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 속에서 피어난 꽃 꽃처럼 아름다운 뿔
‘화중련(火中蓮)’. 불 속의 연꽃. 꽃이 어찌 불 가운데서 피어날 수 있을까. 불교에서 화중련은 ‘보리(깨달음)의 꽃은 고통과 번뇌의 불길 가운데서 피어난다’는 역설적인 진리를 담고 있다. 화각장 이재만의 작품도, 인생도 화중련을 닮았다.
수소의 거친 뿔이 ‘꽃처럼 아름다운 뿔(華角)’로 화하는 순간을 가리켜 이재만은 “꽃봉오리가 탁 터진다”고 말했다. 그가 이 말을 한 것은 그 순간의 성취감과 기쁨을 말하기 위해서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꽃이 피어나기까지 수고로움을 강조하기 위해서였다. 화각은 알록달록 화려하고, 조각조각 이어 맞춘 것이니 조각마다 꽃송이가 핀 것 같다. 꽃이 피어나는 순간은 찰나일지 모르나 씨앗이 땅에 떨어져 꽃이 피기까지 여정을 생각하면 한 송이 꽃이 피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섭리이면서 동시에 불꽃 속에서 피어나는 위대한 기적 같다.
성한 손가락은 두 개뿐
이재만은 서울 토박이로 1949년 태어났다. 하지만 호적에는 1953년생으로 돼 있다. 두세 살까지 홍역 등으로 죽을 고비를 몇 차례나 넘기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출생신고가 늦어졌다고 한다. 어린 시절 병치레는 이겨내면 더 야무진 몸을 만들어주기도 한다지만, 이재만은 손가락을 잃는 아픔을 겪었다. 손재주로 사는 장인의 운명치고는 얄궂은 일이 아닐 수 없다.
“기어 다니던 시절, 화로에 손을 넣는 바람에 왼손은 다 눌어붙어버리고 오른손은 엄지와 약지만 남았어요.”
워낙 어린 아기 손이어서 순식간에 녹아내린 탓에 치료조차 힘들었을 터. 그는 온전하게 남은 두 손가락을 움직여 보이며 덤덤하게 말한다. 그러나 생은 참으로 역설적이게도 그에게 손재주를 부여했다. 더불어 보기 드문 낙천성과 활달함까지 선사해주었다.
“내 상황을 생각하고 한탄하면 뭘 합니까. 과거에 집착하면 현재를 살지 못해요. 구김살 없이 살아야지요.”
그런 성품 덕이었을까, 아니면 재주 때문이었을까. 그는 성한 손가락이 두 개뿐인 손으로도 그림 그리기를 좋아해 어릴 적엔 만화를 곧잘 그렸다. 할아버지가 단청장이었고, 그가 세 살 때 돌아가신 아버지는 대목, 그리고 어머니는 자수를 곧잘 놓았다니 재주는 핏줄로 이어진 셈이다. 흔히 성격이 운명을 결정한다고 하는데, 장인의 세계에서는 소질이 운명을 만드는 것 같다. 그의 솜씨는 자연스레 화각의 세계로 그를 이끌었다.
“학교 친구 가운데 신문배달을 하는 친구가 있었어요. 화각장인 음일천(陰一天, 본명 음진갑) 선생님 공방에 배달하러 갔다가 그림 그리는 것을 보고 음 선생님에게 ‘그림 잘 그리는 친구가 있는데, 이 그림을 보면 좋아할 것 같다’고 말씀드리고는 저를 공방으로 데리고 간 겁니다.”
열여섯 살 소년의 눈에 화각 그림은 ‘이상한 그림’이었다. 그런데 화각공방에 다녀왔다는 말을 들은 그의 어머니는 무슨 예감이 들었는지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며 그를 앞장세워 공방을 찾았다.
“어머니는 제가 만화 그리는 것을 썩 좋아하지 않으셨는데, 화각은 한번 해보라고 권하시더군요.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전통 공예를 하셨으니 이쪽이 인연이라고 생각하셨나 봅니다.”
