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사상

東洲 成悌元의 生涯와 道學精神

醉月 2012. 11. 24. 12:07

東洲 成悌元의 生涯와 道學精神_김문준


성제원은 16세기 중반 한국의 학자이다. 그는 자기를 수양하여 깨끗하고 고결한 인생을 즐긴 도학군자의 모범을 보여주었다.

성제원은 한국의 정통 도학을 계승했으며, 유학의 經史는 물론 천문·지리·의약·算學·卜筮·律 呂 등 여러 術學에도 밝게 알았으며,

仙學이나 불교도 해박했다. 그는 聖人의 학문을 익히고 실천하기 위하여 노력하였으나, 한편으로는 산수를 즐기며, 세상의 속절 에 얽매이지 않고 탁트인 마음의 정취를 지니고 있었다.

 

성제원이 교류한 대표적인 인물은 훌륭한 학자이면 서도 평생 평범한 일생을 살았던 花潭 徐敬德(1489- 1546), 명종 말년에 경전에 밝고 행실이 뛰어난 사람으로 천거되었으나 모두 사양하고 벼슬을 하지 않은 大谷 成運(1497-1579), 세상사에 초탈하여 높은 경지를 즐긴 南冥 曺植(1501-1572), 기인으로 이름난 土亭 李之涵 (1517-1578), 토정의 문인인 孤靑 徐起(1523-1591) 등 이다.

 

이들은 모두 세상에 드문 조선중기의 이름난 학자들이면서 동시에 대표적인 세상에서 은둔한 선비들로서, 오늘날에도 너무도 잘 알려진 대학자들이다. 성제원이 보여 주었던 그 순수한 정신과 고아한 정취, 그리고 명리에 대한 초연, 불변의 기개는 조선의 선비정신이 지니는 志操의 바탕이었으며 16세기 후반기 이후 한국 선비정신의 밑거름이었다.

 

1. 머리말

한국 정신사의 전개 과정에서 크게 변화 발전한 계기는 여러 차례 있었는데, 특히 고려말에 이르러 성리학이 도입된 일은 한국정신사의 큰 변화를 초래한 계기였다. 성리학은 불교와 도가의 高遠하고 虛寂한 기풍을 바꾸어 현실문제와 직접 맞부딪치는 현실생활과 역사문제 속에서의 경세사상과 자기수양 정신을 일깨우는 새로운 도학 기풍을 만들었다.


그러나 조선 건국과 더불어 인륜과 절의가 무너진 상황 속에서 도학은 세상 속에 나오지 않고 침잠하게 되었고 김숙자 김종직 등의 노력으로 향리에서 私敎育을 통하여 계승되었다. 이러한 속에서 도학의 기풍은 세대를 거듭하다가 드디어 중종 때에 조광조 등이 나와 至治의 기치를 내걸고 새로운 역사 중흥의 계기를 만드는 듯 했으나, 16세기 초반에서 중반기에 걸쳐 4차례의 사화 로 인하여 도학의 참신한 기풍은 완전히 붕괴되어 버릴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나 4차례의 사회가 휩쓸고 지나간 황량한 지적 풍토와 폐퇴한 정치적 풍토 속에서도 혼탁한 세상에 물들지 않고 자기를 수양하여 고아한 인생의 경지를 즐기며 후진을 기르는 깨끗하고 고결한 지성인의 모범을 보여 준 이들이 적지 않았는데, 특히 東洲 成悌元(1506∼ 1559) 선생은 그러한 이들 가운데에서도 대표적인 도학 군자였다.


성제원이 남긴 저술이나 그에 관한 기록은 그리 많지 않는 편이다. 아마도 그가 세상에 잘 나오지 않고 저술 에 전념하지 않은 탓이기도 하지만, 문집이 나온 때가 그가 사망한지 350여년만에 후손 成璣運이 집안의 家 牒과 여러 선생의 文集에 남겨진 글들을 모아 시문집과 연보를 간행한 1906년 이전까지 이미 많은 원고가 산실 되어 버렸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므로 겨우 시문 집 {東洲先生逸稿} 3권 1책(목활자본)이 전하게 되었 다. 1903년 宋秉璿이 쓴 序文과 1903년에 宋炳俊, 1906년에 成璣運이 쓴 跋文이 있다.


이 밖에도 {조선왕조실록}에 그가 유일로 천거될 당시의 기록이 다소 남아있다. 이러한 자료들을 근거로 하여 그의 생애와 도학정신을 살펴보고자 한다. 그의 생애와 도학정신에 대한 이해는 16세기 사화기 직후 한국 도학군자들의 정신세계를 이해할 수 있는 바탕이 될 것 이다.

 

2. 성제원의 가문과 생애

성제원은 연산군 12년(中宗 원년)에 태어났다. 태어난 곳은 [연보]에도 알 수 없다고 했다. 본관은 昌寧이며, 자는 子敬, 호는 東洲이다. 長興府使를 지낸 成夢宣의 셋째 아들이다. 어머니는 부사를 지낸 平壤 趙氏 趙瑞 鍾의 딸이다.
성제원의 선조들은 고려말 이후 매 시기의 한국의 지난 한 역사 속에서 언제나 높은 학문과 절의를 보여주었다. 시조는 고려 때 중윤(中尹)을 지낸 成仁輔이며, 그 의 6대조인 怡軒 成汝完은 고려말에 政堂文學을 지내다가 조선의 태조가 등극한 뒤로 잔치를 베풀어 초대하자 白衣를 입고 나아가 세상에서 서궁의 포의잔치(西宮布 衣宴)라고 칭했다. 그 뒤로 抱川의 王方山에 은거하면서 삭망 때면 松岳을 바라보고 통곡하면서 王方居士라 고 자호하며 고려의 왕씨조를 잊지 않는 의리를 보여 勿溪書院에 배향하였다. 그 아들 檜谷 成石瑢은 조선조 에 들어와서 대제학을 지내었고 시호는 文肅이다.


