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 잇고 전통 넘는 장석·자물쇠 새 경지
두석장 박문열
장석과 자물쇠는 가구를 쓰기 편하게 만들면서 아름다움도 더해준다. 그러나 가구를 보완하는 용도라 일반인에게는 그 가치가 생소하다. 빼어난 솜씨로 장석을 만드는 두석장(豆錫匠) 박문열(朴文烈·64)은 목가구와 건축물에 들어가는 철물을 만들고 7단 자물쇠의 비밀을 밝혀내 명성을 얻었다. 세상의 무관심 속에서도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걸으며 경복궁을 비롯해 여러 문화재 복원에 참여한 중요무형문화재다
전체에 두석을 씌운 옥쇄함 형식의 이 작품은 전통에서 한발 나아간 새로운 양식이다. 독불장군(獨不將軍). 혼자서는 장군이 될 수 없다고 하지만 박문열은 혼자 힘으로 장인의 세계에서 장군의 자리에 올랐다. 물론 그에게도 스승이 있었고, 장인의 길로 이끌어준 귀한 인연이 있었다. 무엇보다 타고난 솜씨와 고집이 있었으니 장인이 될 수밖에 없는 운명이라 하겠다. 그러나 이런 막강한 운명을 시험할 만큼 그의 인생은 시련의 연속이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과의 싸움’ ‘인내’라는 말을 자주 입에 올린다.
“1990년대 초까지는 생계에 급급했습니다. 공방을 차렸다가 불이 나서 다른 사람 가게에 들어가야 했고…. 아는 사람들이 ‘도와주겠다’고 말은 하지만 사실 누가 도와주겠습니까. 참고 버티며 나 자신과 싸워왔지요.”
2년 전 경기도 파주에 땅을 사서 안착하기까지 그는 길고 험한 길을 걸어왔다. 다른 사람들이 기계로 장석을 제작할 때도, 남이 장석의 진가를 알아주지 않아도 그는 손으로 만드는 장석 일을 포기하지 않고 버텨왔다.
그에게 장석 일 가운데 가장 힘든 것은 무엇이냐고 물어보았다. “다 똑같이 힘들다”는 대답이다. 어떤 점이 가장 재미있느냐고 물어보았다. 역시 “다 재미있다”고 대답한다. 그러니까 그에게 일은 솜씨와 지구력만 있으면 할 수 있는 것, 즉 큰 문제가 아니라는 뜻이다. 비록 스승이 있었다 하나 전통 도제 관계처럼 철저한 훈련과 가르침을 받은 것도 아니었고, 거의 혼자 힘으로 기술을 익혀야 했음에도 일을 특별히 힘들어하는 것 같진 않다. 대신 자신도 어찌할 수 없는 운수의 흐름과 싸워 견뎌내는 것이 큰일이었던 거다.
자신의 불운과 극복 과정을 구태여 내세우지 않는 그이지만, 과거 인터뷰 자료를 보면 20대에는 죽기 위해 산으로 들어갔고, 절에서 출가하려고 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어느 스님이 지어주었다는 그의 호 ‘심경(心耕)’은 마음밭을 잘 갈고 닦아야 한다는 뜻이다. 소띠인 그의 삶은 마치 거친 돌밭을 묵묵히 가는 소의 우직함과 닮았다.
초등학교 졸업 후 쇠붙이와 인연
1949년 경북 경주에서 태어난 그는 3남4녀의 막내였다. 곧 6·25전쟁이 발발하고 가족은 부산으로 피란을 떠났지만 목수였던 아버지가 휴전 이듬해 세상을 뜨는 바람에 일가족은 연고도 없는 서울로 무작정 올라왔다. 전쟁 직후, 누구나 사는 게 힘들었지만 일곱 남매와 홀로 된 어머니의 삶은 신산하기 짝이 없었다. 공부보다는 그림 그리고 손으로 만드는 걸 좋아한 막내는 늘 굶주리며 용산의 금양국민학교를 다녔다. 겨우 초등학교를 졸업한 그는 곧 일자리를 찾아야 했다. 처음 찾은 일자리는 주물공장이 몰려 있던 남영동의 삼흥주물. 친구 따라 찾아간 첫 일자리가 주물공장이었으니, 쇠붙이와의 인연은 팔자에 있었던 것 같다.