그의 어머니는 그 시절 고등학교까지 졸업한 인텔리 여성이었다. 미군 부대에서 장사도 하고 몇 만 평의 땅을 일구어 밭작물을 내다 파는 사업가이기도 했다. 네 아들 중 막내인 이재만의 미래를 특별히 고민했을 어머니가 화각 공방을 둘러본 후 내린 결론은 “손이 시원찮아 어렵긴 하겠지만 할 수는 있을 테니 도전해보라”는 것이었다.
“저는 처음에는 매력을 못 느꼈습니다. 자유롭게 그림 그리고 싶었는데, 공방에서 붙박여 하는 일이 답답하게만 보였어요.”
어머니는 그의 등을 떼밀다시피 공방으로 보냈고, 스승과 부모님 말씀이라면 무조건 따라야 하는 줄 알던 착한 막내는 어쩔 수 없이 화각의 세계로 발을 내디디게 되었다. 그래도 그림에 대한 미련을 접지 못해 미대에 진학하려고 했으나 어머니는 미대보다는 공예가 낫다며 그를 주저앉혔다.
오늘날 중요무형문화재로 우뚝 선 그를 보면 과연 어머니의 당시 결정이 현명했지만, 그의 마음 한 자락에는 ‘그림이나 설치미술을 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아직 남아 있는 듯하다. 화가나 설치미술가의 작업은 수많은 공정과 까다로운 기술이 필요한 화각공예에 비해 자유로우니, 활달한 그의 성격에도 잘 어울렸을 법하다. 그러나 수많은 화가와 설치미술가에 비해서는 물론이고 다른 전통 공예 분야와 견주어보아도 화각장은 극소수에 불과하니 그의 존재는 더할 나위 없이 귀하다.
스승 수발하며 배운 기술
1966년 그가 스승 음일천 선생 밑으로 들어갔을 때 음 선생은 이미 60대였다. 음일천은 일제강점기에 급속히 사라져가는 화각공예의 맥을 이은 거의 유일한 존재로, 현재 세 명밖에 안 되는 화각장이 모두 그의 제자다.
“음 선생님 외 다른 화각장은 들어본 바 없지만, 지금 남아 있는 그 시대 화각 작품을 보면 선생님 말고 두어 명 더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음 선생님처럼 활동하고 제자를 키워낸 장인은 없지요.”
서울 태생인 음일천 선생은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쇠뼈를 다듬는 각질장이자 거북 등딱지에 채색하는 대모공예 장인이었다고 한다. 그의 아버지는 고종 때 대모로 만든 관자(망건에 다는 고리로 옥이나 금, 뿔 등으로 만들었다)나 안경테 등을 왕실에 납품하고 일본에 수출도 한 이름난 장인이었다. 음일천은 서울 배재학당과 간도 영신학교에서 공부하고 가업을 이어받아 일제강점기 일본 민속학자들과 함께 조선 공예를 조사하러 다니기도 했다.
조선시대 후기 크게 발달한 화각공예 장인들은 일제강점기 들어 몇몇 일본 상인이나 예술가들의 하도급업자로 전락했고, 일본인들은 다듬기 어렵고 공정도 복잡한 화각 대신 셀룰로이드와 유리에다 그림을 그리게 함으로써 화각공예는 전멸하다시피 했다. 이때 음일천은 오히려 각질장에서 화각장이 되기를 자처하고 화각공예의 맥을 이은 것이다.
광복 후 혼란기에 음일천은 화각 대신 백동 수저를 제작하거나 고무신 원료 공장을 운영하기도 했고, 한때는 정치활동에 나선 적도 있다. 6·25전쟁 이후 다시 화각을 잡아 자본가와 손잡고 수출까지 한 적도 있지만 파산한 뒤 집에서 작업하게 됐다. 이재만이 음일천 선생을 만난 것은 음 선생이 아내도 잃고 홀로 셋집에서 일하던 노년기였다.
