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사상

新 한국의 명장_12

醉月 2015. 1. 22. 20:49

내가 너를 매화로 꽃피우기 전엔 너는 다만 밀랍에 지나지 않았다

 ‘윤회매’ 재현한 예인 김창덕


꽃에서 나온 밀랍이 다시 꽃이 되었으니 윤회한 꽃이라는 뜻이다.
이덕무의 ‘청장관전서’에 수록된 윤회매 기록을 읽고 그것을 재현한 김창덕(金昌德·48)은 승려 출신으로 선화 작가이기도 하다.

姑射빙膚雪作衣 고야산 신선의 얼음 피부에 눈으로 옷을 짓고

香脣曉露吸珠璣 향기로운 입술은 새벽이슬 구슬을 마셨다

應嫌俗蘂春紅染 속된 꽃들 봄의 붉은 빛으로 물드는 것이 싫어서

欲向瑤臺駕鶴飛 요대를 향해 학을 타고 날아가려 한다

고려 시인 이인로의 ‘매화’라는 시다. 얼음같이 맑은 살결에 눈으로 옷을 지었다고 했으니 설중매(雪中梅), 아마도 백매를 읊은 듯하다. 이 시에는 매화에 관한 옛사람들의 생각이 모두 담겼다. 향기와 새벽이슬, 여느 꽃과는 다른 고고한 성질, 그리고 달(요대, 신선이 사는 곳)과 벗할 때 더욱 아름다운 모습까지.

“매화 향기는 짙고 화려한 게 아니라 은은하게 풍겨나 암향(暗香)이라고 합니다. 또 매화는 여러 그루 무리 지어 서 있을 때보다 단지 몇 그루 고매(孤梅)로 저녁달이나 새벽달빛 아래 서 있을 때 고고한 품격이 절정을 이룹니다.”

옛사람들의 매화 사랑은 수천 편의 시로 남았고, 심지어 밀랍이나 비단, 종이로 매화를 만드는 데까지 나아갔다. 이른바 ‘매화벽’이라고 칭할 만하다. 벽(癖)이란 무언가를 지나치게 즐기는 병을 말하니, 요즘말로 하면 마니아나 ‘오타쿠’ 정도 되겠다. 김창덕은 이런 옛사람들의 매화벽을 고스란히 잇는 듯하다.


종이꽃 공부하다 茶, 花, 輪廻梅

어쩌면 김창덕이 빠진 것은 윤회매라기보다 윤회매를 처음 만든 조선시대 실학자인 청장관 이덕무(李德懋·1741~1793) 선생이라 할 수 있다. 김창덕이라는 이름보다 다음(茶·#54533;)이라는 호로 더 잘 불리는 데서 알 수 있듯이 그는 열네 살에 절집에 들어가 차 맛을 본 이후 오늘날까지 차를 늘 곁에 두고 산다. 차 문헌을 찾다가 우연히 발견하게 된 것이 윤회매라고 한다.

“다도연구가 김명배의 ‘다도학논고’를 읽다가 이덕무 선생이 밀랍으로 윤회매를 만들고 친하게 지내던 박제가, 유득공 등과 함께 차를 들며 시를 지었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또 궁중채화 분야 무형문화재인 황수로 선생님의 ‘한국 꽃예술문화사’에서도 윤회매를 확인했고요.”

궁중채화는 비단을 주재료로 만든 우리나라에만 있는 전통 가화(假花), 즉 조화로 특히 궁중에서 쓰던 매우 아름다운 꽃을 말한다. 여러 가지 가화로 화단을 만들어 연회의 무대를 꾸미거나(지당판), 관모에 꽂기도 하고(어사화 같은 잠화), 잔칫상에 장식으로 올리기도 한다. 가화의 재료로는 비단은 물론이고 종이, 밀랍, 삼베, 심지어 떡이나 과자 등도 쓰인다. 특히 상에 올리는 가화를 상화(床花)라 하는데, 윤회매는 아마도 이덕무 선생의 찻상에 오른 다화(茶花) 구실을 했던 것 같다.