“철을 녹여 재봉틀 부속이나 기어 같은 기계 장치를 주로 만드는 공장이었습니다. 제가 가구 장석을 만드는 두석장이지만, 금속을 다루는 장인이니만큼 금속과 관련된 것은 다 할 줄 알아야지요.”
장석과 자물쇠가 전문인 두석장을 넘어서 금속을 다루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잘 다루게 된 데는 어린 시절 3년여 몸담았던 주물공장의 경험이 바탕이 됐을 터다. 어려서도 그는 ‘불굴의 화신’이었던 것 같다. 솜씨도 좋았지만 남보다 더 열심히 일했고, 그래서 수당도 많이 받았다. 그런 성실함과 실력 덕택에 강원도의 큰 석회공장에 취직도 됐단다. 석회공장에서 무슨 일을 어떻게 했는지 구체적으로 들려주길 바랐지만 “그런 이야길 뭣하러 하겠느냐”며 썩 내켜하지 않는다. 열일곱 살 청년이 객지에서 새벽부터 야간작업까지 일에 묻혀 살던 시절을 되돌아보고 싶지 않아서일까.
그렇게 타지에서 힘들게 일하다 몇 달 만에 서울로 올라와 다시 주물공장에서 고생하던 그에게 새로운 일거리를 찾아준 것은 막내누이였다. 누나의 시누이 남편이 인사동에서 장석 공방을 하고 있었는데, 그가 바로 박문열의 스승 윤희복 선생이다. 공방이라고 해봤자 인사동의 유명한 표구사 동문당 뒤편 한옥 부엌에 마련한 이름도 없는 일터였다. 인사동에서 거래되는 가구의 장석을 만들거나 수리해주는 곳이었다. 작고 초라하긴 해도 그가 처음으로 장석과 연을 맺은 곳이니 나름대로 특별한 감흥이 있었을 법한데, 그는 무심하게 대답했다.
“장석에 무슨 관심이나 적성이 있어서 간 게 아니라 생계를 해결하려고 일하러 간 것이지요 뭐.”
‘계보 없는 匠人’
그러다 공방이 홍은동으로 옮겨가고 그도 스승을 따라 7년여 숙식을 함께했다. 그 일이 힘들기만 하고 적성에 맞지 않았다면 그리 오래갈 수 없었을 것이다. 그 7년 세월 그는 스승에게 무엇을 배웠을까.
“배우기는 뭘…, 혼자 터득하는 거지. 다 알아서 만들어야 했지요.”
예전 공방이 그랬기도 하고 장인들이 본래 친절하게 가르쳐주는 성향도 아니지만, 실제로 그는 ‘계보 없는’ 장인으로 불린다. 같은 중요무형문화재 두석장 김극천이 4대째 통영 장석의 전통을 오롯이 잇고 있는 데 반해 박문열은 평범한 공방에서 혼자 익힌 솜씨로 건축물의 철물부터 탑의 상륜부 제작과 자물쇠와 열쇠까지, 다루는 범위가 종횡무진이다. 어쩌면 그의 폭넓은 솜씨는 친절한 스승 없이 혼자 궁리하며 터득하는 과정에서 나온 것인지도 모르겠다.
비록 친절한 가르침은 없었지만 솜씨 좋고 성실한 젊은이는 7년 동안 많은 것을 익혔다. 공구를 만들고 다루는 것부터 철을 깎고 정으로 문양을 새기고 음각과 투각, 조이질(쪼는 기법)과 상감(표면을 파고 다른 재질을 끼워 넣는 기법)까지 두루 익힌 그는 드디어 스승에게서 독립했다. 1970년대 중반, 그의 나이 스물다섯 살 때였다. 그러나 실패. 그는 어쩔 수 없이 다시 스승 밑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3년을 더 보낸 뒤 한남동에 작은 공방을 차렸다.
