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사상

新 한국의 명장_04

醉月 2014. 4. 25. 18:00

선비가 사랑한 사군자 칼

삿됨을 물리치고 자신을 닦다

낙죽장도장 한상봉

 

한경심 │한국문화평론가 icecreamhan@empas.com

 

남녀와 지위 고하를 불문하고 누구나 칼을 지니던 전통 사회에서 선비들이 가장 아끼던 칼은 대나무에 인두로 글자를 새긴 낙죽장도(烙竹粧刀)였다. 소박하면서도 문서향 가득한 품위 있는 낙죽장도는 우리나라만의 독특한 칼로서 선비들과 함께 사라졌다가 전라도 곡성의 한병문 장인이 새로이 되살려냈다. 그의 뒤를 이어 중요무형문화재가 된 그 아들 한상봉(韓相鳳·53)은 낙죽장도는 물론 사인검과 사진검을 직접 제작할 정도로 대나무와 쇠를 다루는 데 뛰어나다. 대나무에 매화, 난, 국화를 표현한 사군자도.

 

書爲白髮劒斜陽 글하며 백발 되고 검으로 해 기울었다

天地無窮一恨長 천지는 무궁한데 한 가닥 한은 길어라

痛飮長安紅十斗 서울 홍주 열 말을 심하게 마시고

秋風?笠入金剛 가을바람에 삿갓 쓰고 금강으로 들어선다

 

‘김삿갓’으로 불리는 난고(蘭皐) 김병연(金炳淵)의 ‘금강산으로 들어가다(入金剛)’라는 시다. 몰락한 양반이기에 어쩌면 누구보다 자존심이 강했을 김병연이 자신의 평생을 압축해 내세운 것이 글과 검, 두 가지다. 옛 선비는 글만 읽는 맹꽁이가 아니라 글과 함께 칼이나 활을 다룰 줄 알아야 했다. 맹자가 말한 호연지기(浩然之氣)를 키우기 위해, 그리고 모름지기 꼿꼿한 선비라면 학문과 함께 기개가 있어야 하므로 선비에게는 글과 함께 칼도 중요했다. 물론 선비가 지니는 칼은 무인의 환도(環刀)와는 달랐다. 그렇다면 선비는 어떤 칼을 지녔던가? 부녀자가 세련된 은장도를 가슴에 품었다면 선비가 아끼며 늘 몸에 지니던 칼은 바로 대나무로 만든 낙죽장도였다.

 

여자의 칼과 선비의 칼

장도(粧刀)란 아름답게 꾸민 칼을 뜻한다. 흔히 여성이 노리개로 가슴에 차는 은장도를 떠올리지만 크기와 상관없이 장식이 들어간 칼은 모두 장도라 할 수 있다. 실제로 칼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지위와 권위를 나타냈으므로 죄다 멋지고 아름답다. 특히 우리 칼은 실전용 칼조차 매우 섬세하고 세련되게 만들어 무기로 쓰기에 아까울 지경이다. 산이 많은 우리나라 지형상 실전에서 가장 유용한 무기는 활이었고, 칼은 늘 차고 다니지만 마지막 육박전에서나 쓰는 호신용에 가까웠기에 실용성보다 장식성이 더 돋보이는 특징이 있다. 어쩌면 조선시대 초반의 긴 태평성대로 실전보다 위엄을 과시하는 의장용 칼이 더 발달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조선시대 임금의 어도(御刀)에는 칼집조차 나무가 아닌 귀한 대모(거북 등딱지를 얇게 저민 것)로만 만든 것이 있고, 임금을 곁에서 시위(侍衛)하던 운검과 별운검이 들었던 칼에도 어피로 감싸고 은이나 옥 등으로 장식한 고급스러운 것이 많다. 이런 칼은 장중함과 위엄이라는 보이지 않는 덕목이 한낱 기물에서 얼마나 멋지게 구현됐는지 생생하게 보여준다. 그런 반면 임진왜란 당시 군기감의 칼은 거의 녹슬고 손질이 제대로 돼 있지 않았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예의에 치중했던 문치의 나라 조선의 특징이 칼에도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무인의 환도조차 아름답고 멋지므로 장도라 불러도 어긋나지 않지만 장도로 불리는 칼은 그만큼 장식성이 뛰어난 칼을 말한다. 다같이 장식한 칼이라 하더라도 환도라 함은 칼을 찰 수 있도록 칼집에 단 고리(環)를 강조해 ‘차는 칼’임을 내세운 것이고, 장도라고 일컫는 것은 비록 차는 고리가 있어도 아름다움을 강조한 이름이다. 장도는 그만큼 장인이 솜씨를 한껏 부린 칼이다. 실제로 고려시대 은장도는 보기에 숨이 막힐 정도로 아름답다. 한상봉 장인은 고려 장인의 솜씨에 감탄하며 설명한다.