그의 高祖는 직제학과 병조참판을 지낸 睡軒 成槪이며, 曾祖는 仁齋 成熺인데, 그는 단종 때 승문원 校理를 지냈으며, 종질인 成三問 등이 단종 복위를 도모하다가 실패한 丙子獄事가 일어나자 연좌되어 국문을 당한여 독으로 사망하여 蓼堂과 勿溪와 東鶴 등 여러 서원에 配享되었다.
성제원의 조부인 靜齋 成聃年과 종조부인 文斗 成聃壽 는 부친을 따라다니며 귀양살이를 하다가 부친이 사망하자 고향인 파주에 장사지내고 묘소 아래에서 살았으며, 끝내 세상과 단절하고 칩거하는 평생을 보내어 생육신으로 이름이 났다. 그의 부친인 江湖散人 成夢宣은 일찍이 부친을 여의고 어머니를 지극하게 섬겼으며 시와 글씨가 호방 강직하였다. 長興府使를 지냈으나 선생이 2세 되는 해에 사망했다.


성제원은 어려서부터 뛰어난 바가 있었고 불과 14세에 학문에 뜻을 두었으나, 그 해에 기묘사화가 벌어져서 많은 현인이 화를 당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책을 덮으며 "당고의 화가 현세에도 일어났구나" 하고 탄식하며 은둔의 뜻을 가졌다고 한다. 한훤당 김굉필에게서 성리의학을 전수 받은 서봉 유우에게 수학하였다. 처남인 西 阜 宋龜壽와 圭庵 宋麟壽와 더불어 三賢이라 칭해지기 도 했다. 26세에 외숙 李公을 따라 금강산을 유람하기도 했다.


그는 44세에 모친상을 당하였는데, 몇 개월 동안이나 병석을 지키고 밤에도 눈을 붙이지 않았으며 모친상을 가례에 따라 치루어 효성으로 고을에 칭찬이 높았다. 46세에 탈상한 후 그는 전답과 집을 과부가 된 누이에게 주고는 公州의 先塋 아래에 초가집을 짓고 살면서 먹을 것이 떨어져도 태연했으며 개의치 않았다. 달전 언덕 뒤의 옥정봉 위에 축대를 쌓고 항상 모친의 묘를 바라보면서 울었으므로 사람들이 그 축대를 望墓臺라 고 했다고 한다.


48세에 遺逸로 軍資主簿에 천거되었다가, 그 해에 보은 현감이 되었다. 그는 보은 고을에 도착하여 세속의 형편에 따라 다스리고 정사를 베풀음에 공정하고 엄격했다. 자기 자신에게는 대단히 박하게 했으나 백성을 어루만짐에는 대단히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백성들이 곤궁하지 않고 윗사람을 섬김에 어긋남이 없어서 떠도는 유랑민들이 사방에서 모여들었다. 한번은 관직을 던져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도중에 늙은이와 어린아이 들이 울면서 길을 막고 선생을 둘러싸고는 다시 고을로 돌아온 일도 있다.


보은은 속리산 아래에 있어서 한가할 때면 문득 말과 종을 물리치고 혼자 소요하는 신선의 취미가 있었다. 현감직을 그만 두고 고향으로 돌아가자 고을 사람들이 生祠堂을 세우고 그의 善政을 기록하여 한 권의 책을 내었다. 그리고 그가 별세한 기일에는 반드시 제사 지냈다. 제사 지낼 때에 남녀가 齋戒하였으며 오랜 시간이 지낸 뒤에도 제사를 폐지하지 않았다. 제사 지내는 날에는 남녀노소가 모두 고기를 먹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본래 벼슬에 뜻이 없었으나 다른 사람들이 그가 자기 스스로 높은 체하여 나오지 않는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할 것을 염려하여 현감이 되었다가 임기가 다 하자 그만 두고 옛 집으로 돌아와 일생을 마쳤다. 54세 에 公州 達田의 田舍에서 사망했다. 그는 공주의 忠賢 書院, 보은의 象賢書院과 金華書院, 창녕의 勿溪書院에 配享되었다.
그는 세 번 장가들었으나 후사가 없었고 큰형의 셋째 아들 成聞德이 양자가 되었다. 훗날 구한말에 학덕과 절의로 당대 선비의 모범이 되었던 悳泉 成璣運(1877- 1957)의 11대손이다. 제자로는 선조때 형조·예조참판을 지낸 七峰 成壽益(1528-1598), 雙溪 宋應祥·宋應瑞 형제, 宣祖의 장인이 된 박응순(1526-1580), 李應麒 등이 문인록에 기록되어 있다.

 

3. 시대배경과 성제원의 인품

성제원은 東洲仙人이라고 自號하여, 세상에 동주선생 으로 알려졌다. {인물고}에 그는 經義에 통달하고 大節 이 있다고 기술되어 있다. 그는 역량과 학식이 뛰어나 그 자신은 한 세상을 교화시킬 수 있는 인물이었지만 세상의 도가 쇠퇴하자 자취를 감추고 산야에 물러나 살면서 성리의 이치를 탐구하고 홀로 자신을 지키며 가꾸 는 여유있는 삶을 살았다. 그러므로 고아한 정취만 있는 것이 아니라 經史에 마음을 담고 의리를 즐겨 찾았다.


성제원의 인품에 대하여 {조선왕조실록}에는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는데, 그의 인품을 단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전 보은현감 성제원이 卒하였다. 意氣가 뛰어나고 志尙이 굳세었다. 가정에서는 孝悌를 극진히 하였고, 친구를 대함에는 한결같이 誠信으로 하였으며, 농담을 잘 하고 온화하였다. 아름다운 자연을 만나면 반드시 하루종일 거닐었다. 평상시 남과 지낼 적에는 현인이거나 어리석은 자거나 거스름이 없이 모두 적절히 대하니, 남들은 그의 가슴속을 알 수가 없었다. 일을 만나 여론의 시비가 있으면 한결같이 옛 의리를 따르고 나머지 의논은 개의하지 않으므로 의연하여 범할 수가 없었다. 명종 때에 유일로서 보은현감에 제수되었는데, 벼슬살이를 욕심 없이 하면서 오직 술로써 즐겼으나, 교활한 아전은 위엄을 두려워하고 간사한 백성은 덕에 감복하였다. 임기가 끝난 뒤에는 곧 옛집으로 돌아갔는데 부름을 받고 나아가지 않고 있다가 사망했다."


성제원은 당시에 고결한 인품과 학덕을 지니고 있었던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그가 보은현감으로 있을 때, 남명 조식, 토정 이지함, 화담 서경덕이 모두 멀리에서 찾 아와서 같이 밤을 새우며 수일간을 담소하며 지낸 적이 있는데, 상국 이준경이 그 소식을 듣고 "응당 德星이 하늘에 나타나 있으리라" 라고 했다고 한다.