1996년 윤회매의 존재를 확인한 김창덕은 이덕무의 문집 ‘청장관전서’에 수록된 ‘윤회매십전’의 글을 베끼고 해석해가면서 윤회매 만드는 법을 혼자 익혔다.

“책에는 윤회매를 만들게 된 연유뿐 아니라 만드는 법이 그림까지 곁들여 상세하게 나와 있어서 따라 만들기가 그리 어렵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매뉴얼이 좋아도 실제로 한 번도 보지 못한 것을 재현하기가 어디 그리 쉬운가. 다행히 그에게는 타고난 솜씨를 갈고닦은 전력이 있었다. 윤회매를 알기 전인 1990년 승려였던 그는 선화(禪畵)로 미국 시카고에서 초청 전시회를 열 정도의 그림 솜씨에, 그보다 한참 전인 1980년대 초반, 범패 무형문화재였던 지광스님(작고) 밑에서 범패와 지화(불교예식에 쓰이는 종이꽃)를 익혔기에 윤회매 만들기가 가능했을 터다.

“범패는 춤과 음악이 유명하지만, 범패를 시연하는 여러 재(齋)에서 단을 차릴 때 종이꽃으로 장식합니다. 범패를 배울 때 종이를 염색해 꽃 만드는 것까지 다 배워야했지요.”

달 그림과 함께한 홍매. 김창덕은 원만구족(圓滿具足)을 뜻하는 만월을 좋아한다.

   

불교에서 꽃은 피안의 세계, 또는 만행(萬行·자비행)을 상징한다. 그래서 대승불교는 꽃으로 장엄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부처님께 올리는 6법공양에도 꽃 공양이 들어갈 정도로 꽃이 중요하다. 범패에도 꽃을 찬탄하는 소리(노래)가 들어가고 범패의 나비춤은 손에 모란꽃을 들고 춤을 춘다.

“범패 스승인 지광노장께서는 패납(태평소)도 잘 불었지만, 지화를 잘 만들었어요. 모란, 작약, 연꽃, 국화를 많이 만들었지요. 윤회매는 밀랍으로 만드니 종이보다 까다롭긴 하지만 만드는 법은 비슷합니다.”


절개 높은 高士

숱한 시인묵객이 꽃을 그리고 노래했지만, 동양에서 매화는 언제나 특별한 꽃이었다. 세상만물에 가치와 의미를 부여한 성리학자들은 꽃에 대해서도 서열을 매겼다. 조선시대 후기 꽃나무에 미친 유박의 저서 ‘화목품제(花木品題)’에 따르면 제1등급의 꽃으로 가장 먼저 거론되는 꽃이 매화다. 뒤이어 국화와 연꽃, 대나무와 소나무가 1등급으로 꼽힌다. 2등급으로는 모란 작약 파초 등이 꼽히고, 동백은 3등급, 서양에서 꽃의 여왕으로 대접받는 장미는 수양버들과 함께 5등급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나라 국화인 무궁화는 안타깝게도 겨우 8등급이다.

“사군자라 부르는 매난국죽이 중국 시각이라면 우리 조상은 매화와 모란, 작약, 연꽃, 국화를 높이 친 것 같아요.”

그의 말이 아니어도 문인들이 자주 짓던, 꽃을 의인화한 가전체 소설 ‘화왕전’에 단골로 등장하는 꽃이 매화와 모란, 작약 등이다. 왕으로 등장하는 꽃은 언제나 모란이다. 모란은 탐스러우면서도 우아하니 과연 왕좌를 차지할 만하다. 작약 역시 탐스러우나 어딘가 단아한 데가 있어 재상감이다. 매화는 절개 높은 고사(高士), 그리고 국화는 숨어 사는 은자로 종종 등장한다. 모두 유박의 기준으로 1, 2등급에 속하는 꽃들이다.