“이 잔잔한 무늬는 안에서 밖으로 찍어내고 위에서 다시 눌러주는 타출기법을 썼습니다. 요즘은 대부분 바깥에서 문양대로 파내는 기법을 쓰지요. 타출기법은 재현하기도 어렵거니와 이 정도 솜씨를 내기는 힘들다 합니다.”

타출기법으로 완성한 은장도의 무늬는 번쩍이지 않고 부드럽게 순은색으로 빛나며 신비한 기운마저 내뿜는다. 인간의 솜씨와 미의식의 극치를 보여주는 고려 은장도를 보다 문득 고개 돌려 낙죽장도를 보면 그 당당한 소박함에 한순간 머릿속이 서늘해지는 것 같다. 대나무의 본래 마디가 고스란히 드러난 몸체에 장식이라고는 낙(烙), 즉 인두로 지진 글자뿐이다. 그것도 욕심을 경계하고 풍류를 즐기며 학문을 권하는 문장을 새겼으니, 이만큼 기술과는 멀고 정신적으로 무장한 칼은 없을 듯싶다. 물론 낙죽장도도 쇠뼈와 쇠뿔로 마감하고 먹감나무로 잇고 칼날에 금은으로 글자를 새기기도 하니, 사람의 솜씨가 아주 들어가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장인의 화려한 기교가 아니라 겸손한 손길이다.

“예전 선비는 아마 손수 만들었을 겁니다. 칼날이야 대장간에서 가져왔겠지만, 글자를 낙하는 일은 선비가 직접 했겠지요. 글자를 쓸 줄 알아야 할 수 있는 일이니까요.”

칼날도 작은 화덕이 있으면 직접 만들기가 그리 어렵지 않다고 한다. 솜씨 있는 선비라면 집에서 혼자 다 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한상봉 장인은 추측한다. 실제로 낙죽장도 기술을 전수해준 조상 한기동 어른 역시 농사짓고 글 가르치던 훈장이었다.

낙죽장도전수관 전시실에서 칼을 살펴보는 한상봉 장인. 벽에 걸린 사진은 부친 한병문 장인.

 

 

 

 

아버지 한병문 장인의 집념

화려함보다 소박함을 더 뛰어난 덕목으로 여긴 조선의 선비가 스스로 경책하듯 차고 다니던 낙죽장도는 예뻐서 인기 있었던 은장도와 달리 그 맥이 쉽게 끊어져버렸다. 어쩌면 선비 스스로 만들어온 것이기에, 선비가 사라지는 시대가 오자 함께 끊어졌을 것이다. 전라남도 곡성의 한씨 가문에서 낙죽장도를 계속 만들 수 있었던 것은 윗대 어른 한기동(韓基東·1873~1959) 덕택이다. 한기동은 한상봉 장인의 부친 한병문(韓炳文·74)의 재종조부로, 한병문 장인은 열세 살에 훈장이기도 한 한기동 할아버지 댁에 들어가 글을 배웠다.

“한기동 할아버지는 거문고와 장구도 만들 만큼 솜씨가 뛰어났다 합니다. 또 한문을 잘하셨기 때문에 약방문을 써줄 수 있어서 ‘약국할아버지’로도 불렸고요. 아버지는 이 할아버지 댁에서 글을 배우며 낙죽장도 만드는 기술도 배우신 거지요.”

한기동이 처음부터 낙죽 기술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한기동 집안과 사돈관계였던 이교호 씨가 낙죽장도를 만들었는데, 워낙 공예에 관심이 많았던 한기동은 이씨에게 이 기술을 배우고자 했다. 그런데 이씨는 한씨네가 살던 목사동면 공북리에서 좀 떨어진 신전리에 살고 있어서, 이씨를 공북리로 초빙하기에 이른다.

“한기동 할아버지가 머슴을 여럿 둔 부농이어서 가능했던 것 같습니다. 이교호 어른을 공북리로 모셔와 생계를 보장해주면서 기술을 배운 거랍니다.”