“그때 저의 집은 성동구 성수동이고 선생님 댁은 화양동에 있었는데, 이듬해 고덕(하일동)으로 공방을 옮겨가면서 집과 멀어졌지요. 그때만 해도 고덕은 버스가 하루 두세 번밖에 안 다닐 정도로 외딴곳이었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그는 공방에서 숙식하며 선생님을 모셨다. 공예는 대개 도제로 들어가 스승을 수발하며 기술을 배운다지만 화각장 수업은 일도 어렵거니와 혼자 스승을 모셔야 하는 고된 길이었다.
“밥을 해드려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때로 쌀이 떨어지면 남의 밭에서 일해주고 쌀을 얻어 와야 했습니다. 어쩌다 제사나 명절 때 집에 들러도 하룻밤을 자고 갈 수가 없었습니다. 어머니는 ‘선생님 굶으시겠다’며 반찬을 싸서 곧장 돌려보내곤 하셨어요.”
기록에 등장하는 음일천의 노년은 마음 내키면 작업하고, 돈 떨어지면 굶고, 누가 작품을 달라면 가져가라는 식으로 살았다고 하니 옛 시대의 장인다운 풍모임에 틀림없다. 이재만이 기억하는 스승은 가끔 시내로 나갈 때면 두루마기 입고 지팡이를 짚고 가는 풍채 좋은 어른의 모습이다. 오늘날도 그렇지만 그때는 더욱 화각을 알아주는 이가 드물었고 따라서 수요도 극히 적었다. 하지만 가끔 인사동에서 작품이 팔릴 때면 약주를 걸치고 돌아오곤 했다. 화려한 지난날의 명성에 비하면 쓸쓸하기 짝이 없다고 하겠으나 어쩌면 스승의 기술을 전수받기에는 최고의 조건이었는지도 모른다.
“성격이 강하고 불같이 무서운 분이셨지만 정도 깊고 가르치실 땐 매우 꼼꼼하게 지도해주셨어요.”
얼마 남아 있지 않은 음일천의 작품은 유독 화사하고 곱다. 장인은 작품으로 이름을 남기기도 하지만 제자로 이름을 이어가는 존재이기도 하다. 그는 이재만의 정성 어린 시봉(侍奉)을 받으며 귀한 기술을 물려주었으니 장인으로서는 천명을 다한 셈이다.
화각장은 우선 재료인 쇠뿔을 처리하고 다듬을 줄 알아야 한다. 쇠뿔을 삶아 뿔 속의 뼈를 빼고 껍질을 쓰는데, 이 휜 뿔 껍질의 한쪽을 갈라(박타기) 펴서 종이처럼 얇게 다듬은 것이 각지(角紙)다. 투명한 각지에 그림을 그린 다음 진채 안료로 칠하고 이를 뒤집어[복채伏彩)] 장식하고자 하는 기물에 붙인다. 화각을 완성하려면 이렇게 쇠뿔 처리부터 화각을 붙이지 않은 부분 옻칠하기, 경첩이나 장석으로 마무리까지 여러 과정을 거친다. 예전에는 쇠뿔을 다루는 각질장이 따로 있었지만 이재만이 스승에게 배울 때는 농도 직접 짜고 목기도 죄다 손수 만들었다.
“장석도 철판을 사서 직접 두드려 만들었으니 두석장 일도 한 거지요. 이제 가구와 장석은 다른 사람 것을 쓰지만 그래도 화각을 완성하기까지 서른다섯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기술 말고 남은 게 없어
처음 입문할 때는 이렇게 힘들 줄 몰랐다고 한다. 그러나 음 선생 밑에서 폭넓게 배운 덕에 웬만한 것은 다 할 수 있게 됐으니 고생한 보람이 있다. 그가 직접 만들었다는 나무 주전자는 전문 소목장이 만든 것처럼 곱고 정교하다. 자개함도 만들 정도로 무엇이든 만들고 그리기 좋아하는 그로서는 일이 힘든 것은 큰 문제가 되지 않았을 성싶다. 어쩌면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화각공예를 하는 외로움이 더 크지 않았을까.
“선생님께 배우는 중에 만화가의 조수로 일하기도 하고 극장 간판을 그린 적도 있습니다. 선생님이 돌아가시고 혼자 골방에서 작업할 때는 이 일을 계속 해야 할지 회의도 많이 들었고요.”
