 성철스님께서는 지눌스님의 사상에 원돈신해문으로부터 경절문으로 발전이 있었던 것이라는 풀이를 피력하고, 심지어는 {看話決疑論}은 지눌스님 자신의 저술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암시도 주는데, 이 점은 학자들로서는 좀더 다각도로 곰곰이 따져보고 나서야 결론지을 사항이라고 생각됩니다.
아무튼, 정 선생님이 돈점 및 선교 관계의 문제가 이론적인 일치나 차이의 문제라기보다는 수행적인 문제라고 지적하시고, 실제 수행자의 고민과 관련해서 보충설명을 요구하신 것은 이 문제에 접근하는 시각에 있어서 탁견을 시사한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실제 수행자의 고민에 초점을 맞추어 보건대, 이치의 길, 말의 길, 뜻의 길에 따라 듣고 헤아리는 알음알이 생각, 즉 지해가 작용함은 모든 중생 살림살이의 기본 현실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문제를 풀어가는 데 있어서는, 박성배 교수께서 지난 해에 해인사에서 열린 학술대회에서 발표했고 {백련불교논집} 3집에 실린 논문 [돈오돈수론]의 한 대목이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됩니다.
거기에서 박 교수는 信章과 修章으로 관점을 나누어서 선수증론에 접근할 필요성을 지적하셨는데, 信章의 요체는 不二요 修章의 요체는 二元的 衆生 現實입니다. 그러니까 선수증의 문제는 곧 그 不二의 信과 엄연한 분별의 현실을 한꺼번에 안고 있는 수행자가 과연 어떻게 수행해야 하는가 하는 것이겠습니다. 모든 중생이 있는 그대로 부처라든가, 不立文字, 格外道理, 無所依 등의 禪理가 信章의 내용인데, 그런데도 修章에서는 분별의 知解, 見聞覺知에 의지해야 하는 현실에 부딪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선수증론에서도 修章의 문제는 敎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발표 논문에서도 인용한 바 있는 Bernard Faure가 禪과 敎를 가르는 경계선은 선종과 교종 사이에만 그어지는 게 아니라 禪 자체를 또한 관통한다고 지적한 것도 이와 관련해서 시사하는 바가 많다고 생각됩니다. 선종이 확립된 이후에도 숱한 선사들이 敎를 부인함으로써 禪을 가르치는 언설을 해왔음은 禪敎의 문제가 다만 종파적 문제가 아니라 信章의 禪理와 修章의 수행실제가 부딪치는 선수증 자체내의 문제이기 때문이라고도 볼 수 있겠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정 선생님의 질문으로 돌아가 본다면, 정 선생님의 지적대로, 화두를 들고 참선수행하는 이들 치고 활구와 사구를 엄연히 가르는 간화경절문의 가르침을 모르지 않는 한 그 누가 "나는 圓頓信解門이 궁극의 길이라고 믿어서 圓頓言句를 관하노라"고 자부하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싶습니다. 한편으로, 간화경절문의 이치대로 충실하게 수행하고자 간절하게 평생을 바치는 이들도 지해, 견문각지가 작용하지 않는 수행만으로 삶을 채울 수 있는 이가 또 어디 있을까 싶습니다. 다만, 좀 단순화시켜서 말하자면, 그 信章과 修章의 접점에서 이루어지는 수행이 바로 活句의 看話라고도 할 수 있지 않을까, 화두를 들고 의심하는 간절면면함이 수그러들고 끊어지는 순간마다 이미 二元的 次元이 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 않겠는가 하고 말씀드리는 정도에서 이 문제에 대한 답변을 가름하고, 정 선생님께서 거론하신 바 원돈, 원돈언구, 선교일치의 문제는 그 본격적인 논의를 이후의 과제로 남겨두었으면 합니다.