기술을 배운 한기동은 한걸음 나아가 제자와 후손에게도 이 기술을 전해주고자 했다. 그런 면에서 한기동은 그 시대 보기 드문, 의식 있는 선비였던 것 같다. 하지만 이 기술을 성실하게 익힌 제자는 많지 않았다. 수제자가 병에 걸려 죽고 친손자들은 꾀를 피웠지만, 한병문은 집안 할아버지가 어려워 낙죽장도 만드는 일을 거들면서 자연스레 기술을 배웠다. 하지만 9년 뒤 할아버지 댁을 나오면서 한병문은 낙죽장도 만드는 일도 그만두게 된다. 돈도 안 되고 찾는 이도 없는 그 일을 특별히 해야 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그런 한병문이 20년도 더 지난 뒤 다시 낙죽장도를 시작하게 된 데는 특별한 계기가 있다.

“한기동 어른 문하에서 함께 수학했던 이동규라는 분이 있었는데, 그분이 일본에 끌려가 강제노역을 하다 일본에 정착하게 되면서 어느 날 동경 고도(古刀)박물관에서 한기동 어른의 낙죽장도를 발견했답니다. 전남 곡성산(産)이라고 돼 있었다니 한기동 할아버지 것이 확실하지요.”

이동규 씨는 글만 배우고 낙죽장도는 배우지 못했지만, 스승의 작품을 익히 봐와서 박물관의 낙죽장도를 보자마자 단박에 스승의 솜씨임을 알아봤다. 미처 몰랐던 낙죽장도의 가치에 놀란 이동규 씨는 고향에 돌아와 낙죽장도를 찾았으나 그 기술이 단절된 것을 알고 무척 안타까워했다고 한다.

“이런 이야기를 들은 아버지는 농사일을 그만두고 낙죽장도를 다시 만들기로 결심하셨습니다. 이후 낙죽장도에 대한 아버지의 집념은 대단했습니다. 지금도 편찮으신 몸으로 대나무를 어떻게 손질했느냐, 저의 낙 놓는 자세가 좋으니 어쩌니 챙기실 정도입니다.”

 

문화계 인사도 몰랐던 낙죽장도

낙죽장도 재료가 되는 대나무는 산비탈같이 물이 많지 않은 땅에 사는 2~3년생 분죽이다. 유난히 꼿꼿해 말리면 잘 터진다.(위) 사골은 낙죽장도의 아래위를 막는 막새와 고리(메뚜기)를 만드는 데 쓴다.(아래)

 

지금도 일반인은 낙죽장도를 잘 모르지만 예전에는 더했던 모양이다. 낙죽장도가 처음 세상에 소개된 것은 1980년대 중반, KBS TV의 ‘전국일주’라는 프로그램을 통해서였다. 텔레비전을 통해 한병문의 낙죽장도가 알려지자 곡성군에서는 그를 전남 무형문화재로 지정하려고 나섰는데, 전남 문화재 전문위원 한 사람이 반대하고 나섰다.

“자신은 전라도의 모든 문화재를 알고 있는데, 이 낙죽장도라는 것은 처음 봤다면서 한병문이라는 사람이 고증도 없이 단지 ‘고풍스럽게’ 만든 것인지도 모른다며 반론을 제기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고증을 위해 한동안 무진 애를 쓰셨지요.”

옛 문헌을 찾으러 다니는 한병문 장인에게 누군가 인사동과 청계천에 고서적이 많다고 해 서울까지 올라와 낙죽장도 사진을 보여주며 찾던 중에 한 서점 주인이 ‘그런 것은 본 적 없지만 칼이 수록된 책이 있다’며 책 한권을 건네주었다. 바로 ‘통인미술’이라는 도록이었다. 이 도록을 넘기다가 한병문은 낙죽장도를 발견했고, 이번에는 도록 첫머리에 글을 쓴 예용해 선생을 찾으러 나섰다.

“우리 문화재를 발굴하고 가치를 밝혀 높이는 데 애쓰시던 예 선생님은 칼을 수집하셨는데, 그중에서도 낙죽장도를 무척 아껴서 낙죽장도 만드는 곳을 찾으려고 전라도 지역을 조사하면서도 끝내 찾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러다 텔레비전에서 낙죽장도를 보고 기뻐하던 차에 아버지가 찾아가자 반가워하셨죠.”