그때마다 그를 지켜준 것은 “내가 고수해온 것을 자네가 끝까지 지켜달라”는 스승의 유언이었다. 스승의 유지도 받들고 스승이 병 때문에 선정되지 못한 무형문화재에 제자가 올랐으니 스승과 제자의 뜻이 모두 결실을 이룬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것은 20년도 지난 한참 뒤의 일이다. 스승이 세상을 뜰 무렵 그의 시련은 한창 진행 중이었다.
“병이 들면서 자식들을 찾으시더군요. 사실 저는 선생님께 자식이 없는 줄 알았어요. 혼자 수발하다 자식이 있다는 소리를 들으니 기분이 좀 묘했습니다. 긴 세월 뜻 없이 산 것 같아 후회를 해야 할지, 화를 내야 할지….”
화각에서 묘사하는 세계는 아름다운 꽃과 새가 가득한 신선 세계, 이상향이다. 이 아름다운 세계는 이재만 화각장의 손길에 한 떨기 연꽃처럼 피어난다.
하지만 후회할 시간도 화낼 여유도 없었다. 그의 어머니 역시 중풍에 걸려 몇 년째 와병 중이어서 어머니 곁을 지켜야 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 뭔가 보여드리고 싶었지만 아직은 돈도 안 되는 기술을 붙잡고 있으니 안타까운 마음이 더했다. 그는 오랜 전통을 전수받은 소중한 존재가 되었지만, 그것이 물질로도 명예로도 환원되지 않으니 그 자신은 그 의미를 확인할 길이 없었을 것이다. 게다가 스승을 보내드리고 공방을 정리하러 갔을 때, 동네 아이들의 대보름 쥐불놀이로 잿더미로 변한 공방을 마주해야 했으니 그는 스승의 유작도 자료도 하나 건지지 못했다. 그야말로 아무것도 남은 게 없었다. 그에게 더 이상 잃을 게 있을까? 그런데도 더 잃을 것이 있었다. 스승이 돌아가시던 해, 그는 어머니를 잃었고 어머니가 남겨주신 집도 곧 잃고 말았다.
축복은 재난의 형태로 온다고 했던가. 이제 그에게는 부모도 스승도 없다. 어머니의 유산을 지키지 못한 형제도 도움이 되지 못했고, 그에게는 단돈 30만 원으로 얻은 방 한 칸이 전부였다. 인생에서 바닥이라는 게 있다면 아마 이때가 아니었을까 싶다. 이후 그의 삶은 모두 이 바닥에서 시작해 이룬 것이다. 모든 걸 잃은 것처럼 보였던 1974년, 동아공예대전에 그가 입상하면서 세계공예가협회 주최로 인도에서 열린 전시회에 작품이 초대됐다. 그렇게 조금씩 그는 바닥에서 일어나 새 삶을 일궈왔다.
“자수성가하느라 참 힘들었는데, 그래도 산 입에 거미줄은 안 치더군요. 작품을 하나씩 하면서 버텼고, 아내를 만나면서 도움을 많이 받았지요.”
그와 아내는 알뜰하게 살림을 꾸려 돈을 모아 1980년대 중반 좀 싼 집을 찾아 인천으로 이사했다. 이제는 인천에서 완전히 자리 잡아 집 겸 공방을 마련하고 땅도 사서 옻나무도 키운다. 두 아들은 어느덧 장성해 그의 뒤를 잇겠다고 나섰다. 그 사이 그의 작품은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 독일 중국 등지에서 수십 차례 전시됐고, 1996년 드디어 국가중요무형문화재 자리에 올랐다.