重峯 趙憲은 상소문을 올려 세상을 구하는 才士를 천거 할 때 성제원을 退溪 李滉, 河西 金麟厚, 南冥 曺植  3 선생과 竝稱하면서, 칭찬하기를 "조정의 큰그릇이오 세상을 구제할 큰 인재"라고 하였다. 尤菴 宋時烈은 "선생이 中國에 태어나지 못한 것을 선현들이 애석하게 여긴 것 을 보면 변방(偏邦)의 작은 선비가 아니다"라고 하였고, 또 "찬 물 속에 비추는 가을달이오, 顔子의 거문고와 曾 點의 비파 타는 心懷"라고 표현하였다.


이처럼 성제원은 16세기 중반의 대표적인 도학군자였다. 그런데 16세기 한국의 상황은 정신사적인 면에 있어서나 정치사적인 면에 있어서 암흑시대였다. 己卯·乙巳사화 등 4대 사화를 겪으면서 바르고 강직한 선비들이 잇달아 수난을 당하자, 사림은 조정에 나가는 것을 꺼려하였고, 조정에 있더라도 감히 바른 논의를 피력하 지 않았으며, 자연히 山林에 은둔하는 선비들이 많았다.


기묘사화 이후의 정계와 학계의 사정에 대하여 율곡 이이는 "국초에는 인재를 많이 육성하여 고려조보다 훨씬 나았는데, 연산군 때에 와서 함부로 죽이기 시작하였고, 남은 기운은 기묘사화 때 거의 다 없어졌으며, 그래도 면면하게 이어가던 숨결이 있었는데 을사사화 때 아주 끊어졌다."고 기술하였다. 조헌도 당시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사화가 혹심하였기 때문에 기미를 아는 선비들은 모두 出處에 대해서 조심하였습니다. 成守琛은 己卯의 화란이 있을 것을 알고 城市에 숨었고, 成運은 동기간의 슬픔을 당하고서 報恩에 숨었으며 이황은 동기가 화를 입은 것을 상심하여 禮安으로 물러갔고, 林億齡은 아우 林百齡이 어진이를 해치는 것을 보고 놀라 외지에서 세상을 등지고 살았습니다.

 

또한 徐敬德이 花潭에 은둔하고, 金麟厚가 벼슬에 뜻을 끊었고, 曺植·李恒이 바닷가에 숨어 산 것 등은 모두 을사년의 사화가 격분시킨 것 입니다. 鄭之雲은 김안국에게 학문을 배웠는데 자기 스승이 큰 죄망에 빠질 뻔하였던 것을 징계하여 술로 세월을 보내어 이름을 감추었고, 成悌元은 직접 송인수의 변을 보고 낮은 관직에서 전전하며 해학으로 일생을 보냈고, 李之함은 安命世의 처형을 보고 바다의 여러 섬을 돌아다니면서 거짓 미치광이로 세상을 도피하였습 니다. 이들은 모두 조정의 큰그릇이고 세상을 다스릴 만한 고매한 인재들인데, 기러기가 높이 날아 주살을 피하듯이 세상을 버리고 산골짜기에서 늙어 죽었습니 다." 이와 같이 기묘·을사사화 이후 사림의 의기가 크게 막히고 상실되자, 많은 선비들이 조정을 떠나거나 들어가지 않고 지방의 향리에서 경전을 연구하고 자기의 언행 을 수양(明經修行)하며 도를 닦으면서 의기와 재주를 묻어두었다.


조정에서는 강직한 선비들이 사라지자 오로지 자기 이익과 직위를 탐하는 자들이 득세하여 더욱 큰 부조리가 만연하였다. 또한 유생들의 학문 풍토도 대단히 비속하게 되었다. 당시 公州의 州學提督官으로 재직하던 조헌이 學政의 폐단을 논하면서 時事에 대하여 강력하게 비판하였던 상소에 다음과 같이 아뢰었다. "지금 조정의 거조는 讒言이 기승을 부려 형벌이 자행되고 어진이를 추대하고 유능한 자에게 양보하는 뜻이 전혀 없으며, 관리들 사이에도 학문이 끊어지고 교양이 부족하여 孝悌의 정신을 흥기시켜 배반함이 없게 하는 풍속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이에 三綱은 매몰되고 의리가 분명치 못하여 異說을 주장하는 무리들이 세상에 날뛰고 임금을 버리고 어버이를 뒤로 여기는 설이 기탄 없이 자행되고 있습니다. 지방의 선비들도 오직 이욕만을 찾기에 급급하여 교육을 확립하고 인륜을 밝히는 내용을 강론하려 하면 곧 시문을 짓는 일이 급하다 하고, 白鹿學規(주자의 가르침)에 대하여 논하려 하면 곧 司 馬試가 늦어진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다시 어질고 바른 인재들이 조정에 절실하게 필요했다. 이에 따라 이조에서, 坡州의 成守 琛·草溪의 李希顔·晉州의 曺植·砥平의 趙昱과 함께 公 州의 成悌元을 '경학에 밝고[經明] 행실이 착하다[行 修]'고 하여 遺逸로 천거하여, 성제원은 이들과 함께 6 품에 임명되었다. 성제원은 돈녕부 주부와 군기시 주부 를 거쳐, 명종 임자년에 조식·이희안·조욱과 함께 다시 특별히 지방 고을에 임명되었다.


이러한 조정의 노력으로 무오·기묘의 사화 이후로 몰락 하였던 사림계의 新進 士類들이 관리에 다시 등용되면 서 '향약'을 보급하고, '소학'을 장려하여 향촌질서 및 사회교화 체계를 확립하여 갔다. 명종·선조를 거치는 동안 이와 같은 향촌질서 및 사회교화 체계는 더욱 확 립되었고 성리학 연구의 심화로 학문적으로 바탕을 마련해 나갔다.


이로서 고려말 조선초에 易姓혁명을 반대하여 과거를 외면하는 것을 자기 긍지로 삼아 관직에 참여하지 않고 '經明行修'로서 자기를 수양하여 학덕을 높이는 것을 본무로 삼았던 도학전통은 더욱 존중되었다. '독서하는 자는 士라고 하고 政事에 종사하는 자는 대부'(讀書曰 士 從政爲大夫)라고 한다는 중세 사대부의 생활신조는 이제 과거로 출신하여 정사에 참여하는 것이 본무가 아니라 '경명행수'로서 학덕을 쌓는 것이 유학자로서 대접을 받는 풍토로 계승된 것이다. 이와 같이 과거를 외면하는 유학자를 훗날 '山林'이라고 하였으며 유교국가 에 있어서 유학자로 대우받는 이 사람들은 과거에 합격하여 관인이 되어있는 일반 사대부에 비하여 도리어 존경받는 사람이 되었다. 성제원은 이러한 의미에서 한국 정신사에 남다른 공헌을 하게 된 것이다.