낙죽장도가 고증이 안 돼서 문화재로 지정되지 못했다는 말을 들은 예 선생은 “문헌자료는 없지만 작품으로 고증할 수 있다”면서 지방무형문화재가 아니라 국가 지정 중요무형문화재가 될 수 있다고 격려하면서 전승공예대전에 출품을 권유했다.

“그때 예 선생님은 낙죽장도의 뿌리가 백제 시대 비수(匕首)라고 말씀하셨답니다. 몸에 지닐 수 있는 비수는 장식 없는 칼인데, 이 전통이 조선시대 선비 문화에서 낙죽장도로 꽃피었는지도 모르지요.”

 

 

 

 

한상봉 장인은 일본 국보로 지정된 백제의 칠지도(七支刀)도 낙죽장도의 먼 조상으로 삼고 싶어 한다.

“칠지도 명문에 백제에서 만든 것이라고 나와 있지만, 옛 백제 땅에서도 품질이 우수한 철이 나던 이곳 곡성 부근에서 만든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설성경 연세대 국문과 교수 말에 따르면 심청전에 등장하는 중국 상인이 철을 사러 이곳에 왔을 거라고 하는군요.”

심청의 고향을 황해도 해주로 보는 기존 학설과 달리 심청이 살던 곳은 곡성이고 인당수는 변산반도 앞 임수도(옛 이름 인수도)로 보는 설이 제기됨에 따라 곡성군에서는 심청 축제를 열고 있다. 심청전을 통해 철 생산지 곡성과 칠지도는 이렇게 연결된다. 사실 여부야 어떻든 곡성이 좋은 철 생산지였으니 칼 제작 기술이 발달했을 것은 당연하다. 실제로 중요무형문화재 은장도장 박용기 장인은 광양 사람이고, 낙죽장 김기찬(중요무형문화재)이 낙 하는 기술을 배운 곳도 전라도 송광사니 칼과 대나무, 낙죽 기술이 한자리에 모인 곳이 전라도 땅인 것만은 확실하다.

 

매난국죽을 구현하는 사군자 칼

그럼 낙죽장도에 새기는 글은 어떤 글인가? 물론 제한이 없다. 만드는 사람이나 칼 주인이 좋아하는 문장을 새기면 된다. 그러나 전체 일곱 마디 또는 아홉 마디 길이의 대나무에 들어갈 수 있는 글자에는 한계가 있다. 자주 새기는 글은 송나라 왕원지의 ‘황주죽루기’와 백거이의 ‘양죽기’, 진종황제 권학문, 그리고 굴원의 초사(楚辭) 등이다.

“아버지와 제가 가장 많이 쓰는 글은 대나무가 많이 나는 황주에서 대나무로 누각을 세우는 이야기를 담은 ‘황주죽루기’인데 총 368자로 길이가 적당하고, ‘양죽기’는 그보다 자수가 조금 많고, 권학문은 짧습니다.”

‘황주죽루기’에는 “학창의를 걸치고 화양건을 쓰고 손에는 ‘주역’ 한 권을 들고 향을 피우고 말없이 앉으면 세상 근심이 사라진다. 강산 저편 바람 타는 돛단배와 모래톱에 날아드는 물새와 연기처럼 피어나는 구름과 대나무 숲만 보일 뿐이다. 술기운 가시고 차 끓이는 연기가 사라지길 기다려 서산으로 지는 해를 보내고 떠오르는 맑은 달을 맞으니 이 또한 귀양살이하며 머무는 뛰어난 흥취다”라는 내용이 나온다.

대나무와 군자를 빗댄 ‘양죽기(養竹記)’에는 “대나무의 성질은 곧으니 곧음으로써 몸을 세운다. 군자는 그 성질을 보며 곧 의지하지 않고 중립할 것을 생각한다. 대나무 속은 비어서 그 비움으로 도를 체현한다. 군자는 그 속을 보며 (자신의 마음을) 비워 남을 받아들이는 방법을 생각한다”는 뜻깊은 구절이 등장한다. 한편 굴원의 유명한 초사에는 세속의 더러움에 차마 물들지 못하는 주인공에게 어부가 일러주는 “창랑의 물이 맑거든 내 갓끈을 씻고, 창랑의 물이 흐리거든 내 발을 씻으리라”는 탁영탁족(濯纓濯足)도 나온다. 모두 빼어난 문장이요, 군자의 곧은 마음과 세속을 멀리하는 즐거움,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와 철학이 담겼다.