화각, 한국만의 공예
화각은 자개와 더불어 전통 공예 가운데 화려한 장식성이 돋보이지만 널리 알려진 자개와 달리 남아 있는 유물도 많지 않고, 종사자도 얼마 안 된다. 사실 화각은 자개처럼 우리나라에서 특별히 발전한 공예인데 화각 기법이 어떻게 발전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완전히 밝혀지지 않았다. 확실한 것은 당나라 시대 거북 등딱지(대모)를 얇게 저며 그림을 그려 뒤집어 붙이는 복채기법에서 화각이 발전했으리라는 것이다. 신라시대 대모복채 칼집이 일본에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이 땅에 대모기법이 들어온 게 분명하고, 고려시대 더욱 발전해 대모로 만든 함과 합 같은 상자, 자개와 대모를 함께 사용한 세련된 유물이 남아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거북이를 구하기 힘들어 대모 대신 발견한 대용품이 쇠뿔이었고, 쇠뿔을 다듬은 각지는 대모보다 더 투명해 더욱 화려한 색감을 표현하는 화각공예로 발전해왔다. 그럼에도 현재 남아 있는 화각 유물과 기록은 조선시대 후기 것밖에 없다.
“화각은 주로 지체 높은 이들이 사용했으므로 작품이 많지 않고 기술도 널리 알려지지 않은 것 같습니다. 화각 작품은 주인이 죽으면 함께 묻었을 텐데, 쇠뿔은 유기질이니 곧 썩고 맙니다. 그래서 유물이 적은 것 같아요.”
화각은 습기에 약하고, 화각을 붙인 목기가 습도에 따라 수축하고 팽창할 때 화각이 들뜨게 되면 그 사이에 곰팡이가 피기도 한다. 화각은 아름다운 만큼 부서지기 쉬운 체질을 지녔다.
“저는 전통도 중요하지만 과거보다 더 잘 만들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접착제나 광약도 현대 제품을 시도해보고 직접 만들어도 보면서 내구성을 높이는 방안을 연구합니다.”
그런 노력 덕택에 그의 작품은 과거 화각 작품보다 내구성이 한결 높아졌다. 한편 궁중 유물로 전해지는 화각빗이나 자, 함 등은 정교하고 아름답지만 화각공예는 점잖다기보다 때로 눈에 튀고 그림도 자유분방해 어쩌면 서민적인 색채가 짙은 공예였을 것이라고 추측하는 학자도 있다. 그러나 이재만의 생각은 다르다.
“귀한 쇠뿔로 만든 화각은 처음에 왕가에서만 썼기 때문에 그 기술도 소수만 가지고 있었다고 봅니다. 임진왜란 때 일본이 사기장과 칠장을 끌고 갔으면서도 화각장을 끌고 갈 수 없었던 것도 그만큼 드물었기 때문일 겁니다.”
일본은 임진왜란 때 화각장을 끌고 가지 못했지만, 대신 그에게 일본에서 작업을 하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해온 적이 있다.
“조건이 아주 좋았습니다. 옻나무 키울 산과 공방까지 다 마련해주겠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거절했습니다. 우리 것을 지키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일본은 습기도 많고 뭐니뭐니 해도 우리 쇠뿔이 아니면 화각을 할 수 없으니까요.”
그의 말에 따르면 세상에서 화각으로 만들 수 있는 투명한 각지로 다듬을 수 있는 쇠뿔은 우리 한우 수소, 그것도 2~3년생의 뿔밖에 없다고 한다. 대모기법이 당(唐)대 이후 중국에서도 사라졌는데 우리나라만 이를 계승한 화각공예가 발전한 것은 바로 한우가 있었기 때문이다. 0.25~0.3mm 두께의 얇고 투명한 각지에 그는 산과 물, 봉황과 모란, 학과 구름, 동자와 복숭아, 신선, 거북, 그리고 연꽃도 그린다. 꼼꼼히 채색한 뒤 바탕색이 될 물감으로 전체를 다 칠해 메우는데, 바탕색은 흰색과 노란색도 있지만 주로 붉은색이다. 이렇게 다 메운 각지를 뒤집으면 바탕색을 배경으로 고운 그림이 나타난다. 이런 각지가 모이면 아름다운 산수와 꽃, 십장생이 만화경처럼 펼쳐진다. 대개 인간이 동경하는 신선 세계, 아름다운 꽃으로 장엄(莊嚴)한 이상향이다. 이 순간이 바로 그가 말하는 “꽃봉오리가 탁 터지며” 불꽃 속에 연꽃이 피어나는 순간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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