그는 남달리 깊고 넓은 심중을 지닌 인물이었다. 이러한 인품을 기술한 기록은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
{조선왕조실록}에 성제원은 "작은 일에 구애되지 않는 활달한 성격으로 학문을 좋아하고 힘써 행하였으며, 어머니 상을 당하여서 한결같이 예법대로 준행했고 삼년상을 마치고 나서는 묘 옆에다 집을 짓고 종신토록 살 계획을 세웠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어려서부터 科擧에 뜻을 두지 않았고, 날마다 스스로를 엄하게 다스렸으며 남 가르치기를 게을리 하지 않은 사람이다. 천성이 孝友스러워 어머니의 삼년상을 한결같이 禮制에 따랐고, 衰 을 몸에서 벗지 않고 늘 입고 다녔으므로 이웃과 친척들이 모두 감복하였다."고 기술하고 있다.

 

또한 "선생은 품부한 자질이 활달하고 출중하여 호걸스럽고 뛰어나서 사람들에게 추중을 받았다. 그러나 세상의 세세한 속절에 구애되지 않고 세상을 얕보고 불공스럽게 하는 일이 꽤 있었지만 그의 중심에는 확고한 신념이 있었으며, 효도와 우애는 천성적으로 타고났다. 親喪을 당해서는 예절을 다하였고 모친이 죽어 재산을 분배할 때에는 자기 몫을 모두 형제들에게 돌리고, 거침없이 표연하게 돌아다니며 산수를 아주 좋아하였으므로 사람들은 그를 '有髮僧'이라고 하였다. 보은현감 에 제수하니 잘 다스린다는 명성이 있었다."고 기술되 어 있기도 하다


성제원은 성리학을 깊이 연구하여 정통하였으며, 한편으로는 지리학·의학·복술 등을 배우고 벼슬을 싫어하였다. 만년에 遺逸로써 보은현감을 지낼 때 산수에 노닐며 하는 일이 없는 듯하여도, 직무에 충실하였고 그 혜택이 백성에까지 미쳤으며, 정년이 되어 공주의 옛집 으로 돌아와, 다시는 벼슬에 뜻을 두지 않았다.
그는 세상사람들이 달갑게 여기는 명성이나 재산 같은 것을 초개와 같이 보았다. {남명집} [사우록]에 "동주 선생은 과거 보는 일을 싫어하고 오로지 옛 도를 정밀하게 생각하고 힘써 실천하는데 힘을 썼으며 마음으로 도를 얻기에 애쓰고 소소한 말절에는 구애되지 않았다. 선생을 아는 자들이 선생의 춘풍기욕의 취미가 있다고 하였으며 모르는 자는 한 시대의 일민(佚民)이라고 했 다."고 하였으며, {조선왕조실록}에는 "선생은 당세의 높은 선비들과 널리 교류했으며 평시에 사람 대하는데에 오만함이 없었으므로 어진 자와 어리석은 자들을 가리지 않고 모두 더불어 교유했다. 때문에 선생의 학문과 정신세계를 아는 자는 선생이 따뜻한 봄날에 강가에서 노닐고자 했던 공자의 즐거움(春風沂水之樂)이 있다 고 했으며, 선생을 모르는 자는 선풍도인의 유유자적함 (仙風道骨飄然物外)이 있다"고 했다.


성제원이 '春風沂水'의 즐거움이 있다는 의미는 정치 도덕 경제 등 사회문제와 예악을 다루는 능력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대범한 기상을 지니고 자유(自遊)스러운 인생의 경지를 보여주었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잘못 보면 단지 정치 도덕 경제 등 사회문제에 전혀 관심 없거나 무능한 仙風道人의 유유자적한 면만이 있는 것으로 잘못 안다고 했다.


그는 사람됨이 세상 밖에 방랑하여 인간 세상을 하찮게 보는 뜻이 있었다. 스스로 술과 시에 취하고 노래하는 것을 흥취로 삼았고, 가슴속은 넓고 소탈하여(曠達) 어떤 것에도 얽매이지 않았다. 벼슬에 나아가 보은현감이 되었을 때 정치에는 청렴 간결함을 숭상하고 교화를 급 선무로 삼았으므로 다스림(治平)이 제일이었다고 한다. 또한 그 고을에 살고 있었던 大谷 成運의 초당을 지어 주기도 하였는데 이는 隱逸을 대접하는 까닭이었다.
그가 보은현감으로 있을 때 유생들이 충청감사에게 글을 올려서 성제원이 어짐으로 백성을 어루만지고 정사를 맡은지 일년만에 서원을 세워 선비를 모아 가르치니 지극하지 않음이 없다고 上書하여 감사가 조정에 청하여 四書 五經을 받은 일이 있다. 이 때에 성운이 성제원의 치적과 기품의 특이함과 덕과 업적이 넓음을 칭송하는 시를 짓기도 했다.


보은현감으로 재직하면서 선정을 베풀자 고을의 인사들이 生祠堂을 세우기도 했다고 한다. 또한 그가 보은 현감으로 재직할 때 본인이 세웠던 象賢書院에 그 역시 사후에 배향되었다. 그가 수령으로 재임한 고을에 군민이 사당을 짓고 서원에 배향하여 추모한 것은 백성을 자식과 같이 돌보고 교화를 일으킨 공덕이 큰 것을 말 해준다. 또한 보은현감이 된지 3년째 되던 해 을묘왜란 (명종 11년)을 당하였는데, 군사를 모은 일이 충청도에 서 가장 우선하였다.(국조기요) 이러한 일들을 통해 볼 때, 성제원이 무위자연 高踏의 생활 정조를 즐기면서도, 아무리 어려운 시대상황에 처하더라도 백성의 삶을 걱정하고 돌보는 지식인의 책무를 충실하게 행동으로 보여 주었음을 알 수 있다.