“그때 우리 전통 가구는 주로 외국인들이 사갔습니다. 그러니 외국인이 몰려 사는 한남동이나 이태원 쪽에 공방을 내는 게 맞지요. 장석이 빠지거나 나무의 빛이 바랜 가구들을 수리해주고 다시 칠해주는 일을 했습니다. 옻칠이 아니라 고무나무에서 나온 재료를 알코올에 녹인 ‘세락’이라는 도료를 발라줬습니다.”
지금 남아 있는 전통 가구가 얼마 안 되는 것은 그때 우리나라 사람들이 워낙 많이 팔았기 때문이라고 그는 덧붙인다. 그때만 해도 우리 가구의 아름다움과 가치를 우리가 모르던 때였으니까.
독립을 했다고 금방 돈이 잘 벌리는 것은 아니었다. 가구를 거래하는 상인이었다면 돈을 좀 만졌을지 모르지만 그는 상인들이나 가구를 사용하는 사람이 맡긴 가구를 수리했으니 큰돈을 벌기는 애초에 어려운 일이었다. 그런데 그나마 불이 나서 가게를 다 태워버리고 만다.
“가게에 있던 가구들이 다 남의 것이잖습니까. 남의 물건을 다 태워먹었으니 이만저만 낭패가 아니었지요. 용산경찰서에 끌려가서 조사까지 받았어요. 나라의 재산을 태워버린 죄를 지었다는 겁니다. 잠을 안 재우며 괴롭히는데, 무섭고 힘들었습니다. 그때만 해도 경찰이 정말 무섭던 시절이었지요. 결국 검찰 조사까지 받고 벌금을 물고 풀려나왔습니다.”
경찰과는 반대로, 그에게 가구를 맡긴 사람들은 오히려 그를 위로하며 어떤 보상도 요구하지 않았으니 불행 중 다행이었다. 그런 이해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은 평소 그의 우직함과 정직함, 신용이 어떠했는지를 잘 말해준다.
건물이나 가구에 다는 자물쇠도 두석장이 만든다. 박문열은 어릴 때부터 자물쇠 수리를 많이 해서 자물쇠 다루는 일에 아주 능숙하다. 여러 가지 모양의 자물쇠와 열쇠. |
“내 인생이 시작됐다”
빈털터리가 된 박문열은 어쩔 수 없이 옛 스승의 공방에 다시 들어가게 된다. 스승의 공방은 이제 제자와 아들, 사위가 운영하고 있었고 그는 월급쟁이로 얼마간 일했다. 아마 이때가 그에겐 심정적으로 매우 힘든 시기였을 것이다. 그러다 바로 위의 형이 군에서 제대하고 나와 같이 일해보자고 해서 이태원에 다시 공방을 냈다.
그런데 아무리 성실하게 일을 해도 형편은 나아지지 않았다. 가구에 장석은 빠질 수 없는 품목이지만 가구처럼 덩치가 크지 않으니 외상을 하기 일쑤였다. 2년 좀 넘게 버티다가 사업을 접어야 했다. 이번에는 막내 매형이 운영하는 가구공장에 들어가 4년을 일했다. 그의 삶은 좀처럼 정착하지 못하는 듯싶었다.
“전통공예를 알아주지도 않는 때였으니까요. 1990년대 들어서 사람들이 전통 가구를 찾게 돼서야 저도 겨우 독립할 수 있게 됐습니다.”
고가구는 이미 품귀였으니 이제 현대 소목들이 전통 가구를 새로이 만들어야 하는 시대가 열렸다. 드디어 그에게도 기회가 온 것이다. 매형의 홍은동 공장 건물 옥상에 여덟 평짜리 가건물을 짓고 그는 새롭게 독립했다. 1990년대 초였다. 이때 비로소 “내 인생이 시작됐다”고 그는 말했다.