그 다음에는 제가 覺과 不覺, 부처와 중생의 엄격한 구분을 성철스님 수증론의 골격으로 본 데 대하여, 그렇다면 모든 중생이 있는 그대로 다 부처라는 취지의 經文과 禪旨에 어긋나지 않은가 하는 의문이 있을 수 있겠으므로 해명을 요청하셨습니다. 정 선생님께서 언급하신 "마음과 부처와 중생, 이 셋이 다른 게 아니다"라든가, "평상심이 곧 도"라든가, "번뇌가 곧 보리다" 또 "도인은 망상도 없애지 않고 참됨도 구하지 않는다"는 등의 말씀은 모두 깨친 경지, 즉 不二의 경지의 증언입니다. 깨친 경지를 전제하지 않고 不二를 세상의 원리로 얘기하는 것이야말로 불교의 근본정신과 정반대되는 佛法의 神秘化, 絶對化, 超越化, 他者化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하자면, 覺, 不覺의 문제와는 상관없이 佛法을 마치 물리법칙처럼 여기는 태도가 바로 그런 것입니다. 수증론의 信章과 修章을 두고 말하자면, 위에 든 不二의 말씀들은 信章의 메시지인 깨친 경지의 증언입니다. 이치와 말과 뜻의 길이 끊어진 不二를 증명하여 깨친[證俉] 자리에 관해서도 새삼 구차하게 이치와 말과 뜻을 동원하여 修證을 論함은 그 내용을 證하지 못하고 信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不覺의 수행자를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修章에서는, 覺과 不覺, 부처와 중생이 다르지 않다고 하는 不二의 信은 역설적이게도 내가 그 信의 내용을 실제로 證하였느냐 못하였느냐 하는 엄격한 분별이 있어야만 信으로서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이지, 그렇지 못하면 희론일 뿐이고 막행막식의 빌미가 될 뿐인 것입니다. 원리로서가 아니라 실제 겪는 사건으로서의 覺, 證俉가 그토록 강조되는 것도 바로 거기에 이유가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깨쳤느냐 못깨쳤느냐 하는 것이 {禪門正路}의 기본 문제의식인 이유 또한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고 생각됩니다.
그 다음으로 無心無念에 대해서 설명을 요청하셨는데, 이 문제 또한 위와 같은 맥락에서 풀어볼 수 있어서 간단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有念과 無念을 중생과 부처의 근본 차이라 하면서 모든 망념을 철저하게 다 없앤 것이 무념이요 무심이라고 역설하는 것은 修章의 메시지라고 하겠고, 본래 없앨 것도 구할 것도 없다고 하는 것은 信章의 메시지라고 하겠습니다. 한마디 덧붙인다면, 깨침도 닦음도 다 頓이라고 함은 망념이란 게 본래 空하다는 信章과 망념을 끊어야 한다는 修章의 구분이 원칙적으로 무의미하다는 것, 그러나 실제로 그 구분을 無化시키는 깨침의 사건은 반드시 문제삼아야 한다는 뜻을 한꺼번에 담고 있지 않은가 하는 것입니다. 망념이 본래 空하다는 것만 말한다면 성철스님도 "徹見心性하여 當下에 無心하면 涅槃心과 如來心도 求覓할 수 없거니 어찌 解悟와 證俉를 논하리오마는……"하는 단서를 달아 암시하듯이 頓이고 漸이고 따질 일이 못되고, 망념이 본래 空함을 전제하지 않은 채 망념을 끊어 무심무념이 되는 것만 말한다면 頓이란 말을 붙일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제가 쓴 '매개'라는 말, 또 수행방편의 의의와 관련된 문제를 제기하셨는데, 방편이란 말 자체가 이미 진체는 속체로써 매개 불가능하다는 뜻을 담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진체의 도리는 격외이므로 그것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할 수 없이 방편을 사용한다. 역으로 불이의 격외도리를 드러내기 위한 모든 이원적인 방법은 방편이다라고 이해할 수 있겠는데,
그러니까 방편은 아무리 도리를 드러내는 데 유용한 것이라 해도 도리어 그 자체일 수는 없다는 뜻이 들어있다고 하겠습니다. 증오와 수행방편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수행의 방편은 불각의 중생에게 유일하게 가용한 것이어서 필수불가결이기는 하지만, 그것을 가지고 待悟를 한다면 사실상 방편을 갖고 覺의 매개로 착각하는 셈이라 하겠습니다. 그러니까 수행의 여러 가지 방법을 '방편'으로서 필요불가결하다고 인정하는 것과 그것을 覺의 매개로 삼는 것은 이미 이율배반적인 태도라 하겠습니다. 어떤 수행방법을 覺의 매개로 여긴다면 그 수행방법은 이미 '방편'이 아니며, 格內(?)와 格外를 혼동하는,
즉 불교에서 가장 근본적인 문젯거리로 지적하는 오류를 범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그리고 이 점은 "수행방편"으로서의 화두참구에도 그대로 적용되며, 성철스님이 화두참구를 견성의 첩경이라했지 돈오돈수 그 자체라고 하지는 않은 뜻도 거기에 있다고 봅니다. 원융스님도 {간화선} 86∼87쪽에서 그런 뜻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는 것을 소개하는 것으로 제 답변을 가름하겠습니다.
다시한번 정경규 선생의 논평과 질문에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