성제원은 일찍이 말하기를, 賢才들이 모두 좋은 세상을 만나지 못해 마침내 (자기의 능력을) 시험조차 하지 못 했으니 이것이 하늘에 운세인가? 화담과 남명은 모두 반드시 빨리 (사업을) 이루지만 쉽게 실패하고(速成而 易敗)하고 퇴계는 반드시 늦게 달성하지만 오래 지속되 고 멀리까지 이른다(遲成而久遠). 나는 빨리 이루고도 능히 오래도록 지속할 수 있다(可速而能久)고 자부하기도 했다. 이처럼 그는 마음이 활달한 호걸이었으며 국량이 크고 깨끗한 큰 선비였다.


규암 송인수는 "동주 선생은 일세의 영웅호걸인 선비요 (英豪之士), 세상을 구제하는 헤아릴 수 없는 큰 뜻(濟 世不器之志)을 품었다. 어느 곳에도 매이지 않았으며 학문의 공이 더해졌으나 孝悌信義는 그 본바탕에서 나온 것이지 힘써 학문을 하여 얻은 것이 아니다. 가히 세상에 드문 高才이다. 학문을 함에 반드시 聖賢으로 뜻을 삼았고, 글은 兩漢을 숭상했다. 意氣는 뛰어났으며 뜻은 견고했다. 大節에 임하여 그 뜻을 빼앗지 못할 사람은 바로 이 사람이다" 라고 찬탄했다.


훗날 우암 송시열은 "동주 선생은 邵康節의 학을 배운 자로서 선현들이 중국에서 태어나지 못하였을 뿐, 편방 (偏邦)의 작은 선비가 아니다" 라고 했으며, 보은의 상현서원 승향축문에서 성제원을 다음과 같이 칭송했다. "아아, 선생의 氣力은 영웅호걸이오,
뛰어나고 속세에 초연하여, 맑고 깨끗함이 淸風같도 다." 또한 [춘추형축문]에서는 다음과 같이 찬탄했다. "뜻은 우주를 덮고 용기는 고금에 뛰어났다.
行義는 밝게 우뚝 솟았고, 風聲은 永樹로다."

 

4. 성제원의 학문과 정신세계

성제원의 학문은 남은 기록이 거의 없어서 남아있는 것 으로는 잘 알기 어렵다. 다만 현재 남겨진 그에 관한 기술이나 그가 교유한 주요 인물들의 학문 경향을 살펴보 면 그 대강을 알 수 있다.
16세기 이전의 성리학계는 일상의 도덕 실천에 힘썼을 뿐 철학적으로는 심화되지 못하였고, 주로 修身齊家治 國平天下를 내용으로 하는 실천적이고 윤리적인 면에 치중하였다. 그러다가 조광조가 至治의 기치를 내세우고 세상에 나오자 성리학이 확실한 이상과 안목을 가지고 철학적으로 심화될 수 있는 전기가 마련되었다. 16 세기 이전까지 치중되었던 실천적·윤리적인 면에 대하여, 인간이 마땅히 지키고 따라야 할 소당연(所當然之 則)의 근거를 밝히려는 이론적이고 논리적인 학문이 필요했다.


이러한 시대 상황에서 성제원도 성리학에 전심한 것으로 보인다. {인물고}에 그는 성리학을 깊이 연구하여 정통하게 되었다고 기술되어 있다. 그러나 아쉽게도 성리에 관한 그의 글은 전해지지 않는다. 성제원의 스승은 西峰 柳藕(1473∼1537)인데, 그는 寒暄堂 金宏弼 (1454-1504)에게서 배우고 열심히 공부했으나 1504년 (연산군10) 갑자사화때 스승 김굉필이 사사된 후 어머니가 병석에 눕게 되자 의술을 연구하여 직접 약을 지어 공양했다고 한다. 그는 관직에 나가지 않고 후진들 을 가르쳐 많은 인재를 양성하였는데, 글씨·그림·天文· 音律·卜筮·醫術에 능하고, 특히 {주역}에 통달하여 문 명이 높았다고 한다.


성제원이 김굉필의 문인이었던 유우에게서 수학하였다는 사실에 비추어 보면, 그의 학문은 鄭夢周, 金宗直, 金宏弼을 잇는 한국의 정통 도학을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고 생각된다. 김굉필의 학문은 이론보다는 실천을 중시하는 한국의 정통 도학의 기반이었다. 忠信篤行의 삶 을 살다가 무오사화(연산군 3년) 때에 유배에 처해졌다가 갑자사화(연산군 10년) 때에 賜死되었던 김굉필의 학문과 사상은 조광조·김안국 등 至治의 기치를 드높였 던 명현들에게 전수되었으며 또한 서봉 유우를 통해 성제원의 학문과 사상의 바탕이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성제원의 학문은 경학과 성리학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그가 교유한 주요 인물들의 학문 경향을 보면 성제원의 학문과 사상의 양상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다.
성제원이 교유한 대표적인 인물은 평생 布衣로 지냈던 花潭 徐敬德(1489-1546), 명종 말년에 經明行修人으로 천거되었으나 모두 사양한 大谷 成運(1497-1579), 세상사에 초탈하여 '超脫不羈'의 초월적 경지를 즐긴 南冥 曺植(1501-1572), 經明行修로 천거되어 포천·아산의 현감을 지냈던 土亭 李之 (1517-1578), 토정의 문인인 孤靑 徐起(1523-1591) 등이다. 이들은 모두 세상에 드문 조선중기의 名賢이면서 동시에 대표적인 은둔거사 들로서, 오늘날에도 너무도 잘 알려진 대학자들이다.


이들은 모두 그와 절친하게 교유한 학자들인데, 이들 모두는 유학의 經史는 물론 천문·지리·의약·算學·卜筮· 律呂 등 여러 術學에도 정통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던 인물들이었다. 그들은 학문과 정신이 높으며 성품이 고결하여 세상에 나아가 이름을 떨치기를 좋아하지 않았으며, 더군다나 당시 시대의 참혹한 士禍 시기에 처하여 세상사에 초연하게 도와 자연을 즐겼던 高士들이다. 중봉 조헌은 그들이 모두 다 조정(廊廟)의 큰그릇들이요 세상을 다스릴 훌륭한 재목들이라고 평하기도 했 다.