생계를 돕기 위해 아내가 아들을 업고 파출부 일을 하러 간 사이 그는 딸아이를 눕혀놓고 일하는 생활이었어도 박문열은 자신의 작품 세계에 대한 고집이 있었다. 새벽에 일어나 공방에 오면 언제나 작품을 만들었고, 낮에는 주문 들어온 일을 했으며 그리고 다시 밤까지 작품에 몰두했다. 그렇게 정성 들여 만든 작품을 전승공예대전에 출품했다. 전통공예관 임영주 관장의 격려로 1987년부터 꾸준히 작품을 냈지만 뽑히기는 해도 큰 상을 받지는 못했다. 주변 사람들 말마따나 가구에 붙이는 장석으로는 큰 상을 받기 힘들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주변 사람들 말마따나 가구에 붙이는 장석으로는 큰 상을 받기 힘들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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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과 같이 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어 뭔가 특별한 것을 해보기로 결심했습니다. 남이 못하는 것이 뭘까 고민하며 찾던 중 아는 사람에게서 7단 자물쇠 이야기를 들었지요.”
7단 자물쇠란 열쇠를 집어넣어 열기까지 일곱 단계를 거치는 자물쇠를 말한다. 대개 자물쇠는 서양식이든 동양식이든 열쇠를 집어넣고 돌리면 바로 열리지만, 7단 자물쇠는 열쇠를 넣는 구멍조차 찾기 힘들어 흔히 ‘비밀자물쇠’라 불린다. 그는 이 비밀자물쇠를 찾아 경남 진주 태정민속박물관의 김창문 관장(2003년 별세)을 만났다. 김 관장은 1950년대부터 장석과 자물쇠를 수집해온 이였다.
“박물관 전시실을 둘러보아도 특별한 것이 보이지 않았어요. 그래서 제가 중요한 게 있으면 좀 보여달라고 부탁을 드리니 처음에는 없다고 하더군요. 그분이 담배를 태우시기에, 나가서 담배를 몇 갑 사가지고 다시 찾았지요. 그러자 비로소 안으로 들어가시더니 조심스럽게 꺼내오셨어요.”
그러나 실측은 물론이고 스케치도 하지 못하게 했다. 그저 눈으로 볼 수밖에 없었다.
“수집가에게는 작품의 희소성이 제일 중요하니까 제게 허락하지 않은 것이 당연하지요. 외국인이 거금을 주고 사겠다는 것도 거절했을 정도로 귀하게 여겼으니까요.”
열쇠로 여는 방식만 잠깐 보고 온 그는 고속버스터미널에서 스케치를 하고 서울로 올라와서는 바로 공방으로 직행했다.
7단 자물쇠의 비밀을 풀다
“공방 문을 열며 이 자물쇠의 비밀을 풀 때까지 집에 안 들어가겠다고 결심했습니다. 머릿속에 담아둔 기억을 떠올리며 그 작동 원리를 아는 데까지 꼬박 닷새가 걸렸는데, 때가 한겨울이어서 추위에 고생깨나 했지요.”
그가 보여주는 7단 자물쇠는 장식처럼 보이는 광두정(대갈못)을 살짝 밀어야 열쇠구멍이 나타난다. 그리고 열쇠를 집어넣고 다시 각도와 방향을 바꾸어가며 밀고 돌리고, 이렇게 일곱 단계를 거쳐야 비로소 열린다. 처음 접한 사람은 열쇠가 있어도 열 수 없을 정도다. 하물며 이를 만드는 데는 얼마나 비상한 머리가 필요할 것인가.
“자물쇠 내부에 여러 비밀 장치가 있는데, 특히 각도를 45도로 꺾어둔 부분이 있습니다. 그것 때문에 애를 먹었지만 제가 처음 공방에 들어왔을 때부터 워낙 자물쇠를 많이 다루어봐서 웬만한 자물쇠는 자신이 있었지요.”
두석장은 장석만 만드는 것이 아니다. 반닫이나 함, 책장, 뒤주까지 자물쇠를 채워두는 가구가 많아 두석장은 자물쇠를 많이 만들게 된다. 또 자물쇠가 고장 나거나 열쇠를 잃어버리는 사람도 많아 자주 새로 만들어야 한다. 그러나 그의 비상한 머리와 솜씨, 그리고 숱한 경험과 집념이 아니라면 7단 자물쇠의 비밀을 풀 수 없었을 것이다.