매화의 무엇이 옛사람들을 그토록 매료시켰는가. 매화는 탐스럽지도 않고 화려하지도 않다. 그러나 뽐내지 않으면서도 고고하고, 화려하지 않지만 기품이 있어 볼수록 매력적인 꽃이 매화다. 더구나 땅과 가까이 있는 풀꽃이 아니라 키 큰 나무에서 피는 꽃이다. 그렇다고 같은 꽃나무인 살구꽃이나 복사꽃처럼 화사하게 흐드러지지도 않는다(유박의 기준으로 복사꽃과 살구꽃은 5, 6등급이다). 말하자면 매화는 고고함과 더불어 절제와 겸손을 두루 겸비한 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옛 선비들이 매화에서 가장 높이 친 것은 바로 겨울에 꽃을 피운다는 점이었다.


매화를 보며 주역을 읽는 까닭

설중매라는 말이 있듯 눈 내리는 계절에 매화는 꽃을 피운다. 서리 입은 매화를 ‘얼음 피부’라거나 ‘하얀 비단’으로 묘사한 시가 자주 등장하는 것도 추위 속의 매화를 칭송한 것이다. 생명이 발하지 못할 것처럼 얼어붙는 시절, 땅속 온기를 기적처럼 전해주는 매화를 보며 성리학자들은 주역의 복(復)괘를 떠올렸을 것이다. 복괘는 맨 아래 초효(初爻) 한 자리만 양(陽)인 괘로 생명력의 상징인 양을 품었다는 의미이자 양이 회복되는 출발점을 나타낸다. 이 괘에 해당하는 달이 음력 11월, 동지가 드는 달이다. 동지 역시 해가 길어지기 시작하는 날로 태양의 성장을 상징한다. 그래서 주나라 시절에는 11월을 정월로 삼았고, 로마시대 동지축제는 크리스마스가 됐다.

실제로 매화를 읊은 시에는 매화와 함께 주역을 읽겠다는 내용이 자주 나오고, 특히 납전(臘前·섣달 전) 즉 동지 전후의 매화[初梅]를 칭송한 시가 많다. 또한 주역 연구가 꽃을 피운 송나라 시대 ‘천기를 누설했다’는 평을 들을 정도로 뛰어난 주역풀이를 한 소강절의 점술을 ‘매화 역수(易數)’라고 하는 것도 매화와 추위, 추위 속에 꽃을 피워 올린 양의 기운과 관련이 있지 싶다.

성리학자들이 매화에 부여한 뜻은 이처럼 심오하지만, 선비이자 시인으로서 그들이 매화에 매료된 것은 ‘일생 추위 속에 살아도 향기를 팔지 않는’(梅一生寒不賣香) 지조를 읽었기 때문일 것이다. 어쩌면 조선 선비들은 매화에서 자신들의 가장 이상적인 모습을 발견했는지도 모른다.

“이덕무 선생은 서얼로 관직에 나아가지 못하다 정조 임금 때 발탁돼 규장각 검서관이 됐습니다. 가난에 시달리면서도 책으로 배고픔과 추위를 달래 ‘간서치(看書痴·책만 보는 바보)’로 불릴 정도로 정갈한 분이었던 것 같습니다. 윤회매를 만들며 그분에 대한 생각을 놓은 적이 없어요.”

매화를 ‘매형(梅兄)’이라 부를 만큼 매화를 사랑했던 퇴계 이황 역시 뛰어난 도학자다. 물론 퇴계의 매화 시를 읽어보면 도의적인 면만 있는 것은 아니고 거의 ‘벽’에 가까운 탐미적인 면도 보인다. 실제로 이덕무가 살던 조선시대 후기로 올수록 선비들의 꽃 사랑은 철학적이고 도의적인 차원을 떠나 ‘벽’으로 치달은 구석이 없지 않다. 매화를 사랑한 나머지 벽 한구석에 감실을 마련해 매화분을 두고 비단 장막을 치는가 하면 감상할 때는 거울과 초를 이용했다.