이들은 모두 道家적 풍취를 좋아했으면서도 유가의 본 령을 깊이 이해하고 학덕을 갖추어 고결한 선비로 이름 나서 조정에서 벼슬을 주어 초대하여도 나아가지 않았고, 때로는 벼슬길에 오르기도 하였으나 항상 오래지 않아 시골로 은퇴하였던 인물들이다. 그들은 모두 고결하여 가난함을 편히 여기어 利錄을 구하지 않고 오직 스스로 한가함을 즐겼다.


성제원은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젊어서부터 功利와 科 擧에 마음을 두지 않고 悠悠自適하고 風月을 읊으며 회포를 풀었으며, 세상사의 번잡하고 시끄러운 것을 싫어하여 문을 닫고 출입하지 않았다. 천성이 慷慨하고 정직하여 세상사에 따라 남에게 머리를 조아리거나 우러러보려고 하지 않았다. 항상 몸을 깨끗하게 가져 세속의 지위나 명리를 바라지 않고 속세에 초연했다.
이 때문에 {조선왕조실록}에는, "거침없이 표연하게 돌아다니며 산수를 아주 좋아하였으므로 사람들은 그를 有髮僧이라고 하였다"라고도 하고 "큰 재기가 있고 학식도 높았으며 放達하였다. 그의 학문이 老莊에 가깝지 않은가 의심하였다."라고도 기술되어 있다. 그러나 한 시에서 "鍊丹은 오히려 志을 헤치고, 佛道에 참여함은 역시 정신만 수고롭게 하네"라고 읊은 것을 보면 仙學 이나 불도에 침잠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면서도 성제원이 젊어서 금강산을 유람할 때 많은 승려들과 주고받은 시를 보면 성리학이나 도학만을 고 집하면서 다른 학문을 배척하였던 태도가 아니라 다른 학문이라도 그 높은 정신세계를 인정하고 공유하는 도량이 있었다고 보여진다.

 

5. 성제원의 詩文

세계 성제원의 삶의 태도는 그의 생애와 시를 통하여 살펴보면, 程 나 朱子와 같은 도학군자의 태도라기 보다는 주돈이나 소강절의 생활 태도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어려서부터 영특하여 뛰어난 바가 있었고 14세에 聖人의 학문에 뜻을 두어 힘을 다하여 노력하였으나, 그의 생애에 있어서 주요한 취미는 산과 강을 따라 유람하는데 있었다. 그의 시문집 가운데 있는 각 시들은 대부분이 이러한 종류의 작품들이다. 그의 심정에는 인간세상보다는 자연세계를 흠모하는 뜻이 있었다.
명승을 찾아다니는 것을 정취로 삼고 또 명승을 찾아다니는 것을 즐거움으로 삼았던 그의 마음이 뚜렷하게 나타나 보인다. 물 건너고 산 오르는 것이 바로 지극한 즐거움(至樂)이며, 만사를 불문에 붙일 수도 있다. 인간세상의 밖을 소요하며 조정과 저자(朝市)를 가볍게 여기며 산수와 흰구름을 상대하는 것이다.


이것은 모두 그가 세상의 일에 대해서는 가볍게 여기는 뜻을 나타낸다. 주자가 주돈이는 "자연에 마음을 두고 있었다"(有山林之志)고 평한 것과 같은 정신세계이다. 맑고 깨끗한 산수를 즐기며 名利와 부귀를 즐기지 않았다. 그러나 주돈이가 자연에 마음을 둔 나머지 신선에 대한 흠모를 나타내었지만 성제원은 그렇지는 않았다. 다음의 '큰 형님을 모시고 용강정에 오르다'라는 3수의 시는 이러한 성제원의 삶의 태도와 정취를 잘 나타낸 명작이다.

 

陪伯氏遊龍江停三首

새로 떠오르는 아침 햇살이 층층이 산 위로 흩어지니
강물 위에 어리는 물빛이 눈을 어지럽히네
백사장이 연이어 있고 섬에서 자라는 나무는 멀리 뻗었네.
해변가 여울이 이른 아침 밀물에 사라지며
맑고 깨끗한 산 기운이 수천의 봉우리 위로 피어오르고
하늘은 텅 비고 큰 들이 평평하네.
가을은 맑아 그윽한 감상이 충족하고
취함에 의지하여 높은 정취가 툭 터지네. 취하여 미친 듯하면 사람들이 모두 비웃고
맑은 정신으로 묵묵히 있으면 사람들이 다투어 신랄하네
행세에는 뚜렷한 방책이 없으니
구름을 헤치고 은신하는 것이 맞도다.
鍊丹은 오히려 지(志)를 헤치고
佛道에 참여함은 역시 정신만 수고롭게 하네
배부르거나 주리거나 마땅한 즐거움을 따르니
청산과 더불어 주객이 되네 한가로운 가운데 무슨 할 일이 있는가
홀로 앉아 술동이를 마주 대하네.
산수는 아교로 갠 옻칠이요
이름을 날리는 인생길은 거북이 등위의 털과 같네
바람이 부니 소나무가 춤을 추고
구름이 흩어지는 옥봉우리가 홀로 높구나.
눈을 들어 긴 하늘을 바라보니 광활하고
거문고를 울리니 기운이 저절로 호방하구나.

 

이 시를 보면 그의 심정이 자연의 경이로움에 빠져들어 자연현상 하나 하나를 예사롭게 보아 넘기지 않고 자세히 관찰하면서 독락원 전경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있다. 화평하고 호방한 기상이 잘 나타나 있으며, 그의 마음이 자연의 정취에 흠뻑 젖어 있다.
그에게 있어 자연은 생을 조명해보는 도구이고 잣대이면서 또 시의 소재이고 주제였다. 동양문화에 있어서 자연은 객체나 대상, 혹은 기계적인 법칙에 의해 지배 되는 자연만은 아니다. 고래의 동양적 자연관에서 보면 자연은 인간이 추구해야 할 궁극적 가치체계인 道의 중요한 일부이며, 인간이 자연의 생성화육과 화합하여 天 人合一·無爲自然을 이룰 때, 그 도달점은 가장 이상적 이고도 조화로운 경지인 것으로 받아들여져 왔다. 다음 의 '용문산에서 놀다'라는 시는 이러한 산수생활의 즐 거움과 정취가 잘 나타나 있다.