그는 이 7단 자물쇠를 비롯해 비밀 자물쇠를 유형별로 열 몇 가지 만들어 1993년 전승공예대전에 출품해 문화체육부장관상을 거머쥐었다.
“작품을 제출하고 나서 한번은 애들을 데리고 북한산에 올라갔는데 개울가에서 깜빡 잠이 들었어요. 그런데 꿈에 똥이 어마어마하게 많이 나타나는 겁니다. 정말이지 그렇게 많은 황금 똥은 처음 봤다니까요.”
길몽이라는 황금똥 꿈을 꾼 이튿날 전통공예관에서 전화가 왔다. “석 장짜리가 됐습니다”라는 소식이었다. 그때 1등은 상금이 500만 원, 2등은 400만 원, 3등은 300만 원이었는데 3등에 해당하는 문화체육부장관상을 받았다는 뜻이었다. 그의 나이 마흔다섯. 비로소 자신의 이름 석 자를 세상에 당당하게 내보이게 됐을 때, 그 감격은 어떠했을까.
“공방 문을 잠그고 나가 정처 없이 마냥 걸었습니다. 나중에 한 소목이 장석 맞추러 왔다가 공방 문이 닫힌 걸 보고 뭔 일이 있구나 하고 생각했답니다.”
이 7단 자물쇠는 독창성이 뛰어날 뿐 아니라 우리 겨레의 뛰어난 과학 수준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그는 말한다.
“우리나라 자물쇠는 외양도 다양하고 아름답지만, 개폐 방식이 매우 정교하고 과학적입니다.”
실제로 그의 비밀자물쇠 기사를 접한 대전 국립중앙과학관 측에서는 그에게 자물쇠 제작을 의뢰했다. 자물쇠의 내부와 부속을 단계적으로 보여줄 수 있도록 만든 10여 점이 과학관에 전시돼 있다.
美, 실용, 의미
오늘날 두석장의 일은 흔히 자물쇠와 가구 장석을 만드는 정도로 알고 있지만 과거 두석장의 분야는 매우 넓었다. 가마나 수레, 허리띠의 장식, 임금이 쏘는 화살촉, 옥새함(금도금을 입힌다), 귀중품을 보관하는 궤(상자)의 장식 등을 만드는 일도 두석장의 몫이었다.
‘두석’이라는 말은 구리 합금을 가리키는데, 같은 구리 합금인 방짜가 구리에 주석을 섞은 향동(놋쇠)인 반면 두석은 구리와 아연 합금인 황동을 말한다. 그러나 황동을 두석이라 표기할 때도 있지만 합금 재료인 아연(또는 함석)을 두석이라 하기도 했다. 심지어 주석을 지칭한 것이라는 설도 있다. 어찌됐든 두석장은 두석을 다루는 장인을 말하며, 과거 두석이 널리 쓰인 만큼 조선 시대 경공장(궁에 소속된 장인을 관리하는 부서)에도 소속돼 있었다.
“조선 시대에는 금속공예가 아주 세분되어 두석장, 은장, 입사장, 금박장, 환도장, 조각장 등이 있었습니다. 방짜는 귀한 주석 합금에다 두드려 만드는 과정이 까다로워 널리 쓰이지 못한 반면 두석은 여러 장식을 만들 수 있어 널리 쓰인 거지요.”
특히 두석은 누런빛을 띠기에 금을 대신하는 구실을 했다. 그런데 두석장이 꼭 구리 합금인 두석만 사용한 것은 아니다. 장석 가운데 거멍쇠는 시우쇠(두드려 다듬는 과정을 거치지 않고 달구기만 한 무쇠)를 쓰며, 조선 시대 후기 들어서는 구리에 니켈을 합금한 백통(백동)을 많이 썼다. 두석도 구리와 아연을 대개 7대 3 비율로 섞지만 색깔을 다르게 내고 싶을 때는 합금 비율을 조금씩 달리하기도 했다.