이런 완상(玩賞) 관습 중 극에 달한 것은 빙등조빈연(氷燈照賓筵)이다. 겨울날 항아리에 물을 채워 얼음으로 등을 만든 다음 속에 촛불을 켜고 손님(매화)을 비춰보며 감상하는 모임이다. 이 정도면 성리학자들이 경계하는 완물상지(玩物喪志·사물을 즐기는 데 빠져 마음을 잃음)라고 할 만하다.

그러나 이덕무의 친구였던 박제가는 자신의 세계를 개척하고 전문적인 기예를 완성하는 일은 벽을 가진 자만이 할 수 있다고 했다. 이른바 ‘미쳐야 미친다’는 주장이다. 이덕무도 책과 지식, 매화에 미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지만, 빙등조빈연 같은 호사스러운 방식이 아니라 일일이 손으로 만드는 소박하면서도 정성스러운 방식을 취했다. ‘윤회매십전’에 윤회매 만드는 일을 ‘완물’이라고 비난할 수 없다는 구절이 나오는 것을 보면, 이덕무는 윤회매 만드는 일이 한갓 취미로 떨어지는 것을 경계했음을 알 수 있다.

“이덕무 선생은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으로 꽃이 그냥 지고 마는 것이 아쉬워 윤회매를 만들었겠지만, 꽃에서 시작해 다시 꽃 아닌 꽃이 된 그 이치에서 문장을 깨치고 환골탈태하는 도의 경지를 분명히 밝혔습니다.”

 

납매를 만들 때는 섬세한 손놀림이 필요하다. 밀랍을 녹여 꽃잎 모양으로 떼어 물에 띄우고, 꽃술은 노루 털을 심어 표현한다. 꽃잎을 만들 때면 실제로 벌이 날아들기도 한다.

   

 

활짝 핀 매화와 아직 피지 않은 꽃망울이 어우러진 홍매. 홍매는 사랑을 뜻해, 김창덕도 사랑에 빠졌을 때 홍매를 많이 만들었다.

‘윤회매십전’에서 이덕무는 “윤회매는 가짜 꽃이지만 꽃다운 향기가 스며 나오니 (…) 윤회매가 매화가 되기 전에는 밀랍이지 꽃이 아니었지만, (또한) 매화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은 밀랍의 전신이 꽃이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리고 “매화는 밀랍을 잊고 밀랍은 꿀을 잊고 꿀은 꽃을 잊는다. 그러나 윤회매를 저 나무 위 꽃과 대조해보면, 말 없는 가운데 따스한 윤기(倫氣)가 통하여 마치 할아버지를 닮은 손자와 같다”고 했다.

‘윤회매십전’ 끝머리에는 이덕무와 유득공, 박제가의 7언 절구 19수가 실려 있는데, 김창덕이 일일이 베껴 쓴 그 시들 가운데 이덕무의 시가 눈에 띈다.

蜂衙夙結轉輪緣 벌들의 마을에서 일찍이 맺은 윤회의 인연으로

現了雙雙姉妹聯 이제 나타났구나, 쌍쌍이 자매로 이어져

若使眞花開着眼 만약 참꽃이 피어 보게 된다면

澄鮮一氣肖孫憐 해맑고 고운 같은 기상, 손자라고 예뻐하리

“윤회매가 꽃에서 나와 다시 꽃이 된 윤회를 보여주지만, 한편으로 생로병사와 사계절의 무상함 속에 과거 현재 미래, 삼생(三生)은 바로 이 순간에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윤회라는 말 자체가 불교적이지만, 윤회에서 무상한 공(空)의 이치와 그 공의 영원성까지 그는 읽어낸다.