 

遊龍門山

송화 가루를 모아 점심허기를 위로하고
푸른 하늘을 한가로이 바라보니 저문 하늘의 구름이 더 디 움직이네
뜰에 가득 산 그림자 가득 차고 찾아오는 이 드무네
오직 산새만이 푸른 가지에 앉아 지저귀네

 

성제원의 시는 대다수가 이처럼 속절에 얽매이지 않고 탁트인 마음의 정취를 표현하였다. 마침내 마음이 탁트인 즐거움(曠達樂)을 얻어서, 마음이 여유롭고 화평하여 자연과 일치되고 있음을 뜻한다. 자연과 그와의 마음과 완전히 일치된 物我一體의 경지를 의미한다. 정경 묘사는 자연스럽게 물아일체의 경지가 드러난다. 이는 작가의 감정이 지극히 순수하면서 사물을 관찰하는 능력이 뛰어남을 뜻한다. 또한 자연세계를 仙界의 정경과 같이 묘사함으로써 작가가 지향하는 경지가 어떠한 세계인가를 보여주고 있다. 그의 吟風弄月하는 생활태도가 한적한 정취로 충만되어 있음을 가히 상상해 볼 수 있다.


도학자들은 시란 뜻을 말하는 것(詩言志)이므로 眞情과 實景을 표현해야 하고 性情을 도야하는 효능을 가진다고 생각했다. 특히 정경묘사는 단순히 사물을 묘사할 수도 있지만 작가의 내면 의식세계를 반영한다. 즉 작가가 지향하고 있는 이상세계를 경물을 묘사할 때에 드 러낼 수 있기 때문이다. 성제원이 관심을 기울였던 자연은 도학파가 성정도야를 위해 중시했던 江湖歌道의 자연이었으며, 현상계로서의 자연세계(物)가 아니라 자연현상의 근원이며 본체(天 또는 道)를 드러내는 자연이며, 성제원의 시는 그러한 자연과 자신이 합일하여 하나가 되는 경지를 표현하고 있다. 이러한 경지는 그 자신에게 절대자유의 경지인 '逍遙自在'의 기쁨을 준다.
성제원은 혼자만 이러한 정취를 즐긴 것이 아니라 이러 한 정취를 지닌 친구들과 더불어 즐기기를 좋아하였다. 다음의 두 수는 이러한 풍취를 잘 보여준다.

 

仲氏山軒次韻贈宋眉 

오만한 세상에 물들지 않고
학문은 게으르나 친구와 글을 좋아했네
세상에서 누가 반가운 이인가
깊은 산에서 흰 구름을 벗하네
상쾌하게 읊조리니 정신이 활발해지고
술에 취하니 화평한 기운이 일어나네
다행히 오늘 이렇게 모였으니
모두 함께 스스럼없이 어울리세.

 

贈李德夫二首

그대는 술을 좋아하지 않지만 거문고와 시를 사랑하고
나는 거문고를 모르지만 시와 수를 아네
만일 장차 두 사람이 자리를 같이할 때마다
어느 땅, 어느 계곡, 어느 산이든 마음이 탁 트이지 않을까

내가 취한 것을 성내지 마라. 취함이 나쁜 것이 아니오.
술 깨어 거문고 소리를 들으니 시름만 더하네
취함이 근심을 없애고 거문고는 흥을 돋우니
인간세상은 도리어 한때의 풍류로다

 

또한 佛僧들과의 자연스런 교유도 즐겼다. 금강산에 유 람하면서 여러 불승들에게 준 시가 몇 수 남아 있다.

 

贈淨源

이미 그 근원이 능히 맑은데
그 말류가 더럽혀 질 것을 근심하겠는가
천여 개의 봉우리 그림자에 고요히 잠겼는데
둥근 달이 밝음을 머금었도다
이 도를 아는 자 드무니
인간 세상에서 비로소 홀로 보도다

 

이 시를 보면 정원이라는 불승이 이미 그 근원이 맑아 性情이 더럽혀질 걱정이 없으며, 천여개의 봉우리가 고요하고 둥근 달이 밝은 이 自在·自然의 도를 아는자 드물지만 인간 세상에서 그 홀로 본다고 칭송하고 있다. 불도를 이론적으로 공격하는 태도가 아니라 그 정신세계가 도달한 경지를 공감하는 태도이다. 다음의 시는 혜일이라는 불승에게 신선의 노닐음을 같이 즐긴 즐거움을 노래하였다.

 

贈惠一

구정봉 머리의 산 안개를 빌어 말하고
사자암의 맑은 밤에 상위에 기대어 잠을 자네
신선의 노닐음 어느 날에 서로 생각할꼬
그대가 만일 나를 생각할 때면 달은 하늘에 가득 차리

 

이와 같이 성제원은 도가적인 삶의 정취를 즐고 불도 의 수준 높은 정신세계를 인정하였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그 기반은 유가적인 정조를 깊이 지니고 있었다. 당시에 세상 사람들이 그를 有髮僧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放達하여 老莊에 가깝지 않은가 의심하기도 하였지만, "鍊丹은 오히려 志를 헤치고, 佛道에 참여함은 역시 정신만 수고롭게 하네"라고 읊은 것을 보면 도학자의 입장에서 仙學이나 불도의 단점을 알고 있었으며 따라서 도가나 불도에 빠지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음 의 '취후'라는 시는 그가 단지 신선의 정취를 좋아서가 아니라 가슴속은 세상 속에 있다는 것을 드러내고 있 다.

 

醉後

가슴속은 우하(虞夏)요 몸은 조선이라
인간 세상 가운데에서 풍진과 섞였네
매화를 읊는 일은 소동파의 흥이요
동쪽 울타리에 국화를 따는 일은 도연명의 진경(眞境) 이라.
정원 가득한 수풀과 꽃 속에서 스스로 부유함을 누리면 서
만종이나 받는 경상(卿相)의 빈한함을 오히려 비웃도 다.
그윽한 뜰에서 다행히도 크게 취할 수 있고
소매를 길게 휘두르며 춤을 추니 달 그림자 새롭도다.

 

虞는 舜임금이 다스리던 나라요, 夏는 禹 임금이 세운 나라이다. 堯舜과 禹湯은 유학에서 일컫는 대표적인 성인이다. 큰 세상에서 큰 뜻을 펼치고 싶은 마음 가득하지만 조선이라는 작은 나라의 혼탁한 시절에 살면서 뜻을 제대로 펴지 못하니, 소동파와 도연명의 은둔고답 의 세계를 살아간다는 뜻이 들어있다.

그러니 인간세상을 벗어나 자연에 취하고 술에 취해 자신이 처한 상황을 잊고 초연하게 살고자 했다. 다음의 시도 그러한 양상을 잘 드러내고 있다.