“예전에는 두석장이 직접 합금했지만 이제는 사다 씁니다. 다만 기성품이 아니라 합금 비율을 미리 정해주지요. 예를 들어 우리가 쓰는 백통은 니켈을 28% 섞는데, 기성품으로 나오는 백통에는 15%밖에 안 들어 있어요. 니켈이 많이 들어갈수록 다루기 힘들어지거든요.”
가구의 나무 재질이나 빛깔, 문양에 따라 장석의 재료도 달라진다. 물론 어떤 장석을 쓸 것인지는 가구를 짠 소목과 같이 결정할 일이다. 단아하고 깔끔한 솜씨로 이름난 중요무형문화재 소목장 박명배는 박문열의 장석만 쓰는 걸로 유명하다.
가구 장석은 문짝을 여닫는 경첩, 문이나 서랍의 고리와 들쇠(손잡이) 같은 실제 쓰임새를 위한 것도 있지만 고리나 자물쇠가 부딪치는 부분이 상하지 않도록 보호하고, 못을 사용하지 않고 결구(짜맞추기)로 제작하는 전통 가구에서 결구 부분을 감싸 보강하는 구실도 한다. 또 나무의 흠을 가리기 위해 쓰기도 한다. 그리고 모든 공예가 그렇듯 장석은 실용성과 함께 아름다움도 갖춘다. 또한 그 아름다움에 풍부한 의미까지 담아낸다.
“자물쇠 가운데 물고기 모양이 많지요? 물고기는 눈을 뜨고 자니 재물을 지키는 의미로 물고기 자물쇠를 만든 겁니다. 물론 물고기는 알을 많이 낳으니 다산과 풍요를 뜻하기도 하고요.”
“답습에만 머물러서야…”
남자가 쓰는 사랑방 가구엔 장식용 장석을 거의 붙이지 않지만 안방 가구는 화려한 장석으로 멋을 부리기도 한다. 특히 장석이 돋보이는 가구는 반닫이다. 선이 단순하고 투박한 형태의 반닫이는 장석으로 멋을 살린다. 반닫이는 장이나 농을 제대로 갖추지 못하는 서민들이 널리 써왔기 때문에 장석 발달에 크게 영향을 미쳤다. 우리 가구 가운데 지방색이 가장 뚜렷한 가구이기도 하다.
반닫이 가운데 장석이 가장 돋보이는 것은 평안도 박천 지방의 숭숭이 반닫이다. 정교한 기하학적 도형을 모두 투각으로 표현해 숭숭 뚫렸다고 붙인 이름이다. 숭숭이 장석은 아마 그 지방에서 반닫이 목재로 써온 피나무의 재질이 물러서 지나친 압력을 주지 않기 위해 그리했을 성싶다. 박문열이 1998년 전승공예대전에서 특별상을 받은 숭숭이 반닫이 장석을 보면 투박한 반닫이라는 선입관이 무색해진다. 전통을 되살리는 데 뛰어난 솜씨를 발휘한 박문열은 그러나 전통공예라고 해서 옛것을 답습하는 데 머물러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21세기를 사는 사람이 15세기 장인들 것을 모방만 하면 되겠습니까. 현대의 좋은 도구로 더 좋은 작품을 만들어야지요.”
늘 새로운 것에 도전함으로써 자신의 운명을 타고 넘어온 그는 최근 백골에 백통을 아예 덧씌우는 작품을 내고 있다. 이제는 나이도 많아져 예전만큼 일을 해내지 못하지만 이렇게 새로운 시도에 쏟는 열정은 조금도 식은 것 같지 않다.
“작업하다 잘 안 풀려 힘들 때면 밭의 풀을 뽑으며 마음을 달랩니다. 마음밭도 가꾸고 채소밭도 가꾸는 거지요.”
늦었지만 마침내 그토록 바라던 자신의 땅과 공방을 갖게 된 그는 공방 바깥에 밭을 가꾼다. 오이장아찌까지 직접 담근다는 그는 깻잎과 오이가 햇살에 한창 무르익는 모습을 사랑스러운 눈길로 본다. 이제 그의 인생에서 고단한 운수는 끝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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