 

사랑에 빠져 출가, 사랑에 빠져 환속

그는 한때 승려였다. 열네 살에 출가해 서른 즈음 환속하기까지 범어사, 태안사 등 조계종의 큰 절집에서 큰스님을 시봉하며 살았다. 그런데 출가한 이유도 환속한 이유도 모두 ‘사랑에 빠져서’라니 참 묘하다.

전북 남원 운봉이 고향인 그는 어린 나이에 출가했지만 할아버지 때부터 부자였던 집안의 아들이었다. 열한 살 때 인천으로 이사한 뒤 사월초파일 할머니와 함께 간 절 수도사에서 벽화를 보고 반해버렸다고 한다.

“지붕 서까래와 그 아래 벽화를 보는 순간, 단청과 벽화의 푸른빛, 백호(부처님의 양미간 사이에서 나는 흰털로 빛을 낸다)의 흰색이 확 와 닿으며 어디서 많이 본 그림 같았습니다. 그 푸른색이 얼마나 깊이 박혔던지, 그날부터 나는 절에서 살아야 한다는 생각뿐이었지요.”

그를 낳기 전 할머니가 절에서 백일기도를 했다니 불교와 인연이 깊었던 것 같다. 매일 절에 놀러가며 스님의 사랑을 받았던 그는 초등학교 6학년 때에는 출가한다고 세 차례 가출을 감행하기도 했다.

“가출하고 어디 갔느냐고요? 아버지 낚싯대 가지고 낚시터로 ‘출가’했지요. 어릴 때부터 아버지가 낚시하는 걸 워낙 많이 봐와서 낚시터에 가서 낚시꾼 아저씨들한테 물고기 많이 잡아주고 왔지요.”

가출 소동으로 아버지와 형에게 혼이 많이 났지만, 매일 함께 잘 만큼 정이 깊은 할머니를 설득하는 데 성공한 그는 초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정식으로 출가하게 됐다. 그런데 그를 사랑해준 수도사 월강스님은 뒷날 범패를 배운 지광스님과 친한 사이라고 하니 그는 친구 사이인 두 스님을 스승으로 모신 셈이다. 그런데 그가 비구계를 받은 절은 그가 살던 인천도 아니고 고향 전라도도 아닌, 아무 연고 없는 부산의 범어사다. 범어사를 선택한 이유는 “최대한 집과 멀리 떨어지기 위해서”라고 하니, 과연 비구답다고 해야 할까.

범어사에서 그는 강주(강원의 강사스님) 도영스님을 시봉하며 차를 담당했다. 그 덕분에 차에 대해 ‘조금 알게 됐다’고 하는데, 차에 대한 그의 사랑은 깊고 지식은 해박하다. 그가 아내를 만나게 된 것도 차 덕분이다. 그가 전남 태안사에 머물던 시절, 절을 방문한 젊은 남녀 몇 명에게 차를 대접했는데, 그 가운데 지금의 아내가 있었다. 미래에 아내가 되려 그랬는지 마침 그날 그 아가씨는 물놀이를 하다 콘택트렌즈를 빠뜨린 바람에 차 대접을 하는 스님을 유심히 보았고, 젊은 처자의 깊은 눈길을 받은 젊은 비구는 가슴이 뛰었다.

그리고 6개월 뒤 아가씨는 직장 산악회 동료 예순아홉 명과 태안사 계곡에 놀러와 이전 날에 차를 대접해준 스님께 인사를 했다.

“인사하고 얼마 안 돼 고맙게도 스님이 상추를 한 바구니 가득 갖다주셨어요. 그걸로 고기를 싸 먹었지요.”

아내 고승희 씨의 설명에 김창덕은 깜짝 놀라는 시늉을 했다.

“아니 고기를 싸 먹었다고요? 그런 줄 알았으면 안 가져다줬을 텐데. 난 여태 그런 줄 몰랐네요.”