“서양의 훌륭한 검에도 더러 좋은 명구가 새겨진 것이 있지만, 이렇게 작품 전체가 들어가는 경우는 없어요. 옛사람들은 다독보다 한 편의 글을 정독하고 숙독하는 편이었다지요. 낙죽 하면서 이 글을 늘 가까이 보고 외며 심신을 다독였을 선비들을 떠올립니다.”

또한 칼날에도 금은으로 입사하는 글이 있는데, ‘뿌리 없이 서지 못하고, 학문 없이 행하지 못한다(無本而不立, 無文而不行)’ ‘일편심(一片心)’ 같은 말이다. 특별히 사인검 같은 삿된 것을 물리치는 벽사용 칼날에는 북두칠성을 새기기도 한다. 이런 특징을 살려 낙죽장도에 ‘일편도’니 경인일에 만들었다고 ‘경인도’, 또는 ‘칠성죽장검’ 같은 이름을 붙이는데, 그 백미는 ‘사군자도’가 아닐까 한다. 칼 한 자루에 매화 난초 국화 대나무를 모두 표현한 것이 사군자도다.

“우선 대나무를 쓰고, 글자 한 자 한 자를 매화 꽃잎 무늬 속에 새기며, 칼집 고리에 다는 끈은 양피나 녹피를 초록으로 입혀 난초 잎 모양으로 늘어뜨리며 고리에 조개껍데기를 갈아 국화 모양으로 만들어 달면 매난국죽 사군자가 완성됩니다.”

이 정도면 선비가 누릴 수 있는 최대의 호사라 할 것이다. 비록 드러난 사치는 아니지만 정신적으로는 가장 풍부한 내용을 담은 낙죽장도가 사군자도다.

 

날을 안 벼리는 사인검과 사진검

선비들이 좋아하는 칼 중에는 인검(寅劍)과 진검(辰劍)이 있다. 즉 호랑이(寅)와 용(辰)을 상징하는 칼이다. 특히 호랑이해 인월의 인일 인시에 만든 칼은 사인검, 용해의 진월 진일 진시에 만든 사진검은 귀신도 벨 수 있는 위력을 가진 칼이다.

“귀신은 음의 기운인데, 양 기운이 모인 사인검이나 사진검은 모든 삿된 기운을 막아주지요. 사인검이나 사진검을 만들 수 있는 시기는 60년에 한 번밖에 안 돌아옵니다. 기술이 있다고 다 만들 수 있는 건 아니지요.”

그런데 한상봉 장인은 무슨 복인지, 사인검과 사진검을 다 만들었다. 부친 한병문도 사인검은 못 만들고 60일에 한 번씩 돌아오는 경인일에 경인도만 만들었을 뿐이다. 이미 이수자로 인정받은 그의 아들 역시 50년 가까이 기다려야 기회가 온다.

 

 

이미 낙죽장도 이수자로 인정받은 아들 한준혁과 함께. 아들은 산업디자인 전공자다.

“경진년인 2000년 사진검을 만들어 전승공예대전에 출품했는데, 한 문화계 인사가 항의 전화를 하셨어요. 사인검은 들어봤어도 사진검은 못 들어봤다고요. 저는 아버지께 틀림없이 사진검이 있다는 말을 들었는데, 그 항의를 받고 고증 자료를 찾아 헤맸습니다.”

그의 아버지가 낙죽장도를 고증하기 위해 애썼듯 그도 전라도의 대학 도서관과 박물관을 뒤졌다. 그리고 국방군사연구소에서 펴낸 ‘한국무기발달사’라는 책에서 비록 사진검은 아니지만 삼진검을 찾아냈다. 성종실록 가운데 살인사건과 관련된 기사에서 혐의자가 해명하는 말 가운데 “집에는 삼인검과 삼진검만 각각 한 자루 있을 뿐 환도는 없다”는 대목이 나온다.

“삼인검이든 삼진검이든 이런 벽사용 칼은 날을 벼리지 않으므로 사람을 죽일 수 없다는 증거로 내세운 겁니다. 귀신을 베는 칼이니 날을 벼릴 필요가 없지요.”