 

次大谷韻

낚싯대를 드리움은 마디풀꽃 핀 물가가 좋아서가 아니요
뜬구름 같은 세상 서로 다투기 어려워 봄 속에서 비웃음이라
오늘 술동이를 앞에 놓고 폭음(暴飮)하니
취한 가운데에 도리어 취한 사람을 만드네.

 

이러한 생활은 高踏생활의 실천이라 하겠는데, 이 풍조는 위·진 간의 노장파의 淸談에 가장 잘 나타나 있다. 고답의 세계는 부조리하고 어지러운 세상(浮世), 개인의 失意에서 온 고민을 구제하는 장이기도 하다. 고답의 세계에서는 독선 즉 개인적 자유가 절대적으로 허용 되기 때문이다. 고답, 소요, 愛自然은 개인의 절대적 자 유와 고민의 해결책이라는 것을 공감할 수 있다.
이러한 정취는 그의 생활태도에 도가적인 분위기가 많았으며, 그러한 도가적 성향의 명사들과 자주 교유하면서 왕래하였다는 점과도 관련이 있다. 그의 학문은 도 학을 기저로 하지만 그의 생활 情調는 성현을 목표로 하는 도학자의 생활이 아니라 일종의 명사 혹은 고사적인 생활이었다.


그의 이러한 생활과 정취는 공맹의 생활 중에 충만되어 있던 장엄감·책임감과는 다르며 또 정이천 이후 일반적인 송대 유학자의 생활태도와도 다르다. 정이천과 주자는 인간사회의조화를 파괴하는 원인은 모두 인간욕망 (欲)의 過不及에 있으므로 靜과 敬을 주로 하여 人極을 세우고 사회 정의를 이룬다는 엄격한 도학정신이 있었다. 자기의 인격수양과 투철한 역사의식이 연계되는 것이다.


성제원의 삶에서 투철한 역사의식을 발견하기는 어렵지만, 그의 순수한 정신과 고아한 정취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 크다. 생애를 통한 삶의 과정에서 볼 수 있듯 이 그의 명리에 대한 초연, 불변의 기개야말로 선비가 지니고 사는 志操의 바탕이라 할 수 있다. 한국의 선비가 선비상으로 우선하는 것이 安貧樂道이다. 안빈낙도 의 정신은 유불도 사상을 막론하고 그 근본정신의 바탕 이다.

성제원은 賞山玩水하는 생애를 통하여 관조하는 삶을 살고자 했다. 그는 이러한 삶이야말로 도를 즐기는 것이요, 守分하는 삶으로 이해하고, 이러한 삶이 성현의 경지인 것으로 자족하고 있다. 이러한 안빈낙도의 삶 가운데 맑고 고아한 정취를 누리며 세상의 명리와 부귀에 초연한 높은 정신은 조선 지성의 바탕이었다.

 

6. 맺는말

성제원은 16세기 중반기에 걸쳐 4차례의 사화로 인하여 선비 정신이 붕괴되어 버린 세상에 살면서도 혼탁한 세상에 물들지 않고 자기를 수양하여 깨끗하고 고결한 인생의 경지를 즐기는 도학군자의 모범을 보여주었다.
성제원은 남다른 정기와 높은 氣節을 지니고 있었으며, 마음이 활달하고 신의가 있었으며 국량이 큰 인물이었다. 그는 역량과 학식이 뛰어나 그 자신은 한 세상을 교화시킬 수 있는 인물이었지만 세상의 도가 쇠퇴하자 자취를 감추고 산야에 물러나 살면서 성리의 이치를 탐구 하고 홀로 자신을 지키며 '春風沂水'의 즐거움을 즐기는 여유 있는 삶을 살았다.

 

그는 사람됨이 세상 밖에 방랑하여 인간 세상을 하찮게 보는 뜻이 있어서, 술과 시에 취하고 노래하는 것을 흥취로 삼았고, 가슴속은 넓고 소탈하여 어떤 것에도 얽매이지 않았다.
벼슬에 나아가 보은현감이 되었을 때 정치에는 청렴과 결함을 숭상하고 교화를 급선무로 삼았다. 보은현감으로 재직하면서 선정을 베풀자 고을의 인사들이 生祠堂 을 세우기도 했으며, 백성을 자식과 같이 돌보고 교화를 일으킨 공덕이 컸다.
성제원의 학문은 서봉 유우를 통하여 정몽주, 김종직, 김굉필을 잇는 한국의 정통 도학을 바탕으로 했으나, 경학과 성리학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유학의 經史는 물론 천문·지리·의약·算學·卜筮·律呂 등 여러 術 學에도 無不通知하였다. 그는 성리학이나 도학만을 고집하면서 다른 학문을 배척하였던 태도가 아니라 높은 정신세계를 공유하는 도량이 있었다.


성제원은 도가적인 삶의 정취를 즐기고 불도의 정신세계를 인정하면서도 그 기반은 유가적인 정조를 지녔다. 당시에 세상 사람들이 그를 有髮僧이라고 하고 放達하여 노장에 가깝지 않은가 의심받기도 하였지만, 도학자의 입장에서 仙學이나 불도의 단점을 알고 있었으며 따 라서 도가나 불도에 빠지지 않았다.
성제원은 고결하여 利錄을 구하지 않고 오직 스스로 한가함을 즐겼다. 젊어서부터 功利와 科擧에 마음을 두지 않고 悠悠自適하고 風月을 읊으며 회포를 풀었으며, 세상사의 번잡하고 시끄러운 것을 싫어하여 문을 닫고 출입하지 않았다.

그는 聖人의 학문에 뜻을 두어 힘을 다하여 노력하였으나, 그의 생애에 있어서 주요한 취미는 산수를 즐기는 일이었으며, 세상의 일에 대해서는 가볍게 여기고 속절에 얽매이지 않고 탁트인 마음의 정취를 지니고 있었다. 그는 큰 세상에서 큰 뜻을 펼치고 싶었지만, 세상이 혼탁하여 뜻을 제대로 펴지 못하고 은둔 고답의 세계를 살았다.
성제원이 보여 주었던 그 순수한 정신과 고아한 정취, 그리고 명리에 대한 초연, 불변의 기개는 조선의 선비 정신이 지니는 志操의 바탕이었으며 16세기 후반기 이후 한국 도학정신의 밑거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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