티격태격하는 부부의 모습은 정겹고 푸근하다. 그러나 비구스님과 한 살 많은 처자의 사랑은 쉽지 않아서 눈물과 우여곡절 끝에 마침내 1996년, 김창덕은 그의 나이 만 서른에 산을 내려오고 말았다. 광주에 자리를 잡은 지금 두 사람 사이에는 곧 대학생이 되는, 엄마 닮아 잘생긴 큰아들과 아버지를 닮아 눈 밝고 재주 좋은 귀여운 둘째 아들이 있다.

   



천상의 소리와 꽃비

김창덕의 인생은 이렇듯 사랑으로 이루어진 것 같다. 절의 그림을 사랑하고, 차를 사랑하고, 한 여인을 사랑하고. 그리고 먹는 것보다 더 좋다는 음악을 사랑해 모은 LP판이 벽 한 면을 채우고도 넘친다. 게다가 죄다 명반이다. 범패를 배우게 된 계기도 어느 날 범패 음악을 듣다가 마음이 저릴 정도로 아파와서라고 하니, 그에게 사랑 아닌 것은 없는 것 같다.

전시회를 하면 언제나 잘 팔리는 그의 선화는 굵은 필치의 여느 선화와 달리 섬세해 독특한 개성이 넘친다.

“범패는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대로 꼭 지켜야 하지만, 그림은 스승 없이 혼자 내 마음대로 그립니다. 저는 먹을 아끼고 선을 아껴서 그리는 편이지요. 그림은 많은 세월이 손에 쌓여 마음이 손으로 나올 정도가 돼야 제대로 된 그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일까. 그림은 잘 팔리긴 하지만, 그걸로 돈을 만들 생각은 없고 공덕 쌓는 일로만 그리려 한단다. 윤회매는 미국 뉴욕 유엔본부에도 들어갔고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의 청화백자전에도 전시됐지만, 돈이 되지는 못한다. 대신 그는 윤회매와 범패 바라춤을 결합한 공연을 꾸준히 한다. 그의 공연 무대는 윤회매에 빛을 비춰 무대 뒷면에 큰 나무 그림자가 나타나면 소리 나지 않는 종이 바라로 현대음악에 맞춰 춤을 추는 것이다.

“저는 천상의 소리와 꽃비가 실제로 있다고 믿습니다. 우리 눈과 귀는 한계가 있어서 못 듣고 못 보지만 분명 존재한다고요.”

소리 나지 않는 윤회매 바라춤을 추며 그는 볼 수 없고 들을 수 없는 이덕무 선생을 마음으로 떠올리며 눈물을 지을 때도 있다.

“꿈에라도 한번 뵙기를 바라는데, 아직 와주시지 않았습니다.”

다행히 새해 벽두에 서울 역사박물관에서 ‘간서치 이덕무와 윤회매’를 주제로 한 전시회를 열기로 해 그는 가슴이 부풀어 있다. 사람들에게 이덕무 선생의 깊은 인품과 예술성을 보여주는 것이 어느덧 평생 과업이 됐다. 아울러 미국에 있는 ‘청장관전서’를 우리 땅으로 가지고 오는 것도 그의 숙원이다.

“유득공과 함께 이덕무 선생에게 윤회매 만드는 법을 배운 북학파의 거두 연암은 이덕무의 인품과 글, 지식, 기억력, 문화적 소양과 예술성을 높이 쳤다고 합니다. 언젠가는 이덕무 선생을 기리는 윤회매 문화관을 만들고 싶습니다. 여러 종교인이 같이 만나 차를 마시며 우리 문화를 연구하고, 젊은 세대들이 조선시대의 선비정신과 실학파의 인문학과 예술, 그리고 차 문화를 접할 수 있는 공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덕무와 김창덕 사이에 놓인 것은 200년이 넘는 세월이 아니라 수액까지 붉다는 홍매 한 가지인지도 모르겠다.

 

달빛 속의 매화가 아름답듯 윤회매도 하얀 달항아리에 꽂혀 있을 때 더욱 멋스럽다. 동신대를 세운 이장우 박사의 저택 사랑채는 김창덕이 낮 동안 기거하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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