대신 인검과 진검의 칼날에는 검결(劍訣) 27자와 또 다른 면에는 북두칠성과 28수 별자리를 새긴다. 검의 비결 27자는 ‘사인검, 하늘은 정기를 내리고 땅은 영혼을 도우니 해와 달이 형상을 갖추고(四寅劍 乾降精 坤援靈 日月象)…’ 등의 내용을 전서로 새겨 신성함을 더한다. 이런 칼을 가진다면 검의 신선 여동빈이 아니더라도 ‘와호장룡’의 여주인공처럼 칼을 휘두르며 “소매 속에는 푸른 뱀(칼), 담대한 기운 더욱 거세진다(袖裏靑蛇膽氣?)”는 시구를 읊고 싶어진다.

그러나 인검과 진검은 그런 요란한 검이 아니다. 휘두르지 않고 곁에 두기만 해도 든든해지는 검이다. 인검은 의(義)를 상징하고 진검은 인(仁)을 상징하니, 굳세면서도 부드러운 검이다.

한병문 장인은 낙죽장도를 만들 때 대문 앞에 금줄을 치고 낙죽 하는 방 안에는 팔괘기를 사방에 꽂고 목욕재계하고 작업을 시작하며, 경인도를 만들 때는 여기에 봉축주, 기도주, 태을주를 외우고 진법주, 칠성주, 운장주, 28수주 등을 읽었다고 한다.

“한기동 할아버지는 칼 만드는 동안 학동들이 계속 주문을 외도록 하셨답니다. 그만큼 좋은 기운을 담으려고 하신 거지요.”

한병문 장인은 경인도의 힘을 굳게 믿었는데, 1991년 동아공예대전에 우연히 출품한 경인도가 대상을 받게 된 것도 바로 그런 기운 덕택이었다고 본다.

“일본 전시회 도록 사진을 찍기 위해 촬영을 했는데, 사진을 찍은 잡지사 사진부장이 동아공예대전에 출품을 권하더랍니다. 마침 동아일보사가 바로 가까이 있어서 접수 마감에 임박해서 죽장도(지팡이칼)와 장도 두 개를 제출했는데, 접수 직원이 같이 제출할 것이냐 따로 제출할 것이냐를 묻자 아버지는 두 번 생각하지도 않고 따로 제출하셨답니다.” 따로 제출한 덕택에 나중에 심사위원들의 의견이 “장도가 너무 소품이어서 대상을 주기 힘들다” “작품을 치수로 평가하느냐”로 갈렸을 때 “달리 출품작이 있으면 대상을 주자”로 합의됐고, 마침내 대상을 타게 됐다.

 

김삿갓의 죽장도 모티프

곡성 낙죽장도전수관 전시실에는 눈에 띄는 칼이 하나 있다. 바로 김삿갓의 죽장도다. 삿갓 쓰고 죽장을 든 채 전국을 떠돌던 김병연은 어느 날 이규호 씨에게 죽장도를 수리해달라고 맡겼다고 한다.

“그러나 끝내 김삿갓은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 죽장도가 아버지에게까지 전해져 아버지가 칼날은 살리고 썩은 대나무는 버리고 다시 만든 것이 이것입니다. 김삿갓이 화순에서 죽었으니, 아마 곡성을 지나다 들렀던 것 같습니다.”

겉에서 보기는 지팡이처럼 생긴 죽장도는 속에 칼이 숨어 있는(暗藏刀) 호신용 지팡이 칼이다. 뿌리가 그대로 손잡이가 된 지팡이 칼은 나그네의 든든한 의지처가 됐을 법하다. 한병문은 김삿갓의 지팡이 칼을 수리한 데 이어 잘생긴 대나무를 골라 같은 형식의 지팡이 칼을 만들었는데, 겉에 아무 문양도 새기지 않은 깨끗한 대나무를 거꾸로 세워놓은 모습 그대로다. 그런데도 아름답고 귀티가 흘러 사람의 눈을 사로잡는다.

“전승공예대전에 이 작품을 출품했을 때, 사람들이 모두 감탄을 금치 못했습니다. 역시 자연 그대로가 가장 아름다운 것 같습니다.”

잘생긴 대나무를 만나면 낙죽조차 삼가는 그 마음이 진짜 장인의 자세인지도 모른다.

“아버지의 깨끗한 낙죽 글씨에 비해 제 글씨는 기교가 흐른 것 같아 늘 부끄럽습니다.”

그러나 한상봉의 글씨와 십장생도는 능란한 낙화가(烙畵家)의 솜씨와 비교하면 담백하고 고졸하다. 기교가 부끄러워지는 공예, 공예를 뛰어넘어 문화가 된 공예를 만날 수 있는 곳이 바로 낙죽장도의 세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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